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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_전집_④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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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11-14 23:22 조회24,7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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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 전집 ④전기

是無言 , 말 없는 것이 옳다

 

 

 

이용도 목사 전집   ④ 전기

是無言 , 말 없는 것이 옳다

 

2 판 1 쇄 발행 • 2004 년 7 월 5 일

 

지은이 • 피터스 / 변종호 

엮은이 • 변종호 

펴낸이 • 이민수

 

펴낸곳 • 장안문화

등록 • 제 6-0044 호 (1979 년 4 월 4 일 )

 

주소 •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103-19 베델하우스 403 호 

Tel • 2232-1277 / Fax • 2232-2800

 

http://www.jbook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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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89-85137-06-9 (04230) 

ISBN 89-85137-02-6 ( 세트 )

 

 

 

 

이용도 목사 전집 ④전기

是無言 , 말 없는 것이 옳다

 

 

 

 

 

장안문화

 

 

 

 

발간사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을 발간하며

 

한국교회 역사의 수많은 인물 중 가장 독특한 신앙가이며 가장 열렬한 전도자 중의 한 분이었던 이용도 목사는 33 년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커다란 신앙의 유산을 남기었습니다 . 일찍이 일제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외쳤으나 정신과 신앙의 독립이 더 시급함을 깨달았던 이용도 목사는 곧 영적인 독립운동을 벌였고 목을 찢고 가슴을 터트려 영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말씀은 그가 남긴 글을 통해서 70 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영적인 자유를 갈구하는 교인들에게 동일한 감격과 생명력을 주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변종호 목사의 필생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 변 목사는 이용도 목사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34 년 『 이용도목사서간집 』 을 처음 발간했고 이후 일기 , 저술집 , 연구논문 등을 50 여 년에 걸쳐 발간해왔고 1986 년 『 이용도목사전집 』 (10 권 ) 을 내놓았습니다 .

 

이러한 역작인 『 이용도목사전집 』 은 1993 년 장안문화사에서 쇄를 바꾸어 발간되다가 , 이용도 목사 70 주기에 즈음하여 개정판이 기획되어 , 금번 『 이 용도목사전집 』 2 판으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은 초판의 글들을 선별하여 , 서간집 , 일기 , 저술집 과 전기 , 추모집 등 전 5 권으로 구성하였습니다 . 그러면서 새로운 내용들을 보충시켰습니다 . 우선 서간집의 경우 1934 년판에만 수록되었던 편지들을 찾아서 추가시켰습니다 . 또한 이용도 목사의 친구로서 선교사였던 피터스 (Peters • 皮道秀 ) 목사가 1936 년 발표한 이용도 목사 전기 ‘Simeon, a Christian Korean Mystic’ 을 전기에 포함시켰는데 , 변종호 목사가 저술한 기존의 전기와 보완적인 내용이어서 전기가 새로운 모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에서는 내용의 정확성과 친밀성을 제고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 먼저 원본에 충실키 위해 , 서간집은 1934 년판과 1969 년판 , 일기는 1966 년판 , 저술집은 1975 년판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 본문의 한자어 중 일상적인 현대어가 있는 경우 당시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대치시켰습니다 . 이런 경우 원문과 비교가 필요할 경우에는 한자를 [ ] 안에 병기하였습니다 . 그러나 1930 년대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문장의 술부 등은 대부분 그대로 두었습니다 . 또한 서간집의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각주로 달았고 초판에서는 익명으로 표기되었으나 자료들을 통하여 내용 확인이 가능한 사항들은 최대한 실명화했습니다 . 또한 변종호 목사가 소장했던 사진들과 피터스 목사가 제공한 새로운 사진들을 본문 내에 배열하였습니다.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의 발간이 이용도 목사의 신앙과 사상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 이용도 목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올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 받습니다.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의 발간을 위해서 여러분들께서 도와주셨습니다 . 윤춘병 감독님 , 김길송 목사님 , 피터스 목사님 , 임인철 권사님 , 성백걸 교수님 , 김형기 교수님 등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2004 년 6 월

장안문화

이민수

 

 

 

머리말

 

시무언 이용도 목사님을 나의 신앙생활의 사표로 , 은인으로 모시고 사모하며 존중해온 지가 어언간 53 년이 되었습니다 . 1931 년 3 월 1 일 오전 10 시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983 년 11 월 16 일이 되었으니 목사님을 그리고 사모하는 동안 어느덧 50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

 

10 년의 병상에서 일어나 몸이 비틀거리고 마음이 휘청거리고 있을 때 말씀으로 훈계하시고 안수기도로 앞날을 축복해주시던 용도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50 년이 넘어 지난 달 10 월 2 일 저녁 5 시에 목사님의 50 주기 기념예배를 드린 바 있는데 이 몸이 이제 이 글을 쓰게 되니 , 이 감회를 인간들이 쓰는 말이나 글로는 형용하기 어려움을 느낄 뿐입니다.

 

그때 나를 그렇게 붙들어 주시고 일으켜 주신 목사님은 나의 인생행로에 빛이 되시고 지팡이가 되어 주시므로 나는 깊은 감사와 감격에 사로잡혀 있을 때 , 웬일인지 세상은 그를 몰라주고 구박하는 것이었습니다 . 그러니 나로서는 놀람과 분함을 참을 수 없어 그들을 대항하여 일어선 것입니다 . 이리해서 맞붙은 항쟁이 52 년간 계속된 것입니다 . 이렇게 지내오는 동안에 세월은 흘러 어느덧 내 나이가 80 을 맞았습니다 . 인생의 황혼이 점점 짙어진 것이 었습니다.

 

하나님의 특은을 입어 병약한 몸이 80 까지 살았으니 이제는 더 살겠다고 애쓸 염치도 없고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 드릴 말도 없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는 내 과거를 회고하고 지나온 내 일생을 정리해 보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됩니다 . 내가 일생 동안 악전고투해온 문제의 결론을 지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지나온 50 여 년 동안에 이용도 목사님께 대한 세평은 구구하였습니다 . 적어도 50 가지 이상의 험구망담이 그의 시체를 매질하여 왔습니다 . 그에 대한 석명 ( 釋明 ) 에 참고가 될까 하여 나는 용도 목사님을 위한 책 7 권을 간행했습 니다 . 그러나 그 책들이 이 목사님의 생애를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쓰지 못하지나 않았나 하여 스스로 조바심됨이 큰 바 있습니다 . 그러므로 이때에 나는 목사님을 위하여 책 한 권을 더 써야겠다고 느낀 바가 있어서 내가 사모하고 존중하며 보고 느끼고 연구해온 바의 마지막 장을 쓰는 것입니다.

 

나는 50 여 년간 이용도 목사님을 중심한 모든 비평 , 모든 광경을 다 파악하기에 힘써 왔습니다 . 40 년간 신학교에서 교수를 하면서 그의 생애를 연구 검토해왔습니다 . 특히 최근 15 년간은 순복음신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 치고 ‘ 오순절신학 ’ 을 강의해왔는데 그것도 용도 목사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설명할 수 있기를 원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에 대한 모든 비평 , 모든 공경 , 모든 연구발표들을 다 모아서 키 위에 올려 놓고 까불어 본 결과 다른 모든 것은 다 날아가고 불려나가 없어 졌는데 오직 誠 과 聖 만이 남아 있었으매 나는 이 목사님을 誠 의 사람 , 聖 의 님이라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 이 책이 독자에게 무해유익의 책이 되고 하나님께 불욕귀영 ( 不辱歸榮 ) 의 책이 되기를 빌면서 이 글을 끝맺기로 합니다 .

 

1983 년 11 월 16 일 

투쟁 61 주년의 날 

제 13 회 加一 감사절의 날에

변종호 씀

 

 

 

 

 

이용도의 현대적 의미

 

성백걸 박사 ( 한국기독교사상사연구소장 )

 

 

 

새 『 이용도목사전집 』 이 던져줄 빛

 

18 세기 말 조선천주교의 설립과 19 세기 말 한국개신교의 형성 이후 지난 2 세기를 통해 이 땅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전개해온 한국기독교는 이제 21 세기를 맞아 새로운 시대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 여기서 우리는 앞선 시대에 기독교 복음에서 새 비전을 찾고 그 실현을 위해 헌신 (commitment) 했던 신앙 선배들의 자취를 뒤돌아보며 , 그들이 던져주는 현대적인 빛을 헤쳐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 이번에 장안문화의 수고에 의해 새롭게 정리되어 발행되는 『 이용도목사서간집 』 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1933 년 10 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새 인격 형성을 위한 복음운동에 자기 삶을 투신했던 이용도 목사가 별세한 후 , 다음해인 1934 년에 그의 애제 ( 愛弟 ) 변종호는 이용도 목사와 신앙동지들 사이에 오고 갔던 흩어진 서신들을 모아 『 이용도목사서간집 』 을 발간하는 열성과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 1953 년에는 변종호에 의해 『 이용도목사서간집 』 ( 심우원 ) 재판이 간행되었는데 , 이때 초판에 들어 있던 편지들 , 특히 이용도 목사가 받은 많이 편지들이 빠지게 되었다 . 그 의도와 기준은 이용도 목사에 대한 세간의 터무니없는 비판 여지를 줄이려고 한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또한 1966 에는 신생관에서 『 이용도목사 일기 』 가 , 1975 년에는 역시 신생관에서 『 이용도목사저술집 』 이 발행되었다 . 1986 년에는 변종호 편저로 초석출판사에 『 이용도목사전집 』 ( 전 10 권 ) 이 간행 되었고 , 1993 년에는 이것이 다시 출판사를 장안문화사로 바뀌어 나왔 다.

이번에 5 권으로 새로 정리되어 발행되는 『 이용도목사전집 』 의 특징은 , 우선 , 그간 학자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보충되었다는 것이다 . 특히 1934 년의 『 이용도목사서간집 』 초판에 들어 갔다가 1953 년 재판에서 빠진 편지들이 이번에 모두 수록되었는데 , 그 내용을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이용도 목사의 행적과 신앙동지들의 교류 범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 또한 이번 판에서는 비록 원래 자료는 아니지만 , 변종호 목사의 편집본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에 맞춘 재편집의 묘를 살려 일반인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이 새로운 『 이용도목사전집 』 이 앞으로 한국교회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보이게 또 보이지 않게 던져줄 빛을 살펴보도록 하자 . 즉 이용도 목사가 비추어주고 있는 현재와 미래적인 빛의 방향을 파악해 보자는 것이다.

 

 

 

한국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의 한 원형

 

이용도가 지니고 있는 빛은 , 우선 조선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의 새로운 지평을 비추어주고 있다 . 한국교회의 역사가 40-50 년의 연륜을 지니고 , 서구 근대문명과 기독교의 실체에 대해 깊고 넓게 파악하면서 , 근대 가치와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우리의 역사 상황에서 근대적인 민족의식을 지니고 철저하게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 우리 민족의 고유한 종교성과 영성이 근대 가치와 복음의 진리와의 융합과 합일을 통해 제 3 의 새로운 창조적인 지평의 한 원형으로 출현하게 된다 . 이것을 ‘ 한도한기론 ’( 韓道韓器論 ) 으로 부를 수 있는데 , 그 본질적인 특성이 조선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의 추구로 나타났다 . 이점에서 이용도가 지니고 있는 조선적이고 우주적인 영성과 , 그에 바탕을 두고 출현한 영적이고 우주적 (Spiritual and Cosmic) 인 기독교의 빛은 현재와 미래에 한 원형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복음과 신앙의 ‘ 본말 ( 本末 )’ 을 바로 잡는 빛

 

현대 한국기독교의 큰 병폐는 신앙의 본과 말 혹은 실체 내용과 외적 형식의 혼동에 걸려 있다는 진단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 그만큼 복음의 본질과 신앙생활의 참된 의미가 흐려져 있는 현대이다 . 이 점에서 벌써부터 무엇이 중요하고 , 무엇이 부차적인지 헷갈리고 있던 1930 년 대의 한국교계에 대해 던졌던 이용도의 예언자적인 빛은 오늘날도 여전히 환하게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 용도는 사람은 살아 있는 생명체요 생명은 사랑을 그 본질로 하고 숨쉬고 있는데 , 이 사랑은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본다 . “ 사랑은 사람의 생명이라 . 고로 사랑은 곧 , 사람 그것 ” 인데 ,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신앙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물질문명과 얽힌 서양적 기독교를 넘는 동양적 기독교의 여명

 

이용도는 동양종교 문화권에서 태어난 신앙인으로서 물질문명과 얽힌 서양 기독교의 종말을 내다보며 동양의 풍부한 정신적 유산에 뿌리내린 동양적 기독교의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 성경과 함께 불경과 도덕경도 읽을 수 있었던 그는 “ 서양의 기독교는 동적 ( 動的 ), 동양의 기독교는 정적 ( 靜的 ). 西洋 = 物 - 現世的 - 形式 - 外的 , 東洋 = 靈 - 內的 - 神秘 . 西洋 人 은 外的 의 것을 더 찾았다 . 이제 신비적인 것을 동양인이 찾아야겠다 . 찬송보다 기도 ! 기쁨보다 눈물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음은 무슨 이유인가 . 동양에서 서양적 기독교는 실패 . 서양인은 공관복음적 , 동양인은 요한복음적 . 서양의 미완성품인 기독교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심령방면 신비방면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겠다 . 동양적이란 것은 요한 발견적인 것이다 ” 라고 했다 .

 

 

 

자연의 위기를 극복하는 생태적 기독교

 

용도의 신앙체험과 생명력 있는 생활의 힘은 자연 , 그것도 산 속에서 산과 더불어 호흡하며 얻은 것이다 . 그를 결정적으로 교회개혁적 부흥사로 내몬 것도 1928 년 강원도 금강산의 백정봉의 기도체험이었고 , 1931 년 아현성결교 회의 집회도중 쫓겨났을 때에도 그를 받아준 것은 인왕산이었으며 , 그 후에도 용도가 지치고 상처를 입었을 때마다 찾아간 곳은 산의 품이었다 . 용도 는 새에게 설교했던 프란치스코처럼 “ 자연은 나의 친구 . 믿을 사람도 없고 사귈 사람도 없을 때 하늘 , 산 , 흐르는 물 , 공중의 별 , 밤의 산과 들 초목 , 곤충 , 새들 , 이는 다 - 자연에 속한 것으로 나의 친구가 되나니 , 나는 늘 이 친구를 보려 자연 속으로 들어갑니다 ” 라고 했고 , “ 자연은 나의 애인의 집으로 하고 금년에 나는 거기서 주님으로 더불어 살리로다 ” 라고 다짐했다.

 

 

 

예술적인 영성과 기독교의 멋진 지평

 

21 세기는 문화예술의 시대라고 누구나 말하고 있다 . 실제로 , 우리 시대는 사회정치적 관심보다는 어떤 면에서 예술적인 감성 , 예술적인 혼 , 예술적인 영성이 새로운 차원의 물결을 생성시키는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 이점에서 예술적 신앙인으로서 이용도가 지니고 있는 세기적인 빛이 있다 . 그는 시 ( 詩 ) 를 그리스도 곧 정의와 사랑의 신에 흠뻑 미쳐서 거기서 터져 나오는 생명의 율동으로 보았다 . 그래서 “ 기도는 곧 시 ( 詩 ) 입니다 ”, “ 신앙이 깊으면 그의 모든 말이 다 시다 ” 라고 인식했다 . 또한 , 협성신학교 때부터 가 야금을 즐겨 탔던 이용도는 음악 속에서도 종교적 차원을 발견했으며 , 그 소리의 나래를 타고 하느님의 품속에 들어가서 신비의 나라를 체험했다 . 그 밖에도 그림과 연극과 가극예술에서 역시 종교의 세계를 느끼며 예술과 종교의 일치된 지평을 열고 있던 이용도였다 . 그러면서도 그는 “ 진리는 아무 런 둔한 손끝으로라도 잘 표현할 수 있다 . 그러나 미 ( 美 ) 는 아름다운 손에 의해서만 그 형 ( 形 ) 이 정제 ( 整齊 ) 된다 ” 고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는데 , 이런 점에서 용도를 통해 정제되어 나타난 인생과 종교의 아름다운 예술적 세계 는 그 현재적 의미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새 창조의 기도와 생활의 일치

 

하지만 , 무엇보다도 이용도에게서 현재 기독교가 배워야 할 것은 그가 터득하고 있는 기도의 깊이와 힘이라고 할 수 있다 . 사실 , 기도야말로 용도가 가장 강조한 신앙의 필요충분조건이었으며 , 용도야말로 기도의 사람이요 이 땅에 살아있던 기도 그 자체였다 . 용도다운 모든 사상과 활동의 진원지가 기도였는데 , 그는 기도를 자기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다 . 그는 기도를 단지 하느님께 인간의 소원을 올리거나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정도에서 이해하지 않는다 . 용도의 기도는 그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 그때 기도는 사람의 생명이 새로 태어나는 신비로운 창조적 사건의 장소이다 . 깊은 기도 속에서 세상의 힘든 삶으로 지치고 오염된 사람의 생명이 기쁨과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의 생명을 얻어 새로 태어나게 된다 . 용도는 이것을 ‘ 생명의 역환 ’ 과정으로서 신앙생활과 ‘ 생명의 역환소 ( 易換所 )’ 로서 기도로 말한다 .

 

이렇게 역사적인 빛을 지니고 있는 이용도 목사를 우리 시대에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이번 『 이용도목사전집 』 출판을 기뻐하고 축하하며 , 그 노고를 치하한다 . 부디 이 땅에 시무언 ( 是無言 ) 이용도 목사의 새로운 빛에 의해 수많은 생명과 사랑의 꽃들이 만개하기를!

 

2004 년 6 월

 

 

 

 

차례

 

발간사 • 4 

머리말 • 6

이용도의 현대적 의미 • 8 

차례 • 12

 

 

제 1 부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피터스

            (Simeon, A Christian Korean Mystic)

 

천사를 기다리며 • 14 

서 문 • 16

제 1 장 아버지와 가족 • 18

제 2 장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믿음 • 23 

제 3 장 찢어진 지체들 • 30

제 4 장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치유하고 • 35 

제 5 장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 40 

제 6 장 빌린 시간 • 45

제 7 장 내 양을 찾았다 • 50 

제 8 장 다른 양 • 55 

제 9 장 광채 • 62

제 10 장 저녁노을 • 67

제 11 장 그리고 저녁 별 • 72 

제 12 장 열정의 시무언 • 77 

이용도 목사를 기억하며 • 84

 

 

제 2 부 사랑으로 타오른 생명의 불꽃 

 

서 문 • 91

제 1 장 성장기 • 93

제 2 장 신학생 시절 • 99 

제 3 장 전도사 시절 • 107 

제 4 장 교단활동 시절 • 114

제 5 장 부흥사 시절 (1931 년 ) • 119 

제 6 장 부흥사 시절 (1932 년 ) • 128 

제 7 장 부흥사 시절 (1933 년 ) • 139 

제 8 장 승천입영 • 152 c7a7d779362f70948282092c421b7f7e_1477463008_04.JPG


 

천사를 기다리며

 

“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

그 아름다운 1930 년 9 월의 어느 날 , 이 사람이 친구 이용도 목사에게 “ 부족한 우리 집에 오십시오 ” 하고 말할 때 , 이 사람은 앞으로 얼마나 큰 은혜를 받게 될지 몰랐습니다.

원산지방 통천교회를 담임하시던 이용도 목사는 전국 주일학교연합회 간사로 파송이 되어 반드시 서울로 올라와야 했습니다 . 그러나 이용도 목사는 서울에 거처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 독신생활을 하는 제가 그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있어서 이용도 목사에게 “ 나의 집이 불편해도 오실 생각이 계시면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겠습니다 ” 하고 말했습니다 .

이용도 목사는 달리 가실 데가 없어서 그의 가족과 헤어져 곧 서울로 올라 오셨습니다 . 나의 집은 사직동 언덕 위에 있는 선교사 사택의 아래 마을에 있던 다섯 칸짜리 한옥인데 , 옆집에 계신 한인수 목사 부인이 준비하신 한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석 달 동안 우리 두 사람은 한방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 저녁마다 이용도 목사의 복된 말씀을 듣고 같이 기도하게 된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시려면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의 제 1 장 ~ 제 9 장을 보십시오 . 그 내용 모두 이용도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천사처럼 한국에 오셨습니다 . 대접한 사람들은 한량없는 복을 받았습니다.

 

“ 오 주여 , 다시 이용도와 같은 천사를 우리 한국에 보내주시옵소서 . 과연 그와 같은 분을 우리가 대접하고자 합니다 . 아멘 .”

 

2004 년 3 월 

피도수( 皮道秀 ·Victor Wellington Pe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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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기독교 인물의 전기를 즐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선의 독특한 인물 한 사람을 소개하는 일이 주제넘은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 그는 나와 가까운 친구였고 , 얘기하려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듣거나 직접 목격한 것들이다.

‘ 시무언 ’( 是無言 ) 은 그의 아호로 그는 그렇게 불려지는 것을 좋아했다 .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뜻을 설명하고 있다.

“ 시무언 ! 이 말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 말 없는 것이 옳다 .”

그는 여러 차례 기독교인들의 주된 의무들을 강조하였다 . 언제나 최우선의 의무는 ‘ 무언 ’( 無言 ) 이었다 . 그렇지만 그의 언변은 누구보다도 유창했다 . 이러한 표면적인 모순에 대하여 그는 계속 설명하고 있다.

“ 세상이 하는 대로 버려두고는 그냥 우리는 주께 돌진하여 사명만 다합시다 . 기도할 때 기도하고 , 전도할 때 전도하고 , 충분히 자유롭게 움직입시다.”

“ 잠잠할 때가 있으면 말할 때가 있다 ”(전 3:7) 는 말씀대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포괄적으로 해석했다.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 는 말과 침묵의 조화에 대한 깨달음을 얘기한다 . “ 침묵을 즐기는 자만이 온전히 말할 수 있다 .” 유창한 언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불같이 일어나지 않으면 기꺼이 침묵하는 시무언은 말을 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그의 이름과 같이 말이 없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완전한 설명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 그의 영적인 요소와 다섯 번의 시험만을 소개하려 한다 . 하나님이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방법 들을 돌이켜보고 더욱이 “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 겸손히 순종하고 , 고요히 묵상하고 , 땀나도록 일하는 것이 우리가 할 바이다 ” 라고 권면하는 사람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더 깊은 헌신 , 기도 , 열심 , 희생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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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1 장

아버지와 가족

 

 

“ 너희들 교회 가려는 것 내가 모를 줄 알아 ? 날 바보로 알아 ? 내가 여기서 다 봤다 . 이 몹쓸 것들 . 멍청한 것들 . 다들 한 패가 되어 날 속이려고 .” 욕설과 함께 몽둥이가 휘둘러지고 , 그릇들은 깨지고 , 아이들은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 어머니는 흐느껴 울고 …… . 이번 소동은 이 집안을 휩쓴 이전의 많은 소동들과 달리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 연약하게 보이는 한 어머니가 한 아이는 등에 업고 나머지 세 아이는 치마자락에 매단 채 이웃집으로 도망가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긴장감을 주었다.

일요일이었던 그날 아침은 즐겁게 시작되는 듯하였다 . 날씨는 쾌청했고 그날 아버지는 멀리 신계 장터로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 아버지는 마치 가족들이 교회 갈 채비를 돕는 듯 일찌감치 집을 떠났다 . 신계까지는 걸어서 7 시간 정도나 걸리므로 가족들이 모처럼 주일날 예배를 두 번이나 드려도 그 이전에 아버지가 불쑥 먼저 돌아올 염려는 없었다 .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있는 동안에는 그의 눈을 피해 예배 드리러 빠져나갈 기회는 결코 없었다 . 더욱이 아버지의 엄격한 뜻을 거슬리며 교회에 다니면 무서운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어머니는 남편의 핍박으로 마음대로 교회를 다니지 못했어도 , 아이들은 그녀를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 결국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들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아버지 이덕흥 ( 李德興 ) 은 소 거간꾼이었다 . 그는 군청으로부터 받은 허가의 표시로 왼팔에 빨간 완장을 차고 시변리 우시장에서 거래를 주선했다. 가옥 약 200 호 , 인구 약 1,000 명 정도를 헤아리는 시변리 ( 市邊里 ) 는 군내에서 두 번째로 큰 우시장이 있었다 . 수천 평 크기의 이곳에서 11 월부터 이듬해 3 월까지의 동절기 장 ( 場 ) 이서면 보통 200~300 두 , 많게는 1,000 여 두의 소가 출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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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은 소들 사이로 산전수전을 겪고 거친 거간꾼들이 돌아다녔다 . 동물들을 겉만 보아서는 잘 모르는 만큼 이들은 상당히 예리한 눈을 가졌다 . 먼저 사겠다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소의 조건을 빨간 완장을 찬 거간꾼들 중의 한 명에게 알려준다 . 그러면 이 거간꾼은 소를 팔겠다는 사람에게 가서 설득한다 . 가격을 내리고 운이 좋으면 소를 처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 소의 가치를 고집하는 주인은 손해 보며 팔려고 하지 않지만 , 거간꾼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는지를 안다 .

거간꾼은 부산스럽게 소 주인을 설득하다가 전혀 다른 얘기를 시작한다 . 이 때 가엾은 소는 영문을 모르고 호된 욕을 먹게 된다 . “ 어떤 바보가 이따위 볼품없이 늙은 놈에게 100 엔을 내겠소 .”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자리를 뜨면서 또 한마디 한다 . “ 좋소 . 거기 서서 원숭이처럼 떠들기나 하면서 저 늙은 놈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오 . 난 상관없으니 .”

“ 잠깐 , 봅시다 .” 주인으로부터 기대했던 말이 나오게 된다 .

“ 오늘은 이놈을 꼭 처분해야 하고 다른 볼일도 있으니 …… .” 

“ 좋소 , 그러면 제대로 값을 불러보시오 .”

멈춰선 거간꾼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무심한 척 대답한다.

그러면 흥정이 시작된다 . 이 거간꾼에 의해 순박한 양쪽은 매매계약서에도 장을 찍고 소는 새 주인을 따라가게 된다.

거간꾼은 거래금액 100 엔 중 3 엔을 챙겨 군청에 납입하면 이 중 1 엔을 구전으로 받는다 . 5 일장이고 그나마 1 년 중 5 개월만 장이 서므로 거간꾼들은 나머지 기간에는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해서 생계를 꾸몄다.

이 씨도 마찬가지였다 . 장이 서지 않는 동안 그는 먼 곳의 조그만 마을 시장까지 가서 싼 물건을 사와서 팔아야 됐다 . 시변리는 모든 방향으로 수십 킬로씩 펼쳐진 좋은 농업지역에 위치했다 . 이 씨는 안악 , 평산 , 신계 등 주변의 작은 동네들을 다녔다 . 40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먼 곳을 다녀올 때는 소도 한 마리 몰고 돌아왔다 . 이런 경우 , 오고 가느라 보통 2~3 일 정도 소요됐다 . 다음 장날 때까지 3 마리의 소를 집의 외양간에 두기도 하였다 .

 

그러므로 술만 안 마신다면 , 그는 그의 자녀들에게 제법 넉넉한 생활을 제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 너희가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내가 너희를 모으려 했으나 …… . 너희는 그렇지 않았다 ” 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 이 씨는 인간의 못된 고집으로 시험에 빠졌고 또한 시험에서 구원해 줄 사람과는 싸웠다.

최근에는 일요일마다 무슨 일들이 생겨서 아버지는 항상 집을 지켰다 . 그러므로 가족들은 교회에 갈 수 없었다 . 한번은 일요일이 장날이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장이 서질 못했다 . 다음 일요일에 아버지는 집 출입문 앞에서 하루 종일 쟁기를 수리했다 . 그 다음 일요일에 아버지는 감기로 집에 누워 있었고 다음 주 일요일은 명절이었다.

 

마침내 행운의 일요일이 왔다 . 아버지가 신계를 다녀오기로 했는데 그날이 일요일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잊어버렸던 것 같았다 . 그는 일찌감치 출발했으므로 지금쯤은 한창 길을 가고 있었을 것이다 . 어머니는 아이들 모두를 첫 찬송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로 데려가려고 무척 애를 썼다 . 귀중한 찬송가를 한 곡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옷장 서랍에서 아이들에게 입힐 가장 좋은 빨간색 삼베 저고리와 바지를 꺼내면서 어머니는 주의 보호하심을 감사했다 . 양마리아 ( 梁瑪利亞 ) 라는 서양식 이름을 가진 어머니는 놀고 있는 세 사내 아이들을 불렀다 . 맏이 용채 ( 用采 ·Using Diversity) 는 10 세였으나 조선식 나이로는 11 세였으므로 스스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7 세인 영웅 ( 英雄 ·Hero) 도 혼자서 옷을 입었다 . 그러나 막 4 세를 지난 용도 ( 容道 ·Admit-the-Truth) 는 가만 있지를 못하고 귀엽게 탄 벌거벗은 몸으로 다시 뛰어나가 놀려고 했다 . 한 살짜리 만수 ( 萬壽 ·Live Forever) 는 엄마의 등에서 물끄러미 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 용구 ( 龍九 ·Near Perfect) 와 이 집안의 막내이자 고명 딸인 순례 ( 順禮 ·Obedience) 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다.

 

나중에 스스로를 ‘ 시무언 ’ 이라 불렀던 용도는 이미 어머니의 믿음을 따라서 머리를 간절하게 숙이고 하나님께 그의 아버지가 교인이 되어서 그들이 언제나 함께 교회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짙푸른 바다 위를 떠가는 형형색색의 무적함대처럼 30 분만에 그들은 기백 있게 집을 나섰다 . 어머니와 4 명의 아이들은 교회로 향하는 아름다운 길에서 시원한 바람이 후덥지근한 8 월의 적막을 몰아내는 듯한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교회는 벌써 차있었다 . 적어도 부인반은 다 차있었다 . 펼쳐진 부인들의 하얀 치마들 사이에서 반들반들한 마루바닥이 조금씩 보일 뿐이었다 . 8 칸짜리 방을 가운데로 가로지르는 하얀 커튼의 반대쪽으로부터 우렁찬 남성들의 찬송소리가 들려왔다 . 이 소리를 통해 남자반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 목사님을 제외하고 아무도 양쪽을 다 보지는 못했다 . 물론 아버지는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으므로 남자반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 가족들에게 알려줄 수도 없었다 . 맏이인 용채가 어머니의 자리를 떠나 반대쪽에 앉으려면 1 년 정도는 더 있어야 했다 .

어머니와 아이들에게는 은혜로운 예배였다 . 회중이 아는 두 가지 찬송은 오로지 “ 예수 사랑하심 ” 과 또 다른 하나인데 , 어머니에게 그렇게 감미롭게 들린 적이 없었다 . 그리고 설교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모두는 가벼운 마음으로 닥쳐올 소동에 대한 아무런 의심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 그러나 고약한 아버지가 그의 가족을 속였던 것이다 . 그는 신계에 가지 않았다 . 그는 떠나는 체하고는 숨어서 가족이 자기의 명령을 고의적으로 거역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 아버지는 가족들이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고집하면서 자신에게 맞서고 있다고 믿었다 . 그는 가족의 면전에 칼을 휘두르며 다시 교회에 가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도 했다 . 이렇듯이 10 세 이전에 죽은 영웅을 제외한 5 명의 아들과 1 명의 딸은 어머니의 믿음과 아버지의 핍박 가운데서 자라났다.

 

특히 용도는 어머니에게 기쁨이었다 . 용도가 10 살 때 다니던 학교 ( 시변리 공립보통학교 ) 의 교장이 예수를 믿는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했다 . 교회에 다니던 모든 아이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용도는 그러지 않았다 . 그리하여 그는 퇴학을 당했다 . 이때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 용도는 5~6 일 집에 있었다 . 그런데 그 무식한 교장이 용도의 굳은 마음을 확인하고 복학하라는 말을 전했다 . 그 교장은 자신의 방침을 고수했으나 용도에게는 예외로 했다.

 

작은 초가집 교회가 종탑이 있는 널찍한 벽돌 교회로 바뀌게 되었다 . 이즈음 용도는 주일학교 교사이고 교회의 리더였다 . 또 먼 도시의 미션스쿨 ( 개성 한영서원 ) 에 입학했다 . 그는 그곳에서 유명한 길선주 목사의 학생 부흥회 때 기억에 남을 경험을 하기도 했다 . 기도는 그의 생생한 호흡이 되었고 홀로 교회에서 기도하며 밤을 새웠다 . 그는 주일학교 시작 전이면 항상 일찌감치 교회 종탑에 올라가 1 시간 이상 기도하고 남들이 오기 전에 다시 내려왔다 . 그러므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이렇게 어머니의 훈계가 아버지의 핍박보다 강했다 . 그러나 좋은 일 가운데 많은 곤경도 있었다 .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아침에는 공부하고 방과 후에는 학교 부설 직조장에서 일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 그렇지만 그는 교회 활동을 많이 했으므로 직조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는 밤일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심과 불안이 당시 학생 세대의 특징이었다 . 일부 학생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기독교보다 공산주의가 더 빨리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에 관해 은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머지 반은 기독교를 믿었다. 그들은 개인적 인생 철학의 기로에 서있었다 . 용도는 예민한 사색가였다 . 그래서 모든 선전과 주장에는 관심이 있었다 .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하나님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 일이 생겼다 . 열심히 일했으나 그는 식비를 낼 수 없게 되었다 . 기숙사에서 쫓겨나 배고픔의 고통을 겪던 그는 결단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2 장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믿음

 

 

학생식당의 식비 납부기한을 며칠 넘겼지만 시무언은 납부할 돈이 넉넉지 않았다 . 결국 돈을 납부할 때까지 식사를 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받은 그는 식당으로 몰려가는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 우울한 생각들이 봇물이 터지듯 계속 그의 머리 속에 일어났다.

“ 너희들은 하루 세끼를 먹어야 돼 , 나도 마찬가지야 .” 

격렬한 감정이 몰려왔다.

“ 너희들은 먹지 않으면 죽지 , 나도 그래 . 너희들처럼 나도 살과 피로 되어 있어 . 너희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해 , 나도 마찬가지이고 . 우리 사이의 차이점은 너희들은 돈이 있고 나는 돈이 없는 것이다.”

홀로 우두커니 서있으니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느꼈다 . 모두가 자신을 경멸하는 것 같이 생각됐다 .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돌아서서 나와버렸다 . 그들이 그를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 그들의 손가락질로 뒤통수에 구멍이 날 것 같이 생각됐다.

그는 기숙사 뒤편 언덕에 올라 홀로 앉았다 . 사실 혼자라고 할 수는 없겠다 . 1900 년 전 우리와 같이 온갖 시험을 홀로 받으신 그분이 그곳에 함께 계셨음이 틀림없다.

그는 수풀 사이에 앉아 기숙사 너머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 멀리 외국인의 3 층 건물이 있었다 . 그의 눈에 이것은 거대한 궁전이었다 . 시끄럽게 경적을 내며 고급 차들이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 그 모든 것을 응시했다 . 배고픔과 서러움으로 약해진 그의 심정은 모든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 그러다가 그의 눈길이 학생식당으로 끌렸다 .

‘ 저놈의 학생식당 . 저주를 받아라 !’ 저 식당 안에서 돈이 있는 그의 학우들은 식사하고 있다 . 쌀밥의 구수한 냄새가 주위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 . 실제로 냄새가 풍겼는지는 중요치 않다 . 어쨌든 그는 냄새에 자극을 받는 지경에 도달했다 . 매운 김치와 갓 익은 깍두기의 냄새도 났다 . 이것들은 하늘의 거대한 젓가락 사이에 끼어서 그의 혀끝을 간지럽게 하는 듯했다 . 식탁 위에 놓여있는 접시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수저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그의 귀에 울려왔다.

“ 죽어라 .” 모든 소리가 사형선고처럼 울려왔다 .

“ 죽어라 , 이 불쌍한 놈아 ! 돈도 없는 이 놈아 . 이 세상은 돈 있는 사람들 만을 위한 곳이다 . 돈 , 황금이 없으면 죽어야 돼 .”

그의 손가락이 쑤셨다 . 눈도 따갑다 . 혀는 말랐다 . 훔치기라도 할까 ? 사실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식욕과 육욕을 가진 그는 곧 그들로부터 조롱을 듣게 될 것 같았다 . 납부할 돈이 없다는 조롱을.

“ 꺼져라 , 이 무일푼아 !” 그들은 야단을 칠 것이다 . 

“ 동전 한 닢이라도 가져오지 못하면 굶어라 !” 

그의 마음은 비탄에 빠졌다.

“ 너희는 먹고 살면서 나를 죽이는구나 . 나도 죽지 않고 살 수는 없나 ?” 바로 그때 천사들이 내려와서 역사를 했음이 틀림없다 . 그의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 집에 먹을 것이 자주 떨어졌지만 그의 신실한 어머니는 배고픈 자식들을 모아놓고 모두 머리 숙이게 하고 자비로운 하늘의 아버지께 기도 드리며 그의 언약을 감사했었다 .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 모두가 너희를 버려도 나는 버리지 않으리라 . 나는 너와 함께 있겠다 .”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이 말씀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

 

고개를 들고 이제 그는 당당하게 언덕을 내려가 기숙사로 바로 갔다 . 손가락질과 노려보는 눈들을 이제는 염려하지 않았다 .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 그는 버림받지 않았다 . 그는 빵 대신 하나님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 멸망과 축복 , 고통과 즐거움 , 모든 것이 십자가로 인하여 거룩하게 여김을 받느니라.”

사실 학교생활의 고난이 이때 있었음은 다행이었다 . 그가 고등학교 과정을 끝낼 무렵 전국을 휩쓴 정치적 소요는 그를 무서운 고난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 끈질긴 시위와 지친 밤들을 보내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나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개입하신 것으로 믿어질 정도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 관리가 그를 동정하여 풀어주었다.

시골 학교에서 1 년간 교편을 잡아 공부와 일을 번갈아 하면서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 한때는 공산주의 조류에 눌리기도 하고 육신적 시험의 물결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일찍부터 형성된 그의 믿음의 반석은 모든 흉흉한 파도 가운데에도 흔들림 없이 우뚝 서있었다.

 

송봉애 ( 宋鳳愛 ·Phoenix Love) 와 결혼한 후 , 시무언은 소속 교단의 신학교 ( 협성신학교 ) 에 들어가 영원한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다 . 신학교의 고등 영문과에 등록하여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 교회 일에도 활동적이었고 특히 연극 제작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사회성과 다방면의 재능이 표면화되면서 그의 헌신의 생활은 은밀하게 장애를 받기 시작했다 . 결국 그의 기도가 결실이 없고 식어지면서 그는 주께 눈물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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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려운 순간에 어머니의 오래된 믿음이 다시 한 번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 드디어 주님이 내적으로 역사하심을 나타내는 눈물이 그에게서 나오기 시작했다 . 축축하고 짠 눈물들은 이후 자주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 그는 이 경험을 ‘ 주님이 그에게 눈물을 주신 순간 ’ 이라고 늘 얘기했다 .

이제 그는 큰 울음과 들리지 않는 신음소리로 그의 마음을 아낌없이 쏟아낼 수 있게 되었다 . 그는 자정이나 새벽녘 긴 시간 동안 산 위에서 기도하였다 . 그는 한적한 곳을 찾아 언제나 무릎을 꿇었다 . 시간이 늦거나 거리가 멀거나 날씨가 추운 것을 개의치 않았다 . 자신의 육화 ( 肉化 ) 를 애통해 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맞볼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하였다 . 친교와 연극과 학문의 생활은 사라졌다 . 그리고 그 자리에는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모르는 2,000 만 동포를 위해 한 몸 불사르겠다는 열정이 솟아올랐다.

신학교 과정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졸업이 임박했다 . 젊음 , 열의 , 특별한 능력 , 결의 , 타오르는 믿음 , 그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다 . 아버지의 반대 , 세상의 무신론 , 고통 , 남성적 욕망도 결국 그의 진로를 바꾸어놓지 못했다 . 황해도의 어느 작은 초가집에서부터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가졌던 소망은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였다 . 의사는 그가 오래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그도 자신의 가늘고 창백하고 떨리는 몸을 볼 때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 쇠약한 모습으로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한 시간을 보냈다 . 그는 아침에 피어 저녁에 꺾이는 꽃처럼 곧 죽을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침상에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중에 운명의 장난같이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누워서 명상을 하는데 그의 눈앞에 소년 시절의 시변리 그의 집 맞은편에 살던 대구에서 온 아줌마의 기억이 스쳐갔다 . 그녀가 신이 들려 한 말이 생각났다.

“ 이 아이는 나이 30 을 넘기지 못합니다 . 그러나 30 이 넘어서도 살게 되면 알려주세요 . 아마 대단한 일을 하게 될 겁니다 .”

시무언에게 부흥회 인도를 부탁한 교회의 목사가 말했다.

“ 주님께서 당신을 생각하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셨다고 믿습니다 . 우리는 성령의 은혜가 흘러 넘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시무언은 엎드려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 나는 어차피 침상에서 죽을 것이다 . 일어서서 죽는다 해도 어리석은 짓은 아니리라 . 오히려 오늘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면 이렇게 얼간이처럼 가만히 누워있는 것은 차라리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 ? 일어나서 죽자 . 죽어야 한다면 싸움터로 가는 길에 죽자 .’

주위 사람들은 그가 차려 입고 나가려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랬다 . 그들은 그가 가지 못하게 타이르기도 하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 그러나 그의 표정은 단호했고 어떤 것도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그 작은 몸으로부터 흘러나왔다.

“ 왜 이러세요 . 부흥회는 고사하고 걸어 다닐 힘도 없잖아요 .” 

주위 사람들이 만류했다.

“ 그럼 , 바보처럼 여기에 누워 치욕스럽게 죽어야 하겠소 ? 이것은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길이오 . 가다가 죽더라도 영광이오 .” 

그의 눈은 빛이 났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 다시 한 번 그 불굴의 믿음이 승리했다 . 그는 벌써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 그는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북쪽의 강동이라는 동네로 향하며 점점 가까이 갈수록 그는 생기를 얻었다 . 그는 이제 만반의 준비됨을 느꼈다.

부흥회 첫 시간 이전에 그와 그의 친구는 어둑어둑한 소나무 숲에서 기도했다 . 주님 앞에 그의 죄를 모두 벌거벗겨 놓은 후에 그는 설교말씀을 달라고 기도했다 . 희미한 한 줄기의 빛이 교회 창으로부터 나뭇가지 사이를 통하여 비쳤으나 그는 보지 않았다 . 응답이 없으므로 계속 기도했다 . 기대에 찬 100~200 명의 교인들이 모였다 . 자발적으로 부르는 찬송가 곡조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 이것 또한 그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 응답이 없으므로 계속 기도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났으므로 목사가 개회를 하기 위해 들어갔다 . 이젠 통일된 목소리가 친숙한 곡조를 따라 무릎 꿇은 이들의 외로운 마음 위로 흘렀으나 그는 계속 기도만 했다 . 아직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 갑자기 찬송이 멈추고 어수선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회중의 기도소리였다 . 그는 일어나 들어갔으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 강대상에서 그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 회중의 기도소리가 잦아졌을 때 , 담임목사는 그들의 소원기도를 마무리하였다 . 드디어 시무언은 일어섰다 . 드디어 시무언은 주님으로부터 설교말씀을 받은 것이다.

거의 1 시간 동안 그는 이전과 전혀 다른 설교를 했다 . 회중은 녹았다 . 일부는 남아서 밤새도록 끊임없이 사탄과 싸웠고 일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은혜의 보좌로 인도했다 . 시무언은 지치지 않았다 . 놀랍게도 상쾌함을 느꼈다.

소문이 퍼져나갔다 . 둘째 밤 교회는 꽉 찼다 . 나무 밑에서 다시 필사적인 기도를 하고 나서 교인들 앞에서 힘 있는 설교를 했다 . 이렇게 1 주간이 흘렀다 . 강동 교회는 이런 부흥회를 해본 적이 없었다 .

 

시무언의 명성은 밖으로 퍼져나갔다 . 여러 곳으로부터 초청이 밀려들었다 . 하루하루 주어진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바로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는 스스로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첫 목회지는 ‘ 통천 ’( 通川 ·Stream Communication) 이라는 금강산 근처의 구역이었다 . 그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천 ( 川 ) 자를 동일한 발음의 다른 천 ( 天 ) 자로 바꿔 , 통천 ( 通天 ·Heavenly Communication/Heavenly Communion· 하늘과의 교통 ) 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

그러나 시무언이 그곳에 갔을 때 그는 ‘ 하늘과의 교통 ’ 이라고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 교회는 의견이 다른 두 집단으로 갈라져 있었다 . 한 집단은 청년회장인 유원복이 주동이었고 다른 집단은 주일학교 부장인 김석호가 주동이었다.

어느 밤 시무언은 기도하러 빈 교회로 들어갔다 . 어둠 속에서 얼굴을 바닥에 댄 채 한참 기도를 한 후에 그는 곁의 창문으로 사탄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 찬 호흡이 바닥에 떨어졌다 . 그의 마지막 순간이 드디어 온 듯했다 . 무서운 용모가 점점 가까이 다가와 마치 그를 삼킬 듯하였다 . 드디어 마지막 순간 그는 그의 모든 용기를 모아 맹렬히 외쳤다 . “ 물러가라 , 사탄아 !” 이 소리에 사탄은 사납게 날뛰더니 반대쪽 창문을 통해서 사라졌다 . 그런 후에도 그가 혼자 계속 기도하는 동안 같은 사탄이 이 집 저 집을 배회하면서 사악한 생각을 자고 있는 교인들의 머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 보았다 . 그는 ‘ 어둠의 왕자 ’ 인 사탄이 원복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그는 따라갔다 . 그리고 그 집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 그는 또 자고 있는 교회 속 장의 몸 위에 떠있는 끔찍한 모양의 사탄을 보았다 . 그는 죽기를 각오한 사탄과의 싸움을 시작하여 사탄이 물러날 때까지 계속했다.

그때 멀리 석호의 집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것이 보였다 . 그는 달려가서 다시 싸웠다 . 아침 내내 집집마다 교대로 싸움터가 됐다 . 자고 있던 교인들의 몸과 마음 위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 결국 사탄이 완전히 물러나게 되자 시무언은 집으로 돌아와 늦게나마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사건들은 분열의 치유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전형적인 고린도 교회와 같았다.

 

지방회가 열렸다 . 많은 일들이 지방회에서 결정된다 . 지방회가 은혜로우면 1 년 내내 그 지방에 유익이 있을 것이고 , 그렇지 않다면 모든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 그러므로 목사들과 전도 부인들은 3 일간의 기도회와 직분자들을 위한 5 일간의 부흥회를 먼저 갖는다 .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지방회가 열리게 된다 .

 

 

 

<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3 장

찢어진 지체들

 

 

금강산 온정리 ( 溫井里 ) 에서 1928 년 11 월 5 일 월요일 저녁 때의 일이었다 . 10 명의 설교자 , 3 명의 전도부인 , 그리고 다른 1~2 명이 지방회에 앞서 3 일간의 기도회를 위하여 모였다 . 조선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주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원산지방회 중 있었던 일이다 . 일반적으로 지방회의 일들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만남이 없는 , 영생의 문제와는 큰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 그러나 지도자들은 먼저 활력을 얻어야 했으므로 15 명이 모였다 . 그들은 기도회를 먼저 하고 다음 특별히 원산지방 내의 교회 직분을 맡은 이들을 위한 5 일간의 부흥회를 열고 마지막 2 일은 지방회의 사무를 처리하기로 정했다 .

브래넌 ( 夫羅萬 ·L. C. Brannan) 형제가 기도회를 인도하였는데 은혜가 있었다 . 그렇지만 시무언이 원했던 만큼은 아직 아니었다 . 다들 직분자 부흥회에 참석하자 열기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학교 전시회에만 관심을 둠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무언의 교회에서는 월요일부터 시무언과 동행한 김창희 청년이 참여했고 다른 3 명은 토요일부터 참여했다 . 유치원 교사인 김채경 , 고 씨 청년 , 분열의 주동자인 청년회장 유원복이었다 . 그들은 2, 3 일 정도 늦게 도착했다 .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직장일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부흥회 참여만을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시무언이 보기에 그들은 산에서 휴일을 보내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는 듯했다 . 또 아쉬운 일은 이들 4 명은 서로 친구 사이로 같은 편이었다 . 만약 상대편이 함께 왔으면 서로의 반목을 화해시키고자 했었는데 불가능하게 되었다 . 그들은 늦게 목적도 달리 참석했지만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길 시무언은 간절히 기도했다. 

그날 밤 자정 무렵 친구 현 목사가 시무언에게 말했다. 

“ 조용한 교회에 가서 함께 기도합시다 .”

교회의 어둠 속에서 시무언과 현 목사는 기도했다 . 때때로 “ 아멘 ” 소리만 나오는 조용한 묵상이 이어졌다 . 그리고 나선 다시 큰 소리로 기도했다 . 가을 밤 공기는 싸늘했지만 그들은 시간과 장소에 대한 의식이 없는 가운데 있었다 . 고뇌의 기도를 드리는 중에 번개 불과 같은 빛이 시무언에게 나타났다 . 그는 어떤 이적이 일어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

드디어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 다시 시무언과 현 목사는 차례로 기도했다 . 잠시 후 , 방금 들어 온 사람이 나가는 듯하더니만 돌아와 현 목사의 뒤에 앉더니 말을 시작했다 . 시무언은 기도를 마치고 그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 그는 일행 중에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 그는 마을 학교의 선생이었는데 평판이 좋은 사람으로 들었다 . 그의 아기가 죽게 되었다고 했다 . 시무언은 그 사실도 들었던 적이 있다 . 그럼에도 그의 집을 한번도 심방하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했다 . 현 목사가 그와 같이 일어나 나가려 할 때 , 시무언은 그를 일으키는 팔과 그들과 같이 가라고 하는 목소리를 느꼈다.

그 마을의 서 목사를 찾아서 데리고 모두 4 명은 그 선생의 집으로 갔는데 그의 아이는 벌써 사람의 도움이 무용할 듯 보였다 . 그러나 시무언은 그 아이가 무신자와 미지근한 종교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 그는 하나님이 이 아이의 병을 통해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시려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섯 사람 모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중에 분명한 느낌이 시무언에게 왔다. 한 목소리가 얘기하는 듯했다.

“ 물을 좀 데워 아이를 씻기는 것이 좋겠다 .”

여섯 명 각자가 돌아가며 기도하는 동안 시무언은 뜨거운 물을 가져달라고 했다 . 그러나 아이가 칭얼거림으로 그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할 수 없었다 . 시무언은 아이가 진정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다 . 아이가 진정됐다 . 그들은 기도를 계속했다 . 그러나 이제 아이는 죽어가는 듯하였다 . 아이를 위한 더 이상의 간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되었다 . 그들의 기도는 참회와 용서를 구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뜨거운 물이 들어왔다 . 그러나 아이는 이제 거의 죽어있는 듯하므로 씻겨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되었다.

반면 , 어차피 죽을 아이면 한번 씻기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 그래서 그들은 아이를 목욕시키고 다시 기도했다 . 이제 아이가 낫기를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달라고 기도했다.

돌아가며 한 명씩 모두 기도를 했다 . 아이의 숨소리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주일 새벽 다섯 시가 거의 되어서였다 .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드렸다 .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자신 있게 그 집을 나왔고 시무언은 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했다.

 아침식사 전에 들으니 그 아이는 이제 편히 자고 있다 했다 .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무언과 다른 두 사람은 복통이 일어나 식사를 할 수 없었다 . 매일 아침 기도회를 인도하는 시무언은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곤욕스러웠다. 그때 서 목사가 얘기했다 . 그는 어제 밤에 하나님께 아이보다는 병을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자신들에게 아이의 병을 옮겨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에 대한 염려는 이제 끝났으나 시무언 자신의 교회에 대한 걱정은 계속 남았다 . 그 아이의 몸은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 치료되었으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분열은 치유를 갈구하고 있었다 . 일요일 아침 예배 시작 전에도 상황은 별로 밝지 않았다.

유치원 교사인 채경이 시무언의 방으로 찾아왔다.

“ 목사님 , 저는 아침예배에 참석하지 못해요 . 산에 가려고 합니다 . 출발하기 전에 뭐 시키실 일은 없나요?” 

시무언이 대답했다.

“ 교회에 있는 것보다 산에 가는 것이 아마 재미있고 은혜도 받을 수 있겠지 . 그러나 오늘은 주일이고 김 선생에게는 다시 없을 특별한 일이 벌어질 거요 . 그러니 산에 가지말고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소 . 이것은 내 생각이니 김 선생 좋을 대로 하시오.”

그녀가 일어서 나가려 할 때 시무언은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 나가면서 기도해봐요 . 그리고 주님이 이끄시는 데로 , 산이 됐던 , 교회가 됐던 , 따르시오 .”

그녀가 나가자 시무언은 성령께서 이 젊은이들을 이끄시고 새로운 체험을 주십사 하고 다시 기도했다.

시무언은 교회에 갔다 . 채경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 하고 있던 참에 놀랍게도 그녀뿐 아니라 나머지 4 명의 청년이 모두 들어왔다 . 예배 중에 그 들은 은혜를 받은 듯했다.

그날 오후 그들은 2 마일 정도 떨어진 큰 절인 신계사 ( 新溪寺 ·New Stream Temple) 로 소풍을 간다고 했다 .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시길 기도하는 중에 시무언은 그들이 이번 모임에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다 . 채경 외에 원복 , 고 씨도 직장일로 월요일에는 돌아가야 했다 . 원복은 면사무소에서 , 고 씨는 법원에서 일했다 .

월요일 아침이 왔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 주일학교 부장 측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으므로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자 하는 희망은 당분간 연기될 수밖에 없었으나 , 한쪽 편의 지도자들이라도 진실로 회개할 수 있다면 그는 치유의 확신을 가지고 교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월요일 아침 채경은 시무언을 찾았다.

“ 목사님 , 아침식사 후에 저는 돌아가려고 합니다 .”

여관 문밖에 서있은 그녀의 우아한 흰색 실크 블라우스와 주름 잡힌 검은색 치마가 베란다 바닥 위에 조금 비쳤다.

“ 가능하면 가지말고 남아서 더 큰 은혜를 받도록 해요 ”

조 교사가 하루 정도는 혼자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 것이라 조언했다. 그녀는 반쯤 돌아서더니 10 월의 화려함을 벗고 거친 바람 속에서 황량하고 우울하게 서있은 단풍나무가 있는 정원을 쳐다보았다 . 유치원에 새 난로가 설치되어 익숙할 때까지 선생 하나로는 어려울 텐데 . 또 그날은 어머니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 무엇보다도 , 돌아갈 때는 청년들과 같이 차를 타고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녀는 더 일찍 버스를 타야만 했다.

 

시무언은 그녀의 변명들을 하나하나 대응하여 맞섰다 . 난로와 어머니회의는 하루 정도는 그녀 없이도 그런대로 넘어갈 것이다 . 그리고 청년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 그녀는 그들과 같이 이곳으로 올 때 이미 사람들의 빈축을 샀으므로 이들과 같이 돌아간다고 더 이상 빈축을 살 일이 아니었다.

시무언은 결론을 내려주었다.

“ 모든 일을 하나님과 나에게 맡겨요 . 그래야 당신이 변화되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나서 돌아가서 진정한 아이들의 지도자가 되세요 .” 그녀는 수심에 잠겨 눈을 위로 들었다 . 여관 지붕 위로 웅장한 옥녀봉 (玉女 峯 ·Crystal Peak) 이 솟은 듯이 보였다 . 거기에는 밤새 내린 많은 서리가 하늘의 신전을 만들었고 그곳에서는 천사들이 조물주를 경배하기 위해 모일 것 같았다 . 그러나 그녀의 눈길은 옥녀봉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에 있었다 .

“ 예 , 그렇게 하겠습니다 . 은혜부터 받고 나서 가도록 하겠습니다 ” 

하고 천천히 답했다.

시무언은 김 선생이 은혜를 받기 위해 더 머물기로 했다는 말을 청년들에게 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 먼저 원복을 만났다 . 한눈에 보니 원복은 변해 있었다 . 그는 갈 마음이 없었다 . 그도 큰 은혜를 소망하고 있었다 .

“ 여기에 있을 수 없지 않소 . 가도록 하고 가면서 기도하시오 . 이곳에서 받을 만큼의 은혜를 가면서도 받을 수 있소” 

시무언이 말하자 원복은 울음을 터트렸다.

시무언은 원복이 직장으로 출근해야 하는 필요성과 남아서 은혜를 받고자 하는 욕구 사이에서 얼마나 고민하고 있었던지를 알 수 있어 같이 울었다. 그때 다른 한두 명이 지나가다 멈추어 섰다 . 이때 고 씨는 없었다 .

“ 왜 그래요 ? 안 가세요 ?” 시무언이 그들에게 물었다 .

“ 우리는 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 오늘 가지 않겠습니다 .”

시무언은 이제 기도할 때가 된 것을 알았다 . 그들의 팔을 붙잡고 산을 기어 올라 무릎을 꿇었다 . 그들은 사랑이 없고 편을 짓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번민하며 기도했다.

그때 시무언이 원복에게 말했다.

“ 이제 가시오 . 직장을 잃으면 어쩌려고 .”

“ 상관 없습니다 . 직장을 잃는다 하더라도 여기 남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 제 친구 고 씨도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산을 내려와 여관으로 갔다 . 아침식사 시간이었다 . 고 씨를 만났다 . 그는 식사 중이었다.

“ 원복과 창희는 기도하려고 남기로 했는데 자네도 같이 남읍시다 .” 고 씨는 갑자기 식사를 중지했다 .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 그는 몸을 떨기 시작하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 놀란 눈으로 시무언이 물었다 . 

“ 무슨 일이요 ? 식사를 하다 말고 …… ”

“ 저도 남아야 합니다 .” 고 씨가 불쑥 내뱉었다 . 

“ 아멘 ! 주님을 찬양합니다 !” 시무언은 기뻤다 .

“ 식사를 마치고 교회로 오시오 .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

 

 

 

 

<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4 장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치유하고

 

 

그 월요일에는 4 번의 예배가 있었는데 통천교회의 유 씨 , 김 씨 , 고 씨 , 그리고 채경은 모든 예배에 참석했다 . 시무언이 계속 기도했듯이 그들은 모두 은혜를 받았다 . 화요일에도 그들은 계속 남았다 . 화요일은 마지막 날이었는 데 그날 밤부터 지방회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 뭔가 벌어지려면 이제 벌어져야 될 순간이 된 것이다.

예기치 못했던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 반대편인 주일학교 부장 김석호가 집회에 참석한 것이다 . 교회 분열의 문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해결되지 못하면 이런 기회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방회의 관례에 따라 그날 밤의 예배 후에는 친목회가 열려 자정쯤 끝났다 . 모두 파하여 나올 때 원복도 시무언을 따라 나오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 그가 더 깊은 은혜의 역사를 갈망하고 있음을 시무언은 알 수 있었다 . 

“ 같이 기도합시다 .” 시무언이 제안했다 .

“ 예 , 그렇게 하지요 .” 원복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 산으로 갑시다 .” 시무언이 말했다 .

그들이 올라갈 때 바위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 둘 다 멈추어 섰다 . 여자의 음성이었다 . 유치원 교사 채경은 아니었다 . 어쨌든 , 누군가가 성령의 강림을 그렇게 열망한다는 것에 감사했다.

30 분간 둘은 얘기하면서 걷다가 돌아보았다 . 기도하는 음성이 춥고 어두운 산 속에서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 그 음성의 주인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 그들 교회의 전도부인이었다.

원복과 시무언은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무릎을 꿇었다 . 원복이 기도를 했다 . 특별히 그가 싸우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 그들이 내려왔을 때 거의 새벽 2 시였다 .

“ 서둘러 잠을 청합시다 .” 각자의 숙소로 들어가면서 시무언이 권했다 . 

“ 아닙니다 . 자고 싶지 않습니다 ”

라고 말하면서 원복은 시무언의 방으로 같이 향했다.

그들이 헤어질 때 시무언이 말했다 . “ 부흥회는 끝났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친구들과 함께 교회로 오시오 . 기도합시다 .” 

원복이 가자 시무언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 얼마 전 도착한 석호까지 숙소 동료들은 바닥에서 한 줄로 누워 자고 있었다 . 석호는 깨면서 물었다 . 

“ 어디에 계셨습니까 ?”

시무언은 원복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간단히 얘기하고 밖으로 나가면서 아침에 깨면 교회로 오라고 했다.

석호는 그가 기도하려고 추운 밖으로 다시 나가는 줄 알고 자신의 외투를 입고 가라고 했다 . 시무언은 그 외투를 입고 교회로 가서 교회 청년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 기도할 때 부인반 쪽에서 소리가 났다 . 기도하는 음성이 커지자 시무언은 이 음성이 조금 전 산에서 기도하던 전도부 인임을 알았다 . 그는 이 기도의 여인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다시 찬양했다 . 그녀가 기도를 마쳤을 때 시무언이 말했다.

 주여 , 감사합니다 . 청년들이 이 아침에 기도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옵니다 . 주님도 꼭 오셔야 하겠습니다 .” 

그들 둘은 기쁨으로 같이 기도했다.

삐걱거리는 문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 시무언과 전도 부인은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 한동안 듣고만 있던 이 사람이 끼어들었다 . 분열의 주동자인 석호였다 .

그는 가슴을 치고 땅을 치고 뜨거운 고백의 홍수를 가슴으로부터 쏟아냈다. 시무언이 그와 더불어 울면서 기도하자 석호는 가까이 다가와 그의 팔을 시무언에게 얹으며 말했다.

“ 용서해주세요 . 저는 죄인입니다 .”

흐느낌과 외침소리가 크게 뒤범벅되어 옆 숙소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이 깨었다 . 사람이 들어왔다 . 시무언은 원복이라는 것을 느꼈으므로 더욱 간절하게 기도했다 . 석호가 일어서 원복에게 가서 그의 팔을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 드디어 싸우던 두 사람이 만났다 . 그러나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때 마음의 앙금을 모조리 불사르는 성령의 불길이 내렸다 .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다 .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 곧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 기쁨을 참을 수가 없어 시무언은 여관으로 가서 교인들을 불렀다.

“ 성령이 내렸습니다 . 빨리 오시오 . 성령이 내렸습니다 .”

브래넌 형제가 다른 여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한 시무언은 급하고 흥분해서 신발도 신지 않고 내달렸다 . 도중에 그는 갑작스럽게 한 생각이 들었다 . 

“ 문이 잠겼다면 ?” 그러나 기도하면서 그는 확신했다 . “ 당신께서 베드로와 바울을 위하여 옥문을 여셨듯이 나를 위해서도 문을 여시리라.”

그는 여관에 도착했다 . 그는 문고리를 잡았다 . 문이 열렸다 . 뜨거운 마음으로 “ 아멘 !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 그는 들어가서 브래넌 형제를 불렀다 . 

“ 빨리 오시오 . 일이 벌어졌습니다 . 와서 집회를 인도하세요 .”

교회에 돌아와서는 인도자 중의 하나인 원산의 이호빈 목사가 생각나서 그를 부르러 다시 황급히 나갔다 . 다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

“ 이렇게 요란을 피우는 것이 좀 주제넘지 않나 ? 이런 일은 이곳 목사나 지 방 감리사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기에는 그가 너무 벅차 있었다 . 이런 때에는 규칙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 . 그는 계속 달렸다 .

교회에 돌아와보니 사람들이 문까지 꽉 차 있었다 . 이때 유치원 교사와 고 씨가 생각났다 . 교회 안을 훑어보았으나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 그는 다시 달려 나갔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까다로운 일이 생각났다 . 남자가 어떻게 처녀를 깨울 방법이 있을까 ? 여자숙소를 들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었다 . 그는 달리면서 기도했다.

그때 여자숙소에 도달했다 . 보니 여주인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 이토록 매끄럽게 성령이 까다로운 문제들을 해결하고 계셨다. 

“ 선생 좀 불러주시오 .” 그는 흥분하여 말했다 .

“ 선생 ! 선생이요 ?” 여주인은 좀 어리둥절해서 반문했다 . 

“ 예 , 김 선생 , 유치원 선생인 채경 말이오 .” 

잠시 후 그녀가 놀란 눈을 하고 문으로 나왔다.

“ 나오시오 !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 시무언은 몸짓을 섞으며 말했다 . 

“ 전 잠을 자지 못했어요 . 걱정이 많아서요 . 곧 가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그녀도 교회에 도착했다 . 그녀는 울부짖으며 기도하면서 번민 가운데 무릎을 끓고 바닥을 쳤다.

4 시 . 5 시 . 빛은 없었다 . 그러나 교회 안은 무척 더워 숙인 얼굴들에 땀이 흘렀다 . 앤더슨 형제와 브랜넌 형제는 그 부르짖는 회중의 한 가운데 서서 “ 오 , 주여 ” 만 연속하였다 . 시무언은 그들에게 김 선생과 다른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 사람들이 미쳤다 ’ 는 소문이 마을로 퍼졌다 . 6 시가 됐다 . 동이 트기 시작했다 . 7 시 , 8 시가 됐다 . 아침식사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기도와 고백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마침내 시무언은 브랜넌 형제에게 물었다 . “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지방회를 연기하지요 . 이 일을 멈춰서는 안되겠습니다 .” 

“ 예 , 계속하지요 .” 브랜넌 형제는 동의했다 .

하루 종일 이 모임은 계속되었다 . 사실 지방회는 진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재현된 것이다 . 50~60 명이 교회에서 기도하며 철야했다 . 목요일 아침 교회는 다시 찼다 . 보통 먼저 온 교인들은 자리를 잡고 나서 잡담을 한다 . 그러나 지금은 기도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 인도자도 필요 없었다 . 성령이 직접 주장하셨다 .

그날 몇 사람은 마을을 방문했는데 성령의 불길이 모든 집에 떨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 그들의 얼굴이 빛났다 .

그날 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성령의 권능이 다시 나타났다 . 시무언은 다음 날 아침 다시 기도회를 갖기로 광고했다 .

“ 언제든지 일어나면 나오십시오 . 그때가 성령이 여러분을 이끄시는 시간입니다.”

금식과 무휴 ( 無休 ) 의 밤낮을 보내고도 버틸 힘이 남았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 시무언은 2 시에 교회로 갔는데 많은 이들이 꿇어 앉아 울며 기도하고 있었다 . 그들은 6 시까지 기도했다 . 그때 시무언은 다음 날 아침 또 모임을 갖기로 광고했다 . 그 후 5~6 일 동안 별도 광고 없이 아침 기도회는 계속되었다.

교회에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 마침내 지방회는 예정보다 7 일 늦게 시작되었다 . 사실 지방회도 부흥회의 연속이 되어버렸다 .

이 부흥회를 통하여 모든 이의 삶이 바뀌어졌으며 또한 다양한 열매가 열렸다.

첫째 , 친지를 주께 인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 그들은 용감하게 나가서 부정적인 사람 , 게으른 사람 , 우유부단한 사람들을 설득했다 . 집안으로 들어가 책망하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 기적적인 치유가 있었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성령의 불길이 내려왔다.

둘째 , 지방 전도계획에 대한 구상이 부흥회를 통해서 나왔다 . 1,000 명의 원산지방 교인들이 전도대를 조직하기 위해 1 년에 1 엔씩 내기로 합의했다 . 이 운동을 위해 유명한 부흥사인 정남수 목사가 회장이 되고 시무언은 회계가 됐다 . 이 구상은 후에 송도지방 , 수원지방으로도 확산되었다 .

셋째 , 오랫동안 지방의 청년들이 볼세비키 사상에 미혹되고 있었으나 이후부터 이 불길한 세력이 약화되었다.

넷째 , 새로운 삶이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 지방 내의 2,000 명의 아이들이 새로 주일학교에 등록했다 . 전도하지 않아도 새로운 신자들이 교회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혀 모르던 집안의 가장들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했다 . 60~70 마일 밖의 멀리 양양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소식도 있었다 . 그때부터 지금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 다섯째 , 통천교회에 분열의 시련은 다시 없었다 . 오랫동안 이름에 걸맞지 않았던 통천교회는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곳이 되었다.

봄에는 절친한 친구가 된 원복과 석호 , 창희 , 고 씨와 나머지 청년들이 1 개월 동안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가졌다.

4 월 9 일 화요일 밤 50 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는 작은 통천교회를 100 여명이 메웠고 이들 중 벌써 많은 이들이 자신의 부모를 그리스도께 인도했다. 들어갈 수 없었던 다른 이들은 모두 은혜 받기를 열망하며 창문 옆 언덕에 모였다 . 불신자들도 와서 죄를 고백하고 신자가 되었다 .

현재까지 교회신축을 위해 100 엔 정도를 모았는데 이날 밤 1,500 엔이 거두어졌다 . 얼굴이 보이지 않는 밖에 있던 사람들도 창문을 통해 손을 뻗쳐 바구니에 헌물을 넣었다 . 돈 외에 신발 , 옷 , 반지가 들어왔다 . 많은 이들이 헌물을 가져오면서 말했다.

“ 나는 이 돈 때문에 지옥에 갈 텐데 이렇게 처분하게 되니 정말 좋습니다.”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도 전해졌다 . 어떤 여자아이는 오랫동안 새 신발을 소원하여 그의 아버지가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교회의 사정을 듣고는 아버지에게 신발 살 돈을 달라고 하여 헌금을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감동적인 이야기는 이 무렵 죽은 유치원생에 관한 것이다 . 이 아이는 이 부흥회에서 주님으로 인한 기쁨에 대하여 배웠었다 . 그의 선생인 채경이 와서 마치 자기의 아이인 것처럼 슬퍼했다 . 그 아이는 누워서 죽어가면서 찬송과 교회 종소리를 한 번 더 듣기를 청했다 . 사랑스러운 종소리가 마지막으로 조용한 방에 울릴 때 어린 영혼은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떠났다 . 아이의 환한 기쁨의 얼굴을 본 부모는 모두 교인이 됐다 . 이 슬픈 얘기가 입 소문으로 전해지자 온 동네가 깊은 감동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날 밤 교회에 왔다 . 그리고 성령의 불이 다시 내려왔다 .

이즈음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전해진다 . 한 젊은이가 시무언의 설교를 듣고 영향을 받아 개종하게 되었다 . 전도가 양양했던 이 젊은이가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니 성난 아내가 비단 저고리 감을 그의 얼굴 앞에 들이 대며 따졌다 . 그녀는 여행가방에서 그 물건을 발견했는데 , 그는 아내에게 비단을 사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 마침내 그는 다른 여자에게 주려던 것이라 고 고백했다.

 

 

 

<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5 장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1929 년 1 월 원산지방은 부흥의 열기가 가득했다 . 동해안의 어촌인 장전에서 시무언과 원산에서 온 그의 동료인 이호빈은 특별 집회를 열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 때 전에 본 일이 없는 28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문가에서 머뭇거리며 서있이다가 천천히 신발을 벗고는 주춤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뒤편 방석이 깔린 바닥에 앉았다 . 그의 태도로 봐서 그가 교인이 아님을 시무언은 알 수 있었다 . 설교를 마치고 기도와 고백을 할 시간이 됐을 때 그 청년은 일어났다.

“ 저는 오선모라고 합니다 . 원산 전신국의 기사입니다 . 업무로 수개월 동안 장전에 오는데 늘 교회 반대편의 여관에 머물렀습니다 . 오늘 새벽 잠을 자다가 종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리가 나를 깜짝 놀라게 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 어둠 속에서 저는 제 눈앞에 있는 작은 종을 볼 수 있었습니다 . 말의 목에 채우는 것 같은 종이었습니다 . 저는 무서워 떨렸습니다 .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어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일어나 마당으로 나와 하늘을 보았습니다 .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발길 닫는 대로 갔더니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 무릎을 꿇을 때 저는 하나님과 성령이 이 곳에 계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저의 죄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 제가 만약 믿지 않는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이 순간부터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연히 강대상에는 주일학교에서 사용하는 작은 종이 있었다 . 그 사람은 그것을 보고 기뻐했다.

“ 이것이 제가 오늘 새벽 마음 속으로 본 것과 같은 종입니다 . 저에게 이 종을 주시면 가져다가 제 방에 걸어놓고 볼 때마다 저의 결심을 되새기도록 하겠습니다 . 제가 죄를 지으면 이 종이 저를 회개시키도록 할 것입니다 .” 목사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 그리고 그는 4 일간 매일 아침 , 오후 , 저녁 집회에 참석했다 . 마지막 날 밤 그는 라디오를 가져와서 성도들에게 시현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 모두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도록 했다 . 그는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를 설명하고 그것을 비유로 훌륭한 설교를 했다.

“ 라디오가 전파에 실린 소리를 내기 위하여 주파수를 맞추어야 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 전에는 우리가 하늘의 소리를 잡아 낼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 하나님은 늘 계셨으나 우리는 그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믿기 시작한지 겨우 4 일밖에 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이런 진리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에 놀랄 뿐이었다.

이 부흥회를 마치고 그는 원산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부인이 그의 가방에서 얇은 여성용 저고리 감을 발견했다 . 그전부터 그는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이 일로 인하여 변명하기 어렵게 되었다.

“ 이게 뭡니까 ? 이것으로 뭐 하려는 거예요 ?” 

그의 부인은 요란스럽게 다그쳤다.

“ 이게 뭔지 알고 싶으면 나와 같이 교회에 갑시다 . 그럼 내가 설명을 하겠소 ” 하고 평소와 달리 침착하게 말했다 .

우연히 수요일 저녁이었고 기도회 시간이었다 . 그녀는 그가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 좋아요 . 갑시다 .” 그녀는 성을 내며 말했다 .

그러나 그들의 집은 교회와 3 마일 거리에 있어 걸으니 1 시간 정도가 걸렸다 . 교회에 도착했을 때 예배는 끝났었다 . 사람들은 집으로 갔고 이호빈 목사가 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 저 , 목사님께 일이 있어 왔습니다만 …… .” 그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 “ 제가 목사님 앞에서 집사람에게 말할 것이 있습니다 .”

전도부인에게 양해를 구한 후 모두들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 그는 그 문제의 ‘ 수코사 ’ 저고리 감을 모두들 앞에 펼쳐놓았다 . 

“ 작년에 다른 여자와 가깝게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

그는 숨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 이런 대담한 고백을 그는 평범하게 얘기하므로 듣고 있던 모두들 더욱 가슴을 졸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이 저고리 감은 그녀를 주려고 샀습니다 . 그녀는 기혼자였습니다 . 저는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틈틈이 찾았습니다 . 그러던 중 저는 장진에 갔고 그곳에서 교회 종소리를 듣고 교회로 가서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 이제 저는 이것을 저의 착한 처에게 주고 싶습니다 . 용서하세요 . 제가 잘못했습니다.”

“ 오 씨가 회개를 했고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케 되었으니 그를 용서하고 이 저고리 감은 하나님께 바칩시다 ” 하고 이 목사와 전도부인은 그의 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 씨 부인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 그때 거기서 그녀도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했고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날 오 씨는 그의 부인이 개종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는 주님 나라에 합당한 생활을 못할 때의 무서운 결과와 죄의 값에 대하여 그녀에게 계속 얘기했다.

“ 개인의 생명과 가정과 나라 , 모두 죄에 의해 멸망할 것이오 . 우리는 구원을 믿어야 하오 ” 하고 그는 말했다 . 그리고 길거리에서 할 수만 있으면 젊은이나 노인들에게 설교했고 사무실에서도 동료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한번은 목사와 전도부인이 매우 추운 밤에 그를 심방하였는데 그는 곧 자리를 뜨더니 한참 있다가 친구들 8 명을 데리고 들어왔는데 , 한 명은 일본인이고 나머지는 조선인이었다 . 그는 그들을 따뜻한 바닥에 앉히고 지폐 한 장 을 꺼냈다 . 그러고는 성냥에 불을 그어서 그 지폐에 갖다 대었다 .

놀란 친구들이 말렸지만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지폐가 다 탈 때까지 성냥을 들고 있었다 . 그들은 서로 쳐다보며 말했다 . 

“ 이 친구 미쳤군 , 돈을 태우다니 .” 

말을 하지 않고 있던 그가 대답했다.

“ 내가 너희들만큼은 미치지 않았다 . 너희들은 내가 내 손안에서 1 엔짜리 지폐를 태운다고 나를 미쳤다고 하지만 너희들은 너희 입안으로 수백 , 수천 엔을 태워버린 것을 알아야 한다 . 지금까지 너희는 얼마나 많은 돈을 낭비했느냐 ? 사실 나도 너희와 같았다 . 그러나 이제 나는 예수를 믿고 다시는 더 이상의 돈을 담배를 피우면서 낭비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 이뿐 아니라 우리 조선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돈을 술로 낭비하는가 ? 이제 모두 끊고 예수를 믿자.”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설교했다.

이 목사가 간단히 설교를 하고 나니 그의 일본인 친구는 확실히 마음이 움직였고 그도 일본에서는 교회에 출석했다고 고백했다 . 그러나 조선에 온 후 기독교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했다.

“ 전 지금 큰 번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 이제부터 교회에 나가 다시 믿도록 하겠습니다 .” 모든 조선인들도 감동을 받고 믿기로 작정했다 .

정남수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원산의 남촌 (Southville) 교회에 왔을 때 오 씨는 3 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개의치 않고 그의 부인을 데리고 매일 밤과 새벽 집회에 나왔다 . 그러나 그의 부인이 별 관심이 없었고 또 더 이상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므로 그는 화가 났다 . 어느 날 밤 그는 다투다가 우발적으로 그녀를 때리게 됐다 . 그녀는 그를 비웃었다 . “ 그래 , 기독교인이 마누라를 때리는구나.”

그때 그에게 깨달음이 왔다 .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조금씩 잘못을 범하게 되면 부지불식 ( 不知不識 ) 간에 그가 처음으로 누린 기쁨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 나는 나의 집사람을 인도하지 못했는데도 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 내가 정말 은혜를 받았다면 이렇지는 않을 텐데.” 

그는 침통한 마음으로 반성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매번 교회에서 기도하며 그는 평안을 구했다 . 그러나 만족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그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 은혜를 받을 수 없으면 나와 집사람은 지옥에 갈 텐데 ’ 하고 생각했다 . 벽에 걸려 있는 종을 볼 때마다 그는 ‘ 꼭 은혜를 받아야 한다 ’ 는 생각이 들어 기도를 시작하나 불가능한 것 같았다.

하루는 계속된 고통가운데 긴 칼을 하나 사서 종이에 쌌다 . 그리고 벽의 종을 내려서 칼과 함께 그의 주머니 속에 넣고 교회로 갔다.

“ 오늘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내리지 않으시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 교회로 가면서 그는 절박한 마음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

바로 그날 밤 원산에서 며칠간 부흥회를 인도한 시무언은 그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으므로 축도 후에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그에게 뭔가 큰 문제가 있음을 느낀 시무언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 저는 오늘 밤 집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 오늘 밤 저는 은혜를 받을 때까지 교회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오 씨가 답했다 .

시무언은 그가 마음에 소망을 품을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교회 뒤 편 언덕으로 데리고 가서 승리할 때까지 기도하기로 했다.

환한 달이 비추는 가운데 두 사람은 언덕 꼭대기에 앉았다 . 시무언은 길게 얘기를 하고 권면하고 기도했다 . 갑자기 오 씨가 일어나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 천천히 풀었다 . 그리고 뭔가를 손에 쥐고 시무언의 눈앞에 들이댔다 . 긴 칼의 날이 달빛에 번쩍였다.

“ 이게 뭐요 ?” 시무언은 소리치며 칼의 손잡이를 잡았다 .

“ 전 제 처도 바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 가정은 불행하고 마음은 혼란하여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 만약 하나님이 저에게 평안을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이 칼로 목숨을 끊기로 작정했었습니다”

그는 말을 시작했다 . 그리고 주머니에서 종을 꺼내며 계속 말을 이었다 . 

“ 저는 이것을 집에 걸어놓았습니다만 바라던 은혜는 받을 수 없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오늘 밤 이것을 부셔버리려고 가져왔었습니다 . 그런데 오늘 밤 저는 목사님을 만나 큰 만족과 평안을 얻었습니다 . 하나님은 저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더 큰 은혜를 예비하시는 줄로 확실히 믿습니다 . 다시는 집사람을 때리지 않고 집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시무언이 말했다.

“ 죽고자 하는 마음은 사탄이 준 것이오 . 이제 성령께서 은혜를 내리셨으니 오직 감사할 것뿐이오 . 하나님께 우리의 감사를 드립시다 .” 오 씨는 시무언에게 칼을 기념으로 주었다.

그 후 시무언은 그 칼을 볼 때마다 사탄이 어떻게 사람 마음의 평안을 빼앗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지를 되새기곤 했다.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그들은 아침까지 청년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 오 씨는 구원을 발견했지만 그들은 아직도 같은 문제로 인하여 비참한 지경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날 아침 기도회 때 오 씨의 부인을 볼 수 없었던 시무언은 오 씨에게 집으로 가서 부인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 모두들 전도부인의 집에서 모였다 . 이전에 저고리 감 문제로 모였던 적이 있던 그 방에서였다. 

“ 어젯밤 부인은 거의 과부가 될 뻔했습니다 .”

시무언이 앉으며 오 씨 부인에게 말하자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 부인은 오늘 울며 무덤으로 가서 남편을 묻을 뻔했습니다 .”

시무언의 극적인 표현은 오 씨 부인의 얼굴에서 큰 눈물이 흐르게 했다. 

“ 오늘 아침 부인이 남편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하나님은 부인의 남편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 난봉꾼에다가 , 처를 때리기도 하고 또 자살까지 기도했던 부인의 남편은 죽었습니다 . 지금 이 남편은 새 남편입니다 . 훌륭하고 신실한 남편입니다 . 사실상 오늘 두 사람은 새롭게 혼인하는 날입니다.”

“ 제가 잘못했어요 . 남편의 말을 순종치 않아 그가 거의 죽을 뻔했으니 제 죄입니다 . 오늘부터 남편을 받들고 믿고 교회에 다니겠습니다 .” 그녀가 흐느꼈다.

“ 오늘의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읍시다 .” 

시무언이 제안했다.

방금 식을 올린 듯한 눈부신 신랑신부가 카메라 앞에는 서있고 그 옆에는 정 목사가 서있었다 . 그리고 뒤에는 이호빈 목사와 시무언이 서있었는데 시무언은 이후부터 그들의 ‘ 형 ’ 이 되어 그들의 집에 종종 놀러 가곤 했다 .

 

 



<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6 장

빌린 시간

 

나이 삼십이 되면서 예언대로 시무언은 수명을 다하는 듯하였다 . ‘ 연수 칠 십 ’ 은 이미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 기운이라도 좀 있었으면 좋겠으나 , 그 지친 몸에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 전혀 없었다 .

그런 중에 놀라운 일이 있었다 . 그의 여위고 창백한 얼굴과 가늘고 누런 손을 본 사람은 그가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으로 여겼다 .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디에서인지 커다란 신비한 에너지가 풍성하게 쏟아져 나왔다 . 어떻게 나왔는지 , 어디로부터 생겼는지 ,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 연약한 몸을 돌보지도 않고 정열적으로 살았던 그의 예언된 삼십 년의 인생은 무척 빨리 지나갔다.

 

부흥회는 1928 년 11 월 금강산에서 있었던 이후로 계속되었다 . 원산지방을 휩쓴 성령의 역사는 그 후 2 년 동안 계속됐다 . 그리고 1930 년 10 월에 시무 언은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의 간사로서 경성에 오게 되었다 . 당시 연합회에서 발간한 유익한 자료의 많은 부분은 시무언이 만들었다 . 그는 표현력이 뛰어나고 감수성이 독특했다.

그러나 사무실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그의 역할 중 일부였다 . 전국각지의 주일학교 기관들은 그를 계속 강사로 불러 세웠고 이것은 상당한 노동이었다 . 그가 이런 기관들에서 강습회를 열면 항상 부흥회로 바뀌었다 . 일반 교인들은 그의 교재를 열면서 자신들의 경건치 못한 마음도 열리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 그들은 교육을 받으러 왔다가 남아서 기도를 했다 .

더욱 놀랍고 독특한 일들은 말없이 뒤에서 일어났다 . 이런 일들 중의 하나가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있었다.

시무언은 내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저녁에 같이 기도할 때에 그는 예사롭지 않게 감동된 모습이었다 . 그는 울면서 자신의 이기심과 나태함 , 교만 , 자기 도취 , 인색함을 고백하였다 . 누구도 그에게 이런 죄가 있다고 욕할 사람은 없었다 . 그러나 그는 피 흘리는 듯한 깊고 떨리는 목소리로 산 제물로 고난에 참예하고 싶다고 외쳤다.

나는 상당히 부끄러웠다 . 나는 이 다음에 무엇을 기도할 수 있을까 ? 그가 간구하는 천한 곳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을까 ? 솔직히 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나는 남들이 감당하는 빈곤과 추위와 박해와 고통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 ’ 고 주께 고백하는 것뿐이었다 . 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완악한 마음에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 마지막으로 로마서 8 장에 기록된 말씀이 나를 위로하였다 . 성령이 아버지께 우리가 너무 약하여 구하지 못하는 것들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신다는 말씀이었다 . 우리는 따뜻한 바닥에 드러누워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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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은 무척 추웠으나 따뜻한 이불은 촉감이 좋았다 . 자정 무렵 잠을 자려고 할 때 시무언은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 나는 나가서 구유 앞에 머리 숙인 목자들을 만나야겠소 .”

내가 놀라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 의미 있는 말을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 나 같이 영혼이 무딘 사람에게는 수수께끼처럼 알듯 말듯했다 . 말뜻은 분명하게 알아듣지 못했지만 , 내 영의 실상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 그래서 나는 더 묻지 않고 단지 나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만 부탁했다.

어둠 속에서 그는 거의 나갈 채비를 마쳤다 . 나도 주님을 만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알았다 .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 그러나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 나는 목자니 , 구유니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몰랐다 . 그러면서 이런 혹한에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논리의 근거를 마땅히 찾지 못한 상태에서 불안하지만 추위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주님은 나에게 용기를 주셨다. “ 나도 같이 갈까 ?” 슬며시 물었다 .

그는 기뻐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 “ 가면 은혜를 받을게요 .” 

우리 둘 다 준비가 되었을 때 그는 이불 몇 개를 집어 들고 말했다. 

“ 그 애가 추울지 몰라서 .”

그날 밤 시무언은 교회로 가는 도중에 만난 한 순진한 어린 남자아이에 대하여 얘기했다 . 그 아이는 거지들이 가지고 다니는 찌그러진 뚜껑 없는 깡통을 차고 있었는데 얘기를 해보니 그 아이는 불구자인 형을 위해 구걸을 했고 그 형밖에는 아무 친척도 없었다고 한다 . 그들은 다른 불구자들과 함께 미국 영사관 담 아래의 구덩이에서 살고 있었다 . 바로 그곳이 그리스도로 비유된 그 아이를 만난 구유였던 것이다.

시무언은 아무도 없는 거리를 달리면서 숨차게 뒤따라오는 나를 돌아보며 

“ 목자들도 어린 그리스도를 보기 위하여 달려갔다 ”(눅 2:16) 는 사실을 나에게 되새겨 주었다.

영사관의 높은 회색 돌 담장 뒤에는 풀 둔덕과 녹슨 깡통이 발에 채였다. 한쪽 끝의 바닥은 패여서 두세 발자국 정도 꺼져 있었다 . 좁은 입구에서 몸을 구부리면서 시무언은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 문이 열리자 그 안으로부터 희미한 초롱불이 비치어 그 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 연약하나마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떼를 지어 붙어 있었다.

한 나이 먹은 아이가 일어나 앉으면서 자기가 형이라고 대꾸했다 . 어린 아이도 일어나 앉았는데 이 아이는 눈을 껌벅거리며 졸린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 시무언은 간단히 자기가 누구인지 얘기하고 가져온 이불을 전달했다 . 아주 정중하게 감사하면서 그것을 받은 그 형제는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오래된 담장 가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이 불쌍한 영혼들이 우리가 방문한 이유를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하기를 기도했다 . 돌아오면서 시무언은 낚시를 가는 어린 학생처럼 깡총깡총 뛰었다 . 그는 따뜻한 방에서 편히 쉬면서는 고통스러워했지만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영하의 추운 거리를 걸으면서는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 고통의 신음과 멍에는 사라졌다 . 그는 참으로 이상한 방법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집에 와서 나에게 누가복음 2 장 20 절과 29 절을 읽으라고 했다 . - “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 “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그리고는 그는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경험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 이전 사역지인 통천에서 그는 한 거지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 거지들은 전에도 종종 와서 문전에서 찬밥을 얻어가곤 했지만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주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문전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밥 한 사발만을 주어서 그를 문전에서 돌려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는 아내에게 “ 다음에 오는 거지는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깨끗한 사발과 수저를 주고 천사가 방문한 것처럼 대하자 ” 고 말했다 . 하루는 식사를 하려고 할 때 한 거지가 왔다가 대문을 나가는 소리를 듣고는 달려나가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 그 불쌍한 거지는 너무 당황해 말을 하지 못했다 . 그러나 권면하므로 그는 마침내 죄송해하며 들어왔다 . 시무언은 그의 앞에 그의 밥그릇과 수저를 놓았다 . 그는 놀랐다 . 그가 보통 열 집을 돌아다녀야 얻을 수 있는 것을 한 집에서 다 얻었다 . 그때 시무언은 이전에는 몰랐던 기쁨을 느꼈다고 했다.

12 월의 이른 아침 조용한 시간 , 다시 광채가 비쳤다 . 참으로 그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이상한 존재였다.

“ 오늘 밤 나는 구유의 아기 예수를 보았습니다 .”

그는 부드러우나 단호하게 행복에 넘쳐 말했다 . 나도 그가 정말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와 같이 자신을 잊고 남을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크리스마스 행사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 교회가 터져나갈 정도였다. 그러나 교회 신자들은 행사 다음 날의 슬픈 현실을 잘 알고 있다 . 환호하는 군중이 사라진 후 교인들은 회가 벗겨진 벽과 경첩이 떨어진 문짝들 , 고장 난 창문들을 발견하곤 했다 . 그러나 한참 재미있는 일을 할 때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행사 프로그램에 열중하느라고 생각할 틈이 없었다.

시무언은 한번은 꽤나 요란스러웠던 행사를 마치고 혼자 집으로 오면서 한 우화를 생각해냈다 . 아마 그것은 행사가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군중이 교회를 가득 메우므로 나중에 오는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고 , 그날의 공연자들도 도착하여 입장하기 위하여 별별 노력을 다했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밖으로 밀려났는데 , 그러는 동안 군중은 안에서 계속 기다리다가 지쳐서 단 하나의 행사도 보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기억된다.

아무튼 , 집에 도착했을 때 시무언은 훌륭하고 현명한 왕이 다스리는 넓고 번성한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한번은 그 왕의 생일이 가까워오자 백성 들은 그의 은덕에 감사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왕을 기쁘게 하고 싶었다 . 그래서 백성들은 왕의 재위 중의 일들을 묘사한 멋진 행사를 준비했다 . 이 행사에는 특별한 건물이 필요했고 준비도 수개월간 계속되었다.

드디어 생일이 됐다 . 모든 왕족과 귀족과 그 나라의 고관들이 모두 모였다 . 왕은 자신을 위하여 만든 멋진 좌석에 앉아 행사를 가장 잘 보고 즐길 수 있었다 . 그러나 왕은 수시간 후 지루해져서 일어나 바람을 쐬러 나갔다 . 모두 기분이 좋았고 행사도 재미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왕이 자리를 비운 줄 몰랐다.

왕이 밖으로 나가 보니 주위에는 거지와 불구자와 과부와 고아들이 많은 것을 발견했다 . 한 노파는 안에서 벌어지는 행사를 훔쳐보면서 추위에 떨고 있었다 . 왕은 외투를 벗어 그 노파의 어깨 위에 걸쳐주니 노파는 감사했다 . 또 배고파 우는 한 불쌍한 아이의 얼어붙은 손에는 동전을 쥐어주었다 . 또 맨발의 노동자에게 왕은 그의 신을 벗어 주었다.

그때 왕은 자신이 밖에 나온 것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군중들은 그를 팔꿈치로 밀어냈다 . 아무도 그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 그를 침입자로 여겼다 . 모든 손님들이 왕의 성대한 생일 행사를 즐기는 가운데 정작 왕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당시 시무언은 구유의 아기 예수와 보좌의 왕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하루하루를 빌려서 사는 처지이면서도 이상하게 그는 죽음을 정복했고 삶에는 풍성함이 넘쳤다 . 그는 사람들이 알 지 못하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 그의 음식은 하나님의 뜻과 연관이 있었다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의 하루가 완료되고 그의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 내일이 되면 하나님은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시 빌려주실 것이다.

 

 

 

<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7 장

양을 찾은 기쁨

 

1931 년 1 월 , 기온은 영하 23 도까지 내려가고 칼날 같은 바람까지 부는 그 해 겨울 중 가장 추운 밤 11~12 시 무렵이었다 . 당시 영동에서 집회 중이었던 시무언은 교회에서 여관으로 돌아가던 중 가련하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 “ 누가 이런 날 밖에 나와 있는 것인가 ?”

그는 궁금했다 . 그 소리는 절망의 외침이었다 . 이 불쌍한 자를 그냥 놓아두면 그냥 외치다 지쳐서 잠잠해질 것이고 다음 날 아침 뻣뻣하게 얼어붙은 송장으로 발견될 것임을 시무언은 알고 있었다.

‘ 이 교회 교인들이 나에게는 편하고 따뜻한 여관방과 풍성한 밥을 주나 , 그들 중에 이 불쌍한 자의 울음 소리를 듣고 따뜻한 곳으로 데려갈 자는 없구나 ’ 하고 생각했다 .

그는 흐느끼는 소리를 따라가 길 한복판에서 넝마조각을 걸치고 있는 어린 거지를 발견했다 . 무릎 아래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홍당무처럼 빨갛다 . 그의 긴 머리는 헝클어지고 초췌한 손은 거지들의 표시인 뚜껑 없는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 오늘 아침 밥은 얻어먹었니 ?” 시무언은 인사를 한 후 물었다. 

“ 아니요 , 못 먹었어요 .” 

훌쩍거리며 답했다.

“ 뭘 좀 먹었으면 이렇게 춥지는 않을 텐데 .” 

시무언은 중얼거렸다.

추위에 그곳에 더 이상 서서 계속 얘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시무언은 아이에게 크게 말했다 . “ 가자 .”

여관 주인이 그를 들여놓을지 말지 모르나 시무언은 개의치 않았다 . 그저 그를 쉴 곳으로 데려가야 했다.

“ 어젯밤에는 뭘 먹었니 ? 찬밥 , 더운밥 ?” 가면서 물었다 . 

“ 찬밥을 조금 먹었어요 .” 울음을 그치면서 대답했다 . 

“ 아프지는 않니 ?”

“ 아니요 , 괜찮아요 .” 어린 아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

 “ 아 , 그래 .” 시무언은 생각했다 .

‘ 여기에 하나님의 비밀이 있구나 . 48 시간 동안 작은 찬밥 덩이 하나만 먹었다면 이런 날 밤 우리는 병이 나거나 죽었겠지 .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아이를 돌보고 계셨구나 . 나는 담요 2 개와 두루마기 1 개를 껴입고 따뜻한 바닥 위에 누워있었지만 지난 밤 추위 때문에 제대로 잘 수 없었다 . 아 , 이는 진정 하나님의 돌보심이고 하나님의 사랑이로구나.’ 여관 방에 다다르자 시무언은 그에게 나이를 물었다.

“ 여덟 살이요 ” 라고 했으나 시무언이 보기에 나이에 비해 작았다 . 문을 열어 제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 시무언은 그를 가장 따뜻한 아랫목에 앉히고 그의 두루마기를 덮어주었다. 

“ 엊저녁은 어디서 잤니 ?” 

“ 가가 ( 假家 ) 에서 잤어요 .”

‘ 가가 ’ 는 주로 장터에 있는 것으로 단순히 양철 지붕만으로 비와 햇빛으로부터 물건을 보호하는 곳이므로 담 같은 것도 없다 . 이런 것들은 동네나 마을의 큰 길을 따라서 널려있었다. 

“ 그래 무엇을 덮고 잤니 ?”

“ 아무 것도 안 덮고 잤어요 .”

‘ 사악한 세상이로구나 ’ 라고 생각하며 이불을 하나 더 덮어주는데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 모두 자기만을 돌보고 있으니 오직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돌보셨구나 .” 다시 아이를 향하여 물었다. 

“ 아버지도 , 어머니도 없니 ?”

“ 어머니는 아버지와 싸움하고 양잿물 먹고 죽고 아버지는 미쳐서 달아났어요.”

‘ 아 , 이 무서운 죄 값 .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구나 . 그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시무언은 생각했다 . 그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 

“ 이젠 몸이 좀 녹았니 ?” 

“ 네 .”

“ 오 , 그럼 조금 있다가 떡국이나 한 그릇 먹으면 괜찮지 . 그런데 네 이름은 무에냐?”

“ 억성 ( 億成 ) 이에요 .”

운명의 장난처럼 그 이름의 뜻은 ‘ 백만장자 (Million Maker)’ 라는 것이다 . 

“ 성은 ?”

 “ 최가에요 .”

“ 그전에 너의 집은 어디 있었니 ?”

“ 여기서 이십 리 떨어져 있어요 . 열세 살 된 누이가 지금 살고 있어요 . 그 전에 갔었는데 사람들이 다시 쫓아냈어요.” 

“ 너 예배당 아니 ?” 

“ 알아요 .”

“ 예수 믿는 사람 너의 동리에 있니 ?”

“ 많아요 . 여기도 예수 믿는 사람 많아요 .”

‘ 예수 믿는 사람은 도처에 많거니와 너를 긍휼히 여길 신자는 없었구나 ’ 하고 시무언은 생각하다가 여관 주인이 문을 여는 바람에 생각을 멈췄다. 주인의 아들이 이 목사가 거지와 같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알렸다 . 시무언은 여관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

‘ 아 , 세상이 악하여 이익만 탐하고 명성만 구하였으니 어찌 의를 알며 사랑을 느낄 수 있는가 ’ 하고 생각하며 주인에게 떡국 한 그릇을 주문했다 . 

‘ 오 , 악한 세대야 , 너희는 먼저 의와 사랑을 구할지어다 .’ 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 언제부터 얻어먹었니 ?” 

“ 재작년부터요 .”

“ 아 , 여섯 살부터 얻어먹었구나 .”

“ 아버지하고 둘이 얻어먹다가 작년에 아버지는 미쳐서 내빼고 나 혼자 얻어 먹어요.”

여관 주인이 와서 그들이 바닥을 더럽힐 것을 걱정하자 시무언은 속으로 분개하면서 생각했다 . ‘ 오호 , 악한 세대여 , 너희는 마땅히 회개할지어다 .’ 아이의 얼어터진 발과 다리로부터 나온 피는 길가에서 묻은 먼지와 범벅이 되어있었다 . 주인의 걱정은 정당한 것이기는 했다 .

시무언은 주인에게 부탁하여 물을 끓여다가 아이의 얼굴과 수족을 씻기고 얼어터진 발가락에 연고를 발라줬다.

일단 치유의 사역이 시작되자 철저하게 했다 . 이제 깨끗해진 몸에 맞는 깨끗한 옷이 필요했다 . 기쁨의 눈물이 그의 눈에서 흘러나면서 시무언은 입던 바지와 저고리를 입혀주었다 . 그리고 끝으로 양말을 신기고 버선을 덧 신겼는데 너무 컸다 . 그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고 같이 웃었다 .

주인의 부인이 들여다 보더니 “ 버선이 어찌 큰지 장화 신은 것 같구나 ” 하고 웃고 갔다.

모든 일을 끝내고 시무언은 그가 한 일을 대견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 ‘ 아 ,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야 ’ 하는 탄성이 나올 뻔했다 .

‘ 내 아들에게도 이만큼 해준 일이 없었다 . 겨우 입던 옷들을 준 것이지만.’

그때 또 우스운 상황이 벌어졌다 . ‘ 여덟 살 아이에게 이런 것들을 입히다니 .’ 그들은 서로 쳐다보고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

어린 병아리가 어미의 따뜻한 날개아래 둥지를 틀고 쫑알거리는 것처럼 , 이 아이가 얼굴에서 환한 빛을 내고 만족해하며 웃을 때 시무언은 명상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 저의 얼굴에는 미소가 나타나고 입으로는 평화스러운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나의 마음은 기쁨이 가득하였도다 . 저의 울음은 나의 울음이었고 저의 웃음은 나의 웃음이었다 . 오 , 네가 울어 내가 울었고 , 네가 웃어 내가 웃었으니 이 어인 인연인고 . 이것이 과연 목자와 양의 인연이었는가 .’

이때 주문했던 떡국이 들어왔다 . 식사 후 그들은 같이 누웠다 . 시무언은 아이의 더벅머리를 응시했다 . 그 머리의 주인은 벌써 자고 있었다 .

‘ 검다고 하더라도 이는 꼭 양과 같았다 . 이는 나의 양이었던가 . 아 ,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양아 . 굶주림과 추위에 울며 거리에서 방황하던 어린 양을 찾았노라 . 그러나 오 주여 , 나는 참 목자 노릇하기 어렵사옵니다 . 내가 이 어린 것을 어이 하오리까 . 주여 , 나를 도우사 이 어린 것을 도울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는 그도 잠이 들었다.

 

시무언은 십자가에 대한 찬송을 작사했는데 ,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이 죄인 안에 들어오실 때 

십자가의 고초가 거기 있었고 

죄인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십자가의 고초를 또한 겪도다

 

인생들아 , 생명을 얻으려느냐 

십자가의 고난을 들을 것이요 

십자가의 고난을 쳐다보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을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요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라 

영원히 하나님과 살 것이라

 

그의 대표적인 명상 하나를 소개한다.

 

범사를 주를 위하여 할 것이니 장사도 나를 위하여 말고 그 가운데서 주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 뭇사람에게 편익을 주기 위하여 할 것이고 , 입는 것도 주를 위하여 , 가는 것 , 앉는 것 , 모두 주를 위하여 할 것이니라 . 주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는 일이거든 먹지도 말고 입지도 말지니라 . 우리는 주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이다 . 주를 위하여 수고하고 주를 위하여 가난하고 주를 위하여 굶주리고 잠 못 자고 헐벗고 욕을 먹는 것보다 큰 복은 없느니라.

 

 

 

<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8 장

다른 양

 

 

아침에 억성이가 흥얼거리는 기분 좋은 노래 소리에 시무언은 깨었다. 

“ 춥지 않았니 ?” 시무언의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

“ 아니요 , 너무 더워서 땀이 흐르던데요 .” 정색을 하며 눈을 치켜 떴다 .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시무언은 웃으며 말했다. 

“ 배가 고프구나 . 너 , 오늘은 밥 얻어다가 나를 먹여라 .” 

억성은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 그러지요 . 나가서 한 통 가득 얻어올게요 .”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 

“ 그러면 우리 둘이 먹고 살 수 있겠구나 .” 

시무언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 저만 믿으세요 .” 아이의 얼굴이 밝았다 .

이런 정다운 얘기를 주고받을 때 아침상이 들어왔다 . 그들은 서로를 보더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 아 , 여기가 참 좋은 세상이로구나 . 천국 같도다 .’ 시무언은 생각했다 . 저녁 식탁에는 여관 주인이 우동 두 사발을 차려왔는데 이 아이는 어쩐 일인지 시무언에게 자기의 것을 덜어주었다 . “ 왜 그러니 ?” 이상하여 물었으나 아이는 말없이 웃으면서 우동을 자꾸 덜어 놓는다 . 이는 이 아이가 시무언에게 보답하려는 것이었다 . 먹고 있던 우동이 세상에서 그가 줄 수 있는 전부이었으므로.

그날 밤 시무언이 교회에서 돌아왔을 때 아이와 여관의 사환인 경종 (Tinkling Bell) 이같이 놀고 있었다 . 그러고 보니 경종이 아이의 머리를 깎아놓았다 . 시무언은 생각했다 .

‘ 아 , 네 맘에도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구나 .’

23 세쯤 되는 경종은 소학교를 4 년 다녔고 한동안 교회도 나갔으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 그 후 5~6 년 동안 임금이나 옷도 받지 않으며 이 여관에서 일해왔다 . 시무언이 “ 왜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가 ?” 하고 물었으나 그는 “ 이곳에서 많은 은혜를 입었으므로 여기 있으면서 갚아야 합니다 ” 하고 답했다.

“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항상 그렇게 받아드리기를 바라네 ” 

라고 하며 시무언은 그에게 자신의 저고리와 내의를 주었다.

“ 육신은 고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 아멘 .”

이 목사와 억성이는 며칠 동안 은혜 안에서 함께 먹고 자고 기도했다 . 이 아이는 시무언을 마스코트처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거나 심부름할 거리를 찾았다 . 시무언도 이 아이가 할만한 작은 일들을 생각하곤 했다 .

매일 아침 아이는 방을 청소하고 가끔은 편지를 부치거나 시무언이 외출하려 할 때는 그의 신발을 문 앞에 갖다 놓곤 했다.

시무언이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 그의 경성 집에 여분의 방이 있거나 주위에 여유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려 했다 . 그러나 그럴 처지가 안되므로 그는 아이를 경종에게 맡기고 2 엔을 주면서 영구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 아이를 그의 누이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 짐을 싸는 동안 아이는 옆에 다가와 머뭇거리며 말했다. 

“ 저도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

그 말에 시무언의 마음은 참을 수가 없었다.

‘ 아 , 나는 이 아이를 버려야만 하는가 ? 목자가 양을 버린단 말인가 ? 위대한 목자이신 주님처럼 양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 . 이 아이에게 ‘ 난 너를 버리지 않겠다 ’ 하고 말할 수 있으면 …… . 오 주여 , 우리가 헤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 아멘 .’

많은 군중이 역에서 시무언을 환송했다 . 그 와중에서 그는 억성이를 보지 못할 뻔했다 . 갑자기 뭔가가 그의 두루마기를 비벼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그 불쌍한 아이가 그의 외투 자락을 붙잡으며 눈물을 글썽인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이 추운데 뭐 하러 나왔니 ? 어서 돌아가거라 .” 시무언은 타일렀다 . 

대꾸 없이 아이는 시무언의 부드러운 두루마기 자락에 머리를 묻었다.

 

그리고 나서 한달 내내 시무언은 억성이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다 . 그러던 중 경성의 고아원에 자리를 마련했다 . 시무언은 억성이 사는 곳에서 가까운 옥천에 내려가 그를 만나서 데려오기로 했다.

그러나 만나지 못했다 . 경종이 와서 말하기를 누가 가서 데려오기로 했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할 수 없이 시무언은 그의 양을 데리고 오지 못한 채 슬피 홀로 돌아왔다.

하루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2 통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 2 통 모두 경종으로부터 왔다 . 먼저 한 편지를 읽었다 .

 “ 억성과 같이 있는데 아파서 경성까지 데려갈 수 없겠습니다 ” 

라고 했다 . 다음 편지를 열었다 .

“ 목사님께 , 하나님의 은혜가 목사님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 억성이가 어제 죽었습니다.”

시무언은 나머지를 읽기가 힘들어 눈물을 닦으며 간신히 읽어 내려갔다. 

“ 저는 억성이가 죽는 날까지 같이 있다가 오늘 시신을 내어다가 산자락에 묻었습니다.”

3 일 후 경종은 서울에 왔다 . 그는 억성이를 여관으로 데리고 오는 바람에 여관에서 해고되었다고 했다 . 그리고는 100 마일이나 되는 길을 걸어서 시무언에게 왔던 것이었다 . 그러나 그들은 힘들었던 긴 노정에 대해 얘기하기보다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으로 깊은 상념에 빠졌다.

“ 그 아이는 너무 차가웠어요 . 먹지도 못하고 그냥 죽어버렸어요 .” 

경종이 짧게 말했다.

가책이 시무언의 마음을 삼켜버렸다.

“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긴 양을 나는 버렸다 . 오 주여 , 언제나 저는 한 번이라도 당신이 했던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제 설교는 말뿐입니다 . 신학교를 졸업하고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은 누구라도 이런 설교는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누가 주님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오 주여 , 저는 진정한 사랑의 설교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수천 마리의 양들이 억성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채웠고 사랑을 역설하는 시무언의 설교는 곧 절정에 올랐다.

 

어느 3 월의 오후 시무언은 10 일간의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중부지방의 한 도시로 내려갔다.

그는 기차역에 내려 먼저 교회로 가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 그리고 나서 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소녀에게 근처에 괜찮은 여관이 있는지 물었다 . 그 소녀는 재빨리 그의 짙은 무명옷과 낡은 모자 , 그리고 고무신을 훑어보더니 “ 잘 모르겠는데요 ” 하고 쌀쌀맞게 대답했다 .

시무언은 계속 헤매다가 마침내 한 여관을 발견했다 . 높은 담장으로 연결된 문 밖에서 그는 “ 이리오너라 ” 하고 조선식으로 주인을 불렀다 .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 그는 서양식으로 대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역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 더 길을 가니 다른 여관이 있었다 . “ 이리오너라 ” 라고 불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 두드려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 다음 집도 여관이었다 . 그 집도 문이 닫혀있었고 죽은 듯이 조용했다 . 네 번째 집을 향했다 . 길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여인들이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쑤군거렸다 . 외지사람이 이 집 저 집을 헤매고 다니는 모습이 우스웠던 것이다.

네 번째 집에서 나오려 할 때 시무언은 그전에 알던 사람 중의 하나가 근처에서 살던 것을 기억해냈다 . 여관은 아니지만 가볼 만 했다 . 그러나 역시 소용이 없었다.

계속 좁은 골목을 이쪽저쪽으로 헤매면서 시무언은 두 사람의 방랑자가 생각났다 . 그들도 오래 전 이 여관 저 여관을 전전하다가 결국에는 마구간에 들어가게 되었다 . 오늘 밤 그도 양들의 곁에 잠자리를 마련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 주님은 이렇게 세상에 오셨음을 상기했다 . 그는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으나 세상은 그를 맞아주지 않았다.

마침내 한 학생이 알려주는 대로 가서 언덕 위의 여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이리오너라 . 아무도 없소 ?” 

15 세 정도된 소녀가 나왔다 . 

“ 이곳에 묵을 수 있겠니 ?”

“ 들어오세요 .” 그녀가 안내했다 . 

“ 하나님이 복 주시길 .”

그는 그 소녀에게 좀 과분할 수 있는 감사를 표했다 . 예수를 믿느냐고 물었더니 소녀는 그렇다고 하면서 서부교회에 다닌다고 했다 . 부모에 대해서 물으니 아버지는 한때 믿었으나 그만두고 지금은 어머니하고만 같이 다닌다고 했다 . 그녀는 조그만 방으로 시무언을 안내해주었다 . 

“ 이 방이 나의 구유로구나 ”

하고 생각하며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했다 . 방은 낡고 추웠다 .

방의 구들장을 데울 때까지 소녀는 시무언을 안쪽의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여주인이 들여다보더니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 그가 시골에서 왔다고 답하니 여주인은 “ 그래요 ?” 하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 그러나 옆방에서 나온 반응은 달랐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옆방에는 17~18 세 가량된 여관주인의 아들이 있었다 . 그는 종이 문짝 건너편의 자기 방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 ‘ 이 무식한 촌사람 ’ 에게 좀 으스대고자 찬송가를 크게 부르고는 자랑스럽게 일어 책을 읽었다 . 그리고 마침내는 영어 실력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P-i-c-t-u-r-e” 라고 한자씩 크게 발음하더니 “ 픽챠 ” 하고 우스꽝스러운 발음을 했다.

시무언은 소녀를 불러 여관의 사환에게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사환이 없으므로 소녀는 어머니에게 물으러 갔다 . 여주인이 와서 시무언의 짐을 물었다 . 기차역에 있다고 하니 그녀는 아들에게 가서 가져오도록 했다 . 그러나 그 아들은 화를 내며 불평을 하더니 시무언 방의 문을 열어 제쳤다.

“ 짐이 어디에 있어요 ?” 그가 쏘아붙였다 .

시무언은 짐표를 건네주며 기차역에 있다고 말했다. 

“ 무겁겠네요 .” 그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

“ 별로 그렇지 않네 .” 시무언이 천천히 말했다 .

“ 그렇지만 자네가 가기 싫으면 내가 직접 가도록 하지 ” 하고는 바로 나섰다.

“ 그렇게 하세요 .” 자기 방에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 역으로 가면서 시무언은 기도를 드렸다.

“ 오 주여 , 이런 짐을 져본 일이 없었는데 이제야 질 때가 되었습니다 .” 역에서 버드나무로 만든 상자를 찾았다 . 부흥회 기간 동안 가르칠 책과 잡지들이 들어있어 무거웠지만 등에 지고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저녁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다 . 길을 오고 있는데 잘 차려 입은 남녀들이 역으로 가고 있었다 . 지나가며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로 보아 교회의 목사와 직분자들이었다 . 그날 밤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오는 유명한 이 목사를 마중 나가는 길이었다 . 무거운 짐을 진 채 검은색 무명옷을 입고 있던 이 목사의 모습은 깔끔하고 세련된 모양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한 번 눈길을 주고는 위대한 설교자를 만나기 위해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방문 앞에 짐을 내려놓고는 숨을 몰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문을 닫았다. 잠시 후 소녀가 와서 문을 살짝 한쪽으로 열다가 시무언이 무릎을 꿇고 하 나님의 도우심에 감사하는 기도 소리를 들었다 .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다시 닫고는 어머니에게 갔다.

“ 어머니 , 그 사람은 교인이 틀림없어요 . 지금 기도하고 있어요 .”

저녁식사 후 여주인은 숙박계를 내밀며 경찰의 검문을 위해 기록해달라고 요청했다.

“ 무슨 일을 하세요 ?”

“ 설교를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 

하면서 직업란을 기입하려고 했다.

“ 아 , 거기엔 쓰지 마세요 . 그냥 장사꾼이라고 하죠 .” 

“ 하지만 , 난 장사꾼이 아니오 .” 

“ 그러면 , 농사꾼이라고 하죠 .”

“ 난 목사이니 , 목사라 써야 하지 않겠소 .”

여주인은 목사라고 써넣으면 혹시 경찰이 찾아와 귀찮게 굴지나 않을까 염려도 됐지만 시무언의 행색이 목사로 보이기에는 너무 초라하다고 여긴 것 같았다 . 여주인이 인정하든 말든 목사라 기입한 숙박계를 건네며 시무언은 예언자처럼 말했다.

“ 이것 가지고 나가서 신약의 요한복음 13 장 7 절을 읽어보시오 .”

시무언은 교회를 가기 위해 주인 딸을 불러 길을 물었다 . 여주인이 듣고는 아들에게 가라고 했으나 그는 싫다고 하니 그 딸도 안 가겠다고 한다 . 말다툼을 하다가 딸이 가기로 된 모양이었다 . 중간쯤 가다가 시무언은 그녀를 돌려보내고 혼자 교회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 목사와 교회의 직분을 맡은 이들은 강단에 벌써 앉아있었다 . 쑤군거리는 소리가 났다 .

“ 설교하실 목사님이 왜 안 오시지 ?” 투덜대며 말했다 . 

“ 마중을 나갔는데 흔적도 없었다지 .” 

다른 이가 어리둥절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 못 오시면 미리 전보라도 주셔야 되는 것 아니야 ?” 

옆의 사람이 불평했다.

“ 상당히 난감하게 됐네 .” 그 옆의 사람이 중얼거렸다 .

그러는 동안 시무언은 교회 건물 뒤로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는 일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 안이 가득 찼으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서있었다 .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 많은 이들이 그의 움직임을 힐끔 쳐다보다가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그는 교회 안의 뒤편에 자리를 발견하여 앉아서 기다렸다.

그들은 목자를 기다렸으나 막상 목자가 나타났을 때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러는 동안 목자는 기도하며 명상을 하고 있었다 .

 

기도는 곧 나의 기쁨이요 , 나의 의미요 , 나의 생명이요 , 나의 일이외다 . 기도가 없어 나의 기쁨도 없고 나의 존재도 의미도 없고 나의 생명도 없고 나의 일도 없습니다 . 기도는 곧 나의 생명이요 나의 운동이올시다 . 기도보다 더 큰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 그러나 나는 종종 기도를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 , 기도 못하는 나의 슬픔 . 아 , 기도 없는 나의 영의 가련함 . 밥을 굶는 것보다 더 가련하고 옷을 벗은 꼴보다 더 불쌍한 것입니다 . 오 하나님이여 , 나에게 기도를 주시옵소서 . 기도할 영의 힘을 주시고 기도할 말을 주시옵소 서.

 

나의 중심에 기도가 없으매 나의 영은 신랑과 만나는 밀실을 갖지 못하고 쫓겨난 신부와 같습니다.

 

오 주여 , 기도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 나의 모든 것은 다만 기도에 있습니 다 . 기도를 마귀에게 빼앗기면 나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자입니다 . 마귀는 나의 기쁨을 빼앗으려 하지 않습니다 . 저는 지혜로운 놈입니다 . 저는 나의 평화와 힘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 나의 신앙과 열심도 저는 빼앗으려고 직접 손을 대지 않습니다 . 저는 자기의 악의 ( 惡意 ) 를 대적하는 나의 모든 선을 빼앗으려고 애를 쓰도록 그렇게 무지한 자가 아니요 , 그런 우맹 (愚 氓 ) 이 아닙니다 . 저는 무엇보다도 나의 기도 하나만을 빼앗으려고 하는 아주 묘한 자입니다 . 기도만 빼앗으면 신앙도 , 열심도 , 기쁨도 , 평화도 다 자연히 빼앗을 수 있는 것입니다 . 나의 신앙으로 되는 생활의 전체가 모두 기도 위에 건설되어 있으며 기도 속에서 형체를 이루는 것이므로 저는 나의 기도를 상하고 무너뜨리는 것을 가장 큰 일로 삼습니다 . 오 주여 , 이 마귀의 간계 ( 奸計 ) 를 타파하고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

 

기도 , 기도 , 아 그리운 기도 . 내 생명이 떠날 때까지 할 수 있는 기도를 주옵소서 . 기도는 나의 알파요 , 오메가가 되어지리다 . 나의 생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게 하여 주옵소서 . 아멘 .

 

 

 

 

<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9 장 

광채

 

어떤 교인도 시무언에게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 그가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이란 것을 몰랐다 . 다윗 왕이 유배되어 있을 당시 모두 왕을 다시 모셔 오자고 할 때 반대한 사람들이 유다의 장로들이었다 (삼하 19:10). 지금 기다리는 교인들도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마침내 시무언은 바로 앞에 있는 소년의 팔을 끌어당기며 누가 목사인지를 물었다 . 예상치 못하던 대답이 돌아왔다 . 

“ 우리 아버지가 목사님입니다 .”

시무언이 그의 아버지 보기를 청하자 그 소년은 앞으로 가서 단상의 아버지와 얘기를 하니 그 아버지가 아들을 따라왔다 . 아버지인 목사가 소년을 쳐다보자 소년은 “ 저분 이세요 ” 하고 가르쳤다 . 

“ 어디서 오셨습니까 ?” 목사가 시무언에게 물었다 . 

“ 이용도라고 합니다 .” 그는 조용히 말했다 .

“ 이 목사님 ? 그렇습니까 ?” 목사는 놀란 듯 소리쳤다 .

그리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 그 동안 시무언은 그 목사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 그래 이 목사가 이렇게 생겼단 말인가 ? 유명한 목사인 줄 알았는데 .’ 그러다가 목사는 다시 일상적인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 언제 오셨습니까 ?”

“ 한시 반 차로 왔습니다 . 이곳 교회에 왔다가 동네를 한 바퀴 돌아다녔습니다.”

“ 이럴 수가 …… . 그때 오실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 자 앞으로 가시지요.”

저녁예배 후 모든 사람들이 이 목사 주위로 몰려왔다 . 그들은 이 목사에게 교회 옆의 좋은 여관으로 옮기라고 하면서 모든 준비가 이미 되어있다고 했 다.

놀라운 날들이 계속됐다 . 사람들은 오랫동안 젖어있었던 구습을 떨쳐버렸 다 . 구습을 확인하고 그것을 버리게 된 것을 기뻐했다 . 

하루는 이 목사가 교회 목사 및 직분자들에게 얘기했다.

“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외제 옷과 장신구를 하고 금줄시계를 차고 가죽구두를 신고 있는 줄 아십니까 ? 역으로 마중 나갔던 날 , 여러분들은 목사를 맞으러 간 것이 아니라 , 훤하게 치장한 멋있는 신사를 맞으러 갔었 습니다 . 진정으로 목사를 만나기 위해 갔었다면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초라한 행색의 조선인에게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기회를 잃었던 것이지요.”

하루하루 지나면서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진리를 시인하고 스스로를 곧게 하였다 . 공식적인 광고도 없었는데 소식은 들판의 불처럼 그 지방에 퍼져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원근각처에서 계속 몰려와 매번 2,000 여 명이 교회를 메웠다.

10 일간의 집회가 끝날 무렵 시무언은 도착 첫날 그의 구유를 발견했던 여관으로 갔다 . 그곳 사람들 모두 흥분하여 그를 맞았다 . 그들도 집회에 참석하여 성령에 의해 깨어져 있었다 . 온 가족이 뛰어나와 울었다 . 

“ 아 , 처음 오셨을 때 , 누구셨는지 알았다면 …… .”

15 세 소녀는 신약성경을 들고는 시무언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 다.

“ 내가 하는 것을 너희는 지금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 ”(요 13:7).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 그래 , 늘 어려운 사람들을 대접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 언젠가는 부지 중에라도 그리스도의 사자를 대접할 수 있을 것이다.’

 

시무언이 그 마을을 떠날 때가 되었다 . 그를 전송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였다 . 아마 도지사도 그 정도의 군중을 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온 군중은 울며 많은 선물을 그에게 건넸다 . 그는 사전에 선물을 사양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다가 기차가 떠날 무렵 , 그가 뿌리칠 겨를이 없게 되었을 때에 기차 창문을 통해서 선물을 전달했다.

 

선물과 관련한 한가지 일이 있었다 . 선물은 그에게 부담이었다 . 그는 언제나 부흥회를 끝내고 빈손으로 동네를 떠나려고 노력했고 그러기 위하여 그는 수건 , 옷 , 과일 등 받은 선물들을 역으로 가는 도중에라도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 뭔가 집으로 가지고 가면 부끄러운 일 같으므로 빨리 없애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의 어느 곳에서나 듣는 이야기가 있다 . 누군가 이 목사에게 멋진 비단 옷을 선물했는데 다음 날 보니 잘 알고 지내던 한 거지가 입고 있더라는 것이다 . 그는 건강과 물질에 있어서 주 앞에 아낌이 없었다 .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날 즉시 쓰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을 받은 것이다.

 

그는 기차에서 많은 편지를 썼다 . 나도 그가 기차에서 쓴 편지 한 통을 가지고 있는데 , 그가 북쪽 국경 넘어 조선사람이 많이 있는 용정 ( 龍井 ·Dragon Well) 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쓴 것이다 . 위에 소개한 집회의 1~2 개월 후인 1931 년 5 월 4 일자로 되어있다 . 능력 있는 청지기의 역할에 대하여 썼다.

 

주님의 크신 도움으로 지금 만주에 왔습니다 . 사악한 곳이나 안전하게 지냅 니다 . 교회 안이나 마당까지 사람들이 꽉 차서는 주님의 복음에 머리를 숙이니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 육은 약하나 마음은 기쁩니다 . “ 그는 다른 이들을 구원했으나 스스로는 구원하지 못했다 .” 다른 사람을 구원하거나 주님께 영광을 드림에 있어 몸을 아낄 바 아닐 것입니다 . 내 육의 약함은 편할 수 없는 십자가를 내가 짊어짐을 증거하는 것이라.

진리의 영이 당신의 마음에 불같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 내일 , 내년을 기약하며 오늘 쓸 힘을 아끼지 맙시다 . 죽는 날까지 매일 싸울 것입니다 . 주님은 내일의 일을 위해서는 내일 , 내년의 일을 위해서는 내년에 필요한 힘을 다시 주십니다 . 주님의 사랑의 십자가는 내가 부흥회를 가졌던 천안 ( 天安 ·Heavenly Peace) 에서도 크게 드러날 것으로 믿습니다 .

형제여 , 네 하나님이 복 주시리니 강하고 담대합시다 . 형제여 , 뒤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오니 낙심하지 마시오.

만주의 형제자매들의 신실한 문안을 기쁨으로 받으시오 . 이들이 당신을 위하여 눈물로 드리는 기도가 언젠가는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당신에게 힘과 위로가 될 것을 믿습니다.

 

차 중에서

시무언

 

 

 

그 해 시무언은 부흥 사역에 전념키 위하여 주일학교연합회를 그만두었다. 1 년 내내 전국의 교회들로부터 요청이 쇄도했으므로 그의 일정은 쉼이 없었다 . 어떤 때는 수개월 전에 그의 일정이 정해지므로 많은 교회들은 초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생의 정점에 서있었다 . 그 모든 부흥회를 진행한다는 것은 육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기록을 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 그는 조선의 13 개 도와 만주를 번개처럼 넘나들었다 . 가는 곳 어디에서나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다.

항상 군중을 모으는 그의 설교는 자석과 같은 데가 있었다 .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수백 마일 밖에서부터 찾아온다.

경성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극적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 일요일 아침이었다 . 1932 년 봄 긴 부흥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 시무언은 예수께서 예루 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내용의 구절을 읽고 비애감과 영광이 교차된 잊을 수 없는 설교를 했다.

 

“ 그들의 삶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 이 백성이 마침내 그들의 왕께 ‘ 호산나 ’ 를 외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 그는 이 땅의 왕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그들의 열정을 경멸할 수는 없습니다 . 내가 그곳에 있었다 해도 나 역시 겉옷을 벗어 그의 발 아래 펼쳐놓고 종려나무를 흔들며 ‘ 할렐루야 ’ 를 외쳤을 겁니다 .”

“ 영국인 , 불란서인 , 미국인들에게는 사랑하는 조국이 있습니다 . 조국을 떠나 멀리 있어도 그들에게는 그들의 공사관이 있고 국기가 있으므로 이것들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습니다 . 일본사람들은 군대를 중심으로 결집합니다 . 신문에서 읽지 않으셨습니까 ? 일본에서는 아이들도 만주의 자국 병사들에게 보내려고 물건을 모으고 푼돈을 저축한다고 합니다.” 힘을 다하여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 그렇습니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깃발이 있고 전쟁이 있습니다 . 나는 자정 이후에 잠이 들어 3 시에 일어나려고 하면 허리띠를 풀어놓을 여유가 없습니다 . 나는 언제나 싸움을 위해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 그때 시무언은 강단 앞에 놓여있던 헌금주머니를 보면서 외쳤다.

“ 자기 나라에 세금을 낸 일이 없는 백성은 불쌍한 백성입니다 . 이전의 우리는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큰 빛으로 인도된 거룩한 나라의 백성입니다 . 무식한 나라의 백성은 왜 세금을 내는지 모릅니다 .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 구원과 생명과 사랑에 대한 감사 ,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고마움 때문입니다 .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 천국을 소유하면서 이 땅에서 하늘의 왕께 바칠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 기쁜 마음으로 왕께 드리기를 주저하지 맙시다 . 나는 지치고 약하나 예수님은 이기셨습니다 . 나는 가난하나 예수님은 차지하셨습니다 . 나는 시험을 받으나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 모두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곁에 계십니다.” 

이 위대한 맺음말에 모든 성도들은 일어나 목소리로 높여 크게 ‘ 주 예수 이름 높이어 ’ 를 불렀다 . 그 순간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일어나 드리는 영광스러운 찬양이었다.

 

이 지구 위에 거하는 온 지파 족속들 

그 크신 위엄 높여서 만유의 주 찬양

 

그때 나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수세기 동안에 걸쳐 울렸던 장엄한 메아리를 듣는 듯했다.

 

영광스러웠다 . 하지만 이것은 한낮의 영광이 아닌 저녁노을의 영광이었다 . 잠시 동안 하늘에 펼쳐지는 광채를 위하여 태양은 불타고 구름은 몰려들었다 . 그러나 이 광채 다음에는 …… .

 

 

 

 

<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10 장

저녁 노을

 

이쯤 되니 모든 사람들이 이 목사를 알게 되었고 그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부흥회 , 기도 , 울음 , 외침 , 귀신들린 사람의 치유 등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고들은 얘기들을 퍼트렸다.

그러나 그 소식 중에는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와 같이 불길한 것들도 섞여 있었다 . 파도가 일게 되면 다가올 폭풍을 걱정하게 된다 .

시무언은 예언된 수명인 30 세를 넘겼다 . 하나님은 그의 수명에 1 년 , 2 년 , 그리고 이젠 3 년을 보태주셨다 . 시무언의 사역은 끝나가는 듯 보였다 . 아무튼 그의 영광은 지는 저녁노을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공개적으로 목사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반발하였다 . 이로 인하여 그의 명성은 퇴색되었다 . 그들은 예배 후 기도시간에 그 가 불을 끄게 했다고 하면서 그의 명성을 더욱 퇴색시켰다 . 또 그들은 그가 여신도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의 명성에 흠을 냈다 . 그들은 그가 교인들로 하여금 이상한 교리에 관심을 갖도록 했고 교인들을 평안하게 하지 않고 흥분을 시켜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많은 교회로부터 몰려났다.

이런 비난들은 그의 신중치 못한 행동으로부터 발생된 것이지 그의 행동에 죄가 있었기 때문은 전혀 아니었다 . 하지만 결과는 비참한 것이었다 . 시무언이 비난했던 목사들은 사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 그러나 비난을 하더라도 개인 혹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비공개적으로도 할 수 있었겠다 . 기도를 위해 방을 어둡게 하는 데는 심리학적으로도 일리가 있고 선례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조선의 교회와 사회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다른 중요한 이유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 목사의 사역 대상에 양떼의 일부인 여신도들을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그러나 조선의 예의범속을 좀더 신중히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사실 기독교는 불가사의로 가득한 종교이지만 초신자들은 무익한 거짓 교리로부터 온전히 보호되어야 한다 . 이 모두에 대하여 할 말은 있었으나 상황을 호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냥 두었으면 아마 시무언은 이 모든 것들을 점차적으로 고쳐갔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문제는 달랐다 . 그의 신비주의의 정수가 여기에 있다 . 성령의 능력과 인도를 무한히 받아드리는 그는 어떠한 교리라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 그는 억제하거나 유도하지 않았다 . 성령은 자유롭게 역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러므로 그는 신중함조차도 성령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무의미한 방언과 가짜 은혜가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놓았다 . 예를 들어 종종 조선에서 있는 일이기는 하나 , 설교가 끝난 후에 모두가 오랫동안 통성으로 기도를 했다 . 이때 시무언의 말들은 교인들을 진정시키기보다는 이들의 울음과 흐느끼는 소리를 더욱 고조시켰다 . 종종 수시간 동안 울고 바닥을 치고 떨며 실신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런 일들을 모두 성령의 역사로 보았기에 통제하지 않았다 . 이런 분위기 가운데에는 많은 함정들이 있는데 균형 있는 조언을 통해서 이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무언은 자신이 하는 것을 믿었으므로 바뀌지 않았다 . 비판을 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 신비주의자인 그는 침착하게 그의 영혼 안의 빛을 따라갈 뿐이었다 . 수년 동안 매일 죽어왔던 그에게 이런 것들은 괘념할 바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지금 원수가 점점 많아지는 판이올시다 . 이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탓이겠지요 . 예수님이 그 거룩한 어머니와 형제들에게도 이해를 받지 못하고 친구들에게도 버림을 당하여 외롭게 혼자서 사형을 당하시더니 , 아마 내가 그렇게 될까 봅니다 . 전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차차 나의 대적이 되고 전에 나를 신임하던 부모도 차차 나를 불신임하고 나를 이해 동정하던 형제와 처도 나를 이해치 않사오니 장차 나의 영 ( 靈 ) 의 길을 막아 하나님의 성의를 이루지 못할까 두렵소이다.

 

지금 나 하나를 가운데 두고 마귀는 굉장히 역사를 합니다 . 이렇게 여러 방면에 서서 마귀는 나를 공격합니다 . 나는 그 가운데서 꼭 마귀에게 사로잡혀 죽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주님이 사방에서 나를 지켜 주심으로 내가 지금까지 견디었나이다 . 할렐루야 . 아멘

 

몸이 상하고 자신감도 손상된 이때에 어려운 시험을 맞았다 .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의 비판은 이 시험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라고 하겠다 . 그의 말대로 마귀의 역사는 굉장하여 그의 가장 약한 곳을 공격했다 .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하여 인간의 삶에 관여하시는데 , 이미 얘기했듯이 시무언의 약점은 여기에 있었다.

성령에 저항하여 파멸된 사람도 있었다 . 그러나 시무언은 정반대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하여 너무나 수용적이어서 신성한 능력뿐 아니라 사탄의 능력도 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 교활한 마귀는 그곳을 공격했다 . 사탄은 빛의 천사로 둔갑하여 미혹하므로 그런 위험은 그가 감수해야 했다.

 

1932 년 2 월 젊은 여성과 신학생 몇 명이 입류 (trance) 를 시작하여 그들 주변 사람들의 과거 일들을 알게 되었고 나중에는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도 받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 이 현상의 시작은 시무언과 전혀 관련이 없었으나 그는 피할 수 없이 이 일에 연관이 되었다 . 수개월 동안 그는 그들과 자주 만났다 . 그들은 기도 모임을 종종 가졌는데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그중 한 사람에게 영감이 내리게 되면 그가 모임의 전체나 한 개인에게 얘기를 시작했다.

이런 기도회 중에 한번은 시무언이 ‘ 성령 ’ 에 의해 말한다는 한 젊은 여인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 너는 무엇을 위하여 설교하고 돌아다니느냐 ? 그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 나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네 설교나 부흥회가 무슨 소용이냐 ? 기양에서 실패하지 않았더냐 ? 꿈이나 환상도 없지 않았더냐 ? 이런 것들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 보라 . 이 시대의 마지막 때에 내가 새로운 일을 하겠다.”

“ 어찌하여 이런 죄인들에게 나타나십니까 ?” 

시무언은 말을 하고 있는 이에게 물었다.

“ 내가 죄인을 사랑하는 줄을 모르느냐 ? 나는 세상에서 멸시 받는 자들에게서 영광 받기를 원하노라.”

“ 어찌하여 이런 무식한 여자가 당신의 말씀을 전합니까 ?” 

그가 물었다.

“ 내가 유식한 사람을 통하여 말한다면 너는 그가 그의 지식으로 얘기한다고 할 것이 아니냐 . 너는 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다 .” 

세 번째로 그는 용감히 물었다.

“ 지금 이 일이 마귀의 일인지 하나님의 일인지 모르겠나이다 .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옵고 이 예언하는 종을 시험하나이다 . 하나님을 믿습니다 . 이 일이 당신의 일이라면 저의 물음을 용서하옵소서.”

 “ ​도마야 , 네가 나의 옆구리를 만져보기 전에 믿을 수 있었으면 더 큰 은혜를 받았을 텐데 . 시험을 한 후에 믿겠다고 하니 너의 믿음이 적구나 ” 

라는 결정적인 대답이 한숨과 같이 이어졌다.

이젠 주사위는 던져졌다 . 시무언은 믿었다 . 그 말은 깊은 영적인 것이고 예언됐던 일들은 실제로 일어남으로 증명이 되었다 . 그는 “ 이것은 사탄의 역사가 될 수 없으므로 성령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 고 결론을 내렸다 .

 

이런 결론에 도달하자 , 그의 친구들은 경고했고 동료들은 비난했다 . 그러나 그에게 그런 경고와 비난은 하나님의 역사에 반대하는 일로 비췄을 뿐이다. 반대로 사람들에게 시무언은 마치 항구로 예인 ( 曳引 ) 되는 고장난 배처럼 비이성적이고 고집 세고 현혹된 불쌍한 인물로 비췄다 . 이런 소요가 끝나기 전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 그 중 많은 것들은 괴상한 얘기들인데 곧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피할 수 없이 그가 일생 동안 맺어온 사람들과의 관계들은 금이 가게 되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가 시작됐다 . 이들은 신비적이고 , 감성적이고 , 열렬하고 , 고난을 감내하는 사도적이었다 . 이런 새로운 관계가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1933 년 3 월 그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교회와의 관계가 단절됐다 . 이 시기에 새로운 모임은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1933 년 3 월 19 일 그는 부친에게 편지했다 .

 

소자는 연회에 문제가 많아 목사직을 내놓게 되었으며 월급은 벌써 양력 2 월부터 끊어졌습니다 . 마귀는 저를 크게 시험하나 주님은 늘 넉넉한 은혜로 더욱더 보호하십니다 . 또 소자 근일은 몸이 매우 피곤한 중에 있어 사람들은 걱정하오나 주 또한 지켜주시니 염려 말아야 하겠습니다.

늘 기도하고 늘 감사하고 오래 참으십시다 . 혹 다른 교역자나 교인을 만나면 사랑과 정성으로 대접할 것이고 할 수 있는 대로 도와줄 것이며 조금이라도 걱정이나 염려나 원망은 마시옵소서 . 인간으로서의 자랑을 하나님이 없게 하시고 겸손히 말없이 기도와 감사로 지낼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이 모임의 조직화에 반대하였으나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면서 마침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했다.

그의 편지 한 통을 통하여 시무언이 ‘ 예수교회 ’ 라 불리는 새로운 조직의 초대 선도감으로 추대된 데에 대한 심정을 살펴볼 수 있다.

아 , 나의 이름이 새 교회 관리자로 들림의 아픔이여 . 나를 찌르는 가시로다 . 나는 땅 위에 이름을 남기기 원치 않았더니 , 이 어인 모순인고 . 이것도 또한 주가 주시는 가시관이었던가 . 주는 나에게 평안과 기쁨도 많이 주시고 또 아픔과 괴로움도 많이 주시도다 . 주 주시는 것이면 음부와 사망의 고통이라도 받을 수밖에 없으니 , 이것은 한 포로 ( 捕虜 ) 인 것인가 . 그리하여 포교소 ( 布敎所 ) 관리자의 가시관도 결국 받아쓰고 마는가 . 오 주여 , 할 수만 있으면 이 잔과 이 관을 나에게서 떠나게 해주시옵소서 . 오 그러나 주여 ,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성의대로만 하시옵소서 . 아멘 . 아멘 .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모순되어 보이는지 !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 우리는 종종 오해하기도 한다 .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다 . 많은 이전 사람들과의 관계는 끝이었으나 교인들과 만든 새로운 조직체는 시작이었다 . 조선교회 역사의 대부분은 평탄했지만 시무언 개인의 삶을 비추어 보건대 새 교회도 평탄할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 저녁노을이 끝나면 새롭게 동이 틀 것인가 ? 아니면 …… .

 

저녁노을 그리고 저녁 별

그리고 나를 부르는 분명한 소리

 

 



<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11 장

그리고 저녁 별

 

 

시무언은 네 차례의 큰 싸움을 용감히 싸워 모두 이겼다 . 그러나 다섯 번째 싸움에서의 결과는 새로운 운동을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다.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시는 은혜의 증거 , 성령과의 명백한 교통 , 하나님의 심오한 역사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 , 특히 모두의 눈시울이 젖어있을 때 사랑에 관하여 한 영광스러운 말 , 이것들은 시무언의 강점이자 약점인 곳을 쳤다 . 시무언은 인간의 마음을 향한 하늘의 사랑에 대해서는 자제하지 않았다 . 이런 역사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결론을 지었다 .

마귀의 의도대로 그의 결론은 틀렸다 . 성실함 , 진지함 , 기적적인 능력은 늘 하나님에게만 속한 일들은 아니었다 . 과거의 많은 사례에서 보듯 , 마귀도 거짓된 역사를 통하여 복음전도의 열정을 자극하고 삶을 새롭게 하고 기독교인들을 회생시키면서 신실한 교인들의 후원을 받게 한다 .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역사를 방해하려는 마귀의 계략의 일부이다.

사탄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흉내를 낼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이미 경고했다 (마 24:24). 그들을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은 ‘ 그 열매로써 ’ 인데 , 그들의 열매는 10 년 또는 한 세대를 지나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보는 열매가 알곡인지 알곡을 가장한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렵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실수를 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사탄이 일하는 방법을 몇 가지 지적한다.

① 사탄은 종종 미술가들이 묘사하는 뿔과 발굽이 달린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사랑과 종교를 제공하는 매력적인 가짜 신이다 (고후 4:4).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는 동안 그는 하나님 주시는 모든 것을 자신이 사람들에게 주는 것처럼 가장한다 . 그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② 속임수는 사탄의 수단이다 . 영리할수록 수단이 뛰어나다 . ​

③ 그러므로 사탄의 종들도 기적을 행한다 . 사탄은 선하게 보이는 일들을 내세운다.

④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탄이 진리를 유사하게 흉내내는 것을 허락하셨다 (신 13:3). 그러나 하나님은 확실한 지침 하나를 주셨다 . 달리 말하면 , 새로운 운동에 대한 시험방법은 교리로써 판단하는 것이다 . 즉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

이들 조선의 신비주의자들은 이 시험의 참뜻을 알지 못했다 . 그들은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감정적인 경험만을 확대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 이런 경험은 만물이 지어지기 전에 계셨고 , 만물을 만드시고 , 처녀에게서 나시고 ,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다시 사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다시 오실 위대한 그리스도보다도 부각된다 . 그들이 이러한 진실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 교리에 대한 무관심은 항상 심각한 문제이다 . 그러므로 이런 시험방법에 의해서 이 운동의 부족한 점이 드러난다.

이 경우에 또 다른 실용적인 시험방법이 적용될 수 있겠다 . 이 집단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므로 신명기 18:20~22 에 제시된 시험방법이 해당되겠다 . 한 마디라도 틀리면 예언자는 그로 인해 들통이 나는 것이고 모세의 율법 하에서는 더 이상 논란 없이 즉시 죽임을 당했다.

이 집단의 많은 예언이 적중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적어도 시무언에게 태어날 아들이 장차 큰 일을 할 것이라는 예언은 분명히 실패했다 .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고 그나마 태어나서 금방 죽었기 때문이었다 . 하나님의 평범한 시험방법을 적용해도 이 운동의 부족함은 다시 한 번 발견된다.

성경을 통한 시험방법 외에 , 두드러진 특징을 가졌던 다른 운동들과 비교하는 것도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겠다 . 이들 특징은 3 개의 심리적 , 4 개의 물리적 요소로 되어있다.

 

 

1. 반주지주의 (anti-intellectualism)

 

시무언이 예언을 하는 여인 중의 한 명에게 어떻게 예언이 오는가 하고 물었더니 , “ 저는 생각하지 않고 느낌을 따라서 말합니다 ” 하고 답했다 . 똑같은 고백이 1 세기 전 어빙 (Irving) 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있었다 . “ 한가지 사실은 , 인간의 이해력을 비난하고 평가절하시키는 것입 니다 . …… 우리 안에 있는 영은 언제나 우리의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습 니다.”

 

 

 

2. 사소함 (triviality)

 

몬타니스트 (Montanists), 카미사드 (Camisards), 어빙주의자 (Irvingites), 오순절주의자 (Pentecostalists) 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 옛날이나 현재나 이런 종류의 운동들 가운데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사소하고 우발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행하는 특별 예언의 내용들이다.

“ 선다 싱이 하늘로 올라갔고 그의 거짓 환생이 몽고에서 나타날 것이다 .” 

“ 예수님의 진짜 생일은 1 월 3 일이다 .” 

“ 그의 부활일은 4 월 14 일이다 .”

한 여인은 신령한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뜨거운 난로에 집어넣었다가 아무런 상처 없이 꺼내 보였다 . 그러나 은혜와 구속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인 이해는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보다 떨어져있었다 . 모든 것을 종합하면 , 내용에 비해 포장만 요란했다 .

만약 오늘날 영광의 주님이 한 예언자를 선택하시어 말씀하신다면 , 이런 종류의 사소한 말씀은 아닐 것이다 . 기존의 기록된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중대한 가치를 지닌 말씀일 것이다 . 보편적 적용이 가능한 폭넓은 원리를 말씀하시면서도 한 특정 시대에 주시는 긴박한 말씀일 것이다 . 옛 말씀에서 보듯이 , 이런 경우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들의 것과 비교하여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3. 분리성 (divisiveness)

 

이 집단의 사람들이 먼저 일반 신자들과의 단절 (separation) 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에게 단절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 이들은 자신들을 순교자라 하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유대와 로마에 맞선 예수님과 사도들의 처지와 비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헤롯 왕과 네로 황제가 교인들을 박해했던 것과 다른 교인들이 자신들을 비난하는 것을 동일시하였다.

이전의 어빙주의자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 “ 단절의 영은 계시 (utterance) 의 유무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 그 결과는 매우 엄청났다 . 이 기준에 따라 많은 정통주의자들이 이교도로 몰려 쫓겨났다.” 

 

 

4. 물리적 현상

 

(a) 시무언이 인도한 마지막 부흥회에서 몸의 떨림이 매우 두드러졌다 . 스와미 비시타 (Swami Vishita) 의 『 진정한 영매술 』 (Genuine Mediumship) 의 237 페이지가 조선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

“ 영력이 오면 특이한 떨림이 일어나는데 손과 팔의 경련이 일어나고 어떤 때는 온몸으로 확대된다.”

 

(b) 조선의 운동에서 입류를 할 때면 언제나 1~2 분간 숨을 죽이고 있다가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 비슷하게 조선의 무당들도 영이 드나드는 것을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로 표시했다 . 『 진정한 영매술 』 에 따르면 급하고 불규칙적인 호흡은 영이 들어올 때 생긴다.

 

(c) 다음으로 이들 중 일부는 무의식에 빠진다 . 『 진정한 영매술 』 의 236 페이지에 기록된 내용에 해당된다.

 

“ 입류 상태에서 말을 하는 영매가 되면 기절한 듯한 느낌이 오게 되는데 완전히 무의식 상태가 될 때까지 계속될 수 있다.”

 

(d) 입류 상태의 현상은 『 진정한 영매술 』 의 239 페이지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 영은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하게 영매의 음성기관을 통제하므로 영이 스스 로의 음성기관을 사용하는 것처럼 들린다.”

 

같은 현상이 조선의 무당들에게도 일어난다 . 마귀의 역사와 유사한 점이 많고 무시하기에는 너무 놀랍다.

이 운동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입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운동을 인정한 시무언은 실수를 했다 .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그들의 진실함을 공박하고자 함이 아니고 시무언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다.

시무언은 이 운동을 통해서 은혜의 요소들을 보고자 했다 . 작아 보여도 무한히 중요한 하나님이 남기신 표적을 찾고자 했다.

그가 쉽게 실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 건강의 악화 및 본질적인 시험 자체와 더불어 , 두 가지 사실이 있다 . 이전 동료들과의 교제가 끊어지면서 다른 집단이 그를 열렬히 맞아주었다 . 마지막 때 그의 옛 친구들은 그를 떠났다 . 그러므로 그를 용서하자 .

몸은 쇠하고 마음엔 상처뿐인 상태에서 새로운 친구들과의 어울림은 마치 편안한 쉼터에 도달하여 닻을 내리는 것과 같았다 . 모든 비난과 마찰과 충고는 밖의 겨울 바람처럼 휙 지나가버리고 , 이젠 따뜻함과 환대 , 친교 , 기도 등과 같은 가족적인 분위기가 다가왔다.

그 집단은 공통점들이 있었다 . 모든 이들은 가까운 집안의 형제자매들이었다 . 모두들 자유롭게 웃고 일하고 예배했다 . 이들의 예배는 부흥회 같았다 . 성찬식도 성스러움은 유지하지만 , 가족식사의 모습과 유사했다 .

전국에서 힘들게 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전해 듣고는 모여들 었고 이들은 아낌없는 환대를 받았다.

쇠약한 시무언이 받는 이 마지막 위로를 누가 시비하겠는가 . 이는 마치 그의 장례를 예비하기 위한 향유와 같았다 . 비록 잘못된 집단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 종의 마지막 날들을 위로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 누구를 통해서든지 시무언을 따뜻하게 위로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그가 예수교회의 선도감이 되고부터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더 이상 설교를 하지 못했다 .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참된 교인이라도 재기할 수 없 었다.

그는 이제 저녁 별로서 비취고 있었다 . 조선 나이로 33 세밖에 안 됐지만 그는 벌써 노쇠했다 . 그의 사역은 이제 마무리되는 것 같았고 그도 소원했던 대로 “ 다 이루었다 ”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렇지만 1933 년 5 월 1 일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직도 불굴의 기상이 살아있었다.

 

편지 없어도 대강 소식 알 줄 아오.

입맛 달아 밥 잘 먹고 , 마음 편해 잠 잘 자고 , 날마다 누워 안식이니 내 평생에 이런 호운 ( 好運 ) 쉽지 않소 . 주 날 사랑하사 독자같이 아끼시고 , 용사 같이 먹이시니 채찍 얹어 몰아내시는 날이 있을지라 . 내 그날을 기다리고 피를 모으니 최후의 일성을 외치고 갈진저. 내 이제 백골이라 그냥 갈까 염려마소.

 

 

 

< 제 1 부 : 시무언 , 신비의 조선인 크리스챤 >

 

 

 

제 12 장

열정의 시무언

 

 

열정은 이 신비주의자 시무언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설명하는 핵심어라 하겠다 . “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시 69:9) 는 그가 자주 인 용하는 구절이었고 그의 삶이 충실히 보여주었다 . 이 같은 열정에 삼키어져 버린 자는 흔치 않았다 . 그러므로 사탄은 그를 뒤로 끌어 당기지 못하고 반대로 앞으로 밀쳐버리려고 했다.

열정은 사실 하나님이 주시는 속성이다 . “ 주님은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사 59:17) 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 육신을 입고 세상 가운데 계실 때 주님은 정말 열심으로 사시지 않았는가 ? 정열적인 시몬의 위치를 열두 제자 가운데 정해주시지 않았는가 ? 스스로 만족해 하는 교인들을 향하여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고 오래 전부터 말씀하지 않았는가?

주님은 이 땅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 . 누군가 성자 화이트필드 (Whitefield) 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 그는 광적으로 설교했다 ” 고 하였다 . 어느 목사는 꿈 가운데 열정의 구성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 열정은 총 100 파운드의 무게인데 야망과 편협함 그리고 칭찬과 권위에 대한 사랑 , 종파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4 파운드 , 사람에 대한 사랑은 3 파운드 정도이므로 순수한 열정의 합은 총 100 파운드 가운데 7 파운드밖에 안 된다 .” 

그러나 시무언의 열정은 이와는 달랐다.

시무언에 내재하던 하나님의 소중한 일부인 이 열정을 마귀가 교묘하게 침해했다 . 마귀는 달리 그를 이길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에게 덫을 놓았던 것이다 . 비겁한 자는 상대방이 지쳐있을 때 공격하듯이 마귀도 그렇게 했다 . 빛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는 그를 신비주의로 빠뜨려 원래의 교단에서 축출 당하게 하고 거짓 운동으로 그의 명성을 더럽혔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교파를 ‘ 시무언 교회 ’ 라고 부르기도 했다 .

그러나 이런 외부적 관계의 변화 때문에 우리가 그를 배척할 필요는 없다. 시무언이나 우리가 파당을 지어 바울파 ( 派 ) 나 아볼로파에 속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함께 담당하는 동역자들이다 .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양한 재능을 발휘하여 봉사할 수 있다 . 이런 면에서 시무언의 큰형인 용채 ( 用采 ·Using Diversity) 와 그의 동생인 만수 ( 萬壽 ·Live Forever) 의 이름은 예언적이다 .

시무언이 끊임없이 의지했던 구원자는 세상의 자녀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고 죽음의 순간에도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않겠고 다시 돌아오리라 ” 고 하셨다 . 한 편지에서 시무언은 다음과 같이 썼다 .

 

살림이 가난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세상이 어려워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나라는 망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사회는 소란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배울 길은 막혀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사람들이 욕하고 비웃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몸은 병들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육신은 죽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그의 그리스도는 또 구유에서 나신 초라한 아기였고 목수의 아들로서 가난한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겸손한 나사렛 사람으로 머리를 둘 곳도 없으셨고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의 아들이었으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모두 행하셨다 . 산에서 외롭게 밤을 세우며 우리의 기도를 중재하셨고 가족들에게까지 제정신이 아니라는 오해를 받아가며 , “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49) 라고 하시는 열정을 가지셨다 . 제자의 발을 씻기신 순종의 종이 셨고 멸시와 배척을 당해 슬픔 가운데 계셨던 초라한 분이셨으나 마지막에는 “ 다 이루었다 ” 라고 외치셨던 불굴의 일꾼이셨다 .

 

 

시무언이 받은 많은 은혜 중에서 몇 가지는 아주 탁월하다.

 

①  첫째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 사랑 ’ 이다 .

“ 사랑밖에는 다른 사명은 없습니다 ” 라고 설교했다 .

“ 주님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 주님은 속마음을 보시기에 높은 자나 낮은 자나 , 외국인이나 내국인이나 , 아이나 어른이나 , 적까지도 구분 없이 한결 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

창기와 거지 , 무식한 자 , 아이들을 싫어하는 것은 예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 성프란시스 (Francis of Assisi) 와 같이 그의 사랑은 새 , 나무 , 바위들에게까지 확대된다 . 그는 바위를 하나님의 제단이라 부르면서 바위가 딱딱하거나 차갑다고 탓하지 않았다 . 그는 “ 낮의 새들은 그의 설교를 들어주는 친구요 , 밤의 벌레들은 그와 같이 기도하는 친구 ” 라고 하였다 .

 

②  기도는 이러한 사랑의 필연적 결과였다.

기도는 그의 삶의 일부분으로 일상대화나 설교는 자연스럽게 기도로 이어졌다 . 사람들은 언제 기도로 바뀌어졌는지를 잘 의식하지도 못했다 . 기도는 매우 아름다운 구슬들이나 ,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구슬들은 서로 연관 없이 인생이라는 줄에 매달려있는 상태이다 . 그는 성경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한 후 바로 하나님의 정원으로 모두를 인도한다 . “ 오 , 아버지 …… .” 라고 할 때 모두들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게 된다.

기도의 형식을 통하여 전보를 받는다고 할 때의 놀라움을 상상해보라 . 한번은 큰 부흥회 도중에 그가 나에게 전보를 보냈다. 

“ 주님 , 피 목사를 급히 보내주옵소서 .”

“‘ 기도로 살다 기도로 죽어 .’ 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 기도는 우리의 본업이요 , 그 외의 것은 다 부업입니다 . 본업에 실패한 자 , 부업만을 가지고 살기 어렵습니다 .” 또한 “ 그저 기도합시다 . 기도의 불이 살아 있는 유일의 증거구려 . 욕을 먹으면서라도 기도합시다 . 쫓겨나서도 기도합시다 . 최후에 승리는 기도자들에게 있을 것이니 …… .”

 

③ 그의 사랑과 거의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셋째 은혜인 겸비 ( 謙卑 ) 이다 . “ 거지라도 주님과 같이 , 아이라도 선지자 같이 대접할 겸비에 들어가길 기도합니다.”

또한 “ 나는 난봉에게서나 아이에게서나 무식한 자에게서나 불교인에게서나 무교회주의자에게서나 , 누구에서든지 다 배울 바를 찾는 자이외다 .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어떤 때 저희의 어떤 점보다 못한 것을 내 속에서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겸손히 저희에게서 이를 배우지 아니치 못합니다 . 나는 남을 가르칠 자가 아니요 , 배울 자이니 , 일생 학생심 ( 學生心 ) 을 가지고 배워 마땅한 자입니다 . ‘ 선악 ( 善惡 ) 이 개오사 ( 皆悟師 ) 라 .’ 모든 것이 다 나의 스승이 되어 있습니다.”

“ 겸비는 마지막으로 갖는 덕입니다 . 사랑과 믿음과 다른 모든 은혜는 겸비 보다 먼저 얻을 수 있습니다 . 나는 ‘ 주님 , 저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리는 시므온입니다 .’ 그러면 눈물이 흐릅니다 .”

그에게 한 집회의 성공을 축하했더니 , 그가 대답했다 . 

“ 난 그저 성령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

 

④ 그의 사랑은 또 다른 은혜와 섞이는데 , 십자가를 지는 은혜가 그것이다 . 한번은 그가 저녁 가족기도회를 드리며 ‘ 십자가 가까이 ’ 를 부르는 중에 가사에 감동을 받았다.

 

그 고통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몸소 지셨던

 

그리고는 기도했다.

“ 예수님은 머리 둘 자리도 없으셨고 그의 외투를 수없이 벗어 주었고 그의 모든 힘과 모든 가진 것을 마지막 하나도 남김없이 쓰시고 오로지 피 몇 방울만 남기셨습니다 . 그리고는 그는 ‘ 다 이루었다 ’ 라고 외치셨습니다 .”

 

⑤ 이쯤 되면 시무언의 다음의 은혜인 ‘ 비 ( 非 ) 세속성 ’ 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겠다 . 그는 친구를 꾸짖는다 .

“ 세상이 너를 버린다 하여 너는 슬퍼하느냐 ? 그러면 너는 세상의 환영을 받아 거기서 영생을 얻을 줄로 생각하느냐?”

그는 ‘ 오래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 고 수없이 말해왔다 .

“ 단 몇 년을 살더라도 온전히 기도하며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 나는 예수님과 함께 ‘ 다 이루었다 ’ 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다.”

한번은 내가 그에게 충고를 했다.

“ 예수님의 짧은 생애가 우리에게도 이상적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 예수님의 임무는 달랐습니다 . 그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후 다시 사셔서 전할 말씀이 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세상에 왔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잘 돌보아야 합니다 .” 그가 대답했다 . “ 나는 속히 죽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웨슬리와 에디슨의 장수는 가치가 있습니다 . 왜냐하면 수명이 길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지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오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다 . 장수는 스스로 원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 우리의 생사 ( 生死 ) 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므로 오늘 내가 사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 나는 하나님을 위해 남 김없이 쓰기를 원합니다 . 만약 하나님이 내일 다시 나를 쓰시기 원하신다면 내 생명을 연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 나는 부흥회에 설 때마다 기도합니다 . ‘ 주님 , 제가 이 집회를 마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르오니 저의 마지막 힘과 생각을 오로지 당신께 바치게 하옵소서.’”

 

그의 비세속성의 두 번째 측면은 돈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이다 . 돈이 있을 때 그는 아낌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 그러나 돈이 없을 때 그의 필요는 어떻게든 누구로부터이든지 충족되었다.

“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마음에 있으면 당장 내가 가진 돈을 모두 써버린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종종 고난을 겪었다 .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을 위로하는 마음이 넘쳤다 . 먹을 것이라고는 쌀과 오이밖에 없을 때도 거리낌없이 손님을 맞았다 . 그의 아내인 송봉애는 오이만 가지고 다섯 가지 반찬을 만들어냄으로써 궁핍함을 감쪽같이 숨겼다.

그의 비세속성은 그가 살던 시대로부터의 대담한 단절에서도 보인다.

 

난 미래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 나는 오로지 오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 지금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 나는 지난 일을 상관하지 않습니다 . 과거에 사용했던 방법을 생각하면서 성령이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시리라 기대한다면 , 나는 벌써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 지난 번의 승리와 은혜는 방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인한 것입니다 . 새로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과 연합하는 데 있습니다.

 

그의 비세속성의 다른 일면이다 . 그에게 단순한 크기는 의미가 없었다 .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이 예배를 위해 모였을 때 , 그는 특별히 유익한 말씀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대중 ( 大衆 ) 에게서는 실패를 당하나 한 사람에게서 승리를 얻는 것이외다 . 공회 ( 公會 ) 에서는 실패이나 한 사람 앞에서는 완전한 승리를 얻습니다 . 그런고로 저희들은 공회적 , 법적 승리를 기대하여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 하였으나 각 사람을 상대해서는 함구 ( 含垢 ) 패배이었던 것입니다 . 공회의 마음은 얻었으나 결국은 한 사람의 마음도 얻지 못한 것이요 , 주님은 한 사람의 마음을 얻으므로 결국 만인의 영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생명 , 돈 , 시간 , 숫자 등 육과 세상이 귀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이 시대는 이런 사람을 크게 칭송해야 한다 . 그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자신의 그림자를 크게 드리우면서도 쉘리 (Shelley) 가 얘기하는 ‘ 천천히 전염 되는 세상의 더러움 ’ 에 굴하지 않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데이비드 그래이손 (David Grayson) 처럼 살지 못할까봐 염려했던 사람이었다 .

“ 사람은 그가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시간인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온몸으로 아낌없이 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의 열정의 비밀을 알 수 있다 . ‘ 지금 이순간 ’ 만을 생각하는 무모한듯한 대범함으로 내일에 대한 아무런 걱정 없이 그는 살아왔다. 그의 편지 중 일부이다.

 

형아 , 나는 나의 일에 대하여 아무 수단도 방법도 없는 것을 알아다오 . 무슨 깊은 철학적 원리를 나에게 묻지 말아다오 . 죽음 ! 이것만이 나의 수단이요 , 방법이요 , 원리라고 할까 . 그리하여 날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냥 무식 스럽게 돌진하려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원인 시무언에게 성령은 이러한 대여섯 가지의 특별한 은혜를 허락하셨다 . 그의 영광으로 인하여 다른 모두가 기뻐했다 .

“ 저녁노을 , 저녁 별 , 그리고 분명한 부름 …… .” 그의 수고는 그 해 3 월에 끝났다 . 4 월 , 5 월에는 쉬고 있으면서도 장렬한 싸움을 간구했다 . 여름이 되니 그는 가망이 없어 보였고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 시무언을 존경하는 어느 젊은이는 시무언을 대신해서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시무언은 권면한다.

 

사랑하는 자여 , 네가 과연 네 몸을 드리어 나의 몸이 당하는 바를 대신하며 네 생명을 드리어 죽을 나의 생명을 대신하고자 하느뇨.

오 나의 사랑하는 자여 , 네가 나를 참으로 사랑하느냐 ? 그러할진대 너는 이제 나를 대신하여 무고히 병석에 눕기를 원치 말고 오직 너의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르기까지 그리하여 마침내 병들기까지 생명이 땅 위에 떨어질 때까지 진리를 외치고 핍박을 받으며 기도를 올리고 멸시를 받으라 . 나는 너의 몸과 생명이 공연히 병과 죽음으로 나를 따르는 일이나 , 대신한다는 일을 기뻐할 수 없노라 . 오직 진리로 나를 따르고 십자가로 나를 대신하여 나서기를 바라노라.

 

시무언은 몇몇 유명한 약수터에서 요양하기도 했었으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8 월초 원산으로 돌아왔다 . 1928 년 부흥회의 기억들이 서려있는 아름다운 정경 가운데에서 새로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1933 년 10 월 2 일 육신의 장막을 조용히 벗어놓았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인상적이었다.

“ 주님 , 제가 3 년만 더 살게 해주시면 거지들에게 말씀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 저는 그들과 함께 굶고 그들과 함께 잔치하겠습니다 . 그들과 같이 웃고 울겠습니다 . 오 주님 , 거지들을 위해 3 년만 살려주십시오 .” 시무언의 어머니 양마리아도 임종을 지켰다 . 그녀의 기도는 풍성한 열매를 맺었었다 . 동생 용구는 2 년 반 전에 , 순례는 몇 개월 전에 이미 앞서 운명을 달리하여 형 용채와 동생 만수만 남았다.

숨이 멈출 무렵 시무언은 형의 손을 잡고 말했다.

“ 내 눈을 보십시오 . 죽는 눈이 이런 것을 보았습니까 . 사람이 영생한다는 데 모두들 죽는 이야기들만 하니 이 무슨 어리석은 생각들입니까 . 영생을 믿으시고 죽는다는 말은 그만둡시다.”

시무언으로부터 물질적 도움을 구했던 그의 형은 기대보다 더 훌륭한 도움을 받았다 . 멀리 황해도의 어린 시절 이후로 그의 형은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

모든 가족 중에서 혼자 믿지 않았던 시무언의 아버지는 이제 마침내 가족들과 함께 머리 숙여 기도하게 되었다 . 그는 슬펐지만 역설적으로는 행복하게 되었다 . 그 해 봄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환상을 보았다 . 한밤중의 그의 신음소리에 온 가족이 깼다 . 그리고 새벽이 되기까지 가족들은 그가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내면의 어두운 모습을 보고 있었다 . 차츰 광경이 바뀌더니 그는 구세주를 대면하게 되었다 . 못 자국을 지닌 채 그의 의를 위하여 다시 사신 모습이었다 . 평안이 왔고 마침내 온 이 씨 집안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초대 교회에는 열정의 사람 시몬이 있었고 조선 교회에도 열정의 사람 시무언이 있었다 . 그들이 받았던 은혜가 그들과 함께 없어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열정 ? 예 , 주님 , 열정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 더 큰 열정을 구합니다 . 주님 , 분별하는 지혜도 함께 주시므로 사탄의 속임수를 물리치게 하옵소서 .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열정과 지혜를 간절히 원합니다 . 주님 , 우리 가운데 열정과 지혜를 지닌 주의 사자를 다시 한 번 보내소서 . 그가 오게 될 날을 알게 하심으로 우리는 마음의 촛불을 밝혀 그를 맞이하게 하소서.

 

 

 

이용도 목사를 기억하며

 

이용도와 나는 1930 년 경성 감리교단에서 장로목사로 함께 안수를 받았다 . 1930 년 연회에서 그는 경성의 주일학교연합회로 파송됐다 . 그가 경성에서 기거할 곳이 없었기에 나는 그를 청하여 함께 살았다 . 우리는 사직동의 다섯 칸 한옥에서 그의 가족들이 동해안에서 경성으로 이사올 때까지 3~4 개월 동안 같이 지냈다 . 우리 집 옆에는 영어교사였던 한인수 목사 가족이 살면서 우리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이용도는 나에게 참으로 정다운 친구요 , 형제였다 . 나는 한 성자와 함께 살 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 그는 나로 하여금 성프란시스 (Francis of Assisi) 를 생각나게 했다 . 그는 가끔 티벳에서 그리스도를 전했던 인도의 성자 선다 싱을 찬양했다 . 같이 집에 있을 때 나는 몇 시간 동안 이용도의 이야기와 설교를 들었다 . 그때 들은 이야기는 나의 글 ‘ 시무언 ’ 의 자료가 되었다.

이 글은 1935 년에 경성에서 발간된 기독교서회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회지에 실렸다 .

그가 가족과 함께 자기 집으로 이사를 나가자 나는 못내 서운했다 . 그러나 우리의 우정은 지속되었다 . 이용도는 예민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 그는 주일 학교연합회를 위해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 그러나 그의 능력은 그가 하는 일들보다 컸다 . 그를 대신하여 그 일을 할만한 사람은 많았다 . 그러나 그처럼 설교할 수는 있는 사람은 없었다.

1931 년 연회에서 이용도는 경성지방 순회목사로 파송을 받아 대중전도 사역을 담당하게 됐다 . 이 일에는 아무런 봉급이 없었기에 스톡스 (M. B. Stokes· 도마련 ) 박사와 나는 그를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 그 해 이용도는 전국에 걸쳐 유명해졌다.

1933 년 3 월 , 나는 조선을 떠나야 했다 . 감리교 선교국은 병으로 귀국하는 한 미국인 선교사를 나로 하여금 동행하도록 했다 . 1934 년 8 월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슬프게도 이용도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 이후 1~2 년 동안은 이용도의 부인과 연락이 있었다.

 

나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4 년간 신학을 공부했다 . 졸업하기 3 개월 전에도 나는 여전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 1928 년 2 월 10 일 금요일 저녁 , 나는 중국본토 선교회의 미국담당자를 만났다 .

그는 “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당신은 중국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 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 반쯤 열린 문으로 들어갈 생각은 마시오 . 하나님께서 당신을 움직일 준비가 되셨다면 ,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의 말이 있습니다 . 그것은 중국인의 손님에 대한 작별인사인 , ‘ 만만 소 ’( 천천히 가시오 ) 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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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 2 월 12 일 일요일 밤 교회에서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조선 (Korea) 에 복음전도자로 가게 될 것이다 .”

나는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살고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 그들의 답장이 왔다 .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네가 조선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 한 달이 지나 감리교 선교국에서 전보가 왔다 . “ 청원이 수락됨 . 조선에서 일하시오 .” 로스앤젤레스의 나의 모교회 ( 母敎會 ) 도 나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 이렇게 해서 문은 활짝 열리게 되었다 .

그리하여 1928 년 7 월 31 일 출발하여 8 월 29 일 부산에 도착했다 . 조선은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었다.

한인수 목사는 나에게 조선어를 가르칠 교사로 임명되었다 . 그는 양주삼과 함께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제 1 반에 속해있었다 . 약 2 개월 후에 나는 처음으로 조선어로 설교를 했다 . 마태복음 2:10 을 본문으로 용산감리교회에서 이었다 . 양주삼 박사는 나에게 조선식 이름을 선사했다 . ‘ 피도수 ’(皮道 秀 ) 이었다 .

12 월이 되어 추워지자 나는 솜이 든 조선옷을 입기 시작했다 . 첫 1 년을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지낸 후 나는 사직동에 있는 조선인 집으로 이사했다. 경성지방의 선교와 관련한 나의 근무처는 종로 근처에 있었으나 경성 동부 지역의 선교를 위해 의정부에서 선교사역을 했다 . 나는 신설리와 성북동에서 천막집회를 가졌고 그 두 곳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1934 년 , 나는 개성의 선교사로 , 1935 년에는 철원지방으로 파송을 받았다 . 김화교회에 담임목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을 담임했다 . 그러나 나는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 대구에서 만주에 이르기까지 , 그리고 중국의 북경까지 돌아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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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준 헌금으로 많은 교회를 세웠다 . 당시 약 200 불 정도면 조그만 시골 교회를 하나 지을 수 있었다 . 나는 김화에 돌과 타일로 된 지붕이 있는 조선식 교회를 지었다.

한흥복은 한 달에 두 번씩 여자 선교사 한 명과 함께 김화를 방문했다 . 금요일 저녁 , 그녀는 청년부 모임을 인도했고 토요일에는 여자들을 위한 모임을 인도했다 . 내가 그녀에게 일요일에 독창을 해주기를 요청했더니 그녀는 나에게 기타 반주를 부탁했다.

나중에 주위의 동료 하나가 “ 한흥복은 아직 미혼인데 몇몇 남자들이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다 ” 고 전해주었다 .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 그러나 몇 달 동안 그녀로부터 아무런 답이 없었다 . 그 후 짧은 편지 한 통이 날라왔다 . 단순히 “ 나는 지금 기도 중입니다 ” 는 것이 그 편지 내용의 전부였다 . 나중에 그녀는 “ 주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 라고 했다 .

우리는 김화에서 1938 년 2 월 12 일에 결혼했다 . 하나님께서 나를 조선에 보내신 지 10 년만의 일이었다 . 나는 젊은이들에게 호화로운 결혼식으로 빚을 지지 말 것을 충고하였기 때문에 국수와 보리차로 결혼식을 치렀는데 단돈 10 원이 들었다 .

흥복의  한  친구가 이화전문에서 우리를 찾아와서 조선잡지(Korean Magazine) 에 우리에 관한 기사를 써주었다 . 우리의 첫 딸이 1939 년 8 월 28 일에 태어났다 . 우리는 시편 84:11 의 말씀을 따라 ‘ 영은 ’ 이라고 이름을 졌다.

나는 항상 조선에서 살기를 원했다 . 그러나 1940 년에 미국 정부는 전쟁이 임박했다고 경고하면서 조속히 조선을 떠날 것을 충고했다 . 당시 경찰은 조선 사람들이 미국인과 같이 있으면 의심을 했다 . 또한 미국의 아버지가 병석에서 우리가 미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랬다 . 1941 년 우리는 슬픈 마음으로 조선을 떠나면서 곧 다시 돌아오게 되기를 기원했다.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우리의 귀환은 지연되었다 . 아내 흥복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고 곧이어 한국동란이 일어났다 . 그리고 이후에는 마땅 한 선교단체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교회와 함께 교회사역을 하게 되었다.

 

1976 년 이화여대에서 개교 90 주년 기념하여 우리 부부를 초청했다 . 우리는 한국에서 1 개월 동안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 맹기영 , 이호빈 , 김광우 , 한영선 , 박창혁 박사 , 그리고 김옥길과 같은 친구들은 우리를 왕과 왕비처럼 환대했다 . 장미꽃이 만발하고 가는 곳마다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 한국은 이전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1941 년에 서울에는 14 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400 개 이상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 우리는 한국을 이렇게 기억하고 싶다 .

이 글을 마무리하며 이용도 목사의 며느리와 손자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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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년 가을에 

피도수( 皮道秀 ·Victor Wellington    Pe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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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1933 년 10 월 2 일 , 이용도 목사께서 승천하신 이후 25 년간 기도하며 명상하며 하늘의 뜻을 기다려 오다가 주께서 나에게 지시하시는 바 있어 붓을 들 어 쓴 것이 이 글이올시다 . 이용도 목사 승천하신 지 반년 후인 1934 년 봄에 용도 목사의 서간집을 내면서 뒤이어 그에게 관계되는 책 5 권을 계속 출판할 것을 예고하였더니 , 용도 목사를 비방 모욕하는 소리가 세상에 하도 높아가며 이 출판 계획을 방해 조소함이 또한 너무 심하였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 사업이 주님의 뜻에 어그러지는 일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서 계획을 중지하고 때를 기다려 보기로 하였습니다 . 그런데 기도 드리며 기다려 오기 25 년 만에 “ 이제는 써라 ” 하시는 지시가 내리심이 있어 이에 이 글을 쓰게 된 것이올시다.

주님께서는 나를 살려두시고 , 일기 , 회고문 등 약간의 자료를 있게 해두시었다가 , 25 주기라는 예정된 때에 이르러 이 글을 쓰라 하심에 나는 나의 기도를 붓대로 삼고 나의 눈물을 잉크로 삼아 정성되고 엄숙하게 하늘의 음성을 들어 가며 조심조심 붓을 놀리어 이 책을 쓴 것이올시다.

병약 쇠잔의 이 몸이 용도 목사보다 25 년을 이 땅에 더 살아 있다는 것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요 , 내일을 보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 용도 목사의 사적에 관계되는 문헌을 일제 말엽의 그 악독한 손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죽음의 38 선을 수차 왕래하면서도 그 문헌들을 내 손에 무사히 넘겨 오게 하시고 6.25 사변에는 적귀들의 마수에 온통 빼앗겼었는데 그 손에서도 약간을 탈환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25 주기에는 쓰라고 하시니 나는 그저 그 명에 복종하여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 주의 명령의 음성이 들려올 때 나는 사양하고 거부하여 보았습니다 . 그런데도 쓰라고 하시니 더 앙탈할 수 없어 그저 붓을 잡게 된 것 뿐이올시다 . 주께서 나를 5 년만 더 이 땅 위에 두시겠다면 나는 이 글을 5 년 후에 쓰게 해달라고 연기를 청했을 것이고 10 년 , 20 년 , 혹 25 년을 더 두시겠다면 나는 50 주기에 쓰게 해달라고 애원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이 방면의 주님의 애정과 뜻하신 바를 알려주심이 없으시매 이때 이 기회에 내게 있는 자료와 내 정성 , 내 능력 등 나의 있는 바를 다 털어 바쳐서 우선 이 글을 써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이 책을 약전 ( 略傳 ) 으로 생각하고 결정판의 전기는 후에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오직 한국의 사도행전이요 , 묵시록의 속편이라고도 하는 이 글을 이런 병신을 살려두셨다가 박신오속 ( 薄信汚俗 ) 의 이 손으로 쓰게 하신 것에 너무 황공함을 느낍니다.

용도 목사의 그 기도와 , 그 외침과 , 그 사랑과 , 그 눈물과 , 그 땀과 , 그 피만은 길이길이 이 땅 위에 살아있어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서 길이 역사하리라는 주임의 음성이 지금도 내 귀에 들려오고 있나니 , 이용도 목사 , 그는 오직 주님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서만 일평생을 살았고 오직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만 땀과 피를 쏟고 가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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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년 4 월 6 일 

是無言 58 회 탄생의 날

변종호 씀

 

 

 

 

< 제 2 부 : 사랑으로 타오른 생명의 불꽃 >

 

 

 

제 1 장

성장기

 

 

출생의 시대적 배경

 

이조 500 년간의 적폐 ( 積弊 ) 와 적악 ( 積惡 ) 으로 국운이 점점 위태로워가는 19 세기 말의 이 나라에 특기할 두 가지 사실이 있었으니 , 외부 침략 세력이 날로 악착스러워지는 것과 신파 기독교가 1884 년에 이 땅에 전래됐다는 것이다 .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70 여 년간의 민족의 역사가 이 두 가지 사실에 의해서 , 혹은 이 두 가지 사실과 관련된 영향에 의해서 지배되고 조종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 즉 , 침략 세력이 쇠잔해 가는 나라와 민족을 결정적인 비운으로 채찍질해가는 것이었고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활동이 허덕이는 민족과 국가에게 희망과 위로로서 꾸준히 활력을 공급하여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근세 70 여 년간 우리의 역사는 나라와 민족을 해치려는 세력에 대항하여 이것을 격퇴하려는 호국의 노력과의 투쟁의 역사이었는바 , 즉 침략 세력에 대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적 호국의 노력이 그것이었다.

19 세기의 연속으로서의 20 세기 초두의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최대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 그러므로 20 세기 초두라는 산정 ( 山頂 ) 에 올라서서 이 나라의 지난 날을 회고하고 또 앞날을 전망하는 자가 있었다면 그는 오직 한마디 말을 부르짖었을 것이니 , 그것은 이 땅에 사람이 나와야 하겠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 즉 나라를 사랑하고 민중을 깨우칠 수 있는 사람 , 충성된 애국혼과 열렬한 신앙심을 가진 이가 나와야 되겠다고 외쳤을 것이다 . 그런데 이때에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손이 이 강산에 오는 많은 아이들 중에 특히 한 아기를 보내 주셨으니 중부 조선 황해도 땅에 고고의 성을 울린 이용도가 그 아이였던 것이다.

 

 

 

어린 시절

 

이용도는 1901 년 4 월 6 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이덕흥 ( 李德興 ) 씨의 셋째 아들로 세상에 왔다 . 그의 출생에 특별히 뛰어난 사실이 없었고 그의 어린 시절에 또한 특별히 기록할만한 사실이 없다.

어려서는 학질 등 잔병을 많이 앓고 신경이 과민한 편이었으며 울기 잘하는 점 등은 보통 이하의 변변치 않은 아이였다 . 그래서 부형들은 초저녁에 죽을 아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보통학교에 다니게 될 때부터 몸도 좀 건강하여지고 두뇌도 좀 발달된 듯하여 학교 성적이 중간 이상이 되었고 선생님에게 총애를 받았고 친구들을 잘 사귀어 항상 여러 친구를 거느리고 다녔다 . 이야기를 재미나게 한 다고 해서 친구들이 늘 이야기 좀 들려달라고 줄줄 따라 다닌 일이 있었고 친구들을 많이 모아 시냇가로 나가서는 군대놀이를 하는데 항상 대장이 되어 지휘를 하였다.

이렇게 자라나는 아이 용도의 가정 환경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부친은 대주가 ( 大酒家 ) 인데 모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었으므로 집안은 항상 편안하지를 못했다 . 불신대음 ( 不信大飮 ) 의 부친은 신앙의 모친을 항상 박해 압제하였다 . 그래서 그 모친이 어린 용도의 눈 앞에서 양잿물 사발을 추켜 든 때도 수차 있었다.

이렇게 살고 있는 모친은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의 기도를 항상 올리고 있었다 . 이 기도는 여러 자녀들을 다 위해서 올리는 것이었지만 특히 이 모친의 기도에 깊은 감화를 받은 아이는 셋째 아들 용도이었다.

13 세 때에 그는 벌써 기도생활을 하는 아이가 되었다 . 부형들의 말과 용도의 간증에 의하며 이때부터 예배당 종각에 올라가서 여러 시간 , 혹은 밤새도록 기도를 올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 이렇게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용도는 그 나이는 비록 어리나 그 신앙은 벌써 상당한 터 위에 서게 되었다. 1913 년경은 우리의 국권이 빼앗긴 지 4 년째 되는 해이었다 . 국권을 빼앗고 또 우리 동포에게서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침략자는 기독교 압박에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썼다 . 특히 교육기관에서 그러하였다 . 공립학교의 모범 교장이라는 시변리 공립보통학교의 교장 기무라 ( 木村 ) 는 기독교를 믿는 어린 이들을 몰고 학대하기로 유명하였다.

하루 저녁에는 용도가 울면서 들어와 하는 말이 내일부터는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이었다 . 그 이유는 교장이 악착스럽게 믿는 집 아이들을 탄압함으로 견디어 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 형이 학교에 가서 교장에게 용도의 퇴학원을 냈다 . 물론 용도가 퇴학하는 이유를 자세히 교장에게 말했다 . 그랬더니 며칠 후 교장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 이제부터 용도에게 대해서만은 신앙 문제로 아무 압박을 주지 않을 테니 학교에 보내라 ” 고 해서 다시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 이것은 용도가 하도 얌전한 모범 학생이기 때문에 교장이 그리했던 것이다.

이후 용도는 신앙의 터 위에 점점 든든히 서게 되고 그 중심을 충분히 발로 시켜 사랑 , 열성 , 희생 , 봉사의 생활을 실천하여 집안과 근처에 점점 그 존재가 뚜렷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중 기억에 남을 만한 것들이 몇 가지 있겠다.

누이동생 ( 순례 ) 이 하나 있었는데 어머니가 병중에 낳았으므로 젖을 한 방울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 이에 이 젖 못 먹는 어린 누이를 용도가 맡았다 . 아침 학교에 가기 전에 젖을 근처에서 얻어 먹이고 저녁에 일찍 돌아와 또 이 집 저 집으로 젖을 얻어 먹이러 다녔다 . 이 어린 누이에게 젖을 얻어다 먹이는 용도는 누이가 울 때 함께 울었고 누이가 배고플 때 함께 굶었다. 어머니는 병약하고 집안 살림은 가난하니 용도는 혼자 눈물과 땀을 다 쏟으며 살림을 거들었다 . 특히 없는 것을 얻으려 근처 집에 가서 구구한 사정을 말하는 일은 그가 혼자 도맡았고 물길어 주고 절구질하고 힘든 일하는 것도 혼자 맡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처음으로 환상을 체험했다 . 어느 날 밤중에 중풍에 걸리신 백부님이 갑자기 진유 ( 眞油 ) 를 사오라고 했다 . 이때 어린 용도는 사양치 않고 나섰다 . 캄캄한 한밤중에 혼자 길을 가노라니 키가 9 척이나 되는 마귀가 나타나 길을 가로막아 섰다 . 이때에 용도는 놀라지 않고 마음을 침착히 한 후 찬송가를 큰 소리로 불렀더니 하늘에서 천사의 날개가 내려와 그 마귀를 밀어내고 보호하여 주어서 그 길을 무사히 가서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고 한다 . 그의 일생에 여러 번 환상을 본 일이 있는데 이것이 그가 세상에서 처음 경험한 환상이라고 한다.

 

14~15 세가 되자 그의 재질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그는 손재주가 좋아서 대패 , 톱 , 망치 등을 가지고 항상 뚝딱뚝딱 무엇을 만들고 고치고 하여 집에 손질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다 맡아서 수리하였다 . 그는 일에 근면하여 무슨 일이든지 착수하면 끝이 날 때까지 꾸준히 근면하였고 무슨 일을 붙들면 미친 듯이 열중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결사 면려 ( 勉勵 ) 하는 성질을 가졌다.

말재주가 비상하여 15~16 세에 벌써 그 존재가 알려져 윤치호 , 이상재 , 양주 삼 씨 등이 놀래어 감탄하기도 하였다 . 이러한 재질과 성격을 가지고 든든한 신앙에 사는 용도는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누구에게나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귀염을 받아 집안에서와 근처에서 비상한 주목과 인기를 끌게 되었다.

 

 

 

소년 시절

 

시변리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용도는 1915 년에 개성 한영서원 ( 송도고등보통학교 전신 ) 에 입학하였다 . 수업 연한 4 년인 이 학교를 용도는 9 년 동안 다녔다 . 학비를 벌어 쓰느라고 반공 ( 半工 ) 을 하니 남이 1 년 하는 공부를 2 년 하여야 되었고 1919 년부터는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3, 4 차례 체포 투옥되었고 2 년간의 징역 언도를 받고 복역하기도 하였으니 남이 4 년에 마치는 공부를 9 년이 걸렸어도 정식 졸업장은 결국 못 받게 되었던 것이다 .

용도의 중학 시절 9 년 동안은 그 전부가 고민이요 , 눈물의 생활이었다 . 돈 없어 배가 항상 고픈 소년이니 신체가 충분히 발육할 수 없었고 기를 활짝 펴지 못하는 고학생이니 그 마음이 항상 고민과 비창 ( 悲愴 ) 에 살았다 . 다른 친구들이 공부를 마음껏 하다가 볼을 차고 던지며 흥에 겨워 놀 때에 용도는 쉬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노동을 하였다 . 괭이와 삽으로 흙을 파다가 허리가 너무 아파 주저앉아 울기도 하였고 , 흙짐을 지고 흙수레를 끌다가 거꾸러져 무릎에서 피가 난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어떤 때에는 학교 부설 직조장 ( 織造場 ) 에서 실을 고르고 직기를 다루기에 눈알이 빠져오고 어깨가 늘어져서 몸을 거느릴 기운도 없을 때도 있었다.

남들은 편안히 놀고 유쾌히 공부하면서도 밥을 배불리 먹고 군것질까지 하는데 용도는 끼니때에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 식당에서 식사 종 소리가 나서 모두들 식당으로 몰려들 때 용도는 슬그머니 딴 길로 나가 만월대에 가서 눈물로 끼니때를 보내는 적이 많았다 . 식사가 끝났을 무렵에 방에 가서 “ 용도 , 밥 먹었느냐 ?” 는 인사를 받게 될 때는 거짓 트림을 하며 배를 쑥 내밀어 보이면서 잔뜩 먹고 왔노라고 그럴 듯하게 속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 입은 옷은 항상 남루하였고 양말은 발을 가리운 부분보다 내놓은 부분이 더 많은 것이 보통이어서 주일에 주일학교 선생 노릇을 하려고 해도 여선생에게 양말 뒤축 뚫어진 것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못 가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고향인 시변리와 개성 사이는 140 여 리인데 언제나 방학이면 용도는 이 길을 늘 걸어 다녔다 . 차를 탈 돈은 물론 없었지만 도중에 노비 ( 路費 ) 할 돈도 한 푼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 그래서 이 길을 여름에는 아카시아 잎을 뜯어 먹고 가을에는 풀 열매를 따 먹고 겨울에는 솔잎을 짓씹고 눈을 집어 삼키면서 다녔다.

도중에 숙박할 노비를 가지지 못하는 용도는 새벽 3, 4 시경에 떠나 밤늦게 도착하는 것이었는데 종일 굶으며 140 리를 걸은 용도는 집에 들어서면 언제나 피곤을 부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죽을 애를 다 쓰는 것이었다 . 이렇게 힘들게 하는 공부를 반공생이기 때문에 남들이 한 해에 하는 공부를 두 해에야 하는 것이었으니 어린 마음의 고달픔과 애달픔은 다른 사람의 상상이 상으로 심각하였다 . 그러나 신앙에 굳게 서있은 그는 조금도 누구에게 짜증을 부리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빛은 절대로 없었고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더 가까이 나가기를 힘쓰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하는 공부를 9 년이나 애를 쓰며 하고서도 용도는 졸업장을 타지 못하였다 . 같은 반 학우들이 졸업장을 타는 날 용도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었다 . 졸업식이 지난 지 1 년 반 후에 출옥한 용도는 결국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졸업자와 같은 자격이 필요한 경우에만 관청 모르 게 학교가 인정해주기로 함을 가까스로 약속 받았을 뿐이었다.

 

 

 

독립운동 시절

 

이렇게 고달프게 공부를 해오는 동안 1919 년의 봄이 왔다 . 3 월 1 일 낮에 대한독립 만세의 소리가 개성 거리를 진동시킬 때 , 그 함성 속에는 용도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날 만세를 부르기 시작해서 1924 년 봄 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5 년 동안을 용도는 만세 부르기에 목이 항상 쉬어 있었고 4 번 투옥되었고 3 년 이상의 시일을 감옥에서 살았다 . 1919 년 3 월 1 일에 붙들려 들어가 약 2 개월간 유치장 생활을 하였고 , 1920 년 2 월 11 일에 소위 기원절 사건으로 들어가 반 년간 있었고 , 1921 년 성탄절에 불온 문서 사건으로 붙잡혀 반년간 있었고 , 1922 년 가을에는 태평양회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2 년 징역 언도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때에 학교를 운영하는 교장은 이 애국심이 열렬한 학생 때문에 참으로 곤란이 많았다 . 양심적으로 생각하면 실상은 독립운동을 권하고 격려해 주어야 할 것이지만 관청에서는 감시와 문책을 엄중이 하니 교장의 입장은 곤란하였다 . 그래서 교장 왓슨 (A. W. Wasson. 王永德 ) 씨는 용도에게 독립운동을 하지 말기를 여러 번 권하였다 . 그러나 이런 때는 매번 둘이 다 붙잡고 통곡을 하면서 헤어지곤 하였으니 용도의 열정과 논리가 두 사람의 통곡을 재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용도는 그 몸 전체가 오직 애국의 열정의 불덩어리였다 . 이 불덩어리가 자기의 피와 눈물을 항상 끓게 하고 있었고 나타나는 데마다 빛을 던지며 부딪친 존재들을 모두 태웠다 . 그래서 이 불을 끌 자가 세상에 없었고 또 그 유창하고 사람을 위압시키는 언변과 열렬 철저한 행동은 마주 서는 자를 모조리 압복하고 감탄시키어 20 세 전후의 용도는 벌써 권위 있고 위풍 있는 독립운동자로서 그 존재가 뚜렷했다.

두뇌가 명석하고 관찰이 예리한 용도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일을 꾸며냈는데 , 일을 꾸미는데 미쳐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그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생각에 열중하였으며 안 ( 案 ) 이 완성되어 운동에 착수하게 되면 필요한 활동을 주의 깊게 쾌속하게 전개하여 벼락같이 실천하는 것이었다 . 선전문 등사와 동지 연락 등에 어찌도 민속하고 확실하게 하였는지 후에 알게 되는 부형 , 경찰 , 법관 등이 모두 혀를 둘러 놀라는 것이었다 .

일을 꾸며내거나 지령을 받아서 대중 앞에 선전을 하는데 있어서는 그 열 변과 그 웅변이 만인을 감탄시키고 도취시키는 것이었다 . 그래서 그는 애국적 웅변가로서 알려지게 되었고 경찰에 붙들리게 되면 문초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요령 있게 활동보고를 하고 형사들을 권면 훈계하는데 그 말이 어떻게나 조리 있게 지당한 말인지 형사들이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멍해서 경청 하곤 한다는 것이 형사들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이었다.

그는 언제든지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벌을 혼자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였다. 그래서 동지들이 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결사적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 모 사건에서 이용도와 김종필이 서로 내가 혼자 한 일이라고 혼자 벌을 받으려고 고집하고 경쟁한 일은 한때 개성 거리에 아름다운 이야기 거리가 되었었다.

그는 경찰관과 사법관을 감동시키고 그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 하도 진실하고 정성되고 뜨거운 웅변이었으매 취조하는 입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용도를 동정하고 아끼고 우대하였다 . 담당 형사가 붙들어 가면서도 감탄하며 특대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비밀히 내통하여 도망갈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 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할 때에 아름다운 행적이 많이 있었으나 알 길이 없고 후일에 같이 있던 죄수의 입에서 말이 퍼지게 되어 알려진 것이 한두 가지 있다 . 겨울을 당하니 철갑을 두 손에 밤낮 채워 두는 사형수의 손목에 얼음이 꽂혔다 . 이 철갑과 얼음에 얼어붙은 손목을 용도는 가끔 제 뱃속에 품어주어서 녹여주는 것이었다 . 그리고 배고파 하는 죄수들에게 자기 밥을 주고서 저는 고요히 기도를 하는 때가 가끔 있었다.

 

 

 

< 제 2 부 : 사랑으로 타오른 생명의 불꽃 >

 

 

 

제 2 장

신학생 시절

 

 

 

새로운 시작

 

서대문형무소를 나온 용도는 곧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찾아갔다 . 다시 취학하여 졸업을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 이때에 교장은 한층 더 곤란에 빠졌으니 용도를 받을 수도 없고 안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연구하고 애쓴 결과 용도를 신학교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것은 용도를 상급학교로 진학시켜 주는 것같이 보이기는 하나 사실은 처치 곤란한 학생을 멀리 격리 추방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용도에게는 신학 공부를 권면하고 신학교에는 부탁하고 애원하여 용도를 신학교에 입학시키기로 하였다.

오직 애국심에 불타고 독립운동에만 열광한 용도는 아직 신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조국이 독립을 하고 민족이 자유를 얻어야 살지 신학 공부 같은 것으로 어찌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용도의 생각이었다 . 그저 만세를 불러 목이 터지고 찢어지고 매를 맞고 맞아 살이 다 찢기고 피를 다 말리고 뼈가 부서져 가루가 되면서라도 독립운동을 하여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는 것만이 자기가 할 일이요 , 또 그것만이 조국과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학교에는 안 간다고 단연 거부하였다 . 그러나 교장과 선생들이 하도 권하고 있고 또 곰곰이 생각하니 그 끓는 가슴은 촌구석 어디에 가있어서도 식힐 도리가 없으매 ‘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 를 고요히 부르며 눈물의 걸음으로 서울의 신학교에 들어갔다.

 

 

 

협성신학교 영문과 1 학년에 입학하였다 .

 

애국의 불이 활활 붙고 있는 가슴을 부여안고 밀리고 몰리어서 신학교로 들어가는 용도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나 돼지와 같았다 . 마음 없는 공부에 억지로 마음을 붙이려는 마음은 괴롭고 안타까웠다 . 그래서 신학생이 된 용도는 신학생다운 점은 없고 그저 신문 , 잡지 , 시가 , 소설 , 법률 , 정치 서적 등이나 읽고 학생들끼리 모여 앉으면 이론이나 캐고 논쟁이나 하고 강의 시간에는 까다롭고 괴상한 질문을 해서 선생을 골려 주는 등 경건치 못하고 얌전치 못한 행동으로 가슴 속의 애국의 불길을 진압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론가 , 논쟁가 , 말썽꾼 , 경우꾼 , 싸움패 , 과격파로서 알려졌다 . 그리고 또 학생이거나 선생이거나 경우에 틀리면 그냥 몰아세우고 닦아 세우는 직접 행동파로서 신학교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눈 흘김과 경원(敬 遠 ) 함을 받는 향기롭지 못한 존재이었다 .

그러나 이 생활은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오직 그 가슴에 있는 애국의 불길과 독립운동의 열정이 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고서 진압을 당하므로 몸부림치는 모습이었으니 미워하거나 책망하기보다는 동정의 눈물을 자아내는 사실인 것이었다.

 

처음에 이렇게 길이 들지 않고 난폭하여 보이던 용도도 신학교에 들어와서 하루 이틀 거룩한 밥을 먹고 신성한 공기를 마시는 동안 점점 마음이 진정되고 자리가 잡혀지는 것이었다 . 그러나 진정되는 마음이라고 해서 그 마음이 신학 연구에 달려 붙거나 경건한 생활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겨우 붙드는 것이 어린이들을 상대로 하는 유년지도 사업이요 , 주일학교 사업이었다 . 유년지도 사업에 뜻을 세운 용도는 시 , 노래 , 연극 등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동화 , 동요를 창작하고 아동 설교에 열을 내며 율동과 아동극에 실연을 하며 가극의 주역을 맡는 것이었다.

이때에 용도는 자기의 아호를 ‘ 심조 ’( 心鳥 ) 라고 하였는바 , 그것은 새들이 즐거운 노래를 마음껏 부르는 것과 , 넓은 천지를 자유로 날아다니는 것을 부러워하고 또 그것을 목표로 했으므로 ‘ 마음의 새 ’ 를 그 이름을 삼았던 것이다 . 그러나 심조도 그 심령은 항상 컬컬하고 답답하였다 . 그래서 봄날의 종달새를 이상으로 하는 심조는 흐린 밤의 뻐꾹새의 울음을 울 뿐이었다 . 어린이들을 데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도 그 마음은 항상 설한풍 ( 雪寒風 ) 에 흔들리는 고목과 같았다 .

이렇게 살고 있는 심조에게 새 원기를 불어 넣어주는 때가 왔으니 그것은 본과에 있는 이호빈 ( 李浩彬 ) 을 알게 된 것과 가을에 이환신 ( 李恒信 ) 이가 입학하여 온 때부터이었다.

컬컬할 때에는 이론 잘하고 건실한 사상을 가진 환신과 밤새도록 논쟁을 하고 답답할 때에는 황소 같은 호빈에게 매달리어 어리광을 부리면서 심조는 하루하루 현상 유지에 애를 쓰는 것이었다 . 이렇게 지내는 동안 어느덧 셋은 삼이형제 ( 三李兄弟 ) 로 알려지도록 절친하여졌으며 다음해 봄부터는 셋이서 현저동에 셋방을 얻고서 자취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호빈은 호를 천농 ( 天農 ) 이라 하였는바 , 그는 항상 이상적 농촌 건설 , 농촌의 천국화를 꿈꾸고 있어 자기가 하늘의 농사꾼이 되겠다는 생각과 또 자기가 농장을 경영하는 때가오면 이름을 ‘ 천농원 ’ 이라고 하겠다고 하면서 자기의 호를 천농으로 삼았다 . 환신은 진해 ( 震海 ) 라고 호를 삼았는바 , ‘ 동천 진해 ( 動天震海 ) 하고 명진사해 ( 名震四海 ) 하겠다 ’ 는 염원에서 진해라고 하였다 . 그래서 천농 , 심조 , 진해의 삼형제는 한집에서 한 솥에 밥을 끓여 먹으면서 각각 자기의 특성과 특기를 기르고 연마하면서 유쾌하고 감격스러운 학창 생활을 뜻있게 값있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좌절과 변화

 

그러나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용도는 가슴 한편 구석에 그 누구도 모르는 용도 특유의 고민과 우울이 계속되고 있어 그의 오랜 동안의 심적 불안과 성격 분열은 몸과 마음을 아울러 파괴하여 2 학년 둘째 학기를 마치는 1925 년 겨울에는 폐병 제 3 기 , ‘ 공부를 그만두고 쉬라 ’ 는 의사의 명령을 받게 되었다 . 그때에 폐병 제 3 기라는 진단은 틀림없는 사형의 선고이었다 . 용도는 입을 딱 벌리고 누워 천정만 쳐다보고 있었고 호빈과 환신은 쑤군쑤군하다가 자신 없는 말소리로 억지의 위로를 하는 것이었다 . 몇 날을 지난 후의 용도는 부슬부슬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호빈과 환신의 고향인 강동 ( 江東 · 평남 ) 에 용도를 데려다가 휴양을 좀 시키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었다.

겨울방학이 되자 용도는 3 원짜리 ‘ 부루도제 ’ 한 병을 사가지고서 진해에게 끌리어 강동으로 갔다 . 강동 가서 수일 동안 지내노라니 그곳 교회에서 부흥회를 좀 인도해 달라는 것이다 ( 그때만 해도 옛날이어서 폐병에 걸린 자는 병에 걸린 기색을 절대로 나타내지 않고 건강자인 척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 신학교에는 다닌다고 해도 겨우 아동 설교나 학생을 상대로 한 이성적인 설교나 좀 해보았을 뿐이지 부흥회 인도라는 것을 해본 일이 없었음에 둘은 겁이 나고 두려워서 움츠려 드는 것이었다 . 그런데 촌 교회에서는 미욱스럽게 그냥 졸라댄다 . 하도 조르는 바람에 피할 도리가 없어 그럼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을 두 사람은 해보게 되었다.

내일부터 부흥회를 인도해본다는 결정을 한 두 학생은 곧 밖으로 나갔다. 강동군 원탄면 ( 元灘面 ) 의 대동강 상류의 얼음 위에 나가서 둘은 기도하였다 . 밤이 깊어지도록 둘은 기도하였다 . 그 이튿날도 새벽 일찍 나가서 저녁 때가 되도록 또 열심으로 기도하였다 . 그리고 집회가 시작될 저녁때에 집으로 돌아왔다 . 저녁밥은 먹는 시늉만 하고는 또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 벌써 종소리가 들린다 . 둘의 가슴은 철렁했다 . 다시 종소리가 들렸을 때 두 사람은 일어섰다 . 자신 없고 울렁거리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두 사람은 비틀걸음으로 예배당을 향해 나갔다.

첫날 저녁에 설교는 환신이 하고 용도는 사회를 하기로 했다 . 첫 번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 기도하고 일어나 다시 찬송 149 장을 꺼내어 1 절을 부르고 2 절 시작을 하는데 용도는 울기를 시작하였다 . 용도의 울음을 본 회중은 모두 운다 . 용도의 울음이 심해짐에 따라 만장은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 149 장을 몇 번 되풀이해서 부르는 동안 예배당 안은 그냥 통곡의 마당이 되었다 . 이날 저녁 환신이 설교를 하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은 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튿날부터는 용도가 설교를 하라는 것이 환신의 억지요 , 모든 군중의 요청이었다 . 그래서 피할 수 없어 용도가 맡기로 했다 . 부흥회 설교를 맡아 놓은 용도는 떨리는 마음에 밤새도록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그래서 기도로써 밝히고 새벽에 강단에 나섰다 . 나서니 찬송을 불러도 눈물이요 , 기도를 올려도 울음이다 . 설교도 좀 해내려 가다가는 그저 울음에 떨려 말소리가 흐려지는 것이었다.

용도의 심중은 이상한 열에 끓어올랐다 . 찬송을 불러도 , 기도를 드려 설교를 해도 , 그저 용도가 무슨 말이든지 꺼내면 청중이 통곡이요 , 감동이요 , 감격이었다 . 여기서 용도는 어느덧 자기를 잊어버리고 제 몸을 잃어버렸다 . “ 조용한 곳에 가서 약을 먹으며 고요히 치료를 하라 ” 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몸이 의사의 명령은 잊어버리고 그런 생활은 해볼 생각조차 안 하였다. 주님께서 불러 세우시는 것이었으니 이 자리에서 한마디라도 외치고서 당장 죽으리라는 결심이 생겼다 . 이 순간에 주께서 명하시는 말씀을 외치고 죽는다는 결심이 열정으로 , 열변으로 변하여 그냥 결사적으로 외쳐댔다 .

이렇게 1 주일 동안을 하고 나니 원기왕성 , 의기충천하여 밥은 전보다 배나 먹을 수 있고 주먹을 꽉 쥐어보니 기운이 산도 무너뜨릴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편에서 자진해서 근처의 다른 교회로 가서 부흥회를 열었다 . 밤 11 시까지 집회를 끝내고 60 리 길을 집까지 5 시간이나 걸어 돌아왔어도 피곤도 모르고 원기 왕성하였다.

강동에 가서 이런 생활을 한 달 동안 하고서 서울에 돌아오니 친구들이 깜짝 놀란다 . “ 공부를 쉬고 요양을 하라 ” 는 말을 듣던 사람이 어찌 그렇게 속히 회복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 밥을 얼마든지 먹고 원기가 넘실넘실 넘쳐 흐르는 것을 본 가족들은 감사해서 울고 감격해서 울었다.

 

강동에 다녀온 용도는 딴 사람이 되었다 . 부동의 신념과 확신을 얻은 중생의 사람이 되었다 . ‘ 바치라 . 그저 완전히 바치라 . 주님께 완전히 바치기만 하면 내 모든 문제는 주님께서 맡아 주관하시고 내 몸 전체도 주님께서 뜻대로 잘 맡아 사용하신다 ’ 는 확신을 얻은 주님의 기개 ( 氣槪 ), 하늘의 생명을 가진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 . 벌써 죽었을 사람이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 더욱 새 힘을 얻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됨을 얻은 용도는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는 동안에는 내 생명을 거두시지 않으실 것이니 그 뜻에 따라 그 뜻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만 기도하고 준비하고 노력하기로 결심하고 또 맹세하는 것이었다.

강동에 가서 그런 상상 이상의 체험을 얻어 가지고 돌아온 후 호빈 , 용도 , 환신은 더욱더 가까워졌다 . 전부터 삼이형제라고 불려오던 이 삼형제의 자취생활은 학우 생활의 모범이 되고 동지 생활의 전형이 되리만치 재미있고 상호의 인격 향상에 도움이 되는 생활이었다.

강동을 다녀온 후도 용도는 여전히 아동을 상대로 한 동화 , 동요 , 무용에 몰두하는 것이었으나 전날의 그것에 비해서 퍽 깊고 신령하고 신비스러운 내용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점점 아동 상대에서 학우 상대로 , 학우 상대에서 일반 신도 상대로 그의 목표는 넓어지고 높아지고 깊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지내는 용도는 신학교 재학 중에 많은 아동극 등의 각본을 썼고 가극 , 동요곡 등의 작곡을 하였고 성극 , 아동극 등에 출연 혹은 지휘를 하였다 . 특히 비극의 주연으로 무대에 나서는 용도는 장안 남녀의 눈물을 한없이 자아내는 명배우이었다 . ’ 공주와 꽃팔이 ’, ‘ 봄바람 ’ 등의 가극과 ‘ 애굽의 이스라엘 ’, ‘ 십자가를 지는 이 ’ 등의 성극은 상당한 명작으로 서 길이 전해오고 있었다.

용도는 음악에 또한 특출한 재능이 있어 신학교 찬양대에서 제일 유능한 멤버이었고 풍금은 배우지 않고서 찬송가 4 부를 능숙히 치는 것이었고 가야금도 배우지 않고서 명곡을 잘 탔다 . 음악을 잘하는 용도는 그 손이 악기를 만지기도 잘하여 영신학교의 풍금이 상해서 100 원 이상이 들어야 고치겠다는 것을 13 원어치 재료를 사다가 2~3 일 동안에 다 고쳐놓았다는 것은 그의 재질을 알려주는 좋은 이야기이었다.

 

어느덧 4 학년의 여름방학도 끝나고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다 . 그때에는 연회가 가을에 있었으므로 용도는 재학 중 9 월 13 일에 파송을 받았다 . 파송을 미리 해놓고서 반년 후 학교 졸업이 되면 일터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 이때에 용도가 처음으로 파송 받은 곳이 강원도 통천 ( 通川 ) 구역이었다 . 신학 졸업을 반년 앞두고 미리 파송을 받은 용도는 마음이 무거워지고 어지러워졌다 . 그래서 그때 이후의 용도는 공부보다는 깊은 명상에 잠기는 일과 애타고 끓는 기도의 생활에 치중하는 것같이 보였다.

졸업을 2~3 개월 앞둔 1927 년의 성탄 . 이날에 협성신학교 학생회 주최의 성탄극 ‘ 십자가를 지는 이들 ’ 은 용도의 원작이었고 주역도 이용도이었다 . 십자가를 진다는 많은 군상 ( 群像 ) 들이 지나간 후 뒤를 이어서 나타난 이용도 .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비틀걸음으로 힘들게 형장인 갈보리 언덕까지 올라가 쓰러지는 용도의 모습은 2,000 년 전의 그리스도 수난의 광경을 너무도 분명히 눈에 보여주는 것이어서 회장은 통곡의 골짜기 , 눈물의 바다로 화하였다.

노래를 좋아하고 연극 연출에 특출한 소질을 가진 용도는 이날 밤의 성탄극에서 다시 한 번 용도의 존재와 인물을 재인식시켰고 , 신학교 학생으로서 마지막인 성탄절에 그가 고안해 낸 각본으로 자신이 출연한 이 연극 ‘ 십자가를 지는 이 ’ 는 신기하게도 그의 일생을 미리 알려주는 자기의 일생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였다.

 

 

 

성역 ( 聖役 ) 의 준비

 

그런데 이용도의 신학교 재학 4 년 동안의 생활을 그의 심리면으로 고찰할 때 그에게는 네 가지의 고민의 시기가 있었다.

 

① 사상적 고민의 시기 :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 있는 사상의 전향을 위한 고민이었다 . 그의 생각에는 펄펄 끓어 오르는 애국의 열정으로 2,000 만 민족을 일으켜서 군대를 만들어 가지고 총검을 들고 나가서 왜적과 일전을 하고 싶은데 지상의 것을 초월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계명의 쇠고랑에 매어지는 것은 참으로 창자를 끊어내는 애달픔이었다.

② 이성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연애의 고민 : 이용도는 어렸을 때부터 근처 처녀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 고향 동리의 어떤 처녀는 이용도 이외의 총각에게는 시집을 안 간다고 고집을 부린 일이 있었고 혼담이 나왔을 때는 여러 처녀의 집에서 경쟁이 생겨 서로 중상 모략이 일어나 혼란이 생긴 일도 있었다 . 그러나 결혼한 이후는 이 방면의 말썽은 없이 평온 무사하였다 .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방면에 독특한 소질을 나타내게 되니 장안의 여학생의 일부가 용도에게로 관심을 집중하였다 . 그래서 필경은 이 방면의 견인 ( 牽引 ) 에 끌려 허덕이게 되었다 . 특히 Y 라는 처녀의 유혹은 대단하였다 . 그렇게 추잡한 모략은 아니었으나 여러 가지 좋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어 은근히 열렬히 끌어당기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서 용도가 적어도 2 년 이상은 이 사건으로 몹시 고민하였던 것이다 . 

③ 빈곤과 병약을 중심으로 한 고민 : 일면에서 그럴 듯한 미끼로 끌어당기는 그 유혹에 둥글둥글 끌려 들어갔으면 학비 같은 것쯤은 문제없이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나 고민하며 고생하면서도 내 몸을 지키고 양심을 살리려니 생활은 늘 궁핍하였다 . 그래서 기숙사에 있지를 못하고 셋방을 얻고 나가서는 좁쌀 죽을 쑤어 먹은 때도 있었다 . 이렇게 사는 동안에 그의 몸은 극도로 약해져서 그의 폐는 약해져 피를 토하게 되었다 . 붉은 피를 토하며 찬송을 부르며 비극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용도의 모습은 분명히 비극의 주인공으로 세상에 나온 듯이도 보였다 . 이상의 고민이 겹치고 겹쳐 약한 용도를 무자비하게 내려 누를 때 용도는 가끔 비명을 올렸다 . 고민하고 몸부림 치던 나머지 한강에 투신 자살을 하려고 밤중에 나가서 노들강변을 밤새도록 헤매다가 밤이 다 밝아서 돌아온 일도 한두 번 있었다.

④ 장래를 위한 고민 : 주님의 일꾼으로서 주님의 명을 받아 주님의 양을 맡아 길러야 할 장래를 생각할 때 그에게는 심각한 고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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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해서 이용도의 신학 공부 4 년 동안의 생활은 시종일관이 고민의 생활이었다 . 펄펄 뛰는 애국의 피를 누르고 모아 말없이 십자가에 쏟을 준비를 하는 애국 학생의 신학 재학 4 년 동안의 생활은 오직 애끓는 고민 , 심각한 고민을 극복하기 위한 난행이었다 . 이런 점에서 볼 때 용도의 신학 졸업은 인생에서 가장 어렵다는 대학 하나를 무사히 졸업한 셈이 된다.

1928 년 1 월 28 일의 협성신학교 제 14 회의 졸업식 날에 이용도는 졸업장을 받았다 . 여러 의미에서 감개가 많은 용도는 한편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애국심 , 예술심 , 신앙심이 그 가슴 속에서 범벅이 되어 요동을 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었다.

14 회 졸업생의 이름 중에는 다음의 학생들이 있었다 .

 

이강산 ( 李康算 ), 이피득 ( 李彼得 ), 전효배 ( 田O培 ), 남천우 ( 南天祐 ), 정봉익 ( 鄭奉益 ), 유자훈 ( 劉子勳 ), 민응식 ( 閔應植 ), 조신일 ( 趙信一 ), 정경옥 ( 鄭景玉 ), 윤태현 ( 尹兌鉉 ), 이진구 ( 李鎭九 ), 배덕영 ( 裵德榮 ), 이명제 ( 李明濟 ), 차경창 ( 車敬昌 ), 백학신 ( 白學信 ), 황치헌 ( 黃致憲 ), 노형근 ( 盧O根 ) 씨 등 42 인

 

 

 

< 제 2 부 : 사랑으로 타오른 생명의 불꽃 >

 

 

 

제 3 장

전도사 시절

 

 

통천구역 담임

 

 

1928 년 1 월 28 일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이용도는 그 이튿날인 29 일에 파송 받은 통천구역으로 향해서 떠났다 . 이날은 상당히 추운 날이었고 강원도 지역 안에 들어서니 예년에 드문 큰 눈이 와서 쌓여있었다 . 그렇게 쌓인 눈을 처음 보는 용도는 이 대설 ( 大雪 ) 에 인상이 깊었고 곧 ‘ 너의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 처럼 죄악 , 흰 눈을 연상하며 교역 ( 敎役 ) 을 시작하였다 . 교회 담임 초기의 용도를 한 마디로 평한다면 그는 분명히 이성적인 전도인이요 , 문화적인 교역자이었다 . 이때까지 지내온 과거를 회상하고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을 못 붙잡는 것은 아니었으나 원체 이성적이고 예민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용도임에 신앙적인 생활보다는 문화적인 활동이 항상 앞서는 것이었다 . 더욱이 당시 사회는 민족주의 사상에서 사회 주의 사상으로 전향하고 있는 때이었음에 사회 사조의 대세에 영향되는 바도 있어 용도는 점점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 말하자면 인본주의 신앙으로 전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부임 초기 약 반년 동안은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사상적 위기 , 신앙적 타락의 상태에 빠져가고 있었다 . 중심을 잃은 존재로서 지향 없는 걸음을 걸으며 신 ( 神 ) 을 놓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 이런 신앙의 터 위에 선 전도인이 양을 인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으며 용도의 전도 활동이란 것이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고 아무런 열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 이러한 자기의 입장과 현상을 발견한 용도는 깜짝 놀라 자기 자신의 신앙 혁명 , 신앙 내용 개선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느끼었다 . 통천에 가니 그 구역 안에 박재봉 ( 朴在奉 ) 이라는 청년이 있어 신앙이 돈독하고 교회도 성심으로 돕고 있었다 . 이 청년은 용도의 주례 하에 결혼식도 거행한 사람이다 . 장마철에 이 사람의 결혼식에 갔다 오다가 홍수의 범람 때문에 자동차가 빠져서 이용도 전도사 부처가 꼭 죽을 뻔한 일도 있는 인연 깊은 청년이다 . 그런데 그는 특히 기도생활에 힘을 쓰는 듯이 보였다 . 그래서 중심에 웬일인지 불안과 갑갑증을 느끼는 용도는 어느덧 박재봉에게 특히 접근하게 되어 기도생활에 대한 것을 이야기도 하고 의논도 하게 되었다 . 그러다가 하루는 둘이서 산기도를 드리려고 산으로 향해 들어갔다 .

 

 

 

금식 산기도

 

통천읍의 서북쪽에 있는 백정봉 ( 百鼎峰 ) 은 금강산의 기슭으로서 좀 들어가면 기암과 절벽이 첩첩이 쌓여 있다 . 이 산으로 밤중에 산기도를 드리러 들어가는 두 청년은 의논하고 결심하며 용도는 재봉에게 말하였다.

“ 내가 들어가 엎드리거든 내가 일어날 때까지 나를 깨우지 말고 만일 여러 날이 걸려서 혹 집에서나 교회에서 찾아오는 일이 있어도 내가 일어나기 전에는 나를 누구든지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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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기회만 있으면 우리 전도사와 함께 한번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려고 기회를 노리던 재봉은 이 말을 받아들여 그리하기로 한 후 두 청년 은 바위들 틈에 가지런히 엎드렸다.

이날 밤에 여기 엎드려서 시작한 산기도가 하루 이틀을 지나고 1 주일을 지나 10 일간 계속되었다 . 다행이 둘이 함께 나간 것을 재봉집에서나 교회에서도 알고 있었으므로 궁금하기는 하나 다른 큰 염려는 하지 않고 있었다 . 교회가 일어나서 찾아 다니다가 두 사람의 엎드린 것을 발견했으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 확실함으로 누구나 건드리지는 않았다 . 그래서 10 일간의 불식불음 ( 不食不飮 ) 절대 금식의 산기도를 무사히 마치고 하산하였다 .

10 일간 산기도를 드린 후부터의 용도는 전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 신앙에 자신이 끓고 전도하여 다른 사람을 끓게 하는 열 있는 전도인이 되었다 . 이에 그는 생활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말하는 전도자이기 전에 기도하는 기도꾼이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예배당 근처에서 용도를 만날 수 없을 때는 시외로 나가면 산기슭이나 시냇가에 엎드려 몸부림치며 기도 드리는 용도를 찾아볼 수 가 있었다 . 이리해서 이때부터는 신앙의 열이 기도생활을 채찍질하고 기도 생활이 신앙의 열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그는 기도하는 신앙가 , 능력 있는 전도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

기도에서 예측 못할 힘을 얻은 용도는 그 힘을 다 바쳐 일에 면려하였다. 교우의 가정 심방 , 노방 전도 , 우물을 파고 , 예배당을 수리하고 , 병약자를 병원에 업고 다니고 , 거지를 집으로 데려다가 대접하는 등 복음 전파와 육체 노동을 겸해서 심신이 아울러 최대한의 일을 해내는 것이었다.

 

 

 

마귀의 격퇴

 

일에 최선의 면려를 하는 용도는 기도생활에 더욱 열중하였다 . 산기슭과 시냇가에 엎드리는 용도는 예배당 안에서의 기도에도 더욱 치중하였다 . 그래서 용도는 초저녁이나 밤중이나 새벽이나 그 언제든지 때를 가리지 않고 그저 나가 엎드리는 것이었다.

하루는 새벽 3 시쯤 되어 자기의 규례대로 또 성전으로 나갔다 . 이때에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는 용도는 기도하였다.

“ 아버지여 , 나의 혼을 빼어버리소서 . 그리고 예수에게 아주 미쳐버릴 혼을 넣어 주소서 . 예수에게 미쳐야 하겠나이다 . 예수에게 미치기 전에는 주를 온전히 따를 수 없사옵고 , 또한 마귀와 싸워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 

이렇게 몇 시간을 지내고 있을 때 크고 까만 몸뚱이에 수족에는 삼지창같이 검고 날카로운 손톱발톱이 있고 그 눈방울은 사발같이 큰 것이 둥글 거리고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은 것이 앙상히 드러나고 머리에 큰 뿔 둘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 생전 보지 못하던 무서운 것이 나타나 머리맡에 서서 용도를 굽어보며 기도를 방해하기를 혹은 웃는 형상도 하고 무섭고 흉측스럽게 우는 형상도 보이며 또는 그 무서운 눈방울을 부릅뜨고 위협도 하고 그 무서운 손을 내밀어 용도를 움켜잡으려고도 하는 등 , 실로 가슴이 서늘하고 소름이 끼쳐지는 농락을 하는 것이었는데 , 이것이 즉 용도에게 나타난 마귀 그것이었다.

용도는 무섭기도 하고 보기도 끔찍하여 몸을 돌이켰다 . 그랬더니 그 놈은 또 몸을 움직여 용도의 눈앞에 와서 마주섰다 . 그래서 용도는 몸을 좌편으로 혹은 우편으로 돌려 보았으나 그 괴물은 용도보다 먼저 앞질러 와서 마주 서는 것이었다 . 그래서 용도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마귀는 기도를 방해하며 집어삼킬 듯이 덤빈다 . 세상에서 이런 험상궂고 무서운 것을 처음 보는 용도는 필사적으로 있는 용기를 다 내어 울며 부르짖었다. 

“ 아버지여 , 아버지여 , 아버지여 .”

그리고 마귀를 향하여는 고함을 지르며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대들었다. 

“ 사탄아 , 사탄아 , 물러가라 .”

이때에 자세히 보니 이런 마귀들이 성전에 가득히 차있고 또 밖에도 많이 있어 그 머리들을 창문으로 들이밀고 용도를 쏘아보고 있다 . 이러므로 용도는 주먹을 들어 마귀들을 내어 쫓느라고 덤비어 들었다 . 벽력같이 호령을 하며 고함을 지르며 퉁탕거리며 이리치고 저리 친다는 것이 바람벽을 부수며 유리창을 깨뜨렸다 . 마귀는 형체가 없는 것이매 용도가 마귀를 친다는 것이 담벽과 유리창을 때릴 뿐이었고 용도의 손에는 피가 흐르고 손에 뼈가 어긋나고 부어 오른다 . 새벽 내내 있는 힘을 다하여 고함을 쳤으매 목은 쉬었고 밤새도록 홀로 혈전을 계속하였으매 기진맥진하였다 . 이때에 다시 눈을 들어 돌아보니 아직도 한 마리의 마귀 새끼가 방안에 남아 있어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 이에 용도는 또 소리를 높이어 주먹을 들어 치려 했다 . 

“ 사탄아 , 물러가라 . 이 집은 아버지의 성전이니 물러가라 .”

그때에야 마귀는 문을 열고 쫓겨나간다 . 이에 용도는 날쌔게 뛰어 나가 마귀를 추격한다 . 시가로 달아나는 마귀를 그냥 쫓아가니 마귀가 어느 집 대문에로인가 쑥 들어간다 . 보니 그 집은 권사의 집이므로 용도는 달려들며 외쳤다.

“ 권사님 , 마귀가 들어왔으니 일어나시오 .”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고 있던 그 집 사람들이 놀라 일어났다 . 여기서 용도는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왔다 갔다 하며 두 주먹으로 무엇을 치는 듯이 하며 외치며 돌아다녔다.

“ 이놈아 , 사탄아 , 너 이놈 ,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도 해치 못하리라 .” 

한참 후에 마귀가 집에서 뛰쳐나가 도망가니 목사는 또 따라나간다 . 그냥 추격하니 통천 시가를 다 지나서야 멀리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 용도가 이렇게 마귀를 격퇴하고서 “ 할렐루야 , 할렐루야 ” 를 높이 노래 부르며 거리로 돌아올 때는 벌써 날이 다 밝았다 . 피 묻은 의복 , 피 흐르는 손 , 땀을 빼고 핼쑥해진 얼굴을 한 용도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위엄 있게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마귀와의 격전에서 승리를 얻은 용도는 이때부터 하늘의 권능과 용기를 얻어 기도와 설교와 신앙 생활에 더욱더 굳센 힘과 생명을 얻게 되었다.

 

 

 

구역의 부흥

 

1928 년 12 월 24 일 새벽에 이런 놀랄만한 사건이 있은 후 용도는 벌써 전날의 그 용도가 아니었다 . 어찌 보면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몇 날 못 살 것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육체가 이렇게 되는 반면 심령에는 엄청난 능력과 권세가 왔다 . 그래서 이때 이후의 용도는 분명히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으로 움직이는 듯하였다.

하루를 지난 성탄절에 용도가 강단에 올라가 몇 마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어느덧 성탄절이라고 해서 많이 모인 사람들이 통곡하며 거꾸러지는 것이었다 . 이 시간부터 만인의 심령에 성신이 임하시어 크게 역사하시었다 . 오랫동안 불신 상태 , 배교 상태에 빠졌던 사람들이 다 찾아와 통회하고 새 힘을 얻으며 기독교를 반대하며 박해하던 말썽꾸러기 청년들이 다 나와 거꾸러지었다 . 그래서 신도가 50~60 명에 불과하고 미지근하고 맨송맨송하여 빛을 잃고 사회의 욕거리가 되었던 통천읍교회가 몇 주일 후에는 150~160 명으로 교회가 꽉 들어차는 것이었다.

연말에 이런 역사에 부딪힌 용도는 신년 벽두부터 우선 담임한 구역 내 일곱 교회에 부흥회를 열었다 . 그러자 용도가 이르는 곳마다 불이 떨어지고 그가 나서기만 하면 교회가 통회하고 갱생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2~3 개월 내에는 용도가 담임한 통천구역 내 일곱 교회는 완전히 부흥하였다 . 그러자 근방 여러 곳에서 간절한 청빈이 있어 부흥회에 나간다 . 이리해서 그는 1929 년도에 자기가 담임한 교회 이외의 곳 20 여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여 큰 역사에 접하고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는 사자가 되었다.

 

 

 

명성의 확산

 

원산지방 안에서 크게 역사하는 용도의 명성은 어느덧 원근 각처로 널리 알려지게 되어 1930 년 벽두에는 멀리 인천 서해의 덕적도에 가서 부흥집회를 열게 되었다 . 이곳 부흥회 1 주일 동안에 위대한 역사가 있은 것은 몇 가지 문헌으로서 알려져 있다 . 그런데 이 집회에서 얻은 한 큰 소득은 사회주의 자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청년 김광우 ( 金光祐 ) 가 거꾸러져 입신하게 된 것이다.

 

1930 년도의 일기에 의하면 용도 목사는 2 월 26 일부터 3 월 9 일까지 평양 중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 그런데 이 집회에서 주님의 권능이 크게 역사하시어 평양성을 뒤끓게 하였다. 1)

 

1) 추모집 제 3 부 ‘ 평양 중앙교회 ’ 에 전문 ( 全文 ) 수록

 

 

둘째 날 밤의 설교는 ‘ 예수의 죽음 ’ 에 대한 것이었다 . 이날 밤의 모든 광경과 사실은 벌써 땅에서의 것이 아니었다 . 부르는 찬미 소리도 사람의 노래가 아니요 , 천군천사의 소리였고 울려 나오는 그 음성이 모두 사람의 목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 이날 저녁에는 별사람이 다 모였다 . 일등부자 , 관리 , 변호사가 다 모였다 .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설명은 사람의 배알을 갈래갈래 끊어내는 것이었다 . ‘ 빌라도의 심판 ’ 을 설명하실 때 내 결에 있는 변호사가 너무도 울고 있음에 내가 참 미안을 느낄 지경이었다 . 1,000 여 명 군중은 그저 울음이다 . 수천의 눈은 그저 눈물이다 . 목석도 이 자리에서는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평양의 부흥회를 끝낸 후부터 부흥사로서 용도 목사의 명성은 날로 높아가고 더욱더욱 멀리멀리 알려져 1930 년의 대부분도 역시 이곳 저곳의 부흥회 인도에 끌려 다녔다 . 평양 중앙교회에서의 큰 역사는 앞으로 평양방면의 전도의 길을 열었고 황해도 신천교회에서의 역사는 황해도 방면에 성령의 불을 켜는 시초이어서 이 해에 이루어진 큰 역사이었던 것이다 . 그런데 한 가지 수상한 것은 원산지방 안의 동역자들의 눈치가 좀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용도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나 모이면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는 눈치가 아무래도 이상히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이상한 눈치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역자들이 용도를 좋게 여기지 않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이름이다. 

“ 교회는 안 지키고 돌아다니기만 한다 .”

“ 제 구역이나 돌아볼 것이지 남의 구역에는 왜 다니는 거냐 .” 

“ 여기저기서 용도는 왜 끌고 다니느냐 .”

 “ 제 교파 안에서나 다닐 것이지 , 타 교파에는 왜 다니는가 .”

이는 염려해주는 말 같기도 하고 아끼는 말 같기도 하나 그 말이 나오는 근원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그런 마음에 있는 것이었다.

 

 

 

< 제 2 부 : 사랑으로 타오른 생명의 불꽃 >

 

 

 

제 4 장

교단 활동 시절

 

 

주일학교연합회 파송

 

 

눈치로만 보이던 그 이상한 괴물이 어떤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났으니 , 이 용도가 원산지방 ( 통천구역 ) 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 내 교회 , 내 구역에만 있지 못하고 다른 구역이나 다른 지방 , 다른 교파에까지 부흥집회를 다니는 부흥사를 주일학교연합회 간사라는 부흥사업과는 아주 거리도 멀고 방면도 다른 일터로 가라는 것이었으니 , 그것은 영전 같으나 좌천이었다 . 아주 부흥집회를 못하게 하려는 심보에서 취하여진 것이었다. 

“ 너는 주일학교 사업에 소질이 있어 그리로 보낸다 .”

표면상으로는 이렇게 내세우기는 하나 , ‘ 너 어디 부흥집회에 실컷 다녀보아라 ’ 하는 이면의 묘한 내용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 그래서 교역자 이동의 시기도 아닌 1930 년 10 월 16 일에 3 년 동안 눈물과 땀을 흘리며 길러 놓은 정든 양떼들의 석별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용도 목사는 통천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용도를 어떤 조그만 사무실의 테이블 앞에 가져다 앉혀 놓았다는 것은 분명히 멧새를 새장 안에 가두어 놓은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중심은 숨길 수 없어 부흥사로서의 본색이 나타나고 있었다 . 다행히 총무인 H 목사의 선처로 전에 없던 직원실 기도회를 매일 아침 열기로 한 후 그 인도를 용도에게 맡겼다 . 그래서 끓는 가슴을 이 아침 시간에 용도는 쏟아놓는 것이었다 .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가 생기었다 . 몇 날을 지내니 몇 명 안 되는 직원들이 빈정거리기 시작하였으니 , “ 이게 주일 학교연합회냐 , 부흥회냐 ?” 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우물우물하더니 그 기도회에 용도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었다.

주일학교연합회 간사로 서울에 온 용도 목사는 이상하게도 각 방면의 주목의 대상이 되고 인기를 집중하였다 . 그러나 인기가 높아지면 질수록 그의 등 뒤에는 검은 손이 움직이는 것이었으니 주일학교연합회에서도 웬일인지 그를 좋아하지 않는 눈치가 보였다 . 말하자면 말썽꾼이요 , 처치 곤란이었다 . 그래서 생각된 것이 미국 유학이란 이름으로 멀리 보내려는 것이었다 . 마침 그때에 미국에서 모 감독이 나왔으므로 그에게 소개하고 추천을 했더니 다행히 승인이 되어 다음해 가을 (1931 년 ) 에는 미국으로 데려가기로 확정하고 그 감독이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용도는 미국으로 공부 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 그런데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용도의 미국 유학을 중심으로 세 사람의 생각이 각각 다른 것이었다 . 주일학교연합회와 교단본부에서는 멀리 미국으로 쫓아버리려는 것이고 미국의 감독은 데려다 공부를 시키려는데 본인인 용도는 미국에 가면 물질 중심의 문화 생활에 심취한 미국 사람들을 좀 단단히 두들기고 깨워주 려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1929 년 말경 일기의 문구로써 짐작할 수 있다 . “ 주여 , 나를 미국에 보내 주시옵소서 . 그 돈밖에 모르고 물질밖에 모르는 미국 사람들을 깨우쳐주고 부흥시키려 하오니 …… ,”

그런데 이렇게 결정하고 이렇게 준비하며 때가 오기를 용도는 기다리고 있었는데 , 약속의 때에 이르러서는 누구 하나 용도의 유학을 고려하는 자도 없어 결국 미국 유학이란 것은 불쾌한 한 막의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주일학교 강습회

 

1931 년 초두에 용도는 주일학교 강습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충북 영동에 갔다 . 여기서의 강습회 기간은 8 일간이었는바 , 이 강습회가 용도에게 있어서는 주일학교연합회 간사로서의 최대의 활동이고 최후의 노력이었다.

여기서 용도가 주일학교연합회 간사라는 괴물의 손에 붙들려 탄식하며 고민하면서 그 손에서 벗어나 성신의 손에 이끌려 오직 주의 복음만 전파하고 주님의 직접 역사를 세상에 알리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 여기가 용도의 생애에 있어서는 한걸음 더 주께로 가까이 나가는 중요한 포인트이었다.

당시 일기의 일부를 인용한다. 2)

 

2) 일기 ‘1931 년 1 월 9 일 ~16 일 ’ 에 전문 수록

 

 

 

강습회보다 사경 ( 査經 ) 과 부흥회로 모이어 신령한 은혜만 받기로 했던들 더 큰 은혜가 임하였을 것을 가련한 일이다 . 장로교에도 이렇게 기도가 없었던가 ! 아 , 조선의 교회는 장감 ( 長監 ) 을 막론하고 그 정지가 가련하였구나 . 저희가 기도를 몰랐으니 어디 가서 신비한 은혜에 접할 기회가 있었으랴. 오 주여 , 저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

 

영동을 다녀온 후 얼마 있다가 서울 어떤 곳에서 주일학교 지도자 강습회가 열렸다 . 여기에는 조선에서 주일학교 사업계에서 유망하다는 강사는 다 모였는데 용도에게도 어떤 과목을 맡김으로 거기에 참가하였다 . 그런데 여기서 극히 중대한 사건이 생기었으니 집회 사흘째 되는 날에 강습생 전부가 모 씨의 시간에 한 명도 참석을 않고 그 다음 시간에도 또 그리하더니 용도의 시간에만 전원 참석하여 열심히 수강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 그리했을 뿐만 아니라 강습생 중의 대표자가 나타나 하는 말이 다른 시간은 다 그만 두고 용도 목사의 시간만 다 넣어서 듣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일에 강습회 주최자 측은 크게 당황하였다 . “ 주일학교 사업은 그 범위가 극히 넓어서 어느 한 면만의 연구나 활동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용도 한 사람의 강의만 계속할 수는 없다 ” 는 것을 강습생들에게 일러 주는 주최자는 용도에게 가서는 심히 괴상한 말을 하였으니 “ 이 목사는 강습회에 나오지 말아달라 ” 는 것이었다 . 이 목사가 나오면 다른 강사들이 다 그만둘 모양이니 그러면 안되겠고 또 이 목사가 나오면 다른 강사들의 위신과 면목에 관계되는 바가 크니 나오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 이에 이용도 목사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그 강습회에 나가지 않았다.

 

강습회에서 몰리고 난 이용도 목사는 어이가 없었고 생각도 많았다 . 도대체 어찌된 세상인가 세상이 이래서야 될 수가 있겠는가 . 몰리고 나서 하루 밤이 지난 그 이튿날 용도 목사는 아침부터 누워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었다 . 그런데 정오 경에 이르러 잠도 들지 않았는데 이상한 환상에 접하였다 . 용도 목사가 강단에 나서니 어디서인지 많은 청년들이 몰려 들어 회당이 가득 찼다 . 용도 목사가 한참 말을 하는데 무섭게 생긴 사람 둘이 손에 큰 검을 들고 들어와서 않은 청년들을 모조리 찌르고 베어다 쓰러뜨리고서 용도 목사에게 이르러서는 두 명이 함께 칼을 들어 동시에 목사를 치려고 한다. 이때에 목사가 입김을 내어 그자들을 훅 부니 둘이 다 당장 쓰러져 죽는 것이었다 .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 아주 정신이 똑똑한 때에 이 광경이 보여진 것이다 . 이에 이 목사는 벌떡 일어나서 엎드렸다 . 엎드린 이 목사는 기도 드렸다.

“ 주여 , 알려주시옵소서 . 어찌 이것을 보여 주셨으며 이 뜻이 무엇임을 알려 주시옵소서.”

오랫동안 기도를 드렸더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 네 입에 내 능력을 주니 나가서 외치고 외쳐서 마귀들을 쳐서 물리치라.”

 

 

 

전국순회 부흥 전도

 

주일학교 지도자 강습회에서 그런 사건이 있은 후 이용도는 문제의 인물이 되었다 . 감리교단본부에서도 이 사건을 중대시하여 용도 처치 문제를 중심으로 연구와 논쟁이 모 방면에서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 마침 연회가 열리게 되었으므로 이용도는 경성지방 순회목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 경성지방 감리사의 명령하에서 경성지방을 순회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용도 목사는 인간의 거리에 말 못할 사정이 많음과 주님의 섭리를 말로 다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그저 하늘만 우러러 보며 기도로써 오직 주님과 연락하면서 지시에 의해서 그저 주께서 주신 무기인 혀와 주께서 주시는 능력인 말을 통하여 주님의 역사에 복종만 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용도 목사는 자기의 아호를 시무언 ( 是無言 · 말없는 것이 옳다 ) 이라고 정한 듯한바 , 이리하는 데는 위에 말한 그런 사정이 그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인 것이었다.

어느 한 곳에나 , 어느 한 기관에 놓으면 자꾸 문제가 생기는 용도를 지방 순회목사로 정한 것은 부득이한 최선의 인사이었다 . 그러나 얼마 안되어 다시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교단본부의 명령과 전 조선 각 교회의 요청이 상충되는 것이었다.

감리교회의 경성지방만 순회하여야 할 처지에 있는 이용도 목사였으나 전 조선 각 교파의 각 교회가 좀 와달라고 간청 애원의 아우성을 치므로 용도 목사의 입장은 딱하게 되고 교단본부는 염려를 하게 되었다 . 그런데다가 경성지방의 감리교회들 중에는 용도 목사의 집회를 몇 날이라도 열어보려고 갈망하는 곳도 있으나 , 그 꼴 보기 싫다고 빈정대고 비방하는 교회도 있으니 이 중간에 선 이용도 목사는 점점 처신이 곤란해지는 것이었다 . 이렇게 되니 용도 목사는 그저 엎드리는 수 밖에 없었다 . 엎드려 그저 기도 드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 주여 , 어찌 하오리까 . 내 주여 ,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

이렇게 고민의 생활 , 기도의 생활을 계속하던 용도 목사가 한 결정을 했으니 이제부터는 오직 기도를 드려서 내리시는 지시에 의해서만 움직이기로 한 것이 그것이었다 . ‘ 가고 오는 것 ’ ‘ 어느 교회에 가서 몇 날 집회를 하고 안 하는 것 ’ 등 모든 것을 오직 기도를 통해서 내리시는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만 결정하고 움직이기로 하였다.

그리해서 하루에 수 십 통씩 배달되는 여러 곳에서의 집회 간청의 편지와 전보를 앞에 놓고 용도 목사는 그저 엎드려 기도 드리다가 주께서 가라는 곳을 향하여 가기로 하는 것이었다.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 16:6~10).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주님의 뜻대로만 한다는 이 처신이 상사인 경성지방 감리사와 교단본부 감독을 등한히 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결과도 나타나는 것이었다 . 이러한 눈치를 분명히 본 용도 목사는 더욱더욱 고민하고 더욱더욱 엎드리었다 . 그러다가 꼭 와서 죽을 생명들을 속히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편지와 전보가 한 교회에서 수 십 번씩 계속해서 오기도 할 때는 그저 “ 내 주여 ,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 하며 눈물을 흘리며 끌려가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분명히 상사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요 , 교단의 규칙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끌려 다니는 용도 목사는 주님의 권능과 사랑을 인간의 상상 이상으로 도처에서 충분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 주님의 권능이 크게 나타난다는 것은 그 역사의 기계 노릇을 하는 사람의 ‘ 인기가 높아간다 ’ 는 말로 표시 되었다 . 그래서 용도 목사는 1931 년 여름 경에는 벌써 각처에서 경탄의 존경과 함께 전 조선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다. 

“ 그는 바울이야 , 세례 요한이야 .”

“ 그는 사람이 아니야 , 성신이야 , 예수님의 그림자야 .”

이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삼천리 강산에는 큰 부흥이 일어났고 이용도 목사라는 이름은 2,000 만 동포 ( 불신자도 포함 ) 의 입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

 

 

 

< 제 2 부 : 사랑으로 타오른 생명의 불꽃 >

 

 

 

제 5 장

부흥사 시절(1931 년)

 

 

크신 역사

 

1931 년은 용도 목사의 교역자로서의 생활에 가장 큰 빛을 발하는 해이었으니 이 해가 주님의 크신 역사를 나타내는 최고 절정으로 올라가는 해이었기 때문이다 . 주요 집회는 아래와 같다 .

평양 중앙교회 , 재령 동부교회 , 재령 서부교회 , 경남 거창교회 , 간도 용정 교회 , 간도 국자가교회 , 간도 두도구교회 , 평양 남문밖교회 , 함남 영무수양회 , 은율교회 , 선천 남교회 · 북교회 , 아현성결교회 , 경남 통영교회 , 사천교회 , 충북 진천교회 , 경성 삼청동교회 , 중앙전도관 , 인천 내리교회 , 개성 남부교회 , 화천교회 , 평양 명촌교회 , 평양 산정현교회

 

 

 

재령 ( 載寧 ) 집회

 

당시의 사정을 일기를 통하여 설명한다. 3)

 

3) 일기 ‘1931 년 2 월 28 일 ~3 월 4 일 ’ 에 전문 수록

 

 

 

목소리는 조금도 안 나올 모양인데 각처에서 모여든 군중들은 어찌할꼬 . 심히 민망 . ‘ 오 주여 , 옳소이다 . 나의 음성을 아주 잠그시고 당신이 직접 역사할 때로소이다 . 시간이 지날수록 , 세월이 갈수록 나의 앞에는 기사와 이적이 있었나이다 . 이번에는 또 어떤 오묘를 나타내시려나이까 . 나는 엄숙한 마음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 아 , 주는 나의 오묘요 , 신기이었나이다 . 목은 꼭 잠겼으나 통역을 세워 불을 토하게 되니 성신의 맹렬한 역사가 일어났다 . 나는 말을 할 수 없노라 .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 곧 나의 설교는 나의 중심에 가득히 서리어 있노라 . 중심에 있어서 나를 괴롭게 하노라 . 나는 말로 할 수 없어 눈물만 흘리노라 . 이 눈물은 오늘의 나의 설교로다 . 나는 중심에 있는 말을 다하지 못하여 전신의 힘을 모아 쥐어 손을 드노라 . 들은 손은 곧 나의 설교로다 . 나는 말할 수 없으매 엎드려 기도하노라 . 이는 곧 나의 설교로라 . 나의 등에서 흐르는 땀은 여러분을 위한 나의 진실한 설교로다.

 

 

 

거창 ( 居昌 ) 교회 집회

 

거창교회 집회의 모습을 용도 목사의 일기를 통해서 보기로 한다. 4)

 

4) 일기 ‘1931 년 3 월 5 일 ~3 월 13 일 ’ 에 전문 수록

 

 

 

저녁에 사람은 많이 왔었지만 나는 아무 설교도 하지 못하였다 . 나의 중심에 불이 없고 감동이 없음이었다 . 나 자신에게는 큰 망신임이 확실하다 . 하지만 열심 없는 것을 지껄이고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편안하였다 . 주께서 나에게 나타낼 오묘를 나는 기대하였다 . 반드시 무슨 성의 ( 聖意 ) 가 계실 것을 믿는다 . 예배를 마친 후 40~50 명 가량이 남아 있어 기도하고 그 후는 10 여명의 진실한 신자만이 남아있어 기도하였다 . ‘ 오 주여 ,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 주여 , 저희들의 죄악을 긍휼히 여기시고 돌아보아 주옵소서 . 우리들의 죄 때문에 당신의 사자의 입을 봉하지 마소서 ’ 하는 것이었다 . 나는 나의 부족함과 악함을 뉘우치고 저희는 저희의 죄 , 성신의 뜻보다 인위만을 좇는 저희의 죄를 알았도다 . 주님은 과연 오묘하시도다 . 어떤 때는 나로 말하게 하여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어떤 때는 입을 다물어 놓고 은혜를 주시나이다.

 

 

 

간도 용정촌 교회 집회

 

거창 집회를 마친 용도 목사는 집에 잠깐 들렸다가 간도 방면으로 향하였다 . 4 월 18 일에 용정에 도착하여서 5 월 5 일에 서울 귀환할 때까지 반달 동안에 용도 목사는 용정촌의 국자가 ( 局子街 ), 두도구 ( 頭道溝 ) 의 감리교회와 용정장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5)

 

5) 추모집 제 2 부 ‘ 이호빈편 ’ 에 전문 수록

 

 

 

용도 군의 설교의 중심점은 , 현 교회에 기도가 없음을 책망하고 ‘ 가슴에 피로 받아야 할 신앙 ’ 이 두뇌로 따지어 받으려고 철없이 덤비는 오늘날의 신자를 꾸짖었다 . 더욱이 교역자들을 향하여 책망하고 꾸짖었다 . ‘ 머리의 부분으로만 따지고 꾸며 교회를 먹이려는 교역자들이여 , 가슴에 피를 쏟아 생명으로 먹이어라 .’ ‘ 교제 ( 交際 ) 에 동분서주하는 일이 있기 전에 먼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여라 .’ 이렇게 외치어 교역자를 격려하였다 . 그 설교가 어찌도 열렬하고 권위가 있으며 생명의 불길이 뿜어 나왔던지 구경꾼에 불신자까지라도 사람의 말 같지 아니하다고 놀래었거니와 실로 성령에 끌리어 불타는 애통의 간증이었으며 천군이 호령하는 뇌성 ( 雷聲 ) 과 같았었다 . 청중은 울다가 무서워 떨었고 무서워 떨다가 다시 울면서도 남이 알지 못하는 시원한 맛을 가슴에 맛보게 되어 폐회를 선언하나 헤어질 줄을 몰랐고 언제든지 집회 정각 전에 만원으로 문밖까지 여지가 없었다.

 

 

 

평양 남문밖 ( 南門外 ) 교회 집회

 

간도 용정촌 방면의 집회에서 돌아온 용도 목사는 6 월 8 일에서 12 일까지 평양 남문밖교회에 집회 차 내려갔다 . 재령 교회에서의 엄청난 역사는 분명히 일부분의 사람들에게 시기나 질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여 이용도는 무교회 주의자라는 소문을 떠돌기 시작하였다 . 그래서 평양에 용도 목사가 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재령 방면에서 이용도는 무교회주의자라는 선전이 강렬한 바람을 타고 평양에 들어왔다 . 그런 이유로 남문밖교회에 집회가 시작되자 은혜 받으려는 사람도 많았지만 염탐하고 책잡으려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 당시의 사정을 모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 6)

 

6) 일기 ‘1931 년 6 월 13 일 ’ 에 전문 수록

 

 

 

6 월 초이었습니다 . 길선주 목사 등 7~8 명의 목사는 무교회주의자 이용도의 집회를 감찰하고 책을 잡기 위하여 나섰는데 나도 같이 따라갔습니다 . 회색 주의 ( 周衣 ) 를 입고 하이칼라 머리로 깎은 청년이 강단에 올라서는데 얼른 보기에는 아편쟁이같이 밖에 안보였습니다 .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척 나서면서 ‘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면서 두 손을 드는데 ,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 거림을 느꼈고 그 기도의 말이 하도 유창하고 , 비장하고 , 아름답고 , 심각함 에 정신이 빙빙 도는 것이었으며 요한복음 6 장 1 절에서 59 절까지를 읽는데 그 성경 읽는 데서 벌써 만장의 군중은 감탄 , 황홀 , 통회 , 체읍 ( 涕泣 ) 하는 것이었습니다 . 설교를 하시다가는 , ‘ 토마스 목사의 피와 살을 먹은 평양성 아 , 네가 언제까지 의인의 피를 요구하며 , 얼마나 더 많은 의인의 피를 요구하느냐 ’ 하는 말에 이르러 만장이 통곡을 하게 되자 책잡으러 갔던 목사들이 모조리 거꾸러져 자복 , 회개 , 통곡하는 광경은 참으로 성신의 크신 역사인 동시에 사람 눈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장한 일이었습니다.

 

이 남문밖교회 집회 시에 광성고교 강당에서 광성 , 정의여자고등 , 성경학교의 학생들에게 세 번 설교를 하였는데 이때에 감명을 준 바가 대단히 컸다고 한다 . 그래서 오늘날 교역에 투신하고 있는 40 대의 그 세 학교 출신 교역자 중에는 이때의 감명에서 출발한 자가 많다는 것이다.

 

 

 

선천 ( 宣川 ) 읍 집회 7)

 

7) 일기 ‘1931 년 8 월 20 일 ~8 월 22 일 ’ 에 전문 수록

 

 

아 , 이 굳고 교만한 선천이여 , 목사로부터 평신도까지 다 생명이 죽지 않았는가 . 내 마음 심히 괴롭도다 . 선천의 사람들아 , 너희가 나의 피와 살을 마실만하도다 . 주께서 허락하시면 나는 줄지라 . 그러나 나의 그것들이 어찌 너희에게 생명이 되랴 . 주여 , 저희에게 생명이 되도록 나를 신조 ( 新造 ) 하여 나의 고기를 저희에게 던져 주소서 . 나의 피를 뿌리시고 …… . 오 주여 , 나를 죽이시어서라도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옵소서.

 

 

 

아현성결교회에서의 축출

 

아현성결교회에서의 집회는 9 월 28 일부터 시작하여 10 월 3 일에 마친 예정이던 것을 2 일 밤중에 집회 도중 축출을 당하여 부득이 집회가 중단되는 사건이 있었다. 8)

 

8) 서간집 ‘ 이호빈 목사에게 보낸 편지 ,

   ① 1931 년 10 월 7 일 ② 1931 년 10 월 13 일 ’ 에 전문 수록

 

 

 

월요일 새벽에 시작하여 금요일 밤 열두 시에 축출을 당하였답니다 . 밤중에 그 교회 전도사에게 축출을 당하고 책보끼고 무악산 허리를 타고 송림(松 林 ) 으로 나는 들어갔으니 은근한 주의 품이 더욱 그리웠음이었습니다 . 그때 쫓겨날 때 퍽 감사하고 좋았습니다 . 생전에 처음이지요 . 기한 전에 쫓겨나기는 참 굉장하였소이다 .

 

당시의 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조선 교계의 형편은 이호빈 목사에게 보내는 용도 목사의 서간의 일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9)

 

9) 서간집 ‘ 이호빈 목사에게 보낸 편지 ,

    ① 1931 년 10 월 초 ② 1931 년 10 월 13 일 ’ 에 전문 수록

 

 

 

큰 싸움은 시작되었소이다 . 영과 육의 싸움이니 이스마엘과 이삭의 싸움이로소이다 . 혈육으로 난 자가 하나님의 허락으로 난 자를 대적하는 싸움이로소이다 . 혈육의 자식이 허락의 자녀를 시기하여 꼬집어 뜯고 있나이다 . 각 처에서 이 싸움은 시작되었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오이다 . 하나님의 사람의 운동이요 , 그 자비의 계획적 전책 ( 戰策 ) 인가 하나이다 . 

그러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 날이 우리의 완성의 날이겠지요 . 우리의 육신이 저희들 목전에서 저희들 손에 살이 찢기어 지는 그날에 우리는 장쾌하게 예수님의 최후의 말씀 ‘ 다 이루었다 ’ 를 부르짖고 승천하겠지요 . 우리는 이제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를 비통하게 부르짖고 십자가 상의 벌거벗은 몸이 최후를 마치신 그 예수를 따라갈 뿐이외다 . 여하간 우리의 피의 한 방울이 떨어지는 그날이라야 우리의 일은 다 이루는 날이니 오늘 와도 좋고 내일 와도 좋을 것이외다.

 

 

 

황해노회의 이용도 매장 결의

 

용도 목사가 아현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다가 현장에서 축출을 당하던 그 무렵에 황해노회에서는 공회의 결의로 이용도 처분의 안이 통과되었다. 지난 봄 재령 교회의 집회에서 너무도 굉장한 역사가 일어나고 은혜가 크게 내릴 때 일부 사람들은 시기의 눈으로 보았으니 그것은 교회에 충실치 못한 무능에 속하는 교직자들이었다 . 남들은 은혜에 푹 빠져 감격의 생활을 하는 동안 일부의 사람들은 감찰 행동을 취하여 트집을 잡을 연구를 항상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 월 12 일부터 은율교회에서 1 주간 집회를 할 때에는 좀더 감찰의 눈을 날카롭게 하여 별 것을 다 꼬집어 보고 들추어 보는 것이었다 . 그리해 가지고 꾸며낸 것이 황해노회의 이용도 매장의 결의이었다 . 이것은 ‘ 까닭 없이 예수를 미워하던 못된 피 ’ 의 발동이었고 ‘ 저가 아버지에게 속하여 있어서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 때문에 생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 

당시 황해노회에서 가결된 것은 6 조인바 이용도는 , 

① 재령교회를 비방한다.

② 여신도들과 서신 거래를 자주한다. 

③ 불을 끄고 기도를 한다. 

④ 교역자를 공격한다.

⑤ ‘ 성서조선 ’ 이라는 잡지를 선전한다 .

⑥ 그러니 그는 무교회주의자요 ,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이니 황해노회 지경 안에서는 청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 결의에 대해 용도 목사는 김인서 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해명한다.10)

 

나는 남을 가르칠 자가 아니요 , 배울 자이니 , 일생 학생심을 가지고 배워 마땅한 자입니다 . ‘ 선악이 개오사 ( 皆悟師 )’ 라 . 모든 것이 다 나의 스승이 되어 있습니다 . 나는 말하지 않고 , 즉 이론하지 않고 그냥 살렵니다 . 말할 자가 아니고 사는 자가 되어 최대의 축복을 느낄 따름입니다 . 진리는 말할 바 아니요 , 살 바 장소임을 나는 압니다 . 종교는 설교에 있지 않고 삶에 있지 않습니까 . 인형 , 우리는 삶에 거합니다 . 설교 , 문서 다 좋지만 , 그 뒤에 우리의 삶이 없으면 이는 무익한 것이 될 것이외다 . 우리 삶에서 이 모든 것이 나오게 합시다.

 

 

 

통영 ( 統營 )· 사천 ( 泗川 ) 집회 11)

 

10) 서간집 ‘ 김인서 씨에게 보내는 편지 , 1931 년 10 월 ’ 에 전문 수록 

11) 일기 ‘1931 년 10 월 6 일 ~ 10 월 19 일 ’ 에 전문 수록

 

 

 

주여 , 당신만이 영광을 받으소서 .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는 나를 무엇이라도 만드소서 . 이것은 더러운 것밖에 없는 미물이로소이다 . 그러나 이것을 제물로 받으시옵소서 . 그리하여 이것의 존재라는 것은 지극히 작은 부분의 하나 라도 남기지 마시옵소서.

 

 

 

평양 명촌교회와 산정현 ( 山亭峴 ) 교회 집회

 

1931 년도에 용도 목사는 평양에 세 번 갔었다 . 그의 일기에 의하면 2 월 14 일 밤부터 3 일간 평양 중앙교회에서 6 월 8 일부터 5 일간 남문밖교회 , 그리고 세 번째가 12 월 중순에 평양 가서 명촌교회에서 1 주일간 집회를 인도하고 이어서 산정현교회에서 5 일간 집회를 인도한 후 28 일 밤차로 평양역을 떠났다 . 이때의 명촌교회 집회는 너무도 유명했고 평양의 인기를 집중하였다 . 너무도 성신의 역사가 크심을 평양성 내의 각 교파 모든 교회가 다 알게 되었으매 산정현교회가 움직였다 . 그래서 명촌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려는 목사를 붙들어서 5 일간을 더 평양의 강단에 세웠다 .

명촌교회의 집회에서 성신의 위대하신 역사가 너무 굉장하였으므로 산정현 교회는 첫날 첫 시간부터 초만원이었다 . 집회 시간 30 분 전에 가면 벌써 사람으로 문이 꼭 닫혀 회당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고 한 시간쯤 전에 가서 겨우 뚫고 들어가면 앞뒤에서 조이는 바람에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 곤란과 현기증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평양의 산정현교회라면 지식계급의 신자와 생활이 유족한 신자가 많기로 유명한 교회다 . 그런데 이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으니 평양 시내의 지식인 , 신학생 , 숭실전문 학생들 중의 유력한 정수분자가 다 모였다 .

 

 

 

1931 년 10 월 사천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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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기서의 1 주일 동안의 집회는 사실상 평안남도의 각 교회를 1 년 동안 순회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었다 . 그런데 여기서 5 일 동안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더 땀을 흘리며 더 결사적으로 외쳤으니 그 효과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 용도 목사가 전하는 당시의 간증이다. 12)

 

12) 추모집 제 1 부 ‘ 목사님을 따라 평양 명촌에 ’,

    ‘ 산정현교회의 집회 5 일간 ’ 에 전문 수록

 

 

 

“ 회당에서 밤을 새워 기도를 드릴 때 나의 맥박이 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 나는 내 숨이 곧 끊어질 지경에 이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이 때에 안수기도를 원하는 이가 한 분 나타났습니다 . 나는 숨도 쉴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으니 말로 기도를 드리지는 못하고 그저 그 머리 위에 손만 얹고 있었습니다 . 이때에 내 심중에 일어나는 감격은 너무 컸습니다 . 내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에 남을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감격했습니다. 내가 숨이 지더라도 그 부인은 축복을 받을지니 나는 죽어도 나 대신 주님께서 그를 축복하실 것이 믿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 나의 기도는 축복의 기도가 아니라 ‘ 나는 남을 도울 힘이 없사오니 주님 친히 축복하옵소서 ’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 그런데 얼마 후에 힘이 나고 말문이 터져서 둘이 다 충분히 감격할 수 있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이렇게 산정현교회에 뿌린 이용도 목사의 피땀의 씨가 옥토에 떨어져 잘 자라난 것을 알 수 있었으니 , 그 후로 산정현교회는 평양에서 가장 은혜스럽고 , 건실하고 , 굳센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 이때 부흥회 당시에 담임목사는 강규찬 목사님이시었다 . 그 늙으신 몸이 그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감격하여 기뻐하시던 그 모습도 또한 잊혀지지 않는 바이다 . 그리고 그 다음에 송창근 목사가 시무하였고 , 그 다음에 오신 이가 전세계에 알려진 주기철 ( 朱基徹 ) 목사님이시었다 .

주 목사님의 순교는 물론 목사님 자신의 순교적 신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 사모님 오정모 씨 , 산정현교회의 제직 , 든든하고 강력한 교인 전체의 필승과 불패의 결사적인 뒷받침이 합동하여 크게 역사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 산정현교회의 배인숙 전도사가 가끔 찾아와서 울면서 그간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줄 때마다 나는 항상 산정현교회 강단에서 외치는 용도 목사님의 모습을 연상하였고 , 주 목사님의 순교의 승리의 소식을 들은 후로는 산정현교회에서 그때 그 닷새 동안에 그 땀과 그 눈물을 흘리면서 외치고, 몸부림치던 용도 목사님의 모습과 다년간의 악형과 옥고에 뼈만 남으신 몸이 평양 감옥의 천정을 보며 고요히 영광스럽게 눈을 감으시는 주 목사님을 연상하나니 이용도 목사와 주기철 목사님은 어느 점에서인가 단단히 연결된 굵은 선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기도단의 출현

 

1930 년 3 월 평양 중앙교회에 와서 씨를 뿌리기 시작한 후부터 계속해서 평양의 각 교회에 용도 목사의 피와 땀을 통한 복음의 씨는 많이 뿌려졌다. 이 씨가 한 좋은 싹으로 돋아났으니 , 평양기도단의 출현이란 것이 그것이다.

 

‘ 단 ’( 團 ) 이란 말은 조금 잘 어울리지 않는 말 같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함으로 결국 그렇게 이름이 붙은 것이다 . 기도의 불덩이들이 모였으니 기도단이고 또 그들이 무엇을 해낼 것 같으니 청년단 , 독립단을 연상하면서 기도단이라고 한 것이다 . 이 기도단은 평양 서문밖교회를 중심으로 생겨나 자라고 있었다 . 기도단은 그저 실컷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오락가락 하다가 지어진 호칭이지만 이 기도단원들이 평양성 안의 기독교회의 핵심적 존재인 것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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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곧 이 기도단의 첫 사업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 신앙생활 ’ 이란 잡지가 발간된 것이 그것이다 . 필자에게 알려지고 기억되어 있는 한도 안에서는 , “ 용도 목사는 외치고 , ‘ 신앙생활 ’ 은 글로써 조선 천지를 복음화하자 ” 는 데서 탄생되었다 . 1932 년 정월 어느 날 새벽에 서문밖교회 아래층 기도실에 창간호를 한아름 안고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 신앙생활 ’ 에 대한 설명을 하시던 김인서 장로님의 모습을 지금도 나는 내 눈 속에 그리고 있다

 

 

 

< 제 2 부 : 사랑으로 타오른 생명의 불꽃 >

 

 

 

제 6 장

부흥사 시절(1932 년)

 

 

 

주요 집회

 

동대문교회 , 인천 내리교회 , 서울 자교교회 , 연화봉교회 , 상동교회 , 도화동 교회 , 강원도 양구교회 , 용두리교회 , 신설동교회 , 체부동교회 , 평양 명촌교회 , 평양 신암교회 , 한포교회 , 충남 당진교회 , 광화문교회 , 평남 안주교회 , 운산 북진교회 , 해주 남본정교회 , 신계교회 , 양주 월계리교회 , 중앙전도관

 

 

 

원단 ( 元旦 ) 의 부흥회

 

1932 년 이용도 목사는 정월 초하룻날부터 부흥 집회에 나섰다 . 실상은 작년 말에 시작한 집회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 작년 말에 평양에서 명촌 , 산정현 두 교회 집회를 계속해서 2 주간 인도하고 29 일 아침에 도착한 목사님은 그 날 밤부터 또 부흥회에 나서는 것이었다 . 산정현 집회에서 맥박이 끊어지려던 그 몸이 하루도 쉼이 없이 그냥 집회를 계속하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정말 결사적 활동이요 , 그의 하루하루는 모두가 최종의 날이었고 그의 말은 한마디한마디가 다 유언이었다 . 제 몸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으로는 차마 이럴 수 없는 것이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애착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렇게 제 피를 무리하게 쏟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완전히 전체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지시에만 절대로 복종하여 가라시는데까지 가다가 부르실 때에 가려는 생활 원칙을 확립하였으매 그저 엄청나게 그저 미욱하게 육탄으로 돌진 , 맹진 ( 盲進 ) 하는 것이었다 .

‘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저는 주의 것임 ’ 을 믿었기 때문이며 ‘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 죽는 것도 유익한 것임 ’ 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

이 해 첫날에 선 교회는 서울 동대문교회이었고 계속해서 인천 내리교회, 서울 자교교회 , 연화봉교회 , 도화동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 동대문교회에서의 설교 내용 중 일부다. 13)

 

13) 추모집 제 1 부 ‘ 잊혀지지 않는 그 설교 , 쟁쟁한 그 음성 ’ 에 전문 수록

 

 

주님을 따르는 일은 다른 노릇 다 하면서 할 수는 없습니다 . 다른 노릇 다 그만두고 다른 생각 다 내어버리고서야 주를 따를 수 있습니다 . 넥타이가 바로 매어졌나 해서 거울을 몇 번이나 보는 사람의 성경에는 먼지가 푹푹 쌓여 있습니다 . 콧잔등에 바른 분이 지워지지나 않나 해서 거울을 들고 다니며 길가에서까지 꺼내 들고 보는 여자의 마음에 예수는 없습니다 . 예배당에 와서도 두루마기 동정이 어찌되지나 않나 해서 마음을 거기 두고 , 저고리 뒤가 접히지 않았나 해서 잔등만 만지는 동안 그 속에 주님은 계시지 못합니다.

 

 

 

송창근 박사의 귀국

 

송창근 박사와 용도 목사와는 특별하게 깊은 인연이 있다 . 송씨가 피어선 성경학원에 다닐 때에 우연히 사귄 두 사람은 어느새 절친해졌다 . 7, 8 년 전 그가 미국으로 공부를 가고 싶은 생각은 많으나 손에 한 푼도 없으니 떠날 여비도 준비할 도리가 없어서 그는 고민하는 것이었다 . 이때에 신학교 3 학년에서 고학을 하던 용도 목사가 송형의 마음 속은 짐작되나 그도 역시 단 몇 원을 어찌할 길이 없었다 . 오래 동안 생각하던 용도는 슬그머니 집 ( 현저동 산기슭에 전세로 들어있던 조그만 집 ) 을 팔았다 . 전셋돈 250 원 전부를 건네주고 제가 입던 오직 한 벌인 깨끗한 양복을 줄이고 고쳐서 입혀 주어 그를 미국으로 공부하러 보냈던 것이다 . 이러한 송 씨가 7 년 만에 박사가 되어서 돌아오니 용도 목사의 감개가 어떠했을 것인가. 14)

 

14) 일기 ‘1932 년 1 월 1 일 ’ 참조

 

 

 

7 년의 세월은 두 사람을 잘 길러주어 하나는 신학박사가 되고 하나는 유능한 부흥목사가 되었다 .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흥목사가 된 용도 . 어느덧 삼천리를 편력하는 순회 부흥목사가 되고 또 벌써 어디서부터인지 핍박 공격의 손길이 자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된 용도는 그 누구를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나고 있었다 . 그런데 이때에 이 신학박사가 오게 되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 것인가 . 송 박사에게 대한 그의 기대는 컸고 송 박사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어린애기같이 순진하고 열렬하였다 . 그래서 앞으로의 조선 기독교계는 이 두 사람의 동정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을 예상케 하는 것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송 박사는 얼마 후에 평양으로 내려와서 숭실학교 교목으로 들어갔다 . 송 박사는 평양에 자리를 잡고 용도 목사는 평양을 원심 ( 圓心 ) 으로 하고 그 주위를 빙빙 돌며 땀을 흘리며 피를 쏟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 다.

 

 

 

연회 ( 年會 ) 와 노회 ( 老會 ) 의 결정

 

작년 감리교연회에 경성지방 순회목사로 파송을 받은 용도 목사의 1 년 동안 의 생활을 살펴보면 한 교파에 속한 지방 순회목사가 아니고 교파를 초월한 전국 순회 부흥목사라고 함이 오히려 적당할 형편이었다 . 그러므로 소속 교단에서는 말썽이 많았다 . “ 왜 이리저리로 남의 교파에까지 다니게 하느냐 ”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 그래서 어떤 한편에서는 용도를 어느 한 기관에 붙들어 매놓자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용도는 아무데 갖다 놓아도 그저 부흥회식의 활동밖에 모르고 또 안 하는 것이니 별다른 도리가 없어 이 해에도 역시 서울지방 순회목사로 파송을 하게 되었다 . 그래서 어느 교파 , 어느 지방에서든지 용도 목사를 모셔가려는 데는 서울지방 감리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 정당한 수속 절차로 되어 있었다.

 

당시 장로교 평양노회는 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 ① 타교파의 강사를 집회에 청할 때는 규정된 수속을 취할 것 ( 용도 목사의 청빈을 제한 ) ② 조용히 기도하고 떠들지 말 것 ( 평양기도단의 열신 동지들의 기도를 억제 ) ③ 무인가 단체를 해산할 것 ( 기도단 같은 열신 운동을 탄압 ) 이었다 . 남궁혁 ( 南宮爀 ) 박사와 채필근 학사의 제안으로 가결된 이 법안은 기도를 제한하는 악법인 것이었다.

 

 

 

평양 명촌교회 ,  신암교회 집회

 

서울 근방을 중심으로 봄 내내 집회인도를 한 이용도 목사는 6 월 중순에 평양으로 내려가 우선 명촌교회와 신암교회의 집회에 나섰다 . 이때 평양방면의 집회를 인도하려고 서울을 떠나려 하였을 때 , 용도 목사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 있어서 발걸음 하나를 옮겨놓을 힘도 없으리 만치 기운이 없었다. 그런 것을 그야말로 결사적 용기를 내어 평양까지 이르렀다 . 용도 목사의 간증이다. 15)

 

15) 추모집 제 3 부 ‘ 평양 명촌교회 , 신암교회 ’ 에 전문 수록

 

 

 

이번에 이곳 오기 전에 나는 기운이 없어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 일어날 기운이 없어 무척 걱정을 하고 있었으나 가야 할 길이기에 나는 억지로 일어났습니다 . 작은 성경 한 권을 겨우 손에 들고는 지팡이를 잡고 일어났습니다 . 겨우 정거장까지 나와 기차표를 사기는 했으나 기차에 오를 힘도 없고 평양까지 무사히 도착할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 나는 정거장 한 모퉁이에서 고요히 기도 드렸습니다 . 기도 드리는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 ‘ 아버지 , 이 몸으로 , 이 기운으로 , 이 길을 떠나 가오리까 . 가다가 죽어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 저는 용기도 자신도 없사오니 아버지 뜻대로만 하시옵소서 .’ 이렇게 기도하는데 가야 한다는 명령이 내릴 때 나는 무한한 감격에 빠졌습니다 . 생각하니 전에는 30 분이면 도착할 정거장에 1 시간 반 이상을 걸려 지팡이를 집고 나왔던 것입니다 . 기차에서 너무 피곤하여 사리원에서 도중 하차를 했지요 . 하차한 나는 동으로 서로 감리교 예배당을 찾아갔지요 이 길을 걷는 동안에 어디서인지 힘이 좀 오는 것이었습니다 . 신앙의 동지 몇 분을 만나 114 장 ( 목마른 자들아 다 이 리오라 ) 찬송을 부르는 동안 확실히 좀더 새 힘을 얻었습니다 . 이때부터 기도의 말을 할 수 있는 힘도 생기어 예배를 드린 후 새 힘을 받아가지고 평양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평양에 와서 집회를 인도하는 용도 목사는 어디인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이 보였다.

 

그 즈음 용도 목사의 심경은 그의 편지 하나에 나타난다 .15)

 

16) 서간집 ‘ 이종현 씨에게 보내는 편지 , 1932 년 7 월 22 일 ’ 에 전문 수록

 

 

 

무엇이든지 다 모여 오라 하라 . 같이 춤 출 자면 , 같이 기도할 자면 , 같이 찬송하고 같이 전도할 자면 . 남자도 좋고 여자도 좋다 . 상인도 좋고 농인도 좋다 . 학생도 좋고 선생도 좋다 . 양인도 청인도 왜인도 좋다 . 광인도 좋고 병인도 좋다 . 장로교인도 좋고 성결교인이나 감리교인도 좋다 . 이단자 ,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는 명패를 차고 제사장 아문에서 쫓겨 나가던 이가 , 오 , 그 이가 우리의 왕이시요 , 대장이시다 . 다 오너라 . ‘ 주의 것 ’ 이거든 . 주의 것 ! 주의 것 ! 오 , 주의 것들이여 !

 

 

 

평양노회의 금족령

 

지난 해 연말에 명촌과 산정현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평양성의 신도들이 이번 여름의 명촌 , 신암의 집회에서는 결정적으로 신앙의 내용과 생활 태도에 변동을 가져왔다 . 그런데 이런 변화 ( 성령에 의해서 신도들이 새로 지음을 받는 일 ) 가 교권자 , 목사들에게는 공포와 위협으로 나타났으니 무능한 교역자들이 자기의 지위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평양노회는 또 한 개의 다른 법안을 통과시켰으니 이용도를 평양노회 지경 안에는 들이지 말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 그 내용은 아주 솔직한 것이었으니 이용도를 세우면 그만치 설교 못하는 본 교회 목사가 푸대접을 받고 그의 생활이 위협을 받을 것이니 그를 노회 지경 안에 들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평양노회의 결의 사항은 , ① 이용도는 거짓말쟁이다 . ② 이용도는 대접 받기를 좋아한다 . ③ 이용도는 파괴주의자다 . ④ 이용도는 질서를 혼란케 하는 자다 . ⑤ 이용도를 단에 세우면 본 교회 담당목사가 푸대접을 받아 살길이 막연해진다 . 그러므로 이용도를 우리 노회 지경 안에 들이지 말자 .

 

당시 정황과 관련한 평양기도단원의 간증이다.

 

“1932 년 10 월 평양노회에서 경내 입족 ( 入足 ) 금지의 결의가 있은 후로 우리 동지 몇 사람은 각 동지의 집으로 몰려다니면서 울며 기도 드리고 통곡하며 하늘에 호소하였습니다 . 김예진 , 김지영 , 나학주 등의 집으로 몰려다니던 우리는 종현 씨 집에서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 이리 지내는 동안에 그 해도 거의 끝이 되어 오는 어느 날 밤에 목사님의 형상이 나타났습니다 . 평양 노회 결의가 있은 후로 그는 머리를 깍지 않고 수염을 그냥 두었습니다 . 컴컴하고 침울한 그 얼굴 , 약해지고 쇠잔한 그 몸이 작은 방안에 많이 모인 사람에게 말씀을 하시려고 윗간 담벽을 지고 섰습니다.

 

17) 서간집 ‘ 이호빈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 , 1932 년 10 월 ’ 에 전문 수록

 

 

 

‘ 여러분 , 이 땅은 내가 가장 땀을 많이 흘린 곳이요 , 내 눈물이 제일 많이 떨어진 곳이올시다 . 나의 기도가 이 땅을 위하여 가장 간절하였고 나의 고민이 이 땅의 뭇 영들을 위하여 가장 컸습니다 . 그런데 이 땅이 나를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이곳 교회의 강단이 나를 세우지 않습니다 . 그래서 나는 옛날의 친구나 한두 사람 잠깐 만나보고 가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 죄인이 밝은 하늘을 쓰고 들어올 수 없어서 다 어두운 밤중에 찾아왔는데 이 집에서 웬 기도소리가 이렇게 크고 웬 울음소리가 이렇게 높습니까 . ( 목사님은 커다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 모조리 잡아 죽이는 그 통에도 어린 모세를 몇 달 동안은 기를 수 있었으나 결국 내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울음소리가 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 여러분 왜 이리 모여서 야단이시고 왜 울음소리를 이리도 높이십니까 . 나를 사랑하거든 울음을 그쳐 주시고 나를 생각하거든 헤어져 돌아가 주십시오.’

 

이때에 모인 50 여명은 초상집에서처럼 대성으로 통곡을 하였습니다 . 밤이 새도록 통곡을 하였습니다.

 

 

 

안주읍 교회 집회

 

안주읍에는 동부와 서부의 두 교회가 있는데 용도 목사는 이 두 교회의 연합 초청에 의해서 1932 년 10 월 3 일부터 11 일까지 부흥회를 인도했다 . 당시 참석자의 간증이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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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추모집 제 3 부 ‘ 안주 동부교회 , 서부교회 ’ 에 전문 수록

 

 

 

설교를 한창 내리 답새기다가 만인의 가슴이 바짝바짝 타 들어왔을 때 목사님은 손을 높이 들며 찬송을 꺼내셨다 . 열광된 청중이 화하여 한절을 다같이 부르면 다시 있는 열을 다 내어 찬송의 다음절을 시적으로 해석 설명하시며 자기의 주장과 소회를 퍼붓다가 말이 제 3 절을 향하여 가경 ( 佳境 ) 으로 들어가면 , 또 손을 번쩍 들며 제 3 절을 발성하는 것이었다 . 이러하기를 분명히 4 시간 이상 해내었다 . 이날 저녁부터 일반의 가슴은 시원해지고 , 끓던 가슴은 쾌함을 얻게 되었다 . 이렇게 되니 이 목사님 모셔오는데 반대하던 분자들도 전부 거꾸러지게 되었다 . …… 이때에 안주에서의 집회광경에는 누구나 다 놀랐다 . 밤 7 시부터 예배를 시작하여 설교를 3~4 시간씩 하고 그리고는 밤이 늦도록 수백 명의 신자에게 안수기도를 하시고 그리고 나서는 강대상 아래 엎드려서 기도로 밤을 완전히 새우시는 것이었다 . 그리고는 오전공부 , 또 계속하여 오후공부 . 이리하여 안수집회 8 일간은 문자 그대로의 불면 ( 不眠 ), 불휴 ( 不休 ) 이었다 .

 

집회 이후 그의 심정을 나타내는 편지의 일부이다. 19)

 

19) 서간집 ‘ 이호빈 씨에게 보내는 편지 , 1932 년 10 월 15 일 ’ 에 전문 수록

 

 

 

나는 대중이 나의 상대가 아니요 , 다만 한 사람이 나의 최선의 상대이었으니 대중을 위하여 나의 생명을 버리지 못하나 한 사람을 위하여는 나의 전체를 희생에 공 ( 供 ) 하기 원하는 것이외다 . 회중에서 실패 , 인전 ( 人前 ) 에서 승리 , 이것이 우리에게 있을 바 일이구려 . 우리가 회 ( 會 ) 를 위하여 충의 ( 忠 義 ) 와 사랑을 다하지 못하나 한 사람을 위하여는 생명을 아끼지 말 것이외다.

 

 

 

해주 집회

 

해주 집회에서도 성신의 권능이 크게 역사했다. 20)

 

20) 서간집 ‘ 김영선 씨에게 보내는 편지 , 1932 년 10 월 26 일 ’ 에 전문 수록

 

 

 

나는 안주와 운산 북진 집회를 마치고 평양으로 들려서 해주에 와서 집회를 인도하는 중입니다 . 북진서 , 숙천서 , 안주서 , 그 외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왔습니다 . 700~800 리 먼 곳에서 학생과 부인들이 발이 부어터져 피를 흘리면서 주야 불구하고 기어드는 정지를 보면 목석 같은 마음에도 눈물이 고입니다 . 심령의 기갈은 심하여 만나 죽게 된 이때 , 오 하나님이여 , 은혜의 비를 내리시옵소서 .

 

 

 

한준명 ( 韓俊明 ) 사건

 

 

고요히 이용도 목사의 일생을 관찰하고 분석할 때 1932 년의 10 월까지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든지 말 들을 것이 하나 없고 책 잡힐 것이 절대로 없었다. 황해노회 , 평양노회 등에서 무슨 소리를 한대도 그것은 시기 , 질투가 아니면 못난 인간들의 생트집이지 말이 되지도 않는 말들이었다 . 그런데 10 월말에 이르러 한 사건이 생겨서 용도 목사에게 욕을 뒤집어 씌우게 되었으니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한준명 사건 , 즉 한준명 등의 예언 운동 - 입류 (入 流 ) 라고도 함 - 사건이 그것이다 .

원산에서 기도생활을 정성되게 하던 한준명은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 한준명은 평양으로 와서도 예언을 하게 되었다 . 평양에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평양의 지식인 , 열신 분자 등이 모여서 그 예언을 듣고 혹은 감탄 , 혹은 검토하다가 나중에는 단단히 달라붙어 질문 시험 검증까지 하게 되었다 . 미래에 대한 것은 그냥 들을 수 밖에 없지만 현재에 관계되는 것은 앞 뒷굽을 맞춰 보기도하고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해 보기도 하였다 . 했더니 맞는 것도 있지만 안 맞는 것도 많았다고 한다 . 그래서 문제를 일으켜 거짓 예언자 , 사기꾼 , 요술쟁이라고 공박을 하게 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라고 때려 죽인다고 몽둥이를 들고 나서기도 하였다 . 이에 한준명은 할 수없이 원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한준명은 이용도의 파당이라고 하면서 한준명의 욕은 잊어버린 듯이 그만두고 용도를 몰아세우고 또 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걸리지를 않아서 걸지를 못하고 트집 잡을 것이 없어 생트집을 잡아서 공박하던 차인데 이런 일이 생기니 교묘히 결부를 시켜서 이 기회에 용도를 타도 , 매장하려는 것이었다 . 평양 한구석에서 생긴 별치 않은 이 사건이 어느덧 전국에 알려지고 전국에서 용도를 시기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총궐기하여 용도 공격에 달라붙었다 . 그래서 용도에 대한 비방 , 험구 , 욕설 , 저주가 차마 귀로 들을 수 없는 정도의 것으로 전국을 휩쓸었다 . 이에 용도 목사를 잘 알고 용도 목사를 진심으로 앙모하는 이들은 이를 갈며 통분하였다.

이렇게 평양 교계가 야단 법석을 하고 있을 때 용도 목사가 평양에 들리게 되었다 . 말하자면 한준명을 평양에 소개한 이가 용도 목사이었는데 , 그 한 준명이 와서 이렇게 중대 문제가 생겼으니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분자들이 용도목사를 붙들고 힐난을 하려는 것이었다 . 마침 목사님이 모 상회에 가 앉았는데 평양 교계의 유력자 7~8 인이 달려들었다 . 그들은 자기네들의 눈에 보이는 한준명을 설명한 후 결국 한준명은 나쁜 사람이요 , 교회를 망치려 다니는 자라고 단언하였다 . 그리고 나서는 말했다 .

“ 한준명은 이 목사가 소개하여 평양에 데려다가 이 일을 일으켰으니 이 목사도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그러니 이 목사의 위신과 명예를 아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오니 , 한준명이 잘못이라는 것과 한준명을 소개한 것에 대한 유감의 뜻과 이제부터 한준명과는 인연을 끊는다는 것을 중외(中 外) 에 성명하시오 .”

이 말을 듣고 목사는 말없이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묵도를 올리시더니 입을 열었다.

“ 나는 신앙태도에 다소간 다른 점이 있다는 한준명은 고사하고 , 도적이나 음부나 살인강도라고 하더라도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다가 죽기를 원하고 힘쓰는 자입니다 . 만일 여러분 보시기에 양해 못할 점이 있든가 , 용인 못할 것이 있거든 버리든가 내쫓든가 하십시오 . 나의 원하는 바는 세상이 버린 사람 , 세상에서 몰리어가는 사람을 받아 그를 거두어 손을 잡고 울며 살려고 합니다 . 내쫓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요 , 임무일는지 모르거니와 나는 쫓기는 자를 거두어 그들과 함께 우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여러 사람의 입에서는 숨소리 하나도 안 들리고 오직 목사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 그의 얼굴에는 중대한 결심과 커다란 환난을 예상하는 엄숙하고 침통한 빛이 띄어 있었다.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

 

 

 

송창근 박사와의 결별

 

황해도 신계읍으로 집회를 인도하러 가는 도중에 평양에 잠깐 들렀다가 이런 광경에 접한 용도 목사는 이상하게 송 박사가 그리워져서 만사를 제치고 그를 만났다 . 그랬더니 송 박사도 역시 한준명은 나쁜 자라고 욕설을 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용도 목사는 긴 시간을 그 자리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 곧 일어나서 신계를 향하여 평양을 출발하였다 . 자동차 안에서 그냥 울며 간 용도 목사는 신계읍에 가서도 그저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 목사는 기도하였다 . 그저 기도에 미친 사람같이 엎드려 기도만 하는 것이었다 . 신계읍 1 주일간의 집회는 그저 기도요 , 그저 우는 집회이었다고 한다 . 신계 읍을 떠나기 전날 밤은 용도 목사가 편지를 쓰기에 꼬박 밤을 밝혔다 . 그 편지를 등기편으로 보내었으니 받는 이는 송창근 박사이었다 . 여러 달을 지나서 우연한 기회에 들려주는 용도 목사의 말에 의하면 그때에 송 박사에게 편지지로 약 80~90 장을 썼는데 여태까지지 나온 이야기와 자기의 견해와 소신을 말한 후 그런 생각을 가지신 형님과는 신앙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써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정성으로 있는 것을 다 털어서 미국으로 보내고서 7 년 동안 기도를 해서 졸업하고 돌아온 송형 . 그가 나오면 외로운 저의 생활과 역사에 힘이 되고 의지가 되어줄 줄 믿었던 그 송 박사와 이렇게 결별을 하는 용도 목사의 심중은 창자를 끊어내고 눈알을 뽑아내는 그것이었다.

 

 

 

공격과 박해

 

한준명 사건은 분명히 용도 목사의 일생에 극히 중대한 한 선을 긋는 것이었다 . 이때부터는 용도 목사는 모든 험구 , 욕설 , 공격 , 박해를 말없이 받는 무저항의 구도자가 되고 말았으니 그것은 세상이 나쁘다는 사람 , 세상이 죽 여버리겠다는 사람을 사랑하다가 그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선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21)

 

21) 서간집 ‘ 김인서 씨에게 보내는 편지 , 1932 년 12 월 17 일 ’ 에 전문 수록

 

 

 

나는 김성실파 ( 派 ) 도 아닌 동시에 인서파도 , 태용파도 아니요 , 마찬가지로 , 남주파나 , 준명파도 아니올시다 . 태용 ( 泰鎔 ) 이 세상에서 버림을 당할 때에 나의 마음이 그를 향하여 간절하였고 , 성실 ( 誠實 ) 이 버림을 당할 때에 나의 마음 역시 그러하였고 , 내가 그들의 주의를 찬동해서가 아니요 , 그들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고도 . 남주 ( 南柱 ), 준명 ( 俊明 ) 이가 축출과 멸시를 당하여 나는 또 그들에게 대한 나의 간절한 열 ( 熱 ) 의 도 ( 度 ) 가 올라가는구려 …… . 나는 욕을 먹고 쫓겨남을 받아 마땅한 자로 압니다 . 욕을 먹고 축출을 당하는 자들을 애호 ( 愛護 ) 하고 싶으니깐 . 더욱이 예수의 이름으로 욕먹는 자라면.

이런 태도를 명백히 하자 전 조선의 교계에서 한준명을 나쁘게 생각하는 이는 더불어 용도도 같은 놈으로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 그래서 기독신보에는 이용도를 이세벨의 무리 중의 하나이라는 논설을 쓰고 재령 , 사리원 등지에서 용도 목사의 사진을 보며 기도생활을 하던 이들이 사진을 찢어버리고 용도 공격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전국이 떠들썩하고 기독신보가 용도 비방의 기사를 쓰자 , 감리회 경성지방 교역자회에서는 이용도 사문위원회를 조직하였다 . 조사위원으로 신OO , 김O준 , 이O갑 씨 등이 선정되어 조사를 하며 연구를 하고 용도를 불러 장시간의 심문을 하고 또 증언도 청취하였다 . 홍OO , 김O섭 , 원O상 씨 등도 위원에 가담하여 더욱더욱 시끄러워지는 것을 본 용도 목사는 곧 목사 사임원을 상사에게 제출하였다 . 그러나 우선은 사임원을 수리할 수 없다고 하여 퇴각이 되었다.

 

한준명 사건은 분명히 용도 목사의 심경에 어떤 큰 결정을 가져왔으니 위대한 일이나 찬란한 일 , 나라를 구한다거나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 극히 작은 일 , 세상에서 보기에 아주 우스운 극히 작은 한 사람 , 혹은 극히 악한 사람 하나를 사랑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고요히 죽어지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즉 “ 내 사랑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네 모든 것을 바치라 ” 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설교도 부흥도 그만두고 경우도 시비도 가리지 말고 그저 사랑 , 무차별의 사랑에 망하고 또 죽기로 작정하였다.

추악한 인간들의 입으로의 공박은 오히려 용도 목사로 하여금 더욱더욱 이 세상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주님 편으로 좀더 가까이 가게 하는 추진의 힘이 될 뿐이었다 . 그래서 그 입이 ” 큰 물결 일어나 내 쉬지 못하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 를 높이 부르짖는 것이었다 .

“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7~9)..

 

 

 

 

< 제 2 부 : 사랑으로 타오른 생명의 불꽃 >

 

 

 

제 7 장

부흥사 시절(1933 년)

 

재천거지 ( 在天居地 ) 시대

 

1932 년 말부터의 용도 목사는 몸은 땅에 붙들려 있으나 마음은 온전히 하늘에 속하여졌다 . 저들은 이유 없이 말썽을 부리고 잘못도 없는데 구박을 해 오다가 저의 눈에 좀 틀리게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용도 목사를 이단이니 염병쟁이니 하고 떠들썩하였으니 용도 목사는 이런 세상에서 저들과 함께 오래 살기를 원치 아니하게 되었다 . 살아보려는 계획도 없고 살려는 욕망도 없고 그 몸이 땅에 있는 것은 그저 주께서 두시니 두어짐을 받고 있는 것이지 다른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때 이후의 용도 목사는 그저 주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다가 주께서 부르실 때에 가려는 하늘의 기계 , 하늘의 부속품으로서 그저 하나님의 명령에만 복종하고 하나님이 조종하시는 대로밖에 달리 움직이지 못하는 주님의 막대기가 되었다 . 그래서 1933 년 초두 이후의 용도 목사의 일거일동은 그저 고요히 기도하다가 주의 음성의 지시를 듣고서 움직이는 것이요, 눈감고 기도하다가 주님의 빛이 인도하시는 방향에 따라 가라는 데까지 가려는 절대 복종의 생활이었다 . 몸과 목숨이 땅에 있으나 영과 정성은 하늘에 가있는 생활이었다 . 이렇게 움직인 용도 목사의 1933 년도의 왕래와 동정은 다음과 같다.

 

연말 ~ 2 월초 원산에 유함

2 월 초 평양 신양리교회 집회 (3 일), 회중교회 집회 (10 일 ) 

2 월 13 일 ~ 16 일 안주 집회

2 월 20 일 ~ 5 월 1 일 해주 집회

2 월 말 ~ 4 월 중순 서울 자택에 병와 ( 病臥 ) 

4 월 14 일 원산서 부활절 예배 5 월 15 일경 원산발 - 평양행

5 월 중순 ~ 6 월 하순 평양에 병와

6 월 하순 ~ 7 월 하순 대보산에서 병요양 

7 원 26 일 평양발 경성 통과 

7 월 27 일 원산행 도중 삼방협에 하차 

8 월 1 일 삼방발 - 원산행

8 월 1 일 ~ 10 월 1 일 원산에 병와 

10 월 2 일 승천

 

 

 

눈물 쏟을 곳을 찾아서

 

1932 년의 연말과 1933 년의 초두는 조선 교계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 . 조사책벌공회 결의 등 험한 풍운이 사납게 일어나 용도 목사로 하여금 탄식을 발하게 하는 것이었다.

“ 사방에서 핍박과 멸시가 조수같이 밀려들어와 나는 거리를 걸을 용기조차 잃는 때가 있습니다 . 마음이 민망한 때도 있고요 . 그래도 주님 도우심으로 이겨 나갑니다.”

1928 년 정월 신학을 졸업하고 주님의 일을 받들어 나온 후 어언 5 년 . 그 동안 교회 담임 , 주일학교 사업 등에 복무한 일도 있었으나 그 어디서 , 그 무슨 일을 맡는다고 해도 용도 목사가 한 일은 오직 주님의 음성을 직접 전달 하는 일이었다 . 그래서 그의 행적은 인간 역사적이거나 문화사적이 아니요 , 사도행전적이요 , 요한묵시록적이었다 . 특히 전국 순회 부흥목사로서의 그의 활동은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받아 오로지 그의 기계로서 그의 조종에 의해서 동 ( 動 ) 하고 정 ( 靜 ) 하고 언 ( 言 ) 하고 행 ( 行 ) 한 것뿐이었다 . 인간적인 그 무엇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살았으면 왜 이 세상에서 잘 살아 볼 수 있는 길을 취하지 않았고 그 좋은 명예와 인기를 잘 붙들어 명망을 높이려 하지 않았을 것인가.

이때까지의 용도 목사의 생활 , 그것은 주 가라 하시는 곳에 가고 오라 하실 때 왔고 주 외치라 하실 때 외치고 잠잠하라 할 때는 수천 명을 모아 놓고 도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냥 단에서 내려서는 것이었다 . 주 부르실 때에 있는 힘과 있는 땀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죄다 쏟아 바치더니 한준명 사건에 이르러서 “ 너는 나의 사랑을 보여주라 . 나의 당한 욕을 보여주기 위하여 네가 욕을 먹고 나의 사랑을 확실히 알리기 위하여 경우도 따지지 말고 신학설에 붙잡히지도 말고 그저 무차별의 사랑 , 무아 ( 無我 ) 의 대애 ( 大愛 ), 망아 ( 忘我 ) 의 천애 ( 天愛 ) 만을 보여주라 ” 하심에 삼천리의 그 박수 갈채를 던지고 10 년의 지우 ( 知友 ) 송 박사와 갈라서서 꿰어진 옷자락으로 한준명을 붙잡기로 한 것이었다.

주 세우시고 주 앉히시며 주 주시고 주 뺏으시니 시무언은 그저 주의 조종하심에 말없이 복종하려는 것만이 그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 내가 이제 무슨 말을 더하리오 .”

오직 눈물 흘리며 오직 기도 드리며 주께서 부르시는 순간까지 그저 복종, 그저 사랑의 교훈을 남기기로 하였으니 욕하는 사람들이 사는 평양보다 욕 먹는 사람들이 있는 원산에 맘이 끌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내가 그들의 주의를 찬동해서가 아니요 , 그들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고도 욕먹고 더욱이 예수의 이름으로 욕을 먹는다 ” 는 사실 하나에 끌리어 욕먹고 몰리는 자를 찾아 원산에 자주 가게 되었다.

 

 

 

기도 , 기도 오직 기도

 

원산에 갈 때마다의 용도 목사의 중심에는 원산 가서 기도를 좀더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 다른 데서 기도를 안 한 것이 아니었지마는 좀더 기도를 드 리는 것이 평생 소원임에 좀더 기도 드릴 수 있는 곳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 원산에 가는 용도 목사는 원산역에 내리면서부터 다시 원산역에 나와서 기차를 탈 때까지 전부가 기도이었다 . 그저 눈 감고 발길 끄시는 대로 가서 엎드리다가 다시 일으켜 끌어내시는 대로 끌려서 걸음도 걷고 기차도 타고 가라 하시는 곳까지 가기로 하는 것이었다.

무차별의 사랑에 잠기려고 자칭 정통교단과 신사숙녀에게 버림을 받고서 기도에 열중하여 눈을 감으니 잠긴 눈 속에 나타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모습 뿐이었다 . 주님을 보는 방법은 육신의 눈이 감기어 완전히 소경이 되고 영안만이 활짝 뜨여 하늘만을 바라보는데 있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용도 목사는 그저 기도 , 그저 기도에 열중하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그리함으로만 주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이때의 용도 목사의 중심에 ‘ 오직 기도로서만 살다가 기도 속에 죽으려는 결심 ’ 이 생긴 것은 주님을 뵈옵고 주님 곁에 살다가 주님 나라에 가서 길이 주님과 함께 살려는 유일한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었다.

세상과 갈라서서 주님 편에 붙고 오직 사랑 , 오직 기도만을 생활의 동력으로 삼은 용도 목사는 이 세상에 살아지는 날까지의 생활을 오직 주님의 뜻에 의해서만 살기로 방침을 다시 한 번 확정하였다 .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서는 주께서 살라고 하시는 대로 그 하루를 살기에 힘쓰고 밤에도 자라 하시면 자고 자지 말라시면 자지 않고 밤새도록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해인 1933 년 . 치욕의 해인 동시에 광영의 해인 이 해의 일거수와 일투족을 온전히 주님의 지시에만 절대 복종하는 생활을 산다기보다는 살림을 당했고 그의 조종을 받는 것이었다 . 이 탈 ( 脫 ) 세상적 생활방식을 세상은 잘못이라 하고 이단이라고 했다.

 

 

 

주님의 지시로 평양방면의 집회에

 

1932 년 말부터 원산에서 담벽도 못보고 천정도 못보고 그저 엎드려 기도만 드리던 용도 목사가 일어나 앉으며 얼굴을 드는 날이 왔으니 그것은 주께서 평양방면에 가서 전도를 하라고 하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1 월말에 용도 목사는 평양에 도착하였다 . 이때에 신양리교회에서 3 일간 , 회중교회에서 10 일간 집회를 인도하였으니 평양으로 가라고 하신 주님께서 이 두 교회의 강단에 서라고 하심에 섰던 것이다. 22)

 

22) 추모집 제 3 부 ‘ 평양 신양리교회 ’ 에 전문 수록

 

 

 

우리 신양리감리교회에서는 매해 음력 정월이면 사경회를 여는 것이었습니 다 . 1933 년 초의 음력 정월 사경회가 사흘째 모이는데 용도 목사님이 평양에 오시었습니다 . 그때는 벌써 목사님은 어느 교회에서든지 세우지 않기로 되어 있던 때입니다 …… 그 설교에 힘들어 하심 , 그 기침에 가슴 아파하심 . 참으로 눈물이 나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 하루에 세 번 혹은 네 번씩 외치시고 , 밤에는 안수 기도에 또한 피와 땀을 다 쏟았습니다 . 매일 밤을 안수기도로 밝히셨어요 . 하루 저녁에는 목사님의 기운이 아주 다 뽑히신 듯한데 , 안수 받으려는 사람이 하도 많이 모여들기에 내 가슴이 아파서 목사님에게 오늘 밤은 안수기도는 그만두고 돌아 가시자고 하니 , 엄연한 태도로 ‘ 이거 내가 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주님의 지시나 명령이 있는 한 , 내가 거꾸러져 숨이 지는 순간까지 하다가 죽어야지요 ’ 하는 것이었다.

 

평양에서 이렇게 집회를 인도한 용도 목사는 곧 이어서 안주읍에 가게 되었으니 이것도 주님의 가라고 하시는 지시에 의해서이었다 . 용도 목사에게 가라고 명령하시는 주님께서는 용도 목사를 불러오라는 지시를 안주 사람에게 내리시었다 . 그래서 갈 사람을 가게 하시고 부를 사람을 부르게 하신 역사가 용도 목사를 안주에 도착하게 하시었다 . 이에 모 씨는 회고한다 . 23)

 

23) 추모집 제 3 부 ‘ 안주노회 관련 ’ 에 전문 수록

 

 

 

1933 년 봄에 목사님이 평양 신양리교회와 회중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안주로 또 한 번 모셔올 생각을 가지고 나는 평양으로 나갔다 . 이때까지 안주노회에서는 어떤 금조 ( 禁條 ) 가 정식으로 없었으므로 , 나는 평양에 가는 것이었다 . 그러나 안주의 동 · 서 두 교회가 다 반대하므로 , 나는 내 개인의 이름으로 목사님을 모셔왔다 . 오시기는 했으나 어느 교회에서도 세우지를 못하게 하므로 수일 동안은 개인 집에 모여서 기도를 드리다가 4 일째 되는 날에 청년회에 교섭하여 그곳을 회장 ( 會場 ) 으로 하고 집회 광고를 써 가지고 거리로 나가는데 어떤 이가 활동 주선하여 3 일간 등단하게 되었다 . 그러나 이 3 일간의 집회에는 누구나 너무 긴장 감격하여 무슨 설교를 했는지 기억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곧 안주노회가 소집되었고 이용도 매장의 논의가 가결되었다 . 안주노회의 이용도 매장 결의의 이유는 아주 우스웠다 . ‘ 용도 목사 말대로 하면 모든 가정이 결단 나고 세간살이가 깨어질 것 ’ 이라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최후의 고향방문

 

안주에서 기차를 타신 용도 목사는 어디 가서 내릴 것을 생각지 않고 있었다 . 그런데 차 중에서 기도하는 중에 “ 용도야 , 이번에는 한번 고향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라 ” 고 하는 지시에 접하였다 . 그래서 금교역에서 내려 시변리 본집으로 갔다 . 부모님 곁에 꼭 하룻밤을 잤는데 이것이 용도 목사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을 방문한 것이 되었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부모님을 못 찾아 뵈옵는 것이 죄송하여 마음을 아프게 하였고 끌리어 다니는 몸이 촌가를 얻을 수 없어 부친의 환갑에도 찾아가지를 못해 항상 불효의 상심에 젖어있는 효자 용도가 이번에는 주님의 명령에 의해서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 인사 드리는 것이었으니 천부의 명령과 아들의 소원과 부모친척들의 그리움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 그러나 이 고향방문이 이 세상에서 최후의 길인 것이 알려질 때 이 길이 너무도 총총하였음에 듣는 자가 애연함을 금할 길이 없다.

 

 

 

해주 집회 24)

 

24) 추모집 제 3 부 ‘ 해주 남본정교회 , 1933 년 2 월 ’ 에 전문 수록

 

 

 

부모님 곁에 누운 용도는 밤새도록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어 역시 기도로 밤을 밝혔다 . 어찌 이날 밤의 용도의 감상과 감회를 이 세상의 붓과 종이가 충분히 기록할 수 있으리요 .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떠나는 것이었으니 해주 방면에 가서 집회를 열라는 하늘의 지시가 있기 때문이었다 . 내가 나서 자라던 고향집을 마지막으로 왔다가는 용도는 집 문을 나설 때 눈을 감고 기도하며 나섰다 . 다시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눈을 뜨지도 않았다 . 눈감고 기도하며 자동차에 올랐다 . 금교역에서 경성행의 기차를 탈 때와 경성역에서 경의선 북행차를 탈 때도 눈을 감고 타고 토성역에서 해주행의 기차를 탈 때도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탄다 . 해주역에 내린 이용도 목사 . 그는 어디로 가서 누구 집에 들어 이 밤을 지낼 것도 생각지 않고 그저 주께서 발 길 인도하는 대로만 가려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그 몸이 해주 남본정교회에 이르렀으니 용도 목사 자신도 왜 그리 갔는지 알지 못하는 일이고 남본정교회에서도 어찌되어서 소식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용도 목사가 왔는지 놀라는 형편이었다 . 필자는 이것을 주님의 뜻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믿나니 이렇게 온 것이 용도 목사 자신의 뜻이 아니요 , 해주 교회의 공작이나 활동의 결과가 아니요 , 오직 주님의 뜻이 있어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되었던 것이다 . 이용도 목사의 이 세상에서의 최후의 설교를 남본정교회에서 열게 하기 위한 주님의 뜻이 용도를 해주로 몰아왔던 것이다 . 미리 말하여 두는 것은 이때의 용도 목사의 집회는 벌써 땅 위의 인간 용도의 설교가 아니라 하늘의 사람 , 이 세상적 요소는 아주 뽑아 버리고 저 세상의 것만 가지고 온 용도로서 인도한 것이었다 . 생각건대 용도 목사 자신은 이곳에서 이 교회 강단에서 피를 토하고 거꾸러져 사랑하는 동생 용구가 누어있는 남산 기슭에 묻히기를 원하였으나 주님의 뜻이 다른데 있어서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연회의 결정

 

해주에서 있는 기운과 땀과 피를 다 쏟은 용도 목사는 겨우 서울 집 (현저동 산 12 의 15) 까지 몸을 끌어올 수 있었다 . 집에 도착한 그는 그냥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 이렇게 누워 있는데 1933 년의 중부연회가 열렸다 . 연회가 열리기 얼마 전에 지방감리사에게서 퇴회원 ( 退會願 ) 을 내라고 사람이 보내 어졌다 . 퇴회원을 낸다는 것은 감리교 목사를 그만두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에 기도를 올리고 난 용도 목사는 이에 응하지 않고 반각 ( 返却 ) 해 보냈다 . 그랬더니 또 사람이 와서 이번에는 강박을 하는 것이었다 . 이때에 묵도 를 올리고 난 용도 목사는 다시 반각하는 것이었으니 이제 용도 목사가 자기가 원해서 목사직을 내던진다는 것은 배교 ( 背敎 ) 의 의미도 포함될 수 있 는 듯한 것이기 때문에 또 응하지 않았다 ( 축출을 당하는 것은 별문제지만 ). 그랬더니 연회가 열리자 연회에서 강권 발동으로 휴직 처분 ( 강제 절연 의미 ) 이 내렸다 . 이때의 사정을 용도 목사의 서간에서 엿본다 .25)

 

25) 서간집 ‘ 이호빈 씨에게 보내는 편지 , 1933 년 3 월 26 일 ’ 에 전문 수록

 

 

 

이미 각오했던 일이라 순서대로 되어가는 일만 감사할 뿐 …… 모든 경영은 다 실패로 돌아가고 주의 성도들은 발 붙일 곳도 없어지는 듯하나 , 그러나 만세 결국은 승리외다 . 주 우리 편이시니깐 . 더욱더 용기를 냅시다 . 끝까지 돌진합시다.

 

 

 

새 교회 ( 예수교회 ) 설립 문제

 

소위 한준명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 욕하고 비방하며 밀어내고 몰아내던 자칭 정통 교회에서 용도를 구박하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용도가 이단이 되어 가지고 새 교파를 조직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 그러나 냉정히 고요히 기도하며 선의로 고찰해 본다면 용도에게 그렇게 욕먹어야 할 책임은 없는 것이었다 . 그저 무능한 교역자의 무리들과 생명 없는 말라빠진 현실 교회가 자기 무능과 자기 고사 ( 枯死 ) 를 고백하는 자기주의 망발에서 나 오는 말뿐이지 용도가 그렇게 뒤집어 써야 할 책임은 없었음을 아래의 몇 가지 사실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32 년 10 월 7 일 평양 연화동예배당에서 열린 평양노회는 이용도 입족금지를 결의하였다 . 그래서 그 자리에서 큰 파란이 일어났다 . 그런데 이 결의가 있은 지 얼마 후 이 목사님이 평양에 오시었다 . 그때의 모씨의 집 다락에 동지 12 명이 모이어 기도회를 보고 또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 이때 에 K 씨가 진지한 태도로 제의했다 .

“ 교회가 이 꼴이 된 이상에는 별 수가 없습니다 . 목사님에 대한 무리한 압박과 박해는 앞으로 더 심하여질 것이고 악독한 현 교회는 목사님을 어느 강단에도 세우지 않을 터인즉 이 기회에 단연 분리하여 교회를 따로 세우는 것이 양책일 것이올시다.”

이때에 묵도를 올리고 또 일동이 기도를 한 후 목사님이 하신 말씀은 이러하였다.

“ 그들이 나를 배척하거나 때린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서 떠나거나 멀리할 수 없습니다 . 그들과 갈라서서 편히 살거나 내 무엇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그 구박 , 그 배척 속에서 울면서라도 그들의 손을 붙잡기에 힘써야겠고 또 나는 죽어도 그들의 손을 붙잡고 그들 앞에서 죽으려고 합니다.”

이때에 목사님은 흥분에 떠시었고 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 이 말에 K 는 좀더 주장해 보았으나 목사님의 태도가 절대적으로 엄연하고 확고하였으므로 일을 꾸며보려던 K 는 얼굴이 붉어서 물러가고 말았다 . 

해주에서의 마지막 집회를 마치고 집에 와 누워 있는 동안 용도 목사에게는 두 가지 사실이 그의 숨을 가쁘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평양방면의 여러 교회에서 책벌 축출을 당한 무리들이 이곳 저곳에 몰리어 다니며 따로 예배를 본다는 소식과 원산에 있는 기도의 동지들이 사람을 보내고 혹은 편지를 통해서 “ 주님께서 새 교회를 세워서 믿다가 쫓겨난 무리들을 거두어 돌보라 하시니 네가 이 일을 맡으라 ” 는 것이었다 .

이 두 가지 사실은 분명히 용도를 고민의 심연 ( 深淵 ) 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으나 용도는 오직 기도 , 오직 기도로써 이 문제에 대처하기로 하여 그저 기도 , 그저 기도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 누워 있는 그는 자는 듯하나 자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었고 눈을 뜬 듯하나 눈은 이 세상 사물은 보이지 않고 기도에 취하여 딴 세계를 보며 딴 생각에 인간적인 정신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내던 용도목사가 4 월 10 일경에 원산에 갔다 . 그랬더니 기도의 동지들이 모여 전원 일치의 의견으로 권면한다 . “ 주께서 네게 이 일을 맡기시니 받으라 ” 는 것이다 . 이 말에 대한 대답을 용도는 하지 않았다 . 그저 말없이 엎드려 부르짖고 애원하고 통곡하는 것이었다.

기도하는 친구들이 날마다 찾아와서는 “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쫓겨난 무리들을 용도목사에게 맡기라 ” 고 하더라고 하기도 하고 “ 네가 맡아라 . 그 생명들을 죽일 것이냐 . 주님을 위해서는 무슨 고생도 하고 무슨 욕도 먹겠다더니 이까짓 일을 안 하려느냐 ” 고 강박과 책망으로 나오기도 한다 . 이틈에서 용도 목사는 한 달 동안 고민하며 한숨 쉬며 기도하며 통곡하였다. “ 무슨 고생도 하겠사옵니다 . 무슨 괴롬도 다 달게 받겠사옵니다 . 무슨 병도 좋사옵나이다 . 어떤 죽음도 좋사옵나이다 . 그러나 …… 그러나 이 일만은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 제가 일생 동안 목이 터지도록 외친 것이 ‘ 사랑하자 ’ ‘ 합하자 ’ 하는 것이 아니었나이까 . 사랑하는 자가 어찌 헤어지며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찌 분열 되겠나이까 . 주님이시여 , 나의 주님이시여 , 내 몸에 옷이 하나도 없어도 좋사오며 거적을 두르고 살아도 좋사옵나이다. 이 몸이 걷고 걸어 발바닥이 아주 누더기가 되도록 걸어 불쌍한 자나 걸인에게 마음껏 전도하다가 길가에 거꾸러져 죽게 해주실 수 없겠나이까 . 문둥 병에 만일 ( 萬日 ) 을 고생해도 좋사오며 악질에 급사 ( 急死 ) 를 하여도 좋사오니 주님이시여 , 오 나의 주님이시여 , 이 일만은 나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몸부림치며 애원 , 애걸하고 있는 동안에 평양방면에는 소속 교회에서 쫓겨나고 몰리어난 자가 약 500~600 명 이상에 이르렀다 . 이들이 아픈 가슴을 붙잡고 모란봉 기슭으로 청천강변에서 기도를 다녔더니 심술꾼들이 “ 저 사람들이 무슨 사건을 꾸미려 한다 ” 고 경찰에 밀고를 하여 붙들려 다니게 되었다.

몇몇 사람이 어떤 집에 모여 기도회를 드렸더니 ‘ 독립운동을 한다 ’ 고 경찰에 밀고를 하여 또 끌려 다녔다 . 이런 소식이 매일같이 용도 목사에게 전하여 오더니 나중에는 예배를 보려면 총독부에 포교계 ( 布敎系 ) 를 내고 교단 인가를 받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포교계를 용도의 이름으로 제출하라는 것이다 . 용도 목사는 절대 불응하였다 . 여기서 응하지 않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요 , 본분이라고 생각한 그는 절대 불응의 태도를 견지하였다 . 이 문제를 위해서 그는 기도하며 울고 울면서 기도 드렸다.

그런데 마지막 날이 왔으니 그것은 평양에서 포교계의 서류 ( 書類 ) 에 수백 명이 연명한 탄원서가 첨부되어 왔다 . ‘ 이 버림받은 생명들을 붙들어 달라 ’ 는 것이었다 . 여기서 또 곁에 있던 기도자들이 대든다 . “ 이 생명들을 어찌할 것이냐 . 이 일이 왜 못할 일이냐 . 주님을 위해서는 십자가도 져야 할 것이거늘 이 일쯤을 못할 것이 무엇이냐 ” 고 말로 권하고 책망하며 기도로 조르고 애원한다.

이때에 이르러 용도 목사는 탄식하며 통곡하며 기도 드렸다 . 밤낮 몇 날을 기도만 드리고 난 용도 목사는 박해자의 칼날 아래 목을 내어대는 듯한 마음자리로 말하였다 . “ 내 도장이 어디 있을 테니 쓸 데 있으면 마음대로 쓰라 ” 는 것이었다 . 이때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그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 26)

 

26) 서간집 ‘ 김희학 씨에게 보내는 편지 , 1933 년 봄 ’ 에 전문 수록

 

 

 

아 , 나의 이름이 새 교회 관리자로 들림의 아픔이여 . 나를 찌르는 가시로다 . 나는 땅 위에 이름을 남기기 원치 않았더니 , 이 어인 모순인고 . 이것도 또한 주가 주시는 가시관이었던가 . 주는 나에게 평안과 기쁨도 많이 주시고 또 아픔과 괴로움도 많이 주시도다 . 주 주시는 것이면 음부와 사망의 고통이라도 받을 수밖에 없는 , 아 , 이것은 한 포로이런가 . 그리하여 포교소 관리자의 가시관도 결국 받아 쓰고 마는가 . 오 주여 , 할 수만 있으면 이 잔과 이 관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오 , 그러나 주여 ,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성의대로만 하시옵소서 . 아멘 . 아멘 . 아멘 .

 

그저 주님 위해 한준명을 ‘ 몰리는 자 ’ 라는 오직 한 가지 이유로 동정하며 비호하다가 욕을 혼자 뒤집어쓴 용도 목사가 1,000 명에 가까운 가련한 양들을 그냥 버려둘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 사실상 새 교회 ( 예수교회 ) 는 이미 이루어져서 예배를 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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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리들을 통솔해 나가기 위해서 포교계를 관청에 내야겠는데 그 관리자로 이름을 빌리라는 것뿐이었으니 분열이 된다면 좋은 것이 아닐 줄은 아나 시비곡직 ( 是非曲直 ) 보다 무차별의 사랑을 유일의 생활 규범으로 삼고 있는 용도 목사가 여기에 도장을 내맡긴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 이 도장을 친 서류가 인가되기 전에 용도 목사가 승천하였다 . 그래서 그 서류가 10 월 중순에 반각 ( 返却 ) 되어 나왔다 . 용도 목사와 새 교회와의 관계는 오직 이뿐이다.

 

 

 

인간의 소원과 주님의 뜻

 

여기에 이르러 용도 목사는 욕먹을 밑천을 또 하나 벌었고 그의 운명은 거의 결정되는 것이었다 . “ 어리석은 무리들과 어울려 다니더니 새 교파까지 조직했다 ” 는 것이 그를 욕하는 자들의 말거리가 되었다 . 여기서 많은 동지는 돌아섰다 . 용도 목사가 몰리며 욕먹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위하여 기도하던 진실한 사모자들도 하나씩 둘씩 정을 끊으며 눈물로 헤어져 나갔다 . 용도 목사의 편지를 하늘의 복음같이 소중히 여겨 품속에 품고 다니던 이들이 그 편지를 아궁이에 던져버리고 재령 부근에 퍼졌던 1,000 여 장의 용도 목사의 사진이 모두 다 찢기어 버림을 당하는 것이었다 . 용도 목사님을 주의 사자로 믿고 그의 눈물과 피땀을 주의 역사로 믿어 거기서 힘을 얻고 용기와 위로를 얻었던 많은 신도들로서 이제 그를 버리고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일생에 비극이요 , 조선 교회사상의 비극의 1 막이 아닐 수 없었다 . 그 기도와 그 눈물이 거짓이라면 이 세상 어디서 참된 기도와 진정한 눈물을 찾아볼 것인가 . 그 신앙과 그 생활이 이단이요 , 나쁜 것이라면 이 세상 어디서 정통 신앙과 바른 생활을 찾아보란 말인가.

많은 신도는 눈물과 슬픔에 잠기게 되고 적지 않은 수의 신도가 그렇다면 이것도 저것도 다 그만두겠다고 솔직하게 배교를 선언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 당시의 조선 기독교계는 분명히 혼란과 눈물로 화하였었으니 책벌하고 몰아내고 버리느라고 혼란하였고 쫓기며 기도하며 새 생명을 찾노라고 눈물을 흘렸다 . 용도 목사가 좀더 잘 살고 좀더 좋게 역사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한탄은 그를 버리고 돌아오는 이들도 다같이 하는 말이었다 . 용도 목사를 통해서만 조선 교회의 부흥과 번창이 오리라고 기대하던 많은 사람이 다 실망을 하게 될 때 조선 교회는 통곡의 교회로 화하여 “ 주여 , 이 민족을 버리시렵니까 ” 하며 탄식하기도 하고 “ 주여 , 당신의 뜻이 어디 있나이까 ?” 하며 애원의 기도를 올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

 

도장을 마음대로 쓰라고 허락해 버린 용도 목사는 정조를 빼앗긴 것 같은 허전하고 애달픔에 울며 기도 , 오직 기도에만 더 열중하게 되었다 .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목사에게 느껴지는 바가 있었으니 그것은 새 교회가 서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그 일을 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시라면 주께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강과 힘을 주실 것이라고 믿어짐이 그것이었다. 27)

 

27) 서간집 ‘ 변종호에게 보낸 편지 , 1933 년 5 월 1 일 ’ 참조

 

 

 

더불어 그 힘을 얻기 위해서는 정성되게 요양하는 것이 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차라리 십자가를 지워 주시기를 원하면서 오직 주님의 뜻에 복종하려는 충성에서 거친 음식을 달게 먹고 불편한 자리에서 편히 잠들면서 피를 모으며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 그래서 이 생활은 조금이라도 내 병을 고치겠다는 인간적 욕심이나 , 내가 무엇을 해보겠다는 세속적 사업 계획이 아니고 그저 뜻대로만 이루어지옵소서 하는 절대 복종의 마음과 고요히 성의를 찬양하는 감사의 심정에서 나오는 것이었다.28)

 

원산에서 약 한 달 반 동안 고요히 요양한 용도 목사는 몸에 기운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듯함을 느끼게 되었다 . 그래서 좀더 정성되게 요양을 해보려는 그때에 또 주님의 지시가 내렸으니 평양방면으로 가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 목사의 생각에는 좀더 누워 있으면 기력이 충분히 회복될 듯하였고 지금 이 몸으로 먼 길을 다니는 것은 어쩐지 안심이 안 되는 것이었으나 주 명하심이 있으니 그저 복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5 월 중순에 뼈만 남은 몸이 비틀걸음으로 평양을 향해서 원산을 떠났다 . 평양 가는 기차를 탄 용도 목사는 호흡 곤란에 신고 ( 辛苦 ) 하며 오직 기도 속에 깊이 빠지는 것이었다 . 평양에 도착한 목사는 대찰리 모 씨 집으로 가서 누웠다 . 거기서 새로 모인다는 예수교회가 멀지 않았으나 용도 목사는 그 교회에는 가보지도 않고 그저 누워 병에 신고할 뿐이었다 . 교회까지 갈 기운도 없었지만 꼭 가보라는 지시도 없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뜻이 새 교회 운동에 직접 나서라는 데 있지 않고 어려움에 빠진 많은 개인들을 경책 , 권면 , 지도하라는 데 있었다 . 그래서 그저 누워 있어서 찾아오는 많은 사람의 눈물을 씻어 주고 연약한 자들에게 힘과 원기를 넣어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약 한 달 반 동안 누워 있던 용도 목사는 다시 몸을 일으켜 대보산 ( 大寶山 ) 으로 가게 되었던바 그것은 거기서 목장을 경영한다는 어떤 교우가 찾아와서 너무도 갈망하고 애원함으로 기도를 여러 번 해보신 용도 목사는 간청에 응하기로 하였다.

여기서도 용도 목사는 많은 사람에게 기도와 권면으로 새 생명을 얻게 하기에 밤낮 땀을 빼시었다 . 그러나 대보산의 요양에서도 치병의 효과는 조금도 없음으로 약 한 달을 지나고서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 대보산에서 떠나려는 용도 목사는 벌써 이 땅 위에 자기 몸을 오래 두지 않으시려는 하늘의 뜻을 알았다 . 그래서 대보산을 떠나는 그 길이 바로 이 세상을 아주 떠나는 첫걸음인 것도 알았다.

버스를 타고 평양으로 들어가는 도중에서 대보산으로 향해 오던 이호빈 목사 일행을 만났다 . 그들은 용도 목사를 만나려 가던 차이었으매 노정을 변경하여서 용도 목사의 차에 올라 그의 곁에 와 앉았다 . 여기서 평양까지 가는 도중에서 용도 목사는 여러 가지 유언을 하였다 . 여기서 용도 목사는 호빈 목사의 손을 꽉 붙잡으며 눈물을 푹푹 쏟다가 “ 형님 , 형님께서 내 뒤를 이어주시오 ” 하였다 .

이후로 호빈 목사가 용도 목사에게 못하지 않는 눈물과 땀을 주님을 위해서 흘리고 있는바 그것이 이때의 유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 이후 10 년간의 호빈 목사의 혈전고투는 조선 교회사상에 독특한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호빈 목사의 설교 50 여 편을 나는 필기하였다 . 출판 준비에 착수하였는데 6·25 사변이 일어나 그 원고가 전부 분실된 것은 한을 길이 남겨준 바이다.

 

 

 

< 제 2 부 : 사랑으로 타오른 생명의 불꽃 >

 

 

 

제 8 장

승천입영( 昇天入榮 )

 

숨 거둘 땅으로

 

호빈 목사에게 긴 유언을 하는 동안에 일행이 탄 차는 어느덧 평양성을 향하여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말을 끝낸 용도 목사는 고요히 중심으로 부르짖었다.

“ 아버지여 , 이제는 나의 혼을 받으소서 . 어디 묻히오리까 ?”

그리고 묵도를 드렸더니 “ 원산으로 가라 ” 는 음성이 들려왔다 . 그래서 대보산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용도 목사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와 간청을 물리치고 하루 밤을 지나고서는 평양을 떠나시는 것이었다.

1933 년 7 월 26 일 오후 1 시 . 부산을 향해서 평양을 떠나려는 기차 가운데 몸이 심히 쇠약 수척하고 호흡 곤란에 괴로워하는 환자 하나가 올랐으니 그가 과거 3 년 동안 삼천리강산의 박수 갈채를 혼자서 받고 지난 3 년 동안에 이 평양성에를 여러 번 오락가락하며 평양성 사람의 눈물을 한없이 자아내며 그들에게 또 무상의 큰 기쁨을 가져다 주던 주의 사자 , 이용도 목사이었다 . 기운이 없고 숨이 끊어져 오는 용도 목사는 겨우 몸을 기차에 끌어올렸다. 기차에 올라선 용도 목사 . 그는 힘드는 눈을 겨우 떠서 플랫폼에 나와 있는 동지들을 내려다보고 다시 평양성 안을 향해서 시선을 돌려 본다 . 그리고는 그저 눈물을 흘린다 . 이 눈물은 세상에 흔히 있는 그런 눈물 , 내가 오래 못 산다던가 , 세상을 떠나게 될 때에 흘리는 서러운 눈물이 아니다 . 주 께서 부족한 종을 이 땅에 여러 번 보내시어 외치게 하신 감격의 눈물이요, 평양성이 아직도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한데 대한 마음 아픈 눈물이요 , 여기 나온 동지들이 그 남은 날을 잘 살다가 아버지의 집에까지 무사히 이르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의 눈물이었다 . 기차 출발의 종이 울린다 . 그러나 이 시간에는 그 어느 날 밤 상인천역에서 부르던 것과 같은 찬송을 부르는 사람은 하나 없다 . 기차가 움직인다 . 용도 목사가 두 손을 높이 들며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린다 . 빨라지는 기차는 어느덧 획 날아가며 용도 목사를 빼앗아 가버렸다 . 전송자들의 눈 속에 두 손 들고 기도 드리는 모습만을 남겨놓고 용도 목사는 마지막으로 평양성을 떠나버렸다 . 전송자들이 허둥지둥 플랫폼을 나오니 기차는 어느덧 대동강을 건너서 남쪽을 향해 멀리 사라져가고 있다 . 대동강은 문득 여러 사람의 머리에 요단강을 연상시킨다 . 대동강을 건너서 가버리신 목사님을 언제 또 이 땅 위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을 것인가.

 

평양역을 떠난 용도 목사는 그날 밤 경성역에 내려 역전 여관에서 1 박하고 그 이튿날 아침 원산행 기차를 탔다 . 그런데 차 중에서 너무 힘들어 함으로 동행하는 부인이 삼방협역에 도중하차를 하도록 하였다 . 그래서 삼방협에서 5 일간을 지나고서 8 월 1 일 오후 1 시에 원산을 향하여 삼방협을 떠났다 . 원산에 도착한 용도 목사는 광석동 모 씨의 집으로 인도되었다 . 여기서 용도 목사는 두 달 동안 언제나 눈을 감으면 기도 드리다가 주님을 만나 뵙고 눈을 뜨면 천국의 찬란하고 영화로운 광경에만 접하는 것이었다 . 이렇게 지내는 그는 이 두 달 동안에 만날 수 있는 자칭 예언자들과 신앙이 견실치 못한 신도들을 애휼 ( 愛恤 ), 정도 ( 正導 ) 하기에 기도와 눈물과 사랑을 다 바쳤다 . 숨질 때 되도록 그는 성지에 봉복하여 버림받는 자들을 주의 사랑으로 품어 눈물로 교도하는 것이었다.

 

 

 

운명 전후

 

1933 년 10 월 2 일 . 목사님이 가시는 날이 왔다 . 부모 , 형 , 처 , 동지 , 학생 등 20 여 명이 둘러앉았다 . 찬송 소리가 들린다 . 혹은 높이 혹은 가느다랗게 성가 소리가 올려오고 있다.

 

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 위해 너의 정성껏 기도했나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치기 전복을 받을 줄 생각 마라 

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주 내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주의 밝은 빛에 항상 활동하며 선한 사업을 힘쓰겠나 

자유 얻으려면 주의 뜻을 따라 너의 모든 것 희생하라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친 후에 주와 온전히 사귀겠네 

주의 주신 기쁨 또한 그의 사랑 어찌 말로 다 형용하리

 

이 찬송은 목사님이 원하시는 찬송이 되어 여학생들이 열심으로 불러 드렸다 . 이밖에도 여러 가지 찬송이 숨 거두시는 순간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 손을 들어 아버지를 찾으신다 . 아버지가 가시니 힘있게 악수를 하신다 . 어머니 , 형님도 불러 악수하신다 . 이때에 앉은 이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과 다 한 번씩 악수를 하신다 . 마지막에 부인의 손을 잡았다 . 이번에는 손을 놓지 않고 잡아 끄신다 . 부인이 끌리어가니 왼손이 와서 또 붙든다 . 그리고는 힘있게 꼭 붙잡고 한참 있다가 놓으신다 . 모인 사람은 다 눈물이다 . 그러나 목사님은 그저 태연하고 그저 화평해 보였다.

 

말을 뒤로 돌려 몇 날 전 일을 몇 마디 쓰기로 한다 . 약 10 여일 전에 고향에서 부모님이 오시었다 . 부모를 만나는 순간에도 목사님은 조금도 슬퍼하시는 기색이 없고 오직 웃는 얼굴로 부모님께 안심과 위로를 주시는 것이었다 . 어머니도 아들 앞에서는 조금도 걱정하시는 빛을 안 보이시고 눈물을 숨기시며 그저 감사의 기도만 올리시었다 . 그러나 밤에 예배당에 가시어서는 밤새도록 기도와 눈물로 밝히시는 것이었다 . 아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슬픔과 아픔을 완전히 감추시는 어머니와 ,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하여 고통과 쓰림을 넉넉히 숨기는 그 아들의 정경은 곁에 있는 자의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 그리고 세상 떠나시기 3 일전에 모든 사람을 불러 모으시고 말했다.

“ 내 눈을 보십시오 . 죽는 눈이 이런 것을 보았습니까 . 사람이 영생한다는 데 모두들 죽는 이야기들만 하니 이 무슨 어리석은 생각들입니까 . 영생을 믿으시고 죽는다는 말은 그만둡시다.”

결에 있는 형님 용채 씨에게 향하여서 눈물을 흘리시며 부탁했다.

“ 주님은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 그러니 형님 , 형님의 손발을 자르면서라도 생명을 구하시오 .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 호빈 목사에게 향해서는 부탁했다.

“ 형님 , 처자를 없는 듯이 하고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 주십시오 . 제가 하던 일을 형님이 뒤이어주세요 . 그리고 송창근 형 , 환신 씨 등과 손을 마주 잡고 조선의 기독교를 위해서 죽도록 일하여 주세요.”

 

목사님의 최후는 참으로 화평했고 복스러웠다 . 일생 동안 그렇게 앉아보지 못하시고 누워보지 못하시던 목사님도 이때에는 누워계시었다 . 30 평생에 그렇게 말을 많이 하시던 그 목은 침묵을 지키시었다 . 별 사람 , 별 인물이 다 와서 별소리를 다 해도 그는 잡은 바가 있는 듯이 엄연 ( 儼然 ) 자중 ( 自重 ) 하셨다 . 그는 입을 다무셨다 . 들어 유익 못될 말은 한마디도 안 하셨다 . 진리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으셨다 . 곁에 있는 사람 중에서 경솔한 말이나 헛된 말이 나오면 목사님은 진정한 사랑으로 훈계하시는 것이었다 . “ 지금은 명상할 때요 , 묵상할 때니 고요히 있어 주의 임하심을 기다리라 ” 는 것이었다 . 피가 다 마르고 살이 다 떨어졌건만 그래도 안타까운 사랑은 그 무엇을 좀더 먹여주고 싶어하시는 것이었다 . 그는 숨지는 순간까지 사랑과 진리를 나타내시었다.

 

아마 저녁 4 시가 지난 지도 오래였을 때이었다 . 환하게 그 얼굴에 광채가 나타나며 눈을 번적 뜨시더니 목사님이 함께 찬송을 부르자고 하시며 손으로 박자 놀리는 형용을 하신다.

 

아름다운 내 본향을 목적 삼고 , 한 찬미를 불러보세 

거기 무궁한 세월이 흘러갈 때 고난 풍파가 일지 않네 

고난 풍파가 일지 않네

거기 무궁한 세월이 흘러갈 때 고난 풍파가 일지 않네 

맑은 수정과 같은 내 본향의 성 밤마다 꿈 속에 보니 

이 눈앞에 저 묘하고 명랑한 성 가리우는 것 별로 없네 

너와 나 위해 예비한 집이로다

주 예수의 계신 델세 만국 왕 되신 이 

우리 쓸 면류관 손에 들고 기다리시네

모든 슬픔과 아픔을 벗어난 후 영원히 즐거워하리 

손에 거문고 들고 늘 찬미할 때 우리가 서로 만나겠네 

우리가 서로 만나겠네 손에 거문고 들고 늘 찬미할 때 

우리가 서로 만나겠네

 

마지막 줄 ‘ 우리가 서로 만나겠네 ’ 까지 박자를 놀리시던 목사님께서 손을 맥없이 푹 놓으시며 눈을 힘없이 감으신다 . 얼마 후에 다시 눈을 뜨며 얼굴에 미소를 띠우는데 그 얼굴의 환하고 평화스러움과 그 빛나고 영광스러운 광채는 거룩하고 존귀한 인상으로 오직 눈에만 남아 있을 뿐이고 말로나 글로서 형용하기는 어렵다 . 그리고서 잠깐 후에 다시 고요히 눈을 감으시더니 목이 마름을 알리는 듯이 보였다 . 이때에 수저로 물을 떠서 입에 넣어 드리니 받으신다 . 그래서 각 사람이 다 한 모금씩 떠서 드린다 . 마지막 사람의 숟갈이 물을 그 입에 넣을 때 그것을 겨우 받으신 목사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것이었다.

 

1933 년 10 월 2 일 오후 5 시 , 주의 사자 이용도 목사님은 33 세에 천국을 향하여 이렇게 세상을 떠나시었다 . 조국과 동포를 사랑하여 일생 동안 눈물과 땀을 한없이 쏟으시고 주님과 죄인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다 빼앗기신 애국 성도 이용도 목사께서 1933 년에 33 세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은 가시면서도 민족대표 33 인과 예수님의 33 세를 연상시키며 그들의 생애를 길이길이 명상하고 본받으라는 그 어떤 교훈이 내포하여 있음을 알려주는 듯하여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끼게 하는 바가 있다.

 

 

 

장송( 葬送 )

 

“ 이용도 목사님이 운명하다 .” 세상에서 흔히 하는 버릇에 의해서 부고가 각처로 보내어졌다 . 그 너절한 종이 조각에 등사로 새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謹訃

李龍道牧師 以宿患 呻吟中 不幸 當日 午後 五時 離世 玆以呈訃 

追而 十月四日 午後三時 永決式 擧行爲定 玆以 添告 

一九三三年 十月 二日

 

이 부고를 전국 각지 웬만한 곳에는 다 보냈다 . 그런데 조문은 하나도 없고 조전만 두 장이 왔으니 그 하나는 총리원에서 사무처리를 겸해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보내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양의 송창근 박사에게서 온 것이었다 . 그런데 이 송 박사의 조전이 사람의 가슴을 쪼개내는 바가 있었으니 그 전문의 문구는 “ 용도야 너는 가고 말았는가 ” 하는 것이 있다 . 용도 목사가 부흥목사로 3 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그렇게 흘린 눈물 , 땀 , 피의 보수가 이 세상에서는 조전 두 장으로서 청산되는 셈이었다.

 

나는 목사님의 식어진 몸에 기름을 바르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옷을 입혀 드리었다 . 뻣뻣하여지고 싸늘하게 식어진 그 몸 , 그것은 살이나 피나 기름은 한 점도 없는 뼈다귀 그것뿐이다 . 채 닫히지는 않았으나 고요히 내려감은 그 눈 , 다시는 너희에게 말을 하지 않겠노라고 하시는 듯이 굳게 잠긴 그 입 , “ 나는 코뼈가 부러진 게야 ” 하시면서 손으로 만지시던 그 나지막 한 코 , 이 , 모든 모습은 아직도 살아계신 것같이만 보였다 . 어찌도 평화스럽고 어찌도 귀여운 얼굴인지 . 그 눈은 감겼으나 그 눈동자는 아직도 사랑의 빛을 빛내고 있고 그 입은 닫쳤으나 사랑을 말씀하신다.

어느 부인이 베옷을 지었다 . 목사님은 그 옷을 입으셨다 . 널이라고는 하나 생겼으나 상여는 없다 . 나무쪽 몇 개를 비껴 매어서 그것을 상여로 삼았다 . 그 위에 널을 올려놓고 광목 한 조각으로 둘렀다 . 남녀 동지 몇 사람이 상여를 했다 . 여학생 몇 사람이 꽃을 몇 가지 주어 들고 찬송을 부른다 . 이 찬송 소리를 앞세우고 목사님은 누워서 산비탈을 올라가신다 . 이것을 장사라고 부르는가 . 하늘의 장사였다 . 목사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만 같았다 . 쓸쓸하다고 평할 수도 있고 복되다고 찬송할 수도 있는 이 작은 행렬 . 이것이 이 땅의 성자를 마지막 보내는 광경이었다 .

상여가 묘지에 도착되었다 . 이제 곧 하관을 하려는데 문제가 생겼으니 그것은 어떤 험상스럽게 생긴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여기는 매장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 개인 소유의 산이요 , 공동묘지가 아니니 못 묻는다는 것이다 . 아주 거친 말씨와 난폭한 행동으로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 부근에 다른 무덤들 이 상당히 많이 있는대도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이었다 . 여러 사람이 빌고 애원하여 평토장 ( 平土葬 ) 을 하기로 하고 겨우 매장을 하였다 . 그러나 얼마 동안은 밤에 누가 와서 묘를 파버리지나 않는가 하여 염려가 되었다 . 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심술궂은 모 방면의 사람들이 그런 행위를 선동했다는 것이다 . 일생 동안 잘못한 것 없이 몰리고 주님의 뜻대로만 살려 했기 때문에 쫓기어 다니던 이용도 목사님은 매장되는 최후의 순간까지 구박을 받는 것이었다.

이용도 목사님의 시체를 담은 관이 땅속으로 들어간다 . 널이 무덤 구멍 속에 들어가서 놓일 때 곁에서 어떤 이가 말한다.

“ 이용도 목사는 나에게 두 가지다 . 첫째는 나의 신앙의 어머니이고 , 둘째는 나의 마음의 쾌락이었다 . 목사님이 아니었다면 찾지 못할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 얻지 못할 신앙을 얻었으니 그는 나의 어머니요 , 그 신앙으로 해서 내 마음이 새로워지고 새로운 생명에 접하여 말로 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얻었으니 그는 나의 쾌락이다 . 이용도 목사님 . 그는 나의 어머니 , 나의 기쁨이었다.”

한 삽 가득 떠서 던지는 흙이 쿵 소리를 내며 목사님의 가슴 위에 가서 떨어질 때 모두 울었다 . 그리고는 곧 찬송을 불렀다 .

 

저 좋은 낙원 이르니 그 쾌락 내 쾌락일세 

이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춘일 ( 春日 ) 되도다 

영화롭다 낙원이여 그 산악에서 보오니 

먼 바다 건너 있는 집 주 예비하신 궁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것 영원한 내 집이로다

 

이곳과 저곳 멀지 않다 내 구주 건너 오셔서 

손목을 잡고 가는 것 내 평생 소원이로다 

저 기화요초 향기는 바람에 불려오도다 

생명수 가의 화초는 늘 사시 청춘이로다 

청아한 음악소리는 풍편에 날아오는데 

흰 옷을 입은 무리들 천사와 노래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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