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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살아 계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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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3-29 19:32 조회8,0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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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시편 24:7)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시 42:2)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 84:2)

 

   영혼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분명히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시편 42편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동물적인 "갈망"이 추가되었다. 마음(네페쉬)이 히브리어로 인간의 목 안에 있는 생명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것은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 인간의 생명력이 마치 사슴이 맑은 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갈급해한다. 그것은 생명의 샘을 애타게 갈구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만물도 살아 있게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다. 생명은 생명을 갈구한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 생명력은 활력을 준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관한 소식은 인간 속에서 생명에 대한 갈구와 갈망을 깨운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게 만들며, 자신의 생명 속에 더 많은 생명이 주어질 미래를 추구하게 만든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력으로 인해 매우 매혹적인 존재가 되신다. 그분은 생명을 갈망하는 자들을 자신에게 끌어당기신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은 사귐의 능력도 지니시며, 함께 나누신다. 그분의 생명력은 자신에게서 나와서, 인간의 갈망하는 영혼을 찾는다. 여기에 생명의 운동이 나타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 속에서 일으키시는 갈구와 갈망을 통해 인간을 움직이시며, 이를 통해 인간을 살아 있게 하신다.

   하나님도 스스로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신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움직이시며, 이 운동 속에서 인간의 생명 갈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을 향해 움직이신다. 그러므로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즐거워한다. 이것은 하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나 그분의 피조물 안에 계시는 편재(偏在)가 아니라 그분의 백성 안에, 그분의 성전 안에, 그분의 영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내주(內住)이다. 이것은 몸과 마음을 관통한다. 몸과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과 마음 안에서 즐거워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지금 경험할 때에 "우리 안의 모든 것"이 침묵하기 시작한다고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은 말한다. 예컨대 게르하르트 테르스테겐의 유명한 노래는 다음과 같이 읊는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니,

    우리 속의 모든 것은 침묵하라."

 

   이스라엘의 경험은 이와 다르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면, 백성은 하나님을 갈구하고, 갈망한다. 하나님이 오시면, 그분의 백성은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활짝 열고, 세상 속에서 문을 높이 들어올린다."(시 24:7)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백성은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움에 넘친다. 백성은 먹고 마시며, 생명의 잔치를 벌인다.

   ​오직 생명의 죽음이 생명 속으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의 시간적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유한한 생명이 무한한 생명으로 높이 들릴 때, 더 정확히 말하면, 오직 무한한 생명이 유한한 생명 안에서 나타나고 그 안에서 경험될 때, 그것은 가능하다. 유한한 생명과 무한한 생명은 출생과 죽음을 통해 구분된다. 그러므로 오직 생명이 태어나고 죽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유한한 생명으로 입증할 때, 유한한 생명 속에서 무한한 생명이 나타날 수 있다. 무한한 생명이 유한한 생명으로, 그리고 유한한 생명이 무한한 생명으로 움직이는 것은 생명의 가장 높은 형태이다.

   플로티우스에게서 우리는 이러한 변증법적인 사고의 흔적을 발견한다. 만물을 스스로 움직이는 자는 단지 만물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흘러넘치는 존재의 원천은 무한한 존재의 유출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유한한 존재들도 살려낸다. 이것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이는 질적인 운동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로, 일자(一者)가 그의 타자(他者)로 움직이는 질적인 운동이다.

   헤겔과 횔더린에게서 우리는 이러한 변증법의 완성된 형태를 발견한다. 이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롬 4:17)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창조신앙을 통해 더 선명해진다. 플로티누스의 유출 과정 대신에 대립들의 합치와 분리된 자들의 화해가 등장한다.

   가장 높은 형태의 생명은 가장 깊은 분리로부터 생명을 되살리는 것이다. 비존재가 존재와 결합되며, 존재가 생성한다. 유한한 생명이 무한한 생명 안으로 높이 들리고, 영원한 생명이 생성한다. 이 영원한 생명은 모순의 변증법적 과정이며, 모순, 곧 죽음과 부활의 해결이다.

 

     "죽음을 회피하고

      전혀 파괴되지 않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것이

      정신의 생명이다.

      오직 절대적인 해체 속에 존재할 때

      정신은 자신의 진리를 획득한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거나 거짓되고,

      이제는 끝났으니,

      다른 곳으로 간다고 우리가 말할 때처럼

      정신의 힘은 부정을 외면하는 긍정이 아니다.

      오직 부정을 눈앞에서 직면할 때,

      오직 부정과 함께 머물 때,

      정신은 큰 힘이 될 수 있다.

      이 머묾은 부정을 존재로 뒤바꾸는 매혹적인 힘이다."

 

이렇게 헤겔은 "정신의 현상학" (1807)에서 썼다. 튀빙엔 신학대학에서 헤겔의 젊은 친구였던 횔더린은 헤겔의 "젊은 시절의 글"을 다시 붙잡았다. 여기서 변증법의 원초적 형태는 결합하고 분리하는 사랑이다. "히페리온"의 결론부에서 헤겔은 잊을 수 없는 표현을 남겼다.

 

     "사랑하는 자들의 불화가 세계의 불협화음이듯이,

      화해는 싸움 한가운데 있다.

      그리고 분리된 만물을 다시 만난다.

     '심장 속에서 혈관이 나뉘고, 돌아온다.

      그리고 만물은 유일한, 영원한, 불타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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