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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이용도 신앙과 사상 심포지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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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09-07 13:17 조회5,0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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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수 선교사가 본

거룩한 열정의 사람 이용도

(1901 - 1933)

 

 

이 상 윤 목 사

(신영감리교회)

 

1. 

 

   이 연구의 주된 자료는 1930년대 당시 이용도 목사와 함께 일하며 위로해 주며 살았던 미국인 선교사 피도수(Victor Wellington Peters, 1902-현재)가 1933년 10월  2일 동료 이 목사의 비극적 죽음을 겪고 난 3년후에 비로소 기독교서희에서 발행하고 있었던 영문잡지 코리아 미션 필드(Korea Mission Field)에다 1936년 1월호부터 12월호까지 장장 일년동안 연재하였던  '시메온 한 신비의 한인 크리스챤'(Simeon,A Christian Korean Mystic)과 지난 1996년 6월 22일 한국에서 조직된 이용도목사 신앙과 사상연구회의 요청에 의하여 1996년 10월 현재 미국에 생존해 있는 93세의 피도수 선교사가 보내준 '이용도목사 희상기’ 가 또 다른 주요한 자료다.

    특히 93세나 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타이프 라이터를 쳐서 보내온 이번 희상기의 내용은 깊은 우정과 정성이 배어 있었으며 마치도 천국에서 온 소리같이 생경한 느낌이 가득 풍겨나는 너무나 귀중한 자료였다. 이는 마치도 1937년 중국 연안에서 한국인 혁명투사 김 산을 만나 그의 고난에 찬 혁명역정을 고스란히 담아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한 사회주의 민족혁명가의 일대기를 써준 님 웨일즈가 아직도 노익장을 자랑하며 생존해 있다는 소식만큼이나 대단한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같은 이념의 투사면서도 일본 간첩으로 오인되어 사형 당한 김 산을 1968년 복권시킨 중국공산당의 결정을 보면서 만시지감이지만 감리교에서 휴직 처리된 채 63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이용도 목사의 처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이용도 목사의 신앙사상은 걸림돌과 같은 것이었다. 뜨거운 신앙열정과 신비적 열심은 오순절 성령운동의 하나로서 은사운동에 심취했던 그를 교희가 몰이해하여 이단으로 몰고 마침내 생매장하듯이 버렸던 33세된 이용도 목사의 최후는 너무나 비통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이요, 좌절이었다. 1930년 약관 30세의 나이에 전국을 상대로 하는 성령은사운동의 기수로 등장하여 방방곡곡을 누볐던 그가 33세로 요절하였는데, 어느 누구든 그에게 잡히기만 하면  꼬꾸라지고, 뒤집어지면서 성경의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은혜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30년대 초반 한국교희 사도행전의 한 장을 기록한 존재였다. 또한 어느 누구도 감히 그가 이단이요, 교회의 버림받은 존재로는 믿지 않았고 그의 행적이 옳은지 그른지 보다는 마치도 에덴동산의 중심에 있어 모든 이들의 접근을 거부한 채 화염 검에 둘러 쌓여 있는 비밀한 나무, 생명나무의 존재처럼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아 거룩한 열정에 휩싸이도록 만들었다.

 

    1920년대-30년대의 격동의 동아시아에서 살면서 한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간 그에게서 우리들은 민족과 국가와 교희와 영생을 향한 그의 불타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일제하의 식민지 청년으로서 가난한 장터 소 거간집의 아들로서 성장하여 민족해방과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일제의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고 민족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데올로기의 장성을 넘나들면서 불타는 민족혁명의 열기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던 열혈청년 이용도가 마침내 영생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복음전도의 사도가 되어 가는 위대한 이야기를 어느 누군들 깊은 연민과 동경 속에서 깊이 심취하고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를 둘러싼 주변인물과 교회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수많은 그의 신앙적 순수성을 의심하고 박해하면서 마침내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매장했던 당시 교회모습을 바라보면서 한없는 분노와 좌절을 맛보았고 고통받는 생의 한복판에 서서 교회의 모순과 마주하고 있었을 우리의 절망하던 예언자 이용도를 안타까워하고 동정하면서 마음아파해 하지 않았던가.

 

    나 개인으로 말한다 해도 역시 그렇다. 어느 날 이용도 목사의 존재를 접하게 되면서부터 평전을 쓰던 1984년까지 10여년동안 이용도 목사의 신앙과 사상에 심취되어서 갈바를 알지못하던 내 심령의 갈급함을 해결하였고 영생의 도정에선 사명자로서 교회를 섬기고 회중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뜨거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또한 실로 우연한 기회에 이용도목사 신앙과 사상연구회의 인연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이러한 기회를 갖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돌이켜보면 12년전  영국으로 떠나기 전 2개월 정도 코리아 미션 필드 지에 나와 있는 피도수 선교사의 회상기와 기존의 이용도 연구자료를 한데 모아 인간적 좌절에 굴하지 않는 성령의 사람 이용도를 기술해 보자고 했는데 고백하자면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고 말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성령의 사람 이용도의 인간적 측면에서 그가 직면했던 사건중심으로 엮되 이명직의 아가서 주석서 연구나 예수교회 회보를 편집하면서 문학자적 소양을 갖고 예수사랑에 초점을 맞춘 박계주의 순애보를 발굴하고 이영철 장로님의 부인으로서 생존해 계시는 전철자 사모님을 알게 된 것이 그  당시의 수확이라면 수확이요, 보람이라면 보람이었다. 어쨌든 그의 신앙적 갈등과 고뇌의 깊이를 재어 보자는 의도에서 기독교사상에 두 번에 걸쳐 연재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12년이란 세월이 흘러 바다에 닿았다. 그 사이 이용도 영성과의 만남을 위하여 영국으로 인디아로 유학하면서 중국의 마테오 리치, 인디아의 로베르트 데 노빌리를 공부하고 인디아의 선다 싱을 추적하면서 얻은 많은 자료들과 유익한 인간관계 훗날 기약도 없는 아시아 해방의 신학을 향한 도정에 큰 힘이 되주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기도와 인내 그리고 깊은 명상의 삶을 통하여  보다 깊은 영성적 통찰력 들을 집대성하여 이들과의 새로운 만남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위로이기도 하였다. 물론 아직도 정리도 안되고 부족한 졸고를 누군가가 읽겠는가,  다만 이번에 어찌된 심판인지 피도수 선교사의 입장에서 담겨진 이용도 목사의 생애와 신앙을 정리해 보라는 부탁을 받았다. 여러분들이나 저나 이미 시무언의 이름으로 그의 삶과 사상에 매료되어 버린 지금 우리는 공개적인 자리든, 그렇지 못한 자리든 가릴 것 없이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그와 우리가 얽혀 들어가야만 했던  열정과 감동의 경험을 나누면서 이 짧은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용도 목사를 알고 난 후에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한순간에 알아버렸다. 쉽게 말하면 나의 인생 행로가 확달라졌다. 지나놓고 보면 황량하기 짝이 없었던 그 시절 1970년대에 신학교는 내게 낯설었고 공부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갇혀서 지냈던 고교시절을 뒤로하고 자유분방하고 경쟁적인 대학사희는 부족한 사회성과 소심성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견디어 내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나에게 다가온 그는 가난도 축복이요, 고뇌도 기쁨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하였고 일천하기 짝이 없는 출생신분과 현실을 제어할 수 없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나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해방시키시고 자유케 하시는 존재임을 분명히 알았다. 이제는 무기력한 신학생의 자리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친우들올 사귀고 공부를 하고 한국사를 연구하고 신학사상에 심취되면서 성령역사도 체험하고 비록 가난하지만 사희발전과 교희역사를 바꾸는 일에 눈을 떴고 공익을 끼치고 역사를 변화시키기 위하여서는 안일하게 살면 안된다는 엄연한 현실을 알아버렸다. 나에게 이용도 목사는 고위성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거대한 새 교회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나된 삶에 충실하고 세계적이고 개방적인 신학적 상상력이 날개를 펴고 목희와 선교적 소명에 생을 걸고 나의 모든 꿈과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위로의 힘으로 해결된다는 낙관적 확신을 얻었다. 이를 위해서는 분투 중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사나이다운 삶이요, 그리스도인 다운 용기며, 진실이라는 것도 알았다.

 

2.

 

    알려진바 대로 변종호 목사의 이용도 연구는 질기고도 위험한 것이었다. 질겼다는 것은 50년을 하루같이 그렇게 매달리고 집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겠고 위험하다는 것은 이용도 연구를 독점하다시피 함으로서 이용도 연구의 휘광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모름지기 공부나 신앙이나 사람 나고 연구 났고, 사람 나고 돈 났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목사 되기 전에 인간이 되고 인간성이 되었어야 영성도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지간에 그의 말대로 하자면 그는 끈질긴 연구 노력으로 '쭈그렁 밤송이 삼년 달려있듯이' 그렇게 오랜 세월 마르고 닳도록 끈질긴 집착과 아집 속에 여물어 갔던 것이다. 사실이지 피도수 선교사도 지적하였듯이 한국적 샤머니즘의 변형에 다름 아닌 계시와 환상 속에 날이 지새던 원산 신학파들의 광란의 교제 속에 합류하였던 이용도는 그의 말기적 삶은 깊은 혼돈과 아픔의 상처로서 각인 되었다. 특별히 신앙생활사의 김인서는 능란한 문체와 장로교적인 고루성을 적당히 가미한 채로 퉁기듯이 일갈하는 매서운 공격은 당시 7만도 되지 않던 한국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엄청난 파문을 불어오기에 족하였으며 덩달아 평양 기도단의 행적에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웠던 남궁 혁과 그의 일행들은 오순절신앙은 절실한 바이지만 이용도는 아니라는 의기양양한 주장을 펴서 장로교를 한데로 묶었으며, 감리교회 역시 이용도의 주님이 여자가 아닌가 하는 치명적인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를 몰아붙여 마침내 경성 교역자회의의 휴직목사로 만들었다.

    실제로 이용도는 1931년 가을부터 원산 신학파들과 합류함으로서 한국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동시적으로 이단혐의를 받게 된 이용도 목사는 백남주, 한준명, 유명화, 김성녀 등과 같은 취급을 당하면서 이세벨의 무리라는 최종적인 욕을 먹고 있었다.

    이용도 목사관계자료는 우선적으로 유의해서 보아야 할 것이, 주장하는 측의 입장과 논리가 대응적이냐 아니냐 하는데서 대별될 수 있는데 대표적인 문서가 바로 신앙생활사의 당시 해당사안에 대한 보도태도가 하나있고, 해방후 민경배 선생으로 하여금 장로교 적인 문제인식에서 비롯된 이용도 신비주의 사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부활하였다. 그리고는 1978년 감리교신학대학의 신학과 세계 4호에 개재된 한국교회 신비주의 연구 특집으로 나온 이용도 연구다. 여기에도 역시 혐의점이 되었던 신비주의 신사상의 핵심인 영류문제는 일절 언급하지 아니하고 곧바로 마이스터 에카르트나 십자가 신비주의류로 섞어 버림으로서 이용도 연구의 장애물을 하나 더 추가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나서 존경하는 유동식 박사의 논문 아닌 보고서 형식의 글이었던 '이용도목사와 그의 주변' 이라는 글이 1967년 기상 7월호에 상재되었다. 비로소 좀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이용도 연구의 길잡이가 제시된 것이다. 이용도 연구는 우선 신비주의도 민족주의도 아닌 제 3의 입장 정립이 절실히 요구된다. 곧 교회의 교리적 판단과 입장에 의하여 돌연히 정죄 되었던 그의 신앙사상은 차지하고라도 문제의 핵심인 이용도의 영적 체험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한 영적 투신이 전무하다는 데서 이용도 연구가들은 하나같이 패착하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냉랭하고 메마른 영적 체험을 밑천 삼아 거대한 히말라야 고봉이나 다름없는 이용도 영성을 향해 오르려고만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쉽게 말해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은사는 머리 갖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오체투지하는 것처럼 엘리야의 하나님 엘리사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이 솟아나오지 못한다면, 누미노제의 거룩한 영성적 침잠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낱 영성없는 한낱 종이 위에 쓰여진 먹 물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까짓 신학적 해석학은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아무도 손대지 않는 각양각색의 해석학적 시도는 가상한 노력이다. 더군다나 세계화시대에 영문자료도 내보고 국제학술대회도 가져보고 후학들을 위해서 공개논문대회도 갖자. 그러나 신학적 훈련도 필요하고, 서구신학의 문서에도 숙달되고 전문성을 갖추는 것도 얼마간 다소 필요한 것이 사실이겠으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적어도 성령에 취하고 은사에 매달리는 직접적인 체험과 은사를 통하여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까지도 변함없는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호흡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회중을 떠난 신학이요, 자기 아집에 다름 아닌 주장이요, 시대를 외면하는 독선이요, 허무맹랑한 주장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바로 교회도 향도하고 회중의 신령형편을 책임져야 하는 목양자의 책임을 저버리는 행위이며, 목회와 선교, 교육과 봉사라는 고유의 영역을 지킬 수 없는 미성숙한 영적 존재로 낙오하기가 십상이다. 요한복음적인 영적 체험 곧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되는 영적 체험 곧 거듭남과 죄사함, 성령 충만의 기쁨을 받아보지 못하고서는 영적감화와 감동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에서 영적 열기에 취하여 겁없이 달려드는 위험스러움을 안쓰럽게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용도 목사가 당했던 이단 시비 때문에 그 후에는 영적 체험도 영적 도전도 두려워하다가 보니까 속으로 기어들어간 형국을 띠고 있는 현재를 바라볼 때 더욱더 경계해야 할 것이 내 부단속이요, 일치인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일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의 본질을 외면한 채 깊이의 차원을 상실하고 있는 오늘날의 형편과 처지를 감안해 볼 때 더욱 더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용도적 신앙체험은 가난의 영성이자 위기의 영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이 향유될 수 있는 거룩한 만남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여러분 성령체험의 깊이를 결여한 화석과 같은 교희들 성령의 권능을 상실하고 생명력을 상실한 교희들을 통해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용도적 리바이벌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도 여기 이 곳에는 성령이 역사하고 있으며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떨어졌던 성령의 불이 쏟아지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각가지 뜨겁고 차고 넘치는 은사가 나누어지고서 지금도 역사하는 사도행전 적인 증거를 쫓아서 나가지 못하는 연구는 죽은 것이며, 복음의 전파력이 단지 지적이고 논리적인 차원에서만 집착하여 복음의 영적 의미를 전파할 수 없다면 복음의 위력은 상실될 것이다. 아직도 오로지 이용도의 위대성에만 집착하여 뒤따르던 무리들이 오늘날 이용도 목사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영성이 결여된 신앙 생활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바라본다. 또한 그렇게 이용도 이용도 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이용도 류에는 들지 않았다고 하면서 제도교회에 주저앉아 뭉개고 있었던 영감 없는 무리들은 이용도 연구 이전에 이용도 삶을 욕되게 한 장본인들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하겠다. 그러한 연후에 비로소 반골 민족주의자 이용도 열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신에 붙들렸던 영적 자유인 용도를 찾아 들고,그를 안타까워하고,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끌어안을 수 있는 구도자들이 나타날 때,우리의 용도는 용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용도적 신앙과 삶이 전파되고 한국 그리스도 교회의 앞날에 밝은 빛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3. 

 

    우선 주목해 볼 것은 피도수 선교사의 글 '시메온 한 신비한 한인 크리스찬'이다. 12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이 글은 분량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으며 더군다나 스캔들러스한 사건의 상세한 보도를 하였다는데서 주목받아 마땅하다. 더군다나 1928년 한국에 파송되면서부터 시작된 이용도와 피도수와의 만남은 매우 자연스럽기조차 하였다. 양주 포천지방을 관할하던 도마련(M B Stocks)의 지도하에 움직였던 초임선교사 피도수는 1930년 여름 이용도와 함께 나란히 목사안수를 받았고 통천지방 파송을 받지 못한 무임목사 이용도의 생활비를 대주면서 사직동집에서 함께 살았던 인연으로 말미암아 피도수-이용도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깊은 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2회에 걸쳐 연재된 기사의 내용은 상당히 자세하고 깊이가 있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까 당연히 용도의 집안내력이나, 아내 이야기 친인척들의 동태 등이 여과없이 공개되었으며, 1930년부터 전국적 부흥사로서 등장한 용도목사의 활약상이 생생한 원음의 박력 그대로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10회부터는 문제의 원산 신학파들과의 회동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그대로 적시함으로서 이 문서의 귀중성이 확연하게 매겨져 있다. 한마디로 이용도 회상기에 다름 아니다. 깊은 연민과 아픔의 상처를 안고 우정과 동역자의 연대의식에서 비롯된 선교사의 문체는 읽고 있는 모두의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고도 남을 줄 안다. 예수의 말씀 형제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임을 피도수 선교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엘에이(L.A)에 살고 있는 노령의 피도수 목사는 이용도 신앙과 사상 연구회 앞으로 영문 A4용지 6쪽 분량의 이용도 목사 회상기를 보내왔다. 이용도 목사가 돌아가신지 실로 63년만에 일이었고 그가 1936년 일 년 동안 그를 추모하면서 썼던 회상기가 꼭  환갑을 먹은 해에 보내 온 신기한 인연의 줄을 이어주었다.

    제가 1989년 1월 선다 싱 실종 60년을 맞아 인디아의 히말라야 산록지대의 하나인 하미찰프라데 시주의 심라와 수바투를 찾았을 때 반갑게 맞아주었던 아마드 칸이라는 이름을 가진 84세난 외과 의사가 생각이 났다. 예수탄생 8일째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난 시무온과 한나처럼 그렇게 그들은 오래 생존해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의 생존을 증언해 주고 사명을 다할 때까지 죽지 못하고 있는 천사들처럼 피도수 선교사 역시 오늘까지 이렇게 이용도 목사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절망의 예언자 이용도를 그리워하면서  오고오는 수많은 청년 학생 구도자들을 위하여 지구촌의 한 귀퉁이에서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애절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지독한 고독과 아픔 속에서 마지막을 보냈던 용도목사를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여기 지금 이렇게 함께 그가 남기고간 삶의 발자취와 고뇌에 찬 삶의 나날들을 회상하면서 되짚어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만남이고 감동입니다. 환상이고 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깊고 깊은 연민이요 아쉬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거짓과 위선으로 말미암아 너절한 인간군상들 속에 떠밀려 어디로인가 허위에 세계로 흘러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제 여기서는 피도수 선교사가 불러주는 용도 목사의 초혼의 자리 진실로 참된 영적 자유와 인간적 친교와 만남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야 하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먼 이국땅 세기를 격하는 63년 전의 깊고 깊은 사연과 우정 그리고 신실한 믿음으로 두 사람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산과 강과 하늘과 바다를 넘어 밀려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한 우정과 사랑의 정신을 맛볼 수 있다. 그것도 90객의 노인이 가지고 있는 63년 전의 회상기가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신비로움을 한번 느끼기를 바란다.

 

'IMAGINE Yl YONG DO ENTERING THIS ROOM NOW. HE COMES IN QUIETLY HUMBLY NOT WISHING TO BE NOTICED. HE IS PLAINLY DRESSED BUT CLEAN HE BOWS IN SILENT

PRAYER AND SAYS NOTHING UNTIL WE SPEAK TO HIM HE REPLIES A GENTLE SMILE AND WE KNOW IMMEDIATELY WE SHALL LIKE HIM IF WE INQUIRE FURTHER ABOUT HIS WORK HE SHIFTED OUR THOUGHTS AWAY FROM HIMSELF HE WILL BIGIN TO TELL US WHAT

GOD HAS BEEN DOING' 

 

4.

 

    이용도 신앙과 사상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영적 해석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유동식 박사는 최근 서울에서 모였던 제 4회 국제신학 세미나에서 이용도 신학이 성령운동에 미친영향이라는 발제에 뒤이어 진행된 민경배 목사와의 논찬에서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지적을 했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성령운동과 이용도 목사의 신학이란 용어를 쓰셨는데 그 이용도 목사의 성령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30년의 한국교회 상황이라는 배경을 분명히 해야 그의 성령운동이 잘 이해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 장로교의 당시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남궁 혁 박사가 지적하였듯이 당시 한국교회 상황은 교리 신조에 충실한 근본주의와 보수주의를 생명과 같이 지켜 오던 그런 장로교 중심의 교회가 아니었나 하는 것이고 남궁 혁 박사가 쓴 글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결여가 되었다. 그리고 보면 신조라고 하는 것은 화석화되고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고목이 되어 껍데기만 있고 형식은 무성한데 생명을 잃은 그런 교회였다. 이 말은 단적으로 당시 대표적인 지도적 신학자가 표현한 한국교회의 실상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물론 역사적인 전체 흐름을 배경으로 하여 그런 권두언을 썼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교회의 성령운동은 생명을 리바이벌할 생명운동으로서 이해되는 가운데 이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성령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당시 한국교회의 배경이었는데 요점을 잘 잡아내야 이용도의 성령운동이 왜 그 시대를 그렇게 휩쓸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다음에 이용도 신학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아니될 열쇠가 하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열쇠를 잡지 못하면 횡설수설하게 됩니다. 남궁 혁 박사는 성령의 제 3시대인 성령중심의 교회시대라고 하는 것은 보완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썼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이용도목사는 1931년에 자기의 개인적인 메모에서 서양 기독교와 동양 기독교를 다음과 같이 대조해 놓았습니다. 서양 기독교는 동적이요 외적이요 형식적인 것으로서 음양설로 말한다면 양적인 면으로서 크게 발전해 왔다. 여기에 비하여 동양적인 기독교는 정적이요 내적이요 신비적이라 음양으로 본다면 음적일 것이다. 서구 기독교는 동적인 면을 잘 발달시켜왔다. 그러나 오늘날 위기에 부딪친 인류문명과 또 아시아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동양적인 것이 요청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상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서양 기독교는 공관복음이요 동양기독교는 요한복음이다. 이것은 아주 상징적인 말입니다만 귀담아들어야 할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동양적이란 요한 발견적이다 하였습니다. 만약 이용도 신학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의 신학을 풀어나가는 키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용도 목사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한신학의 세 가지 초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초점은 첫째가 예수 그리스도 신 비주의이고, 둘째는 영육변증법적인 이원론으로서 영으로 난 것은 영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영은 살리는 것이요 육은 우리에게 무익한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취된 종말론으로 물론 미래에 성취될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요한복음이 강조한 것은 이미 여기에 심판이 이르지 아니하고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하루 하루의 순간이 종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5.

 

    피도수 선교사는 미국 캔사스주 출신으로 프린스톤에서 B D 학위를 마치고 1928년 8월 29일 마침내 한국 땅 부산으로 입항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는 두 달 뒤 한국어 설교를 용산감리교회에서 했다. 당시 그는 도마련 선교사가 관할하던 서을 동지방에 속해 일하였는데 중생을 강조하고 전도에 열심이어서 종로에 위치해 있던 중앙전도관 부관장의 일을 보면서 지역별 교희와 전도소에서 집회를 인도했으며 특히 신설동과 성북동에 있던 개척교회들을 후원했다. 한편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살던 집에서 나와서 사직동에 있던 한옥 6간짜리 집에서 살면서 한복을 입고 한식을 먹으면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일종의 토착적인 선교활동을 한 것이다. 1930년 8월 연회에서 이용도와 나란히 목사안수를 받고, 1928년 신학교 졸업전 파송받아 갔던 통천구역에서 이동하여 서올에 있던 전국주일학교 연합회로 파송받아 온 이용도 목사와 함께 사직동에서 살았다. 그런데 1933년 3월 그는 때마침 병이 난 선교사 가족을 인솔하여 미국을 다녀오라는 선교부의 명령을 받는다. 그해 이용도 목사는 연회에서 원산 신학파들과의 관련 때문에 소환당하여 사문받았고 경성 교역자희의에 목사 휴직원서를 내놓기 직전이었다. 이용도 목사에게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때에 그가 한국을 떠났다. 1934년 8월 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이목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피도수 선교사의 증언이다. 당시 이 무렵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은 피도수 선교사의 눈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첫째, 반지성적인 성향이 두드러졌다. 이미 기도하는 여자들이 주장하는 계시를 믿기 시작하였다. 둘째,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몬타너스파들이나 카미사드파, 어빙파, 오순절파 등 미신적인 여러가지 사소한 것을 숭상하였다.  예를 들어 인디아의 선다 싱이 승천했다든지 몽골에서는 재성육신이 이루어졌다든지 예수의 진짜 탄생일은 1월 3일이며 부활은 4월 14일이라든지 어떤 여자가 뜨거운 화로를 손하나 않다치고 옮겨놓았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셋째, 분파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다 결연한 순교자로 자체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의사 소통이나 연대의식이 생겨날 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국은 조그마한 차이도 크게 느끼고 심각한 이견이 있다고 생각하여 곧바로 불화관계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갈라서게 된다. 넷째는 눈에 띠는 신체적 현시적 특색이 있다. 즉, 기도할 때 온 몸을 크게 떨고 흔들면서 기도한다.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경련이 일어나고 흥분으로 떨고 손과 발을 뒤흔들고 때로는 온몸을 뒤집기도 한다. 또 성령이 나타난다든지 영매가 등장할 때에는 쉿소리를 강하게 내거나 휘파람소리 같은 이빨 사잇소리를 낸다. 때로는 회원 중에 의식을 잃어 버리거나 영매와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 깊은 무의식으로 들어간다. 또한 어떤 영이 영매를 부르듯 상대의 목소리를 장악하거나 대신해서 흉내내듯 발성을 하고 의사를 소통하고자 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무당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도 목사는 다음과 같은 우수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첫째, 사랑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문제 해결의 방법은 사랑에 있다고 믿었으며,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살고자 하였다. 창녀를 무시하고 고아와 거지들을 돌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수 있는가고 반문하였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처럼 그렇게 베풀고 나누는 영성으로서 살기를 바랐다. 그는 바위를  하나님의 제단처럼 여겼고 차갑든지 뜨겁든지 구애받지 않고 불평하지 않았으며, 낮기도 할때는 새가 함께 있었고, 밤기도 할때는 벌레들이 동행하였다. 둘째,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도는 그에게 있어 대화의 시간이었고, 삶의 전체였다. 기도는 우리의 업무 나머지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뜨거운 기도는 생의 모든 것 망해도 기도, 흥해도 기도, 기도하자. 크게 뜨겁게! 셋째, 그는 역시 겸비의 사람이었다. 나는 기도한다. 겸비한 가운데 살다 보면 거지로 가장한 주님을 만날 볼 수도 있고 아이로 보이는 예언자를 섬길 수 있다. 나는 누구에게서나 배운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나 나이 어린 손아래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크게 배우고 크게 깨우친다. 겸비는 나의 최후의 덕이다. 우리는 믿음도 사랑도 겸비 보다는 쉽게 구한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서는 겸비의 마음을 나눌 수가 없다. 오 주여 나로 하여금 시무언 곧 침묵의 순종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구원을 보게 하소서. 나는 그저 성령의 역사만을 바랄 뿐 바라는 아무 것도 없다. 넷째,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살았다. 어느 날 저녁 그들 온 가족은 내 주를 가까이 라는 찬송을 불렀 다. 우리 주님은 머리둘 곳도 없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었다고 하셨다. 그는 겉옷도 수십 번 남을 주었고 그는 자기의 힘과 정성과 열정을 다 기울여 사람들을 섬겼고 마지막에 가서는 십자가 상에서 피와 땀과 눈물마저 다 뿌리고 갔다. 그는 크게 울부짖었다. 나는 다 이루었다고. 다섯째, 타계적인 신앙과 삶의 태도가 강했다. 그는 돈 쓰는 것도 한꺼번에 몽땅 다 쓰고 말았다. 세상이 나를 버려도 무섭지 않다는 완전 타계적인 신앙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 관념도 없었고,  생활의 계획도 전혀 없었다.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제한이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살았다.

    나는 오늘 이 시간만 염두에 둔다. 나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 오로지 현재 여기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받든다. 그는 죽기 얼마 전부터 삼 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의 최후의 기도는 이러하였다.

 

 "주여 내게 삼 년만 여유를 주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나의 온 힘을 기울여 거지들을 위하여 쏟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굶고 그들과 함께 먹으면서 단 삼 년 동안만 그들을 위하여 설교하 고 섬기고 가겠습니다."

 

    그는 열정의 사람이었다. 거룩한 열정에 온 몸을 내맡기고 오로지 한가지 소원은 영혼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사랑과 구원의 사역자였다.

    피도수 선교사는 이번에 보내온 회상기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면서 이용도 목사의 과오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1932년 원산으로 가서 직접 그 사건의 담당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그는 개인적으로 그들의 따뜻한 환영과 대접에 만족해 하였고 계시로 말하는 문제의 기도하는 여자들을 보았다. 그때 이용도 목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일단의 여자들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고, 이목사가 영으로 말하는 어떤 여자와 대화를 시도하였다. 왜 당신은 이런 단순한 여자들에게 계시를 말합니까. 하고 이목사가 묻자 대답은 만약 배운 사람을 통해서 계시를 말하면 지식으로 말한다고 하기 때문이지요. 라고 했다. 그래서 이목사는 영에게 다시 한번 묻기를 나는 시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여자를 시험해 보려 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정말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까? 그 때 그 여자는 수줍은 듯 답하기를 오 도마야 내가 내 상처를 만지기 전에 믿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을 너는 왜 그리 믿음이 없는냐 하고 나왔다. 그때 이목사는 이것은 사단의 역사는 아니다. 결국 이것은 성령의 역사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예언하던 한 여자는 아주 케케묵은 일상사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예언하였고 결국은 사단이 역사한 것임이 드러났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였다. 거짓 예언자는 광명의 빛으로 위장하였던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이용도 목사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의 감리교 동역자들이 다 떠나고 없던 그 시절에 그는 새롭게 만난 그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1933년 그 해 연회는 이용도 목사 문제를 아주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휴직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 그의 새로운 친구들은 그를 예수교회의 지도자로 모시고 갔다. 그때 그가 쓴 편지를 보면 오 주여 저가 스스로 예수교회의 선도감이 되려 했습니까? 오 주여, 만약에 가능하시기만 하다면 이 잔과 이 왕관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오 주여,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거룩한 성의대로만 하옵소서!  바로 그 어간에 이용도 목사는 육체적인 고통이 극에 달했고 마침내 더 이상의 바깥 활동을 할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서서히 그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주님은 그를 1933년 10월 2일 부르셨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제 나에게 와서 나의 기쁨에 동참하여라.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었다. 민족주의자 기독교 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 할지 하는 따위는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전장에서 사형장에서 도시와 마을의 거리 거리에서 그네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한국 만주 시베리아 일본 및 중국의 대지 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 들어갔다. 그들은 직접적인 일에서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좋은 평가를 계속하고 있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가지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불사성의 본질이다. 이것이 영광이자 수치다.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을 바꿀 수 없다. 그것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가 없다. 유일한 개인적 결정이라고는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싸울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파과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 밖에는 없다.(님 웨일즈 아리랑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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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 목사의

"피도수 선교사가 본

거룩한 열정의 사람 이용도" 

에 대한 논평


 

심 광 섭 박사

 (감신대 강사)

 

 

    한국의 초기 교회가 낳은 목사 중에 시무언(是無言) 이용도 목사만큼 활발한 연구와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도 드물다. 평생에 걸친 변종호 목사의 집념이 결실을 맺어 이용도 목사 전집이 10권으로 출간되었고 감리교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장로교 신학자들의 연구 또한 활발하다.

    감리교신학대학의 학술지 『신학과 세계』 제 4호(1978년)는 이용도를 특집으로 다루어 연구하였는데, 윤성범 교수는 이용도를 철저히 겸비, 순종, 사랑의 생활을 일관했던 기독교 신비주의자로 시정(視定)하면서, 이는 십자가 신비주의 혹은 예수 신비주의라고 결론지었다. 박봉배 교수는 이용도의 금욕주의가 정열적인 사랑을 동반하는 신비주의로 옮겨갔으며, 쉴라이에르마허의 절대 의존의 감정이 이용도에게 와서 절대 사랑의 감정으로 대치되었다고 평가하였다. 변선환 교수는 이용도의 신비주의를 독일 신비주의의 거장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같은 선에서 보면서 독일 신비주의가 중세 말기의 구원을 잃은 인간의 곤궁과 고난을 반영한다고 본다면, 이용도의 신학 역시 일제의 폭정이 극에 달하였던 암흑시대에 겨레의 아픔과 고난을 반영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한국 교회사가 송길섭 교수는 이용도를 한국 교회의 개혁자로 그리고 있으며 유동식 교수는 열광주의자로 보았다. 장로교회사가 민경배 교수는 이용도를 "한국교회의 자립과 토착화에 나서서 고고하게 음성을 내다가 사라져 간 신앙인", "한국교회의 최초의 실험자"이며, 그의 사상을 "고난 받는 그리스도 신비주의” 라고 단정한다. 이영헌 교수는 이용도의 신비주의를 신부 신비주의, 고난의 신비주의라고 보며, 거기에는 예수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보았으며, 한숭흥 교수는 이용도를 서양 신학자들과 대등한 신학사상의 위대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의 정열적이고 온몸으로 주님께 헌신하였던 신앙 열정이 더욱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용도 신학의 방법론은 합일의 원리이며 그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비주의이며, 동시에 성애(性愛)가 아닌 성애(聖愛)에 전인적 실존이 투여된 감상주의적 카타르시즘이라고 평가한다.

    최근 성백걸 목사는 이용도를 십자가와 사랑의 신비주의자요 개혁가일 뿐만이 아니라 한국적인 구원의 삶을 살다 간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영성적 사상가로 보려고 시도하였다. 이상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이용도가 일단 신비주의자였음에 동의하나 그 특색을 밝히고 문제점을 지적하는데는 서로 상이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 사람이 아니면서 잠시 이용도와 삶을 같이 한 선교사 페터스(V.W.Peters) 의 눈에 비친 이용도의 삶과 사상이 이상윤 목사의 연구에 의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1. 우선 이상윤 목사는 이용도 연구에 임하는 2가지 태도틀 비판한다. 첫째, 영성이 결여된 지적이고 논리적인 탐구에만 몰두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오로지 이용도의 과거의 역사적 위대성에만 집착하여 복음 생동력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용도를 연구하면서 이용도의 사상적 본질에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와 모순되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둘째는 제도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로서 한편으로 이용도의 위대성을 말하지만, 다른 한편 이용도와 무관하다고 선언하기 때문에 이들은 정작 이용도의 삶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와는 달리 연구자가 제시하는 태도는 이용도에 대한 순전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힌 용도를 대하여 그가 "반골 민족주의자" 였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가 배척하는 두 가지 태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적하는 것이며, 또한 그가 제시하는 태도가 자신의 태도인지 아니면 페터스의 태도인지 불분명 하다.

 

2. 페터스가 12회에 걸쳐 연재한 글의 제목은 "Simeon, a Christian Korean Mystc"(1935) (시무언, 한 기독교 한국인 신비주의자)이다. 페터스는 "시무언, 얼마나 멋진 단어인가!  침묵이 옳다"(Si-mu-on! What a wonderful word! Silence is right.) 하고 설명한다. 페터스는 이용도의 삶을 통해 한국적 기독교 신비주의를 살아간 한 유형을 기술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연구자는 이용도를 "거룩한 열정의 사람"으로 제목을 고쳐 지을 뿐만 아니라 "시메온, 한 신비의(한) 한인 크리스챤"이라고 오역까지 감행하면서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 산을 논문의 시작과 끝에 부연하기 때문에 이용도를 열정의 사람, 혁명투사로 그리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과연 페터스가 본 이용도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페터스는 12장에서 이용도를 열정의 사람으로 끝맺으면서 예수의 제자 열혈당원 시몬과 비교한다. 그러나 이용도의 열정은 십자군적 열정이 아니라 기도와 겸비와 침묵 속에서 익어간 聖愛, 天的愛로서의 무한한 사랑의 열정, 십자가의 열정이 아닌가?

 

3. 연구자는 이용도 목사를 "오순절 성령운동의 하나로서 은사운동에 심취했던” 자이며 "성령 은사운동의 기수"로서 규정하고 있다.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이 기도, 회개, 새로운 심령의 탄생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은 사실이나 기성 교회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이 세상의 가치관을 대부분 긍정하고 따라갈 것을 종용하는 오늘날의 은사운동과 본질적으로 그 궤를 달리한다고 생각한다. 

 

4. 연구자는 "계시와 환상 속에 날이 지새던 원산 신학파들의 광란의 교제 속에 합류하였던 이용도"의 "말기적 삶은 깊은 혼돈과 아픔의 상처로 각인되었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의 이용도 연구자들에게 "성령에 취하고 은사에 매달리는 직접적인 체험과 은사"를 강조한다.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5. 페터스가 11장에서 문제점으로 지적한 반지성주의, 사소한 것을 계시라고 주장하는 하찮음, 분파성, 물리적 현상의 중시 등은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이나 그의 사상이 지닌 문제점이 아니라, 말년에 유명화, 백남주 등과의 교제에서 비롯된 문제점들이다. 따라서 이용도가 인도하는 부흥회의 문제라기보다는 백남주 일파의 문제점이며, 이를 비판하지 않고 용인한 데서 불거진 문제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 교회의 신학교라고 볼 수 있는 원산 신학산의 설립자인 백남주, 이 예수교회와 이용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예수교회"가 기성교회로부터 몰려나고 이단시되기는 하였으나 당시 40여개의 집회소를 헤아리는 한국 교회사상 중대한 의미를 가진 한국적 토착교회를 형성하였으며 1933년 6월 3일에 이용도는 초대 선도감으로 세움을 받았다. 이제  "예수교회" 전통에서 보는 이용도의 실상이 드러나야 할 때이다. 

 

6. 페터스가 보는 이용도의 한국적 신비주의의 특징은 무엇일까?

 

    1) 기도. 페터스는 통천교회의 분열을 기도로써 극복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페터스는 이용도의 사랑은 기도의 결과라고 말하나 오히려 사랑이 기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기도는 신비주의의 대표적 특색이다. 페터스는 이용도 신비주의의 특색을 십자가 혹은 예수 신비주의라기보다 기도를 통한 靈신비주의로 보고 있지 않은가?

 

    2) 사랑. 페터스는 이용도의 가난한 자와 거지에 대한 연민과 사랑, 영적 감수성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사람은 그의 삶에서 드러나며 삶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은 사람의 생명이라. 고로 사랑은 사람 그것이었느니라." 그의 사랑은 고난받는 자에 대한 상린과 일치에서 극에 달한다. 특히 이용도의 사랑은 성 프란시스처럼 자연에까지 확장되었다. 여기에 인격 신비주의를 넘어 동양적 자연 신비주의로 가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3) 겸비. 겸비의 본질은 배움이다. 이용도에게는 "善惡이 皆吾師"이다.

 

    4) 십자가에서의  미완성. "우리는 비통하게 십자가의 벌거벗은 몸으로 최후를 마치신 그 예수를 따라 갈 뿐이다. 하여간 우리의 피 한 방울이 떨어지는 날이라야 우리의 일은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 자신이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날에 우리의 완성이 있는 것이다."

 

    5) 비세속성(unworldliness). 이를 타계적(otherworldly) 신앙으로 봄은 옳지 않다. 이는 예수처럼 매일 죽는 "종말론적 긴박성"(송길섭)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에게는 내년도 내일도 다 없고 늘 오늘뿐인 것 같아 외다." “죽음! 이것이 나의 유일한 나의 계획이며, 나의 방법이며, 나의 원리다."

 

    페터스는 유명화 등 신접자들에게의 접근을 이용도의 반지성성이라고 평가하면서 모든 운동의 기준은 교리(doctrine)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용도는 성령의 능력과 인도에 대한 매이지 않는 신앙으로 모든 낯선 표현들까지도 신뢰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 이용도 신비주의의 정수가 있다. (Here was the very marrow of his mysticism. With an unbounded faith in the power and leadership of the Holy Spirit, he was ready to credit any manifesttion.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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