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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이용도 신앙과 사상 심포지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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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09-07 13:24 조회1,5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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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움 강연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예수론”

 

 

 

 

 

이 세 형 박사

 

미국 Drew. Univ., Ph.D. (조직신학전공)

                          감리교 신학대학 강사

                          정동감리교회 선교목사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예수론

 

 

 

이 세 형 박사

                 (Drew Univ., Ph.D.; 감신대 강사, 정동제일교회 선교목사)

 

 

 

 

I. 들어가면서

 

 

   이용도는 조직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교회사를 공부한 역사가도 아니다. 그는 교회의 개혁과 사랑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했던 부흥설교가였고, 음악을 사랑하였으며, 주일 학교 공과와, 성극, 시, 편지와 일기 등을 남긴 문필가였다. 이용도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아버지 이덕흥과 어머니 양마리아 사이에서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용도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이 없다. “어려서 잔병을 많이 앓고 신경이 과민한 편이었고 울기 잘하는 점등은 보통 이하의 변변치 않은 아이였다. 그래서 부형들은 초저녁에 죽을 아이라고 보았다고 한다.”1) 그러나 초등학교 다니면서 몸도 건강하여지고 두뇌도 발달하여 선생님의 총애를 받고 여러 친구들을 거느리고 다니게 되었다. 용도의 가정은 당시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가난과 유교적인 봉건관습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이용도의 아버지 이덕흥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난과 비참한 신세를 술과 난폭으로 풀고 있었고, 어머니는 시변리 교회의 전도부인으로 신앙으로 구차한 집안살림을 꾸리며 자녀들을 키워나갔다. 용도가 어려서 부모에게서 세속적인 아버지와 경건한 어머니의 삶을 보고 자라게 되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에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용도였다. “13세때 그는 벌써 기도 생활을 하는 아이가 되었다. 부형들의 말과 용도의 간증에 의하면 13세때부터 예배당 종각에 올라가서 여러 시간, 혹은 밤새도록 기도를 올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2) 용도는 이미 어린 나이에 ‘가난’과 ‘교회’를 경험하였고 이는 일생을 두고 용도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 되었다.3)

 

    나이가 들면서 용도는 점점 그의 재질이 나타나게 되었고, 14, 5세에는 손재주가 좋아 대패, 톱, 망치 등을 가지고 집에 필요한 것들을 수리하였고, 근면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5, 6세때에는 이미 말재주가 비상하여 윤치호, 이상재, 양주삼씨 등에 비상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4)

 

1) 변종호 편저. 이용도 목사 저. 이용도 목사전집 제2권, (서울: 장안출판사,

1993),18쪽.

2) Ibid., 19쪽.

3) 성백걸 박사는 그의 논문, “사랑과 정의의 사도, 이용도의 삶과 사상: 역사신

학적인 접근”에서 ‘가난’과 ‘교회’는 용도가 어려서 만난 것으로 생을 다할 때까지 따라다닌 것이라고 한다. 성백걸은 “그는 가난한 삶을 신앙으로 승화시켜 ‘빈은 나의 애처’라고 고백”하였고 “교회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교회에서 쫓겨나 새로운 예수 교회를 창설하는 데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성백걸,“사랑과 정의의 사도,이용도의 삶과 사상: 역사신적인 접근,” 감리교와 역사.. V.1., [서울: 한국감리교회사학회,1994, 10, 20.],29쪽).

4)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저. 20-21쪽.

 

 

    용도는 1915년 송도 한영 서원(후에 송도고등 보통학교가 됨)에 입학하여 그의 중학시절을 보냈다. 이 시기에 용도는 가난 때문에 고학을 해야했고, 다른 한편으로 그 가난의 근본 원인이 일제의 침탈에 있다는 현실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 4년 공부 과정을 9년에 마쳐야 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때에 송도거리의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약 2개월간의 유치장 생활을 하면서, 이후 5년여에 걸쳐 열렬하게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래서 1919년 12월 18일에는 조선독립수비단 사건으로 신계 경찰서에 검거되었고, 1920년 2월 11일에는 이른바 기원절 사건으로 붙잡혀 약 6개월간 투옥되었으며,1921년 성탄절 에는 불온문서사건으로 약 6개월간 옥고,1922년에는 태평양 의회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 징역언도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3년 8월에 석방되었다. 다섯 번의 투옥과 3년여의 감옥살이를 겪으면서도 이용도는 굴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5)

 

   

   이용도의 독립운동에의 참여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신앙인으로서 역사와 사회 속에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신앙운동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후에 밝히겠지만, 이용도의 사유의 구조는 비이원적인 구조를 가지는 바, 정의와 사랑의 양면성을 인정하면서 이 둘이 하나의 실재인 예수의 삶, 나아가 하나님의 두 속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신앙으로 표현되 었을 때는 하느님의 영 흑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어떤 때는 정의의 외침으로 어떤 때는 사랑의 어루만짐으로 나타나는바, 그의 생애를 통해 젊은 시절에는 똑같은 신앙의 표현이 정의의 투사로, 그리고 목회의 현장에 들어서는 사랑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나타나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23년 8월에 출옥한 이용도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복교를 시도하였으나 여의치않자 교장이 었던 왓슨(A.W. Wasson)은 비공식적으로 졸업의 자격을 주어 1924년 2월 협성신학교 영문과에 입학하도록 돕는다. 신학교에 입학한 이용도는 아직도 민족독립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신학공부보다는 정치, 사회, 신문, 잡지, 문학, 소설, 법률 등에 관한 책을 탐독하여 이론싸움이나 논쟁을 즐겼고, 강의시간에는 괴상한 질문으로 교수들에게는 이론가, 논쟁가, 말썽꾼, 경우꾼, 싸움꾼, 과격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6)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 용도는 시, 노래, 연극 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가극과 동화와 동요와 아동설교에 취미를 붙여 주일학교사업에 열중하였다.7) 그의 뛰어난 문장력과 학문에 대한 재능은 1931년 번역 저술한 1932년 후반기 장년 주일공과에 잘 나타나 있다.

 

5) 성백걸,“사랑과 정의의 사도,이용도의 삶과 사상,” 29쪽. 이 당시 용도는 “그 몸 전체가 오직 애국의 열정의 불덩어리였다. 이 불덩어리가 자기의 피와 눈물을 항상 끓게 하고 있었고 나타나는 데마다 빛을 던지며, 부딪친 존재들을 모두 태웠다. 그래서 이 불을 끌 자가 세상에 없었고 또 그 유창하고 사람을 위압시키는 언변과 열렬 철저한 행동은 마주 서는 자를 모조리 압복하고 감탄시키어 이십 전후의 용도는 벌써 권위 있고 위품있는 독립 운동자로서 그 존재가 뚜렷하였다.”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저. 23쪽).

6)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저. 26쪽.

7) 이용도는 1927년 4월에 가극 “춘풍”을 아이생활 4월호에 발표하였고,가극 “공주와 꽃팔이”를 아이생활 5-6월호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5일에는 협성신학교에서 “십자가를 지는 이들”이란 제목의 희곡을 써서 각본과 주연까지 도맡아 무대 위에 올렸다. 1928년에 들어와 아이생활 11월호에 크리스마스 성극으로 “애굽의 이스라엘”을 발표하였고, 12월에는 성극,“믿음으로 사는 화공”을 발표하였다. “춘풍”에서는 엄동설한 같은 수난 속에 있는 조국에 반드시 춘풍이 온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고, “꽃팔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믿음으로 사는 화공” 등은 어려운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최선의 삶을 살게될 때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사람의 상상이나 노력을 넘어서는 큰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작품들 속에서 용도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거니와 아무리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조국의 통일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임할 것이란 것을 성극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들의 내용을 보기를 원하면,변종호 편저,이용도 목사 저술집. 이 용도 목사 전집 제5권, (서울: 장안문화사, 1993), 41-72쪽을 참조할 것.

           

               옳다 세상에 오는 봄 막을 이 없고

               강산에 부는 춘풍 금할 이 없다.

               때가 이르러 저 인간에도 춘풍이

               불게 되면 싸움과 시기와 분쟁이

               다 없어지고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자유의 낙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춘풍”중에서)

 

 

    1931년 이용도는 전국 순회부흥사로서 일년 내내 부흥 사업에 헌신하여 하루도 쉬어보지 못하는 분망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한 중에서도 무더운 여름 내내 공과를 역술하여 1932년 장년 주일학교 공과로 쓰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공과의 내용은 구-신약에 나타난 신앙위인전으로 이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공부는 후에 용도의 설교와 가르침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용도가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고난과 가난과 겸비가 담긴 신앙생활은 바로 이들 신앙 위인전을 집필하는 중에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성경에 기초하여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8) 

 

    분명 목회 이전의 용도의 삶은 목회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고 자타가 다 용도가 부 흥강사가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물론 용도에게 신비적인 종교체험이 전적으로 목회를 시작하기 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1년 7월 26일의 일기책에 기록된 자필 이력서에 의하면, 용도는 1916년 1월 15일 밤에 勝魔경험을 하고 1916년 10월에는 중생의 경험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9) 이어 1926년 폐병 3기로 판명이 되어 이환신의 고향인 평남 강동체 휴양차 갔다가 감격과 감동의 울음바다를 이루는 설교를 하였고, 몸의 원기도 회복되고 기분도 상쾌하게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신학교 졸업 후 부임지인 강원도 통천에서 교회 청년인 박재봉과 금강산에서 10일간의 금식을 통해 기도의 사람이 되었고,10)  1928년 12월 24일 또 한번의 승마 경험을 전하고 있다.11) 이러한 종교적인 경험을 통해 이용도의 목회는 새로운 힘을 얻었고 교회가 부흥하고 구역 내를 넘어서서 전국을 순회하는 부흥사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용도는 처음부터 부흥강사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목회마저도 자신의 길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했고, 부흥강사가 되었을 때 주변의 사람들도 용도의 갑작스런 변화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호빈과의 대화에서 용도는 “아무래도 자기는 목회에 자신이 생기지 아니한다. 기왕 신학을 시작했으니 종교교육방면이나 전공으로 나아가겠노라”고 말하곤 했다. 용도의 친구들을 포함해 그와 신학교 시절을 보낸 이호빈도 말하기를 “그는 길을 잘못 들었다...

 

 

8)장년공과는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저술집. 82-198쪽에 나와 있음. 공과 중에 특별히 “모세의 이야기”,“예레미야,” “시므온,” “크리스마스”등은 이용도의 삶과 그의 예수론을 이 해하는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9)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일기. 이용도 목사 전집 제3권,139쪽.

10)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저. 30-33쪽.

11) Ibid., 36-38쪽.

 

 

 신학방면보다는 예술 방면이나 법학이 좋을 듯 생각되었다...법관이나 교육자나 문사나 연극가의 소질은 풍부하여도 목회의 소질은 가장 적다고 누구든지 인정할 것이다”12)라고 하였다. 후에 영무 해안에서 이호빈과 용도는 심도 있는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자기가 

은혜 받은 경험담이며 각처에서 이상한 큰 역사를 보던 이야기며 용도의 속마음을 들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때 용도와 말했던 이야기를 이호빈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부흥 목사가 절대로 자기의 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였다. 자기의 진정한 소원은 종교 교육사업이었는데 웬일인지 자기도 알지 못하게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어지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이 끌리어 다닌다고 하는 말을 나는 유심히 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가장 강단에서 현 교역자를 너무나 지나치게 공박한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평을 듣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남을 공격하려는 생각을 가져 본 일은 절대로 없고 가끔 그런 일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도 드리고 있는데 웬일인지 강단에 나서면 자기도 깨달아 알 수 없는 말을 말하게 된다고 하였다...성능에 붙들려 일터에 나서야 할 것이며 설교는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전하여야 할 것이며 성역은 자기 뜻으로 택할 것이 아니며 설교는 자기의 말로써 토해 낼 것이 못된다.13)  

  

 

    위와 같은 증언을 토대로 부흥사로서의 이용도의 삶은 처음부터 자기가 원해서 된 것이 라기보다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어찌할 수 없는 힘에 밀려서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도의 생애와 사상이 신비주의 일변도로 치달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설교와 삶은 정의와 사랑으로 요약되는 균형 있는 것이었고, 그의 예수 이해와 하느님에 대한 이해도 윤리와 복음, 진리와 사랑이 잘 조화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보겠다. 정의와 사랑의 두 측면을 분명하게 읽었던 성백걸은 그의 논문, “사랑과 정의의 사도,이용도의 삶과 사상” 에서 이제까지 이용도에 대한 연구들을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하고 있다.

 

윤성범의 "이용도와 십자가 신비주의", ” 박봉배의 “이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와 그 윤리성”, 변선환의 “이용도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유동식의 사랑의 열광주의에 초점을 맞춘 “이용도 목사와 그의 주변", 민경배의 “이용도의 신비주의와 그 부흥운동” 이 모두 신비주의를 말하면서도 그가 실천했던 “사랑”에 강조점을 둔 연구였다면, 송길섭외 “한국교회의 개혁자 이용도”는 오히려 앞에서는 소홀히 다룬 그의 “정의” 실천에 관심한 연구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용도의 전체 생애와 사상에서 “정의와 사랑”이라는 보다 더 균형 잡힌 신학적인 구조를 읽어내며 접근하여 좀 더 온전한 이용도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14) 

  

 

    이용도 사상 가운데서 “정의와 사랑”이라는 신학적인 구조를 보았던  성백걸의 지적은 이용도를 균형 있게 볼 수 있는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용도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일면은 의(진리)요 일면은 사랑(은혜)이시매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 혹시 어떤 때는 의로 어떤 자에게는 사랑으로 나타나시어 완전히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셨느니라”15)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때는 의의 채찍으로 어떤 때는 은혜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의와 사랑,진리와 은혜는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 둘은 나타나는 실존에 있어서 다르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天的愛)이란 점에서 같은 것이다. 의 안에 사랑이 있고 사랑 안에 의가 있는 것이다. 나타나는 모양에서 의와 사랑,정의와 사랑은 상관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정의와 사랑은 전체인 하나님의 사랑과도 상관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다. 하나의 실재로서 하느님의 사랑은 나타나는 모양에 따라 정의로, 의로, 진리로 나타나기도 하며, 또 다른 한편, 사랑과 은혜와 눈물의 위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점에서 정의와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의 나타남인 것이다.

 

12)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연구 40녀. 이 용도 목사 전집 제4권. (서울: 장안문화사,  1993),71-76쪽.

13)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연구 40년. 80-81 쪽.

14) 성 백걸,“사랑과 정의의 사도,이용도의 삶과 사상,” 26쪽.

15) 변 종호 편저,龍指信學. 이 용도 목사 전집 제 6권. 13쪽.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 안에 정의와 사랑의 양면성은 예수에 대한 이해에서 신앙인의 삶을 이해하는 용도의 인간이해 속에서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적용이 된다. 따라서 필자는 가난과 고난과 겸비의 삶을 통해 독립운동과 종교교육운동과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던 전도자 이용도를 다룸에 있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나타난 정의와 사랑의 구조를 읽었던 성백걸의 평가에 동의하면서, 먼저 이러한 구조를 동양의 빛에서 설명하고 이어 이 구조의 빛에서 이용도의 예수론을 전개해 보고자 한다.

 

 

II. 이용도에 나타난 동양적인 것

 

 

     이용도의 사상을 논함에 있어서 그의 사유구조가 동양적이란 점을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남긴 글과 주변인들이 전하는 증언에 따르면, 그의 삶은 포용적이고, 여성적이며, 동양적인 면을 갖고 있다. 실제로 그의 내면은 부드럽고, 섬세하고, 생명력이 있었으며, 그의 삶 가운데 늘 시와 음악이 있다. 지적인 삶이 아니고 (지성적이었음에도), 감성적인 삶을 살았다. 우위보다는 무위에, 높아짐보다는 낮아짐에, 외향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일에 언제나 치중하였다. 남성적이기보다는 여성적인, 양의 세계이기보다는 음의 세계에 처해 있었다. 부와 쾌락과 높아짐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과 고난과 낮아짐의 道를 가르쳤다. 부활의 영광보다는 십자가의 고난을 그리스도인인 따라야 할 삶의 길이라고 가르쳤다. 긍정적이고 밝은 세계가 아니고 어둡지만 부정의 언어로 표현된 깊은 심연의 세계를 전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가난하고 고난받고 겸비해야 한다는 말씀이 사람들을 울리고 변화시켰으며 새로운 교회의 개혁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부정의 언어로 표현된 가난과 고난과 겸비함을 예수께서 원하시는 삶이라고 가르칠 때 교회의 회중이 통회하며 변화를 꾀하였다. 용도가 인도하는 집회에서는 눈물이 많았다. 설교하는 자신도 울고 집회에 참여하는 회중도 울었다. 그리고 그 울음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였다. 울면서 이기적이고 세상적이고 갈등에 고민하던 영혼들이 무화의 과정을 통해 사랑의 세계로 영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울음을 통해 영혼이 맑아지고 새로운 통찰력과 함께 단순한 삶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용도의 부정의 언어로 표현된 설교 속에 회중은 진리에 대한 소리에 대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 안에서 살아있는 생명의 예수를 만났던 것이다. 예수와 만나는 순간은 새로운 질서가 지어지는 변화의 시간이요, 이제껏 살았던 삶에 대한 돌이킴의 시간이요, 세상의 세속적인 죄를 내어놓고 새로운 생명을 공급받는 시간이었다. 예수가 생명의 근원이란 점에서 예수와 인간은 일치될 수 없는 초월의 힘을 갖는다. 그러나 예수와 만나게 될 때, 그 생명은 인간의 심령에 들어와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예수의 영은 우리에게 내재의 영으로, 변화의 영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용도의 부정의 언어, 수용적인 영성, 내면적인 感의 신앙은 밝고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知의 신앙보다 훨씬 깊고 근원적인 것이다. 이같은 특성을 필자는 서양에 대한 동양의 영성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동양의 영성 나아가 한국인의 영성에 호소하는 힘이 이용도의 설교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동양의 영성을 필자는 노자의 도의 형이 상학과 연결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老子 道德經에서 道란 존재의 근원이며 궁극적 실재로서 모든 만물을 낳지만 만물을 낳는 과정에서 그리고 만물이 도를 향하는 과정에서 양면적인 움직임 곧 건과 곤의 움직임이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道德經 42장에서 老子는 “道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습니다. 만물은 ‘陰’을 등에 업고, ‘陽’을 가슴에 안았습니다. ‘氣’가 서로 합하여 조화를 이룹니다”16)라고 밝히고 있고, 道德經 40장에서는 “온 세상의 모든 것 ‘있음 (有)’에서 생겨나고, 있음은 ‘없음(無)’에서 생겨났습니다” 17)라고 쓰고 있다. 이 둘의 표현은 도가 세상을 낳는 외면적 과정과 내면적 과정을 드러낸 것으로 만물이 나오는 모양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道는 그 움직임이 만물을 내는 외향적 우주 발생적 진행만 있는 것이 아니다. 道는 오히려 그 근원에로 되돌아가는 움직임이 있다. 그래서 다시금 道德經 40장에 老子는 “되돌아감이 道의 움직임입니다. 약함이 道의 쓰임새입니다”라고 하였고, 25장에서는 道에 대해서 “나는 그 이름을 모릅니다. 그저 ‘道’라 불러 봅니다. 구태여 형용하라 한다면 ‘크다(大)’고 하겠습니다. 크다고 하는 것은 끝없이 뻗어 간다는 것, 끝없이 뻗어 간다는 것은 멀리 멀리 나가는 것, 멀리 멀리 나간다는 것은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18)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바대로,  道는 실재로서 陰陽의 양면을 가지고,  또한 하나의 경험 혹은 움직임으로서 멀리 나아가는 움직임과 되돌아가는 움직임이 있다. 필자는 나아가는 움직임과 돌아가는 움직임을 陰陽,  혹은 乾神,  創造性과 受容性, 有와 無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이처럼 陰陽의 양면적인 움직임을 통해 道의 한 실재를 구성하기 때문에 道의 형이상학은 “비 이원적인(non-dualistic)”19) 특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老子의 道德經에서 無는 有에 대해서 陰은 陽에 대해서 근원적인 힘을 갖는 바, 인간에 대한 자연, 남성에 대한 여성, 외면에 대한 내면,창조성에 대한 수용성이 궁극성을 갖는다.

 

    이용도는 그의 글에서 동양에서는 동양적인 종교가 나와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 다. 그는 먼저 한국인으로서 서양의 문화에 뒤지지 않는 동양 문화에 대한 정신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양문명을 물질적으로 동양문명을 정신적으로 대별하면서 서양 기독교의 실패를 동양의 기독교에서 그 내일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서양의 기독교는 動的, 동양의 기독교는 靜的,西洋=物-現世的-形式! 外的. 東洋=靈-來世的-神秘 -內的. 서양인은 外的인 것을 더 찾았다. 이제 신비적 예수께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음은 무슨 이유인가? 동양에서 서양적 기독교는 실패. 서양인은 공관 복음적, 동양인은 요한 복음적. 서양의 미성품인 기독교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이매 심령 방면 신비 방면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겠다. 동양적이란 것은 요한 발견적인 것이다.20) 

 

     

16) 노자 원전. 오강남 풀이,道德經,(서울: 현암사,1996),183쪽.

17) Ibid., 175쪽.

18) Ibid., 115쪽.

19) 비 이원적이라 함은 “이원론”도 “일원론”도 아님을 의미한다. 동양에서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도나 태극은 그 안에 양면성(음과 양)을 지니면서 동시에 이 양면성을 초월하는 실재이다. 이러한 실재의 구조는 일원론으로도 이원론으로도 궁극적인 실재의 구조를 설명할 수 없다. 자연을 관찰하여 얻어진 동양의 실재에 대한 이해는 그 실재의 구조 안에 근본적으로 상대적이고 관계적

     인 상호 보충적 관계를 가지며 이러한 특성을 비 이원적이란 말로 설명한다.

     (참고. Young Chan Ro, The Korean Neo-Confucianism of Yi Yulgok [Albany: SUNY Press, 1989],2).

20) 변 종호 편저. 이용도 목사 저술집. 이 용도 목사 전집 제 5 권. (서울: 장안 문화사, 1993),209쪽.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는 이상을 이용도는 동양의 심성에서 찾았다. 1929 년 12월 21일 성탄주일에 어떤 시인이 용도에게 보낸 시를 자신의 일기 속에 소개하고 있다.

 

위대한 영의 소유자 예수여

당신의 탄생일인 이 복스러운 날에 기독교인이 아닌 우리도 당신의 앞에 엎드리나이다. 우리 불신자도 당신을 사랑하고 또 경배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아세아로 더불어 혈족의 관계를 맺은 까닭입니다. 약소한 민족 우리들은 세상의 한 노예로 십자가형틀을 지고 갑니다. 우리는 벙어리와 같이 우리의 맞을 모든 매를 맞아 상하신 당신을 말없이 우러러 뵈올 뿐입니다. 이교의 지배자는 우리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우리는 억지로 사회적 계급의 바늘 침상에 눕게 됩니다. 세계는 지구 정복에 주린 구라파의 욕심 앞에 놀라 떨고 섰습니다. 제국주의는 맘몬의 손에 들어가서 부정한 환희의 춤을 추고 전쟁욕 권세욕 소유욕 -- 삼 마녀는 구라파의 노변에서 잔치의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저 구라파 천지에는 당신이 유하실 곳이라고는 일간두옥도 남지 않았습니다. 오시옵소서. 그리스도여 발길을 돌려 이리로 오시옵소서. 아세아에서 당신의 처소를 잡으십시오.21)

  

 

     이용도는 한국땅에 예수의 도래를 노래하고 있다. 전쟁욕과 권세욕과 소유욕에 눈이 먼 서구인들의 오만과 비 영성을 이용도는 잘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리한 눈으로 서구 문명을 비판하는 이 용도가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죄악상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22)  그럼에도 기독교 신앙의 토착화를 위해 서구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기독교에서 고난받는 한국인의 경험을 가지고 예수를 이해함으로서 한국의 토착화 신학과 신앙의 정립을 위해 이용도는 위대한 유산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실로 이용도는 교회 갱신을 촉구하는 가운데 교리주의와 가르치는 자리에서 겸비할 줄 모르는 선교사들의 태도를 비난하거니와 한국인을 향한 목회에 대해 의존적인 태도를 넘어서고 있다. “아! 선교사들의 교만함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겸비하여 배울 줄을 모르고 남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자로만 자처하였으니 너희의 눈을 막아 의인을 보지 못하게 하였도다. 예수를 잡아죽인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장로와 영수들이 곧 너희들이었느니라.”23)

 

21)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일기. 이 용도 목사 전집 제3권. (서울: 장안문화사, 1993),66-67쪽.

22)박봉배 박사는 “이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와 그 윤리성”이란 글에서 이용도가 독립 운동으로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고도 그의 글 가운데 이를 언급하지 않고 일본의 침략주의를 비 판하려 들지 않는 것은 지나친 신앙 내면화를 통한 현실을 등한시 한 경우라고 비판한다. (박봉배,“이 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와 그 윤리성,” 이 용도 목사 관계 문헌집.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전

 집 제9권. [서울: 장안문화사,1993], 138쪽).

 23) 1931년 3월 7일 고창 부흥회 3일째에 쓴 일기로서 아마도 부흥회를 놓고 선교사들의 방해가 있었던 것 같다. 이후에 쓰여진 연속된 일기에서 불의와 싸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 려놓고 있다. 3월 9일 일기에서 “주께서 역사하심을 감사하였다. 나는 불의와 더불어 싸우는 의의 자식이요 진리의 아들이다. 이 땅에 마귀는 꽉 찼다. 어두움의 권세요 밤의 권세의 때로다. 미워하고 죽이고 시기하고 음란하고 패역하며 교만한 이 악마의 세계!”라고 쓰고 있고,3월 10일에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이제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랴?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고 마음을 단호하게 정리하는 것을 본다.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저. 이 용도 목사 전집 제2권.,84-87쪽).

 

 

     이용도가 동양에서 서양적 기독교의 실패를 보았던 것은 선교사들의 교리 중심적인 오만한 태도가 아니었나 싶다. 예수의 삶이 고난과 가난과 겸비의 삶을 통한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한 삶이었다면, 이용도의 눈에 비친 선교사들의 삶은 예수와의 삶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형식주의와 인간적인 요소들로 가득하여 너무나 세상적이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모양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당시 용도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고난과 가난과 수치의 역사였다. 그리고 민족의 고난의 현실은 자신의 현실과 같았다. 그런데 용도에게 위대한 점은 민족의 현실과 자신의 처지를 그리스도안에서 받아들이는 자기 정체성의 회복에 있었다.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예수가 지고 갔던 십자가의 역사로, 자신이 처한 고난의 인생을 예수가 살아갔던 고난의 여정과 연결시킴으로서 남의 눈으로 자기를 보지 않고 자신의 입지를 자기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것을 신앙 안에 받아들이는 그리스도 신앙 안에 자기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민족과 자신이 경험하고 있었던 부정의 현실을 동양의 물질에 대한 영의 궁극성 안에서,유에 대한 무의 궁극성 안에서 신앙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이용도의 한국의 영성 혹은 동양의 영성은 먼저 그의 자연 사랑에서 찾아진다. “자연은 나의 친구. 믿을 사람도 없고 사귈 사람도 없을 때 하늘 산 흐르는 물 공중의 별 밤의 산과 들, 초목 곤충 새들 이는 다 -- 자연에 속한 것으로 나의 친구가 되나니 이는 늘 이 친구를 보려 자연 속으로 들어갑니다.”24) 용도가 자연 속에 들어가 자연으로부터 배운 것은 무화의 과정이었다. 자연 안에서 인위적인 욕심을 끊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세계를 보았다. 하늘과 땅의 냄새를 보면서 편애하지 않는 공평함을 보았고,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는 자기 비움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자기 스스로를 위해 주장하지 않는 하늘과 땅의 움직임을 보면서 자신을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완성하는 것임을 보았다.25) 無爲의 관점, 無化의 과정이 곧 이용도에게는 신앙의 순례였고, 이는 동양적인 영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4)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서간집. 이 용도 목사 전집 제1권,77쪽. 1931년 10월 25일 이 태순 씨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이다. 이 편지에서 자신의 좌우명인 “苦는 나의 선생...貧은 나의 애처...卑는 나의 궁전...예수는 나의 구주...자연은 나의 친구”를 적고 있다.

25) 道德經 7장에 보면 老子는 다음과 같이 자연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

 

나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완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老子 원전. 오 강남 번역. 道德經. 43)

 

이용도는 자연을 벗삼아 자연 속에서 기도하는 중에 자기의 욕심을 비우고 그 안에 예수의 생명으로 역환하는 기도를 드렸다.

 

 

또한 이용도는 자연 속에서 발견한 물의 위대함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 유한 물이 강한 돌을 굴러가게 한다. 유한 골짜기 물이 단단하고 굳은 반석을 쪼개고 깨뜨려 모래를 만든다. 강한 것의 힘보다 유한 것의 조화가 실로 효하도다. 유는 우주의 본성이었나니 유가 강을 주관하였느니라. 우주만유의 본성은 선이오 유이었느니라.26)

 

柔가 强을 이기는 종교적 역설의 진리를 용도는 물의 낮은 데로 흐름과 자기 낮춤에서 배우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노자의 도덕경 8장에 물의 흐름을 통해 도를 가르치려 했던 것에서 그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道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

때를 가린 움직임.

 

겨루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 받을 일도 없습니다.27) 

 

 

    도덕경에서 가르치는 삶의 자세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물같이 되라”는 것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며 생명의 근원이 된다. 또한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정결케하며 세상의 허물을 지고 닦아 냄으로서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물을 이롭게 하고 생명을 제공하며 정결케하는 힘을 가진 물이지만, 결코 물은 남과 겨루거나 다투지 않고, ‘자기 낮춤’을 통해 만물을 얻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물 속에서 우리는 자기 겸비(self-humiliation)와 자기 승귀(self-exaltation)의 길이라는 종교적 역설을 배우는 것이다. 물처럼, 물처럼 되라.

 

     하늘과 땅이 가르치는 無化 혹은 無爲의 정신, 물이 갖는 자기 낮춤의 정신을 용도는 자연과 벗하면서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연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만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았던 것이다. 더불어 예수 자신도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진실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해 새벽 미명에, 혹은 아무도 없는 밤에 산과 광야와 들로 기도하러 나섰던 것을 알았고 이러한 예수의 삶을 스스로 닮아가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새벽 미명에, 혹은 밤이슬을 맞으며 밤이 맞도록 어떤 때는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며 또한 들과 산에 나가 자기의 생각과 뜻을 내어놓고 기도함으로서 주님의 뜻과 주님의 생명으로 다시금 채우는 “생명의 역환”으로서 삶을 가지게 되었다.

 

26) 이용도 일기 1929년 12월 24일. 성백걸의 “사랑과 정의의 사도,이용도의 삶과 사상,” 53쪽에서 재 인용한 것임.

27) 老子 원전. 오 강남 번역,道德經, 47쪽.

 

     이용도가 자연과 벗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신성시하거나 하느님과 자연을 일치시키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용도는 자연을 벗삼음으로 자연 안에 나타난 예수님의 겸비와 하느님의 뜻을 보았던 것이다. 이점에서 자연은 예수를 이해하는 그릇이었지 예수 자체는 아니었고, 생명을 이해하는 그릇이었지 생명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쉼과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자연의 품이 아니고 예수의 품이었던 것이다.

 

산아, 나무야,바위야,나를 가리워 주의 진로의 눈에서 피하게 하여주고,모든 인간들에게서 숨기어 수치를 면하게 하여다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산에서 범죄하여 산을 더렵혔사오매, 나는 산의 원수가 되었고,나무와 바위 아래서 내가 부정하였으매 저가 나를 멸시한지라 어찌 나를 덮어주며 가리워 주랴. 산과 나무가 나를 덮어주지 아니하고 바다가 나를 숨겨주지 아니하며 바람이 나를 듣지 않고 하늘이 나를 동정치 않는도다.

 

오 -- 나의 가련한 몸. 어디다 피신할고 -- 오직 나의 피신처요 구원의 섬이 하나 있으니 이곧 나사렛 예수 나의 주 그리스도시로다. 나는 저에게도 많은 죄를 지어 원수가 되었으나 그러나 저 많은 원수까지도 포섭할 사랑의 내용을 가진 신이었도다. 오 -- 주여 나를 숨겨주옵소서 당신만이 나의 구주로소이다. 사랑의 날개로 나를 덮어주소서. 그리하여 당신은 나에게로 향하는 바 저주를 당신 몸에 받으시는 것이옵니다.

오 -- 주여 나의 주님!28) 

 

 

    자연이 갖는 자기 비움의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움직임 곧, 무위의 과정을 통해서 용도는 동양적 예수, 한국인의 예수를 보았던 것이다. 또한 부드럽고 여성적이고 정신적이며 내 면적이고 평화적이며 절제하는 영성을 동양의 자연관에서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같 은 무위의 영성29) 혹은 무화의 영성을 통해 그리스도와 합일을 추구하는 일화의 이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과 벗삼아 배웠던 동양의 무위 혹은 무화의 영성은 예수와의 관계에서 신앙인(자신)의 모습을 “무”30) , “공(空)”31),“공(ball)"32) ,"연”33)으로 설명하고 또한 주님이 타

 

28)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일기. 143. 1931년 8월 17일 일기.

29) 용도의 무위의 영성은 예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가장 잘 나타난다. “내가 남을 사랑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사랑하라. 내가 선을 행한다 의를 행한다 하는 계획조차 없이 사랑하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사랑하라. 이런 형제의 사랑

      이야말로 참 봉사 하늘의 사랑일지니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이 하늘의 사랑을 실행하여야겠습니다.” (변 종호 편 저’ 이 용도 목사 서간집. 168쪽).

30) 용도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먼저 무가 되셨기에 우리도 주님을 위해 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나의 소유라고는 생전에 다 주를 위하여 무가 되게 하여 주시기 바라옵나이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무가 되어졌사오니 나는 주를 위하여 무가 됨은 마땅한 일이니이다.” (1930년 1월 3일에 드린 기도. 변 종호 편저,이 욘도 목사 임기. 72쪽).

31) 용도는 자신의 무화를 통해 마음을 비움(空)으로서 주님의 영이 충만하게 들어와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가 있었다. “우리의 소유란 전부 부인할 것입니다. 외적 소유나 심적 소유나! 그리고 아주 공허하여 무가 될 것입니다. 나의 이상 나의 주의 나의 계획 다 집어치우고, 오-- 주여 나는 무요 공이로소이다. 나의 위에 성령이 움직이어 주의 이상을 세우고 주의 계획을 세우시옵소서. 

      그리고 주께서 움직이옵소서. 그리하면 나는 주에게 딸려 움직일 것이로소이다”(1932년 2월 2일 평양 형제들에게 쓴 편지 중에서.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서간집. 104 쪽).

32) 무(無)와 공(空)으로 그 속에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공(ball)이 된다. “나는 주의 놀리시는 대로 놀 공이올시다. 나는 공을 봅니다. 줄 맨 공,아이가 줄을 당기면 오고 늦추어 보내면 가곤 하는 그 공을 봅니다. 그 공은 나요 그 주인은 주님이었습니다. 주여 사랑의 줄로 나를 매시옵소서. 그리고 맘대로 주께서 놀리시옵소서. 나의 운동은 그것이 나의 운동이 아니라,주의 팔의 운동이었습니다. 주의 팔을 움츠려 끈을 당기시면 나는 주의 앞으로 따라 들어올 것이요,팔을 펴서 끈을 풀으시면 나는 또 굴러나갈 것입니다. 주의 팔의 운동대로 들고,나며,굴고,노는 공이로소이다...나는 주를 통해서만 보고,주를 통하여서만 듣고,주를 통하여서만 걷고,동작하는 것이었습니다”(변 종호 편저, 龍道信學. 71-2쪽).

33) “나는 한 연이로소이다. 줄을 매어서 임자의 놀리는 대로 노는 연이로소이다. 오르게 하면 오르고,내리게 하면 내리고,좌로 하면 좌로,우로하면 우로,퇴금 주는 대로 줄을 풀면 나가고,감으면 오고 하는 연이로소이다. 연은 항상 그 얼굴을 임자에게만 향하고 있음이 그 특 색이로소이다. 만일 뒤집혀서 등이 임자 편에 온다면,이는 벌써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될 것 이었나

      이다”(Ibid.,72).

 

시는 “나귀 새끼 " 34) , "작은 나귀”35) 또는 “막대기”36)로 표현한다. 예수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용도는 無化와 空化를 통해 예수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다만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신앙의 주체는 자신에게서 예수에게로 예수의 생명에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에 접함으로 예수의 사람, 예수의 도구가 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에게로 향하는 과정은 웨슬리의 성화의 과정처럼 점진적이고 발전적인 것이나 이와 같은 예수와의 만남은 바로 노자의 도 형이상학에서 만물의 어머니인 도에로의 함일 과정과 유사한 형태를 가지는 것이다.

 

   이용도는 사상가나 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용도의 신학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들을 통해서 우리는 동양의 비 이원적인 실재의 이해의 눈을 가지고 순환적인 구조 안에 궁극적으로 영원한 도에로 회귀하는 동양적 신비주의의 영성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전개하는 실재의 이해는 양면성을 인정하면서도 두 실재를 실체(substance)로 인정하여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도록 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구도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 사이의 상관적인 상호 보충적 참여를 통해 이것과 저것을 포월하는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이해, 다른 말로 하면 음과 양의 상관적이며 상호보충적인 양면성을 인정하면서도 음과 양을 포월하는 궁극적 실재로서 노자의 도의 실재구조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용도의 용어로 하면 “정의와 사랑”의 균형을 말하면서 이 둘을 포월한 개념으로 천적애(天的愛)를 말하는 것에서 찾아질 수 있다.

 

34) 용도는 자신과 예수와의 관계를 예수를 태웠던 나귀로 보거니와 자신이 영광스럽게 된 것은 예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 __ 주여 크고 휼륭한 준마를 다 내어놓으시고, 비리 먹고, 연약한 이 나귀새끼를 이용키 위하여 불러 타 주시었으니 왕을 태운 나귀새끼의 영광이 얼마나 하오리까. 주님은 불편하시겠지만은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편리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무용한 이  나귀새끼에게, 영광을 입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을 나는 알고 있나이다”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일기. 165쪽).

35)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서간집. 41쪽.

36) 변 종호 편저, 龍道信學. 73쪽.

  

 

III. 이용도의 예수론

 

 

     이용도는 예수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에게 예수는 육신과 마음과 영혼과 생활전체를 구원한 구주였다. 그리고 가난하거나 당하거나 죽거나 살거나 그의 평생 사랑할 이는 예수이름뿐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먼저 예수를 사랑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어찌하여 예수를 사랑하느냐? 나는 예수를 믿어 병나음을 얻었고 모든 난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나는 중한 폐병으로 절망의 죽음만 기다리다가 기도하는 중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무서운 난치병이 나아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야 이적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잘 믿는다든지 못 믿는다든지 나는 이적을 믿습니다.

 

나는 또한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기한(飢寒)의 苦도 맛보았고 이 시대를 만나 감옥살이도 하여 보는 동안에 갖은 고생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고통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기었습니다.

 

또한 나는 일의 실패와 성 문제와 인생 문제의 번민에 접하여 극도의 고민을 견디지 못하여 한 때에는 자살하려고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믿어 이 모든 인간고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런즉 나의 하나님은 나의 육신도 구원하시고 내 마음과 영혼도 구원하시었습니다. 나의 생활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나의 구주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37) 

 

 

    그렇다고 해서 용도가 예수를 사랑한 것은 조건적인 것 때문에 예수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 예수를 사랑하였다.38) 이용도가 말하는 예수는 지성적으로 습득된 예수가 아니고 몸소 체험한 예수였다. 구체적으로 병을 낫게 하고 인생의 번민을 풀어주고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준 길과 진리요 생명으로서 예수였다. 그리고 그의 생활의 모든 초점은 예수에게 맞추어졌다.

 

예수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은 예수다!

소망에도 예수요 인내에도 예수요

기도에도 예수요 찬송에도 예수다

떠들어도 예수요 잠잠하여도 그저 예수뿐이다.

생시에도 예수! 꿈에도 예수! 그리고 잠꼬대에도 예수다!

먹어도 예수요 입어도 예수요

자도 예수요 일하여도 예수다!

그저 우리 생활의 중심 초점은 예수뿐이다.

오 -- 예수는 곧 우리 모든 것의 모든 것이요 또 우리의 생명이다.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이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 유익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오 --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37)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서간집. 166-7쪽.

38) Ibid., 167.

 

오 -- 우리의 진리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어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오 -- 우리의 길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어 우리는 행할 수 없습니다.

오 --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여!

영원히 우리와 같이 하여 주옵소서.39)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서 예수는 “肉의 예수, 榮의 예수, 富의 예수, 高의 예수” 아니고 “靈의 예수, 賤의 예수, 貧의 예수, 卑의 예수”였다.40) 용도가 경험한 예수는 영광의 예수가 아니고 고난의 예수,너무나 비천한 예수였다. 영광의 신학이 아니고 십자가의 신학이었다. 당시 이용도가 경험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 아래 신음하던 민족의 십자가 고난이었고, 자신에게 가난과 병고가 늘 괴롭게 하였다. 젊어서는 아버지의 몰이해와 봉건주의에 대주가로서 가정이 평탄하질 않았다. 가난은 평생 용도를 따라 다녔고,결혼하여서 슬하에 7남매를 두었으나 아들 영철을 제외하고는 생후 2-3년 이내에 모두 조실하는 아픔을 겪었다.41) 이러한 아픔을 용도는 송창근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 육편으로 보면 아주 사나운 팔자를 타고 났습니다. 그러나 영편으로 보면 예수의 팔자와 거진 같은 팔자라요. 어쨌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팔자였으면 그만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육이 곤고할 수밖에 있나요. 십자가로서 그 팔자 그 운명을 설명하게 된 것이니까!

 

형님! 우리는 쉴 새 없는 것을 축복으로 알고 병약함을 은혜로 받읍시다. 우리는 그것에 주의 보혈을 섞어 요리합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진미를 만듭시다. 그러한 모든 곤고가 아니면 어디서 십자가의 진미를 맛볼 여지가 있겠습니까?42) 

 

 

    용도는 자신의 처지를 예수의 처지와 연결시킴으로서 자신의 고난을 수용하거니와 오히려 고난을 예수를 따르는 통로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뿐 아니라 삶의 모양까지 그리스도와 같아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용도가 이해한 예수는 가난하고 고난받는 종이었다. 그리고 그 가난과 고난을 통해 예수는 인간을 하느님의 세계로 포용할 수 있었다. 어느 자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용도는 가난했던 예수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천동으로 태어나서 빈궁의 사람

무식의 노동자 무명의 종교가

무의무가한 한 고아로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자리 삼아

남들의 반생을 겨우 일생으로 살고

마침내 외의 내의조차 빼앗기고 참형으로 종신한 내가 아니냐!43) 

 

39)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서간집. 118-119쪽.

40) 변 종호 편저,龍道信學. 21쪽. 

41)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사진첩 및 승모문집. 이 용도 목사 전집 제10권,19쪽. 

42)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서간집. 144쪽. 

43)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서간집. 135쪽. 

 

 

    용도가 보았던 예수는 가난한 자, 고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버림받은 죄인으로 마침내는 십자가의 처형을 당한 육신으로는 실패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육체의 실패를 통해 영의 완성을 가져왔다는 것이 용도의 입장이다. 이러한 예수에 대한 이해는 용도로 하여금 육을 넘어서 영을 기쁘게 하는 삶을 촉구함으로서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도록 하였던 것이다. 

 

영이 안하자면 육은 고하여야 되는 줄 압니다.

영의 부는 육의 빈에서 잘 획득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세상을 버리십시다. 육은 버리고 영에 삽시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도 풀의 꽃이요,육체의 생명도 아침 안개, 육체에서 곤하고,영에서 길이 편하게 하소서. 육에 슬프고, 영에 슬프게 하소서. 육에서 수치를 당하고, 영에서 영광을 얻게 하소서. 나의 육신은 죽은 것이읍고,세상은 망할 것이로소이다.

큰 싸움은 시작되었소이다. 영과 육의 싸움이외다.

이 영은 이 육을 먹어야만 흥할 것이외다.

나의 영은 이 육을 다 먹어 삼킨 후에야 승전고를 울릴 것이외다.44) 

 

 

    그렇다면 용도는 예수의 자아 이해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용도는 예수에 대해서 요한복음 저자의 신학을 따르고 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기록되어있다. 예수는 용도에 의하면 육은 입으신 하느님이시다. 형체로는 육을 가지셨지만 내면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영으로서 예수는 하느님과 하나이신 분이시다(外肉內神).45) 그렇다고 용도는 예수를 인성과 신성으로 구분하여 실체 개념으로 예수를 보려고 했던 희랍철학적 존재론적인 구분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용도의 예수 본질은 어떤 성질이나 본성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가 살았던 고난의 삶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의 힘이 곧 예수를 이루는 본질인 것이다. 

    예수가 外肉內神이란 말은 예수는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하느님이란 뜻이다. 그리고 육체를 가진 예수가 내면의 하느님의 영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예수는 삶이 시작한 순간부터 고난의 삶일 수밖에 없었다. 이점에서 용도에게 나타난 예수의 삶은 영의 삶을 위해 육이 고난을 당하는 금욕주의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살았던 가난과 고난과 겸비의 삶이 --십자가의 삶 -- 예수의 삶을 이루는 본질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용도에게 있어서 가난이나 고난은 피할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난과 고난은 진리를 얻고 고난받는 사랑의 예수를 만나는 통로가 된다. 곧 예수가 살았던 삶을 삶으로서 예수와 만나는 사건을 생명의 사건으로 신앙의 사건으로 용도는 이해했던 것이다. 

 

    용도가 경험했던 예수는 고난받는 예수였다. 그래서 용도는 “참된 진리는 필히 고를 통하여 오는 것이었으니 苦를 경유치 않는,곧 그저 흑판 믿어서나 책자의 흑점을 통하여 얻은 바 진리를 흙덩이 같다고 한다면 전자는 금덩이 같다”46)고 했고,“슬픔은 주님이 들어오시는 문”47)  으 로 보며 고난을 통해 겟세마네와 골고다 언덕의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였던 것이다. 

 

44)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관계 문헌집. 이 용도 목사 전집 제 9권,128쪽. 박봉배 박사의 논문,“이 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와 그 윤리성”에서 박봉배 박사가 이 용도의 서간집에서 인용한 것을 재 인용한 것임. 

45)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일기. 132쪽.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나이다.” 용도는 성서 중에서 시편 이사야 아모스 예레미야를 읽으라고 추천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성서는 요한복음을 읽으라 하면서 주를 사랑하는 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933 년 3월 10일 일기) 용도는 요 8:16; 8:29; 10:30; 17:11; 17:21; 7:28; 10:34; 6:63 등을 인용하면서 하느님과 예수 는 영으로 하나됨을 표현하고 있다. 

46) 1932. 3. 10. 일기.

47) 1927. 4. 17. 일기.

 

 

 “오 -- 주여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주님은 너무나 천한 주님이시었나이다. 너무나 무력한 주님이었고 너무나 비천한 주님이었나이다.”48) 이러한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이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이 용도의 삶이었다. 그래서 “주여 나를 이끄사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당신의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시읍소서”49) 기도하면서 “시련을 당하는 것을”50)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아 즐거워”하며 “골고다의 영광”을 달게 받으려고 하였다. 

 

    예수께서 가난과 고난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의 자기비움의 사건인 겸비속에 잘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하느님의 뜻을 향한 순종의 삶이 그려져 있다면 이러한 순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예수는 자기를 비우는 겸비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움으로 비로소 예수는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사랑과 진리의 본체로서의 생명이 되시었다. 

 

     용도는 예수의 자기 비움의 겸비한 삶에 대해서 “저는 본래 부요하시더니, 귀하시더니, 편하시더니, 영광스러우시더니, 든든하시더니,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천하셨고, 불편하셨고, 수치를 받으셨고, 약하시었고”51)라고 표현한다. 이는 바울의 빌립보서 2장 6-11 에 나오는 케노시스 기독론을 생각나게 한다.52)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 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에서 바울의 기독론은 십자가와 영광, 자기 비움과 채움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용도는 고난의 예수에 초점을 맞추고 영광의 예수에는 그렇게 많은 무게를 주지 않는다. 이것은 용도자신이 논리적 일관성을 갖는 기독론의 정립에 관심하지 않고 신앙인의 자세와 삶에 초점을 두고 예수를 그리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경험한 가난과 고난과 굴욕의 삶에서 예수의 삶을 보았고 그러한 예수의 삶 속에서 생명과 신앙의 본체인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던 것이다. 

 

     용도가 이해한 하느님의 본질은 양면을 가지는 바, “일면은 의(진리)요 일면은 사랑”이었다. 이는 용도가 아모스서에서 배운 진리였다. “아모스는 죄와 형벌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되는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요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말하였다”53) 

 

48) 1931. 5. 7. 일기. 

49) 1931. 5. 7. 일기. 

50) 1933. 4. 4. 일기. 

51)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일기. 138-9쪽. 

52) 용도의 바울에 대한 인용은 주로 고린도서에 제한되어 있다. 용도의 성서인용에 있어서 바울의 대표적인 자기 비움의 기독론인 빌립보서가 인용되지 않는 것은 재미있는 발견이다. 

53)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저술집. 143. 

 

 

하나님이 가진 사랑은 정의가 없는 사랑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리와 정의를 포용한 사랑이다. 불의와 죄악을 해결하지 않은 사랑이 아니고 불의와 죄를 치유하여 진리에 다시 세우는 것을 사랑 속에 포함시켰다. 그래서 용도에게 있어서 天的愛(하느님의 사랑)는 정의와 사랑을 포월한 사랑이었고, 이러한 구조는 말 있는 종교와 말 없는 종교를, 예언자 전통과 제사장 전통을, 진리나 정의와 사랑을, 신앙의인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성화를 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천적애가 신앙인에게 가능하게 되었던 것은 예수가 곧 생명으로 예수와 만남으로 생명의 역환을 가져오기 때문이다.54)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양면성은 신앙인의 자세 가운데 성화의 과정, 흑은 천적애로 향하는 과정에서 용기와 겸비로 대변되기도 한다.55) 그리고 이 같은 하느님의 본체가 예수의 삶 가운데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를 만나고 하느님을 만나 자신의 삶 속에 체현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이점에서 용도의 예수론은 철저하게 자기에게 체험된 생명의 힘으로서, 믿음의 내용인 진리와 사랑의 본체로서 이해한 예수였다. 이점에서 예수의 수육의 사건이나 생애나 가르침 모두가 의와 사랑의 삶이었고 마침내 이 둘을 포월한 천적애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 천적애의 사랑이 드러난 자리는 가난과 고난과 겸비였다. 

 

    용도의 예수 이해가 체험적인 것이라면 결국 용도가 체험한 신앙론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용도는 신앙 본업론을 주창한다. 용도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모든 인생의 전인격적이고 궁극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인 부업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할 본업이었다. 1931년 11월 30일 평양신우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용도는 신앙 본업론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앙이 나의 본업이라. 전도도 나의 본업이 아니요 기도도 나의 본업이 아니었으며 그외 전체가 다 나의 본업은 아니었습니다. 노동, 상업, 농업, 어떤 직업이든지 나의 본업은 아니올시다. 나의 본업은 오직 신앙 그것이 있을 따름이 올시다. 신앙을 위하여 전도하고 신앙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먹는 것을 위하여 입는 것을 위하여 신앙하는 것이 아니요 신앙을 인하여 먹고 신앙을 인하여 입는 것이 올시다...전도도 기도도 이것이 신앙의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으면 이는 무익할뿐더러 유해한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모든 것을 신앙을 기인하여 가지고 하지 않으면 이는 죄요 신앙을 위하여 하지 않으면 이는 무익한 것이올시다.56) 

 

 

    그렇다면 용도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는 신앙이란 교리적인 고백이나 급진적인 변화의 사건으로서 신앙을 말하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성화의 실천적 사랑의 삶을 신앙의 내용으로 보았다. 용도는 예수의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면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다 주신 사랑의 완성을 보았거니와, 이는 그가 쓴 1931년 1월 28일 일기에서 쓴 신앙의 4 단계에서 잘 나타난다.57) 

 

54) 삭개오가 변화된 삶을 가져온 것은 그가 예수 안에 사랑과 생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변 종호 편저,이용도 목사 저술집. 180쪽). 

55) Ibid., 211쪽. “신자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바 그 용기는 예수의 용기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주님을 밝히 증거할 용기가 있어야겠다...그러므로 신앙에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신앙은 용감하면서도 또 겸비함을 요한다. 겸비하지 않으면 강퍅하여지므로 우리는 겸비하여 뉘게서든지 배울 수 있어야겠다. 참된 신앙은 내강외유이어야 할 것이다.”

56)변 종호 편저,이용도 목사 서간집. 91쪽. 

57)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일기,119쪽. 신앙에는 4 시대가 있고 각 시대의 대표가 있다. 

1. 교회시대 - 교회의 의식제도 등 교리에 복종하는 때 -- 베드로가 대표자. 

2. 수도시대 - 아무리 의식을 지키고 교리대로 행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자기 마음과 행실은 죄의 상태를 면치 못하여, 죄를 버리고 육을 멸하여, 금욕하여서 도를 이루려는 때 -- 야곱이 대표자.

3. 신앙시대 - 아무리 금욕 멸죄한대도 여전히 죄인 됨을 면치 못하는지라. 자기가 성결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면 낙망할 수밖에 없으리라. 고로 도를 닦음으로가 아니요 다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확신하는 때니 -- 바울이 그 대표자.

4. 사랑시대 - 신앙만을 가지고도 오히려 불만족을 느끼게 되나니 이는 사랑이 없음을 자각함으로써이다. 신앙으로 용기와 담력을 얻어 죄와 싸울 수는 있고 죄인을 책망할 수는 있으되 죄인을 긍휼히 여길 수는 없음을 어찌하랴! 이에 오 -- 주님이시여 나의 믿음이 사랑에 있게 하옵소서. 나에게 사랑과 긍휼을 주시옵소서 하고 빌게 되는지라. 이에 사랑에 들어가나니 이 곳이 절정이라  여기서부터 영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 요한이 그 대표자.

       1기는 -- 교회가 그 주체라 교회를 의지하고

       2기는 -- 자기가 주체라 자기 노력으로야 될 줄 알고

       3기는 -- 자기노력도 부인하고 다만 하나님만 신뢰함으로만 될 줄 알고

       4기는 -- 사랑의 화신이 되어 자기는 사랑의 신에 삼킨 바 되기를 원하느니라. 

 

 

이 신앙의 4단계는 교회사적으로 교부 시대, 수도원 시대, 종교개혁 시대, 현재의 교회 시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동안 개혁자들의 신앙이 400여년 동안 인류의 영계를 이끌어 왔지마는 이제 현대는 새로운 양식의 요구하게 되었는바, 곧 신앙의 완성으로 사랑의 시대를 고대하는 것이다.58)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시대는 곧 예수와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생명의 영성인 것이다.59) 

 

    용도가 말하는 새 시대의 신앙이란 교회의 의식을 통해서도, 자신의 금욕적인 수도를 통해서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의 가르쳤던 신앙의인의 교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물론 용도는 신앙의인을 통해 신앙의 주체가 하느님이 된다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느니라(롬 1:17). 의인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이 있어야 산다."60) 그러나 용도는 신앙의인을 넘어서서 사랑의 삶이 곧 구원을 이루는 영생의 삶임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 웨슬레에게 있어서 칭의의 사건이 구원의 현관인데 반해서 성화의 과정이 곧 구원의 집이라고 이해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점에서 용도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죄인이면서 의인이라는 루터의 가르침보다는 생명이신 예수(생령이신 성령)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된 삶을 추구하는 사랑의 완성을 이루어가는 성화에 구원의 완성이 있음을 가르친 웨슬리에 가깝다 하겠다. 이것을 용도는 “생명의 역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신앙이란 곧 생명의 역환의 일이외다. 세상에 살던 나의 죄악의 생명은 하늘에 사는 예수의 생명과 바꾸어지고, 물을 바라던 나의 생명은 영을 원하는 그 생명과 바꾸어지고,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 애쓰던 나의 생명은 환희와 평화와 용기로 날뛰는 그 생명으로 변하여지고, 땅 위에서 물욕과 정욕에 쌓여 오래 잘 살기를 꿈꾸던 나의 생명은 이를 저주하여 버리고 천에 살려는 생명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번뇌와 고통비애와 탄식, 마지막으로 사망을 차지하게 되어 있는 그 생명은 예 수에게 갔다 주어 십자가상의 제물이 되게 하고 그 대신 천상에 있어 나의 영이 성의를 따라 진리에서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그 생명을 예수님에게서 얻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곧 생명과 생명의 바꿈질이었습니다. 믿는다 하여도 이 생명의 역환이 없어, 그는 아직 사망에 거하는 자 올시다. 우리는 부절히 우리의 생명에서 불의를 찾아 가지고는 예수에게로 달려가서 그 생명의 의와 바꾸어 가지고 나오나니 이것이 곧 우리의 기도 중에서 되어지는 일이었습니다.61)

 

 

58)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일기. 108-9쪽. 

59) Ibid., 109쪽. 

60) Ibid., 20쪽. 

61)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서간집. 85-86쪽. 

 

    “생명의 역환”이라 함은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죄와 상관없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으로 우리의 죄된 생명이 바꾸어지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예수에 더욱더 접근하고 가까이 갈수록 더욱 성숙하고 변화된 삶을 통하여 예수와 일화(一化)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용도가 추구했던 삶은 예수를 닮는 삶, 예수와 하나되는 삶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고난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추구한다 하여 그를 고난의 그리스도 신비주의라 칭하고,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추구한다 하여 사랑의 그리스도 신비주의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용도는 예수와 구별이 없는 신비적 합일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민경배 교수는 이용도가 예수의 고난과 자신의 고난을 예수의 여정과 자신의 여정을 일치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62)  이는 용도가 자신의 예수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깊이 표현한 것일 뿐 그의 신앙과 삶 속에 자신의 위치를 예수와 일치시키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63) 

 

    앞서도 말했거니와 용도는 “신앙의인”에 자신의 신앙을 기초하고 있고, 성화의 과정을 새로운 시대의 신앙의 과제로 본다는 점에서 용도를 주관적이고 이단적인 신비주의자로 몰아세우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그리고 용도의 이러한 성화의 과정으로 이해한 새 시대의 신앙의 과제는 동양의 무화 혹은 무위의 전통에 서 있는 신앙의 자기 내면화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로 신앙의 보이는 교회사적인 4단계의 구별을 용도는 대중에서 개인에로 옮겨가는 신앙으로 표현한 바 있다. 64) 여기서 개인이란 함은 만사에 작은 일에 충성함으로써 큰일을 이루는 일을 뜻한다. 

 

62) 민경배, "이용도의 신비주의 연구: 한 교회사적 고찰”,  이용도 목사 관계 문헌집. 49-55쪽. 

63) 용도의 호는 시무언(是無言)으로서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사용하였지만, 성서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시므온과 6세기의 성자였던 시메온의 생애를 자신의 생애의 모델로 삼아보려는 데서 시므온을 사용하였다. 그가 자신과 일치시키고 배우려 했던 시므온과 시메온은 경건한 삶을 통해 주님을 기다렸던 사람들로 용도는 자신과 예수를 일치시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말랑 깽이 할아버지로, 막대기로, 나귀새끼로 보는 용도는 예수 앞에 자기를 비우는 겸손을 가지었지, 자기와 예수를 일치시키는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보겠다. 교회개혁을 위한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용도는 누가 한국교회를 위해 예수의 역할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민경배는 이것이야말로 용도가 바로 예수와 자기를 일치시킨 경우라고 몰아가지만(이용도 목사 문헌집, 40- 4 2쪽),예수의 원하는 교회를 위해 누가 일할 것인가 라고 이해한다면 오히려 차별이 없는 예수와의 일치를 통해 구속의 은총과 속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신앙의인이 필요치 않는 신비주의의 오류에 빠진다는 지적은 그 힘을 잃는다고 생각한다. 

64)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서간집. 149쪽

            나는 대중을 위하여 있는 자가 아니로다. 

다만 개인을 위하여 살려고 하노라.

대중은 나의 대상이 아니요

개인만이 나의 진실한 대상이로다.

나는 개인보다 대중을 더 중시치 아니하며

개인보다 대중을 더 두려워하지 않노라.

나는 대중을 위한 일의 허명을 버리고

한 사람을 위한 진실에 들어가려 하노라.

저 예수는 一인은 위하여 있는 자요

대중을 위하여 있는 자 아님을 찾았노라.

대중을 대하였을 때에도 그 一인一인을 살피어

그 정지를 긍휼히 여기시었도다.

一인의 주님을 통찰치 못하고는

대중의 주님을 살필 수 없느니라.

나는 대중을 위하여 크게 이름 있게 살지 않겠노라.

다만 一인을 위하여 작게 이름 없게 살려 하노라.

 

 

곧 신앙의 성숙한 내면화, 무화, 공화, 영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용도의 예수론을 살펴보았다. 용도의 예수론은 이론적인 신학적 일관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예수를 존재론적으로 서술하는데 있지 않고, 자신의 생애에 변화와 생명을 주어 고난 가운데서 사랑의 삶을 살도록 했던 그 생명의 예수였다. 그의 설교와 글에서 나타난 목회자 혹은 부흥사 용도가 체험한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을 그 본질로서 그 안에 가진 외육내신의 존재였다. 그리고 육체를 입으신 하느님으로서 예수는 신앙의 내용이 되는 생명 그 자체였다. 이점에서 용도는 믿음의 교리적인 고백과 논쟁의 일삼았던 서구의 기독론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자연스럽게 따라 산 예수의 생애를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삶의 모델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의 자아 안에 변화와 변혁을 경험하는 인격과 신앙의 성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용도는 예배의 대상자 혹은 타자로서 우리의 내면과 상관없이 우리의 삶에 침투에 들어오는 예수(imputation)가 아니고, 이미 우리 안에 우리가 만나고 있는 내안의 너로서 생명이신 예수(impartation)이다. 

 

 

IV. 나가면서.

 

     이용도는 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이를 신앙으로 승화시켜 살다간 선지자요 신앙실천가였다. 그는 1901년 4월 6일 태어나서 1933년 10월 2일 예수와 같은 나이인 33세의 일기로 순교자적 삶을 사셨다. 그에게는 가난과 고난이 그리고 교회가 평생을 곁에서 따라다녔고 예수의 복음을 열렬히 전하다가 예수처럼 삶을 마쳤다. 그는 예수에 미친자였고 예수에게 눈을 떼지 않고 주님의 사랑을 우매한 백성에게 피를 토하며 전하다가 가셨다. 님이 가신지도 이제 64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그의 외침과 가르침은 현대 교회를 향해서 더욱 힘차게 들려오고 있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가 평생에 외쳤던 한국 교회의 갱신은 아직도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65) 

 

65) 용도가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부흥은 수적인 성장이나 화려한 교회경영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교회의 부흥이란 신앙의 개혁을  뜻하는 것으로 신앙인들의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1927년 2월 9일 그의 일기에서 그는 한국교회에 없는 것과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한국교회의 암울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없는 것 : 기도, 개인 전도, 열심, 사랑, 용기, 감사, 찬송, 협동, 성경공부, 구도심, 봉사, 가정 기도; 한국교회에 있는 것 : 잔말, 말질, 평론, 돈만 모으려는 생각, 게으름, 시비투쟁, 비겁 공포, 불평, 근심 걱정, 분열, 연문학, 구금심 탐욕, 이기, 가정 불안.”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일기. 21쪽). 

 

    이용도가 한국교회에서 보았던 것은 영성의 피폐였다. 그의 신앙 4단계를 논하는 중에 한국의 교회는 선교사들로부터 수입된 “신앙의인의 과정”에 머물러 있었다. 신앙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은혜와 인간의 죄인 됨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신앙의인이란 자신의 변화가 없이 교리적 고백만으로 끝나버리게 될 때, 자기의인화에 빠짐으로서 신앙이 형식주의와 이기주의, 나아가 교권주의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이점에서 이용도는 400여년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종교 개혁적 신앙, 신앙의인에 기초한 신앙이 한때는 힘을 발휘하여 획기적인 신앙의 영성을 주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 개혁적 신앙의 실패를 용도는 선교사들의 실정과 연결시키거니와, 이제 한국에서는 한국인에 의한 새로운 영성이 요구되는 바, 사랑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이것을 용도는 천적애의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천적애에 이르는 과정을 웨슬레의 성화의 과정에서 그리고 동양의 도의 실재 구조 가운데 무위의 과정 혹은 무화의 과정과 연결시켜보려고 하였다. 

 

    여하튼 이용도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독특한 예수 이해를 하였던 선견지명이 있었던 예언자였고, 생명의 역환을 통한 신앙의 실천을 통해 역동적으로 변화의 삶을 가져오는 생명의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이점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아직도 서구의 바벨론 포로에 잡혀 우리의 영성과 숨결보다는 교리화된 문자에 얽매어 교권화를 치닫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회가 점점 더 이기적이고 형식적이 되어 기독교 선교를 막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60여년전 아직 우리민족과 교회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교회를 향해 외쳤던 이용도의 피맺힌 절규를 다시금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용도가 한국 교회를 위해 최후로 들려주고 싶었던 젊은이들에게 도서관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고, 교역자들에게 너무 가족과 혈연에 연연하지 말고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는 목회를 하라고 일렀던 것이다.66) 오늘 우리가 한국 교회의 여러 가지의 개혁을 논할 수 있겠지만, 한국 교회가 젊은이들을 위한 선교를 열어놓고 있는지,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존경받을 만큼 진실하게 예수의 삶을 사는 지도 생각해 볼일이다. 

 

    이제 글을 마침에 있어 이용도의 목회와 삶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먼저는 그의 예수를 향한 생명과 사랑의 영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예수와의 일화를 추구하고 영성을 철저하게 내면화함으로서 가족과의 관계, 제도로서의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관계, 교회의 역사성과 사회 윤리성에 대해서는 등한히 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 현대 교회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는 액면 그대로 용도의 삶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물론 그의 메시지 속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표현된 정의, 공의, 의, 진리에 의해서 교회의 개혁적인 메시지를 사랑과 위로의 메시지와 함께 담겨 있지만, 그의 전체적인 삶과 사유가 천적애로 포월되는 과정은 오히려 신앙의 개인화, 내면화로 치달았다고 보겠다. 이점에서 기독교가 갖는 사회의 책임이 간과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사랑의 영성화를 통해 볼 때 기독교의 메시지는 철저한 개인주의와 철저한 보편주의의 사유에서는 대단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공동체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제도나 사회가 갖는 합리성에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같은 제안이 용도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 신앙의 사회적인 표현보다는 개인의 내면적 영성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의 사회 참여를 통해 사회를 개혁시키기에 앞서 용도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개혁, 그리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독교인 개개인의 변혁이 먼저 있어야 했었다. 이러한 개혁을 위해서 요구된 것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대별을 하고, 이 둘 중에 영적인 삶의 추구를 지향함으로서 육적인 고난을 오히려 미화하는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66)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저술집. 79-80쪽. 

 

 

정말 영적인 삶을 위해서 육은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이것도 이용도의 상황에서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바꿀 수 없는 상황으로 부딪혀지는 가난과 병고와 고난을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는 것을 용도의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신앙의 위대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교회의 입장에서 가난과 고난은 이상화될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주신 지혜를 통해 같이 나눠먹고 베푸는 사회구조를 개선함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무지와 게으름을 타파함으로서 보다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신앙을 감정과 낭만에서만 할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그의 성화신학 혹은 천적애의 사랑이 사회와 구조를 개선하고 변혁하는데까지 끌고가야 하는 것이 남아있는 후대인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용도의 동양적인 영성, 한국인의 영성에서 그의 자연사랑을 보았다. 그리고 자연과 대화하고 자연 속에서 무화와 자기 비움의 지혜를 배웠다. 자연 안에 내재된 하느님을 보았거니와 그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만났던 것이다. 자연은 더 이상 우리의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늘 가까이 하고 찾아야 할 친구이며 우리와 함께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대리인인 인간으로서 자연을 돌보고 가꾸어야 할 책임을 갖게 된다. 용도의 자연사랑은 오늘 신학하고 목회하는 후대인들에게 생태계의 위기에서 새로운 생태신학의 가능성을 미리 실천하였던 선구자로 볼 수 있겠다. 자연이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라면, 기도할 수 있는 성소라면, 그리고 그 성소를 통해 예수의 생명을 만나고 예수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라면, 자연의 파괴가 곧 하느님을 세상에서 몰아내고 예수님을 몰아내는 것이란 메시지를 듣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영성이 메말라 가는 것은 자연을 이기적으로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용도가 사용했던 영육 이원론은 실체로서 몸과 마음이 나누어져 있어 육은 열등한 것이고 영은 우등한 것으로 이 둘의 관계를 선-악 이원론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고, 용도가 사용했던 영-육 이원론에 입각한 금욕주의의 사유는 관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하고 싶다. 보이는 것은 무조건 열등한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우등한 것으로 보는 것은 역사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등 수 없이 세상을 분리하고 차별하는 죄를 범하여왔다. 따라서 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를 만났던 용도의 삶은 이미 그 삶 속에서 범재신론(Panentheisms)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67) 이런 점에서 보이는 육적인 것도 하느님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신성한 것이고 경시될 것이 아니다. 영과 육은 관계개념이지 서로 독립된 실체개념일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영과 육은 명사로서 사용될 것이 아니고 한 실재의 두 면을 나타내는 형용사로 사용되어야 한다. 즉 영적인 삶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고 육적인 삶은 인위적인 욕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용도는 죄를 인위적인 것이라 표현하였고, 68) 마귀를 인간 욕심의 의인화라 하였 다. 신앙인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육적인 이기심에 기초할 수 있고, 영적인 사랑에 기초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영의 육화, 영의 삶화, 예수의 생명의 삶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이러한 영적인 삶을 위해 용도는 영-육 이원론적인 금욕주의의 삶을 살았다는데 있다. 

 

67)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저술집. 231쪽. “하나님의 말씀을 만물 속에 잠재합니다. 진리의 연석에 들어가면 만사에 개안합니다. 신을 찾음은 우주를 전유하는 일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말은 예수가 그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68) 변 종호 편저,이 용도 목사 일기. 126쪽. “저희의 죄 -- 성신의 뜻보다 인위만을 쫓는 저희의 죄 -- 를 알았다.” 

    이런 모든 평가와 제안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민족의 현실과 척박한 교회의 현실에서 외롭게 외쳤던 광야의 소리, 회개의 소리, 사랑의 소리에 먼저 깊이 겸비한 자세로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태도인 줄 믿으면서 글을 맺는다. 

 

 

[이용도 신앙과 사상 연구회 활동 경과보고]

 

 

1995년 10월 7일 / 종로 Y.M.C.A 강당에서 제1회 이용도 신학 심포지움을 예수교회 공의회 주최, 강남대학교 신학대학 후원으로 개최하였다. 

 

1995년 11월 / 예수교회 공의회 정기회에서 제1회 이용도 신학 심포지움을 평가하면서 한국교계에서 이용도 목사님의 신앙과 그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분들이 많이 있고 또한 이를 체계적으로 학문적으로 정리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음을 생각하고 약간의 기금을 마련하여 교파를 초월하여 이용도를 연구하는 모임을 결성하기로 하고 그 모임을 위하여 강남대학교 신학대학의 정희수,박종수 두분 교수님에게 의뢰하여 추진하도록 하였다. 

 

1996년 2월 / 예수교회 공의회에서 의뢰한 두 분 교수님과 공의회 소속 목회자 중 인영남, 강태우 목사  두 분을 추가로 선정하여 가칭 ‘이용도 신앙과사상 연구회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정희수 박사님을 추대하여 추진위원회로 하여금 본격적인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이용도 신앙과 사상 연구회 추진위원회’에서 한국 교계와 신학계에서 이용도 목사님을 흠모하고 추앙하는 분들을 선정하여 고문 및 연구위원으로 위촉하고 발기인 대회 및 창립총회를 1996년 6월 22일 가지기로 하였다.

 

1996년 6월 22일 / 종로5가 백주년 기념관에서 발기인대회 및 창립총회를 가지고 박종수외 42인 의 이름으로 발기인 선언을 하였으며, 회칙을 통과시키고 초대회장에 이윤구 박사, 부회장에 정희수박사, 총무에 박종수박사를 선출하였으며 간사로 김길송  목사, 이정배박사를 선임하였고 간사에 인영남목사, 강태우목사를 선임하였다. 

 

1996년 10월 14일 / 이용도 신앙과 사상연구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여 제2회 이용도 신앙과 사상 심 포지움을 본 연구회 주최와 예수교회 공의회 후원으로 개최하였다.          강 사 : 이상윤 목사 (신영감리교회)

“웰리엄 피도스목사가 본 이용도”

논 찬 : 심광섭 박사 (감리교 신학대학 강사)

 

1997년 3월 20일 / 이용도 신앙과 사상연구회에서 공모한 “이용도 논문 학술상” 공모자 중 2명을 선정하다. 

정학진 목사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졸업/역사신학 전공)

인영남 목사 (강남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목회상담 전공)

 

1997년 5월 19일 - 20일 / 이용도 신앙과 사상연구회 주최로 “연구모임”을 가지다. 

 

* 장 소 : 경기도 용인 로스기념관

* 발 제 : 정학진 목사

                " 이용도와 문학 "

인영남 목사

 " 칼융의 개성화 과정에서 본 이용도의 종교체험”

* 공동토의 : 이용도 신앙과 사상연구회의 앞으로의 연구과제들에 대하

             여 참석자 전원이 진지하게 토의하다. 

* 참가자 : 25명

 

                                    

1997년 11월 3일 / 제3회 이용도 신앙과 사상 심포지움을 본 연구회 주최와 예수교회 공의회 후원으로 개최하였다. 

강 사 : 이세형 박사 (정동감리교회)

  “시무언 이용도의 예수론”

논 찬 : 이정배 박사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

           최 인식 박사 (서울신학대학 교수)

 

 

 

 

            [본연구회에서 앞으로 추진계획 중인 사업들] 

 

 

1.  이용도 목사에 관한 문헌과 그동안 발표된 학술지들을 총 망라해서 수집하는 작업.

2. 연구위원회를 중심으로 계속적인 이용도목사의 신앙과 사상을 연구하는 작업.

3. 이용도목사 장학기금을 마련하여 후학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작업. 

4. 참신한 학술논문 및 설교문을 교파를 초월하여 공모 선정하는 작업. 

5. 회원확보

6. 이용도 목사 연구논문들을 묶어서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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