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새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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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07 07:35 조회7,53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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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사야 64:8)
만물의 궁극적인 새 창조는 매일의 창조 보존을 훨씬 넘어선다. 이를 통하여 극복되는 것은 단지 파괴만이 아니라 파괴 가능성이기도 하고, 단지 인간의 폭력에 의한 죽음만이 아니라 피조물의 사멸 가능성이기도 하다. 현재의 창조의 근본적인 조건들이 변화된다. 피조물은 시간의 힘으로부터 영원의 현재로 해방되고, 죽음의 권세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해방된다. 도처에서 혼돈과 파멸의 위협을 당하는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의해 완전한 보호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병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그리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가져왔을 때, 그는 이 만물의 새 창조를 선포한 셈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을 생각해 볼 때, 이 만물의 새 창조는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고 그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극복한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을 새 창조의 첫 날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이 날은 빛의 새 창조와 함께 시작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고후 4:6)이다. 목격자들의 보도에 따르면 "부활 현현"은 새 창조의 첫 날의 우주적인 빛 안에서 일어났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일찍부터 부활의 날을 "여덟 째 날", 다시 말하면, 새 창조의 첫 날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역사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새 세계의 시작으로 파악했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눈물이 사라질 것이고, 죽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부활 축제가 봄 축제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연의 봄은 만물의 새 창조의 영원한 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또 그리스도교의 오순절 축제가 여름의 시작과 일치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즉 자연이 푸르게 되고 꽃들이 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숨결 안에서 온 피조물들이 영원히 생기를 얻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고, 그에게서 죽음의 파멸함으로써 덧없고 죽어야 하는 만물의 새로운 창조라고 하는 종말론적인 과정이 시작된다. 지구 피조물의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창조주 영"을 향해 소리치는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육체의 부활과 자연의 부활도 기다린다.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거듭남으로써 우리는 온 우주의 거듭남도 기다린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조금도 상실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모된 형태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의 새 창조의 영으로부터 인간의 폭력과 우주의 혼돈이 극복될 것을 기대한다. 이를 넘어서서 우리는 시간의 힘과 죽음의 권세가 극복될 것도 기대한다. 끝으로 우리는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 주는" 영원한 위로를 기대한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의 사귐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귐의 춤을 추며, 영원히 기뻐할 날을 기다린다.
여러 가지 비유들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갈망하는 만물의 이 새로운 창조를 생각하려고 한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부정한다는 면에서 이 비유들은 모두 강력하다: "하나님은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계 21:4) 그러나 이 비유들은 긍정적인 요소들 안에서는 허약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처럼 상처받는 생명 가운데서 아직은 그런 경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 긍정적 요소의 선취(先取)가 없다면, 우리는 부정적인 요소의 개념들을 전혀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당한다. 우리는 살려고 하기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계속 남아 있기를 원하지, 사라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사랑, 생명, 영속성에 대한 긍정적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만물의 새 창조에 대한 희망의 표상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돈과 죽음의 세력을 몰아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극복하는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구상의 불법과 폭행을 몰아낼 "하나님의 의"를 희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피조물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의 거듭남을 희망하려고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엄청난 매일의 죽음 때문에 절망하고 말리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상처당하기 쉽고 죽어가는 이 생명에 대한 사랑이 다시금 태어난다. 이 사랑은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단 하나의 피조물에 대한 희망이라도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지 않았을 것이다.
희망에 근거한 사랑은 확산되는 체념의 병을 퇴치하는 가장 강력한 약이다. 수많은 피조물들의 죽음을 감수하는 현대인의 냉소주의는 죽음의 동맹군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저항하는 백성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고통의 심연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을 향해 소리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피조물을 유지하는 영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만물의 새 창조의 영을 기다린다. 심연으로부터 울려나오는 우리의 외침은 하나의 생명의 표징, 곧 하나님의 생명의 표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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