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절망은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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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3-28 23:25 조회7,97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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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디모데전서 6:12)
신앙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희망에 의존해 있다고 한다면, 불신앙의 죄는 분명히 절망의 등에 올라타고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죄의 기원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사실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한 측면을 따름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그런 교만의 다른 측면은 절망, 체념, 게으름과 비탄이다. 바로 이로부터 모든 생명체들을 달콤한 부패의 씨앗으로 가득 채우는 비애와 좌절이 생겨난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영원한 죽음을 초래하는 죄인들의 목록을 보면, "두려워하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살인자들과 다른 여러 사람들보다 먼저 언급된다. 히브리서에서 산 소망을 저버리는 행위는 고난 가운데서 약속에 순종하지 않은 일, 유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로서 소망하는 자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죄가 된다. 그러므로 유혹은 거인처럼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약함, 소심, 낙담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드높이시며, 그에게 열려 있는 광활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을 주셨건만, 인간은 뒷걸음을 치며 낙심한다. 하나님은 만물이 공의와 평화 속에서 다시 창조될 것을 약속하셨건만, 인간은 마치 모든 것이 옛날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약속에 합당한 존귀한 존재로 여기셨건만,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대를 신뢰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을 가장 위협하는 죄이다.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그가 행하지 않는 선이며, 그의 악행이 아니라 그의 태만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희망의 상실이라는 죄목으로 그를 고소한다. 왜냐하면 이른바 이런 불이행의 죄는 모두 절망과 작은 믿음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멸망에 빠뜨리는 것은 죄라기보다는 차라리 절망이다."라고 요한 크리소스톰은 말하였다. 그래서 중세기에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의 하나로서 무기력이나 비탄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요셉 피퍼는 "희망에 관해"라는 그의 논문(1949)에서 이 절망이 어떻게 두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는지를 매우 잘 지적하였다. 절망은 오만일 수도 있고, 절망일 수도 있다. 두 가지는 희망에 저항하는 죄이다. 오만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의 성취를 성급하게, 자기 멋대로 미리 취하는 것이다. 절망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의 비성취를 성급하게, 자기 멋대로 미리 취하는 것이다. 미리 취한 희망이나 포기해 버린 희망을 통해 일어나는 절망의 두 가지 방식은 희망의 점진성을 폐기해 버린다. 양자는 약속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희망의 인내를 거역한다. 양자는 성급하게 "지금 벌써" 성취를 바라거나 희망을 "도무지 품지 않으려고" 한다. 절망이든 오만이든, 그 속에서는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굳어 버리고 얼어 버린다. 오직 희망만이 밀려오는 자유 속에서 참으로 인간적인 것을 보존할 수 있다.
이처럼 절망도 희망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가 전혀 갈망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희망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절망할 수도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희망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성취할 길이 전혀 열려 있지 않기 때문에 절망의 고통이 일어난다. 그래서 분노한 희망은 몸을 돌려, 희망하는 자를 삼켜 버린다. 퐁타네는 그의 한 소설에서 "산다는 것은 희망을 무덤 속에 묻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소설에서 그가 묘사한 것은 "죽은 희망"이다. 신앙과 확신은 죽은 희망 가운데서 실종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절망은 영혼을 환멸로부터 보호하고 싶어 한다. "희망과 기다림은 많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현실의 기반 위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며, "분명하게 생각하고, 더 이상 바라지 않으려고 한다." (카뮈) 그러나 이러한 사실적 현실주의와 함께 사람들은 유토피아 중에서도 가장 나쁜 유토피아에 빠지고 만다. 무질(Musil)은 이를 일컬어 현상 유지의 유토피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희망에 대한 절망은 언제나 좌절의 얼굴만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감각과 전망, 미래와 목표가 없는, 창백하고 침묵하는 얼굴을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은 웃음을 지으면서 체념하는 얼굴을 보일 수 있다. 반갑구나, 슬픔아! 그렇게 되면, 가능성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그 속에서 희망의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전혀 찾지 못한 자들의 야릇한 미소만이 남게 된다. 삶의 권태, 겨우 꾸려나가는 생활만이 남게 된다. 비(非)종말론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교회가 만든, 그래서 더 이상 그리스도교적인 세계라고 할 수 없는 부패한 사회에서는 무기력과 권태만큼, 그리고 빛이 바랜 희망을 가지고 계몽하거나 교묘히 장난하는 것만큼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행동 양식은 거의 없다. 그러나 희망이 새롭고 신기한 가능성의 원천이 되지 못할 때, 사람들이 가진 가능성들을 가지고 놀이하는 무의미하고 풍자적인 유희는 결국 지루함으로 끝나거나, 부조리를 폭로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오직 희망만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희망만이 모든 현실을 관통하는 가능성들을 진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희망은 사물을 지금 존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진행하고 움직이는 모습대로, 그리고 가능성 속에서 변화될 수 있는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오직 세계와 세계 안에 있는 인간이 완결되지 않은 단편과 실험의 상태 속에 있는 한, 이 땅의 희망은 의미를 가진다. 희망은 움직이는 역사적 현실의 가능성을 선취해 나가며, 자신의 몸을 던져서 역사적 과정을 결정해 나간다. 그러므로 미래의 희망과 그 선취는 침울한 삶을 비추는 희미한 불빛이 아니라, 모든 것을 움직이고 변혁하는 참된 가능성의 지평을 현실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과 그에 상응하는 사고는 유토피아적인 것이라는 비난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존재할 수 있을 곳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발가벗은 사실, 완결된 현실과 법칙을 신봉하는 현실주의, 그 가능성에 절망하면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는 행위야말로 유토피아적인 것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가능한 것, 미래적이고 새로운 것, 현실의 역사성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아직은 끝장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한,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절망은 환상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증주의적 현실주의도 역시 환상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세계는 사실들의 고정체가 아니라 과정들의 그물이기 때문이요, 세계가 법칙을 향해 움직일 뿐만 아니라 이 법칙도 역시 스스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며, 법칙의 필연성도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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