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언 소식 2006 > 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자료실

시무언 소식 2006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5-10-27 20:28 조회2,182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3c8744de1bb2fd96dfb7090cee364249_1469809385_02.jpg

 

 

3c8744de1bb2fd96dfb7090cee364249_1469809385_07.jpg

 


 

 

예수님처럼 살다가신 분

 

 3c8744de1bb2fd96dfb7090cee364249_1469809385_12.jpg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온 지구촌이 꿈과 희망과 축제로 떠들썩하던 서기 2000년을 지나, 벌써 다섯 해를 보낸 2006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丙戌년 새해 아침, 동양적인 상징과 해석으로 ‘개해’인 이천육년은 주인에게 충성스럽게 복종하는 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해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편지 첫머리에,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스럽게 복종하는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기에 참죈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있고 또한 삶의 목적도 기쁨도 영광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중 앞서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종’ 가운데 이용도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이 민족의 가난과 억압과 고통과 슬픔과 어둠을 한 몸에 짊어지고, 예수님 따라 예수님처럼 살다가신 분입니다. 오늘도 우리 후배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기 위해서 앞서간 이용도목사님의 발자취를 아가려고 애써봅니다. 하여 이용도목사 기념사업회를 발족한지 두 해째를 맞이하였습니다. 그 간에 관심을 기울여 동참해 주신 여러 동역자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빛나는 병술년 새해아침에 우리 주님 이름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역 위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원드립니다. 

아울러 한 가지 알려드리면서 협조를 구할 것은, 본 기념사업회에서는 기금 마련을 위해 대한기독교서회와 협의하여, 우리가 사용하기로 한 ‘개역개정판 성경’ 보급을 받아 하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개역개정판 성경이 필요하실 때 연락주시면, 성서공회에서 구입하실 수 있는 가격으로 봉사하겠습니다. 꼭 기억하시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2006년 한 해 동안 사역에 큰 부흥이 이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김종순 목사 드림

 

 

 

 

 제2회 시무언 소식 2006년

 

• 발행인 / 김종순

• 편집인 / 유승훈

• 발행처 및 배부처 / 

시무언 이용도목사 기념사업회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 103-19 베델하우스 203호

전화 : 2232-1276 

팩스 : 2232-2800

 

 

  3c8744de1bb2fd96dfb7090cee364249_1469809549_03.jpg
3c8744de1bb2fd96dfb7090cee364249_1469809549_09.jpg
3c8744de1bb2fd96dfb7090cee364249_1469809549_15.jpg
3c8744de1bb2fd96dfb7090cee364249_1469809549_21.jpg
3c8744de1bb2fd96dfb7090cee364249_1469809549_25.jpg 

 

 

 

 

 

예수를 따르려면 (마 16:24-26)


전덕일 목사 (본회고문)

 

 

 3c8744de1bb2fd96dfb7090cee364249_1469809549_3.jpg

 

  예수를 믿는 일은 예수를 따르는 일이요,예수를 따른다는 말은 예수를 닮는다는 말입니다. 확실히 말해서 작은 예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아들 딸이 그 부모를 닮듯이 말입니다. 모든 불신자들이 당신들이 믿는 예수가 그토록 좋으면 그 분을 좀 보여 달라고 말할 때에 천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본 자는 예수를 보았다고 할 만큼 예수를 닮아야 합니다.

 

 요 14:8에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인천 숭의교회 원로이신 故이성해 목사님이 97세로 소천하셨는데 그 교회 수석장로인 최재학장로 말이 우리 원로목사님은 꼭 예수를 닮았다고 말했습니다.

 말씀하는 것이나 행동이 꼭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어찌 故이성해 목사님 뿐이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닮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른다는 말은 예수를 닮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주님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가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닮는 일에 첫째 장애물은 나 자신입니다. 이세상 일도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자기 극복을 해야 한다고 그럽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 따는 것도 자기 극복을 해야만 한다고 그럽니다.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했고 위대한 바울사도는 갈 2: 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기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완전 자기 포기의 간증이였습니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만 지고 우리는 그저 믿어 구원 받고 축복만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될 이유를 요 15:18~20에 ‘세상이 너희를미워하면 너희보다먼저 나를미워 한 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 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 할터이요 내말을 지켰은즉 너희말도 지킬터이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목숨 걸고 따라야한다고 말씀 하셨습니 다.

 이 세상일도 일사각오하면 큰 성공을 거둘 수가 있습니다. 聖雄이순신장군은 왜적과 싸울 때 摩下 모든 병사들에게 ‘생즉사야(生卽死士!!)는 사즉생야(死則生世)’ 라 했는데 살고자 하면 죽고 죽으면 산다 했습니다.

 마 16::25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저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故 是無言 이용도목사님을 추모하는 이유는, 우리와 호흡을 함께 한 사람으로 예수를 따라간 한국인의 모델이었기 때문입니다.

 33세의 짧은 생으로 召天하셨지만 자기를 송두리째 버리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고귀한 생명을 초개같이 버려 예수를 따르신 是無言 이용도목사님이였기에 가신지 이미 72년이 흘렀어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용기를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옷깃을 여미고 고인을 간절한 마음으로 추모하고 是無言 이용도목사님처럼 주님을 따라 가기로 다시 한 번 다짐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피터스가 본 시무언은 어떤 사람인가

 


김영철목사 (본회자문위원)

 df71f79b07ab29bdb35a0726c25f4e02_1469809858_46.jpg

  먼저피터스(Peters) 목사와 필자와의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피터스 목사와 이용도 목사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피터스 목사와 저자와의 관계는 먼저 우리 내자인 임숙경 여사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아주사 대학에서 공부하던 1 960년대 초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1998년 피터스 목사댁에서 만났을 때 피터스 목사가 한국 선교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용도 목사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다만 사제 관계로만 지내고 있다가, 1984년에 이호빈 목사께서 미국을 방문하시고난 후 비로소 피터스 목사와 이용도 목사의 관계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사실은 어떤 날 피터스 목사의 가정을 방문하였더니 옛날즉 1935년에 당신이 직접쓰신 “Simeon,  A Christian Korean  Mystic”이라는 장편의 논문을 직접 저자 앞에 내놓으시면서 “이 글은 김목사님이 가지고 있어야 할 중요한 재료입니다” 하시는 것이다.

 그 논문을 읽고 나서 비로소 피터스 목사와 이용도 목사의 관계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여러 번 반복해서 그 논문을 읽었다.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것은 참으로 귀중한 사료 document가 되는 자료인 것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어, 즉시 카피를 해서 한국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피터스 목사에 관해서 사제간의 관계가 아니라 “마치 어떤 농부가 어떤 밭에 숨어 있는 큰 보화를 발견하고 집에 돌아가 자기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그 땅을 사셨다.” 하신 성경의 말씀과 같이 정성을 다 기울여서 귀한 보물같이 대하게 되었다. 필자 자신도 이용도 목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호빈 목사나 한준명 목사님, 이정선 목사, 이도근 장로, 변종호 목사 그리고 안주에서 오신 김희학 장로를 통해서 직접 이용도 목사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필자가 피터스 목사가 직접 쓰신 논문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마치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것 같이 말로 전해오는 “구전”과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있는 것 같이 이 논문을 통해서 죽은 이용도가 아니라 살아계시는 “이용도 목사”인 것을 발견하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피터스 목사가 직접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이용도”를 증거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용도 목사연구회가 구성되었고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용도 목사의 생애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먼 미국땅에서 자세한 실정을 알 수는 없었으나 안병무박사, 변선환박사 그리고 선우남박사를 통해서 이용도목사의 사상이나 신학을 정립할만한 문서자료가 부족하다는 말은 늘 듣고 있었다. 특히 안병무박사가 미국을 방문하여 며칠동안 필자와 같이 지내면서 “이호빈목사는 이용도에 관해서 산증인이지마는 신학적인 재료가 될만한 문서를 남겨주시지는 못하였다”는것이었다.

 이러한 찰나에 피터스와 이용도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였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일인지 몰랐다.  물론 피터스목사의 논문은 1935년에 쓰신 글이었기 때문에 결국 변종호목사께서도 이 논문을 발견하고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 논문을 읽고 난 후 저자는 본격적으로 피터스목사와 접근하여 무엇이든지 가지고 계시는 자료를 수집해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가능한 한 기회를 만들어 피터스목사를 한인교회와 미국교회로 초대하여 한국 선교사업에 관한 경험담을 듣기로 하였다.

 현재 피터스 목사는 95세의 고령이지만 아직도 기억력이 마치 젊은 청춘같이 생생하시고 정신력은 더 말할 여지없이 맑고 깨끗하신 편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67년이 지나간 옛날 일들을 마치 지나간 달에 보신 것 같이 상세하게 설명하시는 것이다.

 이용도 목사 연구 논문 제일권 『이용도와 한국교회의 개혁운동』이라는 책 첫면에는 이용도 목사의 사진이 크게 복사되어 있다. 이 책을 김길송 목사로부터 받은 후 즉시 피터스 목사 댁을 방문하였다. 도착하자마자 “피터스목사, 한국에서 온 좋은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하면서 그 책을 내드렸다. 그 책 첫면에 나타나 있는 이용도 목사의 사진을 보시는 순간 갑자기 피터스 목사의 얼굴이 붉어지며 무언가 좀 놀라신 표정을 하고 대번 ‘형님! 형님 참으로 반갑습니다.”하시는 순간 눈에서는 구슬같은 눈물이 책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필자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음이 설레이고 코가 찡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장면 하나만 보더라도 피터스 목사와 이용도 목사의 관계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피터스 목사가 계속 말씀하시기를 “이런 사람은 100년에 하나 정도 태어나는 사람입니다”하시면서,“형님이 나에게 주신 감동은 아직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습니다”라고 혼자하는 말 같이 중얼거리시는 것이었다. 계속 대화를 나누시면서 “이용도 목사”라고 하는 대신 “용도형님”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시는 것이었다.

 이용도 목사의 사진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그런지 무언가 피터스 목사의 마음이 무겁고 한이 사무치는 것 같은 인상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느낄 수가 있었다. 더욱이 “용도형님”하고 힘을 주어서 이 목사를 부르실 때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장면을 좀 더 실감나게 독자 여러분에게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서 피터스 목사가 친필로 쓰신 편지 한 토막을 아래에 보여 드리기로 하겠다.

 

 오! 나의 사랑하는 형님 용도 -

 주예수의 품에 숨겨 계시는 용도여 -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용도 형님 이 이 땅 위에서 고생하셨을 때에 이 부족한 동생은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하였읍니다. 그래도 형님이 나의 부족한 것을 다 용납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속히 천당에서 서로 반갑게 만나서 면대하여 말할 기회가 있을 터이니 그때까지 이 약한 동생은 용도 형님을 본받아서 주님의 명하시는 대로 날마다 행하려고 결심합니다. -피도수 上 1996 년 9월 12일-

 

 지금부터 6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간 옛날 일들이건만 아직도 피터스 목사 마음속에는 이용도에 관한 잊을 수 없는 좋은 인상들이 굳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필자는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더욱이 주고 받는 대화 중에 부질없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이용도 목사를 향하여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데 피터스 목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실수 아닌 실수 같은 질문을 하였더니, 한참 동안 생각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다가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 기독교회에서만 있는 문제가 아니고 온 세계에서 있었던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무언가 해명하기 힘든 문제를 그래도 해명할 수 밖에 없다 하는 기분에서 피터스 목사는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이용도 목사를 이단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이단이 아니겠나? 하고 저는 생각하여 봅니다.” 다시 긴 한숨을 내쉬는 피터스 목사는 “모두가 용도 형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판단하는데서 온 실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공생활이 짧은 3년이었던 것 같이 이용도 목사의  공생활도 짧은 3년동안 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 바울이라 할지라도 인간 예수에 관해서는 베드로나 요한보다 더 잘 알 수는 없었던 같이 이용도 목사에 관한 일도 피터스 목사만큼 많이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베드로나 요한은 예수님과 같이 먹고 자면서 같이 동고동락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면, 피터스 목사 역시 이용도 목사와 한 집에서 같이 먹고 같이 자면서 같이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건과 업적들이 다 이 3년동안에 일어났다. 그런데 이와 같이 중요한 기간에 한동안 이용도 목사는 피터스 목사하고 같이 한 집에서 같이 선교사업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것 같이 바울보다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을 한 것이다. 1930년 10월 16일부로 통천에서 서울지방으로 파송을 받은 이용도 목사는 집도 없고, 교회도 없고, 월급도 약속받지 못한채 서울로 파송이 되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형식은 파송이라 하였지만 실상은 강제로 서울로 불러들인 셈이 되었다.

 그래서 이 목사가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피터스 목사는 모든 잭임을 지고 이 목사에게 권하기를 자기하고 같이 살면서 주일학교 교육사업을 같이 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피터스 목사의 말에 의하면,“이용도 목사에게 드릴 월급도 책정되지 못한채 파송이 되었기 때문에 나와 도마련 목사가 이 목사의 생활비를 책임졌었지요.”‘ 나는 그 때 독신으로 한국집에서 살고 있었고 이 목사 역시 혼자서 서울로 오셨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같이 살게 되었지요.”

“일년 가까이 같이 살다가 통천에서 이 목사 가족이 오신 후에는 인왕산 밑에 전셋집을 얻고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억하기에는 생활비는 계속 보조하여 드린 것 같습니다.”

“서울로 오신 후 용도형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부흥회를 인도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왕산 밑으로 이사는 하였지만 늘 서로 자주 왕래를 하였기 때문에 진행되는 일들은 서로 알면서 지냈지요. 그때 용도 형님의 건강은 매우 약한 편이었습니다.”

“용도 형님하고 한 집에서 같이 살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용도 형님 때문에 큰 은혜를입었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이용도 목사를 통해서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었다. 이와 같은 설명을 하실 때는 피터스 목사의 얼굴이 붉어지며 눈물이 글썽거리는 모습을 감추시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여기서 필자가 더욱 더 자세히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은 이 목사에 관한 중요한 일들이 전부 피터스 목사와 같이 살며 같이 지내신 즉 사직동과 인왕산 밑에서 사실 때 일어난 일들이요, 사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설 명하지만 1930년 10월 16일부터 1933년 3월에 피터스 목사가 환자를 인솔해서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두 분은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용도 목사가 급속도로 빨리 대중적인 부흥사로 유명하게 된 동기는 물론 본인의 실력과 재능도 있었겠지만 자연적으로 주어진 여건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피터스 목사 설명에 의하면 “만일에 이용도 목사가 어떤 교회를 담임한 목사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렇게 자유스럽게 부흥회를 인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하셨다. 이 말은 서울로 파송받은 이 목사는 마치 굴레벗은 망아지 모양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의 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용도 형님에게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하고 피터스 목사는 설명하면서 어떤 면에서 자기도 이용도 목사의 성역을 도와 준 사람이라고 하는 자부심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이 목사가 유명해진 원인이있다면 그것은 그 당시의 한국사회와 백성들의 심리적인 실정과 현실이 이용도 목사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영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온 백성들이 예수를 환영하며 호산나를 외친 것은 자유와 주권을 잃고, 민족의 지도자를 잃고 방황하는 백성들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예수가 나타났기 때문에 온 백성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한 것 같이 그 당시 한국 백성들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실정이 이용도 목사를 민족의 구원자로 영접하며 환영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용도 형님은 성령을 받은 목사요,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요,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이요, 남이 욕을 하며 대들어도 반항하지 않고 참는 사람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도 형님은 말씀에 능력이 차고 넘치는 목사이었습니다.”

“미처, 부흥회한다는 광고가 없어도 어떻게 부흥회하는 소식을 아는지 100리 밖에서 교인들이 도보로 걸어서 온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열심은 마치 미친 사람들 같지요 (웃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들이 아니고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은혜스럽게 설교하는 사람은 다시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100리밖에서 도보로 걸어온 것이 아닐까요?”

“부흥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도 이 목사는 쉬는 법이 없습니다. 저녁 때가 되면 또 다시 산으로 올라가서 다음 집회때까지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기도하시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목사, 이렇게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기도만 하면 오래 살 수 없습니다.”하고 권면하면 “죽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으니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기도해야지요. 죽기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전도하는 것이 먹고 자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는 것이 이 목사의 사상이요, 생활이었습니다. “어떤 날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 목사 가방에 없고, 밖을 내다보니 눈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눈이 내리는 것도 모르고 밤새도록 산에서 기도하다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거지가 찾아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밥을 주어도 방에 들어와서 먹고 가도록 하고, 추운 겨울에는 양말이나 목도리를 하나 주어서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한 번은 시장에 나가 반찬거리를 사들고 오는데 이웃동네 불쌍한 부인을 만나서 그것을 주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지요. 하여간 이 목사는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을 주어야 마음이 편안하였지요.” “가령 음식점에 들어가서 같이 음식을 먹을 경우 음식값은 반드시 이 목사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남에게 음식값을 떠 맡기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 자기 주머니가 비었으면 미리 내 주머니가 비었으니 피목사님이 한 턱 내시오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를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슬픈 것이 아니요,가난해서 슬픈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괴롭고 슬픕니다.”다음 이야기는 피터스 목사가 평생을 두고 여러번 되풀이해서 간증하는 중요한 자기 자신의 체험담입니다.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이 날은 유난히도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 이 목사는 따뜻한 온돌방 아랫목에 누워 있었고,나는 성탄절 준비를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자리에 누워있던 이 목사가 갑자기 일어나서 자기의 이불을 돌돌말아서 보자기에 싸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저는 생각하기를 이 목사가 또 이와 같이 추운밤에 산에 가서 기도하려는 줄 알고. “이 목사 오늘은 몹시 추운밤이니 나하고 같이 집에서 지냅시다.”하면서 약한 몸을 돌보지 않고 너무나 무리하는 것만 같아서 간청하듯이 말렸습니다. 그러나 내 간청은 들을 척도 하지 않고 이 불을 메고 문을 나서려고 하는 순간 제 마음에는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기를“그러면 나도 이 목사 따라 같이 가면 안될까?”하였더니 이목사가 제 얼굴을 바라보면서“ 피목사 나하고 같이 가면 오늘밤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걸” 하는 나지막한 음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더욱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의복을 갈아 입고 같이 가십시다.’하고 좀 더 두터운 오바와 목도리를 두르고 집을 나와서 이 목사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어떻게나 혹독하게 추운지요! 그날 밤은 특별히 더 추운 날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가 가시는 방향이 인왕산을 향하지 않고 종로 쪽을 향하여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혼자 생각하기를 ‘아마 서대문형무소를 이 밤에 방문하려는 것인가’ 하면서 계속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서대문쪽도 역시 아니고 종로쪽으로 가는 방향이었습니다.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바람은 뺨을 후려치는 것 같이 불어닥치고 혹독하게 추웠습니다. 컴컴한 골목에 들어서서 생각하니 그곳은 미국 영사관이 있는 뒷골목이 틀림없었습니다. 큰 빌딩 뒤에 음침한굴 같은 데가 있는데 컴컴하고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무개 있느나 하고 이목사이 불렀습니다. 그 당시는 나도 그 애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잊어버렸습니다. “네” 하고 죽어가는 음성으로 대답을 하면서 어떤 거지 애가 컴컴한 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너 얼어죽지는 않았구나, 참 잘되었다’하면서 이 목사는 자기가 메고 온 이불을 그 거지에게 주면서‘너 이것을 덮고 자면 얼어 죽지는 않을것이다.’하면서 그 거지애를 껴안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애는 ‘아저씨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더니 다시 굴을 향하여 들어가고 이 목사는 돌아서서 다시 집을 향하여 출발하려는 순간,누군가가 제 머리를 매트로 후려치는 것 같기도 하고,펄펄 끓는 용광로 속에 뛰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분간할 수는 없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 마음이 어떻게나 기쁘고 감동이 되는지요! 내 발로 걸어서 집으로 왔는지 날아서 왔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와 보니 어떻게 감사하고 기쁘고 감동이 되었는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은 피터스 목사님의간증을 들으면서 필자가 우리 말로 표현하여 본말이다).

 피터스 목사는 수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이말씀을 간증하고 계신다. 피터스 목사님이 직접 저술하신‘this is My Story”라는 책에도 이 간증을 기재하셨고,그리고 다른 책에도 같은 간증이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간증을말씀하실 때, 67 년 전에 있었던 옛 이야기 같이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이야기 같이 실감이 나는 생생한 기분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말 끝마다 되풀이 하시기를 “나는용도 형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하시면서 감격을 금할 줄 모르신다. 또 한 가지 피터스 목사님의 저서 가운데 이용도 목사님을 소개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비유를 인용하시면서 이용도의 신앙정신을 소개한 내용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나이까?”하고 질문할 때“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가하니라”하고 대답하셨다.

 이용도 목사는 이와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한국 교인들에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당시한국의 정치적인 현실도 유대인과 비슷한 여건 속에서 일본 정부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만할때다. 더욱이 교회는 이중으로 일본 사람들의 감시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df71f79b07ab29bdb35a0726c25f4e02_1469809932_84.jpg 

 

 일본정부가 늘 협박하는 것은 교회에 연보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 안 바치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늘 교인들이 조심하며 연보를 바쳤습니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연보를 바치고 있는 교인들을 향해서 이용도 목사는 다음과 같이 지혜로운 설명을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영국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영국 백성의 의무이고,미국 사람들은 미국 정부에,일본 사람들은 일본 정부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연보를 바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이 말은 한국 백성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말 대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예수님과 같이 이용도 목사도 지혜롭게 대답을 하시더라는 이야기를 미국 교인들에게 소개한 내용이다.

 다음은 피터스 목사가 원산에 있는 신학산 기도원을 방문하시고 느낀 점을 소개하여 보겠다. 피터스 목사가 원산을 방문한 것은 신학산 기도원을 찾아보려고 간 것은 아니고,그 기도원에 소속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용도 목사하고 매우 밀접하다는 소문을 들었을뿐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를 전혀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제 기억으로는 원산 송도원에서 과히 머지 않는 곳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약 30여명 정도 모여서 기도하는 그룹이었고,장소는 교회는 아니고 개인 주택 같기도 하고,조용히모여서 기도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던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제가 보고 느낀 감상은 마치 초대교회에서 되어졌던 일들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주인도 없고, 손님도 없고,다만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인 것 같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제가 손님이었지마는 조금도 어색하거나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천국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여간 제가 보고 느낀 분위기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사랑과 은혜가 차고 넘치는 느낌이었습니다. 내 것 네 것도 가리지 않고 있으면 같이 나누어 먹고, 없으면 같이 굶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되면 우선 찬송을 부릅니다. 찬송소리도 보통 듣는 찬송 소리가 아니고 은혜가 넘쳐서 부른다고 할까요,하여간 기쁨이 차고 넘쳐서 부르는 찬송소리였습니다. 그러다가 묵상 기도를 합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합니다. 때로는 큰 소리를 내면서 기도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서 애쓰다가 입술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조용히 묵상기도를 할 때 어떤 분은 예언을 합니다. 어떤 때는 그 예언이 꼭 맞을때도 있고 맞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대개 이해할만한 일들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는데 예언을 하는 일에 대해서는 좀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하여간 신비스러운 모임인 것은 틀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계획을 세우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 순간 되어지는 현실속에서 모든 일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다가 기도를 하고 기도하는 도중 어떤 분이 예언을 시작하면 다같이 동화되어 협조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여간 그렇게 친절하고 사랑이 넘쳐흐르는 인간관계를 나는 평생 처음 본 것 같았습니다.”

 피터스 목사가 원산에서 체험하신 소감을 정리해 본다고 하면 피터스 목사님이 느낀 기도단은 마치 초대교회에서 되어졌던 성령 운동과 같은 인상을 받았고, 예언을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좀 이상한 의문을 가지고 계신 것 같고,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나 행동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감탄을 하시는 모습이었다.

 어떤 날 부흥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이 목사는 “피목사, 내 말 좀 들어보십시오” 하면서 기분이 좋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데 하여간 부흥회 때 생긴 일인 것 만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그 내용인즉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번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목적 한교회로 향해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기차가 목적한 정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렸습니다. 같이 내리는 손님이 적지 않게 많았지요.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허름한 내 성경가방을 들고 내리는 손님들 틈에 끼어서 줄입구를 통해서 정거장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정거장 안팎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며 환송도 하고 환영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변에서 되어지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관심을 가질 아무런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거장을 나서서 즉시 목적한 교회를 향하여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이 목사는 발걸음이 매우 빨라서 아무도 그 분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교회에서 부흥사를 영접하기 위해서 직원들이 정거장으로 환영을 나갔다는 것입니다. 출입구에 서서 부흥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흥사인 저를 만나지를 못하였습니다. 실망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다소라도 서로 위안을 하며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혹시 부흥사가 기차를 놓치고 버스로 오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맥없는 발걸음을 돌려 정거장에서 교회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때 벌써 부흥회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십리 밖에서 오는 교인들이 하나 둘 모여 들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담임목사는 물론이요,당회원이나 혹은 알고 있었던 교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였을까요? 부흥사 없는 부흥회를 어떻게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걱정하며 웅성거리고 있었겠지요.

 여기까지 듣고 있던 나(피터스목사)는 기다리고 있었던 교인들보다 더 조바심이 들고 초조해져 이목사에게 묻기를,“그러면 그때 이 목사님은 어디 있었소?”하고 화를 내는 어조로 다그쳐 물었다고 한다. “나는 정거장에서 나와서 곧 바로 목적지인 교회를 향하여 달려갔지요. 도착하여 교회안팎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만날 수 없었고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서 즉시 뒷산으로 들어가서 기도하였지요.”하고 담담하게 이 목사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목사가 산에서 돌아오니 찬양을 인도하는 지휘자는 준비 찬송을 인도하고 있었고,벌써 모여든교인들은 빈 좌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여 들었더라는 것이다.

 

 df71f79b07ab29bdb35a0726c25f4e02_1469809981_62.jpg 

 

 피터스 목사님은 그 후 되어진 일이 다급하게 알고 싶어서 다그쳐 묻기를“ 그러면 이 목사님이 교회 안에 들어설 때 부흥사로 알아보고 환영을 하던가요?”하고 물으니“아무도 강사님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하는 사람이 없기에 나 혼자 앞으로 나가서 제일 앞좌석에 엎드려 기도하였지요.”하고 이 목사님은 천연스럽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피터스 목사는 더욱 다급하여지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러면 어떻게 담임 목사하고 첫 인사를 나누었소?”하고 물었지요.

“제가 앞자리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을 때 담임 목사는 벌써 눈치를 채고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하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흥회는 시작이 되었고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임하였다고 하더군요. “이용도 목사를 오해하고 배척하는 일들이 이런데서부터 시작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하시는 피터스목사는 긴 한숨을 내어쉬면서 “대부분의 사건들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먼저 비난하며 비판하는데서부터 문제가 된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는 이 목사가 가지고 계시는 성품이라고 할까요,혹은 성격이라고 할까요?”

“누가 욕을 한다고 하여도 이 목사는 화를 내고 대항할 줄 모르는 사람이요, 누가 못난 놈이라고 욕하며 모략을 한다고 해도 변명하며 해명하려 하지 않고 못난 놈 모양으로 웃으면서 그 자리에서 떠나는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하시면서 “참으로 유별난 사람이었지요. 다만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다가 그렇게 되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신 것 이루고자 함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을 몰랐습니다. 이용도 목사가 기차에서 내릴 때 그분의 머리속에는 오직 한 가지 부흥회를 위한 일만 꽉 차 있었습니다.‘이용도를 자랑하는 부흥회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부흥회가 되게 하옵소서’하는 소원 뿐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용도 형님의 마음이었습니다.”“그러나 기차에서 내릴 때도 기도하는 마음뿐이요,거리를 지나서 교회를 향하여 가면서도 기도하는 마음이요,‘부흥회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흥회는 나를 위한 것이 합니다.’하고 애원하는 기도의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환영하러 나온 사람들의 마음과 이 목사는 마음이 일치할 수가 있습니까? 왜냐하면 서로 딴 방향의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한 사람은 천국을 향하여 가자고 주장하는데 또 한 사람은 세상을 향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달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피터스 목사는 다시 강조해서 말씀하기를 “이것이 이용도 목사와 한국 교회가 해결하지 못하였던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시면서 약간 슬픈 표정을 지으시는 모습이었다. 피터스 목사는 어디까지나 평범하고 진실된 마음의 자세로 대화를 계속하였다. “이용도목사는 쇼를 하거나 자기를 과장해서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초라한 시골 농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틀림없는 표현일 것 같습니다.”

“정거장에서 내릴 때 이 목사의 모습은 부흥회를 인도하는 유명한 부흥사 같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초라한 시골 훈장 같기도 하고 어떤 면으로 보면 절에 있는 중같이 보이기도 하였지요. 그러니 신사 부흥사를 찾고 있는 교인들이 어떻게 이용도 목사를 알아볼 수 있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저는 백번 이 목사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교인들 편에서는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제가 다시 이 목사님에게 묻기를 ‘정말 이 목사가 정거장을 나올 때 전혀 몰랐습니까?’하고 강조해서 물었지요.” (물어 본제가 어리석은 사람이었지요. 형님을 의심해서 물은 것은 아니고 농담으로 한번 해 본 일이지요.)

“용도형님이 하시는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 요구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기도요,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는 내용뿐입니다.”

“설교준비를 하실 때 지식으로 쥐어 짜며 준비하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이 말씀하소서 순종하겠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설교 준비였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감동이 오지 않으면‘오늘 저는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하고 서슴지 않고 일어서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할 때에는 시간가는 줄도 모릅니다. 또한 듣는 청중도 죽은 듯이 숨쉬는 소리도 없이 두 시간 세 시간도 길다 하지 않고 듣고 있습니다. 말재주가 어떻게 좋든지,어디서 그렇게 좋은 비유의 예화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참으로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렇게 은혜스러운 설교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지도자 강습회가 있었습니다. 용도님의 설교(강연) 시간이었습니다. 은혜가 충만해서 열심히 설교하시기를 세 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화장실에 가는 사람도 없이 꼬박 앉아서 숨소리도 없이 움직이지도 않고 세 시간을 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위에서 필자가 질문하였던 질문이지마는 다시 한번 확인하는 뜻에서 질문하기를“ 장로교회 그리고 감리교회에서까지 이용도 목사를 배척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단이라고 비난한 사람들의 태도를 살펴보면 두 가지를 구분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지방교역자들의 질투심에서 생긴 일이겠지요. 왜냐하면 이용도 목사의 인기가 고도로 상승되고,교인들 즉 목회자들이 아니고 평신도들이 이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교회 목회자들이 위협을 느끼게 되니 결국 질투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배척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 같고,두 번째 원인은 이 목사의 신앙정신이 초교파적인 신앙을 주장하신 결과일 것 같습니다;

“이 목사는 장로교,감리교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장로교회에서 더 많이 초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목사님은 감리교회 목사이었지요. 그러나 이 목사의 성령운동이 지방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교파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이었 기 때문에 결국 장로교회,감리교회가 연합해서 배척운동이 일어나게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수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반기를 들었겠지요.”

“중요한 원인은 이용도의 신앙과 신학을 이해할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신앙과 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던 같이 한국교회가 이 목사의 앞서나가는 신앙노선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불타오르는 용도형님의 주장을 받아소화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와 같은 설명을 하실 때는 마음이 답답하신 것 같은 기분을 감추시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가 작은 녹음기를 피터스 목사의 입술 앞에 들여대기가 송구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화를 나눌 때마다 녹음기를 사용해서 한마디도 빼놓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용도 목사를 연구하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한마디 한마디의 증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1935년에 피터스 목사님의 손수 쓰신 “Simeon,  A Christian Korean Mystic”의 저서를 들고 가서 그 동안 한국에서 번역하여 사용되고 있는 이 저서의 제목들을 보여드렸다. 그 번역된 제목들을 추려보니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① 시무언,한 기독교인 신비주의자

② 시메온,한 기독교인 신비주의자

③ 시메온,한 신비주의 한인 크리스천

④ 시메온은 한인 기독교 신비주의자

 이상과 같이 번역된 제목들을 보여 드리며 물었다. “피터스 목사가 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제목을 선택하여 보시기 바랍니다.”하고 물었더니 한참 동안 묵묵히 생각하시더니 “글쎄요, 다 좋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네 번째 것 이제 마음에 드는 것 같습니다.”

“시메온은 한인 기독교 신비주의자”라고 읽으시면서 “이용도 형님은 틀림없이 성경적인 신비주의자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하시고 말씀을 끝냈다.

 


 df71f79b07ab29bdb35a0726c25f4e02_1469810020_27.jpg

 

 

‘무모 무법’(無謨無法) : 이용도의 시대의식

 

 

柳錦周 박사(교회사.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수)

 

 

 df71f79b07ab29bdb35a0726c25f4e02_1469810064_32.jpg 

 이용도의 신비주의의 제2기인 ‘고난의 신비주의’는 1932년 10월 말의 한준명 사건을 계기로 하여 일단락된다. 그와 가깝게 지내던 송창근(末昌根, 1898~1950)이나 그나마 이용도(季龍道)에게 친소(親疎)의 여지(餘地)를 남겨두었던 교계의 여러 인사들이 등을 돌리고 나설만큼 한준명 사건은 이용도 몰락에 결정적이었다. 이때 교회로부터 받은 피습감이 그토록 절절하였을까. 더구나 이용도는 “몰리 우는자를 나는 못버린다.”고 선언하고다. 다음은 당시 그를 염려해 마지않던 김인서(金麟瑞)에게 적어 보낸 이용도의 편지의 일부이다.

 

 나는 욕을 먹고 쫓겨냄을 받어 맛당한 자로 압니다. 욕을 먹고 축출을 당하는 자들을 애호(愛護)하고 싶으니깐! 더욱이,예수의 일흠으로 욕먹는 자라면! 성실(誠實)씨, 태용(泰鎔)씨,국주(國住)씨,교신(敎信)씨 물론 그들을 내가 잘 알지 못해도! … 나는 원래 내가 누구를 인도할 무슨 능(能)이나 (術)을 가진 자가 아님을 임이 각오하고 다만 성의(聖意)에 끌려 그 사명에만 미성(微誠)의 순종을  정(呈)하였을 뿐입니다. (김인서 씨에게,1932년 12월 17일자서간)

 

 그러나 이러한 이용도의 ‘무차별 사랑’은 한준명 사건의 난류와 엉켜 기어이 화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이용도의 이러한 ‘무차별사랑’선언은 그의 신비주의의 ‘무모 무법’ (無謀無法)에 연결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용도는 계획도 없이 법도 없이 살아가겠노라고 말한다. 이때는 장로교 평양노회에서 평양기도단(平壤祈禱團)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킬 무렵이었다. 이 평양 기도단은 1931년 평양에서 결성된 이용도계의 기도단이었다. 김예진, 김익선, 김지영, 김교순, 김인서, 박윤선, 이조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용도의 ‘무모 무법’은 차라리 스스로 택하고 다짐한,그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의 태도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용도는 김광우(金光祐)에게 보낸 한 서간에서 ‘무모 무법’의 태도를 다짐하고 있다.

 

 형아! 나는 나의 일에 대하여 아무 수단도 방법도 없는 것을 알아다오 무슨 깊은 철학적 원리를 나에게 묻지 말아다오. 죽음! 이것만이 나의 수단이요 방법이요 원리라고 할까! 그리하여 날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냥 무식스럽게 돌진하려는 것뿐이다. 어느 날이든지 나의 빛없는 죽음! 그것이 나의 완성일 것이다. 형아! 나는, 이(理)없이 광(光)없이 죽으려 한다. 뒤에 이(理)있이 광(光) 있이 싸울 사자(使者)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나는 무리(無理)하게 죽을께 형은 형은 유리 (有理)하게 살아주지 않으려나! 나는 법 없이 조리(條理)없는 운동에 제물이 되거든 형은 법적으로 조리 있게 일하여다구! 이를 위하여 나는 먼저 덜어져 죽는 적은 밀알 한 알갱이가 되려 하노라. 형아! 그대는 아끼라 세련을 가하라 그리고 후일 나의 값없이 떨어진 눈물 혹 피와 살을 형의 설교의 제재(題材)로취하여다구.(김광우씨에게, 1932년 4월 12일자 서간)

 

 이용도는 그의 벗 김광우에게 부탁하기를 앞으로는 조리(條理)를 가지고 일하여 달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 시대를 위해 죽어야 할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용도의 ‘무모 무법’은 우선 고난의 신비주의자 이용도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용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을 그의 운명으로 알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용도의 ‘무모 무법’은 그의 시대의식과 자기 사명에 대한 표현이었다. 이용도가 살던 시대는 선교사의 영향력이 감퇴하기 시작한 때였다. 선교사의 기관 인퇴와 함께 갑자기 사라진 신앙 준거의 부재,그 처음에는 조리도 법도 가지기 힘들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理)없이,법(法)없이’는 그의 시대 정황에 대한 이용도의 판단이요,거기서 결정한 그의 삶의 태도였다고 하겠다.

 법적으로 조리있게 일할 수 있는 시대의 도래는 이용도의 눈에 아직 보이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 시대를 위해서, 그 시대의 한국교회를 위해서 먼저 떨어져 죽는 작은 밀알, 법 없고 조리도 없는 운동의 제물,그리고 값없이 떨어진 눈물과 피와 살이 자신의 몫이요 사명임을 이용도는 알았던 것이다. 이용도는 그렇게 다만 성의(聖儀)에 끌려 그 사명에만 순종을 정하고 있었다.

 

 교권 하에서도 주님! 단상에서도 주님! 산 중이나 거리 속에서도 주님 그저 어디서던지 주님 이면 그만이요 또 완성이외다. (이호빈 씨에게, 1932년 5월 26일자 서간)

 

 교양과 상식이 있는 이성적 균형과 평범성은 선교사의 영향력이 사라지기 시작한 그 처음에는 아직성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이용도는 ‘무모 무법’으로 훗날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었고,서북(西北)의 장로교회는 법과 조리, 그리고 교권으로서 그 시대를 겪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류금주,『이용도의 신비주의와 한국교회』,서울 : 대한기독교서회,2005, pp. 132-135.

 

 

이용도 목사님과의 만남


 

이규석 장로(본회 상임이사)

 

 

df71f79b07ab29bdb35a0726c25f4e02_1469810114_27.jpg

 

  1992년 봄, 한국교회에 문제를 던져 놓은 어느 목사님의 작품을 출판하고 싶은 마음이 떠올랐다. 그러던 중 몇 분의 역대 목사님이 머리에 스쳐갔다. 그 중에서 이용도 목사님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나는 이 목사님에 대하여아는 것이란 신비주의자, 이단, 감리교단과 장로교단에서 배척당한 문제 인물로 알고 있었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신앙생활을 유별나게 한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몇 분의 목사님에게 자문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이용도 목사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같은 사람으로 취급당할까 보아 조심하고 있을 때였다. 이천 목사님은 한국교회에 그 분만한 영향력을 끼친 분도 없다 하시며 당신 목회의 표상으로 삼으셨다고 한다.

 명관조 목사님은 이 목사님을 한국의 성자라고까지 들려주셨다. 전덕일 원로 목사님 (93 세)은 이 목사님 생존시에 받은 감명이 지금도 큰 힘이 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 외 몇몇 분들은 부정적인 말을 하는 분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전에 초판으로 출판된 이 목사 전집 1질을 구해가지고 저녁에 읽기 시작하면서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읽는 중에 내 마음에 감동이 일면서 은혜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몇 일 동안에 몇 회를 정독하였다.

 

 출판 준비를 하기 위해 책 판권 소유자를 찾던 중 소유자가 일본에 체류중이라 마침 동경 국제도서 전시회에 참가하기 겸해서 일본에 찾아가 만났다. 처음으로 상면하는 분이다. 나의 출판취지를 말하니 상대방이 감격스러워했다. 왜냐하면 이전에 출판한 것으로 인해서 좋지 않은 말들이 많았고 어려움도 많이 당했다고 한다.

 

 그런중에 내가 출판하겠다고 하니까 아주 반가워했다. 92년도 가을에 전집 10권을 출판했다. 우리 사원들도 이 책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책을 대하는 목사님들이 왜 그런 책을 취급하느냐,  핀잔을 주더라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이용도 목사님에 대하여 소문이 잘못났기 때문에 인식이 좋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믿음이 있었다. 이 책을 찾는 사람은 따로 준비되어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몇 곳의 교계 신문에 책 광고를 냈다. 광고를 보고 전화 또는 엽서로 주문이 몰려오는데 500명 이상이 접수되었다. 계속 3판 을 찍었다.

 

 책이 붐을 일으키니까 이 목사님에 관한 평가가 달라지면서 공개적으로 정평이 나기 시작했다. 회사에까지 찾아와 이 책을 출판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들었다. 이책 을 읽는 분마다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인사를 들어왔다. 2004년도 판에는 피도수 선교사의 이용도 목사 전기를 새로운 자료로 보충하였고, 중복되는 내용을 삭제하여  5권으로 개정판을 냈다.

 

 이용도 목사님으로 인해서 김길송 목사님과 만나게 되었으며 이 목사님의 영성에 많은 영항을 받은목사님들이 중심이 되어 시무언 이용도목사 기념사업회가 태동이 되었다.

 

 2004년 7월 7일에 감리교 본부 회의실에서 100여명이 모여 창립 예배를 드렸다. 김종순목사님이 회장을 맡으면서 기념사업회가 발전 일로에 있다. 육으로는 뵈올 수 없으나 책을 통해서 이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영혼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이규석 장로



2005년도 이용도목사 기념사업회 경과 보고


 

2005. 1. 24. 신년하례식을 화양감리교회에서 오전 11시에 1부 기도회

             2부 친교회로 모임

2005. 2. 28. 2005년도 사업계획 및 재정예산안 심의를 위한 운영위원회로 모임

2005. 3.  7. 이용도 목사 초상화를 제작하여 유관 기관에 기증

2005. 3. 11. 강화동지방 9교회를 순방하며 이용도목사 전집을 보급 겸

             홍보하다

2005. 3. 21. 시무언 이용도목사 기념사업회를 소개하는 홍보용 팜플릿

             5,000부를 제작

2005. 4.  4. 이용도목사 출생 제104주년 기념 추모기도회를 인천 앞바다

             시도에서 마친 후본회 학술분과 위원장 백철 목사의 초청으로

             그의 본가에서 오찬 친교를 가짐

2005. 5. 23. 본회 소식지 창간호를 위한 편집위원회를 본회 사무실에서 모임

2005. 5. 26. 본회 여성분과 위원장이 우순덕원장이 운영하는 햇살센터의

             세돌을 맞는 기념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본회 임원진이 참석하다.

2005. 6.  1. 철원동지방 제3보병사단 수색대대 교회, 생수교회, 생창교회,

             김화교회를 방문하고 이용도목사 전집을 보급 겸 홍보하다.

2005. 6. 20. 한국 기독교 호남지방 순교지 순례를 본회 임원

             부부동반으로 순례하다.

2005. 7.  7. 본회 창립 제1주년 기념행사를 감리회관 16층 회의실에서 가짐

2005. 7. 25. 7월 정기 임원회 7월 정기임원회를 소집하여,상반기 사업 및

             재정의 경과를 심의 후,하반기 사업추진에 대한 재검토에

             대한 상의를 가짐

2005. 9. 26. 이용도목사 소천 제72주기 추모행사를 아현감리교회에서

             오후 3시에 1부 추도 예배,2부 기념강연회,3부 친교모임

             등을 가짐.

2005. 11.  7. 지방 순례 홍보 활동 계획을 위한 실무자 예비모임을 가짐.

2005. 12. 19. 송년 친목회를 화양감리교회에서 오전 10시에 모여

              친교시간을 가짐

 

 8a91d279dc6519a1e0b127eb2c1ed6e0_1469810645_26.jpg
8a91d279dc6519a1e0b127eb2c1ed6e0_1469810645_32.jpg
8a91d279dc6519a1e0b127eb2c1ed6e0_1469810645_4.jpg
8a91d279dc6519a1e0b127eb2c1ed6e0_1469810645_47.jpg
8a91d279dc6519a1e0b127eb2c1ed6e0_1469810645_52.jpg
8a91d279dc6519a1e0b127eb2c1ed6e0_1469810645_58.jpg
8a91d279dc6519a1e0b127eb2c1ed6e0_1469810645_63.jpg
8a91d279dc6519a1e0b127eb2c1ed6e0_1469810645_69.jp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