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자의 절대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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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03 07:21 조회6,6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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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 생활은 언제든지 적극적이다. 역류를 올라가는 배와 같다. 올라가다가 서기만 해도 곧 세상의 흐르는 물결에 밀리어 내려가게 된다. 심령생활에 권태가 생기면 벌써 떠내려가고 있는 줄 알라.
A: H와 M을 비교하면 H보다 M이 못하지 않은데 H는 늘 좋은 양복을 입기 때문에 M보다 퍽 낫게 보여.
B: 그래, 사실이야. 사람은 별 수 없어. 그러기에 목사 노릇을 해도 좋은 양복을 입어야겠더군.
A: 학생 중에도 늘 좋은 양복을 입는 이는 겉으론 얼른 보아 번질번질하여 보이는데…….
B: 옳아요. 물론 내용이 있어야겠지만 외화(外華)도 무시할 수 없어.
오 주님이시여, 세상이 이리 되었나이다. 좋은 양복을 입어야 등용이 되고, 교제를 잘해야 교회 일을 잘 본다고들 합니다. 외화와 외교술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 사업을 하는데 첫째 조건이 될 수 있사오리까.
다른 일에는 몰라도 교역(敎役)에는 신앙이 첫째 조건이고 또 사랑이 그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믿음과 사랑이 목사의 절대 조건이 되어야 할 것이로소이다. 오, 주님이시여.
1927년 3월 2일 (수)
그때 그 풍토는 오늘 우리의 풍토다. 현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 시각의 노예가 되어 옷과 꾸밈으로 '너와 나'를 점수 매기고 있다.
교회만 놓고 보면, 목회자는 오늘날 '또 건축'의 새 양복을 입고자 도를 넘어서다가 다리가 걸려 교회가 찢어지는 흔한 각본을 이 시간까지 연출해내고 있다. 교인들은, "젊은이들은 사서 고생을 해야 돼, 내 자식은 빼고"라고 말하는 사람마냥 목회자의 신앙과 인격이야말로 중요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되 실제로는 목회자의 사교술과 양복에 좌우되니, 그 아비에 그 아들이런가.
중심을 몰라주고 껍데기를 우러르는 작금의 한국풍토를 향해 교회는 분연히 일어나 대항하여 새로운 현실의 밭을 일구지 못하고 교인대로 목회자대로 외모와 숫자의 두 여인을 슬슬 꼬이며 정력을 빼니, 오늘날 교회의 수난을 두고서 하늘을 탓하지 말지라.
"주님, 세상이 이리 되었군요. 우리가 이리 되었어요. 아파트 평수로, 대학교 명찰로, 월급의 계급으로, 회당의 덩치로, 서로가 서로를 훑어보는 파도가 교회까지 삼켜먹었습니다. 우리를 조율해주소서. 그럼 우리는 아프겠지요. 그러나 어찌하리요? 주님의 눈을 우리에게 주사, 주님이 보시듯 우리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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