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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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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09-07 14:05 조회2,7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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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이용도 신앙과 사상 연구회" 학술대회



 

 

 

"이용도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시 간 : 2004년 10월 2일(토요일) 늦은 3시 - 6시

                            장 소 : 감리교신학대학교 채플 1층 1세미나실




 


                     주  최 / 이용도 신앙과 사상 연구회

                     


 

 

 

 

 

 

순     서



 사 회 / 이 찬 수  박 사

(본 연구회 총무) 

 

 

 

 

개     회     사  ------------------------------------------- 사     회     자


 

기              도  ------------------------------------------- 김 희 방 목사

                                                                                          (본 연구회 의장)

 

 

인     사     말  ------------------------------------------- 이 정 배 박사

                                                                                       (본 연구회 부회장)

 

 

강            연 1 ------------------------------------------- 김 형 기 목사 

                                                                                                 (한신대 강사)

 

 

 

 

"이용도의 독립운동의 실체"

 

 

 

논            찬 1 ------------------------------------------- 이 상 윤 목사

                                                                                (기독교사회봉사회 총무)

 

               휴              식                                                                                           

 

 

강            연 2 ------------------------------------------- 최 대 광 박사 

                                                                                                 (감신대 강사)

 

 

 

 

"아나키스트 이용도"

 

 

 

 

논            찬 2 ------------------------------------------- 정 지 련 박사

                                                                                (인천여신 교수)

 

질  의  응  답  ------------------------------------------- 청              중


 

 

 

알              림   ------------------------------------------ 사     회     자

 

 

 

폐     회     사   ------------------------------------------ 사     회     자

 

 

 



아나키스트 이용도


최대광(감신대 강사)


    들어가는 말


    2004년 6월 18일 KBS의 열린 채널에서는 진보누리에서 제작한 프로그램 “주민등록증을 찢어라” 1시간동안 방영하였다. 주민등록증 탄생의 원인도 모르는 대다수의 고등학생들은 사진찍고 지문에 검정 잉크를 묻히면서 이것이 마치 국가적으로 공인된 ‘성인식’의 일부인양 착각한다. 그러나, 주민등록증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위시한 31명의 게릴라가 청와대를 급습하기 위해서 남파된 이후 생겨난 것이라고 그 프로그램은 전했다. 국가 권력이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느낀 직후, 증명서를 통해 국민을 ‘감시'하기 위해서, 생겨난 “통제 증명서”가 곧 주민등록증이다. 지금도, 국민들은 길거리 곳곳에서, ‘검문'을 당하고,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국가 기관의 통치양식에 복종하고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가입할 때마다 우리는 이름보다 더 중요한 ‘번호’를 기입한다. 종이 위에 코팅한 주민등록증이 범죄자들의 지문을 색출하는데 많은 시간을 절약해 주었지만, 컴퓨터 지문 자동인식기능이 국가 통치시스템의 핵심 구조로 자리매김할 즈음에, 주민등록증은 ‘전자식’으로 바뀌어, 수십명이 매달려야 할 지문감식을, 단 한명이 처리할 수 있는 ‘경제적’ 방식으로 전환 되었다.

    84년도에 죽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가 국가기관이 즐기고 있는 통제의 효율성이 원형감옥 감시 시스템인 페놉티콘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통제’는 오늘도 길거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주민등록증 외에도 다양한 신분증들이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있으며, 핸드폰을 통한 위치추적, CCTV에 의한 녹화와 기록, 모든 기록이 문서화되고, 이는 다시 항목별로 나누어지고, 번호가 매겨지고 (무덤에도 번호가 매겨져 있다), 분류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데이터베이스화된 개인을 위해 커리큘럼이 짜여진다. 유전자 정보 시스템이 체계화된 이후에는, 현재까지 부분적으로 진행 되고 있는 국민들의 생체정보가 보관되고 분류될 것이다. 국가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강화 되었다. IMF이후 ‘애국’이라는 이름의 금 팔기가 국내 신드롬이 되더니, 월드컵 이후 붉어진 “흥분하는” 국가주의의 등장, 고구려사 왜곡을 통한 반 중국적 국가주의, 최근 야구선수, 연예인의 ‘병역’의무를 통해 불고 있는 애국주의 등등, 통치 시스템은 자신들을 방어할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이 위치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러한 유의 통제와 충성심 강요되고 있다. 과학을 믿었던 근대 이후 인간들이 예견한 자유와 진보의 시대는 악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기독교의 권력구조 역시 강력한 통제/관리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서구 교회는 구원의 독점,마

녀사냥,퇴출 (ex_communication)이단 논쟁 등으로 민중들을 국가에 대해 헌신하게 하였고,우리나라의 개신 교회는 이단/정통을 통한 교리적 통제,반공주의의 주입,교회 정치 안에서의 일반신도 배제,대교회 중심주의와 지교회 설립 그리고 셔틀 버스를 통한 교인 싹쓸이 등으로 ‘독점' 구조를 확립해 나가고 있다. 이미 변선환 선생의 출교사건에서도 보여주고 있듯, 이 통제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학문적 자유를 억압하며, 신학교에 “교회에 도움이 되는 신학” 곧 성장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을 가르치라고 협박한 바 있다.

    현대의 '통제’적 시대상황에 대한 반동으로 학자, 노동계 등에서 과거 비 현실적이리만치 개인의 절대자유를 믿고 꿈꾸었던 아나키스트들이 요즘 국내에서 활발하게 재 평가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도그마를 증오했던 그들이기에, 아나키스트들 모두를 일관적으로 정체 하기란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정형화 되어 있는 관객의 예술이해를 부수기 위해 전시장에 변기통을 올려놓아 전통적인 예술 가치를 조롱한 뒤샹과 같은 다다이스트들과 그들의 후예인 초 현실주의자들을 포함해서, 자본주의를 비판하여 사회주의를 옹호하나 중앙당을 거부하는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자본주의적 아나키스트, 생태계를 옹호하는 자연주의 아나키스트, 테크놀로지 사회를 멋진 신세계로 기대하는 테크놀로지 아나키스트, 기독교의 신앙을 옹호하는 기독교적 아나키스트, 신과 교회를 거부하는 무신론적 아나키스트까지, 이들은 실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느슨한' 이해라면,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하여, 통제구조를 거부하거나 혹은 이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은 아나키스트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서구에서나 우리나라에서, 교회의 억압적 이데올로기와 국가권력의 통제에 저항하였던 수많은 ‘신앙인'들도 존재하여 왔다. 서구의 신비주의자, 종교 개혁적 이단들, 토마스 뮌쩌를 위시한 독일의 농민전쟁 참여자, 재 세례파, 베긴회와 같은 평신도 수녀회, 모라비안과 같은 평신도 섹트 등이 그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무교회 주의자, 기독교 공동체 운동가 그리고 이 논문의 주제가 될 이용도 목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세속적 의미의 아나키스트가 인간의 자유와 진보를 신뢰하였다면, 신앙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의 절대 자유를 담보할 하나님과의 만남과 이에 따른 ‘체험' 그리고 실천을 교회가 독점할 수 없다고 외친 사람들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교회를 옹호하는 조직, 교리, 신조 등을 증오하였고, 개개인의 하나님 ‘체험'에 궁극적 가치를 부여하였으며,교회조직에 등을 돌린 주변부 사람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한국교회의 한 위대한 신앙인 이용도 목사를 아나키즘의 시각으로 다시 보려 한다. 교회가 교리와 교권으로 정체화 되어 있는 이때, 이념적으로 우파적 성향을 강하게 내보이고 있는 이때, 그리고 탈 교파적 신학이 등장하며, 탈 교회적 ‘영성'운동이 서구에서나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때, 이용도 목사의 아나키즘은 예수 체험과 실천의 한 단초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용도의 아나키즘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아나키즘이 무엇인지 살펴 보도록 하자.

 


    몸말


    1. 아나키즘이란?


    2000년 4월 개봉한 “아나키스트"라는 영화는 잘생긴 배우 장동건과 정준호를 내세워, 실제 있었던 암살 지하단체인 "의열단"의 활약상을 그려내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산뜻한 ‘검은' 복장, 와인을 즐기며 거사 (암살)를 하는 멋들어진 모습, 그리고 항상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는 단원들의 사생활... 현대 액션의 근원은 서부영화라는 말이 있듯이,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고, ‘권총'으로 무장한 ‘차가운' 시선의 소유자들이 악당을 물리치는 모습은, 그들의 알키타입인 존 웨인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물론 "아나키스트"와 같이 황색 얼굴을 한 버버리 코트의 사나이들이 스크린의 끝에서 끝으로 붕붕 날아 다니는 모습은, 동양 갱스터 무비의 액션스타 주윤발이 시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토록 샌님 같은 멋쟁이들이 ‘애국’과 ‘조국’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상의 결합이다. 그들의 유일한 활동이란 ‘조국을 위한’ 테러 뿐이다. 또한 그들은 폼 나는 얼굴에 잔뜩 멋을 부리며 사진찍기를 좋아하고, 도박과 마리화나를 즐기고, 여자들과의 로맨스에 빠져 있다. 압박, 굶주림, 폭력에 떨고 있는 조국을 구출하기 위해 일어난 숭고한 테러집단의 이미지와 위에 언급한 브르주아적 이미지가 쉽게 결합되지 않는다. 영화를 찍은 감독이 007시리즈나 조폭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게다. 007 의 문란한 생활, 빈틈없음, 냉철함은 한국 조폭영화에서 출현하는 두목들의 모습 그대로다. 이들의 이미지를 의열단 멤버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그 증거는 인간의 완전한 평등을 주장하는 아나키스트 그룹이 조직 내에서 조폭식 상하관계를 따지고 있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액션은 관객들의 눈과 귀를 간지럽혀 주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아나키스트란,총알을 발사하며, 버버리 코트에 와인을 즐기는 세디스트적 테러리스트”라고 오독誤讀 하게끔 만든다.

    이 오독은,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발생된 현상이 아니다. 숀 쉬한에 의하면 20세기 초 서구의 영화는 아나키즘에 대한 거부감을 충분히 느끼게끔 하였다 한다:


20세기 초기 영화들 역시 아나키스트를 음흉하게 묘사함으로써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부추겼다. 당시의 영화들은 아나키스트에 대해 본능적인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심지어는 한참 훗날인 1960년대에도 로버트 베이커는 그의 영화 ‘시드니 거리에 대한 포위공격'에서 예전부터 내려온 구태의연한 고정관념을 재활용했다.... 1970년대 중반에 나온 클로드 샤브롤의 스릴러 ‘나다'는 미국 대사를 프랑스로 납치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난다는 내용을 담는 등 좀더 동시대적인 배경을 설정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검은 옷을 입은 광적인 우상 파괴자'라는 아나키스트의 이미지에는 티클만큼의 변화도 없었다.1) 

 


    글의 앞 부분에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나키즘”이라라는 기표를 (signifier) 풀이하는 우리시대의 대중적 기의 (signified)는 “테러리스트”라는 것을 밝혀내고자 함이다. 동시에 an + archy 곧 왕권과 국가에 대한 과격한 거부 속에 혼란을 즐기는 자들이 아나키즘을 추종하는 세력들이라는 선입견 역시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시대를 전후한 아나키스트들 역시 암살과 폭파를 중심운동으로 삼았으며, 일본인 반 천황주의자 가네코 후미코와 결혼한 한국인 아나키스트 박열은 서양의 허무주의를 흡수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박열은 사회와 질서, 법률제도, 도덕, 종교, 국가주권 등은 모두 약육강식이라는 투쟁관계를 표현하는 미명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약육강식 관계는 인간사회뿐만 아니라 만물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학대 속에서 약자로서 인종하는 것이 저주 스럽게만 여겨졌고,모든 사물에 반역 복수함으로써 만물을 멸하는 것이 위대한 자연에 대한 합리적 행위"라고 믿게 되었다.2) 

 


박열은 서구의 니힐리즘의 영향하에, 이성주의로 고착화된 '전통'을 증오하였고, 이 범주를 확대하여 적자생존의 자연질서까지도 파괴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격한 사유체계 뒷편에는, 그러나, 박열이 소유하고 있었던 나름대로의 믿음을 감지할 수 있게끔 한다. 그것은 ‘투쟁, 관계의 극복, 약육강식에 대한 증오다.

    적자생존을 중심한 사회분석은 구한말 시대 일제에 의한 사회 진화론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미 에드워드 사이드가 다윈의 ‘진화론'이 비 서구 민족들을 진화가 덜 된 인물로 폄하 하거나,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에서 당연히 도태되어야 할 존재들로 삼았다고 평가 하였다. 이렇게 왜곡된 학문체제가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 때, 초창기 개화파 지식인들은 사회 진화론을 받아들여 “실력 양성론” 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식민지 통치를 합리화한 사회 진화론은 그러나,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 킨이 과학화하였던 “상호부조론”의 저항을 받는다.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에 의하면, “적자생존”이 다윈 자신의 이론이라는 것보다는 그의 생물학적 이론을 받아들인 후세대 철학 / 사회학자들의 탓이라는 것이다:


1) 숀 쉬한, 우리시대의 아나키즘, 조준상 옮김,(서울: 필맥, 2003),28-29

2)야마다 쇼지, 가네코 우미코, 정선태 옮김,(서울: 산처럼, 2002), 138-139


나의 관심을 집중시킨 커다란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다윈의 법칙이라고 알려진 ‘적자생존'이라는 결론은 사실 그 후계자들이 개발한 것이다. 후계자들 중에는 헉슬리 같은 가장 지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문명사회에서 파렴치한 행위는 없다. 이 법칙에 따르면 문명사회에서 일어나는 파렴치한 일들,백인과 소위 열등 인종의 관계,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 구실을 찾지 못할 것이 없다.3) 

 


당시 사회에서 “적자 생존이... 하나의 종교로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확인”4)한 크로포트킨은 “동물간의 상호부조, 원시인의 상호부조, 고대인의 상호부조, 중세도시의 상호부조, 우리시대의 상호부조”5)에 대한 작업에 들어간다. 즉 “생존경쟁”의 시각으로 사물을 재단하는 것이 아닌,“협동"이라는 틀 안에서 생태계 구조를 파악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상호부조론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적자생존적 사회 진화론의 법칙에 대항할 근거를 제공하여 주었으며, 후에 이 사고 방식은 공산주의운동과 결합되어 아나코 코뮤니즘의 형태로 발전되어 나갔다고 한다. 초창기 한국 아나키즘으로 학위를 받은 이호룡의 글을 읽어보자:

 

1910년대 국내 아나키즘의 주된 내용은 아나코 코뮤니즘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것 한국인들이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던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상호부조론을 중심으로 하는 아나키즘을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는데 가장 적합하였던 것은 약육강식,적자생존의 생존경쟁 원리를 부정하는 상호부조론이었으며,상호부조론을 새로운 사회운영 원리로 내세운 아나코 코뮤니즘이 반제국주의 사상체계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다.6) 

 

 

아나키즘이 적자생존을 거부하는 “협력”적 이론위에 서 있음을 볼 때,이 사상의 현대적 뿌리는 '투쟁’이 아닌 ‘화합’이며 ‘전쟁’이 아닌 ‘평화’임을 알 수 있다.

 

    이덕일은 아나키즘을 “모든 정치적 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 기관이 행사하는 강제수단의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및 그 운동”7)으로 정의하면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도,“자유 연합주의”8)로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위에 언급한 아나코 코뮤니즘이 기존의 공산주의와 다른 점은 공산주의는 플로레타리아와 당의 권위를 절대시하나, 아나키스트들은 그 조직에 완강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아나키즘을 정체할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이 탄생한다. 그것은 "타율"주의가 아닌 "자율"주의라는 것이다. 즉, 아나키즘은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자율적, 자유연합주의"라고 볼 수 있다.

 

3) 크로포트킨 P.A.크로포트킨 자서진, 김유곤 옮김,(서울: 우물이 있는 집, 2003) 590

4) 위의책, 591

5) 위의책, 592

6)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서울: 지식산업사, 2001),92-93

7) 이덕일,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서울: 웅진닷컴,2001),103

8) 위의책


    이러한 근대 정신은 중세가 끝나며 갑작스레 나타났던 것이 아닌, 이미 중세의 신비주의자들, 이단들, 그리고 이들의 결집체가 종교개혁 그리고 독일의 농민전쟁을 근저로 탄생했다는 주장이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장 프레포지에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중세에는 이단이라는 형태로 교회의 권력에 맞서 혁명적 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중세의 이단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에 로마제국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비정통교와는 달리 기독교의 교의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이단은 지식인들에게 신학 용어로 호소하거나 정통 기독교에 맞서 다른 교리를 표방하는 지식인들 사이에 일어난 운동이 아니 었다. 12 - 13세기의 이단들은 스스로를 사회적, 혁명적, 민중적 운동으  규정했다. 이단들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모두 교회의 계급적  질서와 로마의 권력을 공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종교개혁가들이나 발도파 신도들은 통속어로 전도하고,번역하고 읽었다...9) 


 

장 프레포지에가 지목한 현대 아나키스트의 선조들은 또한 “영혼의 자유 수도회. 프란체스코회의 신령파,모라비안"10)등도 망라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이단'은 교회의 권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언어로 성서를 읽고,하나님과의 직접적 만남을 꾀함으로써, 인간과 신의 중재자인 교회와 신의 세속적 왕권인 로마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특히  ‘영혼의 자유 수도회' 는 중세 독일의 대표적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후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단체다. 이들의 “자유연합적”이고 “자율”적인 모임은 이미 교회의 변방에서 있었던 고대와 중세의 신비주의적 유산을 물려 받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운동의 후예들은 카톨릭보다 더더욱 교권과 교리를 숭상하는 그룹으로 ‘타락'했지만 말이다.

    영국의 신학자 돈 큐핏은 서방교회의 전통을 교리신학적 전통과 신비신학적 전통으로 나눈다:

 

 

 

9) 장 프레포지에, 아나키즘의 역사, 이소희외 옮김,(서울: 이룸,2003),22

10) 위의책,23-24

 

 

 

 


      지배적 통치의 에토스는 기관적, 교권적 그리고 가부장적이다. 그 정신은 종교적 율법이 생산되고 강화되는 구조인 교리신학으로 표현되었다. 이 전통 즉 “교부적 전통"은 특히 남성 중심적이었다...종교적인 행복과 성취는 아주 긴 미래 곧 종말이나 죽은 이후로 미루어 졌다. 이 과정에서 올바르다고 여겨진 신도들은 수권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행했으며. 그 거대 구조를 강화하는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점차적으로 이미 고정된 구조는 자체가 목적이 되었고 예배는 의례적 퍼레이드처럼 상징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또 다른 전통은 거의 모든 면에 있어서 위의 전통과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이는 저항의 전통이다. 그 전통은 비규정직이며 기관중심적이 아닌 카리 스마적 운동 이었다. 그 운동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직자보다는 평신도의 운동이었으며, 남성적 형태가 아닌 여성적 형태였다. 예배에서 사용되 는 언어는 율법적이기 보다는 시적이었고,(구원)의 외형은 먼 장래가 아닌 가까운 미래였다....

    최근에 와서는, 그 갈등이 율법, 훈련, 집단적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교리신학과 개인적인 종교적 행복을 추구하는 저술가들에 의해서 생산된 신비신학이 었다.

11)  


비록 큐핏은 서양 종교사의 흐름을 이분법적 구조로 지극히 단순화한 혐의가 짙을지라도, 그가 마지막 문장에서 암시하고 있듯이,신비신학과 이를 재 발견하려는 새로운 신학적 흐름이 ‘영성신학'이라는 학문적 분야로 떠오르고 있음을 볼 때, 교리와 신조, 조직 중심의 남성적 종교운동에 저항하는 체험적, 시적,공동체 중심의 여성적 영성운동은 오늘의 시대에 다시 점화된 기독교 아나키스트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흐름을 읽은 현대의 창조영성 운동가 매튜 폭스는 '종교'와 ‘영성'을 나누며, 전자는 '조직'이요, 후자는  ‘체험'이라고 하면서, 종교시대의 종언과 영성시대의 시작을 선언한 것이다.12) 또한 ‘기독교'라는 접두어에 거부감을 느낀, 호주의 아나키스트 데이브 아담스는 이를 “그리스도-아나키”라는 신조어로 범주화하며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글을 달고 있다: “내 경험으로는,낮과 밤이 다르듯 이, 어둠과 빛이 다르듯이, 추위와 더위가 다르듯이, 친구와 차 한잔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것과 오밤중에 길거리에 내쫓겨 아무 곳도 갈수 없고 아무도 찾지 않 는 것이 다르듯이,그리스도-아나키는 기독교와 다르다.”13)


11) Cupitt, Don, Mysticism after Modernity. (London Blackwell Publishers, 1998), 82-83

12) Brown, David Jay, “Counting Our Original Blessings with Mathew Fox,” in Brown David Jay and Novick Rebecca

     McClen, Voices From the Edge. (Freedom CA: The Crossing Press, 1995), 150

     “저는 종교와 영성이 커다랗게 차이가 나지 않기를 바라는데, 사람들은 그 차이점에 대해서 명확히 해야 하고,종교에 안주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요. 영성은 경험에 관계되어 있으며, 종교는 불행히도 조직의 구조로써 끝나버리게 되지요. 즉 교황들이 와

      서 건물을 구입 했다는 뉴스의 리포트와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난주에 이곳 베이 지역에서 (San Francisco, San Jose,

     Oakland, Berkeley를 호칭하는 말) 크로노클 이라는 잡지 머리기사에 카톨릭 교회가 12개의 교회 건물을 판다고 하더군요. 왜

      냐구요? 그 교회참석 인원이 35 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예요. 종교는 그 건물들을 팔아 버

      려야 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영성은 모든 것들의 근원들, 즉 놀라움, 경이로움, 고통, 고난, 창조성, 정의 그리고 동정심의

      근원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교역시 그래 야하는데,불행히도 그 길을 벗어났습니다.’,

13) Adams, Dave, Christi-Anarchv Discovering a Radical Spirituality of Compassion, (Oxford, England Lion

     Publishing Co., 1999)73—74


폭스가 종교와 영성을 조직과 ‘체험, 이라고 양분한 것을 아담스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아나키를 “폭력적 조직과 자비심”이라는 구도로 양분하며, 고통과 어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연에 “직접 참여"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자비심의 원형임을 믿는다. 폭력의 사이클에서 자멸하지 않고 인류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법을 발견한다면,그는 인류가 간절히 찾고 있는 과격한,비폭력적인 희생적 사랑의 모델이라 는 뜻이다.”14)

    결론적으로 볼 때, 아나키즘은 인간의 자율을 선호하고,자율적 그룹들간의 상호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자유를 확충해 나가는 이데올로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나키즘은 정치 이데올로기 안에만 머무르는 운동이 아니라, 종교사와 영성사 안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음은 물론,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적 아나키즘운동의 효시가 됨을 역시 알 수 있다. 묻혀있었던 고대와 중세의 반 도그마 그룹들을 재발굴하고 있는 현대의 ‘영성신학'은 기독교 아나키즘 혹은 그리스도-아나키에 새로운 혜안을 열어 줄 것이다. 다음은 이용도의 아나키즘적 성향과 형태를 살펴 보기로 하자.



     2. 이용도의 아나키즘


    이미 변선환 선생이 이용도 “두고 두고 깊이 생각해야 할 한국 신학의 이정표"15) 라고 평가 하였듯이,이용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해 왔었다. 이는 신비주의자, 예수 운동가, 열광주의자, 한국교회의 개혁자, 종말론적 신비주의자, 포스트 프로테스탄티스트 등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평가의 공통점은, 이용도가 기존의 교권적 틀을 거부했다는 데 있다. 이용도와 신비주의" 혹은 “이용도와 열광주의"  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도 “이용도와 교권주의" 혹은 “이용도와 정통교리"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용도가 협성 신학교를 입학하기 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5번의 옥고를 치르는 등 그의 혁명가적 소질을 유감 없이 발휘하였음을 익히 알고 있으며, '감리교'라는 교파적 틀 역시 무의미 하게 하면서, 장로교, 성결교에서도 활발하게 부흥운동을 벌였고,특히 그의 삶 후반에는 교권 주의가 그에게 철퇴를 가하게끔 빌미를 제공한 입신 그룹들과의 긴밀한 접촉도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부흥회의 와중에, 그는 아현 성결교회에서 집회 도중 쫓겨났고,장로교회에서 이단으로 선언 당했으며, 결국 그의 모 교단인 감리교회교단에 휴직계를 제출 했음도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이 말해 주듯이,그의 글들 곳곳에서,형식주의적 틀을 특히 증오하였고, 거대한 종교적 예식에도 저주를 퍼 부었다. 다음은 그의 글에서 나타나는 탈 교리적 선언의 한 부분이다:


14) 위의책,100

15) 변선환,한국적 신학의 모색, 변선환 아키브 편집,(서울: 한국신학 연구소,1997), 357


   

 

사랑은 곧 생명이라. 사랑없는 신앙은 생명없는 신앙이니라. 교리와 신조의 송독,교회 출입의 허식, 이런 신앙의 형식 (껍질)으로 신앙의 전부를 삼아 스스로 속는 자 그 얼마나 많은 현대인 인고, 네가 신앙의 소유자이냐 그러면 너는 사랑의 소유자가 될지이다. 사랑이 없는 신앙은 불 꺼진 등이오 맹인의 안경 이니라.16)


아 이 조선교회의 영들을 살펴 주소서 머리속에 교리와 신조만이 생명없는 고목같이 앙상하게 뼈만 남았고, 저희들의 심령은 생명을 잃어 화석이 되었으니 저의 교리가 어찌 저희를 구원하며, 저희의 몸이 교회에 출입한다고 하여 그 영이 어찌 무슨 힘과 기쁨을 얻을 수 있사오리까17)


악한교회가 강단에서 교리와 신조를 설명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되 그리스도의 마음은 잊어 버리었구나! 믿음이란 교리의 승인이나 신조의 묵인에 있지 않고 예배의식을 거행함에도 있지 않고 연설에나 기도에도 있지 않고 할렐루야 아멘하며 노래하는 데도 있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그 신이 나의 신이 되어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므로 죽음에서 나오는 것이어늘.18)


아 오늘 교회의 고갈함이여 어찌 그다지도 심한고! 교리와 신조는 있으되 참된 신 (信)은 없었구나 사각된 교리와 고목된 신조에 만족이 없으면서도 그래도 그것으로 억지로 만족하려는 현대 교인들의 무지와 무언에 주는 슬퍼 하시도다. 형제들이여!  참 신,순령 을 받으소서 기독교는 원래 사업의 교가 아니요 신의 교이며, 지적 교가 아니요 천적 교이며, 물적이 아니요 영적 이었나이다.19)  

 


 

그의 선언에서 볼 때, 교리는 껍질이요, 사각이며, 생명 없는 고목이요, 화석이다. 이미 ‘형식화'되어있는 설교와 기도도 질타하며 찬송도 공격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저술에서 ‘교리'에 관한한 긍정적인 발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교권을 지키고자 하였던 교리신학자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용도의 선언과 그의 선풍적 부흥회는 ‘악몽’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당시 교단을 장악하며 미지의 신神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선교사들에게 “화 있을 진저”라며 독설을 퍼 부었으며,그들의 프로그램에 따라 형식화한 교회 역시 그가 분노했던 대상이었다:


16)이용도, 이용도 목사 일기,변정호 편집,(서울: 장안출판사,1993),173-174

17) 위의글, 181

18) 이용도, 이용도 목사 서간집, 변정호 편집, (서울: 장안출판사,1993), 67

19) 위의글, 104


 

 

아 선교사들의 교만함이여 너희가 화 있으리로다. 겸비하여 배울 줄을 모르고 남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자로만 자처하였으니,너희의 눈을 막아 앞을 보지 못하게 하였도다 예수를 잡아죽인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장로와 영수들이 곧 너희들 이었느니라.20)


한국 교회는 점점 무력해 간다. 점점 속화해 간다. 교회 안에는 훈훈한 맛이나 따뜻한 맛이 조금도 없고 들어서면 찬바람이 쓸쓸히 돌 뿐이다. 시기가 가득하고 분쟁이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다.21)


교회를 사랑하여 사람을 죽이는 모순! 열렬한 신자에게서 종종 나타나고 있었던 사실을 생각하여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취할 바 입니다22) 

 

 

당시 선교사들은 교회 현장이 아닌, 선교센터를 장악하여, 각각의 교회를 ‘성장'과 ‘정체’에 초점을 맞추어 각 지역 교회와 신도 그리고 목사들을 재단하고 있었고, 선교지 분할정책과 네비우스 방법을 통해 교회와 교회를 '효과적'으로 통제 (언더우드: 권력의 경제(economy of power))하고 있었다.23) 그들에게는 ‘효과적'선교 정책 였는지 모르나, 이것은 이미 선교센터와 지역교회와의 “상하관계"를 구체화한 것이었다. 앞에서 밝힌 “교리와 신조”에 매몰된 교회는 이미 ‘생명'을 상실하였고, ‘교회' 혹은 ‘조직'에 대한 사랑 혹은 ‘충성심'이 교회 내 상하 위계질서를 형성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교회 중심 권력이 정치적 배제排除를 시작했던 것이다.

    조직을 우선시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나키스트들이 목놓아 거부하였던 악의 근원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의 신념은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변종호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교권과 조직을 유지하고자 하는 교회의 ‘건물'도 “다 불살라 버리고"라면서,잿더미 위에서 참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한다: "벽돌로 담을 쌓고 울긋불긋 장식을 해 놓은 것이 이것이 교회가 아니 예요. 이 예배당을 다- 불질러 버리고 잿더미 위에서라도 몸과 마음을 아주 바쳐 참된 예배를 드려야 그것이 교회 올시다.”24) 중세의 ‘교회'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성경읽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직접적 만남을 추구하였던 신비주의자들의 후예인 종교개혁자들이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에서 그대로 재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용도가 자신의 선생이라고 밝혔던 톨스토이가 저술한 책 중 하나인 복음서 개 략 Gospel in

Brief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20) 일기,125

21) 일기, 32

22) 서간집, 177

23) 이에 관해서는,최대광 “세계 신학적 관점에서 본 이용도목사의 영성과 신학,” 이정배 외, 이용도의 생애,신학, 영성, (서울: 한

       들 출관사,2001), 71-75 참조.

24) 변종호, 이용도 목사 전, (서울: 장안 출판사,1993),72-73


예수가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살아 있는 새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

유대인들이 말했다.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년이 걸렸는데, 당신이 어떻게 사흘 만에 새 성전을 지을 수 있다는 겁니까"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성전보다 더 소중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너희가 '나 여호와는 너희 제물을 기뻐하지 않는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기뻐한다..' 고 했던 예언자의 말뜻을 이해했다면, 너희가 지금처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할 때,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세계가 살아 있는 성전일 것이다.”25) 

이용도가 톨스토이의 복음서 개략  을읽어 보았는지 아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서로의 강조점이 틀릴지라도,기존의 조직과 건물 중심의 교회가 아닌 “살아있는 공동체”를 추구했음에는 확실하다.

    사회주의자였으며, 훗날 정동교회 담임목사가 된 김광우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용도는 톨스토이의 인생론과 참회록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톨스토이는 나의 선생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인생의 의의에 대해서 다른 누구에게 보다 많이 배웠습니다.”26) 이용도의 서신에 답한 김광우는: “성서 안에서 인생을 알고 또 진리의 주체를 발견한 톨스토이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열정이 나의 가슴에 용솟음 쳤던 것이었습니다”27) 라고 화답하였다. 이는 이용도가 일회적으로 김광우에게 톨스토이를 소개했던 것이 아니라, 그를 ‘자주’인용했다는 것이고, 특이할 점은 사회주의자에게 원시 기독교적 공동체를 이상향으로 꿈꾸었던 아나키스트 톨스토이를 소개하면서, "톨스토이는 내 선생"이라고 한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프르동과 같이 소유를 죄악”28)으로 여겼으며,“자연과 교감하면서 살고, 자연을 보다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시골에서"29)사는 검소함을 주장하였고, "돈은 폭력과 권력의 핵심"30)으로 여겼으며, "차르의 전제정치에 반감을 품고 있던 톨스토이는 국가권력과 모든 정부형태에 대해서 맹렬한 증오심을 느꼈다.31) 이러한 사상적 기반을 근거로 한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소로우의 불복종 운동과 함께 후에 간디와 마르틴 루터 킹에게도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근로, 금연, 금주, 검소 등의 기반으로 정교회를 개혁하려던 톨스토이의 삶이, 이용도에게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설교로 다시 탄생한다:


25) 톨스토이, 레프,톨스토이 성경, 강주현 옮김,(서울: 작가정신,1999),31-32

26) 서간집,22

27) 김 광우,빛으로 와서. (서울: 탁사,2002), 91

28) 장 프레포지에, 위의책, 273

29) 위의책,272

30) 위의책,273

31)  위의책,274


다른사람은 다 - 나보다 낫게 여기고, 겸비하므로 순종하며, 말없이 늘 주님을 묵상하고, 땀이 흐르도 노동할 것, 이것이 우리 일입니다.32)


고는 나의 선생, 빈은 나의 애처, 비는 나의 궁전, 자연은 나의 애인의 집으로 하고 금년에 나는 거기서 주님으로 더불어 살리로다.33)      

 


즉, 이용도는 아나키스트적 성향을 가지고 톨스토이를 만났고, 이것이 그 자신의 아나키즘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직과 교리를 거부하고 그가 찾으 려고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생명'이었다.

이 생명에 대한 신비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비가 오는 보니 꽃 필 봄이 온 줄을 알겠나이다. 비에 젖은 땅속에는 새 생명들이 움직이고 있지요. 오래지 않아,오래지 않아. 적은 생명들의 기꺼운 노래를 이땅 위에서 듣게 되겠지요. 오-생명이여! 없는 듯이 묻히어 있는 작은 생명들이여!34) 

 

주여 저 어린아이에게 울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 울음소리가 깊이 '잠든 어머니를 깨워 젖을 찾는 소리가 되었으니 만일 그 울음소리 (시끄러운)가 없었더라면 애기는 굶어 죽을수도 있고 깔려 죽을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듣기 싫어도 그 애기에게는 그 생명을 지켜주는 무기입니다.

오 - 그 울음소리,당신의 경륜이 오묘하도다35)

 


 그의 시적인 '생명찬가'는 그가 사랑해 마지 않던 '예수'에게 전도되어,“예수의 생명”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된다. 그의 글들을 읽어보자:      


 

주님의 진리는 다만 일종의 설교가 아니라 “나를 따르려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것이 아닌가 나의 형제여! 십자가다 참된 결합은 “나의 피는 참 마실 것이요 나의 살은 참 먹을 것이니" 이것이다. 어느 것이나 다 십자가가 아닌가 생명과 생명이다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의 결합이다.36)


자식이 죽게 되니까 어머니가 자기의 동맥을 끊어 그 피를 그 입에 흘려 넣었습니다. 피를 먹어야 산다니까. 전신의 피를 다 쏟아 부었습니다. 아들은 정신없이 받아 먹습니다. 아들은 차차 생명이 들어옵니다. 나중에는 생기가 돌아 살아나 눈을 뜨고 일어났습니다. 오 - 그러나 그 어머니는 전신의 피를 다 쏟은 탓으로 죽었습니다. 두 손의 동맥을 끊고 손을 자식의 입에다 대인 채 어머니는 죽은 것이었습니다. 자식의 죽을을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죽음에 대신 피를 흘리셨고, 우리는 그 피로 살게 되었습니다. 주는 사형을 당하시고 우리는.. .37)

 


32) 서간집, 77

33) 일기, 71

34) 일기, 26

35) 위의글,40

36) 이용도, 是無言: 이용도목사 글 모음,예수교회 엮음, (서울: 다산글방, 1993), 23

37) 일기,78-79


“예수의 생명”은 예수의 피이며, 이는 곧, “예수의 사랑”이다. 이용도는 이를 시詩 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교권을 수호하려던 교리와 신조의 저 편에서, 그는 예수의 생명인 사랑과의 일화一化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그 신이 나의 신이 되어서)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예수의 생명" 은 마치 서구에서 학자들의 손에서 탄생한 개념인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응하는 토착적이며 시적 표현이 아닌가? 우주적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의 시공적 제한을 극복하고 지금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하나도 모자람 없이 ‘돌파'하고 있다면, 2000년전 골고다의 피흘림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침투하여,우리의 생명을 ‘사랑'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예수의 사랑이 나의 생명이 되는 것을 이용도는 “생명의 역환"으로  즐겨 표현 하였다.


 

우리는 기도에 들어갈 때마다 반드시 주님의 귀한 생명을 얻어 가지고 나오기 위하여 나의 불의를 찾아 들고 들어가서 이를 값으로 드리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생명 역환구에 가서 기웃 기웃하고 또 무엇을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일을 더하고 더할수록 우리의 영은 부하고 부하여 부족을 느낄 것이 없는 거부에 이를지니 이는 우주만물의 소유주이신 주님이 우리의 물주가 되신 까닭입니다.38)


소유의 역환: 주님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는 세상의 생명을 바쳐야 한다. 옛것 을 버릴수록 새것은 온다.39) 

 


예수의 사랑으로 역환된 우리가 하나님과 합하여지고 (Union with God), 하나님 께서는 이 온 우주의 ‘물주'가 되시오니,그를 신앙하며 ‘일화'하는 것은 곧 우주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과격한 발언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과격성은 박열과 같은 '파괴적’이 아닌, 하나님과 하나됨을 통한 절대자유의 쟁취 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8) 서간집 , 86

39) 일기, 109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하에 기록했다는 영성의 4단계, 곧,“교회시대, 수도시대, 신앙시대, 사랑시대”40)라는 도식 속에서, 이용도는 “신앙만을 가지고 불만족함" 41)선언하고, 사랑시대 곧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고, “죄인을 긍휼이 여길 수”42)있는, 자신의 원수까지 포용하는 무소 불위의 절대 자유를 성취하려 한다. 또한, 가장 낮은 신앙의 형태를 ‘교회'시대라고 보면서, 무교회주의자인 우찌무라를 답습하며, 교권과 이를 수호하려던 교리에 대한 그의 태생적 거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용도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학적으로 박제화 시켜, 우리 구원의 주체로만 포장하고 이에 따른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금테 두르고 기름 바르는 것에 저항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우리의 배울 바는 예수의 생활, 그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단지 신자神子라고만 하여 죄인인 인간들이 감히 따라가지 못할 것으로 간주해온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학의 일류는 분명히 기독에게서 무한히 멀게 만들었다.43)


영의 혈루증, 영의 생명이 다 새어 나가면 사경에 이른다. 영의 생명이 새기 시작하면, 무력, 불평, 번민, 고통, 비애, 절망 등이 뒤덮여 온다.

은혜의 기운(氣), 생명의 동풍 (바람)이 없는 자는 불평의 소리만 많은 것이다. 모든 일이 다 걸리어 스스로 편치 못한다.

네가 신음소리 많은가? 네게 불평소리 많은가? 네게 원망소리 많은가? 이는 생명에서 떨어져 내려가는 소리다. 네 생명이 새어 나오는 구멍을 찾아야 한다. 그래 그 구멍을 막아놓고 새로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야 한다.

이 생명은 예수에게 접촉되어야 한다. 예수에게서 생명의 은혜가 나오는 것이다. 예수에게 붙어야 된다. 예수에게 붙으려면, 고무 바퀴를 붙이는 사람이 사면지로 싹싹 닦아내고 마주 붙이는 것 같이 우리 속에 부정한 것을 닦아내야 된다.44)


주는 생명이요, 힘이다. 주는 기쁨이요, 위로다. 주의 생명이 우리에게 통할 때에  우리의 영은 건전을 얻는다.

나는 홀로 주님을 따라 갑니다.

나의 자랑의 머리도 깎아 버리고

치례의 옷도 벗어버리고!

그것은 세상의 자랑이요, 호사는 되되 주님께는 거리낌이 되니까요

나는 굴갓을 씁니다

먹물든 장삼을 입고 새끼띠를 띱니다

이제 갑니다

 

홀로 향하여 가는 곳

남이 아는 듯 모르는 듯

다만 골고다로만

주의 뒤를 따라 갑니다.45)

 

 

40) 일기, 119

41) 위의책.

42) 위의책.

43) 위의책, 112

44) 시무언,73-74

45) 서간집,25

 

    예수를 신앙함이라는 것은 예수의 생명인 사랑에 접촉하여, 나의 것을 잃어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 그리하여 세상의 빈자와 약자의 삶에 한없는 자비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다. 신과의 연합안에서 세속과 등지고 내면의 자유만을 즐겼던 에소테릭한 자유가 아니다. 그의 자유는 ‘다시 돌아옴' 의 ‘책임적' 자유였다. 이것은 앞서 데이브 안드류가 표현한 "그리스도-아나키”의 한국적 원형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용도의 영성은 교회의 상하조직과 결코 친親할 수 없었다. 그는  나키스트였던 것이다.

    조직과 권력에 대한 그의 비판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비록, 그가 쓰지 않았더라도, 그의 일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글에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 칼날도 분명히 간직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대한 영의 소유자 예수여. 당신의 탄생일인 이 복스러운 날에 기독교인이 아닌 우리도 당신의 앞에 엎드리나이다 우리 불신자도 당신을 사랑하고 또 경배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아세아로 더불어 혈족의 관계를 맺은 까닭입니다. 약소한 민족 우리들은 세상의 한 노예로 십자가 형틀을 지고 갑니다. 우리는 벙어리와 같이 우리의 맞을 모든 매를 맞아 상하신 당신을 말없이 우러러 뵈올 뿐입니다. 이교의 지배자는 우리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억지로 사회적 계급의 바늘 침상에 눕게 됩니다.

    세계는 지구 정복에 주린 구라파의 욕심앞에 놀라 떨고 섰습니다. 제국주의는 맘몬의 손에 들어가서 부정한 환희의 춤을 추고 전쟁욕 권세욕 소유욕 삼마녀는 구라파의 노변에서 잔치의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저 구라파 천지에는 당신이 유하실 곳이라고는 일간두척도 남지 않았습니다. 오시옵소서. 그리스도여 발길을 돌려 이리로 오시옵소서, 아세아에서 당신의 처소를 잡으십시오.46) 

 

46) 위의책,66-67

 

 

아시아 민중의 가난과 굶주림에 함께하는 그리스도를 보고 감동하여 그의 글에 옮겨 적었듯이, 그의 ‘사랑’의 십자가의 길은 사회정의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위에서 밝혔듯이, 그는 “다시 돌아왔다.” 하나님 체험으로, 도道를 한몸에 머금은 후, 세상으로 눈을 향하는 예언자로 돌아왔던 것이다.

    예수의 생명인 사랑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화하려고 했던 이용도는, 그가 교단에서 축출당하고, 새로운 교회를 선언하기 직전, ‘주의것'이라는 표찰만 있으면, 어느 누구나 와도 좋다는 '자유 연합주의'적 발언을 하고 있다. 그의 글을 읽어보자:

미치광이라도 주의 것이요, 장사군, 농사군이라도 주의 것이요 목사요 또 이단자라는 별명을 들어도 너는 주의 것일 것이요 무교회 주의자 위험분자라는 홍패(紅牌)를 찾아도 너는 주의 것일지니라. 무슨 이름이든지 다 좋다.「주의 것」이라는 등록표만 붙어 있으면! 오 할렐루야 찬송하세 주의 것들이여! 별것들이 다 모여 노래하고 춤추고 떠들고 왔다 갔다 하누나 - 굿중패 같고 남사당패 같다 할지라도 속은 다 - 주의 것들인가! 무엇이든지 다-모여 오라하라! 같이 춤출자면 같이 기도할자면 같이 찬송하고 같이 전도할 자면!... 이단자! 백성을 미혹하는자!라는 명패를 차고 제사장 아문에서 쫓겨 나가던이가! 오- 그이는 우리의 왕이시요 대장이시다.47) 

 

위의 글에서 이용도는 교회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인물들이 아닌, 주변부의 사람들,  이를테면, “장사꾼, 농사꾼, 목사이면서 이단자, 무교회주의자, 굿중패 남사당패와 같은 열광주의자"를 아우르는 “주변부 연합주의적” 청사진을 제시한다. 주변부에 위치한 그들의 모습 그대로가 '주의 것'이라고 선언 하면서, 기존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교권적 권력을 해체하여, '사랑'의 연합주의적 공동체를 선언한 것이었다. 예수 교회의 뿌리는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일련의 발언들과 그의 삶은 아나키스트적 사상체계를 물씬 느끼게 하는 것이다. 돈 큐핏이 만일 이용도 목사의 삶을 보았다면, 신비주의적 저술가로 칭하며, 한국 교회의 역사 역시 도그마적 그룹과 신비가적 그룹의 상호 투쟁관계로 파악했을 것이고, 데이브 안드류는 이용도를 한국에서 “그리스도-아나키”를 전파한 인물로, 폭스는 종교시대를 마감하고 영성시대를 열어젖힌 인물로 평가할 것이다.

    종합해 보면, 이용도는 자신의 아나키스트적 성향에 톨스토이를 만났고, 이에 그의 신비주의적 성향과 맞물려 예수의 생명인 사랑에 접촉하여 ‘역환’된 자아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며 약자와 빈자의 가난과 고통에 한없는 자비심과 연민을 가지고 그들과 ‘연대’하여 ‘비폭력’적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려는 이상을 먹고 살았던 것이다. 이제 아나키스트 이용도를 말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47) 서간집,155

 

 

    나오는 말: 영성-아나키즘을 향하여

    인간의 자율과 자유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이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운동과 공동체의 뿌리에는 김은석이 주장하듯이 “인간의 능력과 진보에 대한 강한 믿음”48)이 깔려 있다. “고드윈은 무한히 개선될 수 있는 인간을 신뢰했고 코로포트킨은 아나키즘과 진화를 결부 시켰다.”49) 고드윈이나, 크로포트킨은 교회의 권력이 상실되면서, 인간이성에 새로운 권력이 부여되기 시작한 근세에 미래에 대한 장밋빛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모더니즘의 후예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된다. 무한히 개선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가 그것이다. 프랑스의 비평학자 르네 지라르는 푸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의 선동가들이 별 생각 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말처럼, 문화적 금기가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완전한 자율성, 즉 ‘모든 개인 욕망의 자율성’을 전제하고 있는 가장 엄격한 개인주의에 동의해야만 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날 때부터 이웃의 것을 '욕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이든 어른이든 두 사람이 별것도 아닌 것을 갖고 서로 다투는 것만 보아도, 이런 전제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50) 


 

 

우리의 경험적 사실을 볼 때, 집안에서의 어린 두 형제 혹은 자매가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 모방하고 경쟁하며 결국은 다투는 모습을 본 부모라면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소유한 ‘모방욕망’이 경쟁욕망으로 발전하고 종국에 가서는 ‘폭력적’ 형태인 ‘희생양’ 이데올로기가 탄생한다고 분석한 탁월한 비평학자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여기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우리 의식에서 멀리하고, 심지어는 마치 그런 것이 없었던 듯이 행동하려는 현상이 있다. 이는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아주 진부한 현상이다. 엄연한 현실을 무시하는 이런 현상은 옛날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으로, 오늘날 사회가 갖고 있는 하나의 사치라고 할 수 있다.51) 


 

자신이 알고 있는 현상을 겉으로 인정치 않으려는 특이한 문화에 우리가 살고 있다.

활자로 자신의 주장이 씌여지면서, 자신의 논리적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때에 따라서는 방어와 핑계를 계속하는 현대문화에 대한 일침일 것이다.


48) 김은석,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서울: 우물이 있는 집,2004), 30

49) 위의책.

50) 르네 지라르,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김진식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4), 20-21

51) 위의책. 21


톨스토이는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민화에서 사람에겐 관이 들어갈 한 평만큼의 땅이 필요하다 했다. 커다란 땅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던 한 사나이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교훈’적인 것 만큼이나, 톨스토이도 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50평생을 갈등하고 투쟁했었다. 그리고 그 글이 담겨져 있는 민화집은 자신의 몸과 영혼을 갈고 닦는 수도자적 삶을 지속하던 과정에서 탄생한 글임을 우리는 그의 인생론과 참회록에서 파악할 수 있다.

    "욕망의 제어는 국가의 통제 시스템에 효과적으로 적응시키기 위한 교회의 기만" 이라는 거친 표현을 하기 전에, 위에서 르네 지라르가 언급하였던 ‘사실’에 대해 더 솔직해 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경쟁욕망’을 제어하지 않고는 ‘폭력’적 현상이 필연적이다"라는 문제에 봉착할 때, 좀 더 고양된 형태의 휴머너티가 필수적이다. 또한 ‘자유’에 대한 개념이 인간 ‘욕망’의 무한 확대인가, 아니면, ‘욕망’을 제어 함으로, 자신의 의지가 강화되는 동시에, 초월적 존재 혹은 우주적 에너지와의 만남 속에서 ‘자유’함을 얻는가의 차이점을 좀 더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 차이점이 ‘세속적’ 아나키즘과 ‘신앙’안에 있는 존재들이 소유하는 아나키즘의 차이점일 것이다. 만일 인간 욕망의 극복과 초월적 존재와의 만남 속에서 절대 자유를 구가한다면, 이용도적 아나키즘의 공헌은 지대할 것이다. 그는 “생명의 역환”을 말하며 예수의 생명인 사랑에 힘입어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한없는 동정심을 갖고 그들과 연합하여 평화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용도와 가까웠던 피터스 선교사는 이용도의 감동적인 기도문을 우리에게 소개해준다: "주여 저에게  3년만 더 주소서.  그러면 저는 저의 모든 힘을 거지들에게 설교하는데 쏟겠습니다. 저는 그들과 같이 굶고 잔치를 벌일 것입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웃고 울 것입니다.”52) 이용도에게 또 다른 영향을 준 프란체스코를 연상케하는 대목이다. 이용도의 아나키즘을 굳이 명명한다면, “영성적 아나키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면의 경쟁욕망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아나키스트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자율적 공동체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 글로 말미암아, 무교회주의, 신비주의, 아나키즘, 그리고 더 넓게는 다다아즘, 아방가르드, 초 현실주의등과 같이 체제 속에 안주하는 인식구조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사상운동과 영성운동의 연구를 기독교계 안에서 시작하는 작은 디딤돌이 되기 바란다.

 

52)  피터스, “시무언: 한국 기독교 신비주의자,” 박종수 역, 이용도의 신앙과 사상연구회, 이용도 목사의 영성과 예수운동, (서울: 성

       서연구사, 1998), 103




이용도의 독립운동


 

김 형 기 (예수교회 목사/구약학)



머리말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시무언 이용도 목사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여 많은 연구물을 내어놓았고, 그 논문들이 여러 책으로 엮어져 출판되는 결실을 이루었다. 그 글들은 에세이 류, 일반연구논문, 석사학위논문, 그리고 박사학위논문에 이르기까지 성격 별로 차이를 나타내지만 주제에 대해서는 거의 신비주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용도 목사의 학창시절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몇몇 전기적인 글들에서 간략히 언급될 뿐이고, 그것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년 이용도의 독립운동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전거는 변종호 목사가 쓴 季龍道牧師傳일 것이다. 그는 이용도 목사의 생애 가운데 “애국(독립) 운동 시대”를 한 장(章)으로 구별했고, 여기서 (1) 삼일운동, ⑵ 1920년 2월 11일 기원절 사건, ⑶ 1921년 성탄절 불온문서 사건, (4) 1922년 가을 태평양회의 사건,네 차례에 걸쳐서 독립운동에 나서 옥고를 치른 것으로 기록하였다.1)

    이 글에서는 이 네 사건을 중심으로 청년 이용도의 독립운동 면모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이용도 독립운동의 실체를 밝히는 일에서 제한점이 있음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필자가 주로 의존한 자료는 정보관계 문헌과 재판행형관계 기록이고, 그 밖에 국한된 몇몇 문헌을 사용하였으므로 상당히 제한적이고 따라서 한계를 가질 수 있다.

 


1. 독립정신의 함양

 

청년 이용도는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송도고보 학생 신분으로 5년 동안이나 독립운동에 몸을 담게 된다. 그를 독립운동에 내 몬 요인들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의 독립운동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요인들은 무엇이었는지를 몇 가지 짚어 보고자 한다.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그의 타고난 성품과 가계의 내력일 것이다. 의형제로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시무언을 잘 알고 있었을 사람 가운데 하나인 이환신 목사의 증언은 그의 성품을 아주 잘 알려주고 있다.

 

용도씨는 두뇌가 아주 명민했고 경우도 밝고 사리에 명백 철저하기로 유명했다. 시비를 가리는데 있어서 그렇게 지독하고 무서운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무슨 논쟁이 생기게 되면 그는 발벗고 나서 달려 붙었고 조금 경우가 틀리게 되면 막 드리대고 그냥 답새게 대는 것이었다. ... 그는 말하자면 극단성의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우정이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는 내가 없고 내것이 없는듯이 아주 탁 쏟아 놓고 지내다가도 한번 무슨 논쟁이나 승강이 생기게 되면 절대로 지려는 마음이 없었고 또 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옮다고 생각되거나 자기에게 어떤 주장이 생기면 그때에는 천만인 앞에서도 굴함이 절대로 없는 특성을 가졌음을 여러 가지 실례로 보아서 알 수 있었다.2) 


 

여기서 우리는 불의와 부정을 보고 결코 그대로 넘어가지 않는 시무언의 타고난 성품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강직한 성품 일면에 저항의식을 부가시킨 것은 그의 가계 내력이었을 것이다. 그의 본관은 안악이씨인데,시무언의 아들인 이영철 선생는 안악이씨가 고려조 말에 역성혁명에 항거해 두문동에 들어간 72인의 후손이고, 안악으로 숨어들어 살았던 관계로 안악 이씨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고, 지금 안악이씨 후손들은 자신들을 모두 그렇게 여기고 있다.3) 이러한 내력에 대해서는 바로 선대인 시무언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이 저항정신을 일깨우는 동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둘째로 한영서원, 곧 송도고보의 교육환경을 들 수 있다. 한영서원을 세운 윤치호의 건학 이념은 한 마디로 “나라사랑”이다. 그는 구국의 이상과 계획으로 교육사업에 전념한 것이 다.4)한영서원은 민족교육에 충실하였다. 개천절을 개교기념일로 정하여 민족의식을 높였고,채플시간과 조선어 시간 같은 현장교육을 통하여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켰다. 5)

    한영서원, 곧 송도고보의 교육환경 가운데 청년 이용도에게 독립정신을 강하게 불어넣은 것은 “십일월 동지회”의 창가독립운동일 것이다. 애국 독립사상으로 불타는 젊은 지사들은 창가(唱歌)를 통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1914년 7월 한영서원 교사 신영순(申 永淳)의 주도로 “十一月 冬至會”를 결성했는데, 11인으로 구성된 이 조직에는 한영서원의 교사 5인, 교직원 1인, 학생 1인이 가담하였다.6) 이들은 애국 창가집 출판을 계획하고, 그 해 9월경에 처음으로 애국 창가 100곡을 수록하는 창가집 40권을 제작해 한영서원과 “십 일월 동지회”에서 주관하는 “하령회”(夏令會)에서 배포하는 것을 필두로 하여 수량을 늘려가면서 비밀리에 창가를 가르쳐 점점 대중화시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1916년 10월에 13인 회원 전원이 송도경찰서에 검거되면서 사건화하였고,1917년 9월에는 회원 가운데 신영순을 위시한 회원 5인이 1년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7)

    시무언이 한영서원에 입학한 것은 “십일월 동지회”가 결성된 이듬해인 1915년 4월이므로, 그가 1919년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었던 창가독립운동의 전말을 지켜보면서 한영서원의 투철한 교육 방침을 통해서 애국 독립사상으로 고취되어 있었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셋째로 시무언이 옥중에서 만난 애국지사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이환신 목사에 따르면 시무언은 어느 유명한 애국지사와 한 감방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를 스승처럼 모셨으며,감한 이후 그의 부인을 찾아가 어머니처럼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8) 이 일은 아마도 시무언이 태평양회의 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를 적의 것으로 여겨지는데,그가 독립운동에 지속했던 것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애국지사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1) 邊宗活, 季龍道牧師傳, 서울: 新生館,1958, 1973, 9쪽.

2) 李桓信, “용도 형님과 나,” 변종호 편, 季龍道牧師硏究四十年(卷一), 서울: 신생관, 1973, 74-5쪽.

3) 이것은 필자가 2000년 1월 19일 이용도 목사의 장손 이광범 씨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들은 내용이다.

4) 주재용,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33쪽.

5) 松都學園90年史, 인천: 학교법인 송도학원, 1997, 92쪽.

6) 위의 책, 93, 94쪽.

7) 위의 책, 99쪽.

8) 宋吉變, “韓國敎會의 改革者 季龍道,” 神學과 世界 1978년 제4호, 128; 동, 日帝下 監理敎會 三大星座, 서울: 성광문화사, 198

    2, 219쪽.

 

 

2. 삼일독립만세운동

 

삼일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25일경까지 약 2개월에 걸쳐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족독립운동이다. 운동은 3월 1일에 서울[京城]을 기점으로 지방 여섯 군데, 평안남도 평양, 진남포, 안주, 평안북도 의주, 선천, 함경남도 원산에서 동시에 일어났고, 2일에는 황해도 해주, 수안 두 군데에서 연이어 일어났다. 9) 운동은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어 6일, 10일, 14일, 23일에 집중적으로 일어났고, 4월 1일을 전후한 며칠 동안 절정을 이루어 4월 15일 이후로 점차 줄어들어 25일경에는 진정되었다.10)

    운동의 성격도 처음에는 시위 위주였다. 서울의 경우 3월 1일 학생 약 3,4천명이 파고다 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운동을 시작하여 군중이 합세함으로써 시위대는 수 만을 헤아리게 되었고, 이날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여하려고 상경한 사람들 십수만이 운집해 서울 시내는 일대혼잡을 이루었다. 11) 몰려드는 군중을 해산하기 위해 경찰과 헌병대는 총기를 난사하여 사상자가 나기 시작하면서 운동은 격화되었고, 3일부터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시위군중도 늘어나고, 일부 지역에서는 연행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서로 몰려가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군대가 동원되었다.12) 드디어 일본 각의는 4월 4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본토 군대 보병 6개 대대, 헌병 65명, 보조헌병 350명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13)  운동은 4월 15일 극에 달하는데, 이날 경기도 발안장(發安場)에서 수백 명이 참여한 시위가 있자 군대가 동원되고 32명이 살해되고 가옥 28채가 불타는 참사가 벌어진다.14) 바로 제암리사건이다. 하지만 전국의 운동은 이날 이후로 진정세를 보이게 된다.

    개성에서는 3월 2일 준비에 들어가, 3일부터 운동이 시작된다. 송도고보 학생들은 김익중, 송영록, 심적용, 김정식, 안종화, 김천수 등 4학년이 주동이 되어 만세운동계획을 추진 하였다. 학생들은 고종의 국장으로 걸어둔 일장기를 보이는 대로 거둬들여 그것을 변조해 태극기를 만들었고, 3일 저녁 2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개성 거리를 돌진하면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민중들과 합세하여 만세를 불러댔다. 이날 일본인 교사 소전(小田)은 일본도를 들고 “만세운동에 참가한다면 이 칼로 목을 칠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저지를 기도했고, 호수돈 여학교 학생들을 기숙사에 갇힌 채 만세를 불렀으며,일부 시위 참가자는 주재소를 부수기도 했다.15) 이날 시위는 철도원호대가 출동하면서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16)

 

9) 韓國民族運動史料. 三一運動篇其一, 서울: 국회도서관, 1977, 254쪽.

10) 위의 책,154쪽.

11) 위의 책,254쪽.

12) 위의 책, 6쪽.

13) 위의 책, 92쪽.

14) 위의 책, 138쪽.

15) 松都學園90年史,100쪽.

16) 韓國民族運動史料. 7쪽.

 

    이튿날인 4일에는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포함한 시위군중 1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다가 출동한 기마대와 소방대의 가혹한 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3월 5일에는 드디어 개성 시내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리기에 이른다.17) 6일 밤에는 1천여 군중이 모여 경찰서로 몰려들었고, 철도원호대가 출동하여 경찰과 함께 해산에 나서 밤 11시에야 진정되었다. 이날 쌍방에 인명손실이 있었는데, 투석으로 경찰측에서 보조원 1명, 순사 1명, 순사보 2명이 부상하였고, 시위대에서 1명이 사망하였다.18) 개성에서는 4월 2일 약 300명이 참가하는 시위가 다시 벌어졌고, 주동자가 체포하고 해산되었다. 4월 2일 開城 약 3백 騷擾하다, 주모자를 체포하고 해산시키다.19)

삼일운동으로 송영록, 심적용, 김정식, 김천수 등 주동자급과 상당수 송도고보 학생들이 검거되어 옥고를 겪었다.20) 변종호에 따르면, 시무언은 이때 약 2개월 동안 유치장 생활을 했다고 한다.21) 청년 이용도가 삼일운동에 가담했다는 더 다른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영민했던 그가 민족적인 대운동을 지나쳤을 리가 없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3. 기원절 사건

 

기원절(紀元節)이란 사방절(四方節), 천장절(天長節), 명치절(明治節)과 더불어 일본의 사대 경축일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의 명치 정부는 “기원전 660년 1월 1일 神武天皇이 樓原에 궁을 지었다”는, 곧 나라를 세웠다는「일본서기」(本書記)에 근거하여 이 날을 건국일로 정하고 ‘기원절’이라고 이름 지어 1872년(명치 5년) 12월에 공포하고, 구역(舊廢)의 1월 1일을 그레고리역으로 환산해 이듬해인 1873년부터 1월 29일부터 이 날을 기념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정월 개념이 바뀐 데 대해서 국민들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고 신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부는 “천황 이전 시대의 역법”[元嘉歷]을 들어 날짜를 다시 2월 11일로 역산해 1874년부터는 2월 11일을 기원절로 지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 의 관심을 끄는 것은 기원절에 일본 궁중 안의 황령전(皇靈殿)이라는 곳에 일왕이 직접 나와서 제사를 지냈고,1914년부터는 전국의 신사에서도 기원절 제사를 지내도록 해서 민간에서도 건국 경축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22)

    청년 이용도의 기원절 사건은 1920년(大正 9년) 2월 11일로 기록된다. 변종호는 전기에 이 사건으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고 기록했고, 23) 송길섭도 이 사건으로 6개월 동안 개성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했다.24) 하지만 이것은 근거 없는 추정이거나 증언상의 착오일 것인데, 그것은 태평양회의 사건 기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17) 松都學園90年史, 100쪽.

18) 韓國民族運動史料. 12, 15쪽.

19) 위의 책,107쪽.

20) 松都學園90年史, 100쪽.

21) 변종호, 季龍道牧師傳,9쪽.

22) 紀元節.フリ -百科事典. http://ja.wikipedia.org/wiki/.

23) “1920년 2월 11일에 소위 기원절 사건으로 들어가 반년간 있었고.” 변종호,季龍道牧師傳, 9쪽.

24) 宋吉變,“韓國敎會의 改革者 季龍道,” 127; 동, 日帝下 監理敎會 三大星座, 218쪽.

 

    태평양회의 사건으로 체포된 이용도는 삼심에 걸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때 검사국은 1920년(대정 9년) 2월의 일을 거론하면서 형량을 높이려고 하지만 고등법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시하였다.

 

3년 전 대정 9년 2월, 경찰서에서 피고의 소위를 취소한 결과 즉각 방면되었고 검사국에서도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해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새삼스레 1, 2심의 3년 전의 확실한 불기소 사건을 기소 유예의 사건이라 강변하여 이 건(件)까지 첨부하여 가형(加刑)한 것도 불법이라고 생각한다.25)       

 


우리는 판결문에 있는 대로 체포된 그가 조사한다고 말 몇 마디 주고받고나서 문자 그대로 “경찰서에서 즉각 방면되었”을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검사국에 송치되어 검사 앞에 끌려다니면서 심문을 받고 조서를 꾸미는 상당히 시달림을 당하는 어려운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건에서 불기소 처분되었고, 적어도 판시에 서 알 수 있듯이 검사의 주장대로 “기소유예”된 것이 확실하므로, 이용도가 기원절 사건으로 형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원절에 청년 이용도는 무슨 일을 했는가? 그것은 분명하지 않다. 1919년 11 월 1일자로 조선군사령관이 천장절에 관해서 육군대신에게 보낸 보고전문은 이듬해 2월에 있었던 기원절의 사건을 짐작하게 한다.

 

天長節 祝日을 堂하여 不穩行動을 할 것이라는 風說이 있었으나 平壞府內 三個所에서 男女學生 비슷한 者가 集合하여 萬歲를 부르고 我國旗 一을 破棄하였다. 또 義州에서도 敎會堂에서 少數의 사람이 集合하여 萬歲를 부른 者가 있었으나 其他는 一般으로 靜穩하게 經過하였다.26) 

 


이 천장절의 운동은 기원절 사건이 있기 불과 3개월 전의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1920년 2월 11일에 어떤 움직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당국의 불기소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기원절이라는 사건명이 첩보보고에서조차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사건의 규모나 내용이 집단적으로 강력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소수가 참여한 아주 사소한 것이었거나, 또는 거의 이용도 독자적인 것에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정 되는 것이다.

 

 

4. 조선독립주비단 사건


시무언은 1931년 7월 26일자 일기 난외에 적은 자필이력에 “一九二一年 聖誕날 被捉”이라고 적었다.27) 변종호도 전기에 “1921년 성탄날에 불온문서 사건으로 붙잡혀” 갔다고 적었다.28) 이것은 1920년에 있었던 사건으로 연대가 바로잡혀야 하고, 명칭도 “조선독립주비단”(朝鮮獨立籌備團) 사건으로 일컬어져야 할 것이다.

 

2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3집 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1978, 1479쪽.

26) 韓國民族運動史料. 268쪽.

27) 변종호편, 季龍道牧師의 日記, 서울: 신생관, 1966, 168쪽.

28) 변종호, 季龍道牧師傳, 9쪽.


    이 사건은 일본 경찰의 상부 보고를 통해서 확인된다. 경찰은 1921년(大正 10년) 1월 29 일 “大正 9年 12月 28日 黃海道 新溪警察署에서 朝鮮獨立籌備團이라고 하는 불미스런 朝鮮人들을 檢擧하였다”고 상부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에 따르면 황해도 신계군 강월리에 주소 를 둔 이윤천, 이상섭, 이종겸, 이병의, 이창길, 이만기, 이의기, 그리고 금천군 시변리 이용도가 검거되었고, 황해도 일대에 주소를 둔 손재흥, 이광복, 노성근, 한동운, 유억수와 강원도 안승훈이 단원으로 지목되었다. 보고는 또 1920년 7월 중에 봉산군 사리원의 손재흥이 이윤천을 권유해 단원으로 가입시켰고, 이윤천은 신계 금천 양군에서 단원을 모집하여 이종겸, 이용도 이외에 여러 명을 권유하여 단원으로 가입시켰고, 이종겸은 다시 이상섭, 이병의를 입단시켰다고 했다. 또 독립주비단의 본부는 황해도 황주이며 그곳에 여단사령부를 설치하고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다는 진술을 받았으나 현재 심문중이므로 확실한 것은 분명치 않다고 했다. 이 단체의 계통과 목적은 주모자인 손재흥을 체포한 뒤에나 분명히 밝힐 수 있는데, 이전에 사리원경찰서에서 검거한 독립결사대나 독립청년단이 모두 비밀결사였으므로 공통점이 있어서 사리원경찰서에서도 관련성을 조사하는 중이라고 했다.29)

    이상이 조선독립주비단 검거에 대한 보고의 전부이다. 이 보고는 “內閣總理大臣”에게까지 올라갔고30) 또 앞서 검거된 비밀결사와 연계가능성으로 보아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보고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이 사건의 전모에 관해서는 더 알려지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면모를 추정할 수 있다. 진술을 통해서 나타난 “여단사령부”라는 명칭은 이 단체가 무장항일투쟁 단체였음을 암시한다. 또 체포된 단원 중 이종겸을 제외한 단원 전원이 교인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인 중심으로 결성된 독립운동 비밀결사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사건은 삼일운동 이후 무장운동으로 변한 대일항쟁에 기독교인들이 적극 가담한 예로 평가되기도 한다.31)

변종호는 이 사건을 “불온문서사건”이라고 규정했는데, 우리는 이 규정에서 시무언이 조선독립주비단에 가입하여 문서작성이나 배포의 임무를 띠고 활동했던 것은 아닌가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일화 한편이 전한다. 송봉애 사모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겨울날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고 있는데 순사들이 들이닥쳐 남편을 연행하여 가는지라 아침이라 옷도 제대로 안 입어 자기가 겉옷을 가져와 입히려고 하니까 순사들이 그것마저 못하게 하고 데리고 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체포될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일화로 추측된다.32)

 

29) 金正明, 朝鮮獨立運動. 第一卷 分冊 民族主義運動篇, 東京: 原書房, 昭和42年[1967],510-1 쪽. 참조, 韓國民 族運動史料.

      三—運動篇其一,762-3쪽.

30) 위의 책,511쪽.

31) 基督敎百科大事典,서울: 기독교문사,1996, 1220쪽.

32) 임인철, ”이용도 독립 운동 일화 - 송봉애 사모님 회고 일편,” http://cafe.daum.net/simeonlovers. 이 일화는 정확한 연대가 밝혀

      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원절 사건의 체포 당일에 있었던 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5. 태평양회의 사건


송도고보에 재입학한 1921년, 시무언은 11월에 이른바 “태평양회의 사건”을 주도한다. 태평양회의는 1921년 11월 11일 워싱턴에서 시작된 군비감축회의를 가리킨다. 열강들이 참석하는 이 회의에서 원동(遠東) 문제를 다룰 것이라는 사실이 보도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구미위원회(歌美委員會)에서는 이승만, 서재필 등을 이 회의에 대표로 보내 조선독립청 원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한편 이러한 소식을 접한 시무언은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군비감축회의 개최 당일에 동맹휴교와 만세시위 전개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던 것이다.33)

    송도고보 4학년 부급장이었던 시무언은 1921년 11월 10일 오전 이성애(季成愛)라 이름하는 면식없는 인물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그 편지의 내용는 11월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시작되는데 거기서 조선독립의 문제가 논의되므로 지지하는 뜻으로 동맹휴교를 해야 한다는 논지였다.34) 시무언은 그 편지를 읽고 나서 처음에 김종필(金鐘弼), 최마태(语馬太)를 기도실로 불러 이 문제를 의논하고, 다시 급장들을 모았다. 그는 “태평양 회의에서 조선독립 문제가 논의되므로 우리들 조선인은 축하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 회의 첫날인 명(明) 11일 동맹휴교를 감행해야 한다”, 35) “본 회의는 동양 평화를 영원히 유지시키려는 회의이므로 우리 생도는 동맹휴교하여 축의(祝意)를 나타내야 할 것이 아니냐”,36) “다른 학교도 동맹휴교를 한다는 소문인데 중등교(中等校)의 지위에 있는 우리 학교도 동맹휴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37)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모두 동맹휴교를 결의하고, 급장들을 통해서 이 소식을 전교생에게 알렸다.

    방과 후 기숙사에 돌아온 시무언은 이 일을 깊이 생각하다가 이번 사태가 몰고 올 여파를 염려했던 것 같다. 그는 김승렬, 이강래,원홍구 세 교사에게 동맹휴교 결의 사실을 알렸고, 교사들은 “즉각 취소하라”는 훈시를 내렸다. 그는 그날 밤과 다음 날 아침 사이에 최마태와 한맹석은 시내로 보내고,본인은 기숙사와 시외에 있는 학생들에게 알리려고 침식을 잃고 분주하게 달렸다. 그 결과로 11일 아침 300여 전교생 가운데 200여 명은 출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38) 이렇게 해서 시무언은 학교 당국과 전체 학생들에게는 별로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동맹휴교라는 명분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주도면밀한 성품이 그대로 반영되는 대목이다.

이 사건으로 1921년(대정10년) 12월 26일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에서 있었던 1심에서 최마태는 무죄로, 김종필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시무언은 보안법 7조 조선형사령 42조의 위반혐의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39) 죄목은 학생들을 선동하여 100여 명의 학생들을 휴 교시켰으므로 치안을 방해한 사실이 인정된다는 것이었다. 시무언은 1922년 4월 24일 고등 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같은 해 8월까지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약 10개월 동안 시련을 겪었다.


33) 국가보훈처,『독립유공자 보훈록』, 304쪽.

34) 독립운동사자료집,1477, 1478, 1479쪽.

35) 위의 책, 1480쪽.

36) 위의 책, 1482쪽.

37) 위의 책, 1481쪽.

38) 위의 책,1478쪽.

39)  위의 책,1480, 1482쪽.

 

 

6. 시무언과 만우의 만남에 관하여

 

시무언 이용도와 만우 송창근의 만남이 어떤 연유로 이루어졌는지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들이 아마도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감옥에서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만남은 청년 이용도의 독립운동 면모를 밝히는 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들이 언제 어디서 만났느냐는 시기와 장소의 문제는 어느 사건과 관련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청년 이용도의 독립운동 면모를 좀 더 규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헤아려 보려고 한다.

먼저, 그들이 독립운동 과정에서 각각 붙잡혀 사법기관의 어느 장소에서 만났을 것이라는 추정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글이 하나 있다. 바로 “靑年”지 제2권 제7호(1922년)에 게재 된 “靈魂의 出行”이라는 시이다. “詩蘊城”이라는 필명으로 기고된 이 시에는 “이詩를 苦役 하는 어린 동무 龍道의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장공 김재준 박사는 「晩雨回想記」2 부에 이 시를 싣고 만우가 이용도를 그리워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40)

 

       靈魂의 出行41)


                                                                                   詩蘊城

 

 

 

                              - 이詩를……苦役하는 어린동무龍道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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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김재준,「晩雨回想記」, 서울: 한신대학, 1985, 85쪽.

41) 靑年 第二卷 第七號(大正 11년,1922년) 夏期七八月合號,56쪽.

 

이 시는 청년 이용도가 태평양회의 사건으로 잡혀들어가 옥고를 치르고 있을 즈음에 지은 것임이 거의 분명하다. 만우는 시무언을 “愛의 동무”,  “生命의 동무” ,  “永遠의 동무”, “魂의 동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철창 속에 갇혀서 외롭게 지내고 있을 시무언에 대한 애절한 마음으로 동지애를 표현하고 있다. 만우와 시무언, 그들이 철창 속에서 만나 깊 은 사귐을 갖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훌륭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만났을까? 시기에 관해서는 만우의 독립운동 행적을 기준으로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만우의 독립운동 관련사건은 삼일운동, 남대문역 폭탄투척사건, 독립창가 배포사건, 수양동우회 사건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수양동우회 사건은 시무언의 사후인 1937년에 있었던 일이므로 우리의 논의에서는 제외된다.

    장공의 회상에 따르면 만우는 남대문역[서울역] 폭탄투척사건과 관련되어 한 차례 체포된다. 삼일운동 이후 일본은 조선 총독을 경질하는데, 신임 총독 사이토(齋廢實)가 서울에 도착하는 것을 기회로 1919년(大正 8년) 9월 2일 오후 5시 애국지사 강우규(妻字奎)는 열차에서 내려 역사 귀빈실을 나와 도열해 있는 환영객들을 지나 마차로 갈아타는 총독 일행을 행해 폭탄을 던졌고, 폭탄은 그 한가운데 떨어져 총독의 마차에도 파편이 튀어 총독의 옷 세 군데를 손상시켰으나 총독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고, 출영객 가운데 29명이 중경상을 입었는데, 그 중에 촌전(村田) 육군소장을 비롯한 유력인사 5명이 중상을 입는다.42) 만우는 그때 마침 고향 웅기에 다녀온 길이었는데, 그것이 혐의가 되어 잡혀들어 갔으나 강우규 지사가 체포된 이후에 혐의를 벗고 풀려나게 된다.43) 강 지사가 체포된 것은 9월 17일이었고 검사국에 송치된 것이 9월 29일,연루자들이 체포되고 10월 6일에 상부에 보고되었으므로44) 만우가 이 사건으로 잡혀있던 기간은 1개월이 못되고 길어야 2~3주간 정도였을 것이다. 이 기간에 만우가 시무언을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시무언이 이 기간 동안 활동한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형행기록에 따르면 만우는 1920년(대정 9년) 2월 19일 독립창가 유포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에서 형을 산 뒤 그해 6월 18일 만기 출옥한다.45) 날짜를 미루어 보면, 그는 1919년 12월 19일경에 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길게 잡아서 그보다 2~3주 전인 12월 초를 전후해서 체포되었을 것이다. 만우가 이 사건으로 관에 잡혀 있던 기간은 시무언이 기원절 사건으로 체포되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들은 이때 만났을까? 하지만 그럴듯하지 않다. 왜냐하면 만우는 1920년 2월 19일자로 서대문감옥에 들어갔고, 시무언이 2월 11일 체포되었지만 불기소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구치소에서 만났을 것으로 가정하더라도 날짜로 따져서 불과 1주일 이내에 깊이 있게 사귈 수 있었느냐도 문제지만, 시무언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원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시기에 각자의 사건으로 한 곳에서 만났을 개연성은 거의 없다.


42) 金正明,朝鮮獨立運動,52쪽.

43) 김재준,앞의 책,26쪽. 장공은 젊은 만우가 혐의를 받고 붙들린 것이 알려지자 강우규 지사가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수했다고

      전한다.

44) 金正明,앞의 책,114-116쪽.

45) 國史編纂委員會,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別卷 4, 서울: 국사편찬위원회,1992. 486쪽.

 

    남은 것은 삼일운동 기간이다. 시무언이 삼일운동으로 검거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을 개연성은 있다. 삼일운동사건보고에 따르면,경성에서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으로 운동에 참 가하여 구금된 수는 4월 1일 현재 20개 교 167명으로 확인된다.46) 그리고 4월 29일 현재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에 검거된 인원은 119명인데,이 가운데 4명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고 20명만이 지청에 남았으며 나머지 95명은 본청으로 송치되었고, 47) 서대문감옥은 운동 참가자들 1,187명이 잡혀 들어와 북적였다.48) 여기에서 시무언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을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피어선 학생이었던 만우가 운동으로 잡혀들어 왔다면 그들이 여기서 만났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우가 삼일운동 당시에 운동에 참여했다거나 검거 내지 구금되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만일 시무언이 서대문에 들어왔다면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무언 역시 변종호의 기록을 제외하면 명확한 근거가 없다. 사실로 가정하더라도 시무언은 다른 사건과는 달리 자신의 이력에 왜 삼일운동에 관해서는 적지 않았는지, 그리고 변종호는 그것을 “유치장 생활”로 표현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서 아무것도 확정할 수가 없다.


맺는말

 

시무언 이용도 목사는 송도고보 시절 5년 동안 삼일운동, 기원절 사건, 조선독립주비단 사건, 그리고 태평양회의 사건을 통해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는 최소한 6개월 이상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고, 적어도 6개월 내외되는 기간을 경찰서와 검사국을 오가면서 독립 운동으로 인해 일제의 시달림을 받았을 것이다.

    청년 이용도의 삼일운동 당시 이 운동에 열렬하게 가담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활동에 관해서 변종호의 기록 이외에 다른 자료를 갖지 못하였다. 기원절 사건에서 그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그 사건의 실체 역시 우리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조선독립 주비단 사건은 상당히 규모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재판을 통해서 정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무언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옥고를 치렀을 개인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단 하나의 보고 이상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시무언은 태평양회의 사건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형을 살았다. 우리는 재판기록을 통해서 이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논의한 청년 이용도의 독립운동은 그 실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독립운동은 자료발굴이 이루어져야 하고, 사실이 더 밝혀져야 한다. 이 소론은 이 일에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46) 韓國民族運動史科, 150쪽.

47) 위의 책, 162쪽.

48) 위의 책, 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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