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인간의 고난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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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09 20:45 조회7,02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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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12)
18세기에 리스본의 지진과 함께 세계를 인도하는 선한 하나님과 세계의 조화에 대한 신앙은 깨어졌다. "하나님은 죽었다!"가 범세계적인 신학의 붕괴와 유럽의 저항적 무신론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이라는 말하기도 끔찍스러운 범죄와 말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20세기에는 인간의 자기신뢰도 깨어졌다. 1945년의 히로시마 원폭투하 이래 인류는 그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었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핵 종말이 언제나 가능한 그러한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심각한 인도주의의 붕괴와 유럽의 허무주의를 대변하는 상징이다. 어떻게 우리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하나님에 대해 여전히 신뢰 가득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히로시마 이후에도 인간에 대해 여전히 신뢰의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에 관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의로운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변호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불의와 폭행의 역사에서 대답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물음은 결코 포기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물음은 하나님에 대한 물음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 묻는 것은 "살해자가 궁극적으로 그의 희생자를 딛고 승리하지 않도록" (M. 호르크하이머) 정의를 위해 외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정의를 위한 배고픔 안에서 존속한다.
2. 아우슈비츠 안의 신학, 다시 말하면, 희생자의 기도와 외침을 수용하지 않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쉐마 이스라엘과 주기도문이 낭송될 때, 하나님은 임재하셨다. 저 지옥에서 인간적으로는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은 고난의 동반자로서 위로를 주셨다. 아우슈비츠의 말할 수 없이 끔찍스러운 고난은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기도 하다.
3. 고난으로부터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이론적, 형이상학적인 대답을 줄 수도 없고, 주어서도 안 된다. 욥처럼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자는 왜 자신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격분하면서, 종교적인 해명을 제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통 중에서 우리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신비적인 해답이 있다. 우리의 진정한 고난은 하나님의 고난이기도 하다. 우리의 슬픔은 하나님의 슬픔이기도 하다.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의 고통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하다고 말할 때, 고통의 여지를 갖는 그러한 완전한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고,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 우리는 고통 중에서 무감정하고 무관심한 하나님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슬픔의 쇳덩이 아래서
인간의 심장이 무너져 내릴 그 때에
하나님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리는 똑같은 신음소리를 들으신다." (T. Rees)
언젠가 카타리나가 "나의 하나님, 나의 마음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있었을 때,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라고 소리치자, 그녀는 이런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나의 딸아, 너는 내가 너의 마음 안에 있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느냐?"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자는 알든 모르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절규와 함께 외친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을 깨닫는 자가 즉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저 하늘에서 신비하게 마주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의미에서 그와 함께 소리치시는 인간적인 하나님이시여, 그 자신이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때 자신 안에서 부르짖고 자신을 대신하여 탄식할, 같은 감정을 지니신 영이시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고난의 심연과 죄악의 지옥 안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영의 사귐을 가져옴으로써 우리가 고통 중에서도 침몰하지 않고 고난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게 하는 것은 십자가의 못 박힌 그리스도의 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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