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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중생(重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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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30 23:52 조회8,0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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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도서 3:7)

 

   디도서 3장 5~7절의 고전적인 본문은 "중생"을 "새롭게 함"이라고 설명하며, 이로써 신앙의 세례 경험을 묘사하거나 성령 세례와 물세례의 신앙 체험을 묘사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꼭 마찬가지로 베드로전서 1장 3~4절도 세례 경험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신학 명제를 말한다.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를 구주로 깨닫는다. 그 혹은 그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 그의 자기 경험은 처음부터 공동체의 친교 경험 안에 있다. 세례는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다.

   새로운 탄생은 "성령을 통하여" 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일어난다. 왜냐하면 새롭게 하는 성령은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는 능력" (롬 8:11)이기 때문이다. 그 동인(動因)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다. 히브리어로 자비는 출생의 고통만큼 강한 사랑을 뜻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창조적인 사랑이요, 새로운 생명을 낳는 사랑이다. 그 역사적 근거는 그리스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새롭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낳는 영이 나온다. 이 영은 우리를 신앙 안으로 붙들어 맨다.

   사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구원 의미에서 기인한 것으로 설명되지만,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사건의 구원 의미는 우리가 "살아 있는 소망으로 거듭난 것"을 통하여 계시되고 체험된다. 소망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은 하나의 부활 체험이다. 여기서 신앙인은 이제부터 자신을 하나님과 분리된 죄인으로 체험하지 않고 의로운 자로, 그리고 하나님이 받아들인 자녀와 가족으로 체험한다. 사죄에서 의로움은 우리를 짓누르던 불의한 과거를 치유하는 과거지향적인 행위이라면, 중생에서 이 의로움은 영원한 생명의 미래를 지향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나라", 새로운 "영원한 창조" 안에서 다함께 하나님의 미래를 물려받을 권리이다.

   하나님의 미래에 주어질 이 상속을 확신하는 자는 이 땅에서 이미 "산 소망"으로 살아간다. 이것은 우리를 살리는 소망이요, 더 이상 실망시키거나 깨어질 수 없는 소망이다.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현재화하며, 영원한 생명의 부활 세계 안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회상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산 소망을 일으킨다. 그리고 과거 회상과 미래 소망이 이처럼 공명하는 가운데서 영원은 시간 안에서 인식된다. "거듭남"의 순간은 영원한 순간, 영원이 시간에 접촉하고 시간의 덧없음을 폐기하는 순간이다.

   성서가 말하는 이런 내용에 따르면 신앙 안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새로운 생명이 개시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것은 회복한 생명도 아니고, 회춘한 생명도 아니다. 더욱이 그 근원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생명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에 전례가 없는 것으로서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 즉 만물의 새 창조의 시작이다. 이처럼 "산 소망으로 거듭난 것"도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역사적 생명 안에서 부활한 것과 일치한다.

   우리가 이 생명의 신기함을 이해하려면, 참으로 소망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미리 바라보아야 한다. 회복되어 가는 창조의 신선한 아침을 되돌아보아도 안 되지만, 인류가 아직은 거룩하고 의롭고 착했던 한때의 시원을 되돌아보아도 안 된다. 영원한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복낙원" (復樂園)이 아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였고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신" (고전 2:9~10) 부활의 세계로 이어진다. 양자의 차이점은 죽어야 할 이곳의 생명과 죽지 않을 그곳의 생명 간의 차이점이다.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진정한 새로움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유한한 생명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삼켜짐으로써 생겨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곳의 생명이 늘 새로워지거나 아마도 늘 회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속해 있다. 이는 마치 "12월이 지나면 언제나" 다시 "5월이 찾아온다."는 노래 가사의 위안처럼 들린다. 그러나 거꾸로도 타당하며, 끝내는 무상함이 미래의 모든 희망을 짓눌러 버린다. 모름지기 부활의 새로운 세계가 개시되어야 참으로 "새로운 생명"도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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