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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라 파라 깊이 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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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4 10:53 조회1,9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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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라 파라 깊이 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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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거울
이현필이 정리하여 쓴 스승 이세종의 전기인데 원본은 찾을 길이 없다.
위의 자료는 이현필 선생이 서리내에서 스승 이세종의 전기를 중심으로
가르친 내용을 동광원 계명산 분원 이희옥 초대 원장이 1959년에 옮겨 
쓴 노트이다. 이 노트에는 "그는 이렇게 살으셨다. 그는 이렇게 가르치셨다"는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세종의 생애와 가르침을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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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종 선생 말씀
스승 이세종이 성경공부 시간에 강의 한 내용을 제자 이현필이 받아 쓴 노트로
1930년대의 글로 추정되는 오래된 자료이다. 참 신앙을 지키는 자는 고독할 것이라는 글이 돋보인다. 이 노트는 동광원 계명산 분원 박공순 원장이 보관하고 있다. 

 


  “한남지방 화순이라는 곳에 이상한 사람이 한 분 계신다. 그는 서양 요리를 먹고 비단 옷을 입은 성자가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성자이다. 그는 학식도 지위도 없는 산골 농부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운 후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고난을 즐겁게 받고 있다. 그는 음식을 먹어도 사람이 차마 먹지 못할만한 것을 먹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어도 결코 먹지 아니한다. 그는 불쌍한 거지나 어려운 삶을 사는 빈민들을 생각하면 부드러운 밥이나 맛있는 반찬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잘 때에 이불을 덮어도 몸을 절반만 가리고 잔다. 왜 다 덮지 않느냐고 물으면 추운데 잘 곳이 없이 길가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차마 이불을 끌어다 덮기 어려워 손이 떨린다고 한다. 나는 다만 그의 순진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실천하여 보려는 열성만을 존경하고 사표 삼고 싶은 것이다.”
  위의 글은 1930년대 감리교 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정경옥 박사가 그의 설교집 「그는 이렇게 살았다」에서 한 말이다.  여기 정경옥이 말한 이상한 사람, 헐벗은 성자가 바로 이세종 선생이다.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이세종을 길러낸 역사의 현장 전남 화순 도암에 온 우리들은 영산 천태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이 역사적인 순례행진에 한영우 집사, 김춘일 동광원 화순 분원장, 박공순 동광원 계명산 분원장이 우리와 한 팀이 되어 주었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성인의 영감과 자취가 배어있는 천태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등광리 마을 이세종 생가 왼쪽 위로 등광교회가 보인다. 본래 이 마을엔 교회가 없었는데 20여년 전에 이세종의 제자 수레기 어머니(손순임)의 아들 이원희 장로가 지은 교회이다. 한 동안 목회자가 없었는데 지금은 예장 대신측의 정칠용 목사가 부임하여 사역하고 있었다. 참 신기한 사실은 이 등광리 교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목회자 없이 신앙생활 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 마을 교인들은 기성교회에는 나가지 않아도 ‘이공(이세종)의 예수’를 믿어왔기에 신학교를 나온 목회자들의 목회가 맞지 않았을 것이다. 등광교회는 이공의 영향을 받고 이 등광리 마을에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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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광교회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193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공의 제자 이상복 장로의 아들 이세철 목사에 이어 지금은
정칠용 목사가 담임하고 있다.

 

 

등광교회에서 300m쯤 올라가면 이원희 장로가 1981년에 지은 기도원 건물이 나온다.  길 쪽에서 보면 콘크리트 집인데 반대쪽에서 보면 돌을 쌓아 놓은 움막같다. 기도원 쪽방을 들여다보니 ‘천태 수양원’이란 조그마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세종 선생이 세상 떠난 뒤 그의 제자 김광석과 이상복이 40년 동안 기도하며 이곳을 지켜왔다고 한다. 지금은 옛 건물 위에 한 층이 더 세워져 2층 집이 되었고, 집 앞에는 ‘등광교회 수양관 이세종 선생 기념관’이란 간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이세종의 제자들이 수도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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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 수양원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산 141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집은 이공의 제자 오복희 전도사가 100만원, 서울 신촌 예배당
안병모 목사가 50만원을 헌금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천태 수양원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풀이 무성한 빈터가 나왔다. 우리를 안내하던 한영우 집사가 “여그가 바로 이공이 도를 깨달은 산당터인디 여그가 없었다면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도 나올 수 없었당께!”하고 신이 나서 말해주었다. 한영우 집사의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이곳이야 말로 이세종, 이현필 운동의 가장 중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왜 이곳이 그리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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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터
이세종이 산당을 짓고 공을 드리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도를 깨달은 
곳으로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산 141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오동나무가 외로이 서 있고 그 집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세종은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자식이 없자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였다. 무당이 자식을 얻고 싶으면 불당을 짓고 정성을 드려야 한다면서 명당 자리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여기가 제일 좋은 곳이니 여기다 산당을 지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세종은 무당이 시키는 대로 지하방까지 있는 2층짜리 산당을 짓고 몸을 씻기 위해 연못까지 팠다. 이세종은 거기서 하루 열두 상 차리는 제사를 지내며 기도하던 중 우연히 성경을 얻어 읽다가 그것이 생명의 말씀인 것을 깨닫고 모든 제사 기구를 버리고 오직 성경 공부에 들어갔다.  
  이세종이 성경을 읽고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산당을 짓고 드린 모든 공이 헛수고요,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자식을 낳게 해달라거나, 집안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이 모든 것은 부질없는 것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결코 아니었다. 참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을 본받아 가는 (Imitatio Christi) 자기 희생과 사랑의 길이었다.  
  이세종은 불같은 성격으로 그런 깨달음의 진리를 실천에 옮겼다. 빚진 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들에게서 담보로 잡았던 집과 땅 문서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들의 빚을 탕감해 준 것이다. 그리고 창고 문을 열어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쌓아두었던 양식과 재물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모든 세상의 재물과 명예, 인연을 툴툴 털어버리고 수도자의 길로 나섰다. 오래 전에 천태산 기슭에 지어 놓은 산당을 기도처로 삼고 본격적인 독수도에 들어간 셈이다. 선승들에게나 이어 올 듯한 고요한 명상과 기도를 통해서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통을 추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까지도 바꿔 세상에 대해서는 공(空)을 쳐버린 이공(李空)이라 칭하였다. 그는 산당 이름을 유산각(遊山閣)으로 바꾸고 거기서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밤이면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처녀, 총각들을 모아다가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성경 이외의 다른 책은 일체 보지 않았다. 그의 삶의 유일한 표준은 성경이었다. 그에게 성경을 배우기 위해 멀리 광주에서 고등 성경학교 학생, 전도사, 광주에서 당당한 큰 교회 맡은 목사들, 산에서 도 닦는 도인들이 각각 모여 들었다. 최흥종 목사가 그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노라복 선교사도 그를 지지했고, 강순명 목사도 그의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으며, 백영흠 목사도 늘 참석해서 감동을 받았다. 이세종이 이들을 앞에 앉혀 놓고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가르친 교훈은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세종의 강의를 제대로 필기한 이는 이현필뿐이었다. 이세종은 이현필을 천재라고 칭찬했는데 후에 이현필은 스승 이세종의 정신을 그대로 따라 사는 영의 사람이 되었다. 이세종은 성경공부 시간에 누가 찾아오면 인사하지도 인사 받지도 않았다. 공부시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음식을 먹지 않았다. “성경공부는 공사요, 음식 먹는 것은 사사다.”고 하면서.
  그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훗날 그런 말씀 어디서 받았느냐고 묻거든 내게서 들었다 하지 말고 천태산 바위 틈에서 들었다 하시오.”하며 이세종파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우리들에게 둘러싸인 한영우 집사는 신이 나서 이렇게 말한다. “알고 보면 여그가 동광원 운동의 원뿌리인 셈인지라.” 이전의 산당이 이제는 예배당과 성경 연구소가 되어버린 셈이다. 천태산 바위 틈, 알고 보니 여기가 곧 이세종 선생이 진리를 깨닫고 처음으로 제자들을 키워냈던 이 자리가 바로 동광원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 토박이 수도 운동의 발상지인 셈이다. 도암면의 도암(道岩)이란 도의 바위 곧 말씀의 바위를 의미한다. 성인들을 키워낸 이 도암이야 말로 도와 말씀, 진리가 나온 거룩한 현장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신비한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은 산당도 다 허물어져 없어졌고 연못도 메워져 잡초만 우거져 있다. 지금 여기엔 이세종 선생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물받이 나무가 썩어 형태만 남았지만 아직도 바위 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두 손을 벌려 물을 받아 마시니 가슴이 시원해지고 피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한영우 집사의 말에 의하면 이세종 선생은 자연을 좋아하고 수목과 화초를 사랑했다고 한다. 옛 산당 자리 이 곳엔 이세종 선생 때 심은 큰 오동나무와 백일홍 나무들이 그대로 서 있었다. 벚꽃 나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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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 바위

박용배 목사, 한은우 목사, 최흥욱 목사, 한영우 집사, 박공순 원장

(사진 왼쪽으로부터)

 

 

  이세종은 이 높은 산에서 물줄기를 발견하고 샘 근원에서 나무로 판 수챗 구멍으로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들고 고기도 길렀다고 한다. 언젠가 그가 열병으로 앓다가 그 연못가에 나와 목욕하고 신기한 환상을 보면서 열병이 기적적으로 낳았다는 바위가 지금도 땅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그리고 바위 틈 사이에는 야생란이 자라고 있었다.
  이세종의 기독교는 그가 이 천태산 바위 틈에서 혼자 엎드려 혼자 성경 파면서 깨닫고 일궈낸 한국적인 기독교이다. 동양적 신선 냄새가 나고 한국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토박이 기독교이다.
  이세종의 유적지 순례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이세종의 무덤이 있는 화학산 한새골 움막터를 찾는 일이다. 한새골을 찾아가는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라 험하고 가파른 길이다. 가는 길에 이세종과 이현필이 수도했던 도구박골 소반 바위, 각시 바위를 둘러보는 것도 좋다. 이세종은 진리를 깨달은 뒤 등광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일제 말기 신사참배 문제가 심각해지자 이곳 한새골로 들어와 3년 동안 움막에서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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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 산당터 물받이 나무
                 이 물받이 나무로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들었다. 지금은 썩어 형태만 남았다

  이세종은 말년에 세상과 사람을 떠나 산에서 산으로, 보다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옛날 이집트의 안토니처럼 깊은 산에 숨어 철저한 고독과 침묵 속에 살았다. 고독과 침묵은 모든 수도자들이 영성을 길러가는 두 가지 방편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다.
  화학산 도구박골은 주위 십리 안에 인가가 없는 수도의 적지였다. 이세종은 이 도구박골에서 돌로 울타리를 쌓아놓고 그 안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 앉아 매일 하늘만 쳐다보면서 명상하였다. 얼마 후 더 깊은 산 자기의 마지막 장소를 찾아 거기서 떠나 화학산 각시 바위 넘어 한새골에서 최종 말년을 보냈는데 그곳은 인가가 전혀 없는 산중이었다.
  그를 따르는 제자 박복만을 시켜 통나무집을 나흘간 지었는데 겨우 두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었고, 문도 성경대로 좁은 문이였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세종은 평소에 가르치기를 “예수 믿는 길은 좁은 문이다. 좁은 문도 그냥 들어가는 좁은 문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을 들어가야 한다” 고 했는데 실제로 그런 집을 지었다. 이 한새골 움막 좁은 문도 이세종은 너무 크다고 했다. 제자가 “다시 뜯어 다시 좁게 할까요?” 하고 물으니 “얼마나 오래 살 것이라고 내버려 두시오.” 하였다. 결국 그 집에서 삼 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세종의 길은 좁은 길이었다. 우리 생각에는 큰 문 열어놓고 대대적으로 전도하며 “아무나 와도 좋소!”하고 싶으나 진리는 언제나 좁은 길이다. 이 세상에서 진리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환영받는다. 세속적 기독교는 넒은 문이다. 참 신자가 찾아가야 하는 길은 좁은 문, 좁은 길이다. 좁은 문도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십자가를 지고 들어가는 좁은 문이다. 나사렛 예수의 길은 바로 이 길, 좁은 길이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날 때는 평생 그를 따르던 제자 몇 사람만이 곁에서 시중하였다. 제자들에게 나뭇가지를 베어오게 하여 그것을 손수 새끼로 엮어 사다리 상여를 만들어 자기 좁은 방에 놓았다. 그 위에 이불을 펴고 평소에 베고 자던 목침을 놓고는 제자들에게 “나를 들어 그 위에 올려놓으시오. 그리고 내가 숨이 지더라도 꼭 이대로 묻어 주어야 합니다. 달리하면 당신들 벌 받습니다.”고 하였다. 바싹 마른 이세종의 몸은 이미 미이라 같은 해골이었다. 제자들에게 자기 누운 상여를 들어 어깨에 메라고 명했다. 제자 다섯 명이 시키는 대로 하니 아모스 4장 12절을 찾아 읽으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하고 소리쳐 읽으니 이세종은 상여 위에 누운 채 “높이! 더 높이!”하고 재촉하더니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고 세 마디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숨진 뒤 시신에 입힐 수의를 새로 마련할 필요도 없고 늘 입고 있는 거지 옷 그대로 땅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내가 소리내어 통곡하니 누워 있던 이세종은 벌떡 일어나 왜 우느냐면서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하고 말했다. 아내가 울음을 멈추자 이세종은 도로 누워 얼마 후 고요히 잠자듯 숨을 거두었다. 그는 끝까지 따르던 몇몇 제자들과 아내의 돌봄 속에서 우여곡절의 지상 생애를 마감했다. 그때가 바로 1942년 2월 그의 나이 63세였다. 이세종이 남긴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도 없었다. 일생 사진 한 장도 안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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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종 선생 무덤

전남 장흥땅 유치면에 있는 이공의 무덤 앞에서 동광원 식구들이

예배드리고 난 뒤 함께 앉아 있다 

제자들은 추운 겨울 언 땅을 파고 그의 지시대로 움막 옆에 무덤을 만들어 헌 옷 그대로 입혀 평토장하여 스승을 땅에 묻었다. 지금 그의 무덤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 대천리 양지녘에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의 껍데기인 육신만 땅에 묻혔을 뿐, 그의 혼과 얼은 제자들의 가슴에 묻혀 한국 기독교의 토착적 영성의 뿌리가 되었다. 후에 맨발의 성자라 불리웠던 이현필은 조직과 운영으로, 정인세는 이 운동을 서울로 끌어 올리는 중추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으로 김병로와 같은 이는 대법원장으로 있을 때 판결을 내리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성경 위에 두 손을 얹고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세종의 영향을 받은 이로서는 전 검찰총장 원택연 장로가 있고, 정치가로는 장면과 김상돈이 있다. 학계에는 전남대 농대 교수인 김준과 전남대 명예 교수인 신귀남이 있다. 철학자로는 유영모가 있고, 사회 운동가로는 현동완 YMCA 총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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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천태산을 뒤로하고
왼쪽부터 이현필 선생의 수제자 오북환 장로, 이세종 선생의 제자 이원희 장로,
'호세아를 닮은 성자'의 저자 엄두섭 목사 

  천태산을 내려오는 길에 김춘일 화순 분원 원장이 이세종 선생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아직도 긴 여운을 가지고 내 마음 속에 살아있다. “이공(이세종)님이 예수를 믿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는 그대로 조금 남은 돈을 늘 큰 주머니에 넣고 다녔대요. 다니다가 거지가 구걸하면 손을 쑥 집어넣어서 잡히는 대로 다 주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에 들어서자 저만치 한 거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지 뭐예요. 그 순간 그는 주머니 속의 돈을 꺼내어 다가와 구걸하는 거지에게 몽땅 털어 주었어요.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거지는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당연하다는 듯 아무 반응도 없이 지나쳐 가더래요. ‘저 저 저런, 문둥이 같은 자식 보래이. 그 돈이 얼마나 큰돈인데 인사도 없이 그냥 지나가나? 저런 못돼 먹은 놈···’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깐 뿐 이공님은 그 자리에서 가슴을 치고 말았답니다. ‘오, 주님!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구제한답시고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하다니! 오, 내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아직도 이 죽을 놈이 살아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이공님은 저기 천태산에 들어가 수도를 하셨다는 거예요.”
  이세종 선생이 살아있을 때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을 해석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님의 일을 할때 ‘나’라는 의식조차 없어야 합니다. ‘나’라는 의식 이것이 곧 불법입니다.” 이세종 선생의 이 한마디 말씀이 지금 나의 영혼을 깨우고 있다. ‘나’라는 의식을 지우고 오직 주님만이 살고 나타나야 한다.
  이세종의 전기를 써서 그를 세상에 처음 알렸던 엄두섭 목사는 「호세아를 닮은 성자」라는 책에서 이세종에 대한 일화를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어느 날 이세종은 나주 남평 오동나무 거리에서 어린 거지 하나를 만났다.  돈 얼마를 구제하고 조금 가다가 생각하니 그 거지의 허름한 옷과 헐벗은 모습이 떠올라 양심이 괴로웠다.  그래서 다시 그 거지를 찾았으나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하루 종일 거지를 찾아다니다가 해질 무렵에서야 원적골이라는데서 다시 만났다.  이세종은 거지를 붙잡고는 “당신께 좋은 일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입은 옷과 내 옷을 바꿔 입으면 어떻소?”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바꾸어 입었는데 그 모습은 참 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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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종 선생의 제자들
전남 곡성군 원달 수도처에서 찍은 사진으로

왼쪽 첫째가 이재갑 장로이고 둘째가 이상복 장로이다 

  거지가 입던 다 떨어진 옷을 자기가 입고 자기의 새옷을 거지를 주니 이세종의 큰 몸집에 거지의 옷은 너무 작아 남 보기에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이세종의 조카들이 그 꼴을 보고서는 너무 창피해서 “그런 거지 꼴을 하고 마을에 가면 우리들까지 수치스럽다.”면서 야단쳤다. 그래서 이세종은 해가 질 때까지 돌아가지 못하다가 자기 모습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어두워진 다음에야 마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세종의 상식을 뛰어넘는 언행은 처음엔 사람들에게 바보처럼 보였으나 세월이 흐르자 차차 거룩하게 느껴지게 되어 사람들이 이세종을 성자로 받들게 되었다. 유영모 선생도 이현필과 함께 이세종이 살던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를 둘러보고는 이세종을 성자라고 부르기에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유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인이 무엇이냐? 물질에 빠지고 미끄러지는 나를 물질을 차 버리고 깨끗해 보라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위에서 내려온 얼을 생명으로 잡아 윗자리와 같이 거룩해 보자는 것이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내 위에 누가 있으랴 하는 자는 지각이 없기로, 마치 철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 머리가 가장 위인줄 알고 일을 저지르니 못된 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박영호, 다석 유영모下, P.150)
  이세종은 좀처럼 어디로 다니지 않았다. 깊은 산 속 바위 그늘에 핀 향기로운 꽃 한 포기가 제자리를 떠나지 않듯이 그가 일평생 산 세계는 화순 도암의 등광리와 천태산, 거기서 좀 더 산 속으로 들어가서 그가 말년에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난 화학산이 그의 무대의 전부였다. 그는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숨어 있기를 원했다. 그는 예수를 영접한 후 사람들이 자기를 ‘이공(李空)’이라 불러주기를 바랐다. 철저한 자기 부인 자기 비움의 정신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공’. 그는 그 이름을 그렇게 사모하고 불림 받기를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오늘까지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세종 선생이라 하지 않고 이공 어른, 이공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천태산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우리들의 발걸음이 이리도 가볍고 우리들의 가슴이 무언가 가득 차 있는 듯 뿌듯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산에 들어가 마음을 비웠기 때문이다. 사람이 산에 들어가면 신선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원래 신선 선(仙)자는 사람이 산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우리 일행은 올라갈 때는 여러 말하면서 다녔으나 지금 내려오는 우리들은 말이 없었다. 어디엔가 취한 기분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이공(李空)으로 불리기를 원했고, 예수 믿는 그날부터 다른 것은 알지 않기로 마음먹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한 분만 위해 살아갔던 이세종 선생. 그는 분명 숨은 성자였다. 그가 믿은 예수는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아는 예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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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를 닮은 성자」
엄두섭 목사가 1987년에 처음으로 써서 펴낸 이세종 선생의 전기로
이세종 연구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남 화순 도암 마을에 가면
                                      숨은 성자를 만날 수 있다
                                      사람아 사람아 예수의 사람아
                                      한번 도암 골짜기 등광리 마을
                                      천태산 바위 틈을 찾아가서
                                      거기서 흠뻑 이공의 영기를
                                      마시고 돌아오려무나
                                      진리는 바위 틈에서 나오고
                                      영감은 산에서 나오는 구나
                                      가자, 천태산 바위 틈으로
                                      오묘한 진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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