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32. 성령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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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26 23:14 조회7,83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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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구약성서에 따르면 영(ruah)은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신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의 숨을 도로 취하시면, 모든 것은 먼지로 흩어진다. (시 104:29 이하) "만약 하나님이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흙이 있는 자가 육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 (욥 34:14~15) "땅을 가득 채우고 모든 것을 모으는" (사 34:16) 것은 하나님의 이 생명의 숨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생명의 숨에 의해 생겨났고, 이를 통해 생명을 조성하는 창조의 공동체 안에서 결합된다. 인간도 모든 피조물의 이러한 생명 공동체에 속해 있다. 만약 인간이 이 공동체로부터 벗어나면, 생령(生靈)을 잃게 된다. 만약 인간이 이 공동체를 파괴하면,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생명의 영, 이것은 무엇보다 피조물들의 생명 연관성이다. 만물은 서로 의존해 있고, 서로 함께 지내고, 서로를 위하며, 종종 서로 안에서 공생하기를 좋아한다. 생명은 사귐이고, 사귐은 생명을 전달한다. 창조의 영과 마찬가지로 새 창조의 영도 인간과 모든 다른 생명체 사이에서 생명의 사귐을 회복한다. 새 창조는 육체를 폐기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육체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의 영을 사람의 마음속에 주신다면, 사람들은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버리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얻게 될 것이다. 이사야 11장이 예언한 대로 샬롬(평화)이 사람들과 동물들을 하나의 새로운 생명 공동체 안으로 인도할 것이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사 32:15~16)
인간은 함께 사는 모든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땅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다. 이 땅은 우리의 공동 환경이며, 실제적으로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우리가 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대지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대기권과 생명권을 포함하는 지구 시스템을 말한다. 성서적 전승에 따르면 땅은 풀, 나무와 동물을 "산출한 존재"이며, 인간도 역시 땅으로부터 취해졌다. 이 땅의 생명 공간은 모든 생명체의 창조 공동체의 한 부분이다.
땅을 단지 원료로만 생각하고 땅을 더 이상 거룩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은 현대의 산업 사회가 도래하면서부터다. 하나님의 땅의 거룩함을 재발견해야 할 때가 무르익었다. 재앙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말이다. 이스라엘의 지혜서가 말하듯이, 하나님의 영은 "온 땅"에 충만하다. 여기서 오늘 성령에 의해 개시되고 확증된 하나님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 (계 21장)을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면, 영생도 없다. 그리고 새 땅이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도 없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역사(歷史)의 구원사적 사건(성탄절 ㅡ 고난절 ㅡ 부활절 ㅡ 승천일 ㅡ 오순절)로부터 나오는데, 우리는 이를 교회력에 맞추어 기념하기도 한다. 오순절은 이 순서에서 마지막 축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은 다른 축제들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역사(歷史)와 성령의 역사(歷史)가 서로를 제약하면서 뗄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한 눈에 알 수 있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성령으로부터 나오며,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구원의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며, 살리는 영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지며, 영안에서 지금 우리와 함께한다.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는 그의 세계와 함께 시작하며, 그의 부활에서 끝난다. 그 다음에는 관계가 뒤바뀐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동체에 성령을 보내며, 성령 안에서 임재한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 된다. 성령 안에서 파송된 그리스도는 성령을 파송하는 그리스도가 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삶의 신비에 직면하게 되고, 생명의 영이 그리스도의 이 신비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누가는 이 비밀이 상징적인 시간대를 갖는 구원사적인 사건들의 순서인 것처럼 말한다. 그리스도는 "3일"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였고,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갔으며, "50일" 후에 교회에 성령을 부어 준다. 그렇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유일한 신비, 즉 세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오시는 사건이다. 예수의 남녀 제자들의 부활 신앙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 점을 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고, 예루살렘의 여인들과 갈릴리의 제자들만이 그의 부활을 체험하였다. 바로 이들에게 그는 친히 부활한 그리스도로 나타났다. 이 경험은 그들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리스도처럼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세상을 능히 이기는 신앙을 발견하였으며, 이제는 그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직접 "나타남"으로써 그를 "보았던" 자들은 부활의 영도 받았다. 부활한 그는 "성령을 받아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부활한 자의 현현과 성령 강림, 부활 신앙과 오순절 경험은 서로가 하나이며, 시간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과 부활의 영 가운데서 자신의 중생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같은 사건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죽은 신앙일 것이고, 그리스도가 없는 영적인 중생만이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신할 수 있다. 40일 동안 부활한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임재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결코 거룩한 환상의 종교를 설립하지 않았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더는 현현하지 않았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도다." (요 20:29)는 신앙으로 살았다. 현현한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로 변하였다. 왜냐하면 영은 그리스도의 현현 가운데 이미 임재하였기 때문이다.
참된 부활 신앙은 성령의 역사(役事)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하고서 "아, 그렇구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영에 사로잡히는 것을 뜻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에서 "내세의 능력" (히 6:5)을 경험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부활절이 없다면, 오순절도 없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오순절이 없다면, 부활절도 있을 수 없다. 성령 신학이 없는 부활 신학이 없듯이, 부활 신학이 없는 성령 신학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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