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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 맨발의 성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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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4 11:09 조회1,7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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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 맨발의 성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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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필 선생 사진 


        당신은 아십니까?
        당신은 들어보셨습니까?
        한국의 맨발의 성자에 대하여

        섬진강 굽이굽이 맨발로 걸으며
        눈 덮인 지리산 마루에 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사랑이 밀려와
        ‘아 십자가 아 십자가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감격하여 십자가의 노래 부르며 흐느껴 통곡하던 님

        지리산 우거진 솔밭, 갈대밭 속에
        한번 엎드리면 꿈쩍도 않고 일어날 줄 몰라
        까마귀가 송장인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까악 울다가
        그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찍을 때까지 
        잔등에 흰서리 덮이고 수염엔 고드름 달린 채
        밤새워 목숨 걸고 겨레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던 님

        한 마리 잃은 양을 찾기 위해
        거지같은 헌 옷에 맨발로 걸식 탁발하며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준령 험치 않소
        방울방울 땀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노래하며
        30리 50리 산길 지치는 줄 모르고 걸어간 거룩한 거지 전도인

        눈 오는 밤이면 배고프고 헐벗은 겨레의 가련한 얼굴들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 조끼도 없이 맨 저고리에 엷은 바지 입고
        불도 때지 않은 방에서 요도 없이 앉아 추위에 떨며 
        주린 사람들 찾아 돌봐주던 따뜻한 사랑의 사도
        더럽고 냄새나는 거지굴 속에 칠성판을 깔고 누워서
        거지들과 함께 어울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던 님

        길가의 들꽃처럼 이름 없이 살다가
        사진 한 장 쓸만한 것 남기지 않고 
        마지막엔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거적대기에 싸서
        평토장을 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고는
        하늘로 훌쩍 올라가 버린 님

        아, 오늘 같은 영혼의 깊은 밤중엔 
        맨발의 성자 그 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님과 같은 이는 볼 수 없어
        거슬러 거슬러 영혼으로 님을 찾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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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필 선생 친필

 

 

 맨발의 성자,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집사도 아닌 평신도였다.  그는 한 시대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간 이름 없는 예수의 제자였다. 그는 한국 기독교 100년 역사 속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성자였다. 그가 곧 한국의 프란치스코라고 불리는 이현필 선생이다. 맨발의 성자라는 이름은 엄두섭 목사가 1978년 이현필의 전기를 쓰면서 책 제목으로 붙인 이현필의 별명이다.
  그는 한평생 집도 없이 하늘을 천장으로 땅 바닥을 안방으로 돌로 베개를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자원하여 거룩한 전도인으로 거지의 삶을 살다간 주님의 신실한 종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넥타이 매어 본 일도 양복을 입어 본 적도 없고 그 흔한 쌀밥 한 그릇 먹는 것을 옆에서 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이 “선생님께서는 왜 밥을 잡수시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니 “쌀 한 톨 만들기까지 농부들이 석 달 남짓 땀 흘려 수고하는데 농사도 짓지 않는 내가 어찌 그 쌀로 지은 밥을 체면도 없이 넙죽넙죽 먹어 치울 수 있겠는가?”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손수 병원에서 환자들이 먹고 버린 죽을 다시 끓여 먹으며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이현필의 삶은 고난과 순결, 가난과 청빈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러한 삶 속에서도 그가 살던 화순에서 서울로 광주로 남원으로 진도로 해남으로 가게 되면 그 멀고도 먼 거리를 볼 일은 뒷전이고 맨발로 걸어서 가고 오면서 만나는 사람 가리지 않고 복음 전하다 보면 3개월도 걸리고 6개월도 걸리곤 했다니 이런 그를 가리켜 ‘한국의 프란치스코’ 또는 ‘맨발의 성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정말 잘 한 것 같다. 프란치스코가 벼랑 끝에 몰린 유럽의 기독교를 살려내며 불거진 인물이라면 이현필은 소리 없이 한국교회의 언저리에서 예수의 영성을 추구하다 스러져간 참 예수꾼이었다. 이현필, 그는 분명히 한국교회 영성사에 있어서 한 맥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특이한 사람이지만 숨겨져 있다.  그는 결코 그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우리들의 순례는 맨발의 성자 숨은 성자 이현필 선생의 지나온 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우리도 그가 걸어간 나사렛 예수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 보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가 기도하고 수도하고 가르치고 전도하며 몸담아 살았던 거룩한 현장들을 찾아가 보면 길이 보이고 진리가 보이고 예수가 보인다. 본격적인 순례 행진에 앞서서 이번 호에서는 그의 생애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현필은 1913년 1월 28일 전남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용하리)에서 평범한 농부인 이승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보통학교를 마친 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에서 몇 십리 떨어진 영산포에 나가서 닭 장사를 하다가 일본인 목사에게 전도 받고 13세 때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후 한때 서울에 올라와 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그때 원경선 선생(현 풀무원 공동체 원장)을 만나 평생 교우가 되었다. 원경선 선생은 지금도 동광원 광주 귀일원을 달마다 둘째 주일에는 꼭 한 번씩 찾아가 예배 인도를 하고 벽제 계명산 분원에도 일 년에 서너 차례씩 오가며 동광원 가족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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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원 수양회 마치고

왼쪽부터 엄두섭 목사, 유영모 선생, 정인세 원장 

 


  서울 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배운 그는 광주에 내려와서는 신안동교회 전도사로 일했으며, 해방 전에는 광주 YMCA의 강순명 목사를 중심으로 한 독신 전도단에 참여하여 이준묵 목사, 차남진 박사등과 전도 활동을 하였다. 
  이현필의 삶이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22세 때 도암의 성자라고 불리는 서른 살 위인 이세종 선생을 만난 뒤로부터였다. 감리교 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정경옥 박사는 이세종을 가리켜 “한국에 성인이 나왔다.”고 소개했는데 이세종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자기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가 남매처럼 살았고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 속에서 지냈다. 또한 밤에는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가까운 마을의 처녀, 총각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켰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이세종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은 살아있을 때에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 봤지만 내 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하고 하였다.
  이현필은 25세 때부터 28세까지 전남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에 들어가 기도생활을 하면서 이세종 선생의 지도와 영향을 받게 되어 수도자의 모습을 닮아갔다. 나이 30세 전후로 그는 지리산의 오감산이나 서리내에서 깊이 기도하였다. 산에 파묻혀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고, 특별히 부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남원에서도 몇 십리 들어가는 서리내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고 불리는 동산이 있다. 서리내에서 행해진 교육은 보름씩 산 속에서 행해졌으며 경건생활과 노동이 엄격하게 함께 이루어졌다. 갈보리 역시 서리내와 함께 수도의 도장이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 모여 예배드리고 성경 강해를 들었으며 특히 그의 순결사상을 여기서 받게 되었다. 갈보리와 서리내는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훗날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이현필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에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의 삶을 훈련시켰다. 그 자신 스스로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 옷과 불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지내며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였다. 그는 식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을 했으나 일체 침묵하였고 오직 성경만 가르쳤고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생명외경 사상을 실천하여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동안 교회 지도자들이 이현필을 금욕주의자 또는 산중파라고 부르며 비방하였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찾아와서 보고 들은 사람들은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하고 소리쳤다. 이현필은 지리산 봉우리마다 깨끗하게 가득 쌓인 눈경치를 보며 수도하기 위해 세상도 청춘도 모두 바친 제자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아, 십자가! 십자가의 길 뿐입니다!”하고 호소하곤 하였다.  도인(道人) 이세종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 이현필은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 모두 7년이란 산기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에 통곡하는 사람이 되었고 청빈한 수도자 프란치스코 같은 모습을 닮아 어질고 겸손한 성자의 모습을 이루어 갔다.
  이현필의 주위에는 여러 유능한 인물과 명사들이 모여 들었다. 호남의 명사요, 나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최흥종 목사는 이현필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서울 중앙 YMCA 총무요, 평화주의자로 20세기 종로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현동완 선생도 이현필을 방문하고 그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광주 YMCA 총무 정인세는 유도 2단에 덴마크 체조 교사이기도 했던 인물인데 YMCA를 그만두고 양복을 벗어버리고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이현필 운동에 몸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한국의 공자요, 작대 철학자로 이름난 삼각산 철인 유영모 선생은 이현필을 사랑하여 한평생을 이현필과 교제하였고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자진하여 봉사하였다. 1946년 처음 만나서 이현필이 세상 떠난 1964년까지 한결같이 사제의 의를 지켰고 진리와 도(道)의 정을 나누었다.
  이현필과 당대의 석학 유영모와의 만남은 동광원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것이었다. 유영모 선생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 교장이었으며 유명한 한학자로서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함석헌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유영모가 이현필을 만난 것은 현동완과 정인세와의 관계성 속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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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다석 유영모 선생

 

 

  그들은 한국 안에서 성인을 찾아 헤매였으나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갈급함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그들은 전라도 화순의 이세종이란 인물을 찾게 되고 그 후 1946년 전남 광주에서 맨발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이현필을 만나게 되었다. 이 나라에 성자가 나기를 고대하던 현동완은 이현필에게서 성자의 가능성을 보고 당시 YMCA 연경반 공부를 맡고 있던 삼각산의 유영모에게 이현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로서 1946년 봄 광주 YMCA에서 유영모, 현동완의 공개 강연이 열리게 되었고 처음 대면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영모는 이현필에 대해 “한국에 인물이 없는 줄 알았더니 광주에 반쪽이 있었구나.”하고 말했다고 한다. 유영모 선생은 이현필을 무척이나 아끼었고 자주 광주 동광원에 내려와 동광원 식구들에게 강의하곤 하였다. 이현필은 유영모의 가르침에 매우 만족해하였다. 특히 유영모의 동정 순결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어느 날 이현필은 유영모의 강의를 듣고 나서 평하기를 “한마디 한마디 피투성이다.”고 할 정도로 전폭적이었다. 이현필은 유영모의 참 인격과 참 말씀에 끌리어 스승으로 받들었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유영모의 영성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강조한 것이라면, 이현필의 사상은 이웃에 대한 비계산적 무차별적 사랑의 실천이었다. 두 맥의 만남을 통해 자칫하면 은둔적이고 신비적인 영성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동광원이 균형 잡힌 영성을 갖추게 되었다. 유영모의 민족적이고 한국적인 여운이 뒷받침되어 한국의 토착적 주관을 가진 믿음을 이 땅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1949년에는 현동완 총무가 이현필과 그의 제자 일부를 서울로 초청하여 삼각산과 능곡 등지에 머물게 했다. 능곡에는 오원(吳園)을 세우고 남녀 청년들이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추운 겨울 날 이현필은 남녀 제자들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마을에 탁발을 내보냈다. 추운 겨울인데도 신도 신지 않고 맨발로 나섰다. 처녀들이 탁발하고 떠난 집에 뒤이어 남자들이 또 닥쳐 탁발을 청하니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요즘 무슨 거지들이 이리도 많아졌지?”하고 말하였다. 제자들은 경기도 고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고양 벽제에 있는 계명산 수녀원의 모체가 되었다. 경기도 능곡을 중심한 이현필의 젊은 전도대는 농사도 지으며 때로는 탁발도 나가고 모여서는 항상 기도하고 성경 읽는데 주력하였다. 한편 여름에는 전도대를 조직하여 남원, 순천, 여수, 강진, 해남, 광주 등지로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거지같은 헌옷에 신도 신지 않고 맨발에 걸식 탁발을 하며 전도하였다. 해남의 명사 이준묵 목사도 적극 나서서 도왔고 자기 교회에 이현필을 청해 집회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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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 계명산 수녀원

 

 

  그러던 중 6ㆍ25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1949년 여순 반란 사건으로 고아들과 떠도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현필은 탁발 수도를 그만두고 전남 화순군 화학산 청소 마을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1950년 1월 광주에서 정인세 선생을 통해 YMCA를 중심으로 동광원(東光園)이란 이름의 고아원이 생기자 이현필과 그의 제자들은 동광원 고아들을 헌신적으로 섬겼고 결국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의 운동 단체가 되었다. 그들은 오갈 데 없는 많은 사람들을 하룻밤씩 재워주는 운동을 벌였다.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고 재워 보내는 이 사역은 후에 귀일원(歸一園)의 모체가 되었다. 여순 사건과 전쟁에 휘말린 민족의 역사 현장에는 고아뿐 아니라 과부, 장애인, 무의탁 노인, 나환자, 폐결핵 환자들이 들끓었다. 동광원의 고아 사역이 귀일원으로 통합되면서 처음 10여명을 돌보던 것이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현필 선생과 숨어서 수도하는 동광원 지체들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기도 밖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현재 동광원 식구들은 전국에 약 80명 가량이며 남녀 모두 독신 생활하는 공동체 형태로 살고 있다. 주로 전라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원에 본원이 있고 분원으로서 진도 분원, 함평 분원, 도암 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그리고 경기도 벽제 계명산 분원이 있다. 
  말년에 이현필은 말 한마디도 못할 만큼 후두 결핵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그는 자기 건강이 오래 못갈 줄 알고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 가서 혼자 죽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로 가기로 작정하고 기차를 타고 그의 제자 셋째(한영우 집사)가 넝마주이하면서 살고 있는 신촌 거지 굴까지 업혀서 갔다. 그는 묘지에서 주어 온 칠성판을 깔고 누웠다.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면서 그는 죽은 사람처럼 핏기가 없어졌고, 그 자신도 운명의 시간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날이 새자 죽음을 넘긴 그는 필담으로 실로 놀라운 고백을 하였다. 
  “저는 그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고백합니다. 제게 있어선 선행이 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귀할 뿐입니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님께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고 느낍니다. 그동안 저는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위선자입니다. 저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은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만 나갈 것입니다.”그리고 무슨 고기든지 좋으니 먹을 고기를 사오라고 부탁했다. 셋째는 굴비 한 마리를 사서 동냥 다닐 때 쓰는 때 묻은 깡통에 물을 붓고 끓여 가져왔다. 이현필은 그 국물을 자기 입에 떠 넣어 달라고 말했다. 셋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조기 국물은 후두 결핵으로 말 못하는 이현필의 목으로 넘어갔다. 그동안 한 번도 육식 아니 커피 한잔 마시지 않던 그가 고기 국을 마신 것이다. 그때가 바로 1955년 가을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파계이다. 그런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일주일도 못 버틴다는 후두의 병이 깨끗이 나은 것이다. 훗날 그는 이때의 심중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가 저지른 파계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그동안 나의 금욕, 고행의 모습 때문에 따르던 사람들이 격분하여 나를 위선자라 몰아 붙이며 몽둥이로 때리고 동광원에서 쫓아내도 할 수 없다는 각오로 고기를 먹었습니다.”  물론 이현필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사람 보기에 그는 금욕주의자 같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처럼 보였다. 더욱이 곁에서 지켜본 제자들에게 비춰진 인상이 하나님의 은총이나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철저한 절제를 통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오해될 것을 걱정하여 의도적으로 파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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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필 선생 임종하신 집

  1964년 이현필은 광주 동광원에서 마지막 고별 집회를 여러 날 계속하고는 세상 떠날 때가 가까운 줄 알고는 급히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가장 사랑하고 사모하는 고장은 경기도 벽제 계명산 수녀원이었다. 그곳에 여 제자 정한나 수녀가 홀로 들어가 굴을 파고 살며 개척한 동광원 분원이 있고, 산수 좋은 뒷산 개울가에 현동완 총무의 별장 자리에 조그마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현 총무가 동광원에 기증한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계명산 수녀원에서 줄곧 기도하면서 자기가 세상 떠날 것을 미리 말하며, 제자들에게 지극한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장래를 부탁하고 일일이 축복하였다.
  최후의 순간이 왔다. 평생 영양실조로 시달린 그의 육체가 더 이상 오랜 병을 감당해내지 못하였다. 수녀들이 깨끗이 빨아 두었던 선생의 누더기 바지 저고리를 수의로 입혀 드렸다. 그러나 그는 입었던 옷을 다시 벗으며 “이것은 내가 깨끗이 입은 것이니 내가 죽으면 이 옷을 없애 버리지 말고 헐벗은 사람에게 주어 입게 하시오.”하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시체에 수의를 입히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또 “나는 죄인이니 내가 죽으면 관에 넣지 마시오. 죄인의 시체니까 거적대기에 싸서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도록 길가에 평토장해 주시오. 분상을 만들어 놓는 이는 화를 받을 것이오.”하고 유언하였다. 임종이 가까워지면서 몸은 불덩이 같이 뜨거워지고 숨은 곧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자 무척 애썼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바로 이때 이현필에게 신기한 기쁨의 물결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기쁨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한 이현필은 또 다시 외쳤다. “아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면서 주위를 둘러보며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하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꽃피고 새 우는 봄의 문턱에서 이현필은 한 알의 밀알 씨가 되어 벽제 계명산에 묻혔다. 유영모 선생은 이 사실을 한시로 읊었다.  “도암서기무등등 현필이공계명치”(道岩瑞氣無等騰 賢弼李公啓明致) “도암의 상서로운 기운이 무등산에 오르고 이현필 공이 벽제 계명산에서 마치다”라는 뜻이다. (박영호, 다석 유영모下, P145)
  이현필의 평생 갈망과 목표는 순결과 자기완성 그리고 고난당하는 이웃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복음 삼덕 곧 순결은 목숨보다 소중하며, 순명은 생명과 같은 것이고, 나 하나의 인격완성이 가장 귀한 것이요,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결, 청빈, 순명의 수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걱정하는 이웃이 있으면 자기도 밤새 잠 못 이루고 함께 걱정했고, 형제들이 기뻐할 때는 자기도 춤출 듯이 기뻐하였다. 우리도 이현필의 길을 가자. 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길이리라. 아, 제 2의 이현필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오늘 우린 맨발의 성자를 어디서 또 다시 찾아 볼 수 있을 것인가? 아, 맨발의 성자여, 한국 강산에 신음하는 겨레와 비틀거리는 한국교회를 위해 다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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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필 선생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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