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오시는 하나님 > 영성생활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영성생활

14. 오시는 하나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08 07:07 조회7,335회 댓글0건

본문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편 31:24) 

 

 
   신앙 때문에 밧모 섬에 유배당한 요한은 이러한 만물의 새 창조를 보았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계 21:3~5) 요한은 어디서 이것을 보았는가? 그는 "주의 날에 나는 성령 안에 있었다." (계 1:10)고 말한다. 그가 그때에 본 것은 그를 압도했다. 마치 그것이 부활절에 사도들을 압도하고, 바울이 부름을 받을 때에 그를 압도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안에 있는, 자신을 낮추고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에 그는 "마지막 심판", 하나님의 새 세계의 여명 안에 있는 옛 세계의 종말을 보았다.

   "세계의 종말"은 밤, 핵겨울, 지옥의 흑암, 죽음의 영원한 암흑세계가 아니다. "세계의 종말"은 새로운 영생의 날이다. 첫 창조처럼 만물의 새 창조도 흑암을 몰아내는 빛과 함께 시작한다. 이것은 "영원의 서광"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이 아니라 새 창조의 새 날이고, 메마른 것에서 꽃이 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생명의 영원한 봄이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ㅡ 이것은 사라지지 않고 영속하는 창조, "끝없는 시작"이다.

   요한은 누구를 보는가? 그는 무한히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의 유한한 피조들과 상처받기 쉬운 이 땅에 오시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이 땅의 그의 시간적인 피조물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옛적에 안식일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창조물 안에서 끝없이 안식하시기 위하여 오신다. 하나님이 거하시려는 곳은 이런저런 성전, 대성당이나 돔이 아니라 그의 온 창조물이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다." (사 66:1~2; 행 7:48) 우주는 하나님의 성전이고, 혼돈은 하나님의 적이다. 그러므로 새 창조의 아름다움은 혼돈을 몰아낼 것이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집이 되기를 갈구한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들은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기 떄문이다. 하나님의 영은 그 모든 것들 안에 계시고, 그 모두를 하나님의 미래를 위해 개방시키신다.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품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은 안식하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세계가 하나님의 성소가 되고 그가 모든 피조물들에게 되돌아와서 거할 수 있기까지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안식하지 못하신다. 새 창조, 이것은 "그가 피조물들과 함께 거하고, 그것들이 그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을 멀리서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력은 그의 피조물의 생명력이 되고, 그의 인간들은 그의 임재 안에서 생명을 위한 공간,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공간과 사랑을 위한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영원한 빛은 창조물을 비추고, 모든 생명체들을 따스하게 만들며, 그것을 하나님의 활력으로 채운다. 그의 영원한 임재는 죽음이 갈라놓았던 것을 합쳐 놓는다.

   그리하여 창조물로부터 죽음, 흑암, 차가움과 혼돈이 사라져 버린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처럼 가까이 오시면, 죽은 자들은 살아나게 되고 죽음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의 영광이 계시되면, 그의 아름다움은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도스토옙스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처럼 가까이 오시면, 우리가 무덤에서 슬피 울 때에 느끼는 하나님의 부재(不在)는 사라진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서 고향을 발견하시고, 인간들은 하나님에게서 고향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과 동물, 땅 위의 피조물과 하늘의 피조물은 하나님의 공동 거주지에서 이웃이 되고 한 식구가 된다. 이것을 요한은 밧모 섬에서 보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세계는 하나님 안에서 미래를 발견하고, 하나님은 새롭고 해방된 복된 세계 안에서 미래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신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9, 17)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측면은 타락하고 찢겨진 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의 길을 가시는 참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사랑으로 위로하기 위하여 깊은 버림받음 속에서 죽음을 친히 감당하신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부유케 하기 위하여 가난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신다. 다른 하나의 측면은 우리의 참 자아이다. 우리를 생명의 샘과 분리하는 우리의 죄는 용서함을 받는다. 우리의 적대감은 극복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화해시키며, 우리는 화해된 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는 사랑 받는 자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하나님 경험을 갖게 된다. 즉 하나님은 우리 곁에 다가 오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기동하고,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자아경험을 갖게 된다. 즉 우리는 하나님에게 용납되었다. 우리는 첫 창조의 날의 새 피조물처럼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다. 우리를 억누르는 불의와 폭력의 짐인 옛 것은 낡은 외투처럼 우리에게서 벗겨졌다. 온 창조의 봄인 새 것은 벌써 우리를 사로잡았다.

   화해의 경험과 함께 우리의 변혁은 시작된다. 위대한 환상 (계 21)이 말하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미래는 화해로 인하여 지금, 그리고 이미 우리에게 도래한다. 하나님의 화해가 우리를 사로잡는 곳에서 이미 눈물은 씻어지고, 애통과 곡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처음 것", 곧 "옛 것"은 지나갔기 때문이다. 바울도 밧모 섬의 요한처럼 그것을 본다. 그는 우리에게도 눈을 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라고 요구한다.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이것은 눈을 감는 신비적 신앙이 아니라 눈을 멀리 여는 메시아적 신앙이다. 더욱이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보는 자는 세계의 적개심과 분열상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화해된 것"으로 보며, 그 안에서 벌써 새롭게 창조된 세계를 본다. 우리의 적들도 더 이상 불공대천의 적들이 아니라, 그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사랑하고 하나님이 이미 자신과 화목케 하신 인간들이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동료들의 무신론을 우리 모두가 화목케 된 참 하나님의 진정한 화해보다 더 진지하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