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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겟세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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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19 21:28 조회7,7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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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가복음 14:36)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는 그리스도가 체포되고 로마 군인들에게 고문을 받는 사건으로부터 비로소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훨씬 더 일찍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갈릴리 지역, 곧 그리스도가 권력과 불의와 로마의 폭압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려고 결심한 순간에 이미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그의 열정, 병자들의 치유,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 죄인들의 용서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격렬한 적대자들, 백성의 선동가와 로마 점령군과 충돌했다. 그의 예루살렘 입성은 성공적이었다. 백성들이 모여 환호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막 11:9~10) 백성의 봉기를 두려워한 질서 수호자들의 노심초사는 더욱 이해할 만하다. 나사렛에서 온 사람은 위험해졌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그리고 눈치 채지 못하게 사라져야 했다.

   이 이야기까지는 아직 특별한 게 없다. 수많은 용감한 남자들과 여자들, 수많은 해방 투쟁가들은 백성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 사람들의 눈앞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뭔가 다르고 처음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그 사이에 일어난다. 로마 군인들이 그를 체포하기 전날 밤에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 간다. 그는 단지 세 명의 친구만을 데리고 가는데, 마가가 보도하듯이, " 그는 놀라며 슬퍼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고 말하고, 그의 친구들에게 자신과 함께 깨어 있기를 간청한다.

   예전에도 그리스도는 밤에 종종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고 했다. 그는 마치 요구처럼 들리는 기도를 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소서!" (막 14:36) 이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하니님, 그의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약성서의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친교는 깨어진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슬픔에 처한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마치 마비된 듯이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일치는 이 분리 속에서 오직 자신을 달래는 "그러나"에 의해서만 지탱된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그의 진정한 수난, 하나님으로 인한 그의 고난은 그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하나님의 침묵에 의해 거부된 겟세마네의 그리스도의 기도로써 시작한다. 분명히 그때에는 고통 앞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인간적인 공포도 있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공포도 느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잔인한 주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육체적인 고통과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자기연민에 빠진 감성적인 약자로 취급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 될 게다.

   여기엔 전혀 다른 공포가 그리스도를 사로잡았고 그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고 나는 믿는다.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한 독생자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공포였다. 그는 자신의 생명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때문에 두려워했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 있다고 선포한 그 아버지의 나라 때문에 불안했다. 이 하나님으로 인한 고난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수난 안에 있는 본래의 고통이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야말로 그가 지나칠 수 없었던 잔이었다.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침묵은 죽은 자의 침묵보다 더 큰 것이다. 마르틴 부버는 이것을 "하나님의 어두움"이라고 불렀다.

   의사 누가와 다른 증인들은 깨어 기도하는 그리스도로부터 땅에 떨어지는 "피와 같은 땀방울"에 관해 말하고 있다. 루터의 번역에서 이 구절은 "겟세마네의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표현되고 있다. 누구와의 투쟁인가? 죽음과의 투쟁인가? 그것은 이것 이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이 하나님 경험과 투쟁한 것이다. 바로 이 점에 그의 고뇌가 있었다. 그는 이 고뇌를 그의 투신으로 견디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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