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동광원을 찾아서 > 추천글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추천글

7. 동광원을 찾아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4 14:10 조회2,656회 댓글1건

본문

7. 동광원을 찾아서


  

​  독일의 신학자 하르낙(Harnack) 교수는 “수도원은 교회가 박해받을 때 지켜주고, 세속에 빠질 때 건져주었고, 이단 사교가 일어날 때 바른 신앙을 지켜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세 교회가 생명력이 사라지고 어두워졌을 때마다 베네딕트, 버나드, 프란치스코,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고 도덕적 타락을 막아주고 정화시키는 영적 수원지가 되어 세속 교회에 신령한 물줄기를 대주었다. 수도원은 세속 속에 있는 교회의 영적 수원지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세상에 종교치고 수도원이 없는 종교는 없다. 불교도 원불교도 가톨릭도 그리스 정교회도 수도원이 있는데 우리 개신교만 수도원이 없다. 수도정신이 없이는 영성생활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는 기도원은 많은데 수도원이 없다. 수도원 없이 교회와 예배만 가지고 종교생활을 해 나가려고 하니 신자들의 영성이 메마르고 세속에 깊이 빠지고 경건을 잃어버리고 교양도 없고 천박해지고 말았다. 심각한 영적 위기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를 구원하기 위해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수도원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수도원을 세우고 그 수도정신을 세속 속에서 실천해 나가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이런 심각한 현실 앞에서 고뇌하던 필자는 한국 개신교 토박이 수도공동체라고 일컬어지는 동광원(東光園)에서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있었다. 세상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어 버린 어느 날 우리들 일행은 구도자의 심정을 가지고 동광원이 시작된 영감어린 땅 빛고을 광주로 내려갔다. 우리가 내려간 곳은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 2동 132번지에 자리잡은 사회복지 법인 귀일원(歸一院)이었다. 늦은 봄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100년 넘어 보이는 은행나무가 그 푸르름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는 귀일원의 작은 방에는 고승처럼 생긴 한 노인과 청년처럼 혈색이 좋은 또 다른 노인이 우리를 맞아들였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26_42.JPG

  

귀일 정신요양원

 

  고승처럼 생긴 노인은 지금은 고인이 된 베드로라는 별명을 가진 오북환 장로였고, 혈색이 좋은 노인은 김준호 선생이었다. 당시 오 장로는 귀일원의 이사장이고 김 선생은 귀일원의 이사였다. 귀일원은 정신질환자들과 지체인들,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자원 봉사자들이 가족처럼 모여 사는 공동체이다. 
  현재 100여명의 중증 여성 정신 질환자들이 살고 있는 1, 2층의 방 20여개는 깔끔했고, 창문을 막는 창살은 한 곳에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이곳에서 36년째 일하고 있는 나숙자 총무는 “귀일원이 내 집이고 원생들은 내 가족”이라며 “가정을 가지면 남을 돕기가 어려울 것 같아 결혼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곳 원생들은 직원들을 ‘언니’, ‘이모’라고 부른다. 직원들은 정부에서 나오는 100만원 안팎의 월급을 전부 운영비로 내놓고 환자들과 숙식을 함께 하고 있다. 원생들이 내의 포장 작업으로 번 돈은 개인 통장에 모두 적립해 주고 있다. 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나간 사람이 아직 한 명도 없다는 귀일원은 보건복지부가 처음 실시한 정신 요양시설 운영 평가에서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돼 복지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 귀일원은 정신 질환자들을 보호하는 귀일 정신요양원과 정신 지체인의 생활시설인 귀일 민들레집 그리고 장애인 직업 재활시설인 귀일 향기 일굼터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26_54.JPG

 

 

 귀일 복지관ㆍ귀일 민들레집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의 제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귀일원이다. 이 귀일원의 모체가 곧 동광원이라고 할 수 있다.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을 따르는 무리들에 의해 1948년부터 자연스레 형성된 기독교 공동체이다. 이현필은 그의 스승 이세종의 영향을 받아 오직 순결한 몸과 마음으로 예수를 따르기로 하였다. 그 후, 이현필은 개인적으로 깊이 기도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갔다. 이 모습을 보고 참으로 예수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이 이현필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을 동광원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광원이란 이름은 1950년 여순 반란사건으로 생긴 고아들을 위해 만든 고아원 이름이다. 6.25 전쟁으로 계속해서 고아들이 늘어가자 이들을 동광원으로 받아들여 당시 동광원의 아이들은 60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동광원은 주의 사랑에 붙들린 이현필 선생이 버림받은 이웃, 고아, 걸인, 나그네들을 고난 가운데 사랑으로 돌보려고 세운 수도공동체인 셈이다. 이현필 선생이 화순과 남원에서 훈련시켜 두었던 수녀들과 제자들을 이곳 광주로 보내 방림산 자락에 움막 짓고 고아들을 돌보게 하여 순결과 노동, 수도와 선행이 조화를 이룬 순결 신앙인들의 한국 개신교 맨처음 토박이 수도공동체를 이름하여 동광원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귀일원이라 하여 오갈 데 없는 정신 장애인들과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자기 집으로 알고 수도자 봉사자들과 함께 사는 곳으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자. 한 맘으로 살자. 하룻밤씩 재워 보내자”는 이현필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세워진 사랑의 동산이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26_68.JPG

 

 
광주 양림동 고아원

 

  우리들이 동광원의 분원들 가운데 귀일원을 택했던 것은 그곳에 이현필 선생의 직계 제자인 김준호 선생과 또 한 사람의 제자인 오북환 장로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동광원 공동체의 족보를 따지자면 이현필 - 오북환 - 김준호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곳에서 만난 오북환 장로는 아흔이 넘은 고령인데도 맑은 얼굴, 고승 같기도 하고 어린 아이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오북환 장로는 남원 광한루 옆에서 삼일 목공소를 꾸려나가다 이현필 선생에게 반하여 목공소를 집회소로 내 주고 목공일을 집어 치우고 이현필을 따라나선 분이다. 그는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 동광원의 설교자로 성경을 가르친 95세에 세상을 떠난 베드로와 같은 수제자로 순결사상을 강조하는 동광원 식구 누구나 존경하고 사랑하는 지도자이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26_79.JPG

 

 

 오북환 장로
벽제 계명산 수녀원에서 강론하고 있다

  김준호 선생은 이현필을 학생 때부터 따라나선 해남 출신의 이현필의 직계 제자이다. 그는 이현필을 가장 가까이 한 방에서 모셨던 그 누구보다 가장 사랑 받았던 요한과 같은 신실한 제자이다. 맨발로 밥 빌어먹으면서 걸인들 친구 되고 폐결핵에 걸려서도 결핵환자들 돌보다가 80세의 총각이 된 사랑의 사도이다.
  김준호가 스승인 이현필의 인품에 사로잡힌 것은 23세 때였다. 전남 해남에서 의사가 되려고 시험공부를 하던 가운데 종소리 듣고 마음이 끌려 찾아간 곳이 수동교회였는데 이곳에서 이현필 선생을 처음 보게된 것이다. 귀일원 방안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 선사 같기도 한 그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현필 선생님과 오북환 장로님이 추운 겨울 새벽에 오셨는데 머리를 깎고 속옷을 입지않은 채 바지저고리를 걸치고 있었어요. 양말도 신지않았더군요. 종교인 냄새는 전혀 안 나고 마치 머슴 같았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강대 위에 오르지 않고 마룻바닥에 앉아서 설교를 하시는데 꽃병에 든 국화꽃을 보고 선생님은 몹시 떨리고 슬픈 목소리로 ‘꽃은 핀 자리에 그대로 둔 채 봐야 합니다. 앞으로 꽃을 꺾지 마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는 의사가 되려는 공부를 포기하고 일생을 이 분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을 기다리고 갈망하던 김준호는 이현필 선생의 첫 마디에 그냥 머리 숙이고 거꾸러졌다. 이렇게 해서 김준호는 그때부터 이현필 선생의 제자가 되어 따라 나섰던 것이다. 김준호는 그런 선생의 모습을 보면서 “꽃을 저만큼 사랑하는데 사람에 대해서는 어떠하랴.”는 생각에 그 길로 이현필을 따라 나섰고 한평생 그의 제자로 살았다는 얘기였다. 훤칠한 키에 마른 체구, 하늘색 한복을 걸친 김준호 선생은 고령인 탓에 힘이 없어 보이면서도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신비한 기운이 그에게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26_93.JPG

 

 

  광주 귀일원에서 강론하는 김준호 선생 

  이현필 선생의 제자 김준호 선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동광원의 원래 목적은 관상수도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아와 과부가 많아지자 그들과 함께 살면서 돌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은 동광원 영성의 기초가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이 말씀은 동광원의 정신을 요약한 것이다. 동광원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육체적인 일(선행)과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기를 지키는 정신적인 일(수도)이 조화를 이룬 공동체이다. 동광원은 밖에서 보면 사회사업 단체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순결 신앙인들의 수도단체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고아와 과부 같은 고통당하는 이웃을 돌보는 생활이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동광원의 삶은 세상 속에 있지만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고 주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수도공동체 생활인 것이다.
  현재 동광원 식구들은 전국에 약 80여명 가량이며 남녀 모두 독신생활의 공동체 형태로 살고 있다. 주로 전라도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원 본원, 광주 귀일원 분원, 도암 분원, 벽제 계명산 분원 등이 있다. 이 분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첫째 부류는 산골짜기에서 노동하면서 수도하는 분원들이며, 둘째 부류는 광주 귀일원과 같이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분원들이다. 광주의 소화 자매원, 전북의 진달래집도 이 부류에 속한 동광원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동광원 본원은 전북 남원에 있다. 1947년 남원에서 시작한 수도 공동체가 1948년 광주로 이주해 있다가 1980년 정인세 선생의 주관으로 공동체가 최초로 시작되었던 전북 남원시 대산면 운교리의 토지 147,400㎡를 사들여 교회와 집을 짓고 이전하면서 동광원 본원이 세워졌다.

  동광원에서는 해마다 1월에 ‘공동체 가족 총회’를 갖고, 8월에는 동광원에서 생활하다가 세상으로 나가 생활하는 가족들의 공동체 모임인 ‘삼온회’ 회원과 함께 ‘하계 수양회’를 연다. 동광은 가족들은 이 행사들을 통해 이현필 선생의 거룩한 뜻과 동광원 설립 정신 그리고 박해와 굶주림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겪었던 고난의 일들을 되새기며 오직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삶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동광원 가족은 일생을 결혼하지 않고 순결을 지키며 동광원 분원과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에서 불우한 이웃을 돌보거나 일한다. 나이 들어 활동할 수 없게 되면 이곳 본원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 본원에 있는 동광원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의 삶을 후대에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선생의 뜻과 삶에 공감하고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2004년에 이 선생의 기념관을 본원 안에 세웠다.

  동광원의 명칭을 2005년 4월 17일 ‘기독교 동광원수도회’로 변경하였다.

  동광원 공동체 가족은 가장 많았을 때에 총 220여명이었으나 현재는 동광원에 40명,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에 26명을 합하여 총 66명의 가족이 생활하고 있다. 동광원이 설립된 후로 이들 중 84명이 소천하였고 세상으로 나간 70여명 중 삼온회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는 모두 15명이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27_06.JPG

 

 동광원 본원

(전북 남원시 대산면 운교리 862-85, ☎ 063-625-9754)

 

  전남 화순에 도암 분원이 있다. 전남 화순군 도암은 이현필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1925년 12세 때 나주시 영산포 일명 관파교회에서 주님을 영접한 뒤 1927년부터 도암 등광리 숨은 성자 이세종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 하나님 사람의 생활을 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곳이다.

  도암 문바위 마을 뒤의 화학산 골짝 중턱에 자리한 도구밖골에서 이세종 선생이 수도하셨다. 이때 이현필 선생이 이곳을 드나들며 이세종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세종 선생은 수도처를 더 깊은 산중의 각시바위로 옮기게 되었다.

  1943년 ‘수레기 어머니’가 아들 이원희를 데리고 이곳 도구밖골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 이곳은 최초의 공동체 수도처가 되었다. 이상복 정한나 정귀주 등이 이곳을 수도처 삼아 오갔으며 오북환 김준호 조동록 강화선 강차남 김금남 이인옥 오세휘 등 30여 명이 공동체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은 1947년부터 도구밖골에 인접한 이현필 선생의 형이 살던 도암 중촌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수도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현재의 동광원 도암 분원이다.

  공동체 가족들은 1949년부터 도암 분원에서 가까운 봉하리 청소골 초가 3칸을 사들여 고아 8명을 수용하고 돌보았으며, 1954년 광주 고아원 동광원이 해산된 후 동광원을 찾아온 고아 55여 명을 거두어 도암 대포리 산 밑에 움막을 치고 돌보았다.

  화순 도암 분원에서는 한때 60여명이 성경 공부와 기도 생활을 하며 ‘성경 공부반’을 운영하고 ‘수양회’를 열기도 하였다. 현재는 4명의 공동체 가족이 남아 수도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27_18.JPG

 

 

도암 분원

(전남 화순군 도암면 호암리 679번지, ☎ 061-375-0958)

 

  경기도 고양시 벽제에는 계명산 분원이 있다. 계명산 분원은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계명산 자락에 있다. 정한나 집사가 1957년 3월 5일 경기도 능곡 오원에서 살던 이희옥 박공순 자매들과 함께 계명산 앵무봉에 처음 들어가 초막을 짓고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던 여성들만의 수도처이다. 이들은 모두 이현필 선생의 지도를 받아 수도하였다.

  정한나 집사는 1956년경 서울 YMCA 현동완 총무 정인세 원장과 함께 계명산에 따라갔다가, 이곳의 산세가 상서롭고 수도생활을 하기에 좋아서 ‘도토리에 맹물을 끓여 먹더라도 여성들만으로 자립하는 수도원을 짓고 살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이 솟구쳐 1957년 3월 5일에 뜻을 같이하는 자매들과 이곳에서 수도를 시작하여 한때는 40여명의 수녀들이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1기에 10명 내외의 자매들을 1년씩 5기에 걸쳐 오북환 장로가 강사를 맡아 가르쳤다.

  계명산 분원은 이현필 선생이 소천하신 곳이다. 이현필 선생은 이곳에서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다”라고 하시며,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 51세를 일기로 “오! 기쁘다, 오 기쁘다” 하시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에 “앞으로 이곳은 의인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길이 미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현재 성화된 이현필 선생 신앙생활의 발자취를 연구하고 추모하기 위해 기독교 목회자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으며 동광원 가족들은 이곳에서 2개월에 1회씩 엄두섭 목사를 주강사로 ‘동광원 영성 관상 집회’를 열고 있다.

  현재 이곳 계명산에는 5명이 수도생활을 하며 동광원 분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27_32.JPG

 

 

벽제 계명산 분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3동 산1번지, ☎ 031-962-9314)

 

 

  동광원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각 분원들은 대체로 농사를 지으며 벌을 치는 일을 하고 있다. 어느 분원이 부족하면 서로 작물을 보내어 나눈다. 이들은 하루 두끼의 채식을 하면서 최소한의 경제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먹는 것만 해결되면 욕심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하루 두 번의 기도 모임과 주일 오전 오후 예배가 있다. 연중 행사로는 남원 본원에서 해마다 1월 초와 8월 중순 두 차례에 걸쳐 약 1주일씩 집회(동광원 수양회)를 갖는데 이때가 동광원의 모든 식구가 모이는 날로 엄두섭 목사와 정인세 원장이 주로 강의를 맡았으며 가끔씩 유영모 선생, 최흥종 목사 같은 이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27_46.JPG

 

 

남원 동광원 수양회 마치고
강사: 김흥호 교수 

  이들은 손님이 오면 그냥 밥먹여 주고 소박한 사랑으로 대한다. 동광원은 수도생활을 주로 하는 곳이기에 각 분원들은 모두 산골에 자리잡고 있으며 집들은 여느 시골 사람들이 사는 집과 다름이 없다. 동광원이란 간판도 달려 있지 않고 경계를 짓는 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어떤 정결함, 고요함, 평온한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동광원 예배는 보편적인 개신교 예배처럼 찬송 기도 말씀 강론으로 되어 있다. 기도는 침묵으로 드리며 찬송은 높은 소리로 크게 부르지 않고 느리고 고즈넉이 부른다. 성경 강론을 들을 때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무릎을 꿇는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사용하는 독특한 찬송 곧 ‘동광원 성가모음’이란 찬송을 갖고 있다. 주로 이현필 선생, 유영모 선생, 현동완 선생, 김준호 선생이 지은 노래들인데 매우 한국적인 정취가 있는 가락들이다. 요즈음은 프랑스 떼제 공동체의 찬양도 함께 부르고 있다.
  동광원에는 지금도 수도공동체로서의 규칙도, 제도도, 약속도 없다. 조직도 회원 자격도 없다. 그저 독신이면 된다. 이현필 선생은 공동체의 규칙 만드는 것을 꺼려했고, 곁의 사람들이 규칙을 만들자 해도 반대하고 자연 그대로 살았다. 따라서 동광원에는 일반 수도원과 같은 조직도 없고 울타리도 없다. 비교파 비조직 비형식이 그들의 외형적인 특성이다. 한국적인 상황 속에서 남아 있으려면 이제부터라도 조직과 제도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필자가 물으니 이채영 원장(지금은 고인이 됨)이 이렇게 대답한다. “우린 외형적인 모습에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내적 생명이 계속 살아서 누구의 가슴에든지 심겨져서 열매를 맺는데 있습니다. 이미 그 빛은 뿌려졌고, 이 빛이 누군가의 가슴에 가서 뿌려지고 심겨지고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동광원 사람들은 보이는 것들 없어지는 것들 곧 조직과 제도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생명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들에게 큰 강점이 되었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27_58.JPG

 

 
벽제 계명산 분원에서 일하는 수녀들 

  동광원 같은 모임은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다고 본다. 이제 동광원은 한국 개신교 수도공동체로서는 맨 처음으로 가장 오랜 60년이 넘는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 동광원은 서구 신학이나 서양 선교사 등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경 말씀을 그대로 따르려는 한국 사람들의 토박이 수도공동체였다. 대천덕 신부는 한국의 기독교가 너무 서구화되어 있고, 모든 것을 서구 신학의 잣대로 재려는 경향을 아쉬워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동광원 같은 한국인의 자생적인 공동체는 매우 귀하며 계속 발전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1948년을 동광원의 원년으로 삼는다면, 2009년인 올해는 동광원의 61주년이다. 그 사이 동광원은 60대 노인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노령화되었다. 지난 60여년간 동광원과 이현필의 영성은 많은 영향을 끼쳐왔으며 개인적으로 감화를 받은 이들은 셀 수 없지만, 특별히 수도영성적 차원에서 이현필의 정신을 계승하여 실천한 대표적인 수도공동체들이 있다.

  첫째, 현재는 장로회 신학대학교의 영성훈련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기도 포천의 은성수도원이 있다. 은성수도원장이었던 엄두섭 목사는 젊은 시절 동광원과 인연을 맺은 이후, 이현필과 동광원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써서 교계에 처음으로 동광원을 소개하였다. 그는 이현필을 알고부터 머리를 밀고, 양복을 벗고, 양말을 신지 않는다. 고기를 먹지 않고, 아내와 분방(分房)을 하고, 침묵기도를 한다. 혼자 독수도(獨修道)를 하기 위해 회갑의 나이에 포천 운악산 골짜기에서 바위를 굴려가며 기도했다. 수도 전통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던 시절, 수도원을 짓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많은 오해를 받고 어려움을 겪었으며, 후배들에게 수도원을 맡기고 80세에 은퇴하였으나 그의 은퇴 이후 은성수도원은 장신대 영성훈련원이 됨으로써 수도원으로서의 기능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엄두섭 목사의 영향으로 성빈수녀원, 나실인수도원, 신빈수도원 등 다수의 개신교 수도공동체가 생겼다. 은성수도원 입구에 걸려있는 “전심으로 나를 찾으면 만나리라”는 현판의 글씨는 아직도 선명하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48_44.JPG

 

  

은성수도원

 

  둘째, 목포의 디아코니아 자매회 역시 이현필과 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디아코니아 자매회 창설 당시 한산촌 폐결핵 환자 요양시설과 수녀원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평생 의료봉사를 한 여성숙 선생은 이현필이 제중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부터 그의 주치의였다.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는 여의사 여성숙 선생의 깊은 사랑과 믿음의 열매로 독일의 디아코니아 자매회를 본받아 설립한 미혼 여성들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노동과 봉사로 일생을 헌신하는 수도원 같은 곳이다.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에 산야 3만평 위에 비둘기집 같은 돌집 몇 채를 지어놓고 여성숙 원장과 언님들이 살고 있다.

  디아코니아 자매회는 현재 천안 병천면 옛 한국신학연구소 자리에 모원(母院)을 두고 있으며 전남 무안에 분원이 있다. 모두 10여명의 언님(자매)들이 수도허원을 하고 살고 있는데 올해로 28주년을 맞이하였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48_56.JPG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초기)

 

  셋째, 나실인수도원이 있다. 1988년 충남 옥천에 또 하나의 수도공동체인 ‘나실인수도원’이 세워졌다. 이미 1978년에, “예수를 믿고 나서 예수를 몰라 울었다”는 윤뵈뵈 원장을 중심으로 두 여성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가 이때 본격적인 수도 공동체가 세워진 것이다. 이 수도원은 여성 독신 수도원장을 중심으로 여성 수도사들인 수녀들과 남성 수도사들인 수사들이 있고 여기에 결혼했고 가정이 있는 수도회 가정팀이 있다. 나름대로 한국 사회의 현실에 토착화된 수도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내부적으로 수도원식 생활을 하는 ‘신앙공동체’와 팀별로 나누어 관련된 사업을 하는 ‘경제공동체’로 나누어져 있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를 삶의 목표로 살아가고 있다. 수도자가 된지 20년 된 한 수사는, “나의 허물을 형제 자매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때 내 안에 큰 자유가 온다”며 공동체 삶을 감사하고 있다.

 

  


나실인수도원

 

  넷째, 가톨릭의 독신 여성 수도원인 소화 데레사 자매원을 들 수 있다. 소화 데레사 자매원은 무등원의 후신인 사회복지 법인 소화자매원(1991년 무등원을 개명)을 운영하던 이현필의 제자인 김준호가 조철현 신부와 함께 1999년 창설하였다. 이현필 영성과 가톨릭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을 동일시하여 소화 영성 전수에 이현필 영성을 포함시켰다. 따라서 이현필과 동광원의 토착성에 대한 언급과 영성에 대한 해석은 전무하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48_71.JPG

 

 

 소화 데레사 자매원

 

 

   빛고을 봉선동 귀일동산에 따스한 노을빛이 비치고 있다. 우리는 왜 여기 왔는가. 예수를 따라 믿음으로 사는 삶을 배우려고 온 것이다. 가난한 이웃 버려진 사람들을 도와주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고 버려진 사람이 되어 가장 낮은 곳에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 곧 예수 공동체의 참 모습을 찾아보려고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다. 우리가 먼저 가난해 지자. 욕심을 버리자. 가진 것이 많을수록 이웃에게 줄 것은 적어진다. 귀일원 뜨락에 내리는 저녁 노을에 흠뻑 취해 이런 다짐을 해 보면서 난 너무도 행복해 하고 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그 크고 부드런 손으로
     밝은 하루를 빚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고마워하며
     나도 오늘 하루
     착한 일 하며 살아야지
     마음 속으로 다짐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천지
     사는 게 괴로워서 눈물짓고
     숨쉬는 게 답답해서
     한숨짓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도와주고
     괴로운 이가 있으면
     그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아픈 사람 있으면
     찾아가 위로해 주고
     넘어진 사람 있으면
     살며시 그 손을 꼬옥 쥐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고 보살피고
     보듬으며 돕고 산다면
     아침마다 동터오는 새벽은
     그 얼마나 아름다우랴

     아, 난
     아침마다 눈을 뜨면 
     환한 얼굴로
     주님의 손이 되어
     착한 일 하며 살아야지
     굳게 다짐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21848_84.JPG


 

 귀일원 이현필 선생 자료실 앞에서
이곳이 이현필 선생이 거하면서 집회인도 한 곳이다
왼쪽부터 박용배 목사, 조동희 목사, 최대용 목사, 한은우 목사,
김준호 선생, 최흥욱 목사, 박공순 계명산 분원장, 이채영 귀일원장

댓글목록

나그네님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