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종말론적인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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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28 01:03 조회7,9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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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나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신약성서가 교회를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로 이해하고, 공동체의 소집과 사명을 종말론적인 기대의 지평 안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부르고, 보내고, 의롭다고 인정하고, 거룩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세계를 위한 그의 종말론적인 미래 안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부르고, 보낸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언제나 교회가 기다리는 주님이다. 실로 교회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이 세계를 위함이지,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자의 통치로부터 살아가며,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과 공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자의 다가오는 통치로부터 살아간다.
이와 같은 종말론적 방향은 교회의 생존 근거와 그 목표 안에서 모두 드러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선포되는 말씀으로부터, 통고하고 파송하는 말씀으로부터 살아간다. 이 말씀은 자체 안에 마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선포되는 말씀은 모든 관점에서 자신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지향한다. 말씀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이 미래는 말씀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 미래는 말씀 사건을 통해 아직 성취되지 못한 것으로 인식된다.
생명을 창조하고 신앙으로 부르는 말씀은 선포와 통고이다. 말씀은 최종적 계시를 선사하지 않고, 하나의 길로 인도한다. 말씀은 이 길의 목표를 약속하며, 이 목표는 오직 약속을 따르는 순종 가운데서만 달성될 수 있다. 종말론적이고 보편적인 미래의 약속인 말씀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 앞으로는 다가오는 미래를 지시하며, 밖으로는 광활한 세계를 지시한다. 약속된 미래는 바로 이 세계를 향해 다가온다. 그러므로 모든 선포는 바로 이와 같은 종말론적 긴장 안에 있다. 선포는 오직 그 효력이 드러나는 곳에서만 인정된다. 선포는 오직 진리의 미래를 통고하는 곳에서만 진실한 것으로 드러난다.
선포를 통해 전달되는 이 진리는 오직 신실한 기다림과 열정적인 갈망을 통해서만 소유될 수 있다. 이처럼 말씀은 자신의 미래를 향한 내적인 초월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서 종말론적인 선물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은밀한 미래는 이미 현존한다. 그러나 그 미래는 약속과 일깨워진 희망의 양태로 현존한다. 말씀은 그 자체로서 종말론적 구원이 아니라, 다가오는 구원으로부터 종말론적인 적합성을 획득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하나님의 영의 진리와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미래의 선수금이며, 더 큰 것을 지시하고 인도하기 위해 그것에 매어 놓는다.
이와 같은 진리는 세례와 성만찬에도 해당한다. 세례도 역시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 이미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음에 따라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인도할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확증을 얻는다. 교회는 오직 종말론적인 공동체로서만 세례 집행의 권리를 갖는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오직 미래를 향한 개방성으로부터만 이러한 법적인 행위와 창조적인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얻는다. 성만찬도 이처럼 신비적으로, 제의적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만찬 공동체는 절대자의 거룩한 현존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기다리고 기대하는 공동체요, 오고 있는 주님과의 사귐을 추구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공동체로, 그리고 이러한 기다림을 통해 자신의 생활을 결정해 나가는 공동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파송에 순종하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계를 위한 봉사도 실천한다. 교회는 오직 세계를 향한 파송을 구체적으로 실천함으로써만,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다. 교회의 실존은 봉사의 실천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교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교회의 본질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있다. 세계를 위한 공동체가 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된다.
"세계를 위한 교회"는 무분별한 연대성과 막연한 동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대로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것과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소원은 그리스도의 파송과 사도직 속에서 드러난다. 온 인류에 대한 교회의 개입(介入)은 선교 속에서 실현된다. 이러한 파송은 사회가 교회에게 허락하는 사회적 역할의 기대 지평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오고 있는 공의와 오고 있는 평화, 오고 있는 자유와 인간의 존염성의 종말론적인 기대 지평 안에서 일어난다.
교회가 인류를 섬기는 목적은 이 세계가 지금의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보존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계가 변하여 자신에게 약속된 바로 그것이 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위한 교회"란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교회"와 세계의 갱신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이 인류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회가 사회를 정의와 생명, 인간성과 사회성이 실현되는 종말론적인 기대 지평 안으로 받아들일 때, 그리고 교회가 자신의 역사적 결단 속에서 이 미래를 위한 개방성과 수용성, 탄력성을 세계에 전달할 때, 세계의 갱신은 일어난다.
일차적으로 세계의 갱신은 부활의 능력으로부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약속을 세계의 방방곡곡에 전파하기 위해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서 일어난다. 복음 선포는 교회와 교직자들의 지배권을 확장하는 것이나 절대자 숭배를 통한 이런 특권의 재획득과는 전혀 무관하다. 선교의 목적은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생생하고 활기찬 희망을 일깨우는 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는 자는 고난도 기꺼이 감수한다.
이것은 단지 특수한 교직자들만의 임무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임무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를 향해 희망의 사도직을 수행하며, 바로 여기서 자신의 본질을 발견한다. 즉 희망의 사도직을 통해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 교회는 그 자체로서 세계의 구원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교회로 만드는 일이 곧 구원일 수는 없다. 교회는 세계의 다가오는 구원을 위해 봉사하며, 마치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의 근거가 되는 예언자적, 종말론적 배경이 진지하게 고려된다면, 그리스도교적 선교의 목적도 분명해질 수밖에 없다. 선교는 하나님과의 화해, 죄인의 용서와 불신앙의 극복을 목표한다. 그러나 구원은 구약성서의 의미에서 "평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원은 단지 영혼의 구원, 악한 세상에서 개인을 구원하는 것, 양심의 시련 속의 위로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희망(정의로운 희망)의 실현, 인간의 인간화, 인류의 사회화, 온 피조물과의 평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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