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성령의 사귐 안에 있는 교회 > 영성생활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영성생활

33. 성령의 사귐 안에 있는 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27 23:50 조회8,045회 댓글0건

본문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히브리서 6:5)

 

   "성령의 사귐" 안에 있는 교회를 말할 때, 이로써 우리는 성령에 의해 생겨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귐이 교회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러한 사귐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교회를 넘어서는 생명의 세계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성서의 약속에 따르면 "성령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을 부르고 성령과의 사귐을 확신하는 교회는 스스로를 이 사건의 시작으로 여긴다.

   그리스도를 고백할 바로 그때,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고 변모시키기 위하여 도래하는 성령의 더 큰 우주적 차원 안에 있음을 스스로 경험하게 된다. 교회는 성령을 독점할 수 없다. 교회는 성령을 임의로 부리지 못한다. 그 반대가 옳다. 성령은 교회를 자신과 결합하며, 교회를 임의로 부린다. 영에 관한 성서 이야기에 따르면 성령의 관심은 교회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과 동행하든, 교회와 동행하든, 성령의 관심은 생명의 중생과 만물의 새 창조에 있다. 그러므로 성령이 "바람처럼 임의로 불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임의로 부리지 못한다고 늘 강조해서는 안 된다. 성령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려는지, 왜 그가 우리를 강권하려는지를 알려면, 우리는 성령의 바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령에 대한 교회의 첫 번째 관계는 에피클레시스(epiklesis)이다. 이것은 성령이 오기를 기도하면서 그를 지속적으로 부르는 것이요, 공동생활과 개인 생활에서 그의 에너지가 올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고백하는 교회는 전적으로 성령의 감화와 그의 광채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호흡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이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은 하나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의 피조물"로 정의한 것과 동방교회가 교회를 성령의 간구와 도래의 장소로 본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모순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양자는 상호보완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가 없다. 그리고 성령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진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우리의 전제가 되는 것은 양자 간의 진정한 상호 작용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순서(말씀이 먼저 온 다음에 영이 온다)는, 만약 그 반대(영이 먼저 온 다음에 말씀이 온다)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일방적이고도 잘못된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질문 54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과 말씀"을 통하여 그의 공동체를 다스린다.

   복음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현재화한다. 그것은 역사의 시간을 넘어서 우리에게 돌진해 온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임재한다는 것과 그가 영광 중에 도래한다는 것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가 회상하는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 안에서 구원의 미래를 기다리며 재촉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신앙적 공동체를 신앙을 통해 창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는 복음의 말씀에 의해 생겨나고, 고난 중에서도 지탱된다. 그리스도가 선포되는 바로 그곳에, 교회의 심장은 약동한다.

   교회에 충만히 임하는 성령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리스도는 무엇 때문에 세상에 왔는가?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 무엇 때문에 그가 죽고 부활하였는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지기" 위함이다. 말씀이 육체의 모습을 취한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기 위함이다. "우리 인간이 성령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셨다"고 아타나시우스는 말했다. 하나님의 역사(歷史)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인간과 지구 피조물과 함께 성령의 사귐을 갈구한다. 성탄, 수난, 부활, 승천의 더 큰 의미는 성령 강림이다.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역사의 목표이지, 단지 그 부록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무엇을 경험하는가? 성령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령은 완전히 이타적이며, 자신을 넘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신앙함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감화를 받게 되고, 내세의 능력인 그의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히 6:5) 왜냐하면 그리스도도 역시 이타적이며, 자신을 넘어서 성령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은사를 통하여 활력을 얻는 가운데서 우리는 다가올 새 창조의 봄을 느끼며, 몸소 "산 소망"이 된다. 하나님의 영의 임재 안에서 자신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서로 교차되는 두 개의 다른 운동이 일어난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을 교회로 소집하는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를 세상 안의 그리스도인들로 파송하는 운동이다.

   우리가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예배와 상호 신뢰 가운데서 소집된 공동체를 뜻하며,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족, 직업, 일과 사귐 가운데서 흩어진 교회를 뜻한다.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이 되는 것만으로 교회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도 존재한다. 소집된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교회를 대표하는 것은 신학자들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다.

   비록 이들이 예배 중에서는 "평신도"라고 불리지만, ㅡ 이것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이다. ㅡ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직업적인 전문가는 신학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다. 중세기 가톨릭교회가 교역자와 평신도를 구분함으로써 세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은사를 상실하였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개신교가 "성직자"와 "교인"을 구분한 것은 영적이지 못한 일로서, 이것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성령의 사귐 안에서는 오직 영적인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의 오랜 성직 계급화는 "교회의 백성"을 미숙하게 만들었으며, 현대가 도래하면서부터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이 직무적인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교역자와 평신도를 구분하지 말고, 그리고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게토처럼 만들지 말고, 그리스도인들의 두 가지 생명 운동, 곧 공동체로의 소집과 사회적 소명으로의 파송을 일으켜야 한다. 소집과 파송은 성령이 숨을 들이쉬는 것과 숨을 내쉬는 것으로 경험된다.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은 예배를 위한 공동체의 소집만큼 소중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교회 출석과 동일한 것으로 보게 되면, 직업과 은사 안에서 감당해야 할 우리 자신의 소명은 망각될 것이다. 오히려 예배 모임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회생활의 제반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인도하도록 돕는다. 예배를 위한 소집은 세상 안으로 파송하는 일을 돕고, 예배를 통한 파송은 온전한 영적인 생활로 인도한다. 우리의 파송은 불의와 폭력, 억압과 무관심으로 얼룩진 사회의 고통 안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는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문안하고 "주의 평안 가운데 가라!"고 파송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