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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세종ㆍ이현필 선생 유적지 순례를 시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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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4 10:25 조회3,9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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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종ㆍ이현필 선생 유적지 순례

-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 - 

글쓴이: 최흥욱 목사(서부동산교회 담임)

 

 

1. 이세종ㆍ이현필 선생 유적지 순례를 시작하면서 

  실천신학자 박근원은 언젠가 「기독교 사상」지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한국 개신교 영성의 뿌리, 어느 면으로 보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앙생활의 표출은 이세종, 이현필로 이어지는 신앙생활의 운동이었다. … 이 분들은 전형적인 한국 사람으로서 외부의 신학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다만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체험한 신앙적 영성의 소유자들이었고, 그들의 영성이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성 대가들의 신앙생활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세종과 이현필은 한국교회 영성사의 큰 맥을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국 개신교회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성을 전해준 한국적 토착적 영성인이다. 그들은 신학자도, 목회자도, 장로도 아닌 평신도였으나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따르며, 복음을 말로서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고 증언한 한국적 영성의 뿌리와 같은 존재였다. 이세종과 이현필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특이한 존재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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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원 수양회

다석 유영모 선생은 동광원에 자주 내려와 강의하곤 했다

맨 앞줄 왼쪽부터 엄두섭 목사, 유영모 선생, 정인세 원장

그들은 결코 그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1930년대의 조직신학자 정경옥은 이세종을 가리켜 도암의 숨은 성자라고 하였다. 한국 기독교 백년사에 이세종과 이현필 선생 같은 독특한 인물은 없었다. 청빈의 길, 사랑의 길, 순결의 길, 초월의 길, 고난의 길 등 그것을 생명처럼 강조하며 몸소 그렇게 산 사람도 없었고, 철저한 자기 비움을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려 애쓴 인물도 드물다. 우리는 이세종과 이현필을 통해 고난의 예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간 비천한 예수, 청빈의 예수를 본다.
  “주여, 나는 당신 밖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Domine, ego non ha-bes nec volo nisi te)라고 기도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이세종과 이현필은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한 송이 백합화, 고요히 이름 없이 지나갈 고독한 들꽃으로서의 짧으나 굵은 삶을 마쳤다. 절대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린 이현필 선생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 6ㆍ25동란에 허덕이던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동광원이 시작되었다. 고아, 걸인, 나그네 하룻밤 재워주기 운동, 십시일반 운동을 펼쳤다. 동광원은 여순 반란 사건 이후 급증한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세워졌던 고아원의 이름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부녀자, 청년 할 것 없이 가족을 버린 채 그를 따랐고, 그들 일행은 탁발을 하거나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현재 전북 남원의 동광원 본원을 비롯해 화순, 함평, 광주, 진도, 벽제 등 전국 각지에 동광원의 분원들이 세워졌고, 제자들이 순결, 청빈, 순명을 원칙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동광원은 귀일원의 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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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양림교회 앞 마당에서의 이현필 선생

이 사진틀은 현재 광주 귀일원 자료실에 보존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현필 선생의 유일한 사진이다. 1941년 여름 30세 때

삽 들고 들어오다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이현필 선생, 신성철 장로,

박석현 목사, 백영흠 목사, 김학준, 이준묵 목사

 이세종과 이현필은 향기나는 참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은 다른 것은 알지 않기로 결심하고 오직 한 줄기 길, 골고다의 길, 나사렛 예수의 길, 좁은 길, 님의 자취 따르는 한 가닥 오솔길을 걸어간 참 예수꾼이었다. 성 프란치스코가 세상과 가정, 학문과 소유, 친구 일체를 버리고 ‘내 주여, 나의 전부여!’ 감격하며 걸어간 한 줄기 길을 그들도 걸어갔던 것이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되 물에 퐁당 빠지듯 믿었다. 하루 종일 성경과 하나님만 생각했다. 그리고 울면서 다녔다. 하나님 속에 완전 빠져 들어가 믿었다. 이현필은 거지가 오장치를 짊어지고 나서듯이 믿으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 오복희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빌어 먹으라.’고 대답하였다. 거지가 되라는 말이다. 삼박자 축복을 받으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일체 세상만사를 버리고 머리도 빗지 못하고 옷도 빨아 입을 생각을 못하고 맨발로 체면이고 부끄럼이고 전혀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취해서 찢어진 바지 가랑이도 기워 입지도 않고 움켜쥐고 다녔다니 이현필이야 말로 거지 중의 거지였다.  
  이세종도 쑥범벅을 먹고 일체 소유를 버리고 바보가 되고 거지가 되어 예수의 길을 걸어갔다. 개신교 최초의 토착 수도 공동체인 동광원은 맨발의 성자요,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우는 이현필과 그를 따랐던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였다. 이현필을 이야기하자면 그의 스승 이세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세종은 호세아를 닮은 성자라고 불리어지는데, 그가 복음을 접한 후 성경 말씀에 따라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매 사이로 지낼 것을 요구하였으나 부인이 이를 거부하고 두 번씩이나 개가하였고, 그때마다 지게로 직접 살림을 져다 주었으며, 부인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는 아무 말 없이 받아준 것에서 비롯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세종은 한때 화순 도암 동광리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나 복음을 접한 후 성경 말씀에 따라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평생 청빈과 순결, 곤충과 미물까지도 존중하는 생명경외 사상을 가지고 살았다. 이런 이세종의 삶 속에 승화된 토착 수도원적 모습은 그의 제자들 중 하나인 이현필을 통해 전수되었으며 이때부터 하나의 공동체의 모습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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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첫째가 박공순 원장, 둘째가 필자, 셋째가 귀일원 박은순 원장,

넷째가 이채영 원장, 이어서 박용배 목사, 유상범 목사, 최대용 목사,

한은우 목사, 조동희 목사


  이세종과 이현필을 통해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참 믿음은 예수의 길을 찾아 우리도 그 길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다. 필자는 이세종, 이현필 선생을 얼굴로는 만나지 못했으나 글로서 또는 제자들을 통해서 만날 수 있었다는데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이세종과 이현필, 그들은 필자의 믿음과 인격 그리고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분들이다. 필자는 프란치스코의 길, 이세종의 길, 이현필의 길, 이 길이야말로 참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 예수를 바로 믿는 길은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라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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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종 선생의 고향 화순 도암 등광리 마을

“이공 어른이야 말로 진짜 예수쟁이였어!” 노인들의 말이 한결같다

  필자의 평생 소원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세종, 이현필 선생 유적지를 순례하는 일이었다. 이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지난 2001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뜻을 같이하는 목회자들과 함께 순례 길에 올랐다. 한은우 목사님, 최대용 목사님, 유상범 목사님, 박용배 목사님, 조동희 목사님이 동행해 주었고, 동광원 계명산 분원 박공순 원장님이 우리를 안내하였다. 승합차를 타고 꼬박 2박 3일 동안 한국의 숨은 성자 이세종, 이현필 선생의 옛 터전인 전남 화순 도암, 광주 귀일원, 남원 동광원, 서리내, 갈보리, 벽제 계명산등을 돌아보았다. 성인이 걸어간 자취를 밟아보고 몸으로 익혀온 그 제자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듣고 보고 만져보면서 잔잔한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셨다. 이 거룩한 땅들을 밟으면서 주님처럼 살고, 주님처럼 고난 받고, 주님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거룩하고, 순결하고, 청빈하며 예수가 그들의 전부였던 삶을 살아간 사람들, 말하는 이 없어도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서로 다르고 이름은 서로 같지 않아도 주님 그토록 사랑하기에 목숨을 아낄 수 없었고 내 것을 가질 수 없었던 이들.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를 부르짖으며 예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했던 참 그리스도인들. 기도가 노동이요, 노동이 기도인 자연에 파묻혀 깊이 묵상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간 진짜 예수꾼들을 만나보고는 이러한 거룩한 사랑 앞에서 가슴 벅찬 감동이 영혼에 밀려와 우린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돌아왔다.
 

 우리 일행을 태운 승합차가 화순으로 내려가는 동안 박공순 원장님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있다. 하나는 이세종 선생에 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현필 선생에 얽혀진 이야기였다. 박 원장님은 이현필 선생을 만난 뒤 벽제 계명산에 와서 마흔 일곱 해 동안 수도생활하며 청춘을 묻어버린 수녀이다. 필자와는 20여년 동안 교제가 있어왔기에 이런 분을 우리들의 순례여행에 안내자로 모시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 그가 입을 열어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해인가 광주 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다고 해요. 이 소식을 들은 이공(이세종) 어른은 사경회 한 주간 동안 먹을 음식을 미리 준비하여 광주로 갔어요. 광주에 가서 보니 시가지 한 복판으로 흐르는 개울가에 많은 거지들이 움막을 치고 살고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본 이공은 걸인들이 살고 있는 천막에 들어가 가져온 모든 음식을 나눠주었어요. 그래서 사경회 기간 동안 자기는 내내 금식하면서 말씀을 들어야만 했어요. 사경회를 마치고 광주에서 도암 동광리의 집을 향해 약 80리 길을 걸어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오다가 너무 지쳐서 길가에 그만 누워버리고 만 것이었죠. 한참 동안 쓰러져 있는데 갑자기 뱃속에서 뜨거운 성령의 불기운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어요. 그 후 몸이 가벼워져 자기 몸이 바람에 날아갈 듯하여 집까지 쉽게 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한참 이야기하던 박 원장님은 이야기를 멈추고 무언가 회상에 젖어 생각에 잠기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탄 승합차는 어언 광주를 지나 전라남도 화순을 질러 두 영인들의 고향인 도암 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 하나만 들어도 이세종이 어떤 사람인지 상상이 갔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이세종 선생에게 하나님이 성령의 불을 내려주신 것이리라.
  하루는 이세종 선생이 구제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참다운 구제란 자기가 쓸 몫에서 떼어 내어 하는 것이다. 자기가 먹을 것 안 먹고 해야지, 먹고, 입고, 쓸 것을 다 쓰고 남은 것으로 구제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주더라도 자기가 입은 옷이 다 해어져 누더기가 되기까지 입으면서 주어야 참 동정이 된다.” 도암의 성자 이세종 선생, 그는 우리에게 자기 비움을 통한 이웃 사랑의 길을 보여주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울 때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리라.

  침묵하던 박 원장님은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동광원 화순 분원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현필 선생 이야기 하나 더할게요. 우리 이 선생님이 서리내 우거진 갈밭 사이에 종일 움직이지 않고 엎드려 있으면 까마귀들이 날아와 죽은 송장인줄 알고 부리로 쿡쿡 찍어보았다고 해요.  밤새 산에 엎드렸다가 새벽에 산에서 내려온 그의 잔등에는 서리가 하얗게 덮여 있는 것이었어요.  이런 그가 한번 남원 마을로 지나가면 집집에선 가정 주부들, 처녀들이 가출해서 그를 따라다녔고, 교회에선 집사들이 그를 따라 나섰고, 목공소에선 목수가 일을 집어치우고 그를 따라 나섰으며, 사진관 부인이 집을 버리고 따라 나서는 게 아닙니까? 큰일났지요.” 사실은 박 원장님 자신도 이때 집을 나와 이현필 선생을 따라 나선 가출 여인이었던 것이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집에서 뛰쳐나와 그를 따르게 하였을까? 겉으로 보기엔 상거지 꼴인 이현필인데 그에게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이 미쳐서 그를 따르게 하였을까? 이번 순례에서 이 문제 하나만 풀고 돌아가도 하나도 후회스러울 것이 없을 것 같다.
  이현필. 그는 분명 숨은 기도자였다. 숨은 기도자를 세상은 모른다. 그러나 기도하는 이가 엎드려 두 무릎을 꿇은 자리에서는 영의 진동이 일어나고, 영파가 일어난다. 낙타 무릎이 세상을 환하게 하고, 나라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자신을 살리는 것이다. 기도의 밀실로 들어간 사람이 그 밀실에서 나올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오는 법이다. 이현필 선생 이야기를 듣고 있는 순간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 “세상일에 너무 바빠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사람들아! 이제 한번 엎드려 보자. 열광한 군중들 속에 있지 말고 고요한 밀실에 홀로 물러가 보라. 그리고 영음을 듣고 영감을 받아보아라.”
 

해가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어둠이 덮여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영인들의 숨결이 서려있는 고장에 우리가 도착했다. 얼마나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곳이었던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필자의 제의로 우리 모두는 이현필 선생이 즐겨 부르던 ‘주님 가신 길이라면’이란 찬송을 다함께 감격스럽게 불렀다.

“1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 준령 험치 않소
     방울방울 땀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후렴) 오 주 예수 주님이여 천한 맘에 오시 오며
           밝히 갈쳐 주옵시기 꿇어 엎뎌 비나이다
  2  주님 가신 길이라면 가시밭도 싫지 않소
     방울방울 핏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3  주님 계신 곳이라면 바다 끝도 멀지 않소
     물결 물결 헤엄쳐서 건너가서 뵈오리다
  4  주님 계신 곳이라면 하늘 끝도 높지 않소
     믿음 날개 훨훨 쳐서 올라가서 뵈오리다” 


  이렇게 해서 순례는 시작되었다. 우린 길 찾아 나선 순례자가 된 것이다.  

     무릎 꿇고 눈을 감아 보아라
     눈앞에 한 가닥 오솔길이 보인다
     꼬불꼬불한 길
     찔레와 잡초
     억새풀에 덮여있는 길
     자갈과 돌들 널려있는 험한 길
     가는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기 힘든 
     무척 외로운 길이다

     우리도 ‘주님 가신 길이라면’을 노래하며 
     이 한줄기 길을 가자
     주위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머뭇거리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엎드린 그 자리에서 
     주님과 십자가만 갈망하고 사모하자
     우리 마음에 감격이 오고 
     통곡이 올 때까지 밤을 새우자
     이제 그만 밀실로 들어가서 
     주님과 사랑을 속삭여 보자
     예수를 바로 믿는 길은 이것이다 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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