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창조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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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06 00:17 조회7,67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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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진화의 개념을 창조의 개념과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고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두 개념은 원칙적으로 서로를 배제하는가? 근(현)대적, 학문적 진화론은 처음부터 교회의 반대에 부딪쳤다. 피우스(Pius) 10세는 1907년의 교서 "Pascendi domonici gregis"에서 진화론을 현대주의의 오류의 하나라고 비판했다. 생명이 물질에서 나왔다는 이론은 유물론, 범신론, 무신론으로 인도한다는 비판이었다. 피우스 12세는 1950년의 교서 "Humani Generis"에서 진화론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일치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진화론은 인공적인 산아제한과 낙태를 허용하고, 오직 창조신앙만이 자연에 대한 충실한 자세와 태아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보존한다는 선언이었다.
개신교 측에서도 진화론과 창조신앙은 일치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찰스 다윈의 획기적인 저서 "자연토대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해" (1859년)에 관한 공개적인 논쟁이 불붙었다. 1860년에 옥스퍼드의 감독 윌버포스와 헉슬리 사이에 유명한 논쟁이 일어났다. 여기서 신학자는 공인된 승리자로 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기적인 진화론과 종의 진화론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철학자 헬베르트 스펜서는 다윈 이전에 진화론을 주장했고, "적자생존"이라는 표현을 이미 사용했다. 다윈 자신은 "진화"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주저했고, "변형"과 "계통이론"이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비록 자주 인용된 다윈의 저서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 "인간과 그의 역사 위에서도 빛은 비칠 것이다."는 이런 방향을 지시하고 있지만, 그는 진화론 도태이론을 사회과정에 간단히 적용할 생각을 갖지는 않았다. 이런 일은 이른바 사회적 다윈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회적 다윈주의는 가본주의자들의 경쟁, 유럽의 식민주의, 백인의 인종주의와 지역주의(백인의 지배)와 계급투쟁을 자연적인 도태의 사건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사회적 다윈주의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공동체 형태들도 도태의 원리의 의미에서 인간 진화의 더 높은 단계로 해석했다.
신학적 저항은 하나의 과학 이론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는 것을 반대하는 형태로 비로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신학적 저항은 여기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세계관 자체 때문에 일어났다. 만약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견해가 자연적인 "생성"을 주장하는 견해로 대체된다면, 인간은 자신이 모든 개체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법칙의 톱니바퀴 속에 있다고 느끼게 된다. 만약 종(種)이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적응 과정 속에서 도태된다면, 자연 법칙은 개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많은 생명체의 대다수가 자연의 무익한 실험이라면, 자연적인 진화가 어떻게 세계의 의미일 수 있는가?
근본주의자들의 단체는 1925년에 미국 테네시 주(州)에서 이른바 "원숭이ㅡ재판"을 야기했다. 재판관들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화론을 학교에서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국에서는 과학적 "진화론자들"과 근본주의적인 "창조론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새로운 현상은 "창조론자들"이 오늘날 자신들을 신앙적인 과학자들로 이해하고 있고, 자신들의 학문적인 기관에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 개신교 신학에서는 칼 바르트, 아돌프 티투스, 칼 하임이 진화론과 창조론을 생산적으로 종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윤리적 신학과 새로운 변증법적 신학이 신학과 과학의 상호 "불간섭"의 무관심주의적인 해결(H. 오트)에 가담하자, 양측에게 흥미로운 이런 시도는 중단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제안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단지 해결의 포기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자연 인식과 진화론의 틀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세계 안의 하나님의 활동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세계를 창조 세계로 이해하고 세계의 역사를 하나님의 활동으로 이해하는 법을 이성적인 자연과학자들에게도 보여주기 위해 신학은 예전의 종합 시도를 다시 이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진화론 논쟁으로 인해 그리스도교적 창조론에서 생겨난 일방적이고 협소한 견해를 비판적으로 폐기할 필요가 있다.
진화론으로 인해 열려진 자연 인식의 틀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창조신앙을 해석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해야 한다.
1. "진화"는 엄격한 의미에서 "창조" 자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제작"과 "배열"과 관련되어 있다. 창조와 제작, 창조와 구분은 혼동되어서는 안 될, 성서적으로 상이한 개념들이다. "창조"는 존재 전체의 기적을 표현한다. 창조활동은 시간적으로 연장되고 풍성한 형태로 갈라지는 모든 존재를 하나의 유일한 하나님의 순간 속에 파악한다. 그러므로 "창조"와 "진화" 간에는 원칙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2. "진화"는 물질과 생명 체계의 연속적인 확장을 설명한다. 따라서 진화론은 신학적으로 "계속적 창조"에 관한 언급되는 자리에 속해 있다.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유지하시고 보존하시고 변형하시고 촉진하시는 형태들은 신학적으로 미래 개방적인 역사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창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 생명과 물질의 다른 형태들과의 친교 속에서 인간은 시간의 개방된 과정 속에 있다.
3. 성서적이고 특히 메시아적인 창조론은 균형 상태에서 정지해 있거나 자신 안에서 순환하고 닫혀 있는, "정적인" 우주관을 원칙적으로 거부한다. 완성을 향한 우주의 종말론적인 지향성에 상응하는 것은 오히려 완성되지 않은 우주적 역사관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간중심적인 세계관과의 작별을 의미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은 물론 가장 높이 발전한 생명체이다. 그러나 "창조의 왕관"은 하나님의 안식이다. 인간은 이 창조의 축제를 위해 창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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