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성화(聖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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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5-01 07:09 조회8,0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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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사도행전 7:49)
성화(聖化)라는 단어는 먼저 거룩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행위를 표현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그 무엇을 선택하시고,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삼으시며, 자신의 존재에 참여시키심으로써 그것이 자신과 일치하도록 만드신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그것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것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
첫 번째 창조 보도에 따르면 창조주가 가장 먼저 거룩하게 하는 것은 어떤 대상이나 주체가 아니라 시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이며, 자신의 안식을 통하여 이 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친숙한 환경과 자신의 거주지에서만 "편안함"을 느낀다. 안식일에도 바로 그렇다. 하나님은 이 일곱째 날이 되는 시간 안에, 일곱째 해 안에, 일곱 번의 일곱 번이 되는 해 안에 거하신다. 이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며, 창조적으로 활동하시고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시간의 리듬 안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영원한 나라 안에서 안식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피조물들, 사람과 동물들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경축일, 안식일,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임재를 통하여 이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 왕조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시어 백성과 함께 약속된 자유의 땅으로 들어감으로써 이 백성을 거룩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 거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길동무로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로서 자신의 선택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며, 이 백성을 "온 백성의 빛"으로 만드신다. 왜냐하면 이 백성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지식, 자유와 공의, 즉 평화로운 구원이 나와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다음과 같은 희망의 환상(계 21:3)을 본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 역사에서 이스라엘에게 국한되었던 것이 하나님의 미래에서는 보편적인 것이 된다. 모든 민족들과 온 인류가 해방되고, 거룩하게 된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이 그들가 함께 거하시며, 집안 식구인 그들을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시키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는 것은 그리스도교에도 역시 적용된다. 성령의 영향과 임재로 인하여 모든 민족들로 구성된 이 무리가 복음의 빛을 온 민족들에게 전할 "성도들의 공동체"가 된다. 이 무리가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거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의롭게 된 죄인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에게 영접된 나그네로서 거룩하다. 바로 그런 자로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 세계의 구원의 전조(前兆)와 시작이 된다. 성령은 그들에게 불안한 마음을 주는데, 마음은 영원한 나라 안에서만 비로소 안식할 수 있다.
하나님이 언제나 먼저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거처, 그분의 환경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생태계(生態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거룩하게 된다.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도 한다. 성전이 서 있는 도시는 거룩하게 된다. 그리고 백성이 거하는 나라는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성전과 도시와 나라의 거룩한 영역은 하늘과 땅과 모든 생명체를 거룩하게 하는 우주 안의 하나님의 장엄한 임재의 상징적인 시작일 뿐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寶座)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1; 행 7:49).
이 땅 위의 거룩한 장소가 거룩한 것은 오직 이 땅 자체가 거룩하고 또 거룩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간 안에 거하신다. 그렇지만 창조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가 지배하는 하늘과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결코 안식하시지 못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통하여 온 창조의 공동체를 거룩하게 하신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환경이 될 것이며, 그의 신성한 생명에 영원히 참여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가까움을 생활로 실천할 때, 인간들은 하나님에 의한 성화의 수동적인 객체들일 뿐만 아니라 그 나름대로 성화의 주체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 어떤 것을 경외 속에서 대할 때, 우리가 그 어떤 것 속에서 하나님의 가까움을 느끼고 목도하기 때문에 그것을 침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거룩하게 한다." 우리가 거룩하게 하는 첫 번째 대상은 자신의 말씀과 영 안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첫 기도는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그의 인격과 그의 가까움, 우리와 함께 하는 그의 임재와 그의 영광을 말한다.
우리가 거룩하게 하는 두 번째 대상은 우리 자신의 생명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여러 관계에서 불러내어 자신 앞에 서 있는 인격으로 만들 때,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 우리는 주체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진지하게 여기며, 하나님과 일치하는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화된 생명이기 때문이다. 성화된 생명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에게 참여하고 하나님과 일치하는 데 그 의미를 갖는다.
모든 것은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하고 평생 동안 이를 유지하는가에 달려 있다. 한 인간 생명의 진실성은 이 일치에 놓여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이처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그가 속한 사회의 관행과 충돌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권력가들의 요구와 강요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일치는 하나님과 또 자기 자신과도 충돌하는 그런 세계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화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 안에서 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산상수훈의 축복선언과 윤리적 요구는 성화된 생명을 보여 준다. 이것은 결코 임의 처방이 아니다. 성화된 생명은 그리스도와의 동시성에 있고,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하는 데 있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곧 성화다. 하나님의 형상과 자녀인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것이 곧 행복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화는 진정한 자아실현으로 이끈다. 하나님과 일치하고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자들은 거룩하고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자녀인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도 추구한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모든 생명체들과의 일치도 추구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자신의 생명과 다른 생명의 존중,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경외는 생명의 성화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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