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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부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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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25 00:34 조회7,6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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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태복음 28:6)

 

   하나님이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부활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한다면, 하나님은 로마의 황제와 같은 그러한 권세의 총화가 아니며, 그리스의 우주가 반영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법칙의 총화도 아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부유하게 하고, 비천한 자들을 들어 높이며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살리는 능력이다. 부활 신앙은 그 자체로서 이미 인간을 일으켜 세우고, 생명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인간을 권세와 소유의 치명적인 환상으로부터 해방하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래를 개시하고 역사를 여는 사건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이 죽음의 역사 한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의 근거이고 약속이다. 바울은 이런 맥락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1)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완료를 성령의 현재적 임재와 연결하며, 성령의 임재를 죽은 자들의 미래적 부활과 연결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나간 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가운데서 현재를 결정하면서 활동하는 과거의 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미래를 열기 때문이다. 성령의 임재하고 해방하는 경험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완료에 근거한다. 바울이 이 본문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림이라고 일컫는 그러한 "죽을 몸의 살려 줌"의 미래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것이고, "다시 살리는 성령"의 경험을 통해 깨달아진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한다면, 부활의 과정을 말해야 한다. 이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 그 근거를 가지고, 성령 안에 그 역동성을 가지며, 만물의 진정한 새 창조 안에 그 미래를 가진다. "부활"은 하나의 완료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길을 의미한다. 이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어떤 생명을 여기서 의미하는가? "죽을 몸을 살린다."는 문장은 부활의 희망이 하나의 다른 생명과 관련 맺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희망이 이 죽을 생명이 달라진다는 사실과 관련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부활은 결코 달콤한 말로 위로해 주는 "피안의 아편"이 아니라, 이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다. 희망은 하나의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구원을 바라본다. 성령 안에서 부활은 단지 기대될 뿐만 아니라 벌써 경험되기도 한다. 부활은 매일 일어난다. 사랑 가운데서 우리는 많은 죽음과 많은 부활을 경험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희망으로 거듭남으로써 부활을 경험한다. 우리는 이미 여기서 생명을 일깨우는 사랑을 통하여 부활을 경험한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을 통해 부활을 경험한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은 죽음의 멸절과 영원한 생명의 출현의 시작으로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사실"이고, 그러므로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계시이다. 칼 바르트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분"으로서 새로운 세계의 창조자이시다. 부활 신앙은 그 자체로서 이미 생명의 능력 가운데서 인간을 살린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 계시를 종말사의 역사로 규정지으며, 역사 경험의 영역을 새로운 창조의 기대지평 안으로 옮겨 놓는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은 인간 역사의 전망 안에서 모든 죽은 자들의 보편적인 부활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희망의 인간적 측면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연의 전망 안에서 죽음의 파괴적, 반신적 세력이 창조로부터 추방되었음을 뜻한다. 죽음은 "굴복되었다." (고전 15:26) 그리고 새 창조 안에서 죽음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희망의 우주적 측면이다.

   부활의 희망에서 어떤 생명의 경험이 생겨나는가? 희망의 표상은 항상 생명의 길과 경험을 열어 주고, 제한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과 새 창조를 희망하는 자는 부활의 영에 사로잡힐 것이며, 이미 여기서 "미래 세계의 힘들"을 경험한다. 그는 살아 있는 희망으로 "거듭날" 것이다.

   부활은 몸과 정신을 지닌 전인을 뜻하기 때문에 이 "살아있는 희망"은 여기서 이미 하니의 정신적이고도 육체적인 희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그와 함께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저항하는 죽음의 반항에 직면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의 희망이 없이는 생명과 죽음을 조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죽음을 생명체의 자연적인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생명을 원하지, 죽음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가 죽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벌써 육체를 포기해야 한는가?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살아 있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지 않는 것만이 죽지도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을 긍정하는 자는 자신을 죽음의 고통에 내맡긴다. 그는 실망당하고 상처입고 슬픔을 당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생명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입고 죽으며 슬픔을 당할 수 있는 각오를 벌써 가지게 하는 것은 죽음의 굴복과 부활에 대한 희망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사랑 안에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요한일서 3장 14절은 말한다. 부활의 영 안에서 사랑은 죽음처럼 강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사랑 안에서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승리가 경험되기 때문이다.

   죽음은 분리의 세력으로서 이 세상의 삶 안으로 파고들어온다. 부활은 통합의 능력으로서 이 세상의 삶 안으로 파고들어 와서 죽음의 활동을 중지시킨다. 이것을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의 관계에서도 경험한다. 자신의 몸의 죽음을 직면할 때, 우리의 영혼은 몸 위로 상승하여 몸의 욕구와 허약성으로부터 분리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이미 여기서 인간을 영혼과 몸으로 분리하고, 영혼으로 하여금 몸을 지배하고 억누르도록 유도한다. 왜냐하면 몸은 결국에 매장되는 시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육체의 부활"은 전혀 다른 몸 경험으로 인도한다. 단지 영혼만이 아니라 영혼과 몸을 지닌 전인(全人)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창조보도는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영혼만이 아니라, 바울이 언제나 강조하듯이, 육체도 "성령의 전(殿)"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은 생명의 영이다. 이 영이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것에 몸과 영혼은 다시 하나가 된다. 생명에 거슬리는 분리와 죽음을 추구하는 갈망은 극복된다.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생명의 불안도 사라진다.

   "육체의 부활"이라는 비유 안에서 생명과 죽음은 이처럼 조화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은 수용될 필요도 없지만, 억압될 필요도 없다. 나는 이 부활의 영 안에서 여기서 완전히 살고, 완전히 사랑하고, 완전히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완전히 부활할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희망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 중에 그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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