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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_전집_③ 저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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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11-14 23:21 조회4,4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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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 전집 ③저술집

  

卑 는 나의 宮殿

 

 

 

이용도 목사 전집 ③ 저술집 

卑 는 나의 宮殿

 

2 판 1 쇄 발행 : 2004 년 7 월 5 일

 

지은이 : 이용도 

엮은이 : 변종호 

펴낸이 : 이민수

 

펴낸곳 : 장안문화

등록 제 6-0044 호 (1979 년 4 월 4 일 )

 

주소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103-19 베델하우스 403 호 

Tel 2232-1277 / Fax 2232-2800

 

http://www.jbooks.co.kr 

jbooks@jbooks.co.kr

 

값은 표지 뒷면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ISBN 89-85137-03-4 (04230) 

ISBN 89-85137-02-6 ( 세트 )

 

 

 

이용도 목사 전집 ③저술집

卑 는 나의 宮殿

 

 

 

장안문화

 

 

 

발간사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을 발간하며

 

 

한국교회 역사의 수많은 인물 중 가장 독특한 신앙가이며 가장 열렬한 전도자 중의 한 분이었던 이용도 목사는 33 년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커다란 신앙의 유산을 남기었습니다 . 일찍이 일제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외쳤으나 정신과 신앙의 독립이 더 시급함을 깨달았던 이용도 목사는 곧 영적인 독립운 동을 벌였고 목을 찢고 가슴을 터트려 영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말씀은 그가 남긴 글을 통해서 70 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영적인 자유를 갈구하는 교인들에게 동일한 감격과 생명력을 주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변종호 목사의 필생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 변 목사는 이용도 목사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34 년 『 이용도목사서간집 』 을 처음 발간했고 이후 일기 , 저술집 , 연구논문 등을 50 여 년에 걸쳐 발간해왔고 1986 년 『 이용도목사전집 』 (10 권 ) 을 내놓았습니다 .

 

이러한 역작인 『 이용도목사전집 』 은 1993 년 장안문화사에서 쇄를 바꾸어 발간되다가 , 이용도 목사 70 주기에 즈음하여 개정판이 기획되어 , 금번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으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은 초판의 글들을 선별하여 , 서간집 , 일기 , 저술집 과 전기 , 추모집 등 전 5 권으로 구성하였습니다 . 그러면서 새로운 내용들을 보충시켰습니다 . 우선 서간집의 경우 1934 년판에만 수록되었던 편지들을 찾아서 추가시켰습니다 . 또한 이용도 목사의 친구로서 선교사였던 피터스 (Peters • 皮道秀 ) 목사가 1936 년 발표한 이용도 목사 전기 ‘Simeon, a Christian Korean Mystic’ 을 전기에 포함시켰는데 , 변종호 목사가 저술한 기존의 전기와 보완적인 내용이어서 전기가 새로운 모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에서는 내용의 정확성과 친밀성을 제고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 먼저 원본에 충실키 위해 , 서간집은 1934 년판과 1969 년판 , 일기는 1966 년판 , 저술집은 1975 년판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 본문의 한자어 중 일상적인 현대어가 있는 경우 당시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대치시켰습니다 . 이런 경우 원문과 비교가 필요할 경우에는 한자를 [ ] 안에 병기하였습니다 . 그러나 1930 년대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문장의 술부 등은 대부분 그대로 두었습니다 . 또한 서간집의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각주로 달았고 초판에서는 익명으로 표기되었으나 자료들을 통하여 내용 확인이 가능한 사항들은 최대한 실명화했습니다 . 또한 변종호 목사가 소장했던 사진들과 피터스 목사가 제공한 새로운 사진들을 본문 내에 배열하였습니다.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의 발간이 이용도 목사의 신앙과 사상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 이용도 목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올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 받습니다.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의 발간을 위해서 여러분들께서 도와주셨습니다 . 윤춘병 감독님 , 김길송 목사님 , 피터스 목사님 , 임인철 권사님 , 성백걸 교수님 , 김형기 교수님 등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2004 년 6 월

장안문화

이민수

 

 

 

머리말

 

이용도목사 저술집을 내면서 감개와 감격이 큰 바 있어 감루 ( 感淚 ) 를 금할 길이 없다.

 

1931 년 3 월 1 일 재령 부흥회에서 그의 성역에 감복되어 그를 따르던 나는 1933 년 10 월 2 일 그가 승천하자 , 그를 충심으로 사모하는 작은 정성에서 이용도목사전집 간행을 서원한 바 있었다 . 그런지 44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겨우 이 책을 한 권 더 간행하게 되었다.

 

원래는 1~2 년 내에 전서 출간을 완료해볼 예정이었으나 모든 조건 , 모든 상황이 그냥 계속해서 생각 같지 않고 나의 역부족 , 정성 부족으로 약 10 년간 에 한 권꼴로 출간이 계속되어 이제 겨우 이 책을 내게 되었다 . 사업은 지지부진이나 마음은 44 년간 이 일에 하루도 열이 식은 바 없었건만 지금 이 책을 내면서 지나온 반세기간을 회고할 때 심장이 터질 듯한 감회와 목청이 찢어질 듯한 통곡이 함께 용솟음침에 나도 놀라는 바이다.

 

어쩌면 세도와 인심이 이다지도 험악하고 냉담하였으며 어쩌면 내 건강과 내 역량이 이렇게도 온전치 못하고 작았던지 , 이 작은 사업을 50 년이 걸려 도 완결하지 못했으니 참괴 (? 愧 ) 와 자책을 금할 길이 없다 . 그러나 한편으로 감사와 찬송이 더 크고 높은 바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병신의 생 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이만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성 ( 誠 ) 을 대심에 의함이다.

 

이용도 목사 관계의 종이조각 , 책 부스러기를 꾸려 들고 , 품에 품고서 이리 저리로 유랑을 계속하는 44 년간의 생활에는 애탐도 , 외로움도 , 설움도 , 장 탄식도 많았다 . 남에게는 한 품의 가치도 없는 휴지꾸러미를 감추어 가지고서 서울 , 재령 , 평양 , 동경 , 송화 , 해주 등지로 전전표류 하는 동안 좋은 많은 것을 피탈 ( 被奪 ) 혹은 분실하였다 . 일정의 탄압에 많은 것을 자투자기 ( 自投 自棄 ) 하였고 38 선을 넘어오며 숱한 것을 치도기주 ( 置逃棄走 ) 했으며 6.25 적 난에는 먼지 하나 안 남기고 빼앗김을 당했다 . 이런 변을 겪고 당하고서 남은 것으로 전집 제 5 권까지를 내게 되었으니 감개가 적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이 사업이 이만치라도 이루어진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능력과 사랑과 보호로써 됨을 믿어 감사와 찬송을 올리는 바이다 . 20~30 대에 꼭 죽었을 이 몸을 70 이 넘도록 살려두심 , 많은 사람이 용도를 욕하고 버리고 돌아서는 40 여 년간에 아직도 그와 더불어 살려는 미성을 보유케 하심이 다 하나님의 뜻과 능력으로 되어졌음에 , 오직 감읍 ( 感泣 ), 오직 할렐루야를 높이 찬송할 뿐이다.

 

이 책을 이용도 목사 42 주기 기념으로 이용도 목사님을 사모하여 기도하며 눈물 흘리는 참된 믿음의 성도 여러분께 드립니다.

 

1975 년 8 월 15 일

편자 변종호

 

 

 

 

이용도의 현대적 의미

 

성백걸 박사 ( 한국기독교사상사연구소장 )

 

 

 

새 『 이용도목사전집 』 이 던져줄 빛

 

18 세기 말 조선천주교의 설립과 19 세기 말 한국개신교의 형성 이후 지난 2 세기를 통해 이 땅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전개해온 한국기독교는 이제 21 세기를 맞아 새로운 시대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 여기서 우리는 앞선 시대에 기독교 복음에서 새 비전을 찾고 그 실현을 위해 헌신 (commitment) 했던 신앙 선배들의 자취를 뒤돌아보며 , 그들이 던져주는 현대적인 빛을 헤쳐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 이번에 장안문화의 수고에 의해 새롭게 정리되어 발행되는 『 이용도목사서간집 』 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1933 년 10 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새 인격 형성을 위한 복음운동에 자기 삶을 투신했던 이용도 목사가 별세한 후 , 다음해인 1934 년에 그의 애제 ( 愛弟 ) 변종호는 이용도 목사와 신앙동지들 사이에 오고 갔던 흩어진 서신들을 모아 『 이용도목사서간집 』 을 발간하는 열성과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 1953 년에는 변종호에 의해 『 이용도목사서간집 』 ( 심우원 ) 재판이 간행되었는데 , 이때 초판에 들어 있던 편지들 , 특히 이용도 목사가 받은 많이 편지들이 빠지게 되었다 . 그 의도와 기준은 이용도 목사에 대한 세간의 터무니없는 비판 여지를 줄이려고 한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또한 1966 에는 신생관에서 『 이용도목사 일기 』 가 , 1975 년에는 역시 신생관에서 『 이용도목사저술집 』 이 발행되었다 . 1986 년에는 변종호 편저로 초석출판사에 『 이용도목사전집 』 ( 전 10 권 ) 이 간행되었고 , 1993 년에는 이것이 다시 출판사를 장안문화사로 바뀌어 나왔 다.

이번에 5 권으로 새로 정리되어 발행되는 『 이용도목사전집 』 의 특징은 , 우선 , 그간 학자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보충되었다는 것이다 . 특히 1934 년의 『 이용도목사서간집 』 초판에 들어 갔다가 1953 년 재판에서 빠진 편지들이 이번에 모두 수록되었는데 , 그 내용을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이용도 목사의 행적과 신앙동지들의 교류 범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 또한 이번 판에서는 비록 원래 자료는 아니지만 , 변종호 목사의 편집본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에 맞춘 재편집의 묘를 살려 일반인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이 새로운 『 이용도목사전집 』 이 앞으로 한국교회 역사의 물줄기를 바 로잡는 과정에서 보이게 또 보이지 않게 던져줄 빛을 살펴보도록 하자 . 즉 이용도 목사가 비추어주고 있는 현재와 미래적인 빛의 방향을 파악해 보자는 것이다.

 

 

 

한국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의 한 원형

 

이용도가 지니고 있는 빛은 , 우선 조선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의 새로운 지평을 비추어주고 있다 . 한국교회의 역사가 40-50 년의 연륜을 지니고 , 서구 근대문명과 기독교의 실체에 대해 깊고 넓게 파악하면서 , 근대 가치와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우리의 역사 상황에서 근대적인 민족의식을 지니고 철저하게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 우리 민족의 고유한 종교성과 영성이 근대 가치와 복음의 진리와의 융합과 합일을 통해 제 3 의 새로운 창조적인 지평의 한 원형으로 출현하게 된다 . 이것을 ‘ 한도한기론 ’( 韓道韓器論 ) 으로 부를 수 있는데 , 그 본질적인 특성이 조선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의 추구로 나타났다 . 이점에서 이용도가 지니고 있는 조선적이고 우주적인 영성과 , 그에 바탕을 두고 출현한 영적이고 우주적 (Spiritual and Cosmic) 인 기독교의 빛은 현재와 미래에 한 원형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복음과 신앙의 ‘ 본말 ( 本末 )’ 을 바로 잡는 빛

 

현대 한국기독교의 큰 병폐는 신앙의 본과 말 혹은 실체 내용과 외적 형식 의 혼동에 걸려 있다는 진단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 그 만큼 복음의 본질과 신앙생활의 참된 의미가 흐려져 있는 현대이다 . 이 점에서 벌써부터 무엇이 중요하고 , 무엇이 부차적인지 헷갈리고 있던 1930 년 대의 한국교계에 대해 던졌던 이용도의 예언자적인 빛은 오늘날도 여전히 환하게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 용도는 사람은 살아 있는 생명체요 생명은 사랑을 그 본질로 하고 숨쉬고 있는데 , 이 사랑은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본다 . “ 사랑은 사람의 생명이라 . 고로 사랑은 곧 , 사람 그것 ” 인데 ,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신앙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물질문명과 얽힌 서양적 기독교를 넘는 동양적 기독교의 여명

 

이용도는 동양종교 문화권에서 태어난 신앙인으로서 물질문명과 얽힌 서양 기독교의 종말을 내다보며 동양의 풍부한 정신적 유산에 뿌리내린 동양적 기독교의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 성경과 함께 불경과 도덕경도 읽을 수 있었던 그는 “ 서양의 기독교는 동적 ( 動的 ), 동양의 기독교는 정적 ( 靜的 ). 西洋 = 物 - 現世的 - 形式 - 外的 , 東洋 = 靈 - 內的 - 神秘 . 西洋 人 은 外的 의 것을 더 찾았다 . 이제 신비적인 것을 동양인이 찾아야겠다 . 찬송보다 기도 ! 기쁨보다 눈물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음은 무슨 이유인가 . 동양에서 서양적 기독교는 실패 . 서양인은 공관복음적 , 동양인은 요한복음적 . 서양의 미완성품인 기독교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심령방면 신비방면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겠다 . 동양적이란 것은 요한 발견적인 것이다 ” 라고 했다 .

 

 

 

자연의 위기를 극복하는 생태적 기독교

 

용도의 신앙체험과 생명력 있는 생활의 힘은 자연 , 그것도 산 속에서 산과 더불어 호흡하며 얻은 것이다 . 그를 결정적으로 교회개혁적 부흥사로 내몬 것도 1928 년 강원도 금강산의 백정봉의 기도체험이었고 , 1931 년 아현성결교회의 집회도중 쫓겨났을 때에도 그를 받아준 것은 인왕산이었으며 , 그 후에도 용도가 지치고 상처를 입었을 때마다 찾아간 곳은 산의 품이었다 . 용도는 새에게 설교했던 프란치스코처럼 “ 자연은 나의 친구 . 믿을 사람도 없고 사귈 사람도 없을 때 하늘 , 산 , 흐르는 물 , 공중의 별 , 밤의 산과 들 초목 , 곤충 , 새들 , 이는 다 - 자연에 속한 것으로 나의 친구가 되나니 , 나는 늘 이 친구를 보려 자연 속으로 들어갑니다 ” 라고 했고 , “ 자연은 나의 애인의 집으로 하고 금년에 나는 거기서 주님으로 더불어 살리로다 ” 라고 다짐했다.

 

 

 

예술적인 영성과 기독교의 멋진 지평

 

21 세기는 문화예술의 시대라고 누구나 말하고 있다 . 실제로 , 우리 시대는 사회정치적 관심보다는 어떤 면에서 예술적인 감성 , 예술적인 혼 , 예술적인 영성이 새로운 차원의 물결을 생성시키는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 이점에서 예술적 신앙인으로서 이용도가 지니고 있는 세기적인 빛이 있다 . 그는 시 ( 詩 ) 를 그리스도 곧 정의와 사랑의 신에 흠뻑 미쳐서 거기서 터져 나오는 생명의 율동으로 보았다 . 그래서 “ 기도는 곧 시 ( 詩 ) 입니다 ”, “ 신앙이 깊으면 그의 모든 말이 다 시다 ” 라고 인식했다 . 또한 , 협성신학교 때부터 가야금을 즐겨 탔던 이용도는 음악 속에서도 종교적 차원을 발견했으며 , 그 소리의 나래를 타고 하느님의 품속에 들어가서 신비의 나라를 체험했다 . 그 밖에도 그림과 연극과 가극예술에서 역시 종교의 세계를 느끼며 예술과 종교의 일치된 지평을 열고 있던 이용도였다 . 그러면서도 그는 “ 진리는 아무런 둔한 손끝으로라도 잘 표현할 수 있다 . 그러나 미 ( 美 ) 는 아름다운 손에 의해서만 그 형 ( 形 ) 이 정제 ( 整齊 ) 된다 ” 고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는데 , 이런 점에서 용도를 통해 정제되어 나타난 인생과 종교의 아름다운 예술적 세계 는 그 현재적 의미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새 창조의 기도와 생활의 일치

 

하지만 , 무엇보다도 이용도에게서 현재 기독교가 배워야 할 것은 그가 터득 하고 있는 기도의 깊이와 힘이라고 할 수 있다 . 사실 , 기도야말로 용도가 가장 강조한 신앙의 필요충분조건이었으며 , 용도야말로 기도의 사람이요 이 땅에 살아있던 기도 그 자체였다 . 용도다운 모든 사상과 활동의 진원지가 기도였는데 , 그는 기도를 자기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다 . 그는 기도를 단지 하느님께 인간의 소원을 올리거나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정도에서 이해하지 않는다 . 용도의 기도는 그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 그때 기도는 사람의 생명이 새로 태어나는 신비로운 창조적 사건의 장소이다 . 깊은 기도 속에서 세상의 힘든 삶으로 지치고 오염된 사람의 생명 이 기쁨과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의 생명을 얻어 새로 태어나게 된다 . 용도는 이것을 ‘ 생명의 역환 ’ 과정으로서 신앙생활과 ‘ 생명의 역환 소 ( 易換所 )’ 로서 기도로 말한다 .

 

이렇게 역사적인 빛을 지니고 있는 이용도 목사를 우리 시대에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이번 『 이용도목사전집 』 출판을 기뻐하고 축하하며 , 그 노고를 치하한다 . 부디 이 땅에 시무언 ( 是無言 ) 이용도 목사의 새로운 빛에 의해 수많은 생명과 사랑의 꽃들이 만개하기를!

 

2004 년 6 월

 

 

차례

 

간사 • 4

머리말 • 6

이용도의 현대적 의미 • 8 

차례 • 12

 

제 1 부 설교 모음 • 13

 

서문 • 14

제 1 장 겸비하라 • 16

제 2 장 항상 너와 함께 있으리라 • 17 

제 3 장 참 신앙생활 • 19 

제 4 장 믿음과 용기 • 23 

제 5 장 참된 신자 • 24 

제 6 장 죽음과 심판 • 25

제 7 장 주께서 주시는 힘 • 29

제 8 장 주를 따르는 자는 강하라 • 32 

제 9 장 짐 진 자 , 다 나오라 • 35 

제 10 장 겟세마네 동산 • 36

제 11 장 심리학이나 교육학보다 • 28 

제 12 장 내가 원하는 바 • 40 

제 13 장 사마리아 여인 • 45 

제 14 장 예수의 사랑 • 49 

제 15 장 피의 설교 • 50

제 16 장 하나님의 은혜 • 52 

제 17 장 새 생명 • 55

제 18 장 예수의 설교 • 57 

제 19 장 예수의 생애 • 59

 

제 2 부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61

 

서문 • 62

제 27 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 63 

제 28 과 거듭난 야곱 • 67

제 29 과 용감한 지도자 모세 • 71 

제 30 과 여선지 드보라 • 76

제 31 과 나오미와 룻 • 80

제 32 과 기도의 어머니 한나 • 84 

제 33 과 실패한 사울 • 86

제 34 과 모범적 친구 요나단과 다윗 • 91 

제 35 과 평민선지 아모스 • 95 

제 36 과 개혁자 요시야 • 99

제 37 과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 103 

제 38 과 편협한 애국자 요나 • 107 

제 39 과 신앙의 힘 • 111

제 40 과 사가랴와 엘리사벳 • 115 

제 41 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 119 

제 42 과 시므온과 안나 • 123

제 43 과 그리스도인의 싸움 • 127 

제 44 과 시몬 베드로 • 130

제 45 과 정직한 회의자 도마 • 134 

제 46 과 믿음 좋은 백부장 • 138 

제 47 과 청년 부자 • 141

제 48 과 세리장 삭개오 • 144

제 49 과 처음 순교자 스데반 • 147 

제 50 과 바울 • 151

제 51 과 크리스마스 • 155

제 52 과 기독교의 신앙 인물 • 159

 

제 3 부 어린이의 영양 • 162

 

서문 • 163

제 1 장 창작 성극 모음 

▷ 춘풍 전 1 막 • 164

▷ 공주와 꽃팔이 전 3 막 • 171 

▷ 애굽의 이스라엘 • 180

▷ 믿음으로 사는 화공 • 187

제 2 장 성자 이야기 • 191 

제 3 장 위인 이야기 • 198 

제 4 장 훈화 •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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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이용도 목사의 설교는 책으로는 되어 나올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필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용도 목사의 설교를 필기해 보려고 애써본 사람은 퍽 많다 . 그러나 모두가 다 실패하였으니 용도 목사의 설교는 그 말이 보통 사람보다 3 배 내지 5 배는 빨랐던 것과 용도 목사의 설교는 한 10 분만 듣노라면 정신 빠진 사람같이 말에 취하지 않으면 눈물과 통회가 쏟아져 나와 붓대를 잡고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용도 목사의 설교가 문장으로 세상에 나온다면 그것은 용도 목사의 설교 중의 몇 마디만 표기한 것이지 그의 설교 전체는 아닐 것이다 . 보통 사람보다 3~4 배나 빨리 하는 말씨로 2~3 시간 내지 6~7 시간 외쳐대는 설교를 필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요 , 만일 그것을 필기할 수 있다면 1 회분의 설교만으로도 큰 책 한 권 이 더 될 것이다 . 그래서 여기에 내놓는 설교란 것도 설교를 듣고 집에 돌아가서 그 기억에 남은 말 몇 마디를 적은 것이매 이것은 용도 목사의 설교의 한 단편이거나 설교 어록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그의 설교는 구상이나 준비나 계획이 절대 없이 엎드려서 기도 드리다가 주님께서 하라시는 말씀만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에 설교문으로 만들면 골자도 없고 요령도 없어 글로서는 아주 졸렬하고 세련되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용도 목사는 자기 생각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절대로 없으니 대지 ( 大旨 ), 소지 ( 小旨 ) 가 없고 설교의 제목조차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이야기 같은 말만 4~5 시간씩을 외쳐내니 문장으로서 세련될 수 없고 문리 ( 文理 ) 가 정연할 수 없다.

용도 목사의 설교는 그 쓰러질 듯한 연약한 몸 , 그 진실하고 정성된 몸짓손 짓 , 그 흘러내리는 땀과 눈물 , 그 유창 통쾌한 열언성변 ( 熱言聖辯 ), 필요한 때에 이르러서의 적당한 찬송의 제창 , 열창 , 필요한 성구의 시적인 인용과 낭송 , 장단 적절의 기도 - 애도 ( 哀禱 ), 시도 ( 詩禱 ), 열도 ( 熱禱 ), 혈도 ( 血 禱 ) 등 - 의 혼합 , 교착 ( 交錯 ), 합주 , 제창 등으로 된 천계 ( 天界 ) 의 방송 ( 放送 ) 이거나 신국 ( 神國 ) 의 방언이지 인간 세계의 연설이나 담론이 아니기 때문에 글로는 기록되기 어려운 것이었고 글이 된다고 해도 추고첨삭(推考 添削 ) 을 거친 인조문장으로서의 미문가장 ( 美文佳章 ) 이 될 수는 절대로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저 외쳐서 죄인의 가슴에서 죄악을 털어 내놓게 하고 들려주어서 아픈 가슴을 낫게 해주는 것이지 속된 인간의 손으로 써서는 아무 꼴도 맛도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데 있어서도 인간 두뇌적인 독서 방식으로 문장이나 보고 대 · 소지를 뽑으려는 생각은 버리고 그저 고요히 기도 드리며 성신의 역사를 통해서 이 글이 나의 심령의 어느 방면에 광명과 영양과 생명이 되게 해주옵소서 하는 ‘ 받음의 준비 ’ 를 가지고 ‘ 주시기를 기다림 ’ 이 있어야 비로소 얻음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 이용도 목사의 설교는 참으로 그의 땀 , 눈물 , 피 , 살과 주님의 사랑 , 성신의 역사 등이 합쳐져서 발하는 하늘의 음성이요 , 천계의 방송이 었다.

 

편저자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1 장

겸비하라 (요 13:1~17)

 

예수의 일생이 겸비를 가장 잘 나타내었습니다 . 주께서 받으실 자녀 되기 위하여는 우리가 겸비하여야겠습니다 . 주님의 생애는 그 전부가 겸비로 일관하였습니다 . 그 나심 , 집 , 제자 , 교훈 , 세족 , 이세 ( 離世 ), 무덤 등 이러한 예수를 우리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 예수는 무지 하였습니다 . 지식도 계획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 이렇게 살아야 바로 사는 것인데 인간들은 너무 알아 걱정입니다 . 알기 때문에 , 아는 척하려고 해서 , 배울 것을 배우지 못하고 고칠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 그러니 우리는 유아 , 광인 , 창녀에게서라도 배워야겠습니다 . 우리가 은혜를 사모하면서도 받지 못한다면 이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 주님을 믿은 지 오래라고 하면서 교만한 자 참으로 화 받을 자입니다 . 직분자는 평신도보다 겸비의 덕이 있어야 할 것이거늘 더욱 교만하니 가장 중한 심판을 받을 자는 목사, 장로 , 권사 , 속장일 것입니다 . 가르치고 인도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니 우리는 그저 어린애같이 겸비하여 그저 받을 준비만 항상 계속하 여야 하겠습니다 . 환난 , 고통 , 고독의 낮은 자리에 처해 있어야 안위 , 기쁨 ,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성신을 힘입어 우리 속에 있는 교만의 사귀를 내어 좇아야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 마 12:28). 교만의 마귀가 역사할 때 우리는 꺼꾸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니 우리는 성신을 힘입어 겸비에 서서 배우고 받고 얻어야 하겠습니다 . 유대교의 직분자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자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예수를 죽였습니다 .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를 죽이는 일 , 이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오늘에 주님께서 이 땅 위에 오신다면 그를 죽이는데 앞장설 자들이 교인과 제자들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 우리는 푹 수그러져 아주 무척 낮아져서 겸비하고 겸손해야겠습니다 . 하나님을 볼 눈은 겸비의 눈뿐입니다 . 물론 낮아지고 겸비하자고 하면 학자와 교리 신봉자는 그를 불러 비현대적이요 , 비현실적이요 , 이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신앙생활은 겸비의 생활임을 우리는 배우고 깨달아야겠습니다 . 예수님은 거지와 못난이로서도 우리 앞에 나타나실는지 모르는 것이니까 우리는 항상 겸비하여 배우고 받기 위한 준비의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1931 년 2 월 20 일 오전 6 시 평양 서문밖교회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2 장

항상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모든 인간은 다 평안히 기쁘게 잘 살기를 원합니다 . 그래서 별 수단과 방법을 다 써보고 별별 노력과 활동을 다 해봅니다 .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생활 , 가장 잘 사는 생활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임을 우리는 확실히 깨달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 모든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 , 이 세상 의 물건과 사람을 의지하고 그것들이 함께 있어 주기를 바라고 빌고 있으나 그것은 다 헛된 기대와 바람입니다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반드시 떠나고 흩어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 이것들과 헤어지고 갈라질 때에 떨어지는 것이 눈물이요 , 일어나는 것이 한숨입니다 .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요 , 불가피한 운명이건만 인간들은 이것을 붙들고 여기에 매달려 허덕이다가 눈물과 한숨으로 일생을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생활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 , 하나님께 안겨 사는 자는 생 , 사 , 병 , 고 ( 孤 ), 빈 ( 貧 ) 등이 그에게 아무런 불쾌한 자극이나 영향을 주지 못하고 그 모든 현상이 다 그에게는 화평 , 용기 , 생명 , 광명을 주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 세상의 모든 것은 갑니다 . 떠나갑니다 .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흩어져 각각 제 갈 데로 가고 나를 혼자 둔다고 해도 내가 혼자 있지 아니하나니 아버지께서 항상 나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 요 17:32 ).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 , 그는 하나님을 떠난 자입니다 . 무전 ( 無錢 ), 무자 ( 無子 ), 무우 ( 無友 ), 모두 하나님과 함께만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세상에서 예수님같이 외로운 이가 어디 있었습니까 . 그러나 그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하였으매 항상 광명과 능력과 안위 속에 산 것입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는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싫고 오직 부모만 찾아 서럽게 부르짖고 있으며 그 부모는 또 그 아이를 찾을 때까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아이를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떠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헤매시며 한탄하시며 기다리십니다 . 고독이란 하나님을 떠난 생활자의 상태를 말함이요 , 하나님을 떠난 천하의 만물은 모두 절대의 고독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에 고독에 빠짐 같이 우리를 잃은 하나님께서도 또한 우리와 같이 외로워하시며 슬퍼하십니다 . 부 , 모 , 자 , 전 ( 錢 ), 물 ( 物 ), 건강을 잃을 때 우리는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어두움에 헤매는 것이나 이때는 실상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때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지음을 받은 만물은 하나님과 함께 살게끔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생명의 뿌리에서 떠나서 살려 하므로 마르고 시들고 죽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그러니 우리는 이제라도 아버지를 찾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습니다 . 우리의 살고 죽음이 여기서 결정되고 우리의 잘 살고 못 삶이 여기에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자주 모이고 항상 기도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두 가지의 사람이 있어 항상 감사하며 만인을 환영하는 이가 있고 또한 공연히 남에게 대하여 불평과 저주를 하는 자가 있습니다 . 진리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항상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람과 부딪치는 것이니 진리의 생활에 필요한 것은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 어물어물 타협하지 말고 오직 잡은 바에 의해서 푯대를 향해서만 쏜살같이 나갈 것입니다. 남이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 그저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서만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아 그와 함께 사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유익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 롬 8:28 ). 세상이 괴롭다는 병 , 빈 , 고 ( 孤 ), 고 ( 苦 ) 가 모두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오직 언제나 항상 함께 하실 수 있는 아버지만 붙들고 그와 같이 살기 위해서만 우리의 노력을 기울임이 있어야겠습니다.

 

1931 년 2 월 16 일 오후 7 시 평양 중앙교회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3 장

참 신앙생활

 

  예수의 활동 방식 ( 요 7:3~9)

· 예수님은 항상 몸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산으로 들로 강 건너로 가셨습니다.

· 신앙운동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으로써만 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 · 오늘의 교회의 전도사업이란 것은 주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되는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 사람을 되도록 많이 모아 놓고 제 수단과 제 방법으로 해내려고 합니다.

· 성경말씀 가운데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님의 뜻을 생각지도 않고 반대되는 생각함

· 예수님은 사람을 피하시려 하는데 그들은 많은 사람에게 보여 주려고 하였습니다.

· 주님께서는 많은 말을 아니하시고 선전도 하지 않으시고 누구나 다 아는 가장 평범한 비유를 드는 정도의 방식을 쓰셨습니다.

· 그러다가 가끔 이적을 행하시거나 이상한 빛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 

· 주님께서는 모든 일에 아무 수단이나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

 

 

 

기도

 

· 오직 기도에 엎드릴 뿐이었습니다 . 매일 아침 , 매일 밤 , 산에서 , 들에서 기도하시는 일이 주님께서 일하시는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 복음서를 고요히 읽어 보면 주님의 기도의 모험의 사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주님이 어째서 기도에 그렇게 힘쓰셨습니까 ?

· 우리는 기도를 해야겠습니다 . 내 집을 위해서가 아니고 식구를 위해서나 밥을 위해서가 아니고 사업을 위해서나 세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사랑을 위해서 , 모든 사람이 다같이 사랑 가운데 살 수 있기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 그리고 생명을 위하여 , 심령을 위하여 , 죄인을 위하여 , 자비를 위하여 ,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여야겠습니다 .

· 이것 한 가지 , 오직 기도 한 가지면 그만인데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실행도 못합니다.

· 모든 백성 , 모든 제자가 깊은 잠에 들어 있을 때 주님께서는 혼자 나가셔서 모든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 모든 사람이 잠잘 때 눈물로 조용히 기도하시는 것이 주님의 사업하시는 힘을 얻는 유일의 수단이었습니다.

· 주님께서는 드러나게 일하심을 피하였습니다 .

· 인생은 다 자나 예수님만 깨었습니다 . 조용히 기도하기 위하여 주님은 항상 깨어계셨습니다 . 죄인을 사랑하시기 위하여 항상 깨어 기도하셨습니다 . · 그러나 악한 죄인은 주님의 이 사랑을 모릅니다 . 오직 예수의 중심의 사랑이 우리의 중심에 부딪칠 때 눈물이 흐를 수 있고 주님의 희생과 사랑에 감격할 수 있습니다.

( 여기서 찬송 75 장 ‘ 주 달려 죽은 십자가 ’)

 

 

 

주의 사랑

 

· 악한 죄인은 예수의 사랑에 대하여 감각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 그러므로 애를 태우고 속을 태우면서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 감격과 감사의 생활 . 이는 오직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는 자에게만 있는 일이니 예수를 떠나서 이 세상에 참된 감격이나 감사가 없습니다.

 

 

 

영생

 

· 영생은 곧 이것이라고 요한 17 장 3 절에 말씀하셨습니다 .

· 영생을 가르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 우리를 구하시기 위한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 빌라도 앞에서 아무 말도 안 하셨으나 우리를 향해서는 지금도 크게 외치고 계십니다.

· 빌라도 앞에서 말없이 변명 없이 죽으신 그 사실 , 그 희생이 2000 년 후인 오늘까지 우리를 위해서 외치고 계시며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 조용한 밤중에 깨어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음성과 주님께서 흘리신 그 피가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 피 흘리심 , 피 흘리는 희생 , 피의 호소 ,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을 하는 큰 힘이올시다.

 

 

 

신앙 일반

 

· 인생의 직업 중 기본적인 것은 농업이다 . 농사짓느라고 바친 수고의 총화 ( 總和 ) 로서 추수하는 것이 농업이다 .

·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전체를 희생하여야 은혜를 받는다 .

· 믿음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 . 기도는 모험적이어야 한다 . 

· 신앙은 불이고 참된 지식은 연료이다 . 

· 신앙과 참된 지식은 서로 떠날 수 없다 . 

· 참된 지식이란 것은 이 세상 지식이 아니다 .

· 지식에는 지각적인 것 ( 頭腦 ) 과 감동적인 것 ( 中心 ) 이 있다 . 

· 무지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다 .

·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일이요 , 예수를 아는 일이다 . 

· 오늘의 지식이란 어떤 것이냐 ?

· 선악과는 지 ( 知 ) 요 , 냉 ( 冷 ) 이요 , 이기적이고 생명과는 감 ( 感 ) 이요 , 중심 생명 - 신력 ( 信力 ) 이요 , 열이요 , 희생이다 .

· 생명과를 먹은 후에 선악과를 먹기는 쉬우나 선악과를 안 후에 생명과는 먹을 수 없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

· 전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고 후 아담은 생명과를 먹었다 .

· 지식의 연료에 사랑의 불을 지르자 .

· 학설만 취하는 것은 선악과만 먹고 마는 것이다 .

· 서양의 기독교는 동적이요 , 동양의 기독교는 정적이다 .

· 서양 : 물 ( 物 ), 현세적 , 형식적 , 외적 / 동양 : 영 ( 靈 ), 내세적 , 신비 , 내적

· 서양인은 외적의 것을 다 찾았다 . 이제 신비적인 것을 동양인이 찾아야겠다.

· 찬송보다 기도 , 기쁨보다 눈물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음은 무슨 이유인가.

· 동양에서 서양적 기독교는 실패이다 .

· 서양인은 공관복음적이요 , 동양인은 요한복음적이다 .

· 서양의 미성품 ( 未成品 ) 인 기독교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이매 심령 방면 , 신비 방면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겠다 . 

· 동양적이란 것은 요한 발견적인 것이다 . 

· 회개 - 십자가 - 구원 - 성령

· 성령을 받는 일이 가장 큰 은혜와 가장 큰 권능을 받는 일이다 .

· 믿음 , 용기 , 겸비 , 사랑 . 이런 것은 다 성신을 받아 영화 ( 靈化 ) 함에서 얻는 것이다.

· 엽 ( 葉 ), 화 ( 花 ), 결실 ( 結實 ) 은 가지에 나타나는 현상이나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어서만 그 사명을 다한다.

·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는 것 , 이것이 신비적이다 . 예수는 주 ( 株 ), 우리는 지 ( 枝 ), 우리는 노력하고 헛된 애를 쓸 필요가 없다 . 그저 주 ( 株 ) 에 꼭 붙어 있기만 하면 그만이다 . 그러매 사업의 유무도 , 성패도 오직 주님께서 책임지고 계신 것이다.

· 우리는 엽 ( 葉 ), 화 ( 花 ), 실 ( 實 ) 이 나타나는 때를 기다리기만 할 것이다 .

· 신앙은 진자 ( 振子 ) 와 같이 극단적 운동이다 .

· 신앙은 지연 ( 紙鳶 ) 과 같이 뿔과 같이 순종하는 일이다 . 시시각각으로 순종만 하는 일이다.

·3 낙 ( 樂 )- 무식 , 빈 ( 貧 ), 버림받는 것

·3 감사 - 성 ( 成 ) 에나 불성 ( 不成 ) 에나 환란에나 다 감사할 것

 

1931 년 2 월 15 일 오후 7 시 평양 중앙교회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4 장

믿음과 용기 ( 요 9:1~4)

 

· 세인이 구하기 전에 주님은 벌써 구하고 계시며 은혜 베풀기 위해서 긍휼히 여기신다 ( 대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주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느니라 ).

· 병자의 말 - 하고자 하시거든 내 병을 고쳐주소서 ; 예수 말씀 - 내가 하고자 하노니 병 고침을 받으라.

· 우리의 받고자 함이 먼저가 아니고 주님의 주시고자 하심이 먼저이다 .

· 우리의 기도보다 주님의 기도가 먼저 있었다 .

· 그러므로 제사나 의식이 필요치 않고 오직 주께 나가기만 하면 병 고침을 받고 기쁨과 위로를 얻는다.

· 신자에게는 용기가 필요한바 그 용기는 예수의 용기이어야 할 것이다 .

·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주님을 밝히 증거할 용기가 있어야겠다 .

· 나에게 생명과 용기와 구원을 주시는 신앙을 얻어가지고서 만인이 부 ( 否 ) 라고 하여도 담대히 명증하여야겠다.

· 세상이 무어라든지 내 눈을 띄워준 것이 사실이거든 증거해야 된다 .

· 그러므로 신앙에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

· 그런데 신앙은 용감하면서도 또 겸비함을 요한다 .

· 겸비하지 않으면 강퍅하여지므로 우리는 겸비하여 뉘에서든지 배울 수 있어야겠다.

· 참된 신앙은 내강외유 ( 內剛外柔 ) 이어야 할 것이다 .

 

1931 년 12 월 22 일 오후 2 시 평양 명촌교회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5 장

참된 신자

 

·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고 오직 신앙의 대상이요 , 기독교 교리도 학리적이 아니고 오직 신앙할 말씀뿐이다.

· 속죄함을 받은 확신은 의심이나 비애를 축출한다 . 그러므로 근심 걱정이 있는 자는 신앙이 없는 자다.

· 믿음이 있다면 의심이 없다 . ( 부흥성가 53 장 ‘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 신앙이 있으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분토같이 버린다 . ( 부흥성가 68 장 ‘ 먹 보다도 더 검은’)

· 신자는 오직 신앙으로서 평화와 기쁨을 얻는다 . 

· 생어 ( 生魚 ) 와 사어 ( 死魚 ) 는 다르다 .

· 신앙은 오묘하여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얌전한 자로 손뼉 치며 날뛰게 한다.

· 참된 신앙은 죄 사함을 받은 체험에서만 생기는 것인데 오늘의 주일학교선생 , 교역자 , 제직들 중에 이 속죄 경험 없는 자가 많다 .

· 속죄 경험 없는 자는 아무런 사업을 해도 기독교 사업이 아니다 . 농촌 사업이니 사회 사업이니 아무리 떠들어도 이기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 미국의 교회는 태엽 없는 시계와 같다 .

· 지금은 우리의 신앙을 검토할 때다 . 나는 죄인 , 주는 속죄 , 나는 속죄함을 얻었다는 계단에 올라야 참된 신앙이다.

· 속죄에 감격한 자로서 비로서 행 2 장에서 보는 새 술에 취할 수 있다 .

· 새 술에 취한 자가 참된 신자인가 , 정신이 말똥말똥한 자가 참된 신자인가?

· 참된 신자를 세상은 염병 장이 , 미친 놈이라고 한다 . 예수님과 바울 선생을 세상이 어떻게 보았는가?

 

1931 년 12 월 23 일 오후 2 시 평양 명촌교회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6 장

죽음과 심판 ( 히 9:27~; 벧전 1:24~)

 

죽음의 법

 

모든 사람이 재산 , 처자 , 권속을 떠나기 싫어합니다 . 그러므로 죽음은 부자의 법이 아니고 복자의 법이 아닙니다 . 로마가 다른 법은 만들었으되 죽음의 법은 내지 못했고 일본이 다른 법에는 밝되 죽음의 법칙은 모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법은 누구나 피하지 못합니다 . 남녀 , 빈부 , 영 · 미인 ( 英美人 ) 그 누구나 이 법 앞에 차별이 없고 이 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 나도 죽고 여러분도 죽을 것입니다 . 세상의 그 누구나 다른 그 무슨 법은 부인할 수도 있고 반항 불복할 수도 있으나 죽음의 법에 거슬릴 수 있는 자 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다 . 세상 법을 다 폐해도 죽음의 법을 폐할 수 없고 인간이 다 걱정하면서도 폐하지 못하고 인류 전체가 총동원해서 등장 ( 等狀 ) 을 들어도 이 법을 폐하지 못합니다 . 별 수 없으니 복종할 수밖에 없고 울 수밖에 없고 가슴과 땅을 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판의 법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없는 것같이 죽는 자 또한 심판 받음을 면할 수 없습 니다 .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 살아간다는 일 순간 , 일 동작은 다 하나님의 심판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인간은 결국 누구나 다 두 개의 법정에 서게 되어 있나니 제 1 의 법정은 죽음의 법정이요 , 제 2 의 법정은 심판의 법정입니다 . 그런데 이 심판은 죽어서 주님에게 받기 전에 이 세상에서 날마다 날마다 예심의 조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 오늘 저녁에 여기서 한번 첫 심문 ( 예심 ) 을 해봅시다 . 여러분의 손을 어떤 데 써왔습니까 . 타인 ( 打人 ), 도적 , 술잔 , 투전 그렇지 않으면 조인 ( 助人 ), 구인 ( 救人 ), 협력에 썼습니까 . 그 손이 의로운 일에 움직였으면 천국행에 기록될 것이요 , 불의에 썼으면 지옥행에 기록이 될 것입니다 .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도 제 손이 의의 손인지 불의의 손인지는 압니다 . 선한 손을 가진 자 영복 ( 永福 ) 에 참여하고 악의 손을 가진 자 영벌 ( 永罰 ) 에 임하게 됩니다 . 눈도 그렇습니다.

평화의 눈이 만인을 평화롭게 하나 독살스러운 눈이 많은 사람의 기분을 해하고 평화를 파괴합니다 . 눈을 잘 쓰는 자는 나 복되고 남 복되게 하나 , 눈을 악용하는 자는 나를 해하고 남을 해하는 것입니다 . 귀도 역시 그렇습니다 . 좋은 말과 교훈을 잘 듣는 자 복되고 악담 , 외설만 따라 다니며 듣는 자는 화를 받습니다 . 입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데 입의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 먹는 것과 말하는 것 . 먹는데도 먹어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서 먹기도 하고 술 , 담배 등 해로운 것을 먹어서 내가 해를 받고 남을 해하기도 합니다 . 말 . 나쁜 말이 얼마나 나와 남을 해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거짓말 , 욕설 , 음담 , 악언 , 이 얼마나 사람을 해하는 흉기입니까 . 발도 같은 발을 가지고서 예배당에 가는 발도 있고 칼날을 타는 무당의 발도 있으며 살인 , 활인 ( 活人 ) 에 쓰는 발 , 음란방탕에 다니는 발 , 도적질 다니는 발 , 남을 구하러 다니는 발이 있습니다 .

사지 백체 ( 百體 ) 를 잘 쓰면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으나 귀 , 눈 , 입 , 코를 잘못 쓰면 그것이 다 죄악의 무역항이 됩니다 . 그러면 내 신체를 잘못 쓰게 되는 원인은 어디 있는가 하면 그것은 마음의 잘못된 데서 시작됩니 다 . 몸이 잔인 악독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벌써 그 마음이 악해져서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심판은 그 마음을 상대로 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 마음이 어두움을 좋아하는 자 , 지옥의 길을 찾고 광명을 좋아하는 자 ,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 마음에 도적의 마음 [ 賊心 ] 을 품은 자는 벌써 도적의 죄 [ 盜罪 ] 를 범한 자요 , 마음에 음심을 품은 자는 벌써 음행을 한 자입니 다.

세상 법은 행동을 보고서 처벌하나 하늘의 법은 그 마음 상태를 보아서 처 벌합니다 . 그러므로 남을 재판하는 재판관도 하나님의 심판은 면하지 못합니다 . 서울서 부흥회 때에 경찰관 1 명이 참회를 하는데 법에 따라 남을 다 스렸다는 모든 것이 다 범죄 행위였다고 통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사람의 재판에는 불공평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무사 , 절대 공평한 것입니다 . 얼굴 번번한 신사숙녀도 안에는 큰 죄악을 가지고 있습니다 . 애를 써서 감추어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하는 것 입니다.

생각하면 세상 사람은 모두 다 감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슬픔의 감옥 , 불평의 감옥 속에서 살고 있지요 . 이런 감옥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 판을 이 세상에서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 ( 信 )· 불신 ( 不信 ) 도 자유요 , 선행 · 악행도 자유입니다 . 그러나 꼭 생각할 것은 그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끝날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그 심판은 외형에 나타난 것에 의하지 않고 속마음 상태를 보아서 행하는 것이매 천당과 지옥에의 갈림은 그 마음 상태로써 결정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 장 10 절에 보면 의인은 없어 , 한 사람도 이 세상에 없다고 하였습 니다 . 그런데 예수님의 속죄가 만인을 다 의롭게 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진리요 , 기적입니다 . 크나 적으나 죄를 짓지 않음이 없는 만인이 오직 주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는다는 사실 , 이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축복의 사실입니까 . ( 찬송 121 장 ‘ 내주의 보혈은 ’)

사람의 심판이 죽은 후에 있다고 해서 재세 ( 在世 ) 시의 일시적 기쁨을 위해서 범죄하는 자가 있으나 우리는 재세 시에 당장 심판이 시작되는 것을 알 아야겠습니다 . 하나님의 심판에 배심판사로서 양심이 항상 따르고 있습니다 . 도적질을 하려 할 때 먼저 양심의 심판을 받고 음행을 하려 할 때 어떤 방면에서 이의를 제출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 이 양심의 심판을 무시하거나 이의를 눌러버리고 범죄를 하면 그 다음에는 심고 ( 心苦 ) 와 상심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 가인이 아우를 죽인 후 “ 가인아 ,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 는 음성이 들려올 때 저는 모른다고 하였으나 그 다음에 “ 네가 무엇을 했느냐 ?” “ 네 마음이 왜 편치 않으냐 ?” “ 네 얼굴이 왜 변하느냐 ?”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범죄한 자에게 네 단계의 벌이 임하는바 그것은 첫째 , 마음이 상하는 것입 니다 . 가슴이 편치 않고 마음이 답답합니다 . 의를 행하는 자 그 몸은 혹시 피곤하거나 몰리는 일이 있어도 그 마음은 태평하고 기쁨에 넘치는 것과 좋은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 음행 , 도적 등 범행한 후 마음이 무겁고 불편함은 범죄에서 오는 벌의 무거운 짐이올시다.

둘째 , 모습이 변하고 안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 마음에 불안이나 공포가 있을 때 얼굴 빛과 피부 빛이 변합니다 . 마음이 변하면 체질이 변합니다 . 병에 걸려 변질할 때 소화불량 , 늑막염 , 폐병 , 화류병 등이 오는 것입니다 . 셋째 , 그 다음에는 조직적인 파괴가 일어나니 부부이별 , 부자무의 (父子無 義 ), 가정불화 , 가정파멸 등이 이르는 것입니다 .

넷째 , 그리고는 경제적인 파멸이 필지 ( 必至 ) 합니다 . 죄악은 만성일 뿐 아니라 유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부 ( 父 ) 의 범죄가 자녀에게 매독을 유전하듯 이 죄악은 자자손손 유전됩니다 . 심상 ( 心傷 ), 신상 ( 身傷 ), 조직파괴 , 경제 파멸이 있은 후에는 사망이 이릅니다 . 죽음은 최후의 교실 ( 敎室 ) 이요 , 최후의 학교입니다 . 아무리 악인이라도 죽음에 이르러서도 회개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무기징역을 자원하는 자입니다 . 세상의 무기징역은 그래도 한 번 출옥할 때가 있으나 참된 무기징역은 끝이 없습니다 . 지옥이 없다는 자도 있으나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나니 세상에서 슬픔 , 안타까움 , 눈물 , 한숨에 잠겨 사는 생활 , 이것은 분명히 지옥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 이 지옥의 불은 알코올이나 담배나 성행위로 끄지 못합니다 . 오직 천화 (天 火 ) 와 성령의 불로써만 처치할 수 있습니다 . 철저히 통회하고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 ( 찬송 117 장 ‘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

인간이 이 세상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것과 같이 천당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사랑과 진리의 평강과 평화가 그것입니다 . 지옥이 마음에 있듯이 천당 도 심중에서 경험됩니다 . 성령의 불로 죄와 지옥을 멸해버리면 천당에 사는 듯한 감격과 감사를 느끼나니 이것이 분명히 천당의 일면을 이 세상에서 알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 ( 찬송 117 장 다시 )

참으로 속죄를 얻지 못한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그리스도를 얻지 못한 자 또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 불신자에게는 지옥밖에 없고 믿는 자에게는 천 국문이 열리어 있습니다 . 그러니 지옥으로 향할 것이냐 , 천국문으로 들어갈 것이냐는 신 ( 信 ) 의 유무에 있는 것입니다 . 신앙은 예수의 살과 피로 맹세하여지는 것임에 믿는다는 일은 예수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고 마시는 것입니다 . 예수의 피와 성신의 감화만이 우리로 신앙생활을 하게 하며 천국으로 가게 하나니 우리는 믿어야겠습니다 . 십자가는 죄보다 크고 강한 것입니다 . (121 장 찬송 )

 

1931 년 12 월 23 일 오후 7 시 명촌교회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7 장

주께서 주시는 힘

 

· 하나님을 믿는 야곱은 돌 베개 하고서도 돌 단을 쌓고 감사했습니다 . 공부 많이 하고 돈 모아 가지고 명예 얻어 가지고 돌 단 쌓을 수 없습니다.

·( 마 14:22~, 8:23~) 내 심해 ( 心海 ) 는 풍파 심한 갈릴리 바다 . 돌연히 자주 자주 풍파가 일어나 불안 , 공포 , 고독 , 비애에 사로잡힙니다 .

· 심해에 풍파 일어나는 인간은 고통에 허덕입니다 .

· 나도 24~25 세 때에는 한강에 빠져 죽으려고 한때가 여러 번이 있으나 한번 깨달음이 있은 후에는 어떠한 고생도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 물론 빈궁과 불안은 여전하나 안심할 수 있어 전과 같은 파선항 ( 破船港 ) 이 아니었습니다 . 사나운 풍파 중에도 안과 ( 安過 ) 하고 고통 , 번민 , 핍박이 있으나 안심할 수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 자랑이 아니라 그때의 나와 같은 상태에 있는 분을 위해서 나의 과거의 경과를 보고해 드리는 것입니다.

· 안전하게 살아보려고 인간들이 별 조직과 기관을 다 세워보지만 심해 (心 海 ) 에 풍파를 지닌 인간에게 안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 결혼식에서 맹세를 반석같이 하고도 몇 달 후에 이혼이 있고 차용증서에 보증을 3~4 사람 세워도 돈을 잘리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 한 사회주의자가 있어 예수쟁이 핍박에 별 수단을 다 쓰더니 거꾸러져서 하는 말이 “ 내가 과거에 찾았던 것은 반딧불이요 , 유령의 빛이었습니다 . 행복의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눈물 한숨의 생활밖에 못하였습니다 . 심해 (心 海 ) 에 풍파가 계속되는 동안 파선의 위기를 면할 수 없었고 의심의 장막이 둘러 있는 동안 넘어도 넘어도 태산뿐이었습니다 . 이때에 여기서 예수 그리 스도가 계심을 찾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 영생의 주님을 찾은 자는 너무 기뻐 춤추며 잠을 못 자는 것입니다 . 기쁨 없고 웃음 모르던 생이 이렇게 희락으로 변하는 것이 풍파 중에 예수님을 찾은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 거짓 기쁨은 시체가 되고 백골 ( 白骨 ) 이 되고 옛날의 슬픔은 희락의 참 생 ( 生 ) 을 낳습니다 .

·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은 누구나 오직 눈물 탄식뿐이나 예수 그리스도와 대할 수 있는 자만 이런 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 내 남편 , 내 자녀는 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 한 분만은 특수한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 인생은 비 ( 悲 ), 애 ( 哀 ), 고 ( 苦 ), 사 ( 死 ) 의 세상입니다 .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 곁에 계시어서 그것을 삼켜 버리시고 쫓아 버리십니다 . 그러므로 예수를 모신 우리는 “ 슬픔아 , 고난아 , 핍박아 , 오려면 오라 ” 고 통쾌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내 경험을 또 하나 얘기하겠습니다 . 작년 겨울 산정현교회 집회 때에 회당에서 밤을 새워 기도를 드릴 때 나의 맥박이 그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내 숨이 곧 끊어질 지경에 이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이때에 안수기도를 원하는 이가 한 분 나타났습니다 . 나는 숨도 쉴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으니 말로 기도를 드리지는 못하고 그저 그 머리 위에 손만 얹고 있었습니다 . 이때에 내 심중에 일어나는 감격은 너무 컸습니다 . 내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에 남을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감격했습니다 . 내가 숨이 지더라도 그 부인은 축복을 받을지니 나는 죽어도 나 대신 주님께서 그를 축복하실 것이 믿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 나의 기도는 축복의 기도가 아니라 “ 나는 남을 도울 힘이 없사오니 주님 친히 축복하옵소서 ”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힘이 나고 말문이 터져서 둘이 다 충분히 감격할 수 있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 이번에 이곳 오기 전에 나는 기운이 없어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 일어날 기운이 없어 무척 걱정을 하고 있었으나 가야 할 길이기에 나는 억지로 일어났습니다 . 작은 성경 한 권을 겨우 손에 들고 는 지팡이를 잡고 일어났습니다 . 겨우 정거장까지 나와 기차표를 사기는 했으나 기차에 오를 힘도 없고 평양까지 무사히 도착할 것 같지도 않았습니 다 . 나는 정거장 한 모퉁이에서 고요히 기도 드렸습니다 . 기도 드리는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 아버지 , 이 몸으로 , 이 기운으로 , 이 길을 떠나 가오리까 . 가다가 죽어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 저는 용기도 자신도 없사오니 아버지 뜻대로만 하시옵소서 .” 이렇게 기도하는데 가야 한다는 명령이 내릴 때 나는 무한한 감격에 빠졌습니다 . 생각하니 전에는 30 분이면 도착할 정거장에를 1 시간 반 이상을 걸려 지팡이를 집고 나왔던 것입니다 . 기차에서 너무 피곤하여 사리원에서 도중 하차를 했지요 . 하차한 나는 동서 ( 東西 ) 로 감리교 예배당을 찾아갔지요 . 이 길을 걷는 동안에 어디서인지 힘이 좀 오는 것이었습니다 . 신앙의 동지 몇 분을 만나 114 장 ( 목 마른 자들아 다 이리오라 ) 찬송을 부르는 동안 확실히 좀더 새 힘을 얻었습니다 . 이때부터 기도의 말을 할 수 있는 힘도 생기어 예배를 드린 후 새 힘을 받아가지고 평양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한 나는 다시 외칩니다 . “ 그리스도는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 라고 . 뉘가 나를 욕하고 비방한대도 나는 관계하지 않습니 다 . 이렇게 살아오는 나는 오직 주님만이 나의 전부이니까요 . 병에서 일으켜 주시고 끊어져 가는 숨을 이어 주시고 새 힘을 때마다 때마다 넣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나는 다른 아무 것도 원치 않고 믿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내 곁에 계시면 갈릴리 바다의 그 큰 풍파를 잔잔케 해주시지요 . 비애와 절망에서 기쁨과 소망으로 원수에게 둘러 싸여서도 승리만 계속하게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 이 한 분만 붙들 수 있어 우리는 연전연 승일 것입니다.

 

1931 년 12 월 19 일 오후 7 시 평양 명촌교회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8 장

주를 따르는 자는 강하라 (마 26:57~58)

 

나는 어느 날 깊은 밤중에 예배당에서 혼자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 한참 기도를 하는데 벽에 걸렸던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를 향하여 가까이 오더니 내 눈앞에 와서 멎어지는 것이었습니다 . 나는 놀래어 그 그림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 보니 , 주님의 이마에서 붉은 피땀이 흐르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 나는 잠깐 동안 보다가 그 광경이 하도 끔찍하여 머리를 푹 숙인 후 다시 들지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주를 따르시는 여러분 , 여러분은 어디까지나 주를 따르고 있으며 어디까지 나 따라 가시렵니까 . 주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또 그 성격이 가장 대담하고 용감한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사랑하는 내 선생이 결박을 당하고 매를 맞고 끌리어 가게 되니 떨며 멀찌감치 따라 가던 그 사실을 아십니까. 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내 병을 고쳐 주셨고 죽은 자를 살리고 거꾸러진 자 를 일으키시던 그 주님께서 잡혀 가는데 죽어도 놓지 않고 죽어도 따르겠다던 그 제자 베드로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 권능과 이적과 위엄이 있을 때 베드로는 주를 죽어도 놓고 싶지 않았으나 뭇사람에게 모욕을 당하고 죽을 자리로 끌려가게 되니 자기의 욕망과 요구를 위하여 주를 따르던 베드로는 멀찌감치 슬금슬금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 칼을 빼어서 말고를 치던 그 용기를 가졌던 베드로도 주님께서 잡히어 정말 죽을 땅으로 끌려가게 되니 주를 버리고 돌아서고 싶어진 것이올시다 . 나는 오늘 조선의 교회가 베드로의 이 꼴과 같이 되었다고 봅니다 . 오늘날에 예수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하기를 왜이리 부끄러워하고 떨고 있습니까?

예수라면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들지 못하며 성경을 남이 좀 보면 어떻다고 그것을 감추느라고 작은 성경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까?

우리는 이 한심한 태도를 버리고 굳세어야겠습니다 . 우리는 먼저 사치를 버리고 신앙에 강하여야겠습니다 . 사치는 우리의 신앙을 약하게 하는 고약한 놈이니 우리는 먼저 이것을 버려야겠습니다 . 극빈한 가정을 찾아 갔을 때도 필히 엎드려 마음을 푹 놓고 기도를 해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 이즈음 교역자들은 양복 바지에 날을 세워 가지고 다니면서 좀 누추한 집에 가서는 앉을까 말까 하다가 나오게 되니 이런 교역자 아래서 어찌 굳센 신앙이 날 수 있겠습니까 . 우리는 사치를 버리고 사랑을 위하여 부르짖어야겠습니다.

나는 어떤 겨울 날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한 창기 ( 娼妓 ) 한테서 크게 배운 것이 있습니다 . 승객 중에 어린 소녀 하나가 옷을 변변히 입지 못해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 다른 사람도 다 아이를 보았으나 본 척 만 척 하는데 그 창기가 자기가 입은 외투를 벗어서 그에게 입히고 또 그 손과 발을 어루만 져 주는 것이었습니다 . 나는 창기의 그 참된 사랑에 머리를 숙이고 감격했습니다 . 세상이 천하다 하고 세상에게 버림을 받은 이 창녀에게서 나는 다 른 누구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감화를 받았습니다 . 학박사 ( 學博士 ) 의 설교보다 , 오묘한 이론보다 이 시간에 그 창녀에게서 배운 바가 나에게는 더 많았습니다.

하늘의 사실을 외치고 주의 사랑을 부르짖는 오늘날의 교회에 어디 사랑의 사실이 있습니까 . 우리는 외모를 버리고 참사랑으로 강하여야 되겠습니다 . 주를 따름에도 주를 참으로 사랑해서 따르지 않고 우리의 무슨 욕망이나 조건이 있어 따라다니고 있으므로 무슨 위험이나 환난을 만나면 스스로 낙심을 하고 돌아서는 것이올시다 .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한 것도 이 점에 있습니다 . 우리는 나의 이익이나 나의 조건을 위하여 주를 믿지 말아야겠고 우리는 보수를 얻기 위하여 일하는 품꾼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 빵 때문에 품꾼이 되어 예배당 문을 들락날락 하는 교역자의 꼴같이 불쌍한 것이 없습 니다 . 길이 아무리 험하고 환난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우리는 주를 사랑치 않고는 살 수 없어 주를 따르고 인간을 사랑치 않을 수 없어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겠습니다.

천당에 가는 길은 험합니다 . 그러나 우리에게 생명 길이 되나니 우리는 주 를 따라 천당을 향하여 나가야겠습니다 . 생명의 길은 호화로운 길이 아니요 , 죽음을 당하는 길이니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서 담대히 나가야겠습니다 . 용기를 죽이는 사치를 버리고 남을 해하는 언행을 버리고 주를 향하여 참되게 걸어나가야겠습니다 . 우리가 시대의 낙오자가 되었다고 하여도 주를 향하여 나가는 걸음만은 늘 걷고 있어야겠습니다 . 나는 목사라는 명목을 붙이고 있지만 얼마나 게으른지요.

우리 원산지방에 참으로 부지런한 권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 그는 보수를 받지 않으면서도 교우 심방에 전력을 다하며 교우들을 돌아보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 이 권사님을 대할 때마다 주의 일을 한다고 월급을 받아먹는 나는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기 , 허영 , 사치 , 분쟁을 다 버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는 주님의 정경을 살펴 기도하고 또 힘을 모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강하여질 것이올시다 . 우리는 힘을 내어 권세 , 명예 , 지위 , 황금이 모든 것을 초월하고 십자가의 길로 주를 따라 굳세게 행진하여 야겠습니다.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9 장

짐 진 자, 다 나오라 ( 마 11:28; 요 14:6~7)

 

주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 무거운 짐 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 내가 너희에게 평안함을 주리라 . 내 짐은 가볍고 평안하리라 .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내게 오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 라 ” 고 말씀하셨습니다 . 실로 인생은 짐을 지고 그 어디인가로 걸어가는 것이올시다 . 그 무거운 짐 , 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짐 , 우리 인생이 지지 않을 수 없다고 해서 지는 짐이 이 땅 위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 금전을 위한 짐 , 명예를 위한 짐 , 지위를 위한 짐 , 자녀를 위한 짐 , 가정을 위한 짐 , 교회를 위한 짐 …… .

아 ! 수 많은 짐 , 벗지 못할 짐 , 누가 이 무거운 짐을 벗겨 주겠습니까 ? 벗지 못할 이 짐을 지고서 그 어디인가를 향하여 가며 허덕이는 인생의 꼴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 이 불쌍한 인생들을 주님은 “ 나에게 오라 , 내가 너희 에게 평안함을 주겠다 ” 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이 짐을 벗기 위하여 주 앞으로 나가야겠습니다 . 주 , 당신은 무거운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고 갈보리 산까지 가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으니 이는 우리의 짐을 완전히 벗겨주었다 는 말씀이올시다 . 형제여 , 사랑하는 형제여 , 다같이 십자가 있는 갈보리 산으로 갑시다 . 모든 짐에 눌리고 진세 ( 塵世 ) 에 파묻혀 아글타글 헤매지 말고 참된 살 길을 찾아 나가십시다 . 왜 이렇게 주저하고 걱정과 근심과 분노에 눌리어서 허덕이겠습니까 . 우리를 향하여 살 길을 가르쳐 주시는 주의 음성을 찾아 갈보리 산으로 가십시다 . 이 산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죽을 자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 우리는 이 길을 찾아 달음질쳐야겠습니다 . 이 길을 알지 못하는 자와 알고도 가지 않는 자를 향하여 주님은 또 외치 십니다 .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 너희가 진 무거운 짐을 다 가 져오라 ” 라고 . 무거운 십자가를 약한 어깨에 지실 때 주님인들 왜 괴롭지 않으셨겠습니까 . 그러나 주님은 죄인의 짐을 대신 짊어져야 가슴이 시원함을 느끼시었습니다 . 여러분 , 우리는 잠깐의 평안을 얻기 위하여 먹고 마시는 데만 취하여서는 안되겠습니다 . 우리 어깨에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하여 주님께로 나아가는 노력이 있어야겠습니다 . 우리의 짐이 아무리 무겁고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주님께 가기만 하면 다 해결될 터이니 우리는 주만 향하여 나아가십시다.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10 장

겟세마네 동산 ( 마 26:36~46)

 

예루살렘 성 . 복잡한 거리에서 사욕을 위하여 눈이 벌개서 헤매던 모든 사람이 잠들고 하나님을 공경하노라 , 모세의 율법을 저 혼자 아노라 하던 제 사장과 서기관들의 발걸음조차 끊이고 황금의 노예가 되어 웃음을 팔던 무리도 다 화려한 집 속에서 단 꿈을 꾸는 때에 고요한 이 성을 뒤로 두고 안타까운 가슴을 부둥켜 안고 감람산 깊은 골짜기로 향하는 장년 하나가 있었으니 그는 우리에게 피땀을 흘려주실 예수님이었습니다.

깊고 깊은 감람산 험한 길을 외로이 쓸쓸히 걷는 주의 걸음은 참으로 고적 한 것이었습니다 . 마지막 전날 밤이었습니다 . 성만찬도 끝난 지라 사랑하는 제자들도 거의 다 가고 겨우 두세 사람이 남아있다가 끄덕끄덕 졸며 피곤한 다리로 뒤를 따를 뿐입니다 . 병을 고쳐 주고 복을 빌어 주고 떡을 먹여 주고 다시 생명을 받았다 하여 따라다니던 그 많은 무리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고 쓸쓸히 걸어가는 그 뒷모양을 보는 이는 누구나 비장 ( 悲壯 ) 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보시고 가슴이 아프신 주님은 이 무리를 위하여 아버지를 부르짖지 않을 수 없어 겟세마네 골짝 가시가 무성한 그곳을 혼자 가서 엎드려 피땀을 쏟으시며 기도하신 것이올시다. 주님께서 이런 고생을 하신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올시다 . 오직 여기 앉으신 형제자매님들을 위하여 그러신 것이올시다 . 이 참경 ( 慘景 ) 을 상상할 수 있는 우리는 주님의 애타시는 가슴을 살펴야 하겠습니 다 . 그리고 또 우리는 주님의 가슴을 조금이라도 시원케 해드리도록 힘써야 겠습니다.

2000 년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흐르던 그 피땀이 지금도 이 강산에 흐르고 있습니다 . 만일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다같이 겟세마네로 달려가 주님 앞에 엎드려 통곡하여야 마땅할 것이올시다 . 그리고 우리도 우리 교회를 위하여 이 강산을 위하여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여야겠습니다 . 피땀을 흘리는 기도가 있는 곳에야 생명이 있습니다 . 또 이 세상은 악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무리가 많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힘써 기도하여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행적을 한 편의 사기 ( 史記 ) 로만 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 우리는 주님의 피땀이 우리에게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알아야겠습니다 . 이 강산에서 자란 우리는 이 강산을 겟세마네로 삼고 피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함이 있어야겠습니다 . 우리의 겟세마네는 우리의 피땀을 부르고 있나니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같이 하여 겟세마네 동산 , 주님 계신 성산 ( 聖山 ) 으로 나가십시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의 뒤를 따라가려네

 

1931 년 12 월 27 일 산정현교회 일요강화

 

편주 : 이 집회에는 많은 회중이 몰려들어 예배당 안에서는 겹겹이 앉아도 자리가 없어 나는 겨우 바깥 담에 앉아서 들었다 . 그 광경은 실로 주의 말씀을 듣고자 운집한 회중을 연상케 했다 .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11 장

심리학이나 교육학보다 광성( 光成), 정의 ( 正義 )여고 연합집회

 

주일학교 연합회의 월급을 받아 먹는 자로서 거기 제정된 내용의 말을 하지 않고 딴소리를 한다는 것은 쫓겨날 일일는지 모르겠으나 주일학교 선생들이 무슨 심리학이나 무슨 교육학을 배우기 전에 먼저 회개하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 믿음 없는 청년남녀들이 모여서 무슨 사업이니 , 무슨 활동이니 한다는 것은 죄악의 기계 노릇이나 하고 마귀의 밥 노릇이나 하는 결과를 내기 쉬운 것이올시다 . 그러므로 먼저 예수의 피 공로를 배우고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남녀가 사귀고 성신의 역사로서 아동들을 잘 기르기 위한 기도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내가 송도 ( 松都 ) 고보에 있을 적에 주일학교 일을 맡아 본 일이 있었습니다 . 거기서도 역시 남녀가 섞이어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떤 뻔뻔하게 생긴 여자 하나가 나에게 매우 친절하게 굴게 될 때 그의 “ 선생님 ” 하는 소리가 피아노 소리보다도 더욱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 그러자 매 주일에 한 번씩 만날 때마다 늘어가는 정은 늘어갈수록 고무줄과 같아서 뺑뺑하여 질수록 점점 더 큰 무엇이 잡아당기는 것이었습니다 . 보이지 않는 줄은 더 끌려서 선생님이라는 말을 삼켜버리고 누님이라 오빠라 부르게 하면서 죄악의 줄은 한마디의 매듭을 맺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일학교에 대한 정성은 점점 없어져 동한다는 것은 육신의 정만 이동하고 실상은 그저 누님을 만나기 위해서만 가는 것이었습니다 . 그 누님만 만나면 주일학교의 사명은 다 한 것 같이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전에는 눈에 뜨이지 않던 나의 신발이 새삼스럽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 그전에는 뒤축 나간 양말과 꿰어진 짚신도 만족하던 것이 웬일인지 세세히 그 놈이 들여다 보였습니다 . 여기서 또 사치의 마귀가 눈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 부끄러우나 가자 . 누님이 보고 싶으니 가자 . 여기서 아담과 하와가 풀 잎으로 몸을 가리웠던 것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한 주일에 한 번씩 주일학교에서나 만나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를 않아서 핑계를 만들고 이유를 꾸며 가지고서 한 주일에 세 번 , 네 번씩 딴 곳에서 만나게 되니 애정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 심화되어 누님을 놓고는 잠시도 살 수가 없을 듯이 애가 타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도 내던지고 예수님도 좀 있다가 보기로 하고 그저 그것만 붙들고 매달려 허덕이게 되어서 …… . 비로소 이것 큰일났다 .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괴로움에 몰아넣는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 오 주여 , 이놈이 이 구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소서 ” 하고 부르짖을 때는 벌써 시기가 늦어 나는 죄악의 큰 세력에 꼼작할 수 없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 나는 잠을 잘 수가 없고 밥을 먹을 수도 없어 차라리 자살을 해 보려고도 했습니다 . 이렇게 못된 것이지만 죄인의 친구이시며 또 구주이신 주님께서 구원의 손을 내미시어 겨우 그 함정에서 뛰어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 여러분들은 이런 무용한 고생을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12 장

내가 원하는 바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을 따르는 일은 다른 노릇 다 하면서 할 수는 없습니다 . 다른 노릇 다 그만두고 다른 생각 다 내어 버리고서야 주를 따를 수 있습니다 . 넥타이가 바로 매어졌나 하여 면경 ( 面鏡 ) 을 두 번 세 번 보는 사람의 성경에는 먼지가 푹푹 쌓여 있습니다 . 콧잔등에 바른 분이 지지나 않는가 하여 거울을 들고 다니면서 길에서도 가끔 가끔 거울만 보는 여자의 마음에 예수는 없습니다 . 예배당에 와서도 두루마기 동정이 어찌되지나 않나 해서 마음을 거기에 두고 , 저고리 뒤가 덮이지나 않았나 하여 잔등만 만지는 동안은 그 속에 주 님이 계시지 못합니다.

누더기를 입었으면 어때요 . 세수를 안 했으면 어때요 . 새 옷을 입거나 몸을 곱게 차리고서 옷에 정신을 빼앗겨 주를 잊는 것보다 마음대로 엎드릴 수 있고 되는대로 뒹굴 수 있는 헌 옷이 얼마나 주님에게 곱게 보여요.

나에게 가장 원하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 집도 처자도 다 버리고 입은 옷 한 벌 입은 그대로 손에 성경 , 찬미 , 두 책만 들고서 끝없는 나그네의 길을 걷고 싶은 것이올시다 . 아침에서 저녁까지 혼자서는 찬송하고 사람을 만나서는 전도를 하고 저녁 해가 서산을 넘어 갈 때는 산기슭 , 바위틈에서 마음껏 정성껏 기도를 드린 후 곱게 깔아 놓은 잔디밭에 누워 맑은 하늘 고운 별들을 바라보면서 주님 품속에 편히 잠들어 …… , 이 얼마나 복 받은 생활일 것입니까 . 나는 이걸 원합니다 . 일생에 이 생활이 내게 한 번 와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록

 

· 영계 ( 靈界 ) 의 방정식은 과학의 공식으로는 해석하지 못합니다 .

· 다른 일로 결식 ( 缺食 ) 하면 괴로우나 주님의 은혜 중에 금식하는 것은 감격 입니다.

· 영계의 위생은 세상의 위생과 다릅니다 .

· 하나님이 귀해 하시는 일은 세상이 모르고 신과 그 사람만이 아는 일입니 다.

· 심판의 최대 안목은 ① 사랑할 수 있느냐 없느냐 ②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 염소 새끼를 사랑하는 것이 신 ( 信 ) 이요 , 그를 사랑 못하면 신 ( 信 ) 이 아닙 니다.

· 문화 생활이란 것은 ① 참된 노동 ② 참된 신앙 ③ 참된 예술에 사는 것입니다.

· 예수가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이 시멘트 길같이 교만과 악에 굳어진 탓입니다.

· 성경을 못 읽는 것은 그 눈이 나쁜 탓입니다 . 

· 기도는 믿음을 달아보는 저울입니다 .

· 예수는 심령을 위해서요 , 육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 그리하면 모든 것을 그 위에 더하시리라 .

· 성신을 구하자 . ① 진리를 알기 위해서 ② 나를 알기 위해서 ③ 사명을 알고 다하기 위해서 ④ 순종할 수 있기 위해서.

· 경상도에 갔을 때 여관의 여주인이 쌀을 일다가 깨달은 것 . ① 검불은 경한 죄요 , 돌은 중한 죄 , ② 가랑 나무도 불탈 때는 눈물을 흘리더라고 .

· 하나님의 말씀은 만물 속에 잠재합니다 .

· 진리의 연석 ( 宴席 ) 에 들어가면 만사에 개안 ( 開眼 ) 합니다 .

· 신을 찾음은 우주를 전유 ( 全有 ) 하는 일입니다 . 생명이 있다는 말은 예수가 그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 예수의 피의 주사는 만병을 고칩니다 . 육의 병도 영의 병도 다 고칩니다 .

· 좋다고 생각되는 길로 가서 구원을 얻으시오 . 그러나 못 얻겠거든 예수께로 오시오.

· 술에서 , 계집에서 안전을 얻겠거든 그리로 가시오 . 그리고 나도 데려다 주시오 . 우리 동포도 다 데려가시오 . 그러나 그것은 헛된 고심이요 , 애씀이기에 나는 이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 성신의 은혜를 받으려면 죽었다가 깨어나야 됩니다 . 작은 죄과라도 철저히 쏟아버려야 새 은혜가 담기는 것입니다.

· 기도는 곧 시 ( 詩 ) 입니다 .

· 설교를 들어서 연료를 준비하고 기도로서 성냥을 삼아 불을 지릅니다 .

· 이 세상은 내 세상이 아니라 주님의 세상입니다 .

· 세상은 주님의 무대요 , 우리는 배우입니다 .

· 하나님이 찍으신 사진이 우리 눈으로 안 보인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 그 음성이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없다고 할까요 ?

· 눈 , 안경 , 현미경이 다 각각 그 작용이 다릅니다 . 우리의 눈은 너무 밝아도 , 어두워도 못 보고 원 ( 遠 ) 도 , 근 ( 近 ) 도 못 봅니다 .

· 사람은 수레이다 . 그 안에 타는 사람에 따라서 그 격이 달라진다 . 황제가 타면 만인이 절하고 …… .

· 사랑이 곧 이적이다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불타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이적이 가능하다.

· 사람은 사랑의 막대기다 . 친구란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

· 세상의 최대의 낙 ( 樂 ) 은 주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

· 태양의 힘 , 산 자에게는 활력소이나 죽은 자에게는 부패를 촉진할 뿐입니다.

· 성신은 환상이 아니라 보혜사시요 , 진리의 신이십니다 .

· 말세의 기독교에는 선지자가 나와야겠습니다 . 요한 , 예레미아 , 아모스 같은.

· 2 대 발견 ① 나에게서 불의를 깨닫고 ② 예수에게서 의 ( 義 ) 를 찾는 것입니다.

· 진리의 창세기에 기도의 불 , 이에 내가 탑니다 .

· 예배당에 들어서는 것이 곧 일대봉사 ( 一大奉仕 ) ·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도인을 보내자 .

· 성광 ( 聖狂 ) 으로 죽는 것이 똑똑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복됩니다 . 나를 때리고 죽이는 사람을 향해서 “ 저들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 저들에게 복을 내리어주소서 ” 하는 말이 입에서만 나오지 않고 끓는 피 속에서 , 세포 속에서 , 감격의 눈물 중에서 나온다면 10 년 , 20 년 더 사는 것보다 복됩니다 . 내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 이 잔명 ( 殘命 ) 이 아직도 이 땅에 있는 것은 내가 완전한 사랑을 모르고 또 실행하지 못한 탓이올시다.

· 예수는 불이요 , 좌우의 이검 ( 利劍 ) 이요 , 돌이다 . 신자는 열 ( 熱 ), 검 , 돌같이 침묵해야겠습니다.

· 예수의 3 년간 하신 일이 2000 년 동안 살아 있고 3 년간 흘린 눈물이 억억억 ( 億億億 ) 의 심령에 살아 있습니다 .

· 주색 ( 酒色 ) 의 낙 ( 樂 ) 에는 비애가 있으나 혈루 ( 血漏 ) 문둥이도 그 마음에 예수가 있으면 천국의 생활이다.

· 믿기 전에는 자기중심의 생활이고 신앙에는 예수중심 , 진리중심의 생활 .

· 신앙이 깊으면 그의 모든 말이 다 시 ( 詩 ) 다 .

· 신 ( 神 ) 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고 신앙의 대상입니다 .

· 교만한 이마 [ 額 ] 가 먼지에 엎드러지기 전에는 신도 모르고 진리도 모른다 .

· 주일날 종교와 예배당 종교 .

· 살아서 영생함을 얻으면 그는 불사영생 ( 不死永生 ) 이다 .

· 예수의 생명이 내 생명 되도록 합시다 . ( 이날에 5 시 , 10 시 반 , 12 시 , 2 시 , 7 시 , 다섯 번 설교 )

· 기도는 잠꼬대로 하지 말고 영이 깨어서 전심전령 ( 全心全靈 ) 을 바쳐서 할 것이다.

· 방인 ( 傍人 ) 에게 꺼리지 말고 남이 볼까 보아 겁낼 것도 없다 . 예수는 기도에 자유이었고 완전이었다 . 대인 교제 중에도 기도하는 방약무인 ( 傍若無人 ) 이었다.

·‘ 나 ’ 가 마귀올시다 . 그래서 ‘ 내 ’ 가 죽어야 마귀가 죽는다 .

· 소위 세상의 행복은 붙들기 전에는 그것만 붙들면 기쁠 것 같으나 붙들고 보면 슬픔이 남을 뿐이다.

· 신앙생활은 피동 ( 被動 ) 생활 , 포로 ( 捕虜 ) 생활이다 .

· 신자는 언 ( 言 ), 시 ( 詩 ), 화 ( 畵 ) 의 안 [ 內 ] 에 그리스도를 담아서 하라 .

· 나의 이때까지의 사랑은 고리대금 ( 高利貸金 ) 이었다 .

· 세상에 충분히 실패할 때 비로소 우리의 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내게 오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 영 ( 靈 ) 에 용기만 주소서 . 밥은 주께서 주신 손으로 벌어 먹겠사오니 .

· 어떤 업 ( 業 ) 을 위해서는 어디나 갈 수 있으나 영이 울 때는 예수밖에 갈 곳이 없다.

· 내가 기도할 때 남은 나를 조소한다 . 그러나 나는 그것 때문에 기도를 멈추지 않나니 너희는 나를 구하지 못하고 예수는 나를 구하시는 고로 나는 기도하고 나는 믿는다.

· 이 세상에서 밥 , 신발 , 모자 , 안경 , 다 필요하다 . 그러나 그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영의 힘 , 마음의 힘이다 .

· 기독교를 부인하려는 때는 영의 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의 일이다 .

· 각종 물건은 각기 소생처 ( 所生處 ) 에서 구할 것이다 . 그러나 영의 힘이 필 요할 때에는 오직 - 예수에게로만 갈 것이다 . 그러므로 예수에게 와서 밥이나 돈을 달라는 것은 잘못하는 일이다.

· 갈 자는 다 버리고 가라 . 그래도 나는 혼자 있지 않으리니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리니.

· 오 , 너는 어부 ( 漁夫 )! 사람의 영을 낚는 어부 .

· 나는 26 세에 시계를 한 개 샀습니다 . 첫날에는 백 번이나 틀리더니 제 3 일 에는 시계가 죽도록 안 틀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 이 세상에는 위로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 그래서 떡장사의 말만 들어도 훈훈하고 통사정만 들어도 시원해집니다.

· 주는 나의 밥 , 나의 잠 , 나의 보재약 , 나의 눈물 , 나의 땀 , 나의 세계 , 나의 우주.

· 의지할 것이 없는데 의지하려는 모순 속에서 인생은 살고 있다 .

· 참된 회개가 있기 전에는 회개가 오지 않는다 . 영의 그릇에 죄악이 담겨 있는 동안에는 천국을 담을 수 없다.

· 지옥의 말석 ( 末席 ) 에 갈 자 - ① 오래 믿는 자 ② 학자 ③ 부자 .

· 오래 믿는 자는 생명의 약동이 없다 . 그는 체면 때문에 오래 기도하지 못한다.

· 불쌍한 자 -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자 . 남을 인도하는 자 .

· 죄의 값은 - ① 마음이 상하고 ② 얼굴이 변하고 ③ 경제 파멸 ④ 조직 파멸 ⑤ 병고 ⑥ 죽음 - 최고 법원 ( 최고 학원 ) ⑦ 지옥 .

· 우리의 눈은 원불견 ( 遠不見 ), 근불견 ( 近不見 ). 너무 밝아도 너무 어두워도 못 보고 높아도 못 보고 낮아도 못 본다 . 하나님이 이런 눈에 보일 것이냐 .

· 혼자 기도할 때 무서우면 신이 멀리 있는 증거다 . 기쁘고 환하면 신이 가까이 계신 증거다.

· 병시 ( 病時 ) 는 복 될 때 - 주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때인 고로 .

· 주는 체험할 것이지 말할 것이 아니다 . 설명하는 자가 되지 말고 체험하며 사는 자가 되자.

· 값이 높은 보물일수록 나타나지 않는다 . 주의 은혜는 나타나지 않는다 .

· 목사는 가련 ( 可憐 ) - 내수외호 ( 內瘦外豪 ).

· 난지 보름 된 아이 - 피는 생명 , 생명은 피 .

· 신앙 운동은 모험 운동이다 .

· 예수를 믿지 않고 10 년을 살아 보시오 . 예수를 믿지 않고 20 년을 살아 보시오 . 그렇게 살아야 별 것 없어요 .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생명을 붙잡고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기도

 

하늘도 땅도 다 손아귀에 넣고 죽음 , 가난 , 고민 , 신고 ( 辛苦 ) 를 다 한 덩어리를 만들어서 주먹에 넣고 사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 사람은 다 광인 (狂 人 ) 이로소이다 . 이왕 미칠 바에는 진리에 미치고 그리스도에게 미치게 하옵소서 . 예수의 겸비 , 기도 , 사랑을 본받게 하옵소서 . 아멘 .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13 장

사마리아 여인

 

여자에게는 남편을 얻는다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이다 . 남편을 바로 만나야 일생을 잘 살고 그렇지 못하면 일생을 큰 고통으로 지나게 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 그리고 좋은 남편을 한번 얻어 백년해로 하는 것이 행복된 일생이고 결혼이 한번 이상하게 되어 이리 저리로 혹은 이 남편 저 남편을 찾아 전전 유랑하는 것은 여자의 일생으로서는 불행한 일생이 아닐 수 없다 . 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인 ( 요 4:1~26) 은 다섯 번 결혼을 한 불행한 여자이므로 예수님의 관심과 연민을 끌게 되었다. 

그 여자가 다섯 번 결혼하게 된 경로는 다음과 같다.

· 부자의 아들을 찾아 도회처로 시집을 갔다 . 많은 여자들이 원하는 남편은 돈 많은 남자요 , 동경하는 곳은 도회처이다 . 그래서 이 여자도 맨 처음에 돈 많은 남편을 찾아 도회처로 시집갔다 . 여자의 마음에 돈만 많으면 재미가 나고 몸과 맘이 평안할 줄 아나 돈 많은 집 아들이란 흔히 바보나 멍텅 구리가 되어 말재주도 없고 일할 줄도 모르거나 사랑이 없고 건방지고 아내를 천대하거나 종으로나 부리려는 고약한 사람들이므로 부잣집에 잘못 시집가면 일생을 눈물로 살거나 목을 메게 되는 경우가 많다 . 그래서 이 여자는 그 부잣집을 뛰쳐나왔다.

· 풍채 좋고 인물 잘난 호남자를 찾아갔다 . 그런데 이런 자들은 흔히 건달이 아니면 난봉꾼이어서 잘 생기고 말은 잘하나 일 안하고 술만 먹고 돌아다니며 쌈질만 하는 것이다 . 이런 자의 집에 가면 놀기 좋고 건들거리기는 좋으나 항상 쌀이 떨어지고 나무가 떨어진다 . 놀기나 하면서 배고픈 생활은 오래 견딜 수 없는 것이다 . 그래서 이 여자는 이 남편과도 갈라섰다 .

· 농사 집 아들과 다시 결혼을 하였다 . 부잣집 아들이나 난봉 자식은 사람 천대나 아내 구박이 일쑤임에 인간의 대우를 받고 부부 생활다운 부부 생활을 해볼까 하여 순박하고 진실한 농촌 남자를 찾아갔다 . 그러나 농촌 살림이란 여름 내내 김매고 일년 내내 물레질 , 방아질 등 일에 파묻혀 일밖에 없으니 비누 세수 한번 못하고 분 한번 못 바르고 몽당 속에서 , 검불 속에서 뼈가 부러지도록 일하는 것밖에 없었다 . 그래서 이 여자는 여기서도 나왔다.

· 상인의 아들을 남편으로 맞았다 . 장사꾼의 집은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 있음에 거리가 번화하고 옷과 물건이 얼마든지 많다 . 그래서 옷 잘 입고 몸맵시 보고 놀러 다니기가 좋다 . 그렇지만 장사 방은 공기 나쁘고 비위생적이 어서 모두가 병약이라 집안에 병인이 떠날 사이가 없고 남편은 항상 콜록콜록 하며 한약 , 양약 , 약만 밥 먹듯하며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으니 병약한 남편과는 도저히 재미를 볼 수가 없어 그 집도 버리고 뛰쳐나와 먼 곳으로 갔다.

· 시원한 바닷가 . 큰 항구로 시집을 갔다 . 부자 , 난봉 , 농사꾼 , 장사꾼 등의 남편을 얻어 재미를 못 보고 낙을 못 보고 애를 태우고 속을 썩힌 이 여자는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물 좋은 생선이나 먹어 보려고 해변으로 왔지만 항구는 쌍된 곳이요 , 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므로 기분이 상하고 구역이 나서 살 수가 없다 . 그래서 이 여자는 다섯 번 시집 가서 다섯 남편과 살아 보았지만 재미도 행복도 찾을 수 없어 다 차버리고 혼자 살고 있던 중이다.

 

그래서 “ 네 남편을 불러오라 ” 고 할 때 “ 나는 남편이 없다 ” 고 한 것이다 . 그 여자는 안락과 평안과 기쁨을 찾아 이 남자 저 남자의 가슴으로 굴 러다녀 보았지만 얻는 것은 없고 몸만 더럽힐 뿐이었다 . 그런데 예수와 이야기를 하는 중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그 물을 얻을 수 있으면 물 길러 다니는 고생도 안 하고 또 목마른 고통도 없어질 듯이 생각되니 그럼 그 생수를 나에게도 좀 달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사마리아 여인뿐이 아니다 . 오늘날의 모든 처녀와 독신 여자도 마음 속으로 하룻밤에 남편을 네 번 , 다섯 번 갈아드린다 . 고요한 밤에 자리에 누우면 여자들은 생각을 하고 궁리를 하면서 이런 남편을 얻을까 저런 남편을 얻을까 하여 하룻밤에 열 남자 , 스무 남자를 골라 보았다 , 내던졌다 , 결혼식을 했다 , 이혼식을 했다 하는 것이다 .

이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는 남편은 의지할 자요 , 믿을 수 있는 자라고 생각했고 좋은 남편을 얻으면 잘 살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 그러나 다섯 번이 나 남편을 갈아 보는 중에 남편이란 것이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래서 사마리아 한편 구석에서 사는 날까지 살다가 죽을 예정으로 거기 와서 지지한 생활을 하루하루 살고 있던 중인데 예수의 말 , 생수의 말을 들으니 다섯 명의 전 남편들보다 좋을 듯해서 예수에게 바짝 달라붙어 조르는 것이었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벌써 주셨다 . 생수를 받은 이 여인은 동이로 물 길을 생각을 버리고 사마리아성 안에 가서 동리 부인 수십 명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 이분이 선지자요 , 메시아로서 생수를 주시는 분이라고 선전하며 친구들을 데려왔다 . 생수를 마신 자는 전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 참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한 자는 동리와 친구에게 그이를 소개하고 선전하지 아니치 못하는 것이다.

실상은 여자뿐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의 마음이 다 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아서 부자 , 영웅 , 농업 , 상인 , 어부 등 하룻밤에도 그 마음이 네 번 , 다섯 번 변모를 하고 변형을 한다 . 부 ( 富 ), 호식 ( 好食 ), 명예 , 권세 등으로 만족도 얻지 못하고 평안도 얻지 못한다 . 아무리 잘 먹고 잘 입어도 거기에 소망과 기쁨이 없다.

이 여자가 최종적으로 어디서 참된 기쁨 , 생사를 초월한 기쁨을 얻었는가 . 예수를 만나 그에게서 과거의 모든 추잡한 것이 다 폭로되고 들춰지고 털어 내임을 당하고 생수로 씻어 내고 생수를 마시게 된 후에 비로소 얻은 것이다 . 사람에게서 , 인간의 거리에서 만족과 평안을 얻으려 애쓰나 고생 , 수고 , 한숨 , 눈물밖에 얻은 것이 없는 자 , 누구나 다같이 이 사마리아 여인같이 예수의 무릎 앞에 나와서 생수를 얻어야 비로소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다 . 고생과 낙망에 녹초가 된 자 , 예수의 생수를 마시어 비로소 고개를 들고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오늘날에 예수를 믿노라고 하는 자 , 껍데기로 예수를 믿어 헛되이 교회당을 찾아 다니나 예수의 생수를 마신 자 별로 없다 . 예수의 앞 , 예수의 무릎 앞에 거꾸러지는 자라야 참된 생명을 얻는다 .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의 입으로 나오는 생수를 얻어 마시었으나 오늘날 이 시대의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흐른 피 , 그의 허리에서 흐른 물을 마심이 즉 예수의 생수를 마시는 일이다.

 

1932 년 6 월 신암교회

 

 

편주 : 이날 밤 신암교회의 집회는 저녁 7 시에서 12 시까지 5 시간 계속되었는데 한 10 분간인 듯이 느껴 졌고 사람마다 남의 무릎 위에 앉았고 사람마다 사람을 무릎 위에 앉히고 들었다.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14 장

예수의 사랑 ( 마 11:25~35)

 

사람은 많은 물건을 필요로 합니다 . 그러나 모든 것을 다 함께 필요로 하지는 않아 , 밥이 필요할 때에는 밥만 구하고 옷이 필요할 때에는 옷만 찾는 것이 보통입니다 . 그런데 환경에 따라 신체의 사정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여러 가지 다른 물건을 언제까지나 요구하므로 인생은 불만 , 비애 , 한숨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 물건을 이렇게 끝없이 요구하는 인간의 몸뚱이가 언제나 항상 갈구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심령의 위로 ( 평화 ) 입니다 . 고생 , 한숨 , 눈물에 잠겨서 사는 인간은 이것을 금 ( 金 ), 여자 , 지식 , 잡기 , 우상 등으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마음을 살펴볼 때는 큰 상처가 많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각각 형편은 다르지만 큰 상처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상처를 당하지 않은 자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 천치나 바보가 아니면 다 있습니다 . 인생이란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쪽박과 지팡이를 가지고 먼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 어떤 때 높은 산 꼭대기에 이르러 목은 마르고 해는 서산에 떨어지고 다리는 아프고 힘은 없는데 물을 찾다가 쪽박까지 던지고 쓰러졌다가 어디서인지 물을 보내 주어야 힘을 얻고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 인생의 행로는 활동사진 필름같이 가다가 일시의 평안을 얻다가 죽기를 원합 니다.

전선을 접해 놓으면 전기가 통하듯이 예수의 진리에 접하여 예수의 것이 내게로 통해 올 때의 감격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 주님을 찾은 때의 기쁨은 세상의 무엇을 얻는데 비길 정도가 아닙니다.

심령의 구원을 얻는 데는 고통과 상심이 절대로 필요한 것은 비애의 선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내게 전해오기 때문입니다 . 고통에 헤매다가 얻는 믿음의 선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와 접선 통전 ( 通電 ) 하는 것입니다 . 육의 생명은 혈 ( 血 ) 로 살고 영의 생명은 사랑으로 삽니다 . 피가 없는 육은 시체요 , 사랑이 없는 영은 악령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 살려면 예수의 사랑에 접하여야겠습니다 . 세상에 귀하다는 것이 많지만 사랑이 가장 귀하다는 것은 사랑의 근원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인격의 고하를 판정하는 데 물건을 많이 가진 것을 보지 않고 사랑의 유무를 보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 그러므로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이 사랑 , 예수의 사랑입니다 . 예수의 사랑에 접한 자 , 사막에서 샘물을 얻은 것이고 암중 ( 暗中 ) 에서 광 ( 光 ) 을 찾은 것입니다 . ( 찬송 166 ‘ 주 음성 외에는 ’, 찬송 198 ‘ 구주 예수 의지함이’ )

 

예수의 사랑에 접한 자는 고 ( 苦 ) 에서 미 ( 美 ) 를 찾고 난 ( 難 ) 에서 시 ( 詩 ) 를 찾습니다 . 비애 , 고독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찾게 하기 위한 하나의 시설 ( 施設 ) 입니다 . 비애와 고통 속에서 아름다운 시의 노래를 찾는 자 , 예수에 접한 자는 하늘에 속한 자이올시다 . 언제까지나 이 죄의 세상 , 고 ( 苦 ) 의 세상 , 저주 받은 세상에 붙들리어 허덕일 것입니까 ? 예수의 사랑에 접선되어 고를 낙으로 ,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 눈물은 참된 교훈을 주는 선생입니다 . 참된 눈물은 하늘의 별 같고 해중 ( 海中 ) 의 진주 같습니다 . 이런 눈물을 추하게 땅에 떨구지 말고 귀하게 하늘로 향하여 바쳐야겠습니다 . 고 ( 苦 ) 는 나의 선생 , 빈 ( 貧 ) 은 나의 애처 ( 愛妻 ), 비 ( 卑 ) 는 나의 궁전으로 알아야겠습니다 . 솔로몬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상가에 가는 것이 낫다고 한 말은 의미가 심장합니다 . 성자와 진리의 사도들은 고 ( 苦 ), 빈 ( 貧 ), 비천 ( 卑賤 ) 을 환영하였습니다 . 내가 먹기 위하여 , 물건을 얻기 위하여 일하는 이들보다 주를 믿는 자들은 더 남을 위하고 구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 ( 찬송 198 )

여러분 비애와 탄식을 물리치십시오 . 그것에 눌리면 죽어 영망 ( 永亡 ) 입니다 . 그것을 밟고 승리의 생활을 하십시오 . 인생의 고난을 통하여 진리를 찾고 죽을 자리에서 예수를 찾으십시오 . 무거운 짐 진 자를 다 거두어 살리는 예수를 붙드십시오 .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오직 예수에게만 찾아가고 오직 예수에게만 내 무거운 짐을 벗어 맡기십시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다 불러 편안케 하시는 예수에게로 가십시다.

 

1932 년 6 월 25 일 오후 7 시 명촌교회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15 장

피의 설교

 

예수에게 씌울 가시관을 엮은 자 , 그 관을 엮노라고 손이 상하고 수고하며 여러 시간을 허비했다 . 그러나 그는 제 몸의 고생보다도 남을 아프게 하는데 열심이 나서 기쁨으로 그것을 엮었다 .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 “ 네가 남을 구할 수 있는 자이거든 거기서 내려와 먼저 네 몸을 구하여서 보여 주라 ” 고 했다 . 그러나 주님은 거기서 죽으셨다 .

여기에 진리가 있으니 세인은 영웅이나 귀인이나 먼저 자기가 살고 남을 살린다 . 이것이 과학적이요 , 합법적이다 . 그러나 하늘에서의 사랑 , 예수의 사랑은 먼저 제가 살고 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리는 것이다 . 자기의 생명을 끊어서 남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것이다 . 자기가 벗어서 남을 입히고 자기는 주리고 남을 먹인다 . 이것이 지상에 처음으로 나 타난 새 사랑의 원칙이다.

예수는 그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며 겉옷도 주고 속옷도 주고 손의 피 , 발의 피 다 뽑아주고 중심 , 심장에 고인 피와 물까지 다 쏟아 나누어주었다 . 제사장 , 장로 , 서기관이 이런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었다 . 그래서 십자가 상에서 “ 저들이 몰라서 그러는 것이오니 그들을 용서해달라 ” 고 비셨다 . 이런 역설과 전도가 이 땅 위에 어디 있겠는가 . 나를 욕하고 때릴 때에 반박 반항하는 자는 세상에 많으나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사람이 세상 사람 중에는 있을 수 없다 . 오직 하늘에서의 사랑만이 그럴 수 있다.

최후에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 이 말씀도 이 세상 사람으로는 못할 말이었다 . 예수와 같은 실패를 한 이는 세상에 또 없다 . 친구 , 친척 , 백성 이 다 버리고 가장 사랑하던 12 제자도 다 모른다고 버리고 돌아선 이런 실패는 세상에 또 없다 . 그런데 주님은 다 이루셨다고 하였다 . 이때의 이 말에 깊은 의미가 있으니 세상 사람은 살아서 일하지만은 예수의 일은 죽어서 하는 일이었고 세상 사람의 일은 살아서 시작해서 살아서 계속하고 살아서 끝맺는 것이지마는 예수님은 죽어서 시작하고 죽어서 계속하고 죽어서 끝맺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예수의 일의 방식이요 , 이것이 즉 살아서 영생하는 도이다 . 다 이루었다고 하신 후 예수는 속옷 겉옷 다 뺏기고 몸의 피와 살도 다 뺏기고 알몸뚱이만 남았다 . 그리고서 운명하셨다 . 금요일 오후 3 시 .

이때에 천지가 캄캄해지고 성전 휘장이 아래서 위로 찢어지고 지진이 일어나서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에서 자던 성인이 일어났다 . 이때에 예수를 잡아 죽이는 심부름을 한 병정들은 곧 그가 신자 ( 神子 ) 임을 알았다 . 그러나 제사장과 서기관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 성전 안에는 지성소가 있어서 거기에는 대제사장은 들어갈 수 있으나 보통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 그러나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는 순간 성전 휘장이 찢어진 후로는 누구나 다 성전 어느 곳에나 마음대로 들어가 기도하고 복 받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지진이 날 때 무덤이 갈라져서 자던 성인이 일어났다 . 모든 자고 있던 성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돌 바위 같은 마음이 깨지고 열리어 옛날의 교만 , 위대 , 자랑이 다 사라졌다 . 오늘도 자는 자 , 자는 성인이 많다 . 그들은 전에 사귀 들린 자를 떼고 부흥회를 인도했고 금식기도를 했다고 하면서도 오늘은 기도도 안하고 교회에도 잘 안 나오는 자고 있는바 이러한 성인이 많다 . 이제 이 가슴의 무덤을 헤치고 그 성인을 일으켜야 하늘의 빛을 보고 새 생명이 움직일 것이다.

 

중앙교회

 

편주 : 이 집회에서는 설교 5 시간을 포함하여 7 시간이 걸렀다 . 500 명 앉는 회당에 1,000 명이 모여 담 벽이 무너졌으므로 벽을 뜯어 놓고서 부흥회를 마치었다.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16 장

하나님의 은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나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크다 .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은혜를 은혜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 또 내 돈을 좀 내어야 귀한 줄을 아는데 그냥 주니까 좋은 줄도 모르고 귀한 줄도 모른다 . 사람이 한달 월급을 받고서는 기뻐하며 고마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생 동안 계속해 주시니 은혜로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나 거저 주신다 . 인간들은 수도 ( 水道 ) 를 돈 주어야 먹게 하지만 주님은 일생 동안 먹고 쓰는 그 많은 물을 언제나 거저 주신다 . 거저 주심에 감사하지 않는다 . 생선 한 개 사먹는 것을 생각해 보라 . 잡는 공로 , 원산서 가져오는 대가 등이 10 전인데 그 고기를 만드신 하나님께는 얼마를 바쳐야 할 것인가 . 그 많은 고기를 주님은 바다 속에 거저 그냥 놓아 두어 마음대로 갖다 먹으라는 것이니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 . 전기 값이 한 달에 1,000~2,000 원이니 하나님이 주시는 태양 빛 값을 전기 값 계산하듯 하면 매일 한집에서 얼마씩의 요금을 내야 할 것인가 . 일생 동안 쓰는 태양 값을 갚으려면 일생 벌어도 그 값을 못 갚을 것이다.

인간이 밥을 먹어야 산다고 하지만 보통 한 주일쯤이나 두 주일쯤 굶어서는 죽지 않는다 . 도인 ( 道人 ) 은 한달 굶어도 죽지 않는다고 한다 . 그러나 공기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하루도 안 먹고는 못 산다 . 공기는 5 분 간만 안 먹어도 죽는다고 의사는 말한다 . 이것이 인간이다 . 인간의 생명이 귀하고 밥이 귀하다고 해서 한 상에 500 원을 받는다 . 그런데 이 밥 한 상이 4~5 시간밖에 사람을 기르지 못하니 공기를 5 시간 먹는데 500 원씩으로 친다면 일생에 공기 값을 얼마나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인가.

이렇게 주시는 은혜를 인간은 모른다고 해서 이사야는 말하기를 “ 소는 구유를 알고 나귀는 자기 주인을 아는데 어찌 이스라엘의 내 백성은 나를 모르느냐 . 머리를 숙이고 있는 짐승은 나를 아는데 머리를 들고 있는 사람은 왜 나를 모르느냐 ” 하였다 .

세상에서 복 받은 자가 누구냐 ? 신을 아는 자요 , 세상의 영웅이 누구냐 ? 신을 아는 자요 , 두뇌가 명석한 자가 누구냐 ? 신을 아는 자요 , 성인 군자가 누구냐 ? 신을 아는 자다 .

인간이 작은 일에 감사하나 큰일에는 감사를 모른다 . 감사를 모르니 인간에 불행만 그냥 계속되는 것이다.

( 이용도 목사께서 ) 어떤 날 밥을 받아놓고 기도를 하는데 거지가 왔다 . 거지를 들어오라 해서 밥을 상에 차려주니 거지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밥을 다 먹고 나더니 고맙다고 절을 다섯 번을 하고 갔다 한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항상 밥만 주느냐 ? 매일매일 끼마다 주는 밥에 감사하는 자 있느냐 ? 거지가 밥 한 상에 절 다섯 번을 한다면 만 석 부자는 절 몇 번을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 부자가 그 곡식을 곡간에 넣고 쇠를 채울 뿐 감사하지 않는다. 1,000 석 , 100 석 , 10 석 , 1 석 하는 자도 다 신의 은혜로 받은 것이거늘 하나님께 감사는 할 꿈도 안 꾸는 것이 아닌가.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 , 하나님의 은혜라고 입으로는 지껄이나 밥 받아 놓고 기도도 안 하는 자 그 얼마나 많은가 . 다른 사람 말을 할 것도 없다 . 나도 신학교를 졸업하고서도 국수집에 가서 기도를 못했다 . 감사의 생각은 약간 있었어도 부끄러워서 기도를 못하고 눈을 뜨고 두루두루 보면서 속으로 기도의 뜻만 표했다 . 그 다음에는 국수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받아 놓고 하는 것보다는 미리 기도하고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해서 들어가기 전에 오늘 국수를 먹게 되어 감사한다고 기도했다.

집에 가서 성경 보고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을 감사할 생각이 자꾸 나서 가지가지 감사를 하다가 지구상에 금수초목을 준 것을 감사하고 물을 주신 것 , 공기를 주신 것 , 태양 빛을 주신 것을 감사하게 되었다 . 이것을 먹고 살면서도 죄를 짓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을 하나님을 알게 하고 예수를 보내어 피 , 생명 , 겉옷 , 속옷을 주고 그가 죽고 그 생명이 죽어 그 생명과 내 죽음과 바꾼 것을 생각할 때 너무 감사 감격하였다.

‘ 나는 너를 위해서 십자가를 졌는데 너는 국수집에 가서 국수 먹으며 기도하기가 부끄럽단 말이냐 ? 사람의 눈이 부끄러워 …… .  예수쟁이라고 할까 봐서 …… . 나는 십자가에 달릴 때 악평 , 저주 , 욕설을 받아도 부끄럽지 않 았다 . 내 죄 때문이 아니라 네 죄 때문에 그랬던 것인데 …… .’

이런 느낌이 들어올 때 엎드려 “ 주여 , 용서하시옵소서 .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 남을 위해서도 기도 하겠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또 국수집을 가게 되었다 . 가면서 나는 ‘ 이번에 가서는 담대하게 기도하게 하시고 곁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큰 소리로 기도하게 하옵소서 ’ 라고 기도하였다 . 들어가 국수를 받아 놓고는 남이야 보든지 말든지 엎드려서 큰 목소리로 귀한 음식 주심을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렸다 . 그리고 먹으니 국수의 맛이 어찌나 좋은지 하늘의 국수 맛이 있었다 .

 일어서니 모든 사람이 비웃는 듯하다 . 그러나 내게는 용기가 있고 기쁨이 있었다 . 그날 저녁 설교를 하나님 은혜를 감사하자고 외쳤더니 내게 얼마나 은혜가 되고 청중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내리었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예수의 공로를 알면 생활 곤란 , 무식 , 병약 , 못 생긴 남편 , 추한 아내 등이 다 문제가 되지 않고 만사에 감사하고 그저 신은 (神 恩 ) 을 감사할 수밖에 없다 .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는 100 년을 살아도 사람다운 생활을 해보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다.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17 장

새생명 (마 9:11, 12:1~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겠습니다 . 유대교회의 사업가들은 저희들만이 하나님을 높이고 백성을 구원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노라고 하는 자들의 찬송과 기도는 같은 것 같으나 그 심중은 아주 다른 것이었으니 예수를 핍박하면서도 기도했고 예수를 타살 ( 打殺 ) 할 때도 기도하면서 그리하였습니다 .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하고서는 위대한 일을 했다고 가슴이 우쭐했고 하나님께 보고하고 자랑했습니다 . 그들이 기도하면서 기껏 한 일이 예수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교만은 마귀의 용상이요 , 겸손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 소위 자랑거리가 있는 자는 교만해집니다 . 돈이나 지식이 넉넉하다는 자가 교만해지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 유대교인은 이방인에 대해서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유일신 여호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레위족에서 나오는 제사장은 면류관과 금 사슬과 방울을 가졌으나 레위족이 아닌 예수는 목수요 , 노동복을 입었고 산으로 해변으로 방황하는 자이었습니다 . 그들은 모세의 법률을 지키는데 충실했는데 예수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땄습니다 . 저희는 오직 모세의 법률을 지키면서 인정은 없었고 자기들의 것만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뽐내었습니다 . 그래서 교만의 절정에 섰습니다 . 그러기에 저희의 표준에 맞지 않는 자는 배척하고 잡아 죽였습니다 . 유대교인 , 로마교인 , 신파교인이 서로 저만 잘났다고 해서 서로 해하는 것은 가탄 ( 可歎 ) 할 일입니다 . 다른 교파에도 신앙생활의 고상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 있거든 서로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 . 교파는 골라 잡는 것이 아니고 들어가는 것이요 , 생의 경험이요 , 심령의 경험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 종교적 야심은 연애하는 눈의 질투 이상으로 잔악합니다 . 연애상의 투기는 1 인을 죽일 뿐이나 종교상의 질투는 많은 사람을 죽이며 대대로 살인을 합니다 . 새 은혜를 받는 것이 어찌 잘못이며 새 생명에 접하는 것이 어찌 이단입니까 . 우리는 날마다 새 것을 받고 새 은혜에 들어가야겠습니다 . 생수의 샘물을 퍼내고 퍼내어 새 생명 , 새 힘을 얻어야겠습니다 .

과거의 그것에만 얽매어 있어야 된다는데 혈기와 질투의 요소가 많음을 주의해야겠습니다 . 옛 것에는 폐허화한 것이 많습니다 . 폼페이와 만월대에는 마른 뼈다귀밖에 없음을 알아야겠습니다 . 유대교인의 페허에는 마른 뼈다 귀 , 무망 ( 無望 ), 무관용 ( 無寬容 ), 미워함 , 시기 , 불평 , 혈기만 있어 생명은 끊어졌습니다 . 교회는 싸움판이다 . 여기에 무슨 구원이 있겠는가 . 나는 속았다는 것이 오늘의 교회에 향하여 보내는 신도들의 부르짖음이 아닌가 . 마른 뼈다귀와 형식밖에 남지 않은 교회는 내용 있는 신앙으로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 직접 그리스도에 부딪혀야겠습니다 . 다된 줄 아는 것 꺾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들어가 거기에 녹아져서 거기서부터 움직이는 일이 오늘의 교회에 있어야겠습니다.

 

1932 년 6 월 26 일 오전 11 시 신암교회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18 장

예수의 설교 ( 누가 23:13~56 )

 

주님 고난 당하시는 때에도 두 가지 사람이 있었습니다 . 하나는 예수를 모욕하고 아프게 하기 위해서 홍포와 가시관을 만드는 자 ,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져다가 준 구레네 시몬 같은 자 . 그리고 꼭 같은 죄로써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에도 하나는 예수를 비방하고 모욕하고 하나는 예수의 무죄와 정의를 알아 참회하고 존경했었습니다 .

 주님 수난의 때에 그 많은 사람이 다 주님을 모르고 주님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오직 강도 한 사람이 주님을 알 수 있고 존경한 것은 참으로 기특한 일입니다 . 주님께서 “ 너와 함께 낙원으로 가리라 ” 고 하신 것은 그가 범한 강도의 죄가 없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 오직 주님을 알았다는 한가지 사실 때문이었으니 누구나 주님을 바로 알기만 하면 그 순간이 곧 영생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 요 17:3~ ).

 간단합니다 . 한 강도와 같이 나는 죄인이라는 것과 주님은 의인이라는 것만 알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 한 사람을 구원하려면 구원하는 그 사람은 굶고 헐벗고 죽어야 하는 것임으로 의인 선지자 예수님은 불쌍하고 억울한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 나는 살인강도라는 것과 예수님은 의인이 라는 것만 알고 믿으면 ,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이른다는 이 한가지만 깨달으면 우리는 완전히 구원을 얻은 자가 됩니다 . 이 성구는 위대한 설교입니다 . 강도의 그 말과 예수님의 그 음성은 지금도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습니 다 . 쟁쟁하게 지금도 우리 귀를 울리고 있습니다 . 오늘날의 신자라는 이들 이 설교를 듣겠다고 밀려다니고 몰려다니면서 설교 아닌 말을 설교라고 듣고 교만하여지고 완악하여지기만 하나 우리가 들어야 할 참 설교는 항상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음을 깨달아야겠습니다 . 오늘날의 교회는 설교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길 잃은 양과 같이 헛된 곳으로 방황하고 있습니다 . 예수를 바라보고 명상하고 이 설교만 들어야 할 것입니다 . 설교를 들으려고 교회에만 따라 다니지 말고 예수님의 그 음성 , 예수님의 그 산 목소리 , 몸에 큰 화를 받아 숨이 장차 끊어져 가는 괴로움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그 설교를 들어야겠습니다 .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산이 무너지고 땅이 찢어지고 대낮이 빛을 잃었습니다 . 이 위대한 설교 , 산천이 떨고 일광이 실색 ( 失色 ) 하면서 증거하는 주님의 피와 눈물의 설교를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가슴을 치면서 들어야겠습니다 . 주님의 설교에는 충격 , 위로 , 책망 , 불이 있습니다 . 예수의 눈물과 그 피 속에 녹아지는 자만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의 음성이 부딪히는 곳에서는 해골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설교 , 살과 피와 물의 설교는 모든 것을 깨치고 모든 것을 새로 만듭니다 . 죄를 밥 먹듯 하던 자가 눈알이 쏟아지는 책망을 받고 상하여 쓸어진 심령이 이 설교에서만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 다 . 이 설교 속에서만 참된 소망과 광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거늘 오늘의 신자들은 허튼 설교를 듣겠다고 예배당만 , 목사만 찾아 다니고 있으니 그 방황하는 모양 참으로 가련하기 그지 없습니다 .

 어디서든지 들으세요 . 어디나 다 성전이요 , 설교장이니 하나님과 접촉할 생각은 않고 목사만 따라다니는 신자 , 부흥회 시간에만 잠깐 회개하고 예배당 문 밖을 나서면 또 그냥 그 꼴이 되는 신자 , 화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 양을 먹일 생각은 하지 않고 굶기고 말리기만 하며 주님을 예배하자고 하면서 주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만 박는 교역자도 화를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 교역자도 평신도도 직접 주님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주님의 설교장에 모이고 엎드립시다 . 이 시간에도 나의 음성을 듣지 마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 주님의 설교를 듣는 데는 때를 택할 필요도 없고 시간을 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잘 때나 깰 때나 괴로운 때나 평안할 때나 어디서나 언제든지 들을 수가 있습니다 . 그런데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찾아 헛되이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듣고 싶을 때에만 들어보려 하나 주님은 항상 우리를 향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 반가워하거나 미워하거나 개의치 않으시고 홍포와 가시관을 만드는 자를 찾아가셔서 설교하시며 피 흘리시며 눈물 흘리십니다 .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 것이겠습니까 ? 오직 우리를 살리기 위하심이었으니 우리는 주님의 정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 주님의 이 심정을 알 수 있는 자라야 주님을 바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믿어야겠습니다 . 우리가 안 가면 주님께서 찾아오시겠으니 우리가 먼저 가야 할 것입니다 . 그러므로 또 예배당에 올 때에도 나를 위해서 말고 주님을 위해서 오고 모든 일 모든 노력도 주님의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주님을 섭섭하게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 주님을 기쁘게 하는 데서만 참 기쁨을 얻고 주님께 전체를 맡기고서 주님이 해주시는 대로 따라 사는 가운데에만 참된 안심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 받은 은혜 소중하여 주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신앙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931 년 2 월 17 일 오후 7 시 30 분 중앙교회

 

 

 

< 제 1 부 : 설교모음 >

 

 

 

제 19 장

예수의 생애

 

세상에 왔던 사람 중에서 예수같이 못나고 예수같이 못 산 사람이 없었습니 다 . 예루살렘에 집이 많되 예수가 날 집이 없었고 베들레헴에 방이 많되 예수를 누일 방이 없어 예수는 말구유에서 난 것이었습니다 . 집집에 이불도 많고 포단도 많았으나 예수의 붉은 살을 가리울 천 한 조각이 없어서 요셉이 옷을 싸가지고 다니던 봇 조각으로 예수를 덮었습니다 . 아무리 천한 인간도 날 적에는 사람의 집안 방 한구석에서 나는데 예수는 말구유에서 났으 니 이런 천대와 짐승 대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 난지 얼마 안돼서 예수는 또 잡아죽이려는 잔학한 손에 걸리어 죽을 듯 죽을 듯 위험에 떨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인간으로 생각하여 이 렇게 분하고 애처로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전도를 하실 때 그 말씀 , 그 행하신 일 , 여러 가지 이적 기사는 -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 - 사람을 사랑 해서 오직 사람을 사랑해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주님을 따른 자는 죄인 , 음란녀 , 세리 , 무식자 등 인간의 부스러기들이었습니다 . 이러한 무리들의 육체적 결점을 보충하시는 예수는 그들에게 또 죄를 회개시키고 천국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때에 성경을 잘 알고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 서기관 , 제사장 등 거룩한 자 , 학식 많고 명예 높은 자들은 예수를 대하는 태도가 냉정하고 모욕적 이어서 “ 네가 어떤 자냐 , 네가 나사렛 녀석이지 ? 몇 살이냐 ? 무슨 학교를 졸업했냐 ? 누구의 아들이냐 ? 목수의 아들이지 ? 네가 무어라고 네가 뭘 장하다고 이적이니 기사니 하고 껄떡이고 다니느냐 ” 고 조소 , 멸시 , 천대 , 시험 하다가 마지막에는 음란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음녀와 예수를 동시에 쳐죽이려고 했습니다 . 심지어는 세금 바치는 이야기로 예수를 시험하고 골려주고 걸리기만 하면 죽여 버리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는 세상에 오셔서 한 자의 글도 써서 남겨 놓은 것이 없습니다 . 마태 , 마가 , 누가 , 요한 , 바울 등이 다 글을 썼으나 예수가 썼다는 글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 예수는 당신이 땅 위에 와서 하신 일이 세상에 나타나거나 말거나 명예가 되거나 안되거나 후세 사람이 보거나 말거나 관계하지 않았고 그저 죄인 하나를 만나서 그를 친구로 삼고 의인으로 만들려는 것만이 목적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예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 그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렸노라고 일기에 써둔 것이 없습니다 . 나인성 과부의 정지가 불쌍해서 살리시고 일으키신 것이지 자랑을 하거나 책을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 막달라 마리아의 형의 죽음도 그 누이 들의 애통함이 불쌍해서 누이들을 위로하려는 한 가지 마음에서 무덤 문을 열고 나가도록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의 일은 쓰는데 있지 않고 자랑에 있지 않고 세상의 계획으로서가 아니고 하늘에서 내리는 지시에 의해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고 인도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구박과 천대 속에 살다가 전도에 나서서는 갖은 박해와 곤란을 당하시고 붙들리어서는 때리면 맞고 욕하면 말이 없이 받으시었으니 그 중심에 오직 사무친 것은 세상에서 몰리는 자와 연약한 자 , 세상에 몸 둘 곳 없는 죄인을 붙들어 안아 그를 위로하고 그를 구원하고 죽은 자를 살리려는 사랑뿐이었습니다 . 이것이 예수의 일생이요 , 예수의 사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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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1932 년도 장년 주일공과 중 전반기에는 마태복음을 공부하고 후반기에는 신 · 구약의 신앙위인전 ( 傳 ) 을 배우기로 되어 있는데 이 후반기 부분을 이용도 목사가 번역 편집했다 . 1931 년 여름 이용도 목사는 전국순회 부흥사로서 부흥사업에 헌신하며 분망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이 공과를 저술했다 . 혹서 동안 지친 몸에 비지땀을 흘리며 허덕이던 용도 목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 세상에 한가하게 피서 다니는 목사도 많은데 어쩌면 내게 이 일까지 맡기시는지 ” 하던 탄성이 귀에 쟁쟁하다 .

이렇게 쓴 글이 1932 년도 장년 주일공과로 쓰여졌다 . 이 공과를 주일마다 배우고 있으면서 겨울부터는 이용도가 이단이라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 나는 이 책을 품고 다니다가 43 년 만에 세상에 내보인다 .

 

편저자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27 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7 월 10일)

 

본문 : 창세기 12:1~5; 17:1~11

 

요절 :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장차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지라 ( 히 11:8 )

 

때와 곳 : 주전 2003 년 ( 출생 ) 1828 년 ( 사망 ) 주전 1928( 가나안에 감 ) 갈대아 우르 , 하란 가나안

 

서론 : 앞으로 반년 동안에는 성경 중에 나타나 있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 을 공부할 터인데 이 거룩한 이들의 신앙생활을 배워 우리는 크게 은혜를 받음이 있을 줄 안다 . 먼저 석 달 동안은 구약 인물 중에서 , 후에 석 달 동안은 신약 인물 중에서 공부하기로 되었다 . 이제 구약 인물 중에서는 믿음의 조상 ( 갈 3:7 ) 이요 , 하나님의 친구 ( 사 41:8 ) 라고 하는 귀한 이름을 얻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안다.

부름을 받음 ( 창 12:1~5 )

“ 네가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12:1) 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셨다 . 이 말씀에 대하여는 사람과 같이 음성으로 하셨는지 혹은 저의 심령이 무슨 영감을 받았는지 그 렇지 않으면 어떠한 환영 ( 幻影 ) 을 보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마는 하여간 무엇으로든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실히 믿을 만큼 나타났던 것은 사실이다.

 

 · 우르에서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그의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하란으로 간 것을 우리가 아는 바이다 . 우르는 바벨론 남쪽에 있는 땅으로 지금은 파사만에서 375 리쯤 되는 유브라데강 서안 ( 西岸 ) 에 무게엘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 우르는 본래부터 사신과 우상을 섬기는 몽매한 백성들이 사는 곳이다 . 여기서 자라난 아브라함도 물론 우상을 섬기는 자 중의 하나임을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은 저와 저의 후세 자손들을 위하여 그곳에서 저를 불러내시었던 것이다 . 저가 거기에 서있어 그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또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부패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마음에 큰 불안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 그래서 아버지 데라와 부인 사라 와 조카 롯과 동행이 되어 하란에 내려갔으니 하란은 메소보다미아의 한 성으로 지금도 유브라데강 지류에서 찾을 수 있는 곳이다.

 

 · 하란에서

창세기 12 장에 아브라함을 떠나라고 한 것은 저가 하란에 우거할 때의 일이니 그 아버지 집을 떠나라 한데 대하여 한 번 더 주의할 것이다 . 그의 아버지 데라는 본래 우상 숭배자로서 우상 제조업자라는 전설까지 남겨 놓은 사람인 만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사람은 아니었다 . 이 우상 숭배자의 집에서 아브라함은 그보다 더 의로운 길을 찾지 아니치 못하였다 . 진리를 향하여 갈급한 저의 영은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 그 말씀 한 마디가 옳지 못한 생활에 얽매여 신음하는 아브라함을 풀어놓아 자유롭게 하는 진리의 말씀이 되었던 것이다 . 진실로 죄악에서 고민하는 자에게 있어 진리의 말씀 한마디는 곧 저를 이끌어내는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 창 17:1~11)

 

하나님은 당신의 권위를 자랑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무리한 명령을 내리는 사나운 임금이 아니다 . 오직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사랑으로써 권고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시다 . 아브라함을 그 본토에서 떠나라고 한 것은 물론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려고 하신 것이다 . 그 내리실 바 은혜를 미리 언약하셨으니 그 중에는 “ 자손을 번성케 하여 주겠다 ” 는 것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한 큰 언약이 있었다 ( 창 12:2; 17:2 ). 그리고 이 언약의 표로 그 자손들은 다 할례를 받을 것을 규례로 세우셨다 . 하나님의 축복은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내릴 것인즉 누구든지 순종만 하면 그 축복에 참예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신앙 ( 히 11:8)

 

아브라함의 모든 행동은 그의 신앙을 잘 설명하는 것이 되었다 . 하나님의 명령을 저의 영에 접할 때에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대로 떠난 것을 보라 . 어려서부터 자라난 그 본토와 의지하고 살아오던 그 친척과 아버지의 집도 버렸다 . 저는 그 길의 방향도 묻지 않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도 염려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나아갔으니 성경에 이른 바와 같다 ( 히 11:8). 저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만 알고 곧 그것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이매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저에게는 첫째 의무가 되었고 이롭든지 해롭든지는 그 다음이었으니 그 까닭은 이를 알아도 좋고 알지 못하여 도 무방한 것이었다 . 또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언약이 있으매 비로소 순종하고 없으면 순종치 아니할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 그 언약이야 있든지 없든지 또 그것을 이루어 주시든지 아니 이루어 주시든지 관계하지 아니하였다. 왜 그런고 하니 언약을 이루어 주고 아니 주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일이요,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만이 자기의 의무인 까닭이었다 . 그런고로 진리에 대하여서는 핑계 없이 이를 순종하는 것이었다 .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한 것은 참으로 이 순종에 있었나니 본토를 떠나라 하매 ( 창 12:1 ) 갈 바를 알지 못하되 그대로 나갔고 ( 히 11:8 ) 할례를 행하라 하매 ( 창 17:10 )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되 그대로 실행하였고 ( 창 17:23 )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 하매 ( 창 22:2 ) 인정상으로 할 수 없는 일이로되 그대로 순종하였다 . 보라 ! 갈 바를 알지 못하되 , 그 까닭을 알지 못하되 , 인정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로되 ,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매 순종한다는 거기에 신앙의 오묘가 있지 아니한가 ? 진실로 신앙에 있어서는 순종이 절대의 조건이니 신앙의 생명은 곧 절대 순종에 있는 것이다.

 

 

 

신종 ( 信從 ) 의 결과

 

 

· 고난

 

진리를 순종하여 나가는 자에게 첫째로 오는 선물은 고난 그것이다 . 아브라함의 당한 바 고난을 생각하여 보자 . 고국과 친척들을 버리게 될 때 , 정처 없이 광야에서 손 노릇할 때 , 흉년과 기근으로 남의 나라에 유리할 때 , 가 정에 불화가 있게 될 때 ( 창 13:7~14:1, 16:16 ), 전쟁이 있을 때 ( 창 14 장 ), 외아들을 제물로 드릴 때 , 이러한 모든 난관을 당하였을 때에 저의 고난은 말할 수가 없었다 . 그러나 이 모든 어려운 것은 일시적 시련 ( 試鍊 ) 에 지나지 못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오는 은혜는 영원히 있을 그것이었다 . 대개 진리를 따라나가는 자에게는 일시적 고난이 없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이것으로써 연단한 자에게는 의 ( 義 ) 의 평강한 열매가 있을 것이니 ( 히 11:11 ) 우리는 마땅히 고난을 환영하여 은혜로 받을 것이다.

 

 

 

 · 언약의 완성

 

저가 만년에 이삭을 나은 것과 가나안 땅을 받게 된 것은 모든 언약이 그대로다 이루어질 큰 증거가 되었다 . 저는 결국 큰 나라를 이루었고 ( 창 12:2, 17:2; 신 26:5; 행 7:17 ) 저로 인하여 만민이 복을 받게 되었고 ( 창 12:3, 17 장 ; 갈 3:14; 행 3:25 ) 자손이 창성하였고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았다 ( 민 23:1; 출 33:1 ).

 

 

 

· 믿음의 조상이 됨

 

저는 진실로 믿음으로 그 영이 새로 나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 지금도 저의 자손은 늘어가는 가운데 있다 .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갈 3:7; 롬 4:16 ) 하고 신앙의 인물 바울도 누누이 칭송하였거니와 저는 과연 신앙에 있어서 처음 사람이다.

 

 

 

 · 하나님의 친구가 됨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 레 11:4 ). 이 거룩하신 이가 말하기를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 고 하신 것이 아니냐 .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저의 안에 계시고 저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우리도 그 안에 있기를 바라고 기도하셨다 ( 요 7:21 ). 우리는 거룩하지 않으면 안에 거할 수 없고 마음이 청결치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 마 5:8 ). 아브라함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로되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으니 ( 대하 20:7; 야 2:13 ) 저가 얼마나 거룩하였고 또 그 마음이 얼마나 깨끗하였던 가를 우리가 알 수 있다 . 저는 과연 인간으로는 처음 성결한 자이다 . 우리는 처음으로 인간의 성화 ( 聖化 ) 를 아브라함에게서 찾아 볼 수가 있게 되었다.

 

 

 

묻는 말

 

1. 아브라함이 성장한 곳은 어디입니까 ?

2. 무엇이 아브라함을 그 가운데서 끌어 내었습니까 ?

3. 주를 따라 나가는 자에게 첫째로 오는 선물이 무엇입니까 ? 

4.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한 점이 어디 있습니까 ? 

5. 아브라함이 얻은 바 귀한 이름이 무엇입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28 과

거듭난 야곱 (7 월 10 일 )

 

본문 : 창세기 25:29~34, 27:18~24, 28:10~22, 33:1~11

 

요절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마 16:26 )

 

때와 곳 : 주전 1844 년 ( 출생 ) 1698 년 ( 사망 ) 브엘세바 벧엘 하란 브니엘 세겜 헤브론 고센 ( 애굽 )

 

서론 : 야곱은 본래 가증한 이기주의자로 고국과 부모를 떠나 타향에서 20 년 동안 신고 ( 辛苦 ) 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함으로써 저의 성격은 크게 변하여 진실하고 충직하며 겸비한 신앙의 인물이 되어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 이 야곱을 변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또한 크게 변화시키시기를 바란다.

 

 

 

불의한 야곱 ( 창 25:29~34, 27:15~30 )

 

야곱은 본래 간사한 사람이요 , 이를 탐하는 자요 ,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사람이니 아래 기록한 그의 간략한 이야기를 보아서 알 수가 있다.

 · 장자권을 삼 ( 창 25:29~34 )

우리나라에서도 장자라 하면 여러 가지 특권이 있거니와 히브리 족속 중에서도 장자는 여러 가지 특권을 가지게 되었었다 . 그러면 이 장자의 특권은 무엇인가?

1. 메시야의 조상이 될 수 있음 ( 창 3:15 ) 

2. 왕과 제사장이 될 수 있음 ( 창 27:29 )

3. 허락한 땅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음 ( 창 28:14 ) 

4. 그 문중에서 주장자가 될 수 있음 ( 창 27:29 ) 

5. 아버지의 유산을 차지할 수 있는 것들이다 .

야곱은 이러한 장자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에서의 지위를 부러워하였다 . 야곱뿐만 아니라 그 어머니 리브가도 야곱이 장자권을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 그것은 에서는 쾌활하나 사람이 우직하고 야곱은 착실하고 영리한 까닭이었다 . 어떻게 되었든지 자기에게 돌아오지 아니한 것을 바란다는 것은 저의 욕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그러나 이것을 얻을 기회는 돌아왔다 . 창세기 25:29 절에 보면 에서가 주려서 피곤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기회로 하여 죽 한 그릇으로 그 장자의 권리를 사고 말았다.

 

 

 

 - 임종 축복을 대신 받음 ( 창 27:15~30 )

 

이삭이 나이가 많아 임종 때가 가까웠다 . 그때 풍속대로 임종에는 장자에게 특별한 축복을 하는 법이 있어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하기로 하였다 . 이때에 리브가는 야곱을 에서와 같이 꾸며가지고 에서의 받을 축복을 대신 받게 하였다 . 이때는 야곱의 간교한 정체가 드러날 두 번째 기회였었다 ( 창27:1~40 ). 야곱은 자기의 이를 위하여는 교묘한 수단과 방법을 다 부릴 수 있는 지혜롭고 영리한 자였다 . 먼저 의 ( 義 ) 를 구하여 신 ( 信 ) 을 지킬 것이었으나 저는 이 ( 利 ) 를 탐하여 지 ( 知 ) 를 무기로 썼다 . 자기의 이를 취하려고 불의한 수단을 썼으니 이것이 사람 앞에는 부도덕이 되었고 하나님에게는 불신의 행동이 되고 말았다 . 그 결과로 첫째 저가 받은 보수라고도 할만한 것은 형 에서의 분노였으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곧 야곱을 죽여 없앨 작정이었던 것이다 . 그래서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 이것이 저에게 내린 하나님의 징계니 저는 그 중에서 하나님의 채찍을 받아 크게 변하게 되었다 . 즉 부모를 떠나게 됨과 타향에 가서 수십 년 간난신고 ( 艱難辛苦 ) 를 받게 되었다 . 이는 다 저가 둘째 , 셋째로 받은바 죄의 보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초달 ( 楚撻 ) 이었던 것이다 .

 

 

 

야곱의 변화 ( 창 28:22, 29:30)

 

장자권은 하나님의 축복의 전부는 아니라도 최고의 선물이라고는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것을 받을 자는 마땅히 새로 지음을 받아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이 큰 은혜를 받아 감당하지 못한다 . 저의 변화는 늘 특별한 곳을 당할 때마다 일어났다.

 

 

 

 · 벧엘에서 ( 창 28:10~22)

 

이 ( 利 ) 를 위하여 교묘한 수단으로 살려던 야곱은 결국 쫓기어 하란에 피난 할 수밖에 없었다 . 그로 인하여 저의 중심에는 두려움과 괴로움과 모든 불안이 있게 되었다 . 이는 다 제 이를 위하여 불의한 수단으로 사는 자들이 받는 보수인 것이다 . 광야에 내쳐진 몸이 되어 저의 영이 지극히 가련하여 졌을 때에 저는 비로소 하나님을 꿈에라도 잊을 수 없도록 간절히 사모하였으니 여기가 저의 기념할만한 벧엘이다 . “ 야곱이 잠을 깨어 가로되 여호와 과연 이곳에 계시도다 ”( 창 28:16 ) 하였다 . 저의 욕심과 간교한 꾀에 취하였던 야곱의 영은 이제야 비로소 깨어 하나님을 찾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이르렀다 ( 창 28:17 ).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 되느니라 ” ( 잠 9:10 ). 저는 이제부터 자기의 지혜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 첫 걸음을 걷게 된 것이다 .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크게 긍휼히 여기시며 아래와 같은 축복을 하셨다.

① 네가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②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번성하리라.

③ 어디로 가든지 너를 보호하여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④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 전에 너를 떠나지 않겠노라 ( 창 28:13~15 ). 

이 축복을 받은 후에 저의 태도는 어떠하였는가 ? 저는 본래 이 ( 利 ) 를 위하여는 영리하고도 튼튼한 방법으로 성공하였으나 하나님 앞에는 그 방법으로 될 수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저는 이해를 가리는 사람들끼리 무슨 약조를 할 때처럼 미쁘신 하나님이 이미 허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조건을 붙여 가지고 그 언약을 더 튼튼하게 맺어 놓으려고 하였다.

“ 만일 하나님이 먹을 음식과 입을 의복을 주사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면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내가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 창 28:20~22 ). 이 말은 철없고 용렬 ( 庸劣 ) 한 말인 동시에 하나님에게 대한 불신 ( 不信 ) 의 태도를 설명하는 말이다 . 이미 허락하셨는데 “ 만일 …… ” 은 무엇이며 원만한 축복으로써 언약하셨는데 “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면 …… ” 이 무엇이냐 ? 또 그리하여 “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내가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 하였으니 이 신앙은 절대의 신앙이 아니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조건으로 한 조건부적 신앙이다.

우리는 여기서 갈 바를 알지 못하되 믿음으로 갔다고 한 아브라함의 신앙보다 얼마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언제든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조건으로 하고 진리를 따라 나가려는 자는 벌써 용렬함을 면치 못한다 . “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 이는 다 믿지 않는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니 너희 천부께서 너희의 쓸 것을 이미 아시니라 .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 이 모든 것을 그 위에 더하시리라 .” 벧엘은 야곱의 신앙이 완성된 곳이 아니다 . 하나님이 자기와 가까이 계신 것을 깨닫고 그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을 겨우 배운 곳이다.

 

 

 

 · 하란에서 ( 창 29:15~30:43 )

 

야곱은 벧엘을 떠나 하란에 와서 20 년이라는 짧지 아니한 세월을 라반의 집 품꾼으로 지내었다 . 그 동안 저의 앞에 오는 많은 고난을 통하여 저는 성실 과 인내를 배우는 동시에 새로운 신앙을 많이 얻었다 . 여기서 야곱은 하나 님이 같이하심 ( 창 31:3 ) 과 보호하심 ( 창 31:7 ) 을 더욱 잘 깨달았다 .

 

 

 

 · 브니엘에서 ( 창 32:1~33:17 )

 

20 년 동안 신고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영적으로 얻은 바도 많거니와 물질적으로도 적지 아니한 소유를 얻었다 . 두 아내와 열한 자녀와 그 밖의 많은 가축들을 이끌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단강까지 왔다 . 때는 밤이었으나 처자와 모든 종들은 먼저 얍복 여울을 건너 보내고 저만 혼자 이편에 남아있었으나 이는 그 형 에서를 멀지 않아에 만날 일이 크게 걱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그 도움을 구하려 함이었었다 . 그래서 지성으로 간구하다가 밤중에 천사를 만나 저를 붙들고 축복하여 주기를 간절히 구하였다.

환도 뼈가 부러지기까지 저를 붙들고 씨름하여 결국은 축복을 받고 또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 남의 것을 횡령 ( 橫領 ) 하던 야곱은 그 이름과 같이 없어 지고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 - 이라는 이름과 같이 새 사람이 되었다 .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나 저는 큰 승리를 얻었다 . 이제 야곱은 저의 생각과 수단을 다 버리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밤이 맞도록 , 환도 뼈가 상하도록 구하였으니 저는 참된 기도의 사람이요 , 따라서 완전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

참된 신앙은 완전한 지혜를 주는 것이다 . 저는 주의 시키는 대로 강을 건너 가서 형을 만날 때에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하여 많은 선물을 형에게 주었다 ( 창 22:3~11 ). 저는 본래 교만하고 탐욕이 있어 그처럼 형에게 머리를 숙일 자도 아니고 또 그처럼 많은 예물을 ( 창 32:13~16 ) 내어줄 자도 아니었다 .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한 후에는 이렇게 겸비하고 관후한 자가 되었다 . 저는 머리를 숙임으로 최후의 승리를 얻었으니 하나님 앞에도 그리 하였고 에서에게도 그리하였다 . 야곱은 진실로 크게 변하였다 .

저의 변화는 오로지 하나님을 만남에 있었다 . 네가 크게 변하려느냐 ? 너는 마땅히 하나님과 접촉하여라 . 네가 하나님과 접촉하려느냐 ? 너는 마땅히 기도하라 . 밤이 맞도록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

 

 

 

묻는 말

 

1. 야곱은 본래 어떠한 인물입니까 ?

2. 저의 가증한 행동의 보수가 무엇입니까 ? 

3. 야곱의 변화는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

4.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 

5. 야곱의 승리의 비결이 어디 있었습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29 과

용감한 지도자 모세 (7 월 17일)

 

본문 : 출 3:1~12, 4:11~13 ( 참고 출 1:1~4:17 )

 

요절 :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시는 자를 보는 것 같이하여 참았느니라 ( 히 11:27 ). 

 

때와 곳 : 주전 1578 년 ( 출생 ), 1459 년 ( 사망 ) 애굽 , 미디안

 

서론 : 모세는 하나님의 큰 선지자로 400 여 년 동안 애굽의 속박 아래 있었던 자기 민족을 이끌고 나온 선도자요 , 하나님의 율법 ( 십계명과 모든 법도 ) 을 백성들에게 전하여 준 입법자 ( 立法者 ) 요 , 구약의 첫 다섯 책을 기록한 저술가로 구약 인물 중에 가장 위대한 영웅이다 . 이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어려운 역경 가운데 어떻게 성장하였으며 어떻게 훈련을 받아서 그처럼 위 대한 역사를 하였는가 하는 그 점을 주로 생각하면서 이 공과를 배워 보자.

 

 

 

역사적 배경 ( 출 1:1~22 )

 

야곱의 아들 요셉이 팔리어 애굽에 가서 총리 대신이 된 후 그 아버지와 형 제 열한 사람과 동족 70 인을 불러다가 고센 지방에서 평화스러운 생활을 하게 하였으니 이때는 애굽의 제 18 왕조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이다 . 그러나 야곱이 애굽에 간 지 100 년이 되지 못하여 18 왕조가 폐하고 제 19 왕조가 국권을 차지하게 되매 그 첫째 왕 라마세스 1 세부터 그 나라 공신 ( 功臣 ) 요셉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더니 둘째 왕 샌티 1 세를 지나 셋째 왕 라마세스 2 세에 이르러서는 히브리 족속을 무한히 학대하게 되었다.

라마세스 2 세는 유명한 건축가였다 . 비돔과 라암셋 두 성읍과 전각들을 굉장하게 건축하는데 모두 히브리 사람을 일꾼으로 부렸던 것이다 . 그렇게 자유스럽던 목자의 생활 , 농민의 생활로부터 애굽의 노예 생활에 들어간 히브리 족속의 정치 ( 政治 ) 는 이때부터 말할 수 없는 간난신고 ( 艱難辛苦 ) 를 겪게 되었다 . 그런데 다시 넷째 왕 메넵타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 부왕의 정책을 그대로 써서 히브리 족속을 학대할 뿐만 아니라 그 족속이 점점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 출 1:10 ) 이 족속을 멸망시키려는 방책으로 사내아이가 나면 다 나일강에 던지라고 엄령 ( 嚴令 ) 을 내리었다 . 이때를 당하여 히브리 족속들은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게 되었었다 . 이에 그 응답으로 모세는 세상에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모세의 아버지를 아므람 ( 출 6:20 ), 어머니를 요게벳이라 하였고 형은 아론이라 하였으니 저는 모세보다 세 살이 위라고 한다 . 그 위로 누이가 있었으니 저가 곧 미리암이다 ( 출 2:4, 15:20 ). 물론 저희들은 다 애굽 사람의 노예로 빈천한 사람들이었다 . 그러나 저희들은 다 레위지파의 자손인 것만큼 ( 출 2:1 ) 신앙심이 돈독한 자들이었다 .

 

 

 

출생 ( 출 2:1~9)

 

애굽 사람의 학대가 절정에 달하여 “ 저희가 낳은 모든 남자는 하수에 던지고 여자는 살리라 ”( 출 1:22 ) 하는 법령이 전국에 시행되는 바로 그때쯤에 모세는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 “ 그 부모가 저의 준수한 것을 보고 있음으로 석 달 동안을 숨기어 ”( 히 11:23 ) 길렀다 . 마침내 어찌할 수없이 모세는 그만 나일강 가에 내쳐진 몸이 되고 말았다 . 그때에 그 부모와 형제들은 하나님을 불러 “ 이는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자식이로소이다 . 받으사 처분 대로 하옵소서 ” 하고 그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다 . 하나님은 그 호소를 들으시고 또 모세를 받으셨다 . 그리하여 바로의 딸을 이끌어 저를 건지게 하고 다시 그 어머니를 불러 젖먹이게 하였다.

 

 

 

모세의 훈련 ( 출 2:2~22; 행 7:21~22 )

 

모세가 그 백성을 애굽의 속박 아래에서 인도하여 내기까지는 실로 80 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난 후의 일이니 그 동안에 저는 지도자 되기에 상당한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 가정에서 ( 출 2:2~ 9 )

 

“ 여인이 아이를 가져다가 젖을 먹이니라 ”( 출 2:9 ). 그 어머니가 모세를 젖먹이는 동안에 감사하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었을지 우리가 넉넉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 “ 모세야 , 너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식이요 , 이스라엘의 자식이다 ” 하면서 껴안고 몇 번이나 저의 머리 위에 세례를 주었을 것이냐 ? 모세는 어머니의 간절한 눈물을 보면서 그 깊은 사정의 호소를 들으면서 애국심과 신앙심으로 어머니의 끓는 가슴 속에서 흘러나오는 그 뜨거운 젖을 먹으면서 저의 영과 육은 건전하게 자라났으니 이 모든 것은 저를 장차 크게 움직일 위대한 설교가 되었던 것이다 . 그리하여 마침내 “ 죽든지 살든지 나는 하나님의 자식이요 , 이스라엘의 자식 ” 이라 하는 강한 의식의 피가 저의 전신에 물결치며 돌게 되어 40 이 될 때에는 저가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 함을 거절하고 자기 민족으로 더불어 고생하는 것을 달게 여기기에 이른 것이다 ( 출 11:24~25 ). 저는 이렇게 그 가정을 통하여 자기 민족 의 조상과 그들의 하나님에게 대한 신앙을 배웠다 . 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자식 하나님의 자식으로서의 훈련이었던 것이다.

 

 

 

 · 궁중에서 ( 출 2:10; 행 7:21~22 )

 

“ 아이가 자라매 데리고 바로의 딸에게 가니 저가 자기 아들을 삼아 이름을 모세라 하여 ”( 출 2:10 ). 이제 모세는 생모에게서 양모에게로 갔다 . 빈천한 노예의 집에서 영화 가득한 임금의 집으로 들어갔다 . 노예의 자식이라는 이름을 내어놓고 왕자라는 귀한 명분을 얻었다 . 이 모든 조건은 다 저의 심신을 크게 황홀하게 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이것이 저의 심령에 일찍이 인쳐 진바 이스라엘 혼을 흘려버리지 못하였다 . 거기서 저는 “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하게 되었다 ”( 행 7:22 ). 곧 저는 애굽의 학술과 그 정치까지 다 알게 되었다 . 물론 애굽의 역사와 지리까지도 잘 배웠을 것이다 . 이 모든 것은 저가 후일에 지도자 되기에 상당한 훈련이 되었던 것이다.

 

 

 

· 실제 운동에서 ( 출 2:11~17 )

 

“ 모세가 이미 장성하여 나이 40 이 되어감에 마음에 생각이 나서 ”( 출 2:11; 행 7:23 ) 그 동포를 가보았다 . 무엇이 40 년 동안이나 애굽 문화에 젖은 저의 영을 깨워서 자기의 동족을 생각하였는가 ? 이는 일찍이 흘려버릴 수 없는 이스라엘 혼을 저의 영에 새겨두었던 까닭이다 . 그 조각사 ( 彫刻師 ) 는 물론 그 어머니였다 . 모세는 드디어 “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 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욱 좋아하여 ”( 히 11:24~25 ) 왕궁에서 뛰쳐나와 이스라엘 민족 해방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 그리하여 제 일착으로 자기 동족을 치는 애굽인 하나를 때려 죽이었다 . 이는 동포의 가련한 꼴과 애굽 사람의 강포한 행 동을 눈으로 볼 때에 저의 피가 가만이 있지 못하였음이다.

그러나 저는 그 민족 해방운동의 방법으로 폭력주의를 썼다 . 용기는 매우 장쾌하나 이는 대사 ( 大事 ) 를 치를 수 없는 혈기의 용맹이다 . 그 결과로 모든 계획이 다 실패에 돌아가고 말았으니 자기의 동포라도 자기를 따르지 않고 도리어 반항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 그뿐만 아니라 이 일이 탄로되어 저는 국사범 ( 國事犯 ) 으로 살인죄로 몰리어 바로에게 잡히게 되었다 . 인하여 모세는 미디안이라는 궁벽한 곳에 도망하고 말았다 ( 출 2:15 ).

하루는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딸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는 중에 광야의 목자들이 와서 무리하게 이 여자를 물리치고 저희의 양무리를 먹이는 것을 보 고 저는 참을 수 없어 목자들을 쫓아버리고 그 여자들을 도와 양에게 물을 먹여주었다 . 모세는 언제든지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의협심이 있는 용감한 사람이다 . 망국 민족이라는 것은 대개 그 심령이 부패하여 죄와 불의에 잘 견디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모세는 그 어머니에게서 얻은 바 참된 신앙으로 인하여 그 영이 살아있었던 까닭이다.

이 불의를 보고 견디지 못해하는 사람 , 저는 자기의 불철저한 혈기 , 지용에 끌리어 실패하기 쉬운 사람이로되 그래도 하나님은 저를 버리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쓸만한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저를 불러 경거망동 ( 輕擧妄動 ) 하는 혈기를 죽이고 영적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의 ( 義 ) 의 병기가 되게 하신 것이다.

 

 

 

 · 미디안에서 ( 출 2:21~22)

 

민족 해방운동의 선구자가 이제는 미디안 광야의 한 망명객이 되어 양무리를 치고 있다 . 40 년 동안 양을 치는 가운데 자기는 민족을 인도할 만한 좋 은 경험과 새로운 진리를 많이 얻었다.

먼저 자기의 지나간 운동의 실패에서 큰 교훈을 받았으니 첫째로 자기 민족성이 얼마나 부패한 것,

둘째로 단순한 애국심만으로는 그 민족을 구원하지 못할 것, 

셋째로 폭력으로는 영원한 승리를 얻을 수 없는 것,

넷째로 자기의 말과 행사로는 도저히 저희들을 지도할 수 없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불철저한 애국심에 포로가 되어 폭력과 자기 수단으로 무엇을 하여 보려다가 실패하고 쫓겨온 자기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자신을 멸시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 출 30:11, 40:10~13 ).

이제 저는 자기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 저는 아주 빈 그릇이 되고 어린 아이가 되었다 . 하나님은 이때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 저가 이제야 하나님의 부리시는 대로 정의와 진리만을 위하여 종 노릇할 사람이다 . 자기의 혈기와 감정으로 날뛸 사람이 아니었다.

 

 

 

임명 ( 출 3:4~4:20 )

 

이제 상당한 훈련을 받은 저는 다시 파송 ( 派送 ) 을 받게 되었다 . “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 출 3:12 ). “ 이제 너는 가거라 . 내가 네 입을 도와 말할 것을 가르치리라 ”( 출 4:12 ). 이것은 모세를 임명하는 그 자리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 모세의 뒤가 얼마나 든든하냐 ! 이 말을 듣고 모세의 용기가 얼마나 더하였을 것이냐 . 그러나 모세는 “ 주여 , 이전에나 지금이나 저는 구변이 없어 입도 둔하고 혀도 둔한 자니이다 ”( 출 4:10 ), “ 가히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 출 4:13 ) 하였다 . 저는 실상 말과 행사가 능한 사람이었으나 그것은 다 무익한 것이었음을 저가 기억하였던 것이다.

결국 저는 애굽에 갔다 (4:20). 자기의 사업을 이루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임으로 그 뜻을 순종하노라고 가는 것이었다 . 그 민족운동을 자기의 할 바 일이라고 하던 그 모세와 이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이 모세와는 하늘과 땅의 차가 있다 . 저는 다만 하나님의 부리시는 기계만 되어 성의 ( 聖意 ) 대로만 순종함으로 자기의 의무를 다하였다 .

 

 

 

묻는 말

 

1. 모세는 그 근본이 어떠한 사람입니까 ? 

2. 모세가 가정에서 무슨 훈련을 받았습니까 ? 

3. 궁중에서 받은 훈련은 무엇입니까 ?

4. 실제 운동에서 실패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

5. 미디안 이전 모세와 이후 모세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30 과

여선지 드보라 (7 월 24 일)

 

본문 : 사사기 4:1~15

 

요절 : 낙담한 자에게 이르기를 굳세어 두려워하지 말라 ( 이사야 35:4 ) 

 

때와 곳 : 주전 1351 년 에브라임 ( 드보라의 집 )

 

서론 : 드보라는 일개 연약한 여자로서 종교와 도덕이 부패하고 정치가 문란하여져서 적국의 침해를 받아 전국이 환란 중에 빠져 있을 때에 여 ( 女 )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사사로 재판하며 백성을 다스리었으며 전사로 직접 출마 ( 出馬 ) 하여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한 성스러운 여걸이다.

 

 

 

이스라엘의 쇠퇴

 

이때는 이스라엘에게 일찍이 망하여 형적 조차 없던 가나안이 다시 일어나 이스라엘을 압제한지 20 년이나 되었다 . 가나안 왕 야빈은 무술이 능한 사람 으로 철병거를 900 채나 가졌고 또 용감한 장수 시스라가 있는 까닭으로 이스라엘은 그 손에 잡히어 심한 고초를 겪어왔다.

 

 

 

 · 하나님을 저버림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쳐서 정복할 그때에는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법도를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저희와 같이 계시게 되어 무한히 강하였었다 . 그럼으로 저희를 대적할 원수라고는 없게 되었던 것이다 . 그러나 거기 서부터 한 100 년 지나오는 동안에는 저희들이 “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 ”( 사 4:1, 3:12, 3:7, 2:11 ) “ 그 열조는 여호와의 계명을 준행하였으되 이 백성은 그렇지 아니 하였다 ”( 사 2:11, 2:17, 3:7 ). 참 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백성은 스스로 우둔하여지고 몽매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 숭배함

 

하나님을 저버린 백성의 우둔과 몽매는 저희로 하여금 사신과 우상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이다 . 이방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은 저희의 죄와 욕심을 만족하게 하여 주는 신이 되고 말았다 . 그리고 사치와 음란과 타락이 저희의 생활이 되었다 . 이로 인하여 나라 형편은 연약하여지고 정치는 문란하여져서 원수들의 압제를 받되 어떻게 할 힘이 없었다 . 망하는 백성은 먼저 그 종교부터 부패하고 신앙부터 망하는 것이다.

 

 

 

· 여호와께 부르짖음

 

야빈왕이 20 년이 지나도록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게 하기를 심히 하는 고로 여호와께 부르짖더라 . 이제 저희의 죄와 욕심을 만족시키려고 할지라도 가나안 왕이 심히 괴롭게 하는 데는 견딜 수가 없었다 . 이제 저희는 예전 애굽에 있을 때에 저희 조상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같이 하나님께 슬피 부르짖어 은혜를 구하였다 .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라 , 저희의 거듭거듭 지어오던 죄악도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저희의 사정을 들으셨다 . 그래서 한 사자를 보내어 저희를 구원하였으니 이 사자가 곧 드보라 여사 ( 女史 ) 이었다.

 

 

 

선지자 드보라

 

드보라는 비록 연약한 여자이나 저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있었고 그 입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으며 저는 진실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모든 죄와 불의를 판단하며 악한 세대를 책망할 선지자가 되었던 것이다 ( 요 16:8 ).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는 가운데서는 남자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요 , 여자도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토하는 입이 없고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자가 없으매 하나님께서는 드보라를 택하여 진리의 사도를 만드신 것이다 . 여자 들이여 ! 무엇을 연약하다고 하는가 ? 성령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가질 것이다 . 그리하면 곧 선지자요 , 통치자요 , 전사 ( 戰士 ) 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사사 드보라

 

드보라는 진리를 입으로 선전하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종려나무 아래 앉아서 백성들의 죄와 의를 재판하며 그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 삿 4:5 ).

 

 

 

 · 재판

 

진리는 죄와 불의를 묵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죄와 의를 분명히 심판하고야 만다 . 하나님은 일점일획 ( 一點一劃 ) 이라도 어두움이 없으사 양과 염소를 좌우로 갈라 놓는 것처럼 분명히 판단하신다. 

 

 

  · 지휘

 

모든 백성은 종려나무 아래에 와서 드보라의 재판을 받았다 . 그리고 그 지휘를 받았다 . 저희들의 국권회복이야말로 진실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 참된 승리를 얻고자 하는가 ? 그러면 먼저 드보라 (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 ) 앞에 와서 판단을 받으라 .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것이다 .

 

 

 

 · 승리

 

‘ 드보라 종려나무 ’ 는 승리의 나무라는 뜻인데 늘 승리하는 드보라가 그 종려나무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되었으므로 그 이름을 붙여 드보라 종려나무 라고 하였다 . 그렇다 . 드보라는 언제든지 승리를 기필 ( 期必 ) 하고 일을 하는 것이다 . 우리는 마땅히 이 말씀으로써 우리 심중에서 일하게 할 것이다 . 이 말씀은 우리의 속 깊은 곳에서 역사하고 있는 모든 죄악을 심판하며 또 끌 어내어 진압해 놓고 멸망시키는 진리의 칼이다 . 가나안은 곧 우리 속에 있는 정욕이다 . 한때는 은혜를 받아 다 없어진 것 같이 믿었던 것이지만 믿음 이 식어갈 때에 저는 다시 머리를 들고 일어나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큰 원수이다 . 이 원수가 너의 속에 있는 것을 네가 승인하느냐 ? 그러면 이 말씀 으로써 역사하시게 하라 . 너는 곧 승리를 얻으리라 .

 

 

 

전사 드보라

 

· 권위

 

드보라는 사람을 보내어 아비 노암의 아들 바락을 불러다 놓고 너는 남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1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서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싸우라고 명령하였다 . 여기서 우리는 연약한 여자이지마는 호걸스럽게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한 것을 볼 수 있다 . 저는 어떻게 그렇게 권위가 있었으며 용감스러웠던고 . 이는 저희에게 무슨 지혜나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저의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이 강하고 능력 있는 까닭이었다 . 진실로 하나님의 성신을 받고 그 말씀을 가진 자는 그가 여자이든지 남자이든지 참으로 권위 있는 자가 될 것이다 . 드보라의 명령을 들은 바락은 힘있는 장수이었으나 “ 당신이 나와 함께 가시면 내가 가려니와 함께 가지 아니하시면 나도 가지 않겠습니다 ”( 삿 4:8 ). 이것이 저의 대답이었다. 

 

 

 

· 용감

 

드보라는 다시 용감스럽게 “ 내가 너와 같이 갈 것이다 ” 하고 나섰다 . 바락은 하나님의 신이 중심에 없었으매 굳센 장수였으되 비겁함을 면치 못하였고 드보라는 중심에 하나님의 신이 계셨으매 약한 여자이로되 강하고 담대한 용사이었었다.

 

 

 

이스라엘의 승리

 

“ 일어나라 . 여호와가 오늘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셨다 . 여호와 네 앞에서 인도하신다 ” ( 삿 4:14 ).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이 드보라를 통하여 나타났다 . 바락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나갔다 . 비겁한 바락이나 드보라 ( 말씀 ) 로 인하여 큰 용기를 얻어 나가 싸웠다 . 이에 시스라가 크게 패하여 도망하다가 마침내 야엘이라는 여자의 손에 죽었다 . 마침내 바락은 승리를 얻었다 . 그러나 그 대적은 원래 바락의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이는 다만 드보라로 말미암아 승리를 얻은 것이다 . 진실로 우리의 참된 승리는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고 오직 성신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성신의 말씀으로써만 인간의 모든 죄악을 정복할 수 있으며 또 그 모든 자랑과 불의를 박멸하고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묻는 말

 

1. 아래 있는 이름들의 신령한 뜻은 무엇입니까 ?

    가나안 , 드보라 종려나무

2. 가나안의 왕과 그 대장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

3. 이스라엘이 몇 해 동안이나 가나안의 압제를 받았습니까 ? 

4. 드보라는 어떤 직분으로 활동하였습니까 ? 

5. 어떠한 자가 실상 약한 자입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31 과

나오미와 룻 (7 월 31 일 )

 

본문 : 룻 1:6~10, 14~22

 

요절 : 각 나라 백성을 한 혈맥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 행 17:26 ).

 

때와 곳 : 주전 1181 년부터 주전 1173 년까지 베들레헴 , 모압

 

서론 : 이 공과를 배우려고 하면 먼저 룻기를 잘 읽어야 할 것이다 . 이 룻기는 이방 여자가 주인공이 되어 인간의 아름다운 덕과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과 그 오묘하신 경륜을 나타내어 보인 책이다 . 우리는 이 가운데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진리 ( 요 3:16 ) 와 진정한 종교는 어 떤 나라와 어떤 민족에게든지 한결같이 구원의 복음이 되는 것을 배울 수가 있다 . 옳다 . 참된 종교에는 국경도 없고 완전한 신앙에는 민족적 차별도 없는 것이다.

 

 

 

나오미의 비애 ( 룻 1:1~10 )

 

지금으로부터 한 3000 여 년 전 , 즉 주전 1180 년경에 유태 전국을 휩쓸던 병 란 , 기근으로 인하여 유대의 모든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 이 때에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의 집에서도 동쪽 모압 땅으로 나가게 되었다 ( 룻 1:1 ). 그러나 주를 저버린 백성들이매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손을 들어 재앙을 내리시니 저희의 괴로움이 심하였다 . 흉년을 당하였으매 기갈 ( 飢渴 ) 이 심하였고 이방의 객 ( 客 ) 이 되었으매 외로움이 또한 심하였을 것이다 . 이러한 처지에서 남편이 죽고 ( 룻 1:3 ) 이어서 이방여인에게 장가들인 두 아들까지 죽었다 ( 룻 1:4~5 ). 이제는 모든 소망도 가고 자랑도 식었다 . 방랑 , 기근 , 멸시 , 사망의 풍랑 가운데서 떠돌아 다니다가 남은 것은 슬픔 과 외로움이 가득한 늙은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나오미의 신앙

 

· 하나님을 기억함

 

비애와 고독한 가운데서 저는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여 양식을 주셨다 ”( 룻 1:6 ) 하는 말을 듣고 자기의 하나님을 다시 바라고 의지하였다 . 진실로 참된 신앙은 세상의 모든 소망과 자랑이 끊어지는 그때에 생길 수 있는 것이요 , 하늘의 위로는 세상에서 이렇게 외로워진 자에게 풍성하게 내리는 것이다.

 

 

 

 · 모압을 떠남

 

저는 두 며느리를 위하여 복을 빌고 ( 룻 1:8~9 ) 이별하고 나왔던 옛 나라를 찾아가려고 나섰다 . 저가 이렇게 모압을 떠나는 것은 신앙의 큰 용기이다 . 모압은 우상의 나라이매 주위에 둘러 사는 사람들은 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 이제 이런 죄악의 나라에서 이방의 두 며느리를 의지하고 구차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 , 자기 동포들에게 가서 백골이라도 그 땅에 묻히려고 하는 것이 저의 소원이었던 것이다.

 

 

 

 · 저의 감화력

 

나오미는 자기가 믿는 종교로 말미암아 모든 모압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그 두 며느리에게까지도 비웃음과 업신여김을 받았을 것이다 . 그러나 저는 그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 가운데서 살면서도 그 미신에 물들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모든 슬픔을 이겨가면서 오히려 두 며느리를 위로하고 친 딸과 같이 사랑하였던 것이다 ( 룻 1:8, 1:11~12 ). 그러므로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의 신앙에 감동되어 친척과 본토를 버리고라도 어머니를 따라가려고 나선 것이다.

나오미는 저희들을 위하여 복을 빌고 돌아가라고 하였으나 통곡하며 떨어지기를 싫어하였다 . 오르바는 의지가 박약 ( 薄弱 ) 함으로 마침내 떨어져 다시 모압의 사람이 되고 룻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오미와 나오미의 하나님을 따라갔다 . 환난 중에서 굳게 믿고 견딤과 자기의 슬픔 가운데서라도 남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은 크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이다.

 

 

 

 

룻의 신앙 ( 룻 1:11~22 )

 

 · 지위

 

룻은 본래 유대 사람에게는 개와 같은 천대를 받는 이방 사람이요 , 우상을 섬기는 미개한 족속의 여자이다 . 저는 나오미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찾았고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예로 들어갔다 . 저는 아브라함과 같이 그 본토와 친척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기 위하여 나오미를 따라나선 것이다 . 이것은 룻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요 , 시어머니에게 대한 효성이다.

 

 

 

· 효성

 

저는 위로 하나님을 믿고 아래로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공경하였다 . 나오미가 모압을 떠날 때에 룻을 보고 “ 동서와 같이 네 고향과 네 위하던 신에게로 돌아가라 ”( 룻 1:15 ) 고 권할 때에 “ 어머니 , 나보고 어머니를 떠나라고 권하지 말아주세요 . 어디든지 어머니가 가시면 나도 갈 것이요 , 어머니가 머무르시면 나도 머무를 것입니다 . 어머니의 백성은 내 백성이요 , 어머니의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아닙니까 . 어느 곳에서든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면 나도 거기서 죽어 같이 묻힐 것입니다 . 죽음 외에는 무엇이든지 나를 어머니에게서 끊지 못할 것입니다 ”( 룻 1:16~17 ). 이 말로써 저의 신앙과 효성은 충분히 나타냈다. 

 

 

 

· 근면

 

하나님에게 대한 신앙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나타나고 자기 의무에 대하여 근면하는 데서 나타난다 . 천대와 멸시가 자심 ( 滋甚 ) 한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믿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하게 남의 밭에서 보리 이삭을 주워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 진실로 잘 믿는 사람은 노동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따라서 마땅히 근면할 것이다.

 

 

 

룻의 상급 ( 룻 3:1~4:2 )

 

흉년과 죽음은 저희들에게 큰 환난을 가져다 주었다 . 그러나 저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부르셨으매 그 모든 슬픔과 근심은 합동하여 유익함이 되었다 ( 롬 8:28 ).

 

 

 

 · 귀인 ( 貴人 ) 의 부인이 됨

 

그때에 베들레헴에는 보아스라는 귀인이 있었다 . 룻이 이삭을 줍던 밭의 주인이 곧 그 사람이다 . 룻은 마침내 이 부요하고 인자한 귀인의 부인이 되어 저의 상속을 받게 되었다.

 

 

 

 · 대왕 ( 大王 ) 의 조상이 됨

 

저가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다 .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 되는 이새를 낳았다 . 이스라엘의 왕 중에서 제일 훌륭한 다윗왕의 조상 할머니가 되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 구세주의 조상

 

마태복음 1:1~17 절에 있는 예수의 족보를 보면 예수의 조상 중에 여인의 이름 넷이 기록되어 있는데 룻이 그 중에 하나이다 ( 룻 4:18~22 ). 이방의 천한 여자로서 예수님의 조상 할머니가 되었으니 그 영광이 만세에 쇠하지 아니하리로다 ( 엡 2:11~12; 골 1:21 ).

 

 

 

신령한 뜻

 

·‘ 엘리멜렉 ’ 은 그 마음을 가리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에 잡혀가서 죽게 된 그 많은 무리를 대표한 사람이다 . 저는 포로로 잡혀가서 후손이 없이 그대로 죽어버리고만 것이다.

·‘ 나오미 ’ 는 기근의 슬픔 가운데 있어 이리저리 방랑 생활을 하는 그곳에서 비로소 자기의 본향과 하나님을 찾아 돌아가는 ‘ 나머지 선민 ’ 을 대표한 사람이다.

·‘ 오르바 ’ 는 믿지 아니하는 이방 사람으로 특별한 기회를 얻어 하나님을 알기는 하였으나 끝까지 믿어 나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다시 이방신에게로 돌아가 영원히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는 백성을 의미한 것이다.

·‘ 룻 ’ 은 하나님을 찾는 교인들을 대표한 사람이다 . 저는 본래 이방 사람으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허락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 그러나 나오미의 하나님을 택하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찾음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예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 저가 일찍부터 섬겨오던 이방신들을 저버리며 오랫동안 맺어오던 친척 관계를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기 위하여 한 행인이 되어 순례의 길을 떠났으니 저의 영 ( 靈 ) 은 보이지 않는 보아스를 바라 마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보아스는 룻의 친척도 되고 구속할 자도 되어 그에게 새 이름을 주어 택한 백성 중에 한 자리를 얻게 해줄 사람이었던 것이다 . 룻은 버림을 받은 민족에게 속한 여자이다 . 빈궁하며 미개한 사람이다 . 가나안에서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들에서도 자기의 양식을 위하여 거둘 권리가 없는 가련한 여자이다 . 그러나 그 용감한 신앙은 이 모든 조건을 짓밟고 뛰어올라간 것이다 . 그래서 결국 그 지경에 제일 영귀 ( 榮貴 ) 한 자리를 얻게 되었 던 것이다.

·‘ 보아스 ’ 는 예수를 표시한 사람이다 . 그는 유대의 정통 혈족에서 났다 .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허락을 다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 그는 이 모든 허락하신 복을 이방 여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 그리고 그를 들어 높은 자리를 준 것이다.

 

 

 

묻는 말

 

1. 나오미의 가정이 어찌하여 모압에 가게 되었습니까 ? 

2. 나오미가 몇 해나 모압에 있었습니까 ? 

3. 룻의 신앙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 

4. 룻의 믿음의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

5. 나오미의 가장 큰 일한 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32 과

기도의 어머니 한나 (8 월 7 일)

 

본문 : 사무엘상 1:10~18, 1:24~28

 

요절 : 내 아들아 네 아비의 교훈을 들으며 네 어미의 법도를 버리지 말라 ( 잠 1:8 ).

 

때와 곳 : 주전 1171 년 ( 사무엘 출생 ), 1160 년 ( 사무엘 부름을 받음 ) 라마 ( 사무엘의 출생지 ), 실노 ( 성전 소재지 )

 

서론 :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모세의 다음 가는 대선지자요 , 제 2 유대 건국자라고 하는 위인이다 . 이러한 사무엘을 낳은 어머니 한나가 곧 오늘 공과의 주인공이다 . 한나는 실로 믿는 마음이 돈독한 부인이다 . 모든 위로와 축복은 다만 하나님에게만 있는 줄 믿고 의지하고 바랬다 . 저는 공중 예배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에 매우 충실하였으나 그러나 그로써 만족하지 못하였다 . 그리하여 혼자 성전에 나가 기도하였다 . 저는 기도로써 큰 만족을 얻는 사람이었다.

 

 

 

한나의 고통 ( 삼상 1:2~9 )

 

한나의 고통은 참으로 두 겹 고통이었다 . 자식이 없는 것이 그 첫째요 , 첩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는 것이 그 둘째이었다 . 그의 남편 엘가나는 좋은 사 람이나 저는 두 부인을 두었으니 이것이 그의 큰 흠집이었다 . 엘가나가 한 나 사랑하기를 첩 브닌나보다 더하는 까닭으로 ( 삼상 1:5 ) 브닌나는 한나를 미워하여 ( 삼상 1:6 ) 어떤 기회에든지 한나의 자식 없음을 조롱하고 멸시하였던 것이다.

 

 

 

한나의 기도 ( 삼상 1:10~12 )

 

저는 그 슬픈 마음을 오직 하나님밖에는 호소할 데가 없었다 . 저는 남편의 다정한 말에도 위로를 얻지 못하고 공중 예배와 제물을 드리는 데도 만족이 없었다 . 저의 속에는 슬픔과 외로움이 가득하였다 .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그런 형편에 있을 때에 혼자 슬퍼하며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고 그는 자기의 모든 사정을 묶어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갔다 . 그가 당한 형편은 ( 자식이 없는 것 ) 그때에 있어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요 , 사람들에게 조소와 멸시를 받는 일이었다 . 그러나 저는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고 구차하게 사람들에게 위로와 동정을 구할 수도 없었다 . 다만 피곤할 때에 반석이 되시며 환난의 때에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에게 가서 저의 사정을 호소할 뿐이었다.

이 기도야말로 저에게 큰 일인 동시에 큰 위로요 , 큰 소망이었다 . 저의 생활은 곧 기도로써 지탱해 가는 것이었다 . 슬픔과 외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기도보다 더 좋은 일은 없는 것이다 .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엎드릴 때에 어떠한 문제이든지 시원한 해결을 얻을 수가 있다 . 이로 보건대 우리가 당하는 모든 난관의 진정한 의미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 절망 가운데 있어 슬퍼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까닭이다 . 상한 심령을 가진 자여 , 하나님을 찾으라 . 긍휼과 자비로써 너를 고쳐 주시리라.

 

 

 

한나의 기도는 어떠한 기도였던가?

 

(1) 한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였다 . 진정으로 구하는 바를 하나님이 물리치지 아니 하실 줄을 알았다 . 또는 자기 앞에 당하게 되는 모든 일은 결국 합동하여 다 유익하게 하여 주실 줄을 믿었었다 . 저는 무엇이든 지 구한 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고 하는 기도였다 ( 삼상 1:18 ).

 

(2) 저의 기도는 열심으로 또 헌신적으로 하는 기도였다 . 저가 심히 애통함 으로 기도할 때에 ( 삼상 1:10 ) 중심에 끓어오르는 간절한 소원은 저를 흔들어 미친 것같이 술이 취한 것같이 되게 하였다 ( 삼상 1:13~14 ).

 

(3) 저의 기도는 오래 참으며 끝까지 계속하는 기도였다 . 그의 기도는 결단코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욕망을 아뢰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다 . 적어도 그의 일생을 통하여 그 충심에 사무친 간절한 소원이라 . 주의 긍휼을 얻기까지 변함없이 간구한 것이었다.

 

(4) 저는 겸비함으로 구하였다 . 저가 기도할 때에 몇 번이나 거듭 자기를 가르쳐 “ 주의 종이 , 주의 종이 ”( 삼상 1:11 ) 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자기는 하나님에게 속한 종으로 또 자기는 하나님에게 바치어 제물을 삼을 자인 줄을 안 까닭이었다.

 

 

 

한나가 오해를 받음 ( 삼상 1:13~18 )

 

한나는 울며 열심으로 입을 들썩거리었으나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 그 당시에는 묵기도 ( 默祈禱 ) 는 드물게 하였다 . 그러므로 큰 기도 소리가 있어야만 참 기도로 보는 엘리의 눈에는 이상하였다 . 공연히 울고 흐느끼며 또 중얼중얼 열심으로 입술을 놀리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으니 술이 취한 줄로 알고 “ 술을 멀리하여라 . 네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취하여서 야단 하겠느냐 ”( 삼상 1:14 ) 고 권고하였다 . 물론 엘리가 한나의 진정을 이해치 못하였던 것이다 . 중심에 너무 간절한 무엇이 있을 때에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호감을 주도록 표현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 그래서 오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한나의 사정을 알아 줄만도 하고 동정하여 줄만도 한 그 제사장이 그 처럼 저를 취한 자라고 할 때에 저는 얼마나 슬퍼하였으며 또 실심 ( 失心 ) 하 였겠는가 ? 그러나 저는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저의 중심을 아실 줄을 앎으로 겸비하게 대답하였다 . “ 제사장이여 , 나는 술을 마신 것이 아니올시다 . 나는 슬픈 여인이매 내 속에 있는 사정을 여호와께 호소하는 것이올시다 . 저를 못된 계집으로 여기지 말아 주세요 ”( 삼상 1:15~16 ) 하였다 . 엘리는 그때에야 자기의 판단이 잘못되었던 것을 깨달았다 . 그러므로 곧 “ 안심하십시오 .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삼상 1:17 ) 하였다 . 남의 영혼을 인도하는 자들 중에 신도들의 신앙과 그 태도를 잘못 판단하여 큰 실수를 하는 일이 종종 있다 . 자기의 신앙 경험이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인도자라 하여 다른 사람을 인도할 사람인 줄만 자처하여 가지고는 오히려 양들의 진정한 심령을 상하게 하는 수가 없지 않은 것이다 . 크게 조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

 

 

 

 

아들을 하나님께 드림 ( 삼상 1:24~28 )

 

저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아들을 낳게 되매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 이는 하나님께 구하여 얻었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 저는 약속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 이 아이를 여호와께 바치되 종신토록 드리나이다 ”( 삼상 1:18 ) 하였다 . 처음으로 귀한 자식을 얻어 그 위로와 기쁨이 오죽하였으랴마는 이것으로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자기가 소유하지 아니하고 곧 주께 드려 하나님의 뜻대로 평생을 보내게 하였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댓 살 때부터는 엘리의 앞에서 여호와께 수종을 들고 있었다 . 오늘에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 , 또한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아 크게 기뻐하는 자 , 또 받은 후에는 다시 하나님께 드려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가 적지 아니하다 . 이 어머니가 그 아들을 가져다가 바치는 데는 세 가지 생각이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다.

(1) 이는 주의 것 - 여호와 내게 주셨으니 ( 삼상 1:27 ) 

(2) 이는 마땅히 바칠 것 - 약속하였으니 ( 삼상 1:11 ) 

(3) 이는 영원히 바칠 것으로 알았다 ( 삼상 1:22, 28 )

부모가 아이를 하나님께 드릴 때에 쓰는 봉헌사 ( 奉獻辭 ) 를 크리소스탐 (J. Chrysostom) 이 우리에게 준 것이 있으니 그 글은 아래와 같다 .

 “ 나의 아이는 본래 영원히 당신의 종이 될 것이오매 나는 나의 모권 ( 母權 ) 을 다 내어놓습니다 . 나는 다만 이 아이가 나에게 무슨 짐을 지울 때에만 내가 어머니 되기를 원하옵고 그 다음에는 온전히 주께 드리나이다.” 이런 철저한 태도로 하나님께 드린 아이에게 거룩한 감화가 크게 미칠 것은 의심 없는 일이다.

 

 

 

아들에게 미친 감화 ( 삼상 2:18, 3:19~4:1 )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랐다 . 당시에 모든 백성이 다 타락하여 죄 가운 데로 들어가고 제사장의 두 아들까지 성전 안에서 죄를 범하고 있었다 ( 삼상 2:12~17, 22~24 ). 이때에 사무엘이 거룩하게 장성함은 그 어머니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이다 . 사무엘은 믿음의 어머니 , 기도의 어머니를 본받아 저가 사는 동안에 믿음의 사람으로 기도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끼쳤다 ( 삼상 7:5~8, 8:6, 15, 11, 12:19, 23 )

 

 

 

묻는 말

 

1. 엘가나와 한나가 해마다 어디로 제사하러 갔었습니까 ? 

2. 한나의 슬픔이 무엇입니까 ?

3. 한나의 기도에 대하여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 

4. 한나가 그 아들을 위하여 한 일이 무엇입니까 ? 

5. 한나의 참된 기도를 누가 오해하였습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33 과

실패한 사울 (8 월 14 일 )

 

본문 : 사무엘상 9 :15~17, 25~27, 10:1, 19:9~11, 31:1~4

 

요절 : 그런즉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고전 10:12 ) 

 

때와 곳 : 주전 1102 년 ( 사울이 왕 됨 ) 1063 년 ( 사망 ) 기브아 믹마쓰 , 길보아 , 미스바

 

서론 : 사울의 사적은 사무엘의 말년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 이스라엘의 큰 예언자요 , 사사인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을 세워 사사를 삼았다 . 그러나 그 아들들은 그 아버지와 같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 못되어서 백성들이 저를 실험하여 마침내 사무엘에게 우리에게도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청하였다 . 그러나 사무엘은 “ 왕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사를 저버리는 것인즉 옳지 아니하다 ” 하여 왕정 ( 王政 ) 이 얼마나 백성에게 가혹한 것을 설명하여 주었다 ( 삼상 8:10~18 ). 결국 백성들이 듣지 아니함으로 왕을 세울 수밖에 없이 되었다 . 그래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되게 되고 그 첫째 왕으로는 사울이 등극하게 되었다 . 저는 첫째 왕으로 택함을 받은 것만큼 준수하고 귀한 성격을 가진 인격자이었었다 . 그러나 저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자기의 뜻대로만 행하는데서부터 크게 실패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사울의 인품

 

사울은 본래 좋은 가문 , 담대하고 권력 있는 사람의 자손이다 ( 삼상 9:1 ). 사울의 건강하고 준수한 인품은 이 좋은 선조에게로부터 받은 것이었었다. 참으로 좋은 조상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복을 받은 사람이다 . 우리는 자손들을 위하여 마땅히 좋은 조상이 되어야 하겠다.

사울은 어려서부터 준수한 소년으로 키가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한 장골이었으니 본문 9 장 2 절에 있는 말과 같다 . 저는 체질이 그렇게 장대할 뿐 아니라 그의 마음도 대범하고 관후 ( 寬厚 ) 한 사람이었다 . 사무엘이 저를 왕으로 공포할 때에 어떤 난류 ( 亂類 ) 들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고 멸시함이 있었으나 사울은 모른 체 하였고 ( 삼상 10:27 ) 왕이 된 후에 백성들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하던 사람이 누구오니까 . 그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겠나이다 ” 하고 부르짖을 때에도 사울이 “ 오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을 베푸셨으니 이날에는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한다 ” 하였다 .

이것이 얼마나 대범하고 너그러운 사람인가 . 저는 과연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 부모에게도 효성 있어 순종하며 부지런히 일한 사람이다 . 또 교만하지도 않고 자기를 낮추어 겸비한 자요 , 순직하고 무사기 ( 無邪氣 ) 한 사람이었다 . 동시에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신이 감동함이 있었다 . 이 모든 점을 보아 그는 왕 노릇할 만한 자격자였던 것이다.

 

 

 

사울이 왕이 됨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 삼상 10:1 ) 기름을 그 머리 위에 부었다 . 이 기름은 제사장을 봉할 때에 머리에 붓는 것인데 왕을 세울 때에도 부었으니 왕은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대표한 사람인 까닭이다 . 그리고 사무엘은 미스바로 백성을 불러 모으고 왕을 투표하니 곧 사울이 당선되었다.

이때에 사울은 집 가운데 가서 숨어 있을 만큼 ( 삼상 10:22 ) 그렇게 순직하고 무사기한 사람이었다 .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온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 만일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노력하였다고 하면 그 백성으로 하여금 크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좋은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 사울이 처음 왕으로 택함을 받을 때에는 반대하는 족속도 ( 암몬 족속 ) 있었으나 이는 오래지 아니하여 다 복종케 되었다 . 길갈에서 사무엘은 온 백성으로 더불어 수은제를 드리고 사울을 왕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를 거행하였다 . 이때 사울의 나이는 30 세이었다 .

 

 

 

사울의 불순종

 

마침 왕 된지 1 년에 불레셋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 이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사무엘은 길갈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려고 약속하였으나 사울의 중심을 시험하여 보려고 사무엘은 일부러 하루를 늦게 도착하여 보니 사울은 벌써 자기가 번제를 드리고 있었다 . 또 애굽에서 돌아올 때부터 원수이었던 아말렉 족속을 칠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 왕을 멸하라고 사울에게 명령하였으나 사울은 그 왕을 멸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살찐 소와 양들까지 다 자기가 차지하였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하나님에게 대한 불순종이다 . 이것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게 된 조건이었다 . 대적의 왕을 살린 것은 인정상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겠으나 하나님의 명령은 그보다 더 중한 것이다 . 사람을 순종하는 것보다 마땅히 하나님을 순종할 것이니라 ( 행 5:29 ). 순종하는 것이 예물보다 나으니라 ( 삼상 15:22 ).

 

 

 

사울의 말로 ( 삼상 31:1~4 )

 

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사울은 사무엘과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 .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사울의 영 ( 靈 ) 은 홀연히 캄캄하여지고 번민은 날로 더하여 병이 되었다 . 이때에 충성스러운 다윗이 와서 저를 구원하였으나 저의 영이 벌써 병든 까닭으로 도리어 다윗의 용맹과 재주를 시기하고 그 아들 요나단까지 미워하게 되었다 . 나중에는 불레셋 백성들이 다시 쳐들어 올 때에 저는 가련하게도 자살하여 버리고 말았다.

저는 그 나라도 잃고 생명도 잃었다 . 그렇게 빼어난 준재 ( 俊才 ) 요 , 호걸이었으나 저의 중심에 하나님의 신이 떠날 때에 저는 비참한 최후를 마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탁하신 대업 ( 大業 ) 도 흙 속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 .

 

묻는 말

 

1. 사울의 아버지는 누구며 어느 족속입니까 ? 

2. 사울의 인격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까 ? 

3. 사울의 실패는 무엇으로 말미암았습니까 ? 

4. 사울의 불순종이 무엇입니까 ?

5. 사울이 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까 ? 

6. 사울이 어떻게 죽었습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34 과

모범적 친구 요나단과 다윗 (8월 21 일)

 

본문 : 사무엘상 18:1~4, 19:1~7, 20; 사무엘하 1:17~27

 

요절 : 많은 친구를 함부로 사귀는 자는 패망을 자청하는 자로되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도 있느니라 ( 잠 18:24 )

 

때와 곳 : 주전 1073 년 ( 친구가 됨 ), 1063 년 ( 요나단 사망 ), 사울의 도성 기브아 , 길보아 (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곳 )

 

서론 : 자고로 친구의 정의를 말하는 데는 동양에서 관중 ( 管仲 ) 과 포숙 ( 鮑 叔 ) 을 들며 서양에서 희랍의 떼몬과 피틱아스를 말하거니와 성경에 있는 요나단과 다윗의 의리와 사랑도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할 것이다 . 다윗은 촌에서 양치던 목자요 , 요나단은 그 나라 왕의 아들이다 . 저희의 사랑 가운데는 계급도 없고 원수도 없다 . 아버지 왕은 원수가 되었으나 그 아들 요나단은 친구가 되었으니 그 가운데서 친구의 의리를 어떻게 지키어 나갈 수가 있었느냐 마는 그래도 끝까지 생명과 같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였다 . 진정한 친구를 하나 얻는 것은 세계를 얻는 일보다 큰 일이다 . 우리는 요나단과 다윗을 배워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를 알 수 있고 또한 참된 친구를 얻는 비밀도 얻을 수 있는 줄 안다.

 

 

 

요나단과 다윗의 결의 ( 삼상 18:1~4 )

 

촌에서 양치던 소년으로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돌 한 개로 잡아 그 머리를 들고 돌아올 때에 다윗을 칭찬치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 거리의 여자들도 춤을 추며 “ 사울은 수천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을 죽이었도다 ” 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저를 찬양하였다 . 그래서 다윗의 인기는 사울 왕보다 또 그 왕자 요나단보다도 더 높아졌다 . 왕은 이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여 중심으로 다윗을 시기하였다.

그러나 요나단은 누구보다도 다윗을 더 사랑하였다 . 그 입었던 두루마기와 또 환도 ( 環刀 ) 와 활과 띠까지 다윗에게 주어 친구의 의 ( 誼 ) 를 맺었으니 이것이 곧 영원히 변치 말자는 그 결의의 신표 ( 信票 ) 가 된 것이다 . 이 언약은 저희 자손에게까지 미쳐 내려간 신의 있는 언약이었다 . 요나단의 영은 다윗의 영과 꼭 부합되었다 . 끊을 수 없이 연락되었다 ( 삼상 18:1 ). 저희의 친구 됨은 영과 영이 부합됨에 있었다 . 그래서 서로 생명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존경하였다 . 이것이 진정한 친구를 맺어주는 필요한 조건이다 . 돈으로 사귀고 인물로 사귀고 이름으로 사귀며 또한 어떠한 이익을 바라고 사귄다면 이는 벌써 참된 친구가 아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애호함 ( 삼상 19:1~7 )

 

사울 왕은 다윗을 크게 시기하여 몇 번이나 그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 그러나 요나단은 이것을 친구 다윗에게 일러 주어 피신하게 하였다 . 그리고 부왕에게 진정으로 “ 다윗이 무슨 죄가 있어 죽이겠느냐고 왕을 위하여 선을 행한 저를 죽이는 것은 왕이 죄를 범하는 것이라 ” 고 간하였다 . 그 후에 다시 아버지와 같이 식사하게 되었을 때에 다윗이 모시어 있지 아니함을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매 극력으로 다윗을 위하여 변호하였다 ( 삼상 20:27~29 ).

이렇게 다윗을 사랑함으로 결국 왕의 진노를 받아 창에 맞을 뻔하였다 . 그러나 저는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고 오히려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함을 분하게 생각하여 먹지도 않고 근심하였다 . 물론 아버지의 말과 같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될 뿐만 아니라 다윗이 왕이 된다면 자기와 그 나라가 서지 못하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 그러나 참된 의리를 위하여서는 자기의 생명이라도 터럭같이 가볍게 여기었다 .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 요 15:13 ).

 

 

 

요나단과 다윗의 이별

 

사울은 마침내 그 악한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고 끝까지 다윗을 해하려고 하였다 . 그러나 다윗은 늘 약자와 같이 피하였다 . 그뿐만 아니라 사울에게 대하여는 조금이라도 적의를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들 요나단을 심히 사랑하는 까닭이었다 . 그러나 이제는 요나단과 영원히 서로 만나지 못할 이별의 눈물을 흘릴 때가 돌아왔다 . 다윗이 들에 숨어 있을 때에 요나단 이 다윗으로 더불어 이미 약속하였던 대로 다윗이 숨어있는 곳에 가서 활을 쏘았다 . 그리고 살 줍는 아이를 불러 살이 저편에 있다고 소리를 질렀으니 이는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 왕의 뜻을 알게 하여 도망하게 하는 신호이었 다 . 드디어 아이를 집에 돌려 보낸 뒤에 다윗은 요나단 앞으로 나와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하고 서로 목을 안고 슬퍼 울었다 . 요나단은 하늘을 우러러 마지막 축복을 하였으니 이제는 애처롭게도 잡았던 손을 서로 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 그러나 저희의 육체는 차차 상거 ( 常居 ) 가 멀어가는 반면에 저 희의 마음은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나누지 못할 그것이다.

저희가 친구가 된 뒤에 서로 존경하고 생명같이 사랑하였다 . 사귐이 오랠수록 서로 존경하고 아껴주는 친구는 과연 세상에 드물게 있는 것이다 . 우리 는 성경에 있는 인물들을 배울 때에 특별히 그 이별의 마당에 임하여 은혜를 받음이 적지 아니하다 . 롯과 아브라함 , 다윗과 요나단 , 바울과 에베소 교인 , 예수와 그 제자들 , 저희들의 이별은 진실로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많다 . 어떤 때에는 사랑과 믿음이 끊어져 당연히 이별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었고 어떤 때에는 떨어질 수 없는 간절한 정리 가운데서 애끓는 이별을 한 때도 있었다 . 이것이 모두 우리에게는 큰 교훈이 되는 것이다 .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들음 ( 삼하 1:17~27 )

 

요나단을 이별한 다윗은 이리저리 쫓겨 돌아다니는 가련한 생활을 하였다. 그 동안에도 사울은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사방으로 찾았던 것이다 . 다윗은 사울을 죽여 원수 갚을 수 있는 무용 ( 武勇 ) 과 또 좋은 기회도 있었지마는 저를 용서하였으니 ( 삼상 24:1~4 )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였던 까닭이다 . 사울과 요나단은 마침내 블레셋 사람의 난을 만나서 길보아 산에서 둘이 다 죽고 말았다 . 그때에 한 사람이 있어 사울의 면류관을 벗겨 가지고 다윗에게 와서 “ 요나단과 사울은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 내가 사울을 죽이고 그 면류관과 팔고리를 벗겨 가지고 내 주께 드리나이다 ”( 삼하 1:10 ) 하였다 . 이는 사울이 다윗의 원수 되었던 줄 알고 다윗에게 은총을 입으려고 함이었다 .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저녁때까지 울며 음식을 먹지 아니하였다.

사울은 자기의 원수이다 . 그러나 저는 생명같이 사랑하는 친구의 아버지다 . 저를 죽인 그 사람을 용서 할 수가 없어 사형에 처하고 슬픈 노래를 지어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하였으니 이것이 오늘까지 유명한 활노래 [ 弓歌 ] 이다 ( 삼하 1:19~27 ). 다윗의 사랑이야말로 진정의 것이었다 . 친구를 위하여는 원수의 생명까지 아끼어 주었다 . 이 친구의 사랑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하고 오묘한 것이냐 . 이는 과연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진정을 설명하는 실례가 된다 . 주님의 사랑은 자발적 사랑이요 , 공번된 사랑이요 , 희생적 사랑이요 , 영원히 변치 아니하는 철저한 사랑이었다 . 우리는 그 위에 우리의 사랑을 쏟아 붓자 . 우리의 사랑의 열도 ( 熱度 ) 를 감하지 말고 있는 바 모든 것을 바치어 그를 사랑하자 . 우리는 주를 사랑하여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고 주로 더불어 사귀어 참된 친구를 얻을 수가 있다.

 

 

 

묻는 말

 

1. 다윗은 그 지체가 어떤 사람이며 요나단은 어떤 사람입니까 ? 

2. 요나단이 다윗을 어떻게 사랑하였습니까 ?

3. 요나단이 다윗을 위하여 사울에게 어떻게 간하였습니까 ? 

4. 다윗이 요나단과 사울이 죽은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 

5. 다윗이 지은 노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35 과

평민선지 아모스 (8 월 28일)

 

본문 : 아모스 1:1, 7:14, 5:18~23, 6:1~7

 

요절 : 너희는 마땅히 여호와를 찾은즉 살리라 ( 암 5:6 ) 

 

때와 곳 : 주전 793 년 벧엘

 

서론 : 아모스는 일개 목자로 정치가 문란하고 종교가 부패한 때에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아 일어나서 유대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각 나라의 죄악을 책망하며 장차 당할 바 형벌을 예언하였다 . 저는 진실로 사자와 같은 선지자였으니 저 재산 계급에 속한 사람이나 부패한 종교의 신자들을 여지 없이 공박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살 거라고 부르짖었다.

 

 

 

아모스의 시대

 

(1) 유대 왕 웃시야의 시대

 

웃시야 왕 ( 주전 781~737 ) 은 아사리아라고 하는 이로 16 세에 유대 왕이 되어 처음에는 주의 뜻대로 순종하여 영화가 지극하게 되었었으나 저가 신당을 그대로 두고 거기 제사하는 일과 분향하는 일을 금치 아니하여 나중에는 문둥병이 들어 이로써 죽고 말았다 ( 왕하 15:1~7 ). 

 

 

 

(2)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시대

 

여로보암 ( 주전 776~763 ) 은 요아스 왕의 아들인데 무력으로 강토를 넓히고 이스라엘을 크게 번창케 한 이다 ( 왕하 14:23~29 ). 이때야말로 남북조 (南北 朝 ) 가 다 왕성하던 시대이다 . 솔로몬의 지극한 영화의 뒤를 이어 당시 이스라엘은 근방 각국에 비길 수 없는 패권을 잡고 있었다 . 이렇게 국운이 융성 한 태평 시절을 당하여 백성들은 도리어 여호와의 은혜를 저버리고 사치하고 음탕하며 타락한 세속 생활에 기울어졌다 . 그러므로 종교의 중심지라고 하는 벧엘에서도 수많은 백성들이 모이여 굉장한 예배식을 거행하고 있었으나 이는 참 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경배하는 가증한 의식에 지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3) 지진 나기 전 2 년

 

웃시야 왕이 즉위 한지 45 년에 그 지경 안에서 무서운 지진이 있었다 .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무서운 날이었었다 . 우리가 임진년이라면 왜란을 생각하고 병인년이라면 양요 ( 洋擾 ) 를 생각하는 것처럼 유대 나라에서 웃시야 때 하면 지진을 기억하고 다시금 무서워할 만큼 온 백성에게 깊이 인상된 지진이다 ( 슥 14:5 ). 그러므로 특히 지진 나기 전 2 년이라고 한 것이니 바로 주전 755 년이다 . 역사가 막카비의 말에 의지하면 아모스 선지가 처음 일어나기는 곧 대 지진 전 2 년 가을 추수 전날인데 모든 백성이 벧엘에 모여 크게 취하여 흥에 겨워할 때에 문득 그 가운데 나타나서 사자 같 이 외치였던 것이라고 한다. 

 

아모스가 부르심을 받음

아모스는 저의 말대로 “ 본래 선지자도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목자며 뽕나무 배양하는 자 ”( 암 1:1, 7:14 ) 이다 . 주전 18 세기에 드고아 목장 에서 양도 치며 뽕나무 배양하는 일도 하던 촌사람이었다 . 하나님은 이 촌 사람 하나를 불러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크게 경책 ( 警責 ) 하며 예언하게 하시었다 .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지식이나 재주 있는 사람을 불러 쓰시는 것보다 미천하고 순박한 자로 진리를 사모하는 자를 택하여 쓰시기를 좋아하신다. 우리 한국에도 아모스와 같은 평민 선지가 일어나서 우리의 죄악을 책망하며 예언해 줌이 있기를 바란다.

 

 

 

아모스의 설교 ( 암 1:2~28, 5:18~23)

 

저는 그 설교에 있어 어떠한 교리를 논란한 것도 아니요 , 신학적으로 변증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 다만 그 백성들의 죄악을 책망하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을 예언하여 저희의 중심을 경성케 한 것뿐이다 . 그런고로 그 설교는 사자의 부르짖는 것과 같이 무서웠었다.

 

 

 

(1) 열국의 죄악을 공격함 ( 암 1:2~2:8 )

 

길르앗 백성을 잔인하게도 살육한 다메섹 ( 암 1:3~5 ) 과 남을 해하려고 자기 백성들을 이끌어 전장에 내보내 참화를 당하게 한 가사와 두로 ( 암 1:6~10 ), 무자비하게도 동포의 피를 흘리는 에돔 ( 암 1:11~12 ) 과 자기의 강토를 넓히려는 야심으로 다른 민족을 잡아 무서운 악형을 다하는 암몬 ( 암 1:13~15 ), 대적이라 하여 남의 나라 왕을 잡아다가 그 뼈를 불살라 회를 만든 그 흉악한 모압 같은 모든 나라의 강포한 죄악을 대도상 ( 大道上 ) 에서 널리 증거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이러한 자들을 용서치 않을 것을 크게 외치었다 . 사람들의 악이 여기까지 미치고야 망하지 많을 자가 어디 있으랴 . 아모스는 과연 대담한 선지자였었다 . 저는 다시 유대와 이스라엘의 죄악을 공격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을 예언하였다 . 유대는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유전하여 내려오는 사신 우상에게 미혹되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예루살렘에 큰 불이 내릴 것이요 ( 암 2:4~5), 이스라엘은 의 ( 義 ) 보다 돈을 중히 여기어 돈을 받고 의인을 팔며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그 기름을 짜내며 음란하고 방탕하여 성소까지 더럽히는 모든 죄로 말미암아 크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을 말하였다 . 유대에 대한 예언은 그 후 200 년에 바벨론 난 ( 亂 ) 을 만날 때에 응하였고 ( 암 5:5 )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그 후 60 년에 앗수리아 왕 살마네서와 살곤이 이스라엘을 크게 도륙할 때에 응하였다 ( 암 6:14 ). 세상의 나라들아 , 이 열국들의 죄악과 너희의 죄악을 대조하여 볼지어다 . 그리고 장차 내릴 바 주의 진노를 피할 수 있거든 피하여 볼 것이다 . 아 , 이 죄악을 알지 못하는 세대 , 남의 피 흘림이 어느 때에 쉴 것이며 저희들이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할꼬 . 하나님은 죄악이 관영한 그 나라를 세워두지 아니하신다.

 

 

 

(2) 부패한 종교에 대하여 ( 암 5:18~22 )

 

저희들의 종교 생활 곧 신앙생활을 위하여는 그 행하는 바 의식이 굉장하였으니 모든 절기를 지키는 것과 때를 따라 성회로 모이는 것과 번제 , 소제 , 화목제 같은 각종 제사와 또 여러 가지 악기와 노래로 주를 찬양하는 일이 참으로 그럴 듯한 것이 많았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절기를 지키는 것도 슬퍼하며 모이는 성회도 기뻐하지 아니하며 그 제사도 돌아보시지 아니하고 그 향기도 맡지 아니하시는 것이요 , 그 노래와 거문고 소리도 즐겨 듣지 아니하신다고 하였다 . 이는 다 저희의 욕심과 또 흥미를 따라 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해오던 일이니까 의례히 하는 규례로 알아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즉 속으로는 원망하면서 입으로는 찬송하며 한편으로는 죄악을 그대로 행하면서 속죄제를 드리는 가식의 것이었다 . 예배당에 모이는 일이 중한 일이 아니요 , 찬송을 한다고 기도를 한다고 그것이 그렇게 귀한 것이 아니다 . 다만 중심으로 하나님의 도를 간절히 사모하며 그 계명을 중심으로 즐겨 준 행함이 없이는 굉장한 예배 의식과 훌륭한 찬양대와 자랑할 만한 기관과 사업도 다 여호와의 앞에서 도리어 진노를 받기 쉬운 지배 조건이 되고 말 것이다 . 신앙의 생명이 끊어져 갈수록 종교는 그 의식이 굉장하며 법이 엄해지는 것이다 . 그래서 그 의식과 법을 지킴으로써 겨우 신자의 체면을 유지해 보려고 한다 . 마침내 가식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

 

 

 

 (3) 부자에게 대하여 ( 암 2:7, 4:1, 6:1~6 )

 

저희들은 가난한 자의 머리에 붙은 티끌까지라도 빼앗을 욕심으로서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음란으로 일삼으며 상아 침상에 누워 기지개 켜는 자들이며 어린 양의 고기와 송아지의 고기를 먹는 자들이며 거문고를 타며 헛된 노래를 부르고 대접으로 술을 마시는 자들이며 값진 향기로운 기름으로 몸에 단장하는 자들이다 . “ 아 , 이 시온에서 평안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무사히 거하는 자여 !” 하고 아모스는 부르짖었다 . 언제든지 돈을 사람보다 , 생명보 다 더 귀하게 여기어 사람을 멸시하고 압박하게 되는 때 , 신성한 종교계에서까지 돈 있는 자가 횡행하게 되는 때 , 이는 벌써 멸망을 자청하고 있는 때이다.

 

 

 

아모스가 핍박을 당함 ( 암 7:10~15 )

 

완악한 자는 책망을 싫어하는 법이다 . 당시에 아모스를 환영하는 자가 누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 저는 모든 백성들에게 왕과 제사장들에게 핍박을 받았다 . 그 중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크게 멸시하며 왕에게 고소하였다 . 이는 저의 가증과 교만으로 인하여 참된 선지자 앞에 겸비할만한 심령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 아마샤는 왕이 있는 서울의 대제사장으로 당시 종교 계에는 거두이었던 것이다 . 드고아 목장에서 나온 촌사람의 말을 겸비하게 들었을 수가 있었으랴 . 세상에는 종종 이름없는 자 중에 , 평신도 중에 세상을 책망하며 제사장을 권고할 선지자가 있는 것이다 . 아모스는 아마샤에게 말할 수 없는 멸시를 받았다 . “ 얘 , 선지자야 . 너는 저 유대 땅에 나가서 예언하고 얻어먹어라 . 여기는 왕의 성소가 있는 곳이요 , 대궐이 있는 곳이야 ” 하였다 . 이 우상의 제사장 된 아마샤의 호령 소리를 들어보라 . 저는 중심에 성신이 떠났으매 백성들의 죄악을 위하여 민망함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 그러므로 진리로 백성을 권고 하지 못하고 다만 자기의 구복과 지위를 위하여 도리어 참된 선지자를 시기하며 가증하게 모든 의식을 집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 자고로 참된 진리의 사도는 그 동류 ( 同類 ) 중에서 핍박을 받았다 . 예수를 보라 . 제사장들의 고 소를 받아 빌라도 앞에 섰었고 바울도 유대 교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아그립바 왕 앞에 섰던 것이다 ( 눅 23:2; 행 17:7, 24:5 ). 이는 당연한 일이다 .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사자라고 하면 세상의 멸시와 핍박을 피할 수 없는 것 이다.

 

 

 

묻는 말

 

1. 아모스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

2. 아모스가 어떤 나라들을 향하여 책망하고 예언하였습니까 ? 

3. 당시 유대와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입니까 ?

4. 하나님께서는 왜 그 백성의 절기와 성회와 제사와 노래를 기뻐하시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까?

5. 아모스를 핍박한 자가 누구입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36 과

개혁자 요시야 (9월 4 일 )

 

본문 : 왕하 22:1~2, 22:8~20, 23:1~3, 23:21~25

 

요절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 되며 내 길에 빛이 되나이다 ( 시 119:105 ) 

 

때와 곳 : 주전 646 년 ( 출생 ), 638 년 ( 즉위 ), 608 년 ( 사망 ), 예루살렘 , 무깃도 

 

서론 : 요시야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은 말할 수 없는 악한 임금이거니와 아버지 아몬 왕도 또한 죄악이 찬 사람이라 24 세에 암살을 당하매 겨우 8 세 된 요시야가 왕이 되었다 . 그러나 현명한 어머니 여디다가 있어서 하나님의 법도를 잘 지켜 나가게 되였다 . 16 세 때부터는 정치와 종교를 크게 개혁하기에 노력하였으니 먼저 이전 왕들의 죄악을 인하여 자기가 대신하여 아프게 회개하고 성경의 뜻대로만 하여야 될 것을 전국에 선언하고 드디어 성경을 법 삼아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 저의 개혁 운동은 자기 중심의 참회로부터 시작되어 전국에 믿게 되었으니 이것은 오로지 성경으로부터 일어난 혁명적 운동인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요시야의 환경 ( 왕하 21 장 ; 대하 33 장 ; 렘 15:4 )

 

요시야의 아버지 아몬은 22 세에 왕이 되어 2 년 동안을 왕위에 있었는데 그 동안에 부왕 ( 父王 ) 들의 행한 바 모든 악을 다 하다가 암살을 당하였다 ( 왕하 21:19~24 ). 요시야의 조부되는 므낫세는 아주 악하고 비열하며 음탕한 죄인이었었다 . 그 거룩한 조상들의 선한 행적을 본받지 않고 선지자들의 예언도 어리석은 것으로 돌려 믿지 않고 완강하게 마음대로 자행자지( 自行自止 ) 하였다 . “ 무죄한 사람의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가에서 저가까지 가득하게 한지라 ”( 왕하 21:16 ). 이 말만 보아서도 저가 얼마나 악하였던가를 넉넉히 알 수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 그렇게 악하였지마는 하나님의 은혜는 요시야의 중심에 풍성하여 성결한 것과 의로운 것을 일찍이 사모하게 되었다 . 이는 그 어머니 여디다의 감화로 말미암은 줄을 안다 . 저의 부친과 조부의 행적을 먼저 읽어 본 뒤에 요시야의 사적을 읽어보라 . 하늘과 땅의 차이를 발견할 것이다 . 므낫세 ( 왕하 21 장 ; 대하 33 장 ; 렘 15:4 ), 아몬 ( 왕하 21:19~26; 대 하 33:20~25 ), 요시야 ( 왕하 22 장 , 13 장 ; 대하 34:33 ). 당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고 온 나라의 사신과 우상을 섬기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도록 타락하였던 때이다 . 이것은 솔로몬 때부터 시작되어 ( 왕하 23:19 ) 아하스와 므낫세 왕 때에 이르러서 극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개혁 사업 ( 왕하 22:3~20 )

 

요시야의 정치적 혁명은 종교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요시야는 퇴락한 성전을 중수 ( 重修 ) 하고 하나님 앞에 모든 백성을 인도하려고 전국에 헌금을 거두기로 하였다 .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서기관 사반과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맡기었다 . 종교적 혁명은 정치의 개혁을 낳는 것이다 . 이 종교적 혁명은 개인의 신앙적 혁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 요시야의 신앙 혁명은 유대의 종교와 정치를 개혁하는 일의 근본 운동이 되었다.

 

 

 

성경과 혁명 ( 왕하 23:1~30; 대하 34:29~35:27 )

 

요시야의 대개혁 사업은 참으로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성경이 왕의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1) 성경의 발견 ( 왕하 22:8, 23:1~3 )

 

성전을 중수할 헌금 사무를 취급하는 중에 우연히 잃어버렸던 성경을 찾게 되었다 . 제사장 힐기야는 서기관 사반에게 전하였다 . 이 책은 일찍이 아하스 시대에 율법 책이 화변 ( 火變 ) 을 당할 때에 요행이 어디 묻혀서 숨겨있던 것이 어떤 돌 밑에서 나온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 그리고 지금 신학자들의 말에 의지하면 그 책은 혹 신명기 책이라고 한다 . 사반은 이 책을 가지고 왕 앞에 갔다.

 

 

 

(2) 성경을 읽음 ( 왕하 22:12, 23 )

 

왕은 먼저 자기가 그 성경 말씀을 들었다 ( 왕하 22:10~11 ). 그리고 자기의 죄와 자기 백성의 과거와 현재의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애통하며 회개하였다 . 그 나라의 개혁은 먼저 요시야의 진정한 회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곧 왕의 신앙 부흥이 전국의 종교적 혁명이 되고 말았다 . 교회의 부흥도 교직들의 신앙 부흥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 왕은 다시 전국 각파의 대표자를 예루살렘에 모아놓고 자기가 친히 성경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고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 계명과 율례대로 지킬 것을 백성으로 더불어 맹세하여 전국적 종교개혁의 선언식을 거행하셨다 . 성경 말씀은 산 진리이다 . 사람의 중심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큰 혁명을 일으키고야 마는 것이다 . 이 말씀이야말로 신앙 혁명의 날카로운 무기이다 . 요시야는 이 말씀으로 연연하여 자기부터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대로 준행하는 경건한 사람이 되었다 . 그러므로 “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온전히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서도 없었고 후에도 이와 같은 자가 나오지 못하였더라 ”( 왕하 23:25 ) 고 칭찬을 받았다 . 

 

 

 

(3) 개혁 운동 ( 왕하 23:4 )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크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그 율법대로만 준행 할 것을 맹세한 후에 곧 개혁에 착수하였다.

· 성전 안에 놓았던 바알과 아세라 목상과 일월성신을 숭배하느라고 만든 모든 제기 ( 祭器 ) 를 성전에서 내어다가 성밖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라 그 재를 백성의 무덤에 뿌리고 ( 왕하 23:4, 6 )

· 이전 왕들이 세워놓았던 우상의 제사장들과 귀신 접한 자와 박수들을 진멸 하고 ( 왕하 23:5, 20, 24 )

· 사신 우상 ( 바알 , 일월성신 ) 숭배를 임금하고 ( 왕하 23:5 절 )

· 우상 예배에 쓰는 물건을 만드는 미동의 집을 헐고 ( 왕하 23:7 절 )

· 전국에 있는 산당을 헐어버리고 ( 왕하 23:8, 13, 15, 19 )

· 아이를 몰록에게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불가마에 넣는 몽매한 미신의 법을 엄금하고 ( 왕하 23:10 )

· 태양을 숭배하느라고 유대 모든 왕들이 만들어 성전 앞에 세웠던 철마 (鐵 馬 ) 와 태양 병거 ( 太陽兵車 ) 를 불사르고 ( 왕하 23:11 )

( 아 ) 이전 왕들이 세워놓은 부정한 제단을 헐고 그 흙을 기드론 시내에 쏟아 버리고 ( 왕하 23:12 )

· 오랫동안 저버렸던 유월절을 전국적으로 지키게 하였다 ( 왕하 23:21 ).

 

저는 16 세로부터 성전 파수 운동을 일으켜 가지고 20 세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대개혁을 시작하여 왕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또 백성들이 즐겨 좇던 모든 옳지 못한 일을 뿌리까지 뽑아 버렸다 . 열조의 왕들이 세운 사당 , 우상 , 제기 , 기념각들 중에는 그 나라에 있어 국보 ( 國寶 ) 라고 할만하며 역사적 기념품이 될만한 것까지라도 담대히 다 깨뜨리고 불살랐다 . 왕의 해골이라도 이스라엘을 범죄케 한 자는 파내어 불살랐다 . 이렇게 격렬한 대개혁의 불은 전국을 휩쓸었던 것이다 . 그리하여 결국 전국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만 경배하게 하였다.

 

 

 

요시야의 말로 ( 왕하 23:29~30; 대하 35:20~25 )

 

전국 백성을 사신의 손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이 대개혁자 요시야 왕은 위에 있은 지 31 년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리아를 치고자 하여 유대를 지나가려고 하는 것을 거절하여 무깃도에서 싸우다가 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 저가 아직 청춘으로 이렇게 죽은 것은 진실로 가석한 일이다 . 그러나 그의 인격과 종교적 대개혁의 위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할 것이다 . 39 세 근 40 이라고 하여도 아직 앞길이 많지 않았는가 . 그러니 백성을 위하여 참으로 희생의 제물이 되는 자가 일찍이 세상을 떠남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예수는 33 세에 사형을 당하지 않았는가 . 요시야는 그 백성을 위하여 큰 슬픔을 가지고 애통한 자이다 . 만승의 임금이 되어 자기 영화와 낙을 일삼는 것이 상례이지마는 저는 백성의 영육을 위하여 진정한 눈물을 흘리었던 것이다 . 저가 세상을 떠나매 백성들도 슬퍼하고 예레미야도 애곡하였다 ( 대하 35:25 ).

 

 

 

묻는 말

 

1. 요시야가 몇 살에 왕이 되었으며 몇 살에 개혁을 시작하였습니까 ? 

2. 그의 종교개혁 사업을 말할 수 있습니까 ?

3. 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큰 원동력이 어디 있습니까 ? 

4. 지금도 성경 말씀이 혁명적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까 ? 

5.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어디서부터 일어나야 될 것입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37 과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9 월 11일)

 

본문 : 렘 1:4~10, 31:27~34

 

요절 : 이와 같이 우리 각 사람이 다 자기 행한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 롬 14:12 ).

 

때와 곳 : 주전 626 년부터 586 년까지 예루살렘

 

서론 : 구약 예언자 중에 예레미야와 같이 예수와 방불한 생활을 한 이가 없다 . 저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아내를 얻지 아니하고 독신 생활을 하였다 ( 렘 16:1~2 ). 고독한 저는 소위 제사장 , 예언자 , 왕 , 이웃과 친척들에게까지 반대와 멸시를 받았다 . 저는 일생을 핍박 가운데서 지나다가 나중에는 애굽에 있는 유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 후세에 저를 일컬어 눈물의 선지자라고 하였으니 어떻게 보면 약한 것 같으나 그러나 저의 울음이나 눈물은 약한 자의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 저는 진실로 그 백성을 대신하여 그 나라의 운명을 슬퍼하였으며 저희들의 죄악을 인하여 대신 눈물을 흘린 것이었다 . 그러나 기진 ( 氣盡 ) 치 아니하는 용기로써 끝까지 산 소망을 품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니 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선지자요 , 열렬한 애국자이었었다 . 우리는 이 공과에서 저가 부르심을 받음 에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을 배울 것이다.

 

 

 

예레미야를 택하심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23 세쯤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예언자가 되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함 ( 렘 1:4 )

 

저는 여호와의 말씀에 의지하여 자기가 부르심을 받기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노력하신 것을 알았다 . 저는 분명히 하나님의 묵시를 받았던 것이다 . 대개 무형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세상에 나타내시려고 할 때에는 늘 어떠한 사람에게 그 말씀을 주어 나타내시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받는 그 사람이 곧 예언자요 , 혹은 선지자인 것이다 . 저들이 얼마나 권위 있으며 또 신성할 것인가 . 이는 저가 곧 하나님의 사자인 까닭이다 . 

 

 

(2) 여호와께서 저를 미리 아심

 

“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다 ”( 렘 1:5 ) 고 하였다 . 그런즉 사람을 내시는 그가 또 선지자를 만들어 세상에 보내시는 그이다 .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생기기 전부터 장차 있게 될 이 존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일일이 관계하시지 않으심이 없으셨던 것이다 . 여기서 알았다는 말은 그의 이름이나 면목이나 알았다는 그런 앎이 아니요, 당신의 계책에 있어서 이 사람을 만드신 것이니까 물론 잘 아실 것이 사실 이나 저를 사랑하며 관계를 맺어 동사 ( 同事 ) 할 그런 친분을 말한 것이다 . 세상에 있어 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일찍이 저를 알아주신 사람이 다 . 시편 1 편 6 절에 보면 “ 대개 여호와 옳은 자의 길을 아신다 ” 고 하셨고 또 시편 37 편 18 절에는 “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평생을 아시나니 ” 고 하였고 “ 온 땅 족속 중에 내 너희를 알았으니 ” 하신 말씀도 있다 . 하나님은 당신이 쓸 사람을 잘 아신다 . 원래 의인이라는 것은 하늘이 아는 사람이다 . 사람에게는 알리어지지 못하였을지라도 하나님에게 알리어져 있는 그 사람 이 곧 의인인 것이다 . 역대에 있는 모든 선지자와 의인을 보라 . 사람들이 다 저희를 몰라보았다 . 하나님이 아시는 자요 , 그의 사자이었으나 사람들의 눈에는 미치광이요 , 못난 자이며 새 술에 취한 사람이요 , 염병 같은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 진실로 세상에서 멸시를 받는 그 사람 중에 하나님이 아시는 의인이 있는 것이다.

 

 

 

(3) 여호와께서 저를 거룩하게 하심 ( 렘 1:5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 사람을 택하사 저를 성결케 하신다 . 그렇지 아니하고는 그가 하나님의 사명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 예레미야는 모태로부터 거룩하게 자라난 사람이다 . 이렇게 성결한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저는 하나님께 헌신치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4) 여호와께서 저를 선지자로 세우심

 

“ 너를 세워 선지자가 되게 하였다 ”( 렘 1:5 ). 저는 하나님의 아시는 가운데서 지음을 받고 또한 거룩하게 양육을 받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임명 받을 때가 돌아왔다 .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이시요 , 설계자이신지라 . 일마다 거기에 적당한 사람을 택하여 적당하게 은혜를 주어서 사명을 맡기는 것이다 . 이때에 그 교만하고 악한 사람들에게는 예레미야를 보내어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려고 하신 것이었다 .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어 내시기 전에 벌써 그의 쓸 곳을 아시나니 흙덩이 같은 우리도 그의 소용이 있어서 지음을 받은 줄을 알 것이다.

 

 

 

예레미야의 태도

 

“ 나는 어린 아이니 말할 줄을 모르나이다 ”( 렘 1:6 ). 저의 겸비함은 모세의 그것과 방불하였다 ( 출 4:10 ). 백성들 앞에 나설 하나님의 대언자로 택함을 받았다고 하면 이는 아주 고상한 직임이다 . 그런데 택함을 받는 자로서 ‘ 아이니 말할 줄을 모른다 ’ 고 한 것은 아주 가치 없는 핑계라고 할 것이다 . 그러나 실상은 이런 겸비한 마음이 있는 그 사람일수록 하나님 앞에 크게 쓰여 지는 것이다 . 전도자가 자기의 무재무능 ( 無才無能 ) 한 것을 일찍이 깨달을수록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속히 큰 능력을 가지고 가까이 임하시는 것이다 . 하나님의 위대한 사업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는 모든 신앙의 위인들은 늘 저희의 부족한 것과 미숙한 것을 아프게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 위인은 자기의 불완전한 준비에 대하여 여간 ( 如干 ) 한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 . 이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그것이 저희를 완전케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 모세의 겸비를 보고 이사야 ( 사 6:5 ) 의 그것을 보라 . 베드로도 주께서 자기와 같이 하심을 감히 감당치 못할 줄을 생각하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 “ 주여 나를 떠나소서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눅 5:8 ) 하였고 디모데와 바울도 또한 그런 심지를 가졌던 사람이다 ( 고전 4:12, 9:16 ). 모든 성 자들과 위대한 전도자들은 자랑과 교만이 없이 항상 그 성직에 그릇됨이 있을까 하여 두려워하며 겸비하였다 . 부족을 느끼어 스스로 겸비하는 그 사람은 벌써 고상한 은혜를 받은 자이다.

 

 

 

예레미야에게 능력을 주심 ( 렘 1:7~9 ) 

 

 

(1) “ 내가 너를 어디로 보내든지 갈 것이오 ”( 렘 1:7 ).

 

한 아이라 말할 줄도 모른다고 한 예레미야를 하나님은 당신의 예언자로 보 내시는 것이었다 . 하나님이 불러 세운 자면 아이거나 무식하거나 아무 관계가 없다 . “ 내가 너를 어디로 보내든지 갈 것이다 .” “ 내가 항상 너와 같이 있을 것이다 .” 이 명령과 허락을 받은 자면 그에게 있는 모든 인간적 약점과 미숙도 다 합동하여 주의 영광과 능력이 될 것이다. 

 

 

 

(2) “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말할지니라 ”( 렘 1:7 )

 

예레미야는 자기가 할 말은 없다 . 다만 하나님께서 주는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기계만 될 뿐이었다 . 이것이 저의 의무다 . 사무엘이 비록 어린 아이라도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때에는 자기 선생이요 , 제사장인 엘리에게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로도 예언자를 만드시고 젖 먹는 아기로도 선지자를 만드시는 것이 아닌가.

 

 

 

(3) 그 손을 입에 대심 ( 렘 1:9 )

 

이는 하나님의 성신이 저에게 접촉된 관계를 이름이니 사명을 받는 자가 하 나님과 접촉의 경험이 없어 가지고는 할 수 없다 . 이 접촉이 저의 둔한 입을 열어 놓는 것이다 . ‘ 하나님의 손 ’ 은 성신의 능력을 가르치신 것이니 ( 겔 3:14, 8:1) 이 성신의 교통을 받지 못하고 누가 능히 예언자가 될 수 있는가 . 이 경험이 없이 말한다면 이것은 자기의 말이요 , 하나님의 말씀은 아닌 것이다.

 

 

 

(4) “ 말을 네 입에 넣었나니 ”( 렘 1:9 )

 

하나님께서는 느낌이나 깨달음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부르짖는바 명확한 말씀까지 주시는 것이다 ( 고전 3:13; 엡 3:4; 마 10:19 ). 성신의 접촉을 받는 자는 뜨거운 감동이 있고 확실한 각성이 있으며 철저히 부르짖을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성신을 받는 자는 자기의 일시적 감정의 충동으로 날뛰는 자가 아니다 . 어디까지든지 위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의 신의 역사를 받아가지고 명백한 사실에 서서 움직이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격분 ( 렘 1:9~10 ) 

 

(1) 파괴적이다 .

모든 죄악을 뽑기도 하고 헐기도 하며 멸하기도 하고 없게 하기도 할 것이 었다.

(2) 건설적이다 .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할 것이었다 . 죄악의 행동과 옳지 못한 생각을 차차 박멸한 후에는 그 자리를 청결하고 새로운 진리를 심을 새로운 성격을 건설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묻는 말

 

1. 예레미야는 어느 때 선지자입니까 ? 

2. 저가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

3. 사명을 받음에 있어서 모세와 저와의 같은 점이 무엇입니까 ?

4. 저의 성격이 어떠합니까 ?

5. 어찌하여 저를 눈물의 선지자라 합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38 과

편협한 애국자 요나 (9 월 18일)

 

본문 : 욘 3:1~4:2, 10, 11( 참고 요나서 전부 )

 

요절 : 내가 참으로 하나님이 모양으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여러 사람 중 하나님을 공경하여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사 들으시는 줄 깨달았노라 ( 행 10:34~35 )

 

때와 곳 : 주전 30 년 욥바 니느웨

 

서론 : ‘ 요나서의 정신 ’ - 이때는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바벨론의 속박을 벗어난 유대 백성들로 더불어 새로운 민족 운동을 시작한 뒤이므로 저희들의 애국적 편심 ( 偏心 ) 과 종교적 자만심이 점점 농후하여져서 외국 사람을 배척하며 멸시하는 열 ( 熱 ) 이 맹렬하여 있던 때이다 . 정치적으로는 외국의 강한 세력을 당할 수 없으매 담을 쌓아 그 침해를 막으려고 하였고 종교적으로는 저희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이방 사람을 개와 같이 천히 하여 상종치 않으려 하였다 . 이때에 하나님은 이 요나서의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은 만국 백성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이나 이방이나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셨다.

 

 

 

요나가 니느웨 전도를 거절함 ( 욘 1:1~4 )

 

하나님이 요나를 불러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라 하셨으니 이는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할 그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심이었다 . 그러나 요나는 이 일을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서반아 남쪽 , 다시스로 도망하게 되었다 . 그것은 첫째 , 니느웨는 유대 나라의 원수인 앗수리아의 서울인지라 저희들이 복 받게 되는 것을 유대 사람 된 요나로서는 즐겨 할 수가 없었음이요 , 둘째 , 앗수리 아 사람은 본래 잔인하고 강포하여 외국의 포로들을 잡아다가 꼬챙이로 살을 쑤시며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일을 예사로 하는 악한 사람들이다 . 그런 중에 유대 사람은 약소 민족이라 저희들에게 무한한 멸시와 학대를 받아 왔으므로 그 무서운 멸시와 핍박을 받으면서까지 가서 전도할 용기가 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 만일 세계전쟁 당시 각국이 서로 미워하는 그때에 불란서 사람을 보고 백림 ( 伯林• Berlin) 에 가서 전도하라고 하든지 독일 사람을 보고 런던 백성을 위하여 가서 전도하라고 하였던들 아마 요나와 같은 태도를 취한 전도인이 많았을 것이다.

 

 

 

요나의 회개와 기도 ( 욘 2:1~9 ) 

 

 

(1) 회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하는 도중에서 풍랑을 만나 물결 위에 내쳐진 몸이 되어 결국 고기 뱃속에 갇히고 말았다 . 저는 형벌에 직면하여서야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 언제든지 완고한 사람이라는 것은 형벌이 닥쳐와야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 형벌에 임하여 잘못을 아는 자도 일종의 어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2) 기도

 

이에 요나는 하나님을 불러 기도하였다 . 참된 회개는 간절한 기도를 낳는 것이다 . 이 기도에서 우리는 요나의 신앙의 일편 ( 一片 ) 아름다운 점을 찾을 수가 있다.

· 내가 음부의 뱃속에서 부르짖을 때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욘 2:2 ). 자기는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이제 음부의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저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저의 호소를 들어 주시는 줄 믿고 이렇게 담대하게 기도하였다 . 우리가 혹 범죄하여 음부의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낙심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말고 담대히 나가 기도할 것이다.

·“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 났사오나 그러나 내가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 보겠나이다 ”( 욘 2:4 ). 이것이 얼마나 담대한 말이냐 . 그래도 다시 성전을 보게 되리라는 그 확실한 소망은 그대로 될 줄을 알고 이렇게 담대히 선언한 것이다.

·“ 물이 나를 에워쌌으며 내 생명이 위태하옵고 …… 내가 산 밑으로 내려가매 땅의 문빗장이 걸려 나를 영원토록 가두었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 내 주께서 생명을 건져 멸망에서 벗어나게 하셨나이다 ”( 욘 2:6 ). 저는 아직 음부의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벌써 구원을 받아 나온 사람처럼 “ 내 주께서 내 생명을 건져 멸망에서 벗어나게 하셨나이다 ” 고 하였다 . 자기 간구는 이미 다 받은 줄로 믿고 하는 말이다.

· 내가 감사하는 음성으로 주께 제사를 드리고 나의 맹세한 것을 갚겠나이다 ( 욘 2:9 ). 이미 받은 줄 믿는 고로 저는 기도하고 또 감사하였다 . 그리고 이제 살아나가서는 명령에 순종할 결심을 아뢰었던 것이다. 요나의 전도 ( 욘 3:1~4 )

하나님은 요나의 기도를 들으셨다 . 너그럽게 요나를 용서하시고 저를 건져 주셨다 . 그리고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여 ( 욘 3:1 ) 다시 직분을 맡기어 니느웨로 가게 하셨다 .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한다고 단번에 버리시는 것이 아니다 . 두 번 세 번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시고 다시 불러 사명을 완전히 이루기까지 권고하시는 것이다 . 요나는 드디어 여호와의 말씀대로 다시 니느웨로 갔다 .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가라 하매 할 수 없이 가는 것이 었고 “ 내가 네게 명한 말을 광포하라 ” 하매 겨우 하루 길을 다니면서 “40 일 후면 니느웨가 반드시 무너지리라고 하신다 ” 하며 외친 것이다 . 저는 실상 그 백성들이 회개하고 구원 얻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전도한 것은 아니다 . 다만 자기의 맡은 바 일이 그 일이기 때문에 책임 이행으로 한 것뿐이다 . 저는 그 생명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자기의 예언만 중하게 여겨 차라리 그대로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 그러므로 저는 사람을 건지기 위하여 설교하는 자가 아니요 , 자기 주장을 세우기 위하여 설교하는 자이다 . 사람들이야 은혜를 받는 바 있든지 없든지 그대로 한바탕 설교를 하여 그 시간의 책임만 면하였으면 다 되는 것인 줄로 아는 그런 전도자였었다.

 

 

 

요나의 전도 결과 ( 욘 3:5~4:1)

 

 

(1) 니느웨의 회개

 

요나의 전도가 있은 후에 니느웨에서는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일제히 금식하며 육축들까지라도 모두 금식하게 하고 여호와를 부르짖어 크게 회개하고 모든 악한 일과 강포한 행동을 다 고치기에 이르렀다 . 니느웨 백성의 회개한 일에 대하여 두 가지 크게 배울 것이 있으니 첫째는 멸시할 만한 그 노예국 백성의 말을 겸손하게 받음이요 , 둘째는 한번 전도를 듣고 급히 회개함이다 . 그러나 이것은 원래 요나의 설교가 잘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 다만 하나님의 신이 저희들 중심에 크게 역사하신 바가 있어서 그 렇게 된 것이다. 

 

 

 

(2) 요나의 불평

 

니느웨가 회개함으로 하나님이 내리겠다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매 요나는 이 일을 심히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 욘 3:10, 4:1 ). 그 이유는 그 포악한 무리들이 멸망치 않고 도리어 복을 받게 됨이요 , 자기의 예언이 무신 ( 無信 ) 하게 됨이었다.

요나는 직분을 맡아 그대로 이행하기는 하였으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어 사랑으로 하지 않고 맡은 바 책임이매 어찌할 수 없어서 억지로 한 고로 저가 마땅히 받을 바 하늘의 상급인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잃은 것이다.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 ( 욘 3:10 )

 

요나는 니느웨 백성을 악하다고 싫어하고 버렸으나 하나님은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은혜를 풍성하게 베푸셨으니 그 은혜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1) 권고하심 - 요나를 보내어 저희들을 크게 권고하셨다 . 하나님의 권고는 벌써 큰 은혜이다 . 언제든지 하나님의 경고가 없이 어떤 민족이나 개인이 망하는 법이 없다 . 망하기 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경고가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나타나서 그 백성을 크게 권고하시는 것이다 . 망하는 자가 어찌 하나 님과 사람을 원망할 수 있으랴.

(2) 기회를 주심 - 권고하실 뿐만 아니라 회개할 기회까지 주시나니 이 40 일은 회개하기에 넉넉한 시간이었다 . 이미 망할 백성에게도 저희가 회복할 넉넉한 기회가 있었던 것이요 , 지금 망하여 가는 사람에게도 또한 회복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

(3) 용서하심 - 하나님께서 저희의 회개를 불쌍하게 여기사 내릴 바 재앙을 물리치셨다 ( 욘 3:10 ). 하나님은 원래 진노를 자비로 , 형벌을 은혜로 갚아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 욘 4:10~11 )

 

성 밖에 나가 앉아 니느웨의 멸망을 기다리고 있는 요나는 죄악의 백성을 멸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용서하심에 대하여 크게 분하고 원망스러워서 속이 타는 중에 햇빛까지 내리쬐니 더욱 괴롭게 되었다 . 그때에 마침 한 박 넝쿨이 있어 이것으로 인하여 그나마 괴로움을 면하게 되었더니 이튿날에는 그 박 넝쿨이 애석하게도 말라 죽고 말았다 . 이 사랑스러운 박 넝쿨을 잃어 버리고 저는 심히 슬퍼하며 괴로워하였다 . 이때에 요나에게 나타난 하나님 의 말씀을 보자 . “ 수고도 아니하고 또한 배양도 아니하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하는 이 박 넝쿨도 애석히 여기거든 하물며 내가 어찌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만도 12 만 명이나 있고 또한 많은 육축이 있는 이 큰 성 니느웨를 애석히 여기지 않겠느냐 ”( 욘 4:10~11 ). 이로서 요나의 편협하고 용렬한 마음을 철저히 타박하고 죄인에게까지 넘치는 당신의 너그러운 사랑 과 육축에게까지 미치는 당신의 한없는 자비를 나타내셨다.

 

 

 

묻는 말

 

1. 요나가 어찌하여 니느웨 전도를 거절하였습니까 ?

2. 요나의 신앙의 좋은 점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습니까 ? 

3. 요나는 어떤 전도인이었습니까 ?

4. 니느웨 백성이 회개한 데 대하여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 

5. 하나님이 죄인에게 어떠한 은혜를 주십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39 과

신앙의 힘 (9 월 25일 )

 

본문 : 시편 8 편

 

요절 : 오직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니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총명을 얻을지라 .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까지 있으리라 ( 시 111:10 )

 

서론 : 7 월 , 8 월 , 9 월 , 3 개월 동안 우리는 구약에 유명한 남녀 열두 사람을 공부하였다 . 각각 별다른 시대에 별다른 성격을 가진 저희들의 성격과 그 생활이야말로 십인십색이었으나 그러나 한 가지로 공통되는 점은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저희들의 신앙이다 . 이제 우리는 이것을 통괄적으로 다시 한번 복습하여 보자.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히브리 민족의 선구자요 , 가나안의 개척자로 이스라엘 나라의 창업 ( 創業 ) 자이다 . 저는 또한 하나님의 친구라 ,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거룩한 이름을 얻은 큰 인물이다 . 저를 생각할 때에 히브리 11 장 8 절을 기억하자 . “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장차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지라 ”( 히 11:8 ). 저의 신앙에 있어서는 그 맹목적 순종이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다.

 

 

 

야곱

 

야곱은 본래 이기주의자이었으나 하나님과 사귄 후로 큰 변화를 받은 사람이다 . 하나님을 구하는 저의 지성은 아무라도 당치 못할 그런 지성이었다 . 얍복 강변 브니엘에서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하나님의 축복을 구한 사람이다 . 자기본위의 사람에게 가증하고 교만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이제는 하나님 본위의 사람이 되어 진실하고 겸비하였다 . 열심으로 간절히 하는 기도는 인격상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모세

 

이스라엘 민족의 자유 해방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절세의 지도자이다 . 애굽의 물질적 번영과 육신의 향락을 초개같이 버리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오랫동안 준비한 사람이다 . 저는 본래 비천한 노예의 자식이었으나 불의를 보고는 견디지 못하는 그는 의협심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 저는 무서움이 없는 전사이었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을 튼튼히 믿는 까 닭이었다 . 믿음은 진실로 용기와 담력을 주는 것이다 . 히브리 11 장 24~26 절 은 모세의 인격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욱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재물보다 더욱 중히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 봄이라.”

 

 

 

드보라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요 , 백성을 다스리는 사사요 , 대적으로 더불어 싸우는 전사로 기울어가는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킨 하나님의 사자이다 . 이제 드보라는 연약한 여자임을 기억하라 . 하나님의 성신이 저의 중심에 충만하였으니 그 신비한 능력이 이 여자의 손을 통하여 큰 일을 나타내신 것이다 .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강하시다 . 약한 자여 , 하나님을 믿고 그 성신을 받을지어다 .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빌 4:13 ).

 

 

 

나오미와 룻

 

룻은 이방 여자로서 나오미에게서 신앙을 배워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 . 하나님 앞에는 종이나 상전이나 빈부귀천과 문명한 사람이나 야만인이나 가릴 것이 없다 . 누구든지 믿고 순종하면 그의 긍휼을 입는 것이다 . 룻은 참된 신앙을 위하여 본국도 버리고 예전에 숭배하던 신도 다 버리었다 . 저는 시어머니를 사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르렀다 . “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마 22:37 ).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형제를 사랑할지니 이것은 우리가 주께 받은 계명이니라 ”( 요 14:21 ).

 

 

 

한나

 

신령한 어머니 한나는 그 나라에 큰 공을 세워놓아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 그의 공로라는 것은 지혜 있고 의로운 아들인 사무엘을 그 나라에 낳아준 것이다 . 저는 한 어린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고 늘 기도함으로 마침내 위대한 선지자를 이루었다 . 신앙과 기도로써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가 있어야 하겠다.

 

 

 

사울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서는 저가 준재 ( 俊才 ) 이었으나 하나님을 떠나서는 저가 왕이로되 미치광이가 되었다 . 급기야는 악령의 지배를 받아 다윗을 시기하여 그 생명을 해하려고 하였으나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던 그 손은 마침내 자기를 죽이고 말았다 . 스스로 선 줄로 알아 교만한 자는 결국 넘어 지느니라.

 

 

 

요나단과 다윗

 

이 두 사람의 우의는 천하에 모범이 되었다 . 그것은 신앙이 공통되는 종교적 우정이었다 . 신앙의 공명 ( 共鳴 ) 이 없는 친구는 결국 참 친구가 되기 어려운 것이다 . 저희들은 어려운 지경에 있을수록 더욱더 사랑하였으니 “ 진실로 참 친구란 어려운 때에 의지가 되느니라 ”( 잠 18:24 ).

 

 

 

아모스

 

아모스는 죄와 형벌을 말하였다 .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되는 동시에 공의 ( 公義 ) 의 하나님이요 ,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말하였다 . 사람으로 서는 죄와 심판을 말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솔직하게 전하는 것이 그 사명을 받은 자의 일이다 .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솔직하게 용감스럽게 외칠 선지자를 찾으신다 . “ 누가 나를 위하여 가겠느냐 ?” 고 . 아모스는 촌사람이다 . 이렇게 소박한 촌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이다 .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선지자들은 거진 다 산이나 빈 들에서 하나님과 특별한 교제를 한 사람들이다 . 예수 , 요한 , 바울 , 모세 , 다윗 ,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

 

 

 

요시야

 

요시야는 왕이로되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성경대로 순종하여 그 나라의 정치를 크게 개혁한 사람이다 . 만승 ( 萬乘 ) 의 임금으로 하나님을 진실히 믿는다고 하면 그 나라에는 얼마나 큰 복이 될 것인가는 요시야를 보아 잘 알 수 있다 . 저는 온전히 성경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를 다스리었다 .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 되며 내 길에 빛이 되나이다 ”( 시 119:105 ).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유대 멸망 당시에 나서 모든 사람의 그릇된 신앙을 고치기에 심혈을 다한 선지자이다 . 신앙은 형식과 제도에 있지 않고 중심에 있음을 증거하는 동시에 당시 가증한 종교 의식과 진실치 아니한 종교가들을 크게 책망하였다 . 드디어 유대 사람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을 남겨놓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 그러나 저의 소리는 지금까지도 벼락같이 오늘의 종교와 그 교회의 신자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다 . 우리는 겸비한 마음으로 예레미아의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 저는 항상 울며 전도한 고로 우는 선지자 , 혹은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 오늘도 이런 눈물의 선지자가 나오기를 바란다.

 

 

 

요나

 

요나는 편협한 민족주의자요 , 용렬한 종교가이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저를 이용하여 세계동포주의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리를 나타내었다.

 

우리는 위에서 신앙의 위대함을 배웠다 . 어떠한 위기를 당하든지 하나님은 당신을 진심으로 의지하며 경외하는 자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사 저로 하여금 참된 진리의 사도 노릇을 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 아 , 위대한 것 ! 신앙의 인물이다.

 

 

 

묻는 말

 

1.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특히 어떤 점을 감탄합니까 ? 

2. 야곱은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습니까 ?

3. 미디안 이전의 모세와 이후 모세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 

4. 드보라의 직분을 말할 수 있습니까 ?

5. 룻의 친척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시오 . 

6. 사울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

7. 요나단이 다윗을 어떻게 사랑하였습니까 ? 

8. 아모스는 어떠한 선지자입니까 ?

9. 예레미야의 다른 선지자들보다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 

10. 요나서의 중심 교훈이 무엇입니까 ?

11. 신앙의 인물들이 하나님과 사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12. 이번 학기에 배운 신앙 인물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40 과

사가랴와 엘리사벳 (10 월 2일)

 

본문 : 눅 1:5~25, 1:57~80

 

요절 :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계명과 예절을 준행하여 흠이 없는지라 ( 눅 1:6 )

 

때와 곳 : 주전 6 년 , 유대 어떤 읍내

 

서론 : 앞으로 석 달 동안에는 신약에 있는 신앙 인물들을 공부할 터인데 이 공과에서는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오셨던 세례 요한의 부모에 대하여 공부하려 한다 . “ 여인에게서 난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다 ”( 마 11:11 ) 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저가 그러한 인물이 되기까지는 그 부모의 위대한 감화가 없지 아니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의로운 부부

 

“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계명과 예절을 좇아 행하여 흠 이 없는지라 .” 저희가 살던 때는 헤롯이 유대의 왕이 되어 로마의 주권으로 그 백성을 다스리던 때이다 . 이 헤롯은 주전 41 년에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주후 37 년에 유대의 왕으로 봉함을 받은 사람인데 사나운 정치로써 백성을 다스렸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유대의 독립당 마카비아 정부가 참패를 당하고 그 당원들은 헤롯에게 말할 수 없는 참혹한 형벌을 당하는 것과 예루살렘이 로마 병정의 발에 유린을 당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오랫동안 헤롯의 학정 밑에서 살아왔다 . 이때에 유대 민족들은 정치적으로 파멸을 당하는 동시에 종교적 신앙까지 극도의 타락을 보게 되었던 때이다 . 일반 민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계의 유력한 지도자인 대제사장까지도 자기의 구복과 일신의 영예를 위하여 정사 잡은 자와 돈 있는 자들에게 아첨하여 가증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대제사장들은 다 뽀에더스 문중 사람들인데 뽀에더스 대제사장은 헤롯의 딸과 혼인하였으니 이 한 사실만 보아도 유대의 형편과 종교계의 부패를 알 수가 있다 . 저희들은 세상의 영광과 권세에만 취하였고 장래 일에 대하여는 아무 소망이나 신념을 가지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 그런고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 같은 일은 매우 어리석은 일로 알았다 . 만일 그런 예언을 믿고 기다린다면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자로 지목할 만큼 되었었다.

그래도 메시야를 기다리며 유대의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자가 없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유대 어떤 산골에 사는 미미한 제사장 사가랴가 곧 그 사람이다 . 참으로 사가랴와 같은 진실한 생활을 하는 자가 그 부인 엘리사벳 외에 또 누가 있을는지 알 수 없다 . 저는 “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 장이었으니 대개 모세의 법이 있기 전에는 그 족속 중에 주장하는 자나 장 자가 제사장의 직무를 하였거니와 ( 창 8:20 ) 그 후에는 레위 족속이라야 제 사장이 되게 되었다 ”( 민 3:12, 45 ). 다윗 때에 와서는 이 제사장들을 24 반에 나누어 한 반이 1 년에 두 번씩 ( 한 번에 한 주간씩 ) 성전 봉사를 하게 하였으니 ( 대상 25:1~19 ) 아비야는 여덟째 반 제사장이었다 .

사가랴는 이 규례대로 1 년에 두 번씩 (4 월 , 10 월 )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1 주간씩 예절을 좇아 제사하는 일을 진심으로 하고 있었다 . 저는 진실로 사람 앞에만 흠이 없이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홀로 하나님 앞에 있어서도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저의 간구 ( 눅 1:8~13 )

 

“ 너의 간구함을 들으신지라 .” 저희들은 나이 이미 많고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나 그러나 그것으로써 실심하거나 슬퍼하여 저희의 종교적 의무를 게 을리할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다 . 오히려 더욱 지성으로 “ 주의 계명과 예절을 좇아 행하며 ”( 눅 1:6 ) 동포들의 가긍한 정지를 위하여 진심으로 분향하며 기도하는 바 있었던 것이다 . “ 이 두 사람은 의인이라 ”( 눅 1:5 ). 대개 “ 의인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며 ”( 롬 15:3 ) 그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자이다 ( 삼상 12:23 ). 사가랴는 자기를 위하여 있는 자가 아니요 , 그 백성들을 위하여 있는 참된 제사장이다 ( 히 5:1 ). 그러므로 저는 자기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었다 ( 눅 2:25 ). 왜 그런고 하면 이스라엘의 슬픔은 곧 자기의 슬픔이요 , 그 백성의 근심은 곧 자기의 근심이 되는 까닭이다 . 저는 자기가 자식이 없음을 부끄러워하거나 ( 당시에 자식이 없음은 수치가 됨 ) 슬퍼할 자가 아니요 , 다만 이스라엘의 운명을 크게 근심하는 자이다 . 그런즉 저의 간구는 자기에게 아들을 하나 주어 저를 위로하여 달라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위로하여 달라는 것에 있었을 것이다.

그 백성들을 위하여 1 년에 두 번만 얻을 수 있는 그 특별한 기회에 있어 저희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하면 저는 참 제사장이 아니고 작은 자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 저는 구약의 예언을 믿고 그대로 이루어 주시기를 기다리기에 넉넉한 신앙을 가진 자이다 . 더욱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실 일에 대한 예언이야 어찌 잠시라도 잊을 수가 있었으랴.

저는 항상 그 예언대로 “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자 ”( 말 3:1 ) “ 하나님의 율례를 버리고 지키지 아니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자 ”( 말 3:7 ) “ 엘리야의 심정을 가지고 아비된 자의 마음으로 그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 된 자의 마음으로 그 아비에게 효도하게 할 자 ”( 말 4:5, 6 ) 가 세상에 올 날이 있을 줄을 믿고 “ 속히 이런 사자를 보내어 정의와 참 된 신앙을 버리고 사망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 하는 것이 저의 평생의 소원이요 , 평생의 간구였던 것이다 .

 

 

 

하나님의 응답 ( 눅 1:13~17 )

 

“ 너의 간구함을 들으신지라 .” 이것은 물론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말이다 . 저의 간구를 들으시고 허락하신 자는 “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자요 , 엘리야의 심정과 재능을 주 앞에 행하여 아비로 자식 을 사랑케 하고 거슬리는 자로 하여금 의인의 슬기를 사모케 하여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자 ” 라고 하였다 . 이것은 사가랴가 오랫동안 간구 하던 바이니 곧 하나님의 선지자요 , 주의 길을 예비할 자 ( 눅 1:76 ) 였던 것 이다 . 가브리엘 천사는 사가랴에게 나타나 이렇게 하나님의 허락하신 바가 있음을 전하여 주었다.

 

 

 

사가랴의 경외

 

“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서매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였다 ”( 눅 1:11~12 ). 아무리 신앙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런 일을 당할 때에는 놀라지 아니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 모세도 그리하였고 ( 출 3:6 ) 마리 아도 그리하였다 ( 눅 1:29 ). 이것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보다 인간이 접촉하여 보지 못한 신기하고 엄위 ( 嚴威 ) 한 일에 대한 경외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 신앙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없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즉 저의 처음 놀람과 나중에 믿지 못한 것은 저로서는 무리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 물론 저가 주의 사자를 보내어 달라고 간구하였을지라도 그 사자가 자기의 자식으로 나리라고까지는 감히 바라지도 못한 일이요 , 또 육신의 처지로 볼지라도 저희는 이미 늙어 생산할 능력을 잃은 지 오래였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알면서도 확실히 믿고 순종치 못하였던 것은 저의 약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이것은 자기의 부족한 조건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능력은 생각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저는 믿지 못하여 이에 벙어리가 되었다 ( 눅 1:20 ). 언제든지 자기의 부족한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여 의혹의 종이 되어 있는 자는 입이 있으되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는 자는 벙어리라도 말하게 되며 무식한 자라도 외치게 되는 것이다.

 

 

 

감사와 환송 ( 눅 1:24~25, 1:67~79 )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였다 .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성신이 충만하여 찬송하였으니 이 찬송은 곧 저의 예언이 되었다 .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었던 일에 대하여 원망이나 불평을 가질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의 그런 징계를 받았으나 간구한대로 이루어지는 것만 무한한 기쁨으로 알았던 것이다.

이제 입이 열리매 비로소 찬송하였지마는 말하지 못한 열 달 동안에도 이 찬송과 감사는 그 가슴에 그대로 뭉치어 있었을 것이다 . 저희의 생활은 기도의 생활인 동시에 감사와 기쁨의 생활이었다 . 이렇게 경건한 부모에게서 자라난 요한이 후일에 큰 인물이 되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묻는 말

 

1. 헤롯 때의 정치상 형편이 어떠하였습니까 ?

2. 당시에 일반 대제사장들과 사가랴 사이에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 

3. 사가랴의 간구하는 요점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 

4. 사가랴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

5. 기도와 찬송이 없이 경건한 가정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41 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10월 9일)

 

본문 : 누가 2:15~19; 요한 2:1~5, 19:25~27

 

요절 :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리이다 ( 눅 1:38 )

 

때와 곳 : 주전 5 년 12 월부터 주후 30 년 4 월 7 일까지 베들레헴 , 가나 , 예루살렘

 

서론 : 신 구약 66 권 중에 훌륭한 부인들이 많이 있으나 성모 마리아 같이 거룩하고 위대한 부인은 또 없다 . 물론 예수의 어머니신 것만큼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존중하되 어떤 때에는 예수보다도 더 높이 공경하는 고로 신교파 사람들은 반동적으로 마리아를 저버리다시피 하였었다 . 그러나 이는 전연 ( 全然 ) 히 교파심이 남은 편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 저는 과연 만대만민에게 일체로 존경을 받을 여자 중에는 다만 한 분만 되는 이다.

 

 

 

신앙의 어머니 ( 눅 2:15~19 )

 

 

(1) 겸비한 신앙과 심령적 위안 ( 눅 1:38, 1:46~47 )

 

마리아는 처음 너무나 뜻밖의 일을 당하게 될 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고 번민이 없을 수가 없었겠지마는 욕이 되거나 영광이 되거나 전부를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태연히 안심하였다 . 이런 겸비한 신앙에 자연히 따라오는 하나님의 선물은 안심 , 그것이다 .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배우라 너희 마음이 편히 쉼을 얻으리니 ”( 마 11:29 ) 하신 예수의 말씀을 들 어서도 겸비한 자가 마음에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거니와 “ 주 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 하는 겸비한 신앙의 고백과 “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나이다 ”( 눅 1:46 ) 한 마리아의 사실을 보아서도 겸비한 자에게 하늘의 위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 노래의 기쁨과 명상의 기쁨 ( 눅 2:13~20 )

 

누가 1 장에서 마리아에게 귀한 소식을 전하던 천사의 기쁨은 2 장에서 천군과 천사와 많은 무리의 기쁨이 되어 노래로 나타났다 . 천사들의 기쁨은 높이 드러나 노래가 되었고 마리아의 기쁨은 깊이 잠기어 명상이 되었다 . 천사의 노래보다 마리아의 명상에 더 깊고 오묘한 것이 있지 않은가 . 천사들과 목자들은 그리스도를 듣고 보는 기쁨이요 ,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소유한 기쁨이었다.

 

 

 

(3) 모든 것을 마음에 새겨둠 ( 눅 2:19 )

 

성경에 마리아에게 관한 기록이 많이 있지 아니함으로 그의 성격에 대하여 말할 것이 별로 없으나 이 위에 드러난 말씀만 가지고도 그의 성격의 일부를 살펴볼 수 있다 . 하나님께서 성모로 택한 저는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고 문학적 천재가 있는 사람인 동시에 매우 침착하고 또 조밀하여 만사에 관찰이 자세하며 생각이 깊고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고 어떤 역사가는 말하였다 .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는 그 자녀의 말과 행위와 또 그 주위에서 일어 나는 모든 사건을 마음에 새겨두고 깊이 생각하는 일이 매우 필요하다 . 그렇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잔말을 하며 책망을 하거나 또는 자녀가 어떠한 일을 하든지 도무지 유의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방임하여 두는 것은 어머니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 마리아는 예수 , 유다 , 야고보의 언행에 유의하여 조그마한 말이나 무의미한 것 같은 일도 일일이 마음에 두고 여러 방면으로 생각하여 어떻게 가르치며 지도하여야 할 것까지 연구하였던 것이다.

 

 

 

협동의 어머니 ( 요 2:1~5 )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 예수께서 일하심에 대하여 마리아가 같이 하였다는 기록이 별로 없고 다만 예수께서 첫 번 이적을 행하시던 가나 잔치에 같이 참예한 일과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때에 그 옆에 같이 계셨다 는 것밖에는 주목할 만한 곳이 없다.

“ 이것은 예수의 처음 이적이라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사 그 영광을 나타내 시매 제자들이 믿더라 ”( 요 2:11 ). 예수의 신비적 능력은 이때에야 비로소 사람 앞에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때까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신비한 능력이 그대로 감추어 있던 것이다 . 마리아는 30 년 동안이나 천사의 말과 목자의 증거를 마음 속에 새겨두고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히 세상에 보내신 자로 알아 왔다고는 할지라도 예수의 중심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오히려 미숙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가나 잔치에 왔을 때부터 그 신앙은 더욱 완전하게 되어 예수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념이 더욱 확실하여졌다 . 그리하여 저를 참으로 존 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 포도주가 진 ( 盡 ) 하매 예수에게 이르되 포도주가 없다 ”( 요 2:3 ) 하여 어떻게 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 이러한 마리아의 청구나 혹은 그 간섭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하는 말씀은 그렇게 존경하는 말씀이 아니었다 . 이 순간에 예수께서는 육신적 윤리 관념에서 떠나서 하나님 편에 있었고 마리아는 다만 육신 편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마리아는 예수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을 존중하면서도 육신의 생각으로는 자기의 아들이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뜻만 생각하는 자는 주를 믿는다고 하여도 아직 그 믿음은 미숙한 믿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예수께서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뜻만 생각하는도다 ”( 마 16:23 ) 하였으니 “ 여인이여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요 2:4 ) 한 것은 오히려 너그럽게 용납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깊이 깨달은 바 있었다 . 그리하여 저는 곧 자기 사람의 생각을 부정해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존경하게 되었다 . 즉 예수는 자기가 양육한 아들이라는 관념을 얼른 벗어버리고 자기를 주재하는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계심을 깨닫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 인하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 너희에게 이르시는 대로 행하라 ”( 요 2:5 ) 고 말하게 된 것이다 . 위대한 자의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고 또 존경하는 것이다 .

 

 

 

마리아의 슬픔과 예수의 효성 ( 요 19:25~27 )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날이 돌아왔다 . 마리아는 십자가에 달려 형벌 당하시는 것을 곁에서 보게 되었다 . 미리부터 예수는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희생이 되실 것을 짐작하고 있던 마리아에게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으나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아들을 볼 때에 그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하였을 것인가 . 시므온의 예언대로 칼이 그 마음을 찌르는 듯하다고 밖에는 더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다 ( 눅 2:35 ). 이 세상에서 영걸 ( 英傑 ) 스러운 아들을 둔 부모는 이렇게 마음이 아픈 일을 당하지 아니치 못한다 . 이것이 곧 세상을 대신하여 당하는 아픔인가 한다 .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어머니를 생각하는 지극한 정지는 인간으로서의 평생 효성을 다한 것이다 . 곁에 섰던 요한과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에게 요한을 가르치며 “ 저가 당신의 아들이니라 .” 또 요한에게 “ 보라 저가 네 어머니니라 ”( 요 19:26~27 ) 하셨다 . 이때에 마리아는 그 곁에 서서 참혹한 광경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 그래서 요한이 저를 이끌고 예루살렘의 자기집으로 돌아간 줄로 생각한다.

무덤에 장사할 때나 부활하신 아침에 저가 그곳에 참례했었다는 증거를 알 수 없거니와 예수 승천하신 후 저가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다른 제자들과 같이 거하며 성신을 기다리셨던 것을 볼 수 있다 . 그 다음에는 그의 사적이 별로 없고 묵시록 12 장에 상징적으로 마리아를 말한 것이 있을 뿐이다 . 전설에 의지하면 요한은 생활이 비교적 넉넉할 뿐 아니라 예수의 유언도 있었고 또 마리아의 친척도 되는 고로 마리아의 평생을 아들들과 같이 모셨다고 한다.

 

 

 

묻는 말

 

1. 마리아의 성격은 어떠합니까 ?

2. 자녀의 마음에 진리를 넣어주기 위하여 어머니는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 

3. 자식 된 자가 부모에게 대한 의무가 무엇입니까 ? 

4. 마리아의 신앙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까 ? 

5. 천사의 기쁨과 마리아의 기쁨을 비교해 말하시오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42 과

시므온과 안나 (10월 16 일)

 

본문 : 본문 : 눅 2:25~39

 

요절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 마 5:8 ) 

 

때와 곳 : 예수 나신 후 40 일 예루살렘 성전

 

서론 : 시므온과 안나는 예루살렘 성전에 출입하는 많은 사람 가운데 예수를 알아본 첫째 사람들이다 . 저희는 마음이 청결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오랫동안 성전에서 봉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메시야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 결국은 주를 찾아 만나 기쁨으로 증거한 사람들이다 .

 

 

 

시므온의 인격 ( 눅 2:25 )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예루살렘에 한 사람이 있었으니 첫째 , 저는 의롭고 성심이 있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 의인은 늘 그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바라고 이를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이다 . 저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그 백성의 행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 자이다 . 이런 사람이 없는 나라는 망하는 것이다 . 의인이 단 열 사람이 없어 멸망한 소돔성을 기억하자 . 모든 사람은 다 자기의 정욕과 이기심만을 위하여 살고 그 민족 전체의 행복을 기대하지 아니할 때에 그것은 불가불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둘째 , 저는 또한 성심이 있었다 .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르친 것이다 . 민족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다 의인이 아니다 . 거기에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심이 있어야 한다 . 백성을 사랑한다 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가 많이 있으되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사람을 사랑치 아니할 자가 없다.

 

 

 

성신의 충만 ( 눅 2:25~27 )

 

시므온은 늘 성신의 교통을 받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1) 성신이 그 위에 계심

 

성신이 그 위에 계셔서 저의 언행심사를 주관하였다 . 그런고로 저는 자기의 의향대로 하지 못하고 다만 성신의 지도대로만 사는 생활을 하였다 . 곧 성신은 그의 위에 있어서 저를 주관하고 저는 그의 아래 있어서 순종하여 성신을 기쁘시게 할 따름이었다 . 그러므로 성신이 심령을 주관하게 되면 이는 곧 자기 본위의 생활이 아니고 하나님 본위의 생활이 되는 것이다. 

 

 

 

(2) 묵시를 받음

 

성신은 저에게 말씀하시며 모든 진리를 나타내셨다 . 그리고 저는 그 말씀을 잘 들었다 . 묵시록에 보면 “ 성신이 여러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하고 일곱 번씩이나 말하였다 . 그러나 심령이 의롭지 못하고 깨끗지 못한 무리들은 주의 진리와 그 계명을 깨닫지 못한다 . 저가 묵시를 받아 죽기 전에 반드시 그리스도를 볼 것을 믿었다 . 여기서 저의 견실한 신앙을 볼 수 있으니 사람이 성신의 도우심이 아니면 확신하는 가운데 들어가기 어렵다 .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자기의 힘으로 보지 못한다 . 성신의 지시와 도움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3) 성신에게 이끌림

 

저가 성신의 감동으로서 성전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 곧 성신이 저를 감동하여 들어가게 하였다 . 저의 행동은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신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는 것이었다 . 예수께서 광야에 나가 시험을 받게 되었을 때에 “ 성신에게 이끌리어 ”( 마 4:1 ) 라고 기록하신 말씀은 의미 없는 말이 아니다 . 세상에는 자기의 ‘ 이상 ’ 이라 , ‘ 주의 ’ 라 하면서 움직이는 자도 있고 ‘ 하나님의 명령 ’ 이라 , ‘ 성신의 감동 ’ 이라 하면서 움직이는 자도 있으니 전자는 바울의 말한바 육신을 좇는 자의 편에 설 자들이요 , 후 자는 성신을 좇는 자라고 할 것이다 . 성신은 늘 사람을 이끌기도 하고 몰아 가기도 한다 . 성신에게 감동되어 온전히 이끌림을 받는 자가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이다 . 그러나 자기를 주장하는 자는 성신의 감동이 있으되 이를 멸시하고 잘 끝나지 아니한다.

 

 

 

예수를 알게 됨 ( 눅 2:28~35 )

 

“ 성신은 진리의 신이라 …… 이르시면 나를 위하여 증거할 것이오 ”( 요 15:26 ). 이는 예수의 말씀이다 . 성신이 오시면 예수를 증거하여 알게 한다 . 진리의 신의 역사를 받지 않고 예수를 아는 자가 없다 . 성신을 받았다고 하는 자면 저가 참으로 예수를 아는 자일 것이다 . 성신이 예수에 대하여 알게 한 것을 보자.

 

 

(1) 구주 되심을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갈 때에 성신은 시므온과 안나로 하여금 이 아기가 그리스도인 줄을 알게 하였다 . 모든 사람이 다 알지 못하 였으되 이 두 사람만 알아 볼 수가 있게 된 것은 성신의 감동함이 분명하다 . 그때에 시므온은 “ 내 눈이 주의 구원하심을 보았나이다 ” 하였고 안나는 “ 예루살렘을 구속하기를 바라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를 말하더라 ” 고 하였다 . 이 아기가 곧 구세주가 되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 구주임을 알게 될 때에 찬송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과 증거하는 것은 하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 여기서 저희는 하늘이 주시는 평안을 맛보고 진리가 저희를 놓아주시는 것을 경험하여 본 것이다.

 

 

 

(2) 주의 고난과 승리를 

 

성신께서는 그 아기가 구주 되시는 것만 알게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당하실 고난과 그로 말미암아 얻을 영적 승리까지 알게 하였다 . 시므온이 마리아 앞에서 예언하여 예수께서 장차 욕을 많이 받을 것과 이로 인하여 그 어머니의 마음은 칼로 에이는 듯한 아픔을 맛볼 것을 말하였다 ( 눅 2:34~35 ). 육신으로는 말할 수 없는 멸시와 고난을 받으실 것이나 저는 이스라엘의 영화요 , 이방의 빛이요 , 만민에게 구원이 되실 것을 증거하였다 . 성신으로 말미암아 주를 알게 되는 자는 저의 몸소 받은 고난도 알게 되는 것이다 . 저의 영광만 아는 것이 아니요 , 그 십자가의 고난과 또 십자가의 승리를 알게 되는 것이 곧 육적 고난은 영적 승리임을 알게 된다 .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다.

 

 

 

안나의 인격 ( 눅 2:36~37 )

 

“ 시집가서 일곱 해 동안 지아비와 같이 살고 과부 된 지 84 년이라 .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주야에 섬기더니 …… ” 하는 말을 보아서 저의 신앙과 인격을 알 수가 있다.

 

(1) 절개 : 저는 절개가 굳은 사람이다 . 청춘에 과부가 되어 평생을 두고 마음을 변치 아니하고 다만 일념으로 신앙생활에 몸을 바쳤으니 저는 과연 주 의 거룩한 신부라고 할 수밖에 없다.

(2) 인내 : 그 동안 길이 참아 주의 영광을 보기까지 믿음으로 기다렸으니 그의 인내와 신앙을 알 수 있거니와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또 주야로 기도하면서 받들어 섬기었으니 여기서 저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동시에 저의 철저한 성격에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 이렇게 굳은 절개와 인내와 지성으로 주를 봉사하였으니 저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은 당연한 상급 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참된 증거 ( 눅 2:38~39 )

 

시므온은 예수를 안고 찬송한 것이 주에게 대한 참된 증거가 되었다 . 예수를 참으로 중심에 안고 있는 자는 찬송할 뿐이니 그것이 참된 전도요 , 좋은 증거가 되는 것이다 . 우리가 주를 증거하려면 먼저 성신의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중심에 안을 것이다 . 그리스도를 그 생활에 가지지 못한 자는 주에게 대한 찬송이 있을 수가 없다 . 더욱이 전도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그와 반대로 예수를 품에 안은 자가 찬송이 없을 수 없고 예수를 참으로 아는 자가 증거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묻는 말

 

1. 시므온은 어떤 사람입니까 ?

2. 의인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입니까 ? 

3. 안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

4. 성신은 진리의 신인데 무엇을 증거한다고 하였습니까 ? 

5. 예수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43 과

그리스도인의 싸움 (10 월 23 일):세계절제주일

 

본문 : 갈 5:13~26

 

요절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느니라 ( 고전 9:25 )

 

때와 곳 : 바울이 갈라디아에 편지를 쓴 때는 주후 57 년 . 이 편지를 쓴 곳 헬라 나라 고린도

 

서론 : 이 공과에서 우리는 갈라디아 교인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를 통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을 배울 수가 있다 . 대개 그리스도 인은 영과 육의 싸움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안으로 또 밖으로 끊임없이 이것을 싸우는 자이다 .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 육에 속한 자를 나에게서 발견하고 또 세상에서 이것을 찾는다 . 그리하여 이 육에 속한 사람이 하는 육의 일을 사랑으로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 갈 5:13~15 )

 

“ 너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부르셨나니 그러나 그 자유로써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함으로 서로 종이 되라 . 온 율법은 일언이 폐지하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셨느니라 ” 라는 말씀은 갈라디아 교인에게 준 바울의 말씀이다.

저는 먼저 기독교인의 자유를 주장하였고 다음에는 그 자유의 성질을 말하여 이는 ‘ 사랑함으로 서로 종이 됨 ’ 에 있다고 하였다 . 그리고 다시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한편으로 자유를 취하는 것인 동시에 온 율법을 복종하여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진실로 기독교인이 주장하는 바 자유는 자기의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하는 그것이 아니다 . 원래 자유라는 것과 마음대로라는 것과는 같은 의미의 것이 아니다 . 육의 욕심대로 하는 것은 실상 자유가 아니라 육의 욕심이라는 그 악의 세력에게 종이 되어 결국 원치 아니하는 죄악까지도 불가불 범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 그러나 남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서 심령이 자유하게 되면 이는 의 ( 義 ) 의 종이다 . 결국 모든 정욕과 불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온전히 진리대로 자유 활동함에 이르는 것이다.

 자유라고 하여서 제 마음대로 저의 비열한 욕심을 만족시키려는 자는 벌써 그 심령이 악에게 사로잡힌 바 된 사람이다 . 여기 육체라고 한 것은 그냥 육이라고 하여도 옳은 것이니 이는 영의 선한 요구를 떠나서 죄와 악을 따르는 인간성을 가르친 말이다 . 곧 죄의 세력을 가르친 것이다 . 만일 사람이 자기의 욕심을 온전히 떠나서 진심으로 남을 사랑하되 자기 몸같이만 한다고 하면 온 율법은 벌써 다 이루었으니 다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사랑이 없는 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기독교인은 율법의 종이 될 자가 아니요 , 사랑으로써 자유할 자이다 .

 

 

 

영의 법과 육의 법 ( 갈 5:16~18 )

 

사람에게는 두 법이 있으니 곧 영의 법과 육의 법이다 . 사람은 이 두 법 중 어느 법에게든지 지배를 받지 아니하면 안 된다 . 이 두 법 뒤에는 이것을 어거 ( 馭車 ) 하는 두 주인이 있으니 육의 법 뒤에는 마귀가 있고 영의 법 뒤에는 성신이 있다 . 사람은 어느 법 아래 속하든지 그는 그 법을 주장하는 자의 종이 되고 마는 것이다 . 이 두 법이 서로 합하지 못하매 한 사람의 중심에서 서로 싸워 사람을 괴롭게 한다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에게 “ 너희는 성신을 좇아 행하라 ” 고 권고하였다 . 이제 너는 성신을 좇아 영의 법대로 살려느냐 , 마귀를 좇아 육의 법대로 살려느냐 ?

 

 

 

육적 결과와 영적 결과 ( 갈 5:19~23 )

 

대개 육의 법을 좇는 자에게서는 육의 일이 나타나는 것이다 . 육의 일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하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과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싸우는 것과 시기하는 것과 분노하는 것과 당을 짓는 것과 이단과 투 기와 또 술 취하는 것과 방탕하는 것들이요 , 영의 일은 그 결과로 사랑 , 희락 , 화평 , 인내 , 자비 , 양선 , 충성 , 온유 , 준절 (? 節 ), 이러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 원래 기독교인은 육의 법을 떠나서 영의 법대로 살 자들이다 . 자기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다 이 법 아래서 살도록 하는 것이니 기독교인들의 활동은 그 요점이 전부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 되어서도 성신의 법에 순종치 아니하고 여전히 마귀의 법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심히 애석한 일이다 . 이제는 우리의 행위를 살피어 어떠한 법에 속하여 살고 있는지 판단해야 된다 . 만일 알 수 없거든 먼저 갈라디아 5 장 19 절 이하에 있는 육의 일을 하나씩 가져다 놓고 우리의 일을 하나씩 대조하여 볼 것이다 . 성신의 밝은 판단을 얻어 어디 속한 자임을 찾는 일이 예수의 사람 되는 첫째 계단이다.

 

 

 

그리스도 인의 승리 ( 갈 5:24~25 )

 

그리스도 인은 두 곳에 싸움을 싸우고 있는 사람이다 . 안으로 육의 세력을 박멸하자는 싸움과 밖으로 세상의 죄악을 쳐서 이기자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아직 육의 종이 되어 있는 이상에는 세상에 대한 애착과 정욕을 이기기 어렵다 . 성신을 따라 영의 법대로 살고자 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이것을 누르려고 일어나는 육의 세력이 발동함을 깨닫게 되나니 정욕 , 물욕 , 세욕 에 속한 모든 죄악의 일이다 . 그러나 영의 세력이 더 강하여 이를 이길 때 에는 스스로 승리를 느끼며 진리에 있어서 자유하게 됨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밖으로 세상과 싸우지 아니치 못할지니 기독교인으로서 세상 편도 아니요 , 예수의 편도 아니고 중간 상태에 있는 자는 더욱 가증한 죄인임을 면치 못한다 . 야고보는 말하기를 “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이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는 것 ”( 약 4:4 ) 이라고 하였다 . 세상의 죄악을 대항하여 마땅히 십자가를 지고 나설 것이다 . 우리는 늘 세상을 향하여 자유와 구원을 선언하기는 쉽게 하나 십자가는 잘 지지 않는다 . 십자가 없이는 승리도 없고 자유도 없다 . “ 예수의 사람들은 그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나니 ”( 갈 5:24 ), 이렇게 십자가에 자기를 못박아 죽이는 경험을 지나서야 비로소 갱생의 아침을 당하게 될 것이다 . 만일 기독교가 세상에서 물러간다면 세상은 그 무법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패망하고 말 것이다 . 성신의 뜻대로 자기를 절제하는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 하고 육신에 끌려 자기 욕심대로 하는 사람들을 속인 ( 俗人 ) 이라고 할 것이다 .

 

 

 

묻는 말

 

1.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말할 수 있습니까 ? 

2. 육의 일과 영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3. 육의 일은 어떤 것들입니까 ?

4. 어떻게 하여야 육의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까 ? 

5.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44 과

시몬 베드로 (10월 30 일 )

 

본문 : 막 8:27~29; 눅 22:31~34; 요 18:25~27, 21:15~17

 

요절 : 여러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 굳세게 말함을 보고 그 본래 불학무식 ( 不學無識 ) 한 백성으로 알았다가 기이하게 여기고 또 그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을 알더라 ( 행 4:13 )

 

때와 곳 : 주후 27 년 2 월 벧바라에서 부르심을 받음 . 29 년 여름 가이사랴 빌립보 근방에서 신앙을 간증함 . 30 년 4 월 7 일 오전 1 시로 5 시에 예루살렘에서 주를 모른다 함 . 30 년 4 월에 갈릴리에서 다시 사도직을 받음 .

 

서론 : 베드로는 본래 열심이 많고 진실하고 담대한 사람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 동류 ( 同類 ) 중에서 항상 인도자가 되어 있었다 . 그의 이름이 사도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가운데 늘 첫째로 있게 된 것이라든지 , 예수를 따르는 세 제자 중에서도 늘 첫 자리에 쓰여있는 것을 보면 제자들 중에 특출한 인물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먼저 선언도 하였고 또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도 하였으니 저는 잘한 것도 많았고 실수하는 것도 적지 아니하였다.

바울을 이방 사람의 사도라고 하면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라고 하겠다 ( 갈 2:7~8 ). 저는 목회적 전도인으로 교회 치리 ( 治理 ) 에는 첫 사람이라고 할만 하다 . 저가 말년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다 함은 우리가 이미 들은 바이다.

 

 

 

베드로의 신앙 간증 ( 막 8:27~29 )

 

베드로는 열정이 있고 또 과단성이 있는 사람이다 . 주의 말씀 한마디에 그 물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 . 한번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대한 세상 사람들의 여론을 물으시는 끝에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하고 제 자들의 신앙을 물으신 일이 있었다 . 이때에 베드로가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 16:16 ) 하고 대답하였다 .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엘리야로 혹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로 만 알고 있을 그때에 베드로는 저를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만 보지 않고 선지자들이 기다리던 구세주인 줄을 알았었다 . 한걸음 더 나가서 세상 사람을 구원하실 구세주인 동시에 저는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로 믿었던 것이다.

예수를 한 종교가나 교육가로만 알아가지고 이점을 높이 떠드는 자는 아직 예수를 참으로 알지 못한 자이다 . 저를 알되 나와 온 인류의 구주로 , 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야 비로소 참된 신앙을 가진 자라고 하겠다. 이 신앙은 물론 그때에 있어 다른 제자들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거니와 하여간 이러한 신앙을 입밖에 내어 밝히 간증한 자는 이 용감한 베드로 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참람 ( 僭濫 ) 이라고 하여 죽을 죄로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하였으니 이 얼마나 담대한 간증인가 저는 예수에게 대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 존경하지 아니치 못하거니와 위험한 시기에 있어서 그 신앙을 솔직하게 간증한 그 대담스러운 태도에는 더욱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바 신앙을 솔직하게 또한 담대하게 간증하여 우리의 태도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 네가 예수를 너의 구주로 , 또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믿느냐 ? 그러면 너는 이것을 담대히 증거하여 예수의 제자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낼 것이다.

 

 

 

베드로의 자만 ( 눅 22:31~34 )

 

베드로는 자기가 가장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자만이 없지 않았다 .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는 그 신앙대로 끝까지 주를 따라 나갈 사람으로 자처하였던 것이다 ( 마 16:33 ). 언제든지 무엇이 조금 낫다고 하는 자가 자만에 흐르기 쉽고 용기 있고 담대한 자는 경거망 동하기가 쉽다 . 그래서 결국 실패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 베드로는 예수에게나 제자들에게나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만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저는 자기가 선 줄로 알게 되는 그것이 가장 위태한 것인 줄로 알고 스스로 삼가며 더욱 겸비하여 주를 의지하고 나가지 아니하면 안되겠다고 하는 그런 신앙 자리에까지는 아직 들어가지 못하였던 것이다 . 주께서는 베드로의 불완전한 신앙을 아시고 그 앞길에 대하여 염려 하시는 바가 있어서 “ 이제 사탄이 밀알을 까부는 것같이 너를 까부를 것이다 ” 고 경고하여 저로 하여금 더욱 겸비한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 그러나 저는 이 것을 깨닫지 못하고 아직 큰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 “ 주여 내가 주로 더불어 옥에도 같이하고 죽기도 같이하기를 정하였나이다 .” 이야말로 과연 굉장하였다.

 그러나 저의 신앙은 아직 혈육에 속한 것이었으매 그날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하였다 . 저는 머지않아 [ 未久 ] 이러한 자기가 나타날 줄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 저는 현재 자기의 자신만 가지고 그렇게 장담 하였던 것이다 . 슬프다 . 저의 자신이라고 하는 그것이 저를 넘어뜨릴 것인 줄을 저가 깨닫지 못하였다 . 저는 분명히 자기 자신이라는 그 자만으로 말미암아 실패를 당하고 말았다.

언제든지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이상이니 자기의 자신이니 하여 자만심에 기울어지는 자는 벌써 타락에 있는 자이다 .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 자기가 능히 할 수 있는 줄로 알았다 .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 “ 내게서 끊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 요 15:5 ) 고 . 온전히 주만 믿고 자기의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가 참으로 신앙의 생명을 체험하는 자이다. 너의 자신 , 너의 이상 , 너의 계획 , 너의 주장 즉 , 너의 육에 속한 모든 것 을 다 버리고 다만 예수로만 너의 주를 삼고 모든 일에 의지하여라 . 그리하 면 네가 그리스도의 사업을 성취하리라. 

 

 

 

베드로의 타락 ( 요 18:25~27 )

 

예수께서 잡히실 그때에 저는 칼을 들어 말고의 귀를 잘랐다 . 저의 혈기와 용맹은 여기에 와서 절정에 달하였던 것이다 .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점점 떨 어지기를 시작하여 예수께서 잡히어 가실 때에는 가까이도 따라가지 못하고 보이지도 않게 ‘ 멀리 따라가서 ’ 대제사장 아문에 와서는 작은 계집종을 두려워하여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 옥에도 같이 , 죽기도 같이 하겠다고 결심하였다던 그 용감스러운 베드로는 어디로 가버리고 이렇게 비겁하고 못난 베드로가 나타났는고 ? 이렇게 자기를 믿고 함부로 호언장담하는 자는 오래 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 비겁한 베드로의 눈은 마침내 자기를 돌아보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 눅 22:60~61 ). 동시에 캄캄한 밤을 깨치는 닭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 . 이 장면이야말로 베드로 평생에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 저는 예수를 쳐다보고 또 닭의 소리를 듣고야 비로소 자기를 알게 되었다 . 그리고 일찍이 주께 서 하신 말씀의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 . 그 자신 있고 용감하고 열심이 있던 베드로는 어디로 가고 비겁한 자기 , 주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지 아니한 자기 , 주를 참으로 따르지 못한 자기 , 그 불철저한 자기가 숨김없이 나타났다.

이에 저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밖에 나가서 크게 통곡하였다 . 이것은 옛 베드로 곧 혈육의 베드로를 장사하는 울음이요 , 새 베드로 곧 영적 베드로가 해산에 임한 울음이었다 . 어떤 전설에 보면 베드로는 그때부터 닭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늘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슬피 울었다고 하였다 . 그리고 매일 새벽 닭이 울 때에는 밖에 나가서 주를 모른다고 하던 그 시간을 참회 의 기도로 보내었다고 한다.

 

 

 

중생한 베드로 ( 요 21:15~17 )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고 물어보셨다 ( 주 : 반석을 의미한 베드로라는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심에 주의하라 ). 늘 자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말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아주 겸손한 음성으로 “ 제가 주 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 하였다 . 늘 ‘ 내가 ’ 하겠습니다 하던 자만한 베드로는 ‘ 주께서 아십니다 ’ 하는 겸비한 베드로로 변하였다 . 세 번이나 물으신 것은 저가 여러 번 예수를 모른다고 한 그 불철저한 첫 베드로를 깨닫게 하심이었다 . 셋째 번 물으실 때에는 “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알지 못하심이 없사온즉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 하였으니 이는 나의 말한 것이나 행한 것을 다 주께서 아시는 것 같이 내 마음 깊은 속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또한 주께서 아시리이다 하는 의미였다.

 

이때에 베드로는 근심을 느꼈다 . 그러나 이것은 겸비한 참회와 진실한 경외로 말미암은 근심이었다 . 과거의 죄과로 자극을 받게 될 때에 저의 심령은 상함을 받아 연약하여졌다 . 그러나 저의 상한 심령을 고치고 다시 굳센 진리의 사도로 만들 오순절은 왔다 . 여기에서 저는 완전히 새로 지음을 받았으니 곧 성신과 불로 거듭난 것이었다 . 이때부터 저는 “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 하신 명령과 “ 내 양을 치라 ” 하신 주의 유언을 지키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는 사도가 되었다.

 

 

 

묻는 말

 

1. 베드로의 성격의 좋은 점과 안된 점이 무엇입니까 ?

2. 예수에게 대한 완전한 신앙을 누가 저 세상에 드러내었습니까 ? 

3. 베드로가 처음 간증한 신앙에서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 

4. 베드로가 어찌하여 떨어지지 아니하였습니까 ?

5. 시험과 환난이 어찌하여 신앙에 있어서 필요합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45 과

정직한 회의자 도마 (11 월 2일)

 

본문 : 요한 11:14~16, 14:58, 20:24~29, 21:1~2

 

요절 : 도마가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요 20:28 ) 

 

때와 곳 : 주후 30 년 베다니 , 예루살렘

 

서론 : 도마는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디두모라고도 부르는데 쌍둥이라는 뜻이다 . 저는 회의자 도마로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졌으니 이는 저가 예 수 부활의 소식을 들을 때에 친히 만져보지 못하고는 믿을 수 없다 함을 인 함이다 . 그러나 저의 의심은 솔직한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끼쳤다 . 어거스틴 선생이 말하기를 “ 저의 의심은 우리로 의심치 않게 하는 의심이라 ” 고 하였다 .

 

 

 

도마의 충의 ( 요 11:4~16 )

 

요한 복음 11 장 1 절로 13 절까지 보면 예수께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누워 잔다고 하였더니 제자들은 이 말씀을 그대로만 해석하여 누워 자면 “ 낫겠습니다 ” 하였다 . 예수께서 다시 명백하게 말씀하시기를 “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 하시고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 그러나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함이니라 ” 하시고 이제는 “ 그에게로 가자 ” 고 하셨다.

이때에 도마는 주께서 나사로를 위하여 감히 원수들이 틈을 엿보고 있는 그 험지에 들어가시겠다는 것을 듣고 동무들을 보고 “ 우리도 가서 같이 죽자 ”( 요 11:16) 고 하였다 . 이것은 두어 주간 전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여 유대인들을 격노케 한 고로 이때에 예루살렘 부근을 왕래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 여기서 돌아 보지 아니하고 동무들 앞에서 죽어도 같이 가자고 선언한 도마의 열정과 충의를 넉넉히 엿볼 수가 있지 아니한가 ? 저가 예수에게 대한 그 열정과 충의는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뒤질 바가 아니었다 . 다만 저는 어디까지든지 솔직하고 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친히 증거할 수 있기 전에는 이를 시인하지 못하는 성벽이 있을 뿐이었다 . 그러나 한번 옳다 한 이상에는 이를 위하는 열정과 충의는 놀랄만한 사람이었었다.

 

 

 

도마가 그 길을 물음 ( 요 14:5~8 )

 

마지막 만찬을 잡수실 때에 주의 종들을 위하여 예비한 하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 요 14:4 ) 하셨다 . 이때에 도마가 “ 주여 가시는 곳을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 하였다 . 도마는 언제든지 솔직한 사람이다 . 그런고로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고 아는 것은 안다고 하였다 . 한 번도 모르는 것을 덮어두고 아는 체하지 아니한 사람이다.

도마도 물론 다른 제자들과 같이 예수께서 그의 왕국을 땅 위에 건설할 줄을 알았었던 고로 이 무지와 오신 ( 誤信 ) 이 저로 하여금 주의 참된 진리를 깨닫기 어렵게 하였던 것이다 . 그러나 도마의 솔직한 반문이 예수의 황금 같은 보배스러운 대답을 끌어낼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으리라 ”( 요 14:6 ). “ 내가 와서 나타내고자 하는 그 나라는 땅에 있는 나라가 아니며 내가 말한 바 그 집은 하늘에 있는 것이요 ,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 나의 나라를 같이 얻는다는 것은 아버지로 더불어 지극히 복스러운 영교(靈 交 ) 의 세계를 같이 나누는 것이니 이는 이 땅 위에서 원만히 얻을 바가 아니다 . 그러므로 내가 하늘로 떠나가는 것은 이 최고 축복의 세계로 들어감 이다 . 이제 너희들이 만일 나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둔 중보자 ( 길 ) 로 또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우신 선생 ( 진리 ) 으로 그리고 영적 생활의 창시자 ( 생명 ) 로 믿고 따른다면 너희들도 이 나라에 들어가서 그 영교 의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 길이 없으면 가지 못하고 진리가 없으면 알 수 없으며 생명이 없으면 살 수 없나니 이에 나는 곧 너희가 좇을 만한 길이요 , 너희가 믿을 만한 진리며 너희가 바랄 만한 생명이다 ”( 토마스 아 켐피스 ).

예수께서 계속하여 “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니 …… ” ( 요 14:7 ) 하고 말씀하셨다 . 저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저의 안에 있으매 누구든지 저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요 , 저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다 ( 요 14:9~10 ). ‘“ 나님이 어디 있느냐 ?”, “ 그가 있는 줄을 어떻게 아느냐 ?”, “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느끼고 있느냐 ?” 이런 것은 사람들이 많이 묻는 말이 아니냐 ?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일찍이 사람들이 대답하지 못하던 말로 예수께서 대답하심이 있지 아니하냐?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떠한 말에서나 책에서나 어떠한 표상이나 교리에서 알기 어렵고 다만 참된 생활을 통과여서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 저를 보고 저를 알고 저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 마이어 박사 )

“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니 …… ”( 요 14:7 ) 

“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거늘 …… ”( 요 14:9 )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믿지 아니하겠거든 행하는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요 14:11 )

 

 

 

도마가 증거를 요구함 ( 요 20:24~29 )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때에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는데 마침 도마가 거기 있지 아니하였었다 . 어디 갔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께서 죽으신 후 곧 어느 은밀한 곳에 가서 혼자 묵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말하였으나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다 . 그 후에 제자들을 만나 예수의 부활하신 소식을 들었다 . 그러나 저는 믿지 아니하였다 . 자기 눈으로 보고 그 못 자 국을 자기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 요 20:25 ). 저 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였다 . 그러나 그 증거는 물적 증거에 그쳤고 영적 증거에 믿지 못하였다 . 이는 그 육체를 만져보아야 믿겠다고 하였으니 대개 영계의 사실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증거가 물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저는 물적 증거를 얻으려는데는 똑똑하였으나 영적 사실에는 몽매한 자이 었다 . 하여간 저는 마음에 있는 것을 숨겨두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발표하는 자이다 . 그러므로 저는 자기 중심을 속이지 아니하는 정직한 자이었던 것이다.

주께서는 저를 즐겨 용납하셨다 . 그래서 저의 앞에 나타나 저의 손으로 자기를 만져 보라고 하셨다 . 저는 그 순간에 인간의 지식 밖에 있는 큰 사실에 부딪치게 되어 경외와 존경으로 “ 나의 주여 , 나의 하나님이여 ” 하고 그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 그 때에 주님이 “ 너는 나를 본 고로 믿으나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 요 20:29 ) 하여 보지 못하고 믿을 자의 신앙을 미리 축복하사 저를 경고하셨다.

도마의 진리를 알려고 하는 그 열심이 주의 마음을 이끌어 후세에 주를 보지 못하고 믿을 사람들에게 축복을 선언하게 하였다 . 도마는 허무한 회의자는 아니었다 . 또 자기 주장을 세우려고 교만한 태도로 질문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 저는 주를 사랑하고 주에게 충의를 다하는 나머지 몽매하고 용렬한 의견이라도 솔직하게 말하여 결국은 큰 축복을 받은 것이다 . “ 진리 를 알아라 그리하면 진리가 너희를 놓아 주리라 ” ( 요 8:32 ).

 

 

 

묻는 말

 

1. 도마의 성격이 어떠합니까 ?

2. 도마가 솔직한 사람인 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 

3.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

4. 예수를 어떠한 세 방면으로 체득하여야 되겠습니까 ?

5. 도마로 말미암아 예수의 부활하신 증거가 더 확실하게 되었습니까 ? 어떻게?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46 과

믿음 좋은 백부장 (11 월 10일)

 

본문 : 마태 8: 5~13

 

요절 : 사람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에 앉으리라 ( 눅 13:29 ) 

 

때와 곳 : 주후 28 년 여름 가버나움 

 

서론:

 

백부장의 소원 ( 마 8:5~8 )

 

한 백부장이 있어 자기의 병졸 하나가 병이 났다고 해서 친히 주님 앞에 나와 고쳐 주시기를 빌었다 . 누가 복음 7 장에 보면 이 백부장이 먼저 유대의 장로들을 통하여 예수께 간청하였다 . 장로들이 주께 말하기를 “ 이 사람에 게 이 일을 베푸시는 것이 마땅하나이다 . 저가 우리 백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 눅 7:5 ) 하였다 . 저는 이방 사람 이요 , 또 권력이 있고 부유한 사람이로되 유대 백성을 사랑하고 더욱이 하나님 경배하는 일을 매우 좋게 여겨 회당까지 지어준 것을 보면 그의 신앙 과 인격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주께서 저에게로 가시는 도중에 저가 사람을 보내어 주께 말하기를 “ 주여 내 집에 임하시기를 내가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오직 한 말씀만 하시옵소서 그리하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 ”( 눅 7:6~7 ). 예수께서 이 말을 들 으시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한 번도 이와 같은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감탄하셨다 . 우리는 백부장의 언행에서 그의 신앙과 인격을 찾아볼 수가 있 다.

 

 

 

백부장의 인격 ( 마 8:9 ) 

 

 

(1) 자비한 사람

 

저가 지금으로 말하면 중대장 지위쯤 가는 사람으로 군인인 것만큼 또 권력이 있고 부유한 것만큼 사람을 천대하고 학대할 것이 사실일 듯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종 하나가 병으로 심히 고생하는 것을 보고 이를 위하여 예수께 사람을 보낸 일이라든지 , 유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든지 , 다 저의 자비한 성격을 설명하는 일이다. 

 

 

(2) 너그러운 사람 

 

본국 사람이나 외국 사람을 가리지 아니하며 높고 낮은 것을 헤아리지 않고 일체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백부장의 신앙

 

무엇보다도 성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의 중심에 종교심을 가진 까닭이다. 백성을 혹 사랑한다고 하여도 종교가 다르다고 하면 종교적 집회소를 지어 줄 까닭이 없는 것이다. 

 

 

(1) 겸비한 신앙

 

겸비를 떠나서는 그 신앙이 참된 신앙이 되지 못한다 . 자기를 끝까지 낮추고 주님을 끝까지 높이지 아니하면 신앙은 서지 못하는 법이다 . 저는 당시에 권세가 당당한 로마 사람이요 , 그 중에도 백부장인즉 무엇으로 보든지 유대 사람과는 상종하지 아니할 훌륭한 사람이다 . 그러나 저는 그 모든 자랑의 조건을 없는 것같이 버리고 주의 앞에서는 극도의 겸비로 주를 우러러 보았다 . “ 주께서 내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내가 주를 뵈옵는 다는 일도 감당치 못하겠다 ” 고 이는 자기는 죄인임으로 주를 대면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2) 고상한 신앙

 

저는 그처럼 겸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말씀 한마디만 하시면 될 줄을 믿었다 . 주를 직접 만나보지 못하여도 또 만져보지 아니하여도 그의 말씀만 있으면 족하다 . 여러 말도 필요치 않다 . 다만 한마디라도 족한 것이다 . 주의 능력을 그만큼 크게 믿은 것이다.

 

 

(3) 기도적 신앙

 

저는 간절히 예수께 구하였다 .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할 것을 느낀다 ( 요 14:13; 렘 33:3 ). 그런데 저의 간구한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종을 위함이었다 . 남을 긍휼히 여김으로 간구하는 기도를 주께서 물리치지 아니하신다 . 이러한 신앙을 로마 사람인 그 백부장의 마음에서 찾아보게 될 때에 예수의 마음은 큰 위로와 소망으로써 즐거워하셨을 것이다 . 그 동시에 택한 백성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배외적 ( 排外的 ) 사상과 종교적 자만에 빠 져서 신앙이 화석 ( 化石 ) 이 되어 오히려 이 이방 사람만도 못한 것을 보실 때에 중심에 민망함이 없지 않으셨을 것이다 . 이 백부장은 이방에 뿌려 놓 은 신앙의 처음 익은 열매로 주의 앞에 나타난 사람이다 . 진실로 주의 구원은 한 나라나 한 민족에게만 국한하게 된 그런 것은 아니었다 . 천국의 잔치 는 온 세계 만민에게 허락된 것이다 .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구원 얻 은 줄로 자처하면서 교만한 자가 실상은 쫓겨날 자이다.

 

 

신앙의 보응 (마 8:13)

 

주께서 곧 백부장의 종의 병을 낫게 하여 주셨다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은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을 얻을 것이다 . 저의 구한 바는 이기적이 아니었다 . 저의 간구는 열심이었다 . 저의 간구는 겸손하였다 . 마침내 저의 종은 고침을 받았다 . 우리는 어디까지든지 조선의 사람이다 . 그러나 영으로는 주의 백성이요 , 온 세계 동포 중에 하나이다 . 백부장은 로마 사람으로 주의 축복을 받았다 . 우리는 조선의 사람으로 주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 이와 같이 만국 만민은 각각 저희의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주께 드려가지고 하늘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며 어떤 나라 사람이든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 (행 10:35).

 

 

 

묻는 말

 

1. 백부장의 인격은 어떠합니까 ? 

2. 그의 신앙은 어떠한 신앙입니까 ?

3. 신앙과 겸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

4. 교회 밖의 사람 중에는 주를 믿는 사람이 없습니까 ?

5. 백부장이 주를 믿는 사람인즉 백부장 직분이 나쁘다고 내어놓고 나와야 됩니까 . 그렇지 않으면 그냥 그 직임에 있어서 주의 뜻대로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까?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47 과

청년 부자 (11월 20 일)

 

본문 : 막 10:17~27

 

요절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눅 9:23)

 

때와 곳 : 주후 30 년 3 월 , 베다니 가는 도중 베뢰아에서

 

서론 : 예수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 그러나 자기의 빈한한 것을 탄식하는 자가 아니었다 . 또는 다른 사람의 부한 것을 부러워하거나 부자가 좋다고 하는 일도 일찍이 없었다 . 부한 것이 참된 생명을 얻는 데는 도리어 방해가 되는 것을 말씀하셨다 . 자기 재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자를 애석히 여기시는 주님이었다 . 예수께서 갈릴리를 마지막으로 작별하시고 예루살렘 최후의 길을 밟으려고 베뢰아를 지나가시는 도중에 한 청년이 달려와서 꿇어 엎디어 영생의 길을 물었다 . 오늘 공과는 예수와 이 청년과의 문답에서 오묘한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 . 먼저 본문을 잘 읽고 그 뜻을 깊이 맛보기를 바란다.

 

 

 

귀한 청년 (막 10:17~20)

 

이 부자 청년이 그 심중에서 움직이고 있는 영생의 욕구로 예수를 찾은 것이 저에게 있어 크게 복된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 청년은 과연 주님 앞에 있어서 한 가지 외에는 다 만족하였었다.

(1) 예수를 보고자 하였다 . 자기 중심에서 일어난 중대한 문제에 해결을 주실 선생님은 예수 한 분뿐인 줄을 알았던 것이다 . 그렇다 . 우리의 모든 문제는 예수 앞에 와서야 비로소 해결을 받을 것이다.

(2) 달려 왔다 함을 보면 그 중심의 문제가 매우 긴급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으니 저는 부자였으나 그 재산으로 영생을 얻지 못한 줄을 알았던 것이다 . 따라서 그 재산이 자기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였었다 .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까 함이 곧 중대한 문제가 되어 저는 이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 참으로 귀한 사람이다 .

(3) 공공연하게 예수 앞에 왔다 . 니고데모와 같이 은밀히 예수를 만나려고 하지 아니하고 예수께서 길에 계실 때에 그 친구와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터이나 달려왔다 . 진리를 얻기 위하여 저는 사람의 이목을 부끄러워하는 자가 아니었었다 . 예배당에 오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나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쯤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이 청년에게 감히 비교도 되지 않는다. 

(4) 겸손하게 나왔다 . 이 청년은 부자요 , 관원이요 , 명망 있는 사람이로되 예수 앞에 달려와서 꿇어 엎디었다는 것을 보아서 그 얼마나 겸손한 태도가 있었던 가를 알기에 넉넉하다 . 우리 인간들은 권력이 있든지 지위가 있으면 교만하여 스스로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 그러나 주님 앞에 오는 자는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리고 겸비가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5) 가장 필요한 문제를 가지고 나왔다 . 이것은 일시적 문제가 아니었다 . 자기의 구복 ( 救福 ) 에 관한 문제나 명예에 관한 문제도 아니었다 . 곧 저의 생명 문제였으니 과연 크고 간절한 문제이다 . 저는 실상 예수를 만나기를 원하였다 . 이제 달려가서 그 앞에 겸손하게 엎드린 것은 주님을 높이어 추대한 것이었다 . 그리고 열심으로 자기의 영혼 문제를 묻는 것이었다 . 저는 모든 계명을 지킴에도 부족함이 없고 육신 생활에도 부족함이 없는 자였으나 그 영은 빈궁하여 주님을 느끼는 자였다 .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으로 인하여 큰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예수의 교훈 (막 10:18~19, 21)

 

예수께서 계명을 들어 가르치시매 저는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계명 율법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니 이것을 참으로 지켰는지는 의문의 것이었다 . 예수께서 저를 사랑하여 한 가지만 남은 중대한 일을 가르치셨으니 “ 가서 있는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를 주라 ” 하심이었다 . 이것으로써 저가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 물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과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는 표현일 뿐이다 . 중심에 있는 신앙으로 인하여 주께 은총을 받을 것이다 . 땅 위에 있는 모든 물건보다 주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있는 것을 다 팔라고 하는 것은 재물이 나쁘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 그것보다 영혼을 더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안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 이 청년의 큰 결점은 재물을 취하여 영생을 저버린 그것이다 . 곧 세상의 재물보다 영원한 생명을 사랑함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청년의 실패 (막 10:22)

 

저는 슬픈 마음으로 돌아갔다 . 그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사모하기까지는 되었으나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함에 있어 자기와 그 재산 전체를 드릴 수 없었다 . 근심하며 돌아간 저가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 모든 것을 버리고라도 왔다면 저는 분명히 영원한 생명을 얻었을 것이요 , 또 예수의 사도가 되었을 것이다.

 

 

 

부자와 천국 (막 10:23~ 27)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는 것도 아니요 , 또 천국에 들어갈 자는 재물이 없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 다만 재물이라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을 크게 방해하는 것을 힘있게 가르치신 것이다 .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것을 말 씀하시매 제자들이 묻기를 그러면 누가 능히 구원을 얻으리이까 한즉 (막 10:26) “ 사람으로는 능히 못하거니와 대개 하나님은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 ”(막 10:27) 고 대답하셨다 . 할 수 없다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 무엇에든지 힘이 없는 줄을 느끼는 이 인간에게 “ 하나님은 할 수 있다 ” 하는 이 말씀은 얼마나 복된 말씀이냐 ? 그런고로 믿으라 .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주의 계명을 따르는 자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묻는 말

 

1. 이 청년의 아름다운 점이 무엇입니까 ?

2. 이 청년을 보아서 우리는 주 앞에 어떠한 태도로 나갈 것입니까 ? 

3. 계명을 지키는 것이 완전한 것입니까 ?

4.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어떠합니까 ? 

5. 재물을 위하여 생명을 버릴 것입니까 ? 

6. 생명을 위하여 재물을 버릴 것입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48 과

세리장 삭개오 (11월 27 일)

 

본문 : 눅 19:1~10

 

요절 : 인자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더라 (눅 19:10) 

 

때와 곳 : 주후 30 년 3 월 여리고

 

서론 : 우리는 이 공과에서 얼마나 천하고 악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 뜻밖의 큰 구원을 얻은 것을 볼 수가 있으니 그는 세리장 삭개오이다 . 저가 로마 관청에 등용되어 세금을 받는 것만큼 유대 사회에서 버림을 당한 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으니 삭개오에게 구원이 임한 것은 도리어 당연한 일이다 . 삭개오가 그 집에 예수를 영접하는 것처럼 우리는 마음속에 예수를 영접하여 계시게 할 것이다 . 그리고 새로운 믿음으로 우리 직무에 착수하자.

 

 

 

잃었던 사람 (눅 19:1~4)

 

 

(1) 삭개오는 어떤 사람인가

 

저는 여리고의 세리장이다 . 세리라는 것은 로마의 세금 받는 일을 하는 사 람이니 유대 사람에게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는 사람이었다 . 저가 이렇게 유대 사회에서 버림을 받아가면서도 세리의 일을 하게 된 것은 재물을 탐하는 까닭이었다 . 그리하여 저는 상당한 재산을 가지게 되었었다 . 

 

 

(2) 삭개오가 예수를 보고자 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 마침 여리고를 지나시게 되었다 . 이 때에 많은 사람이 옹위하고 따르는데 대단한 인기가 예수에게 몰리었던 것이다 . 삭개오는 예수를 보고자 하되 키가 작음으로 길가 뽕나무 위에 올라 가서 내려다 보았다 . 체면도 돌아볼 여지도 없었다 . 그런데 저가 이렇게 예수를 보고자 함은 어떤 깊은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어떠한 사람이기에 이렇게 사람이 옹위하고 따르는가 하는 호기심으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을 듣거나 친히 교제하여 보리라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하였고 설혹 그런 생각을 가졌다 하더라도 자기와 같은 천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바라지도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 다만 예수의 얼굴을 먼 데서 라도 한번 보게 되면 큰 만족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저를 부르심 (눅 19:5~7)

 

이때에 예수께서 저의 이름을 부르시며 내려오라 하셨다 . 주의 얼굴만 보아도 요행으로 알았던 삭개오에게 주의 얼굴이 정면으로 돌아올 때에 저가 얼마나 만족하였을까 ? 또 자기의 이름을 부를 때에 자기 같은 사람의 이름이 예수에게 알려진 일에 대하여는 너무나 신기하여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 뿐만 아니라 “ 내가 오늘 네 집에서 유하여야 되겠다 ” 하실 때의 저의 만족함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구하는 자가 얻을 것이다 . 더욱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 오신 주님이신지라 항상 이렇게 버림을 당한 자를 찾으신 것이다 . 저가 어떠한 생각으로 주를 보고자 하였든지 주께서는 참된 생명으로써 주시는 것이었다. 저는 뜻밖에 땅 위에서 가장 귀한 손님의 일행을 자기집에 모시게 되었다. 예수를 접촉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상의 행복이 된다 . 이것은 주님께서 곧 길이요 , 진리요 , 생명이신 까닭이다 . 저를 보는 자가 곧 하나님을 본 것이요 , 저를 아는 자가 곧 하나님을 아는 자이다 . 우리는 다 예수와의 직접 접촉이 있는가 ? 다만 교리와 신조 , 의식과 제도에만 익숙하고 예수의 영과는 아직 접촉하여 본 경험이 없는가 ? 이것은 우리가 중심으로 저를 보기를 원치 아니하였던 까닭이다 . 체면도 돌아보지 말고 자포자기하는 마음도 내어 버리고 주의 은혜를 원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아 풍성한 생명으로 대접할 것이다 . 주님께서는 저를 불러 “ 네 집에서 유숙하겠다 ” 고 하셨다.

우리의 집은 주님을 용납할 만한 준비가 있는가 ? 우리 마음은 비록 말구유만 못하다 할지라도 어느 한 편 구석에 적게라도 저를 위하여 영접할 자리 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 주님께서는 더럽다고 하지 아니하시고 쉬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삭개오의 구원 (눅 19:8~10)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서 무슨 말씀으로써 저를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으니 알 수가 없다 . 죄인이라고 하여 책망한 것도 없고 또 무슨 칭찬이나 권고의 말씀도 볼 수 없다 . 하여간 예수께서 그의 앞에 있어 삭개오는 크게 회개한 것이 사실이다 . 아무 말씀도 없고 무슨 권고도 없다 하더라도 예수 자신이 벌써 위대한 설교요 , 그의 태도가 벌써 위대한 권고이었기 때문이다 . 삭개오는 일어서서 회개의 결심을 주님께 고하고 그 증거로 자기의 있는 것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며 이왕 토색한 것은 사 배씩 갚아줄 뜻을 간증하였다 (눅 19:8).

반드시 연설을 듣고야 믿고 반드시 책망을 기다려서만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 다른 연설과 설교를 더 기다릴 필요조차 없다 . 이미 들은 예수를 바라볼 것이다 . 그의 십자가 그의 전생애가 곧 위대 한 설교가 아닌가 ? 이제는 연설을 들을 때가 아니요 , 예수를 보고 회개할 때이다.

예수는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언하셨다 .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대개 저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이로다 ”(눅 19:9). 그 구원은 믿음으로 인하여 얻게 됨을 증거하셨다 . 이때에 주의 얼굴에는 얼마나 만족한 빛이 있었을 것인가 ? 십자가의 도가 아무리 세상을 다 구원할 능력이 있을지라도 회개와 믿음을 무시하는 자에게 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 잃었던 자를 이렇게 완전히 찾으셨다 . 죄인이라도 형제와 같이 친근히 대접하고 사랑함으로 저를 찾으신 것이다.

사람을 구원하려는 자의 첫째 일은 설교나 사업에 있지 아니하고 먼저 그를 가까이 접촉하는데 있다 . 이점에서 삭개오는 주님의 사랑과 그 안에 움직이고 있는 생명을 보았던 것이다 .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대하여 온 재산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을 볼 수 없다 . 아마 그는 그 직무를 그대로 하면서 예수의 교훈대로 생활하였을 것이다 . 어떠한 곳에서든지 주의 교훈대로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같이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부자는 그 재물에 종이 되지 말고 그 재물로써 주님을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이 더욱 좋지 아니한가 ? 농사를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회사원이나 사무원이나 무슨 일이든지 다 인간 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것인즉 신자는 마땅히 그 모든 일에서 주의 뜻을 이루도록 힘쓸 것이다 . 삭개오는 예수로 말미암아 의로운 실업가의 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 진실로 모든 사업에 있어서 참된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그리스도의 뜻대로 실현시킬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묻는 말

 

1. 삭개오는 본래 어떠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까 ? 

2. 그가 예수를 왜 보고자 하였습니까 ?

3. 삭개오가 예수를 기쁨으로 영접하였습니까 ? 

4. 당신은 예수를 영접할 자신이 있습니까 ?

5. 믿음을 유지하기 어려운 직무라고 그만 두는 것이 합당합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49 과

처음 순교자 스데반 (12 월 4일)

 

본문 : 사도 행전 6:1~11, 7:1~60

 

요절 : 무리들이 이 말을 기뻐하여 스데반을 택하니 그는 독실히 믿고 성신이 충만한 사람이라 (행 6:5)

 

때와 곳 : 주후 30 년경 예루살렘

 

서론 : 스데반은 예수의 뒤를 따라 순교한 첫 사람이다 . 그 진리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철저하였던 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 저는 유대인들의 형식적 신앙과 가증한 행동을 여지없이 공박하고 예수가 참 구주 되심을 증거하다가 마침내 돌에 맞아 죽었다 . 언제든지 신앙이 형식을 쓰고 차차 식어지면 생명이 없어지고 돌과 같이 되나니 그때에는 새로운 진리가 나타나도 깨닫지 못하고 결국 그 진리를 저버리며 그 사도를 저주하게 된다 . 우리는 여기서 생명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참된 신앙의 위력과 또 사람을 죽이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그 무덤을 파는 형식적 신앙이 두려운 것을 다시 한번 배워보자.

 

 

 

집사 스데반 (행 6:1~6)

 

스데반은 초대 교회의 집사로 피임된 것만큼 (행 6:3, 5) 독실히 믿고 지혜가 많으며 성신이 충만한 사람이다 . 저는 그 맡은 불쌍한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을 정성껏 도와주며 교회의 모든 살림에 몸을 내어놓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 옛날이나 오늘이나 ‘ 독실한 믿음 ’ ‘ 성신이 충만함 ’, 이것이 교회의 직분을 맡는데 필요한 조건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 그러나 오늘 교회의 직분들은 어떠한가 . 독실히 믿고 성신의 충만한 바 있어 그 성직을 주고받는가 ?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신분이나 체면을 보고 또는 오래 믿었다는 연조로서 필요한 조건을 삼는가 ? 교회는 이 성직을 주고받는 일에 있어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마땅히 성신의 지혜로써 하여야 할 것이다.

 

 

 

전도자 스데반 (행 6:8~10)

 

저는 집사로서의 직분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복음과 참된 신앙을 위하여 철저히 증거한 유명한 전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 “ 저가 은혜와 권능을 많이 받아 큰 기사와 이적을 민간에 행하며 ” 지혜와 성신이 충만하여 유대교 신자들의 철저치 못한 신앙과 생명을 잃어 버린 법과 의문을 논박할 때에 각처에서 모여온 모든 유수한 교인들이 변론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당하지 못하였다.

(1) 스데반은 신령한 은혜와 성신의 지혜가 충만한 전도인이다 . 그런고로 권능이 있고 기이한 일이 나타났던 것이다 . 복음 전도라는 것은 원래 신령한 은혜와 성신의 지혜를 가지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 대개 사람의 지식으로써 하는 것은 듣는 자에게 일시의 흥미를 줄 수는 있으되 그 흥미가 길게 사람의 영에 들어가 생명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아 아무 능력 없는 설교가 되고 마는 것이다 . 그러나 성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은 어디든지 능력과 권위가 나타나며 사람의 영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 아 ! 이 신령한 전도인 , 성신의 권능으로써 하는 전도인 , 예수의 교회는 언제든지 이런 전도인을 요구하는 것이다 .

(2) 스데반은 택함을 받은 사도가 아니요 , 한 평신도이다 .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의 일을 한다고 하여도 신령한 은혜와 성신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면 저는 이 은혜를 받은 한 평신도만도 못할 것이다 . 이 스데반과 같은 전도인이 우리 교회에 많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린다.

 

 

 

스데반과 그의 대적 (행 6:11~15)

 

언제든지 주의 참된 복음을 가지고 나서는 자에게는 대적이 없지 아니한 것이다 . 그 대적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믿노라고 하는 자들 가운데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 보라 . 스데반의 대적은 각처 회당에서 모여온 교인들과 또 장로와 서기관들이 그 대부분이 아니었는가 . 저들이 변론하다가 마침내 장로와 서기관들의 동정을 얻어가지고 다시 스데반을 책잡으려고 하였다 . 그 대적들이 스데반을 어떻게 책잡은 것을 상고하여 보면 스데반이 저 희들을 어떻게 공박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이 사람이 “ 모세와 및 하나님을 훼방하는 말을 하고 또 성신과 우리의 율법 훼방하기를 마지 아니한 사람 ” 이라고 하였다 . 이 말을 얼른 듣기에는 그럴 듯하나 그러나 마귀는 언제든지 그럴 듯한 말을 가지고 진리의 사도들을 책잡는 역사 ( 力士 ) 이다 . 이 스데반은 성신의 감동하시는 바를 소멸치 아니하고 그대로 능력 있게 답변하였다.

 

 

 

스데반의 답변 (행 7:2~53)

 

스데반은 이때를 더욱 좋은 기회인 줄 알고 그릇된 유대 백성의 역사적 사실을 들어서 저희의 적으로 근본 신앙과 모든 옳지 못한 행동을 솔직하게 책망하였으니 곧 저희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들이요 , 성전과 율법에 대한 신념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1) 모세를 배반함

 

7 장 25 절에 “ 생각건대 형제들이 하나님께 그 손으로 구원하심을 깨달을 듯 하나 형제들이 깨닫지 못하였다 ” 고 하여 애굽에서 유대 사람들이 모세를 대적하던 옛날 일을 돌이켜 생각하게 하였고 다시 백성들이 일찍 모세를 버리며 “ 누가 너로 유사와 법관을 삼았느냐 ” 고 반항하던 일과 광야에서 모세를 복종치 아니하던 일을 들어 이 백성들은 일찍부터 모세와 다른 모든 선지자들을 배척하는 악성 ( 惡性 ) 이 있음을 말하였다 . 

 

 

 

(2) 하나님을 저버림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버릇이 있음을 가르쳤다 . “ 우리를 위하여 우상을 지어 인도하게 하라 ” 하여 송아지 모양으로 우상을 지어서 그 앞에 제사하고 저희의 손으로 지은 것은 기뻐한 자가 유대인이었던 것을 말하고 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저희들이 희생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고 하여도 이는 다 저희의 욕심과 우매를 인한 것을 철저히 통론(痛 論 ) 하였다 .

 

(3) 성전에 대한 신념이 그릇됨

 

하나님의 성전은 최초의 장막으로 광야에 있다가 여호수아 때에 그대로 가나안에 들어갔고 그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으나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성전에 거하지 아니하시는 것을 이사야의 말씀으로 증거하였다 . 하나님은 장막이 없을 때에도 백성들과 같이 계시고 장막이 있을 때 광야에서도 같이 계셨고 이방에서도 같이 계셨고 성전을 지은 후에도 사람들과 같이 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 손으로 지은 전에만 계실 것이냐 ? 더욱이 유대 사람의 하나님만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라야 경배가 된다는 그 편협한 신념에 대하여 그릇된 것을 철저히 꾸짖었다. 

 

 

 

(4) 선지자와 율법을 버림

 

“ 선지자를 죽이었고 오시겠다 하던 그 의인이 오매 또 너희가 죽였으니 너희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냐 목이 곧고 마음과 귀로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항상 성신을 거슬리니 너희의 조상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는구나 선지자 중에 너희 조상이 핍박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냐 ”(행 7:51~53) 하여 저희의 그릇된 것을 여지없이 책망하였다 . 이 모든 말은 저희의 마음을 찔러 상하게 하는 성신의 검이 되었던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7:54~60)

 

이렇게 능력 있는 스데반의 설교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는 것보다도 도리어 큰 반항을 일으키게 되었다 .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함으로 환영을 받게 되어야만 참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스데반의 전도와 또 세례 요한의 전도를 볼지어다 . 누구든지 성신의 충만함으로 참된 복음을 증거할 때에 그것은 사람의 중심을 찌른다 . 그렇다고 반드시 목전에 서 그 영들이 신복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스데반은 마침내 돌무더기 속에 묻혀 참혹한 순교를 하였다 . 그러나 저의 영은 그때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그 영광스러운 때이었던 것이다 . 스데반은 과연 예수의 죽음의 자취까지 방불히 따라간 성자이다 . 스데반의 그 장엄한 순교 , 죽는 가운데서도 천사와 같이 광채 있는 얼굴을 가지고 원수를 위하여 축복하던 그 승리의 죽음 , 이것은 한 번 더 사울과 그 무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 이것을 목도 ( 目睹 ) 한 사울 은 평생에 한번이라도 스데반의 순교의 형상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울이 그리스도교의 주석 같은 사도가 되게 된 그 동기도 실상은 스데반의 죽음에서 얻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 의인의 죽음은 진실로 생명 있는 죽음이다 . “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 ” 이라 하신 주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

 

 

 

묻는 말

 

1. 집사 됨에 필요한 조건이 무엇입니까 ? 

2. 스데반에게 어떠한 은혜가 있었습니까 ?

3. 설교가 권능 있고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 

4. 스데반의 설교의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

5. 스데반의 죽음이 기독교에 준 큰 공헌이 무엇입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50 과

바울 (12 월 11일)

 

본문 : 행 22:3~15

 

요절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더욱 아름 다움을 인함이라 . 내가 저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똥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내가 그 안에 있음을 나타내려 함이니 …… (빌 3:8~9) 

 

때와 곳 : 출생 주후 1 년경 길리기아 다소

   회개 주후 36 년 다메섹 밖에서 

   순교 주후 67 년 로마에서

 

서론 : 오늘 공부할 사도행전 22 장은 바울이 세 번째 이방 전도를 마치고 돌아온 주후 58 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잡히어 영문에 들어가서 유대 민중에게 자기의 회개와 신앙의 경험을 들어 연설한 것이다 . 저는 참으로 기독교에 있어서 큰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 저는 그 고상한 학문과 우수한 재주와 위대한 정력을 다 주님께 바치어 기독교의 기초를 닦아 놓은 사람이 다 . 신약성경의 사분지 일은 저가 친히 기록한 것이요 , 사도행전의 삼분지 이는 저의 전도 여행의 기록이다 . 만일 바울이 있지 아니하였더면 우리 기독교가 오늘과 같이 세계적으로 발전되었을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 저는 과연 주님 앞에 위대한 사도요 , 충실한 일꾼이다 .

 

 

 

바울의 수양 (행 22:3)

 

바울은 유대인으로서의 자랑을 다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 아브라함의 정통 자손으로 베냐민 지파요 , 권세가 당당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다 . 일찍이 다소에서 희랍 문화의 혜택을 받았고 후에 예루살렘에서 당시에 가장 고명한 학자 가말리엘에게 유대의 모든 학문을 다 배운 사람이다 . 유대교의 법전과 장로의 유전한 바 모든 교훈을 공부하여 유대교의 교리와 그 의식과 제도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엄한 계명을 그대로 지키어 열심으로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던 사람이다.

당시에 가장 양반이라고 하는 바리새 교인이요 , 또 그 사회에 있어서 최고 회의 기관이 되는 산헤드림 의회의 한 의원이었다 . 두뇌가 명석하고 의지가 굳세고 열렬하며 매우 호협 ( 豪俠 ) 한 남자로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거나 그 종교를 위하여서는 그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바울의 반기독운동 (행 22:4~5)

 

이렇게 사람 앞에서는 부족할 것이 없는 바울이 처음으로 반기독운동에 그 발을 내어 디디었다 . 곧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박멸하여 없이하려는 것이었다 . 이것은 예수의 무리들이 지켜 행하는 바 그 교훈이 유대교의 그것과는 크게 반대되는 것이 있는 동시에 이상한 능력이 함께 하여 모든 인기가 그리로 모이기 때문이었다.

저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있어 대대적으로 활동하였으며 계속하여 예수를 따르는 남녀 신도들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고 또 다메섹에 있는 신자들을 잡아 없애려고 출동하였다 . 그 이른바 이단의 무리를 한 그물에 없이하고 자기의 신앙과 유대교의 체면을 보전하여 보려던 것이었다.

 

 

 

바울의 회개 (행 22:6~10)

 

다메섹 신자를 잡으려고 출동한 바울은 벌써 승리를 앞에 둔 것처럼 의기가 양양하였었다 . 그러나 그 도중에서 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 홀연히 큰 광채가 공중으로부터 비행기의 탐조등과 같이 저의 일행에게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 이는 예수께서 당신을 핍박하는 바울에게 던진 첫째의 화살이다 . 의기양양하던 바울은 단번에 땅에 엎드려지고 말았다 . 다시 소리 있어 가로되 “ 사울아 , 사울아 , 왜 나를 핍박하느냐 .” 이는 둘째로 바울의 가슴에 던지는 예수의 사랑의 폭탄이었다 . 여기에 이르러 저는 예수에게 포로 되고 말았다 . 무슨 변론도 하여 볼 여지가 없이 다만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발 앞에 엎드려서 “ 주여 , 뉘시오니까 ?” 하고 감히 한 말을 하였을 뿐이었다 .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 할 때에는 “ 주여 , 그러면 어떻게 하오리까 ?” 하면서 하라시는 대로 순종할 뜻을 고하였다 .

이에 예수는 저의 주님이 되셨고 저는 주의 종이 되고 말았다 . 모든 운명을 주님께 맡기고 항상 “ 주여 , 어찌 하오리까 ?” 하여 주의 명령을 기다려 움직이는 자가 참으로 신앙의 사람이요 , 주의 사람이다 . 우리는 바울의 회개 한 사실에서 몇 가지 진리를 배울 것이 있다.

 

 

 

(1) 바울의 회개는 갑자기 되었다 .

 

저는 긴 세월을 두고 점진적으로 회개하게 된 것이 아니요 , 창졸 ( 倉卒 ) 간에 된 일이다 . 저는 아무 연구나 계획이 없는 도중에서 문득 어떤 세력이 위로 부터 내려와서 그 심령에 역사하여 자기의 죄악을 깨닫게 하고 새로운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었던 것이다 . 이것이 비록 오랜 세월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일시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일시적 감정의 충동이라고 하여 영구성이 없다고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 그것은 저의 회개의 결과를 보아서 더욱 그러하다 . 참으로 바울의 변화는 졸연 ( 猝然 ) 간에 된 일이로되 그 결과는 일시적이 아니었고 영구적이었으며 따라서 그만큼 위대하였었다. 

 

 

 

(2) 회개의 일은 성령의 일이다 .

 

아래서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역사가 위로부터 내려와서 되는 일이다 . 그러므로 회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벌써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아서 되는 일이다 . 뿐만 아니라 믿음에 대하여서도 그러하다 . 원래 사람의 생각이나 노력으로는 자기의 죄과를 회개하기도 어렵고 더욱이 하나님과 예수를 즐겨 믿는 일과 성경의 도리를 만족히 승인 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 다만 위로부터 성령의 역사가 있은 이후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믿고 기뻐하며 순종하여 만족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 사람이 어떻게 처녀의 잉태를 그대로 승인하며 부활과 승천을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 과연 회개와 신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하늘의 일이다 . 

 

 

 

(3) 회개하는 자 , 주 앞에 엎드러진다 .

 

성령의 세력이 사람의 영에 접촉될 때에 저는 그 앞에 엎드려진다 . 여기서부터 저의 모든 오해와 불평과 교만과 가증 같은 여러 가지로 뭉치어진 그 사람 , 죄와 불의를 감히 행하던 그 사람은 엎드러져서 파괴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 사람의 지식과 세상의 이론에 밝은 바울은 아무런 변론도 없이 그 대로 엎드려져서 “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 하는 하늘의 소리에는 “ 주여 , 뉘시오니까 ?” 하고 말았다 .

 

드디어 주를 믿게 되었으니 대개 누구든지 한번 주님 앞에 당당히 엎드러져서 성신의 일을 받기 전에는 자기의 옳지 못한 것을 회개할 수도 없고 또 주를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 이와 반대로 성신이 접촉되는 데는 학자도 없고 변사도 없고 반기독교 운동도 없다 . 다 엎드려 지고야 마는 것이다 . 오 주시여 , 모든 사람을 속히 당신 앞에 엎드리게 하옵소서 . 아멘 .

 

 

 

바울의 헌신 (행 22:11~15)

 

이때부터 저는 “ 주여 , 어찌 하리이까 ?” 하여 주의 지시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드디어 주의 명령을 좇아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 전에는 예수 신자를 잡아 없애기 위하여 들어가려던 그가 이제는 들어가서 예수 신자인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고 필요한 훈계를 들었다 . 이제 저는 완전히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 법과 의문 ( 儀文 ) 에 눌려 화석이 된 교리와 제도 형식에 흘러 고목이 된 신조를 붙들고 자랑하던 바울이 이제는 생명이요 , 진리인 예수에게 그 몸을 바치게 되었다.

저는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 거기서 저의 첫 운동을 기도로 나타냈다 . “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에서 기도할새 …… ” 이것은 다메섹에서 돌아온 후의 일을 설명한 바울의 말이다 . 과연 생명이 있는 신앙이 올 때에는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 신앙의 생명이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기도하지 아니하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 이것을 보아서 기도 운동은 신앙 운동의 전제 ( 前提 ) 운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기도가 없는 신자는 그 신앙이 벌써 고목이 된 것이다 . 신앙의 인물인 바울을 알고자 하면 먼저 기도의 인물 바울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주의 뜻을 알게 되었다 (행 22:18~21). 이때부터 그 지시대로 이방의 사도가 되어 아시아와 구라파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완전히 그 몸을 바쳤다 . 이렇게 주의 계시를 받지 못하고는 완전히 헌신 할 자가 없고 또 기도가 없이는 주의 계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주의 뜻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자들이여 , 주님께서 그 뜻을 알게 하실 때까지 엎드려 기도할 것이다 . 우리는 여기서 완전한 회개와 완전한 헌신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 회개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귀한 은혜요 , 헌신은 이 은혜를 보답하는 사람의 일이다 .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없는 사람 , 더욱이 자기 몸을 바쳐 주를 기쁘게 하는 일이 없는 사람들은 아직도 회개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헌신한 바울을 보라 . 저의 생활은 온전히 예수를 위한 생활이다 .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분토같이 버리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 죽는 것이 그리스도였다 . 바울을 엎드러뜨리신 주의 능력이 우리를 엎드러뜨리시고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마음대로 쓰실 만한 새 사람을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묻는 말

 

1. 바울이 가진 바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 

2. 바울을 엎드러뜨린 것이 무슨 힘입니까 ? 

3. 회개가 자기의 노력으로 될 수 있습니까 ?

4. 돌연적 회개는 일시적 감정의 충동이라 하여 영구성이 없겠습니까 ? 

5. 기도 없이 신앙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까 ?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51 과

크리스마스 (12 월 18일)

 

본문 : 눅 2: 1~20

 

요절 : 오늘날 다윗의 성에 너희를 위하여 한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1)

 

때와 곳 : 주전 5 년 12 월 베들레헴

 

서론 : 세계 역사상에 있어 가장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시고 사람의 형상으로 땅 위에 강림하신 일이다 . 이 일이 일어난 때는 서력 ( 西曆 ) 으로 기원 1 년이다 . 그러나 지금은 서력 기원전 5 년이 정당한 줄로 판명되었으니 이는 본래 디오니시어쓰 액시그누스가 처음 기독교 연대를 계산할 때에 기원 5 년을 1 년으로 잘못 계산하였던 까닭이다 (註 디오니시어 쓰는 로마의 어떤 수도원장으로 주후 526 년에 기독교 연대표를 처음으로 발 표한 사람이다 ). 탄생하신 날에 대하여는 어느 날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제 5 세기경 어거스틴이 비로소 12 월 25 일을 성탄절로 지키기를 시작한 후부 터는 온 세상이 다 이날을 성탄 축하일로 지켜오는 것이다.

 

 

 

호적령 (눅 2:1~4)

 

예수 탄생 당시 로마 제국은 가이사 아구스도가 황제로 있어서 수리아에는 구레뇨를 총독으로 두고 유대에는 헤롯을 왕으로 두어 다스리었다 . 이때 로마 인구는 1 억 2000 만 명이 되고 유대 인구는 600 만이나 되었다 . 황제는 첫째 이 인구 조사를 목적하고 다음에는 그 국산 ( 國産 ) 조사를 목적하여 호적 령을 내렸던 것이다 .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을 하러 제 성으로 돌아갔다 . 이때 로마의 국세 ( 國勢 ) 조사법에는 현재 거주하고 있는 그곳에서 등록하는 법이 있으나 유대의 풍속은 본향에 가서 호적을 하는 것이었으므로 유대에 한하여서는 그 풍속대로 하기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 그런고로 요셉은 자기 본향 베들레헴으로 장차 아내 될 사람 마리아와 같이 갔던 것이다 . - 마리아도 다윗의 후손인고로 그의 본향도 역시 베들레헴이었다.

 

 

 

예수의 탄생 (눅 2:5~7)

 

만왕의 왕이요 , 만민의 구주이신 예수는 마침내 탄생하셨다 . 그런데 그 작은 몸 하나를 용납할만한 거처방이 없어 강보로 싸서 구유에 누이였으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 저가 처음 오실 때뿐만 아니라 오신 후에도 용납한 곳이 없었다 . “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 ” 고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니냐 ? 세상에는 왜 예수를 용납할 곳이 그렇게도 없었던가 ? 베들레헴에 예수를 용납할 자리가 없었다 . 헤롯의 마음속에도 예수를 용납할 자리가 없었다 . 유대교의 제사장들의 마음 속에도 예수 유하실 데가 없었고 가롯 유다의 심중에도 예수의 거처하실 자리가 남아 있지 아니하였다 . 우리 영의 크리스마스는 왔다 . 예수의 영은 우리 심중에서 거처할 자리를 찾고 계시지 않는가 ? 우리 마음 속의 더럽고 편협한 것이 베들레헴 말구유만도 못하여도 예수를 위하여 내 어 놓지 않으려는가 ? 겸비하신 주님께서는 허물지 않으시고 오실 것이다 . 그때에 우리 마음에는 참된 크리스마스가 있을 것이다.

 

 

 

하늘의 영광 (눅 2:8~14)

 

예수의 탄생은 하늘의 영광이요 , 땅의 기쁨이니 이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뜻을 이루게 됨이었다 . 이때에 천군과 천사들은 공중에 나타나서 혹은 기쁜 소식을 인간에게 전파하며 혹은 하늘의 영광을 크게 찬송하기도 하였다 . 과연 하늘의 기쁨을 아는 자는 이것을 전파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요 , 그 영광에 접촉하는 자가 이것을 찬송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예수의 탄생이 있는 곳에 인간의 구원이 있고 인간의 구원이 있을 때에 하늘의 기쁨이 있나니 이는 곧 세상의 기쁨이요 , 온 우주에 두루 비추이는 영광이 되는 것이다.

 

 

 

땅의 기쁨 (눅 2:15~20)

 

예수의 탄생이 있을 때에 하늘의 기쁨은 천사들이 드러내고 땅의 기쁨은 목자들이 나타내었다 . 이 목자들은 보통 목자가 아니요 ,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바 소와 양들을 맡아 기르는 목자들이다 , 그 직무가 이러한 것인 만큼 경건한 자들이라 늘 하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 이 목자들이 이렇게 귀한 소식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복음은 가난하고 천한 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에게 먼저 내리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이 목자들이 예수를 찾아 경배한 데 대해서 배울 것이 적지 아니하다.

(1) 저희들이 그 소식을 들을 때에 의심치 아니하고 곧 이는 “ 주께서 우리 에게 보이신 바라 ”(눅 2:15) 고 확실히 믿은 것이다 . 대개 뜻밖의 일을 당 하게 되든지 또는 원하던 것이라도 갑자기 앞에 나타날 때에 놀라게 될 뿐만 아니라 긴가민가하여 의심하게 되는 때가 많다 . 그러나 목자들은 아무 의혹이 없이 곧 주께서 보이신 바라고 믿은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2) 저희들이 소식을 듣고 그대로 믿을 뿐만 아니라 빨리 예수를 찾아 보려고 간 것이다 (눅 2:16). 언제든지 예수 앞에 나갈 자는 빨리 가야 되는 것 이다.

(3) 그 다음에는 예수를 찾아 만나기까지 낙심하지 아니한 일이다 (눅 2:17). 그날에 새로 난 아기가 그 동리에 예수뿐만 아니었을 줄로 생각한다 . 천사의 소식을 보면 강보로 싸서 구유에 누인 아기가 곧 그이라고 하였 다 . 새로 난 다른 아기가 또 있다 하더라도 구유에 누인 아기는 예수뿐이었던 것을 표시하였다 . 목자들이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는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 그러나 그렇다고 들은 말씀을 의심도 아니하였고 또 낙망하지도 아니하였다 . 끝까지 만날 때까지 견디어 가면서 찾았다 . 우리는 여기서 배울 것이 적지 않다 .

(4) 이미 들은 바가 사실로 증명될 때에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 전파치 아니할 수 없다 (눅 2:17). 확실히 믿고 찾음으로써 체득한 바가 있는가 ? 그러면 그것을 증거할 것이다 . 우리가 확실히 믿는 바와 확실히 체험한 바를 열심으로 전할 때에 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이것을 기이하게 여길 것이요 (눅 2:18), 예수를 아는 자는 마리아와 같이 마음 속에 깊이 새김이 있을 것이다 (눅 2:19).

(5) “ 목자들이 돌아가 그 듣고 본 것이 다 이르던 바와 같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찬송하더라 ”(눅 2:20). 주를 만나본 자와 주의 영이 그 중심에 거하게 된 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예수를 만나기 전에 목자들의 생활은 곤고한 생활이요 , 탄식의 생활이었다고 할지라도 주를 만나 본 후에는 찬송의 생활로 변하였다.

이것은 환경이 변하였거나 처지가 변한 것이 아니다 . 저희 외부의 조건은 그대로 있었다 . 그러나 저희의 중심의 조건은 크게 변하였던 것이다 . 이는 주로 말미암아 소망도 새로워졌고 믿음도 새로워졌기 때문이었다 . 우리의 생활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예수를 만난 경험이 있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영이 새로워짐이 있다고 하면 그는 자기가 처하여 있는 그 처지에서도 넉넉히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 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과 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찬송케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 가난한 사람도 찬송하고 죽음에 있어서도 찬송한다 . 과연 예수의 복음은 기쁨의 복음이요 , 찬송의 복음이니 만민이 크게 기뻐할 아름다운 소식이다 (눅 2:10). 

 

 

 

묻는 말

 

1. 요셉과 마리아가 어찌하여 베들레헴에 갔습니까 ? 

2. 베들레헴 집과 우리 마음을 서로 대조할 수 있습니까 ? 

3. 주를 찾아 만난 자는 어찌하여야 되겠습니까 ?

4. 진정한 크리스마스는 예수를 우리 중심에 환영함에 있지 아니하였습니까?

 

 

 

< 제 2 부 : 장년 만국통일 주일공과 >

 

 

제 52 과

기독교의 신앙 인물 ( 복습) (12 월 5 일)

 

본문 : 마 5:3~16

 

요절 :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때와 곳 : 주후 5 년부터 57 년까지 유대의 어떤 시골 베들레헴 , 가나 , 예루살렘 , 고린도 , 가이사랴 빌립보 , 갈릴리 바다 , 베다니 , 가버나움 베뢰아 , 여리고 다메섹 부근

 

인물 : 사가랴 , 엘리사벳 , 마리아 , 시몬 , 안나 , 베드로 , 도마 , 백부장 , 청년 부자 , 삭개오 , 스데반 , 바울 , 예수 , 천사 , 목자들

 

서론 : 우리가 금년 하반기에는 성경 가운데서 남녀 26 인을 뽑아 그들의 신앙생활을 공부하였다 . 그 중에 19 인은 남자이었고 7 인은 여자이었다 . 이 사람들은 주전 1916 년부터 주후 50 년경까지 거의 2000 년이 되는 그 동안에 있던 사람들이다 . 예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없이 사는 생활은 만족한 생활이 되지 못하였다 . 그러므로 2000 년 동안의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면 다 하나님을 요구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 우리는 그 사실을 우리가 배운 공과로써 넉넉히 알게 되었다 . 하나님에게 대한 신앙과 그 신앙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으로 하여금 가치 있는 생활을 하게한 것도 우리가 알게 되었다 . 하나님은 예나 이제나 완연히 계신 이시다 .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는 이상에 서로 연락 ( 連落 ) 되는 신앙이 없을 수가 없다 . 아무리 세상 이 타락되고 부패하여 가더라도 그래도 그 중에 참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자는 남아 있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복습

 

· 제 40 과 사가랴와 앨리사벳 (눅 1:5~80)

요절 :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계명과 예절을 좇아 행하여 흠이 없는지라 (눅 1:6)

· 제 41 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2:15~19; 요 2:1~5, 19:25~27)

요절 :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눅 1:38)

 · 제 42 과 시므온과 안나 (눅 2:25~39)

요절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마 5:8) 

· 제 43 과 그리스도인의 싸움 (세계절제주일 , 갈 5:13~26)

 요절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오직 우리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5)

· 제 44 과 시몬 베드로 (막 8:27~29; 눅 22:31~34; 요 18:25~27, 21:15~17) 

요절 : 여러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 굳세게 말함을 보고 그 본래 불학무식한 백성으로 알았다가 기이하게 여기고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행 4:13)

· 제 45 과 정직한 회의자 도마 (요 11:14~16, 14:5~8, 20:24~29, 21:1~2) 

요절 : 도마가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 제 46 과 믿음 좋은 백부장 (마 8:5~13)

요절 : 사람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앉으리라 (눅 13:29)

 · 제 47 과 청년 부자 (막 10:17~27)

요절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눅 9:23)

· 제 48 과 세리장 삭개오 (눅 19:1~10)

요절 : 인자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더라 (눅 19:10)

 · 제 49 과 스데반 (행 6:1~7:60)

요절 :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스데반을 택하니 그는 독실히 믿고 성신이 충만한 사람이라 (행 6:5)

 · 제 50 과 바울 (행 22:3~15)

요절 : 내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더욱 아름다움을 인함이라 . 내가 저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똥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내가 그 안에 있음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빌 3:8)

· 제 51 과 크리스마스 (눅 2:1~20)

요절 : 오늘날 다윗의 성에 너를 위하여 한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1)

 

 

 

묻는 말

 

1.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어찌하여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까 ? 

2. 마리아의 성격은 어떠합니까 ? 

3. 시므온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

4. 안나는 어떻게 주를 섬기었으며 예수를 볼 때에 몇 살쯤 되었습니까 ?

5. 성신의 뜻을 좇는 자에게는 어떤 일이 나타난다고 하였습니까 ?

6.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처음 선언한 사람이 누구며 그 일이 어찌하여 장한 일이 되었습니까?

7. 도마는 어떠한 사람이며 그에게서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 

8. 백부장의 신앙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9. 부자 청년이 주를 따르기에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 

10. 삭개오가 회개한 후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

11. 스데반의 설교가 어떻게 되었기에 유대인들이 저를 죽이었습니까 ? 

12. 바울과 같이 갑자기 변화하는 일이 지금도 있습니까 ?

13. 바울이 접하였던 그 빛과 주의 말씀이 현세대에도 그 모양으로 나타나는 예가 있습니까?

14.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 있습니까 ? 

15. 신앙 그것이 사람에게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

16. 하나님과 예수를 숭배하지 아니하고 기독교인의 신앙은 유지할 수 있습 니까?

17. 신앙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얻으신 바가 무엇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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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나는 지금부터 여러분과 얘기를 하자고 나와 앉았습니다 . 내 얘기를 듣는 여러분은 14~15 세로부터 18~19 세 즉 20 세 이내의 분들인 줄 압니다 .

고린도전서 3 장 18 절에 보면 “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먼저 어리석은 자가 되어라 ”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 이 말씀대로 주님을 진실히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 보기에 정말 어리석은 사람 같기도 하고 미친 사람 같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 그런고로 요즘 아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아주 진실한 교인을 볼 때에 ‘ 바보 ’ 니 ‘ 시대에 뒤진 사람 ’ 이니 ‘ 어리석은 사람 ’ 이니 하고 흉을 보는 줄 압니다 . 그러나 실상 ‘ 어느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지 ’ 는 나타날 때가 있을 줄 압니다 .

우리 주님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실 때에 참으로 별별 욕을 다 당하신 줄 압 니다 . ‘ 못난이 ’ 니 ‘ 미친 놈 ’ 이니 ‘ 흉측한 자식 ’ 이니 하고 입에 못 담을 그 더러운 욕을 그냥 전신에 뒤집어 쓰시고 말았으니 그렇게 가엾을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세상에서 욕을 먹으며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압니다.

 

 

 

< 제 3 부 : 어린이의 영양 >

 

 

 

제 1 장

창작 성극 모음

 

▶ 춘풍 전 1 막

 

인물 : 춘풍 1; 꽃 4; 나비 2; 새 2; 소년 2 

때 : 양춘가절 ( 陽春佳節 ) 봄

 

막이 열리면 꽃 , 나비 , 새는 자는 듯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 그 위에 춘풍이 고운 노래를 부르며 나려 온다.

 

편저자 주 : 1927 년 신학교 졸업 무렵 이용도 목사가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지도 연출하기 위해 쓴 습작임 . 엄동설한 같은 수난 가운데 있는 조국에도 반드시 춘풍이 불 것을 암시함 .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이 목사는 부흥사로 나서기 전에는 주일학교 어린이 지도에 열중하였음.

 

 

· 춘풍 노래

 

차디찬 엄동에 설한풍아 

잔인한 네 손을 걷어 쳐라 

따뜻한 양춘이 재를 넘는다 

따뜻한 양춘이 재를 넘는다

 

깨어라 범나비 종달새야 

적막한 강산에 애달픈 꿈

춘풍은 일어나 꽃 향기 날리고 

숨 죽은 강산을 불러 깬다

 

 

· 이야기

 

비단 같은 만리 낙원을 곱게 꾸며놓을 어여쁜 꽃들은 찬 꿈 속에서 아직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구나 . 나비 친구 [ 朋蝶 ] 의 기쁜 꿈도 볼 수가 없고 산 새의 노래조차 들을 수가 없구나 . 그러나 내가 이르러 따뜻이 품어주고 입맞 출 때에야 백화의 좋은 향내는 공중에 퍼지고 새들의 노래는 천하에 가득할 것이다.

 

 

 

· 우는 노래

 

아무리 잔인한 설한풍도

사라지는 운명의 한 때로다

춘풍은 이르러 꽃 향기 날리고 

숨 죽은 강산을 불러 깬다

 

깨어라 봄 나비 종달새야 

적막한 강산에 애달픈 꿈

춘풍은 이르러 꽃 향기 날리고 

숨 죽은 강산을 불어 깬다

 

 

 

· 일동 ( 합창 )

 

일난풍화 ( 日暖風和 ) 좋은 시절 

양춘가절 ( 陽春佳節 ) 이 아닌가

 

 

 

· 춘풍 ( 노래 )

 

양춘이 오니 만화방초 ( 萬花芳草 ) 는 

뛰노는 듯이 즐겨 하며

 

 

 

· 일동 ( 합창 )

 

일난풍화 호시절 양춘가절이 아닌가 

일난풍화 양춘가절 돌아왔네.

 

 

 

· 춘풍

 

만화야 방초야 범나비 새야 

따뜻한 춘풍에 잘 자라라

 

 

 

· 일동 ( 합창 )

 

자라나라 자라나 무럭무럭 자라라 

자유롭게 춤을 추며 자라나라

 

 

 

· 일동 ( 무용 춤추며 ) 

 

일난풍화 좋은 시절 

양춘가절이 아닌가

 

동지섣달 설한풍에 

숨 죽었던 우리들이 

봄바람과 단비에

머리를 들고 나오니

 

일난풍화 좋은 시절 

양춘가절이 아닌가 

일난풍화 좋은 시절 

양춘가절이 아닌가

 

 

 

· 소년 1( 이야기 )

 

하루아침 봄바람에 꽃이 저렇게도 어여쁘게 피었구나.

 

 

 

· 꽃 ( 춤추며 노래 )

 

봄바람이 불어 올 제 

곱게곱게 피였다가 

나를 찾는 동무에게 

기쁜 웃음 나눠주자

 

 

 

· 일동 ( 박수하며 노래 ) 

 

사랑홉다 어여쁜 꽃 

향기로운 꽃이로세 

벙글벙글 내 사랑아 

봄바람에 피었어라

 

 

 

· 소년 2( 이야기 )

 

나비는 춤추고 새는 노래하고 참 좋은 시절이다

 

 

 

· 나비 ( 춤추며 노래 ) 

 

봄바람이 불어올 제 

우쭐우쭐 일어나서

봄 동산에 날아 들어 

기쁜 춤을 추는 우리

 

 

 

· 일동

 

사랑홉다 범나비야 

아름다운 나비로세 

너풀너풀 내 사랑아 

봄바람에 춤추어라

 

 

 

· 새 ( 춤추며 노래 )

 

봄바람이 불어올 때 

꽃과 나비 즐겨 노는 

봄 동산에 날아 들어 

기쁜 노래 하는 우리

 

 

 

· 일동

 

사람홉다 어여쁜 새 

아름다운 봄 새로세 

지지재재 내 사랑아 

봄바람에 노래하라

 

 

 

· 춘풍 ( 이야기 )

 

찬 눈 속에 묻히어 있을 때 같아서는 다시 너희에게는 양춘이 올 것 같지도 않았지 . 또 어느 때에 춘풍이 불어 온 대야 그 역시 꿈만하게 생각했더니 그래도 보아라 . 너희에게도 이렇게 춘풍이 불어올 때가 있지 않니 .

 

 

 

· 일동 ( 춤추며 노래 )

 

보드라운 춘풍 솔솔 불어와서

산과 들의 눈 얼음 다 녹여 버리고 

파릇파릇 남산이 푸르러 올 때에 

자유스런 우리 천지 여기에 열리네

 

벙글벙글 웃는 꽃 만발한 곳에 

너풀너풀 나비춤에 노래하는 새

 

 

파릇파릇 남산이 푸르러 올 때 

자유스런 이 천지 여기 열리네

 

 

 

· 소년 1( 이야기 )

 

참 봄바람이야 말로 반가운 것이다 . 따뜻한 봄바람이 한번 불어오면 꽃은 저렇게 만발하여 웃음 웃고 나비는 자유롭게 날아 춤을 추며 새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되는구나.

 

 

 

· 춘풍 ( 이야기 )

 

옳다 . 그래서 양춘은 누구나 다 기다리는 것이다 . 산야에 춘풍이 불면 만화 방초 ( 萬花芳草 ) 는 즐겨 웃고 금수도 즐겨 날뛴다 . 한 나라에 춘풍이 불면 화평한 나라가 되고 한 가정에 춘풍이 불면 안락한 가정이 되고 온 세상에 춘풍이 불면 다 낙원이 되고 말 것이다.

 

 

 

· 소년 1

 

춘풍 , 춘풍 , 춘풍 , 얼마나 좋은 말인가 .

 

 

 

· 소년 2

 

춘풍 , 춘풍 , 춘풍 , 얼마나 좋은 말인가 .

 

 

 

· 일동 ( 합창 )

 

1. 불어오라 봄바람 솔솔 불어라 

보드라운 바람 불어오너라 

아름다운 우리 꽃동산 안에 

춘풍아 불어 오너라

 

2. 봄바람이 불면 꽃은 웃는다 

봄바람이 불면 나비 춤춘다 

봄바람이 불면 새 노래 한다 

춘풍아 불어 오너라

 

3. 봄바람이 불면 안락한 가정 

봄바람이 불면 화평한 나라 

봄바람이 불면 세상은 낙원 

춘풍아 불어 오너라

 

 

· 소년 1 ( 이야기 )

 

북풍과 한설이 아무리 몹쓸 것이지만 하루아침 봄바람에 그림자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구나 . 그리고 이곳은 이렇게 화창한 낙원을 이루었구나 . 아 , 과연 춘풍을 만난 꽃이나 나비나 새들은 얼마나 좋아하는가 . 춘풍이 불어와 찬 바람에 얼었던 얼음을 다 녹여버리고 꿀 같은 사랑에 넘치는 평화로운 나라 영원한 낙원이 열릴 것이다.

 

 

 

· 춘풍

 

그러나 때가 이르면

뜰 앞에 오는 봄 그 누가 막으며 

산에 부는 춘풍 그 누가 금하랴

 

 

 

· 일동

 

봄 만난 우리들 기쁨을 못 이겨 

노래하는 그 자유 억제할 이 없네

 

 

 

· 일동

 

위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

 

 

 

· 춘풍

 

옳다 세상에 오는 봄 막을 이 없고 

강산에 부는 춘풍 금할 이 없다 

때가 이르러 저 인간에도 춘풍이 

불게 되면 싸움과 시기와 분쟁이 

다 없어지고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자유의 낙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일동 ( 춤추며 노래 )

 

즐거운 우리의 노래 소리

흘러서 공중에 퍼진다 퍼진다 

우쭐우쭐 춤출 때마다

따뜻한 춘풍이 날린다 날린다 

춘풍이 날린다 

우쭐우쭐 춤출 때마다

따뜻한 춘풍이 강산에 날린다 

( 막을 내림 )

 

아이생활  1927 년 4 월호

 



 

< 제 3 부 : 어린이의 영양 >

 

 

 

제 1 장

창작 성극 모음

 

▶ 공주와 꽃팔이 전 3 막

 

편주 : 1927 년 신학교 졸업 무렵 쓴 습작

 

인물 : 여왕 1; 공주 1; 꽃팔이 1; 신하 4; 왕비 1; 소녀 10

 

 

 

◆ 제 1 막 공주의 방

 

· 개막전 합창

즐겁다 우리 집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낙원에서 우리 늘 살겠네 

나비야 춤추고 새야 너희들도 와

우리와 한가지 노래 노래 부르며 즐기자 

해와 달이 변찮코 사시장청 낙원에 

아름다운 풍류 소리 춘풍에 울린다 

즐겁다 우리 집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궁전에서 우리 늘 살겠네

 

 

공주 ( 말 )

 

아 , 나는 그 좋은 꿈을 또 깨었구나 . 어쩌면 그렇게도 재미있는 꿈을 또 깨었단 말인가 . 참으로 그 아이는 아름다운 동무다 . 나에게는 그런 꿈이 길이 길이 두고 오랫동안 깨어지지 않았으면 얼마나 큰 행복이 될까.

아 , 참으로 분한 일이다 . 세상 사람들은 나를 팔자 좋은 아이라고 떠들며 부러워하지만 그야말로 나처럼 불행한 외로운 아이는 세상에 또다시 없을 것이다 . 글쎄 , 밥과 옷은 풍족하다 할지라도 동생이 있나 동무가 있나 . 매일 같이 이 쓸쓸한 궁궐 속에서 혼자만 지나게 되니 무슨 맛으로 산단 말인가.

아 , 참으로 나처럼 불행한 아이는 이 세상에 또다시 없을 것이다 . 그나마 꿈에라도 만나는 동무가 오랫동안 놀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어디 그렇게 놀아 주어야지 . 아 , 진정으로 나는 사랑스러운 동생이 그리워서 살 수가 없다 .

 

 

( 노래 )

 

사랑하는 나의 동무 

언제나 만나 볼까나 

썩은 나무 가지에서 

꽃이 필 때에 오려나 

꿈에 만난 너의 얼굴 

이 내 마음 상케 한다 

사랑하는 나의 동무 

언제나 만나 볼까나

 

( 말 ) 에라 잠이나 또 자자 .

 

· 천사 ( 노래 ) 

 

( 막 뒤에서 )

깊고 깊은 궁궐 속에 

고요한 밤 잠길 때

동무 찾는 어린 공주 

어찌 어리석은지

찾는 친구 만나려면 

궁궐 속이 아니요 

거리로나 바닷가로 

겸손한 맘 가지고

이리 저리 친구 찾아 

이 궁궐을 떠나라

 

공주 ( 말 )

 

옳지 .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거리로나 바닷가로 나가라 . 그리하면 동무를 만나리라 . 아 , 참으로 이상한 말이다 . 내가 이 궁궐을 떠나면 궁궐 안에서는 큰 야단이 날 터인데 , 아하 , 어쩌면 좋을까 . 에라 가자 . 야단이야 나거나 말거나 . 나는 이 쓸쓸한 궁궐에서 동무 없이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 에이 떠나자.

 

( 노래 )

 

나는 간다 나는 간다 

꿈을 따라 나는 간다 

부귀영화 다 버리고 

꿈을 따라 나는 간다 

허황하다 웃지 마라 

꿈을 따라 나는 간다

 

 

 

◆ 제 2 막 바닷가

 

( 소녀 합창 )

 

청명한 날 바닷가에 

고운 노래 흩어지니 

물결 쫓아 잔잔해진다 

사뿐사뿐 백사 위에 

발을 옮겨 놓는 재미 

형언할 수 없어라

소녀 1: 아 우리 무얼 하면서 놀까 ?

소녀 2: 글쎄 우리 앉아서 이야기나 하면서 놀까 날도 따뜻한데 . 

소녀 3: 얘들아 , 우리 그러지 말고 저 물가에 가서 조개나 잡자구나 . 

소녀 4: 그까짓 조개는 잡아 무엇해 . 우리 숨기 내기나 하자 , 야 .

소녀 5: 너희들 너무 여러 가지 생각이 되어서 안됐다 . 그러지 말고 우리 가위바위보에 이기는 애 맘대로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 어떠냐?

 

일동 합창

 

옳다 , 옳다 그 말 옳다 . 그 말이 옳아 . 누구든지 가위바위보에 이기는 이 맘대로 , 누구든지 가위바위보에 이기는 이 맘대로 , 가위바위보 , 가위바위보 다시 한 번 가위바위보 아 , 너로구나 . ( 박수하다가 이긴 자를 가리키며 ) 

소녀 6: 자 , 그러면 무엇을 하지 ? 

소녀 7: 글쎄 , 그거야 네가 알지 .

소녀 6: 그럼 우리 창가나 할까 ? 

소녀 8: 무슨 창가 ?

소녀 6: 우리 ‘ 그립던 동무 ’ 나 할까 ? 

소녀 5: 야 , 그거 참 좋다 .

소녀 6: 자 , 내가 시작을 부르마 . 

( 하나 , 둘 , 셋 )

 

합창

 

문 앞에 꽃동산은 옛날이었고 

그립던 동무들은 형체도 없네 

흐르는 시냇물에 물어보면은 

말하는 소리인지 졸졸 하도다 

개나리꽃 가지에 물어보면은 

봄바람 불어와서 끄떡이노라

 

소녀 일동 : 아 , 참 좋다 . ( 박수하면서 )

 

· 이때에 꽃팔이 등장

꽃팔이 ( 노래 ): 산 중에 피어 어여쁜 꽃이 내 손에 있어 고운 웃음을 웃네 . 

아 어여쁜 꽃.

꽃팔이 ( 말 ): 꽃 사세요 . 이 어여쁜 꽃들 .

소녀 4: 얘 , 이것 봐라 . 꽃팔이다 . 그거 한 묶음에 얼마 받니 ? 

꽃팔이 : 너희들 꽃 사겠니 ?

소녀 5: 글쎄 얼마씩이냐 말이야 ?

소녀 6: 그거 참 싼데 . 자 우리 하나씩 사는 것이 어떠니 ? 

소녀 1: 자 , 사자 . 요것 참 고운데 .

( 소녀들이 제각기 한 개씩 빼어 혹은 꽂고 혹은 든다 )

 

일동 합창

어여쁜 꽃일세 참 고운 꽃일세 

금시에 꽃밭을 이루었네

노래를 부르니 향내 풍긴다

천상 ( 天上 ) 의 선녀가 이 아닌가

 

꽃팔이 : 아이고 이를 어찌해 그냥 다 달아나 버리고 마니 . 

( 소녀 일동 노래 부르며 퇴장 )

공주 : 너 어째서 여기서 울고 있니 ?

꽃팔이 ( 노래 ): 그 몹쓸 애들이 돈도 안 주고서 남의 꽃을 다 뺏어가고 말았어요.

공주 : 그러면 네가 꽃 장사냐 ?

꽃팔이 ( 노래 ): 패역한 거리에 꽃 장사는 본의가 아니나 병 중에 계신 어머니를 나 어찌 하리까.

공주 ( 말 ): 본의가 아니나 병든 어머니를 구하려고 꽃을 팔러 나왔다 , 그 얼마나 기특한 마음인고 . 귀여운 동무야 안심하여라 . 오랫동안 나는 너를 찾아 다녔다.

꽃팔이 ( 노래 ): 아닙니다 . 아닙니다 . 잘못 보셨어요 . 저는 비천한 집 아이로 꽃팔이 입니다.

공주 ( 노래 ): 귀여운 동무야 안심하여라 . 너와 함께 궁전으로 가련다 .

 

( 신하들 등장 경례 )

신하 1: 공주여 어디 계신지를 알지 못하여 궁중으로부터 명을 받자옵고 두루 찾아 다니던 길이올시다.

공주 :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단 말이다 . 나는 일생 동안에 원하던 바 좋은 동생을 오늘에야 얻은 것이다 . 지금 곧 궁중으로 같이 가려던 길이다 . 

신하 2: 공주여 , 안될 말씀입니다 . 저런 천한 아이를 동생이라고 어찌 부르십니까 ? 그리고 궁중으로 데리고 가신단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 천만부당 하신 말씀입니다.

공주 : 나는 이때까지 이 동생을 찾기 위하여 밤잠을 자지 못하고 두루 방황하였던 것이다 . 이제 천행 ( 天幸 ) 으로 만났으니 어찌 떨어질 수가 있겠는가 . 

신하 3: 그러나 공주께서 저런 천한 아이를 만일에 궁중으로 데리고 가신다면 대왕전하께옵서 결단코 용납지 않으실 것입니다.

공주 : 너희는 아무 염려도 하지 말 것이다 . 내가 곧 들어갈 터이니 너희는 먼저 들어가거라.

신하 4: 저희는 먼저 물러가나이다 . ( 경례 )

공주 ( 노래 ): 귀여운 동무야 , 안심하여라 . 오늘부터 궁전에서 너와 같이 살련다.

꽃팔이 ( 노래 ): 넓으신 사랑 받자오니 감사하오나 , 병드신 노모를 혼자 두고 내 어이하리까?

공주 ( 노래 ): 귀여운 친구야 , 안심하여라 . 너와 같이 어머니도 함께 하련다 . 천사 ( 막 뒤에서 합창 ): 오랫동안 꿈을 따라 찾던 친구를 찾고 보니 이 마음에 넘치는 기쁨 , 가슴속에 서리었던 쓸쓸한 꿈은 봄바람에 자취 없이 다 날아가고 가슴 속에 한 송이 꽃 피려 웃는다 . 우지 짖는 새 소리는 다시 기쁘고 푸릇푸릇 먼 산 빛도 다시 곱고나. ( 노래 끝나기 전에 막이 닫힌다 )

 

 

◆ 제 3 막 궁전

 

장면 · 왕궁의 일부

중앙 의자에 왕이 앉아 있고 그 좌우로 왕비와 신하가 서있이다.

 

( 합창 ) 공주는 날마다 꿈을 따라 정처 없이 방황해요 . 

왕비 : 왕님의 근심도 생각지 않고 , 

신하 : 방황해요 .

왕비 : 절박한 국운을 어찌하리 . 

합창 : 어이하리 .

왕 : 오늘은 또 어디를 갔단 말이냐 .

신하 1: 오늘도 두루 찾아 다니다가 저 바닷가에서 만났는데 웬 더러운 꽃팔이 소년하고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시겠지요 . 그런데 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꽃팔이를 공주님의 동무라고 하시면서 궁중으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왕 : 아 , 그런 천인의 자식을 친구라고 하다니 그리고 또 이 신성한 궁전으로 데리고 오다니 . 어 참 , 한다는 모든 일이 모두다 두통거리야 .

신하 2: 어떻게 하면 공주의 잃은 마음을 찾게 하며 그 마음에 참 위안을 줄 수가 있을는지 저희들도 주야로 근심하는 바이올시다.

왕 : 오 , 마침 저기 들어오는 모양이다 . 저 옆에 데리고 오는 소년이 꽃팔이 인가?

신하 3: 네 , 그 아이 같습니다 .

( 공주 , 꽃팔이 등장 . 꽃팔이는 용모가 매우 찬란해졌다 . 의복도 화려한 것을 입었다 . 꽃팔이는 매우 어려운 모양 )

공주 : 어머님 난 오늘 생전에 처음으로 마음이 이렇게 기뻐요 . 

왕 : 오 , 네 마음이 그렇게 기뻐 얼마나 고마운 말인지 모르겠다 .

공주 : 저는 하나님의 지시로 참 동생을 하나 얻어 왔습니다 . 지금까지 저는 어머님의 사랑과 많은 사람들의 보호로 얼마나 호화롭게 지냈는지 아뢸 길이 없습니다 . 그러나 저는 도무지 기쁨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 형제도 없고 얘기 하나 할 동무조차 없어서 마음은 늘 쓸쓸하였습니다 . 그러나 오늘부터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 어머니께서 이 아이를 내 동생으로 내 참 친구로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영원히 기쁨의 생활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왕 : 그래 , 하나님께서 저 애를 네게 지시해 주셨다지 ? 사실 저 아이로 인하여 네가 그렇게 기뻐한다면 내게도 역시 큰 기쁨이 될 것이다 . 그러나 저 아이가 과연 네 동생이 될만한 아리따운 심지와 풍부한 지혜를 가졌을까? 공주 : 네 , 분명히 저 푸르고 큰 눈에는 신비한 지혜가 숨겨져 있는 것이오며 그 어여쁜 입술에는 고운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왕 : 어디 그러면 꽃팔이의 심정과 지혜를 시험해 보자 . 

( 신하들 합창 )

꽃팔이의 마음씨를 시험한다고 , 꽃팔이의 가진 보배 그 무엇인가

왕 : 내 어젯밤 꿈속에 한 곳에 가니 굉장하고 찬란한 이상한 궁전 오색의 광채가 둘리었는데 어디선지 곱게도 울리는 풍악 소리 어떻다고 형언키 어 려웠다 . 정신 없이 안으로 끌려들어가 이리로 저리로 구경을 하다가 동편 쪽 삼층루 ( 樓 ) 에 올라가 보니 검붉은 휘장이 늘어져 있는데 그 안에는 이상한 두 사람이 누어 있었다 . 그 중에 한 사람은 어찌나 예쁜지 인간 세계에서는 보지 못한 절세의 미인이었다 . 그러나 그 옆에 또 한 사람은 세상에 다시없는 추잡한 사람이었다 . 하얀 눈은 푹 빠져 형지가 없고 얼굴은 헌데로 덮여있어 과연 너무 추해 볼 수 없는 그 꼴 . 어쩌면 그런 사람도 세상에 있는지 어떤 사람은 그리도 지나치게 곱고 어떤 자는 그리도 못생겼을꼬. 그때에 홀연히 천사 한 분이 내 앞에 나타나 하는 말이 그 예쁜 모양을 한 사람은 사람이 만든 인형이고 모양이 흉한 저쪽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다 . 어느 것이나 네 나라에 소용되는 대로 한 사람을 줄 터이니 말하라고 하였다 . 아름다운 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요 , 생명이 있는 것은 모양이 흉하니 어느 것이 소용된다고 할까 하다가 아깝게도 꿈을 깨고 말았다. 자 , 꽃팔이야 , 어느 것을 취하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가 ?

( 합창 ) 어렵구나 어려워요 . 그게 어려워 . 귀여운 꽃팔이야 , 어찌하려노 . 인형인가 , 사람인가 , 어느 것인가 . 소용되는 인물이 어느 것인고.

꽃팔이 : 저 같으면 모양이 흉하다 해도 그 산 사람을 취하겠습니다 . 

왕 : 그거 참 재미있는 대답이로다 . 어째서 ?

꽃팔이 : 장식품이나 노리개일 것 같으면 그 모양을 보아 아름다운 것을 취하겠지만 사람은 외모를 보아 취할 것이 아니라 그 속을 보아서 생명이 있고 정신이 있는 것을 취할 것입니다. 

일동 : 참 그 말이 옳아요 .

꽃팔이 : 눈이 아무리 어여쁘다고 해도 보지를 못한다면 그것을 무엇에 써요.

일동 : 그거 소용 없지요 .

꽃팔이 : 입이 아무리 어여쁘다 해도 말하지 못하는 그 입 그 무엇에 쓰나요 . 귀가 아무리 어여쁘대도 듣지 못하는 그 귀 무엇에 쓰나요 . 

일동 : 그것은 쓸 데가 없지요 .

꽃팔이 : 인형이 과연 아름답기는 아름답지요마는 그 신체에는 생명이 없으매 아무 소용없는 장난감에 지나지 못하며 사지와 백체는 시체와 다름이 없으니 그 따위 사람을 대왕의 나라에 쓸 데가 무엇이겠습니까? 

왕 : 그 얼마나 현명한 말인가 ! 이리 가까이 오너라 .

( 꽃팔이를 친히 불러 곁에 서게 한다 ) 옳다 . 과연 그 따위 인형은 장식품이나 장난감으로 밖에 더 쓸 데가 없을 것이다.

꽃팔이 : 그러나 대왕님 . 백성 중에도 분칠해서 곱게 꾸며 놓았을 뿐 아무 소용없는 인형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일동 : 인형 같은 사람이란 무슨 말인가 ?

꽃팔이 : 겉모양은 꾸며 놓아 사람 같지만 속에 생각은 없는 그 물건이 인형 이지요.

일동 : 생각 없는 그 물건은 인형이지요 . 

꽃팔이 : 하나님을 몰라보니 인형이지요 . 

일동 : 하나님을 몰라보니 인형이지요 . 

꽃팔이 : 골육도 몰라보니 인형이지요 . 

일동 : 골육도 몰라보니 인형이지요 .

공주 : 대왕이여 , 이 얼마나 놀라운 아이입니까 ? 그 현명한 지혜와 열렬한 충의에는 과연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왕 : 옳다 . 과연 우리나라 가운데는 장식품에 지나지 못하는 인형이 많을 것이다 . 아무런 뜻도 없고 아무런 생각도 없는 인형 , 과연 놀라운 소리다 . 시험에 만점 급제다.

공주 : 대왕이시여 , 저 아이를 내 동생으로 허락해 주시고 그리고 또 이 궁중에서 한 가지로 복된 날을 짓게 해주세요.

왕 : 옳다 . 물론 너의 동생으로 또 나의 사랑하는 아들로 봉하기를 심히 기뻐하는 바이다 . ( 공주를 보면서 ) 그러면 너도 오늘부터는 기쁨의 생활을 할 것이요 , ( 꽃팔이를 보면서 ) 너도 길이 평안을 누릴 것이다 .

꽃팔이 : 황송하옵니다마는 저를 이 궁중에 두는 일만은 면케 해주시기 바라나이다.

공주 : 어째서 ?

꽃팔이 : 저에게는 오직 병든 어머니 한 분밖에 안 계신데 나 혼자만 이 화려한 궁전에 와서 낙을 보겠다고는 못하겠습니다.

왕 : 오 , 기특한 소리 . 그 얼마나 귀여운 마음인가 .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다 . 너의 어머니도 너와 한가지로 이 궁중에 와서 함께 낙을 누리게 해줄 터이니 안심하여라 . 응 .

꽃팔이 : 감사하옵니다 . ( 경례 )

공주 : 대왕이여 , 저는 새로 얻은 동생의 어여쁜 얼굴을 볼수록 마음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왕 : 오 , 이제부터 내 근심도 다 없어지게 되었다 . 너의 기쁨 없는 얼굴을 볼 때마다 도무지 한심한 것뿐이더니 , 아 , 오늘에야 과연 우리 궁중에 새로운 서기 ( 瑞氣 ) 가 뻗친 것이다 . 

( 이하 노래로 )

공주 : 새 사람을 얻고 보니 나는 기뻐 노래하고 

왕비 : 대왕도 춤을 추며 즐거워하네 .

일동 : 기쁘다 . 오늘이여 , 만세 , 만세 , 만만세 . 산천초목도 너울너울 춤을 추도다.

왕 : 천은이 망극하사

일동 : 우리나라 억만세 . 

왕 : 하나님의 은혜 입어 

공주 : 내가 귀인 만났네 .

일동 : 국태민안 군민공락 우리 기쁨 만만세 . 일월이 무궁하며 만만세로다 . 

꽃팔이 : 꽃팔이는 오늘부터 하나님의 은혜 입어 

왕비 : 기쁨의 궁전에서 일동 길이 살겠네 .

일동 : 세월이 다 하도록 우리나라 만만세 . 오늘의 기쁜 노래 곡조 높아라 .

 

아이생활 (1927) 5~6 월호에서

 

 

 

 

< 제 3 부 : 어린이의 영양 >

 

 

 

제 1 장

창작 성극 모음

 

▶ 애굽의 이스라엘

 

인물 : 아기 모세 ; 그 어머니 ; 누이 미리암 ; 그 동무 3;

             천사들 ; 공주 ; 시녀 3

 

◆  제 1 장

 

미리암의 집 바깥방이다 . 멀리서 유대인들의 슬픈 노래가 들려온다 .

미리암 그 노래를 하다가 눈물에 어리어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는 것으로 시작됨.

 

편주 : 1928 년 첫 교회를 담임하면서 쓴 작품

 

 

유대인의 노래

 

주여 , 우리 어디로 가오리까 . 어디로 어디로 가오리까 . 밤이 깊어 캄캄한데 어디로 어디로 가오리까 . 우리 집엔 근심이요 , 우리 집엔 눈물이니 이 근심 , 이 눈물을 어이하리까 .

미리암 : 오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 어찌하여 귀를 막으시고 이스라엘의 슬픈 울음을 안 들으시나이까.

오 주여 , 이스라엘의 아들과 딸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 어떻게 할까요 .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다 나일강 고기밥이 되고 맙니다 . 오 주여 , 이 아이들이 다 죽고 말면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울 사람이 어떻게 남겠습니까? 주여 , 우리 아기들을 강물에 던져 죽이지 않으면 안됩니까 ? 어떻게 하시렵니까 ? 오 주여 , 우리 아기를 구원할 도리가 없을까요 . 우리 아기들을 다 잃은 후에 우리는 누구를 바라고 살까요 . 오 주여 , 우리는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살리이까?

( 미리암의 친구 둘이 올라오는데 모두가 슬픈 빛 )

 

A: 어떻게 할까 ?

미리암 : 왜 그러니 또 무슨 일 있니 ?

B: 글쎄 그 몹쓸 놈들이 우리 사람을 둘이나 또 때려 죽이더라는 구나 . 

A: 그리고는 글쎄 젊은 사람을 다섯 명이나 수갑을 채워 가지고 막 끌고 가더래.

미리암 : 오 하나님 , 어찌 하시려나이까 ? 우리의 동족들은 다 이렇게 죽어야 되나요 . 오 , 하나님이시여 .

B: 우리 사람은 씨도 남지 않고 다 애굽에서 죽고 마는가 하고 생각하면 곧 염통이 터지는 것 같고 앞이 캄캄해. 

(C 가 또 눈물을 머금고 들어온다 ) 

미리암 : 어서 들어오너라 . 

C: 이를 어쩌면 좋으니 ?

B: 왜 또 무슨 일이 생겼니 ?

C: 저 아래 동리 베냐민네 집에 또 큰 일이 났어 . 

A: 그래서 어서 말해라 .

B: 그래 그 어린 애가 어떻게 됐니 ?

C: 그 어린 애를 장 속에서 찾아내서는 그냥 그 자리에서 찢어 죽이더라는 구나.

미리암 : 아이고 저를 어찌해 . ( 몸 서리를 치고서 운다 .) 

B: 아이 끔찍해 .

C: 너희 아이 잘 감추어 두어라 .

미리암 : 그러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늘 이렇게 감추어만 기르니 . 

B: 요새는 퍽 컸겠구나 ?

미리암 : 그럼 . 막 웃는단다 .

A: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차마 내다가 버리니 . 

C: 그럼 어쩌니 . 드러나면 다 죽는 판인데 .

미리암 : 그런데 이제는 울음 소리가 또 어찌나 커졌는지 모른다 . 

B: 아이고 어떻게 해 , 저것을 .

C: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부모의 손으로 강에다 집어 넣니 ?

미리암 : 얘들아 너희들은 밖에 나가서 동정을 좀 살펴보라 . 그리고 또 좀 여통을 해다오.

C, B, A: 너무 애쓰지 마라 .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 .

(A, B, C 퇴장 . 미리암 혼자 앉아 있다 . 멀리서 슬픈 노래가 크게 들려온다.)

 

 

비가( 悲歌 ):

슬프도다 이스라엘아 

어이 우리 여기 왔던고

우리의 이 눈물 언제 마르며 

우리의 이 근심 언제 다하나

가나안 내 나라 내 나라 조상의 뼈가 묻힌 그 나라 언제나 갈지 

언제나 갈지 가나안 내 나라 언제나 갈지

 

 

◆  제 2 장

 

(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앉아 있다 . 아기가 운다 . 어머니도 운다 .)

어머니 : 아가 울지 마라 . 크게 울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 어쩌면 이런 때에 태어났더란 말이냐 ? ( 아이가 잠잠하다 .) 아가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 죽어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 살아도 이스라엘 사람이다 .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은 지금 다 죽게 되어있다 . 너도 죽게 되고 나도 죽게 되고 . 아가야 어떡하면 좋으니 . 내가 너를 내다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붙들고 있대야 너를 살릴 수도 없고 . ( 아기 또 운다 .) 아가 울지 마라 . 어떻게 하니 . ( 어머니 또 운다 .) ( 하늘을 우러러 ) 어떻게 해요 . 오 하나님이시여 , 이것을 어떻게 해요.

( 미리암 등장 )

미리암 : 어머니 울지 마세요 . 그러니 저것을 어찌 합니까 ? 

어머니 : 울음 소리는 점점 커가고 이제는 글쎄 어떡한단 말이냐 ? 

미리암 : 어머니 별 수 있습니까 . 강에다 갖다 띄우는 수밖에 .

어머니 : 그러니 저것을 어떻게 강에 갖다가 죽여 버린단 말이냐 ?

미리암 : 어머니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영 버리시지는 않을 줄 믿습니다 . 이제 더 감추어 둘 수는 없고 어찌 합니까 ? 글쎄 , 어제 아침에도 베냐민네 아기를 찢어 죽이고 그 어머니와 온 식구까지 다 코를 꿰어 가더래요 , 글쎄 .

어머니 : 오 하나님이시여 ,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 우리는 이렇게 다 죽어야 됩니까 ? 오 하나님 , 이스라엘의 아들은 다 죽고야 맙니까 ? 우리의 아들이 다 죽고만 뒤에 누구라 이스라엘을 구원해 줍니까 ? 오 하나님이시여 , 아브라함의 하나님 , 이삭의 하나님이시여 , 저희들의 눈물을 못 보시나이까 . ( 그 사이에 미리암이 나가서 바구니를 들고 왔다 .) 

어머니 : 그걸로 어떻게 할 것이니 ?

미리암 : 여기다 담아서 갖다 띄우지요 . 어머니 . 

어머니 : 아이구 못한다 못해 . 나까지 갖다 강에 띄워라 .

미리암 :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 저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텐데 이왕이면 왜 그 몹쓸 놈들의 손에 참혹하게 죽입니까?

어머니 : 오 하나님이시여 , 이것을 갖다가 강가에다 집어 넣어야만 되나요 . 오 하나님이시여,

( 미리암이 바구니에 약을 바르고 요를 깔고 준비를 한다 .)

아가 , 너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다 . 네가 죽어도 이스라엘의 아들이요 , 살아도 이스라엘의 아들이다 . 너뿐이 아니라 네 부모와 형제와 너의 온 동포가 다 죽임을 당할 것이다 . 아가 , 네가 만일 죽는다면 죽은 혼이라도 이 참상을 하나님께 호소해다오.

( 미리암이 아기를 바구니에 넣는다 .)

미리암 : 그래도 좋다고 웃어 . 죽으러 갈 줄도 모르고 . ( 미리암 운다 .) 아가 ,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이 거두실 것이다 . 

어머니 : ( 바구니를 붙들고 ) 오 하나님이시여 , 이제는 강에다 갖다 던지려고 담아 놓았습니다 . 오 주여 , 어째서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 주여 ,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 오 주여 , 이것을 버린 뒤에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 우리 이스라엘의 오직 한 가지 소망인 이 아들과 딸들을 다 잃고야 무엇을 바라고 살까요 . 이 자식 없어질 때에 우리 소망도 함께 …… ( 목이 메어 운다 .) 오 주여 , 이제 할 수 없어 갖다 버리거니와 그러나 주의 뜻을 누가 알겠습니까.

( 미리암 들고 일어선다 .)

어머니 : 잘 갖다 띄우고 어떻게 되나 보고 오너라 . 

( 미리암 가지고 나간다 . 어머니 다시 일어서 따라가며 .) 

미리암아 어디 한번 더 보자. 

( 얼굴을 광주리에 대고 운다 .)

( 슬픈 노래 다시 흘러나오고 막 내림 )

 

 

◆  제 3 장

 

( 미리암 광주리를 강가에 놓고 몸을 숨긴다 . 천사가 임한 듯하다 .)

천사 : 눌린 자야 , 네 슬픔을 주가 아신다 . 우는 자야 , 네 눈물을 주가 보신다 . 네가 매를 맞을 때 주가 아파하시고 네가 옥에 갇힐 때 주가 염려하신다 . 주가 손을 드실 때 원수들이 떨리니 , 오 이스라엘아 , 주만 믿고 따르라 . 이스라엘의 아들아 , 잘만 자거라 . 주의 품에 안기어 잘만 쉬어라 . 주가 손을 드실 때 너는 일어나 가나안의 새나라 세워 놓아라. 

( 천사 퇴장 )

( 공주 시녀 등장 )

시녀 1: 물빛이 어쩌면 저리도 새파랍니까 ?

시녀 2: 요새 이 강 속에는 유대 놈의 새끼들이 많겠지요 . 공주 : 그게 무슨 소리냐 ?

시녀 2: 아 , 왜 임금님께서 유대 놈들 새끼가 나면 다 죽이라고 칙령을 내리지 않으셨어요 . 그래서 모두들 이 강에다 갖다 띄우더라는 대요 . 

공주 : 그런 끔찍한 일이 어디 또 있니 ?

시녀 3: 끔찍하긴 뭐가 끔찍합니까 ? 그까짓 종자들 . 

( 공주 귀를 기울였다 . 무엇을 듣는다 ) 

시녀 1: 왜 그러세요 , 네 ?

공주 : 저 소리 너희 들리지 않니 ? 

시녀 2: 무슨 소리요 ?

공주 : 그래서 그런지 아기 소리가 나는 것 같구나 . 저 , 저거 아니냐 . 

시녀 3: 정말이어요 ? 

시녀 2: 글쎄요 .

공주 : 야 , 너 저기 가보고 오너라 . 저쪽에서 나지 않니 . (시녀 1 간다 . 가서 아기를 보고)

시녀 1: 아 , 이거 보세요 , 아주 곱다란 아기예요 .

공주 : 가져와 그럼 . ( 가져왔다 .)    ( 공주 받는다 .) 야 , 이건 참 예쁜 애기구 나 . 어쩌면 이렇게도 잘 났니 .

시녀 2: 글쎄요 . 참 잘도 났습니다 .

시녀 3: 그것도 유대인 놈의 새끼입니다요 . 

공주 : 그렇구나 . 이런 가엾을 데가 어디 있니 ?

시녀 1: 임금님의 명령이니까 저희도 어쩔 수가 없어 내다 버렸겠지요 . 

공주 : 세상에 가엾은 일도 있어라 . 이것을 내다 버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여북했으랴.

시녀 2: 공주님은 참 퍽도 자비심이 많으세요 . 

공주 : 얘 , 이 아기는 내 아들을 삼겠다 . 

시녀 1: 임금님이 아시면 어찌 하시게요 ? 

시녀 3: 원 , 종놈의 새끼를요 .

공주 : 아니다 . 그런 말을 말아라 . 듣기 싫다 . 임금님께는 내가 말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시녀 1: 그러면 일단 젖을 먹여야 하지 않습니까 ? 

공주 : 글쎄 그게 문제구나 . 유모를 물론 얻어야지 .

시녀 2: 글쎄요 . 여기서 갑자기 마땅한 유모를 어떻게 얻나요 . 

( 저쪽 미리암 등장 경례 ) 

공주 : 너 웬 아이냐 ?

미리암 : 네 저는 유대 사람의 딸이올시다 . 

공주 : 그런데 .

미리암 : 황송하오나 지나다가 듣자오니까 어린 아이의 유모가 없어 걱정하시는 모양 같기에 감히 여쭈어 볼까 하고 나온 것입니다. 

공주 : 어 , 그래 그럼 어디 유모가 있나 ?

미리암 : 네 제가 아는 유대인 중에 참 좋은 유모가 한 분 있기에 하는 말씀입니다.

공주 : 오 , 참 그런 좋은 일은 없겠다 . 그럼 어디 있느냐 , 그 유모가 . 

미리암 : 네 , 여기서 얼마 멀지 않게 있습니다 . 

공주 : 오 , 그러면 너 얼른 좀 다녀와 다오 . 응 . 

미리암 : 네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 ( 퇴장 ) 

시녀 1: 거 참 잘 됐습니다 .

공주 : ( 아기를 보면서 ) 아이고 가엾어라 . 이젠 내가 네 어머니다 . 옳지 좋다.

시녀 2: 글쎄요 , 좋다고 웃네요 . 

시녀 3: 뭘 아는 것처럼 . 

시녀 1: 벌써 옵니다 .

공주 : 벌써 와 ? 옳지 거참 잘된 일이로군 . ( 둘이 등장 ) 아 , 그대가 내 아기를 위하여 젖을 먹여 줄 터인가 ? 

유모 : 네 . 그저 정성껏 해보겠습니다 .

공주 : 오 , 그러면 내 아기를 줄 테니 조심해서 귀히 길러 주어 . 그리고 젖이 떨어지면 곧 대궐로 데리고 오란 말이야 . 응 . 

유모 : 네 . 그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공주 : 그 동안에라도 내가 보고 싶으면 데려다 보겠지만 . 

시녀 3: 언제나 분부하시면 되지요 .

공주 : 자 , 그러면 우선 이 돈을 갖다가 소용하고 유모도 무얼 좀 잘 먹어야 겠으니.

유모 : 그저 황송하옵니다 .

시녀 2: 공주님은 참 자비도 하셔 . 

공주 : 자 , 이젠 우리 돌아가자 . 

시녀 1: 가십시다요 .

공주 ( 유모를 보면서 ): 우선 거기서 젖을 좀 먹여 가지고 가게 . 응 . 아기가 얼마나 배가 고프겠나. 

( 공주 일행 퇴장 )

어머니와 미리암 , 그 기쁨을 감출 길이 없어한다 . 공주 일행을 바라보고는 아기를 품에 꼭 껴안는다.

미리암 : 어머니 ,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

어머니 : 오 하나님이시여 , 주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줄 믿습니다 . 

미리암 : 아가 맘대로 울어라 . 이젠 . ( 아기의 얼굴에 뺨을 부비면서 )

어머니 : 오냐 , 이젠 맘대로 울고 맘대로 웃고 어서 얼른 자라다오 . 이제는 네가 잘 자라야 되겠다 . 이 죽어가는 동족들을 아가 네가 구원해 내야 되겠다 . 아가 . ( 둘이서 무릎을 끓고 하늘을 우러러 합창하고 감사를 올린다 ) 

어머니 : 오 , 하나님이시여 . 

( 이때에 들려오는 소리 ) 

슬프도다 이스라엘아 

어이 우리 여기 왔던고

우리의 이 눈물 언제 마르며 

우리의 이 근심 언제 다하나 

잘만 자라라 우리 장수야 

죽고 삶이 네게 달렸다 

어서 자라라 우리 장수야

우리의 죽고 삶이 네게 달렸다

 

아이생활 1928 년 11 월호

 

 

 

< 제 3 부 : 어린이의 영양 >

 

 

 

제 1 장

창작 성극 모음

 

▶ 믿음으로 사는 화공( 靴工 )

 

 

인물 : 적빈 ( 赤貧 ) 한 화공 ; 가련한 순례자 ; 창가대 ; 통행인 ; 소녀 메리 ( 화공 의 딸)

설비 : 헌 구두 방을 차려 놓음 ( 헌 구두짝들 ; 구두 약통들 ; 끈들 ; 마치 ; 신 골 ; 헌 의자 ; 헌 테이블 ; 앞치마 )

 

 

편주 : 1928 년 교회를 처음 담임하면서 쓴 작품

 

때는 맑은 아침 , 화공이 나온다 . 체조를 한다 . 팔을 힘있게 신축한다 . 얼굴이 벌게 지게.

화공 : 네 , 하나님 감사합니다 . 오늘도 이렇게 건강한 힘을 주셨으니 . 

( 다시 팔을 서너 번 폈다 말았다 한다 . 한 번 기지개를 펴면서 )

오늘도 일기가 참 좋군 . ( 벽에 걸린 앞치마를 가지러 가면서 다음의 노래 ) 

화공 ( 노래 ): 라 - 라 - 라 ( 콧소리로 몸짓을 하며 ) 그저 눈만 뜨면 일 하자 네 . 일 하자네 .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석부석 뚝딱뚝딱 일 하자네 . 라 - 라 - 라 노래하며 일 하자네.

( 신탕을 타고 앉아 헌 구두를 찾으면서 ) 라 - 라 - 라 노래하며 종일 일하세 . 

( 바늘을 찾아 들고 꿰매기를 시작하다가 창으로 밖을 내다 본다 . 창이 옅으므로 길 가는 사람들의 발만 보인다 .) 허허 모두들 일터로 가누나 . 관청으로 , 학교로 , 회사로 , 정거장으로 모두 다 제 볼 일을 보려고 간다 . 난 여기서 저이들 얼굴을 못 보아도 저 구두들만 보고도 누군지 안단 말이야 .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의 구두치고는 내 손맛 안 본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 한참 꿰매어서 앞에 놓고 팔이 아플 만큼 두드린다 . 한 번 기지개를 켜면서 ) 에이 팔 아파 . 젠장 맨날 이렇게 골이 빠지도록 일을 해도 그저 밥알밥 알하고 사니 뭘 해 . 그래도 내가 몹쓸 짓 안 하고 이렇게 날마다 나 할 일만 부지런히 하건 만도 …… . 하나님은 무심도 하시지 , 더 나아지는 것도 없고 또 자식이라고 어미도 없는 딸년 하나 있는 게 요즘은 자꾸 앓기만 하니 , 에참 . ( 머리를 긁적거린다 . 그리고 눈이 멍하니 무엇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면서)

아니다 . 이게 뭐냐 . ( 머리를 흔들면서 ) 아까까지도 “ 하나님 감사합니다 ” 

“ 하나님의 은혜올시다 ” 하면서 찬미를 하고는 그새 맘이 또 변해서 하나님을 원망해 ? 이런 악한 자식 같으니 . (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면서 ) 글쎄 내가 이렇게 믿음이 약하단 말인가 . 오늘 아침기도에도 어떤 일이 있든지 하나님을 찬미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열심으로 기도하고는 그새 또 팔 좀 아프다고 그것을 잊어버리고 그 따위 수작을 하고 앉아 있어 . 오 하나님이시여 , 과연 하잘것없는 이 자식이올시다 . 이 자식의 부족한 믿음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 그리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하든지 주님께 감사하며 나 할 일만 부지런히 하게 해주시옵소서 .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게 해주시옵시고 지극히 작은 선 ( 善 ) 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행할 용기를 주시옵소서 . 오 주님이시여 . 

( 노래 )

내 힘이 항상 약하나 주 나를 돌아보시니 내 모든 걱정 버리고 주께로 그저 갑니다.

( 찬송가 12 장 , 고요히 이 노래를 부른다 .)

( 가만히 일어나면서 메리가 어떻게 잠을 좀 자나 하고 곁방으로 엿보러 간다 . 가만히 돌아나오면서 ) 오 , 앓는 소리를 하더니만 잠이 좀 들었구나 . 오 하나님이시여 , 저것의 병을 낫게 해주시옵소서 . ( 자리에 와 앉아서 구두를 꿰매고 있다.)

( 왼편 문 앞으로 초췌한 그러나 거룩한 모양이 있는 거지 비슷한 사람이 하나 지팡이를 의지하고 올라온다.)

순례자 : ( 공손히 읍하면서 )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

화공 : ( 언뜻 그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그의 발을 내려다 본다 .) 웬 양반이십니까 ? 어떻게 오셨습니까 . ( 겸손하게 )

순례자 : 네 , 나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인을 위해서 강림하셨던 유대 승지를 참배하려고 길을 떠난 순례자올시다 . 그런데 오랫동안 길 위에서 방황하였기 때문에 있던 것은 다 없어지고 지금은 촌촌걸식 ( 村村乞食 ) 을 하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이즈음은 끼니를 먹어 본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습니 다 . 그저 떡 한 조각과 물 한 잔만 먹여주시면 살 것 같습니다 .

화공 : 예 , 그러세요 . 오죽 시장하시겠습니까 ? 자 , 그러면 이리 들어오세요 . ( 일어나서 인도한다 .) 있는 것이라고는 앓고 있는 아이를 주려고 구워놓은 빵 한 조각 밖에는 없습니다마는 어서 들어와 주세요 . ( 순례자는 읍하고 따라 들어간다 .) ( 둘은 안으로 들어간다 .) ( 이때에 어디선지 고요히 들려오는 찬미소리가 들린다.)

노래 : 가는 세월 , 죽는 인생 변혁함이 많으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 변할 줄이 있으랴 . 세상 근심 쌓인 중에 위로하여 주시고 새로운 소망 있게 하며 기쁜 맘을 주시네. ( 화공이 나온다 .)

화공 : 응 , 사흘이나 굶고 길을 왔다니 그런 가엾을 데가 있나 .

( 구두를 깁기 시작하면서 ) 침대에 요를 깔아주고 왔으니깐 그거나마 먹고 폭 쓰고 한잠 자고 나면 한결 몸이 풀리겠지 . 에그 가엾기도 해라 .

( 머리를 들고 합창을 하고 ) 오 하나님이시여 , 저 가련한 순례자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 징걸이 위에 가죽 조각을 두드린다 . 이윽고 안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니 이는 메리가 기쁨이 넘치는 노래였다.)

메리 ( 노래 ):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태평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 화공은 일손을 멈추고 노래가 흘러 나오는 곳으로 귀를 기울인다 . 이상한 듯이)

이게 누구냐? ( 일어나서 그리고 가만가만히 걸어간다 . 창문으로 들여다보자 마자 깜짝 놀라면서 ) 아 , 이런 ! 메리가 일어났구나 . 메리야 . ( 메리가 나온다.)

아까까지도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하던 네가 어떻게 그렇게 막 날뛰면서 찬미를 다해 . ( 메리를 얼싸안는다 .) 

메리 : 아버지 난 이젠 다 나았어 .

화공 : 야 , 참 기쁜 일이로구나 .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깨끗이 일어났니 ? 

메리 : 난 아버지가 그러는 줄 알았지 . 

화공 : 뭣이 ?

메리 : 난 잠이 폭 들었는데 “ 메리야 , 메리야 ” 하고 누가 부르겠지 . 

화공 : 불러 ? 그래서 ?

메리 : 그래서 난 “ 응 , 아버지 ” 하고 팔을 들었더니 “ 얘 ” 하면서 내 팔을 잡아 일으키잖아.

화공 : 응 ? 네 팔을 잡아 일으켜 ? ( 놀라는 듯 ) 가만 있더니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 이내 나온다 .)

 아니 근데 그 손님은 어디로 갔나 . 그 불쌍한 순례자 . 

메리 : 무슨 손님 ?

화공 : 아니다 . 그래서 너 얘기 마저 해라 . 

( 매우 급한 모양 )

메리 : 그래서 일어났더니 어찌나 정신이 깨끗하고 몸이 가벼운지 막 날 것 같아요.

화공 : 그래 그가 누구였단 말이냐 , 그럼 ?

메리 : 난 아버지가 그러시곤 얼른 나가신 줄 알았는데 .

화공 : 뭐 ? 가만 있자 . ( 방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 조금 있다가 엄숙한 낯으 로 걸어 나오는데 연해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 오 주님이시여 . 

메리 : 뭘 그래 ? 아버지 .

화공 : 아 , 메리야 . 너를 일으켜 준 사람은 아까 들어온 그 순례자이었구나 . 근데 이제 가보니 그는 정말 순례자가 아니라 곧 주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천사였구나 . ( 합장하고 머리를 들고 눈을 가만히 감는다 .)

오 하나님이시여 , 제가 무엇이건대 이처럼 사랑하시나이까 . 오 주님이시여 . (부녀는 고요히 머리를 들고 눈을 감는다 . 합장하고 고요히 부르는 찬미소 리 더욱 은근하다.) 

노래

가는 세월 죽는 인생 변혁함이 많으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 변할 줄이 있으랴 

세상 괴롬 많은 중에 위로하여 주시고 

새로운 희망 있게 하며 기쁜 맘을 주시네 

( 막 )

 

아이생활 1928 년 12 월호에서

 

 

 

< 제 3 부 : 어린이의 영양 >

 

 

 

제 2 장

성자이야기

 

 

성시메온(Simeon Salus)

 

지금으로부터 약 1400 여 년 전 가량이나 될까요 . 어쨌든 주후 6 세기 때에 저 수리아 에데사라고 하는 촌에서 그야말로 달덩이 같은 아이가 하나 태어 났습니다 . 내가 얘기하려는 성시메온이 곧 그 아이입니다 . 그의 집은 매우 부유하고 그 부모는 아주 신실한 신자였습니다 . 성시메온은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학문을 공부하는 가운데 선을 행하며 덕을 쌓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몸이 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 성시메온이 한 20 세 됐을 때인가 , 예루살렘에서 해마다 굉장히 거행하는 수난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키는 절기인데 - 에 참례해볼까 하는 생각이 간절해서 부모님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 올라가서 그 예식에 참례하는 중에 성시메온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친히 앞에 모신 것과 같이 감격의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주님을 조롱하던 그 꼴이 역력히 눈 앞에 나타날 때에, 

“ 오 주님이시여 , 어찌 이런 욕을 당하시었나이까 ? 그래도 마지막까지 ‘ 저희들이 몰라서 그랬사오니 하나님이시여 , 용서하여 주옵소서 ’ 하고 저들을 위하여 복을 비셨으니 오 주님이시여 , 과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 우리 죄인들의 구주올시다 . 주여 , 나도 어떻게든지 당신이 당하신 욕과 수치의 만분의 일이라도 당해볼 수 있게 해주옵소서 .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욕을 당하셨으니 우리는 당신을 위하여 욕을 당해야 될 줄 압니다 . 주여 , 나는 세상 편으로 너무 똑똑합니다 . 이제부터 나는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 남이야 나를 미쳤다고 하든지 , 못난이라고 하든지 나는 상관치 않으렵니다 . 그리고 다만 당신이 밟고 가신 그대로만 따라가겠습니다 . 오 주님이시여 ,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

이렇듯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 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요단강 건너 어떤 산골짜기에서 작은 수도원 하나를 보았습니다 . 동행하던 요한 군이 문득 입을 열어 “ 저 수도원에는 육신을 쓴 천사들이 살고 있대 ” 하며 그곳을 가르쳤습니다 . “ 그러면 그 천사들을 좀 볼 수 없을까 ” 하고 시메온은 그곳을 바라보면서 좋아했습니다 . 거기서 두 사람은 수도원 으로 들어가는 지름길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 지금까지 저희들이 걸어오던 길에 비하면 어찌나 좁고 또 험한 산골길인지 . 시메온은 혼자서 “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또 험하니라 ”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 두 사람이 수도원 문 앞에 와서 문을 두드리고는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드디어 한 60 가량 된 늙은 수사 한 분이 나왔습니다 . 수사는 이 두 젊은이를 기다리던 것처럼 아주 반가이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맞아주었습니 다 . 그때 그 수사의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 , 그 부드럽고 인자한 말소리 , 그 기쁨이 충만한 얼굴 빛 , 이것은 과연 천사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 멀리 걸어오느라고 피곤하여진 저들에게는 이상한 힘이 솟아오름을 깨달았습니 다 . 수사의 인도하는 대로 안으로 들어가 원장을 뵈었습니다 . 이 두 사람은 그 수사들의 거룩한 생활에 너무나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시메온은 거기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 자기는 아직 예수를 따라가기는커녕 이 수도사들을 따라가기에도 너무나 더럽고 추하고 가증하고 완강함을 깨달았습니다 . 자기의 믿음으로부터 그 말씨 , 그 태도 , 그 행실 , 그 전체의 생활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부족한 것을 깨닫고 서러워하였습니다 . 그리고는 아마 혼자 고요한 성당으로 들어갔겠지요 . 거기 들어가서 는 물론 십자가를 지고 운명하시던 예수님의 형상 밑에 가서 꿇어 엎드려 자기의 성스럽지 못한 생활을 참회하였을 것입니다 . “ 주님이시여 , 나는 과연 죄인이올시다 . 나는 너무나 부족하고 더럽습니다 . 내 말에서나 내 얼굴에서나 내 생활 가운데서는 조금도 주님의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 그러니 누가 나를 주님의 제자로 보겠습니까 . 나 따위 태도는 감히 주님의 그 높으신 덕과 사랑을 말할 자격도 없을 줄 압니다 . 주여 , 나로 하여금 온전히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해주옵소서 . 주님과 같이 욕도 먹고 고생도 당하고 죽임도 당하면서 주님과 같이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게 해주세요. 아멘 .” 시메온과 요한은 진정으로 참회하면서 완전히 주님의 밟으신 길을 밟으려고 애썼습니다.

얼마 안 가서 시메온이 요한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 “ 나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음덕 ( 陰德 ) 을 쌓아야 되겠어 . 그 동안 너무나 사람에게 보이려는 가증한 선을 했단 말이야 . 하나님만이 아시는 선을 행해야겠어 . 이제는 사람의 칭찬은 듣기 싫어 .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나는 듣고 싶어 . 그러기 위하여 좀더 고요한 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형은 어떻게 생각하니 ?” 이때 요한은 “ 그럼 우리 원장에게 한번 그 의향을 말해봅시다 그려 ” 하고 동감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 말과 같이 원장에게 그런 의사를 아뢴즉 , 원장 역시 감격해서 “ 성신이 감동하시는 대로 하시오 . 주님만을 기쁘게 하시도록 .” 거기서 시메온과 요한은 작별을 고하고 떠났습니다 . 

성신은 저희들을 이끌어 사해 근방 어떤 조그만 초막에 몸을 붙이게 했습니다 . 이것도 역시 어떤 사람들이 도 ( 道 ) 를 닦기 위하여 와서 기도하느라고 만들어 놓았던 초막입니다 . 눈비가 그냥 들이치고 하여 어쨌든 형편없었습니다 . 거기서 29 년간 과히 짧지 않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 그 동안 감각을 잃을 듯이 춥고 살이 물러질 듯이 무더운 그 어려움을 스물아홉 해 동안을 참고 견디었으니 뭐 말할 수도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 또한 그러한 어려움 외에도 의식의 궁함이 육신에 쳐들어 오고 거기 따라서 세상의 번영이 활동 사진같이 마음에 지나고 또 지나 자꾸 괴롭게 합니다 . 자기와 같이 자라난 사람들이 얼마나 번쩍하게 되었을까 . 그 집 , 그 옷 , 그 살림살이가 얼마나 화려할까 . 이러한 모든 것은 간교한 마귀와 같이 이 성자들의 마음을 꾀이고 또 흔들어 놓습니다 . 그 중에도 시메온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어서 돌아오라는 그 간절한 정지를 거절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 처음 2 년 동안은 늘 “ 어서 돌아오너라 . 옷 , 밥 , 집은 너를 기다리고 있는데 왜 안 오느냐 ” 고 하시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음성에는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 그러나 시메온은 그러한 유혹이 들어올 때마다 그 자리가 길이든지 산이든지 방이든지 어디든지 그냥 엎드립니다 . 그리고 “ 주여 , 나로 하여금 이 모든 유혹을 이기고 다만 하루를 살더라도 온전히 주님과 같이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 아멘 .” 그리고는 그냥 그 산등에서 삽니다 . 풀밭에서 몸을 굴립니다 . 모든 어려운 시험을 이기며 참는 버릇을 기르기 위하여 . 마침내 저는 승리를 얻었습니다 . 이제야 과연 저희에게서 주의 빛이 흘러 나오게 되었습니다 . 어느 날인가 저는 주의 묵시를 보고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줄을 알았습니다 . “ 주님이시여 , 주님이시여 , 내 어머니의 영혼을 받아주세요 . 제가 주님을 온전히 봉사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떠난 후에 저가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는지 주께서 아시겠습니다 . 주여 , 모든 성도들과 같이 영원한 복락 자리에 받아 주옵소서 . 아멘 .”

시메온은 어느덧 60 노인이 되었습니다 . 그때야 그는 성신에게 이끌리어 세상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시고 부끄러움을 무릅쓰시었는데 , 그리고 죄인들의 구원 얻기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시었는데 하는 이 두 생각이 불같이 마음에 끓어 동하자 저는 더 오래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 주여 , 나는 바칩니다 . 죽든지 살든지 나는 모릅니다 . 다만 당신이 받으신 그 영광의 욕과 수치를 저도 받게 해주세요 . 이제야 골고다는 내 앞에 가까이 온 줄을 압니다 .” 시메온은 요한과 작별하였습니다 .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 이제는 예전에 예루살렘의 거리를 돌아다니던 시메온과는 아주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 이제야 과연 성자요 , 주의 제자요 ,

 전도자라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시메온은 예수님께서 욕을 받으시던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 십자가 형틀을 지시고 운명하시던 그 곳까지 가서 엎 드렸습니다 . 그리고 거기서 사흘 동안을 꼼짝 하지 않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 미친 놈이라고 욕을 받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마침내 세상을 떠나시던 그 형상을 묵상하면서 시메온은 그곳을 떠나서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 나왔습니다 . 거리를 걷는 시메온은 말이 없으나 부허 ( 浮虛 ) 하고 사악한 인간들 에게 큰 전도가 되었습니다.

저가 에메스라는 동리로 들어갈 때에 미친 사람과 같이 죽은 개를 새끼로 매어 끌고 들어갔습니다 . 이 꼴을 보는 아이들은 “ 미친 성자 , 저 미치광이 봐라 ” 라고 소리를 치면서 모여듭니다 . 돌을 던집니다 . 흙을 끼얹습니다 . 새끼 끈으로 때립니다 . 그래도 시메온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인자하게 그들을 대접하였습니다 .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면서 60 이나 난 영감이 아이들과 장난을 합니다 . 길옆에 펄썩 주저 앉아서 아이들과 정신 없이 얘기를 합니다 . 길로 지나가다가는 창을 열고 내다보는 사람에게까지 겸손하게 인사를 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얘기합니다 . 하는 일을 보면 아무래도 상식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다 . 이렇게 성시메온은 이 세상의 치욕을 얻으려는 생각은 세상 사람이 명예를 얻으려는 열심보다도 더 열렬하였습니다 . 성시메온은 보통 전도인들이 들어가 보지 못한 깊은 벽촌에까지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죄악을 회개해야 될 것 , 주의 이름으로 선을 행해야 될 것을 열심으로 얘기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 시메온을 미친 사람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그의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 야 , 그거 참 성자다 ! 그는 참 사람이 아니라 신 ( 神 ) 이로구나 !”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게 되었습니다 . 에메스 시민은 난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 그러나 시메온의 그 거룩한 언행에 대개는 다 감화를 받았습니다 . 그리고 또 시메온은 여러 가지 기적도 많이 행하였습니다 . 마귀 들린 사람과 그 외 여러 병자를 많이 고치고 어떤 때에는 이글이글 타는 숯불덩이를 손에 들고 지옥을 설명한 일도 있었습니다 . 사람의 비밀을 알아 내기도 하고 적은 식물을 가지고 많게 만든 일도 있었습니다 .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제야 과연 범인 ( 凡人 ) 이 아닌 것을 알고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 성시메온은 밤에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기도하였고 사흘 나흘 금식하고 기도하는 일은 예사로 알고 했습니다 . 어떤 때 안디옥을 지나가다가 그곳 공회당에 들어가서 그 수많은 기둥들을 두드리면서 사람에게 말하듯이 “ 너는 가만 있거라 ” 하기도 하고 어떤 기둥을 안고는 “ 너는 넘어질 것이다 ” “ 너는 꺾어질 것이다 ” “ 너는 쓰러질 것이다 ” 하고는 돌아갔습니다 . 며칠이 지나 그곳에는 큰 지진이 터져서 공회당도 물론 쓰러졌습니다 . 성시메온이 말한 대로 어떤 기둥은 쓰러지고 어떤 기둥은 꺾어지고 했더랍니다.

성시메온은 자기의 최후가 가까운 것을 깨닫습니다 . 그래서 평시에 못 잊어 하는 요한을 찾아가서 “ 형제여 , 나는 이제 주님에게로 갈 기약이 가까운 줄 압니다 ” 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였습니다 . 얼마 있다가 거기서 떠나오는 길에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들리기를 “ 너는 네 면류관 하나뿐 아니라 네가 주 앞으로 인도한 사람의 수효만큼 많은 면류관을 주시려고 주께서 너를 부르신다 ” 하는 것이었습니다 . 시메온은 자기가 몸담아 있던 곳에서 성도들에게 자기의 생활의 은밀한 것까지 다 설파하고 또 최후로 빈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원수까지 사랑해야 된다고 누누이 설명한 후 “ 앞으로 이틀 동안은 나 있는 곳을 찾아오지 마시오 . 형제들이여 !” 하고 부탁을 해두었습니다.

이틀이 지났습니다 . 시메온이 거처하는 곳을 가보니 성시메온은 칡덤불 밑에 고요히 누워 있었습니다 . 그의 영혼은 벌써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천군 천사에게 호위되어 올라간 것입니다 . 촌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 어쨌든 미치광이로군 . 죽음도 미치광이 죽음을 했어 !”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 장례도 보통 사람과 같이 못 되었습니다 . 몇몇 성도의 손으로 겨우 시체만이 묘지로 운반되었습니다 .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내려가지고 무덤으로 옮길 때의 생각이 새로워집니다 . 몇몇 성도가 쓸쓸하게 무덤으로 모시어갔던 것 입니다 . 만민의 구주의 최후는 이렇게도 쓸쓸하였답니다 . 시메온은 어떻게 든지 주님께서 받으신 욕과 수치를 받기가 평생에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 그런데 묘지로 운반하는 도중 이상한 것은 어디서인지 장엄하고 또 거룩한 찬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수 천명이 모여서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보다 더 굉장하였습니다 . 에메스 시민들이 이 신기한 기적을 보고 성시메온이 세상에 있을 때의 그 독특한 생활 또 그 모든 기사와 이적을 다시금 생각하였습니다 .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아드님으로 광인 중에도 광인처럼 세인에게 욕을 받으시고 죄인 중에도 죄인처럼 수치를 받으시는 지경까지 내려가셔서 모든 죄악을 극복하시고 그 가운데 신음하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련한 최후를 마치신 예수님을 그들은 다시 새 마음으로 생각할 수가 있었습니다 . 그의 죽음까지도 힘있는 전도가 되었습니다 .

 

 

 

성데오도리쿠스(St. Theodoric)

 

성데오도리쿠스는 지금으로부터 1470 여 년 전에 저 불란서 렌스라고 하는 농촌 어느 농부의 집에 태어났습니다 . 그가 자랄 때에 좋지 않은 동무들과만 사귀게 되어 그 어머니는 매우 걱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 그러는 한편 성경과 다른 좋은 책을 가지고 데오도리쿠스를 열심으로 가르치셨습니다 . 데오도리쿠스가 자라서 씩씩한 청년이 되니 그 부모는 결혼시키고 싶은 생각이 버쩍 났습니다 . 그래서 데오도리쿠스에게 어서 결혼해야 되겠다고 몇 번이나 권해보았으나 데오도리쿠스는 끝내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만 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든지 결혼하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만 몸을 바쳐 일생을 희생 하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강경한 뜻을 거절할 길이 없어 마침내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데오도리쿠스의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하루는 신부 ( 新婦 ) 를 보고 “ 나는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동남 ( 童男 ) 이 되려고 합니다 ” 하는 뜻을 말했습니다 . 그때에 신부는 ‘ 그런 마음이면 왜 결혼하기로 했소 ?’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도 착실한 신자인지라 ‘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한다 ’ 는 말에는 도리어 감동됨이 많았습니다 . 바로 데오도리쿠스는 신부 ( 神父 ) 를 찾아보고 자기의 진정을 호소했습니다 . 데오도리쿠스를 심히 사랑하는 마음인지라 신부는 감격하여 그렇게 주님을 위하여 몸을 바치겠다니 이로 인하여 큰 상급을 받을 것이다 . 그러면 신부 (新 婦 ) 와 상의해서 허락하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데오도리쿠스는 침중한 생각으로 신부 ( 新婦 ) 에게 다시 왔습니다 . 그녀도 주님의 감동함을 입어 쾌히 허락하고 자기도 동정 ( 童貞 ) 을 지키면서 주께 봉사하기로 결심하 였습니다 . 이때에 데오도리쿠스의 만족해 하던 정지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두 사람은 결혼하고 순결한 동남동녀 ( 童男童女 ) 로 주를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 결혼을 하고 이와 같이 동남동녀로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예외의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 이것이야말로 거짓말 같은 참말입니다 . 신의 역사가 아니고는 도무지 되지 못할 일입니 다 . 이때에 레미쪼라고 하는 이가 렌스성 ( 城 ) 의 신부 ( 神父 ) 로 왔습니다 . 데오도리쿠스는 곧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 일찍부터 데오도리쿠스에 대해서 많이 듣고 있었던 터이라 레미쪼도 특별히 데오도리쿠스를 사랑했습니다 . 그리고 친히 그를 가르치며 주의 이름으로 덕을 쌓도록 지도해 주었습 니다 . 거기서 데오도리쿠스는 열심으로 공부하며 덕을 쌓는 까닭으로 얼마 아니 되어 사제 ( 司祭 ) 의 성직을 받았습니다 . 데오도리쿠스는 자기가 선 ( 善 ) 을 한다고 해도 , 주를 생각한다고 해도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 어떻게 좀더 고요한 곳을 얻어 진정으로 참회를 하고 성신의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감히 주님의 일을 한다고 나설 수가 없는 것을 아프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산 험한 골짜기로 들어가서 1 년 동안을 기도와 참회와 성경공부로 날을 보냈습니다 . 거기서 신령한 눈으로 주님의 신기한 형상을 보고 주의 음성을 친히 듣게 될 때에 다시금 가슴에서는 진정할 수 없는 불길이 타오름을 깨달았습니다 . 그리하여 그는 다시 세상으로 내려 왔습니다 . 방방 곡곡에 사람을 찾아 다니면서 불쌍한 이를 도와주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 그러는 한편 자기의 부모와 아내의 부모에게 성스러운 생활을 하도록 많이 애를 썼습니다 . 그래서 마침내 그의 아버지와 장인이 다 데오도리쿠스의 산막에 와서 성자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 그때부터는 데오도리쿠스의 성격을 흠모하여 각처에서 찾아 오는 사람이 많게 되었습니다 . 데오도리쿠스는 기적도 많이 행하였습니다 . 한 가지 사실을 들자면 그 당시 모든 의사들이 뒤통수를 치고 돌아가게 되었던 불란서 왕의 안질을 고쳐 놓은 일입니다 . 그 왕의 아들이 죽었던 것을 살려 놓았습니다 . 이것을 본 국왕과 왕후와 모든 신하들이 얼마나 놀랐으며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했겠습니까. 모든 백성이 다 영광을 주께 돌렸습니다 . 성데오도리쿠스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침식을 잊어버리고 동분서주하다가 78 세 에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편주 : 이용도 목사는 일생 동안 시메온처럼 순성 ( 純聖 ), 순영 ( 純靈 ) 으로만 살면서 그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절실히 원하였음.

 

 

 

< 제 3 부 : 어린이의 영양 >

 

 

 

제 3 장

위인이야기

 

역사상 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 , 모든 것이 다 보통 사람보다는 엉뚱하고 다릅니다 . 이제부터 나는 여러 어린 동무들과 함께 위인의 생각과 그 말과 그 행실을 얘기하여 좋은 인격을 기르는 데 도움이 있게 하고자 하여 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미국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죽기까지 일하겠습니다 .”

미국의 켄터키주 노룬 강변에 토막나무로 꾸며 놓은 오막살이집 한 채가 있었으니 이것이 곧 미국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자란 곳이었다 . 그의 아버지는 토마스 , 어머니는 낸시라고 하였으니 둘 다 하나님을 독실히 믿는 신자였다 . 본래가 가난한 농부의 집안이라 가세는 극빈하였으나 만인이 부러워할만한 평화로운 가정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67 년 전 , 곧 주후 1808 년 2 월 12 일에 이 오막살이에서 전에 없던 아기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으니 이것이 곧 아브라함 링컨이 세상에 나오는 첫 소리였다 . 아브라함 링컨은 7~8 세 될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땅도 파고 나무도 하고 김도 메고 하였다 . 그리고 틈 있는 대로 어머니 앞에서 성경 가운데 있는 유명한 인물들의 얘기를 듣기도 하고 또는 불탄 재와 흙 위에 글씨 쓰기도 연습하였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 낸시가 이렇게 물었다 “ 너는 크면 무엇이 될 테냐 ?” 아브라함 링컨은 생각하여 두었던 것처럼 얼른 “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죽기까지 일하겠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 이 어린 아들의 현명하고도 의미 깊은 대답을 듣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만족한 웃음의 빛이 가득하였고 그 눈에는 감탄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에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 “ 오냐 , 그 결심을 잊지 말아라 . 나는 네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큰 부자가 되는 것보다 항상 성경 한 권만을 손에서 놓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 사람은 논밭이나 금전이 많다고 위대한 것이 아니다 . 가령 태산같이 재물을 쌓아 놓았다고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이 썩었다고 하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의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 어떠한 어려운 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의 할 일을 다하는 사람이 과연 큰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아브라함 링컨이 열 살 때에 어머니를 여의였으나 그 어머니의 이 교훈은 죽기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때 링컨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의 사적을 알고 싶어서 어떤 사람에게 가서 ‘ 워싱턴전 ( 傳 )’ 을 빌려다 읽기를 시작하였다 . 하루 밤은 비가 오기 시작하여 뚫어진 지붕과 구멍난 문틈으로 비가 새고 들이쳐서 그 책을 읽는 중에 책이 거의 다 적시어 버리고 말았다 . 그래서 그는 대단히 민망하여 책 주인에게로 갔다 . “ 이 책을 이렇게 적셔 못쓰게 되었으나 책값을 물어드릴 힘이 없으니 이 책값이 다 될 때까지 저를 일꾼으로 부려 주십시오 ” 하고 간절히 빌었답니다 .

아브라함 링컨은 차차 커갈수록 뱃사공이 되었다가 상인이 되었다가 우체국 배달부로 국장까지 되고 스물다섯 살 때에는 일리노이 주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 그 동안에 법률을 자습해서 변호사가 되어 무죄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부당한 법률과 부정한 법관과 싸움을 계속하여 불쌍한 사람들을 힘껏 도와 주었다.

 

때는 왔다 . 아브라함 링컨이 정의로써 백성을 다스릴 때가 왔다 . 1860 년 미국에서 새로운 대통령을 뽑을 때에 만민은 다투어 가며 아브라함 링컨을 천거하였다 . 그래서 결국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뽑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인류를 정의로 인도하려던 근본 뜻을 실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미국 사람들은 대단히 무도한 사람들이었다 . 왜냐하면 흑인들을 잡아다가 개 , 돼지나 소 , 말처럼 장에 내다가 팔아먹는 일이 있었다 . 흑인들을 사다가 종으로 부리는데 짐승과 같이 부렸다 . 그들이 아이를 낳으면 그것은 새끼 송아지를 팔아 먹는 것처럼 그 귀여운 아이를 팔아먹기도 하였으니 그 때의 미국 사람들이 얼마나 고약하였는지 알 수가 있다.

아브라함 링컨은 이런 무도한 일을 볼 때에 혼자서 울면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을 부르짖었을 것이다 . “ 하나님이시여 , 어찌하면 저 불쌍한 흑노 (黑 奴 ) 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께서 저 무도한 사람들과 불쌍한 흑인들을 보실 때에 심히 민망해 하실 줄 아오매 저는 죽기까지 이 몸을 바쳐 저 흑인들을 놓아주려고 하오니 주여 , 도와주옵소서 .”

아브라함 링컨은 이쪽저쪽에서 공박을 받아가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흑인을 놓아주려고 연설을 하며 미국에 큰 운동을 일으키었으니 이것이 흑노해방운동이었다 . 이때에 북방인들은 흑인해방을 찬성하였으나 남방인들은 반대하였다 . 그래서 마침내 남북전쟁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

“ 나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인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섰사오니 하나님의 뜻이거든 저를 도와주옵소서 ” 하고 기도하였다 . 한번은 풀렌이란 곳에서 북군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링컨은 태연하게 곁에 있는 하관들에게 말하였다 . “ 나는 내 있는 힘을 다했다 . 나는 하나님의 지도하심을 빌었다 . 이제는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밖에 없으니 별로 걱정할 것은 없는 것이다 ” 고 하였다 .

마침내 정의의 싸움은 승리를 얻고야 말았다 . 1863 년 4 월에 이르러 비로서 “ 미국 안에서는 어떠한 곳에서든지 흑노를 부리거나 매매하는 일을 엄금함 ” 이란 법령을 만들어 미국 헌법에 넣고 전국에 반포하게 되었다 .

1865 년 4 월 14 일 어떤 악한에게 암살당할 때까지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의 정의와 인도를 위하여 힘껏 싸운 위인 중의 위인이요 , 용사 중의 용사이다 .

 

로마 대장 레굴루스(Marcus Atilius Regulus)

“ 로마의 명예를 위하여 나는 다시 카르타고로 갈 것이다 .”

로마와 카르타고 두 나라는 여러 해를 두고 전쟁을 계속하였다 . 첫 번 전쟁에 로마의 대장 레굴루스는 카르타고 병정에게 사로잡혀 5 년이라는 긴 세월에 하루도 햇빛을 못 보는 옥에 갇히게 되었다 . 5 년 동안을 계속해 싸운 후 카르타고의 세력은 쇠하게 되었다 . 그래서 카르타고의 장관들은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여 결국 사자를 보내기로 하였다 . 그때에 레굴루스도 그 사자와 같이 로마로 보내기로 하였으니 이는 다름아닌 로마의 유명한 대장인고로 그가 돌아가서 로마 백성에게 화친하고 강화조약을 맺으라고 권고할 것 같으면 로마에서는 곧 승인할 줄 알고 그리한 것이다. 그러나 레굴루스를 로마로 돌려 보낼 때에 카르타고의 장관들은 레굴루스로 하여금 ‘ 만일 로마가 강화조약을 승인하지 않을 때에는 다시 카르타고 감옥으로 돌아올 것이다 ’ 하는 맹세를 하게 하였다 . 그때 레굴루스는 대장다운 음성으로 “ 로마가 강화조약을 승인하지 않으면 나는 카르타고 감옥으로 돌아오겠다 ” 하고 확실히 약속을 하고 사자와 같이 로마로 돌아갔다 . 레굴루스 대장이 5 년이란 긴 세월을 캄캄한 옥중에서 지냈으니 물론 몸도 매우 쇠약해졌을 것이다 . 따라서 오랫동안 고국강산과 사랑하는 처자를 못 보았으니 얼마나 그리웠겠으며 또 그 처자들은 얼마나 대장을 기다렸을 것인가 . 이것을 생각하면 곧 로마로 하여금 강화조약을 맺게 하고 자기는 자유의 몸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 이제야말로 자기는 다시 살아난 몸이 아닌가.

그러나 레굴루스는 과연 위인이라 . 자기 한 몸의 유익보다도 로마 전국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였다 . 자기 일신의 자유를 얻고자 할 것 같으면 로마는 불리한 강화조약을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기나긴 세월의 싸움에서 이제야 겨우 적군의 세력이 꺾이어 가는 판인데 한 번만 더 칼을 들면 적군이 멸망하고 말 이때를 당해서 비릿비릿하게 화친을 해 ? 그리고 또 강화조약을 승인해 주어 ? 이거야말로 참 로마의 수치 가 될 것이 아닌가 ?’ 이렇게 생각한 레굴루스는 로마 시민에게 어떻게 말할 것을 작정하고 로마성 ( 城 ) 으로 카르타고의 사자와 같이 들어갔다 . 카르 타고의 사자와 성안으로 들어갈 때에 레굴루스는 로마의 장군을 만나야겠다고 하면서 병영으로 급히 갔다.

“ 아 , 레굴루스 대장 !” 하고 놀라면서 달려 나온 사람은 5 년 전에 자기와 동관 ( 同官 ) 이었던 오늘의 로마 대장이었다 .

“ 나는 오늘이야 돌아왔소 ” 하고 레굴루스는 대답하였다 . 그리고 말을 이어 “ 그러나 나는 지금 곧 다시 카르타고의 감옥으로 가서 일생을 마치고 말 것이오 . 나의 사랑하는 로마성을 대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 것이오.”

“ 그게 무슨 말씀이오 ? 레굴루스 대장 , 어째서 다시 카르타고로 간단 말씀인가요 ?” 하고 그 장군은 놀라 물었다 .

레굴루스는 열심으로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 “ 장군 내 말을 꼭 믿어 주시오 . 카르타고 군 ( 軍 ) 은 이제 한창 쇠잔해 들어가는 판이오 . 그래서 그네들은 묘하게도 이제 와서 우리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자고 온 것이오 . 그러나 나는 암만 생각해도 이 강화조약은 우리 로마에 크게 불리할 것이오 . 또 지금 강화를 한다는 것은 우리 로마의 큰 수치라고 할 수밖에 없소 . 그런즉 내 말을 믿고 카르타고의 사자가 가져 온 강화조약을 거절하고 전쟁을 계속 하겠다고 하시오.”

“ 그러면 레굴루스 대장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

“ 나는 이 강화가 되지 않으면 다시 카르타고 감옥으로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왔습니다.”

“ 아 , 그러면 다시 카르타고의 감옥으로 가야 된단 말씀입니까 ?” 하고 장군은 레굴루스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 “ 레굴루스 대장의 말씀대로 우리 로마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는 이길 때까지 싸우겠습 니다 . 그러나 레굴루스 대장 , 대장은 이제 자유의 몸이라 다시 카르타고로 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 나는 올 때에 약속을 하고 왔소 .” 

“ 그러면 꼭 다시 가신단 말씀입니까 ?”

“ 가고 말고 .” 레굴루스 대장의 이 말에는 누구도 막지 못할 만큼 굳은 결심이 있음이 드려다 보였다.

“ 나 레굴루스는 로마 사람 중에 하나요 . 로마 사람이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하여 맹세를 어겼다고 하면 이는 로마 전체의 치욕이 되는 것이요 . 그러므로 나는 로마의 명예를 위하여 카르타고로 다시 가는 것이요 ” 하고는 장군과 작별하는 손을 들었다.

굳게 결심한 레굴루스는 사랑하는 처자도 만나지 않고 그 길로 카르타고로 향하고 말았다 . 카르타고의 장군들은 레굴루스가 강화를 권면하기는커녕 도리어 끝까지 싸우라고 권면하고 돌아온 줄을 알고 크게 분개해서 레굴루스를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 레굴루스 대장은 자기의 생명을 바쳐 ‘ 로마 사람은 자기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는다 ’ 하는 말을 증명한 것이었다 .

 

제임스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미국의 유명한 대통령 중에 한 사람인 제임스 가필드는 어려서부터 엉뚱한 짓을 해서 사람들을 많이 놀라게 했습니다.

‘ 무엇이든지 남에게 지면 안 된다 ’ 는 말은 가필드의 가슴 속에서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 ‘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나도 능히 할 수가 있을 것이다 .’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 그런고로 그의 동무들은 그를 ‘ 지기 싫어하는 아이 ’ 라고 불렀습니다 . 하루는 그의 동무가 닭의 둥우리에서 닭의 알 한 개를 꺼내 가지고 제임스에게 보이면서 이런 말로 희롱을 했습니다.

“ 야 제임스야 , 너 이 달걀을 통으로 먹겠니 ?”

“ 어림없다 . 나같이 조그만 아이가 어떻게 그런 달걀을 통으로 먹는단 말이냐?”

“ 그래 , 너 통으로 못 먹는단 말이지 .” 그는 입을 비죽 내밀면서 계속해서 말하기를 “ 이까짓 것 누구나 다 먹는데 . 너보다 더 어린 아이라도 이까짓 것은 다 통으로 먹는데 너 이까짓 것을 못 먹어.”

이 소리를 들은 제임스는 급한 소리로 “ 그래 ? 그럼 그까짓 거 나도 통으로 먹을 테다 ” 하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

“ 옜다 . 그럼 먹어 봐라 ” 하고 그 동무는 달걀을 내어 주었습니다 . 제임스가 이를 받아 손바닥 위에 놓고 한참을 들여다 보더니 두말도 안하고 냅다 뺑소니를 쳤습니다.

이 꼴을 본 그 동무는 “ 저 못난이 봐라 . 저 놈이 못 먹겠으니까 도망 가네 ”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놀려대고 있었습니다 .

조금 있다가 저편에서 헐떡이며 숨이 턱에 닿아 뛰어오는 아이가 있었으니 그는 분명히 제임스였습니다 . 손에 빵 한 조각을 들고 달려온 제임스는 “ 자 , 그까짓 것 못 먹어 ? 먹을게 봐라 ” 하면서 달걀을 통으로 입에 넣고 와작와작 깨물어 먹으면서 이어 빵을 입에 넣고 함께 씹어먹고 있었습니다. 그 동무는 하도 엄청나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고 섰는데 “ 자 , 이젠 통으로 다 먹었다 . 그까짓 걸 못 먹어 ” 하고 뽐내더랍니다 .

 

어떤 날은 학교 교실에서 옆에 있는 아이와 장난을 하다가 선생님에게 들켰습니다 . 화가 난 그 선생은 “ 제임스야 , 헨리야 , 너희 둘은 다른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니까 집으로 가라 ” 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 두 아이는 무안해서 울상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로 서있었습니다 . 그러더니 제임스는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얼른 교실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선생과 학생들은 저놈이 아마 정말 가나보다 하고 그가 나간 문을 일제히 바라보았습니다 . 선생이 그 다음 시간에 교실에 들어가니 제임스는 여전히 씩씩한 얼굴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 선생은 다시 눈을 부릅뜨고 “ 너 가라고 했는데 웬일이냐 ” 하고 물었습니다 .

제임스는 쾌활히 일어서면서 “ 네 , 선생님 , 갔다 왔습니다 .” 

“ 갔다 오다니 ?” 하고 선생은 다시 물었습니다 .

“ 집에 가서 있으라고 하시지는 않았으니까 , 아까 그 시간에 갔다가 집문 앞에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 이 소리를 들은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제임 스의 장쾌한 기상과 무엇에든지 굴하지 않는 그 성미를 속으로 퍽이나 칭찬하였습니다.

 

제임스의 형이 21 세 때에 제임스는 겨우 12 세이었으나 형과 어머니를 도와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 그때에 집 한 채를 짓게 되어 대목을 청해서 일을 시켰는데 제임스는 열심으로 대목에게 “ 내가 널판을 밀어 줄 테니 삯을 얼마나 줄 수 있는가 ” 라고 묻더랍니다 . 대목은 웃으면서 한 장을 미는데 1 전씩 준다고 했습니다 . 제임스가 달라붙어서 대패로 널판을 미는데 하루에 100 장을 밀어서 대목과 여러 사람을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 그래서 일원을 벌어서 어머니께 드리면서 기뻐할 때에 그 어머니는 제임스의 등을 두드리면서 “ 아 , 내 아들아 !” 하고 눈물을 지우시더랍니다 .

 

 

 

소격란 (Scotland) 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 (John Knox)

 

존 낙스는 주후 1505 년에 소격란의 해딩턴 지경에서 난 사람으로 열렬한 애국자요 , 또 무서운 종교개혁이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 그가 신교의 전도인 위셜트 (George Wishart) 의 감화를 받아 신교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 그런고로 구교 신자들에게 무서운 핍박을 당하는 중 메리 여왕에게까지 종종 핍박을 받았습니다 . 그러나 그는 결코 저들에게 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 

낙스는 부정하고 악한 메리 여왕을 꾸짖으며 조국과 하나님 앞에서 바른 마음을 가지라고 굳세게 권하였습니다 . 낙스는 메리 여왕을 전도하기 위하여 늘 궁중을 찾아가서 메리 여왕의 부정하고 잔악한 죄를 책망하고 회개하라고 천둥같이 외쳤습니다 . 이것을 보아도 낙스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이며 또 그때에 있어서 얼마나 권위 있는 사람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메리 여왕이 부당한 혼인을 했을 때에도 낙스는 궁중에 들어가서 메리 여왕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온당치 못함을 말하였다고 합니다 . 그리고 마지막에는 “ 소격란의 행복을 위하여 나는 뜨거운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 다 ” 하고 비장한 소리를 외쳤습니다 . 악한 메리 여왕으로서도 낙스의 입을 재갈 물리지 못하고 도리어 떨면서라도 그의 설교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 낙스는 항상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거기에 비추어 보아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밝히 힘있게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낙스는 소격란을 사랑하는 불 같은 마음을 참지 못하여 늘 하나님에게 부르짖었습니다 . 여왕 앞에서도 주먹을 쥐고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 그가 울면서 목멘 소리로 “ 오 하나님이시여 , 나에게 이 소격란을 주옵소서 .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죽음을 주옵소서 ” 하고 기도한 그 소리는 소격란 사람들의 가슴을 크게 찔렀습니다 . 지금까지도 그의 기도 소리는 소격란 사람들의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람을 개만큼도 여기지 않는 여왕 메리도 낙스의 앞에서는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 그래서 한번은 그의 시녀가 여왕에게 물었습니다 . “ 왕께서는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하여 낙스의 앞에서는 머리를 들지 못하십니까 ?” 여왕은 “ 나는 낙스의 얼굴이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그의 기도는 내가 머리를 들고 들을 수가 없다 . 그가 기도할 때는 내 가슴이 떨리고 무서워지는 까닭이다 ” 하고 대답하더랍니다.

낙스의 역사 중에는 굉장한 일화가 산같이 있지만 일일이 다 말하자니 어디 지면이 허락합니까 . 그래 할 수 없이 길게 못하거니와 마지막으로 그가 별세를 하였을 때에 그의 제자 파란틴이 낙스에 대하여 기록한 글 가운데 한 절을 옮겨 쓰고 끝맺으려 합니다.

“ 하나님의 사람 , 소격란의 벗 , 교회의 자랑 , 신덕 ( 神德 ) 의 거울 , 참 전도자 , 의인의 보호자 , 모범자 , 죄와 악을 치는데 대담한 자 , 이렇게 위대하면 서도 일절 사람의 사랑을 받으려고 원하지 않는 사람 …… . 이 위대한 사람 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기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A. Edison)

 

미국 사람으로 전화기 , 전신기 , 축음기 , 전등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밖에 수 없는 전기 기계를 발명하여 발명의 대왕이라는 이름을 듣는 이가 에디슨이 올시다 . 1892 년 그가 46 세 되었을 때에 이미 특허를 맡은 기계가 , 놀라지 마시오 , 720 가지요 , 특허 청원을 제출해 놓은 것이 150 가지가 더 되었다고 합니다 . 그러니까 그 후에 그가 발명한 기계의 총수는 몇 천 가지가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에디슨이 12 살 때에 돈을 벌고 싶은 생각과 공부를 할 생각으로 신문팔이가 되었습니다 . 신문을 팔면 돈이 생기고 신문을 보면 공부가 되니까요 . 그는 늘 차를 타고 다니면서 신문을 팔았는데 , 자기가 다 보아 아는 사실이니까 열심으로 이야기를 해가면서 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무척 많이 팔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차 가운데서 한 칸을 얻어 가지고 자기의 신문을 만들었는데 이 때는 마침 미국에 남북전쟁이 일어난 때라 여러 사람들은 그 사실과 각 정거장에 상황을 알고 싶어하는 줄을 그는 알았습니다 . 그래서 정거장마다 사실을 탐문하고 또 손님들에게서 탐문을 해서 자기가 글을 만들고 또 제 손으로 인쇄를 해서 손님들에게 팔았는데 여간 잘 팔리는 게 아니더랍니다. 이 신문이 철도 신문으로는 미국에서 처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큰 병 , 작은 병 , 모든 약병을 벌려 놓고 접시 , 주발 , 유리잔을 쌓아놓고는 이렇게 저렇게 실험을 하는데 손님들이 다 자는 밤 중 기차 바퀴 굴러 가는 소리만이 덜커덕덜커덕 거릴 때에 혼자 자지 않고 열심으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 그런 중 한번은 유산 ( 硫酸 ) 병이 떨어져 깨지는 바람에 그 몹쓸 냄새가 차 안에 쫙 퍼졌습니다 . 이상한 냄새에 놀란 차장은 이 칸 저 칸 돌아다니다가 에디슨이 자지도 않고 서서 무엇을 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 그리고 유산병을 깨뜨린 것도 보았습니다.

무정한 차장은 화가 나서 “ 에잇 , 망할 자식 ” 하고 달려들었을 때에 에디슨의 뺨에는 철퇴 같은 주먹의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 얼마나 가엾은 일입니까 . 그때부터 이 소년 화학자 에디슨의 왼편 귀는 멀고 말았습니다 . 그래도 에디슨은 한탄하지도 않고 그냥 약병만 보고 있다가 “ 옳지 , 옳지 ” 하면서 다시 약병을 들고 쏟았다 부었다 하더랍니다 . 이 꼴을 보고 차장은 더 화가 나서 “ 저런 , 제기 저 자식이 미쳤나 , 나가라 . 이 자식아 , 차 안에서 못쓰겠다 ” 하면서 내몰았습니다 . 그 후에 에디슨은 쫓겨났습니다 . 그래도 또 실험실을 차려 놓고 이웃 신문팔이 아이의 집에까지 전선을 매놓고 밤낮 전 신술을 연구하였습니다.

 

에디슨은 대단히 검소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 그가 철도회사의 기사로 있을 때에 다른 기사들은 월급만 받으면 벌써 기생집 , 술집으로 다니면서 돈을 물 쓰듯 하는데 에디슨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 얼마나 정직하고 검소하며 의리가 있는 사람인지 그 불량한 다른 기사도 돈을 좀 아낄 생각이 날 때에는 에디슨에게 맡겨두었습니다 . 그래서 에디슨은 여러 사람의 돈을 맡은 금고가 되었더랍니다.

한번은 자기에게 돈을 맡긴 기사가 술 먹고 기생 집에 가고 해서 돈을 다 써버리고 도리어 빚을 지고 와서 에디슨에게 그 맡긴 돈올 달라고 했습니다 . 에디슨은 “ 그런 짓하는 데에는 네 돈도 네 맘대로 못쓰는 법이다 . 못 주겠으니 그런 줄 알아라 ” 하고 딱 잡아 떼었습니다 . “ 내 돈 내가 달라는 데 이 사람이 근데 장난인가 ” 하면서 그는 얼굴이 시퍼래졌습니다 . 그러나 에디슨은 “ 장난이 아니라 진정이다 ” 하고는 제 일만 하였습니다 .

이것을 본 그 자는 화가 치밀어 주먹을 쥐고 달려들어 막 두들겨댔습니다. “ 이 멀쩡한 도둑놈 같으니 왜 남의 돈을 안주니 ” 그러나 에디슨은 태연한 낯으로 “ 안 준다 . 안 줘 . 네 돈이라도 안 준다 . 네 술값 갚아 달라고 내게 맡겼냐 , 다른 요긴한데 쓰겠다고 맡겼지 ” 하고 그 술값으로는 내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 이외에도 에디슨의 일화는 얼마든지 있지만 다음에 기회 있으면 더 계속해서 애기하려고 합니다.

 



 

< 제 3 부 : 어린이의 영양 >

 

 

 

제 4 장

훈 화 (7 월 10일)

 

 

 

안드로클레스 (Androcles) 와 사자

 

안드로클레스는 로마 사람에게 잡혀 갔던 불쌍한 종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 니다 . 사람을 짐승보다 더 천하게 여기며 무정하게 채찍질을 하여 쇠몽둥이로 때리면서 부려먹는 그 로마 주인에게는 더 있을 수가 없게 될 때에 안드 로클레스는 어느 날 밤 주인의 잠든 틈을 타서 잠근 문을 부수고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어디론지 방향도 없이 그저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 나중에는 배가 고프고 맥이 탁 풀어져서 더 뛸래야 뛸 수가 없 게 되었습니다 . 무엇이든지 좀 얻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안드로클레스는 이리저리 나무 열매를 찾아 다녔습니다 . 이것저것을 막 먹은 안드로클레스 는 좀 자려고 잠자리를 찾았습니다.

 마침내 큰 굴을 찾은 안드로클레스는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 들여다 보니 넓고 좋은 굴이었습니다 . ‘ 이곳이 내가 편히 쉴 곳이구나 ’ 하면서 굴에 들어 갔습니다.

한데 빈 굴인 줄 알았던 이 굴이 실상은 빈 굴이 아니라 사자의 굴이었습니 다 . 마침내 큰 사자가 기어 나오기 시작하였으니 안드로클레스의 갈 곳이 어디입니까 ? 올 데 갈 데 없는 안드로클레스는 벌써 혼은 다 나가고 등신만 멀거니 앉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들 줄 알았던 그 사자는 고운 눈으로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안드로클레스의 옆에 와 앉는 것이었습니다 . 그리고는 가늘고도 슬픈 소리를 내면서 앞발을 들어 안드로클레스에게 내놓아 보였습니다 . 사자의 온유한 태도에 겨우 정신을 차린 안드로 클레스는 쳐든 사자의 발을 본즉 가없게도 커다란 가시가 발바닥 연한 틈에 박혀 있었습니다 . 안드로클레스는 얼른 손을 내밀어 그 가시를 뽑아내고 자기 옷을 찢어서 상하고 퉁퉁 부은 그 발을 처매주었습니다 . 이때 사자의 즐거워하는 모습은 참으로 끔찍하였습니다.

그 후 며칠이 안되어 그 발은 다 나았습니다 . 그때부터 사자는 먹을 것을 물어다가는 안드로클레스에게 주곤 하였습니다 . 그렇게 지내는 동안에 사자와 안드로클레스는 아주 정다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 그래서 한동안 안심하고 잘 지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라 안드로클레스는 그래도 또 인간이 그립게 되었습니다 . 그래서 사자에게 섭섭한 작별 인사를 한 뒤에 다시 전에 있던 촌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 아무개네 종으로서 도망하였던 안드로클레스인 줄을 안 촌 사람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안드로클레스를 결박하였습니다 . 그리고 안드로클레스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 주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고로 “ 이놈 , 너 잘 만났다 ” 하고 안드로클레스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 그러다가 돌아오는 달에 원형극장에서 열리는 사자씨름대회에 가서 사자 밥을 만들 작정으로 그대로 가두었습니다.

어느새 그 날이 왔습니다 . 로마의 황제와 그 외 여러 대신으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구름과 같이 원형극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 로마에서는 가끔 죄인을 잡아다가는 주린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굴 옆에 즉 그 극장에다 집어 넣고는 그 굴 문을 열고 사자들로 하여금 나와서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 이 끔찍한 꼴을 보는 로마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면서 장하다고 상쾌하다고 떠들어대는 것이었습니다 . 세상에는 그렇게 무도하고 끔찍한 사람의 종자도 있는 것입니다.

그날에 사자의 밥이 될 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안드로클레스가 끌려 나갔습 니다 . 원형극장에는 임금님과 각 대신 이하 수만 명의 로마 시민이 빈틈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 주인을 버리고 도망한 죄인이라고 잡혀온 안드로클레 스는 병정에게 끌리어 극장 아래층으로 들어갔습니다 . 병정들이 나간 후에 철문은 쾅 소리를 내면서 요란하게 닫혀 버렸습니다.

넓디 넓은 극장의 아래층 , 도망할래야 쥐구멍 하나 없는 곳 다만 위에서 내려다 보는 로마 사람의 눈알만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 조금 있더니 저편에 있는 문이 큰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열리기 시작합니다 . 불쌍한 로마 사람의 종 안드로클레스는 무도한 로마 사람의 앞에서 참혹하게도 사자의 밥이 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나는 억울하게도 저놈들 앞에서 죽고 마는구나 ” 하고 생각하니 이가 갈릴 뿐이었습니다 . 독이 오른 안드로클레스는 핏줄이 벌겋게 선 눈으로 자기를 내려다보는 로마 사람들을 쳐다보았습니다 . 그리고 사자굴의 문이 점점 넓게 열리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사자는 그 큰 머리를 흔들며 한 놈 , 두 놈 , 세 놈 툭툭 뛰어 나옵니다 . 나와서는 두리번두리번 먹을 것을 찾고 있습니다 . 그 중 제일 큰 놈이 있는데 그 놈이 먼저 안드로클레스를 보고는 달려옵니다 . 안드로클레스는 벌써 얼굴이 파랗게 질려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 아무리 잔악 무도한 로마 사람이라도 그 중에 인정 있는 사람은 그 끔찍한 꼴을 볼 수가 없다고 얼굴을 돌렸습니다 . 그러나 그 끔찍한 죽음을 재미있게 기다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려가던 큰 사자는 반쯤 가다가 우뚝 서서는 안드로클레스의 넋없이 쓰러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 그러더니 가벼운 걸음 으로 안드로클레스의 앞으로 와서는 두 앞 발을 꿇고 그의 앞에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 그리고 꼬리로 그를 툭툭 치면서 일어나라는 듯이 끙끙거렸습니다 . 작은 새끼 사자들은 큰 사자 앞에는 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구경꾼 처럼 바라보기만 하고 서있었습니다 . 이에 안드로클레스는 머리를 들었습니다 . 사자는 빙글빙글 그의 주위를 돌면서 날뛰었습니다 . 그리고는 안드로클 레스를 핥아주면서 연방 절을 하며 여간 정답게 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드로클레스가 정신을 차려 사자를 쳐다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뛰어 일어났습니다 . 안드로클레스는 사자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 이는 분명 전에 가시를 뽑아 주었던 얼마 동안 사랑하고 지내던 그 사자가 아닙니까! 이것을 보고 있던 로마 사람들은 각기 입을 딱 벌리고 혀를 홰홰 내저으면서 크게 놀라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 사람과 그 사자를 함께 놓아 주어라 ” 하는 명령이 황제로부터 내렸습니다 . 그러자 문이 열리더니 “ 그 사람을 데리고 나가거라 ” 하고 소 리가 들렸습니다 . 안드로클레스는 사자의 목을 안고 나갔습니다 . 안드로클레스와 사자는 같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 동물에게도 은혜를 끼치라 .” 

“ 미물도 은혜는 아느니라 .”

 

 

 

꽃주일에

 

우리가 해마다 맞는 6 월이 돌아왔습니다 . 붉은 꽃과 푸른 잎으로 장식한 이 기쁜 6 월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에게 즐겁고 유쾌한 주일 하나를 갖다 줍니 다 . 우리는 이 주일을 일컬어 꽃주일이라 합니다 . 이날은 우리 사회에 있어 가장 큰 날 중의 한 날입니다 . 해마다 이날에는 제 동산을 곱게 꾸미려고 하는 아름다운 꽃들이 나옵니다 . 자기의 기쁨으로 노래하는 온갖 새들도 나옵니다 . 너울너울 춤을 추는 나비들도 나옵니다 . 또한 이 동산을 거드는 동산지기들도 다 나옵니다 . 그래서 햇빛과 비와 이슬을 주시는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즐겁게 노래하며 또 기뻐 춤을 추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 동산을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또는 가을에 더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하여 새로운 생각과 결심을 일으키며 새로운 설계를 세우고자 하는 것입 니다.

해마다 6 월 동산에서 기쁜 새의 노래를 들으면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곱고 아름다운 만 가지 꽃을 보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마다 6 월 이날에 교회에 서 새 노래보다도 더 아름다운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실 것이며 꽃보다도 더 고운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실 것입니다.

 

아이들은 동산의 꽃과 같다고 해서 아이 주일을 꽃주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 동산을 곱게 꾸밀 동산지기가 있다고 하면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안에 있는 화초를 잘 가꾸기에 노력할 것입니다 . 왜냐하면 꽃 없는 동산에는 기쁜 새의 노래도 없고 자유스러운 나비의 춤도 없기 때문입니다 . 비 치는 햇빛과 내리는 비와 이슬이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땅에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 동산으로서 꽃이 없다고 하면 또 있는 꽃이 시들어 간다고 하면 그 동산에는 아름다움도 없고 기쁨도 없고 소망도 없는 황무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 결국 그 동산은 생명을 잃은 동산이 되고 말 것입니다 .

그런고로 동산에는 꽃이 있어야 하고 인간 사회에는 아이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도 아이가 있어야 하고 교회에서 아이가 있어야 합니다 . 꽃이 없는 동산이 쓸쓸하고 무색하고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면 아이가 없는 가정 , 아이가 없는 교회 , 아이가 없는 사회는 그보다 더 쓸쓸하고 무색한 것이 되겠습니다 . 아이가 없는 곳에서 웃음 소리를 듣기 어렵고 기쁨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 따라서 거기에는 별 소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

여러분 , 우리 한국 사회를 산뜻하게 꾸미어 화창한 6 월 동산과 같이 만들 생각은 없으십니까 ? 그리고 이 쓸쓸한 우리 사회에 진정한 기쁨의 노래가 있게 하고 자유로운 춤이 있게 하시렵니까?

물론 우리 한국인으로 이를 원치 않는 사람이 없을 줄 압니다 . 그러면 무엇보다도 먼저 동산에 꽃을 가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을 잘 가꾸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 여러분 , 웃음이 없는 가정을 보셨습니까 ? 그것은 아이가 없는 가정입니다 . 기쁜 노래가 없는 교회를 보셨습니까 ? 그곳은 아이가 없는 교회입니다 . 소망이 없는 사회를 보셨습니까 ? 그것은 아이가 없는 사회입니다.

여러분 , 꽃이 없어지거나 혹은 있던 꽃이 점점 시들어가거나 또는 기쁜 새가 자취를 감추고 나비의 자유로운 춤이 없다면 열매 맺는 가을이 와도 이 동산에만은 쓸쓸한 바람이 감돌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 이렇게 된다면 다만 가엾은 고목만이 외롭게 서있어 다가오는 북풍한설에 한숨짓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 해가 저물어 동산이 캄캄해 올 때 북방으로 돌아오는 까마귀의 까옥까옥 우는 조상 소리와 함께 그 동산의 운명의 문은 영원히 닫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 꽃이 없는 동산이나 꽃이 시드는 동산은 이러합니다 .

 

여러분 , 여러분은 이 동산의 동산지기가 되었습니다 . 그러니 여러분은 우리 한국이란 동산의 이 꽃들이 시들지 않도록 또는 이 꽃들이 마르지 않도록 북돋아 주고 물을 주며 잡초를 뽑아 잘 자라고 꽃 잘 피고 열매 잘 맺도록 힘써 가꾸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 그러면 우리는 자랄 때에 자라고 꽃 필 때에 꽃 피고 열매 맺을 때에 열매를 맺어 이 동산에 기쁨이 있게 하고 소망이 있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우리 집안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우리 아이에게 달렸고 우리나라가 잘 되고 안 되는 것도 오직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 우리 아이들이 못 되면 우리 집안이 안 되고 우리나라가 안될 것이요 . 우리 아이들이 잘 되면 우리 집안이 잘 되고 우리나라가 잘 될 것은 의심 없는 일입니다 . 오늘 우리 아이들이 되고 안 되는 것을 보아서 내일 나라의 운명을 판단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다 잘 돼야겠습니다 . 우리의 집안을 일으키고 우리나라를 빛내기 위하여는 꼭 우리 아이들이 잘 되어야 하겠습니다.

잘 되되 할아버지나 할머니보다 더 잘 되어야 하겠고 아버지나 어머니보다도 더 잘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 그리 되어야 우리 할아버지 , 할머니들이 못한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이요 ,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 하지 못한 일 을 우리들이 다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 집안의 소망은 오직 우리 아이들뿐이요 , 나라의 소망도 오직 아이들뿐입니다 .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우리 아이들이 잘 되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 부모들은 “ 너 어서 자라라 . 우리 집안은 너희에게 달렸으니 너희가 잘 되어야만 하겠다 ” 하시면서 우리 잘 되기를 바라고 서러운 살림을 꾹 참아 나가지 않습니까 ? 선생님들도 우리들 잘 되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지 않습니까 . 이렇게도 우리 집안이 우리 잘되기만 바라고 학교와 교회가 역시 우리 잘 되기를 기다리며 나라가 또한 “ 아이들아 어서 잘 되어라 . 너희가 잘 되어야만 하겠다 ” 하면서 밤낮으로 빌고 기다리고 있는데 여러분 , 이때 우리 아이들이 잘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모든 소망은 다 사라지고 말 것이 아닙니까 . 우리 집안도 더 바랄 것이 없게 될 것이고 나라도 영 틀려지고 말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 ‘ 우리가 안 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다 안되고 우리가 잘 되는 날 에는 모든 것이 다 잘 된다 ’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둡시다 . 그리고 다같이 힘껏 주먹을 부여잡고 ‘ 모든 것이 내게 달렸구나 . 내가 잘 되어야 겠다 ’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읍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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