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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리내와 갈보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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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4 11:39 조회1,3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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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리내와 갈보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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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원시림

 

 

  “눈을 남으로 돌리면 산봉우리가 파도처럼 아득히 시야 속에 물결치고 있고 서쪽과 북쪽으로 고개를 젖히고 쳐다봐야 할 산봉우리들이 쌓여 있다··· 가장 가까운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조그마한 마을에서 신작로를 벗어나 산비탈을 기어오르는 소로를 걷게 되었을 때 숲의 밀도는 짙어져 가고 호랑이가 살고 있어도 무방하리만큼 숲 속은 어둠침침해 있다.”
  이처럼 그려내고 있는 이병주의 「지리산」은 어마어마하게 큰 산이다. 백두의 맥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 나라 땅 남쪽 끝까지 이어져 있는 민족의 영산 지리산. 영남과 호남에 걸쳐 두루 펼쳐져 있고 백여 리가 넘는 능선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곳이 바로 지리산인 것이다. 능선과 능선 사이엔 한신골, 심원골, 피아골, 뱀사골 따위의 골짜기가 움푹움푹 나타난다. 각을 보이며 강하게 움직였던 굴곡이 느릿느릿한 곡선으로 다가서고 다시 가득 찬 들로 바뀌는 곳이 있다. 너른 들판이 펼쳐지는 곳, 바로 그곳에 남원이 있다. 마치 어머니의 품 속에 살포시 자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지리산 가슴 자락에 안겨있는 남원은 푸짐하고 넉넉하기만 하다.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전라도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 남원과 구례라 하였다. 지리산을 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광원 화순 분원을 떠난 우리 일행은 지금 남원 지리산 자락에 와 있다. 때마침 남원 동광원 본원을 지키고 있는 오세휘 장로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이끌어 주었다. 오세휘 장로는 동광원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오북환 장로의 아들로 지금까지 홀로 수도하며 동광원을 돌보고 있는 수도사였다. 올 69세인 그는 침묵과 겸손이 몸에 배어 있는 참 예수의 사람이었다. 남원 시내를 벗어난 우리는 수지면 쪽으로 차를 타고 가면서 지리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해발 1915m를 자랑하는 지리산은 전라북도 남원과 전라남도 구례, 경상남도의 산청, 하동, 함양을 나누는 3도 5군의 명산이다.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맑은 물과 겹겹이 둘러싸인 산마루, 비틀어진 말라죽은 나무들, 철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내는 지리산은 신비의 산이다. 그러나 이 지리산은 겉 모습과는 달리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기도 했다. 해방 후 수많은 젊은이들이 좌우익의 이데올로기 충돌 속에서 쓰러져 간 아픔이 있는 산이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으로 쫓기게 된 남로당 소속의 군인들이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와 ‘빨치산’ 유격대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뒤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옮기지 못한 인민군과 합류해 본격적인 투쟁을 하고 지리산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토벌군인 국군과 빨치산의 무시무시한 싸움터가 돼버린 셈이다.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그들은 서로 보복하는 싸움을 펼치게 되고 피가 피를 씻는 마구 죽이는 일이 되풀이되어 좀처럼 씻기 어려운 역사의 응어리를 남기게 되었다. 이때 죽어간 사람들만 해도 세계 유격전 사상 보기 드문 엄청난 수를 기록한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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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섬진강

 

 

 

  왜 우리는 지리산을 찾아왔는가? 이현필 선생의 동광원 운동 발상지가 바로 남원 지리산 골짜기 서리내와 갈보리 동산이기 때문이다. 이현필이 영성운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이 지리산이요, 그가 맨발로 걸어 다니던 길이 지리산 구석구석을 잇는 산길이었고, 그는 섬진강 맑은 물을 맨발로 건너 다녔다. 섬진강은 전북 마이산으로부터 지리산을 싸고 굽이굽이 감돌면서 남해 노량바다로 흘러가는 길이 220km의 생명줄이다. 이 섬진강은 우리나라 5대 강 가운데 하나로 다른 강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큰 들을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큰 도시를 끼고 흐르는 것도 아니다. 작은 들과 마을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골짜기를 굽이굽이 흐른다. 널따란 논 마지기, 높은 건물, 공장 하나 없이 강과 더불어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는 섬진강 마을을 이현필은 맨발로 걸어 다녔던 것이다.  
  우리 일행이 탄 차가 수지면 수지교회 앞에 이르자 올 78세 되는 김승명 장로가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한다. 그는 이현필 선생을 따라 나섰다가 큰 감동을 받고 수지 장로교회를 세우기까지 한 구도자로서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일터에서 돌아와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는 먼저 서리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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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필 운동의 발상지 서리내
뒷줄 오른쪽부터 김승명 장로, 오북환 장로

 

 

 

 서리내란 이름은 선인래(仙人來)에서 왔다고 한다. 신선이 내려온 곳이란 뜻이다. 서리내 산등성이에 서서 바라보면 한편으로는 지리산 반야봉이 멀리 건너다 보이며 앞으로는 전남 광양 쪽으로 백운산이 구름 속에 내다보인다. 노령산맥의 견두산 줄기가 느른하게 흘러내린 선경이다. 산골짜기 앞의 왼쪽 오른쪽을 상무, 하무라고 부르고 그 너머는 학재가 있고, 또 그 너머엔 백운천이 고요히 흐르고 있다. 사방 전망이 탁 터진 이곳은 이름 그대로 서리내(仙人來)의 선경이다. 선경이라서 이현필 선생이 들어오기 전에도 황생원이라는 도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산신령을 만났다면서 수염도 깎지 않고 여자를 멀리하고 비린 것을 먹지도 않고 도를 닦고 있었다고 한다.
  서리내, 이곳이 바로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요, 산실이요, 말구유였다. 이현필은 이런 좋은 곳을 그의 수도의 요람으로 선택하였다. 해방 이듬해부터 이현필은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을 거느리고 서리내에 들어와 수도를 시켰다. 그들은 대부분 이현필 선생에게 감동되어 집을 나온 젊은이들이었다. 이 서리내 깊은 선경 속에서 그들은 이현필 선생의 인격적 감화를 받으면서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노래를 부르며 훈련을 받았다. 한번 훈련받는 기간은 15일이었다. 보름 훈련하고는 쉬었다가 또 보름을 하였다. 이현필은 뒷산에 자주 올라가 기도했다. 이현필은 남원 목공소를 떠나 이 서리내에 숨어서 하나님만 부르며 엎드려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6ㆍ25가 터지기 전에 이현필은 이 산에 엎드려 있으면서 지리산이 몇 번이나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도 하고, 그가 종일 엎드려 일어나지 않으니 산에 사는 까마귀 떼들이 죽은 송장인줄 알고 모여와 까악까악 울어대며 부리로 쿡쿡 쪼아댔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리산 줄기 서리내 산에는 늑대 사슴 멧돼지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잔등에 이끼와 잡초가 돋은 큰 멧돼지가 새끼들을 데리고 와서 밭에 심은 곡식을 파먹어서 이현필의 어린 제자들이 이 짐승들을 쫓느라고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 산에는 뱀과 독사들도 우글거렸는데 이현필은 맨발로 다녔다.
  서리내에서 이현필은 쌀가루에다 물을 타서 생식을 했다. 그것조차도 어떤 때는 며칠씩이나 굶고 지내기도 하였다. 소녀들도 하루 한 끼씩만 먹었으니 어린 제자들은 수도한다고 하였지만 사실 먹고 싶은 생각 밖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먹는 것이라곤 풀뿌리와 쑥이 주식이었다. 한번은 어디서 쌀이 생겨서 이현필이 소년 소녀들에게 쌀밥을 해 먹이라 해서 오래간만에 하얀 쌀밥을 먹게 내버려 두었더니 먹고 나서 모두 밥에 취해 쓰러져 누워 버렸다. 이현필은 이런 모습을 보고 “그것 봐. 쌀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겠나?”하고 말했다.  
  보름씩이나 서리내 산에 살던 소년 소녀들이 자기 집 생각이 새록새록 피어오를 때는 이현필은 그 마음을 헤아려 “집 생각 간절하지?”하면서 친히 그들을 데리고 서리내를 내려왔다. 산을 넘어 이 마을 저 마을 그들의 집집을 찾아다니며 데려다 주고는 자기는 다시 수십 리 산길을 넘어 서리내로 걸어갔다. 며칠이 지나서 다시 이현필은 집집마다 심방하면서 그들을 데리고 서리내에 와서 또 훈련을 시켰다.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던 남원 서리내골이야 말로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처녀 6~7명과 소년 어머니들 몇이 서리내에 모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서리내 동광원의 효시이다. 이곳에서 행해진 교육은 보름씩 산중에서 행해졌으며 경건생활과 노동이 엄격하게 병행되었다. 이현필은 순결사상을 강조하다 보니 남녀유별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철저하고 엄격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거룩한 땅 서리내 동산에는 옛날 살던 화전민도 없고, 도를 닦던 황생원도 온데 간데 없고, 나무꾼들마저 다니지 않아 찔레와 억새풀이 길을 메웠고, 이현필이 수도하고 가르치던 그 옛 집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우물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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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내

 

 

  동광원의 발상지이다. 이현필 선생으로부터 어머니들이 성경공부를 시작하여 차츰 자녀들을 데려오면서 1947년 9월 1일 소년, 소녀 14명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서리내에서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고 불리우는 동산이 있다. 이곳 또한 서리내와 함께 수도의 도장이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강해를 들었으며 특히 이현필의 순결사상을 이어 받은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갈보리는 서리내와 함께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훗날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갈보리는 전북 남원시 수지면 갈촌 마을 뒷벌이다. 거기서 더 큰 길 쪽으로 나오면 홍실(호곡리)이란 큰 동네가 있다.  천마산과 견두산 사이로 느른히 펼쳐진 산자락이다.
  이 동산에는 갖가지 나무가 우거지고 연못도 있고 커다란 대나무 숲이 있었다. 이곳을 갈보리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옛날 이 일대는 칡넝쿨이 우거진 비탈진 초원이어서 사람들이 ‘갈벌’이라고 불렀다는데 그것이 어느새 ‘갈보리’로 불리어 졌다고 한다. 이 동산은 마을에서 10분쯤 걸리는 호젓한 한 곳에 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농삿집이다. 이 갈보리는 이현필을 따라 나선 김금남양(현 동광원 남원 본원장)의 작은 아버지의 농장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이곳에 농장을 마련하고 그 안에 저수지를 파고 밤나무, 대나무, 감나무 따위를 울창하게 심고 논을 만들었으며 농장 한편 구석에 아늑한 집 한 채를 농막으로 지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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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동산에서

앞줄 가운데 김금남 원장, 뒷줄 가운데 오세휘 장로


 김금남 수녀는 동광원 수녀들 가운데 제일 먼저 수녀생활에 나선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 강남순이 먼저 이현필을 따라 나섰고, 그 뒤 김금남양도 남원읍에서 살다가 자기 앞날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끝에 어머니와 함께 작은 아버지의 농장인 이 갈보리 집에 아버지의 반대를 피해 와서 100일 기도를 드렸다. 이런 일 때문에 이현필이 이곳을 드나들면서 자주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됨으로 이곳도 서리내와 함께 수도의 도장이 되었다. 갈보리는 이현필이 전도를 하며 남원 일대의 신자들이 모여 성경공부와 주일예배를 드리던 곳이다.
  그 무렵 갈보리는 가출인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였다. 이현필을 따라 집을 나온 남녀들이 부모에게 쫓겨날 뿐만 아니라 다니던 교회에서까지도 이단자를 따라 다닌다고 핍박을 받아 쫓겨난 사람들이 이 갈보리에 모여 들었다. 처음엔 주로 가정부인들과 처녀들이었다. 30대 청년 이현필이 한번 남원 일대를 지나가면 교회에서는 부인들이 자기 교회를 버리고 따라 나섰고, 집집에서는 처녀들이 집을 나와 이현필을 따라 나섰다. 그들은 남원 시내에서 20리나 떨어진 갈보리 외딴집에 모여와 숨어 지냈다. 어쨌든 이현필이 한번 지나간 자리에는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남원 일대 집집에는 소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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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광한루 앞에서
왼쪽부터 김준호, 오북환, 이재갑

 

 

 

  남원 광한루 옆에서 삼일 목공소를 꾸려나가던 오북환은 목공소를 집회 장소로 내놓고 목수일 따위는 집어치우고 이현필을 따라 다녔다. 강남순은 자기 딸 김금남까지 데리고 이현필을 따라 다녔다. 삼일 목공소에 모여 성경을 가르칠 때 이현필은 청년 비구승 같은 옷차림에 머리는 삭발하고 거의 말이 없었고 사람 보는 데서 음식을 먹는 법이 없었다. 한번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밤늦도록 계속하고, 중간에 너무 힘들면 잠깐 쉬면서 무우를 깎아 먹고는 또 성경공부를 계속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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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목공소

 

 

  이현필 선생이 처음 전도를 시작하여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오북환 집사가 운영하던 삼일 목공소에 남원교회의 신자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1943년 이곳을 방문하여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청년 이현필에게 반한 남녀가 갈보리 숨은 초가에 모여서는 뒷산 서리내에 엎드려 있는 이현필에게 알려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이현필은 맨발로 그 산을 내려와 오두막 방에 앉아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가르쳤다. 서리내에서 밤을 새고 아침에 내려온 이현필의 잔등에는 서리가 하얗게 덮여 있었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아침 햇볕에 등을 돌려대고 녹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사도 바울의 영적 체험의 절정인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도다”(고후5:13-15)라고 한 것과 같은 사랑의 강권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거지 옷에 바싹 야윈 청년, 삭발한 머리에 언제나 수염도 깎지 않은 이현필이었다. 이현필을 따라 나선 사람들은 이 갈보리 동산에 모여서 늘 예배드리고, 성경 말씀을 듣고, 순결사상을 가르침 받았다.
  이현필이 서리내산에서 기도하다 내려와 또는 갈보리에서 성경을 가르치다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갈보리 산에서’란 노래이다. 이 노래는 동광원의 주제가가 되어 버렸다. 동광원 성가 모음 제 1장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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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동산에 있었던 옛집
왼쪽부터 정인세 원장, 김준호 선생, 김승명 장로, 오북환 장로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는 귀중하신 보배피를 흘리사
                          구원받은 참 길을 열어놓셨느니라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아 십자가 아 십자가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그와 같은 끝없는 사랑을 알고서는
                          영과 육을 아울러 산 제물로 바치며
                          주님 기뻐하시는 종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 보배피를 저에게 부어 주사
                          지금으로 이 몸을 거룩한 성전 삼아

                 영원무궁하도록 삼아주심 빕니다! 

  이토록 애처로운 노래를 부르는 이현필의 모습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갈보리에서나 서리내에서 모이면 이 노래를 불렀다. 모인 사람들은 통곡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노래 곡조도 눈물겹고 슬픈 가락이지만 그들 처지가 핍박받고 집을 나온 신세요, 또 그 장소가 갈보리인지라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부르니 감격과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세상이고 학교고 다 쓸 데 없다. 예수님과 사랑과 우리 선생님뿐이다”하며 목놓아 통곡하였다.

  이현필은 장성한 남성으로서 당연히 가질 여자를 안고 싶은 욕정을 놓았고, 배불리 먹고 싶은 욕심을 접었고, 추우면 따뜻한 곳에 눕고 싶은 마음을 비워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듬고 연약한 이의 고통을 대신해 십자가에 오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사랑에 통곡했다. 밤새 한데서 기도하느라 고드름처럼 꽁꽁 얼은 그의 모습에 그들은 ‘갈보리산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찬송을 하는 그들의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였다. 우리의 죄를 아파해 가슴에서 솟구치는 애통의 피였고, 그들의 죄값을 대신해 달게 받는 헌신의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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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동산에 피어있는 들꽃들
옛 집터였음을 증명하는 돌들이 보인다.

 

 

 

  그러나 눈물과 기도, 영성과 말씀의 갈보리 동산도 옛날의 집터에는 잡나무와 가시나무가 우거져 있어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이름 모를 들꽃들만 피어 있어 고요히 향기를 날리고 있다. 우리들의 길잡이 김승명 장로가 자기 어릴 때 일을 되돌아보며 여기 저기 찾아가 이야기를 해주어 겨우 여기가 갈보리 옛터로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김승명장로가 무얼 찾았는지 흥분하여 소리친다. “여그가 갈보리 옛 집터임이 분명하외다! 여기 돌 좀 보시구려!” 김승명 장로는 감회가 깊은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도 이현필 선생이 부르신 ‘갈보리 산에서’란 찬송에 반해 순창학교 교사 일을 하다가 이 선생님을 따라 나섰지요.”
  서리내에서 산 쪽으로 40리쯤 더 들어가면 오감산이 나온다. 이현필의 제자 김광석과 그 밖의 여제자가 기도하던 산이다. 절벽산이다. 김승명 장로가 오감산에 얽혀져 있는 한 토막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주었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였다.

  한번은 이현필의 제자 김광석 집사가 지리산 오감산 기도막에서 특별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현필에게 누가 떡을 가져왔다. 이현필은 오감산 속에서 기도하고 있는 제자 김광석이 생각났다. “겨울 눈보라 속에 갇혀 뭘 먹고 지낼까?” 이현필은 떡을 수건에 싸서 옆구리에 끼고 맨발로 40리를 걸었다. 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 기도하는 제자가 놀랄까봐 동틀 무렵 조용히 찬송을 불렀다. 김광석은 천사가 온줄 알고 문을 열고 절을 계속하며 나왔다.
  “김공, 얼마나 고생하시오!”하는 소리에 쳐다보는데 이현필 선생이었다. “아니, 이 밤중에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따스한 물을 끓이시오.” 이현필은 겨드랑이에서 가지고 간 떡을 꺼내면서 “잡수시오. 시장하시겠소!”하고 권했다.  
  제자 김광석은 이현필 선생 이야기를 할 때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이야 말로 예수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선생님을 볼 때 나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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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산 기도처

사람의 왕래가 없어서 수도생활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으로

조동록씨의 수도생활을 시작으로 한두명씩 수도생활을 하였고,

1949년 김광석씨의 오랜 수도생활을 마지막으로 이곳의 수도생활은 끝이 났다.

 

  이현필은 그렇게 오감산까지 무려 40여리 리를 걸었다. 오감산 산막에서 홀로 수도 중인 제자가 눈속에서 얼어죽지 않았을까 밤낮으로 기도하다가 몸소 눈밭을 헤치고 그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이현필은 대중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영혼을 우주로 알고, 하나님으로 알고, 마치 살아 돌아온 예수님을 영접하듯 했다. 그 한 영혼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기적인 자신의 욕망을 회개했고,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고, 삶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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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 찾아서 맨발로 다니던 섬진강 여울

  이현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화신이었다. 하나님의 화신이 예수 그리스도이듯이 우린 예수 그리스도의 화신이어야 하리라. 우리의 인격 속에 실제로 예수가 살아 움직이는 인격을 보는 날이 와야 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속에 다시 살아야 한다. 나사렛 예수의 얼, 정신이 우리의 실생활 속에 성육신 되어야 한다. 지금 이 오감산은 너무 깊은 산 속이어서 찾아갈 수도 없고 제자들도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한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이현필을 ‘금욕주의자’또는 ‘산중파’로 부르며 비웃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찾아와서 보고 들은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고 소리쳤다. 이현필은 지리산 봉우리마다 가득 쌓여 깨끗해진 눈경치를 바라보며 수도하기 위해 세상도 청춘도 모두 바친 제자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아, 십자가! 십자가의 길 뿐입니다!”하고 호소하곤 하였다.
  지금 지리산에 저녁놀이 지고 있다. 산허리를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이며 서쪽으로 가라앉는 저녁 해는 더 이상 이 땅의 것이 아니었다. 푸른 시인의 눈물 같은 맑고 순수했던 영인 이현필의 고뇌를 안고 망설이고 있을 때 끝없는 하늘 끝 가운데로 저녁놀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한 점 티끌도 남기지 않는 태고의 어둠 속에서 소슬 바람이 한 차례 울어댔다. 아름다운 내일을 꿈꾸고 살뜰한 소망을 담은 꿈의 고향에 다다른 것처럼 한없이 타오르는 보랏빛 까치놀 울음이 노을빛 받고 너무도 행복하여 내려가는 우리들을 더욱 밝은 빛으로 일어나 서산머리에서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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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저녁놀


                  내 앞엔 오직 하나의 길
                  갈보리산 오르는 길
                  비아 돌로로사로 가는 길
                  십자가 지고 땀과 피에 젖어
                  휘청거리며 가시와 돌밭 길로 걸어가신 님의 길

                  동광원 사람들이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참 목자 이현필 선생 만나
                  한결같이 부르짖었던 기쁜 소리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뚜렷하게 들려온다

                  병약하고 맨발 벗은 이현필 선생
                  나무 한 짐 간신히 지고 바위와 자갈길로
                  가시와 찔레 우거진 숲 사이로
                  두 다리 후들후들 떨면서 그렇게 걷고
                  제자들도 그렇게 스승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하늘 높이 솟은 종탑 아래 웅장한 그레고리안 성가
                  화려한 남녀 신도들 가득한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
                  아, 님의 발자국이 전혀 보이질 않네
                  예수는 서리내 찔레밭길 독사가 우글거리는
                  억새풀 속에 맨발로 다니며 “아 십자가, 아 십자가!”
                  통곡하며 부르는 예수였다
                  밤새 서리 맞으며 엎드려 부르는 예수였다
                  수염에 고드름이 달리며 목메어 부르는 예수였다

                  아, 나는 길을 찾았습니다
                  이것이다 바로 이 길입니다
                  님이 그렇게도 피 흘리시고 땀 흘리고 통곡하시며
                  홀로 밟고 가신 그 길
                  천리고 만리고 비바람 눈보라 몰아쳐도
                  나 따라가리이다 나 걸어가리이다

                  아, 아! 난
                  지리산 서리내와 갈밭(갈보리)에서
                  나의 님 예수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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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원 성가모음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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