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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건강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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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5-02 23:51 조회8,0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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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4)

 

   생명의 성화는 개인적인 차원도 지니고 있다. 초기 산업화 시절에 감리교인들이 흡연, 음주와 사치품 낭비가 없는 훈련된 생활을 성화된 생활로 보았듯이, 오늘날에는 환경오염, 에너지 낭비와 호화 음식이 없는 훈련된 생활이 요구된다. 흡연과 음주와 향락에 대한 포기는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 속의 금욕"이라고 하여 조롱거리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런 생활은 실로 건강에 유익하고 위생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오늘날 담뱃갑에는 "흡연은 건강에 해롭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환경오염, 에너지 낭비와 과도한 육식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건강을 해친다. 병들고 감염된, 혹은 오염된 환경 속에서 우리는 건강하게 살 수 없다.

   생명 경외는 오늘날 생명에 대한 폭력 포기를 요구한다. 폭력 없이 사는 생활은 개인적인 생활에 속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이 없다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을 억압하는 폭력 구조들을 해체하는 것,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런 조용한 전쟁을 도발하는 곳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정치적 과제이다.

   비록 전쟁을 거부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개인적 증언이지만, 폭력 없이 산다는 것은 단지 이런 일로만 그치지 않는다. 적들과 화해하고 적대감을 철폐함으로써 평화를 이룩할 때, 폭력 없는 생활은 실현된다. 가능한 모든 적들을 멸망시킨다고 해서, 평화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는 적대감의 극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폭력 없이 산다는 것은 또한 자연에 대한 기술적인 폭행을 가급적 억제한다는 것, 억센 기술을 유연한 기술로 바꾼다는 것, 효과적인 에너지 생산을 통해 에너지 낭비를 억제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 환경을 조심스럽게 보호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못지않게 폭력 없이 산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성장시킨다는 것, 이성에 의한 육체 통제를 철폐한다는 것, 자기를 지배하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육체와 조화하려고 애쓴다는 것을 뜻한다. 훈련되고 길들여진 현대인들과 "순치된 남자들"이 다시 건강해지려면, 계산밖에 모르는 분열된 이성이 지각하는 이성 안으로 통합되어야 하고, 지각하는 이성이 인지하는 감성 안으로 통합되어야 하며, 의식이 육체 경험 안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오늘날 이성이 ㅡ 특히 남자들이 그렇지만 ㅡ 자기 통제와 자기 지배를 통하여 자유를 얻으려고 육체와 투쟁한 결과로 이성은 자신을 늘 불신하게 되었으며, 자발적 능력은 억제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는 생명의 일치와 조화 속에서 생명의 성화를 발견한다. 우리는 이 일치와 조화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생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그 속으로 통합되고 있다. 이미 보았던 대로, 성화는 언제나 건강과도 관련이 있으며, 건강은 행복과 관련이 있다. 내가 말하는 건강이란 우리가 일반적인 안락 상태에서 느끼는 건강이 아니라 인간다워질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건강은 건강한 상태와 아픈 상태, 생명과 죽음에서 나타난다. 우리의 자연적인 허약성을 받아들이고 인간 생명의 사멸성을 긍정하고 억압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다워지는 능력이 필요하다.

   성화는 내용적으로 항상 치유와 관련이 있고, 치유는 온전하게 됨과 관련이 있다. 많은 어휘들은 이를 증명한다. 영어에서 holy(거룩한)와 whole(온전한)의 밀접한 연관성은 단순한 음성학적 연관성 이상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화는 병든 생명이 치유되고 분리되고 찢겨진 생명이 온전해지는 것을 포함한다. 생명이 건강하고 온전해졌을 때, 생명은 거룩한 것이 된다. 따라서 거룩하게 하는 사고는 "통전적인 사고"이다. 이것은 분석적인 사고처럼 쪼개고 분리하는 사고가 아니라 전체적인 상관성을 추구하는 사고이다.

   만약 처음부터 구성 요소가 아니라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현실을 원자처럼 잘게 쪼개는 현대인의 시도는 사라질 것이다. "소립자"는 현실의 복합적인 관계망과 분리된 우리의 사고의 소산이다. 실용적으로는 두 가지 형태의 사고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발전은 통전적인 사고를 억눌러 왔으며, 이를 낭만적인 시문학이라고 폄하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비과학적이고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분석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통전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통전적인 사고를 방법론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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