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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독립운동의 실체_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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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09-07 12:43 조회1,2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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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 이용도 독립운동의 실체

 

 

이상윤 목사(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총무)



     원래 저에게 주어진 강연제목은 이용도 독립운동의 실체인데 오늘 보니까 이용도 독립운동이군요. 약간 차이가 나는데 대체적으로 이용도 독립운동관련 자료들이 잘 정리 된 논문이군요. 저는 처음 논찬을 부탁받았을 때 문제의식은 첫째 시대정신이 반영된 해석을 내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84년 쯤 해서 이용도 목사 평전을 쓸 때는 변종호 목사의 연구에서 벗어나 그 시대의 언어와 논리를 가지고 시대의 코드를 반영해보자는 것이었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이용도 성령운동을 오순절 은사 운동에 빗대어서 부흥운동보다는 성령운동이라는 코드에 맞추어 해석하자는 것이었지요. 오늘도 같은 맥락인데 역시 이용도 전기를 쓰신 변종호 목사는 독립운동을 보는 시각이 애국입니다. 이는 자유당 말기의 어떤 시대적인 사조가 스며들어 있는 용어지요. 일제강점기를 보내는 동안 한반도와 주변국에서 항일독립 투쟁을 펼쳐간 세력들은 결국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양분되었습니다. 가령 3.1 운동을 보는 남쪽과 6.10만세 사건을 평가하는 북측의 견해가 일정하게 달랐지요. 반제해방 투쟁으로 보는 눈과 해방 후 분단으로 치달려간 세력들이 이미 상당한 거리를 두고 각각의 견해를 가지고 보고 있었지요. 남한에서 3.1 운동을 높이 쳐주지만 사회주의 북조선에서는 6.10 만세를 높이 쳐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차이인가. 반제 반외세 항일 투쟁의 지평이 다른 것을 반영하는 것인데 어찌되었든 상당한 역사인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1919년의 3.1 운동은 만세시위를 중심으로 독립을 청원하고 전 민족적 자주역량을 투입한 운동인데 반하여 사회주의 민중투쟁으로 이미 올라서있는 6.10만세 사건은 민중이 중심에 있지요. 차이는 민족주의 카테고리가 계급의식 이전의 기반위에 서 있다고 한다면 그 후에는 상당한 정도의 계급적 당파성을 갖고 운동을 추동했다는 분명한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시대가 다른 것인지 계급의식이 성숙해지고 있는 것인지 명확치는 않지만 이른바 시대의 코드가 운동의 역량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 30년대는 어느 정도 근대적 시민계급으로서 민중이 성장하여 국제 프롤레타리아 해방전선 안에는 민중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는 무산자 붉은 혁명을 성취하였고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에서는 인도네시아 인디아 등지에서 민족민중운동 전선은 코뮤니스트가 주도권을 잡아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민중운동의 선도적 위치가 아시아 민중해방운동 속에 용해되어 나타나 있지요. 이러한 코드에 맞추어 읽어 보면 이용도 목사 역시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사건과 사고가 달라집니다. 3.1운동 이후 이듬해부터 간여한 사건이 다릅니다. 기원절 사건에서 출발하여 조직적인 뼈대가 든든해지고 조직적인 민중이 개입한 ‘조선독립주비단 사건’이나 학생운동이지만 ‘태평양회의 사건’ 등은 양상이 다릅니다. 1919년 3.1운동이 민족적 의지에서 발생했다면 그 후의 사건들은 민중해방이라는 지향점이 분명한 이념을 가지고 사건이 등장합니다. 민중이 조직화되고 유인물의 량이 넘쳐나고 조직적 대응을 시도하고 사건은 보다 세분화되고 다양해집니다.

 

 

 

     오늘 토요일 이용도 신앙과 사상연구회 모임에 불러주셔서 참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1984년 6월에 기독교사상에 이용도 평전을 썼는데 지난 1997년에는 이용도 신앙과 사상연구회에서 ‘피터스 목사 본 이용도’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한결 같이 이용도의 신앙 사상은 역시 삶으로서 온 몸으로 살아가면서 교회를 뒤집고 민족도 바로 만나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대중의 영성인 성령 충만과 에큐메니칼 비전인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 이 시대의 코드라고 생각합니다. 체험적인 신앙에 기초하여 그리스도 신비주의 신앙을 갖게 되고 신앙내면의 요구에 충실하여 살자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니까 연구대상으로서의 이용도보다도 그리스도교 삶의 소명으로서의 ‘예언자 이용도 선구자 이용도’를 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이용도 신앙과 사상을 갖자는 것은 여전히 햇갈리는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계승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신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자꾸만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고 현실과 이상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신앙과 소명의식 사이에 있는 갈등구조지요. 어느 시대 어느 인간이나 다 같이 안고 있는 문제겠지만 인간은 역사라는 문제 앞에 서기 까지 상당한 정도의 준비와 값비싼 희생을 치르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덧붙여서 인간적 자질과 용기도 필요하지요. 다가오는 시대를 준비하고 시대정신과 마주치는 가운데 이용도 목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역할로 결정되었지요. 십자가의 고초를 당하는 인간의 고뇌를 아십니까? 깊은 고통의 삶을 살아야하고 현실의 요구와 성취가 박탈당하는 그런 고통의 세월을 겪어야 하는 것 이지요. 이용도 목사에게 독립운동 경험은 훗날 폐결핵 말기에 닥쳐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감안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삶의 막중한 무게를 그 순간순간마다 최선을 다해가면서 마주 싸웠던 것이지요. 마치도 아버지 술심부름으로 한밤중에 나섰다가 악귀와 대면하고 대경실색하는 것이 무슨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듯이 그저 그렇게 언제나 열심히 무심결에 내달리는 힘찬 발걸음 앞에 성령체험도 죽음도 그리고 삶도 한 겹의 줄이 되어 다가왔고 지나쳐 갔던 것이지요. 일제강점기였고 탈식민지 문제의식을 지닌 채 투쟁하면서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갖게 된 그가 시대적 소명을 민족해방과 더불어 민중적 기초위에 살아 낸 것입니다. 30년대의 일제는 이미 조선을 넘어 만주로 중국으로 진출하였고 잔혹한 탄압 체제를 운영하면서 강도 높은 제국체제를 구죽하고 있었지요. 그는 그 같은 체제 아래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성령받기 전에는 교회 주일학교 운동을 했지만 성령 받고부터는 부동사가 되어 활동하였는데 그러면서 미국 선교사들의 지배아래 놓여 있는 교권주의적 교회 생태를 피부로 체험했겠지요. 제가 보기는 이용도 목사에게 있어 이런 문제는 너무 짧은 생애의 한순간과 같았습니다. 그것을 소화하고 정리해내기에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았지요. 올해로 104세를 살고 게신 미국의 피터스 선교사는 8년 전 보내온 편지에서 ‘지금도 여전히 이 용도를 환상 가운데 맞이하면서 현재 시제로 된 영문 편지를 보내주었습니다. 이용도 그 단아하고 민중적인 소박한 모습 깨끗하게 빨아 입은 그러나 결코 화려하지 않은 두루마기 속에 쌓여 있는 입가에 미소가 스치듯 지나가는 죽은 이용도를 그는 선연히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60년도 넘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정이 배어 있었습니다. 1930년 초반 이용도는 장로교회에서 문제시되어 '어린양 혼인잔치'나 '입신'(유체이탈) '피가름'으로 이어지는 스캔들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단적 파행에 중심에서 있는 이용도를 살리려 피터스 목사는 애를 썼습니다. 어찌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한편 감리교는 조용했지요. 겨우 경성교역자회의에 사직하고 그나마 조금 받던 생활비도 못 받게 되고 말았지요. 그러나 입신녀 유명화와의 주님 존칭 사용으로 한준명의 어린양 혼인잔치에 대한지지 입장은 철회하지 않았고 해서 의리 지키다가 곤욕을 치루는 꼴이 된 거지요. 친구로서 동지로서 신의를 다 했는데 결과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이단 치리의 역사적인 사례로 남습니다. 신비주의 신앙 열정 그리고 십자가 신비주의 같은 식으로 설명하지만 훗날 성행하는 오순절 성령은사운동과도 일정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의 스타일을 말한다면 그것은 정녕 토착교회 냄새가 물씬 납니다. 이용도 목사가 돌아가시고 남은 예수교회는 어떤 면에서 기성 제도권 교회를 과감히 벗어난 평신도 중심의 새 교회였지만 회중적 자유가 넘치면서 결과적으로는 목회치리가 먹혀들지 않는 독립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령은사운동도 강하고 성령체험의 열기도 대단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식어 간 은사운동은 스웨덴보리식의 신비주의 신앙으로 뻗어가면서 장로교 율법주의나 감리교 복음주의에 대항하는 신비주의적인 평신도 교회로서 자리 잡게 됩니다. 강력한 은사주의 신앙운동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박계주 순애보’ 정신은 맥맥히 살아 있는 사랑의 공동체임은 분명합니다. 다만 카리스마 신앙공동체가 카리스마 목회적 지도력은 수용하지 못하고 평신도 중심의 패러다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교세가 따라와 주지 않았습니다. 성령에만 집착한 것이 시대를 이기는 기도운동으로 승화되고 희생헌신 전도능력으로 이어지지 못한 평신도 정신이 앞서간 교회였지요. 이 점에서는 한국교회에 민주적 평신도 사상과 연관지어 훗날 민중 신학을 탄생케 하는 광맥과 이어집니다만 역시 한국의 주류 교회나 신앙의 패턴이 목회자의 카리스마가 먹히고 권위주의가 보장받는 대중교회였던 것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예수교회는 이점에서 권위주의적 카리스마를 대이어 세워 목회구조를 조직화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지요. 결과적으로 교회를 지탱해 주는 물적 인적네트워크 구죽에 실패합니다. 민중적 취향이 지도력을 상실할 때 경험하게 되는 민중적 좌절에 다름 아니지요.

 

   

    1978년 감신대는 공개적으로 ‘이용도 목사 연구 심포지엄’을 갖고 교수들의 연구논문을 발표합니다. 그때까지는 변종호 목사 한분만이 오로지 이용도 목사연구에 40년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용도목사의 모교에서 그렇게 나오니까 때마침 불던 고속성장의 부동운동에 이론적 결핍을 채워주는 호재로서 큰 기여를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교회의 이용도 연구 붐은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이용도 목사연구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또한 많은 수의 대학원생들이 석사학위 과정의 우수한 연구논문을 내어 놓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연구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이신 이형기 목사님의 연구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이용도 생평연구에서 차지하는 항일 독립운동관련 자료와 연구결과가 전무 하였는데 오늘 이렇게 채워졌군요. 19세부터 시작하여 23살 때 까지 고생 고생하던 이용도 목사의 항일 투쟁 기록을 대하니까 78년도 송길섭 교수의 논문과 다시 보총해서 내 놓은 ‘한국교회 3대 성좌’ 라는 단행본보다도 내용이 튼실합니다. 1900년 생으로 19세 되던 해 3.1 운동을 빌미로 작심하고 뛰어든 운동이지요. 그러고 보니까 그분이 독립유공자시군요. 이용도 목사가 받은 재판행형기록이나 일기나 우리가 대하던 그 내용에 추가된 역사자료들은 독립운동사의 자료들로서 신기합니다. 덧붙여 만우 송창근과 시무언의 우정 있는 교제가 항일투쟁에서 찾아지고 더욱 무게를 느낍니다. 1933년 가을 ‘용도야 너는 가고 말았는가’ 하는 마지막 전보를 보냈던 만우 송창근. 그러기에 이들의 깊은 우정은 교파주의가 만연한 요즘의 세태에 더욱 소중하기만 합니다. 만우도 그렇고 시무언도 그렇고 모든 식민지 청년 학생들의 기개가 그렇듯이 투옥당하고 고생하고 항일의식을 뜨겁게 지니고서 시대를 살아간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시련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살았군요. 이 논문은 그래서 항일 독립운동의 시대적 상황과 조우하고 있는 이들 식민지 청년학생들의 투쟁적 삶을 재조명하고 매를 맞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는 처절한 식민지 상황을 일상처럼 보여줍니다. 1930년대의 조선민중의 삶의 정황을 잠시나마 맛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21세기 오늘 여기에서 지금도 우리는 일제잔재 청산과 친미 수구세력에 대한 역사청산을 놓고 대립라고 각을 세우는 형편이니 역사의 아이러니 치고는 지독합니다. 더군다나 그때부터 있던 보안법 제 7조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으니 아직도 우리는 양단된 견해로 격렬한 국보법 논쟁을 겪고 있습니다.

 

   

    이용도 목사 그 시대에 이들은 웅변 논제로 ‘시대가 영웅을 낳느냐 아니면 영웅이 시대를 이끄냐’ 하는 것이었는데 약간은 진부하다 하면서도 역시 영웅주의적 세계관으로는 오늘날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마키야벨리는 지도자는 자질(Virtu)이 맨 먼저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그 다음은 행운을 꼽았어요 이유는 실력만큼 중요한 것을 행운(Fontana)이라고 보았어요. 그 다운 발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대정신(Neccecita)을 꼽았습니다. 시대정신은 무게를 더하고 어리석은 왕들은 이를 외면하는 것이 상례지요. 그 만큼 민중이 지혜롭고 그래야지요. 역사라는 것은 원우연에 다름 아닙니다. 필연에 너무 연연하면 요령 없는 교조주의자가 됩니다. 인간 삶은 역시 드라마이고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지요. 역사가 이처럼 한 개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오면서도 원우연의 신비처럼 가볍게 방기해버리는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 대통령 실력으로 합니까? 시대가 인재를 부르고 천재가 시대를 외면하지요. 그것이 독선이 되고 자가당착이 되어 악순환합니다. 다만 여기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기독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존재는 투쟁하는 인간이라는 것이고 한 순간 한 순간 선택의 기로에 직면한다는 것이지요. 미친 광기와 우연의 기묘한 결합 이것이 역사를 풀어나가는 모티브라는 것인데 대단하지요. 물론 투쟁하는 인간은 고뇌하면서 선택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로고 부릅니다. 시대의 소명 말입니다. 그것이 역사이고 개인을 뛰어 넘어 역사의 바다로 대해로 나가게 하지요. 1929년 가을 이용도목사는 평소 존경하는 송도고보의 교장이신 왓슨 선교사롤 만납니다. 왓슨은 그를 불러 미국유학을 권합니다. 그때는 왓슨 선교사의 힘으로는 미국 갈 수 있었습니다. 남감리교 출신이니까 밴더빌트나 SMU 정도는 갈 수 있지요. 그때 후배 이환신 목사에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그래 내가 미국 가서 뭐 하겠어 버터 먹고 며칠 더 살면 무엇 하느냐 나는 거저 굵고 짧게 살기로 결정했지' 된장국 끓여 한상 둘러 앉아 풋풋한 민중적 삶을 살아가면서 가난한 설교자로 회중들과 더불어 그렇게 목회하고 기도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했던 이용도 목사는 그 후 3년을 더 살고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과의 대결을 지독한 가난과 떨칠 수 없는 폐결핵과 마주하면서 더불어 조선민중의 종교적 영성에 목숨 걸고 살았던 그는 그래서 더욱 더 철저한 아주 철저한 가난의 영성으로 반교권주의자로 자기식의 삶의 스타일을 고집스레 지키다가 갔습니다. 모든 전기 작가들이 주목하는 영웅과 시대정신과의 조우는 이처럼 예언자적 상상력을 통해서 맛보는 내면의 깊은 심연입니다. 천재들의 광기와 현실적 좌절 시대를 거스르는 광기가 백미 입니다. 이것을 민중혁명의 열기에 고스란히 다 담아내고 있던 항일투쟁의 전사 이용도 목사의 실체를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용도 항일운동 정신에 토대를 둔 반교권주의적 발상과 존엄한 심판 그리고 반 선교사 주의적 행태와 관련해서 민중교회를 구성해간 내력을 찾아봅니다. 성령 받고 은혜 받은 후 영육간을 철저히 구분하고 예수의 가난의 영성을 되찾아 청빈하게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이는 민중지향적 목회자로서 자기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전적으로 헌신한 결과에 다름 아닙니다. 항일독립운동의 반항적 시대정신과 반교권적 이단 독립교회 운동으로 귀결된 이용도 말년의 행태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식민지 현실교회에 안주하여 무기력하게 주저앉고 만 현실 교회를 질타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교권의 압박 속에서 운명처럼 그를 따랐던 정동파의 거두 김광우 목사에게 너는 조직을 세우고 힘을 기르라고 당부한 적이 있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성경적 믿음 안에서 영에 속한 사람이었고 시대적 요청인 항일 독립운동을 통과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새롭게 할 비전을 가지고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지도자로서 영웅적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선다 싱은 식민지 영국에 대해서 불경한 발언이나 반항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가난하고 고독한 전도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신비주의 논쟁의 발단이 된 히말라야 성자 마하리시를 만났다고 우깁니다. 또한 또 다른 논쟁의 단초를 제공하였던 티베트 전도에 심취하다 실종되었지요. 허나 우리의 이용도 목사는 어떻습니까. 일제의 잔혹한 탄압 속에서 네 차례나 투옥되면서도 꺾이지 않고 식민지 청년답지 않은 기백과 정신을 한데 모아 설교하고 전도하면서 참된 자아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해방과 자유인 것을 부르짖어 선포하였던 청년설교자 이용도는 예수의 생애를 방불케 하듯 불과 33세의 나이에 도달하자 이 세상을 떠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연속성 문제입니다. 초기 반제투쟁의 방향과 후기 부흥 운동과의 연결점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부정적이지요. 항일투쟁에서 물러나 교회라는 또 하나의 대중작업으로서 부흥운동에 목을 건 이용도는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었지요.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하지 않고 다스렸고 동지애적인 결속력을 가지고 청빈의 깊은 가슴은 지닌 채 열렬한 복음의 전사로 살고 있었지요. 이미 혁명의 열정을 타계적 신앙으로 채워 놓고 있었습니다. 일제와의 투쟁 대신 기독교 신앙에 매진합니다. 분명 다른 현실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의식구조나 행동 심리적 측면에서 보자면 항일 투쟁과 설교와 기도행위는 동질적인 것입니다. 같은 열정이고 같은 비전이고 같은 동기입니다. 기도 헌신 희생 봉사의 삶은 투쟁적이지 못하면 이루기 힘듭니다. 다만 종교적 영성 안에 내면화된 것이지요. 훗날 현실 교권세력과 대치하고 비판적 투쟁으로 체제나 지키고 세력이나 유지하려는 이들에게 열정적 선교비전과 희생적 삶의 열광주의로 대항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용도 항일 정신이나 반교권적 저항정신은 일맥상통합니다. 초기 저항정신의 내면화가 기독교적 영성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일제와 교권과 대립하고 민중과 형제애적인 결속을 바탕으로 해서 투쟁하는 인간이 자율적 인간이 탄생한 것입니다. 일체의 지배체제를 거부하면서 최소한의 지배만을 기대하는 자유인 아나키스트적인 인간상을 드러냅니다. 물론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탈식민지 의식으로서의 민족 민중의 지향점이 확실하지 않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일견 수긍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미 민족구원을 복음으로 품고 민중구원을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사건 안에서 품고 성육신의 고통을 안고 가는 십자가 신비주의지요. 다만 지상에서의 가시적인 혁명적 투쟁대신 내면적 자유와 영성적 비전을 간직한 채 투쟁의 삶은 계속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역시 이용도는 신학은 역시 신학적이기만 합니다. 따라서 분명 여기에는 연속성이 없고 단절이라는 기존의 견해를 극복하고 더 이상의 양보 없이 내면적 일치며 영적 상합이라는 형식과 틀에서 두개의 서로 다른 주제들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주 정교히 말입니다. 이것이 항일 독립투쟁과 성령운동과의 대립 갈등 구조를 해석해 보자는 본의도 입니다. 운동적 측면에서 경험적 측면에서 정치행동과 영성적 자기결단은 하나의 궤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정체성에서는 문제가 됩니다. 즉 항일 투쟁과 교권투쟁의 두 가지 과제는 두개의 축이 공존하는 거대한 타원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하나의 둥근 원의 다른 축에서 다른 축을 바라볼 수 만 있다면. 이른바 형용모순이고 동질적 갈림길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보자면 반제 항일 반 교권주의는 하나의 동기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인간과 환경의 갈등구조이고 대척점 같은 것이지요. 어떤 면에서는 역학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항의 패러다임에서 보자면 하나의 지향점을 가진 두개의 서로 다른 동축의 힘이 있는 셈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치열한 항일의식의 발로로서 나타나는 투쟁의 형태는 결과적으로 가난을 물리치고 질병을 이기는 성령체험 즉 누미노제를 통하여 신적 현실을 인간 현실로 받아들이는 극단과 극단이 마주치는 관계라는 말이지요. 정치적 상상력과 종교적 영성이 하나의 동축에 걸려서 인간해방과 인간구원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죽음으로서 다가오는 불가항력적인 한계상황을 혁명적 역동성과 신적 계시로 맞아들이고 있는 순교자의 영성 십자가 신비주의의 원형은 나자렛 예수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면서 부활로 이어지는 것이죠. 죽음과 삶이 하나의 나선형 사슬에 꿰어서 함께 돌아가는 환상의 극치 이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브레이크드루(breakthrough) 탈출이지요. 일상의 일탈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듣게 될 ‘예수는 아나키스트다’ 하는 유명한 명제를 곰곰이 되으면서 시대의 코드와 하나 되려는 한국 신학의 몸부림을 생생히 체험해 봅시다. 기대가 큽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나키스트 이용도’에 대한 논찬

 

 


정지련


 

 

     아나키즘과 이용도. 저항의 대명사처럼 보이는 아나키즘과 기도의 사람으로 비쳐지는 이용도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최대광 박사의 시도는 매우 신선해 보인다. 이용도의 사상을 아나키즘의 범주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념이 실제로는 하나임을 보여주는 통찰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최대광 박사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정치적 통제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이 정치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종교사 속에서도 존재했으 며,종교적 아나키즘이 실제로는 현대적 아나키즘의 효시임을 밝힘으로써,아나키즘과 종교(영성)를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님을 암시한다. 실제로 양자는 방법론은 다르지만 진정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연합할 수 있다. 지극히 세속적인 아나키즘과 지극히 종교적인 신비주의가 실상은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용도의 삶과 사상 속에 아나키즘적인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용도의 아나키즘은 정치적 아나키즘과는 분명 다르다. 최대광 박사도 이점을 지적한다、그리고 이용도의 아나키즘을 ‘영성적 아나키즘’으로 부르면서 세속적 아나키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영성적 아나키즘이야말로 세속적 아나키즘이 갖고 있는 문제인 ‘내면의 경쟁 욕망’을 극복하면서도 진정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길로 보는 것이다.

     본인은 최대광 박사의 논지에 동감하면서도 이해를 위한 두 가지-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오는-물음을 제기해 본다.

     첫째, 교리와 신조,그리고 조직 중심의 남성적 종교운동과 체험적,시적, 공동체 중심의 여성적 영성운동이 반드시 대립적인 개념이어야만 하는가? 물론 자유를 억압하며,조직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통제 세력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교리와 신조,그리고 조직 중심의 남성적 종교운동이 반드시 통제 세력과 동일시되어야 하는가? 양자를 상호보완적인 개념으로 볼 수는 없는가?

     둘째, 영성의 사람 이용도가 저항하려 했던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교리와 조직 그 자체인가, 아니면 교권의 횡포인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달 그 자체로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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