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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언 이용도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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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09-07 09:23 조회3,4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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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 자작 詩

 

 

 

생의 승리

 

 

 

위로의 왕 그리스도 

기도를 올리려고 

단 앞에 무릎을 꿇은 즉 

빌수록 주님 계심을 깨닫나이다 

보아라 거기 서 계신 이를 

그리스도 빙그레 하시며 

“두려워하지 말라”

 

 

주여 진실로 사망을 이기실 것 같으면 

이미 전날에 죽어간 자를 

다시 살려 주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소원을 말씀드리니 

주 빙그레 하시며 

“그는 죽지 않았느니라”

 

 

말씀과 같이 

그러면 잠들었나이까 

덮은 그 눈

우리의 눈으로부터 격한 

그 눈섭을 

주여 열어주소서 

주 빙그레 하시며 

“그는 잠들지 않았느니라”

 

 

만일 저가 눈을 뜨고 

아름다운 달빛을 본다면 

아파하는 내 가슴에 돌려보내 주소서 

주 빙그레 하시면서 “그는 자지 아니하니라”

아,잃은 것은 너무도 현저해서 

죽음의 내를 건너기까지는 

다시 만날 소망은 없는 게지요 

주 빙그레 하시며 “그렇지는 아니하니라”

 

 

사랑하는 이 곁에 있는 줄로 

믿기는 하지만 

간절히 빌 때는

더구나 먼 것 같이 생각이 되던데요. 

주 빙그레 하시며 “내가 여기 있노라”

 

 

주여 저희는 오히려 

눈에라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여 우리와 같이 행하시며 

또 주무시지 않고 또 멀리 가시지 않으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 빙그레 하시며 

“내 안에서 살아라”

 

  

 

 

탄신 100주년 행사에 초대합니다.

 

 

 

이 경 삼 목사

(예수교회 공의회 의장)

 

 

 

이용도 목사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죽은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음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용도 목사 탄신 100주년 행사” 이름 지어 봅니다.

 

 

<1927. 4. 8>

 

 

 

 

금년으로 이용도 목사를 비롯한 김재준, 김교신, 함석헌과 함께 탄신 100년이 되는 해 입니다. 이분들은 한국교회사 안에 큰 의미를 갖는 분들입니다. 시기적으로는 가장 어두운 시절, 서양의 기독교가 한국이라는 피선교국에 이식되어 서구적 사상과, 신앙체계로서 존재해온 시대였습니다. 이때 이분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상황과 문화적 배경 에서 복음이 꽃 필 수 있음을 자각하시고, 한국의 토착적인 복음 수용 패러다임을 창출하기 위하여 활동하신 그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네 분들은 기성교단에서 이단시되거나 축출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분들은 우리민족 사상에다 기독교를 접목시켜서 해명해 보겠다는 토착화 신학보다는, 한국교회의 교권주의, 형식주의, 율법주의, 배타주의에 저항하고 복음의 본질을 되찾아 복음이 지닌 생명적 역동성을 회복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교계의 암담한 현실, 선교사들의 제국주의를 경험하면서, 민족에 대한 사랑이였습니다.

 

특히 이용도 목사님은 신비주의자로 매도되어,감리교로부터 추방되었다가 책임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복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최근에 이르러 그분의 관심과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그분의 영성에 대한 연구도 높게 일고 있음을 생각할 때 반가운 일입니다. “이용도 목사는 신비주의자다”로 매도당했으나, 흔히 말하는 기사, 이적, 예언, 방언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예수 정신으로 살다가 가신 분입니다.

 

그분의 삶은 나와 이 세상이 육에서 벗어나서 철저히 영의 세계에서 살자는 뜻에서 신비주의요, 예수주의였습니다. 이분은 그리스도와의 합일,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지닌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의 영성이나 신학을 서구적 틀로서의 신비주의, 우리의 상식적 범주의 신비주의의 틀에 우겨 넣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앞서가신 그분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교회는 있는 데 예수는 없다.” “설교는 있는데 복음이 없다.” “찬양대는 있는데 하나님은 없다.”는 신랄한 비판으로 시대의 교회가 가야할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외침이 1930년대의 광야의 소리로 끝낼 수 있는가?

 

여기 불효하고 모자라는 자식처럼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의 백주년 행사』의 상을 차려 읍소(位訴)하는 바입니다. 진심으로 이 행사에 산모로 수고하신 선배님, 동료 여러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절을 올립니다. 이 작은 겨자씨 행사가 어서 자라서 귀한 열매 맺기를 기도해 봅니다. 더러는 돌짝 밭에, 길가에, 가시덤불에도 씨가 떨어지겠지만, 그러나 더러는 옥토에 떨어져 열매가 맺어지리라 믿습니다.

참여하신 여러분 다시 한번 더 감사 올리며,여러분의 고개 끄떡여 주심으로 신바람나 더 뜨겁게 예수를 사랑하겠습니다.

 

 

 

 

□ 인사말

 

 

 

김 희 방 목사

(이용도목사탄신100주년행사위원회 위원장)

 

 

우리는 한국교회 선교역사 가운데서 1930년대의 시무언(是無言) 이용도 목사의 신앙과 생애를 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한국선교 역사상 우뚝 솟은 기념비적인 이정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용도 목사처럼 오직 예수만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살다간 이도 이 세상에서는 아주 드물 것입니다.

 

올 해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예수교회와 이용도 신앙과 사상 연구회에서 그의 사상과 신앙을 재조명하며 탄신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용도 목사는 민족을 구원하는 길이 교회의 부흥과 갱신에 있고 더욱 목회적 직책의 예언자적 개혁에 있다고 보고 이들에게 회개와 기도와 사랑의 화신으로 몸소 본을 보이며 복음을 증거 할 때 광야의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용도 목사가 살던 시대는 일제의 심한 탄압 때문에 사회참여의 길이 막혀 막다른 골목에서 신앙을 내면화하거나 신비화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건조한 신학이나 교회를 버리고 성 프란시스, 토마스 아캠프스, 톨스토이, 타고르, 썬다씽 등과 같이 사랑의 신비주의를 외치고 그 사랑의 열정과 열광 속에서 살다 죽어 간 것이 이용도 목사의 생애였습니다. 정말로 그는 한국의 아모스,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개혁자로써 예수의 사랑에 미쳐 그의 짧은 삶을 굵게 살다간 신앙의 용사요, 신비주의의 첫 영웅이었습니다.

 

이용도 목사 자신의 생애와 사상은 오직 주님께 미쳐 오직 주님처럼 살아 보려고 애쓰다 힘없고 기진맥진하여 시들어지고 만 길가에 피었던 한 송이의 들장미, 백합화였습니다. 그 자신의 말대로 “고요히 이름 없이 지나갈, 고독한 야화, 들에 핀 백합화”였습니다.

그러나 70년 전인 1933년 10월 2일 그는 이미 갔으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이용도 목사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과 복음증거의 말씀이 지금도 우리 가슴을 심하게 때리고 있습니다.

 

이용도 목사가 한국교회를 위하여 공헌한 흔적은

첫째 참 나라사랑, 민중사랑의 본을 보여 주었고, 그는 고난 당하는 백성과 함께 동거동락 한 분으로 민중신학과 민족교회의 토착화에 이바지한 선구자였습니다.

둘째 전통문화의 토착화, 신비적 새로운 타입의 부흥회를 시작했으며, 때로는 가야금과 단소를 즐겨 국악찬송의 시발자가 되었습니다.

셋째 당시 자기만족에 빠진 교계지도자들에게 교만과 파발의 맹성을 촉구하면서 교회를 교리와 제도와 형식의 질곡 속에서 해방시켜 새 생명의 바람을 전국 교회에 불러 일으켜 1930년대 초기의 교회를 부흥시키고 개혁의 불길을 던졌습니다.

넷째로 전국에 걸쳐 열정적인 기도의 붐을 일으켰으며

다섯째 그의 감화와 부흥운동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평생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바치기로 결심하게 한 것 등입니다.

 

오늘의 교권 지향적인 이기주의와 명예, 그리고 율법주의적인 흐름 속에서 세속화된 물질축복과 대중 지향적인 외형적 선교성과를 바라는 현대의 교회적 상황 속에서 그의 신앙과 생애가 주는 의의는 큰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당시의 교회를 “예수는 죽고 그 옷만 나누는 현대교화,예수의 피를 버리고 그 형식만 취하는 현대교회”라 진단했습니다. 오늘의 현실교회가 개교회주의화 되어 교회도 기업화되고, 신앙부흥운동은 상업화되어 오늘의 나라와 겨레의 어두운 사회적 상황 속에서 참된 성령의 불과 바람으로 생기를 주지 못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교회의 무능을 자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930년대의 이용도 목사와 같은 예언자적인 참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21세기를 맞는 한반도 7천만 겨레에 새 역사를 만들어 가는 한국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함께 다짐해 보는 바 입니다.

 

 

  

이용도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 위원회 조직표

 

 

 

고   문 : 김득중, 김승혜, 김영철, 박대선, 심일섭, 윤도한, 윤신일, 윤춘병, 

          이계준, 이모세, 이윤구, 장기천, 전택부, 한승호 (가나다순)

 

 

명예위원장 : 유동식

 

 

위   원  장 : 김희방

 

 

부 위 원 장 : 김길송, 이영근, 황광한

 

 

총       무 : 인 영남

 

 

 

(행사분과위원회)

 

 

위 원 장 :  이경삼

위    원 : 강영모, 강태우, 권오득, 김병구, 김요범, 김춘택, 김형만, 

노병관, 박재호, 박화자, 방성찬, 안도선, 안성균, 용철호, 

이성우, 이영규, 이준범, 이충원,조남덕, 전국재, 정영수, 

정인남, 정창섭(가나다순)

 

 

 

 

(출판분과위원회)

 

 

위 원 장 : 이정배

위    원 : 김형기, 박종수, 류금주, 성백걸, 연규홍, 오규훈, 이찬수, 

정희수, 차옥승, 최대광 (가나다순)

 

 

  

시무언 이용도 목사 연보

 

 

1901.  4.  6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 178번지에서 아버지 이덕흥씨

             어머니 양마리아씨 사이에서 사남 일녀 중 셋째로 출생.

1910.  1. 15 세례 받음.

1914.        시변리 공립보통학교 졸업.

1915.        송도 한영서원 고등부 입학.

1919.  3.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잡혀 2 개월간 유치장 생활.

1919.  6.  4 송봉애(宋鳳愛)와 결혼.

1920.  2.    기원절 사건으로 체포.

       9.    시변리 신영학교 교원.

      10. 20 아들 영철 출생.

      12. 18 조선독립주비단 사건으로 신계경찰서에 검거됨 .

1921.  3. 송도고등보통학교(= 한영서원) 삼학년에 재입학.

      11. 11 태평양회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22.  8 석방.

1923.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세 번째로 입학.

1924.  2 감리교 협성신학교 영문과 입학.

이호빈, 이환신을 만나다.

1925. (봄) 현저동에 자취방을 얻어 삼이형제가 동거하다.

       11. 폐병 삼기로 진단.

      이환신의 고향 평안남도 강동에 휴양차 갔다가 그곳 교회에서 울음으

      로 집회를 인도한 이른바 강동 체험을 하다.

1927.  3. 17 딸 영숙 사망.

       4. 가극 "춘풍" 발표 ("아이생활", 1927년 4월호).

       5 - 6. 가극 "공주와 꽃팔이" 발표 ("아이생활", 1927년 5-6월호).

       9. 13 강원도 통천 파송.

      12. 협성 신학교에서 연극 "십자가를 지는 이들" 각본을 쓰고 주연함.

1928.  1. 28 협성 신학교 14회 졸업.

       1.  29 파송지인 강원도 통천 교회에 부임.

       9.  연회 허입.

      11. 성극 "애굽의 이스라엘" 발표 ("아이생활",1928년 11월호).

      12. 성극 "믿음으로 사는 화공" 발표 ("아이생활", 1928년 12월호).

      12. 24 승마 체험.

1929.  1. 4 온정리 교회 집회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함.

           성화로 죄인을 소살하는 성몽을 꿈. 이 꿈을 계기로 자신을 온전히 

           주께 바쳐 말씀을 전하다가 죽기로 새롭게 각오하다._

           연초 2개월 동안 통천 부근 20여개 교회 부흥집회 인도.

       12. 30  (새해 1월 5일까지) 덕적도에서 부흥집회 인도. 이 집회에서

              김광우와 만남.

1930.  1. 1.  고(苦), 빈(貧), 비(卑)를 생활훈으로 삼다.

       2.  26.  (3월 9일까지) 평양 중앙감리교회 부흥집회 인도.

           이 집회에 참석했던 장로교 청년 7인이 서문밖 교회 지하실에 모여 

           기도하기 시작함 (후일 "평양기도단"으로 지칭).

1930.  4.  3. 평양 중앙감리교회 청빙(연봉 1200원) 거절.

       9. 28.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10. 16. 전국주일학교연합회 간사로 발령 받음.

       11. 25. 남북감리교 감독, 명년 도미유학 주선을 약속.

1931.  1. 9. (16일까지) 경북 영동 집회. 걸아 최억성을 만남.

  2. 3.  (6일까지) 청년회 기독교 강좌 인도.

  2. 15.  (18일까지) 기도단 요청으로 평양 방문.

  2. 16.  (28일경까지) 재령 집회 인도.

  3. 5.  (13일까지) 거창 집회 인도.

  5.  감리교 경성지방 순회목사로 파송.

  7. 20.  김교신에게 연락, 처음으로 만남.

  7. 26.  이용도 목사 초청으로 김교신 광희문교회에서 강도하다.

  7.  (하순) 이용도 이호빈 원산 방문. 한준명 등 만남.

  9.  삼방약수터에서 요양 중 원산 수도자들과 집회를 가짐.

 10. 2.  아현성결교회 집회 인도 중 쫓겨남.

1932. 장년 만국통일주일공과 출판

  ​3. 16  경성지방회에서 타교단 초빙시 허락을 받도록 조치.

  4.  평양노회, 평양기도단 활동제한 조치.

 10.  7  평양노회, 이용도 금족령 가결.

 11.  (초순) 평양 입류 사건 (소위 "한준명 사건").

 11. 28. 평양노회 임시노회 소집, 한준명 백남주 치리 결의. 이용도 감리교에 

조회하도록 조치.

1933.  1. 3.  원산 예수교회 개천예배 참석.

  3.  감리교 목사 사임 청원.

  6.  3.  예수교회 창립선언 발기인 대표.

  6.  6.  예수교회 창립공의회에서 선도감으로 피선.

  7. 감리교 목사 사임 수리.

 10. 2.  원산 광석동에서 운명.

1995.  8.  15.  정부,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 추서.

 

  

 

 

시무언 이용도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

 

 

1부 / 기념예배 겸 출판기념회

 

 

사 회 : 이경삼 목사

(예수교회 공의회 의장)

 

 

 

촛불을 밝히며 /

*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며 100개의 촛불을 함께 밝힘니다

 

사진으로 보는 이용도목사의 생애 /

이용도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위원회에서 제작하였습니다

낭 송 / 이영숙 집사(한마음교회)

 

묵 도 / 다같이

찬 송 / 102장

기 도 / 김길송 목사 (행사위원회 부위원장)

성경봉독, 시 16:1-11 / 황광한 장로 (행사위원회 부위원장)

찬 양 / 예교성가대 (지휘 / 용철호 집사, 반주 / 이유선선 생)

설 교 “하나님은 나의 주님” / 장기천 감독 (동대문감리교회 원로목사) 

논문집 출판에 대한 인사말 / 김희방목사 (행사위원회 위원장)

서 평 / 이윤구 박사 (인제대학교 총장)

이용도목사 시 낭송 / 김 성 (시인, 국립국악 관현악단)

축 가 / 이보영 교수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인사 및 알림 / 인영남 목사 (행사위원회 총무)

찬 송 /  1장

축 도 /

 

 

 

2부 / 심포지움

 

 

사 회 : 인영남 목사

(이용도목사탄신 100주년 행사위원회 종무)

 

 

 

 제1발제  /  “생애와 사상” 성백걸 박사

 

 

• 이용도의 생애와 사상

 

- 한도한기론의 관점에서         / 성백걸

-

• 세계 신학적 흐름에서 본 이용도의 영성과 신학         / 최대광

 

• 이용도 연구사에 대한 개관과 비판적 분석

 

- 묵시문학과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중심으로         / 이정배

-

• 시무언 신학의 사상적 연관들

 

- 시무언 연구의 심화를 위한 방법론적 시론         / 김형기

 

 

 

 제2발제  /  “신학과 실천” 연규홍 박사

 

 

• 이용도 목사의 성서이해         / 박종수

 

• 이용도 신비주의와 1930년 전후의 한국교회         / 류금주

 

• 이용도 사상과 한국교회 개혁운동         / 연규홍

 

•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

- 그의 성장 배경을 중심으로 한 심리학적 분석          / 오규훈

 

 

 

 제3발제  /  “영성과 예술” 이찬수박사

 

 

• 이용도 목사의 종교적 영성 / 차옥승

 

• 누혈의 신학과 한국적 영성

- 시무언 이용도의 신학적 지평 / 정희수

 

• 뜨거움과 넉넉함

- 이용도와 이호빈의 민족적 주체성과 초교파적 포용성 / 이찬수

 

• 신앙의 예술가 이용도            / 유동식

 

 

  

 

□ 특별 기고

 

 

 

“잃어버린 이용도의 무덤”

 

 

김 영 철 목사

(예수교회 공의회 자문위원)

 

 

 

지난 반세기 동안 잠들어 있던 고 이용도 목사의 업적은 근래에 와서 특히 1980년대부터 신진학자들의 관심 속에서 새롭게 부각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진주는 아무리 깊이 파묻어 두어도 진주요, 진리는 아무리 가리워도 변할 수 없다는 속담과 같이 이용도목사의 진실된 신앙과 사상은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변종호 목사를 주시하여 많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고 이용도 목사에 관한 저서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비단 강남대학이나 감리교 신학뿐만 아니고 교파를 초월해서 많은 신학자들과 관심 있는 인사들을 통해서 이용도의 업적에 관하여 많은 관심과 연구를 통하여 널리 소개가 되어가고 있지만은, 이용도목사가 안장되어 있는 묘지의 위치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는 이용도 목사가 잠들어 있는 산소를 탐지하여 보려고 펜을 들었다. 즉 이용도목사의 시신을 매장한 묘지의 위치를 확인하여 보자는 것이다.

이용도 목사는 1933년 10월 2일에 원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임종하는 날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이호빈, 이종현, 이도근, 김희학, 한준명 등이었다. 이 분들은 필자가 직접 생존시에 만나서 이용도 목사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들이었다.

이용도 목사의 산소를 알고 있었던 이호빈 목사님도 “이 목사를 매장한 산소는 송도원 뒷산이었고 한준명 목사 집에서 멀지 않은 명석동, 근처였다”하고 말씀하였던 것으로 기억나고,김희학 장로는 “원산 신학산에서 멀지 않은 송도원을 넘어 가는 뒷산이었다” 고 한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묘지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질문을 하여 본적도 없었다. 다만 이와 같이 지나간 일들을 되새겨 보는 것뿐이다. 그리고 보면 무관심 속에서 귀한 기회를 다 놓쳐 버린 셈이다.

필자가 이용도 목사의 묘지를 생각하게 된 동기는 미국에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우원 이호빈 목사님의 산소를 늘 방문하였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머리 속에 떠올리는 것은 “혹시 이용도 목사의 묘가 우원의 산소 옆에 있으면 우원 이호빈 목사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연히 L. A.에 계시는 한준명 목사님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이용도 목사의 묘지를 알고 있는 분은 오직 한준명 목사 한 사람만 생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떠올라 왔다. 그래서 그 날은 우선 서론적인 이야기만 한준명 목사로부터 듣고, 음식점으로 모시고 나가서 한 목사가 좋아하는 냉면을 대접하고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그 이유는 완벽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눅음기를 준비하여야 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한 일인지 다행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필자가 갑자기 한국에 있는 미 8군사령부로 나가서 2년간 머물게 되는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의 묘지를 탐색하고 연구하는 일은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한국으로 이사할 준비를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한준명 목사를 자주 만나 충분히 녹음 테이프를 장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는 동안 한준명 목사를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묘지에 대한 설명을 녹음 할 수 있게 되었다. 한준명 목사가 설명하는 내 용을 전부 녹음을 한 셈이다. 그리고 한국으로 나가서 즉시 생각하였던 “묘지에 관한” Article을 쓰기 시작하였다. 한 목사의 녹음을 교재로 하고 이용도 목사의 묘지를 설명 한다는 사실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막연하였기 때문이다. 한 목사님의 말은 “광석동(백남주 목사의 집)과 명석동(한준명 목사 자기 집)그리고 와우동에 있는 세 동리의 산 중턱에 위치한 자리였고, 그것도 봉분도 못하고 평토장으로 묻었습니다.”하였다. 그 다음 녹음을 들어 보면 “광석동에 있는 제기국립학교와 기무라 목재 공장에서 십리쯤 가다가 산으로 500보 정도 떨어진 곳인데”하였고,계속 설명하기를 “거기서 좀 더 지나가면 당나루라는 마을이 있고 시오리 정도 더 지나가면 덕원읍 근처에 베네딕트라는 독일 수도원이 있습니다”하였다. 녹음의 내용을 아무리 정리하여 봤지만 이것은 마치 물위에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 같아서 도무지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변종호 목사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그 장소는 산언덕 같이 보이고,그리고 묘가 있고,그 앞에 말뚝같은 비석이 있고 유심히 들여다보면 한문으로 “이용도”라는 글씨가 보인다. 사진으로 된 묘지는 볼 수가 있는데 그 장소와 위치를 설명한다는 사실은 마치 공중에 그림을 그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미국에 계시는 한준명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목사님,너무나 막연합니다., 마치 서울에서 누님 집을 찾는 기분이니 다시 서면으로 설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몇 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질문하는 형식으로 편지를 보냈다. 얼마후 1998년 10월 7일에 해답이 왔다. 90살이 넘어가는 한준명 목사는 그 분의 성격대로 깨알 같은 글씨로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편지 서두에 “고 이용도 목사의 산소 위치를 알려고 하는 일은 단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933년에 되어진 일을 66년후 지금에 와서 설명을 하라니 설사 설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90이 되었으니 원산에 그 당시 교인들이 아직 생존하고 있다면 100세 이상이 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 제가 제일 어린 사람이었으니 만일 생존한 사람이 있다면 저 밖에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편지 내용을 보면 계속된 글씨체가 아니고 몇 일 후에 다시 쓴 내용 같이 보였다. “시체를 매장할 때 봉분도 못하고 평토장을 했고, 그리고 비석도 못 세워 나 자신이 자그마한 말뚝에다 ‘이용도의 묘’라고 써서 그것도 잘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두드려 박았지요 왜냐하면 나무꾼 소년들이 이 묘패를 보고 뽑아 갈까봐 큰 말뚝을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임시로 생각하고 우선 매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다시 한 목사는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그와 같은 장소에다 매장을 한 것은 후에 이용도 목사 유가족들이 즉시 이장을 해가리라 짐작하고 임시적으로 매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가고 고인의 형님 댁도 무소식이고, 사모님은 영철이 하나 데리고 생계를 유지 못했고,그러다가 대동아 전쟁이 일어났고,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났으니…… 이만 이야기를 줄입니다” 하고 한참 다른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다시 한 목사님도 답답한지 묘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그러니 김영철 목사의 마음이 좀 답답하겠오?…… 이용도 목사의 묘지가 있었던 위치는 송도원으로 넘어가는 광석동, 명석동 그리고 신풍리 쪽으로 내려가는 산 중턱에다가 평토장으로 매장하였다”하는 한 목사님의 기분은 맥이 쭉 빠진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녹음이 되어 있는 테이프의 내용을 보면 이용도 목사의 장례식 날 잊을 수 없는 에 피소드가 있었다는 것이다. “상여를 메고 언덕 중턱에 도달하니 그 동네 사람 몇 명이 다가와서 하는 말이 ‘이 땅은 우리 소유의 땅이니 절대로 여기에는 매장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여기에다 매장하면 즉시 우리가 파 버릴 것입니다’하면서 악을 고래고래 지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상여를 메고 그 반대쪽 언덕으로 내려가니 아무도 따라 오는 사람이 없어서 그 곳에다 매장하였다”(1997년 여름에 한 녹음 테이프)

 

33세로 떠나가는 이용도의 죽음은 너무나도 가엾고 슬프고 억울한 죽음이었는데 마지막 장례식 날까지 이와 같은 비극적인 참사를 당하고 보니 참으로 허무하고 비통스러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이용도의 죽음과 장례식이 아니였나하는 인상을 준다. 한준명 목사는 이용도 목사가 기성교단으로부터 당한 모든 누명과 모략을 세상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인 즉 이용도 목사가 당한 억울한 누명은 한준명 목사 때문이었다고 해도 아니라고 변명할 사람이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변종호 목사의 저서를 보면 한준명 때문에 이용도 목사가 희생되었고,HJM 때 문에 이용도 목사가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고 못을 박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변종호 목사의 역설이 아니고 한준명 목사 자신도 긍정하는 사실 이다. “이용도 목사는 나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희생되었습니다”하고 엄숙히 고백 하였다. 내가 좀 더 야무지게 처신을 하였던들 이용도 목사가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지 않았을 터인데……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하는 고백을 거듭하였다(녹음테이프). “오늘날 같으면 논란의 될 만한 대상이 아니었는데…… 기도 중에 되어진 적은 일을 결국 그와 같이 이용도 목사만 희생시킨 것입니다.”하고 자기의 잘못을 한탄하며 고백하는 것이었다.(녹음테이프) 즉 이용도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준명 개인이 책임 져야 할 개인의 신앙적인 처사를 이용도에게 뒤집어씌우는 작업을 기성교단에서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한준명 목사는 말하기를 “치사하고 더러운 기성교회 목사들이 꼴이 보기 싫어서 나는 평양 장로 교회에다 사표를 내고 원산으로 가 버렸다”고 하였다. 입이 써서 설명하고 해명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정의는 승리 하게 마련이요,진리는 영원히 진리의 가치를 보장한다는 “말씀”과 같이 이용도의 무죄한 사실을 반세기가 흘러간 오늘에 와서야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으니 어찌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하리요? 한준명 목사는 90평생 당신의 고향이요 이용도 목사가 묻혀 있는 원산, 송도원을 한시도 잊지 않고 그리워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준명 목사는 계속 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였다.

 

“19년전 일입니다. 판문점을 출입하는 한국 기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의 고향 도 원산이라고 하여 고향 사람을 만난 기쁨으로 그가 알고 있는 원산의 소식을 상세히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고 하였다. “그 분이 알고 있는 원산 항구는 6 • 25후 완전히 군사 기밀지대가 되어 송도원과 명사십리 일대를 완전히 새로운 군사기지로 개량을 하였다” 는 것이다. 그러니까 “광석동, 명석동, 와우동, 신풍동 즉 이용도 목사 묘지가 있었던 산 전체를 허물어 내려서 큰 군사기지로 변경이 되었다고 하니 평토장으로 매장한 이용도 목사의 묘지가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하는 것이다. (1998년 10월 7일에 한국으로 보내온 편지)

 

그리고 한준명 목사는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를 “만일 내가 오늘 원산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할지라도 이용도의 산소를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한준명 목사 자신도 그 장소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분명치도 않은 설명을 가지고 전혀 생소한 후세들이 이용도의 묘지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나마 이용도 목사의 시체를 손수 매장한 유일한 생존자였던 한준명 목사 마저 1999년 1월 17일 LA에서 작고하였으니 이용도의 묘지는 원산 송도원 뒷산에 매장되었다는 미비한 설명과 변종호 목사가 사진 속에 담아둔 그림 이외 실제로 이용도 목사의 시체가 묻혀 있는 그 땅은 영영 다시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시체는 승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없다고 할지라도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무덤은 세상이 너무나도 무심 하여 돌보지 못한 탓으로 결국 이용도 목사의 시체는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만 남긴 채 영영 사라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우원 이호빈 목사님의 묘지 앞에 설 때마다 저는 혼자 중얼거리기를 “만일에 이용도 목사님의 유골을 우원 옆에 매장 할 수 있다면 우원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고 쓸데없는 공상을 하곤 한다.

세례를 받고 물 위로 걸어가는 예수를 바라보던 세례 요한 같이, 자기의 짐을 대신 지고 예수 교회를 향하여 나가는 우원을 바라보며 안심하고 눈을 감은 이용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우원과 이용도와 같이 두터운 우정을 가지고 평생을 살고 간다면 그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삶이 어데 있으리요? 두 분은 인간으로서 지킬 수 있는 의리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 털끝만치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고 가신 분들이다.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묘지는 설사 다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할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 우원 이호빈 목사님과 시무언 이용도 목사영혼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하나님의 동산에서 산책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리요?”하고 고백하고 싶다. 우원과 이용도 목사는 참다운 친구로서의 “의리”와 또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 속에서 참다운 신앙과 삶의 본을 보여준 성자들이었다고 해도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만 같다.

 

 

  

 

□ 특별 기고II

 

 

 

내가 만난 이용도 목사와 사두 선다 썽

 

 

 

이 상 윤 목사

(감리교 본부 선교국 부장, 

협성대 신학대학원 선교와 에큐메닉스 강사)

 

 

 

1984년 필자는 월간 기독교사상에 이용도 목사의 평전을 쓴 일이 있다. 그때 필자는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으나 여권이 나오지 안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때 당시 월간 기독교사상의 편집장이었던 이정희 선배가 이용도 목사 평전을 쓰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1978년에 이미 감신대는 이용도 목사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하는 신학 연구 모임을 가졌고 『신학과 세계』지에 대대적인 특집 논문을 실었다. 그러나 일반 교회는 여전히 이용도 목사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알고 있다는 것이 이단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고 알지 못하는 세대가 들어선 이상 무언 가 새로운 평가를 해야되는 시점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나름대로 이용도 목사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도 했었고 가능하다면 이단의 누명도 벗겨주고도 싶었다. 더군다나 짜증나는 것은 아직도 이용도 연구에는 변종호 목사 이상을 가는 노력이 전무하다는 사실과 그러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이러한 과제도 결코 용이하지 않았다. 신문이나 잡지나 지면 얻기가 쉽지 않았고 아직도 지명도가 낮아 알아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용도 목사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좋은 글을 써서 시각도 달리하고 평가도 다양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었다. 기왕에 글을 쓰는 거라면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신비주의 정도의 문제는 오순절성령운동으로 극복할 수 있고 30년대 연구를 통하여 나름대로 민족주의 해석으로 넘어 갈 수 있지만 이용도 목사 주변의 인물이 아닌 새로운 취재 소스를 찾아내어서 좀 더 자유롭게 취재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우선 이용도 목사 주변 인물들이 아닌 인물로서 이용도 목사의 진실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만난 것이 직계 가족들이었다. 그때 만난 분이 이용도 목사의 아들 고 이영철 장로의 미망인 전철자 여사였다. 전철자 여사는 시무언 이용도 연구에, 평생을 바친 변종호 목사와 함께 복십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이용도 목사의 유일한 혈육인 고 이영철 장로의 미망인이었다. 그러니까 이용도 목사의 며느리인 이분을 통해서 이용도 목사 가정이 겪었던 아픔의 세월들을 되새기면서 가족의 입장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었고 그런 입장에서 이용도 목사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후덕한 인상에 늘 진지하신 전철자 여사를 통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용도 목사 주변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이용도목사 사후에 겪었던 갖가지 이야기들을 들었다. 가난한 살림에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4남매를 키운 이야기하며 이영철 장로도 50을 겨우 사시고 돌아가 신 이야기까지 잘 들을 수 있었다. 독일 간호사가 되어 8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영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소식을 들어보니 그동안 전철자 사모님은 혈압으로 고생하시고 계셨다. 그러나 필자는 1년 뒤 인디아 유학을 떠났다. 그때 필자 생각은 인디아를 가면 선다 씽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이용도목사와 비교 하는 연구를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시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기독교 영성에 대한 좀더 본격적인 연구가 가능하리라 보았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멀기만 한 한-인 신학교류를 실현시키면서 상호교류와 협력을 통해서 아시아 신학과 아시아 영성신학의 기초를 다져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과 라빈드라나드 타골을 비교하고 연구해보려는 어떤 분위기가 있는 바탕에서 한국의 이용도 목사와 선다 씽을 연구하여 한-인디아 영성신학의 새 장을 열어보자는 것이었다. 또한 덧붙여 이용도 연구를 변종호 목사 이후 본격적인 연구서가 없는 처지임을 감안하여 좀 더 대중적이고 깊이 있게 이용도 목사 사상과 유산을 찾아 연구해야 되지 않을까 하였다. 사실 예수교회측 자료를 보면 초기 예수라는 문집을 보면 상당한 정도로 많은 수의 선다 생 연구자료가 소장되어 있고 이것을 보면 예수교회는 이용도와 선다 씸 이 무언가 유사한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고 영적인 통찰력을 공통으로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듯했다. 여기에 덧붙여 이용도와 선다 씽을 하나의 축으로 놓고 고난의 신비주의를 공유하면서 기존 교회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기독교 영성의 세계를 찾아나간 동반자적인 관계성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신비주의를 벗어나 지나친 개인주의적 성향의 신비주의로 이탈하려고 하는 성향을 돌이켜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는 것 같았다. 요즘 말로 하자면 탈교회적인 성향을 극복하고 좀더 교회 대중적이면서 목회적인 경향이 분명히 드러나는 신앙체험을 인도하자는 그런 깊은 의도를 인디아 선다 씽을 통해서 만들어보려는 것 같았다. 이러한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유지면을 감안해 보면 새로운 오순절 은사체험을 나누면서 이용도 영성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를 기대하였다. 실제로 지나치게 체험적인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그것을 문화와 삶의 현실적 차원에서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영성 공동체 운동이나 해방의 영성으로 발전시킬 수는 없을가를 깊이 고민하기도 하였다. 만약 이러한 영성신학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깊은 기도의 세계를 넘나들을 수 있기를 바랬다. 영적 체험이 카리스마적인 공동체만을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좀더 공동체적인 은사를 나눌 수 있고 각자의 은사를 존중하면서도 전체의 문제를 소홀하지 않는 오순절신앙체험을 맛볼 수 없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통용이 일어나고 비록 원시적인 형태지만 가장 인간적인 공동체를 체현해 내었던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는 불가능한 것일까. 함께 나누고 아낌없이 베풀면서 소유를 집착하지 않고 공존의 지혜를 널리 펴는 오순절 통용공동체와 비전을 찾으리라 하였다. 그래서 전형적인 개인주의적 신비의 영성에서 벗어나 성령이 하나되게 하시는 힘이 역사하는 공동체의 은사를 나누고 전파하는 일치의 세계를 찾아갔다.

 

인디아 교회는 독립 후 다양한 여러 교파들을 통합하여 남인디아교회와 북인디아교회를 탄생시켰고 독특한 토착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2차대전후 의 새로운 세계질서 가운데 제 3의 입장에 서서 미소 양대 패권에 도전하는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고 이념과 교리를 뛰어 넘어 하나의 그리스도와 수많은 종교간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제 3 세계 신학이 발달하고 해방의 과제가 영적인 실천을 통하여 해방의 투쟁혼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신학적 토양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선다 생은 인디아 기독교신학과 영성신학의 뿌리에 해당하였고 소승적 기독교 신앙체험을 대승적 신앙정신의 발현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인디아 기독교신학은 종교신학적인 주제의식을 포괄하고 나가서 해방신학의 실천을 결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인디아 유학생활은 기대만큼 되지 않았다. 방갈로어 연합신학대학의 에큐메니칼한 신학적인 분위기에 빠져 인디아 행동신학의 기초를 이루는 여러 가지 연구세미나를 찾아 다녔고 여기에 관련된 자료들을 읽느라고 시간가는 줄 몰랐다. 또한 한국교회가 힘을 합쳐 인디아 선교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주말이면 인근지역으로 나가 인디아 농촌 교회들을 방문하고 지원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까 선다 씽에 관한 공부는 뒷전이었다. 더군다나 인디아 카스트 제도의 횡포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불가촉천민들의 해방운동을 지원하는 달리트 신학이 등장하여 인디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달리트 해방에 관한 연구가 지배적이었다. 자연 에큐메니칼한 입장에 서있던 필자는 달리트 해방이 남아프리카 흑인해방운동에 버금가는 인간해방의 문제가 달리트에 있다고 판단하여 이 신학에 관련한 자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대학도서관에도 초기 달리트운동에 관한 자료들이 많았고 달리트에 관한 좋은 논문이다 싶으면 그것을 확보하는데 애를 썼다. 결국 필자는 달리트 신학을 가지고 논문을 썼다. 그런 형편이니까 선다 씽 공부는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UTC 도서관에 소장 중인 선다 씽 전기물이나 관련 자료들은 전량 수집하였다.

 

1960년대 인디아로 유학을 온 아일랜드 줄신의 에큐메니칼 신학자 로빈 보이드는 1967년 인디아 기독교 신학개론을 썼다. 그는 일찍이 인디아 기독교 신학은 서구신학의 포로였다는 입장에서 비판을 가했던 학자였는데 그의 인디아 기독교 신학 개론의 서문에서 사두 선다 씽을 독창적인 인디아 기독교 신학사상을 일구어낸 최초의 인물로서 평가하였다. 영적 신비의 구현자로서 인디아 기독교 신학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로 선다 씽 을 보았던 로빈 보이드는 선다 씽의 영적 체험을 선구적인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UTC 캠퍼스에서 당시 독일 함부르크 대에 가서 선다 씽의 메시지를 가지고 설교학을 공부하고 있던 사무엘 프라카쉬를 만났다. 방학을 이용하여 모교인 방갈로어 연합신학대학을 찾아 온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선다 씽을 이야기하였고 선다 씽 연구와 관련한 여러 정보를 교환하였다. 때마침 1989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89년은 선다 씽이 태어난 해였다. 그해 북인디아교회는 선다 씽 탄신 100주년을 맞아 신학연구 모임을 가졌고 하마찰프라데시 심라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또한 1989년 그해 2월에는 히마찰프라데시 복음주의 계통의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선다 씽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선다 씽은 1919년 초 감리교 선교사였던 라일리 파커를 통해서 최초의 전기를 가질 수 있었는데 그 이듬해 유럽과 호주를 방문하였던 선다 씽은 영국 옥스퍼드에서 인디아 출신 신학생 아과사미를 만나 또 다른 관점에서 기술한 전기를 남기게 된다. 선교사들이 정리한 선다 씽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끌어 올린 본격적인 연구서이자 전기물인 스트리터와 아파사미의 실천종교에 있어서의 신비주의 연구가 선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독일교회와 유럽 가톨릭에서 터졌다. 선다 씽의 신비체험이 가짜가 아니냐고 하는 이견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선다 씽이 인디아와 티베트 접경지대인 카일라쉬 지역을 지날 때 만났다고 알려진 신비의 은둔수도자 마하리쉬의 존재가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을 마주친 것이다. 여기에는 초기 전기물인 파커의 선다 씽이나 아파사미의 전기를 가지고는 대응할 수 없었다. 결국은 당시 독일 마부르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던 천재 신학자 프리드리히 하일러가 선다 씽의 복음이라는 저서를내면서 본격화되었다. 1927년에 나온 선다 씽의 복음이라는 저서는 선다 씽의 시크교 배경을 찬찬히 훑어보면서 선다 씽의 회심 전의 상태 회심 후의 변화된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면서 선다 씽의 기도와 엑스타시 내적평안 십자 신비주의의 위안 지상에서의 천상체험을 상세히 논술하였다. 그는 특히 그런 신비체험의 주인공 선다가 형제적 우애를 강조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지상에서의 사역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결코 지상사역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하였다. 인디아인들은 생명의 물인 그리스도의 진리를 목마르게 바라고 있지만 결단코 서양적인 방식으로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편 프라카쉬 목사를 통하여 북인디아 히마찰프라데시 코트가르에서 유학 온 버나드 군도 만났고 뉴 델리 교구의 감독이던 막불 칼렘의 아들 마이클 칼렙 군도 알게 되었다. 특히 마이클은 당시 방갈로어 연합신학대학의 학부생으로 있었기에 때문에 선다 씽을 아는 이들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제 UTC 에서 선다 씽을 말하는 것은 활기가 넘쳤다. 특히 겨울방학 이 오면 히말라야를 가게 될 것이다. 히말라야에서 비로서 그토록 꿈꾸고 있었던 선다 씽의 산하를 눈으로 직접 볼수 있을 것이다. 선다 씽은 이미 인디아 기독교 신학에서 차 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그것은 한국의 이용도 목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선다 씽 의 영성 신학은 맨 처음부터 주목을 받고 있었다. 로빈 보이드는 선다 씽을 평가하기를 인디아 기독교 영성의 컵에 담을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러니까 선다 씽의 영성은 인디아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그리스도신비주의자였고 토착화 영성의 상징이었다. 가장 인디아적인 종교적 정서에 담긴 가장 인디아적인 실천 영성의 한사람으로 평가되었다. 코임바토레 주교였고 옥스퍼드대학를 나온 아파사미는 우르 드어나 힌디어 타밀어로된 선다 씽 관련 자료에 영어로 된 선다 씽을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58년 런던 루터워스 출판사는 A.J. 아파사미 박사가 쓴 선다 씽 전기를 냈다. 선다 씽 사후 20년만의 일이었다. 이 전기는 아직도 선다 씽 연구에 가장 대표적인 저작 이다. 물론 아파사미는 실천종교로서의 신비주의 연구를 1987년에 냈다. 수많은 선다 씽 관련 전기가 있지만 아파사미의 이러한 독보적인 연구는 가장 정평이 나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63년 유동식 교수가 이용도와 그 주변에 관한 짤막한 논문을 낸 이후 민경배 교수가 이용도 신비주의에 관한 상당한 분량의 논문을 낸다. 여기에 감리교 신학자들이 이용도 신비주의를 석사과정과 목회학 박사과정에서 다루기 시작하였고 이 후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용도 목사 연구서들이 다수 나왔다. 여기에 특이하게 한국에서 등장한 기독교계 메시아운동을 연구한 한국메시아운동연구사가 1999년 나왔다. 현재 통일교 계통의 대학인 선문대에서 가르치고 있는 최중현은 1910년대부터 어렴풋이 등장하기 시작한 한국교회의 계시은사운동에 주목하여 이들이 어떻게 기존교회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천년왕국운동 또는 메시아운동을 펼쳤는지를 조명하였다. 그는 가능하면 신종교 현상의 하나로서 이들의 종교학적인 가치를 찾아갔는데 계시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기초조사연구에다 인류학적인 평가를 덧붙여서 한국 메시아운동의 맥을 잡아 나가고 있다. 그의 연구가 특이한 것은 1930년대 한국교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문제의 신앙운동 이용도를 중심으로 하는 백남주 한준명 황국주를 필두로 하여 이들의 메시아 운동 경력을 수집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백남주 황국주 등의 행적을 자세히 추적하였고 여기에서 이용도와의 관련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수도원의 김백문과 유효원을 연결하는 원리강론의 편집사적 흔적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러한 인사들과 행적들이 한국의 신종교 현상으로서의 메시아 천년 왕국 운동을 이루었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이러한 저작이 통일교와 이용도 목사를 쏙 빼놓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동란 후 한국교회와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메시아운동의 대명사 통일교 문선명이 빠진 연구가 되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1910년대부터 시작된 계시운동을 다루면서 신종교로서의 이들의 존재가 기성종교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메시아운동을 개시한 과정을 그나름 대로 소상히 조사하였다는 것이고 메시아운동의 발전과정과 신학적 특성을 소개하였다는 것이다. 최중현은 한국 최초의 메시아운동을 1917년부터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는 이순화를 소개하면서 출발한다. 이어서 1920년 무렵부터 약 10년 동안 은사집회를 인도했다는 남방여왕의 존재를 언급 하면서 1923년부터 게시 받기 시작한 한태동 박사의 선친 한에녹 장로를 한국 메시아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하고 있다. 이어서 김성도 백남주 황국주 등을 메시아 운동의 본격적인 지도자로 보고 있다.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적 신앙은 기성교회의 지나친 반발과 공격을 유발하였지만 거꾸로 메시아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용도 신비주의의 자극을 받아 은사체험을 강조하고 혼란한 사회현실 속에서 나름대로 신념을 가진 새생명을 소유한자로서 살게 만들었다. 신적 계시의 대변자로서 대중 앞에 군림하였던 메시아 지도자들은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를 한껏 이용하였고 활용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훗날 박태선 장로나 나운몽 장로들이 이러한 계시만능주의에 안주할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 때문에 변종호 목사는 여러 차례 주장하기를 한국교회 신비주의 운동에는 이용도 목사의 영향을 받은 계보가 18개 이상이나 된다고 하면서 김윤찬의 DCC 운동에서부터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 운동까지 언급하였으며,1975년에 나온 이용도 목사 연구 40년 주년 기념 연구서 1권에는 한국교계의 신앙계류 라는 제하의 논문에서 말하기를 대략 14개 파가 이용도 목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먼저 평양기도단이 있다. 이 기도단은 1930년 2월 평양에서 조직되어 홋날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까지 되었던 이종현과 김예진 김익선 이정선 목사의 선친이었던 이도근 등이 있고 김지영 김영선 김용진 박윤선 김인서 이정심 김교순 등이 있다고 하였다. 둘째로 이용도 목사 정통계보로서 NAE운동에 깊이 개입한 김윤찬 목사의 사모와 훗날 장로교 목사가 된 이헌수 목사의 사모가 있으며 여기에 덧붙여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여러 목사들을 포함하여 있으며 셋째 순교계보로서 평양 장대현 교회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사모 오정모와 평양 예수교회의 복음사 한의정과 백인숙 장수은 전도사 일본의회를 쳐들어가 민족독립을 요구하였던 죽으면 죽으리라의 실제 주인공 박관준 장로와 예수천당의 주인공 최봉석 목사 등이 여기에 속하고 넷째 한신대학의 만우 송창근 목사와 만수 김정준 만계 등의 기장 인사들이 여기에 속하고 다섯째 오순절 계통으로 초기 한국오순절 교회운동에 깊이 간여한 이들을 1년 동안이나 함께 기도하고 만났던 오순절 계 인사 여섯째 복음교회의 초대 감독이던 최태용 목사와 성서조선의 김교신 일곱째 이호빈 계로서 1930년대 예수교회를 이끌고 한국동란 후 중앙신학교를 만든 우원 이호빈과 김영운 여덟째 함구무언파로 분류되는 감리교 감독인 이환신 목사 아홉번 째는 신비신앙을 끝까지 고수하였던 이정선 목사로 이 사람은 평양기도단의 이도근의 아들로서 입류로 유명한 이유진 여사의 아들이었다. 이들은 스웨덴보리 영향에 깊이 빠져있다. 열번째 이호운 목원대학계열 한번째 소종파 지도자로서 음으로 양으로 이용도 목사의 신앙에 감화되어 한국의 소종파 운동을 이끌고 있는 이들과 열 두번째 과열형으로서 열광적으로 믿고 헌신하는 이들과 열 세번째 이용도 목사가 세상을 떠난후 한국교회의 대소 부흥사 열 네번째 이용도 목사를 오해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배은망덕 부류 등이 있다고 보았다. 물론 여기에는 논리상의 비약이나 지나친 친소관계를 강조한 듯한 인상도 주지만 대체적으로 이용도목사의 영향이 남아 있는 그룹들인것만은분명하다.

 

한편 감리교 목사인 필자는 이용도 목사를 연구하고 정리할 때 다른 교파 사람들과는 달리 본능적으로 이용도 목사의 이단적인 혐의 내용을 언급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관심있게 보는 것은 이 시점에 와서 만약 이용도 목사가 억울하다면 그의 누명을 벗기고 지나치게 매도당한 사실을 밝혀서 그의 남은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것 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용도 목사의 초기 부흥운동은 분명 한국교회 성령운동이 발화하여 1930년대라는 시대사적인 혼탁을 가리고 신생 교회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뜨겁게 변화되도록 역사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본다. 더군다나 오순 절 성령은사운동이 보편화된 이제와서 보자면 그를 신비주의자로 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오순절성령운동의 초기 선구자로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그의 초기활동만 문제가 아니라 이단시되고 예수교회 중앙선도감을 지내고 하면서 지나친 예언활동과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현저하게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문제가 있었고 한국교회 신비주의 운동의 단초를 제 공하였던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점에 관해서는 1936년 이용도 사후 그를 추모하면서 코리아 미션필드에 기고하였던 감리교 선교사 피터스 목사가 지적했듯이 이단성향의 문제는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하며 이것이 장로교에 넘어가서 1930년대의 신비주의 이단사상으로 정죄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가 최후의 시간을 보냈던 원산광석산기도원은 이미 지나친 개인적인 예언행위에 집착한 여자들이 있어 백남주 목사 같은 이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전쟁 후 정득은의 피가름 교리가 서서히 고개를 디밀던 것에 어떤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이용도 목사의 말년에 주님과의 혈연적 연결에 심취해 있었던 데서 기인하는 것이 사살이다. 이처럼 기성교회의 입장 에서 보자면 돌이킬 수 없는 이단으로 돌아서 버린 말년의 이용도 목사의 행태는 단순한 교리사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요 이것이 불필요한 교리문제를 야기시켜서 교회혼란을 자초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용도 목사의 이단문제는 그의 주변 인물들이 있었고 훗날 변종호 목사가 늘상 말했던 흑도도 있었고 천국결혼을 주도하였던 백남주와 입류의 주인공이있던 한준명과 이용도 목사의 생전 주님이라 알려진 유명화 등이 장로교로부터 이단시되었다. 피터스 선교사도 역시 언급하기를 예수 탄생을 1월 3일로 믿고 있다든지 어빙파 같은 연행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지 않은 요소들은 기성교회로부터 심한 도전을 받았고 분명 성령충만의 체험과 치병기적의 체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신앙에 떨어져 성경적 기초를 상실하고 이단적인 신앙으로 기울게 하는 어떤 힘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3년 장로교 총회는 이용도 목사를 이단시하고 30년대 한국교회 최초의 신비주의 신앙운동으로 보고 있다. 물론 이용도 목사는 감리교회에서 컸고 감리교 목사가 된 이이다. 그는 요한 웨슬리의 성령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출발한 감리교 신앙의 뜨거운 성령체험을 복음주의적 경건으로 알고 있었고 사회적 경건도 중요하다고 보았던 이였다. 그러나 성령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까 열광주의적 신비신앙으로 돌아섰고 여기에다 대중주의적 종교 신앙으로 내려가서 경건주의 신앙을 벗어버리고 신비주의적 신앙경향을 강하게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이용도 목사는 20대 초반 민족운동 때문에 4차례나 투옥되고 고난받은 것을 내면화시키지 못한 채 이단적 메시아운동에 깊이 간여하는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오늘날로 보자면 그는 분명 성령충만한 오순절은사운동의 지도자임을 한번에 알 수 있지만 30년대 당시의 신비주의적 신앙 경향은 곧 바로 내면화되고 내세화되어 소극적 행동으로 나타났고 민족주의적 신앙적 토대 위에 뜨거운 성령충만의 복음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내면화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등장한 기독교계 신종교 운동 곧 메시아 운동 세력들은 정득은으로 하여금 박태선과 피가름을 하게 하였고 이것을 은밀히 습득 하고 체계화한 문선명 집단은 피가름의 교리를 통하여 강력한 기초조직을 건설하고 열성적 헌신자들을 통한 헌금을 가지고 종교단체로서의 물질적 토대를 구축하여 신흥종교로서 강력한 세력화를 이룬다. 이러한 신종교들의 강압적인 집단 세뇌방식의 근저에는 주님과의 혈연적 관계를 강조한 피가름의 프로그램화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러한 신종교의 전투적인 조직활동에는 메사아운동을 전개하는 전투적인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문선명이고 박태선이었으며 이외에도 여러 유사한 메시아 종단들이 대중의 무지를 바탕에 깔고 강력한 메시아신앙으로 조직화하고 조직원들을 교묘히 조정하고 통제하면 서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고 성을 매개로 하든지 무조건적인 헌신을 기초로 삼아서 그들만의 종교왕국을 살을 찌웠다. 이러한 신흥종교의 행태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기본적으로 성신체험과 피가름 등을 가지고 아성을 구축하였다는 심증을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박태선 계통에서 나온 에덴성회나 문선명 계통에서 파생한 조희성이나 정명석이 같은 이들이 신흥종교의 교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1930년대의 이용도 목사는 복음적 열광주의 내지는 신비주의 신앙에 빠졌다. 여기에 신비신앙을 가미 하여 교묘한 교리와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조직하여 기성교회를 반하여 메시아집단을 만들었다. 그랬기 때문에 1970년대 말부터 일기 시작하여 한국교회를 부흥 시카고 성장시킨 성령운동을 올바로 이해하고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한국 신학계는 이용도목사 연구에 열을 올리고 그의 신학적 유산을 발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98 년 10월 30일 감리교 제 23회 행정총회에서는 이용도 목사의 명예를 회복하고 감리교 목사로의 회원권을 되찾아 주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그 동안 이용도 목사를 연구하거나 신학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하였던 이들은 하나같이 그 마음속이 편편치 않았고 무언지 모를 따가운 교계의 시선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물론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첫째 이용도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던 초창기 장로교로부터 의심받았던 중심적인 내용은 교역자와 일선교회 선교사들에 대한 공격보다는 교인 중에 여자 교인과 편지연락을 하고 예배를 마친 후에는 불을 끄고 기도하라고 했다는 등 매우 사소한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어두운 교회당에서 소등하고 기도하게 하는 것이라든지 교역자를 공격하고 무교회주의자인 김교신의 성서조선 같은 잡지를 구독하거나 인용했다고 하는 것 등은 이미 훨씬 훗날에 추가가 된 것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조직 교회가 악감정을 가지고 이용도 목사를 공격한 것은 더 구체적이다. 이용도는 거짓말쟁이다. 라든지 이용도는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라든지 이용도 목사는 파괴주의자로서 교회의 질서를 혼란케 한다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선을 넘어선 비판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장로교로부터 따돌림을 당했고 감리교로부터 멀어져 갔다. 이제 다시금 생각해보아도 안타깝다. 그토록 열심있게 기도하며 사심없이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주를 위한 뜨거운 마음과 열정으로 헌신하였으나 그러한 그의 열정적인 열심히 결과적으로 기성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아 이단시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저간의 사정으로 보자면 1934년 원산에서 천국결혼식을 주도하여 한국교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백남주 목사는 전쟁 후 1955년 가을 충남 공주사범학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으며 종교체험에 관한 한 남다른 실험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던 연전 출신 한준명 목사 같은 이들은 해방 후 기성교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여 영영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도 이용도 목사 주변에서 다행스러웠던 이들은 감리교 이환신 감독이나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교를 창설한 이호운 학장이 있었고 여기에 비하면 야인이나 다름없이 살면서 오히려 이용도 목사 연구활동에만 매달려온 변종호 목사 같은 분도 있었다.

 

1930년대 초 반짝하는 사이 조선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뜨겁게 역사하였던 복음전도자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탄신 100주년을 맞으면서 감개가 새롭고 만감이 교차한다. 우선 생전에는 조직이 없어서 기성교회로부터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이용도 목사였지만 이제는 그많은 세월을 뒤로하고 그를 능가하고 그를 능멸할 존재가 없이 오로지 그의 진정한 가치와 용기 있는 삶을 정직하게 평가해주고 인정해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고 이제 당당히 100년의 재평가를 받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꿈만 같은 일이지만 그러나 깊이 들여다 보면 모두가 눈물자국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따지자면 그것은 가난했고 무력했기에 민족해방과 인간구원을 위한 불타는 소명감에 사로잡히기에 충분하였고 그러하였기에 그리스도의 진리를 뜨겁게 열망했고 그리스도를 따라 그를 본받아 그렇게 살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감싸안으면서 함께 살아 냈고 성령에 사로잡혔기에 그러한 살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가난이었고 무력함이었으나 그것 때문에 복음의 사슬에 매어 있는 것처럼 살수 있었고 영생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가난하고 왜소한 인간 존재였으나 거룩한 부름에 응답하여 왕 같은 제사장과 예언자적인 사명감에 온몸을 불사르며 소명에 살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과 삶은 하나가 되었고 이 땅에서 이룬 것이 없었기에 더욱 기리고 사모하면서 뜨거운 성령세례를 반기는 지도 모른다.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젊음을 끌어안고 식민지 지배체제 아래에서 생명의 주님을 놓치지 않고 살려고 몸부림치던 청년 예수가 서로 마주치고 지나간다. 그는 그렇게 살았다. 성령 받기 전에는 민족혼에 사로 잡혀 목숨을 건 해방투쟁도 불사하였고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자 이번에는 영적 식민 상태에 놓여 있는 조선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몸부림친 해방의 전사였다. 영육 간에 모든 족쇄를 던져버리기 위하여 예수의 영에 사로잡혀서 구원받기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 들을 돌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조직교회의 통제를 벗어나고 선교사들의 영향에서 자유롭게 살고자 했다. 성령 충만에 사로잡혀 영적 은사에 경도하고 신비적 신앙체험에 깊이 빠져 예언운동에 심취하였던 이용도는 그러한 복음전파의 현상에 사이비 메시아운동에 넘겨주었다는 교회측의 강한 비판을 받아가면서 복음의 전선을 타고 내려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복음에는 두려움이 없었지만 성령 받고 은혜 받은 재야의 예언자로서 남아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여기 우리 앞에 있다. 이제는 예수교회가 있고 강남대가 있다. 이제는 4년 전 그러니까 1998년 10월 감리교 제 23회 행정 총회가 모인 인천 숭의 감리교회에서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이제 이용도 목사는 나름대로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선구적인 존재로서 전문연구학자와 목사들에게 명예스러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 재야의 이단자로서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왔던 입장에서 제도권 신학자들의 긍정적인 평가와 일선 목회자의 아낌없는 사랑이 사후 70년이 다 되어가는 이때 그의 존재이유를 더욱 절실히 요구하고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었다. 그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평가할 수 있는 영적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제는 이용도 목사를 나름대로 평가하고 이해하는 영적인 기준이 마련되어서 목사들의 영의 눈이 떠졌고 성도들의 각성이 깊어졌다. 이제는 그들의 내면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용도를 받아 들이고 이해하는 내면의 세계가 열렸다. 이용도 목사를 몰이해하던 때는 사라지고 그가 영에 살고 영에 죽은 투철한 인물이라고 보고 있다. 어떤 경우는 이용도를 세계적인 열린 영성의 하나라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그의 자연신학적인 언급들은 이제 환경위기를 사는 시대에 오히려 각광 받아 생명신학의 주요 주제로 해석되고 있으며 신비주의적 그의 신학사상은 과거의 목회적 해석학을 뛰어 넘어 더욱 향상된 해석학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성령운동의 대중적 영성에서 21세기 정보혁명의 지적 세련미를 더하는 위치에까지 다다랐다. 참으로 이용도 목사의 이채로움은 끝이 없는 듯 하다. 원초적 성령체험으로 시작되었던 예수교회도 그간의 좌우 갈등의 진흙탕을 건너오면서 초기의 성령 충만도 신비체험과 성령 충만을 바탕으로 깔고 공동체 교회로 남아 있게 되었고 감리교 정치를 했던 이환신 감독과 김광우 목사 그리고 다른 차원에서 한국교회와 신학 사상의 불을 지펴서 에큐메니칼하고 평신도 지향적인 새 공동체 신학의 산파역을 다했던 우원 이호빈의 구세적인 의지의 신학사상은 이제 여기 나란히 함께 하는 자리가 되었다. 한국적 정서와 풍토 속에서 오로지 주님만을 섬기면서 단순 명쾌하게만 살고자 했던 복음전도자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탄신 100주년을 축하드린다.

 

우리는 이제 성령이 내 안에 내가 성령 안에 거주하는 기쁜 체험을 가지고 교회를 새롭게 나 자신을 변화시켜서 건강하고 성숙한 원초적 신앙의지를 불태울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이용도 목사는 전시대의 유물인양 그렇게 말이 없지만 남아 있는 우리들은 여전히 복음적 열정과 성령 충만에 사로잡혀 일생을 불태운 그를 사모하고 있다. 아직도 그가 그리운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가 이토록 목마르게 그리운 것일까. 그것은 그가 받은 성령 그가 살았던 복음전도자로서 그렇게 뜨겁고 단순 무식하게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 그의 임재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간증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음전도의 사명을 깊이 아로새기면서 그래서 뜨거운 신앙만큼 구주 예수의 영혼구원과 세계섭리의 크고 위대하신 역사를 바라보면서 신비한 그대로 주님 맘에 합당한 그대로의 나이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한국의 이용도 목사와 인디아의 선다 씽 이라는 이들의 만남을 다시 실현하고 전파하는 신학과 체험적 신앙세계와 선교의 비전을 공유한다. 같은 주 같은 성령의 은혜아래 서로 다른 그리고 같은 일치점과 상이점을 헤아려서 살아계신 주님을 전파하자 하였던 뜨거움은 어디에서 솟아나와 불태웠는지 분명히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양자간에는 일맥상통하는 어떤 것이 숨어 흐르고 있다.

 

인디아 기독교 신학 개론에 기독교 신학의 초창기에 인디아의 영성을 전수해준 최초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선다 씽과 한국의 성령운동을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게 하여 조선의 초대교회를 크게 부흥케하였던 시무언 이용도는 선구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인디아 쪽에서 보는 선다 씽은 영적 체험이 남다른 그의 설교에 주목하는데 반해서 우리가 비교해보려는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은 운동의 형태적 발전에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제도교회 입장에서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부흥운동의 영향력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를 계속 시도하는데 비하여 인디아에서는 선다 씽을 개신교 근대성을 획득한 영성의 선구자로서 규정짓고 있다는 것이 상이 할 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한국의 영성 이용도와 인디아의 선다 씽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평가가 전무했던 입장에 서 이용도 목사의 성령이해에 대한 영어 자료가 없고 한-인디아 교화간에 교류가 전무한 형편이다. 이용도 목사에 대해서 양측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한글로 된 선다 씽에 관한 예수교회지의 논문은 적지 않고 시론 또한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단초가 되어 이용도 목사와 선다 씽간에 공유하고 있는 성령체험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도 기대해 볼만하다. 그래도 양자간에 공유하고 있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증거들 그리고 식민지 체제하에서 떼어놓고 구분지을 수 없는 전도로 현실에 대한 신앙적 인식과 제도교회에 대한 조직적인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 도 중요한 영적 체험과 성령운동의 영적 다이나믹스가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조직적이지 못한 복음운동의 내면과 제도교회로부터 일정 거리 벗어나 있는 자유로움과 복음전파에 대한 제 3의 입장은 복음의 전파라는 측면에서 매우 유사한 상황인식을 하고 있다. 더나가서 본격적인 의미에서 신비 체험이나 훈련방식 생활스타일 등에서 누가 누구에게 먼저 그랬는지 모를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과 복음을 위해 스스로 가난해진 것이나 치명 적인 약점이었던 초기 건강상실과 성령 충만에만 매달리는 집념 그리고 강단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여전한 품성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양자간에는 무언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복음의 영역이 존재하였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 현대사에는 1901년에 태어난 천재들이 많았었다. 질풍과 노도의 시대였던 이 혁명과 위기의 시기에 조선은 멸망당하고 독립되었으며 분단은 고착화되고 전쟁과 혁명으로 격동의 세월을 살았다. 그러나 명멸하던 별들처럼 차고 이지러지는 월광처럼 그렇게 허무하기 짝이 없는 시기에 일제에 항거하여 투옥 당하고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여 고난의 주님과 내주하는 성령에 의지하여 살았다. 유한한 지상의 양식들을 집어던지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면서 살아갔던 이용도 목사는 씨알 함석헌 선생과 같은 시기에 살았다. 물론 김교신 선생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용도목사는 순진하고 무구한 신앙적 입장에서 무교회주의를 이해하고 있었고 자기보다 나은 젊은 엘리트들의 기독교 이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로서는 오히려 가난한 조선의 민중바닥을 천착하면서 제도 조직교회를 향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기존 교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도전이 결국은 치명적으로 반격해 온다는 당연한 숙명을 받아들이면서 일전도 불사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살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교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에 취하고 은혜에 취하여 은혜를 사모하고 헌신의 열정에 사로잡힌 여자들과 농촌교인들과 가난한 청년 학생들을 데리고 기도운동 성령운동 부흥운동만을 고집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밑 바닥과 연계하고 그만큼 가난을 온몸으로 껴안으면서 살다간 민중설교자도 없다. 그야 말로 교회의 바닥을 누비면서 성령께 의지하여 교권을 상대로 싸워나갔다.

 

71년 초 신학교를 들어간 필자는 얼마 있지 않아 신학교의 재미없는 학교생활에 실망하고 방황을 시작하였다. 공부나 하고 목회는 하지 말자라든지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으니 졸업하기 전에 학교를 떠나서 대학교로 갈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하였다. 이제와 생각하면 쓸데없는 생각이었고 필요없는 방황이었지만 그때에는 왜 그리도 힘겹고 어려웠는지 모른다. 그때 접하게 된 이용도 목사라는 존재는 참으로 놀라웠다. 짧고 굵게 살아간 것하며 가난과 벗하며 폐결핵으로 죽어간 것하며 마지막으로는 교회에서 버림을 당해 쓸쓸하게 죽었다는 대목에 와서는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를 위한 뜨거운 열정과 기도의 열심 그리고 부흥사로 일관한 삶의 역정 등이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내용들이었다. 복음의 소명에 살고 소명에 죽기까지 후회없는 삶이 부러웠고 놀라웠다. 그토록 끈질긴 가난이 또한 놀라웠다. 그때 이용도 목사를 더욱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북산 최완택 목사를 알게 된 것도 자극적인 일이었다. 그는 이미 나를 한 단계 뛰어 넘어가서 그를 대학 졸업논문에 썼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북산과의 깊은 우정도 존경심도 이용도 목사를 아우르는 것만큼 커지고 솟구쳤다. 그리고 대학 졸업 농촌 목회를 하기 위해 이천 시골로 내려온 후 다른 D.Min 논문들을 대필하면서 다시 한번 이용도 목사를 접했다. 그때에도 한국교회의 교회부흥과 성장운동의 중심적인 연구 대상은 역시 이용도 목사였다: 그리고 나는 목회현장으로 나온 필자는 그와 마찬가지로 성령에 취하고 성령에 사로 잡혀서 용기 있게 목회를 시작하였고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은 후에는 아무 것도 거침이 없이 시무언 그분으로부터 오는 감동으로 살아왔다. 단지 그 분은 시무언하여 성령께 마음 문 활짝 열고 입은 꾹 다물었으나 필자는 그렇지 못한 채 살고 있다. 1984년 85년 영국을 다녀온 후 인디아 신학과 연이 닿아서 1988년 아시아 기독교협의회 장학금으로 인디아를 갔다. 그곳에서 필자는 다시 한번 이용도와 선다 씽 을 한꺼번에 만났다. 그래서 인디아 생활은 좋았다. 1989년 1월 초 인디아 외무성은 당 시 인디아에 들어 와 있는 외국인 유학생들을 초청하여 뉴델리를 포함하여 라지프트와 아그라 삼각지역의 관광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필자는 학교의 추천으로 관광 길에 올랐고 7일간의 여행을 마친 후 뉴델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를 찾았다. 일주일 동안 선다 씽의 유적지 트레킹을 했다. 첫 번째 기착지는 히마찰프라데시 주의 수도 심라였다. 심라는 1905년 9월 3일 선다 씽이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와서 세례를 받았다. 심라는 그때 눈덮힌 겨울이었다. 경비행기로 그곳까지 가서 1905년 9월 3일에 레드먼 목사로부터 세례받은 크라이스트 교회를 찾았다. 심라 여자중학교로 바뀐 교회였지만 감회는 새로웠다. 그리고는 코트가르로 갔다. 그곳은 선다 씽이 미국인 친구 스톡스와 함께 다섯 고아들을 데리고 살았던 유적지였다. 이어 곧바로 솔론을 갔다. 그곳에서 좀 더 들어 가면 인디아 육군 연무대가 있는 스바투를 갔다. 스바투는 현재 인디아 용병 구르카 신병들을 훈련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스바투는 선다 씽이 1929년 4월 실종 직전까지 살았던 방갈로가 있는 곳이다. 희고 차가운 히말라야의 빙설을 뒤집어쓰고 있는 스바투의 연봉들을 바라보면서 히말라야를 들어왔다는 실감을 하였다. 때마침 비춰주는 따스한 햇살에 열병하듯 둘러 처져서 방갈로를 찾는 필자를 반기는 듯 하였다. 마지막 사명처럼 느끼고 티베트를 전도하여 전후 8차례나 들어갔던 티베트를 찾아가던 복음전도자 선다 씽 에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쉼터였던 스바투의 방갈로는 참으로 한적한 곳에 있었다. 인생은 어느 순간 영생으로 향한 길에서 잠시 쉬다가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듯이 선다 씽도 그렇게 잠시 잠깐이지만 가난하고 병든 몸을 위탁하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소였다. 당초 인디아 행을 고집했던 필자는 일정한 교과과정에 의한 유학은 아예 때려치우고 오로지 내가 만든 교과과정에 따라 발길 닿은 대로 배우고 익히는 스타일에 맞추어서 한국의 이용도와 인디아의 선다 씽을 합치시키는 어떤 때가 올런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하지만 구체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인디아를 갔었다. 그리고 마침내 선다 씽의 유적지를 찾으면서 말로는 다 형언키 어려운 그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 가운데 마침내 스바투의 방갈로에 도착하였다. 십 수년여 이용도 목사의 세계를 심취하였으니까 여기에 덧붙여 인디아의 이용도 선다 씽을 채워 영적 순례길을 에우는 순간이었다. 다 알 것도 없고 다 모를 일도 아닌 그런 신비의 손길을 쫓아 따라 나왔던 그 길에서 모든 길은 신에게로 향하고 모든 삶은 그리스도를 따라 완성되는 것임을 그때 알았다. 차겁고 매서운 히말라야의 겨울바람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비로소 히말라야의 눈꽃이 피어 더욱 따뜻하기 만한 그해 겨울을 지냈다. 히마찰프라데시는 인디아의 수도 뉴델리를 떠나서 하리야나를 거쳐 식민지 시대 하계 별장이 밀집해 있는 해 발 2000m의 고지에 위치해 있다. 깊고 푸른 산록에 쌓여 눈덮힌 히말라야를 대하고 있으면 천상천하에 고요란 고요는 다 모여있고 그 끝 모를 깊은 계곡 저편으로는 히말라야의 야생동물들이 눈덮힌 산록을 헤매며 다니고 높다란 히말라야 송은 푸른 하늘을 향 해 쭉쭉 뻗은 큰 팔을 휘두르며 우리를 내려다보는 듯 했다. 산 빼꼭히 들어차있는 산간 마을들에는 저녁 연기가 모락 모락 피어나고 떼지어 돌아 다니는 히말라야 원숭이들은 산 마을의 창틀과 지붕을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먹을 것을 구하고 있었다. 그 속에 흰빛의 피부를 자랑하는 타쿠르 족들의 건장한 몸집과 히마찰프라데시 주민들만이 쓰는 호떡모자는 품위를 자아낸다. 한국과 흡사한 소나무와 따사로운 햇살이 한데 어울려 더욱 크고 넓은 숲으로 한가득 뒤덮인 심라는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시공을 초월한 히말라야의 포근한 안식을 맛보게 하였다. 복음 전도자 선다 씽이 굳이 고향 람프르를 벗어나 이곳을 찾고 여기에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려 했는지를 한번에 알 것 같은 그 무엇이 그곳에 그윽한 분위기로 채우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머무르기를 원했던 스바투의 방갈로에는 이제 가난한 이주노동자인 네팔인들이 아무렇게나 살림을 차리고 살고 있었고 방갈로를 찾기까지 친절히 안내를 해주던 스바투 외과 병원의 나이 먹은 은퇴 간호사는 그 당시 84세가 되었다는 역시 은퇴의사인 칸 박사를 만나도록 해주었다. 너무 먹은 나이 탓에 청력이 떨어지고 기억력이 쇠퇴해졌다고 말하는 80고령의 칸 박사 는 그래도 몇 년 전에 일본인이 찾아오고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라고 말해주었다. 칸 박 사는 필자에게 있어 60여년 전의 선다 씽의 존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생존자로서 시간을 이어주는 안내자였지만 선다 씽의 영성을 전해주는 안내는 할 수 없는 할아버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 설레이는 마음을 가눌 길 없는 필자는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 날밤 나는 거기에서 만해 한용운과 라빈드라나드 타고르가 비슷하듯이 우리의 이용도와 선다 씽은 무언가 같은 일맥상통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가난의 영성이었다. 그리스도처럼 복음을 전하나 얻는 것은 고난뿐 이 세상 에서 바랄 것은 없다는 단순 명백한 복음의 현실을 살아간 이용도와 선다 싱의 삶은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긴말이 필요없는 이 명쾌한 현실을 히말라야를 바라보는 높은 산 기슭에서 이용도와 선다 씽의 만남을 자축하였다.

 

이제 이 긴 글을 마쳐야 할 때가 되었다. 이용도는 일찍이 신학교 재학시절부터 6세기 시리아의 성자 시메온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는 성인목회보다는 유년 주일학교 교육에 남다른 집착과 적성을 보였던 그가 원하든 원치않든 성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로니하다. 어쩌면 조금은 낭만적이고 어찌보면 유약하기 만한 성품의 그가 만약 주님께 사로잡히지 못했다면 일찍 죽었을 것이다. 19세에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아내 송봉애 사모, 속썩이며 살았던 그가 지금 같은 시 절처럼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면 어떠했을까. 만약 왓슨 선교사가 주선한 대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말았다면 그의 후반 인생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많은 감리교 목사들처럼 그도 고국을 잊고 머나먼 타국 땅에서 육신의 안일을 위하고 가족만을 위하여 살았을 터인데 그렇다면 올해의 탄신 100주년은 있었을 것인가. 모두가 부질없는 상상이요 아무런 의미 없는 생각이다. 그는 생의 고뇌와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가난과 벗하고 식민지 청년으로 좌절하면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열을 심고 가난하고 무력한 한국민중들과 살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정 많고 우의를 존중히 여기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절제된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제한된 삶에서 죽도록 충성을 다했던 이 땅의 아들이요 아버지요 남편이요 목사요 영적 지도자로서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성자적인 거룩한 열정도 가슴에 묻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그에게 어느날 운명 같은 주님의 소명이 나타났다. 그리고 사지에서 건진 육신을 끌고 주님의 맡겨주신 목장에서 양들을 돌보고 인도하는 목자적 삶을 산다. 모든 것을 다 버린 심정을 가지고 그저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소명에 합당한 일체의 사기함을 거부한 담백하고 용기 있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모두의 질시와 저주 속에서 그리스도처럼 현실교회의 거룩을 가장한 위선과 무기력한 공동체를 부여안고 그렇게 십자가의 죽음을 죽었다. 아무런 대가도 받음이 없이 그저 함께 나누는 성령의 돌보심과 영생을 향한 헌신적 믿음만을 남겨주고 이 땅을 떠났다.

 

 

 

 

□ 좌담

 

 

 

교회와 시대의 어제 오늘과 이용도 목사

 

 

 

  ◊ 참  석

 

 김승혜 (서강대학교 교수) 김희방 (예수교회공의회 명예의장)

심일섭 (강남대학교 명예교수) 유동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이윤구 (인제대학교 총장) 이정배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사회)

(가나다순)

  ◊ 정  리

 

김형기 (예수교회목사)

  •일 시: 20이년 5월 11일 장 소 : 세실레스토랑

 

 

 

 

 

 

사  회 : 오늘 이렇게 이용도 목사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서 평소에 이용 도목사님을 좋아하시고 또 학문적으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연구하시는 여러 선생님들을 모시고 이용도 목사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좌담회를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세기, 100년 전에 태어나서 예수님처럼 33세의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서 이분처럼 많은 영향을 준 사상가도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런 귀한 분을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어떻게 만나셨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선생님들의 학문적인 여정, 신학적인 연구 속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하시는지,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먼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용도 목사님에 대한 저마다의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를 해주시면 독자들이 더욱 친근하게 이용도 목사님에 대해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용도 목사님에 대한 선생님들의 개인적인 관계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개인적인 관심

 

 

유동식 : 이용도 목사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연유는, 1948년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공주여자 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는데, 거기에 백남주씨가 선생으로 와있었어요. 이름을 바꿔서 백상조라고 했고, 놀라운 지식과 영적인 체험을 한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원전만 가지고 성서연구를 지도했어요. 참 놀라운 분이다 생각했는데, 그 후에 알고 보니까 그분이 백남주 씨더라고. . .  그래서 추적을 해보니까 이용도 목사 그룹이라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 구체적으로 작업한 것은, 1967년이에요. 당시에 복음동지회라고 하는 일본에서 신학하던 이들의 모임이 있었는데,YMCA에서 공개강좌를 하자고 그래요. 열광주의라는 주제로 몇 사람이 강연을 하기로 했는데 나보고 한 주제를 맡으라고 해서 이용도 목사님의 열광주의를 주제로 삼았고… 그때 이용도 목사님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서 처음으로 공부해 본 것입니다. 그리고 강연을 요약해서 『기독교사상』에 실었지요. 그것이 이용도 목사님에 대해 공표된 논문으로는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모두 쉬쉬했어요. 내가 『기독교사상』에 그런 논문을 냈다고 주위에서 눈총도 받고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이단으로 몰릴 때죠.

그 후 1982년에 『한국신학의 광맥』을 정리할 때에 이용도 목사님도 거론했지요. 근자에 와서는 한국인의 영성의 특징을 풍류도라는 각도에서 정리를 하고, 풍류도라는 안목에서 한국의 사상사를 훑어보니까 가장 한국적인 영성의 발로는 종교와 예술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왔다고 보게 되었어요. 1995년도 연세대학교의 다산강좌에서 강의하면서 기독교 신앙과 예술의 관계에서 이용도 목사와 함석헌 선생과 이연호 목사,세 분을 다루었습니다. 그때 강의를 책으로 낸 것이 삼일문화상까지 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만,결론적으로 “가장 한국적이다”,“풍류도인이다” 할 수 있는 이는 함석헌 선생님과 이용도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승혜 : 저는 1981년부터 서강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종교전통과 그리스도교”라는 강의를 개설해서 2년에 한번씩 학부강의를 20년 동안 해오고 있는데, 2년 전에 그것을 책으로 출판한 것도 있습니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400년 동안에 그리스도교가 동아시아,즉 일본,중국, 우리나라 이 세 나라에 들어와서 전통문화와 충돌도 하고 또 수용도 되면서 어떤 결실을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세 나라를 차례로 보면서,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만남은 가톨릭에서 장하상의 “상재상서”(上幸相書: 1839년 기해박해 중 잡힐 때 품에 간직했던 우의정 이지연에게 드리는 편지) 등을 봤고요, 개신교에서는 처 음에는 최병헌 목사님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봤는데, 뭔가 불만스럽게 느껴졌어요. 성취 신학적 시각에서 본 비교 종교적 연구와 이론은 있으나 깊이 있는 영성의 흐름이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용도 목사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1966년에 출판된 일기와 편지를 봤는데요,“내가 찾던 것이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별히 저는 그 분의 내면을 드러내 주는 일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종단과 교파를 떠나서 순전히 한 사람의 영성이라는 점에서 보았을 때, “그리스도 신앙을 자기 문화 안에서 어떻게 소화시켰는가”라는 관점에서 이용도 목사는 제가 본 한국인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분은 최병헌 목사님처럼 이론적으로 전통신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신앙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분 영성 안에 녹아져 있습니다. 도가적인 자연에 대한 사랑,유가적인 학문에 대한 사랑,하늘에 대한 신뢰, 하물며 좋은 의미에서 무속적인,몰아적 신앙에 몰입되어서 자기를 없애고 신이 자기 안에 사시도록 노력했습니다. 전통사상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소화해내고 있어서 제가 좋아하고 있습니다.

 

 

김희방 : 제 고향이 본래 강원도 통천인데,중학교 2학년 때 춘천에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굳어지던 3, 4학년 때쯤 고향에 돌아가서 처음으로 이용도 목사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감리교 목사님들 말씀을 들었는데, 별로 좋게 이야기하지를 않았어요. 그렇지만 평신도한테서는 “한국의 목사님들 가운데 이용도 목사만한 분이 없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가까운 친척들한테서도 많이 들었지요.

박재봉 청년과 금강산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불이 붙어서 소위 영성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까? 자기 교회를 필두로 해서 원산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갔는데,하지만 거기서는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으니까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고,서울에 올라와서도 사실 감리 교회에서는 발을 붙이지 못했고,그러면서 감리교회뿐 아니라 장로교회,성결교회로 다니면서 눈물로 말하고 눈물로 설교하면서 단 5분도 못되어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기 시작해서 다섯 시간 여섯 시간을 계속하지 않았습니까? 금년에 이용도 목사님이 김재준 목사님, 김교신,함석헌 선생님과 함께 탄신 100주년을 맞았지만,선교 2세기에 들어선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분을 여러분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만,이용도 목사님만큼 우리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신앙운동가로 신비주의니, 토착화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만,20 세 전후로 감옥에 여러 번 나갔다 왔다 하면서 가슴 아픈 민족의 한을 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을 했는데,교회 안에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광복 50주년을 맞으면서 고향인 황해도민회에서 “그대로 나눌 수가 없다”,“이런 분은 지금이라도 애국자의 반열에 올려야 된다”고 추천해서 정부에서는 1995년 광복절을 기해서 그 공훈을 대통령 표창으로 추서한 바가 있습니다. 지금 선교 100주년을 맞고,21세기에 들어서면서, 30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자만,이용도 목사님을 앞세우고 그분의 가슴에 불타는 신앙을 지금 이 교회에 전하지 않는다면 이용도 목사 100주년을 맞는 의미가 없다고 생 각합니다.

 

 

심일섭 : 결론은 서론에 있다는 말처럼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우리가 100년이 지난 오늘께 와서 다시 이용도 목사님을 생각하고 또 우리 현장에 필요해서 다시 불러내려고 하는 의도의 첫째는 교회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한국교회의 역사상 오늘 날의 교회처럼 잘못되고 변질된 역사는 지금까지 없었다. . .  그렇게 볼 때,여러 개체 교회의 분란을 일으키면서까지 교회개혁을 정말로 눈물로 호소한 분으로서 오늘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는 한국교회에 이분이 다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뭐 현재 한국교회 성장이 급하다 못해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그러는데,또 그에 따른 문제,물질주의, 자본주의의 제일 나쁜 점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런 형편에서, “이런 형태로 한국 교회가 지속하다 보면 이 민족에게 반드시 버림을 받지 않을까” 하는 어떤 위기의식을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정말로 교회 개혁을 그토록 부르짖었던 그분이 참 그립다” 하는 생각입니다.

그 외에는,민족적 고난에다 자기 자신의 결핵으로 인한 고난 등등으로 고난의 신학을 들 수 있고,이것은 아마도 종교개혁 신학과도 통할 수 있는 것이고,또 일반적으로 특징을 말하면 토착적인, 동양적 한국적 종교 또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편린과 같은 빛이 여기저기서 번득이는 것을 볼 수 있고,또 영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물질화 비인간화되어 가는 이런 때에 영성의 문제에서도 그렇고,또 사상적으로 보면 각 시대는 시대정신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19세기를 산업혁명 이후 경제논리가 확립되지 못한 때에 벌어진 경제활동을, 20세기는 인간의 소외를 말할 수 있을 것 인데,그러면 21세기의 시대정신은 뭘까 하는데 대해서도 이용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특히 영성의 회복문제들이라든가. . .  저에게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됩니다.

구체적으로,이용도를 관심 있게 공부한 것은, 강남대 대학원에서 신비주의 세미나를 한 학기 했는데,한국의 신비주의 대표주자가 누구일까 하고 살피다가 이용도가 아닌가 하여 같이 몇 주 동안 연구한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번 참으로 만났으면”,“그 음성을 한 번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벌써 제이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연구를 해도 무언가 부족함이 있고,그래서 이용도 목사님을 직접 만난 분들과 만나고 대화하면서 배우고 연구를 해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이윤구 : 이용도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뵌 적은 없고,아주 소박하게 이용도 목사님의 이름과 접하게 되었는데,어느 해인지 정확히 생각이 안 나지만,해방 전후의 일입니다. 감리교회를 다닐 때인데,세례를 주신 분이 차경찬 목사신데, 해방 전 외정 말기에 이분이 밤낮으로 경찰서에 불려 다닐 때인데,그리운 인물이 몇 분 계시다면서 그 중에 이용도 목사님을 말씀하셔서 “감리교회에 그런 분이 계셨나 보다” 그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거의 본인을 만난 것만큼 가깝게 생각을 하게 된 것은,이호빈 목사님을 통해서입니다. 자꾸 이야기를 하시니까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아침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아는 분들 중에서 오래 생각하게 되는 분이 네 분인데,직간접으로 알게 된 이분들이 참 좋은 분들이셨다. . .  이호빈 목사님하고는 중앙신학교 인연 때문이고,부산 가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김재준 목사님을 알게 되고 또 그분 밑에서 공부를 했고,그 길을 통해서 함석헌 선생님 글을 읽기 시작하고 만나 뵙고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고,그리고 김교신 선생님인데, 요즘 들어 제가 머리를 짧게 깎고 다니는데,그래서 주변에서 말들이 있습니다만,첫 번째 이유로는 김교신 선생이 젊었을 때 머리를 깍은 모습이 좋았구요. . .  그리고 이호빈 목사님을 통해서 이용도 목사님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함석헌 선생님하고 이용도 목사님을 비교해 왔는데,꽤 재미 있게 생각이 됐어요. 함석헌 선생을 만나고 나서 이상스럽게도,그분이 신비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성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데가 있어서 이용도 목사님과 비교해서 생각하게 되었는데, 두 분이 모두 좋은 의미에서 동양적인,신비적인 신앙을 겸비하신 분들이라,“어쩌면 두 분이 이렇게 닮으셨을까” 생각을 했던 겁니다. 제 관심은, 함 선생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동양철학,동양종교가 주류가 되어서 80%는 동양쪽 사람 같고,이용도 목사님은 반대로 지독하게 기독교 신학, 서구적인 신비주의 쪽으로 가시지 않으셨나 하는 건데,그런 점이 공통점이기도 하고 차이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용도 목사님에게 관심이 있다면,어떻게 해서 우리나라같이 고난 당하고 어려운 시절에서 본인이 원하시지 않으셨지만 감리교회에서 내쫓김을 당하시고 그러면서도 그 신앙을 지켜 가셨을까 하는 겁니다. 아직도 이용도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 다른 고전들을 읽는 데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영감이라고나 할까 느낌이 있어서,그래서 좋아하지요.

 

 

 

연구방법론의 검토

 

 

사  회 :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이용도 목사님을 연구하고 바라보는 여러 선생님들의 시각을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한번 관심을 가지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이용도 목사님에 대한 연구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이용도 목사님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으셨던 분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초기에는 교회에서 출교 되셨고 역사 초월적이고 세대 부정적인 신비주의 사상가로 그려졌다가,거기에 반해서 서구적 신비주의긴 신비주의인데 부정적이지 않은 신비주의자로 그려졌고,또한 교회개혁가로 평가되기도 했으며, 성령운동가로 연구되다가, 또 최근에는 동양적인 심성을 가진 토착적인 영성의 사상가로 평가되기도 했고, 더욱 “이용도 신앙과 사상 연구회”에서 주관한 발표논문에 따르면 포스트 프로테스탄티즘의 사상가로 평가되었으며, 또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이용도 목사님의 감(感)의 신학을 연구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이용도 목사님에 대한 연구가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방향에서 있어왔기에 그 연구사에 대한 검토를 선생님들께서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시 앞으로 이용도 목사님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지에 대한 평가와 방향,좋은 길을 모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희방 : 오늘 이 모임이 있기까지 “이용도 신앙과 사상 연구회”가 중심이 돼서 이용도 목사님을 흠모하면서 순수하게 신앙의 모습을 찾아가기 위해 연구하는 모임을 지속 적으로 가질 수 있었는데, 이윤구 박사님이 회장을 지내셨고,유동식 박사님이 지금 회장으로 계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교회는 교파주의로 출발한 교회는 아니고요,이용도 목사님도 교파 교단에 얽매이는 분은 아니셨죠. 두 분이 모두 소위 성직자는 아니신데, “연구회”가 이렇게 초교파적이고 평신도적인 개념을 두고 줄 발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곁들여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네 번이나 감옥에 들어갔으니 애국자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또 30여 년 동안 짤막한 생애에 신앙 부흥운동과 업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는 일이겠지만,문제는 식민지로 있었던 당시의 여러 가지 제약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미국이 선교사를 보냈습니다만,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려고 할 때 비밀리에 양해를 했던 것이죠. 우리는 제한된 식민지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용도 목사님은 어떤 신앙적인 독자성이랄 까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일본이 지금도 양적으로 보면 교회가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기독교를 일으킨 그 내부를 보면,많은 선교사들이 와서 일을 했지만,역시 사상적으로는 니시다(西田)나 우치무라(內村)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일본에 적합하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흔히 “교회에 교인이 얼마나 모이느냐”,“일년 연보 가 얼마냐”는데 관심을 많이 표명하는데,한일 교회 지도자 모임에 참석한 어느 일본 목사님이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한국 교회가 그러한 시각 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선교성과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패전 국가로서 교회가 발돋음을 했지만,신앙과 사상의 기초에 우치무라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버티고 살려고 노력했고,또 앞으로도 살아 남을 것이다. .” 물량적인데 치중해 온 우리 교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이러한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게 되고,또 앞으로 21세기를 바라보면서 한국 교회가 제자리에서야 하겠다는 생각도 가지게 되는데,그 중심 되는 자리에 신앙적으로 독특성을 가지고 계셨던 이용도 목사님의 목소리가 다시 이 민족의 심금을 울리고 이 민족에게 불을 던져줄 수는 없을까,그리고 이런 방면에서 더 연구가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윤구 : 앞으로 연구 방향이나 과제가 무엇이겠느냐는 것이 두 번째 이야기 주제인데, 나는 이제까지 연구라는 것이 정말 깊이 있게 되어 왔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제가 오래 생각해 온 네 분 중에 함석헌,김재준, 김교신,그리고 이용도 목사님 순으로 모르고 있지 않나 하는,깊이 있게 생각을 못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회자께서 이 목사님을 포스트 프로테스탄티즘의 선구자로 보려는 연구가 있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나는 21세기가 너무 급하게 돌아가니까 포스트 프로테스탄티즘 이야기할 때가 아닌 것 같아요. 포스트 크리스텐돔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요. . .  정말이지 21세기에 인류가 전멸 당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생각해야 되는 인물,거울을 삼아 야 되는 인물이 있어야겠는데,혹 이 목사님을 그런 분으로 생각해 볼 수는 없는 것인 지. . .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용도 목사님은 전집부터 어딘가 모르게 부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 비하면 김교신 선생님 전집은 그런 대로괜찮아 보이고요. 그런데 이 목사님에 대한 생각은 어디까지나 이상한 신비주의자라고 이단시하고,또 부흥사로는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왜 했는지도 모르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않나. . .  욕심 같아서는 이제부터 연구 방향이라는 건 21세기라고 하는,이렇게 썩어가고 있는 인류사회를 건 지는,정말 이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건질 수 없을 것 같은 이 세상을 건져내는 데 생명력을 지닌 인물을 생각해내야 되지 않을까 하는데,이분이 그런 분이 아닐까. . . 

기독교 이 천년 역사상 시대를 초월한 인물이었다면 이용도 목사님이 아닌가. . .  이분이 구라파에 탄생을 했으면 상당히 유명한 분이 되셨을 텐데,여기서 나셨기 때문에 안 되신 것인데. . .  동양사람으로 몇 사람 내놓는다면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그만큼 영성을 갖추고,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많이 울릴 수 있는 인물이 다시 있겠느냐는 말이죠, 21세기에 인류가 까딱 잘못하면 생태계 전체를 끌고 같이 자멸할 것 같은 이 시대에, 깊이 생각해야 될 인물 중에 이용도 목사가 계신 것이 아닌가,연구를 그런 쪽으로 몰고 갔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김승혜 : 지금 말씀을 조금 발전시키고 싶은데요,제가 『이용도와 한국교회의 개혁운동』이란 논문집을 살펴보면서, 처음의 논문들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후부터는 반복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지루했습니다. 좀 다양한 시각으로 연구의 범위가 확대되면 좋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전공이 동양의 종교전통이니까,저는 이분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려면 동 양적인 영성이 어떻게 이분의 영성 안에서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그것을 어떻게 그리스도교로 승화시키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예로, 이용도 목사님 일기를 처음 펼쳤을 때,거기 다섯째 줄에 “주 외에 나를 알 자가 어디 있으며. .” 이렇게 나오거든요,저는 유교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知我者其天平로구나” 하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이 금방 떠오르더라구요. 이런 식으로 일기 전체를 보면 서 빨간 줄을 그었는데,자연스럽게 아주 많이 나와요. 이용도 목사님은 “논어에서 말하기를” 하면서 출처를 밝히며 이야기는 안하거든요. 그러니까 당시의 한국인들이 그랬듯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고, 그분이 그것을 살고 있었던 겁나다. 그래서 그분 영성 안에 동양사상과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를 보게 되면 굉장히 많은 것이 있을 것 같아요. 앞서 이 총장님은 이용도 목사가 서구 영성이 더 강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안 봐요. 저는 그분의 바탕은 동양 영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더 알고 싶은 것은,이분이 어떻게 유불도(儒佛道)라는 영성으로 들어간 건가, 그 구체적 과정이 궁금합니다. 전통사상을 잘 소화하고 그것을 그리스도교로 승화시킨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보는데요,동양적인 심성을 가진 영성가로서의 이용도 - 이런 사람이 아주 적어요. 한국 가톨릭이나 개신교 전체를 통틀어서 상당히 적어요. 그래서 상당한 보물인데,이것을 닦아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이정배 교수께서 이야기하실 때,여성 신학적인 면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것이 도교사상과 접목되어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 자신이 어머니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고,딸의 죽음을 보면서 쓴 짧지만 깊이 있는 글이라든지,자기 부인에 대한 것이나 여성신도들에 대한 것 등등. 그리고 하느님을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다리가 아파서 못 걷는 아이를 집어 안듯이,하느님이 부족한 자기를 안고 가신다든가,그 품에 안긴다는 정겨운 표현아 자주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어머니로서의 하느님 모습을 가진 것은 도(道)가 만물의 어머니라는 도가적인 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여성신학적인 면과 동양적인 영성,두 면에서 들어갈 수 있다면 상당히 깊이 있는 영성이 드러날 것이고,상당히 현대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윤구 : 말씀드린 이용도 목사님의 서구적 영성에 관해서 언급하셨는데,제가 이용도목사님을 보지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니까 잘못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말씀드린 것은 특히 함석헌 선생님과 이용도 목사님을 비교해서 생각한 것입니다. 두 분을 비교해 보면, 함 선생님은 끝까지 동양을 강조하고 나오셨는데, 이 목사님은 철저히 기독교 목사로 나가지 않으셨나,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동양적인 영성이 없이는 이용도 목사님을 생각할 수 없겠지만,돌이켜 놓고 보면 이 목사님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겁니다.

 

 

김승혜 : 끝에 가서 어떤 것이 더 그리스도 신앙을 가진 대중에게 먹혀들어 갈 것이냐 고 했을 때, 저는 동양적인 바탕을 깔면서도 철저하게 그리스도화한 사상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  회 : 이번 주제를 좀더 몰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두 분이 이용도 목사님에 대한 연구가 부실했다는 말씀과 동양적인 영성에 대한 연구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하셨는데,심일섭 교수님이 좀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심일섭 : 사회자께서 지금까지 이용도 연구의 대강을 이야기하셨는데,아직 연구해야 할 분야가 남아 있다면 한국문학사 속에서 자리매김해 보아야 할 문학적인 어떤 가능성 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는,한국 기독교 순교사 안의 한 분으로 자리매김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분이 폐병 3기 4기가 되어서,어떻게든 살려고 했으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거 안 했어요. 내일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 피를 토하면서 그냥 외쳤다구요. 이것은 한국교회의 갱생,혁신을 위해 목숨을 내건 거예요. 순교자적으로 이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신 것이지,그냥 생명이 단명이라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고 저는 봅니다. 순교자의 대열로 넣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비주의 동양적인가 서양적인가 이런 말씀이 오갔는데,이분은 상당히 자연주의자였어요. 이분은 어렸을 때부터 산에서 새를 보고 설교를 하면 새들이 잠잠했고, 그래서 그런 면에서 보면 이용도는 기독교적 자연주의자면서 우주적으로 규정해야지 않을까. . .  탁사 최병헌이,하늘은 “동양의 하늘이 어디 있고 서양이 하늘이 어디 있느냐”그랬지요? 그분이 여러 종교를 비교한,비교종교학으로는 최초의 학자인데,탁 트인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이,표현이 좀더 과장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용도 목사님은 기독교 자연주의자고 우주론자다” - 그렇게 확대해서 해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어서 김재준목사님 하면 흔히 사회운동가로 여기는데,그를 자세히 보면 굉장히 신비주의이고 우주론적이예요. 제가 놀랬습니다. 그래서 큰 분들은 무슨 파(派)다 하는 것을 털어 버리고 우주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다석 유형모 선생도 그렇고. 그래서 크게 보고 있으니까 역시 연구하는 것도 좀 넓혀서 볼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  회 : 여러 선생님들께서도 아시겠습니다만,이용도 목사님 스스로가 “동양은 정적이고 서양은 동적이고, 동양은 요한 적이요 서양은 공관복음 적이다. . . ”라고 하면서 동서양에 대한 비교를 말씀하셨던 부분들이 있거든요. 그렇다고 한다면 그분 스스로 동서양에 대한 구별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적 우주론자” 라고 보기보다는 그것이 그분의 동양적인 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는 없을까요?

 

 

이윤구 : 이것은 내가 꼭 한마디를 해야겠네요. 요즘 교회가 미치광이처럼 잘못 돌아가는데 대해서 이 목사님을 자꾸 연관지어서 생각하게 된단 말이예요.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한국 기독교 100년사를 놓고 교회 지도자 몇 분들을 보면, 굉장히 좋은 의미에서 열광적으로 기독교 부흥신앙의 바톤을 만들어 가지 않으셨나 - 그런 의미에서 이 목사님을 돌이켜 보기가 쉽죠. 짧게 사시다 가셨으니까. 40, 50년 더 사셨으면 어떠셨을지 모르겠지만. . .  그 분들이 다 칼라가 있는데, 그 중에서 이 목사님은 _ 초대교회라고 표현하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 기독교의 순수한 좋은 점을 제대로 받아들이셨던 분이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단 말이죠. 다른 세 분들을 생각해 보면 왠지 양다리 걸쳐놓고 계셨던 것 같은데, 이 목사님은 그런 인상이 없단 말이예요. 아주 폭 빠져서 들어가셨는데. .  그런 점에서는 우리 동양철학에서는,신비주의에서도 마찬가지예요,인퍼스널한 데서 오는 불만이 폭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서양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인간으로 오신 하나님,뭐 그런데 대해서 아주 미치듯이 좋아하지 않으셨을까,그런 의미에서 드리는 이야기구요,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일섭 : 이 박사님,토착화의 어떤 정신주체성,특수성,그쪽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인데,결국 토착화든 신학이든 가야 할 곳은 우주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용도 목사님 하신 말씀 중 유명한 말이 있죠, “서양 답답하니 한국,동양에 와 사십시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그래도 그만한 크기와 귀하고 고매한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이 용도 목사님 전체를 덮고 있다면 부득이 우주 선포와 연결이 안 될 수 없다고 저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  회 : 이제 유동식 선생님께서 여기에 대해서 고견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유동식 : 이용도 목사님하고 김재준 목사님,함삭헌 선생님은 같은 해에 탄생했고 100주년을 같이 맞이하는데,다른 분들은 활동한 것이 반세기가 넘지만 이용도 목사는 3-4 년이야. 함석헌 선생과 김재준 목사는 자료가 무척 많아요. 몇 십 권씩 되도록 남겼지만, 이용도 목사님은 합쳐야 한 권 정도인데, 그런데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과 같은 신앙의 길을 걸었고,같은 문화 배경,같은 문화 속에 살았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용도 목사님이 젊어서 몇 년 활동하다가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영국의 쉘리 생각이 나요. 20대에 그냥 노래 부를 만큼 부르다가 죽었단 말이지. 그렇지만 쉘리를 연구하려면 영문학사를 통틀어야 그것이 조명이 되고 또 그만큼 명문학사에 영향을 주었는데, 앞으로 연구방법을 위해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이용도 목사님의 조그마한 자료를 제각기 자기가 가지고 있는 틀로 해석하고 확대해 가거든. 나 자신도 풍류도 입장에서 자꾸 분석하려고 하고. . . . 앞으로 제일 좋은 코멘터리가 될 수 있는 자료는 함석헌 전집과 김재준 전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이해하는 한 세 분의 사상적인 골격은 같다. . .  역사의식,복음에 대한 열정,그 다음에 시인이라는 세 골격이 같거든.

앞으로 이용도 목사님이 가지고 있었던 - 신비주의라는 말이 제일 가깝겠죠,그리스도라는 말도 안 쓰고 꼭 예수라고 했으니까. 그분의 글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모두 예수인데 - 그 인간 예수에 대한 사랑,아가서를 좋아했다고 그러는데, 그것도 일종의 인간적인,에로스적인 사랑에 의해서 아가페를 이해하려고 했던 놀라운 성격이 있는데,그런 심미적인 신앙의 세계, 이것을 어디서 볼 수 있느냐? 난 함선생 시집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사회참여,역사의식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이 어른이 그냥 살아서 계셨더라면 필경 신천옹(信天翁)과 장공(長空)이 민주화 투쟁에 대표노릇을 했을 적에 이용도도 같이 끼었을 게라 -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도 시에 있어서,세 분의 시를 분석하면 세 분의 시 내용은 같은 그리스도 신비주의 내지는 예수 신비주의 핵심에서 흘러나오는 시들이예요. 우연치 않게 세 분이 같은 해 태어나고 같은 해 100주년을 맞이하였는데,앞으로 새로운 연구방법으로는,세 분을 묶어서 상호이해를 하면 시무언의 삶에 비추어서 신천옹도 더 깊이 이행할 수 있고 장공도 이해할 수 있지 않나,그리고 그 두 분의 사상을 가지고 이용도를 이해하면 더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방법론적인 생각이 드네요.

 

 

심일섭 : 지금 자꾸 단명에 대해 안타까워하는데 그것은 사실이고,역사적 인물은 대개 사료를 많이 남기고,그렇지 않으면 삶으로 계속해서 후대를 일깨우고 있으니까. . .  이용도 목사님은 종교교육부 간사도 하시고 어느 정도 신학적인 소양도 갖춘 분이기는 하지만, 그런것 보다도 그분의 치열한 삶을 거울삼아서 한국 교회의 삶을 비추어 보면 밑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 그런게 하나 중요하고,몇 년 살지 못했지만 위인들의 일생을 압축한 것과 같으니까 삶이 중요하고 그것이 엑기스일 것이다. . .  남긴 자료는 없으니까 할 수 없고, 혹시 연구기관에서 그분을 만났던 분들,감화를 받았던 분들을 찾아서 최대 한으로 자료를 채집하는 일이 대단히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김승혜 : 저는 자료가 없다고 전혀 생각을 않거든요. 이 정도 있으면 상당히 많은 거예 요. 그리고 이론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려면 모를까,삶을 보려면 일차 자료가 이 정도 있으면 좋은 것이지요.

 

 

유동식 : 살아있는 이들의 증언을 채집하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요 몇 년 사인데,이호빈 목사 세상 떠났고,박재봉 목사 세상 떠났고,한준명 목사 떠났고,박승걸 장로 떠났고,이제 유일한 생존자가 피터스인데,그의 증언은 그 당대에 기록한 것이 책으로 나 올 정도로 있고,지금 만나서 이야기해 봐도 새로운 이야기는 없고. . .  이제는 더 찾을생각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 . 

 

 

김희방 : 심일섭 교수님께서 얘기하신 것 가운데서,그분이 오래 살 수 있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한경직 목사님 같은 이도 폐결핵을 앓으시고,변종호 목사님까지도 70, 80까지도 사신 분이예요. 예수께서 젊은 나이에 “우리가 죽으러 가자” 하셨을 적에,우리가 사도신경에 보면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만,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난을 자초한 것이지요. 십자가를 스스로 멘 것처럼요. . 

예수님과 같이 이 목사님도 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 몰라요. 그러나 예수를 사랑한 나머지 그 열정을 파고들다 보니까 죽음을 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이용도 목사님 같은 분은 정신적 순교자에 속한다고 보는 데 공감합니다. 그리고 짧은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예수의 말씀이 전 인류에게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것처럼,이용도 목사님의 한마디가 확대되도록 연구를 해야 하자 않을까 생각이 되네요.

 

 

 

전후기 삶의 연속성 문제

 

 

사  회 : 연구방향에 대해 말씀하신 .것들 중에 재미있는 부분은 짧은 생애를 길게 유추해서 바라보자는 시각과 짧은 생애를 그분의 삶이 충분히 표현된 정수로 보자는 입장으로 대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구자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용도 목사님의 공생애라고 할 수 있는 부흥사 활동 3년 동안의 삶의 모습과 그 이전의 삶의 모습이 외형적으로는 아주 극단적으로 나타난다는 거지요. 이용도 목사님의 전기와 후기의 삶의 일치성 문제,예컨대 전기의 이용도는 독립운동,민족에 대한 사랑,정치적인 의식까지 갖고 계신 분이었는데 후기엔 영성과 천적애(天的愛)를 얘기하면서,때로는 일본의 어떤 것까지 다 포함하려고 하는 사랑의 운동을 보이고 있었는데,이런 모습을 전혀 다른 것으로 봐야하는지 또는 긍정적으로 연결해서 봐야하는지. . .  여하튼 이문제가 적극적으로 설명되지 못하고 있는데,많은 사람들은 이 점을 궁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본 주제에 대해서 고견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승혜 : 저는 연속적이라고 봅니다. 그분의 글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연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인간적으로 변선환 목사님을 좋아합니다만,변선환 목사님께서 이용도목사님을 에카르트와 비교하시면서 “마음속에 천국만을 알고 있었고 바깥에 사회적인 것을 모른 것이 아닐까”라는 비판을 하셨는데, 변선환 목사님께사 이용도 사상에서 사회 을 너무 보지 않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었거든요.

구체적으로 이용도 사상 안에 사회성이 항상 강하게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음 세 가지 점에서 생각했습니다. 첫째로는,통천교회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악마를 보고 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이차 사료를 보니까 그때 통천교회가 상당히 분열되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교회 내의 현실,구체적으로 자기가 맡고 있던 교회현실 속에서 분열을 극복해야 된다는 강한 의식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두 번째로,많이 인용되는 내용입니다만,“예수님 우리 아시아로 오십시요”라고 하면서 이용도 목사님은 약하고 고난 당하는 우리 만족이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라는 처절한 말을 하는데,이 말을 통해 그가 민족적 고통 속에 구원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식민지 아래에 신음하고 있었던 민족에게 신앙적 가치와 의미를 보는 사회성을 상당히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본 교회의 역할입니다. 교회를 “폭탄 제조공장”에 비유합니다.'그래서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터지고, 폭탄 이 터지게 되면 자신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교회에서 해야 할 역할,폭탄과 같이 먼저 터져 죽음으로써,또 교회 전체가 우라 사회에서 폭탄과 같이 자신이 스스로 터짐으로써,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을 널리 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그의 사화의식이 굉장히 강했다고 봅니다. 사회의식의 형태가 바뀐 것이지 사회의식 자체는 계속 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그는 사회변혁적 신비사상과 영성을 가졌다고 봅니다.

 

 

유동식 : 제가 이야기한 방법론 중의 하나가 그건데,이용도 목사님은 간단히 “우리 민 족이 고난을 지고 갑니다” - 자기 개인의 고난에 비추어서 민족의 고난,식민지 피지배를 한탄하는, 짧은 글이지만,그. 다음해인 1934년에, 그 고난의 역사를 성서적인 입장에서 “한민족이 세계 고난을 지고 간다”고 한 것이 함석헌 선생님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의 역사』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방법론으로 제시한 대로,이용도 목사님의 그 짧은 글을 이해하는 제일 좋은 코멘터리는 같은 시대에 방대한 책으로 나온 함 선생님의 풀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승혜 : 저는 그 방법론이 도움이 되리라고 보면서도 조금은 조심해야 된다고 즉각적으로 느낍니다. 시대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시대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거예요. 그러나 영성이라는 점에서는 각 사람이지닌 고유한 색깔이 있거든요. 따라서 이용도의 영성을 다른 두 분의 영성으로 해석을 할 때 까딱하면 색깔이 혼돈이 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배경으로 보는 것은 좋지만 영성 자체로는 각자 고유의 것으로 연구해 야 되지 않나 하는생각이 듭니다.

 

 

유동식 : 그건 인정을 하는데,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지금 짧은 한 마디를 가지고역사의식을 전개하고자 할 때 필자가 자기 철학을 주입하고 만다는 거예요. 거기에 비하 면 같은 시대의 민족사 속에서 한민족에 대해 성서적인 입장에서 인류의 고난을 지고 간다고 본 그분이 가장 가깝다고 보는 것입니다.

 

 

김승혜 : 시대적으로는 맞습니다.

 

 

유동식 : 내용이 또 같은 내용이구요. 그런데 짧은 글을 가지고 논문을 쓰고자 할 때 논자들은 자기의 것을 너무 많이 전개시켜 버리고 만다는 거예요. 비교연구도 좋고, 어떤 주제연구도 좋은데,결국은 자기가 만든 신학의 틀 속에 밀어 넣고 마는 그러한 위험 성이 있기 때문에,오히려 가까운 주석은 같은 역사 속에서,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같은 생각을 했던 그 분들이 가깝자 않느냐 -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것뿐이 예요.

 

 

심일섭 : 유 선생님의 방법론은 참 좋다고 저도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서 고고학에서어떤 유품을 발견할 때도 딱 하나만 찾아내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어떤 사실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부장물이 그 주위에 몇 개가 나와야 학계에서 공인이 되는 것처럼,역시 그런 의미에서 그 주위에 같은 시대에 살던 분들을 충분히 활용하고,또 서로가 증명하게 하고 하는 것은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윤구 : 장공이나 신천옹이라는 두 분을 놓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없는데,이용도 목사님을 비교하는 데서 김교신 선생님을 빼놓는 것은 옳은 건가. . .  짧게 살다 간 분으로 생각하면 김 선생님은 좋은 비교도 되고. . .  또 김교신 선생님은 교회 바깥에서 움직이셨는데, 이 목사님은 쫓겨나시기는 했어도 본인이 교회를 떠나시고 싶은 생각이 한번도 없으셨잖아요? 그리고 나서 밤낮 우셨지. (웃음) 그리고 김교신 선생님은 “성서만으로” 그러고 사셨어도,실제로 사신 것을 보게 되면 해방 전에 마지막까지 장렬하게 노무자들과 일하시다가 병을 얻으셨는데, 이런 분도 같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구요. 나는 짧게 사셨다는 것,절대로 비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짧게 사셔서 더 좋았다,오래 사셨더면 오히려 이용도 아닌 다른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이렇게 생각이 들거든요. (웃음)

 

 

사 회 :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습니다. 세 번째로 제기한 삶의 연속성 문제에 대해서는 선생님들 모두 이용도 목사님의 삶에 연속성아 있다는 것을 긍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제 마지막으로 평소에 가지신 생각을 짧게 나누면 좋겠는데요,이윤구 박사님이 서두에 말씀을 꺼내셨지만,21세기 오늘 이 시점에서 다시 이용도를 꺼내서 이야기하는 의의가 무엇인지, 그분이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하는지,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후학 들을 위해서 의견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동식 : 난 이용도 목사님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자기 일생을 철저하게 살았다는 것,“내가 사는 것은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시는 것이라. . . ” “나는 주님이 굴리실 공입니다” - 빌 공자 공(空)과 둥근 공(球)을같이 썼다는 것은 아주 흥미있는 일이예요. 그러면서 철저한 생명운동이라고 볼 수가 있겠는데,그러면서 갈라디아서에 있는 말씀대로 “믿음만으로,예수만으로” - 이 말씀으로 비추어 보니까 현재 교회는 모두 지저분한 밥장사꾼이라, “예수는 없고 죽은 시체에 걸 쳤던 옷을 나눠갖고 있다”,“교회를 기업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분의 글에 나온 것을 내가 기억해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세습화, 큰 교회를 자기 기업으로 해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문제인데,그때 이미 그 말을 그대로 퍼부었다는 말이지. 그것을 그때 꿰뚫어 보았단 말이지. 21세기가 물질만능시대라도 말야,교회가 장사꾼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나. . . .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철저한 복음에 입각한 생명운동인데,그런 점에서 이 어른이 남기고 간 신앙,그것을 연구하고 하나의 신앙운동 내지는 참 생명운동으로 발전 시켜야 하지 않겠나. . .  이 분의 글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  이렇게 신비로운 말씀이 어디 있는가” 하는 글이 있는데,사실 이게 교회의 본질인데,지금 급속도로 타락 해 가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내다볼 때 이 어른의 신앙을 연구해서 발전시키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닌가. . . 

 

 

김승혜 : 저는 에큐메니즘 쪽으로도 생각을 하는데요,사실 저는 가톨릭 신자로서 1930 년대 개신교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인간의 깊이 있는 신앙과 사랑을 보면서 제 자신이 “개신교 신앙이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구나” 하고 놀란 거예요. 이용도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한국 개신교를 훨씬 더 존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순수한 신앙을 살았던 사람들을 서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가장 깊이 있는 에큐메니즘이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말로 대화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공감하고 존경하게 할 때 깊이 있는 나눔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용도 목사님은 한국 그리스도교 전체 영성에 상당히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윤구 : 거기서 조금 더 나가고 싶은데, 21세기가 여유가 있으면 좋겠는데,지금 급박하게 돌아가서 곧 죽을 것 같은, 죽어도 같이 폭발하는 그런 시점에 와 있는데, 이 목사님께서 오신다면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어떤 말씀을 하실까. . .  일차적인 자료들만 가지고 “이 목사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 이런 식의 이야기말고, 오늘의 시점에서 그 분을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나는,교회에서 욕먹을 소리일지 모르지만,불교인이 들어도,이슬람이 들어도,또 어떤 종교인이 들어도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새 복음이 이 목사님 조명해서 안나올까,그런 생각입니다.

요즘 젊은 학생들한테 내가 하는 말이 “우리는 부끄러운 시대, 한이 맺힌 시대,꽉 막힌 시대를 살았지만,너희는 좀 넓게 길게 보고 살라”고 하는데,이 목사님을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아닌지 몰라도, 그분의 신앙의 깊이, 깊은 연못에서,“오늘 오시면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실까”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사  회 : 잘못하면 이용도 목사님을 너무 지나치게 숭배하는 쪽으로 갈 수도 있겠지요.심일섭 교수님은 처음부터 비판적인 말씀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 . .

 

 

심일섭 : 몇 백년 후는 모르고,역시 지금까지는 좀 미화하고 침소봉대하고 살을 찌워야지 후대에 가서 빼내더라도 빼지. . . (웃음)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지금은 계몽적인 의미에서 최대한으로 미화하고 그랬으면 좋겠고. . . 

제가 처음에 대학원 세미나 이야기를 했지만,이용도 복권운동을 우리 대학원생들이라도 하자고 그랬고 저도 참여를 해서 감리교 교단에 청원서를 내서 그것이 결의가 됐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제가 미국에 있을 때,방학 동안에 기숙사 비워야 되니까 외국인은 한 곳에 몰아서 있었는데,그때 그 넓은 도서관에서 서구의 사상가들을 정리하고 이용도 목사님의 신비적인 것을 정리해서 맞는 것을 그어보니까 상당히 맞아요. 그때 “참 세계적인 분이구나” 하고 느끼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용도 목사님을 흔히 부흥사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때 교회 파괴운동가였어요. 전통적인,흔히 말하는 삯꾼,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교회를 때려 부수는 다른 면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고. . .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보면 예수님이 갑자기 들어닥치니까 예수로 잘 해먹던 종교지도자들이 당황을 한 거예요. 그래서 빨리 나가라고, 밀어붙이고, 그래도 안 나가니까 재판을 걸어 추방을 하잖아요. 한국교회가 그런 형편이 아닌가. . .  지금의 교회는 예수와는 너무나 떨어져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우리교회를 사랑하면서 외쳤던 이용도의 음성을 생각하면서 예수를 다시 교회로 모셔들이고, 영성의 회복을 이분을 통해서 서로 격려하고 새 힘을 얻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김희방 : 이용도 목사님은 짧게 굵게 사신 분입니다. 안병무 박사님이 이호빈 목사님 3 주년 추모 모임에서 하신 말씀가운데 한국의 기독교 역사 100년이 넘었다고 하지만 이 용도 목사님보다 나은 분이 없다. . .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데 이용도 목사만큼 짧게 굵게 사신 분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때까지 사셨다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말을 했을까? 여러 분들이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만,30년 대 돌아가셨기 때문에 지금 살아 계셨다면 방대하고 깊이 있는 신앙과 사상을 이야기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지금 인류와 교회에게 필요한 영성의 문제랄지 교회 개혁,생명운동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그가 남긴 유산들을 가지고 찾아낼 수 있는 귀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  회 : “이용도 신앙과 사상 연구회”가 발족된 이래로 지금까지 이용도 목사님에 대한 새로운 조명들이 활발히 되어 왔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만,신비주의뿐 아니라 영성운동가,성령운동가,교회개혁가,동양적인 영성,토착적인 영성가,포스트 프로테스탄트의 사상가 등등의 이야기가 있는데,주관적인 평가가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이용도 목사님을 조명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새로운 시각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이용도 목사님을 페미니스트,예술사상가로 보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로운 평가와 함께 문제제기도 나왔습니다. 오늘 좌담회 내용이 후학들에게 읽혀지면 새로운 감동으로 이용도 목사님을 바라보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좋은 이야기를 나눠주셨는데,한국교회에게 좋은 열매를 맺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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