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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괴롭게 살다가 즐겁게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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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4 11:18 조회1,4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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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괴롭게 살다가 즐겁게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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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필 선생 태어난 집
전남 화순군 도암면 소재지인 권동 마을에 있다

 

 

 “사람은 괴롭게 살다가 즐겁게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일생을 마치셨습니다.”(엄두섭 엮음, 「순결의 길 초월의 길」, 223쪽)
  이 말은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이 제자들에게 한 설교의 핵심 내용이다. 그는 자기가 설교한 그대로 고난 가득한 삶을 살다가 기쁨으로 이 세상을 떠나간 향기 나는 참 예수꾼이었다. 이현필은 예수 잘 믿으려면 오장치를 짊어지고 나서야 한다면서 스스로 자기 이름을 ‘헌 신짝'이라고 불렀다. 양복과 구두를 벗어 던지고 떨어진 거지 옷을 입고 발에는 신을 신지 않고 겨울에도 맨발로 일생을 그렇게 살았다. 머리는 삭발을 하고 콧물은 손잔등으로 닦으면서, 음식은 주로 쑥을 뜯어 먹고, 그것도 죄인이라 하여 밥상을 차리지 않고 맨땅에서 먹었다. 그는 세상 떠나는 순간까지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완성을 이루려고 몸부림치며 나아갔다. 그의 삶은 고난 덩어리였다. 이런 그가 벽제 계명산에서 세상을 떠날 때 “아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 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고 외치면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는 괴롭게 살다가 즐겁게 죽었다.
  괴로웠기에 그토록 기뻐하였고 행복한 삶을 살아간 성인을 낸 화순 도암까지 달려온 우리 일행은 어느덧 중촌 마을에 다다랐다. 도장리에서 남쪽으로 4km 정도 내려가면 도암면 사무소가 나오고 그 안쪽으로 이현필이 태어난 용하리(권동) 마을이 보인다. 여기 이현필의 생가가 있는데 그는 1913년 1월 28일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아버지 이승로 씨와 어머니 김오산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현필이 자라나고 기독교 신앙을 접한 곳은 거기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중촌(中村) 마을이다. 용하리에서 용강리를 거쳐 왼쪽으로 돌면 ‘중장터'가 나온다. 옛날 운주사 스님들이 장보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장터를 지나 화순군 도암면 호암 2구에 중촌 마을이 있다. 30호쯤 되는 작은 산골 마을로 여기 동광원 화순 분원이 자리 잡고 있다.

  화순 분원은 이현필이 기도생활을 하며 성경말씀과 복음을 전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한때 60여 명이 성경공부와 기도생활을 하며 ‘성경공부반’을 운영하고 수양회를 열기도 하였다. 현재는 4명의 공동체 가족이 남아 수도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올해 일흔 일곱 살이신 김춘일 수녀가 하춘자, 이국자 자매들과 함께 농사지으며 외로이 수도하고 있는 영혼의 도장이다. 김춘일 수녀는 장로교 목사의 딸로서 성경학교를 나와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갔으나 마다하고 이현필 선생을 따라 나섰다. 1953년에 동광원에 들어와 처녀의 몸으로 독신 수도하며 50년이 넘도록 순결 지키며 그리움을 참고 참아 마음 깊은 곳에 한 송이 눈물 꽃이 피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동광원의 큰 언니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동광원 수녀들 가운데서도 가장 머리가 뛰어난 사람으로 아마 여인으로서는 이현필 선생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수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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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원 화순 분원
전남 화순군 도암면 호암2구 중촌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쓸쓸한 산골 마을 외딴 집에서 홀로 엎드려 기도하고 깨끗한 순결 지키며 주님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 보기만 해도 그녀에게선 향기가 난다.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자고 했더니 두 손으로 얼굴 가리며 도망가는 겸손한 여인이었다. 이런 그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부님께서 세상 떠나시기 전에 우리헌티 ‘지금은 여그가 별 볼일 읎는 쬐끄만 산골 동네지만 머잖어 선남선녀들이 구름떼처럼 찾아올것인께 그리 아시오.’하신 말씀이 생각나는 구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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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원 화순 분원장 김춘일 수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광원 화순 분원을 지키고 있는 김춘일 수녀는 그 고된 노동과 수도생활 속에서도 행복해 하고 있었다. 옳은 스승 이현필 선생을 만난 것이 행복의 전부였다. 이현필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된 어느 날인가 김춘일 수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부님은 예수님의 인격을 몸소 제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늘 보았어도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기는 너무도 거리가 먼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부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저는 비로소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라는 것을 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그분은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피를 태워 그것으로 진리의 촛불을 켜들고 모든 사람을 향해 ‘인생의 갈 길은 이 길이다. 인생의 참 행복이란 이것이다.’라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한평생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최선을 다하고 전심전력하여 사신 분이었습니다.”(엄두섭, 「맨발의 성자」, 181~182쪽)
  동광원 화순 분원에서 하루를 묵은 우리 일행은 새벽에 짤막한 기도회를 가졌다. 김춘일 수녀가 남반 여반 구별된 숙소 저쪽 구석진 곳에서 얼굴을 숨기운채 말씀을 전하고 있다.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다.” “오늘 속에 영원이 들어있고 영원 속에 오늘이 들어있다.” “개체완성이 곧 우주완성이다.” “아버지가 만나러 오신 자리가 마굿간이다.” “내 피를 내 놓아야 예수님의 피(사랑)를 볼 수 있다.” “농사는 기도요, 자복이다.” “사람은 괴롭게 살다가 즐겁게 죽어야 한다.” “순결이 곧 구원이다.”
  맑고 카랑카랑한 그의 음성이 새벽의 고요 속에 생명의 소리로 우리들 영혼 속을 파고든다. 분명 예언자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들어보지 못한 소리, 사막에서 온 편지임에 틀림없다. 이 소리 듣고 내 영혼이 봄날 되어 깨어난다. 중촌 마을 동광원 화순 분원에서 들려오는 영혼을 깨우는 가늘고 조용한 님의 음성에 흠뻑 취하고 싶다. 실컷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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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라고 불리는 한영우 장로
왼쪽부터 필자, 동광원 계명산 분원 박공순 원장, 한영우 장로

 

 

  분원에서 가까운 곳 산자락에 한영우 장로가 홀로 수도하며 살고 있다. 그는 올해 79세로 이현필 전기 「맨발의 성자」에서 ‘셋째’로 나오는 인물의 주인공이다. 고아 출신으로 남의 집 머슴 일을 하다가 1949년 ‘청소골’ 고아원 일을 도우러 도암에 들어왔는데 거기서 이현필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광주와 함평에서 거지들과 함께 살기도 하였고, 서울에서 넝마주이를 하면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동광원 수녀들의 농사짓는 일을 도와주며 살아가고 있는 수도사이다. 한영우 장로는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건강해 보였는데 그 비결이 생식에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이현필의 제자이면서도 이세종 선생의 정신을 흠모하고 있는 나머지 도암에 이세종 기념관을 세워 그 정신을 길이길이 남기고 싶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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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산 화학산
화학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멀리 둥그스름한 
봉우리가 화학산 꼭대기이다

 

 

  이현필 선생 유적지 순례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화순 화학산이다. 화학산은 산의 모습이 학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화순군 도암면과 청풍면의 경계에 자리한 해발 613.8m의 산이다. 무등산을 지나 남녘으로 내려가던 호남 정맥이 장흥군과의 경계를 이룬 깃대봉에서 북쪽으로 곁가지를 뻗어낸다. 이 곁가지는 바람재를 지나 서쪽과 북쪽으로 다시 나와 제법 긴 산줄기를 이어 가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나게 높이 솟구친 산이 바로 화학산이다. 이 화학산은 이현필 선생과 그 제자들의 수도의 도장으로 여기 깊은 영감과 기도의 숨결이 서려있다.
  이 화학산은 동족상잔의 슬픈 상처가 남아 있는 아픔의 산이기도 하다. 1951년 4월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 작전으로 대혈전이 벌어져 적어도 500명 많으면 1,000명이 넘는 귀중한 생명이 희생된 비극의 현장이다. 화학산은 바위가 거의 없는 흙산으로 부드러운 능선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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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도암 봉하리 청소골의 고아원 옛터

  화학산 기슭 청소 골짜기는 동광원의 고아원 운동의 발상지이다. 청소(淸沼) 마을은 도암면 봉하리로 되어 있으며 마을에 맑은 쏘가리가 있어서 청소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현필은 한때 탁발 전도단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신앙훈련과 전도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가운데 6ㆍ25 전쟁 일년 전 여순 사건으로 고아들과 헤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전남 화순군 청소 마을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이현필 선생이 김준호씨를 데리고 여기 와서 처음으로 고아들을 모아 기르던 곳이다. 맨 처음 이곳에서 고아원 보모 노릇을 한 사람은 정귀주 수녀였다. 그 당시 의사 김상욱 씨가 이현필 선생의 고아 구제사업에 대한 말씀을 듣고 8만원을 내어놓아 1949년 삼간 초가를 사들여 고아 8명을 돌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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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골 골짜기 마당 바위
이현필 선생이 기도하러 다니던 마당 바위에 동광원 식구들이 앉아 있다
왼쪽부터 최찬익, 윤영윤 선생, 김준호 선생, ㅇ,
김춘일 원장, ㅇ, 남애주, ㅇ, 이국자, ㅇ, 박청자

 

 청소 마을 뒷산에 꾹골 골짜기가 있다. 이곳은 이현필이 새벽마다 기도하던 곳이다. 마을 사람들이 땔 나무를 마련하러 올라가면 눈 위에 새 발자국이 있고 큰 바위(마당 바위) 한쪽에는 눈이 녹아 없어진 자리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가 바로 이현필이 무릎 꿇고 기도한 자리이다. 아주 추운 어느 겨울 날이었다. 이현필이 기도하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그 마을에 사는 누님 집에 들렸다. 누님 집에는 어린 조카 세 명이 있었다. 꽁꽁 얼어서 들어오는 동생을 본 누님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얼른 방으로 들어가서 언 몸을 녹이게 하였다. 한참 뒤 따뜻한 밥상이 들어왔다. 바로 그때 그 집에서 기르는 큰 고양이가 밥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고양이는 얼어서 상해 냄새나는, 양말도 신지 않은 이현필의 발을 꽉 물고 놓지 않았다. 그때 이현필은 “고기 아니요.”하면서 발을 빼냈는데 발에선 시커먼 피가 줄줄 흘러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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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산 등산로 안내도
승용차로 광주에서 화순-능주-도곡-평리 삼거리-도암-중장터-
우치리까지 가서 올라갈 수 있다

 

 

 화학산 구석구석은 이현필 선생의 수도의 도장이다. 이현필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고, 가끔 이 산에 들어와 기도와 명상으로 보내던 곳이다. 6ㆍ25 이전부터도 동광원 식구들이 인연을 가지고 있었으나 특히 6ㆍ25 때에는 동광원 150명의 대식구들이 이 산 여기저기 흩어져 하루 한 끼씩 먹고 살던 곳이다. 이 넓은 산중,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흩어져 숨어 사는 동광원 식구들을 이현필 선생은 밤낮으로 돌면서 심방하였다. 
  화학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하수락 마을(아랫 무지개 마을)이 있다. 도암면 봉하리에 있는 마을로 마귀 할미 폭포에서 물 떨어지는 것을 표현하여 수락이라 하였는데 또 한편으로는 무지개라고 한다. 하수락이라 함은 아랫 쪽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음을 뜻한다. 동광원 식구들이 그리도 존경하는 수레기 어머니(손임순 어머니)의 친정집이 있는 마을이다. 십여 채의 집들이 옛날 옛적 그대로의 모양으로 고요히 살고 있는데 동광원 사람들은 이 마을을 수레기 어머니 마을이라 불렀다. 우린 여기서 수레기 어머니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세종 선생이 자기의 후계자로 지목한 제자가 둘 있었는데 남자로는 이현필이고, 여자는 수레기 어머니(손임순)였다. 그는 본래 이세종의 수제자요, 여자들 가운데 이현필과 같은 사람이었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 동광원에 들어와 이현필을 따랐다. 정한나, 정귀주와 함께 동광원 3여걸이라 불리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부지런하기로 수레기 어머니가 첫째였다. 한창 농번기에 사람들은 고된 일에 지쳐서 세상 모르고 쓰러져 자는 밤중에도 수레기 어머니만은 밤중에 혼자 일어나 보리를 까불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본이 되었던 수레기 어머니는 나주군 방산 뒤로 흐르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중촌 부락에서 중장터로 가는 강을 건너는 돌 징검다리를 장마 뒤에 건너가다가 급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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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기 어머니
본명은 손임순으로 동광원 식구들에게는 
믿음의 어머니로서 성녀로 존경받고 있다

 

 

그 당시 도암에서 수레기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김춘일 화순 분원장은 그때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레기 어머니는 언젠가 등광리 사람 하나가 배가 부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난 그렇게 안 죽을 나요. 오다가다 물고랑창에 엎어져 죽을 나요’하시길래 ‘어머니, 왜 그런 말씀하십니까? 말이 씨가 되는데요?’라고 했더니 ‘춘일양, 생각해 보시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었는데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편하게 자리에 누워 죽기를 바라겠소!’하고 대답하시는 거예요. 존경하올 믿음의 어머니는 그날 두 번 다시 못 돌아올 다리를 마지막 건너 가셨습니다. 몇 일 전부터 밤이면 잠도 안 주무시고 밖에 나가 하늘을 쳐다보시면서 ‘저 별들 좀 보시오. 전에는 없던 저 큰 별들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소!’하시면서 기뻐하셨다는 어머니, 거룩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의 참 딸 되어 아버지 뜻대로 살다가 아버지 기뻐하신 뜻을 이루고 가신 어머니. 사람들은 흉사라고 떠들어댔지만 어머니야 말로 고난의 길, 사랑의 길, 복음의 길을 올곧게 걸으시고 승리의 막을 내리셨습니다.”(김춘일 원장 쓴 「믿음의 어머니 손임순 어머니의 생애」란 제목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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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산 자락 도구박골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우치리에 있는 산골이다

 

 

  화학산 자락 도구박골은 이현필과 동광원 식구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의 장소인 동시에 그들의 공동생활 터전이었다. 도구박골이란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우치리에 있는 산골이다. 우치(牛峙)란 뜻은 원래 소재라 부르는 한자 소 우(牛)자와 고개 치(峙)자를 각각 취하여 우치라 한 것이다. 우치리에는 소재 마을, 문바위 마을, 각수바위 마을, 가마터 마을 등 4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어 120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소재 마을만 남아 30여 호가 살고 있다. 1943년 수레기 어머니가 아들 이원희를 데리고 이곳 도구박골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 이곳은 최초의 공동체 수도회가 되었다. 이상복, 정한나, 정귀주 등이 이곳을 수도처로 삼아 오갔으며 오북환, 김준호, 조동록, 강화선, 강차남, 김금남, 이인옥, 오세휘 등 30여 명이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은 1947년부터 도구박골에 인접한 이현필 선생의 형이 살던 도암 중촌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수도생활을 계속했는데 이곳이 현재의 동광원 화순분원이다.

  문바위란 큰 바위 둘이 우뚝 선 문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현필의 제자 오북환 장로가 일제 때 6ㆍ25 때 4년 동안 숨어 지내던 곳이다. 이곳 산속에 들어와 살던 동광원 가족 강차남 수녀, 문제현, 서울 어머니가 6ㆍ25 전쟁 중에 빨치산에게 끌려가 순교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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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산 문바위

 

 

  좀 험한 바위 위로 올라가면 오른편에 낭떠러지가 있고 그 아래로 물이 급히 흐르는 골짜기를 끼고 왼편 가파른 산 밑으로 난 외길을 구불구불 기어오르게 된다. 숲이 우거지고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어 풀이 허리까지 차는 길이다. 이곳에 한때는 작은 예배당도 있었고, 움막집이 서너 개 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다 없어지고 밤나무만 무성한 채 있는 곳이다. 여기서 수레기 어머니가 살았고, 오북환 장로가 신사참배를 피하여 지내기도 하였고, 6ㆍ25 때 이현필과 함께 하던 이들 가운데 3명이 피살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 화학산 동굴은 이현필 선생이 광주 수피아 여학교 교장 유하례 선교사를 지게에 실어 모시고 들어와 숨어지낸 곳으로 유명하다.

  유하례(Miss Florence E. Root) 선교사는 1927년 34세 때 처녀의 몸으로 미국 남장로교 세계선교회를 통해 광주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미 대사관으로부터 일본으로 피난하라는 연락을 받고 “주님, 저를 편안한 마음으로 있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한다. 이 때 “환란이 닥쳐오는 날 신자들을 버리고 어찌 너만 살겠다고 피난을 갈 수 있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 피난길에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 가족들은 유하례 선교사를 북한군 치하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남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으로 피신시켜 77일 동안 보호하였으며 이 피난 과정에서 8명이 순교하였다. 유 선교사는 피난 과정에서 이현필 선생을 비롯한 돵광원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며 성경 말씀을 교통하면서 이들이야말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동광원이 기독교 단체로부터 이단 시비를 받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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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례 선교사        유하례 선교사를 피신시켰던 굴        유하례 선교사와 동광원 가족

 

 

  각수바위는 숨은 성자 이세종 선생이 하늘만 쳐다보며 기도하던 자리이며 감나무골로 더듬어 올라가면 바람재가 있고 그 뒤로 그다지 높지 않은 봉우리 소반바위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큰 바위가 생긴 모양이 소반(작은 밥상)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소반바위 위에 서서 멀리 바라보면 바람재 너머로 아득히 영광 월출산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인다. 마치 금강산 같다. 소반바위는 크지 않은 평범한 바위이지만 유서 깊은 곳이다. 수도자들이 숨어 살던 곳이다.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를 피하여 이 산속에 피신하여 숨어 살던 여러 사람들 가운데 이상복 장로는 이 소반바위 옆에다 산막을 치고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는 이세종의 제자였다. 지금도 이 바위 밑 땅에는 당시 그가 심었던 돼지감자(뚱딴지)가 묵은 뿌리에서 싹이 돋아 우거진 잡초 속에 섞여 그대로 자라고 있다. 갈대밭은 사람의 키를 넘게 빽빽이 우거져 있다. 6ㆍ25 때는 소반바위 이 자리에 다시 강화선씨, 허감남씨가 산막을 짓고 살았고 이현필, 정인세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오가며 숨어 지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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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산 소반바위

이현필 선생이 기도하던 곳

  그 당시 18세 소년이었던 이인옥 장로가 들려주는 한토막 이야기가 퍽 감동적이었다. “채식만 주로 하던 우리에게 한번은 하얀 쌀밥이 나오는 거예요. 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지요. ‘어디서 쌀이 나왔을까?’ 모두가 오랜만에 잘 먹었습니다. 얼마 후 모두 잠이 들었지요. 식곤증이 온 것이었어요. 잠이 깨자 이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거봐! 쌀이 얼마나 독한 가 알아야 해! 취나물 쑥밥은 보약이니 쑥밥 많이 먹으면 뱃속에 회도 안 생기는 법이야!’ 정말 횟배 아픈 일 없었어요. 선생님은 깨끗한 마음과 가난한 마음가짐을 말씀하신 거지요. 소반바위 시절이 그립습니다.”

  어느 날 이현필은 혼자서 화학산 깊은 산골 소반바위 밑에 사는 한종식이란 사람의 집을 찾아갔다. 그 집은 세월이 평안한 시절에도 몇 십리 산중으로 들어가 길도 찾기 어려운 우거진 숲 속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현필은 그 집에 오자마자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누구를 보고도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금식을 시작하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현필은 누가 오든지 손짓 발짓으로 벙어리 짓만 하였다. 의사소통은 필담으로만 하였다.
  한번은 YMCA 총무로 있으면서 동광원 고아 운동을 하던 정인세 선생이 이 산중을 찾아와 벙어리 도를 닦는 이현필의 산막까지 왔다. 고요한 밤 호롱불 하나 가운데 두고 희미한 불빛 아래 앉은 두 사람은 서로 종이에 써서 필담을 하였다. 이현필은 금식 기도 중에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종이에다 귀일원(歸一院)이라고 썼다. 그리고 정인세에게 필담으로 권하기를 “곧 나가서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동광원 운동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동광원 사람만 말고 누구나 역에 나가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데려다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입니다. 곧 하십시오. 반드시 시작하십시오.” 앞으로 전쟁이 계속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니 거리에 나가 돈 없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하룻밤씩만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벙어리 수도를 하면서 이현필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때는 여순반란 사건 직후요, 6ㆍ25 전쟁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여순반란의 피는 이미 이 땅의 남단을 붉게 물들이고 앞으로 얼마 뒤에 6ㆍ25 난리가 또 북녘으로부터 터지려고 하던 그 역사적인 순간을 영인 이현필은 산 손님들이 날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산속 외딴 집에서 벙어리 수도를 하면서 그의 가슴 속에는 그때 아기 밴 산모와 같이 무엇을 낳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귀일원에 대한 구상이 그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환난이 온다. 사람들을 돕자. 뭇 사람들을 어려움에서 건지자. 땅위에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단 하룻밤도 함께 지내줄 이 없는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들을 도와주자. 의지할 것 없는 그들을 구원하자.” 이런 하나님의 계시가 그의 가슴에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이었고, 후에 이현필 말년에 일으킨 ‘일작운동’(一勺運動)의 구상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일작운동은 이현필이 1964년 세상 떠나던 해 마지막으로 벽제 계명산으로 가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동광원 총회 때 제안한 운동이다. 그것은 모두가 날마다 밥 지을 때 자기 먹을 몫에서 한 숟가락씩 떠서 모으자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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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박골 움막집
왼쪽부터 정신영, 최오남, 감남예, 최호님 동광원 자매들(1969년)

 

  이렇게 실시해서 30명이 밥 한상이 되고, 300명 3,000명으로 늘어나면 학교도 되고 병원도 되고 비행기도 된다. 그렇게만 되면 한국은 자주 국가가 되고 세계엔 평화가 온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손쉬운 착한 일, 소자에게 물 한잔 떠 주는 일 같은 선행. “일작씩 걷어 귀일원에!” “의지할 것 없는 이 하룻밤씩 재워 보내자!”  돈으로는 10원 운동. 누구나 돈 쓸 때 10원 덜 쓰고 그것을 모아 불행한 겨레를 재워 보내고 돕자고 했다. 이 운동이 시작되면서 사방에서 많은 양식이 들어왔다. “가난한 겨레를 도와주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우리나라가 살게 된다."고 이현필은 호소하였다.
  아, 화학산에 해가 지고 있다. 아픔의 산 화학산의 상처를 싸매주고 위로하려는 듯 부드러운 노을빛이 화학산을 비추고 있다. 아픔의 사람들이 아픔으로 커가며 고통하는 삶을 살아갔던 화학산을 뒤로 하며 우리들 일행은 무엇인가 억누를 수 없는 기쁨에 취해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김춘일 원장이 입을 열어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이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1957년쯤이었나 봐요. 제가 광주에서 넝마주이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어느 골목길에서 큰 개 한 마리가 뛰어나와 갑자기 제 다리를 물어버렸어요. 바로 그때 2km 밖에 있었던 이현필 사부님은 저와 같이 놀라셨습니다. 45년이 지난 이 시간에도 그때 그 신비롭고 크신 사랑을 돌이켜 보면서 명상에 잠깁니다.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라고 하신 사부님. 지금도 그때와 같이 저희들과 함께 기뻐하시고 저희들과 함께 아파하시겠지요. 고통의 깊이에 따라 말씀이 들어오고 내 피(내 죄)를 내놓아야 예수님의 피(사랑)를 볼 수 있다고 하신 존경하올 스승은 삶으로 믿음으로 모든 고난을 달게 받으셨습니다.” 
  예수를 닮으려 했기에 아픔이 있었고 아픔을 환영하며 살아갔기에 기쁨이 넘쳤던 행복한 참 예수꾼 이현필이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작게, 낮게, 없는 듯이 살자."는 것이었다. 오늘의 괴로움은 괴로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일 기쁨의 씨앗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광야의 삶은 불편하고 제약을 많이 받고 괴로움이 많은 것이 아닌가. 어차피 광야에 내 던져져 살 바에는 더 이상 괴로움을 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괴로움이 더 하도록 살아봄은 어떨까. 이것이 바로 고통의 신비이리라.
  화학산을 내려오는 내 손에 어느덧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책이 들려 있었다. 영혼으로 가만 가만히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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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분원 식구들
앞에 앉은 이는 하춘자,

뒤에 선 이들은 왼쪽부터 김춘일 원장, 이국자, 이채영, 복은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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