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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깨어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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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5-03 18:53 조회7,9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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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누가복음 12:37)

 

   기도는 뭔가 유별난 것이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은사가 있어야 한다고 현대인은 종종 생각한다. 교회에 가는 사람은 기도하기 위해 가는 것이고, 수도원 담장 안에서만 기도가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일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돕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애도의 고통을 "애도의 일"이라고 부르고, 죄책 경험을 "과거 극복"이라고 부르며, 깨달음을 "자기 자신의 일" 혹은 "자기실현"이라고 부른다. 그에게는 기도가 매우 수동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남자들은 기도를 종종 "여자의 일"로 여긴다.

   현대인의 이런 인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기도는 유별나게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그리고 원초적으로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만이 기도해 온 것도 아니다. 온 피조물이 영의 숨결 안에서 쉬지 않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 구원받지 못한 이 세계의 구원을 갈망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감성이 풍부해지며, 살고 싶어도 죽어야 할 수밖에 없는 모든 생명체들이 이와 같은 갈망으로 차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는다. 이것은 곧 바울이 로마서(8:19 이하)에서 묘사하는 매우 경이로운 사실이다. 그는 말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4)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이런 성령 체험을 우주의 보편적 기대 안에 설정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19, 21) 덧없는 시간과 죽음의 숙명 때문에 "괴로워하는 피조물"과 함께 우리는 육체의 구원을 갈망한다. 이땅의 모든 피조물은 죽음의 고통과 생명 갈구로 인하여 탄식하고 신음하며, 우리의 탄식과 신음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탄식과 신음이 큰 곳에서는 아직도 구원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과 주위의 모든 것이 침묵하는 곳에서는 희망도 역시 죽는다. 탄식과 신음은 죽음에 저항하는 희망의 생명 표징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6절에 따르면 우리가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침묵할 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한다. 이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한다. 구원의 아침이 밝아 오고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피조물에게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이 고난의 시간"을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된다. 바로 그날까지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 안에서, 그리고 피조물과 더불어 친히 고통을 당하시며, 이와 같은 고통과 신음의 인내 속에서 친히 피조물을 위로하신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이 생명을 주는 영 안에서 죽음을 불평하고 죽은 자들을 애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깨어날 것이며, 이 땅이 우는 소리와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깨어 있으면, 우리는 이 세계 안에서 이 세계와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시는 하나님의 고난에도 참여하게 되며, 그의 구원의 미래를 기다리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도는 이 땅이 모든 생명체들과 함께 행하는 바로 그 일,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통하여 이 세계 안에서 행하시는 바로 그 일을 행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유별난 것이다. 왜냐하면 침묵하는 인간은 울부짖고 신음하는 이 땅과 결별하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不在) 때문에 마비된다는 것을 뜻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기도한다는 것은 감성을 깨운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신약성서는 남녀 그리스도인들에게 "깨어 근신하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잠들고 취하고 꿈꾸는 세상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열린 눈과 예민한 감각을 갖고서 살아갈 때, 우리는 무엇을 인식하는가? 우리는 이 세상의 자신 만만한 사람들과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닥쳐오는 세상의 임박한 위험과 시련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오심을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눅 12:37) 깨어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기도는 위대한 기대를 품게 되며, 바로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메시아적인 기도가 된다. 깨어 있음은 기도와 침묵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깨어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생활은 이 세상 안으로 오고 있는 하나님을 열렬히 기다리고 각성하고 근신하는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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