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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언 200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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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10-27 20:31 조회2,4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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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의 믿음 (히 11 : 1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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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김구선생님이 좋아하셨던 이런 옛 글귀가 있습니다.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하얗게 쌓인 눈발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교란스럽게 걷지 말고 똑바로 걸어가서 똑바른 발자취를 남기어라.

그래야 뒤에 따라가는 사람이 앞서 간 사람의 발자취를 바로 따라갈 수 있느니라”

히브리 11장은 믿음의 선배들의 명예의 전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능력으로 우리보다 앞서 인생을 살아간 선배들의 믿음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장이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 선지자들. 선배들의 믿음을 핵심적으로 서술해 나간 이 히브리서 11장 구절구절을 읽어내려 가다가 그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나의 눈을 크게 뜨게 한 것은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는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믿음의 자취도 들어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기록된 우리 선배들이 보여준 믿음의 능력은 어떤 것이 있는가?

첫째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란 믿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희망.

둘째 볼 수 없는 것을 본 믿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비전.

셋째 할 수 없는 것을 한 믿음 (할 수 없는 것들의 향함) 순명.

 

1901년 혼돈과 암흑과 절망의 땅에서 태어난 이용도의 의식 속에 찾아 온 것은 민족의 비극과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빛과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나라와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신감옥소를 몇 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다하면서 젊은 피를 송두리째 바치지만 그것은 한낱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더 무능력한 것임을 절감하고 이후 신학을 하고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피울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부활복음을 외치게 된다.

 

스스로 고통과 가난과 고독과 낮아짐과 순결을 온몸에 걸치고 회중들앞에 서서 눈물로 목이 터져라 회개를 외치고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돌아보고, 덕지덕지 붙어있는 무지와 죄악된 관습과 헛된 욕망의 너울을 벗어던지고 새 한사람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외치고 외치다가 마침내 병든 몸으로 쓰러져 33년을 살다간 선배 이용도목사, 시무언의 절규를 듣는 듯하다.

믿음은 희망의 근거요, 믿음은 비전이요, 믿음은 기적을 낳는 증거라고.

믿음은 새사람,  새의식, 새나라를 입는 것이라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부패한 죄악들, 어둡고 절망스러운 미래, 혼돈된 정신 세계와타락한 인생살이, 회개의 열매가 없는 한국교회의 미래. 수천수만으로 갈라져 갈등하는 민족의 신음소리 앞에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의 의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통곡하고 무엇을 회개하고 무엇을 울부짖어야 하는가?

이용도, 시무언 목사가 지금도 살아서 외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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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임원동정

 

 

 

1. 백철목사 (본회 학술분과위원장)가 2월 8일에서 11일 (3박 4일)간 미국 알라바마주 헌츠빌 지역 연합전도회를 인도했습니다. .

 

2. 우순덕 원장 (본회 여성분과위원장)이 운영하는 햇살사회복지회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지역에 사는 독거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지난 5년간 정성껏 대접하고 있습니다. 본회는 지난 2월 13일 잔치에 본회 이규석 장로 (본회이사)와 김길송목사 (본회 상임부회장)이 참석하고 후원금 20만원을 전달하였습니다.

 

3. 김준형목사 (본회 홍보분과위원장)가 담임하는 반석교회(경기도이천)의 창립 37주년기념 및 총동원주일 축하행사가 2월 25일 (주일)에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4. 채의숭 장로 (본회 자문위원)의 출판기념 축하회가 3월 27일 오후 6시 30분에 종로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에서 표용은 감독의 주례로 거행하였습니다.

 

5. 김종순목사 (본회 회장)의 차남 김석태군의 결혼식이 7월 7일(토) 오후 1시 화양감리교회에서 표용은 감독의 주례로 거행하였습니다.

 

6. 김준형 목사의 회갑연이 9월 15일(토) 11시에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고백1리 반석교회에서 모입니다. 전화 : (031) 399 - 3942 / H•P : 011-491-3322

 

 

 

 

금년 상반기에 본회를 예방해 주신 분들

 

 

김석환 목사 – 현재 몽골에서 선교사업 (신학교를 운영중)을 하심.

서운갑 목사 – 한국기독교 원로목사회 이사

임두순 목사 – 한국기독교 원로목사회 회원

김동두 성도 – 서울교회 성도

강재현 장로 – 서울 무학교회

김형기 장로 – 이문동 감리교회

박창근 장로

김세영 목사 – 강남대학교 동문목회자 협의회 총무

김만수 목사 – 강남대학교 동문목회자 협의회 부회장

신응균 목사

김혜원 전도사

이성덕 사관 – 전 구세군 사령관

최인찬 목사 – 현 우원 이호빈 목사 기념사업회 이사 및 우이동교회 원로목사

 

 

 

 

 

이용도 목사의 고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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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들어가는말

 

 이용도는 고난과 한으로 점철된 역사 속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의 억압과 가난과 병고의 아픔을 깊이 체험하여 살았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고난과 민족의 고난을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하나로 볼 수 있었으며 ‘고난’의 눈을 통해 고난 속에 살아있는 예수를 발견하고 만날 수 있던 것이다. 이용도에게 예수는 오직 영광스럽고 찬란한 곳이 아니라 비천하고 낮은 고난의 자리에만 있는 분이다. 

예수는 언제나 고난을 겪고 있는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과 병자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의 자리에 있는 예수의 삶을 닮는 것이 이용도에게는 영광이요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주님 계신 곳에 나도 있게 해주옵소서. 지금은 주 계시던 곳과 내가 있는 곳이 천양의 차로 떨어져 있어 내가 주를 견해(見解) 할 수 없나이다. 주는 가난한 가운데 계시었고 나는 부한자들 가운데 있나이다. 주는 병든 자들 가운데, 죄인들 가운데 계셨고 나는 의인들 가운데 있나이다. 지금도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영은 가련한 자들 중 계시지요.1)

 이용도는 이렇듯 고난의 현장 한 가운데 있는 예수를 발견하게 된다. 이용도에게 예수는 영광의 예수가 아니라 비천하고 무력한 예수였다. 이용도에게 십자가에서의 예수는 비참하고 무력함의 절정이었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무력하게 죽어간 예수를 이용도는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게 십자가의 고통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영광의 아름다움이었다. 이용도는 “예수의 모든 아름다운 성격은 그의 십자가에 모두 집중되어 있습니다.”2)라고 말하며, 예수가 묵묵히 지고 가던 십자가를 따라가 예수가 마시던 고난의 잔을 달게 받겠다고 결단한다. 그렇게 예수의고난3)과 함께 할 때만이 자기의 완성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1) 이용도 저, 변종호 편, 『이용도목사전집』제2권 일기, (서울 : 장안문화, 2004), 1932년 6월 10일. 241. 이하 『일기』

2) 『일기』1929년 11월10일,79.

3)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외부로부터 당하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다

 

 

 

2. 고난의 그리스도 신비주의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그의 삶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33년의 그의 인생은 고난의 상징이었고 고난 자체였다. 이용도의 삶의 이력을 잠시 살펴보면 가난과 잔병 치레 그리고 술을 좋아하고 난폭하기만한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일관되었던 어린시절, 3 •1운동과 함께 감옥을 왔다갔다하며 5번의 투옥과 3년여의 징역살이를 통해 모진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또한 9년동안이나 다녀야했던 중학교 시절과 끝없이 쫓아다니는 빈곤과 병약으로 인하여 괴로워했던 신학교 시절, 부흥운동과 함께 그가 죽는 날까지 쫓아다니던 이단시비로 인하여 부흥회 중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하고 금족령과 목사직에서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기도 하였으며 이단정죄와 “이단의 괴수”라는 오명을 쓴 채 삶을 마감해야 했던 이용도의 삶은 고난 바로 그것이었고 고난 속에 바로 그가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도 어두움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억압과 수탈에 의한 고통은 갈수록 심해졌다. 변선환은 이용도의 신학이 일제의 폭정이 극에 달하였던 암흑시대의 겨레의 아픔과 고난을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4) 이용도의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 신비주의’는 그가 그의 시대 고난을 인격적으로 거치며 살아가, 그 시대 고난에 응답한 신앙인의 바로 그 산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그분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 신비주의로 형성된 데에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당시 한국교회와 겨레의 고난은 그렇게 숙명적인 것이어서, 쉽게 극복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는 한국교회와 겨레에게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주님으로서보다는 다만 성육하신 임마누엘로서 고백하기 쉬웠다. 우주의 크신 주님이시요, 왕으로서 펼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호흡처럼 얽힌 고난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다. 이용도는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합일을 이룰 수 있으며, 바로 그 합일에서 그리스도는 직접적으로 체감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용도가 그의 신비주의의 길에서 처음부터 전적으로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와의 합일로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27년부터의 그의 일기와 1930년부터의 그의 서간을 통해 볼 때, 세상과 그의 신앙 사이에서 방황과 갈등을 거듭하던 이용도였다. 그러던 그가 세상의 온갖 주목과 유혹과 오해 등을 떨쳐버리고 오직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 신비주의자로서의 삶을 펼친 때는 1929년 기나긴 여름의 끝 무렵이었다. 1929년 8월 23일 일기에서 이용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방황하던 나는 이제야 나의 길을 찾었나이다.…그 길이란 찾기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울 것인데 공연히 반생의 공을 길가에서 낭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 길이란 곧 예수님이 밟으신 길입니다. 나는 그냥 믿고 그 길로만 따라 가려나이다. 남이야 나를 가리켜 〈시대에 뒤떨어진 자〉라고 하든,〈케케묵었다〉고 하든, 못난이라고 하든, 나는 이제는 탓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도로혀 그런 소리 듣는 것을 무상의 광명으로 압니다. 그것도 주님을 따르노라고 받는 욕이니깐,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남의 세상에 살아왔습니다. 너무나 남의 눈을 두려워했든 것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아주 〈예수쟁이〉가 되렵니다. 미치도록 믿으려나이다.…세상에서 똑똑하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속으로는 무기력한 생활만해! 참아 못 견딜 노릇인 줄 압니다.…오 주여 어느 지경까지든지 주만 따라가게 하옵소서.5)

 이 일기를 통해 이용도의 삶에서 모든 고민과 갈등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후에는 그는 확고하게 그의 신앙의 형태, 곧 신비주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갈등하고 고민하지만 신비주의 안에서 한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시대에 뒤떨어졌다느니 못난이라고 욕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위한 길로가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하기로 거듭 맹세하는 것이다.

 

 

4) 변선환,“이용도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이용도 목사 관계문헌집」(인천:초석출판사,1986)152.

5) 『일기』1929년 8월 23일,67.

 

 

 

3. 고난에 대한 이해 

 이용도는 고난의 그리스도 신비주의로 살아갔다. 이용도의 삶에 나타난 고난을 말하기 전에 고난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살펴보려고 한다.

 苦는 苦 자체로서의 의미를 담고있다. 대만의 신학자 송천성(宋泉盛)은 고난의 의미를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6)

 첫째로 고난의 체험은 종교적인 체험이다. 고난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게 되며 절망과 기대속에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하느님께 구원을 바라게 된다. 고난이란 참으로 신앙적인 것이다.

 둘째로 고난의 체험은 친교의 체험이다. 고난은 하나님을 인간에게 밝혀주며인간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해 준다. 이는 또한 사람들 사이를 서로 알게해 주고 가까이 모이게 해 준다. 고난 속에서 이웃은 자기의 이웃을 발견하는 것이다.

 셋째로 고난은 인간으로 하여금 측은해 하시는 하나님 앞에 적나라한 모습으로 설 수 있게 한다. 무한한 권세, 불명의 존재 앞에 설 때 인간은 자만과 위선의 껍데기를 벗을 수 있다.

 이렇듯 고난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나와 관계하고 있는 이웃과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고난은 사람을 정직하게 하여서 더 이상 자신을 꾸밀 수 없게 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돕는다. 함석헌은 한국사에 나타난 고난과 수난의 역사를 세계사의 ‘하수도’격 위치라고 선포하였다. 굴욕적인 면을 감추기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려는 시도이다. 고난을 통해 한국사를 보고 세계사를 보자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고난은 고난 자체로의 의미가 담겨 있다.

 

 

4. 이용도의 고난이해 

 우리에게 고난이 부닥쳐 올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그 고통이 우리를 파괴로 이끌어 갈 수도있고, 또한 우리를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시킬 수도 있다. 어떤 개인이 현재의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변화되어 갈 때는 아픔을 동반하게 된다. 경험주의 신학자 윌리암스는 고통이 우리 자신의 인격적인 역사가 발전해가는 특이한 과정이라고 본다.7)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겪는 고통은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건강에 대한 위협을 극복함으로 더욱 더 건강해지는 것과 같다. 이용도 역시 고난의 삶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존재로 성장하여갔다.

 

 

1) 고난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이용도 

 이용도는 고난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를 자각하게 된다. 즉 나 자신의 실존 및 나 자신의 인간성을 발견한다. 예수를 사랑한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 부분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용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일의 실패와 성 문제와 인생 문제의 빈민에 접하여 극도의 고민을 견디지 못하여 한 때에는 자살하려고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믿어 이 모든 인간고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런즉 나의 하나님은 나의 육신도 구원하시고 내 마음과 영혼도 구원하시었습니다. 나의 생활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나의 구주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8)

이용도는 자신의 고난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발견은 곧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신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이용도는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를 믿으며 이러한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자아 발견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확신을 구축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자아발견은 우리 자신이 의미있는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는 관문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고통과 그 고통이 가져다 주는 자아발견을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성장할 수 있다. 육신의 아픔까지도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하며 다 이루지 못한 생을 새롭게 살아가도록 영향을 끼친다. 결국 고통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에 대한 이해를 심오하게 해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건이 우리가 당하는 고통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아픔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구속사업이란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존재의 자각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우리의 성장을 의미한다.

 

6) 송천성 著, 이덕주 역,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경북:분도출판사,1997)216.

7) 정태기, “아픔과 敎會相談”, <기독교사상>(1983,9),113.

8) 이용도 저, 변종호 편, 『이용도 목사전집』, 제1권 서간집, (서울:장안문화:2004)166~167,이하 『서간집』,

 

 

2) 고난을 통해 겸손함을 배우는 이용도 

 우리는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교만을 자주 본다. 그런 사람은 자기자신도 모를 뿐만 아니라 언제나 이기주의적이어서 자기가 어디에서나 왕으로 군림하려는 것을 볼 수 있다. 고통은 이런 사람들에게 훌륭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그의 욕심과 교만이 겸손과 깨끗한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을 본다. 고통은 이기주의적인 사람에게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고통을 통해 자기의 실존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이용도는 고난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경험한다.

 오 주여 나는 압니다. 주의 자취를 온전히 따라가노라면 나에게는 얼마나 욕됨과 수치됨이 많을는지, 매맞음, 옥에 갖힘, 죽음을 당함,오,이런 선물이 내 앞에는 얼마든지 있겠지요. 그러나 주께서만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이 모든 핍박을 말없이 당하려 하나이다. 주도 당하셨으매 나도 당함이 마땅하나이다.9)

 이용도는 모든 고난과 핍박을 겸손히 받아들이려 하였다. 욕됨과 수치, 매맞음, 옥에 갖힘을 오히려 선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용도가 품고 살아온 ‘고(苦),빈(貧),비(卑)10) 의 생활훈을 보더라도 고난 앞에서 겸손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용도는 고난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평안할 때 배우는 것보다 많고 참된 진리를 배우게 된다고 말한다. 겸손함의 자리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이용도는 충분히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많은 부와 명예를 거느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용도 자신은 그의 자리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고 비천한 곳임을 늘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3) 아픔을 민감하게 느끼는 이용도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곤경을 훨씬 더 예민하게 느끼도록 해주고, 그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도 갖게 해준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 것을 알았고, 우리의 마음이 겸손해져서 나만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의 아픔을 보게 되는 것이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한결 같은 증언이다. 이용도 목사 역시 자신의 고난을 통해 주위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이용도 목사와의 형제인 이호빈 목사는 그를 ‘인정이 많은사람11)으로 회고하기도 하였다. 이용도의 삶은 말과 생각으로 나누는 고통이 아니라 몸으로 나누는 고통이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도 볼 수있다. 생각으로만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 친히 자신의 몸을 통해 고난을 당하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몸으로 나누는 고통을 이용도 자신도 실천한 것이다. 고통의 경험을 서로 나누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를 도울 때, 거기에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을 보게 된다.

 

 

9) 『서간집』, “박정수씨에게” 1930년 1월, 23.

10) 『서간집』, “이태순씨에게”,1931년 10월 25일, 86.

11) 예수교회 엮음,『시무언』,(서울:다산글방1993)183-184.

 

 

 

5. 나가는 말 

 예수를 따라가는 것은 곧 그의 고난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 고난에 길에 서려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이용도는 예수를 따라가고 예수를 위하는 예수 중심주의를 외치며 예수를 닮고 예수처럼 살기 위해 애쓰는 삶을 보였다. 고난은 십자가의 진미를 맛보는 길이고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길이다. 고난을 받지 않는 것은 이용도에게 있어 형식과 거짓에 물든 신앙으로 비춰졌다. 예수와 하나가 되는 길은 나를 부인하고 ‘없음’과 ‘비움’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없음’과 ‘비움’의 삶을 살고자 한 이용도에게는 예수의 사랑만이 충만하게 채워졌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그리스도 신비주의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구원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 자기가 없어지는 무아(無我)에 이르게 된다. 이제부터 사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다.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건조한 이론이 아니었다. 그는 따스한 사랑을 찾았으며, 질서 있는 세상 살림을 즐기지 않고 황홀한 기도의 비밀을 즐겼다. 그는 추상적인 전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하나에서 전체를 보려고 하였다. 이용도는 이것을 사랑이라 하였다. 이는 그의 지극히 깊은 사랑으로 나타났다.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주는 일에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세상이 비난하고 버린 사람일지라도 그는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포용하였다. 자기비하를 통해 예수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용도의 고난의 그리스도 신비주의가 영향력이 있는 것은 이론이 아닌 이용도 자신의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에도 고난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이용도에 대한 글을 쓰는 내내 마음에 무거운 짐을 담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생명의 고난을 살아간 그가 그립다.

 

 

 

 

죽음의 사선을 기도와 눈물로 이겨낸

하나님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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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환경과어린시절

 

 이용도는 1901. 4. 6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이덕흥씨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하여 잔병을 많이 앓고 신경이 과민하고 울기를 잘하였다고 한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부터 몸도 좀 건강해지고 학교 성적이 중간 이상이었고 선생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그는 친구들을 잘 사귀어 항상 여러 친구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용도는 특히 이야기를 재미나게 하여 친구들이 줄줄 따라다니기도 하였고,친구들과 군대놀이를 할 때는 항상 대장이 되어 지휘를 하였다. 

 용도의 가정환경은 좋지 못하였다. 부친은 술을 많이 즐기는 분인데 모친은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집안은 항상 편안하지 못하였다. 부친은 항상 모친을 핍박하였다. 그래서 모친이 어린 용도의 눈 앞에서 양잿물 사발을 추켜든 때도 수차례 있었다. 모친은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의 기도를 항상 올리고 있었다. 특히 모친의 기도에 감화를 받은 아이는 셋째 아들 용도 였다. 13세 때 그는 벌써 기도 생활을 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는 예배당 종각에 올라가 여러 시간, 혹은 밤새도록 기도를 올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모친이 병중에 낳은 누이 동생을 용도가 맡아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젖을 얻어 먹이고 저녁에 일찍 돌아와 이 집 저 집으로 젖을 얻어 먹이러 다녔다. 그는 어린 누이가 울 때 함께 울었고, 누이가 배고플 때 함께 굶었다.

 중풍에 걸린 백부님이 어느 날 밤 중에 갑자기 진유(眞由)를 사오라고 하였다. 캄캄한 한 밤 중에 혼자 길을 가노라니 키가 구척이나 되는 마귀가 나타나 길을 가로 막았다. 이 때에 용도는 놀라지 않고 마음을 침착히 한 후 찬송가를 불렀더니,하늘에서 천사의 날개가 내려와 그 마귀를 밀어내고 보호해 주어 그 길을 무사히 가게 되었다.

 14, 5세가 되자 그의 재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서 대패,톱,망치 등을 가지고 항상 뚝딱 뚝딱 무엇을 만들고 고치고 하여 집에 손질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다 알아서 수리하였다. 그는 일에 근면하여 무슨 일이든지 착수하면 끝이 날 때까지 꾸준히 실천하였다. 무슨 일을 붙들면 미친 듯이 열중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결사 면려하는 성격이었다. 특별히 용도는 말재주가 비상하여 15, 6세때 벌써 그존재가 알려져 윤치호, 이상재,양주삼씨 등이 놀라 감탄하기도 했다고 한다.

 

 

독립 운동과 신학교 시절 

 보통학교를 졸업한 용도는 1915년 개성 한영서원(송도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수업연한이 4년인 이 학교를 용도는 9년 동안 다녔다. 학비를 벌어서 공부하느라 고생하고,독립운동으로2년 동안 감옥생활까지 한 탓이었다. 용도는 9년간 공부하였어도 졸업장을 받지 못하였다. 이 무렵 식당에서 식사 종소리가 나서 모두들 식당으로 몰려들 때 용도는 슬그머니 딴 길로 나가 만월대에 가서 눈물로 끼니 때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입은 옷은 항상 남루하였고 양말은 발을 가리운 부분보다 내놓은 부분이 더 많았다. 주일에 주일학교 교사를 하려 해도 여교사에게 양말 뒤축이 뚫어진 것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못 가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고향인 시변리와 개성 사이는 1백 4십 여리인데 방학이면 언제나 이 길을 걸어다녀야 했다. 차비도 없고 음식 사 먹을 돈도 없는 용도는 아카시아 잎을 뜯어 먹고 가을에는 풀 열매를 따먹고 겨울에는 솔잎을 따먹고,눈을 집어 삼키면서다녔다. 그러나 신앙에 굳게 서 있는 그는 조금도 누구에게 짜증을 부리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빛은 절대 없었고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더 가까이 나가기를 힘쓰는 것이었다.

 어렵게 공부하는 동안 1919년의 봄이왔다. 3월 1일 낮에 대한 독립만세의 소리가 개성 거리를 진동시킬 때 그 함성 소리 속에는 용도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날 만세를 부르기 시작해서 1924년 봄 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5년 동안 용도는 4번 투옥 되었고 3년 이상을 감옥에 갇혀 지냈다. 용도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두 손을 밤낮 채워두는 사형수의 손목에 얼음이 얼어붙자 가끔 제 뱃속에 품어 녹여주었다. 그리고 배고파하는 죄수들에게 자기 밥을 주고 저는 고요히 기도를 하는 때가 가끔 있었다고 한다.

 서대문 형무소를 나온 용도가 송도 고등보통학교를 찾아갔을 때 교장은 용도를 신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용도는 애국심에 불타 있을 뿐 신학교에 가는 것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거부하였다. 그러나 학교측의 권면으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를 고요히 부르며 서울에 있는 협성신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마음에도 없는 신학교에 들어온 용도는 신문, 잡지, 시집, 소설, 법률, 정치서적 등이나 읽고 학생들끼리 모여 앉으면 이론이나 캐고 논쟁을 하였다. 강의시간에는 까다롭고 괴상한 질문을 하여 교수를 골려주는 등 경건치 못한 학생이었다. 그래서 신학생들이나 교수들로부터 말썽꾼으로 알려졌다. 시초에는 이렇게 난폭하여 보이던 용도는 점차 마음이 안정되고 자리가 잡혀갔다. 그 후 주일학교 사업에 뜻을 세운 용도는 시, 노래,연극 등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이호빈,이환신과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함께 자취생활을 하면서 학창생활을 뜻있게 보내게되었다.

 

 

죽음을 뛰어넘은 뜨거운 강동 체험

 용도는 2학년 2학기를 마치는 1925년 겨울 폐병 3기 판정을 받았다. 그때 폐병 3기 진단은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호빈과 환신은 용도에게 자신들의 고향인 평남 강동에 가서 휴양하도록 권하였다.

 겨울 방학이 되자 용도는 환신과 함께 강동으로 갔다. 강동에 가서 수일 동안 지내노라니 그 곳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아동 설교나 신학생 상대로 한 설교 외에는 경험이 없는 고로 사양했으나, 시골교회에서 하도 조르는 바람에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부흥회를 하루 앞두고 두 사람은 밤이 깊어지도록 기도하고 부흥회 당일에도 새벽부터 저녁 때가 되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부흥회에 임했다.

 그러자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찬양과 기도 속에 하나님의 강한 임재가 느껴졌다.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어,이곳저곳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의 역사가 일어났다. 성령이 충만해진 이용도는 자신의 중병도 염려치 않았다. 온 몸에 있는 피를 다 쏟을지라도 오로지 예수님만을 외치다가 죽고 싶었다. 죽을 각오로 열정을 가지고 열변을 토하였다. 한 주간을 지내고 나니 의기충천하여 밥은 전보다 배는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기운이 산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감을 얻은 용도와 환신은 자진해서 근처의 다른 교회로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밤 11시까지 집회를 끝내고 60리 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어도 피곤치 않고 원기왕성하였다. 이렇게 한 달 동안 지내다가 건강해진 모습으로 학교에 돌아오니 친구들과 가족들은 깜짝 놀라 감격에 휩싸여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강동에 다녀온 용도는 딴 사람이 되었다. 부동의 신념과 확신을 가진 중생의사람이 된 것이다. 벌써 죽었을 사람이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새 힘을 얻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용도는 “주님께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는 동안에는 내 생명을 거두시지 않을 것이다. 그 뜻에 따라 복종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만 전심전력 기도하고 준비하자”라고 결심하고 또 맹세하였다.

용도는 여전히 아동을 위한 사업에 몰두하였는데 전보다 더욱 깊고 신령한 내용으로 표현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점 아동에서 학우상대로, 더 나아가 일반 신도로 그의 목표는 넓어지고 높아지고 깊어져갔다. 용도는 음악에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손재주가 좋은 그는 영신학교의 풍금 수리를 위해 재료비만 들여 잘 고쳐 놓기도 했다.

 

 

통천으로의 파송 

 어느덧 4학년이 된 용도는 9월에 강원도 통천으로 파송을 받았다. 이 무렵 용도는 공부보다는 깊은 명상에 잠기고 애타고 끓는 기도의 생활에 치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졸업을 앞두고 1927년 성탄절에 성탄극 ‘십자가를 지는 이들 (원작이용도)’이 신학교 학생들에 의해 무대에 올려졌는데 2000년전 주님의 수난 광경을 너무나 분명히 보여주는 작품이어서 그 자리는 통곡과 눈물의 골짜기가 되었다. 1928년 1월 28일 용도는 협성신학교 제14회 졸업장을 받았다.

 교회 담임 초기 용도는 이성적인 전도인이요 문화적인 교역자였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의 전도는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고 아무런 열의도 일으키지 못하였다. 깜짝 놀란 용도는 자기 자신의 신앙혁명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박재봉이라는 청년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 10일간의 불식불음의 금식기도를 드리고 하산하였다. 10일간의 산 기도를 드린 후 용도는 전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말하는 전도자이기 전에 기도하는 기도꾼이 되었다. 예배당 근처에서 용도를 만날 수 없을 때는 산기슭이나 시냇가에 엎드려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용도를 찾아 볼 수 있었다. 기도를 통해 힘을 얻은 용도는 교우의 가정심방, 노방전도, 우물을 파고, 예배당을 자신이 직접 수리하였다. 병약자를 업고 다니고 거지를 집으로 데려다가 대접하는 등 복음사역을 위해 열정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성령의 불길 속에 이어지는

성령의 뜨거운 회개의 역사

 

 

마귀와의 혈전혈투 

 이용도 목사님은 기도생활에 더욱 열정적으로 몰입하였다. 초저녁이나 밤중이나 새벽이나 언제든지 때를 가리지 않고 엎드렸다. 어느 날 새벽 3시쯤 되어 자기의 규례대로 그는 또 성전으로 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성령의 감동이 그의 영혼을 감쌌다. “아버지여 나의 혼을 빼어버리소서. 예수님께 미치기 전에는 주를 온전히 따를 수 없사옵고 또한 마귀와 싸워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그때였다. 크고 까만 몸뚱이와 삼지창 같이 생긴 손톱과 발톱, 사발같이 크고둥근 눈,사자의 이빨 같은 날카로운 이빨, 머리에는 큰 뿔이 두 개 달린 마귀가 나타났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하는 그를 머리 맡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흉측스러운 마귀는 괴상한 웃음을 지으며 무서운 눈을 부릅뜨고 위협하였다. 날카로운 손을 내밀어 이용도를 움켜잡으려고 하였다. 가슴이 서늘하고 소름이 쫙끼쳤다.

 이용도 목사님은 필사적으로 용기를 내어 “아버지여! 아버지여!” 울며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사탄아 물러가라!” 고함을 쳤다.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마귀를 대적했다. 자세히 보니 성전 안에도 마귀들이 가득 차 있었다. 밖에도 마귀 떼들이 머리를 창문으로 들이밀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주먹을 들어 마귀들을 내어 쫓았다. 벽력같이 호령을 하며 고함을 지르고 퉁탕거리며 이리치고 저리쳤다. 하지만 마치 허공을 치듯 바람벽과 유리창을 깨뜨렸다. 그의 손은 피가 흐르고 뼈가 어긋나 부어올랐다. 새벽 내내 있는 힘을 다하여 고함을 치다보니 목은 쉬었다. 밤새도록 홀로 혈전을 계속하느라 기진맥진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마귀 하나가 남아 나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이에 그는 또 소리를 쳤다. “사탄아 물러가라! 이 집은 아버지의 성전이니 물러가라!” 마귀는 그제야 문을 열고 줄행랑을 쳤다. 이에 그는 날쌔게 뛰어나가 마귀를 추격한다. 달아나는 마귀를 쫓아가니 마귀가 어느 집 대문에로 쑥 들어간다. 권사의 집이었다.

 그는 달려들며 “권사님, 마귀가 들어왔으니 일어나시오”외쳤다. 갑작스런 일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난 권사님의 가족들 눈에 기진맥진한 이용도 목사님이 보였다. 목사님은 아랫목,윗목으로 왔다갔다하며 두 주먹으로 무엇을 치는 듯 하였다. “이놈아, 사탄아! 너 이놈,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도 해치 못하리라!”한참 후에 마귀가 집에서 뛰쳐나가 도망가니 목사님은 또 따라간다. 그냥 추격하니 통천시가를 다 지나서 멀리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마귀를 격퇴하고서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높이 부르며 거리로 돌아올 때는 벌써 날이 다 밝았다. 피묻은 의복과 손,땀으로 젖은 핼쑥한 얼굴을 한 그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1928년 12월 24일 새벽,마귀와의 격전에서 승리를 얻은 이용도 목사님은 이때부터 하늘의 권능과 용기를 얻었다. 기도와 설교와 신앙생활에 활력이 넘쳤다.

 

 

번져가는 성령의 역사와 부흥의 불길 

 하루가 지난 성탄절이었다. 강단에 올라가 몇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성전을 가득 메운 성도들은 통곡을 하며 거꾸러졌다. 목사님의 말씀은 마치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 같았다. 강퍅한 심령들이 부서트려졌다. 오랫동안 불신과 배교에 빠져 있던 사람들, 기독교를 박해하던 청년들이 다 나와 거꾸러지는 것이었다. 50-60명에 불과한 통천읍 교회가 몇 주일 후에는150-160명으로 꽉 들어찼다. 미지근함과 부덕함으로 비방거리였던 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삶이 바뀌자, 사람들은 그 빛을 찾아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령의 역사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그는 새해부터 담임한 구역 내 일곱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다. 부흥의 불길이 교회마다 옮겨졌다. 그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성령의 불이 떨어졌다. 교회마다 통회와 영적 회복이 이루어졌다.

 2-3개월만에 그가 담임한 통천구역 내의 일곱 교회는 큰 부흥을 하였다. 그러자 근방 여러 곳에서도 간절한 청빙이 이어졌다. 1929년 20여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아낌없이 드렸다. 성령의 역사는 계속 번져나갔다. 그는 1930년도 2월 26일부터 3월 9일까지 평양 중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 집회에서 주님의 권능이 크게 임했다. 평양 성중을 들끓게 하였다.

 

 

어느 성도의 고백 

 이때 큰 은혜를 체험한 어느 성도의 간증이다.

『내가 29세 때 서문 안에서 백화상점을 보고 있던 때다. 어느 날 저녁엔가 중앙예배당에서 부흥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나는 처음에 가지 못하였다. 신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와서 하는 말이 청년목사인데 사상과 신앙이 참 좋고 말 또한 썩 잘하더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저녁에 동생이 예배당에 간다고 하나 나는 역시 가지 못했다. 밤이 깊어 동생이 돌아왔다.

 들어오며 나를 붙잡더니 기가 막혀 울면서 “형님 나는 죽을 죄로 잘못하였으니 용서하여 주세요.”한다. 나는 웬일인지 몰라 오직 놀랄 뿐이었다. 주머니에서 큰돈 15원을 꺼내들면서 “이것은 형님 안 계실 때에 제가 도적질한 것이에요.”하며 울음소리가 더 높아진다.” 촌에 갔다 와서 이십원 빚 준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다 훔쳐낸 돈이에요.” 하며 운다. 이 때에 나는 “사람의 죄는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는 것이고,사람은 누구를 사죄하거나 정죄하지 못한다.”고 하며 동생을 위로하였다.

 그 다음 날 저녁이 되었다. 동생의 태도를 보고 밤새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상점을 동생에게 맡기고 중앙 예배당으로 찾아갔다. 사람이 어찌나 많이 모였는지 도무지 바람 들어갈 틈도 없다. 그러나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꿰뚫고 들어가서 강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까지 들어가 앉았다. 시간이 아직 안 된 모양이라 모인 무리가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얼마 후 어떤 청년 하나가 강대상으로 올라간다. 얼핏 바라보니 바람에 날아갈 듯한 가느다란 뺨에 살 한 점 없고노란 그 얼굴! 그는 마치 아편장이로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저런 사람이 무얼할꼬?’하고 업신여기고 또한 의심하였다.

 내가 참석한 둘째 날 밤의 설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이날 밤의모든 광경과 사실은 벌써 땅에서의 것이 아니었다. 부르는 찬미 소리도 사람의 노래가 아니요 천군 천사의 소리였다. 울려 나오는 그 음성이 모두 사람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날 저녁에는 별사람이 다 모였다. 일등 부자, 관리, 변호사가 다 모였다.

 십자가의 설명은 사람의 간을 갈래갈래 끊어내는 것이었다. 빌라도의 심판을설명하실 때 내 곁에 있는 변호사가 너무도 울고 있음에 내가 참 미안한 마음을 느낄 지경이었다. 천여 명 군중은 그저 울음이다. 수천의 눈은 그저 눈물이다. 목석도 이 자리에서는 울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나도 울었다. 그저 울었다. 실컷 울다가 얼굴을 드니 강단에 선 이 목사는 보이지 않고 공중에 서있는 십자가와 거기에 달린 주님만이 내 눈에는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는데 너는 무얼 하고 있느냐!”하는 음성이 내 귀에 들려 왔다. 이때에 나는 기도도 되지 않고 울 수도 없고 다른 무엇이 보이지도 않고 입을 열 수도 없어졌다. 오직 귀에 들리는 큰 음성 “너는 무엇을 하느냐?’ 하는 소리 뿐이었다. 한참동안 어느 세계에 가서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는 나의 눈에,곁에 있는 변호사가 마룻바닥을 치며 대굴대굴 구르는 풍경이 나타났다. 나도 기도를 하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도무지 한 마디도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잠도 안 오고, 밥을 먹으려하니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낮에는 상점 때문에 가지 못하고 밤에야 또 가게 되었다.

 셋째 날 밤, 이날 밤에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그저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에 끓으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요, 예수님은 사람을 저렇게 사랑하시었구나 하고 스스로 감사를 느낄 뿐이었다. 설교 하시는 동안 나는 그저 눈물 그저 울음에 잠기었다. 큰 장마 후에 개천마다 물이 가득차는 것같이 이날 밤에는 눈물이 더욱 더욱 예배당에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

 설교를 마치신 후 통성기도를 시키시니 울음과 통곡 소리에 예배당은 부글부글 끓는 것이었다. 나도 울었다. 그러나 기도는 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기도를 한다고서  “주여, 어찌하여 저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까?” 하였다. 나는 “어찌하여 기도가 안 됩니까?” 이 말 한 마디를 가지고 약 한 시간가량 악을 쓰고 몸부림을 치고 졸라대었다. 내 가슴은 더욱 더욱 막혀 오고 답답하여 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애를 쓰기를 두 시간이나 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 귀 에 들려온다.

“이 놈 너 이 놈, 기도는 하나님의 일이다. 네 맘에 죄를 그렇게 쌓아 놓고 기도를 하겠다고?”하는 소리였다.“주여 내 죄가 무엇이오니이까? 주께서 십자가 공로로 대속하여 주신 줄 믿사옵는데 이제 내게 있는 죄가 무엇입니까? 나는 졸랐다.“내가 네 죄를 사해 준다. 그러나 네가 너의 손과 눈과 발과 마음으로 지은 죄는 네 스스로 회개하고 자복하여야 사함을 받는다.”“주여,이것은 용서함을 받은 줄로 알고 있었는데요.”“아니다. 좀 더 회개해라.” 나는 이때에야“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통곡하였다.』

 

 

 

 

이용도 목사님이 무어라 말씀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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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처럼 살기 원했던 이용도(李龍道)목사. 사랑과 실천의 사도로 살다가 1933년 10월 2일 33세 꽃다운 청년의 나이에 요절한 비운의 사도 한국교회의 영적 스승 이용도 목사. 이 나라 이 민족의 살길은 오직 기독교 정신으로 구출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개인의 구원과 교회 갱신의 회개운동을 위해 전국을 누비며 초교파적으로 대부흥 집회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이용도 목사. 그는 무언(無言),겸비(謙卑), 기도(祈禱) 이 세 가지를 평생 실천하기를 위해 노력했던 이용도 목사. 그는 암울했던 일제하에서 이 민족과 교회에 새별이었고 희망이었고 예언자였고 민족의 스승이었다.

그를 비난하는 자들과 그의 신앙과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 공히 이용도를 가리켜 신비주의자, 성령운동가, 교회 개혁 사상가,동양적 영성가,포스트 프로테스탄트 사상가,미학적 신학자,묵시문학적 감수성의 소유자,탈오리엔테리스트 등 여러 모양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생시에는 주위로부터 시기를 당하기도 하고 부흥집회 도중 쫓겨나기도 하였으나 그는 예수 닮아가려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다 갔으며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를 졌던 것이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끝에 그가 속한 교단으로부터 결국엔 파직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야 만다. 이렇게 철저하게 한국교회와 자기가 속했던 교단으로부터 버림받고 내쫓김을 당하였다. 그렇다고 그를 따르고 그의 신앙과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뜻있는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용도 목사에 대한 생각이 1978년을 계기로 새로운 시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그의 모교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들에 의해(교수 논문집 神學과世界 1978년) 다각도로 시도된 적이 있었고, 드디어 1998년 10월 기독교대한감리회 제 23회 총회에 이용도 목사 복권 청원이 이루어졌고(김종순 목사 외 13인 청원서),1999년 3월 연회에서 복권이 이루어졌다. 필자는 이 보도를 접한 후 만일 이용도 목사가 살아 있다면 후배들의 이 행위를 보고 과연 무엇이라 생각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이용도 목사가 살아있고 그를 파면했던 당사자들이 복권 선언을 했다면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타당한 결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을 두고 복직이니 복권이니 하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역사적인 행위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결의한 연회원 들에겐 지난 과거 선배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이미 지난 사건이라 후배된 저들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파면 당사자도 아니고 파면된 본인이 생존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복권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고인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여겨지는 것이다.

차라리 복권 결의보다는 과거 몇 회 연회의 결의는 잘못된 결의안임을 확인하고 이후로는 이러한 비신앙적이고 비신학적이며 비역사적인 어리석음을 교회의 공회에서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았을까?

 이용도 목사를 아끼고 그의 신앙과 신학을 따르기를 다짐하는 신앙의 후예로서 이용도 목사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정립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2007.7.4)

 

 

 

 

참 교회의 모습

(성경말씀 : 마태복음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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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봄부터 목회를 시작했으니 꽤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성장하고 교회를 섬기며 살아오는 동안에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다시금 간추려 보게 됩니다.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이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구원의 방주여야 한다’, ‘교회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등등의 교회에 관한 정의도 수없이 설명되겠지만 저는 오늘 교회생활의 구체적인 삶을 몇 가지로 그리며 참 교회의 모습을 그

려보려고 합니다

 

 

1. 교회는 사랑과 기쁨의 공동체이다. 

 일반 세상살이에는 갈등과 대립,미움과 시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감싸주고 도와주고 서로 격려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늘 만나는 사람끼리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차별없이 어울려야 합니다. 서로 힘 겨루는 일,싸우고 용서 못하는 일이 교회에서는 사라지고 화합과 일치의 모습만 있어야 합니다. 저는 군목시절 전역하는 장병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사회에 나가 교회 선택을 할 경우 그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얼굴에 근심이 있고, 패잔병의 기색이 있는 교인들 교회는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얼굴에 기쁨도 있고 웃음 가득한 교인들이 다니는 교회를 선택하라고 일깨웠습니다. 교회 생활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어야 합니다. 억지로 하거나 마지못해 하면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사랑과 기쁨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2. 교회는 기도와 말씀이 생생한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의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하시며 “네가 복이 있도다”,“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신앙공동체로서 반석 같은 믿음이 바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두 개의 바퀴가 함께 굴러가야 합니다. 바로 기도와 말씀의 바퀴가 함께 굴러야 합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간구하는 기도가 계속되어야 응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말씀이 생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깊이 젖어들 때 생명력 있는 삶이 가능합니다. 날마다 기도하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저는 ‘특별기도’라는 말을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기도는 쉬지 않고 날마다 해야 하는 것이지 어느 특정기간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3. 교회는 선교와 봉사의 공동체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10여 군데에 매월 선교헌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할수록 더 많은 곳을 지원 할계획도 세웁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 명령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의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면 병든 것입니다. 교인쟁탈전에 빠져도 병든 것입니다. 요한웨슬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는 끝없이 봉사의 활동을 펼쳐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인류구원의 큰 과업을 수행했습니다.

 

 오늘도 슈바이처 박사나 마더 테레사 같은 수녀가 계속 배출되어야 합니다. 지역사회여론에서 “그 교회가 꼭 존재해야 한다”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있으나마나 한 교회는 선교나 봉사를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21세기는 서비스 산업이 우선하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나만을 위한 사람은 누구나 하는 것이고 타인을 위한 삶이 신앙인의 삶이기도 합니다. 남을 구원하고 남에게 베풀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제가 시무하고 있는 반석교회에서는 항상 3가지로 교회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좋은교회는

①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교회

②  기도와 말씀이 생생한 교회

③  선교와 봉사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 아 멘 -

 

 

 

 

기지촌 여성 위해 달려온 5년

 

우 순 덕/햇살사회복지회대표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을 축하라도 하는 듯 겨우내 그 추운 땅속을 견디며 지내온 나리가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기지촌 복지에 대한 꿈을 갖게 하시고 문을 열 수 있게 인도하셔서 5 년간의 발걸음을 걷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2002년 9월부터 매주 1회씩 (현재 화요일) 모임을 갖고 자원봉사자 및 방문자들이 정성껏 마련해 주시는 점심식사를 나누며, 봄, 가을로 야유회 및 치료프로그램을 하였습니다. 클럽에 사랑의 떡 전달 및 일부 혼혈 아이들에게 장학금 연계 및 지원을 하고 있으며 지역 어르신을 위한 모임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평택 푸드뱅크와 단체들을 통해 먹거리 등을 나누고 치과치료 및 생일파티도 하며 입양 보낸 아들을 찾는 등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작년 가을에는 경기도청으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아 이 집도 법인의 기본재산으로 전화시켰습니다.

 

 최근에는 경기도 여성발전기금의 공모에서 채택된 프로젝트 “이제라도 밝은노후 만들자!”를 진행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각 가정을 방문하여 개별상담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남겨지는 기록은 마지막 기지촌의 여성세대의 이야기 모음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며, 이 자료는 한국여성사에 중요한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본회는 변함없이 우리 할머니들의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일인 1만원 10만명 모금 운동과 함께, 정부와 해당당국에 문제해결을 위한 실천을 촉구하기 위하여 연대서명운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현재 1,229명의 분들이 서명으로 동참하여 주셨습니다. 여기 오신 여러분께서도 연대서명 및 다양한 방법으로 할머니들의 주거문제 해결을 위하여 뜻을 모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귀한 메시지를 해주신 최승일 감독님과 축사 및 기타 순서를 맡아주신분들과 바쁘신 가운데도 참여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본회를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주신 교회와 단체, 개인 후원자들과 정성을 다하시는 자원봉사자님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부족함이 많음에도 어여삐 봐주시는 우리 할머니들에게도 더욱 감사드립니다.

 

 본회는 앞으로도 우리사회에서 그늘지고 억압된 삶을 살고 있는 기지촌 여성노인 및 소외된 여성들이 보다 인간다운 사람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우며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지치지 않고 똑바로 갈 수 있도록 많은 기대와 지원을 다시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치매환자 요람 마포재가노인복지센터를

운영하는 한서교회 담임목사 양총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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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는 65세이상노인인구가 3만 2천명가량된다. 이중 10%인 3,200여명이 치매군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치매군 중에서도 320명정도는 사회적 서비스가 시급한 중증환자이다.

 노령화 사회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노인 치매는 가족의 수발과 정신적 부담으로 가정의 행복까지도 파괴하는 무서운 병이다. 조만간 마포군 성산동에 서부치매요양센터가 준공된다고는 하지만 주간에 30명과 단기보호 30명밖에 모실 수 없어 수요를 감당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마포에는한서교회(목사양총재)가 운영 하는마포재가노인복지센터 (소장 조남범)가 있는데 말하자면 치매환자와 가족지원에 관한한 국내에서는 최고 전문 프로그램 운영과 고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기관이다. 마포재가노인복지센터는 9년 전 마포구 공덕1동에 치매센터를 건립해 그동안 300여명 이상 시설보호를 실시했으며, 또 2004년 5월에는 마포구 아현동 고려아카데미텔 303 호에 치매노인가족지원센터를 설립해 단순시설보호를 뛰어 넘어 가정까지 찾아가는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아현동 치매노인가족지원센터가 국내 최초로 개발한 것이 치매노인과 가족을 함께 보는 가족프로그램이다. 현재는 기초생활수급자 위주로 혜택이 주어지는데 가정봉사자가 파견돼 일정시간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본 사업은 마포구청에서 3천만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또 소득에 관계없이 월3만6천원만내면 1회 3시간 기준 월9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돌보미바우처사업’도 적극 펼치고 있다. 돌보미바우처사업은 일종의 일자리 창출 개념으로도 생각하면 되는데, 돌보미들은 120시간 교육을 이수해야 가정파견서비스를 할 수 있다.

 그만큼 치매노인을 다루는 것이 전문지식을 요하기 때문이다. 서비스 수요자는 3만 6천원만 내면 되지만 예산의 정부지원으로 혜택은 23만 8천 5백원어치의 서비스를 받는다. 돌보미들은 시간당 6천원(월60~70만원)의 소득을 올릴 수 있으며, 현재 9명이 교육을 이수한 상태이며, 50명까지 늘려갈 계획이다. 돌보미바우처사업은 마포에서 이곳 재가노인복지센터와 서교동 소재 보사노인복지센터, 아현1동 자활후견기관 등 3곳에서 실시하고 있는데 돌보미들에게 1시간 봉사시 6천원지급은 3개 기관이 합의를 본 상태이다.

 

 치매노인가족지원센터에서는 치매가족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가족모임을 갖고 있다. 가족들만 모여 서로 증상을 묻고 대답하고 전문가를 모셔 치매상식과 예방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문제는 정확한 치매환자의 수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2000년경 노인인구의 8.3%가 치매환자라는 정부발표가 있었지만 학자들은 11%까지 보는 견해도 있다. 조남범 소장은 “치매환자 발굴 차원에서 상담리스트를 작성해 수시로 전화로 관리하고 있는데 치매가 아닌 경우와 마포를 떠난 경우를 제외하면 현재 350명 정도 됩니다. 말하자면 이들 가족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정보를 교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치매노인가족지원센터에서는 그동안 노하우로 시범적으로 치매도우미 파견 사업을 실시하고 있는데 어려움도 많다고 한다. 사업의 성패는 비용에 달려있다고 보고 조소장은 후원자를 찾는데 주력하고 있다.

 조소장은 “노령화는 개인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치매는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단돈 만원이라도 결연을 1:1결연을 맺어준다면 법적지원을 받지 못하는 차상위계층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조소장이 공덕동 시설보호보다 아현동의 가족지원센터의 찾아가는 서비스를주력사업으로 생각하는 것은 시설은 한정돼 있는데 재가서비스는 보다 다양하고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〇치매의증상 

 

 치매의 일반적인 증상은 대게 50세 이후에 발병해 수년에 걸쳐 지속적으로꾸준히 진행된다. 대표적인 증상은 인지장애증상과 행동장애증상으로 크게 나누는데 인지장애증상으로는 서서히 진행되는 기억력감퇴,언어장애,시각 공간 인식능력의 장애,목적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장애 등이 있다.

 

〇치매치료방법

 

 뚜렷한 원인 질환으로 인한 경우는 원인질환을 치료함으로써 치매의 치료가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치료가 비가역적이다. 또한 진단 후에도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그릇된 인식과 편견으로 적극적인 치료를 못받는 경우가 흔하다.

 

 일반적인 치료방법은 자극을 피하고 수용적 태도를 보여주고 지속적이고 일관된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즉 의료진과 가족이 협조하여 조기발견 조기치료를 해야한다.

 

글 / 조남범 (마포재가노인복지센터소장)

 

 

 

 

"비행기타고 88세까지

지구촌 돌며 남 돕고 싶다"

 

화양감리교회 채의숭 장로(본회 자문위원)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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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69세인 대의그룹 채의숭 회장은 특이한 이력과 꿈을 지닌 분이다.

고등학교 때 가진 꿈 3가지 중 2가지를 이미 이뤘고 나머지 하나도 벌써 반쯤 달성하고 있는 입지전적인 삶을 살고있다. 

50대 후반에 과로로 쓰러져 반신마비가됐으나 브루나이에서 개척교회 봉헌예배를 드리고 난 뒤 완치되는 기적을 체험하기도했다.

 

 채장로는 전체 직원수가 1060명이고 연간 매출액이 4000억원에 이르는 6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대의그룹 회장이지만 다른 경영자와는 구별된다. 일생을“주께하듯하라”는골로새서 3장 23절의구절을모토로삼고살아온성실한분이다. 그리고 그는 대의그룹의 모체인 ‘대의테크’를 설립한 1985년 이후 지금까지 22년동안 회사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직원들과 함께 하는 경영철학을 지켜온 사람이다.

 

 화양감리교회에서 36세에 장로가 되어 지금까지 초지일관 열정적이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채회장의 삶을 잠시 살펴보면, 그는 충남 서산의 가난한 농가에서 자라나 일가족과 함께 교육을 위해 보령으로 이주했고, 여기서 신앙심과 젊은이로서의 꿈을 갖게 되였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며 “항상 길잡이 역할만 해주고무슨 일이든 결정은 내게 하도록 했지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어른스러웠고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고 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우수학생이었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그는 농업고등학교 축산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큰 회사의 사장,100개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세 가지 큰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자신의 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건국대 경제학과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해서는 삼성그룹 공채 8기로 입사했다. 삼성 그룹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대우그룹으로 스카우트 돼 CEO 직위까지 오르고 1985년도에 퇴사하여 장난감회사인 ‘대의 실업’ 을 인수, 자동차부품회사로 키워냈다.

 하지만 창업 직후 피눈물을 쏟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을 당했다. 일껏 시설한 공장이 흥수로 침수돼 기계가 고철이 될 정도로 망했고,간신히 재기하던 중에 다시 화재로 공장이 전소되는 참담한 일을 겪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채회장을 믿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가호가 있었던지 채권자인 은행에서도 빚잔치를 하지 않고 기다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가 살아온 삶이 신실했고 가능성을 인정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독일의 비스마르크를 참고로 했다.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독일을 부흥시킨 재상 비스마르크의 국가 경영 철학이 이것이었다고 한다. 그가 퇴임할 때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았다’ 고 했다는 말은 너무 유명하다. 모든 일이 기능은 다르지만 똑같이 중요하다. 탤런트가 다를 뿐이다. 이걸 체득하는 데 40년이 걸렸다.

 회사는 혼자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오너는 방향을 정해주고 집행부서가 결정하게 해야 한다. 내가 그만큼 했는지는 모르지만, 품질관리, 생산, 개발, 영업...어느 한 역할이라도 소홀하면 안된 다고 믿었다. 경비원에서부터 간부들에 이르기까지 주께 하듯 했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았다. “

 

 채회장이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나 오늘까지 걸어온 이야기인 자서전 “주께 하듯 하라”가 출간 되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그만큼 많은 독자들에게 감화감동과 희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채의숭 회장은 글로벌한 중견그룹으로 회사를 키우면서 한편으로는 선교사업을 통해 아시아권 한류의 정신적인 외연을 넓히는 사업을 전개하느라고 여념이 없다. 흥미진진한 애기는 많고 인터뷰 시간은 턱 없이 짧았다.

 

〈노년시대 신문 박병로 편집국장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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