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하나님의 나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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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16 09:03 조회7,1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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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마가복음 1:41)
복음서에 따르면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영의 구원능력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바울에게서처럼 "죄인들"이 아니라 병자들로 나타난다. 그들은 사람들에 의해 밀려들어갔던 구석진 곳과 그늘진 곳으로부터 나와 예수에게 접근한다.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 왔으며,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막 1:32 이하) "마귀들"은 인격적으로 표상된 혼란과 파괴의 세력들이다.
이들은 고통을 주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 메시아가 오면, 이 고통의 영들은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다시금 건강하고 건전하게 살 수 있게 된다고 옛 유대교의 희망은 말한다. 기적적인 병자 치유는 고대에 종종 있었다. 현대의 과학적인 의학 세계에도 그런 일이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그것은 특별한 지평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속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창조세계로 오면, 그때에 고통의 세력들은 필히 물러가며, 고통당하던 피조물들은 건강해진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의 세균을 몰아내며, 생명의 씨앗을 퍼뜨린다. 그것은 종교적인 의미의 구원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건강도 가져온다. 병든 사람들의 치유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육체적인 현상이 된다. 영은 병들어 누워 있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살린다. 비록 오늘날 우리 중의 많은 이들은 친히 그와 비슷한 것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병자 치유의 사건들을 개인적으로 접할 순 없지만, 그것을 도움 삼아 하나님의 생명력이 우리의 신체를 관통하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유기적인 측면을 파악하게 된다.
하나님이 와서 혼란해진 세계를 새롭게 할 때, 병자들이 건강해지고 병의 유발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라 자명한 일이다. 모든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기적"이다. 만물의 새 창조의 영광 안에서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아주 자명한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위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앞을 향해 볼 수 없는 자에게는 이러한 치유사건이 망각할 수 있는 동화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라는 틀 안에서는 이것을 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틀 안에서 그것은 희망을 상기시켜 주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중병들이 죽음의 전령(傳令)이듯이, 우리는 예수의 병자 치유도 전령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곧 부활의 전령이다. 이 죽어야 할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때면, 예수가 병자 치유에서 행한 것이 비로소 완성된다. 모든 중병 속에서 우리는 죽음과 씨름한다. 모든 치유 속에서 우리는 부활과 같은 것을 체험한다. 즉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느끼며, "생명을 다시 선사받았음을 느낀다. 이처럼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는 것, 즉 죽은 자들의 부활과 미래 세계의 생명이 일어날 때면, 그러한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한 부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는데, 그 씨앗을 예수는 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귀에, 그리고 자신의 치유를 통하여 우리의 몸에 심는다. 질병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치유이고, 죽음을 바라볼 때 그것은 부활이다.
예수는 병자를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일로 삼았다. 이것은 진리이긴 하나, 반쪽 진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병자들이 자신에게 온 사실을 통하여 예수 자신도 나름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능력을 자신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소유물로 갖지 않았다. 특별한 상황에서는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다른 상황에서는 전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고향 마을 나사렛에서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라고 마가복음 6장 5절은 말한다. 어떤 조건 아래서 예수의 구원능력은 힘을 발휘했는가?
어떤 사람이 한 병든 아이를 예수에게 데려왔을 때, 예수는 아버지에게 선언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이의 아버지는 울면서 대답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막 9:23~24) 이처럼 약간은 믿지 못하는 믿음만으로도 족하다. 예수가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 아이는 벌떡 일어났다." 병든 자의 이야기는 더욱 더 강하게 말한다.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 (막 5:25 이하)가 있었다. 그 여자는 군중속에 끼어 따라 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그 여자는 생각했던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이 생각한 대로, 그 여자는 신체적 접촉으로 인하여 예수를 "부정하게" 만들었지만, 예수로 인하여 그 여자의 병이 치유되었다. 예수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여자를 보고 말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구원능력을 경험했고, 병자들의 믿음을 통하여 이런 구원능력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병자들의 기대를 증대시켰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적으로 무엇인지를 배웠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와 병자들 사이에서, 그의 능력과 사람들의 믿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 둘은 필히 함께 속해 있다. 이 둘이 함께 오면, 우리는 성령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는 그러한 영 경험 안에 있다. 이 영 경험의 미래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에도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영 안에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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