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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_전집_⑤ 추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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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11-14 23:23 조회7,74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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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 전집 ⑤추모집

 

思慕 의 歲月

 

 

 

이용도 목사 전집 ⑤ 추모집 

思慕 의 歲月

 

2 판 1 쇄 발행 • 2004 년 7 월 5 일

 

지은이 • 변종호 외 

엮은이 • 변종호 

펴낸이 • 이민수

 

펴낸곳 • 장안문화

등록 • 제 6-0044 호 (1979 년 4 월 4 일 )

 

주소 •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103-19 베델하우스 403 호 

Tel • 2232-1277 / Fax • 2232-2800

 

http://www.jbooks.co.kr 

jbooks@jbooks.co.kr

 

값은 표지 뒷면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ISBN 89-85137-07-7 (04230) 

ISBN 89-85137-02-6 ( 세트 )

 



 

이용도 목사 전집 ⑤추모집

 

思慕 의 歲月

 

 

 

 

장안문화

 

 

 

 

발간사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을 발간하며

 

 

한국교회 역사의 수많은 인물 중 가장 독특한 신앙가이며 가장 열렬한 전도자 중의 한 분이었던 이용도 목사는 33 년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커다란 신앙의 유산을 남기었습니다 . 일찍이 일제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외쳤으나 정신과 신앙의 독립이 더 시급함을 깨달았던 이용도 목사는 곧 영적인 독립운동을 벌였고 목을 찢고 가슴을 터트려 영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말씀은 그가 남긴 글을 통해서 70 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영적인 자유를 갈구하는 교인들에게 동일한 감격과 생명력을 주고 있습니다 . 그 런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변종호 목사의 필생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 변 목사는 이용도 목사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34 년 『 이용도목사서간집 』 을 처음 발간했고 이후 일기 , 저술집 , 연구논문 등을 50 여 년에 걸쳐 발간해왔고 1986 년 『 이용도목사전집 』 (10 권 ) 을 내놓았습니다 .

 

이러한 역작인 『 이용도목사전집 』 은 1993 년 장안문화사에서 쇄를 바꾸어 발간되다가 , 이용도 목사 70 주기에 즈음하여 개정판이 기획되어 , 금번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으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은 초판의 글들을 선별하여 , 서간집 , 일기 , 저술집과 전기 , 추모집 등 전 5 권으로 구성하였습니다 . 그러면서 새로운 내용들을 보충시켰습니다 . 우선 서간집의 경우 1934 년판에만 수록되었던 편지들을 찾아서 추가시켰습니다 . 또한 이용도 목사의 친구로서 선교사였던 피터스 (Peters • 皮道秀 ) 목사가 1936 년 발표한 이용도 목사 전기 ‘Simeon, a Christian Korean Mystic’ 을 전기에 포함시켰는데 , 변종호 목사가 저술한 기존의 전기와 보완적인 내용이어서 전기가 새로운 모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에서는 내용의 정확성과 친밀성을 제고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 먼저 원본에 충실키 위해 , 서간집은 1934 년판과 1969 년판 , 일기는 1966 년판 , 저술집은 1975 년판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 본문의 한자어 중 일상적인 현대어가 있는 경우 당시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대치시켰습니다 . 이런 경우 원문과 비교가 필요할 경우에는 한자를 [ ] 안에 병기하였습니다 . 그러나 1930 년대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문장의 술부 등은 대부분 그대로 두었습니다 . 또한 서간집의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각주로 달았고 초판에서는 익명으로 표기되었으나 자료들을 통하여 내용 확인이 가능한 사항들은 최대한 실명화했습니다 . 또한 변종호 목사가 소장했던 사진들과 피터스 목사가 제공한 새로운 사진들을 본문 내에 배열하였습니다.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의 발간이 이용도 목사의 신앙과 사상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 이용도 목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올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 받습니다.

 

『 이용도목사전집 』 2 판의 발간을 위해서 여러 분들께서 도와주셨습니다 . 윤춘병 감독님 , 김길송 목사님 , 피터스 목사님 , 임인철 권사님 , 성백걸 교수님 , 김형기 교수님 등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2004 년 6 월

장안문화

이민수

 

 

 

 

머리말

 

50 은 100 의 반이요 , 10 의 5 배를 내용으로 한다 . 50 년은 복된 해 ( 禧年 ) 이며 오순절은 성령강림과 교회 창시의 절일이다.

 

10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진실이라면 50 년이면 강산이 5 번 변했을 것이다 . 그러나 이용도 목사의 수욕 ( 受辱 ), 피타 ( 被打 ) 는 그냥 계속되고 있고 그에 대한 나의 사모는 불변일 뿐 아니라 더욱 가열의 도가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50 년간의 사모일기 ( 思慕日記 ) 를 한번 들추어보는 것이다 .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으니 내 몸이 77 세 까지 이 땅 위에 살고 있을 수 있다는 것과 내 마음이 50 년간 그를 광모열애 ( 狂慕熱愛 ) 하여 변함이나 냉함이 없다는 데 있다 .

 

그러기에 이 글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붓대를 잡게 하시고 성령님이 붓대를 놀리게 하심에 의해서 쓰여짐을 받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병골이 어찌 77 년을 살 수 있었으며 이 병심 ( 病心 ) 이 어찌 50 년간을 불변수절 할 수 있었겠는가 . 이것은 필시 하나님께서 살려두시고 성령님께서 지켜주심에 의한 것이매 나도 놀라고 남도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50 년간 나를 살려두시고 공부시켜 주시고 바로 살게 하시며 불변열모 ( 不變熱慕 ) 하게 하시고서 이 글을 쓰게 하시니 나는 쓰지 않을 수 없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여기서 용도는 옳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바 있으니 죽을 변 ( 邊 ) 을 죽지 않게 하시고 변할 자를 변치 않게 하시고 이 글을 쓰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매 의로운 하나님께서 하심을 보아 시무언은 옳았다는 것이다.

1981 년이라는 해는 내가 1931 년 3 월 1 일 오전 10 시 황해도 재령읍 서부예배 당에서 이용도 목사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거듭난 지 50 주년 되는 해요 , 이 목사님이 1901 년 4 월 6 일 황해도 김천 땅에서 출생하신 지 80 주년 되는 해이다.

 

감정이 극하여 통곡과 찬송에 삼키어져 글을 더 쓸 수가 없다.

 

1980 년 11 월 16 일 

제 10 회 加一 감사절의 날에

변종호 씀

 

 

 

 

이용도의 현대적 의미

 

 

성백걸 박사 ( 한국기독교사상사연구소장 )

 

 

새 『 이용도목사전집 』 이 던져줄 빛

 

18 세기 말 조선천주교의 설립과 19 세기 말 한국개신교의 형성 이후 지난 2 세기를 통해 이 땅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전개해온 한국기독교는 이제 21 세기를 맞아 새로운 시대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 여기서 우리는 앞선 시대에 기독교 복음에서 새 비전을 찾고 그 실현을 위해 헌신 (commitment) 했던 신앙 선배들의 자취를 뒤돌아보며 , 그들이 던져주는 현대적인 빛을 헤쳐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 이번에 장안문화의 수고에 의해 새롭게 정리되어 발행되는 『 이용도목사서간집 』 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1933 년 10 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새 인격 형성을 위한 복음운동에 자기 삶을 투신했던 이용도 목사가 별세한 후 , 다음해인 1934 년에 그의 애제 ( 愛弟 ) 변종호는 이용도 목사와 신앙동지들 사이에 오고 갔던 흩어진 서신들을 모아 『 이용도목사서간집 』 을 발간하는 열성과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 1953 년에는 변종호에 의해 『 이용도목사서간집 』 ( 심우원 ) 재판이 간행되었는데 , 이때 초판에 들어 있던 편지들 , 특히 이용도 목사가 받은 많이 편지들이 빠지게 되었다 . 그 의도와 기준은 이용도 목사에 대한 세간의 터무니없는 비판 여지를 줄이려고 한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또한 1966 에는 신생관에서 『 이용도목사 일기 』 가 , 1975 년에는 역시 신생관에서 『 이용도목사저술집 』 이 발행되었다 . 1986 년에는 변종호 편저로 초석출판사에 『 이용도목사전집 』 ( 전 10 권 ) 이 간행되었고 , 1993 년에는 이것이 다시 출판사를 장안문화사로 바뀌어 나왔다.

이번에 5 권으로 새로 정리되어 발행되는 『 이용도목사전집 』 의 특징은 , 우선 , 그간 학자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보충되었다는 것이다 . 특히 1934 년의 『 이용도목사서간집 』 초판에 들어 갔다가 1953 년 재판에서 빠진 편지들이 이번에 모두 수록되었는데 , 그 내용을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이용도 목사의 행적과 신앙동지들의 교류 범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 또한 이번 판에서는 비록 원래 자료는 아니지만 , 변종호 목사의 편집본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에 맞춘 재편집의 묘를 살려 일반인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이 새로운 『 이용도목사전집 』 이 앞으로 한국교회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보이게 또 보이지 않게 던져줄 빛을 살펴보도록 하자 . 즉 이용도 목사가 비추어주고 있는 현재와 미래적인 빛의 방향을 파악해 보자는 것이다.

 

 

 

한국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의 한 원형

 

이용도가 지니고 있는 빛은 , 우선 조선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인으로서 한 국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의 새로운 지평을 비추어주고 있다 . 한국교회의 역사가 40-50 년의 연륜을 지니고 , 서구 근대문명과 기독교의 실체에 대해 깊고 넓게 파악하면서 , 근대 가치와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우리의 역사 상황에서 근대적인 민족의식을 지니고 철저하게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 우리 민족의 고유한 종교성과 영성이 근대 가치와 복음의 진리와의 융합과 합일을 통해 제 3 의 새로운 창조적인 지평의 한 원형으로 출현하게 된다 . 이것을 ‘ 한도한기론 ’( 韓道韓器論 ) 으로 부를 수 있는데 , 그 본질적인 특성이 조선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의 추구로 나타났다 . 이점에서 이용도가 지니고 있는 조선적이고 우주적인 영성과 , 그에 바탕을 두고 출현한 영적이고 우주적 (Spiritual and Cosmic) 인 기독교의 빛은 현재와 미래에 한 원형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복음과 신앙의 ‘ 본말 ( 本末 )’ 을 바로 잡는 빛

 

현대 한국기독교의 큰 병폐는 신앙의 본과 말 혹은 실체 내용과 외적 형식의 혼동에 걸려 있다는 진단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 그만큼 복음의 본질과 신앙생활의 참된 의미가 흐려져 있는 현대이다 . 이 점에서 벌써부터 무엇이 중요하고 , 무엇이 부차적인지 헷갈리고 있던 1930 년 대의 한국교계에 대해 던졌던 이용도의 예언자적인 빛은 오늘날도 여전히 환하게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 용도는 사람은 살아 있는 생명체요 생명은 사랑을 그 본질로 하고 숨쉬고 있는데 , 이 사랑은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본다 . “ 사랑은 사람의 생명이라 . 고로 사랑은 곧 , 사람 그것 ” 인데 ,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신앙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물질문명과 얽힌 서양적 기독교를 넘는 동양적 기독교의 여명

 

이용도는 동양종교 문화권에서 태어난 신앙인으로서 물질문명과 얽힌 서양 기독교의 종말을 내다보며 동양의 풍부한 정신적 유산에 뿌리내린 동양적 기독교의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 성경과 함께 불경과 도덕경도 읽을 수 있었던 그는 “ 서양의 기독교는 동적 ( 動的 ), 동양의 기독교는 정적 ( 靜的 ). 西洋 = 物 - 現世的 - 形式 - 外的 , 東洋 = 靈 - 內的 - 神秘 . 西洋 人 은 外的 의 것을 더 찾았다 . 이제 신비적인 것을 동양인이 찾아야겠다 . 찬송보다 기도 ! 기쁨보다 눈물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음은 무슨 이유인가 . 동양에서 서양적 기독교는 실패 . 서양인은 공관복음적 , 동양인은 요한복음적 . 서양의 미완성품인 기독교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심령방면 신비방면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겠다 . 동양적이란 것은 요한 발견적인 것이다 ” 라고 했다 .

 

 

 

자연의 위기를 극복하는 생태적 기독교

 

용도의 신앙체험과 생명력 있는 생활의 힘은 자연 , 그것도 산 속에서 산과 더불어 호흡하며 얻은 것이다 . 그를 결정적으로 교회개혁적 부흥사로 내몬 것도 1928 년 강원도 금강산의 백정봉의 기도체험이었고 , 1931 년 아현성결교회의 집회도중 쫓겨났을 때에도 그를 받아준 것은 인왕산이었으며 , 그 후에도 용도가 지치고 상처를 입었을 때마다 찾아간 곳은 산의 품이었다 . 용도는 새에게 설교했던 프란치스코처럼 “ 자연은 나의 친구 . 믿을 사람도 없고 사귈 사람도 없을 때 하늘 , 산 , 흐르는 물 , 공중의 별 , 밤의 산과 들 초목 , 곤충 , 새들 , 이는 다 - 자연에 속한 것으로 나의 친구가 되나니 , 나는 늘 이 친구를 보려 자연 속으로 들어갑니다 ” 라고 했고 , “ 자연은 나의 애인의 집으로 하고 금년에 나는 거기서 주님으로 더불어 살리로다 ” 라고 다짐했다.

 

 

 

예술적인 영성과 기독교의 멋진 지평

 

21 세기는 문화예술의 시대라고 누구나 말하고 있다 . 실제로 , 우리 시대는 사회정치적 관심보다는 어떤 면에서 예술적인 감성 , 예술적인 혼 , 예술적인 영성이 새로운 차원의 물결을 생성시키는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 이점에서 예술적 신앙인으로서 이용도가 지니고 있는 세기적인 빛이 있다 . 그는 시 ( 詩 ) 를 그리스도 곧 정의와 사랑의 신에 흠뻑 미쳐서 거기서 터져 나오는 생명의 율동으로 보았다 . 그래서 “ 기도는 곧 시 ( 詩 ) 입니다 ”, “ 신앙이 깊으면 그의 모든 말이 다 시다 ” 라고 인식했다 . 또한 , 협성신학교 때부터 가야금을 즐겨 탔던 이용도는 음악 속에서도 종교적 차원을 발견했으며 , 그 소리의 나래를 타고 하느님의 품속에 들어가서 신비의 나라를 체험했다 . 그 밖에도 그림과 연극과 가극예술에서 역시 종교의 세계를 느끼며 예술과 종교의 일치된 지평을 열고 있던 이용도였다 . 그러면서도 그는 “ 진리는 아무런 둔한 손끝으로라도 잘 표현할 수 있다 . 그러나 미 ( 美 ) 는 아름다운 손에 의해서만 그 형 ( 形 ) 이 정제 ( 整齊 ) 된다 ” 고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는데 , 이런 점에서 용도를 통해 정제되어 나타난 인생과 종교의 아름다운 예술적 세계는 그 현재적 의미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새 창조의 기도와 생활의 일치

 

하지만 , 무엇보다도 이용도에게서 현재 기독교가 배워야 할 것은 그가 터득하고 있는 기도의 깊이와 힘이라고 할 수 있다 . 사실 , 기도야말로 용도가 가장 강조한 신앙의 필요충분조건이었으며 , 용도야말로 기도의 사람이요 이 땅에 살아있던 기도 그 자체였다 . 용도다운 모든 사상과 활동의 진원지가 기도였는데 , 그는 기도를 자기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다 . 그는 기도를 단지 하느님께 인간의 소원을 올리거나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정도에서 이해하지 않는다 . 용도의 기도는 그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 그때 기도는 사람의 생명이 새로 태어나는 신비로운 창조적 사건의 장소이다 . 깊은 기도 속에서 세상의 힘든 삶으로 지치고 오염된 사람의 생명이 기쁨과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의 생명을 얻어 새로 태어나게 된다 . 용도는 이것을 ‘ 생명의 역환 ’ 과정으로서 신앙생활과 ‘ 생명의 역환소 ( 易換所 )’ 로서 기도로 말한다 .

 

이렇게 역사적인 빛을 지니고 있는 이용도 목사를 우리 시대에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이번 『 이용도목사전집 』 출판을 기뻐하고 축하하며 , 그 노고를 치하한다 . 부디 이 땅에 시무언 ( 是無言 ) 이용도 목사의 새로운 빛에 의해 수많은 생명과 사랑의 꽃들이 만개하기를!

 

2004 년 6 월

 

 

차례

 

발간사 • 4 

머리말 • 6

이용도의 현대적 의미 • 8 

차례 • 12

 

 

제 1 부 은애의 2 년 반 , 사모의 50 년 - 변종호 

 

제 1 장 1931 년 • 14 

제 2 장 1932 년 • 58 

제 3 장 1933 년 • 66

 

 

제 2 부 잊을 수 없는 그 분

 

제 1 장 그 성역과 순교 - 이호빈 • 99 

제 2 장 용도 형님과 나 - 이환신 • 112 

제 3 장 그는 분명히 성자 - 이호운 • 118

제 4 장 단 3 시간 동안에 받은 인상 - 김용동 • 126

제 5 장 무진의 영양소 , 그 설교 , 그 기도 - 한의정 • 131 

제 6 장 내가 잊을 수 없는 분 - 이세운 • 136 

제 7 장 천당에 계실 목사님 - 이규선 • 139

제 8 장 이 목사님에 대한 생각 몇 가지 - 김지영 • 142 

제 9 장 경모하는 용도 목사님 영전에 - 조경우 • 144 

제 10 장 이용도식 전도활동 - 변종호 • 146 

제 11 장 용도 씨의 인상 - 박재봉 • 152 

제 12 장 시무언을 추모함 - 경석윤 • 153 

제 13 장 내가 숭배하는 성자 - 명관조 • 155 

제 14 장 그 한 분과 그 한 책 - 임근수 • 156

 

 

제 3 부 그 자취를 따라서

 

제 1 장 평양 중앙교회 1930.2.26~3.9 • 159 

제 2 장 평양 명촌교회 , 신암교회 1932.6 • 171

제 3 장 안주 동부교회 , 서부교회 1932.10.3~10.11 • 174 

제 4 장 목사님 그리며 주야 험로 230 리 1932.10 • 178 

제 5 장 생수를 찾아서 1932.10.20 • 185 

제 6 장 해주 남본정교회 1932.10.23 • 190 

제 7 장 평양 신양리교회 1933.2 • 196 

제 8 장 해주 남본정교회 1933.2 • 199 

제 9 장 안주노회 관련 1933.3 •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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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부 : 은애의 2 년 반 , 사모의 50 년 - 변종호 >

 

 

 

제 1 장

 

1931 년

 

 

이 패역한 자도

 

9 년간의 병상생활이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고 그 9 년 동안에 받은 신체의 고통과 마음의 쓰라림은 말로 다하기 어려운 바가 많다 . 피어 오르는 꽃봉 오리에 내리는 서리도 분수가 있지 겨우 19 세란 어린 몸에 길게 누워 , 일어나지 못하는 중병을 주어 9 년이란 긴 세월을 ‘ 눈뱅이 ’ 생활을 하는 형편을 당한다면 아무리 위인이고 위대한 신앙가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라든가, 감사란 말은 나오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 본래 예수를 믿지 않다가 그렇게 되었다면 믿지 않은 죄 값이라 할지 모르겠고 , 망나니 같은 행동을 하다가 그렇게 되었다면 입을 열어 중얼거릴 말도 없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모태에서부터 예배당엘 다녔고 , 도덕적이라고 하는 일은 모두 다 하기를 염원해 오던 몸에 천벌 중에도 가장 심한 천벌을 받게 되니 하늘을 원망치 않을 수 없고 세상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을 복으로 여기어 기쁘게 받고 병상을 낙원으로 생각하라고 말하는 뻔뻔 스러운 목사님은 피눈물 나는 중병이나 소생할 가망이 없다는 죽을 병을 한 번도 앓아 본 적이 없는 볼에 살이 피둥피둥 찐 사람이었다 . 의인 욥도 어려운 고난과 병에 부딪혔을 때 “ 내 어머니의 태가 왜 나를 낳았으며 내 어머니의 젖이 왜 나를 길렀는가 ” 하고 탄식한 것을 생각한다면 나 같은 범 속한 박신자 ( 薄信者 ) 가 하늘을 원망한 것도 무리가 아니요 , 세상을 향해 원통하다고 발버둥친 것도 있을 수 있었던 일이라 생각된다.

병상에 누워 온갖 소망이 다 끊기고 반듯하게 누워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을 때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난 날을 생각해 보곤 하였다 . 다섯 , 여섯 살 때 졸리는 눈을 비비며 아버지와 형의 손에 붙들려 예배 당에 따라가던 눈 오던 추운 겨울 밤도 생각났다 . 열살 안팎의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뛰어 놀다가 얄미운 애를 때리면 아버지가 나와서 나를 때려주며 야단치기 때문에 얄미운 그 애를 때려주지 못해 분해서 앙앙 울던 생각도 났다 . 15 〜 16 세를 지나 세상 물정을 알게 되었을 때는 ‘ 사회를 위하여 …… ’ 또는 ‘ 집안을 위하여 …… ’ 라고 생각하던 때도 기억되었다 . 마음속으로나마 그렇게 알뜰히 생각하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그렇게도 속을 썩이고 애쓰게 하던 과거가 생각났다 . 그러자 지금 내 모습이 언뜻 생각되었다 . 나는 부르짖었다 .

“ 교회는 다 무엇이고 목사는 또 뭐냐 . 있으면 다 나오라 . 너희들과 한번 크게 싸우고 주를 향해 큰소리로 울려고 한다.”

이런 발악의 병상 생활은 한마디로 생지옥이었다 . 몸이 쏘고 아픈 것 , 온 세상에서 아주 버림을 받을 끝없는 고독 , 죽이나 밥을 끓여먹을 쌀이 떨어진 일 , 이 모두가 기막힌 일임에는 틀림 없었지만 이런 모들 것보다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감사할 대상이 없는 심령의 고통은 참으로 유황불이 붙는지 옥의 고통에 못지 않은 혹심한 것이었다 . 후에 이르러서야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어느 신령하다는 목사는 안수기도를 해주겠다고 나의 깨끗한 방에 구두를 신은 채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코웃음 쳐 돌려보내고서 나는 목사라는 거룩한 기생물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 그러므로 비록 병이 차도가 있고 원기를 좀 회복했다 하더라도 교회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갖지 않고 교역자들을 별로 대수롭게 보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1929 년 겨울 , 9 년의 병상에서 일어나 대지에 발걸음을 딛게 된 때부터 점점 원기를 회복하여 넓은 인간 세상에 다시 나서기는 했지만 1931 년 봄이 되기까지 2 년 여 동안 예배당에 간 것은 단 두세 번밖에 되지 않았다 . 그것도 설교를 듣거나 기도를 드리려고 해서가 아니고 특별한 집회가 있을 때에나 갔었던 것이다 . 나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 될 수만 있으면 교회와 완전히 관계를 끊고 예배당에도 일절 발길을 안하고 살다가 이 세상을 끝마치리라고. 이 당시에는 이것이 당연한 생각일 뿐만 아니라 , 옳은 생활이라고 생각했지만 냉정히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발악이요 , 흉계였던가 .

 

 

 

주 날 버리지 않으사

 

이렇게 악화된 심령이 어른들에게는 얼마나 위태해 보이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얼마나 가련하였을 것인가 . 지금에 이르러 생각할 때 얼마나 몸서리쳐지는 일인지 …… . 그러나 이런 완악한 심령을 주님께서는 결코 버리시지 않고 불쌍히 여기어 드디어 구원의 손길을 펴셨다.

1931 년 2 월 하순 경 재령 ( 載寧 ) 거리는 이상한 소문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 정말 그이는 사람이 아니야 . 그는 성자야 , 아니 성신이야 , 예수야 , 그는 요한이야 ” 하는 말이었다 .

당시 예수 믿는 사람이 많기로 이름난 재령의 골목골목에는 어디에서나 이런 수군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 그러나 나는 그런 하찮은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 부모님과 동생들은 교회당엘 가느라고 분주했고 다녀와서는 이런저런 얘기에 밤늦은 줄을 몰랐다 . 그러나 그런 소란도 나에게는 관심을 끌만한 일이 되지 못했다.

이런 소란이 재령 거리를 휩쓸기 시작한 지 10 여 일이 지날 무렵 부모님과 동생들은 나를 붙들고 권하기 시작했다.

“ 얘야 , 이번에 예배당에 가서 은혜 좀 받아라 .”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그러나 그들은 쉬지 않고 조르기 시작한다 . 

“ 제발 교회에 좀 가자 .”

내 태도는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급기야는 부모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간절히 원하신다.

“ 네가 죽을 병에서 살아난 것이 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냐 . 그런데 주님을 배반하고 교회엘 안 다녀 ? 천벌을 받을까 두렵지도 않니 ?”

그러나 나의 대답은 부모님의 마음을 뻔히 들여다 보듯 아픈 곳을 찔렀다. 

“ 그렇다고 해도 요즈음 목사란 사람의 입에서 무슨 신통한 소리가 나온단 말입니까?”

이 말을 들은 부모님과 동생은 몹시 원하였다. 

“ 글쎄 , 그러지 말고 꼭 한 번만 가보자 .”

결국 그들의 청에 견디다 못해 한번 나가보기로 작정하고 말았다. 

첫 시간에 거꾸러지다

이용도 목사님이 재령에 온 것은 동부교회에 부흥회를 하기 위해 1 주일 예정으로 오신 것이었다 . 그러나 서부교회의 간절한 청을 뿌리칠 수 없어 다시 1 주일 더 계속하기로 하셨다 . 내가 교회에 나간 것은 서부교회 부흥회가 시작된 지 닷새째 되는 날 , 그러니까 목사님이 재령에 오신 지 12 일째 되는 날이었다 . 내가 나갔을 때는 아침 예배였다 . 일부러 멀찍이 앉기 위해 신장 안쪽에 살짝 들어 않았다.

이윽고 강대상을 바라본 나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 저런 사람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

그러나 한 마디 , 두 마디 설교가 진행됨에 따라 내 가슴은 이상하게 울렁거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내 머리가 아찔하게 되었다 . 설교가 시작된 지 10 여 분 후에 나는 완전히 거꾸러져 “ 오 , 목사님 !” 하고 목사님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일 정도가 되고 말았다 . 그때 들었던 설교를 다 기억할 수는 없으나 그 중에 이런 내용의 말이 있었다. 

“ 벽돌로 담을 쌓고 울긋불긋하게 장식을 해놓은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 이 예배당을 다 불태워버리고 그 잿더미 위에서라도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 참 된 예배를 드려야 그것이 바로 교회올시다.”

“ 신앙이라 , 사랑이라고 하면서도 내용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껍데기와 기관과 조직만 남아가지고 이것이 예수 교회라고 전하면서 남의 귀한 영혼을 해치고 망치고 죽이는 것이 현대 교회가 아닙니까.”

그의 설교는 이렇게 부패한 교회의 내막을 폭로하고 주님의 일꾼들이 직업화되는 것을 여지 없이 공격하고 예수와 십자가를 재인식할 것을 주장하면서 조선기독교의 재출발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 나는 놀라고 말았다 . 오늘날의 목사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 저렇게 통찰하시는 목사도 이 세상에 있었던가 . 나는 경탄할 뿐이었다 . 그의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작지도 않은 예배당인데도 2,000 여 명이나 되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 후덥지근한 속에서 나는 헐떡거리고 있었다 . 유달리 사람 냄새에 약한 내 머리는 아찔해지고 속은 메스꺼웠다 . 그러나 끝까지 참고 들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1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 안타깝게도 목사님이 목이 쉬어서 말을 잘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 10 여 일 동안을 하루에도 네댓 번씩 , 그것도 10 여 시간씩 외치는 동안에 절반쯤 쉬어있던 목이 이때가 되어서는 들릴락 말락 하다가 급기야는 말문이 아주 막히고 만 것이었다 . 오직 사력을 다해 외쳐 보려는 몸부림만이 처절하게 보일 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하고 귀에 손을 대고 들어 보려 안간힘을 썼다 . 모든 사람들도 침을 삼키며 안타깝게 귀를 기울인다 . 나는 무릎을 세워도 보고 곧게 앉아 보기도 하고 벌떡 일어서 보고 몸을 앞으로 굽히고 강대상을 향해 바라보며, 가슴을 졸이며 귀를 기울였으나 단 한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2,000 여 명의 졸아드는 가슴과 목을 찢어서라도 한마디를 토하고 , 가슴을 깨쳐서라도 외쳐 보려는 단상의 목사님의 결사적인 노력과 최후의 몸부림 , 이는 부패한 기독교의 마지막 몸부림 같았고 고민하는 기독교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모습과 방불했다 . 저렇게도 약하시고 꼭 잠긴 목으로 어째서 저렇게 몸부림을 쳐야 하고 누구 때문에 저래야 한단 말인가 . 어느덧 목이 메인 나에게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 주여 , 주여 , 그 입을 열으사 , 내게 하려는 그 말을 들려주소서 .”

그러나 그 말소리는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 목사님의 얼굴은 땀에 번득거릴 뿐이고 처절한 몸부림은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다 . 나는 앞으로 달려가서 목사님을 끌어안아 내리고 싶어졌다 . 그리고 무릎 위에 누이고 흐르는 땀을 닦아드리고 싶었다 . 2,000 여 명의 마음들이 부글부글 끓어 오른다 . 본 교회 목사와 장로들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 말 소리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건만 몸짓은 쉬지 않았다 . 금방 쓰러질 것만 같은 안타까운 모습이다 . 그러나 최후의 힘까지도 짜내는 듯한 그의 표정은 그러다가 죽더라도 단에서는 내려가지 않겠다는 비상한 결심이 엿보였다 .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 차츰 높아가는 흐느낌에 내 가슴은 바싹 졸아들고 입안은 마르기 시작한다 .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

이때 수군거리고만 있던 제직과 본 교회 목사는 생각 끝에 통변자( 通辯者 ) 를 세웠다 . 이 목사의 몸짓과 입의 움직임을 자세히 지켜본 후 통변자의 호박 , 참외 맛 같은 통변이 나왔다 . 그러나 가슴을 졸이고 있던 군중들은 혹시나 이 목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지지나 않을까 애태우기만 하였다 . 하지만 그렇게도 듣고 싶어하던 목사님의 음성은 결국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 예배는 그대로 끝나고 만 것이다 . 설교 시간은 약 2 시간 .

 

예배가 끝난 후 나는 직분을 맡고 있는 분을 만나 물었다.

“ 약이라도 좀 써보도록 하지 , 왜 그렇게까지 목이 쉬도록 내버려 두었습니까?”

“ 여러 가지 약도 권해 보았지만 도무지 쓰시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 내가 말을 못한다면 그것도 주님의 뜻일 것입니다 . 말을 못하게 하여 당신의 역사를 나타내시려는 것이니 구태여 약까지 쓸 필요가 있겠어요 ’ 하시지 않아요.”

나는 이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말을 못하게 하고서 당신의 역사를 한다니 ,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도대체 누구를 어떻게 역사를 하게 한단 말인가 . 무언지 모르는 것이 가슴에서 철렁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내 머리는 몹시도 어수선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 방에 들어와서 가만히 누웠다 .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마음 속으로부터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 정말 간절히.

“ 주여 , 그의 목을 열어 주소서 . 그 입이 말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 이 기도는 참으로 내가 이 세상에 나서 처음 드리는 남을 위한 간절한 기도였다 . 나는 기도를 올리고 또 올렸다 . 얼마 후 나는 벌떡 일어났다 . 그리고 종이를 찾아 글을 썼다 . 기도문이었다 .

“ 목사님의 목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그 음성이 항상 맑기를 빕니다 . 또한 몸이 항상 건강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그리고 목사님이 이 세상의 마지막 시간을 맞을 때 부족한 저를 꼭 부르시도록 기도합니다.”

 

나는 이 글을 들고 목사님이 머무르고 있는 곳을 찾아 달려갔다 . 그런데 그 곳에 갔을 때 목사님이 계신다는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 계시지 않나 보다 생각하면서 방을 들여다 보았더니 목사님이 소리 없이 앉아계시는 것이 아닌가 . 나는 들어서서 공손히 인사했다 . 때는 2 월말 , 아직도 차가운 겨울인데 방문을 열고 계시는 것은 웬일인가 .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을 하시지 않는가 . 폐가 약해서 공기를 통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문을 열어놓고 주무신다는 것이었다 . 아니 , 그렇다면 목사님이 폐병에 걸리셨단 말인가.

나는 나의 지난 이야기를 간단히 드리고 목사님도 내게 몇 마디 말씀을 하여주셨다 . 나는 일어서면서 내가 써 온 기도문을 목사님께 드리면서 말했다.

“ 목사님 , 목이 꼭 나으셔서 오늘 밤에는 말씀을 들려 주세요 .”

목사님과 나는 굳게 악수하고 헤어졌다 . 해가 기울고 밤이 되었다 . 그러나 목사님의 목은 여전히 낫지 않는다고 걱정들이다 . 말이 안되면 할 수 없이 밤 집회를 중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말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서서 손짓 , 몸짓이라도 하겠다고 주장하셨다 .

 

드디어 밤 집회가 열렸다 . 목사님께서 단에 나타났다 . 목사님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내렸다 . 그러나 나의 온 신경은 귀에 집중되어 있었다 . 그러나 역시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오직 손짓 , 몸 짓만 계속될 뿐이었다 . 어느덧 온 몸은 땀에 흥건히 젖어 들었다 . 어느 틈 엔지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 왠지 나의 가슴은 바짝 타 들어온다 . “ 목사님 , 거기서 죽으시렵니까 ?”

그런데 얼마가 지났을까 , 가느다란 말소리가 한 마디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다 . 조금 있다가 또 한마디가 . 말소리가 점점 커진다 . 마침내는 목이 콱 열리고 쏟아지는 물처럼 거침없는 열변을 토한다 .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 . 왠지 모를 눈물이 그냥 흘러내릴 뿐이었다 . 나는 너무나 감사했다 . 

“ 주여 , 감사합니다 . 그의 목을 열어 나의 귀에 그 목소리를 들려주시니 , 주여 , 감사합니다 .”

나는 이때에 처음으로 진정한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 보았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그의 연약한 모습 , 병색이 짙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곤 했다 .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병약한 몸을 이끌고 저토록 땀과 피까지 쏟으시는 것인가 .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문을 닫지 못하고 지내는 그분이 , 수천 명이나 확 들어찬 그 더러운 공기를 마시며 설교를 . 그것도 3 〜 4 시간씩이나 하시는 걸까 . 목이 찢어지고 마지막 한방을 땀까지도 쏟으시며 가죽이 뼈에 꼭 달라붙기까지.

‘ 오 , 무엇을 위해 그리 하십니까 . 도대체 누구를 위해 …… .’ 내 가슴은 터질 것만 같고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고 있을 뿐이었다 . 그러나 나의 이 눈물은 하늘나라를 생각하여서도 아니었고 그 옛날의 골고다를 생각 해서도 아니었다 . 그저 목사님의 그 친절한 몸부림과 안타까워하심에 대한 것일 뿐이었다 . 나는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며 남달리 완악했던 내 심령을 깊이 뉘우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몹쓸 몸도 버리지 않으사 주께서 이와 같은 사자를 내게 보내 주심에 깊이 감격하였다.

물론 이용도 목사가 재령에 오신 것은 누구보다도 나를 위한 것이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가 다 나 하나를 위한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다 . 이날 밤 나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감사의 기도와 눈물로 꼬박 한 밤을 지새웠다.

 

먼동이 트기를 기다려 나는 종이와 붓 , 그리고 먹을 들고 목사님을 찾아갔다 . 유 ( 留 ) 하시는 집에 이르러 살펴 보니 목사님 계시는 방문이 닫혀있는 것이 아닌가 .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 목사님 계십니까 ?” 하고 문을 두드렸더니 들어오라는 목사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목사님은 냉수마찰을 하는 중이었다 . 옆방과 뜰 , 부엌에서는 부인들이 들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였건만 그 속에서 마음 놓고 냉수마찰을 하시는 그 어린 듯하고 천진스러운 마음가짐에 놀랐을 뿐 아니라 목욕을 하시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찾아온 사람을 들어 오라고 하는 그 태도에 또 한번 놀랐다 . 나는 혼자 있을 때도 웃 옷을 벗기조차도 부끄러워하는데 그 순진함과 태연함엔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목사님의 냉수마찰이 끝나기를 기다려 나는 종이와 붓을 내어 놓으며 나의 부탁을 말씀드렸다 . 그랬더니 빙그레 웃으시면서 ,

“ 삼천리 강산을 다 돌아다녔지만 이런 청은 받아본 일도 없고 또 평생에 이런 글을 써본 적도 없는데 …… .” 나는 재차 간곡히 청원하였다.

“ 목사님의 글씨나 어구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 그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한 나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될 만한 글을 한 자든 , 두 자든 좋으니 써달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붓을 받아 드신다 .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 얼마 지난 후 목사님은 준비나 해둔 것처럼 내려쓰시는 것이었다.

이 글을 본 나는 퍽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 나의 신앙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나는 “ 그런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 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 이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해 주셨다 .

 

이 글은 형에게 드리는 글이나 또한 내가 영원히 붙들고 살다가 죽으려는 글이기도 합니다 . 여태까지 나의 수양과 노력과 활동은 오직 이 세가지를 행하는 일이요 , 실행해 보려는 노력이올시다 .

 

① 무언 ( 無言 ): 이 세상은 말이 많은 세상입니다 . 하지 않아도 될 말 , 또 남을 해치는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 자기의 아름다운 뜻을 남에게 전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을 가지고 얼마나 남을 해하고 세상을 망칩니까 . 이 세상 사회의 모든 악 , 싸움 , 그리고 모든 분쟁은 다 이 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나는 말이 없기를 바라며 또 벙어리가 되기를 위하여 염원하는 바입니다.

 

② 겸비 ( 謙卑 ): 세상은 또 얼마나 교만한 세상인지요 . 못 되고도 된 척하고 또 좀 되면 되었노라고 남을 멸시하고 천대 구박하는 바람에 싸움이 생기고 야단이 나지 않나 생각합니다 . 그래서 나는 가장 낮을 자 , 가장 미욱하고 천하고 불쌍한 자가 되어서 더 배우고 , 더 얻고 , 더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③ 기도 ( 祈禱 ): 기도의 필요성이야 여러 말할 것이 없지요 . 나는 모든 부족과 고통과 설움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길이 바로 기도에 있고 아버지에게서 그 큰 사랑과 위안과 힘과 빛을 얻어 오는 길이 또한 기도를 함에 있으니, 신앙생활에는 오직 기도가 있을 뿐이며 또한 기도 하나로 족한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죽을 수도 , 말할 수도 , 잘 수도 없으니 주를 믿는 자는 그저 기도 하나가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겠습니다 . 물 없이는 고기도 살 수 없고 공기가 없으면 몇 분 동안도 우리의 육체가 살 수 없음 같이 기도 없이는 우리의 영이 1 시간이나 몇 분 동안도 살 수 없음을 깨달아야겠습니다 . 그리하여 어느 때 , 어느 곳에서라도 우리는 그저 기도를 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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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설명을 마치더니 조용히 엎드리신다.

 

“ 주여 , 이 청년의 마음을 살피사 이 시간에 그를 붙들어 온전한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 완전히 붙드사 당신의 포로가 되게 하옵소서 . 그의 몸은 많은 고생으로 지치고 마음은 오래 동안 헤매었습니다 . 그러나 주여 , 지금 그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몸과 마음이 이 자리에 엎드릴 수 있게 하셨으니 이 시간에 그를 꼭 붙드사 아버지의 사슬에 영원히 매이게 하시고 이제 다시는 아버지를 멀리하는 길에 그 발을 들여놓지 않게 하옵소서 . 인생이 몇 날입니까 ? 살면 얼마나 살겠나이까 ? 인생의 낙이 무엇이고 낙을 누린다면 그것이 몇 푼어치나 되겠나이까 ? 헛되고 헛된 인생의 꿈을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것보다도 주의 포로가 되어 주의 곁에서 하루를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요 , 은총임을 알게 하옵소서 . 다 죽었던 그 몸을 살리신 주님께서 그를 살펴 쓰실 곳이 있을 것이오니 이제 그에게 당신이 세우실 장소를 알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아버지를 향하여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옵소서. 벌써 죽어 흙이 되었을 그 몸뚱이 , 또 내일 죽을지 모래 죽을지 모르는 그 몸이 주저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통째로 얻은 그 몸 , 통째로 주께 다 바칠 수 있게 하옵소서 . 아멘 .”

 

나는 온 몸이 마치 전기에 닿은 것 같은 찌르르함을 느꼈다 . 나의 머리는 몹시 무겁고 얼굴은 확 달아 올랐다 . 써주신 글을 받아 들고 몇 마디 하는 동안 나는 그의 동생 ( 용구 ) 의 이야기를 듣고 또 한번 놀랐다 . 폐병 증세가 심해 해주요양원에 있는데 의사의 말로는 며칠 못가리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 죽어가는 동생을 두고 , 자기 또한 경하지 않은 중병에 신음하면서 이렇 게까지 결사적으로 외치고 피와 땀을 쏟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목석이 아닌 사람이라면 그의 심중을 헤아리지 않고 또 ‘ 누구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여야 하는가 ’ 를 생각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1 시간 가까이 얘기하는 동안 나는 목사님의 전 인격에 완전히 엎드러지게 되었고 힘만 있다면 그의 일을 도와드리고 시간만 있으면 그의 곁에서 살아 보기를 원하게 되었다 . 조반상이 들어오는 기색에 나는 일어서려 했다 . 그 때 그는 오른손을 내밀어 내 손을 덥석 잡으셨다 . 처음은 엷은 웃음을 입가에 띄우더니 순간 얼굴빛이 엄숙하게 변한다 . 왼편 손까지 마저 뻗쳐 손등을 쥐시더니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그리고는 “ 고맙습니다 ” 하신다 .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묵묵히 앉아 있었다 .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목사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 이윽고 얼굴을 들고 나를 쳐다보시던 목사님은 또다시 고개를 숙이신다 . 그리고 “ 고맙습니다 ” 하셨다 . 손을 놓고 가만히 고개를 든 목사님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 얼굴 빛은 감격인지 , 비창인지 모를 것에 젖어 있었다 .

글을 써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또 복까지 빌어 주시고서도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는 목사님과 달라고 한 것을 얻어 갖고서도 말 한마디 못하고 넋잃은 사람처럼 멍청하게 앉아있는 내 모습은 얼마나 대조적이었을까 ?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방을 나왔다 . 집을 향해 발걸음을 하나하나 옮길 때마다 나의 가슴은 마치 큰 문을 열어 놓은 듯 시원하였고 양 어깨는 무거운 짐을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함께 찍은 사진

 

그날 오전 공부를 마치고 점심 때가 지난 후 나는 사진관을 찾아갔다 . 목사님과 둘이서 사진을 찍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사진사에게 얘기를 꺼냈더니 ,

 “ 그 목사님은 사진을 찍지 않으시는데요 . 다른 부인들도 목사님의 사진을 갖고 싶어서 며칠 전부터 사진을 하나 찍으려고 그렇게 졸랐대요 . 그렇지만 끝까지 응하지 않으시어 못 찍었는데요.”

나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사진사를 재촉해서 목사님의 숙소로 갔다 . 가는 동안에 혹시 목사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도 그곳에 계셨다 . 인사를 드리자 빙그레 웃으시며 , 반갑게 맞아 주셨다 . 나는 다짜고짜로 조르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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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서 나오세요 . 둘이서만 사진 한 장 찍읍시다 ” 고 말했다 . 사실 너무 대담하고 무례한 것 같기도 했지만 왠지 목사님이 허락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목사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나에게 빙그레 웃으시며 “ 그럴 것 없어요 ” 하신다 .

그러나 나는 찍지 않고는 결코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보이며 또 졸라 댔다 . 마침내 두루마기를 입으신다 . 

“ 모자를 꼭 써야 하나 …… .”

이 말을 들은 나는 뛸 듯이 기뻤다 . 이렇게 해서 나는 이용도 목사님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 이 사진을 보면서 나는 지금도 웃는다 . 모자 쓴 것이 얼른 눈에 띄기 때문이다 . 당시 나는 모자를 쓰고 찍는 것이 좋을지 , 벗는 것이 좋을지 망설이는 동안에 몇 번이나 썼다 벗었다 했는지 모른다. 결국 나 혼자만 쓰고 찍은 것이 이렇게 비스듬히 쓴 우스운 사진이 되고만 것이다.

 

 

 

어느새 사진 1,000 장이 복사되어

 

그때 재령에는 여자 성경학교가 열리고 있어서 부근 지방에서부터 부녀자들이 퍽 많이 모여 들었다 . 거기에다 동부교회 , 서부교회 교인들이 모두 모여 큰 은혜를 받았으므로 사실상 이 목사님의 집회에는 3,000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이곤 했다 . 그렇게 모이는 사람들은 누구나 목사님의 사진을 갖고 싶어했다 . 그런데 목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한두 장 나돌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사진관으로 몰려들었다 . 사진관에서는 둘이서 찍은 사진에서 목사님의 얼굴만 조그맣게 만들어서 팔았다 . 재경에서만도 그 사진이 500 장 이상 팔렸다고 한다.

재령 집회가 끝난 후 목사님은 경남 거창 ( 居昌 ) 에 가셨다가 다시 사리원에 오시게 되었다 . 그런데 목사님이 사리원에 도착하기 전날 ,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사진을 500 장 사갔다고 한다 . 그러니까 이때 팔린 목사님의 사진만 해도 1,000 장이 넘는 셈이었다 . 이것으로 우리는 당시 성도들이 목사님을 향해 얼마나 뜨거운 심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 당시에는 성경 찬송 속에 이 목사님의 사진이 없으면 신자 축에 끼지 못하는 듯하였다 . 하여튼 저마다 그 사진을 내어놓는 것을 큰 자랑으로 삼는 것이다.

 

 

 

내 주소가 적힌 엽서 6 장

 

2 주간의 집회가 꿈속처럼 끝나고 목사님이 떠나는 날이 되었다 .

1931 년 3 월 3 일 새벽 , 나는 일찌감치 목사님을 찾아갔다 . 이번에 목사님을 통해 받은 그 큰 은혜와 감격을 말씀드리고 나서 나는 엽서 여섯 장을 목사님께 드렸다 . 물론 바쁘게 다니시는 줄 뻔히 알면서도 될 수만 있으면 어디를 가시든지 간단하게라도 소식을 전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에서였다 . 엽서에 내 집 주소와 이름을 써드렸다 . 혹시 주소와 이름을 잊지나 않으실까 , 또 엽서를 사실 시간이 없을까 생각해서였다 . 훗날 훨씬 가까워진 후에 들은 얘기지만 온 조선을 다 돌아 다녔어도 그렇게까지 알뜰히 소식을 듣고 싶어 엽서에 이름까지 써준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작별

 

1931 년 3 월 3 일 오전 10 시경 , 드디어 목사님이 재령을 떠나실 시간이 왔다 . 본정통 조선철도 정류장에서 자동차를 타시고 해주에 들러 병든 동생을 찾아 보려는 것이었다 . 정류장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남녀 신도가 전송하러 나왔으므로 좁은 재령 거리 한복판은 사람으로 바다를 이룬 셈이었다 .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나를 자주 돌아 봐주신다 . 더구나 나에게 뜨거운 악수까지 해주신 것은 더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 나는 해주에 있는 동생에게 보내는 문안 편지를 목사님께 드렸다.

잠시 후 요란한 경적소리와 함께 차가 움직인다 . 나는 손을 들었다 . 차 안의 목사님도 손을 드시는가 했더니 어느새 고개를 숙이고 기도 속으로 들어 가신다 . 차가 모퉁이를 돌아선다 . 기도하시는 거룩한 종을 실은 차는 점점 내 눈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오실 때의 이야기와 가신 후의 형편

 

잠시 뒤로 돌아가 목사님께서 재령에 오시던 날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목사님이 오신 날을 분명히 기억할 수는 없다 . 하여튼 내가 안 것은 목사님께서 어느 날엔가 저녁 차로 오셨던 것이다 . 오신다는 시간에 동부교회의 제직들과 신자 여러 사람이 정거장에 마중을 나갔다 . 드디어 기다리던 차가 도착해서 손님들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차에 있는 손님이 다 내리도록 아무도 목사님을 찾지 못했다 . 나왔던 사람들은 실의와 걱정에 휩싸여서 돌아갔다 . 그러나 사실은 목사님께서 분명히 그 차에서 내려 여러 사람이 서있는 앞을 지나가셨던 것이다 . 그런데도 목사님을 발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 여기에서부터 그는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고 목사님 자신의 용도성 ( 龍道性 ) 이 발휘된 셈이었다 .

그날 저녁 목사님의 차림은 누구보다도 초라했다 . 검은 무명 두루마기에 중절모자를 쓰고 성경 , 찬송이 든 책가방을 든 채로 차에서 내리셨다 .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목사님을 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 왜 못 보았을까 ? 설명은 간단하다 . 그는 배가 나오지도 않았고 좋은 양복을 입지도 않았고 생각보다 앳된 얼굴에 걸음걸이도 뚜벅뚜벅 어른스럽게 , 위풍당당하게 걷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가 머리를 들고 의젓하게 나온 것이 아니라 마치 학생처럼 , 아니 죄인이나 된 것처럼 , 어린애같이 가슴을 웅크리고 나오는 모습이 목사 같지도 않았고 더구나 유명하거나 , 위엄이었거나 , 당당해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령 동부교회의 첫 종소리는 어둠에 짙어가는 거리에 구석구석 울려나갔 다 . 그리고 얼마 후에는 재종 ( 再鐘 ) 이 울렸다 . 그러나 집회를 인도할 목사님이 오시지 않은 것이다 . 당황한 주최측의 제직들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 드디어 교회 담임목사가 단에 나타났다 . 오시게 된 목사님이 아직도 오시지 않은 것을 사과하기 위해서이었다 . 마침 이때 강대상 아래에 납작 엎드려 있던 낯선 청년 하나가 일어나 앉는다 . 곁에 있던 청년 하나가 반색을 하며 소리지른다.

“ 아니 , 이용도 목사님 아니십니까 ?” 

“ 예 , 그렇습니다 .”

이 소리가 삽시간에 온 예배당 안에 번져갔다 . 이제야 목사님이 발견된 것이다 . 그 청년은 전날 어느 곳에서 잠깐 목사님을 한 번 본적이 있다는 사람이었다 . 이 청년으로 해서 목사님은 단위에 올라서시게 되었다 .

이윽고 이용도 목사님이 나오셨다 . 기도 , 찬송 , 그리고 말씀을 시작했다 . 만일 이 목사님의 설교를 한 번이라도 들은 바 있는 사람이라면 , 그날 밤 설교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첫날 첫 시간부터 교회 마루는 눈물로 젖어 들었다 . 목사님 오신 지 2 〜 3 일 되는 때부터는 서부교회 교인들도 대부분이 일을 그만두고 가게 문을 닫고 낮으로 , 밤으로 모여 들었다 . 학과시간에 빠지고 부흥회에 참석한 성경학교 학생들이 야단을 맞았고 밤새워 기도하던 중학생이 사감에게 들켜 퇴학을 당한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언론기관에 있는 분들 , 사회의 유력한 분들도 몰려오고 무슨 주의자니 , 무슨 운동가니 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눈물을 홀리며 밤을 새우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 그 이름난 배 , 얼굴가죽이 두텁기로 유명한 이가 정신을 잃은 듯이 4 〜 5 일 동안이나 마루를 치고 통곡했다는 것은 이적 중에도 놀라운 이적이라고 재령 일대가 떠들썩 했었다 . 도깨비가 나온다느니 , 밤만 되면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쥐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도록 꼭꼭 닫아두던 그 예배당에 목사님이 다녀가신 후로는 새벽 한 시가 되고 , 두 시가 되어도 기도소리가 그치지 않고 세 시에도 , 네 시에도 통회하는 울음소리가 울려 나왔다 . 고요한 밤중에 울려 퍼지는 기쁨의 찬송소리는 재령과 온 한국을 구원할 것 같았다 . 용도 목사 ! 오 , 이용도 목사님 ! 그 이름을 불러보고는 기도하고 그 사진을 한 번 꺼내 보고는 찬송가를 높이 불렀다.

 

 

 

의외의 서류우편( 書類郵便 )

 

목사님이 해주를 향해 떠나 가신 지 사흘 째 되는 날 편지가 한 장 왔다. 도장을 갖고 오라기에 뛰어 갔더니 서류우편인데 발신인은 이용구라고 씌어 있었다 . 이상하게 뛰는 가슴을 누르며 편지를 뜯었다 .

‘ 병든 동생에게 형의 편지를 전하고 또 소개를 해주었더니 한번 만나 보고 싶다 하기에 차비를 보낸다 ’ 는 목사님의 편지였다 .

나는 곧 해주를 향해 떠났다 . 해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목사님께서 떠나신 후였다 . 그리고 얼마 전부터 와 계셨다는 목사님의 자당 ( 慈堂 ) 도 이미 떠나셨다 . 나는 거기에 2 〜 3 일 동안 머물면서 목사님 동생에게 얘기를 들려 주고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 간곡한 주의와 부탁을 남기고 해주를 떠나오면 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왔다 .

‘ 그 다정한 목사님 , 사랑 많은 목사님이 동생을 보고도 주의 일 때문에 하루 밤밖에 지내지 못하고 여길 떠나셨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기가 막혔을까.’

확실히 그의 병은 위중하였다.

 

 

 

낯익은 글씨의 엽서 한 장

 

해주에서 돌아온 지 이틀 째 되는 날 엽서를 한 장 받았다 . 경남 거창교회 에서 목사님이 보내신 글이다 . 별 다른 말은 없고 그저 거창에 무사히 왔다는 간단한 안부 편지였다 . 그러나 너무 반가웠던 나는 그 엽서에 이마를 대고 기도를 드렸다 . 밤에 잘 때는 그 엽서를 가슴에 올려놓고 잠이 들기도 하였다 . 나는 곧 답장을 썼다 . 그 편지 중에 시도 한 편 넣어 보냈다 .

 

 

봉정우 ( 奉呈于 ) 이용도 목사

 

그대는 천미 ( 賤微 ) 속에 몸이 태어나 

병약과 눈물 속에 살아 오면서 

그 고통 그 눈물을 쾌히 정복하고

심안 ( 心眼 ) 은 또 보았다 신 ( 神 ) 의 실재 ( 實在 ) 를

 

지나가는 풍성 ( 風聲 ) 에 신음 ( 神音 ) 을 듣고 

남루 ( 濫樓 ) 의 걸아 ( 乞兒 ) 에서 신을 본 그대 

심신의 용도 ( 用途 ) 를 생각하던 너는 

전부를 바치었다 신께 용도 ( 龍道 ) 를

 

신께 바친 네 몸의 처신 ( 處身 ) 을 본 때 

내 어찌 아니 울랴 나는 울었다

병폐 ( 病肺 ) 로 절규 ( 絶叫 ) 하다가 목까지 쉴 때

식불식 ( 食不食 ) 면불면 ( 眠不眠 ) 의 네 양자 ( 樣姿 ) 볼 때

 

마비된 내 심장의 피는 뛰었다

실명 ( 失明 ) 의 내 심안 ( 心眼 ) 은 크게 띄었어 

맥 ( 脈 ) 돌고 눈이 띄어 기쁜 내 손은 

정성껏 만들었다 한 개 화환 ( 花環 ) 을 

영원히 멸 ( 滅 ) 치 않을 한 개 화환을 

나의 영 ( 靈 ) 의 구주인 네게 드리며 

그러나 안 주겠다 지금은

이것 받으려는 그 손을 거두어 두라

 

그리고 또 떠나서 일을 하여라

지금 같은 그 열 ( 熱 ) 로 숨질 때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주를 위하여

북부 ( 北部 ) 에 가슴치고 남촌 ( 南村 ) 에 올라 

일한촌 ( 一寒村 ) 강대상에 피를 토하고 

거꾸러져 그 자리에 네 숨이 질 때 

나는 뛰어가리라 너를 찾아서

네 얼굴에 키스하고 화환 드리며 

지금 주려고 만든 나의 화환을

신자 ( 神子 ) 가 된 네 가슴에 안겨 주려고 

영원히 멸치 않을 너의 이름을 

불멸의 화환으로 빛내어 주려

네 명 ( 命 ) 은 더욱더욱 결사적으로

최후의 순간까지 분전 ( 奮戰 ) 하는 데 있다 

네가 도 ( 道 ) 에 순 ( 殉 ) 할 때 너만 못지 않은 

후계자가 생길 것이고 억만인 ( 憶萬人 ) 은 너를 

신자 ( 神子 ) 로 추대 ( 推戴 ) 하려고 일어나리라

 

이 편지에 대한 목사님의 편지가 곧 또 왔다 . 역시 내가 드린 엽서에 고운 글씨로 씌어져 왔다.

 

‘ 네 명은 더욱더욱 결사적으로 최후까지 분전 ( 奮戰 ) 하는 데 있다 ’ 를 읽고 나의 영 ( 靈 ) 은 작약 ( 雀躍 ) 하며 나의 입술은 “ 아멘 ” 이라고 부르짖노라 . 나는 앞에 죽음밖에 없노라 ! 십자가 !

나는 오직 그 후에 오는 부활을 바라노라 . 이 육에 속한 체 ( 體 ) 는 완전히 죽어버리고 영 ( 靈 ) 에 속한 체로 바꾸려 하노라 . 이것도 성의 ( 聖意 ) 를 기다릴 뿐이로다 . 내 능 ( 能 ) 으로는 죽을 수도 없고 더구나 순도 ( 殉道 ) 라는 그런 영광을 얻기 감당치 못하노라 . 오직 성의에 있을 뿐이로라 . 오 성령이시여 , 나를 이끄소서 골고다까지 . 아멘 ’

 

나는 이 편지를 잘 간직해 두었다 . 그런데 목사님께서도 나의 그 시를 간수하여 두셨다 . 지금 나는 이 두 편지를 양쪽에 내놓고 이 글을 쓴다 . 오 , 감개무량할 뿐이다.

 

 

 

오 , 그리워 그 얼굴이 그리워

 

그 후로는 가시는 곳에서 마다 편지를 보내 주셨다 . 그러나 이미 편지로만 만족할 때는 지났다 . 그저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에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 세상에서 이렇게 그리울 수가 있을까 . 자나 깨나 내 귀에는 그의 음성 이 쟁쟁하고 앉아도 , 누워도 나의 눈 앞에는 그의 모습만 아른거렸다 .

 ‘ 오 , 어떻게 하면 목사님을 다시 만나보고 어떻게 하면 그와 좀더 가까이 서 살 수가 있을까.’

이것이 바로 나의 기도요 , 이것이 바로 나의 열광된 염원이었다 .

 

 

 

하나님의 크신 은총 , 다시 만날 기회

 

이렇게 밤낮으로 그리움에 허덕이고 애타는 중에 그를 다시 만날 좋은 기회가 생겼다 . 오래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던 황주 이 선생님이 사진기를 하나 주면서 사진 기술을 잘 익혀 사진관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 나는 그 사진기를 갖고 재령으로 왔다 . 그러나 재령은 너무 작은 도시였다 . 재료를 구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기술을 연구하기도 불편했다 . 그래서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서울로 올라 가기로 했다 . 서울에 도착한 첫 날은 퍽 피곤하고 다른 일도 있었기 때문에 여관에서 지냈다 . 그리고 그 다음 날에야 목사님을 찾아 종로를 향해 떠났다 . 그때 목사님께서 맡고 있던 일은 주일학교연합회 간사였으므로 종로에 있는 예수교서회 빌딩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간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 충에 올라가서 사무실 문을 두드렸더니 청년 하나가 나왔다 . 나는 문안으로 들어서면서 , 이용도 목사님이 계시는지 물었다 . 이 청년은 어찌된 셈인지 “ 이용도 목사님이요 ?” 하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나는 또 한 번 “ 이용도 목사님 말이에요 ” 하였다 . 그랬더니 역시 그 청년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 이때 저편 쪽 책상 곁에서 한 사람이 일어섰다 . 바로 이 목사님이었다 . 정다운 얼굴로 달려 와서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 아 , 이게 어찌된 일이요 , 그래 그 동안 잘 지냈소 ? 부모님과 누이 동생들 다 잘 있고 ? 언제 왔소 ? 어디에 계시오 ?”

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는데도 연거푸 안부를 묻는다 . 여관에 있다고 했더니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시며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 그렇다고 당장 자리를 비울 수는 없기 때문인지 ‘ 현저동 ( 峴底洞 ) 산 12 의 15 호 ’ 라고 하시며 찾아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 그리고 나서는

“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은 저녁밥 후나 조반 전이니 그때 오면 좋겠다 ” 말씀하셨다.

나는 그날 저녁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현저동을 찾아 떠났다 . 현저동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다 어두워졌다 . 문패를 찾기 위해 성냥을 한 통 사가지고 올라갔다 .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대문 앞에서 불을 켜보곤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 그 이튿날 밤에도 성냥을 들고 1 시간쯤 찾았을 때에야 현저동 산 12 의 15 란 집을 찾을 수가 있었다 . 그런데 문패에는 호주 ( 戶主 ) 가 송봉애 ( 宋鳳愛 ) 라고 써있지 않는가 . 문틈으로 들여다 보면서 ,

“ 말씀 좀 물읍시다 . 이 댁에 이용도 목사님 계시지 않습니까 ?” 

“ 오 이제야 왔구먼 ” 하시는 소리는 분명히 목사님의 목소리였다 .

목사님은 마루에서 뛰어 내려오시고 나는 대문에서 달려 들어갔다 .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호주 송봉애

 

이 ‘ 호주 송봉애 ’ 라는 문패는 현저동을 떠나던 33 년 4 월까지 붙어있었다 . 아마 이 문패 때문에 애를 먹은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 어느 날 어떤 여학생 하나가 목사님을 찾아 현저동까지 왔다 . 그런데 막상 집을 찾았을 때 목사님은 계시지 않고 호주가 손님을 맞게 되었다 . 잠시 앉아서 살피던 이 여학생은 “ 목사님의 방은 어딥니까 ?” 하고 물었다 . 그리고는 그 분에게 “ 목사님과는 무슨 친척관계가 되십니까 ?” 하고 물었다 . 아마 이 학생은 목사님이 송 씨라는 집에서 세 들어 있는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 어느 날 나는 목사님께 물었다 .

 “ 왜 호주를 송봉애 씨로 하고 저렇게 크게 써 붙였습니까 ?” 

목사님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 나는 이 집 식구라기보다 주님의 종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 끄시는 대로 그저 끌리어 다니다가 , 이따금씩 서울에 오게 되면 이 집에 와서 여장을 풀 어놓고 밥 끼나 얻어먹곤 하는 사람이외다 . 그래서 이 집 주인을 송봉애로 정했습니다 . 그뿐 아니라 사실상 봉애가 혼자 집에 있으면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고 거기에다 손님대접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생을 하니 나는 봉애를 동정하고 존경하고 대접하는 의미에서 사실상 호주로 모시고 또 문패까지 그렇게 써 붙였어요.”

 

 

 

최초의 영광 , 목사님과 식탁을 함께

 

그날 밤은 여관으로 돌아가서 자고 이튿날 새벽 일찍 짐을 챙겨서 목사님 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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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아침식사 때였다 . 조반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 잠시 후에 석유상자 하나를 들여온다 . 조금 후에 또 하나를 들여놓더니 두 개를 붙이고 그 위에 신문지를 폈다 . 그 위에 짠 김치 한 그릇 , 된장찌개 한 냄비 , 숟가락 , 젓가락 , 밥통 , 공기 그릇 , 이제 또 무엇이 들어오는가 하고 한참을 기다렸다 . 그런데 더 들어올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 이윽고 방과 부엌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 나는 밥상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 찬송을 부른다 . 그리고 나서는 돌아가면서 성경을 몇 절씩 읽는다 . 긴 성경 한 장이 모두 끝났다 . 기도를 드린다 .

솔직히 말한다면 밥상이라고 차려놓고 삥 둘러앉아 있을 때는 저 밥을 어떻게 먹나 하고 밥 먹을 일이 퍽이나 난처했었다 .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 어디서 오는 건지 부쩍 식욕이 생겼다 . 이상하게 배가 고파지고 밥이 퍽이나 맛있어 보이고 빨리 먹고만 싶어졌다 . 그 한심하게만 보이던 밥상이 그렇게도 아름답고 둘러앉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한 식찬 ( 食饌 ) 이라 하더라도 정다운 사람과 함께 앉아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먹을 수만 있다면 이는 참으로 진수성찬보다 낫고 산해진미를 벌려놓은 것보다도 더 맛 이 좋은 것이라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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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통을 여니 좁쌀이 흰밥보다 훨씬 더 많았다 . 맛없을 밥을 맛있게 먹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 돈이 도무지 생기지를 않아서 이렇게 지내시나 아니면 생기는 대로 다 써버려서 이렇게 지내시나 . 재령에서 말 한마디로 수천 남녀를 마음대로 웃기고 울리시던 , 감히 그 얼굴을 바라보기도 어려웠던 그 성자의 가정생활이 이렇게 궁핍하고 비참한가 생각했을 때 인간세상 어딘가에 큰 결함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한 흥분이 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성인의 가정생활 , 위인의 성빈 ( 聖貧 ) 생활

 

목사님의 현저동 집은 물론 셋집이었다 . 이 집은 서대문우체국에서 서쪽으로 1 킬로쯤 되는 곳으로 독립문에서는 서남 편으로 수백 미터쯤 되는 산비탈 막바지이다 . 집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골목을 끝까지 올라가면 작은 언덕이 하나 나온다 . 이 언덕에 올라서면 동북 편에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편에는 넓은 서대문 형무소의 전경이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듯 훤하게 보였다.

언덕 아래는 경성의 환락경 , 악박굴 약수터가 있고 서남 편에는 인왕산 높은 봉들이 서울 장안을 향하여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 나는 이 언덕에 종종 올라갔다 . 어떤 때는 목사님과 둘이서 올라가기도 했다 . 목사님은 여기에 올라오시면 거리를 향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감옥을 바라보며 흐느껴 우실 때도 있었다 . 한번은 “ 이 아래 담 밑에 조그만 기와집이 하나 있지요 . 거기에 사형 집행하는 교수대가 있답니다 ” 하고 침울한 얼굴로 한숨을 지으시는 것이었다.

목사님께서 일생 동안 가장 크게 활동한 시기를 잡는다면 1931 년 봄부터 1933 년 봄까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이 동안 줄곧 이 집에서 지냈으니 수십 만을 울리고 감동시키신 때도 , 한국교회에게 성화를 던지신 때도 다 이 집에 계시면서 하신 일이었다 . 그전에는 교회를 담임하고 또는 다른 직위에 앉아 있으면서 이따금씩 틈나는 대로 청에 따라 부흥회에 나갔으나 , 1931 년 6 월경부터 33 년 3 월까지는 전임 부흥목사로 최대의 활약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하는 동안 가족들이 이 집에서 생활의 근거를 잡게 하시고 목사님은 이 집에는 누워 본 일이 별로 없이 나다니신 것이었다 . 목사님은 참으로 밖에서 사시는 분이었다 . 교회의 청에 이끌려 지방으로 부흥회에 나가시고 주님에게 이끌려 산기슭으로 기도하러 나가셨다 . 그러다가 말없이 지방교회 부흥회를 떠나시고는 다시 말없이 현저동을 찾아오셨던 것이다.

그 더위 속에서 두세 주일씩 땀을 쏟고 눈물을 쏟아 맥이 빠져 축 늘어진 채로 들어오시면 목사님은 집에 책가방을 던지고 그 걸음으로 또 나가셨다. 산으로 나가시면 새벽 3 시나 4 시가 되어서야 들어 오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침 9 시나 10 시가 지나서야 들어오시기도 하였다 .

그러므로 재수가 좋아 목사님이 지방에서 돌아오시는 시간에 집에 있어야 한번 목사님 얼굴을 얼핏 , 그것도 잠깐 볼 수 있었다 . 만일 그 시간에 딴 곳에 계실 때면 목사님의 그림자조차도 구경하지 못하고 어느 지방으로 가셨다는 소문만 들을 뿐이었다.

그는 참으로 기도밖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 그는 기도광 ( 祈禱狂 ) 이요 , 기도만능주의자 ( 祈禱萬能主義者 ) 였다 . 내가 그 곳에 있는 짧은 동안에도 목사님이 들어오시지 않는 비 오는 밤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다리며 샌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눈 쌓인 인왕산을 바라보며 돌아오시기를 안타깝게 기다리던 때도 수없이 많았다.

만일 “ 이용도 목사는 사람이 아니고 성신 ( 聖神 ) 이야 ” 하는 사람이 있다면 , 나는 “ 그는 사람이다 .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 그러나 그가 갖는 초인적인 큰 능력은 미친 듯이 올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 라고 설명하고 싶다 .

 

 

 

물 귀한 세상

 

현저동 목사님 댁의 가장 큰 문제는 식수난이었을 것이다 . 수도는 언덕아래 큰 길가에 하나 있었을 뿐인데 수백 호가 달라붙어 먹는 것이었다 . 수도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 그 산비탈에는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 그 곳 주민들의 유일한 생명수는 악박굴 약수였다 . 그러나 이것도 온 동네가 다 먹고 또 온 서울 장안의 많은 사람들이 먹으러 오는 형편이니 정말 목마른 세상이었다 . 그래서 물을 긷기 위해서 새벽 2 시나 3 시에 약수터에 나가 기다리면 조반 때나 되어야 겨우 한 지게쯤 얻어올 수 있었다.

나도 물을 길으려 혼자 3 시쯤 일어나 나가다가 승냥이 소리에 질겁을 하고 돌아온 일도 있었고 물을 받기 위해 목사님께서 그 곤한 몸을 일으켜 나가 기다리신 일도 자주 있었다 . 그 때문에 목사님이 산 기도도 못가실 때도 있었는데 이런 판국에 거기에 있는 동안 세수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 때로는 세수하러 경성역에 가곤 했었다 . 한번은 며칠 동안 세수를 않고 지내다가 목사님께 들킨 적도 있었다.

“ 아 , 변 선생은 세수를 안 하시오 ?” 

“ 왜 안 해요 ?” 하고 나는 대답했다 . 

“ 언제 하시오 ?”

“ 경성역에 나가서 해요 ” 하고 무심코 대답했더니 , 그때부터 이 집에서는 나를 경성역에 세수하러 다니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 여기서 경성역까지는 왕복 꼭 1 시간 걸렸다 ).

 

 

 

설사증에 냉수를

 

31 년 여름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 갑자기 사모님이 원인 모를 설사를 시작 하더니 저녁에는 복통과 함께 그 증세가 위중하여졌다 . 의사의 치료를 받 을 돈도 없고 또 그리 할 마음도 없는 듯 형세를 보기만 하시던 목사님이 훌쩍 부엌으로 나가시더니 , 잠시 후 작은 컵에 냉수를 한잔 떠가지고 들어 오셨다 . 잔을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 하여지더니 기도를 드리셨다 . 그리고는 그 물을 사모님더러 들이마시라고 하셨다 . 사모님은 적이 놀라시는 듯 말없 이 목사님의 얼굴만 쳐다보더니 그 물을 그냥 쭉 들이마셨다 . 그랬더니 곧 고요히 잠이 드는 듯하며 증세가 멎어졌다 . 잠에서 깨어나자 , 경쾌하여지고 아주 완쾌하고 말았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것이었다 . 그러나 목사님은 이것을 어디서도 누구에게 말씀하지 않고 또 안수기도를 청해 오더라도 육신의 병 고쳐 달라는 기도는 하시는 일이 별로 없었고 그저 회개하고 중생 ( 重生 ) 하여 심령과 인격이 새로워지고 구원 받는 데만 전력하셨다 . 분명 그때 형편에 신병을 고쳐 준대야 일본인에게 종살이 몇 날 더하다가 죽는 것밖에 없음을 뻔히 아시었기 때문에 , 먼저 심령의 병을 고쳐서 깊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천국 가게 하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고 있었을 것이다.

 

 

 

손수건 한 개

 

내 집에는 누이동생이 넷이 있었다 . 그 중에서 셋째 누이 ‘ 석은이 ’ 는 재봉에 열심이었고 , 수도 잘 놓는 편이었다 . 하루는 석은이가 종이에 싼 조그만 것을 내게 주며 이용도 목사님께 드려달라고 했다 . 손수건이라고 하기에 펴보니 옥양목에 붉은 실로 ‘MIRACLE’ 이라고 수 놓은 것이었다 . 얼마 후에 내가 이것을 목사님께 전해드렸더니 펴보시고는 곧 머리를 숙이시고 기도를 드렸다.

“ 이것을 만든 손과 이것을 준 마음에 주 축복하여 주시고 , 이 ‘ 기적 ’ 이 항상 저와 함께 하시어 , 이 자식으로 주님의 크신 권능을 나타내어 , 저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시고 많은 사람이 구원 얻도록 저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 아멘 ” 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이 수건을 항상 포켓에 넣고 다니시며 눈물과 땀을 씻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목사님께서는 이 작은 일에 큰 감동과 격려를 받은 듯하였고 이 일이 있은 후 석은이가 잘 있는가 가끔 문안을 하셨다 . 나는 이 일 이후 남에게 물 한 모금 대접하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니고 주님을 대접하는 것임을 절실히 느끼었다.

 

 

 

짐 위에 또 짐

 

인정은 야속하고 세상은 너무나 무정한가 보다 . 이렇게 끌려나가서 자지도 , 먹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오셔도 조금의 여가 조차도 없는데 수십 , 수백 교회의 재촉과 간청이 열화 같은 그 무더운 여름날에 너무나 큰 짐 하나가 목사님께 또 지워졌다.

1932 년도 장년부 만국통일 주일공과를 번역하라는 것이었다 . 그것도 8 월말까지 원고를 완성해서 출판부에 내어놓으라는 어이 없는 일이었다 . 더위와 피곤 속에서 땀을 흘리시며 “ 기가 콱콱 막혀온다 ” 고 말씀하시던 그 모습은 정말 애처로워서 눈물 없이는 곁에서 볼 수가 없었다 . 그래도 불평하거나 처지를 한탄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 왼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으시며 웃는 얼굴로 다정하게 농담을 하셨다.

“ 아 , 글쎄 한국에 시간 많고 한가한 목사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하필 나더러 이걸 꼭 하라니 참 …… .”

웬일인지 그의 얼굴은 빛나고 감격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는가 . 도리어 보고 있던 내가 기가 막혀서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목사님을 맞으러

 

내가 재령에 가서 며칠 있는 동안 목사님께서 은율 ( 殷栗 ) 교회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 그래서 가시는 길에 재령에 좀 들려달라고 했더니 시간이 없으므로 끝마치고 돌아가시는 길에나 잠깐 들리도록 해 보겠다고 하셨다. 나는 목사님께서 은율에서 오시는 날을 마치 어린애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 듯하였다 . 그날 아침 일찍 나는 신천읍까지 갔다 . 거기에서 만나 온천 구경이나 시켜 드리고 재령에 잠깐 들리게 할 작정이었다 . 그런데 오신다던 11 시 차에 목사님이 오시지 않았다 . 다음 3 시 차에도 . 그래서 하는 수 없이 6 시 차까지 기다려 보았지만 결국 오시지 않았다 . 걱정에 쌓여 할 수 없이 어둠 속을 더듬어 집에 돌아 왔다 . 터덜터덜 집에 들어서니 동생들이 뛰어 나오며 야단을 친다 . 목사님이 12 시 차로 오셔서 오빠를 종일 기다리다가 6 시 차로 가셨다고 …… .

후에 들으니 그 날 11 시 차로 신천읍에 도착하기는 했으나 도중에 친구에게 붙들려 정류장까지 오지 않고 내려서 점심식사를 하고 다른 길로 정거장에 오셔서 기차를 탔다고 한다 . 지금도 서로 기다리던 양쪽의 심정을 생각하면 이날이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또 한가지 은혜

 

목사님은 은율에서 오셔서 바로 선천 ( 宣川 ) 으로 가셨다 . 그리고는 개성 중앙교회 , 평양 남문밖교회의 순 ( 順 ) 이었다 . 평양 집회를 마치고 서울로 가시는 목사님을 사리원역에서 만나 서울까지 동행했다 . 가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얼마 전에 오셨다가 평양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손님 한 분이 오셨다 . 수목양복을 입고 검은 얼굴에 골격은 꽤 장대해 보였다 . 한 눈에도 퍽 고생을 많이 한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 목사님의 소개로 인사를 했다 . 그는 간도에 있는 이호빈 목사였다 . 이때부터 우리는 알게 되었고 , 수일 후에 우리는 삼방 ( 三防 ) 으로 팔자에 없는 휴양을 가게 되었다 . 나는 여기에서 호빈 목사를 알게 된 것과 또 우리 몇이 삼방으로 휴양을 가게 된 것을 ‘ 또 한가지 큰 은혜 ’ 라고 생각한다 .

 

1931 년 8 월 31 일 오전 11 시 , 경성역에서 떠나는 회령행 열차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여럿 타고 있었다 . 호빈 목사님의 모친님은 간도로 가시고 송 부인은 통천 친정에 다니러 가고 용도 목사와 호빈 목사 그리고 동지 5 〜 6 명이 삼방을 가는 길이었다 . 원래 용도 목사님의 유일한 소원은 할 일을 어서 하고 하루 빨리 죽게 해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휴양 같은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일이었다 . 가끔 휴양을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항상 사양하곤 했었다 . 그러나 이번에는 꼭 쉬라는 상부 ( 上部 ) 의 명령이 있었을 뿐 아니라 여러 동지들의 간절한 애원 때문에 며칠 쉬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 삼방에서 2 주일 동안 산기도로 낮예배로 좌담과 탐승 ( 探勝 ) 으로 많은 은혜와 기쁨을 얻었다 . 모두 석왕사 ( 釋王寺 ) 를 둘러본 후에 거기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자신 있는 외교 , 기도 외교

 

9 월 15 일 새벽에 우리는 석왕사를 향해 삼방을 떠났다 . 역전에 있는 신의여 관에 들려서 싸온 밥을 조반으로 먹고 절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올라가는 도중에 우리는 사진을 한 장 찍었다 . 단속문 ( 斷俗門 ) 앞에서 또 한 장을 찍으려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막았다 . 여기는 사진조합이 있어서 조합원 이외의 사람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 그래서 나는 영업이 아니고 또 내 친구의 사진만 한 장 찍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 . 이야기를 듣고 난 그는 여기에서는 묵허 ( 默許 ) 할 수 있지만 본사 ( 本寺 ) 경내에 들어가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 사사무소 ( 寺事務所 ) 에서 영업자 몇 사람에게서 돈을 받고 특허해 주었으니 다른 사람은 사정여하를 막론하고 사진을 절대로 찍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 단속문에서 찍은 후 우리는 위로 또 올라갔다.

우리가 절간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막는 사람이 있었다 . “ 여기에서는 다른 곳 사람은 아무도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 나는 단단히 따지려고 벼르면서 앞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 이때 목사님께서 무슨 생각에선지 내 옆구리를 찌르며 “ 변 , 가만 있어 . 내가 허락 받을게 ” 하고 말씀하시며 사무소로 들어가셨다 . 할 수 없이 나도 따라 들어갔다 . 목사님은 의자에 앉아 있는 중에게 인사를 하시더니 온 이유를 말했다 . 그 사람의 대답은 “ 안 된다 ” 는 한마디였다 . 목사님은 또 사정과 이유를 설명하셨다 . 서로 자기 주장과 이유를 내세우게 되어 결국 작은 논쟁이 벌어진 셈이었다.

“ 아 , 그럴 것 없이 한 장쯤 찍게 해달라 ” 는 주장에 “ 아 , 글쎄 , 그럴 것 없이 한 장이라도 찍으려면 여기 있는 사람을 불러서 찍으라 ” 는 것이었다 . 팽팽한 논쟁이었다 . 이때 목사님이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들더니 호주머니 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놓는다 . ‘ 조선감리교회 목사 이용도 ’ 라고 쓴 것 이다 . 나는 곧 ‘ 아차 , 이젠 다 틀렸구나 ’ 고 생각했다 . 그렇지 않아도 어딘지 예수 믿는 사람 비슷하다고 해서 더 그러는데 목사 명함까지 내놓았으니 ‘ 정말 정신 없는 일을 하시는군 ’ 하고 생각했다 . 내 생각은 들어 맞았다 . 명함을 쓱 훑어보던 그는 사뭇 빈정거리는 태도로 더 밉살스럽게 굴기 시작했다.

나는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단단히 따질 생각으로 나섰다 . 이때 목사님께 서는 ‘ 가만 있으라 ’ 는 시선을 보내며 그 중을 향해 계속해서 말을 하셨다 . 얼마 후 그는 아무래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 목사님은 그냥 서계셨다 . 아니 든든히 자리를 잡으신 것 같았다 . 그러더니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 사진을 한 장 꼭 찍게 해 달라는 기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도를 하시는 것만은 분명하시다 . 혹시 목사님은 그 자리를 골방이나 바위틈으로 생각하시는지도 몰랐다.

정적 속에 시간은 흘렀다 . 5 분 , 10 분 , 15 분 , 안쪽으로 들어간 사람은 사무에 열중한 듯 이쪽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계셨다 . 마치 평온하고 태평스런 그 모습은 사진 찍는 문제 쯤이야 이미 해결되어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 이러는 동안에 시간은 30 분쯤 지났다 . 침묵의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서인지 그 중이 안쪽에서 다시 나타났다 . 목사님 앞으로 걸어 오더니 , “ 이거 , 절대로 찍을 수 없도록 규칙이 엄합니다만 , 특별히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 하고 말했다 . 마당에 나와 사진기를 세우면서 말했다.

“ 목사님은 설교보다 외교를 훨씬 더 잘 하시는구려 .” 

이 말에 목사님은 미소를 띄우시며 말하셨다.

“ 내 사진기 갖고 내 얼굴 찍겠다는데 못할 법이 어디에 있소 .” 

사진을 찍고 위로 올라가시며 이런 얘기를 들려 주셨다.

“ 내 평생에 지금까지 남에게 따져 보기는 이번까지 딱 두 번이요 . 한 번은 몇 해 전에 개성에서 무슨 회의가 있었을 때요 . 그때 그 회의 회원들이 ○○○에 구경을 가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구경을 안 시킨다는 거예요. 여러 사람이 나서서 별 수단을 다 써서 교섭을 했지만 결국 허락을 얻지 못하고 모두 발길을 돌리는데 내가 나서서 빌아리를 해서 구경을 하고 온 일이 있었지요.”

이때에 나는 목사님께서 만사에 확신을 가지고 나서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날 하루 동안을 재미있게 보내고 저녁이 되어 우리는 석왕사역에서 각각 헤어져 간도 , 경성 , 삼방 , 원산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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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가을

 

경성의 가을이었다 . 부딪치는 바람결이 선선해지고 코에 스며드는 가을의 냄새가 완연해졌다 . 그 무덥던 여름이 다 지나갔다 . 그러나 우리 목사님에게는 가을이 오지 않았다 . 땀 , 눈물의 여름은 여전히 계속이었다 . 땀과 눈물을 흘리며 사는 것이 목사님의 운명인지도 몰랐다 . 방방곡곡으로 이끌려 다니는 생활 또한 여전하였다 . 아니 가을이 되자 산으로 향한 그의 발걸음은 더욱 잦아졌다 . 지방에서 돌아오시면 그저 밥도 잊고 밤도 잊고 산에 올라 엎드리는 것이었다.

쌀쌀해 오는 가을 새벽 , 식어오는 손과 발 , 따스한 이불 속이 저절로 그리워지는 계절에 하루 밤도 집에서 지내지 못하다니 , 도대체 잠을 마다하면서 아버지께 졸라야 할 문제는 얼마나 중대한 것들인가 .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무슨 기도의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 . 하여튼 그의 생활은 기도 , 기도 , 또 기도 , 기도의 연속일 뿐이었다 . 그저 기도의 생활이니 유기주의 ( 唯祈主義 ) 요 , 유도주의 ( 唯禱主義 ) 였다 . 생활이 곧 기도요 , 기도가 곧 생활이었다.

 

 

 

산기도 가시는 목사님을 따라

 

밤이면 밤마다 산에 나가셔서 이튿날 아침 밝은 후에야 돌아오심을 보고 나는 한번 따라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보름이 지난 가을 밤 , 기울기 시작하는 달빛을 구름이 가렸다 . 차라리 달빛이 없는 어스름한 밤이었다 . 목사님이 주섬주섬 산에 가시려고 나선다 . 나도 따라 일어서며 “ 오늘은 나도 가겠어요 ” 하고 말했다 . 대문을 나선 우리는 험한 비탈과 깊은 골짜기를 몇 번이나 넘고 건넜다 . 이윽고 한강의 마포방면이 환하게 보이는 큰 바위에 이르렀다 . 아마 이 바위가 오늘 저녁의 기도자리인 모양이었다 . 목사님이 그 바위에 조용히 엎드리신다 . 상당히 넓은 바위여서 나도 그 바위 다른 쪽 끝에 엎드렸다 . 아니 엎드렸다기 보다는 그저 머리를 숙이고 앉은 셈이었을 것이다 . 목사님이 기도를 시작하신다 .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꽤 큰 소리로 기도를 하셨다 . 나도 잠깐 기도를 드렸다 .

얼마 후에 나의 기도는 끝났다 . 그러나 목사님의 기도는 그냥 계속되고 있었다 . 나는 곁에서 머리를 숙여 묵상을 하다가는 머리를 들고 어스름한 산 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 목사님의 기도소리는 높아졌다 , 낮아졌다 하며 그냥 계속된다 . 1 시간 , 2 시간 , 3 시간 …… . 집을 나설 때가 10 시경이었으니까 벌써 1 시는 넘었을 것이다 . 손발이 시려오고 추워서 오금을 펼 수가 없었다 . 점점 얼어 드는 것 같고 몸은 와들와들 떨렸다 . 가을 새벽의 찬 바람이 쉬지 않고 바위를 휩쓸며 지나갔다 . 나는 목사님이 일어나시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 행여나 하고 곁눈질을 하며 목사님을 살펴본 것이 벌써 수십 번이다 . 그러나 목사님의 기도소리는 점점 높아가기만 한다 .

마침내 기다리다 못해 나는 일어서고 말았다 . 허리가 겨우 펴진다 . 혼자 집으로 향했다 . 서투른 길을 더듬거리며 집에 왔을 때는 새벽 2 시가 넘었다 . 나는 곧 자리에 누웠다 . 그러나 내 눈에는 차가운 바위에 납작 엎드린 목사님의 모습만 자꾸 나타날 뿐이었다 .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그래서 벌떡 일어나 담요를 하나 들고 다시 산길을 더듬었다 . 목사님은 그냥 그대로 엎드려 기도를 드릴 뿐이었다 . 나는 가만히 다가가서 목사님 잔등에 담요를 덮여 드렸다 . 그리고는 곧 다시 돌아왔다 .

이튿날 목사님이 돌아오셨을 때는 조반이 한창일 때였다 . 대문이 열리며 목사님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 숨이 답답하고 등에서 땀이 나길래 봤더니 웬 담요가 덮여있지 않겠나 . 변 선생이 그랬구먼 ” 하시며 웃으신다 .

그 빙그레 웃는 얼굴에서 천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성자의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 나는 그 날 밤의 일을 잊지 못한다 . 밤새도록 무슨 기도의 말이 그렇게도 많단 말인가 . 또 어쩌면 그렇게도 납작 엎드려 한밤을 꼬박 새울 수 있을까 . 생각할수록 감탄과 경배를 금할 수 없었다 .

 

 

 

눈물의 사랑 , 결사적 애휼 ( 愛恤 )

 

역시 그 해 1931 년 가을이었다 . 원동교회 집회를 인도하시던 목사님은 어느 가족의 눈물겨운 형편을 듣게 되었다 . 김○○ 씨의 가족이 끼니를 굶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또 직접 보셨다 .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이다 . 어떤 일을 하다가 결국은 ○○을 당했다 . 그 가족이 살던 곳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마침내 ○○을 떠나 한국에 건너와 경성에까지 이른 것이다 . 그러나 야박한 경성 인심은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 조밥 몇 술도 얻어 먹지 못해 굶고 있었다 . 이 소식을 목사님께서 듣게 된 것이다 . 목사님이 그 집엘 찾아갔을 때도 대여섯 되는 식구들이 차가운 냉돌방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얼굴만 쳐다보며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 그때 목사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알 수 없다 . 다음에 있는 얘기는 그 후에 생긴 일이다 .

어느 날 오후 밖에서 들어오신 목사님께서 다시 급히 나가시려고 하셨다. 웬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 어디 가시는지 저도 같이 갈까요 ?” 했다 . 그랬더니 목사님께서는 “ 아니야 , 혼자 얼른 갔다 올게 ” 하시면서 나서려고 하셨다 . 이런 때면 보통 “ 그럼 다녀오세요 ” 했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꼭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 웬만하면 저도 데리고 가세요 .”

“ 왜 꼭 따라가겠다는 건지 모르겠네 .” 목사님께서 웃으시며 중얼거린다 . 

“ 왜가 아니라 내가 가도 괜찮을 곳이면 목사님과 함께 좀 다녀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 하고 대답하며 따라 나섰다 . 앞서서 빠른 걸음으로 걷던 목사님이 운니동 ( 雲泥洞 ) 에 이르더니 2X 번지라는 문패가 붙은 대문 앞에 멈추어 서시고 문패를 살폈다 .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시며 내게 말씀하신다.

“ 저기 서있는 저 양복 입은 청년이 형사지요 .” 

하시더니 용기를 내시는 듯,

“ 자 , 들어 가자고 ” 하시며 대문을 들어선다 .

 가족과 함께 방에 들어선 목사님은 가족에게 나를 소개하시더니 그 가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 기도를 끝마치고 한참 이야기를 주고 받던 목사님께서 나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셨다 . 내 기도가 끝난 후 목님께서는 하얀 봉투 하나를 김 씨의 미망인에게 건넸다.

집을 나서서 거리를 걸으며 나에게 김 씨와 김 씨의 가족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 그 가족이 경성에 온 것을 안 경찰에서는 그 집에 출입하는 사람을 감시하기 위해 항상 골목에 형사를 세워둔다는 것이었다 . 그 위험하고 찾아가기 힘든 집을 목사님께서는 자주 찾아 다니셨다 . 그 해 겨울 , 목사님께 들어온 돈이나 물건은 거의 다 김 씨 가족에게 전달되곤 했다.

 

 

 

가진 돈 51 전 전부를

 

김 씨 댁을 나온 우리는 창덕궁 앞을 지나 지금의 단성사 있는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 수은등 버스 정류장에 이르렀을 때 오른편 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 그냥 지나치려던 목사님이 고개를 돌려 발 끝을 세우고 안 쪽을 기웃거렸다 . 이때 사람들이 모여 있는 틈으로 가늘고 처량한 단소 소리가 구슬프게 흘러 나왔다 . 곧 목사님께서는 겹겹이 싸인 사람 사이를 뚫고 들어 가셨다 . 나도 따라 들어갔다 .

가운데는 한 40 쯤 되어 보이는 눈먼 소경이 앉아서 단소를 불고 있었다 . 한 곡 또 한 곡 , 단소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 싸늘한 가을 바람에 실려 퍼지는 그 소리는 더욱 처량하여 , 달리는 전차와 자동차의 소음에 끊길 것만 같은 애처로움 , 기울어진 가을 햇살은 빛나고 있건만 그늘에 둘러선 사람들의 눈은 비웃음과 조소로 가득 차 있었다 . 그러나 이런 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그 소경은 있는 힘을 다해 처량한 곡조를 흘려 보내고 있었다 . 그 소리는 나의 가슴을 서늘하게도 하고 바짝바짝 태우기도 하였다.

이윽고 목사님이 고개를 숙였다 . 어느새 감았던 그의 눈에 이슬이 맺히고 그의 조용한 입술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 목사님의 침묵 속에도 단소소리는 그치는 듯 이어진다 . 얼마 후 목사님이 일어섰다 . 이미 그의 손은 호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 소경 앞에 펼쳐진 누른 빛 보자기에는 가을바람이 몰아 온 먼지만 누렇게 앉아있었다 . 그 보자기에 돈이 놓여진다 . 51 전 , 50 전짜리 은화 한 개와 1 전짜리 동전 한푼 , 이것이 목사님 지갑에 들었던 전부였다 . 길을 걸으며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목사님 , 방금 얼마 주었지요 ?” 

“ 글쎄 , 동전 두어 푼 될걸 .” 

“ 아녜요 . 51 전이예요 .” 

“ 아 , 그래 , 그거 참 잘됐군 .”

“ 아니 , 목사님도 , 여기저기에 자꾸 내어 주기만 하면 살림살이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 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 주님의 사랑으로 들어왔던 돈을 다시 주의 명령으로 내보내는 것뿐이지요 . 우리는 있는 것을 모두 다 먼저 줄 수 있어요 . 이것이 바로 성공의 생활이 아니겠어요 ?”

우리는 10 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현저동까지 왔다 . 10 전이면 전차를 타고 편안히 앉아서 올 수 있는 그 길을.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 울적한 마음과 답답한 심정으로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산으로 갔다 . 밤 10 시쯤 , 어두운 산비탈을 기어올라 환한 서울 거리를 향해 앉았다 . 나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첫 절이 끝나고 둘째 절을 부를 때는 눈물이 흘러 나왔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당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찬송을 몇 번이고 계속해서 부른 다음 산을 내려왔다 . 마당에 들어섰을 때 , 어딘가 나가 계셨던 목사님이 문턱에 걸터앉아 계셨다 . ‘ 왜 주무시지 않고 계실까 ?’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 

“ 아 , 변 선생이 조금 전에 산에서 찬송 불렀소 ?” 

“ 예 .”

“ 그래 , 나는 그 찬송소리를 듣고 너무 맘이 서글퍼서 자리에 누웠다가 이렇게 일어나 앉았소 . 용구가 그 찬송을 끔찍이도 좋아하더니만 …… .” 말을 맺지 못한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부탄자창가일곡( 父彈子唱歌一曲 )

 

가을이 깊어만 가는 어느 날 저녁 , 기울던 가을 해가 서산에 지고 있었다 . 산비탈의 목사님 집은 이미 그늘에 잠기고 먼지에 가득 찬 햇살이 마지막 빛을 독립문 위에 겨우 쏟아놓고 있었다 . 목사님은 때때로 생각날 때면 , 찬송가를 타시려고 거문고를 내려 들고 앉으셨다 . 이 거문고는 목사님이 정말 아끼는 것이었다 . 늘 타시던 찬송을 한 곡 타신다 . 그때 곁에 앉아 있던 아 들 영철 군이 마주 앉는다.

 

“ 내가 노래를 부를게 아버지는 곡조를 타세요 .”

그러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 거문고의 곡조에 맞춰 .

 

오 내 사랑 그리운 벗이여 벗이여 

봄이 벌써 다 가고 여름이 와

피었던 꽃들은 봄바람이 갖고 가 

오 이 세상 이같이 거칠구나

 

첫 절 마지막에 이르러 아들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 아버지의 손끝도 떨리고 거문고 줄이 사르르 떨리며 비명 ( 悲嗚 ) 을 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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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내 사랑 그리운 벗이여 벗이여 

여름이 벌써 가고 가을 깊어

붉었던 단풍 잎이 헛되이 지나니 

오 이 세상 이같이 쓸쓸하다

오 내 사랑 그리운 벗이여 벗이여 

너를 찾는 이 내 맘 방황한다 

그리운 나의 맘 덧없이 우노니 

나는 간다 그리운 너를 찾아

 

3 절의 마지막 ‘ 나는 간다 그리운 너를 찾아 ’ 에 이르러 그만 아들의 음성이 울음에 젖어 들었다 . 노래를 부르던 아들의 고개가 숙여졌다 . 곁에서 거문고 줄에 손을 얹고 있던 아버지도 , 그 곁에서 듣던 사람들의 눈도 다 눈물에 젖어 있었다 . 그리고 모두 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

 

 

 

정다운 이야기 만추 ( 晩秋 ) 의 한 밤

 

늦가을 어느 저녁이었다 . 목사님이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신 것은 밤 11 시가 되었을 때였다 . 또 산으로 가시려니 생각했었는데 그 날은 웬일인지 건넛방으로 들어 오셨다 . 나도 곁에 앉았다 . 잠깐 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목사님이 곁에 놓인 시집을 뒤적뒤적 넘기셨다 . 입을 연 우리들의 이야기는 시에서부터 시작되어 문학에까지 넓어져 , 마침내는 예술 전반에까지 이야기가 미치게 되었다.

“ 사람들은 다 각기 자기의 소질과 기능이 다른 모양이야 . 나는 시나 소설보다는 희곡이 더 쓰기 쉬울 것 같아 . 변 선생은 시를 잘 쓰는 모양이지만 , 나는 무엇을 보든지 , 느끼면 곧 그것을 희곡화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 .” 목사님이 그날 밤에 중대한 자기 소개를 한 셈이었다 . 학창시절에 가곡을 좋아하고 또 비극의 주인공으로 서울 장안의 남녀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곧 알아차렸을 것이다 . 가느다란 불빛이 비치는 목사님의 얼굴은 사랑에 빛났고 그 음성은 마치 귀여운 어린애를 어르거나 사랑하는 중생에게 이야기를 하듯 부드럽고 정다웠다 . 용구 동생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한동안 말없이 한숨만 쉬시더니 다시 웃음을 띄며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 내 손을 꼭 잡아주며 ,

“ 그래도 나는 과히 슬퍼하지 않으오 . 변 선생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몰라요 . 앞으로 우리 …… .”

숨을 돌리는 그의 눈동자는 깊은 감격에 젖어 들고 있었다.

“ 변 선생 , 글 쓰기를 힘쓰라고 . 더욱 더 . 변 선생은 시를 참 잘 쓸 것 같아 . 자 …… .”

목사님은 내 손을 힘있게 쥐셨다.

“ 변 선생 그 재주를 다 주께 바치라고 . 성시 ( 聖時 ), 성문학 ( 聖文學 ), 예수 문학에 몸을 바치라고.”

3 시를 알린 지도 훨씬 지난 후까지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 나는 그날 밤 도무지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 이 생각 저 생각에 날이 밝았다 . 그날 밤의 다정하고 알뜰한 목사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귓전에 울려온다.

 

 

 

오막살이 부흥회장

 

나는 앞에서 목사님의 집 ‘ 현저동 산 12 의 15’ 에 있는 오막살이에 대해서 약간 얘기를 했었다 . 이 집도 서울 집이라고 지붕에는 기와가 올려져 있었다 . 그러나 비좁고 작기로는 서울에서 몇 째 갈 것이다 . 물론 목사님 가족 서넛에게는 그다지 좁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 그러나 친척 , 친구 , 또 목사님을 사모하는 자들이 언제나 서넛 또는 많으면 일곱 , 여덟 명까지 묵고 있었으니 비좁고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이 집에는 경성시내에 있는 동지 , 동신자 ( 同信者 ) 들이 밤낮으로 늘 찾아왔다 . 감리교인 , 장로교인 , 성결교인을 가릴 것 없이 찾아왔고 신학생 , 성경학생 , 전문학생 , 중학생이 그칠 사이 없이 찾아 들었다 .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은 그냥 돌아가지 않는다 . 찬송 , 기도 , 설교 , 통곡을 하게 되어 결국 이 집은 늘 부흥회장이 되고 말았다 . 물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것은 목사님이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 만일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러 나가 여러 주일 돌아오시지 않는 동안에는 이 집은 쓸쓸하고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적막으로 가득 찬다 . 마치 초상 당한 집 같기도 하고 과부 살림살이처럼 쓸쓸하기만 하였다.

 

 

 

주는 마음 받는 마음

 

가을이 끝나는 어느 날이었다 . 갑자기 시골에 내려가야 할 급한 일이 생겼다 . 그런데 그때 나에게는 여비조차도 한 푼 없었다 . 이때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자기가 입으시던 겨울 양복을 꺼내시더니 입혀 주시고 넥타이까지도 매어주셨다.

“ 어느 지방에서 받은 손수건인데 내가 땀을 닦았지요 .” 

깨끗이 빨아놓은 손수건 두 개를 꺼내 주셨다.

“ 요행히 돈이 몇 푼 생기더니 이렇게 요긴하게 쓰게 되는구나 .” 

그리고는 10 원을 쥐어 주신다 . 이렇게 해서 급한 길을 나서게 되었다 . 

“ 목사님 , 너무 감사해서 도리어 미안해 견딜 수가 없어요 .”

“ 아니야 , 받는 변 선생보다 주는 내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르겠어 . 도리어 감사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차에 앉아 흔들리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 ‘ 주면서도 도리어 감사하다 ’ 는 마음이 사람의 마음일까 , 신의 마음일까 .

 

 

 

아현사건과 눈물의 현저동

 

그때 서울을 떠난 나는 재령을 거쳐 황주 , 평양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약 1 개월을 보냈다 . 그런데 내가 평양에 있는 동안 경성에서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 그것이 소위 아현사건이다 . 목사님께서는 청을 받고 아현성결 교회에서 1 주일간의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 그런데 부흥회 사흘째 되는 날 밤에 그 교회 목사님이 선언에 의하여 집회를 중지당하고 목사님은 강단에서 물러난 사건이었다 . 그날 저녁의 이야기를 더 하지는 않겠다 . 목사님은 그 날 ○○○ 목사 , ○○○ 등에게 축출을 당하셨다 . 몰려난 목사님은 그 길로 무악산으로 올라가 울며 찬송하고 기도하며 그 밤을 지샜다. 

그런데 더 큰 일이 이틀 후에 생겼다 .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앉아서 쉬시는 목사님 집에 아현성결교회의 ○○○ 씨가 대문을 열고 뛰어들더니 그 대로 마당에 엎드러져 통곡하기 시작했다.

“ 주여 , 이 죄인이 아버지의 아들을 욕하고 내쫓았사오며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 오 주여 , 이 자식을 벌하시고 주의 종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 하고 흐느끼는 것이었다 .

뒤이어 그 교회 교인과 직분자 여럿이 따라 들어와 함께 울며 통곡을 하니 현저동이 울음바다가 된 셈이었다 . 여기에 목사님 또한 같이 통곡을 시작하였다 . 마치 대상 ( 大喪 ) 을 당한 집 같았다 . 후에 들으니 그 주일날 예배시간에 단에 올라가 설교를 하던 ○○○ 씨가 미처 설교를 마치지도 못하고 뒷문으로 나가서 들어오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 그는 설교를 하는 도중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괴로움에 견디다 못해 그 길로 현저동 목사님 댁을 찾아와 통회하게 된 것이었다.

 

 

 

평양 국수집에서 만난 기도단

 

목사님 덕택에 그 시절의 신사가 되어 시골로 내려온 나는 평양에 한 달쯤 머물러 있었다 . 내가 있는 한 달 동안에 평양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 서문밖교회에서는 그 교회의 열심 있는 신자들을 중심으로 각 교회의 동지들이 모여 기도하는 일이 있었는데 세상 사람은 이것을 기도단이라 불렀다. 모여서 너무나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빈정대는 투로 이렇게 부른 것이었다 . 그 교회 근처를 지나는 사람을 누구나 기도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 하루는 어느 친구가 점심을 먹자고 해서 국수집에 들어갔다 . 공교롭게도 그 안에는 열심 있는 신자들과 기도단원 몇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 음식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찬송 기도를 하자고 한다 . 사람이 잔뜩 모인 좁은 집에서 7 〜 8 명이 찬송가를 크게 부르고 집이 떠날 것 같은 큰 소리로 기도를 30 〜 40 분 동안이나 계속하니 그 곳에 있던 손님들이 모두 다 일어서서 젓가락을 든 채로 구경을 한다 . 감격과 조소의 탄성 속에서 그들도 넋을 잃고 구경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의 평양을 얘기하려면 김영선 씨를 빼놓을 수 없다 . 용도 목사님을 통해 중생한 그는 아예 모든 생활을 주님께 맡기기로 결심했다 . 그래서 상점을 다 정리하고 전도를 시작했다 . 한길에서 울며 전도하고 정거장 한복판에 엎드려 큰 소리로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보통으로 하였다 . 더욱 유명한 얘기는 그의 술집 전도였다 . 술집에 들어가서는 손님이 마시는 술 주전자를 집어 던지고 전도를 한 후 술값을 대신 물어주곤 했다 . 그는 새벽 5 시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 예수행상 ( 行商 )’ 을 떠났다 . 좀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 예수행상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전도방식이었다.

새벽에 집을 나서면 그는 온 평양 시가를 누비는 것이다 . 그리고 목청을 높여 “ 예수 믿으시오 , 예수요 .”, “ 이 악한 세상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오 ” 하고 외쳤다 . 이 외침은 퍽이나 우습게 들리기도 했다 . 당시 서울거리에서 “ 생선비웃 사려 ” 하는 장사꾼의 큰 소리나 ‘ 용천제 박하 ’ 를 사라는 시골 행상인들의 고함소리와 비슷했다 . 그러나 그의 떨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찬 바람 부는 어두운 새벽거리를 어정어정 걷는 그의 고개 숙인 모습을 본다면 웬일인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며칠 동안 그의 뒤를 멀찌감치 따라 새벽 거리를 걸은 적이 있었다. 그는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서서 “ 예수 믿으시오 ” 하고 외치고 나서 잠깐 그 자리에서 머리를 숙이고 잠든 거리를 향해 기도를 드린다 . 순찰하는 순경이 “ 웬 사람이냐 ?” 고 다그쳐 물어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저 기도만 할 뿐이었다 . 나는 좁은 골목에서 흘러 나오는 비웃음과 욕하는 소리도 들어 보았다 . 그러나 말없이 대답 없이 어정어정 걸어가는 그의 대답은 오직 하나였다.

“ 예수 믿으시오 ” 하는 부르짖음과 축복의 기도 . 욕을 퍼부어도 조소와 비 웃음이 그를 맞아도 그의 변함 없는 대답과 어정어정 걷는 처량 거룩한 모습은 마침내 뒤따르는 나를 길가에 주저 앉혀 울게 하고야 말았다 . 장사를 집어 던지고 집안을 잊고 욕을 먹어가며 목숨을 내놓은 김영선 씨의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생활 , 이는 오로지 이용도 목사님을 통하여 느끼고 구하고 받은 것으로 되어진 생활이었다.

 

평양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여러 형제들 , 믿음의 동지들을 통해 따뜻한 주님의 사랑을 훈훈하게 느낄 수 있었다 . 특히 김지영 집사님 댁의 각별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 그 집에서 한 달 있으면서 나는 지나친 사랑을 받고 반면에 너무나 많은 괴로움을 끼쳐 드렸다 . 그곳에 있는 동안 약 1 주일간을 감기와 현기증으로 앓아 누웠다 . 그런데 이때 온 가족이 모두 나서서 걱정하고 기도해주고 알뜰하게 간호해주신 그 사랑은 눈물 없이 받을 수 없었다 . 자기 병이나 가족의 병에는 좀처럼 약을 쓰지 않는다는 이 집에서 약을 마구 사들이고 별별 음식을 다 사다 먹였다 . 내가 눈물을 흘리며 정말 감사함을 드리고 송구스러움을 표하자 김지영 집사가 말하였다.

 “ 내가 사랑을 한다거나 또 내게 신세를 지거나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지 마시오 . 이 모든 일이 주님께서 변 선생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 그러니 절대로 내게 고마워하거나 미안한 맘을 갖지 마시오 . 그저 변 선생에게 되는 일은 모두가 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알아 주께 감사하고 주의 사랑으로 받으시오.”

어떤 때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사랑을 가르쳤다.

“ 우리는 일생 동안 사람을 통하여 주의 사랑을 맛보여야겠고 사람을 사랑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물론 그의 생활은 이용도 목사님이 붙여놓은 불을 받아 이룩된 것이라 생각한다 . 이 점은 본인이 나에게 분명히 고백한 것이었다 .

 

 

 

『 신앙생활 』 의 출간

 

또 한 가지 얘기할 것은 신앙잡지 『 신앙생활 』 의 출간이다 . 그 해 12 월 초 경이었다 . 새벽부터 서문밖예배당 지하실에는 책을 한아름 안고 들어온 한 사람의 감격한 울음 소리가 들려 나왔다 . 바로 그 책이 『 신앙생활 』 창간 호였고 눈물을 흘린 그 분은 주필 김인서 ( 金麟瑞 ) 선생이었다 .

“ 여러분이 고대하고 그처럼 기도해 주시던 『 신앙생활 』 이 지금 나왔습니 다.”

목놓아 우는 그 분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이 사람들이 바로 새벽기도로 모인 ‘ 기도단 ’ 이었다 .

나는 이 자리에서 『 신앙생활 』 이 출간된 동기나 또 김주필이 피력한 『 신앙생활 』 의 사상적 배경 , 그리고 그의 사명이나 역할을 논하지는 않겠다 . 단지 이 『 신앙생활 』 역시 이용도 목사가 평양을 다녀가신 후 생겨났고 또 그 창간호가 ‘ 용도파 ( 派 )’ 라고 지목 받는 평양 기도단의 모임 속에서 눈물과 함께 출발됐음을 얘기하고자 할 따름이다.

 

 

 

경성으로 돌아와

 

어느 날 “ 보고 싶으니 경성으로 돌아오라 ” 는 목사님의 편지를 받았다 . 내가 경성에 내렸을 때는 12 월 상순이었다 . 목사님의 생활은 여전했다 . 부흥회 때문에 지방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 그리고 몇 주 만에 한번 오시기는 하나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 물론 산기도 때문이었다 . 요행히 조반상에서 함께 마주칠 때는 있었지만 점심이나 저녁 때는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 그러니까 어쩌다 조반이나 한끼 드시고는 그저 산속에 들어가 묻히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 지방에 나가셔서 그렇게도 땀 흘리고 변변히 잡수시거나 주무시지도 못하면서 집에 돌아와서나 좀 쉬면 좋으련만 , 집에 오셔도 그런 낮과 밤만 계속되니 집안은 항상 무거운 공기에 짓눌린 것만 같았고 가슴은 항상 조마조마하여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 잠깐 잊고 있다가도 눈이라도 펄펄 내리기 시작하고 밤이 점점 깊어지면 걱정에 묻힌 목사님 사모님과 나는 일어나 엎드려 기도할 뿐이었다.

 

 

 

마루 위에서 터트린 통곡

 

어느 날 목사님은 저녁식사를 드시지 않은 채 나가셨는데 어둠이 깃들 무렵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들어오시지 않아 우리도 저녁상을 치우고 말았다 . 저녁을 먹지 않고 기다리던 우리는 지쳐서 모두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한잠을 곤하게 자고 놀래어 깨어나 보니 새벽 2 시가 다 되었다 . 그런데 곧 대문소리가 났다 . 이제야 목사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모두 문을 열고 나가 목사님을 맞았다 . 그런데 웬일인지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이 없었다 . 마루에 올라서시더니 그대로 그 자리에 눕는다 . 우리는 잠깐 누웠다 일어나시리라 생각했다 .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나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 마침내 사모님께서 들어가시기를 권했다 . 목사님은 “ 다 들어가 자시오 ” 하면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 영문을 모르는 우리는 자꾸만 들어 가시자고 졸라댔다 . 눈빛에 비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며,

“ 여보 , 이 밤에 내가 어찌 방바닥에 누워 잠들 수 있겠소 ? 지금 벽돌집 돌층계에 자는 사람 , 초가집 처마아래 누워 떠는 사람이 이 서울에도 얼마나 많은데 내가 어찌 방에 들어가겠소 . 어찌 따뜻한 아랫목에 누울 수 있단 말이요 ” 하시며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나는 건넛방에 들어와 조용히 누웠다 . 한참 후에 사모님도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 이튿날 아침 , 유난히도 밝은 아침 해는 마루 위에 누운 목사님을 비추고 있었다 . 햇빛에 빛나는 그의 머리털과 얼굴에서 십자가 위의 예수님과 사랑의 화신 ( 化身 ) 인 인간 이용도를 본 것이다 .

 

 

 

목사님을 따라 평양 명촌에

 

1931 년 12 월 중순 목사님께서 평양에 가시게 되었다 . 명촌교회에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 이 소식을 듣고 나는 곧 평양으로 내려갔다 . 얼마 전에 지냈던 김지영 집사님 댁에 머무르면서 매일 명촌교회 집회에 참석한 것이다 . 신양리에서 명촌까지는 10 리 가량 되는 거리이다 . 눈이 쌓여 발이 빠지는 이 길을 새벽이면 3 시에 일어나 걷고 밤이면 11 시가 넘어 올라오기도 하였다.

세찬 바람이 불어치는 눈 길에서 다리가 얼어서 옮겨 놓을 수가 없고 숨이 차서 숨을 쉴 수가 없어 돌아서서 쉬곤 했다 . 이때의 부흥회에서 목사님은 인간의 힘으로 하기 어려운 일들을 많이 하였다 . 어느 날 밤에는 시계가 7 시 반을 가리키고 있을 때 시작한 목사님의 기도가 10 시에 끝나기도 했다 . 한번 엎드려 그 빠른 말씨로 2 시간 반이나 기도를 드린 셈이었다 . 집회는 보통 3 〜 4 시간이 걸렸다 . 집회가 끝나면 겹겹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기도를 해 주신다 . 이 안수기도가 거의 1 시간이나 걸렸다 . 그것이 끝나면 겨우 침실로 돌아오신다.

예배당을 나와 숙소인 전도실에 들어설 때면 겨울 셔츠가 땀에 푹 젖고 솜 저고리가 땀에서 건져낸 것같이 젖어 있었다 . 심지어 겉의 조끼와 주의 (周 衣 ) 까지도 땀에 흥건했다 . 그때의 모습을 어떻게 짧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 그러나 만일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다면 누구도 얼굴을 바로 들고 보지 못할 것이었다 . 모두 고개를 뒤로 돌리고 혀를 끌끌 찰 것이다 . 아마 한번이라도 명촌교회 앞방 전도실인 숙소에 들어서는 목사님의 모습을 본다 면 나의 이야기가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렸다 . 하물며 삼복더위에는 어떠했으랴 .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렇게 땀을 흘리고 1 시가 넘어서 나오 시면 침실에는 소위 사모한다는 사람들과 따르는 사람들이 10 명이나 20 명 , 많을 때는 30 〜 40 명까지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 말이 앉아있다고 하지 사실은 그 좁은 방에 한데 뭉쳐 있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 그들은 조금이라도 목사님께 가까이 있어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요 , 단 한마디라도 목사님과 얘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 이렇게 기다리던 이들은 목사님이 나오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오시기만 하면 겹겹이 에워싸고 이리 밀고 저리 미는 통에 방안은 사람의 김에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 되고 만다. 여기에다 이 사람 , 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한마디씩 하는 동안 별 얘기가 다 나온다 . 이런 속에서 어떻게 목사님이 주무실 수 있었겠는가 . 무엇보다 빈틈없이 들어찬 사람들은 목사님께서 누우실 단 한치의 자리도 내어주지를 않는다.

이렇게 또 2 〜 3 시간을 시달리다 보면 벌써 새벽 4 시가 넘는다 . 그러면 또 새벽기도회에 나갈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때 새벽기도회 시간이 5 시였는지 5 시 반부터였는지 분명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목사님은 항상 정각 전에 나가서 엎드리셨다 . 말하자면 그에게는 새벽 3 시나 4 시라는 시간 관념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었다 . 시간만 허락하면 , 언제나 집회가 시작되기 1 시간이나 2 시간 전에 나가 준비기도를 하고서야 단에 서셨다.

 

한마디로 그의 집회 인도의 생활은 불면 ( 不眠 ), 불휴 ( 不休 ), 불식 ( 不食 ) 이었다 . 그래서 그저 엎드려 기도 , 단에 올라 설교 , 그러다가는 찬송 , 땀 , 눈물 , 오직 이것뿐이었다 .

이렇게 밖으로 돌아다니시며 땀과 눈물을 쏟으시는 한편 목사님 댁은 마치 과부의 살림살이처럼 항상 궁색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어떤 곳에서 집회를 하면 떠날 때 넉넉히 여비를 주는 데도 있었다 . 그러나 언제고 자기 집 대문에 들어서기 전에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 그래서 늘 집안은 구차하기만 했다 .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기는 돈을 다 써 버리는가 .

이 목사님은 워낙 사랑 많고 불쌍한 사람에게 동정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어느 곳이나 이 목사님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곳에 사는 딱한 사람, 울던 사람은 모두 찾아와 사정을 하고 동정을 구하며 구걸하였다 . 이런 사정을 들을 때 손에 돈이 없으면 위로해 주고 기도만 해주지만 후에 돈이 몇 푼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전날에 기억해 두었던 그 사람을 불러서 얼마씩이라도 있는 대로 다 나눠 주신다 . 이래서 목사님의 손은 언제나 비어 있는 것이다.

이 명촌교회에 내가 오니 목사님 댁의 형편을 자세히 묻는다 . 나는 내가 아는데까지 대답해주었다 . 그랬더니 그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모르게 30 원을 경성 댁으로 보내주었다 . 목사님께는 아무리 드린대도 집에까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산정현교회의 5 일간 집회

 

목사님의 예정대로 한다면 명촌집회를 마친 후 곧 상경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산정현교회의 직원과 신도가 모두 한 덩이가 되이 열렬히 간청하여 그 교회에 닷새 동안 서기로 하였다 . 날이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차츰 더 모이더니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모인 곳이 좁아서 벽을 밀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뜨겁게 달아 오른 것은 물론이었다 . 이 교회 집회 중에 얘기하고 넘어갈 몇 가지가 있다 .

어느 날 저녁 집회가 끝난 후 남아서 기도할 사람은 자유롭게 기도하라고 하였다 . 나도 남아서 기도하기로 했다 . 얼마가 지난 후 나는 일어났다 . 일어나 보니 목사님은 강단 위에 엎드려 기도하고 계셨다 . 얼마 후 엎드려 기도하시던 목사님께서 고개를 좀 들더니 종이 조각을 꺼내고는 무슨 글을 쓰셨다 . 한참을 쓰신 후에 다시 엎드려 기도를 계속하셨다 . 나는 곧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잤다.

이튿날 새벽기도회를 나가면서 나는 물었다.

“ 목사님 , 어젯밤에 기도하시다가 무얼 쓰셨습니까 ?”

“ 아 , 어제요 , 한참 기도를 하는데 , 참 신기하고도 이상한 광경이 나타나고 마음에 이상한 감격이 생기기에 그걸 좀 옮겨 볼까 하고 일어나 붓을 들었지요 . 그렇지만 도무지 그것을 그려낼 수가 없어서 한참 동안 애만 먹다가 그만 두고 말았지요 . 영감이나 계시라는 것은 받는 자만 받을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일이지 도저히 쓰거나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어.”

후에도 이날 밤의 일을 종종 돌이키며 “ 그때의 광경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 고 하시며 퍽 기뻐하셨다 . 아마 그때 본 바는 목사님 일생을 통해 받은 가장 큰 영광의 묵시라고 생각된다 . 산정현의 닷새 동안은 더욱더 높은 열변이었고 더욱 힘찬 신적 ( 神的 ) 활동이었다 . 그 넓은 예배당이 빽빽이 들어 차고 마당에까지 사람으로 가득하게 찬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었다 . 산정현교회에서의 가장 힘차고 인상 깊은 설교는 마지막 날 저녁 시간이었다 . 이때만큼 많은 사람을 울린 때도 많지 않을 것이다 .

예수께서 일생 동안 조소와 멸시 , 천대와 구박을 받으며 사시던 모습을 2 시간 동안이나 얘기하시다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십자가에 달리시는 광경을 눈물로 설명하셨다 . 이윽고 운명하시는 장면에서는 그 바짝 마른 몸을 쥐어 짜듯 , 반쯤 쉰 힘든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 마침내 땀에 번득이는 얼굴을 하늘을 향해 들더니 그 손을 하늘을 향해 휘두르며 울음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이때 모여 앉은 수천 명의 무리는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아픔을 느끼며 모두 고개를 숙였다 . 그 기막히고 처절한 광경을 도저히 눈을 들어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높아 갔다 .

이날 밤은 싸락눈이 엷게 땅을 덮고 있었다 . 아무 말없이 예배당을 나선 목사님의 발걸음은 정거장을 향하고 있었다 . 그런데 걸어가는 우리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 목사님의 숙소였던 남산여관 앞길에 이르렀을 때는 많은 사람으로 불어났다 . 그날 밤 미끄러운 눈길을 따라 나온 남녀 신자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정거장에까지 따라 나와 목사님과 헤어지는 것을 애달파하는 애끊는 광경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들은 목사님을 향한 자기들의 심정을 선물에 담았다 . 물론 목사님께는 과일 하나를 사드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 그러나 내가 함께 타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마음 놓고 던져주는 것이었다 . 더구나 나는 목사님과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목사님께 작별 인사를 끝내고는 곧 바로 내게 달려와 슬그머니 선물을 건네 주었다 . 물론 목사님은 내가 하고 있는 짓을 눈치 채지 못하셨다.

산정현교회에서는 목사님께 침대권을 사드렸다 . 그러나 목사님은 침대에 들지 않고 한사코 내 곁에 와서 앉으셨다 . 자꾸 침대차에 가셔서 주무시라고 권했으나 사양하셨다.

“ 아 , 글쎄 걱정 말아요 . 침대차에 혼자 가서 누워있는 것보다는 변 선생과 함께 앉았다 , 누웠다 하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르겠어 .”

차 속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이 밝았다 . 경성이 가까워 내릴 준비를 하다가 내가 받은 물건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시더니 금방 안색이 변했다. 

“ 아니 , 변 선생 , 이게 무슨 일이요 ? 이것을 들고 어디를 가겠소 ?”

그러시는 그 얼굴에는 고민과 괴로움과 미안함 , 그리고 내게 대한 책망의 빛으로 가득 찼다 . 나는 아무 말없이 짐꾼을 시켜 짐을 내리고 그것을 수레에 싣고 집으로 갔다 . 수레를 밀면서 나는 크게 후회했다 . 목사님께서 진심으로 괴로워하시는 그 심정을 그때는 나도 좀 알 것 같았다.

손수레에 실어올 만큼 많은 물건들이었지만 , 현저동에는 조금도 많은 것이 아니었다 .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대로는 그 많은 음식들이 이틀 만에 모두 없어졌다 . 먼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충분히 좋은 음식을 얼마든지 잡수실 수 있는데도 쫄쫄 굶고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니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 어쨌든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나 자신이 미워지기만 한다.

 

 

 

끔찍한 고생 , 섰던 자리에서 또 집회로

 

새벽 7 시에 경성역에 내린 우리가 현저동에 이르렀을 때는 8 시가 넘어서였다 . 그런데 목사님은 9 시부터 또 동대문교회의 부흥회를 시작해야 하셨다 . 집에 들어 앉아보지도 못하고 선 걸음으로 그대로 또 떠나신다 .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모든 사람은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 제 1 부 : 은애의 2 년 반 , 사모의 50 년 - 변종호 >

 

 

 

제 2 장

 

1932 년

 

 

참된 이해 , 지극한 사랑

 

내가 사진기술을 혼자 연구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 그러나 처음부터 책을 읽어 가며 혼자 익히자니 별로 신통치가 않았다 . 그래서 나는 어느 연구소에 들어가 시설도 좀 구경하고 또 그들의 기술 정도도 알아 둘 필요를 느끼어 청년회 사진과에 들어가 두어 달 연구를 하고 싶다고 지나는 말처럼 한 일이 있었다 . 그랬더니 곧장 그 자리에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 

“ 변 선생 , 대판 ( 오사카 ) 으로 가보라고 . 큰 도회 구경도 좀 하구 . 사진기술도 연구하구 . 거기서 외로운 양옥이도 좀 위로해 주고 , 그거 글쎄 얼마나 외롭겠소 . 홀몸이 먼 땅에 가서 그렇게 지내느라고 …… .”

나는 정말 놀라고 감격했다 . 물론 나를 다소 신임하는 줄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런 말씀까지 하실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 스물세 살밖에 되지 않는 제수 ( 弟嫂 ) 양옥 , 먼 곳에 떠나 있는 그를 찾아 거기까지 가서 위로를 해주라는 목사님의 지극한 사랑 , 나는 목사님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며 경탄했다 . 1932 년 1 월 13 일 , 나는 대판을 향해 경성역을 떠났다 . 이날도 목사님께서는 털셔츠를 입혀 주시고 손수건을 포켓에 넣어주셨다 . 그리고는 멀리 경성역까지 나오셔서 굳은 악수로 떠나 보냈다 . 나는 차를 타고 또 배를 갈아타며 대판으로 가던 날부터 지금까지도 이 말을 늘 잊지 않고 있다. 

“ 대판으로 가라고 . 양옥이에게 가라고 .”

이 말이 바로 목사님과 나와의 교제를 나타내는 가장 정확한 말이요 , 목사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신임한다는 큰 표징이라고 생각된다 . 사람을 믿어도 정도가 있지 이렇게까지 믿을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할 때 나는 그 끝없는 사랑에 눈물을 금할 수가 없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음자리가 부러울 뿐이다.

 

 

 

호산나 소리 높은 상인천역 ( 上仁川驛 ) 의 밤

 

대판에서 두 달 동안을 무사히 지낸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집에 있게 되었다 . 그런데 해괴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 어떤 목사님이 주일날 수백 명의 신자 앞에서 설교를 하는 도중 , “ 용도의 부인이 ○○가 되어서 다른 남편을 얻어 가지고 도망을 갔답니다 ” 하더라는 것이었다 . 이것은 분명히 이 목사님의 높아가는 명성을 시기하고 자기가 미칠 수 없는 그 뜨거운 신앙에 배가 아파 온갖 말과 거짓소리를 하며 이 목사님을 욕하고 해치고 모략 중상하는 사람의 소행임을 의심치 않았다 . 그런데 이제는 미워하다 못해 용도 목사님의 부인에게까지 욕을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 나는 불시에 목사님이 보고 싶어지고 당장 가서 곁에 있고 싶었다 . 그래서 나는 곧 서울로 올라왔다 . 현저동에 갔더니 목사님 내외분은 다 인천에 계신다고 하였다 . 인천 내리교회에서 집회 인도 중이었다 . 나는 그 집회 마지막 날 인천에 도착했다.

목사님은 그날 밤까지 집회를 마치고 밤 9 시 차로 상인천 ( 지금의 동인천 ) 을 떠나시기로 되어 있었다 . 차 시간이 거진 다되었을 때 목사님 내외는 플랫 폼으로 들어가신다 . 교회의 직원 몇 사람도 같이 입장하고 나도 차를 타려고 같이 들어갔다 . 우리가 들어가는 동안에 정거장 구내에는 100 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 차가 출발하기 5 분쯤 남았을 때였다 . 이때 누구에게서 부터인지 찬송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 잠시 후 완전히 높아진 소리가 정거장을 떠나갈 듯 진동시켰다.

 

우리 다시 만날 볼 동안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서 인도하며

도와 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우리 다시 만나 볼 동안 

하나님이 함께 계셔 

간 데마다 보호하며 

양식 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드높은 찬송소리에 정거장 안은 큰 일이라도 일어난 듯 모든 사람의 시선이 바삐 움직였다 . 도대체 누구를 전송하는데 이렇게도 요란스러운가 해서 그 주인공을 찾기에 바쁜 것이었다 . 승객들 , 역부와 역장 , 순사까지도 드높은 찬송의 전송을 받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 얼마 후 그들은 드디어 말없이 한 곳을 응시하게 되었다 . 그 사람을 찾은 것이다 .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똑같은 시간에 , 동시에 찾아내었다 . 그 많은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여있는 곳을 찾은 것이다 . 찬송소리는 더욱 높아만 갔다 .

 

우리 다시 만나 볼 동안 

하나님이 함께 계셔 

위태한 것 면케 하고 

품어주시기를 바라네

 

나는 이때에 옛날 어느 길 위에서 불려졌던 호산나의 높은 외침을 연상하고 있었다 .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 찬송소리는 최고봉까지 올라갔다 .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있는 힘을 다하여 찬송 부르는 수백 개의 눈은 사라지는 기차를 향하여 안타까운 경의를 표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주강생 ( 主降生 ) 1932 년 4 월 15 일 오후 9 시 51 분 , 상인천역의 한 장면이었다 . 그 시대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 어렵던 때이었다.

 

 

 

떠나가는 나를 붙들고 축복

 

얼마 동안 경성에 있다가 나는 또 집으로 가게 되었다 . 이때에 나는 밤차를 타게 되었다 . 그런데 내가 역으로 가려고 할 때에 목사님은 나를 붙들고 축복기도를 해 주셨다.

“ 이 아들로 하여금 그 몸을 통째로 바쳐 주의 일을 하게하여 주옵소서 . 세상 줄에 얽매어 헛되이 허덕이지 말고 단순한 몸 , 가벼운 마음으로 마음껏 주의 일만 하다가 영원한 나라에 가서 비로소 안식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 아멘 .”

한마디로 말하면 기왕 독신으로 살아 왔으니 끝까지 독신으로 있어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께 바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현저동 오막살이의 작은 부흥회 

 

떠나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5 월도 절반이나 지난 때 목사님 댁에는 나 같은 사람이 서너 사람 더 있었다 . 밥벌이를 시켜달라는 사람과 밥탁을 대려 온 사람들이었다 . 더구나 이 때는 목사님의 궁핍이 전보다 훨씬 더 심했다 . 거기다 부인께서는 가끔 병으로 앓기까지 했다 . 이런 형편에서도 혹시 목사님이 집에 돌아오시는 때는 모여 있는 청년들의 신세를 생각하시며 매우 슬퍼하셨다 . 하루는 말없이 앉아 계시던 목사님이 조용히 찬송가를 꺼내셨다 .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부르 신다.

“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 …… .”

글썽거리던 눈물이 한 방을 , 두 방울 발을 타고 흘러내렸다 . 음성은 떨려오고 열은 높아만 갔다 . 마침내 비 오듯 눈물을 흘리시며 4 절까지 다 부르시더니 앉아있는 청년들을 향해 한 사람씩 각각 기도를 올리라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씩 모두 다 기도를 한 후 마지막으로 당신이 기도를 올리셨다. 

“ 이것들을 주여 돌아보아 주시옵소서 . 주께서 돌아보시지 않으면 이것들은 살 수 없는 자식들이로소이다 . 몸이 먹을 것이 없고 마음이 주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 자식들 …… .” 

그는 목메어 흐느껴 울었다.

“ 불쌍하고 약한 이 자식이 이들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고 붙들어 줄 수 있사오리까 . 주여 , 이들을 직접 맡으시고 주께서 이들의 심령에 직접 역사함으로 채워주시옵소서 . 아멘 .”

모인 모든 사람이 다 통곡하였다 . 몇 날 후에 모였던 청년들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다고 하면서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기뻐하며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산 넘어 신촌을 가며

 

집에 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어느 날 새벽 일찍이 일어나신 목사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 신촌에 가시려는 데 같이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 우리는 바로 길을 나섰다 . 좋은 길을 두고 수풀을 헤치며 무악산을 넘어 길도 없는 바위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 좀 험하지만 가까운 길을 택한 것이다 . 슬슬 목사님의 입에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 아니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주시는 훈계요 , 경고요 , 부탁이었다 . 당시의 참담한 교회 형편과 신자와 교역자의 신앙 상태를 설명하시다가,

“ 변 선생에게도 기회가 있으면 한번 조용히 얘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오늘 마침 기회가 생겨서 말하는 것이외다 . 첫째 , 우리는 좀더 경건해야겠고 , 둘째 , 전체를 오로지 주께 바치는 생활이 있어야 하겠고 , 셋째 , 참된 사랑과 뜨거운 신앙 속에서 살아야겠어요 . 내가 많은 사람을 사귀고 또 많은 사람이 내 집을 드나들기도 하지만 내가 그들을 사귀는 것은 그들을 가까이 해서 덕을 보려거나 사업에 욕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지요 . 그저 마음 이 외롭고 배가 주려 찾아오는 그들이매 , 나는 눈물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것이외다 . 변 선생 , 나는 변 선생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지요 . 그러나 그것은 변 선생이 잘났거나 재주가 있다거나 앞으로 크게 될 희망이 있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 그저 내가 보기에는 외롭고 불쌍해 보이기에 나는 손을 마주 잡고 동거동락하기로 생각한 것이오 . 지금 변 선생을 가장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변 선생을 향해 부르짖는 것은 ‘ 우리는 좀더 경건하고 전체를 주께 바친 후 사랑과 믿음 안에서 살자 ’ 는 것이외다 . 나도 잘 먹고 잘 입고 몸이 편하면 좋은 줄은 아는 사람이오 . 그렇지만 오늘날 이 형편에서 차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런 생활을 못하는 것이오 . 내가 만일 집안이나 처자를 생각한다고 해서 몇 푼씩이라도 저축할 마음이 있었으면 벌써 한 돈 만원은 모았을 것이오 . 그러나 어느 책갈피에 돈 1 원이라도 넣어두고 서는 사람 앞에서 사랑을 말할 수가 없고 양심상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이외다 . 이제 변 선생께 부탁하는 바는 ‘ 우리는 좀더 경건하게 , 좀더 참되게 , 좀더 깨끗하게 잘아가자 ’ 는 말입니다 .”

말씀을 그치신 목사님께서는 내 손을 꼭 잡으셨다 .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선뜻 떠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말없이 있을 수도 없었다.

“ 우리는 무슨 사업 때문에 무슨 준비를 해야겠다거나 또는 무슨 자선사업을 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해서는 안됩니다. 옛날 프란시스가 빈 지갑 속에서 돈을 꺼낸 이적을 나는 확신하고 있어요. 꼭 굶어 죽게 된 사람에게 정말 그 사람을 살리고 싶은 뜨겁고 참된 사랑으 로 준다면 물 한잔이 밥 몇 그릇보다도 그 사람에게 더 큰 힘을 줄 것을 나는 확실히 믿어요 . 꼭 주려고 하는 지극한 사랑으로 프란시스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없던 돈을 주님이 있게 하셔서 프란시스의 손이 그 돈을 들고 나가 쓰게 된 것이에요.” 

그는 자기 손을 지갑에 넣었다가 돈을 꺼내는 시늉을 하면서 말을 하였다. 이날이 길을 걸었던 기억은 나의 일생에 크나 큰 , 아니 가장 중대한 의의를 갖게 하는 일이었다.

이날의 일을 나는 열 번 , 백 번의 부흥 설교를 들은 것보다도 더 귀하게 생각하며 지금도 눈앞에 보는 듯 생생하고 내 귀에 그 음성이 쟁쟁히 들리는 듯하다.

 

 

 

기도 , 오직 기도

 

그 후에도 나는 가끔 목사님과 함께 시내를 다니곤 했다 . 무척 무더운 어느 여름날 , 길을 나서시며 말하셨다 .

“ 자 , 우리 오늘은 산으로 한번 걸어볼까 ? 형무소 북쪽에 있는 현저동 높은 고개를 넘어 신영리로 가자고.”

인왕산으로 올라가시며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 옛날 호빈 ( 浩彬 ), 환신 ( 桓信 ) 과 셋이서 자취하던 집과 밤이면 나와서 함께 기도하던 장소들을 설명하시면서 배화학교 뒷산을 넘어 자하문 고개를 향하고 있었다 . 아래에서 볼 때는 그리 험한 것 같지 않더니 정작 꼭대기를 타고 올라가니 높은 봉 , 깊은 골이 하나같이 모두 가파르고 험하였다 . 목사님은 빠른 걸음걸이로 거침없이 바위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 놓치지 않으려고 뛰다시피 따라가는 나는 죽을 힘을 다해 걷고 있었다 . 그러나 숨이 가빠오고 땀은 비오듯 쏟아졌다 . 거의 창의문에 다 와서는 고맙게도 큰 담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할 수 없이 우리는 평지로 내려 올 수 있었다.

아래로 좀 내려오니 큰 바위가 하나 보였다 . 앞서 가시던 목사님이 가볍게 바위 위에 뛰어 오른다 . 나도 따라 올라갔다 . 겨우겨우 기어서 그 바위 위에 올라가자마자 , 땀을 씻으면서 나는 “ 목사님 , 왜 그렇게 빨리 걷는 거예요 ?” 하고 따지려고 했는데 목사님은 이미 바위 위에 납작 엎드려 계시지 않는가 . 그 내려쪼이는 뜨거운 햇빛과 불같이 달아오른 바위에도 아랑곳 없이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다 . 엎드린 목사님은 숨이 차올라 , 잔등이 들썩거렸다 . 땀이 흘러 옷은 흠뻑 젖어 둥에 착 달라 붙었다 .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은 한 방울 , 두 방울 바위를 적시고 있었다 .

나는 한동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다가 한쪽에 엎드렸다. 그러나 불덩이같이 활짝 달아오른 바위 위에 얼굴을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 나는 곧 일어서고 말았다 . 목사님 곁에 서있으면서 목사님이 일어나시 기를 기다렸다 . 곧 일어나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행여나 하고 기다리던 나는 한없이 서있어야만 했다 . 목사님은 곁에 있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엎드려 소근소근 쉬지 않고 기도를 올리시는 것이었다 . 기다리다 못해 혼자 갈까 하는 생각이 날 지경이었다 . 그러나 이 깊은 산중에 들어 좀처럼 나갈 길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기다리게 되었다.

뜨거운 불 같은 햇볕 아래서 두어 시간을 기다린 나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목사님의 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볼 따름이었다 . 마침내 목사님이 허리를 펴시며 일어나신다 . 얼굴과 머리는 땀에 젖어 헝클어져 있었고 가슴과 다리는 물론 옷도 땀에 푹 젖어 있었다 . 큰 길에 나서서 목사님과 헤어져 신영 리를 가지 않고 다시 시내로 발길을 돌렸다 . 목사님이 사랑하시고 항상 잊지 못하시는 김광우 씨 댁을 찾아 덕적도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 사랑 안에 굳건히 서서

 

집안 형편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여 뒤숭숭한 데다가 , 항상 가슴에 뭉쳐있던 학문욕이 발동하여 드디어 1932 년 가을에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나고야 ( 名古屋 ) 로 떠났다 . 얼마 동안 나고야에 있으면서 나는 이상한 일을 알게 되었다 . 부근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 종교를 박해하거나 신앙자를 구타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한국에서는 제법 성경책이나 끼고 예배당에 다니던 교역자의 자녀들까지도 모두 시치미를 뚝 떼고 ‘ 예수교란 뭔지 이름도 모른다 ’ 는 표정을 지었다 .

그러나 왠지 내 마음속은 ‘ 너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 ’ 하는 외침이 또렷하게 들려와 다른 사람처럼 숨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 그래서 자주 다니지는 못하더라도 누구나 내가 기독교인임을 알 정도로는 성경책을 끼고 다녔다 . 자연히 그런 행동을 하는 나에게 적지 않은 시비와 주목이 오고 갔다 .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하여 ‘ 까짓것 안 믿는 척하고 말까 ’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 이렇게 지내는 나에게 정말 큰 용기를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 그것은 내가 경모하는 용도 목사께서 편지를 보내주신 일이었다 . 편지래야 엽서 쪽에 몇 자 간단히 쓴 것에 불과하였지만 조그만 그 엽서 한 장은 나에게는 큰 힘과 용기를 북돋워준 것이었다.

이 편지를 받고 나서부터 나는 좀더 열심으로 예배당에 다녔다 . 매를 좀 맞는 일이 있어도 예배당에는 다니고 싶었다 . 용도 목사님의 신앙을 위한 그 애씀과 조선 교회를 위한 분투를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 무엇이 겁나서 예수 를 믿지 않는다고 하거나 믿지 않는 척할 수 있겠는가 . 혹자는 나의 이러한 신앙 상태를 어린 아이의 신앙이라고 우습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이런 경로를 통해서라도 참되고 확고한 신앙을 얻을 수 있다면 이런 지도자의 공로는 더할 수 없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고야에서의 1 년을 지내고 나서부터 신앙생활의 행복성 ( 幸福性 ) 과 신앙의 단맛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 것이 더없이 기뻤다 . 이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나의 모든 감사를 먼저 이용도 목사님께 드린다.

 

 

 

 

< 제 1 부 : 은애의 2 년 반 , 사모의 50 년 - 변종호 >

 

 

 

제 3 장

 

1933 년

 

 

주께 사로잡힌 몸 , 오직 주 뜻대로

 

이듬해 봄 나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을 하고 목사님도 현저동을 같이 떠나셨다 . 짐을 다 챙기고 차 시간을 기다리면서 나는 목사님께 물었다 . 

“ 목사님 차비는 준비되었습니까 ?”

“ 응 , 오늘 누가 좀 가져오겠다고 했는데 글쎄 아직 오지를 않는구먼 .” 

“ 그럼 다음 차로 가셔야겠네요 .”

“ 뭘 , 정거장에 나가서 기다리지 . 시간이 다되면 정거장으로 가져올 거야.”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정거장으로 나가시는 것이었다 . 곧 작별하고 학교를 향해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정말 생각할수록 목사님의 마음자리는 너무나 부러웠다 . 하나님을 믿는 그 마음도 그렇거니와 사람까지도 그렇게 든든히 믿는 그 복스러운 마음자리가 너무도 부럽고 그리웠다. 

마지막 편지

이렇게 헤어진 후 잠시 동안 소식이 끊겼다 . 목사님은 몸이 편찮으셔서 못 쓰시고 나는 나대로 공부에 쫓겨 편지 쓸 여가가 없었다 . 문안 편지라도 자주 드리는 게 도리인줄 잘 알면서도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 사실 그때는 아무 대책도 없이 고학생활에 뛰어 들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가끔 목사님의 안부를 잊어 버릴 때도 없지 않았다 . 그러던 차에 편지가 한 장 날아들었다 . 원산에서 목사님이 부치신 것이었다 .

이 편지를 쥐고 나는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 눈물이 나올 만큼 고맙기도 했다 . 궁금하던 차에 들은 소식이어서 만은 아니었다 . 그 글을 보면 목사님의 건강에 대해서 전혀 비관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본래 나는 별로 염려 하지 않았다 . 목사님의 병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7 〜 8 년 전에는 병에 시달려 사선을 헤매신 몸이 이제까지 몇 년 동안 그렇게도 초인간적인 활동을 계속하면서도 별 큰 탈이 없었던 것이다 . 그래서 다소 몸이 약해졌다 하더라도 그 병이 오래 가거나 큰 일이 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조용한 곳에서 잘 정양하시고 있다는 소식은 내 마음속의 옅은 불안까지도 걷어가고 은근한 안심을 자리잡게 하였다 . 이제는 정말 걱정 하지도 않게 된 것이다 .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 나를 그렇게도 안심시키던 그 편지가 바로 목사님이 이 세상에서 나에게 남기신 마지막 글이었다는 것을 …… .

 

 

 

병중의 배면 ( 拜面 ), 이것도 또 마지막

 

수많은 파란곡절을 넘어 겨우 한 학기를 마친 나는 재령 집을 다녀서 금강산엘 갔다 . 금강산에서 나오는 길에 ‘ 혹시 목사님이 아직도 원산에 계시지 않나 ’ 해서 원산에 들렸다 . 그런데 목사님은 아직 원산에 오시지는 않았고 지금 평양을 떠나 원산에 오시는 길에 삼방약수포에 계신다는 것이었다 . 그래서 나는 곧 서둘러 삼방으로 길을 떠났다.

삼방협역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10 시경 . 역에서 내려 인가가 보이지 않는 한적한 길을 한참 들어가니 오른쪽 언덕 아래에 초가집 너덧 채가 가지런히 시내를 등에 지고 놓여있었다 . 그런데 이 집들 중 맨 마지막 집 아랫방에 바로 목사님이 누워계신다는 것이었다 . 사립문을 들어서니 목사님 부인과 아들 영철 군이 반색을 하며 뛰어 나오고 목사님도 누워계시다가 힘들여 일어나 앉으셨다 . 가족들은 먼저 내가 무사함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셨다 . 그러나 나는 뜻밖에도 목사님의 병세가 경 ( 輕 ) 하지 않음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 목사님 얼굴빛은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몸은 극도로 쇠약했다 . 기침은 쉬지 않고 가슴을 쿵쿵 울리듯이 쏟아져 나왔다 . 벌써 나의 마음은 눈물로 적셔지고 있었다.

“ 그렇지 않아도 1 시 차로 원산을 가려던 참이었다오 .”

두 분이 꼭같이 말씀하셨다 . 점심때가 되었다 . 목사님은 국수를 드시고 우리는 차가워진 밥을 먹었다 . 1 시가 가까워오자 목사님은 옷을 입으셨다 . 그러나 1 시 차에도 그 다음 2 시 차에도 목사님 가족은 떠나지 못하고 나만 2 시 차로 먼저 떠났다 . 목사님에게서 10 원을 빌려간 어느 친구가 1 시 차를 탈 수 있게 갖다 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마침 목사님이 옷을 입고 앉아계셔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은 생각이 났다 . 그래서 여쭈었더니 허락해주셨다 . 그런데 그 사진도 이 땅에서의 마지막 사진이 되고 만 것이다.

마침내 내가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 방안을 한번 휘둘러 보았다 . 문득 목사님의 부인에게 시선이 멈췄다 . 한 동안 움직일 줄 모르던 나의 눈길이 다시 목사님의 얼굴에 멎었다 . 핏기 잃은 목사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 목사님의 양손은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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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나을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

나의 이 말에 목사님의 얼굴에 미소가 잠깐 스쳤다. 

“ 아 , 그럼요 . 염려 말아요 .”

나는 목사님의 병실을 나와 총총히 걸었다 . 같이 나서는 목사님 부인을 만류해서 앉혀드렸다 . 목사님의 곁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 그 대신 아들 영철군이 정거장까지 따라 나왔다 . 언덕을 올라서서 뒤를 돌아다 보았다 . 마루에 서있는 목사님 부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나는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 얼마를 더 걸으니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 언덕 뒤로 숨어 들어 가는 집을 다시 쳐다보았다 . 이제는 송 부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적막만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 어느덧 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 조용히 눈을 감았다 . 그리고 목사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 ‘ 목사님 , 분명히 나을 것을 믿습니다 . 하나님 , 우리 목사님을 꼭 낫게 해주세요 ’ 하며 걷다 보니 이미 역에 가까워 있었다.

 

 

 

작은 후회 그러나 영원한 후회

 

차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호주머니를 털어 돈 60 전을 영철 군에게 주었다 . 내가 갖고 있던 전부였다 . 이 돈이라도 내어놓으니 가슴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 사실 나는 이 돈을 내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 조금 전에 점심을 먹을 때부터 어쩐지 허둥지둥하는 기분이 들었다 . 우리는 식은 밥을 먹고 목사님은 국수를 잡수시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내 마음은 평온하지가 않았다 . 사실은 목사님 부인이 목사님과 귓속말을 주고받는 말을 언뜻 들었다 . “ 우리는 식은 밥을 먹지 …… ”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 나는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 선뜻 일어서서 “ 오늘 점심은 내가 사오지요 ” 하고 싶었다 .

그러나 사실은 너무 주제넘은 것 같아서 그대로 앉아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 목사님 부인이 국수를 시키러 나가려고 일어섰을 때도 따라 일어나 그 말을 하고 싶었다 . 그러나 역시 못했다 . 점심을 다 들고난 후에도 목사님이 잡수신 한 그릇 값이라도 내려 했지만 , 그것 역시 되지 않았다 . 사실 나에게도 돈이라고는 모두가 그 돈 60 전밖에 없었다 . 경성까지 가자면 못해도 560 전의 비상금은 있어야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 그래서 세 차례나 내어 놓을 듯하면서도 결국은 못 내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병든 목사님을 뒤에 두고 내 갈 길이 바쁘다고 총총히 물러 나오면서 생각하니 너무도 후회가 되었다 . 그렇게도 잘 잡수시는 국수 한 그 릇을 내 손으로 대접해 드리지 못한 그것이 못내 나의 가슴을 쓰리게 하고 있었다 . 마침내 섭섭함과 송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그 돈을 영철에게 주지 않고서는 그 땅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철이에게는 주었다 해도 내 가슴은 여전히 가시지 않을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 내 손으로 정성껏 국수 한 그릇도 사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러울 뿐이었다 . 그때의 심경이 이러했거늘 , 후에 이 작별이 바로 영 원한 이별임을 알았을 때의 마음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 국수 한 그릇 사드릴 기회나마 그때가 마지막이라니 ,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할 때면 내 마음은 온통 후회와 아쉬움에 휩싸여든다 . 가슴에 맺혀 있는 방울을 풀 일이 없고 아픈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진다 . 오직 가슴을 쥐어뜯고 머리를 깨치고 싶을 따름이다.

이에 더 통탄할 일은 또 하나의 후회가 겹쳐 있다는 사실이었다 . 내가 삼방에 도착했을 때 나에게는 캐비닛 원판 두 개가 있었다 . 물론 그 중에서 하나로는 목사님의 독사진을 찍었다 . 그런데 나머지 하나는 그대로 남겨 서울까지 가지고 온 것이었다 .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찍을 수 있었던 것을 찍지 못했던 후회였던 것이다 . 그때 남은 한판으로 목사님과 내가 둘이서 찍든가 , 그렇지 않으면 목사님 가족을 찍을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 그러나 나는 눈을 꼭 감고 하나를 찍지 않은 채로 돌아서고 말았다 . 물론 이유야 없지 않았다 . 금강산을 향하기 전에 우연히 학교엘 들렀다 . 그 때 8 월 초에 학교에서 열리는 음악강습회의 기념촬영을 한다기에 청탁 받고 약속을 했던 것이다 . 그렇더라도 금강산에서 단 돈 몇 원이라도 벌어 왔다면 서울에 가서 또 사기로 하고 있는 원판을 다 쓸 수 있었겠지만 사실은 손에 돈이 한 푼도 없는데다가 8 월 초는 다되었고 , 경성에 가면 당장 원판이 있어야 하고 …… , 생각 끝에 할 수 없이 원판 하나를 남겨 가지고 돌아선 것이다 . 물론 이유를 댄다면 없지야 않겠지만 그때가 목사님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고만 지금 , 그때의 그 일이 이렇게도 가슴을 아프게 하고 막심한 후회로 남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요.

이렇게 끝없는 후회와 함께 목사님을 보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다른 친구들의 사진은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찍으려고 힘썼다 . 그래서 내가 만일 보통 이상으로 지나치게 친절을 베풀며 사진을 찍는 일이 있다면 이는 그때 생긴 마음 속의 뿌리깊은 후회를 조금이라도 풀어 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는 가끔 엉뚱한 사람을 끌고 가서 국수를 사 먹인 적도 있었고 또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사진 찍어 주는 일도 더러 있었다. 이는 이렇게 해서라도 그때의 안타까움을 잠시나마 잊어보자는 노력이었을 게다 . 그러나 아무리 국수를 사주고 사진을 찍어주어도 가슴 속의 안타까움은 날로 더할 뿐이었다 . 그때 이 두 가지 일이 얼마나 큰 후회를 내 마음 속에 안겨주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 대수롭지도 않은 일들이 그렇게도 큰 후회로 변하는 것을 보고 나는 결심했다 . 될 수 있으면 아무리 작은 일에서라도 후일에 후회가 될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가련한 외아들 영철이

 

길지도 않은 방학 동안 기쁜 일도 겪고 슬픔과 모진 후회도 하고 고생도 겪고서야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 개학을 하고 공부를 계속한 지 며칠 되던 어느 날 , 우연히 거리를 걷던 나는 석교예배당 앞을 지나고 있었다 . 그런데 바로 예배당 뒤뜰에 여위고 초라하게 변한 영철이가 서있지 않는가.

“ 아니 , 영철아 , 네 꼴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니 ?”

소리를 지르며 나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 어느새 내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 그렇게도 충성된 주님의 종 , 삼천리를 울리고 웃기던 위인의 단 하나 있는 귀염둥이 영철이가 아무려면 저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목이 메이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그런데도 영철이에게 별로 묻지도 못하고 따뜻한 위로도 해주지 못한 채 나는 도망치듯 영철이와 헤어지고 말았다 . 이때의 뛰는 나의 마음은 혹시 길에서라도 다시 만날까봐 가슴이 몹시도 떨렸다 . 그리고 차마 영철이를 찾아볼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이때부터 목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못내 송구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 그래서 2 년 전 봄에 목사님이 써주신 글에다 목사님의 사진을 붙여 벽에다 걸어두었다 . 그리고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눈물과 한숨을 막을 길이 없었다 . 이럴 때면 조용히 기도를 드리곤 했다.

 

 

 

불길한 징조 , 10 월 2 일

 

9 월이 무더위 속에서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었다 . 그러나 귀찮고 소란스러운 학기시험은 하루하루 가까워오고 있었다 . 물론 공부가 모두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여섯 달 동안 배운 17 〜 18 과목을 한꺼번에 시험 치르는 게 역시 귀찮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 더구나 나에게는 엷은 공포가 뒤덮고 있었다 . 별로 건강치도 못한 몸이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하자니 책을 들여다 볼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더구나 책 한 권 사보기가 쉽지 않았다 . 많은 결석 때문에 필기조차도 거의 하지 못한 나에게 시험은 분명히 험한 고개 길 이요 , 공포의 대상이었다 . 학기시험은 10 월 중순부터나 시작되지만 9 월말만 되도 하나 둘씩 시험이 있었다.

10 월 2 일 , 이날은 영어독본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 새벽에 잠을 깬 나는 책을 두어 줄 들여다 보다가 조반을 지어 먹고서는 다시 책을 펴 들었다. 그런데 어디선지 세게 부는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 이상한 생각에 귀를 기울이며 책을 읽고 있었다 .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불이야 !”

황급히 뛰어나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 바로 내 방 처마에서 불길이 솟아나고 있지 않는가 . “ 불이야 !” 소리도 나오지 않고 손발을 놀릴 수도 없었다 . 넋이 나간 것이었나보다 . 높아지는 불길을 바라보며 갑자기 정신이 든 것처럼 지붕에 뛰어 올랐다 . 불길이 날름거리고 있었다 . 아무 생각도 없이 칼로 이엉을 끊으며 미친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 이때 차가운 물길이 나를 덮어 씌웠다 . 바로 앞 집 이원철 박사 댁에서 강력 펌프로 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불길이 물줄기 속에 힘없이 꺼져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 20 분쯤 지났을 때 불빛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여기 저기에 횐 연기만 물씬물씬 피어 오르고 있었다 . 퍼뜩 시험을 생각하며 나는 지붕에서 내려왔다 . 그러나 사람들은 다시 올라가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불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 가뜩이나 준비가 없는 데다 그나마도 시험을 치지 않으면 더 큰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은 조급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다시 올라가 지붕 위에서 50 분을 날려 버리고 내려왔다 .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불은 내가 피워둔 숯불에서 일어나 덧문을 태우고 처마를 거쳐 지붕을 태운 것이었다 . 방에 들어 섰을 때 옷은 땀과 물로 푹 젖어 있었고 힘은 쭉 빠져 버렸다 . 그러나 가슴은 아직도 콩이 튀듯 두근거렸다 . 이때 무언가가 내 눈에 번쩍 띄었다 . 바로 이용도 목사님의 사진이었다 . 금방 눈물이 나왔다.

‘ 목사님 , 이즈음 어떠하십니까 ?’

갑자기 끝없는 그리움이 조수처럼 밀려 들었다 . 왜 내가 전같이 목사님 곁에서 따뜻하게 지내지 못하고 혼자서 이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는 이런 변까지 당하게 되었나 . 갑자기 다시 찾은 목사님의 영상은 내 가슴 속을 밑 모를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 . 그리움의 눈물은 그냥 쏟아졌다.

‘ 목사님 , 나의 경모 ( 敬慕 ) 하는 목사님 .’

그렇게도 나를 이해해주시고 사랑해주시던 목사님이 아니었던가 . 언제까지라도 나는 결코 목사님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 결단코 . 그러나 내 마음 속은 반석같이 굳은 결심으로 채워져 있었다 . 내가 이 길을 걷는 것은 크게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겨울 , 나고야에 있었을 때 나는 공부를 많이 해서 용도 목사님의 유력한 조력자가 되어 보리라 결심한 적이 있었다 . 그래서 그의 사업을 좀 더 힘 있게 도와 드리고 그의 생활을 좀더 완전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 그래서 될 수만 있으면 공부는 좀 더 하자 .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일을 위해서라도 , 그리고서는 아주 목사님을 따라 나서자 . 이것이 나의 소원이요 , 나의 기도였다 . 이렇게 시작한 공부이기에 웬만한 고난이나 어려움은 큰 문제로 삼지도 않고 이겨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날 아침에 그런 일을 당했을 때는 마치 그 동안에 참아왔던 눈물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지는 것 같았다 . 이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목사님께 뛰어가 따라다니고만 싶어졌다.

시계를 보니 첫째 시간이 거의 다되었다 . 어쨌든 학교까지 가보기라도 하려고 일어섰다 . 학교에 도착했을 때 시험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 그날 영어 독본 시험을 어떻게 치렀는지 모르겠다 . 그러나 이날 종일 내 가슴은 두근거리기만 했고 밤중에도 목사님의 안부를 생각하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도 이렇게 보내고 말았다.

 

 

 

아득한 소식 , 한 많은 10 월 4 일

 

10 월 3 일의 가슴 두근거리던 밤을 지내고 여느 때처럼 4 일 아침 해도 동쪽에서 솟아올랐다 . 밥을 끓여먹고 미처 세수할 겨를 없이 학교로 갔다 . 그러나 그날도 나는 여전히 넋잃은 사람이었다 . 강의실에 책을 둔 내 발길이 사무실로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 마치 무엇에 이끌리는 것처럼 …… . 어지럽게 쌓여있는 편지를 뒤적거리던 나는 얼핏 내 이름을 보았다 . 원산에서 부쳤고 2 전 우표가 붙어 있었다 . 거기에다 봉해지지도 않은 채로 있었다 .

‘ 아마 무슨 광고나 선전문이겠지 ’ 라고 생각하며 나머지 편지들을 모두 들춰보았다 . 그러나 다른 편지는 없었다 . 그 편지를 들고 사무실을 나오려던 발걸음이 문득 멎어졌다 . 별로 대수롭지 않은 편지라 생각하고 뜯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 그런데 무슨 생각에선지 곧 봉투를 젖혔다 . 반지에 등사된 종이가 한 장이 나왔다 . 글씨도 얼른 알아보기 힘들었다 . 그러나 몇 자를 유심히 읽어 내려가던 나는 숨이 멎어지는 것 같았다 . 얼굴에 확 더운 피가 올라오는 것이었다.

 

삼가 아룁니다.

이용도 목사께서 오랜 병환으로 신음 중 불행하게도 오늘 오후 5 시에 세상을 떠나셨나이다 . 이에 부고를 드리옵니다 .

추신 . 10 월 4 일 오후 3 시에 영결식을 거행하기로 정하여 덧붙여 알리나이다.

 

1933 년 10 월 2 일

 

 

謹訃

 

李龍道牧師 以宿患 呻吟中 不幸 當日 午後 五時 離世 玆以呈訃 

追而 十月四日 午後三時 永決式 擧行爲定 玆以 添告

 

一九三三年 十月 二日

 

 

가슴은 터질 듯 숨이 막혀 올랐다 .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 그러나 내 눈이 편지에서 떨어지는 순간 고개를 든 내 입에서는 “ 허 -” 하는 찬 웃음만 나왔을 뿐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시계는 8 시 50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조금만 일찍 받았던들 8 시 15 분 차를 탔었을 것을 …… . 그랬으면 장례식에라도 참석할 수 있었을 텐데 . 도대체 내 마음은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할 수도 없었다 .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도 . 지금 청량리로 간다면 탈 수 있을까 ? 경성역에서 청량리까지 가는데 기차는 30 분 이상 걸린다 . 이제라도 당장 청량리로 가면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러나 시계는 벌써 9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 나는 곧 학교차 운전 수를 찾았다 . 15 분 동안에 청량리까지 갈수 있느냐는 물음에 표정 없는 운전수의 말은 단호했다.

“ 어렵습니다 . 물론 사람도 다니지 않는 큰 길이라면 최대속력으로 혹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러나 큰 길이라도 십자거리에서 마다 마음대로 갈 수 없으니 15 분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 

그때 나는 다시 다그쳐 물었다.

“ 그러면 지금 출발해서 창동역까지 가서라도 그 차를 탈 수 없을까요 ?” 

“ 그렇게 하면 시간에는 댈지도 모르죠 . 그렇지만 거기까지 대절이라면 20 원은 내야할 걸요 ” 하였다 .

“ 그래요 ? 그럼 바로 떠납시다 . 20 원 낼테니 .”

그랬더니 운전수의 대답은 너무나도 엉뚱했다 . 곧 시내에서 모셔올 손님이 있어서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에야 비로소 나는 깨어난 듯 정신이 들었다 . 아무래도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몽롱한 나를 깨운 것이었다 . 문득 알 수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 아니 이런 큰 일에 전보 한 장도 보내지 않았단 말인가 ? 그리고 의아스런 내 눈은 다시 등사된 글자 위를 더듬고 있었다 . 틀림없는 이 형 ( 李兄 ) 의 부고였다 . 전보 한 장 보내지 않았다는 섭섭함은 순간 노여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 마치 내가 모르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발걸음은 강의실 문을 들어서 있었다 . 홧김에 들어온 것이었으리라 . 만가지 온갖 생각과 흥분을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 그러나 눈앞에 교수가 왔다 갔다 하는 것만 짐작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나는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 당장 일어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늦게 들어온 주제에 금방 다시 일어서서 나갈 수도 없었다 . 그냥 얼굴을 파묻은 채로 그 시간을 보냈다 . 씩씩거리고 있는 나에게 마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주섬주섬 책을 챙긴 나는 교실을 나와 사무실로 갔다 . 기차 할인권을 한 장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 길을 걷는 동안 나는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 저녁 차에라도 갈까 . 까짓 돈이나 10 원 보내고 말까 . 장례식까지 끝난 다음에 가면 뭘 한단 말인가 . 정말 돈이나 좀 보내고 말까 보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한편 돈이나 보내면 또 뭘 하나 당장 내일이라도 가서 무덤에라도 찾아가 실컷 울기라도 하고 싶었다 . 방바닥에 누워서 목사님이 써주셨던 글과 얼굴을 바라보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던 나는 문득 일어났다.

그리고는 시내로 나갔다 . 양옥이랑 영철이는 어떤지 , 발걸음이 무척 빨라졌다 . 영철이가 있던 집을 찾아갔다 . 그러나 1 주일 전에 집에 갔다지 않는가 . 곧 여자신학교를 찾아갔다 . 양옥이도 없었다 . 그저께 출발하는 차로 원산에 갔다는 것이다 . 갑자기 소외감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미리 알려 주고 또 저희들은 저희들끼리 내빼면서 나한테는 말 한 마디 알려 주지도 않고 …… . 안타까움과 분노의 소용돌이는 마침내 미움으로 나타났다.

 

한참 후 흥분이 어지간히 가라 않았을 때 다시 아까 생각으로 되돌아 갔다. 원산에 갈까 , 말까 ? 차는 오후 5 시 20 분 경성을 떠나 밤 11 시에 원산에 도착하는 특급열차가 하나 있을 뿐이다 . 장례가 3 시인데 밤 11 시에 도착할 것을 생각하면 금새 가기가 싫어졌다 . 그러나 생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가슴을 온통 뒤엎고 있었다 . 정말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안타까움만 더해졌다 . 온종일 정신 빠진 사람처럼 거리를 헤매는 내 머리에는 이 두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갈까 , 말까 ?’ 그러나 시간은 안타까운 마음을 곁눈질 한번 해보지 않고 정확히 흘러가고만 있었다.

오후 5 시 . 마음은 끝없이 다투고 있었지만 그래도 발걸음은 경성역을 향해 종로를 걷고 있었다 . 걷고 걸어서 경성우편국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거리를 향한 커다란 시계가 5 시 5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이젠 정말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 가슴이 바짝 조여 들었다 . 가야 하느냐 , 가지 않아야 하느냐 ? 좌우 간 지금은 정해야 한다 . 바로 그때 시계바늘이 크게 한걸음을 내딛는다 .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 전차가 온다 . 가려면 지금 타야 한다 . 그렇더라도 시간에 미칠지 , 늦을지 모른다 . ‘ 자 어떻게 하느냐 ?’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입술은 바짝 마른다 . 그런데 나는 이미 전차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 타고 가면서 생각해 보자 . 전차를 탄 때가 5 시 7 분이었다 . 이상하 게도 가슴은 더욱 고동을 치며 뛴다 . 가슴속은 허공을 오르내리는 것처럼 너울거렸다.

전차가 멎었다 . 경성역전에 닿았을 때가 5 시 19 분 . 나는 뛰었다 . 아직 가는 건지 , 가지 않는 건지 결정을 못했다 . 그런데도 막 뛰었다 . 표 파는 데까지 왔다 . 할인권과 돈을 들여 밀었다 . 할인권에다 왕복이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렸다 . 표 파는 아가씨도 어쩔 줄 모르고 몹시 서둘렀다 . 표를 받아 들었을 때 , 벌써 발차를 알리는 벨 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 막 닫히려는 개찰구로 뛰어들었을 때 , “ 안돼 , 안돼 ” 하던 역원은 표를 돌려주며 빨리 뛰라고 재촉하였다 . 뛰어가는 내 귀에 “ 어서 , 어서 ”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벨은 쉬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 . 내 눈에 시커먼 연기를 푹푹 토하고 있는 기차의 모습이 들어왔다 . 나는 그 기차만 보면서 뛰고 있었다 . 개찰구에서 회령행 기차를 타는 데는 유달리도 멀었다 .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 정신은 아찔해 지고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 그저 뛰었다 . 거의 가까이 갔을 때 지금까지 기적을 울리며 나를 기다리던 기차가 숨을 내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 나는 손잡이를 붙잡고 겨우 , 정말 겨우 발을 올려 놓았다 . 오르고 보니 역원 몇 사람이 내 등을 붙들고 있었다 . 차에 올라선 자신을 발견하자 곧 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 땀은 옷을 흥건하게 적셨다 . 끊어질 듯한 누더기 같은 숨이 헐떡거리며 목구멍을 넘나들고 있었다 . 그래도 차는 움직이고 있었다.

차츰 역 구내를 벗어난 기차는 양 쪽의 집들을 하나 둘 뒤쪽으로 밀어내며 나가고 있었다 . 아득한 혼미 속을 헤매던 눈에 서울거리가 들어왔다 . 다시는 못 볼 마지막 길 같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 나는 이제 죽는다 . 다시는 여기에 올 수 없다 . 이렇게 무리한 몸뚱이 , 아마 무덤에서 기절할거야 . 그리고 , 그리고는 피를 토하고 나는 죽을 거야 . 나는 여기 경성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 . 마음의 방황은 끝이 없었다 . 온 몸에서 식은 땀이 또 한 번 쑥쑥 쏟아졌다 .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졌다 .

차는 한강을 끼고 서울을 안고 돈다 . 서빙고 , 왕십리 , 청량리 …… . 여기가 경성에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마지막 역이지 . 서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하염없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렀다 . 겨우 차에 매달리자마자 곧 주저 앉은 나는 일어서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일어설 힘도 없었다 . 그래서 그대로 주저 않은 채로 몇 정거장인가를 지났다 . 이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 겨우 일어서서 차 안으로 들어갔다 . 차는 그냥 간다 . 우주는 컴컴해오는데 …… . 찻간에 들어가서도 기운이 없어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 얼마 동안 쓰러져 있다가 고개를 들었을 땐 동편 하늘이 훤해왔다 . 아마 달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 가만히 날짜를 꼽아보다가 그만두었다 . 8 월 15 일 , 바로 추석이다 . 물끄러미 동편을 향해 열린 내 눈에 한쪽 뺨을 살짝 내어 놓은 달이 보였다 . 그때 기차가 긴 기적을 울리며 어스름한 달빛 속을 달려갔다 . 기차는 월정리역을 지나고 있었다 .

그 달 , 그 정거장을 눈으로 보며 애타는 듯한 긴 기적소리를 들었을 때 알지 못하는 크고도 야릇한 느낌이 나를 휘감았다 . 그 순간의 이상한 기분은 그 후에도 늘 잊혀지지 않고 돌이켜 보아 지곤 하였다 . 기차는 월정리를 지나 쉬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 . 달을 응시하던 내 눈은 그 달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 눈에서 주룩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 끝없이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 곁에 앉은 사람들의 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떠나지 않았다 . 그리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 그러나 비오듯 흐르는 눈물을 어찌 막을 수 있으리오.

기차가 삼방협역을 들어섰다 . 아 , 이 정거장 , 저 안쪽에 있는 동네 , 동네 곁의 그 집 , 그리고 그 방 , 그 자리 . 마침내 나는 목을 놓아 울고 말았다 . 천만다행으로 마침 옆에 앉은 남녀가 축음기를 틀어놓고 있어서 승객들은 모두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큰 소리로 한참을 울었다 . 운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이 한 조각씩 부스러져 나가고 나는 죽음을 향해 느리게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 실컷 울었다 . 얼굴 꺼풀이 버석버석해지고 목이 아파왔다 . 사지는 부들부들 떨리고 온몸은 깊은 물속에 푹 가라앉는 기분이 었다 . 나는 엎드린 채였다 .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니고 자지도 않고 그렇다고 잠을 아주 안 자는 것도 아니었다 . 석왕사를 지났다 . 안변 , 갈마 , 배와역을 지나 어스름한 달빛 속을 달려갔다 . 벌써 원산 시가지가 멀리 바라보였다 . 기차는 긴 기적을 토하며 달려 들어갔다 . 불현듯 목사님 모습이 떠올랐다 . 나는 왼편 통로에 매달렸다 . 그리고 산제동 , 광석동 쪽을 뒤꿈치를 들며 바라보았다 . 마치 이용도 목사님이 문을 열고 서서 차 타고 오는 나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차가 멎었다 . “ 겐잔 ( 元山 ), 겐잔 ” 하는 스피커의 목소리를 들으며 차에서 내렸다 . 밤이 늦어 버스도 없었다 . 할 수 없이 전에 한번 걸었던 기억을 되 살리는 수밖에 없었다 . 발걸음을 광석동으로 돌리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 ‘ 그까짓 것 , 집에 들어가서는 죽어도 울지 않을 테야 . 한바탕 실컷 나무라고 내일 새벽 차로 돌아 갈 테야 .’ 걸음이 빨라졌다 .

 마침내 광석동 막바지 목사님이 계시는 집이 보였다 . 대문을 들어서며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하였다 . 울지 말자 . 나는 말없이 마루에 올라섰다 . 그리고 역시 말없이 문을 그냥 열었다 .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

7 〜 8 명이 앉아있는 한복판에 바로 이용도 목사님이 누워 계시지 않은가 . 바로 옆에 같이 누워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 3 년 전에 헤어졌던 이호빈 목사였다 . “ 아이구 , 변 선생 .” 그의 큰 손이 덥석 내 손을 쥐었다 . 그러더니 금방 나의 눈길을 눈치챈 듯 , 누워 있는 이용도 목사님에게 시선을 돌렸다 . “ 아니야 , 용도 목사가 아니야 . 형님 용채 씨야 .” 꿈결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아득했다 . 정신은 다시 아찔해지고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 그리고는 울었다 . 통곡했다 .

얼마가 지났는지 모른다 . 꽤 울었던 것 같다 . 모여 있는 사람들과 목사님 부모님께서 말리며 붙잡고 있는 것을 알았다 . 수건 하나가 푹 젖었다 . 목은 다 쉬었다 . 아마 내가 우는 동안에 “ 영철아 , 양옥아 , 그래 너희들만 그렇게 빠져 나왔단 말이냐 ” 하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 울음이 어지간히 수그러졌을 때 송 부인의 가느다란 음성이 들렸다.

“ 전보를 치려다가 그만 …… ” 하고 말을 잇지 못한다 . 

“ 전보를 해주자니까 …… .”

역시 끝을 맺지 못하는 어떤 부인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 학기시험 중 이기에 전보를 안 했다고 했다 . 얼마 후에는 이런 말도 들려 왔다 .

“ 이제야 사람 죽은 집 같구먼 . 울음 소리도 들리고 알려 주지 않았다는 원망 소리도 들리고 …… .”

아 , 이는 김영선 전도사의 음성이 아닌가 . 목사님과 걸음을 같이 하기 위해 남만주까지 가서 결사적으로 전도를 다니다가 몸에 병까지 얻었다는 …… . 그러면서도 목사님 곁을 떠날 수가 없어 이 먼 원산에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 후에야 안 일이지만 목사님의 별세는 주님께서 불러가신 것이라고 해서 울음 소리 한번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근처에 목사님의 친구가 많은데도 어느 한 사람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 무덤에 가보고 싶었다 . 그래서 졸랐더니 모두가 하나같이 반대하였다 . 특히 호빈 목사는 극구 반대하였다 . 

“ 무덤에 가서 아주 죽으려는 모양이군 .”

그러나 나는 막무가내였다 . 마침내 무덤에 가서는 절대 울지 않겠다는 맹세를 단단히 하고서 겨우 허락을 얻었다 . 집을 떠날 때가 밤 12 시 반 , 그러니까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1 시가 훨씬 지났을 것이다 . 고기비늘 같은 구름조각이 수없이 흐르는 추석의 달밤은 어스름하기만 하였다 . 산비탈은 어스름 속에 조용하였다 . 산비탈을 기어오르는 나의 코에 흙 냄새가 확 들어왔다 . 발걸음을 멈췄다 . 붉은 흙이 달빛에 잠긴 무덤이 있었다 . 희미한 달빛에 그 첫말의 글씨는 뚜렷하였다. 

‘ 이용도지묘 ( 李龍道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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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없이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 한참 후에 다시 말없이 일어선 나는 흙을 한줌 집어서 손수건에 쌌다 . 달빛이 조금 환해졌다 . 멀리 바다에는 작고 큰 불들이 무수히 널려 있었다 . 저 멀리 등대가 눈에 들어왔다 . 어디선지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윤선 ( 輪船 ) 의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

오 , 여기 , 바로 이 속에 우리 목사님이 묻혀 계시다니 …… , 울컥 솟아오르는 무엇인가에 목이 꽉 막혔다 . 그렇게 사랑해주시고 그렇게도 잊지 않고 알뜰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건만 털끝만치도 신세를 갚지 못한 이때에 이렇게도 야속하게 가시다니 …… . 손발이 저려왔다 . 나는 울 수도 없었다 . 너무 기가 막히면 눈물도 나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막상 무덤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리려 하였을 때 , 참았던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 비 오듯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산길을 내려왔다 .

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3 시였다 . 맥이 쭉 빠지고 온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 그렇지만 눕고 싶지는 않았다 . 더구나 새벽 6 시 차를 타야 한다는 생각은 누울 만한 마음을 모두 빼앗고 말았다 . 퍽 지난 후에야 좀 누웠다 . 목사님이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는 바로 그 자리에 .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 나왔다.

날이 밝도록 흐르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 날이 밝으니 비로소 송 부인이 눈에 띄었다 . 나는 얼른 외면했다 .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 어머님이 보일 때는 아예 이불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 그저 울고 또 울었다 . 얼마 후 나는 눈물을 닦으며 시험 때문에 6 시 차로 꼭 가야겠다고 말했더니 , 모두들 펄쩍 뛰었다 .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마음대로 상한데다 , 잠까지 자지 못한 몸으로 이제 가다가 무슨 큰 일을 당하려느냐고 극구 말렸다 . 아니 , 아예 말조차 꺼내지도 말라는 기세였다 . 거기에다 저녁 차에 가는 영철이와 양옥이를 꼭 데리고 함께 가라는 간곡한 부탁에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온종일 나는 목사님이 숨을 거두신 바로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

 

 

 

장례식 전후

 

눈물 속에서도 송 부인과 잠시 얘기해 보았다 . 운명 시부터 장례식까지 참여한 사람은 거기 남아있는 동지 몇 사람이 전부라고 했다 . 그 외에 다른 사람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 또 “ 조문이나 조전이 얼마나 왔느냐 ?” 고도 물었더니 , 양주삼 총리사님과 평양의 송창근 박사에게서 온 전보가 고작이라는 것이었다 . 나는 평양 송 박사의 조전에 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그의 조전은 짧았다 . 

“ 용도야 , 너는 가고 말았는가 .”

 

 

 

외로운 세 혼( 魂 )

 

우리 셋은 오후 3 시 차를 타게 되었다 . 7 〜 8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를 전송하러 역 구내에까지 들어왔다 . 출발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이어 기차가 요란한 기적을 내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영철이가 고개를 들며 밖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우리 둘도 얼굴을 돌리며 눈물을 지었다 . 순간 나는 큰 소리로 ‘ 이용도 목사 만세 ’ 를 부르고 싶었다 . 그러나 다음 순간 꾹 참고 그만두었다. 

나는 그때 일을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본다 . 어째서 이용도 목사 만세를 부르려고 했고 또 어째서 부르려던 만세를 그만두었는가 . 차는 달린다 . 날도 저 물어 갔다 . 저녁때가 된 것이다 . 도시락 세 개와 차에서 파는 물 세 잔을 샀다.

“ 하얀 찻잔 셋 , 상복 입은 우리 셋과 신통하게도 같게 보이는구먼 .” 

“ 에구 , 그런 말씀은 왜 또 …… ” 하며 양옥이가 눈을 감았다 .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 어느새 영철이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 혼자서 일어섰다 , 앉았다 하며 곤히 잠든 영철이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 기차는 그냥 달리기만 했다 . 어스름한 달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급기야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 9 시가 넘도록 졸며 흔들리고 있었다 . 벌써 용산을 지난 기차가 경성역을 향해 줄달음질치고 있었다 . 문득 어제 여기를 지나던 생각이 났다 . 정말 감개무량했다 . 역에 내렸을 때도 비는 여전히 퍼붓고 있었다 . 영철이를 양옥에게 맡기고 나는 2 시 차로 신촌을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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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하루 , 이 밤도 눈물로

 

숙사 ( 宿舍 ) 에 들어섰을 때는 밤 12 시가 거의 다되었다 . 맥이 다 풀려 자리에 눕기는 했으나 잠은 오지 않고 생각만 어지러웠다 . 설령 잠이 온다 해도 내일 시험칠 일을 생각한다면 잠을 자지 않아야 될 일이었다 . 그래서 일어나기는 했다 . 그러나 도무지 책을 볼 수가 없었다 . 그저 눈이 가서 머무르는 곳은 목사님의 사진이 붙어 있는 바로 그 벽이었다 . 쳐다보면 눈물이 나서 엎드렸다가도 다시 일어나면 또 눈이 가고 다시 눈물이 흘렀다 . 그날 밤을 이렇게 밝히고 말았다.

 아침에라도 책을 들여다 보려고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저 마음이 끌려가는 곳은 거기뿐이요 , 아무리 울지 않으려 해도 그저 눈물만 한없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 아무리 막으려고 애를 써도 별 수가 없는 것을 알게 되자 이러다가는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 할 수 없이 일어서서 그 사진을 벽에서 떼어 내렸다 . 최후의 수단으로 그 사진을 종이로 싸고 꽁꽁 묶어서 고리짝 속 가장 밑바닥에 넣어 버리고 말았다 . 그렇게 해 뒀더니 이번에는 자꾸 고리짝으로 눈이 가며 눈물이 흘렀다 . 한참 동안을 더 울고 고민하였다 . 얼마 지나갔을 때에야 겨우 울음을 그칠 수가 있었다 . 이러는 통에 책은 한 줄도 보지 못했다 . 겨우 밥을 지어먹고 학교로 갔다 . 물론 그날 시험을 어떻게 치렀는지도 모른다 . 그저 눈물 속에서 넘어간 시험이었다.

 

 

 

목사님이 가신 후

 

목사님을 보낸 후 눈물과 한숨으로 며칠을 보내는 동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픔과 후회가 날로 가슴 깊이 일어났다 . 그 많은 은혜와 신세를 조금도 갚지 못한 후회 , 좀더 오래 사시도록 힘써 보지 못한 뼈 아픈 자책감 . 내 가슴은 항상 찌르는 듯한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장례식에 조차도 참석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을 쥐어 뜯고 싶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 정말 기가 막히고 마음이 아팠다 . 허공을 향해 눈을 들고 앉은 나에게 목사님의 반쯤 쉰 듯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 이제는 정말 무엇을 해서 목사님에게 사죄와 위로를 드리고 또 목사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에게 어떤 위로나 유익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이때에 내 마음 속에 분명히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이 목사님이 각처에 보냈던 편지들을 모아서 서간집을 출판해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님 영전에 드리고 남아 있는 목자 잃은 양들에게 선물로 보내자 고 내 결심을 곧 그날부터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편지들을 모으기 위하여 짬짬이 시간을 내어서는 평양 , 안주 , 해주 등지로 쏘다녔다 . 교파를 가리지 않고 편지가 있을 만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 다녔다 . 그러나 이렇게 착수는 했으나 언제쯤 출판을 한다는 계획은 막연하였다 . 그저 슬금슬금 편지를 한 통 , 두 통 모으고 있었다 . 그러던 차에 34 년 봄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모 잡지에서 이 목사님을 격렬한 어조로 험구 , 악담을 퍼부어 모욕함이 있었으매 , 나는 이를 부드득 갈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내가 이 목사님의 신앙 내용을 신학적으로 잘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시요 , 나의 둘도 없는 은인이었다 . 그런데 그가 많은 사람 앞에서 이리저리 몰리고 매를 맞고 쓰 러지는 것을 볼 때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에 나는 이 목사님의 서간집 출판을 위해 있는 힘을 다 쓰기로 결심하고 일을 진행시켰다.

 

 

 

공부는 천천히 , 그러나 죽어도 이 일만은

 

짧은 봄방학 중에도 편지를 모으는 여행은 황해도 , 평안도로 계속되었다 . 4 월 9 일 아침에야 서울로 돌아 왔는데 그날이 바로 개학 날이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나는 학교는 제쳐놓고 모아온 편지를 늘어 놓고 정리하느라고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있었다 . 그리고 그날 밤 원산을 향해 또 떠났다 . 흔들리는 차 속에서 눈을 감으니 머리를 싸매고 공부에 열중하는 학우들의 모습이 눈에 나타났다 . 비 내리는 밤의 열차는 무거운 정적을 뚫고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 밤 11 시에 출발한 기차는 이튿날 아침에야 나를 원산역에 내려주었다 . 나는 곧 발걸음을 재촉해서 목사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 절하고 우노라니 붉은 흙 사이에 새롭게 돋아나는 새싹이 손바닥에 닿았다.

원산에 사흘을 머무르는 동안 구할 수 있는 편지는 모두 모아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 이때부터는 학교에도 빠지고 끼니도 건너가며 밤낮으로 편지와 씨름하며 살았다 . 학비를 내 손으로 마련해야 하는 내 처지로는 괴로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느 날은 학생 전체가 백운대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 . 나는 사진기와 필요한 도구 일체를 짊어지고 이리저리 따라 다녔다 . 왕복 70 〜 80 리를 걷고 하루 종일 사진을 찍노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시달리고서도 돌아와서는 곧 원고를 쓰기 시작하여 12 시가 넘도록 계속하였다 . 정말 이를 갈면서 썼다 . 나에게는 분초가 아깝기만 하였다 . 그러기에 그렇게도 법석대는 창경원 벚꽃구경이나 한강 뱃놀이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한번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원고를 쓰다가 늦어진 조반을 꾸역꾸역 퍼 넣고서 마신 물을 목에 넘기지도 못하고 신을 신느라고 허리를 구부리다가 물이 코로 흘러 내려 하루 종일 기분이 이상하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 원고의 본문은 거의 다 정리가 되었는데 서문을 아직 쓰지 못했다 . 사실은 그 짧은 서문 하나를 쓸 시간이 없어 못쓰고 있던 것이다 . 그러던 어느 날 밤 2 시 반에 평양역에 내린 후 역대합실 한구석에 앉아서 쓰기 시작했다 . 얼마가 지났는지 눈을 들어 바깥을 보니 아침 해가 올라와 있었다.

 

 

 

심우원 ( 心友園 ) 창립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과 구걸을 하며 창피함까지 참아가면서 모은 편지 100 여 통으로 만들어진 원고가 46 판 300 페이지 가량이 되었다 . 그러나 출판을 하려는 내 앞에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 원고 뭉치를 들고 별사람을 다 찾아 다니고 있는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출판에 힘을 빌려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 서점이나 인쇄소에서 발행을 거부당할 때는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 발행소 이름만 빌리자는 데도 곁눈을 흘기는 사람이 있었다 .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내가 발행소를 하나 창설해서 출판하리라는 결심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 며칠을 두고 기도하며 궁리한 끝에 발행소의 이름을 심우원 ( 心友園 ) 이라고 하기로 결정했다 . 이리함은 시무언 ( 是無言 ) 과 음 ( 音 ) 이 근사하고 또 그때의 나의 심정은 단 한 사람의 심우 ( 心友 ) 라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었다 .

 

 

 

드디어 서간집은 출간되었으나

 

원고를 모으는 데 발벗고 나서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김예진 형의 열성과 한성도서주식회사 김진호 선생의 절대 희생적 도와주심에 의해서 『 이용도 목사 서간집 제 1 권 』 이 1934 년 6 월 11 일에 드디어 출판되었다 . 책이 출판되자 , 나는 곧 기독교 관계 언론기관을 찾아갔다 . 책의 광고를 내기 위해서였다 . 그러나 그 모두 곳에서 거절 당하고 말았으니 그런 책은 광고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 그래서 나는 웬만한 책방은 다 찾아 다녔으나 그런 책은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평양에 갔더니 거기서도 꼭 같은 말을 하며 빈정거렸다 . 조롱과 멸시만 당했을 뿐이었다 .

 

 

 

결국 죄인 , 빚진 죄인

 

나는 책을 가지고 또 아는 사람을 찾아 다니며 한두 권씩이라도 팔아보기로 하였다 . 그러나 어느 한 사람 한 권도 사는 사람은 없고 아예 상대도 안 하려는 것이었다 . 그래서 결국은 많은 인쇄비를 갚지 못하는 채무자 , 말하자면 ‘ 빚진 죄인 ’ 이 되고 말았다 . 절대적 희생으로 출판을 맡아 주신 한성 도서회사의 김진호 선생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 정말 쓰러져 울다가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반년 동안의 결사적 노력과 출판 후의 절대적 타격으로 인해 몸의 병증세가 위중해지고 말았다 . 몸과 마음이 아울러 맥이 빠진 나는 6 월 하순 방학을 1주일 앞두고 병든 몸을 끌고 시골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소 , 멸시 그리고 또

 

집에 와서 얼마 동안 실컷 앓고 난 나는 전날 편지를 모으려 다녔던 곳을 차례차례 찾아나셨다 . 가는 곳마다 나를 기다리는 것은 조소와 멸시 그리고 냉대뿐이었다.

“ 책을 낼 바에는 웨슬리나 루터의 책을 낼 것이지 그 따위 덜된 책을 무엇이라고 썼느냐?”

“ 그렇게도 밥 먹고 할 짓이 없느냐 ?” “ 변종호란 자는 어떤 자식이냐 ?”

“ 그 학교에서는 그런 것도 붙여두나 ?” 

“ 참 별 것들이 다 있어 .”

들리는 소리가 그저 이런 것들이었다.

그 해 여름 , 나는 여기 저기 책을 들고 돌아다녔다 . 가는 곳마다 전에 잘 알던 교회 어른들을 만나보게 되었다 . 그런데 그 분들은 나를 만나서는 대뜸 모욕적 언사를 퍼붓는 것이었다 . 어떤 이가 멀찍이 오는 것을 보고 가노라면 얼른 딴 골목으로 슬쩍 피해 버리기도 했다 . 그러나 이런 일들쯤은 나에게 아무런 아픔도 설움도 아니었다 . 그런 일들이 도리어 내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이요 , 축복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

그렇지만 내 가슴을 아프고 쓰리게 하는 일은 인쇄비 미불에 따르는 죄송함과 심통 ( 心痛 ) 이었다 . 8 월 초에 나는 해주에 가 있었다 . 하루는 친구 몇 사람과 함께 용당포로 소풍을 나갔었다 . 종일 지내다가 어두워져서 숙소에 돌아오니 우표 두 장을 부친 편지 두 통과 전보가 와있었다 . 인쇄비 독촉 내용이었다 . 그 후 계속해서 독촉장이 날아왔을 때 내 마음은 무너지는 듯 했고 가슴은 눌리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 열광했던 나는 이제는 책귀 ( 冊鬼 ) 에게 눌리어서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내 세상에 와서 빈궁하게 살았으나 사회생활에 깊이 들어간 바 없었기 때문에 남의 빚을 져본 일이 없었는데 여기에 이르러 갚을 길 없는 빚을 지고 독촉을 자꾸 받게 되니 몸을 둘 데가 없었고 정신을 지탱할 수가 없어진 것이다 . 내가 미치지나 않는가 하여 나 스스로를 경계하며 감시하게 되니 이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가 없었다 . 정말 나는 죽거나 발광할 듯하기만 하였다 . 그래서 이 중압과 이 채찍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디로 훌쩍 떠나버리고 말 수밖에 없다는 궁지에 몰려들고 말았다 . 의식적으로 남의 돈을 축내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이 상태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으매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여기서 뛰쳐나가려는 본능적 행동으로 연결되어갔다 . 그래서 나는 공부고 , 체면이고 다 잊어버리고 그저 이 감옥에서 빠져나갈 생각만이 불일듯하여 견딜 수가 없어 멀리 없어질 결심이 굳게 섰다.

 

주와 고인 ( 故人 ) 위하여 

눈물 땀 쏟았건만 

조소 멸시뿐이요

죄인 명패 ( 命牌 ) 채우니 

내 혼 심히 괴롭고 

가슴 심히 아파서

용납 않는 이 땅을 

나는 떠나갑니다

 

가재바위 작은 길에서 나는 함께 가던 친구들과 작별하였다 . 좀 먼 데로 가겠다고 했더니 친구는 나를 위하여 기도를 하다가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다.

 

 

 

두만강 붉은 물결 바라보면서

 

2 학기가 개학되는 날인 9 월 2 일 저녁에 경성을 떠난 나는 봉천으로 신경으로 정처 없이 힘없는 발걸음을 내디뎌 유랑객이 되고 말았다 . 신경역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에게 구걸까지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경도선 ( 京圖線 ) 차 안에서 끝없는 벌판 저 멀리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외롭게 방황하는 혼이 되고 말았다 . 차 안에는 승경 ( 乘警 ), 군인 , 헌병 등이 찬 총검이 번쩍거릴 뿐이고 철도 연변에는 습격으로 부셔져 껍데기만 남은 기관차가 처참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용정촌에서는 한층 더 통분할 소식들이 나를 맞아 주었다 . 이용도 목사에게 호의를 갖거나 그 서간집을 읽는 자에게는 공개적으로 구박과 책망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 ‘ 도적의 무리 ’, ‘ 그 나쁜 책 ’ 이런 말이 교회 강단에서 자주 들려온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나는 도문에 이르렀다 . 두만강 하나만 건너면 고국의 그리운 땅을 밟을 수 있는 도문 . 거기를 옛날에는 회막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이때에는 도가 ( 圖佳 ) 철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 이수구까지는 이미 개통이 되어 있었으매 거기까지 온 기차 손님은 동경성 ( 東京城 ) 까지는 군용차로 연락하고 있었다 . 이리해서 북만주 철도에 이어지던 때였다 . 그래서 당시 동경성 영 고탑 부근은 돈 벌이가 꽤 좋았고 마적 경기도 썩 좋아 돈을 잡을 수도 있었고 흥청거리고 혼잡한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죽어지기도 좋은 것이었다. 

두만강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 ‘ 에라 , 그냥 가버리고 말까 ?’ 도문에서의 이틀 동안 나는 도문역과 두만강 사이를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다 . ‘ 갈까 , 말까 ?’ 발길이 강가에 와 닿았다 . 누런 흙탕물이 넘실 넘실 흐르고 있었다 . 바로 몇 발걸음 저편에는 우리 산과 우리 집이 그림 같이 보였다 . 나는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 흑노망향가 ( 黑奴望鄕歌 ) 의 구슬 픈 곡조를.

 

이 강을 건너서 빛 고운 저 산 너머 

내 고향 거기에 있으니 나 가고 싶어라 

차디찬 이 땅을 나는 어이 헤매나

흐르는 내 눈물 두만강 물결을 덥히네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 나는 왜 저기를 가지 못하는가 . 왜 거기를 가고 싶어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 내 눈에서 다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 당장 뛰어서 이 강을 건너고만 싶어졌다 . 그러나 이 작은 몸뚱이 하나를 용납하지 않는 곳이라면 아무리 곱고 아름다운 산천이라 해도 거기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 분명히 나의 산천이 아니다 . 나는 일어섰다 . 저 멀리 펄럭거리는 도문역의 깃발을 향해서 걸었다 . 그러면서 노래를 불렀다 . 헤매는 나그네들이 불렀던 유랑가 ( 流浪歌 ) 의 처량한 노래를 .

 

가자 가자 어서 가 네 걸음 빨리 걸어 

끝 없는 넓은 벌판 죽기 좋은 곳으로 

눈물 한숨 거두고 어서 거기로 가자 

용납 않는 내 고국 잊고 거기로 가자

 

큰 길로 나서서 걷는 동안도 흐르는 눈물은 그칠 길이 없었다 . 정거장 벤치에 무거운 몸을 맡겼다 . 기차표를 사노라고 밀고 제치고 하는 아우성이 시끄럽기만 하였다 . 영고탑으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 나도 표를 살까 ? 힘없이 내려 감은 내 눈에는 강 건너 고운 산천이 어른거렸다 . 순간 가슴 속으로 날카롭게 뛰어드는 생각이 있었다.

‘ 내가 멀리 가서 죽어진다면 어찌될까 ? 그렇게 되고 만다면 나는 영원히 자가 되고 이 목사님은 ○○ 자라는 이름을 영원히 벗지 못할 것이 아니냐 .’ 눈을 번쩍 떴다 . 그리고 일어섰다 .

 

 

 

가자 고국으로 가자 , 죽더라도 거기 가서 죽자

 

드디어 서울을 향해 가는 기차에 내 몸을 실었다 . 두만강을 건너는 나의 눈 앞에는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허덕허덕 걸어오는 탕자의 초라한 모습이 나타났다 . 남양 ( 南陽 ) 발 기차가 영무 ( 靈武 ) 에 도착했을 때 나는 거기서 황급히 뛰어 내렸다 . 이 곳은 몇 년 전 목사님이 말로 할 수 없는 땀과 눈물을 뿌리시고 큰 역사가 일어났던 곳이었다 . 곧장 예배당을 찾아가 예배당 사진을 한 장 찍고서는 곧 바로 경성으로 향했다 . 청량리역에 내린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 운무 ( 雲霧 ) 에 잠긴 싸늘한 가을의 새벽거리는 초라한 나를 향해 냉소와 멸시의 시선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다시 학교로

 

내가 경성에 다시 온 것은 9 월말경이였다 . 학교가 개학한 지 이미 20 여 일이 지난 후였다 . 혹시 제적이나 되지 않았을까 ? 제적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은 어두운 구름에 덮여 있었으니 등록금을 마련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 돈 한푼 없이 이 땅으로 돌아온 나를 나는 후회하고 원망하였다 . 이런 처지에 있을 때 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 평소 나에게 관심을 두고 유심히 주목해 오던 한 친구가 등록금을 내놓으면서 어서 등록하고 공부 나 부지런히 하라는 것이었다 . 그는 내가 돌아온 것을 마치 죽은 자가 살아온 듯이 기뻐했다 . 나는 눈물로 친구의 뜻을 받아 곧 등록을 마치었다 . 

학교에 갔을 때 지난 학기에 나의 결석 일수가 54 일이나 된 것을 알았다 . 어떤 이유로서라도 1 년간 결석 일수가 60 일을 넘으면 성적이나 사정 여하를 막론하고 낙제가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지켜지는 교칙이었다 . 겁이 덜컥 났다 . 만일 앞으로 반년 동안에 감기에라도 걸려 1 주간만 결석해도 별 수 없이 낙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이번 1 년은 쉬고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그러나 기도하며 결심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용기를 내어 공부에 착수하였다 . 어느덧 몇 달이 순간인 듯 흘러가 학기말 시험을 치를 때가 왔다 . 책이라곤 한 권도 사지 못하고 필기조차 도무지 하지 못한 나로서는 보통 걱정이 아니었다 . 그러나 나는 그 고개도 무사히 넘기고 겨울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학년말 시험에는 꽤 좋은 성적으로 진급하게 되어 이 해는 이렇게 지나가게 되었다.

 

 

 

또 한 해를 벌판에서

 

낙제를 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머리 속에는 1 년 후에 졸업장을 받는 장면이 꿈처럼 떠올랐다 . 그러나 이 일은 정말 꿈속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또 1 년을 휴학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기한 내에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해서 제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 이렇게 휴학하게 된 때에 어떤 위중한 환자가 나의 간호를 간원하는 바가 있어 휴학기 동안 나는 그를 간호하기로 하였다.

그 환자와 지내는 동안에 한가한 시간을 좀 얻게 되니 나의 생각은 오직 한 줄기 , 목사님을 향해 달음질칠 뿐이었다 .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한 옛날의 기억들이 하나하나 되살아 났다 . 눈에 띄는 모든 것 , 귀에 들리는 천만 가지 소리가 다 이 목사님의 그 얼굴을 내 눈앞에 나타나게 할 뿐이었다.

설교를 잘하는 사람을 볼 때는 문득 목사님의 얼굴이 나타나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였다 . 설교를 변변히 못하는 사람을 보아도 ‘ 이 자리에 용도 목사님이 계신다면 얼마나 잘 하실까 ’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 

길을 가다가 불쌍한 거지에게 돈을 주는 사람을 볼 때는 혹시나 이 목사님이 아닌가 하여 한번 더 쳐다보고 초라한 구걸자의 앞을 외면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볼 때도 목사님 같으면 지갑을 다 털어줄 텐데 하는 생각에 항상 마음이 울렁거렸다 . 친구를 만나도 , 기차를 타도 , 해가 뜨거나 지는 것을 보아도 , 그저 목사님 생각이었다 . 어두워올 때도 , 환하게 달이 떠올라 올 때도 …… .

나중에는 중절모를 쓴 사람만 보아도 , 횐 고무신 신은 사람만 보아도 ‘ 그 사람이 목사님일지 몰라 ’ 하는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리며 유심히 그 사람을 쳐다보게 되는 것이었다 . 하여튼 나의 이때의 심경은 입류 ( 入流 ) 상태가 아니면 정신이상이었고 , 그것도 아니라면 연모병 ( 戀慕病 ) 제 3 기를 훨씬 지난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다시 입학 , 또 다른 소원

 

이듬해 4 월에 나는 어렵게도 공부를 다시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 다시 학교에 발을 딛게 되어 기쁜 나의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목사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그래서 어찌하면 졸업하기 전에 목사님을 기념하는 사업을 한가지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 그러나 그것은 한낱 좁은 가슴 속에 잠시 일어났다가 없어질 덧없는 꿈에 불과한 것이었다 . 내 손에 돈이 없으니 …… . 그러면서도 나는 또 다른 일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으니 그것은 ‘ 이용도목사전집 제 2 권 ’ 을 출판하려는 것이었다.

 

 

제 2 집 원고를 준비하며

 

그 해 여름방학 동안에 나는 조용히 들어앉아 제 2 집 원고를 쓰려고 했다 . 그러나 세상일은 흔히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보통인 듯하였다 . 조용한 곳을 찾아 평양 , 선천 , 해주 , 대보산 등을 낱낱이 찾아 다녔으나 일은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다 . 8 월 말이 다되도록 쓴 것이라고는 고작 몇 자에 불과했다 . 8 월 말에는 상경하기로 결심했다 . 그래서 결석을 1 〜 2 주 하면서라도 문을 꼭 닫고 들어앉아서 써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이 나의 앞을 가로 막고 말았다 . 오후 차로 상경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31 일 아침 9 시에 ‘ 부친 별세 ’ 전보를 평양에서 받은 것이다 . 부친상을 당한 열흘 동안은 머리를 들 수도 없을 정도였다 . 어떻게 다른 궁리를 할 수 없었던 건 물론이다 . 이렇게 해서 그 기회는 허무하게 달아나고 만 것이다 . 그러나 부친님의 별세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큰 것을 내게 안겨주었다 . 물론 여기에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니 한편으로는 용도 목사님의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 갈피를 잡지 못해 스산한 그때의 마음 속에서 어떤 곳을 향해 걷는 나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 ‘ 하자 , 일하자 , 내가 죽기 전에 어서 일하자 .’ 때로는 죽음이 나를 향해 성큼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 나는 결심하고 소리쳤다.

“ 내가 해야 할 일 , 그 일을 어서 하자 . 하루 바삐 하자 .”

그래서 나는 붓을 들었다 . 용도 목사님과 알게 된 이후에 일어난 모든 기억과 모습을 써 내려가기 위해서 …… .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사실 때문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 반년 동안 배운 18 과목에 대한 학기말 시험이 이제 몇 주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 더욱이 그것은 바로 졸업시험과 같은 중요한 큰 시험이었다 . 만사를 제쳐놓고 시험부터 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 그래서 차마 놓아지지 않는 붓을 던지고 책을 들 때가 여러 번 있었다 .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히 다시 놓고 마는 것이었다 . 도대체 무엇이라고 쓰인 것인지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 한참 자다가 밤 1 시나 2 시에도 벌떡 일어나 멍하니 앉아있는 넋 잃은 나의 모습 , 이는 분명히 학교시험이 아닌 다른 무슨 큰 일에 붙들려 있는 사람의 꼴이었다 . 그래서 마침내 시험은 어찌되건 마음이 끌려가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맘먹고 붓대를 분주히 놀렸다.

 

 

 

닥쳐온 또 다른 끔찍한 일

 

이렇게 고민하고 애를 태우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내 앞에 어느 날 전보가 한 장 날아들었다 . ‘ 익호 사망 ’ 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급전이었다 . 만주 안동현에서 온 것이었다 . 나는 아버님의 별세에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 그러나 형님의 비보에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 정말 너무도 뜻밖의 소식이었다 . 우리 5 형제 중 가장 든든하고 원기 있는 형님이었기에 충격은 더했다.

그러나 전보를 받은 순간 학기말 시험이 눈 앞에 닥쳐 왔기 때문에 가볼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 그렇지만 앉아도 , 일어서도 마음이 술렁거리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 이런 속에서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 밥도 먹히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 나는 곧 일어나 안동현으로 떠났다 .

익호 형님은 만주 오지 ( 奧地 ) 에 장사를 떠났다가 마적단에게 피살 당하고만 것이었다 . 오후 5 시가 되어서 시체가 돌아왔다 . 관을 열자 나타난 형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 눈알은 빠져 없어지고 왼팔도 달아나고 없었다 . 순간 나는 눈을 가리고 말았다 . 그 처참한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 가슴이 총알과 칼끝에 난도질을 당해 그냥 누더기처럼 되고 말았다고 한다. 시험 때문에 나는 그날 밤 다시 상경하였다 . 이 일 때문에 나는 4 일 밤낮을 한잠도 못잔 것이었다 . 나는 그 후로 1 주일을 꼬박 앓아 누웠다 . 앓으면서도 시험은 다 치렀다 . 마지막 시험을 끝내자마자 나는 바로 붓을 잡았다 . 머리는 아득한 허공을 헤매고 손은 부들부들 떨려왔다.

 

 

 

내가 미쳤나 , 왜 이리도 미쳤나

 

내가 이 목사님을 알게 된지도 벌써 5 년이 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3 년이나 지나갔다 . 지난 5 년 동안의 꿈결 같은 일들을 마음 속에 더듬으면 나는 분명히 무엇엔가 미쳤음을 느끼게 되었다 . 목사님 생전에는 따라 다니 느라고 안타까워하던 생각 , 목사님이 가신 후 미친 듯이 그립던 일 , 그리고 목사님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보려고 애쓰던 일 , 이 모든 사실은 분명히 미친 모습에 틀림이 없었다 . 아무리 내가 안 미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일은 분명히 ‘ 그 누구 ’ 혹은 ‘ 그 무슨 사실 ’ 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미치게 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받은 은혜 극진하여

 

나는 한번 더 생각해 보았다 . ‘ 내가 어쩌다 그렇게도 미쳤나 ?’ 나는 그렇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 그것은 내가 받은 은혜가 지중막대 ( 至重莫大 ) 하여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의 모든 마음과 나의 영혼 전체가 그에게 푹 미치고만 것이다 . 정말 나는 이미 죽어 흙과 먼지가 된지도 오래 되었을 몸이다 . 일곱 살 때에 이미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열세 살 때에는 꼭 죽었을 것이고 스무 살 때는 정말 죽고 없어졌을 몸이다 . 그러나 주님은 이 몸을 살리셨다 . 이는 분명히 나를 살려두어야 할 무슨 필요가 있기 때문에 모진 목숨을 거두지 않으시고 땅 위에 더 두신 것이리라.

7 년이란 세월을 병상에 누워 신음하다가 겨우 넓은 땅에 또 다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 그러나 내 마음 속에 하늘로 향하는 감사는 털끝만치도 찾 아보기 힘들었고 주님을 생각하는 신앙은 조금도 없었을 뿐더러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 가겠다는 목표나 계획은 더욱 없었다 . 그러니 병이 좀 나았다고 하더라도 말하자면 가느다란 바람결에도 쓰러져 죽을지도 모를 심령이고 육체였다.

바로 이때 내 앞에 나타나신 이가 이용도 목사님이었 것이다 . 그는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었고 나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 나에게 감사하는 법을 알려 주고 이제부터 내가 걸어야 할 길과 목표를 보여 주셨다 . 그리하여 나의 마음은 든든한 지팡이를 쥔 것 같았고 내 몸은 땅 위에 굳건히 서게 된 것이었다 . 뿐만 아니라 그는 꽁꽁 얼고 말라붙은 나의 혈관에 자기의 뜨거운 사랑의 피를 부어 넣어주셨다 . 거의 다 어두워진 나의 두 눈을 활짝 열어 주신 것이었다 . 그렇게 함으로 해서 비틀거리면서나마 내 몸이 이렇게 넓은 땅을 걷게 되었고 놓칠 듯 하면서도 이만치 주님의 옷자락에 매달려 살게 되었다.

 

이용도 목사님을 알게 된 후에도 나는 여전히 험난하고 위태한 난관들을 넘고 건너야 했다 . 사람과의 교제에서 그랬고 특히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 그러나 나는 곧 쓰러질 듯 하면서도 그 험난한 역경에 한 번도 굴복 당하지 않고 무사히 이겨왔다 .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들을 앞에 놓고 나는 목사님의 전술 ( 戰術 ) 을 체득하기에 힘썼고 더구나 기막힌 일을 당할 때는 정말 목사님의 그 애씀 , 그 생활을 생각하며 항상 물리쳐 이겼다 . 이러는 동안에 나는 이용도 목사님에게 푹 젖어 들어 미치게 되었다 . 따라서 목사님은 ‘ 나의 영원한 선생님 ’ 으로 나의 심령 위에 좌정하시게 된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미쳐가는 한편 세상은 그를 욕하기 시작하였다 . 나는 도대체 왜들 그렇게 야단인지 자세히 알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목사님은 나의 고조된 열정도 아랑곳없다는 듯이 흘연히 이 땅을 떠나 영원한 나라로 가시고만 것이었다 . 세상은 그의 시체까지도 매질했다 . 나는 정말 그 이유를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 그들의 독살스런 매질이 목사님의 시신에 가해질수록 나는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서 뛰어들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 여기에서 출발하여 나는 그 사람들의 심중과 입장을 연구하는 한편 고인이 되신 목사님의 생애를 좀더 철저히 연구하고 싶어졌다 . 물론 그 연구의 결과를 발표하고 싶은 것은 물론이었다 .

이러한 필요에 의해서 생긴 것이 바로 심우원 ( 心友園 ) 이고 그 일의 첫 열매로 『 이용도목사서간집 제 1 권 』 이 나오게 된 것이다 .

 

이러한 사정의 배경과 역사적 발전이 있었으므로 내 연구와 탐색 중에서 목사님의 잘못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없었다 . 외부의 떠드는 소리나 ‘ 미친 자식 ’ 이라는 욕쯤으로는 내 마음 속 깊이 앉아 계신 목사님을 내몰지 못할 것이요 , 내 혈관을 흐르는 뜨거운 그 사랑의 피를 결코 쏟아버리게 하지 못할 것을 나는 확신한다.

설령 내 눈에 그의 잘못이 뜨인다 하더라도 결코 내 힘으로는 내 심장의 일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그의 형상을 찍어 버리지 못할 것이다 . 찍어 버리면 바로 내 심장이 병신이 되고 죽게 될 테니까 말이다 . 떡 한 개를 더 주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받은 100 개조차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요 , 또 이미 받아 먹은 떡이 더럽고 치사한 것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이미 그 떡으로 된 내 피와 살을 떼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 물론 떼어 버리고도 살 수 있을 만큼 피와 살점이 넉넉한 사람은 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떼어낸다면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약자라면 결코 떼지 않을 것이다 . 비록 그 떡이 맛 없고 소화도 잘 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런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 떡으로 된 나의 피와 살을 지켜갈 것이다 .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떡에 감사하며 그 떡을 준 고마운 사람에게 쉬지 않고 절을 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 나는 누구나 다 예수를 믿으라고 억지로 강권할 수는 없습니다 . 그러나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를 느낀 자와 예수 없이는 순간도 살 수 없음을 깨닫는 자는 곧 주께로 나오시오”

하시던 이용도 목사님의 설교의 한 구절을 빌어 목사님을 향한 나의 소회 ( 所懷 ) 의 일단을 피력하여 두기로 한다 .

그렇다 . 이용도를 욕할 자는 마음대로 욕하라 . 그러나 그가 선생으로 보이고 은인과 성자로 보이는 자는 그 앞에 정성껏 절할 것이다 . 그가 미운 자는 한번 더 소리를 높여 소리질러라 . “ 그 놈 , 죽일 놈 ” 이라고 . 그러나 그에게서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자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 “ 오 , 선생님 ” 하며 그를 얼싸안을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 목사님이 이렇다 저렇다 ” 하고 큰 소리로 말 한마디 한 적도 없다 . 그러나 어느 누구는 나를 향해 , “ 그 사람은 예수는 안 믿고 이용도만 믿는다 ” 고 말하며 다닌다는 말도 들었다 . 그래도 좋다 . 예수는 못 믿더라도 이용도나마 믿는 것은 예수도 못 믿고 이용도도 못 믿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이르러 분명한 나의 명언 한마디를 남겨 두고 싶다.

“ 이용도를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자라면 반드시 예수를 못 놓고 죽으리라.”

가슴 속에 끊어 오르는 나의 열정은 지금 목이 찢어지도록 큰 소리로 부를 이름을 찾는다.

“ 목사님 ! 목사님 ! 용도 목사님 !”

 

그렇게 말 잘하는 사람

그렇게 기도 많이 한 사람 

그렇게 사랑 많은 사람 

그렇게 겸비한 사람

주를 위해 그렇게 땀 흘린 사람 

그렇게 주 위해 잠 못 잔 사람 

그렇게 굳센 사람

그렇게 부드러운 사람

 

그렇게 또 그렇게

오직 주만 위해 산 사람

그렇게 오직 주의 뜻대로만 

살기를 힘쓴 사람이 

이 강산에 또 있느냐

이 무리 중에 또 있더냐

 

그리고서 또

그렇게 욕먹은 사람 

그렇게 구박받은 사람 

그렇게 죽은 사람이 

있느냐 있었느냐 

없다 없다

나의 눈은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나 한 개인의 독단적 판단을 고집하지는 않겠다 . 여러분 모두가 각각 스스로 자기를 향하여 대답을 구해 보기를 바라는 바이다 . 이 땅 위에는 목사님을 선생님으로 알고 은인으로 섬겨야 할 사람이 ‘ 아홉 사람 ’ 은 넘을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은 어디론지 다 가버리고 “ 다른 아홉 사람은 어디 갔느냐 ?” 하는 그의 음성만이 이 땅을 향해 들려오고 있다 . 시치미를 떼고 달아나는 자들이여 , 어서 그의 앞에 와서 절할지어다 . 이 일로 너는 살 것이요 , 이 일이 없어 네 생명은 위태할 것을 알아라 . 만상이 다 잠든 1936 년 10 월 25 일 새벽 2 시 나뭇잎을 흔드는 가을바람 소리만이 거칠게 들리는데 어디서 은은한 거문고 소리와 함께 어린 소년의 노랫소리가 내 귀를 울려 온다.

 

오 내 사랑 그리운 벗이여 벗이여 

가을이 벌써 가고 겨울이 와 

붉었던 단풍잎 헛되이 지나니 

오 이 세상 이같이 거칠었다

 

오 내 사랑 그리운 벗이여 벗이여 

너를 찾는 이 내 맘 방황한다 

그리워 나의 맘 덧없이 우노니 

나는 간다 그리운 너를 찾아

 

노래 소리가 그쳤다 . 나는 더욱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 거문고 소리만 이 열을 더하여 그 곡조를 다시 한 번 더 울린다 . 그러더니 그 거문고의 곡조가 변하였다 . 나는 새로 울리는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당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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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1 장

그 성역과 순교- 이호빈( 李浩彬)

 

고 ( 故 ) 용도 군의 추상기 ( 追想記 ) 를 변우 ( 邊友 ) 에게 청탁 받은 지 어언 반 년이 훨씬 넘은 듯싶다 . 그 동안 독촉도 여러 번 받았다 .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붓이 들리지 않았다 . 물론 나의 늘어진 성격 탓도 있겠지만 웬일인지 용도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아파져왔다 . 그러니 그에 대한 옛 일을 추억한다는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 지금도 억지로 이 붓을 들고 보니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않고 눈이 아득하고 한숨만이 나오며 가슴이 빽빽하고 막혀짐을 느끼게 한다.

용도 군을 보낸 후 내 마음이 이리도 아프고 서러워지는 까닭은 웬일일까? 땅 위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섭섭함 , 미진한 사업을 태산같이 남겨두고 한창 나이인 30 청춘에 간 아픔 , 이 강산 위에 피땀을 쏟아 말라빠진 피골 만의 그 몸을 둘 곳이 없어 남북으로 몰려다니던 그 모습 , 생각할수록 나는 쓰라린 설움을 금할 길이 없다.

오 , 군 ( 君 ) 아 ! 나보다 먼저 간 용도 군아 ! 나는 군을 기억할 때마다 가슴만 터지는 듯 아프구나 . 첫째는 군의 중심을 내 알지 못했던 아픔이요 , 둘째는 군의 유한 ( 遺恨 ) 을 내 풀지 못하는 아픔이로다 . 군은 나를 믿어 손잡고 울었으나 나는 군을 몰라 군의 눈물을 뜻 없이 바라만 보았으며 군은 나를 믿어 많은 일을 부탁했으나 내 아직 한 가지도 군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였구나.

군아 , 나의 무지를 네 얼마나 설워하였으며 나의 무능무신 ( 無能無信 ) 에 네 얼마나 울고 있느냐 . 생전의 군의 중심을 알지 못하였던 슬픔도 내 가슴을 견딜 수 없이 아프게 흔들거니와 군이 걸어가던 사랑의 길과 진리의 길을 내 걷지 못하는 답답함 , 무엇에 비할꼬 . 고요히 군을 추억하니 나는 오직 눈물이 흐를 뿐이로라.

나를 주께 부탁하는 군의 기도가 속히 응답되어 나의 무지 , 무언을 변하게 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다시 힘을 얻어 순종하여 기다릴 뿐이로다 . 나는 이제 옛날의 용도를 더듬어 보려니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흥분되어 두서의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 그러나 그렇다고 더 밀릴 수도 없어 잡은 붓을 억지로라도 끌어 생각나는 대로 몇 자 적어보기로 한다.

 

 

 

처음 만나던 때

 

1924 년 봄에 내가 협성신학 ( 協成神學 ) 에 입학하던 바로 그때가 용도 군을 처음으로 만나던 때이었다 . 내가 정식으로 입학수속을 밟지 못하고 겨우 청강생 비슷하게 허락을 받고 남보다 1 개월 가량 뒤떨어져 학교에 도착한 관계상 , 기숙사도 딴 곳에 있게 되고 더욱이 학업에 밤낮 전력을 다하게 되니 일반 학생들과 접촉하여 사귈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 동급생도들과도 별로 상종할 기회가 넉넉지 못하였으니 영문과에 있는 용도쯤은 통성명까지도 해 본 기억이 없으리만큼 서로 등한 ( 等閑 ) 하게 지냈다 . 그 당시 나의 마음에는 친구를 사귀는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 만주에서 공수 ( 空手 ) 를 들고 오직 적심 ( 赤心 ) 하나만을 가지고 돌격적으로 대든 판이라 , 학업에만 전심할 때이었다 . 그러니 매우 적적한 편이었다 . 용도 군과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가끔 동석에서 웃음을 바꾸어보기는 그 해 가을부터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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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 빈아 ( 貧兒 ) 인 나에게 교비도 넉넉하게 생기고 청강생으로 겨우 허락을 얻어 무명 학걸 ( 學乞 ) 이 천지혜택 ( 天之惠澤 ) 으로 정식 입학도 되었으니 제 2 학기 시절은 나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환희기이었고 또한 기숙사도 신학교 기숙사로 들어가게 되니 의기충천 ( 意氣衝天 ) 하여 이제부터는 사귈 만한 친구들과 손을 잡는 길도 열렸고 또 심태 ( 心態 ) 도 좋아졌다 .

때마침 환신 ( 桓信 ) 군이 추기 보결 ( 補缺 ) 에 합격이 되어 신학교로 들어와 용도 군과 가깝게 사귐을 시작하니 이때부터 환신 군과 친한 나도 자연히 용도 군을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 어느 날 어느 시부터라고 따지어 말할 수는 없어도 1924 년 가을부터 사귀기를 시작하였는데 ,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군에 대한 인상이 나에게 좋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 ‘ 재사 ( 才士 ) 요 , 유망한 청년 ’ 이라고 얼른 판단이 되었다 .

 

 

 

내가 본 그때 그 사람

 

그는 특재 ( 特才 ) 이었다 . 말도 잘했고 글도 잘 썼고 음악도 , 운동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 두뇌가 명철하여 비판력이 비범하였던 것이다 .

그는 열정적이었다 .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모르거니와 손대어 하기를 시작한다면 자는 일도 먹는 일도 잊어버리고 팔팔 뛰는 극단의 정열병(情熱 兵 ) 이다 . 재학 당시에 그는 유년 주일학교 일을 계속 시무하였는데 교회 절일 ( 節日 ) 특별순서나 맡게 되면 못 먹고 못 자며 애쓰기에 입술이 말랐다 . 어떤 때는 가로상에 불쌍한 병걸 ( 病乞 ) 을 보고 들어와서는 하염없이 울기도 하였다 . 마음 있는 일이라면 소유도 , 명예도 , 지위도 , 인정도 , 생명도 초개 ( 草芥 ) 같이 내던지고 대드는 열정의 사람이었다 .

그는 인자한 사람이면서 지독한 사람이었다 . 해말쑥한 얼굴에 웃음을 싣고 보드라운 음성으로 나타날 때에는 양 ( 羊 ) 중에도 가장 여리고 보드라운 암 양같이 인자하지만 단에 올라 불의를 공격할 때에는 사자보다 더 무섭고 사납게 지독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 단상 ( 壇上 ) 의 용도만 만나 보고는 말 붙이기가 무시무시하고 가까이 할 수가 없는 듯싶지만 , 급기야 단하 (壇 下 ) 에 내려 사석에서 마주 앉으면 그처럼 인자하고 온순한 자가 다시 없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물질에 등한 ( 等閑 ) 한 사람이었다 . 수년 간을 함께 생활한 일이 있었는데 금전에나 의복에나 모두 네 것 내 것이 없이 지내며 피차에 마음을 통하여 본 결과 , 그는 분명 물질에 퍽 등한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 제 것이라고 묶어두거나 채근하여 찾아 들이는 꼴을 못 보았다 . 없는 사람에게 주지 못해 애쓰는 별사람이었으니 일생을 구차하게 그날 그날을 살아나갔다 . 그러나 그 입에서 물질에 대한 이야기나 걱정을 결코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는 옷맵시를 잘 보는 사람이었다 . 옷이 몸에 꼭 맞지 않으면 잘 입지를 않았다 . 군의 부인되시는 송봉애 ( 宋鳳愛 ) 씨가 옷을 고치기에 어지간히 고생을 했을 것이다 . 어떤 때는 옷을 고치다가 너무 속이 상해서 울었다는 소문까지 있었으니 , 그가 얼마나 옷맵시를 보던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 음식은 탓을 잡지 않아도 의복은 한 술 , 한 올을 꼬집어 들던 맵시꾼이었다.

그는 걸음이 빠르기로 유명하였다 . 인왕산 밑에서 통학할 시절 , 시간이 좀 바쁠 때 앞에 세우고 구경하면 꽤 장관이었다 . 몸 하나 ,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대처럼 발뒷축만 뺑뺑 돌리며 달아나는 것을 보면 나 같은 느림 보는 따라가 보려는 마음도 못 냈지만 어지간히 덤벼드는 진해 ( 震海 ) 군도 쩔쩔매며 따라가노라고 애쓰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그는 보통 걸음에 배 곱은 빠르던 사람이다.

그는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 내가 보기에 용도 군은 신학방면보다 예술방면이나 법학이 좋을 듯이 생각되었다 . 그는 특히 극 ( 劇 ) 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극에 특장 ( 特長 ) 도 있었고 , 이론을 즐길 뿐만 아니라 예민한 판단으로 이론이 명료하였다 . 군이 지도하는 석교 ( 石橋 ) 교회 유년주교의 가극단이 항상 대인기를 집중시키고 있던 것만을 보아도 그가 극에 취미와 특장을 가졌던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또한 어떤 회의석상에서 이론 투쟁이 생길 때 군의 주론 ( 主論 ) 은 보통이 아니었다 . 논점이 명백하였고 이론에 강미 ( 强味 ) 와 권위가 있어 다시 재론할 여유가 없도록 판단이 명료하였다 . 친구 중에서 가끔 군을 향하여 법학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라고 권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 누가 보든지 그에게 그런 권면을 할 만큼 그 방면에 소질이 많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은 문장에 장점도 많이 있었다 . 시를 좋아하고 가끔 명구 ( 名句 ) 를 써내었다 . 그 방면으로 수련을 결 ( 缺 ) 하였고 또는 그 방면으로 진출할 기회를 못 가졌으니 말이지 분명 군이 글에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던 것은 그를 아는 이로서는 누구나 긍정하는 바이다 . 나는 군을 향하여 늘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군이 신학을 하게 된 이유는 부득이한 환경에 몰리어 된 일이지 만일에 모든 외적 조건이 순조로이 허락이 되었다면 예술 방면으로나 법학방면으로 진출하였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 혹시 문학이나 교육방면이라면 몰라도 신학방면으로 진출하였다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일같았다 . 법관이나 교육자나 문사 ( 文士 ) 나 연극가의 소질은 풍부하여도 교회의 소질은 가장 적다고 누구든지 인정할 것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서도 나의 생각에 공명 ( 共鳴 ) 하는 말을 늘 하였었다 . 아무래도 자기는 목회에 자신이 생기지를 아니하나 , 기왕 신학을 시작했으니 종교교육방면으로나 전공으로 나아가겠노라고 늘 이야기하던 것을 보아 그는 분명 길을 바로 들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 그러나 주님께서 불러 쓰시는 데야 어쩌랴 ! 군이 부흥목사로 돌아다닐 때 나에게 이러한 편지가 왔던 것을 기억한다.

 

형님 , 내가 종교교육 총무가 되었다면 형님도 긍정할 수 있으나 , 

내가 말이지요 부흥목사가 되었다면 누구나 놀라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하시는 일은 알 길이 없나이다 . 오직 끄시는 대로 순종할 뿐이외다.

 

이 한 구절의 뜻을 미루어 본다면 용도 군의 최종 사업인 부흥목사직은 제 스스로가 택한 바가 아니라 어떤 능력에 이끌려 따른 것임을 넉넉히 엿볼 수 있었다 . 자기 소질에 맞지 아니하는 사업이었으나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최종 ( 最終 ) 을 고 ( 告 ) 한 군의 승리가 지극히 큰 줄로 믿는다 .

 

 

 

인왕산 밑의 자취생활

 

1926 년이라고 기억된다 . 환신 군과 세 사람이 인왕산 밑 현저동 송림 가까운데 방 한 칸을 세 얻어가지고 자취 생활을 시작하였다 . 본래 넉넉지 못한 고학생들이라 살림은 무척 구차하였다 . 가끔 좁쌀 죽을 쑤어 먹는 형편이었으니 경제적으로 당하는 곤란은 너무 심하였다.

그러나 그때처럼 기쁘고 그때처럼 감사를 느끼던 때를 다시 맛볼 것 같지는 않다 . 용도 군을 찾아 오는 어린 학생들은 우리 집을 천사의 집이라고 하여 찬송과 웃음이 그치지 않았고 동리 사람들은 가끔 우리 집에 웃음 구경을 오는 것이었다 . 새벽에 산에 올라 기도하던 일 , 길어먹는 샘물이 항상 말라서 밤중마다 물을 긷던 일 , 요행 만나는 토장국 속에 숨긴 고기 부스러기 때문에 일어나는 희극 등 모두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이때에 용도 군의 몸은 무척 약하였다 . 신의 ( 新醫 ) 도 , 구의 ( 舊醫 ) 도 몇 날 못 살 것을 알려주었다 . 내가 짐작하기는 군이 한강을 찾아나가 자살을 하려고 하던 때가 바로 이때였다고 생각된다 . 주님의 크신 사랑은 우리 집에 더 강하게 역사하시어 어두운 구름장은 잠깐 동안에 비를 날려 우리들의 생명을 더 윤택하게 하였다 . 나도 이때에 신앙의 경험을 조금씩 맛보기 시작하였고 용도 군은 이 시기가 좋은 고개를 넘으려는 준비의 첫 문이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 새벽마다 산 밑의 돌 틈을 더듬어 몸부림치며 울던 용도 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죽음에 직면한 군의 기도이었으니 극히 간절하였을 것이요 , 간절한 기도였으니 응당 주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었다 .

 

 

 

열정의 사역

 

신학을 마친 후 나는 북간도로 파송을 받고 군은 통천으로 파송을 받았으니 남북 이역 ( 異域 ) 에 피차 만날 기회가 쉽지 않았다 . 

재학시대에는 한 교회로 모일 수는 없어도 한 지방으로라도 모여 용도 군은 유년사업 , 진해 군은 청년사업 , 나는 목회를 맡기로 항상 얘기하며 꿈을 꾸었건만 주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남북 수천 리에 갈라 놓으셨다. 그래도 낙망은 하지 않고 머지 않아 모일 수 있으리라고 믿어졌으므로 밤낮 한 곳으로 모이자는 서신만 왕래하였다.

때는 1929 년 여름이었다 . 감리교회 종교교육 하기수양회가 삼각산 도선사 ( 道詵寺 ) 에 열리었는바 다행히 내가 간도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 이 기회에 세 사람이 함께 모일 수 있으니 앞날의 사업지대도 확정하고 함께 모여 일할 계획도 대강 세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많은 기대를 가지고 나는 간도를 떠났다 . 원산역에 내리니 용도 군이 출구에서 손을 흔들었다 . 그 순간 나의 기쁜 마음 아직도 내 가슴에 깊이 남아 있다 . 새벽에 자전거로 통천을 떠나왔노라고 . 내가 온다는 소식을 바로 그 전날 밤에 알게 된 모양이었다 ( 그 당시는 기차가 없었다 ). 그립던 터이라 괴로움도 잊고 그날 원산 일을 분주히 마치고 밤차로 경성으로 향하였다.

사업지를 여러 곳으로 생각하고 의논하다가 만주지방이 유리하다는 편으로 대강 낙착이 되었다 . 그래서 그 여름에는 용도 군을 간도 지방으로 옮겨 놓는 공작을 시작하려 하였다 . 때문에 당시의 간도선교 관리자인 양주삼 목사도 만나보아야 할 것이고 또 원산지방 장로사 ( 長老司 ) 부라만 ( 夫羅萬 ·L. C. Brannan) 목사도 만나보아야 할 것임을 깨달았다 . 마침 부 목사가 원산 명사십리 ( 明沙十里 ) 해수욕장에 와계심으로 먼저 곧 만날 수 있는 부 목사부터 만나기로 하였다 . 부 목사는 반허락은 하는 듯이 말하였다 . 그래서 우리는 만주의 무대를 좀더 구제적으로 계획하기에 착수했다.

경성에서 양 목사님을 만난 것은 더욱 우리를 기쁘게 하였다 . 우리의 마음 속을 뚫어보는 듯 “ 너희 3 인이 모이는 것을 내가 적극 주선하여주마 . 용도도 , 진해도 간도로 가도록 하라 ” 는 것이었다 . 당시 진해 군은 연전 ( 延專 ) 재학 중이었으니 그는 졸업 후 입북 ( 入北 ) 하기로 하고 용도 군은 지방장로 사의 정식 허락만 있으면 곧 입북하도록 해보라는 것이었다 . 그래서 빠르면 그 해 가을 , 늦어도 이듬해 봄에는 용도 군이 입북하리라고 믿고 좋아하였다 . 그러나 군은 이럭저럭 입북의 길이 막히었다 . 지방에서 놓을 수 없다고 하더니 다음에는 주일학교연합회 사업으로 경성에 가게 되어 입북의 길은 막혀만 가는 것이었다 . 일이 이렇게 되니 나는 입북을 더 권할 용기도 없었다 . 이제는 그저 하늘의 명령이 용도를 간도로 몰아내는 때가 오기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통천구역을 맡은 처음부터 근방 교회의 부흥에 진력하던 용도 군은 1930 년 겨울에 벌써 그 명성이 전국에 알려졌다 . 그래서 1931 년 이른 봄부터는 아주 순회부흥을 전문으로 하다시피 각처로 끌려 다니게 되었다 . 군이 이렇게 침체해 가는 교회와 메마른 심령에 뜨거운 불과 새로운 원기를 불어 넣어준다는 소식을 멀리서 들은 나는 군이 간도 ( 間島 ) 에 좀 다녀갈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하며 군에게도 여러 번 졸랐다 . 그러나 원체 바쁜 신세라 그리 쉽게 허락이 생기지 않았다 . 나는 기도를 멈추지 않고 조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그래서 결국은 잠깐 다녀갈 수 있다는 허락이 생기게 되었다 .

용도 군이 북간도에 들어오기는 1931 년 이른 봄이었고 체류하기도 겨우 2 주간에 불과하였다 . 2 주간 체류하는 동안에 용정감리교회에서 1 주일간 , 두도구감리교회에서 3 일간 , 국자가감리교회에서 2 일간 집회하고 돌아나가는 길에 다시 용성장로교회에서 2 일간 집회를 인도하였다 . 비록 긴 시간의 역사는 아니었으나 나타난 일로 보아서 간도 역사는 주께서 특별히 사용하시사 간도에 있는 뭇 심령들을 깨우쳐 주신 줄로 믿는 바이다 . 나의 심령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 심령 속에 커다란 돌을 던지었고 불을 질러 놓았다. 군이 간도를 다녀간 후 계속하여 각 예배당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며 통회하는 일이 지나치게 격렬하다 하여 말썽이 생기고 문제 거리가 되었던 것을 보아 보통 역사가 아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새벽마다 각 예배당에 기도하는 이가 그치지를 아니하였고 산상기도군의 수도 상당히 늘어났다 . “ 우리의 무기는 오직 기도이다 ” 라고 외칠 뿐만 아니라 , 숙소에 돌아가지 아니하고 예배당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고 있었다 . 말과 행실과 더불어 기도가 우리의 호흡이요 , 생명이며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 주께서 용도 군을 간도에 보내신 뜻은 , 

“ 기도로써 다시 살아라 .” 

“ 신앙은 가슴으로 받아라 .”

이 두 가지 교훈을 주려 하심인 듯하였다.

용도 군의 설교의 중심점은 , 현 교회에 기도가 없음을 책망하고 ‘ 가슴에 피로 받아야 할 신앙 ’ 이 두뇌로 따지어 받으려고 철없이 덤비는 오늘날의 신자를 꾸짖었다 . 더욱이 교역자들을 향하여 책망하고 꾸짖었다 .

“ 머리의 부분으로만 따지고 꾸며 교회를 먹이려는 교역자들이여 , 가슴에 피를 쏟아 생명으로 먹이어라.”

“ 교제 ( 交際 ) 에 동분서주 ( 東奔西走 ) 하는 일이 있기 전에 먼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여라.”

이렇게 외치어 교역자를 격려하였다 . 그 설교가 어찌도 열렬하고 권위가 있으며 생명의 불길이 뿜어 나왔던지 구경꾼에 불신자까지라도 사람의 말같지 아니하다고 놀래었거니와 , 실로 성령에 끌리어 불타는 애통의 간증이었으며 천군 ( 天軍 ) 이 호령하는 뇌성 ( 雷聲 ) 과 같았었다 . 청중은 울다가 무서워 떨었고 무서워 떨다가 다시 울면서도 남이 알지 못하는 시원한 맛을 가슴에 맛보게 되어 폐회를 선언하나 헤어질 줄을 몰랐고 언제든지 집회 정각 전에 만원으로 문밖까지 여지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용도 군은 아주 딴 사람으로 변한 용도이었다 . 1 년 전에 보던 용도 군과는 아주 딴 사람이었다 . 그리도 맵시를 잘 내던 샛치꾼이 아주 어수룩한 산골 서방님 모양으로 언어와 동작도 변하였고 의복까지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다 . 군이 도착하는 날 용정서 20 리 되는 동성용 ( 東盛湧 ) 역까지 마중을 나가서 기다리다가 차내에서 만났는데 20 분 이상 함께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서 용정역까지 오게 되었으니 , 물론 전 같으면 주고받고 말이 많았을 것이었다 . 그러나 그리도 말 잘하던 군의 입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 눈도 입도 꼭 잠가 닫은 듯 열리지를 아니하였다 . 나의 손끝만 힘있게 꼭 쥐었고 이따금 떨려 나오는 숨결만이 코가 좁은 듯 거북하게 뿜어 나왔고 때로 차창을 꿰뚫어 먼 산을 바라보아 이를 악무는 비창 ( 悲愴 ) 스러운 태도가 나타날 뿐이었다.

“ 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 다들 평안하신지요 ?”

이 두 마디 말소리밖에는 더 들은 기억이 없다 . 그러나 코로 뿜어 나오는 숨소리와 내려감은 두 눈초리에 맺혀지는 눈물 방울을 통하여 일생에 주고 받을 말을 다 주고 다 받은 듯싶었다 . 가슴 속에 끓어 넘치는 사정을 말로 어찌 다할 수 있으리요 . 뜨겁게 떨려 나오는 숨결 한 조각 , 피 섞인 눈물 한 방울 , 이밖에 더 바로 더 잘 표현할 방법이 다시 없었던 것이다 . 대하는 맛이 전에 맛보지 못하던 뜨거운 맛을 깨닫게 되었다 . 군이 본래 뜨거운 맛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전에 비하여 그 질과 정도가 훨씬 달라져 있음을 깨달아 알 수 있었다 . 말 잘하던 달변가인 군은 무언의 침묵자로 변하였고 , 애교만만한 사교적 활동가인 군은 눈물 많은 기도자로 변하였고 , 맵시에 샛 치꾼인 군은 검박 ( 儉朴 ) 한 푸석이꾼으로 변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그 중에도 제일 크게 변한 것은 신앙이었으니 , 인본주의 ( 人本主義 ) 신앙에 서 신본주의 ( 神本主義 ) 신앙으로 대변한 것이었다 . 두뇌로 따지어 받아들이던 신앙에서 가슴 속 피로 받아들이는 신앙으로 변하였단 말이다 . 군이 단에 오르면 불덩어리같이 열렬하였고 단에 내리면 어린 양같이 고요하였다. 용정에 첫날 밤 첫 찬양이 133 장 ( 멀리 멀리 갔더니 ) 이었는데 일동이 울면서 거듭거듭 취한 듯 미친 듯 부르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불을 퍼붓는 듯 뜨거운 기도 , 폭포같이 쏟아져 나오는 설교 , 모두가 회중의 마음을 휘어잡아 흔들어 태울 건 태우고 , 씻을 건 씻고 , 쨀 건 째고 , 싸맬 건 싸매는 듯 아프고도 시원한 맛을 주었다 . 땅을 치며 울면서도 가슴이 시원한 맛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이상하고도 유쾌하였다 . 내 일생에 제일 많이 울어본 때도 그때요 , 제일 기뻐해 본 때도 그때일 것이다 . 물론 앞날에 당할 일은 알 수 없지만 지나온 생활을 더듬어 본다면 그때에 울고 웃으며 넘 어간 몇 날의 생활이 제일 큰 고개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심중에 큰 변동이 생겼으니 근본되는 신앙의 변화이었다 . 기도한다는 일이 무엇인지 그때에 비로소 조금이라도 짐작이 생기었다 . 기도는 일종의 집정작용 ( 集精作用 ) 으로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는 일에 필요 조건으로만 알아왔던 사고 방식이 크게 붕괴를 당하고 만 것이다 . 기도는 내게 있는 힘을 묶어 가지고 나서려는 일이 아니요 , 주님의 옷단을 붙들고 늘어지는 일이다 . 지혜를 쥐어짜서 계획하려는 일이 아니요 , 무지의 빈 마음을 가지고 주님 무릎아래서 명령을 기다리는 일이다 . 나의 과거의 기도는 주님의 명령을 기다림이 아니었고 내가 직접 주를 대신하여 명령을 만드는 일이었다 . 그러고 보니 나의 기도실은 주 앞에 엎드려 명령을 기다리는 곳이 못 되었고 나의 재간 ( 才幹 ) 과 지력 ( 知力 ) 으로 사업을 계획하는 설계실로 되었던 것이다.

용도 군이 간도에 들어와 주를 순종하는 생활로써 나타난 일이 여러 방면으로 많았으나 거기까지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 다만 간도 황야에서 군을 만난 것이 내 생명을 살리시려는 주님의 은총의 섭리였던 것만을 믿음으로 감사할 뿐이다 . 잠 못 자고 먹지 아니한 군의 말라빠진 몸 덩어리에서 짜내는 눈물과 땀방울이 어찌도 그리 많았는지 , 땀이 솜옷 겉까지 베어나왔고 수건은 4 〜 5 개씩도 늘 부족하였다 . 말하는 자 그 수가 한없이 많으나 하늘에 소리를 그대로 전하는 자 드물 것이며 , 하늘의 소리를 말하는 자 있다 하여도 실상은 듣는 자 또한 드물 것이다 . 듣는 자 또한 있다 해도 들어 행할 자 그 몇이나 될 것인가 . 어느 시대에 있어서든지 참된 의가 나타나 용납을 받지 못하였나니 , 참된 의로써 이루어지는 새 나라가 언제나 이 땅을 차지할 것인가.

군이 간도 일을 마치고 떠날 때 나는 마침 혼춘 ( 琿春 ) 지방까지 갈 일이 생겨서 두만강변 상삼봉 ( 上三峯 ) 역까지 3 〜 4 시간 동행하였고 나 외에 몇 분 신도가 회령 ( 會寧 ) 까지 따라나갔던 일이 기억된다 . 용정역을 떠날 때에 울면서 작별하던 교우들의 수가 어림잡아 30 명 이상이었고 두도구 ( 頭道溝 ) 로 , 국자가 ( 局子街 ) 로 군을 따라 울며 애쓰던 갈구자 ( 渴求者 ) 들이 무려 수백 명이었다 . 군이 떠난 후 각 교회마다 밤을 새워 울며 기도하는 자가 무수히 많았고 산으로 들판으로 굶으며 , 헤매며 애타하던 자의 수도 알 수 없으리 만치 많았다 . 그 해 여름 , 그 해 가을 , 그 해 겨울까지에 간도 일대가 기도 단으로써 큰 변을 낼 듯 굉장하게 떠들었다.

 

 

 

영무해안 ( 靈武海岸 ) 의 하룻밤

 

용도 군이 간도를 다녀간 이후로 기도해야 된다는 열심이 철저히 강하여져서 그 해 여름에 교역자를 중심으로 29 명의 동지가 회령 백천사 ( 白泉寺 ) 에 모이어 산상기도를 한 일이 있었다 . 그때에 나도 참석하였는바 또 함남 영무교회에서 용도 군이 집회를 인도한다는 소식이 있음으로 동지 몇 사람과 같이 회령에서 영무로 직행하여 5 일간 용도 군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 제 4 일째 되는 날 밤이었다 . 저녁 집회를 마치고 얼마 동안 기도하다가 숙소 로 돌아왔으니 아마 밤 12 시쯤 되었을 때이었다 . 동무들은 잠이 든 모양이나 나는 잠도 잘 오지 않고 일어나 앉기도 싫고 하여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때에 문밖에서 발걸음이 멈추어지며 “ 형님 , 주무십니까 ?” 고 조용히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용도 군의 음성임을 깨달아 알았다 . 나를 찾는 소리임을 알고 대답도 하지 않고 문밖으로 나가니 군이 “ 저기 좀 갑시다 ” 라는 말 한마디를 남겨놓고는 발걸음을 돌리어 해변 쪽으로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라 동리를 빠져나가 송림을 지나고 백사장을 걸었다 . 까닭 모르는 일이나 물어보지도 않고 군의 발 밑 그림자를 보면서 숨차게 따라갔다 . 이곳에 온 지 나흘이 지났으나 집회 인도에 방해가 될까 하여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 단 둘이 만나게 된 것이 반가울 것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깊은 밤중에 바다를 향해서 아무 말도 없이 따라가는 군의 모양이 반갑지를 않고 궁금한 생각과 의아한 생각만이 날 뿐이었다 . 그렇다고 까닭을 묻고 싶지도 않았다.

20 보쯤 앞서서 가던 군이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앉는 모양이 달 밑에 보였다 . 궁금증 나는 가슴을 조금 풀며 나도 그 옆에 주저앉았다 . 군이 모래 위에 꿇어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나도 꿇어 엎드렸다 . 멀리 은혜를 사모하여 따라 나온 나에게 특별한 기도를 해주려고 나를 데려 왔는가 하는 안심과 만족을 느끼면서 정성스럽게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한 15 분간 고요히 엎드려 있노라니 군의 말이 나더러 기도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 물론 주님 앞에 의탁하여 사정을 고하는 일이었으니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너무도 뜻밖에 되는 일이라 선뜻 기도가 나오지를 아니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날 밤은 그 바닷가에서 이야기로 기도로 밝혔다 . 자기의 은혜 받은 경험 담이며 각처에서 이상한 큰 역사를 보던 이야기며 장래 우리들이 합심하여 기도해야 할 것을 말하는 등 시간이 가는 것을 잊을 만큼 긴장한 가운데서 주고 받았다 . 실상은 나는 듣기만 하였다 . 원래 빠른 말세를 가지고 밤새도 록 쏟아 놓은 이야기라 기록하기 불가능할 정도였다 . 수년 간 입다물고 내 놓지 않던 말을 전부 쏟아 놓은 것이었다 . 지금까지 잘 기억되는 일 두어 가지만 간만하게 써보겠다.

 

① 부흥목사가 절대로 자기의 원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였다 . 자기의 진정한 소원은 종교교육사업이었는데 웬일인지 자기도 알지 못하게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이 끌리어 다닌다고 하는 말을 나는 유심히 들었다 . 그리고 자기가 강단에서 현 교역자를 너무나 지나치게 공박한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평을 듣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나 중심으로 남을 공격하려는 생각을 가져본 일은 절대로 없고 가끔 그런 일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도 드리고 있는데 웬일인지 강단에 나서면 자기도 깨달아 알 수 없는 말을 말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설교에 대해서 말하기를 설교의 원고를 써가지고 나가는 일은 끊긴 지가 오래라고 하고 물론 맨손으로 나선다는 일에 큰 실패가 많은 것도 사실이나 실상은 빈 그릇으로 강단 위에 엎드려 울며 졸라 얻어지는 설교가 사람 지각 위에 뛰어나게 되고 승리를 가져오게 되더라고 . 그래서 자기의 경험으로 큰 실패를 여러 번 당하였는데도 빈 그릇을 가지고 조르다가 주시 는 것이 없을 때는 회중을 그냥 돌려보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노라고. 이런 일 등 몇 가지 이야기를 종합하여 보면 군이 얼마나 솔직하게 순종하는 생활을 원하며 지났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성능 ( 聖能 ) 의 힘에 붙들린 생활로 괴로우나 즐거우나 원하는 일이나 원치 않는 일이나 주께 맡기고 십자 가에 죽어지는 생활로 지내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신자는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하겠지만 더욱이 교역자의 생활은 더욱 그래야 할 것을 느꼈다 . 성능 ( 聖能 ) 에 붙들리어 일터에 나서야 할 것이며 설교는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전하여야 할 것이며 성역은 자기 뜻으로 택할 것이 아니며 설교는 자기의 말로써 토해낼 것이 못 된다 . 자기도 알지 못하게 성신의 힘의 불림을 당하는 그때가 가장 큰 역사를 감당하는 때라는 것이었다.

② 수도원 같은 기관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를 그날부터 시작하기로 약속하였다 . 수년 전부터 계획하고 가끔 논의하던 일이다 . 그러나 그 일을 위하여 매일 기도로 주 앞에 조르는 일은 없었다 . 그래서 그날부터 매일 한 번 이상 그 일을 위해 기도하기로 하였다 . 구도자들이 모여 육을 위한 노동을 할 수 있고 심령을 위하여는 기도할 수 있는 기관을 두자는 것이었다 . 전도자들도 가슴에 불이 식어지거든 들어와 엎드려 기도하다가 다시 불이 생기거든 뛰쳐나와 외칠 수 있도록 조용한 곳에 자리를 정하여 집과 땅을 준비하 자는 것이었다 . 현대식 신학교도 아니고 또 수도원도 아닌 그 어떤 것으로 , 성경 읽고 기도하고 노동함으로 육과 아울러 심령의 훈련을 받다가 주님의 명령이 가슴에 떨어지거든 누가 오라거나 말거나 뛰어나서지 않을 수 없는 불타는 가슴을 가지고 사람의 거리로 나서게 하자는 것이다 . 또 고요한 기도의 처소를 갈구하는 자를 위하여 하루바삐 그러한 기관을 만들기 위하여 기도하자고 하였다.

 

어느덧 동이 트고 동해에 불을 켜 들고 올라오는 햇발을 보면서 아래와 같은 기도를 드리고 그 자리를 떠나 숙소로 돌아왔다.

 

지난 밤 저희 두 형제가 주고 받은 이야기 가운데 불필요한 것이 있사옵거든 남김없이 거두어 주시옵고 만일에 주의 뜻에 합당한 부분이 있사옵거든 저희의 생명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 아멘 . 저희가 원하여 조르는 일이 주님의 뜻에 합하는 일이옵거든 속히 이루어 주시옵소서 . 아멘 .

 

 

 

그의 임종

 

1933 년 10 월 2 일의 석양이 원산 광석동 골짜기에 기울어질 때 33 세의 꽃다 운 청춘인 용도 군은 송 부인과 영윤 , 영철 군과 몇 동지를 앞에 놓고 눈을 영원히 감아 버렸다 . 신학생 몇 사람의 찬송가 곡조에 맞추어 맥없이 손가락으로 박자를 놀렸고 동지들이 마지막으로 물 한 술이라도 입에 넣어주고 싶어 둘러 앉은 가운데 차례로 떠 넣는 물을 일일이 받아 넘기었고 마지막으로 아들의 손길도 잡아 보았고 최후까지 똑똑한 정신으로 평화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 그때의 내 심경을 내 어찌 말로써 표현할 수 있으리오 . 발 밑에 창해 ( 滄海 ) 도 단풍의 앞산도 눈에 걸리지 않았고 뜰 앞에 흐르는 물소리 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 주 앞에 만날 수 있는 작별이며 가는 길이 승리의 길인 줄 알면서도 가슴이 빡빡하게 아파짐을 면할 길이 없었다.

최후의 4 일 간을 그의 병석에 함께 있었는데 사흘이 되는 날까지도 행여나 건강이 회복되었으면 하는 기원이 나에게도 있었고 병자 자신도 있는 듯하였으나 마지막 날부터는 분명히 회복 못될 것을 알게 되었다 . 물론 병자의 기운은 마지막 새벽에도 아주 명랑했고 똑똑하였다 . 풀어졌던 눈동자가 반짝반짝 번갯불같이 움직이었고 음성도 똑똑하여졌고 몸을 기동하는 정도도 놀라우리만큼 자유스러웠다 . 그러나 몇 시간 남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된 것은 군의 이야기 전부가 다 최후의 유언이었기 때문이다 . 자기가 이상으로 하는 교회와 수양기관과 교역자는 어떤 것이라는 것도 발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서 부탁한 말도 많이 있었다.

나는 아직 그때에 들은 말을 말하지 않으련다 . 부탁을 감당 못하는 무신 (無信 ), 무력한 자로 울고 있는 형편이니 붓을 들 용기도 없고 또는 아직 기회가 아니라고 느끼어지기 때문이다 . 피 한 방울 , 살 한 점 없이 껍질만이 남아있는 몸으로 내 눈 앞에서 숨결이 잦아지던 군의 모습을 내 또한 숨질 때까지 잊을 수 없다 . 주님의 참된 종으로 피를 말리고 살을 야위어 쓰러진 군을 추억할 때마다 우둔한 내 가슴에도 귀한 충동을 많이 받고 있으며 새로운 생명이 힘있게 뛰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 이미 가신 용도 군 ! 군이 임종시 내게 준 유언의 부탁을 내 힘써 지켜 보려고 하노니 , 주님께 구하여 나의 약함을 도와주시게.

주님이시여 , 용도 군을 통하여 나에게 주신 교훈이 한없이 큼을 깨닫게 하시고 따라서 실행할 수 있는 힘까지 주심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 아멘 . 

(1935 년 봄 )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2 장

 

용도 형님과 나 - 이환신(李桓極)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만주 방랑의 길에서 돌아와 피어선 성경학원에 입학한 때는 서기 1923 년 가을이었다 . 그 이듬해 봄에 광화문교회에서 토론회가 열렸는데 ‘ 때가 영웅을 만드느냐 , 영웅이 때를 만드느냐 ?’ 하는 논제로 피어선과 협성신학교가 대전하였다 . 피어선측 연사로 출전한 나는 말을 해나가다가 진시왕의 예를 들어 영웅이 때를 만든다는 것은 이로써 명증되는 게 아니냐고 단언을 내린 후 하단하였다.

그랬더니 내 뒤를 이어 저편 쪽에서 청년 하나가 나오는데 키가 자그만 하고 몸이 호리호리해서 풍채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으나 그 눈의 광채가 번쩍임이 심상치 않은 인물인 듯함이 직감되었다 . 아 , 이 사람이 나와서 말을 한참 하고 나서 내 말을 논박하고 쳐 내리는데 도무지 꼼짝할 수 없으리 만치 몰리었다 . 특히 진시왕의 예를 반박하는 데는 어떻게나 몰아세우고 깎아 내리는지 창피해서 얼굴이 확확 달아 들어왔다.

내가 처음으로 보는 사람이지만 변론 몇 마디를 들어 보아서도 비상하게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 이 청년에게 내 마음이 폭 끌리었으므로 폐회 후 나는 곧 그와 인사를 했다 . 아까도 이름을 들어서 알았던 바이지만 분명히 이용도라는 청년이었다 . 이날 밤 우리는 서대문까지 전차를 타고 와서 서로 헤어졌다 . 이후부터 우리는 노상 혹은 특별한 기회에 만나게 되었다 . 1924 년 5 월 이호빈 형이 신학교를 나오시었다 . 호빈 형과는 2 〜 3 년 동안 간도 벌판에서 동고동락하였고 생사의 경 ( 境 ) 에 손잡고 다니던 일이 있었으니 이미 친교가 깊었었다 . 그래서 그 해 가을에 나도 신학교로 전학하였고 나 는 곧 용도 씨를 소개하였다 . 이때에 호빈 형은 신학교 기숙사에 계시고 나와 용도 씨는 피어선 기숙사에 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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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용도 씨와 나는 퍽 가까워졌다 . 그래서 서로 정을 드리며 학문을 논구하고 이상을 피력하곤 했다 . 당시 그는 신관 확립에 대단히 고민하는 모양이었고 사회관 , 연애관에도 머리를 썩이는 모양이었다 . 이때 그는 한 1 주일 동안 어디를 나갔다가 밤이 아주 깊어 돌아 오곤 했는데 이 시기가 그에게는 극히 심각한 고민기였던 듯 하였다 (후에 들은바 그는 자살을 하려고 한강변에서 밤새도록 방황했다고 한다).

 

 

 

그의 성격과 재질( 才質 )

 

용도 씨는 두뇌가 아주 명민했고 경우에 밝고 사리에 명백철저하기로 유명했다 . 시비를 가르는 데 있어서 그렇게 지독하고 무서운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무슨 논쟁이 생기게 되면 그는 발벗고 나서 달라 붙였고 조금이라도 경우가 틀리게 되면 막 들이대고 조목조목 따졌다. 좀 어름어름 하다가는 용도에게 경을 단단히 치는 것이었다.

“ 여기가 어디라고 그 따위 수작을 하느냐고 …… .” 그는 말하자면 극단성의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 우정이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는 ‘ 내 ’ 가 없고 ‘ 내 것 ’ 이 없는 듯이 아주 탁 쏟아놓고 지내다가도 한번 무슨 논쟁이나 승강이 생기게 되면 절대로 지려는 마음이 없었고 또 지는 법이 없었다 . 그리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거나 자기에게 어떤 주장이 생기면 그때에는 천만인 앞에서 굴함이 절대로 없는 특성을 가졌음을 여러 가지 실례로 보아서 알 수 있었다 . 다시 말하면 그는 아주 맵고 아주 지독하고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 재간이 비상하였다 . 찬양대에서 유력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음악을 잘함을 알 수 있었고 또 극 ( 劇 ) 을 대단히 좋아하고 또 그의 출연은 귀재라고 하리만치 천재적 묘기를 가졌다 . 특히 비극의 주인공으로 나서면 못 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 이상 외에도 가극을 퍽 좋아했는데 가와 극을 다 좋아하는 것이 결국에는 가극을 즐기는데 이르렀던 것인가 한다 . 그는 많은 가극을 썼고 또 자신이 연단에 나서서 출연도 하였다.

어쨌든 신학교에 있는 동안 그는 못하는 노릇이 없는 만능적 천재요 , 안 참여하는 데가 없는 호동적 ( 好動的 ) 학생으로서 만인의 총애의 대상이 되었다 . 이렇게 지내는 학생이니만치 공부 한가지만 드려 파내는 학생과 같이 성적이 좋을 수는 없었다 . 분명치는 않으나 그때 영문과 졸업반의 종업 석차는 정경옥 , 유자훈 , 이용도의 순이었다고 기억된다 .

 

 

 

삼이 ( 三李 ) 형제

 

언제 어디서라고 명언하기는 어려우나 우리 삼이 ( 三李 ) 는 퍽 가까워졌다 . 3 형제라는 시기와 비평을 받게 된 것도 그 후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 다른 학생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주목하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 셋은 결정적으로 가까워졌다 . 결국은 본격적으로 친형제 관계가 맺어지고야 말았다.

셋이 다 넉넉치 못한 형편이므로 우리는 현저동에 셋방을 얻어 자취를 하던 시대도 있었다 . 이때에 즐거웠던 생각 , 이때에 자유롭게 활기 펴고 뛰놀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시원해진다 . 참으로 이때의 그 재미스럽던 여러 가지 장면은 붓으로나 입으로나 다 형용할 수 없는 지경이다.

우리 세 사람을 다 붙들어다 놓고서 하나씩 성격 검사를 해본다면 셋이 각각 다르고 또 각각 다른 특색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 호빈 형님은 성격이 누긋누긋하고 태도가 느릿느릿함에 반하여 용도 형은 성격이 대단히 급하고 언동이 명결하였다 . 그래서 이 두 분만이 마주 않으면 조화가 잘 안되어 충돌이 되기 쉽고 그 둘만 집에 있는 때는 별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 거기에 내가 들어서야 말이 터지고 웃음이 피어 오른다고 두 분이 늘 말씀하셨다,

내가 나를 평하기는 어려우나 나는 그 두 분을 합쳐서 만들어낸 중간치라고 남들이 말을 하니 스스로도 그런 듯이 생각하게 되었다 . 내가 어디 갔다가 들어오노라면 두 분이 다 문턱에 나서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 이리하여 나는 두 분 형님을 붙여 주고 풀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 그러면서도 3 인 중 1 인이 빠지면 “ 오늘 일은 틀렸군 ” 하면서 잠시 떠난 한 사람을 무던히도 그리워하였다 . 이렇게 되니 세 사람은 자연히 한 몸 같이 되고 한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학교의 삼이형제라면 신학교 밖의 사람이라도 신학교에 좀 자주 왕래하는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 그러기에 졸업하기 전후하여 양주삼 ( 梁柱三 ) 총리 사님께서도 우리 셋을 모아 놓고 “ 되도록이면 3 인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힘써 주겠다 ” 고까지 하셨던 것이다 . 총리사님이 이런 말씀을 안 하시더라도 우리 심중에는 이미 계획과 안이 서있었다 . 즉 한 사람의 월급을 받으며 셋이 한 교회를 맡아 가지고 호빈 형님은 교회 치리 ( 治理 ), 용도 형님은 주일학교부 , 나는 청년회 일을 하기로 생각했었다 . 물론 졸업만 하면 곧 실천에 착수하려고 졸업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졸업을 하고 나니 우리 셋은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부딪쳤다 . 즉 호빈 형님은 이미 간도지방에 파송을 받아 가족이 다 그 곳에 가 있었으니 그리로 안 갈 수 없게 되었다 . 그래서 용도 형이 간도로 가기로 했다 . 양 목사님의 양해와 진력으로 용도 형도 간도로 가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원산지방에서 장로사 부라만 씨가 용도 형을 꼭 붙잡고 절대로 놓지를 않았기 때문에 간도행의 계획은 아주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용도 형도 다른 곳에는 절대로 안 가겠다고 하고 간도에만 간다고 뻐기었으나 부라만 씨가 너무도 간절히 붙잡음에 성의대로 한다고 붙잡힌 것이다 . 용도 형이 간도로 갔다면 나도 물론 간도로 가서 셋이 간도 벌판에서 한참 일을 하다가 죽어지고 말던가 , 사는 날까지 살았을 것인데 용도 형의 일터가 원산지방으로 확정되는 바람에 나는 정신이 얼떨떨하였다 . 두 분이 다 계신 곳이라면 나도 물론 따라가겠지만 어느 한 분만 따라서는 가고 싶지 않았다 . 다른 한 분이 없어 섭섭할 생각과 떨어져 있는 다른 한 분의 외로움이 너무 클 것을 생각할 때 ‘ 이왕 팔자가 이렇게 된 이상에는 …… ’ 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연전 ( 延專 ) 문과에 입학을 하기로 하였다 .

이리하여 몇 날 전까지도 가슴에 그리고 있던 이상과 밤낮 꿈꾸고 있던 아름다운 꿈은 완전히 깨어져 버리고 정든 3 형제 ,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못살 듯하던 3 형제는 “ 아무 때에라도 한 곳에 모여 일하다가 한 구멍에 묻히자 ” 고 약속을 굳게 하면서 동서로 남북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

 

 

 

이별 후의 정

 

서로 떠나 사는 우리 셋은 우편 배달부에게 모든 정성과 희망을 두고 살았다 . 그저 편지 쓰기와 편지 받는 것만이 우리의 생활에는 최선인 듯하였다 . 이리하는 동안에 우리의 정의는 더욱더욱 두터워졌다 . 몸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 반비례하여 정이 더 깊어가는 데는 우리 각자가 다 기뻤고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생의 가치와 행복감을 찾는 것이었다,

 

 

 

연연한 정의 구체적 발현

 

연희전문에 입학한 나는 제 2 학년 여름방학에 순회 강연대를 조직하였다 . 물론 가려는 노정은 강원도 동해안을 목표로 했다 . 가서 용도 형을 만나니 반가웠다 . 너무도 반가움에 나는 그날 밤 강연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 나도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문제 하나를 형이 먼저 꺼냈다.

“ 자 , 우리 이렇게 해보자고 . ‘3·1 당 ’ 이라고 이름을 짓잔 말이야 .    ① 삼위일체를 믿고 ② 지덕체 ( 知德體 ) 삼육 ( 三育 ) 을 이상으로 해서 ③ 삼이 ( 三李 ) 가 일체가 된다는 의미에서 말이야 .”

이 안을 결정한 우리는 손을 붙잡고 울었고 가슴을 안고 울었다.

이때에 멀리 간도에서 삼각산 도선사 ( 道詵寺 ) 의 수양회에 오시는 호빈 형을 원산에서 만날 수 있었으므로 거기서 우리는 우리 3 인의 일체를 또 한번 구체적 문구로 결정하게 되었다 . 여기서 우리의 손은 영원히 한 손으로 붙잡혔고 우리의 몸은 영원히 한 몸으로 묶이었다.

아마 내 일생에 있어 우리 셋이 다 각각 그 생에 있어서 이렇게 기쁘고 이렇게 희망이 가슴에서 뛰는 때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 이때를 내 생에 있어서의 재봉춘 ( 再逢春 ) 이라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

 

 

 

이별 , 또 이별 , 영 이별

 

헤어져 사는 우리는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굳게 하며 각각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 그런데 세월이 흘러 어느덧 4 년이 지나 나는 연전을 졸업하게 되었다 . 1931 년 4 월 지난 해 겨울에 용도 형이 주일학교연합회에 와계시게 되었고 이해 5 월에 가족이 다 서울시 현저동으로 이사를 해왔으므로 한 지체를 멀리 떼어둔 편신 ( 片身 ) 들이나마 시간을 얻어서는 만나고 기회를 타서는 모이어 기뻐하고 좋아하였다.

이러다가 나는 여름 7 월에 좀더 배워 본다는 생각에서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다 . 내가 떠나는 날 용도 형이 경성역까지 나오셨다 . 많은 사람이 전송을 나왔고 여러 사람이 내 손을 잡았으나 그 중에서 가장 힘있게 내 손을 잡아준 이는 우리 형님 용도 씨였다 . 모자를 내두르는 형의 그림자가 점점 작아질 때 내 마음에는 큰 슬픔이 왔다.

한번 떠나 몸이 만 리에 헤어지니 소식도 자주 통하지 못하였다 . 첫 해에는 그래도 간단한 문안만은 이따금씩 통했으나 얼마 후에는 소식조차 듣기가 어려웠다 . 형이 대단히 약해진 몸과 필사적 사역을 하시는 것을 보고 떠나 온 나는 생각이 고국으로 향할 적마다 형의 생각에 염려를 많이 하였다 . 컬컬한 생각대로 한다면야 날마다 편지를 써 보내도 흡족함이 없겠지마는 원래 미국 유학이란 것이 푼 초의 여가도 없는 골몰한 생활임에 나는 편지도 자주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지나는 동안에 세월은 그냥 흘러 1933 년 초겨울에 이르렀다 . 잊혀지지도 않는 10 월 10 일 , 나는 호빈 형의 편지 중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으니 용도 형의 부보 ( 訃報 ) 가 그것이었다 . 첫 순간에 나는 머리가 아찔하고 가슴이 찌르르하더니 그 다음 순간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을 뿐이고 다른 느낌이나 생각도 없어졌다 . 그 후에 나의 의식에 떠오른 생각은 그저 ‘ 이제는 내가 …… 하여야겠구나 ’ 하는 사명감에 가슴이 울렁거릴 뿐이었다 .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3 장

 

그는 분명히 성자 - 이호운(李浩雲)

 

현저동에서

 

신학교에 입학하려고 올라와서 하루는 신학교 기숙사 신세를 지고 이튿날 나는 오상훈 형과 둘이서 현저동으로 이 목사님 댁을 방문하였다 . 목사님은 출타하시었으나 목사 부인의 친절한 영접을 받아 방에 들어가 앉았다 . 잠시 후에 목사님이 들어오셨다 . 목사님은 참으로 퍽이나 친절히 응대하신다 . 얼마 동안 이야기를 한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나서려고 했다 . 눈치 빠른 목사님은 벌써 아시고 내 손을 붙잡으시면서 시험 다 치르기까지 집에 있으라고 하셨다 . 나는 이 말씀에 더 없는 영광과 기쁨을 느꼈다 . 그러나 원체 손님 많은 목사님 댁에 나까지 식객이 되어 폐를 끼친다는 것은 너무나 미안하므로 나는 굳이 사양하였다 . 그러나 목사님의 그 뜨거운 사랑 [ 熱愛 ] 과 참된 정성 [ 赤誠 ] 은 나의 사양을 정복하고서 나를 주저앉히고야 말았다 . 나는 한편으로 미안을 느끼면서도 감사의 눈물과 감사의 기쁨 속에서 그 댁에 유하기로 했다.

목사님 댁은 작은 방이 둘밖에 없다 . 그런데 목사님 댁 식구 4 인과 다른 손님 두 분이 계시니 나까지 합하면 정숙객 ( 定宿客 ) 이 7 인이 되는 셈이다 . 좁다란 서울 방 두 칸에서 7 인이 뒹굴게 되니 그 불편은 말할 것 없다 . 가끔 방문객이나 오면 집안 식구는 문밖에 섰거나 뒷산으로 올라가야 되는 형편이었다 . 그리고 끼니 때도 뜻하지 아니한 식구나 한둘 오게 되면 밥이 한 공기씩 돌기도 한다 . 그것도 채 못 돌기도 하는 것이었다 .

며칠 후에 나는 신학교에 입학이 되었다 . 같이 있던 박송죽 양도 합격되었다 . 우리의 기쁨도 컸지마는 목사님은 우리보다 더 기뻐하시었다 . 그러나 나에게는 큰 걱정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보내주겠다는 곳에서 학비가 올 수 없게 됨이었다 . 그렇다고 목사님의 댁에서는 하루도 더 있을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나는 걱정 아니치 못하였다 . 이때에도 목사님은 벌써 눈치로 다 짐작하시고서,

“ 내 호운이한테 청이 하나 있어 . 다른 데 갈 생각 말고 나와 같이 있어야 돼 ” 하시는 것이었다 .

나는 안 그러려고 하면서도 미안한 빛을 보였던 모양이다 . 이때도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 호운이 , 조금도 미안해 하지 말아요 . 이 집이나 이 밥은 내 것이 아니오 . 이 집에는 주인도 없고 손님도 없으니 염려말고 주인 노릇이나 잘 하라고.”

나는 너무도 황공하고 감사하였다 . 나와 같은 형편에 있는 박 양도 나와 같은 감격으로 나와 같이 목사님 댁에 유숙하기로 했다 . 이때부터 사오삭 (四 五朔 ) 동안 나는 목사님과 같이 기거숙식 ( 起居宿食 ) 하면서 충성된 구도자의 활역사 ( 活歷史 ) 를 배우게 되었다 .

 

 

 

따뜻한 가정

 

현저동 생활의 몇 달 동안은 퍽이나 유쾌하였다 . 목사님은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었다 . 내가 세상에 나온 후 이때까지 이 목사님처럼 나를 사랑하신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만치 나는 그의 사랑을 심각 ( 深覺 ) 하고 있다 . 나는 목사님에게 무상의 존경을 드리면서 또한 심절 ( 深切 ) 히 친할 수가 있었다 . 그저 만나기만 하면 가슴이 시원하고 언제까지든지 마주 앉아있고 싶었다 . 그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 있는 일이 없고 또 무슨 경우에든지 떨떨해서 어물거리다가는 큰 경을 치는 것이었다 . 경이라고 하니까 매를 맞는 것이 아니다 . 목사님이 그저 고개를 소곳하고 무슨 일이나 무슨 심부름을 당신이 몸소 하신다는 것이다 . 그러기 때문에 언제든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내가 내 손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 그렇게 그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일감을 앞에 두고는 참지를 못하시는 성질이었다.

남의 사정을 보는데 목사님같이 알뜰한 이는 없을 것이다 . 그저 살이라도 베어 먹이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것이었다 . 내게 조금이라도 어려움이 있는 눈치를 보시면 무엇이든지 당장 주시기에 급급하시었다 . 부인께 말씀드리기가 바빠서 손수 궤짝을 들추고 가방을 털어가며 내의 , 양말 , 수건 같은 것을 있는 대로 털어주시곤 하였다 . 이런 때는 감사하다 못해 도리어 민망히 생각되었다.

참으로 목사님은 나에게 있어서 친형보다도 ,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해 주시는 어른이었다 . 끼니 때는 목사님이 손수 밥을 퍼주신다 . “ 내가 먼저 퍼먹을 테야 ” 하시면서 밥주걱과 강끼를 빼앗아 가지고는 “ 자 , 호운이 내가 퍼주는 밥 먹으라고 ” 하시면서 나에게 먼저 주시었다 . 밑을 둘러 더운 밥을 잔뜩 담고 꼭꼭 눌러서 주시는 것이었다 . 찬도 맛있음직한 것은 내 편으 로 자꾸 밀어 주셨다 . 아무렇게 해서라도 좀 잘 먹이고 좀 많이 먹게 하시려고 애쓰시는 모양은 나의 눈으로 언제든지 감사의 눈물에 젖게 하곤 했다.

현저동 이 목사님 댁은 내가 이세상에서 처음 본 따뜻하고 사랑에 넘치는 가정이었다 . 아침저녁 찬송과 기도소리가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 이 목사님의 가야금 타는 소리는 이 집에 한층 더 낙원미 ( 樂園美 ) 를 더하였다 . 조석의 끼니에는 찬송 , 성경 낭독 , 기도가 있고서 식사를 시작한다 . 이 댁에는 의외의 손님이 가끔가끔 식탁에 둘러 붙어서 밥이 부족되기가 보통 일이었다 . 방도 좁지만 식탁도 좁아서 손님이 한두 사람만 와도 정면으로 앉지를 못하고 모재비로 앉아 한편 무릎만 내밀고 앉아 먹게 된다 . 찬이란 것도 도무지 없건만 이 집 밥은 유난히 맛이 있다는 것이 이 집 밥을 한끼라도 먹어보는 사람들의 평이었다 . 그래서 저의 집에는 좋은 밥을 잔뜩 쌓아 놓고도 가난한 목사님 댁 밥을 축내고 가기를 기뻐하였다.

이 집에는 대놓고 늘 먹는 식객도 많고 한 끼 두 끼 짬짬이 와서 먹는 손님도 많았다 . 그래서 이 집 대문은 이들 손님의 출입 때문에 큰 고생을 하였다 . 그러나 이 집에서는 그것을 겨워하거나 싫다고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만일 누구든지 그런 기척을 조금이라도 보였다가는 큰 일이다 . 그러기 때문에 누가 오든지 다 내 식구로 대하고 누구든지 이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는 이 집 식구의 자격과 권리를 주는 것이다.

목사님은 이 집의 식구라기보다 다른 집 식구라고 할 만큼 집에는 못 계시었다 . 그 목사님이 집회를 마치시고 돌아오실 때는 벌써 초벌 풀은 푹 죽어 들어오시는 것이다 . 방 안에 들어서시면서 그냥 자리에 쓰러지신다 . 누우시면 운신도 못하고 너무 맥이 없어서 잠도 못 주무시고 음식도 못 잡수시며 그냥 뒤채기만 하신다 . 그러면서도 말씀하신다 .

“ 나는 집에 와서 쉬면 안돼 . 그저 강단에 나서야 밥도 먹고 몸도 성한 모양이니.”

그래서 목사님은 그렇게 지치신 몸을 가지고도 하루도 쉬시는 것은 원치 않으시고 그저 결사적으로 단에 올라서고 소리 높여서 외치시는 것이었다 . 그리고 목사님께서 집에 들어오신다 해도 집이 휴양처는 못 된다 . 성경 보시기와 기도하시기에 있는 시간을 다 허비하신다 . 그리고 목사님이 어디 갔다가 돌아오시기만 하면 어떻게 그렇게 알고 찾아들 오는지 방문객의 행렬이 끊임없다 . 누구든지 찾아오기만 하면 곧 자기를 내버리고 그를 성심으로 응접하신다 . 만일 무슨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왔으면 그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같이 의논하고 연구하고 설명하고 또 기도하기에 온 하루를 다 보내신다.

만일에 신앙 문제에 대한 어떤 논의가 생기면 금방까지 녹으라 지셨던 목사님에게 어디서 그렇게 힘이 오시는지 그냥 열이 올라 대설교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 자리가 바로 소 ( 小 ) 부흥회가 되는 것이다 . 여기에 참여한 자는 돌아갈 생각을 잊어 버린다 . 일어서기를 싫어한다 . 그래서 아침에 온 이가 저녁 때에 가기도 하고 혹은 저녁 먹고 밤 지내고 조반까지 먹고 가기도 한다 . 어떤 때는 하루 종일 토론을 하고도 흡족하지 못하여 산으로 끌고 들어 가서 밤새도록 기도로 조르기도 한다.

어느 늦은 봄날 밤이다 . 달도 없는 캄캄한 밤 [ 漆夜 ] 에 목사님까지 4 인은 어떤 형제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뒷산을 향하여 더듬어 올라갔다 . 그 어두운 밤에 조금도 서슴는 기색도 없이 그 약하신 목사님이 앞장을 서서 비호 같이 송림 사이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 그래서 우리는 그 송림 사이에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 어려운 문제를 주님께 내맡기고 가벼운 몸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혹시 하루 이틀 동안 집에 계시게 되면 목사님은 성경과 신학 서류와 성자 전기 등을 많이 읽으신다 . 그는 『 성프란시스전 』 과 『 성어거스틴전 』 을 애독하셨다 . 『 성어거스틴전 』 은 목사님 자신이 손수 번역까지 하셨다 . 성자의 전기를 읽으실 때마다 그의 가슴은 존경과 동경의 피가 뒤섞였었고 각오와 결심에 주먹을 부르쥐었다 . 그의 최상의 동경은 성자적 생활이었고 그의 지대 ( 至大 ) 의 기원은 ‘ 전체를 주께 바치고 사는 생활 ’ 이었다 . 그래서 그는 프란시스코를 무척 존경하고 그 생활을 동경하였다 . 그가 몽중에도 쉬지 않고 올리는 기도는 아무쪼록 진리를 좀더 알아보고 아무렇게 해서라도 주님의 뜻에 좀더 충순 ( 忠順 ) 해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그는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요 , 하늘이 보낸 천사로 알아 존경하며 받들어 섬겼고 목석에서라도 진리를 배우려고 노력하시었다.

“ 주여 , 이 미련한 인생으로 하여금 바위틈에 서서 절개를 지키는 소나무를 배우게 해주시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을 배우게 해주소서 ” 하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그가 입류 ( 入流 ) 를 용인했다는 것도 오직 단지 진리를 사모하고 주의 음성을 들어보려는 열광적 기도의 새빨간 일념에서 이었음을 나는 확신하고 또 명언한다 . 그는 거지와 한 가지로 숙식하기를 즐겨 했고 정신이상자와 어린 아이의 말에도 주님께서 나에게 내리시는 어떤 교훈이 있지 않는가 하여 겸비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었다 .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 와서 원산의 예언파와 관계 끊기를 충고할 때도 말씀하셨다.

“ 사람이 다 그들을 이단이라고 하더라도 주님은 그들을 버리시지 아니할 것이니 내가 어찌 그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 나는 저들과 한가지로 이단 소리를 듣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세상에서 버림당한 저들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 또 저들이 정말 이단이라고 하더라도 저들 속에 만일 작은 진리가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그 진리만은 달게 받아 배우려고 합니다.”

“ 주의 전을 위하여 간절함이 나를 삼켜 멸하게 하리라 ” 한 말씀이 주님의 응함 같이 진리를 위한 간절한 일념이 그로 하여금 ‘ 이단 ’ 의 명패를 차게 하였다.

그는 수도생활을 퍽 염원하고 있었다 . 그래서 가끔 수도생활의 구체적 조직 계획을 말씀하시었다 . 그러시다가 마지막 한탄은 당신의 사정이 그를 허락하지 않음을 슬퍼하시었다 . 수도생활을 원한다고 해서 그가 염세적 도피주의자는 아니다 . ‘ 어찌하면 주의 참된 종이 되고 , 어찌하면 단 하루라도 주의 뜻에 어그러지지 않는 생활을 해볼 수 있을까 ’ 하고 밤낮 기도하고 연구하여 얻어진바 결론이 수도생활이었다.

그가 늘 원하는 바는 한적한 시간을 얻어 마음껏 기도를 올리는 것이요 , 주님과 대좌하여 그 사랑과 그 진리를 배우는 것이요 , 명상하고 사색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그 가정과 조선 교회는 그에게 그 원을 잘 안 이루어 주었다 . 그래서 그는 항상 고요한 수도원 생활을 동경하였다 . 그의 가슴 속에 깊이 감춘 소원은 그렇게 강단에서 외치며 다니는 것보다는 십자가를 지고 말 없이 거꾸러져 죽는 것이나 어느 작은 한 사람을 붙들고 그를 섬기다가 죽는 것이었다 . 그래서 목사님은 수도원에 대한 연구를 늘 하시었고 수도원 실현을 위하여 늘 기도하시었다.

 

 

 

신영리 ( 新營里 ) 에서

 

6 월도 다 지난 7 월 초인 듯하다 . 하도 지친 그는 누가 보기에도 딱하였다 . 그래서 여름 동안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좀 휴양하라는 충고와 권면이 많았다 . 이에 목사님도 좀 수양하실 의사가 생겨 자하문 밖 신영리로 이사를 하시었다 . 나도 같이 나갔다 . 그곳은 시내에 드나들기는 꽤 멀다고 하겠으나 경치는 좋고 시원한 곳이었다 . 바로 그 옆에 세검정 ‘ 풀 ’ 이 있고 부근에는 과원들이 있고 집 앞에는 좋은 시내가 흐르고 있다 . 참으로 고요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 그러나 그곳 역시 목사님에게는 그리 고요한 곳이 못 되었다 . 이리로도 조용히 찾아오는 방문객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 집에서는 다섯 식구가 살았다 . 문 안에서나 문 밖에서나 경제적 궁핍은 그냥 일반이었다 . 목사님은 이곳에 오셔서도 몇 날을 댁에 계시지 못하고 또 집회 인도로 나가시었다 . 고요히 쉬러 온다고 와가지고 집에는 붙어 있지를 못하고 집에서 떠나 사시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아마 내가 목사님과 같이 몇 날이라도 기거를 같이 할 수 있는 때는 이때일 것이다 . 그 전에는 한 집에서 산다고는 했어도 나는 학교에 가고 목사님은 늘 집회에 인도하러 나가시고 밤이면 산기도를 나가시게 되어 같이 마주 앉아본 일이 극히 드물었다.

여기서 목사님은 신도들을 데리고 예배당의 안팎을 대정결 ( 大淨潔 ) 하신다 . 목사님이 손수 방바닥을 쓸어내고 물걸레를 치신다 . 그리고는 나를 데리고 병자의 집과 신자 댁을 방문하였다 . 목사님과 같이 기도 드릴 기회도 좀 있었고 그의 설교를 들어볼 수 있었다 . 여기서 나는 그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가 있었다 . 그는 가끔 나에게 충고를 하시었다 . 알뜰한 정으로 부탁을 하시었다.

“ 호운이 , 장가가지 말고 독신으로 일생을 살라고 . 이 몸을 전체로 주께 바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소.”

이런 말씀을 목사님은 가끔 내게 하시었다.

자기의 전체를 그대로 주께 바치고 싶으면서도 가정 형편상 그리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시는 목사님은 자기는 못하여도 나만은 주 앞에 완전히 바치는 자 되기를 간원하셨던 것이다.

참으로 목사님은 늘 주의 참된 사자를 기다렸다 . 그래서 시므온이 주를 본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자기도 시므온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하셨다 . 그는 편지를 쓸 때 흔히는 ‘ 是無言 ’( 시무언 ) 으로 쓰시었다 (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몇 자 쓰겠다 . 시므온은 말없이 오랫동안 주를 기다리었다 . 그러다가 성신의 지시로 주님을 만날 때 한없이 기뻤다 .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축복한 후 모든 사람에게 주님을 소개한 후 사라졌다). 목사님은 언제나 시므온과 같은 자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었다 . 자기가 가장 부족하고 약한 종인 것을 자각하신 그는 이 세대에는 어서 바삐 주님의 참 되고 힘 있는 주의 사도가 나타나야겠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바래었다. 

“ 저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할지라 ”(요 30:31) 고 한 요한과 같이 자기를 숨기고 참된 사도를 내세우시려고 무척 애를 쓰시었다 . 마치 시므온이 성전을 드나들면서 뭇 아이를 항상 주목하여 보았던 것과 같이 목사님도 역시 늘 심중에 이 시대의 예언자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언제나 시관에 전 주의를 다하여 눈 앞에 지나가는 일만 사람을 유심히 주시하시었다 . 그는 참으로 참된 주의 사자 하나를 만나보고 죽기를 퍽도 갈망하였다 . 이렇게 간절한 소원은 꿈에도 늘 가지고 있었다 . 그래서 한번은 꿈에 그 사람을 만나신 것이다.

“ 비몽사몽 간에 나는 종로 대거리에 이르렀습니다 . 차마 ( 車馬 ) 가 복잡한 그 거리에 한 거대한 사람이 우두커니 섰기에 나는 가까이 가보았습니다. 그는 마치 세례 요한같이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고 옆에 물병을 차고 손에는 기다란 지팡이를 짚었습니다 . 머리털이 길게 늘어졌으나 그 위풍은 참으로 당당하여 감히 우러러 보기도 어려웠습니다 . 그는 그 거리 복판에 버티고 서서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를 한참 동안 하더니 소리를 높여 ‘ 회개를 하라 ’ 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 들러선 사람들이 욕을 하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미쳤다고 비웃으나 그는 오직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라고 외치었습니다 . 나는 너무 기뻐 그의 곁에 바싹 들어서니 나는 그의 허리에도 차지를 못하게 그의 키는 컸습니다.” 이것이 목사님의 꿈꾼 이야기이다.

목사님은 곧 나를 앞에 엎드리게 하고 이 기도를 올리시었다.

“ 저는 말할 수 없이 부족하올시다 . 가장 큰 죄인이로소이다 . 또 가장 약하고 가장 불충한 자식이로소이다 . 주여 , 이 세대를 위하여서 언제나 참된 종을 보내시려나이까 ? 주여 , 어서 참된 예언자를 보내어주시옵소서 . 주여 , 그 가 누구입니까 ? 그가 누구이겠습니까 ? 나에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 나는 기쁨으로 그에게 수종 들겠나이다.”

목사님은 모든 사람을 다 극히 주목하여 보시었다 . 그리고 누구나 다 존경하였고 천사같이 접대하시었다 . 그는 항상 예언자를 찾으시었다 .

얼마 후에 목사님은 원산방면으로 여행을 가시고 나는 기숙사로 입사하게 되었다 . 그 후에는 목사님을 뵈올 기회가 드물었다 .

그 뒤에도 그는 쉼 없는 과로를 계속하시다가 몸에 병이 중하여지셨다 . 다음 해 봄에는 연회 ( 年會 ) 에서 쉬라는 통고를 받아 휴직하게 되었다 . 그러나 그의 마음은 쉬려고 하지 않았고 또 여러 가지 형편은 그를 쉴 수 없게 하였다 . 내외의 사정은 그의 심신에 안식을 주지 않아 그의 영육은 날로 피로를 더하고 있었다 . 여러 친우들의 권고로 그는 정양의 땅을 찾아 평양 대보산 , 삼방 , 원산 등지로 유전하시었다 . 그러나 그의 병은 날로 심중하여 갔다 . 그래도 그는 앞으로 좀더 일할 기회가 있기를 바랬다 .

“ 내가 죽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아있어 여호와의 행하심을 전파하리로다 ” (시 118:17) 라고 하는 말씀을 읽어 자기가 좀더 세상에 남아 있어 주님의 이름을 전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 . 그래서 그는 언제나 신병을 비관치 않으셨다 . 생각하면 그의 일생은 육체를 무식스러이 혹사하는 생활이었으나 때로는 자기는 ‘ 죽음이라는 복도 그리 속히 받을 수 없는 자 ’ 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생활의 전부는 오직 주를 위해서이었다 . 몸을 돌아보지 않고 무식스러이 살아감도 주의 명령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이었고 병이 중하여짐에 건강 회복에 작은 정성이라도 바침도 좀더 살아서 주의 말씀 몇 마디를 더 외치기 위해서이었다.

참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사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요 , 죽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만 있어지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 밤잠을 안 주무시고 끼니를 잊으시고 땀을 쏟으시고 목이 터지도록 외치시고 웃으시고 안타까워하심이 주를 위해 서이었던 목사님이 병든 몸으로 여기저기 유전하심도 오직 주님의 사업을 위한 애끓는 충성에서임을 나는 확인하는 바이다.

목사님 자신에게 있어서 생은 사다 훨씬 더 괴로운 짐일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제가 편안하기 위해서 생을 싫다고 하지는 않았다 . 그렇지만 주께서는 그의 지상에서의 충성과 공적을 기뻐하시며 그 괴로운 신세에 그 이상 더 오해와 천대와 구박이 임하는 것을 애처로이 생각하시사 ‘ 죽음 ’ 이란 은총의 손을 펴시사 당신의 보좌로 끌어올리신 것이다.

목사님 별세의 비보를 나는 서울에서 들었다 . 이 소식을 들을 때 슬픔보다 감사가 컸고 그 감사보다 아픔이 퍽 더 컸다 . 자나깨나 잊지 못하시는 이 땅의 어린 양을 흩어진 대로 그냥 놓고 가시는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함에 나는 울었다 . 그는 우리를 두고 그만 가시었다 . 우리를 잊지 못하면서 하늘 나라로 가시었다.

그는 비록 가시었으나 하늘에 계셔서도 우리를 위하여 축복 기도를 항상 계속하고 계실 것을 나는 믿는다 . 아니다 . 그보다도 그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아직도 살아계신다 . 그가 흘리신 눈물과 땀과 피 속에서는 지금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 . 그가 한 번이라도 다녀오신 곳에서는 좋은 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 하늘에서 영생을 누리는 나의 목사님 이용도 씨는 이 땅 위에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불러 ‘ 성자 ’ 라고 한다 . 과연 그는 내가 본 성도 중의 첫 사람이다 . 내가 말하고 또 믿는 성자에 대한 개념이나 표본은 고 이용도 목사님이다 . 나는 모른다 . 아직까지도 그에게 이단이라는 명패를 채워두기를 원하는 이가 몇 분이나 되는지 . 그러나 나에게는 이단이라고 쓴 그 글자가 추하게 보이지 않고 성자의 명예를 더 빛나게 하는 훈장으로만 보여지는 바이다.

 

(1936 년 10 월 2 일 )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3 장

 

단 3시간 동안에 받은 인상-

김용동 (金容銅 ): 용인천남지방 감리사

 

위대한 인물이 걷는 길은 평탄한 대로가 아니며 즐거운 꽃밭이 아니다 . 주님이 가신 길은 거친 험로요 , 피 젖은 가시 길이었다 . 20 세기의 이 강산이 낳은 종교가 중에서 주님의 피 젖은 길을 걸으려고 무한한 노력을 하였고 또 힘있게 걸은 뛰어난 종교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고 ( 故 ) 이용도 목사님이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금치 못한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죽여버린 자가 유대교인이었던 것처럼 이 목사님을 욕하고 물고 깎고 찢은 자는 기독교인이요 , 교역자의 탈을 쓴 인간들이었다 . 목사님은 병약한 몸으로 붉은 피를 토하면서도 주님의 복음을 들고 힘있게 외치셨고 소위 지도자라는 인간들의 시기와 욕설을 비 맞듯하며 이 단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쓰면서도 한없이 울며 쓰러져가는 이 교회를 바로 잡기 위하여 심혈 전부를 쏟으시고 광야에 외치는 요한처럼 목이 찢어지도록 외치고 가시었다.

목사님이 가신 자취를 눈감고 더듬어볼 때 전기가 내 전신을 통하는 듯하며 서해에 떨어지는 태양처럼 비장한 그의 종말은 나에게 심대한 자극을 준다. 이처럼 귀하신 목사님과 사귈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함을 슬퍼하나 다행이 ‘3 시간의 인상 ’ 이 나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나는 기뻐한다 .

 

내가 목사님을 만나 뵌 것은 1933 년 여름 평양 덕해 ( 德海 ) 병원 뒷집에서이었다 . 목사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현대의 기독교를 비웃으며 ( 기독교를 비웃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지도자라는 무리들을 조소했다 함이 정당 할 것이다 ) 목사님을 한번 시험하고 골려 주려는 생각을 가지고 동무 N 군과 함께 방문한 것이었다.

작은 아랫방에 중병으로 힘없이 누워계시던 목사님이 우리의 내방을 대단히 기뻐하시는 태도로 겨우 일어나 앉으시더니 고요히 묵도를 올리신다 . 나는 묵묵히 목사님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 그의 얼굴 , 그의 묵도하는 모습 , 그 어느 곳엔가 신비스러운 무엇이 흐르는 듯하였고 그에게서 나오는 그 무슨 힘이 고이고이 내 심장 속으로 숨어드는 듯하였다 . 나는 어느덧 목사님을 비웃는 태도에서 존경하는 태도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목사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우리를 다정히 바라보신다 . 그때에 이상한 그 무엇이 내 전신에 와서 부딪침을 느꼈다 . 그의 인자한 얼굴 그리고 광채 있는 눈동자 , 극히 쇠약한 듯하나 어딘지 심히 강한 듯한 그 모습 . 나는 놀랐다 . 여태껏 내가 보고 경험하여온 인간과는 아주 딴 종류의 사람이 내 앞에서 나를 보는 듯하였고 하늘의 천사가 땅 위에 내려와 앉은 듯하였다 . 목사님을 골려 보려던 나의 마음은 봄날에 눈이 녹아 증발해 버리듯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오직 경애 ( 敬愛 ) 의 불이 내 가슴 속에 불타오름을 느끼었다 . 나는 완전히 정복을 당하고 말았다 . 내가 준비했던 대포 ( 大砲 ) 는 깨어지고 나의 작전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 목사님의 힘있는 눈 , 사랑에 불타는 눈동자가 나의 눈에 부딪칠 때 나는 필경 정복되는 것이었다.

“ 형님들이 이처럼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장래가 유망한 피 끓는 젊은이와 이야기하기를 나는 즐겨 합니다 . 하나님께서 형님들을 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 형님들을 대하니 나에게는 없던 힘이 생깁니다 .”

목사님의 음성은 퍽 명랑하고 보드라웠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듯하였다 . 이때에 나는 있는 용기를 다 내어 첫 질문을 하였다 .

“ 목사님 우리는 여태껏 하나님을 찾았으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고 또 하나님을 알 수도 없습니다 . 하나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목사님은 인자한 눈으로 우리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고요히 입을 열었다. “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겠다는 이가 형님들뿐만이 아니요 , 많을 것입니다 . 그러나 형님들이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기어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 나는 이 자리에서 형님들이 요구하는 하나님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 서해에 사라지는 태양의 아름다움을 형님들은 나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 도저히 못할 것입니다 . 아무리 천재적인 화가라도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그려내지 못할 것이며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라도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읊을 수 없을 것입니 다 . 마찬가지로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보았다고 할지라도 형님들에게 내가 본 하나님을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 . 또 좋은 음식을 맛보고서 그 맛이 어떻다고 눈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 불가능합니다 . 귀로도 , 코로도 ,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이곳에 어여쁜 꽃이 있다면 눈으로 본 그 꽃을 귀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 그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을 귀로써 알 수 없으며 입으로 맛보아야 할 것을 눈으로 쳐다보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 즉 눈의 세계를 코의 세계로 알 수 없고 발표할 수 없으며 코의 세계를 눈의 세계로 알 수도 없고 증명도 못할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심령 ( 心靈 ) 의 세계를 육 ( 肉 ) 의 세계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설명하라는 말 자체가 벌써 잘못된 것입니다 . 내가 이 자리에서 형님들에게 하나님을 보여드릴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 . 설명할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되지 않는 말이지요 . 내가 하나님을 설명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방법을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 형님들과 같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어 애쓴 때가 있었습니다 . 예배당에 가면 목사의 설교 비평이나 하고 학교에 나가면 의심 속에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나 기다렸습니다 . 그러다가 나는 어떤 날 하나님을 만나 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 하나님을 만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어 버리리라 . 하나님이 만일 계시다면 내가 죽도록 찾는데야 나타나 보이시지 않을까 생각하고 그때부터는 매일 밤낮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 산으로 들로 기도할 곳을 찾아서 헤매며 기도하였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볼 수 없고 나의 마음은 더욱더 답답하여지고 괴로워졌습니다 . 나는 죽고 싶었습니다 . 나는 하나님을 끝까지 찾다가 죽고 말리라는 결심을 하고 그냥 기도를 계속하였습니 다 . 어떤 날 밤중 내가 심히 답답한 중에 하나님을 찾으려고 ‘ 하나님이여 , 하나님이여 ’ 하며 기도하던 중에 갑자기 나는 이상한 광명을 영안 ( 靈眼 ) 으로 보았습니다 . 그 광명은 생명과 소망과 기쁨과 힘의 빛이었습니다 . 나의 그때까지 답답하고 괴롭던 것은 구름이 바람에 날려가듯 사라져 버리고 나의 가슴에는 생명과 소망과 기쁨과 힘의 피가 뛰놀게 되었습니다 . 나는 이것 즉 , 이 이상한 광명이 하나님이 보내신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힘으로 된 것이요 ,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 형님들이 만일 하나님을 찾으려면 죽기를 결심하고 기도하십시오 . 그리하면 하나님은 그대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 서산에 사라지는 태양의 미 ( 美 ) 를 알려면 저녁 서산에 가보아야 알 것이고 음식의 맛을 알려면 친히 그것을 먹어보아야 할 것이며 하나님을 알려면 친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신 실재 ( 實在 ) 이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의 세계에 속한 우리의 피부로나 육으로는 찾을 수 없으므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심령을 통해서야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 형님들 , 앞날이 많은 형님들 , 하나님을 찾고 싶습니까 ? 간절한 마음으로 외치십시오 . 기도하십시오 .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거든 있다고 가정하고라도 기도하시오 . 그러면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은 형님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 이때에 형님들은 체험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을 찾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자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자요 , 하나님을 찾은 자는 가장 행복스러운 자입니다.”

목사님의 열정과 사랑에 잠겨서 흐르는 음성은 청산유수와 같이 계속되었다 . 그러나 시간관계상 또는 기억의 형편에 의해서 자세히 기록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 그리고 목사님이 나에게 들려준 말씀 한마디가 더 생각나는 것이 있다.

 

“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대한 능력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 오늘날 이 망하여 가는 시대 , 더러워진 시대에 있어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도가 많이 나타나서 각 방면으로 활동하여야 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힘을 받았다면 경제계 , 정치계 , 교육계 , 종교계 등 그 어느 곳에서나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날 이 땅에는 하나님을 이론으로만 알지 말고 체험으로 찾은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노라고 많은 사람들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 나도 이것은 할 수 있습니다 . 또 이것도 필요하기는 합니다 . 그러나 이것은 아무 힘도 되지 못합니다 . 이것이 인간이 요구하는 바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 이것은 무력합니다 . 하나님을 체험한 곳에야 참 광명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희망과 사랑의 빛이 있는 것입니다 . 형님들 , 앞으로 하나님을 체험으로 찾는 자리에까지 들어가서 큰 힘을 얻어 가지고 이 땅에 요구하는 씩씩한 투사가 되고 인간다운 참 인간으로 값있게 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의 그 생명 있고 열 있고 부드럽고 명랑한 음성은 고요히 내 마음속으로 흘러 들었으며 그의 웅변은 우리로 머리를 숙이게 하고야 말았다 . 그는 약한 몸 , 쓰러질 듯한 극히 병약한 몸이었지만 그렇게 힘있고 생명 있는 열변을 토한 것이었다 .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힘이 그를 통해서 역사하며 그는 위대한 신비력을 가지고 있음을 웅변으로 말하는 듯하였다 . 그 말의 마디마디에 감화력이 잠겨있고 그 말귀말귀마다 정열에 끓었으며 그 말의 내용 전부가 진리이었다 . 우리들은 정신 잃은 사람 모양으로 그 말에 취하여 내 자신이 어디 있는 것인지도 잊었다가 그 말씀이 끝난 다음에야 그 의 말이 3 시간 동안 계속된 열변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 N 군과 나는 이상한 이 사람으로부터 흘러오는 신비한 힘을 가슴에 가득 받아가지고서 다시 자리에 누우시는 목사님의 모습을 뒤로 두고 그 집을 나서게 되었다.

 후에 들으니 목사님의 평양 방문이 이때가 마지막이라고 한다 . 그래서 나는 다시 목사님을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 그러나 이 3 시간에 나에게 남겨 주신 그 인상은 깊이깊이 내 마음속에 뿌리 박혔고 그때의 그 얼굴은 나의 눈 속 세계에 때때로 나타나 나에게 격려와 원기를 보내준다.

오늘날까지 나는 많은 지도자를 대해보았으나 그의 3 시간의 인상처럼 힘있는 인상을 남겨준 지도자가 없고 또 그의 3 시간의 설교처럼 나에게 힘을 주는 설교는 없다 . 생각건대 이 목사님은 주님의 40 일 광야의 생활을 잊지 않고 잘 기억했고 항상 체험하시는 것이었다 . 그는 언제나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기를 기다렸다 . 하나님의 힘 , 성신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고 주의 사랑이 그의 심장에 불붙을 때 그는 외치지 않고는 못 견디었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못 참았다 . 주님의 사랑이 그의 심장을 태울 때 그의 몸 전체는 사랑의 불덩어리가 되었고 사람을 사랑치 않고는 못 견디었다 . 그래서 그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값있는 생활을 하였다 . 하나님의 힘 , 성신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였으매 그는 무언 중에도 그의 눈 그의 얼굴 그리고 그 몸 전체가 위대한 감화력 ( 感化力 ) 을 가진 웅변을 소리 없이 토하는 것이었다 .

그 위대한 감화력에 포로가 된 자는 나뿐이 아니었다 .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그 위대한 감화력은 길이 역사하실 것이다 . 주께서 걸어가신 피 젖은 길을 굳세게 걸어가신 그의 인생과 3 시간 동안의 그의 열정적인 감격스러운 인상 , 그것은 나의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 그의 쨍쨍한 인상과 고막을 뚫을 듯이 들려오는 설교는 항상 나에게 새 힘을 부 어주며 커다란 무언의 웅변으로 항상 나를 채찍질한다. 

(1936 년 4 월 15 일 )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5 장

 

무진(無盡 ) 의 영양소 , 그 설교, 그 기도- 

한의정 (韓義貞): 평양교회 복음사

 

용도 형을 알게 된 후로 나의 뇌리에 남아 있는 인상 중 가장 뚜렷한 것은 1929 년 9 월 하순경의 일이다 . 경성에 왔던 나는 원산에 잠깐 들러 주일예배 나 보고서 만주로 가려고 아침 6 시 반 차에 원산에 내려 마르다윌슨 신학원 기숙사를 찾아가니 사감 노정숙 선생이 끔찍이도 반가이 맞아주시었다 . 사생 일동과 식탁을 함께 한 후 학생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구역으로 파송을 받아 나감으로 나도 예배당을 향해서 나섰다 . 처음에는 전날 내가 맡았던 석우동장로교회로 가려고 했었는데 몇 걸음 가노라니 웬일인지 남촌동감리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바 있었다 . 물론 남촌동교회에는 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으로 나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장로교회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예배당까지 가니 벌써 예배회가 시작된 모양이다 . 단상에는 설교자가 말을 하는데 문제는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요한복음 14 장에 있는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리라 ” 는 말을 가지고 말씀을 하신다 . 그런데 그 어조나 태도가 너무도 열렬하고 통절하여 그 한마디 한 마디가 모두 사람의 말이 아닌 신의 권능이 폭포수 같이 쏟아져 나왔다 . 예수 믿은 지 20 여 년에 처음으로 듣는 설교이었다 . 2 시간의 대설교이었는데 들은 말 중에 이 몸이 육신을 벗고 영이 천계를 향하는 때까지 잊지 못하고 머리에 길이 남을 것이 있다.

 

“ 스스로 생명적 노력을 함이 없는 자는 지옥의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예를 들면 같은 천지에 자라나고 있는 식물이 다같이 자연의 혜택을 받되 뿌리가 깊이 박히고 생명적 노력이 그 속에 있는 것이면 태양의 폭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풍우가 심하면 심할수록 그 잎이 푸르러 윤택한 빛이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고 , 그 키가 크고 무성하여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마지막 귀중한 성공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 자체의 생명력을 잃은 자는 따뜻한 태양과 난풍세우 ( 暖風細雨 ) 도 도리어 그에게 저주할 만한 화가 되어 날로 시들고 말라 결국은 앙상한 뼈다귀만 남아 사멸의 비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 나의 부모여 , 여러 형제 자매여 , 여전히 당신들은 사해 ( 死骸 ) 에 예수란 탈을 씌워가지고 얄미운 하나님 노릇을 하시렵니까 ? 꺾어다가 꽂은 꽃은 불과 수 일에 말라 버리는 것이며 내 것이 없이 남의 것을 빌어먹는 거지는 먹어도 먹어도 배고플 줄을 알지 못하나니 , 어느 때까지나 뿌리에서 끊긴 푸른 빛을 자랑하며 남이 벌은 영양을 빌어먹는 거지 노릇을 하렵니 까 ?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이대로 계속하다가는 결국 한때에 이르러 암흑 , 파멸 , 비애 , 절치 , 원한을 당치 아니치 못할 것이니 생명인 예수를 생명적 노력으로서 받아들이십시오.”

 

이 2 시간 동안에 피땀을 쏟으며 외치신 말 중에서 지금까지 분명히 기억되는 것은 이상의 몇 마디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이때에 나에게 큰 충동을 준 것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죄악을 발견하게 한 것이었다 .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주를 믿어왔으나 가슴에 뜨거운 영적 감동을 받아 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요 , 신앙적 회오 ( 悔悟 ) 를 포함한 눈물의 기도를 올려보기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중심에서 끓어오르는 충성으로 스스로를 죽여 제단 위에 던져 피땀으로써 주님께 드리는 제주 ( 祭酒 ) 를 삼은 그 뼈만 남은 그 청년 , 검소한 그 차림 , 거룩한 그 얼굴 ,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 그러나 교파가 다르고 지인이 없는 낯선 교회이니만치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 오후 3 시 차에는 만주로 향하여 떠날 몸인 것을 생각하니 그냥 발길이 돌아서지를 않는다 . 다시 들어가 문에선 어떤 부인에게 물으니 통천에서 오신 부흥 전도사인데 산제동 여자성경학원에서 모셔오셨다고 하며 그의 이름은 모른다고 한다.

할 수 없어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 선생을 찾아서 산제동서 부흥회 인도 하시는 목사를 모시어다가 우리 학원에서도 부흥회를 열겠다면 나도 몇 날이든지 더 묵어 있으면서 참예하겠다고 청을 했으나 위험 분자이니 청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그때에 나는 선생님 말씀이라면 진리에 과히 어그러지지 않는 한 곧잘 순종해 오던 때이므로 그 말이 옳은가 보다 하고 그날 오후 3 시 차로 입북하고 말았다.

 

3 년을 지난 어느 날 간도에서 기도 생활을 하는 어떤 동지와 신앙담을 나누는 중에 통천에 유명한 부흥목사가 있는데 이용도 씨라는 이로 전선각지(全 鮮各地 ) 에서 큰 역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니 우리 용정교회에서도 한번 청하려고 한다는 말에서 비로소 3 년 전 그 청년이 이용도 목사인 것을 알게 되었다.

 

1931 년이었다 . 명석동 248 번지에 셋방을 얻고 38 동지가 한 집에 기거하며 교회 일을 돕고 있었다 . 나는 선교부 일을 맡아보게 되었으므로 좀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7 월 중순의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앉았노라니 5 〜 6 인의 일행이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동생 준명 ( 俊明 ) 한 사람을 제하고는 모두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 음력 6 월 타는 듯이 더운 날에 회색 모사주의를 입은 사람 , 수목 양복을 입은 사람 , 굵은 베옷을 입은 트레머리 여학생 , 시꺼먼 옷을 입은 청년 . 두 여학생을 제한 남자 청년 세 사람은 모두가 폐병자들같이 뼈만 남은 떼 거리였다 . 그 꼴에도 그들은 아주 익숙한 친구의 집에나 들어서는 듯이 주인 격의 준명이가 안내도 하기 전에 마루 위로 척척 올라앉는다 . 그 기쁨에 넘치는 얼굴과 웃음 , 쾌활하고도 구수한 언어 , 그 모든 동작이 속된 세상의 보통 인간들과 같은 생활을 하지 않는 기인 ( 奇人 ) 들인 것만은 추측할 수가 있었다.

어쨌든 나는 주인이요 , 저들은 손님이므로 손님 대접으로 점심을 시켜오려고 준명과 수근수근 하노라니 일행 중에 1 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

“ 점심은 시키고 왔으므로 곧 올 것입니다 .”

나는 더욱더욱 이상도 한 사람들이라고 놀라면서 인사를 청하니 웬일이요, 웬일이요 , 우리 남매가 마주 앉기만 하면 이야기 하던 신앙의 사표 ( 師表 ) 간도의 이호빈 씨와 한국의 이용도 씨가 오신 것이었다 . 이용도라는 말을 들으매 3 년 전의 그 형상을 환상하니 그렇게 열렬히 외치던 그 전도사임에 틀림이 없었다 . 이호빈이라는 석자 역시 귀에 익숙히 들어 두었던 이름이요 , 다른 3 인도 다 깊이 기도 생활을 하시는 신앙의 동지들이었다 .

마음에 넘치는 기쁨을 발표는 못하거니와 그때에 나의 영은 은근히 ‘ 주께서 나의 신앙 행로의 외로움을 살펴주시는도다 ’ 하는 감격에 넘쳤다 . 이 형제들이 남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역두 ( 驛頭 ) 에 내리면서 시켜놓은 국수 가 벌써 들어온다 . 내 집에 오는 손님은 내가 대접한다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었는데 손님이 주인의 국수를 시켜온 것부터가 이상하거든 또 한가지는 일체의 시중을 손님된 그들이 하는 일이라 . 육수국이나 내 손으로 좀 부어드리려고 주전자를 잡았더니 청년 이 목사는 자기가 이 일까지도 하여야 기쁘겠노라고 내 손에 들린 주전자를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 . 이때에는 나는 무엇이라고 형용키 어려운 , 사실 이때까지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별세계의 사귐 , 그 봉사의 정신에 머리가 띵하였다 . 주는 자가 더 말이 없고 받는 자가 또 말이 없으나 나도 모를 위대한 영적감파 ( 靈的感波 ) 가 나의 영위에 큰 감화를 일으키었다.

점심 후에 여러분이 다 누워 피곤한 잠을 이루시기에 오후 배달 편에 온 서신을 정리하려고 사무실에 가서 급히 일을 마치고는 저녁이나 한끼 대접하려고 장을 보아 가지고 집에 오니 남행차로 벌써 다들 떠나신 후였다 . 이때의 나의 섭섭함과 가슴의 알근함은 아직도 그때 같이 안타깝게 기억되어 있다 . 그 후 그 가을에 삼방 ( 三防 ) 에서 동지들의 회합이 있단 말을 나는 들었다 .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참으로 간절했지만 때마침 미순회 때라 선교사들이 그 회가 열리는 명사십리에 가고 원산구역의 모든 일을 나 혼자서 전부 맡게 되었으므로 촌가 ( 寸暇 ) 를 얻지 못하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기회를 엿보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또한 천추의 한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1933 년 3 월 12 일은 주일이었다 . 마땅히 예배당으로 가야 할 터인데 성경 찬미를 들고 나선 걸음은 불현듯 광석동 이용도 목사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 있었다 . 주일 저녁예배를 보기 위하여 온 집이 다 비고 오직 병석에 누운 이 목사님과 병을 간호하는 인자 형만이 남아 있었다 . 아랫방에 혼자서 자리에 힘없이 누워있는 용도 형 . 그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 윗방에서 잠깐 내려다 본 나는 마음 속에 말 못할 비애를 느끼고 방바닥에 엎드려졌다 . 나의 기도소리는 울음에 떨렸다 . 이는 병든 동지를 위한 하늘에의 간원이었다 . 내가 기도를 마치고 머리가 땅에서 일어나려는데 죽은 듯이 누웠던 용도 형은 가볍게도 몸을 날려 내 곁에 와서 손을 내 머리에 얹으시고 기도를 하신다.

“ 주여 , 이 딸을 사랑하시나이까 ? 이의 육체로 일어나는 전부를 죽이소서 . 죽을 땅으로 보내소서 . 이 딸의 몸에 주신 피와 살이 만방을 살리는 번제물이 되게 하옵소서 . 우리와 한 가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길을 걷게 하시고 성결한 사귐 속에서 죽든지 살든지 부딪치는 파란을 예수의 사랑으로 이기게 하옵소서 . 이제 이 딸로 하여금 주의 명하신 바에 죽도록 순종하게 하시옵소서 . 이 땅에 자기의 사복 ( 私福 ) 을 채우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여성이 많고 또 자신이 망할 뿐만 아니라 남을 죽이기까지 하는 여성이 얼마나 많 은 중에서 이 딸로 하여금 제 몸을 죽여 남을 살리시는 주님을 본받게 하시오니 , 오 주여 , 그 길에서 아름답게 죽어지게 하옵소서 .”

여기까지 이르러 목사님의 목은 메어 더 말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 더 말로 기도를 잇지 못하고 한참 동안 침통한 심도 ( 心禱 ) 를 올리다가 기도는 끝나고 말았다 . 오 , 이날 밤의 이 힘 있는 기도 ! 이 기도의 많은 말은 내 영에 깊이깊이 심겨졌다 . 의외의 축복 ! 죄인으로서 감당 못할 이 축도는 감격에 넘치고 심신에 투철 ( 透徹 ) 되어 영원히 감명되어 있는 바이다 . 너 죽어 남 살리라는 말을 어느 교역자를 통해서도 과거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나는 감격에 넘친 황송한 울음에 생전 처음 목놓고 울어 보았다 . 이 저녁 이 축도에서 굳게 맹세한 결심이 아직까지 가슴에 살아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축도 그대로 내 생활이 실행되지 못함이 슬픈 일이라 . 예수의 말씀이 2 천년 동안이나 뭇 생명 속에서 살아있듯이 그때 저녁의 이 형의 간절한 기도가 내 마음에 살아있음에 불민 ( 不敏 ) 하나마 그가 가신 자취를 따르다가 죽어 보려고 애는 쓰고 있다 . 이는 이미 가신 형의 영을 위로함도 되겠지요 . 형이 가신 지도 이미 3 년째 되어오나 그날 저녁의 그 장면은 더욱 이 눈에 떠오른다 . 고 ( 故 ) 형이 나를 위하여 간구의 축도를 하신 것이 예수를 위해서요 , 그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져 병들어 눕고 또 청춘에 이 세상을 떠난 것도 주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서이었음을 나는 믿는다 . 세상에서 많은 고생을 하시었고 만년 ( 晩年 ) 에 갖은 구박과 멸시 그리고 최후의 고배를 받으시면서 단장의 울음으로 이 백성들의 생명을 염려하는 간곡한 기도를 남기시고 가셨으니 , 우리 후진 ( 後進 ) 은 형의 기도를 그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눈물의 기도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1936 년 말 )

 

※ 한의정 씨는 평양교회 전도인으로 1934~1950 까지 16 년간 열심으로 전도했고 해방이 되자 이호빈 , 이종현 등 교회 간부가 다같이 월남하자고 권하였으나 주님의 양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동안은 내 교회를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며 홀로 교회를 지키다가 1950 년 6.25 적란 중에 평양감옥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6 장

 

내가 잊을 수 없는 분-

이세운 (李洗雲): 대전감리교신학대학장

 

내가 50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많은 사람을 만났고 사귀었다 . 혹은 스승으로 혹은 친구로 이웃으로 동역자로 제자로 적잖은 사람들을 사귀어 왔다. 그들이 모두 크나 작으나 내 마음속에 다소간의 인상을 주고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그런데 그 중에 대부분은 내 기억과 인상에서 사라졌지만 세월이 흘러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내 마음 속에 잊을 수 없을 뿐만 아닌 나의 신앙과 인격 구성에 크고 깊게 영향을 주신 어른이 있으니 , 그가 이용도 목사님이시다.

내가 이용도 목사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31 년 봄 만주 간도 용정 ( 龍井 ) 에서였다 . 이 목사님에 대하여 지나가는 소문은 많이 듣고 있던 차인데 그가 만주를 찾아 오신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 , 특히 젊은이들에게 크게 자극적인 것이었다 . 많은 사람들이 30 리 밖 ‘ 동성용 ’ 이라는 곳까지 마중을 나갔다 . 나타난 그는 회색 동정 단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약간 야윈 30 대의 젊은이였다 . 말이 없고 평화스러운 얼굴에 빛나는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자애와 순결한 거룩함이 깃들어 있었다.

집회는 용정감리교 예배당에서 모였다 . 첫날 밤부터 초만원을 이루었다 . 사회자가 개회를 선언하고 여러 장의 찬송을 불렀다 . 그러는 동안 그는 강단에 납작 엎드려서 일어나지 아니했다 . 얼마를 지난 후에야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올리었다 . 기도를 올리는데 뼈에 사무치도록 절절한 기도였다 . 기도는 계속되었다 . 격하여 목이 메었다 . 장내는 강한 반응을 일으켰다 . 한참 동안의 기도에서 분위기는 용광로와 같이 뜨거워졌다.

설교를 시작했다 . 원고를 사용하거나 시간을 짧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단에 서자마자 포와 같이 기관총과 같이 불을 뿜는 것이었다 . 설교 내용의 절실함과 표현의 적절함 , 중심서 끓어 넘치고 폭발하는 충정의 권면 , 설득 , 경고 , 책망 , 위로 , 격려의 말은 마디마디 사람의 가슴을 흔들고 마음을 찔렀다 . 설교는 1 시간이나 1 시간 반을 계속하고 때로는 2 시간을 계속해도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지루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고 그야말로 취한 듯이 , 얼빠진 듯이 황홀하게 앉아있었다 . 내가 지금까지 40 여 년에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설교를 들었지만 이용도 목사의 설교처럼 내 심령 깊이를 흔들고 은혜가 넘치는 설교를 들려준 이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 아마도 하늘에서 주님 의 말씀을 듣기까지는 전혀 그런 설교를 들을 길이 없을 것이다.

설교가 끝나면 그는 다시 강단에 엎드려서 다시 묵상 기도를 드리었다 .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돌아가고 밤이 깊어 1 시 , 2 시가 되어도 꼬박 강단에서 기도로 밤을 새웠다 . 집회가 계속하는 동안에 1 주간이건 2 주간이건 꼭 같은 싸움을 끝까지 계속하였다 . 그때 그는 성경공부 시간에 ‘ 아가서 ’ 를 가르쳤다 , ‘ 아가서 ’ 강해를 가르쳤다 . 그의 설교는 사람을 사로잡았지만 그의 성경강해는 사람들을 얼빠지게 해 주었다 . 그는 놀라운 웅변가였고 또 보기 드문 문학가적 소질을 구비했었다 . 그리스도와 신자의 아가페적 사랑의 교제를 풍부한 문학적 감정으로 , 영적 경험을 능하고 기묘한 표현으로 설명해 내려갈 때에는 모두 무엇에 홀린 사람들처럼 멍청하게 얼빠져 있었다 . 내가 일찍이 재미있는 책을 많이 읽고 말 잘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꽤 많이 들었지만 그분의 ‘ 아가서 ’ 강해처럼 심취하고 가슴이 뛰었던 일은 아직 한 번도 없다.

그의 설교와 성경강해가 많은 사람과 나를 그토록 강하게 감동시킨 것은 단순히 그의 말재주와 지식과 타고난 문학적 웅변적 소질의 소산만은 아니었다 . 우리는 모두 그에게서 꼭 같은 무엇을 느꼈다 . 그것은 바리새 교인들이 예수에게 대해 말한 것처럼 일반 설교자나 교수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영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 그는 영력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다 . 분명히 기도의 힘과 성령의 힘이 그의 말을 힘있게 해 주었다 . 능력 있고 감동하는 말씀으로 만들어 주었다 . 주 앞에서는 겸손한 태도 , 주님의 영광과 뜻만을 받들어 살려는 간절한 마음 , 깨끗하고 거짓없이 살려는 일편단심 ,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더 깊이 알려는 소원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나는 일찍이 그의 말에서 거짓이나 꾸밈을 찾아보지 못했고 그의 태도에서 교만이나 미움을 발견하지 못했다 . 그 부드러움 , 그 자애로움 , 그 겸허함이 나에게 큰 위안과 격려와 교훈을 준다 . 그는 짧게 살았다 . 그러나 굵게 살았다 . 1933 년 10 월 2 일 아직도 30 대를 다 못 넘긴 33 세의 젊은 나이에 몇 사람에게 들리어서 외로이 숨져갔고 그의 무덤은 원산 산제동에 평토장으로 묻혔다 . 아까운 죽음이었고 애석한 요절이었다 . 그러나 그는 아직도 우리들 마음 속에 살아있다 . 성경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던 그의 열심이 , 주님의 뜻만을 위해 살고 주님만을 위해 살려고 발버둥치던 그의 소원이 아직도 수 없이 많은 영들 속에 살아있다.

금식과 철야와 절규로 지내는 2 주간 , 3 주간의 부흥 집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 새가 그리워서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현저동 조그만 두 칸짜리 전셋집으로 모두 꾸역꾸역 모여든다 . 부인과 가족들에게는 야속스럽기도 하나 그렇지만 여러 주간 동안 불면불휴의 고전을 치른 뒤 파김치가 되어 드러누웠던 그는 어디서 새 힘을 얻었는지 자택에서 다시 부흥회를 벌이는 것이다 .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설교를 계속하고 밤이 되면 오히려 부족하여 현저동 교도소 뒷산 ‘ 둥그재 ’ 솔밭으로 올라가서 송충이 들끓는 속에서 꼬박 밤을 세우는 것이었다.

영들을 아끼는 애타는 마음 , 그리스도를 위하는 뜨거운 마음은 완전히 자신의 괴로움 , 생명까지 잊고 필사적으로 있는 것 전체를 바쳤다 . 편 ( 便 ), 불 편 ( 不便 ), 이 ( 利 ), 불이 ( 不利 ) 가 안중에 없고 죽고 사는 것도 문제 밖이었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이며 그를 어떻게 기쁘게 해드릴까 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이었다 . 그리스도에게 취하고 미친 사람이었다 . 그가 무엇을 했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한 것이요 , 혹시 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도 그의 본심은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것이 잠시 동안 실수로 나타난 것뿐이었다.

거지가 오면 거지와 겸상을 해서 같이 식사를 하고 고학생이 있으면 데려다 먹이고 재우고 했다 . 그래서 좁은 집에는 언제나 식객이 우글우글했다 . 양말이 째졌으면 양말을 주고 내의가 해졌으면 내의를 벗어주었다 . 자기가 신고 입을 것이라도 그대로 집어 주는 것이었다.

내가 식객이 되었을 때에도 너덧 사람의 식객이 상주하고 있었다 . 한때는 쌀이 떨어져서 우리들은 저녁과 조반을 굶었다 . 부인은 우리 얼굴을 바라보며 오히려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장인 영감은 건너 방에서 못마땅해서 얼굴을 찌푸리고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 그런데 그는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여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가져다 놓고 자기는 거문고를 타며 기도회를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맥없이 찬송을 불렀다 . 그러나 차차 열심과 힘이 생겨서 참 놀라운 은혜를 받은 일이 있다 . 점심 때쯤이나 되어서 쌀 가마가 들어와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그러면서 그 동안의 사정을 알게 되었는데 , 사실인즉 단골 쌀집이 있었는데 김좌진 씨 유족 가정을 심방 가셨다가 모두 굶고 앉아있는 것이 딱해서 자기 집에 가져올 쌀을 그 집으로 배달시켰기에 굶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 이런 일은 가끔 있었다 . 남몰래 하는 일이 더 많았다 . 자기 부족에 대한 통회의 기도 , 진리를 깨달은 때에 희열에 넘치는 환희 , 남을 돕지 못해서 애타하는 모습 등은 잊을 수 없는 그의 모습이었다. 

( 기독교사상 제 9 권 8 호 )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7 장

 

천당에 가서 계실 목사님- 

이규선 : 명덕료 관리인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은 이용도 목사님에 대해서 40 년 동안 별소리를 다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 목사님이 천당에 가셔서 하나님의 위로와 영광 속에 살고 계심을 나는 확실히 믿고 알고 있습니다 . 이렇게 말함은 이론이나 전문 ( 傳聞 ) 등 다른 무슨 근거에서가 아니고 저의 눈과 귀로도 직접 보고 들음에서 얻은 사실과 체험에서 간증하는 바입니다 . 여기서 그 한두 가지 실례를 들어 보기로 합니다.

 

 

 

자면서 찬송

 

1931 년 여름이었다 . 신학교에서 임시 방학을 했으므로 본 집이 간도 용정인 나는 얼마 동안 이 목사님 댁에 신세를 지기로 하였다 . 작고 좁은 서울 집 셋방에 손님들은 연락부절 ( 連絡不絶 ) 하여 목사님은 이간 마루에서 주무시고 우리 여자 두 사람은 사모님과 함께 안방에서 자고 있었다 . 그런데 한밤중에 목사님께서 청아한 목소리로 찬송을 크게 부르신다 (53 장 ‘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 예배를 보시려고 찬송을 꺼내시는 줄 알았기에 얼른 옷을 주워 입고서 예배에 참석하러 마루로 나갔다 . 그런데 마루에 나가니 목사님이 반듯이 누워 찬송을 부르시는 것이었다 . 이상한 마음이 들어 멈칫 서서 듣노라니 찬송 1 절을 다 부르시는데 역시 누워서 끝까지 부르시는 것이었다 . 그리고는 그냥 주무시었다 . 나는 이상한 감격과 가슴이 뜀을 느끼면서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또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 목사님 밤중에 찬송을 부르셨나요 ?” 하니 “ 그게 무슨 소린가 ? 나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 ” 하신다 . 이에 비로소 나는 지난 밤에 목사님께서 부르신 찬송이 자면서 부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한 끼에 밥 짓기만 두세 번

 

평상시에 보통 집에서는 한 끼에 밥을 한 번 짓는 것이 상례이다 . 그러나 이 목사님 댁에서는 흔히 한 끼에 밥을 두 번 세 번 짓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것은 기도 손님 , 예배 손님 등이 예의도 , 염치도 없이 무시로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 밥을 좀 넉넉히 지었으나 먹는 동안에 손님이 찾아와 그냥 식사에 동참하니 밥통을 긁어 다 먹어 버린다 . 그런데 밥숟갈을 놓기 전에 손님이 또 찾아오니 얼른 밥을 또 좀 짓는다 . 그런데 이번에도 전번 같이 밥을 박박 긁어 먹는데 또 손님 몇이 들어오니 밥을 또 한번 짓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가 가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쉬어서 버리게 될는지도 모르는 밥을 암만이고 많이 지을 수도 없는 것이니 이런 일이 가끔 생기었다.

그런데 손님이 끼니 때에 목사님 댁에 찾아오는 것은 찬 없는 조밥이라도 목사님 곁에서 먹어 보고 싶어서 오는 것이었으니 사양도 몰랐다 . 또 목사님께서 다섯이 오거나 열이 오거나 대환영이요 , 식사 참가를 강권하시니 지는 척하면서 밥숟갈을 드는 것이 손님들의 기쁨이요 , 소원성취인 것이었다 . 그런데 때로는 손님 접대를 하는 동안에 목사님은 굶고 마는 경우가 있어 가족의 마음이 알근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용도 목사가 죽었다고 순사까지 출동

 

1931 년 7 월 말의 어느 날 이른 새벽이었다 . 이 집 목사님이 죽었다고 사람이 와서 헐떡헐떡 알려주는 것이었다 .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악박굴 약물터 곁 숲 속에 어떤 사람이 엎드려져 죽었다고 사람들이 모여 복작대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 이 집 목사님인 듯하여 뛰어 왔다는 것이다 . 달려가 보니 부근 파출소에서 순사가 와서 조사를 하는데 마주 선 이는 우리 목사님이었다 . 목사님을 모시고 집으로 내려오면서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 보니 남 기도하고 있는데 동리 사람들이 모여 그 야단을 했다는 것이다.

이 목사님은 기도에 열중하여 주님과 대화하고 있는 동안에는 완전히 탈혼 ( 脫魂 ), 입신 ( 入神 ) 상태에 들어가 남이 보면 아주 죽은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 들은 말이지만 이 해 겨울 어느 날은 저녁에 산기슭에 나가 엎드려 기도하는 중 밤에 눈이 퍼 내렸는데 새벽에도 돌아오지 않으시매 염려되어 가족들이 눈 쌓인 산에 올라가 이리저리 살펴 보노라니 눈 속에서 솟아 나와 몸에 쌓인 눈을 툭툭 털더라는 것이었다.

 

 

 

집안은 항상 부흥회장

 

이 목사님 댁은 좁은 셋방이다 . 그러나 그 집은 항상 사람으로 뒤끓었다 . 그것은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 혹은 좀더 은혜를 받으려고 찾아 드는 신앙인들이 모여 기도하며 찬송하며 예배 드리기에 작은 부흥회가 거진 밤낮 계속되기 때문이었다 . 한 그룹이 찾아와서 한참 부흥회를 끝내려면 뒤로 또 찾아와서 끊일 새가 없는 것이었다 . 그래서 그 집은 부흥회의 계속이었다 .

 혹시 부흥회가 끝나고 틈이 좀 생기어 한두 사람의 신앙상담과 안수기도가 시작되면 또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 목사님의 말씀은 한마디도 진리의 교훈이나 설교 아닌 것이 없고 그 편지도 설교나 기도 아닌 것이 없었다 . 그리고 그 사랑과 남에게 주심은 철저하여 혹시 지방 부흥회에서 선사품 ( 수건 , 양말 , 서적 등 ) 이 생기면 곧 나눠주시는데 식객으로 와있는 고학 생에게 먼저 주시고 친척 , 아들 , 사모님의 순으로 손수 나눠 주시는 것이었다.

 

지난 날을 회고하며 목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의 화신이었고 세상이 무어라고 한대도 목사님은 천당 영광에 참여하신 분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내가 세상에 와서 많은 고생과 수고를 하였지만 이 눈이 성령의 화신 ( 化身 ) 을 만나 뵌 것과 몇 달 동안이나마 그에게 시종들 수 있는 영광에 참여했던 것에 감격과 찬송을 드리는 바이다.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8 장

 

이 목사님에 대한 생각 몇 가지- 

김지영 (金志永): 한의원장

 

 

급선무

 

아마 1932 년 여름인가 한다 . 그때에 목사님이 창순여관에 드셨다 . 새벽에 목사님을 찾아가니 몇 친구가 앉아 있고 ○○ 자매가 또 와 있었다 . 그 자매가 자기의 고민을 좀 해결하여 달라고 하며 말을 꺼내었다.

“ 저는 장로교회에 다니는데 어머니는 천주교회를 다니시며 자꾸 천주교회로 가자고 강권을 합니다 . 저는 그냥 장로교회에 다니고 싶은데 어찌하면 좋을지요 ? 어머니의 뜻을 좇을지요 , 제 원대로 고집을 할지요 ?”

“ 많이 기도하신 후 예수만 잘 따라갈 수 있는 길을 가십시오 .”

목사님은 답하셨다 . 그런데 이 이야기가 길어지니 여관에서 어서 조반상을 받으라고 한다 . 그래서 내가 이 뜻을 전했더니 ,

“ 조반 먹는 것보다 이 자매의 심령의 고민을 1 분이나 1 초 바삐 해결해 드리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 조반 좀 늦어지면 어떻고 또 못 먹으면 어떠오 .” 이날에 목사님은 그 조반을 오후 2 시경에 잡수셨다 .

 

 

 

신의절대( 神意絶對 )

 

산천 갔다가 오시는 길에 평양에 잠깐 들리셨다 . 그날이 바로 수요일이므로 신암교회와 서문밖교회에서 집회 인도를 간청하여 왔다 . 그러나 목사님은 주님의 지시가 없다고 하면서 두 교회의 청을 다 단연 거절해 버리시는 것이었다 .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나 주님의 지시가 없을 때에는 참으로 기가 막히게 쌀쌀하고 냉정하게 거절하시는 것이었다.

 

 

 

질병 근치법( 根治法 )

 

1932 년 여름 명촌교회에 오셨을 때의 일이다 . 그때에 나는 허리가 몹시 아파서 집회에 참석을 못하고 누워있었다 . 누워있노라니 몸이 괴롭고 마음이 컬컬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 그래서 억지로 일어나서 집회에 나갔다 . 나가니 병이 더 중해지는 듯 얼마 못살 것 같은 생각에 겁이 났다 . 그러나 엎드려서 열심으로 기도를 계속했더니 어느덧 병에 대한 생각을 잊어 버리고 말았다 . 목사님이 병이 어떠냐고 물으시기에 “ 언제인지 아픔과 병에 대한 관념이 없어졌다 ” 고 하니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

“ 병을 고치겠다고 빌지 않더라도 마음이 주님과 함께 살고 있게 되면 병은 자연히 물러간다.”

그러시며 어떤 촌 부인이 중한 폐병에 걸렀는데 주님을 찾게 되어 마음에 기쁨이 오자 밥을 지으려고 쌀을 일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불을 때면서 나무 타는 소리에도 감격의 기도를 올리게 되니 자연히 병이 물러갔다는 것이다.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아도 믿음 속에 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병은 자연히 낫는 것이라는 말씀이셨다.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9 장

 

경모(敬慕 ) 하는 용도 목사님 영전에- 

조경우 : 서울 일신교회 목사

 

목사님 , 저는 목사님을 몹시도 그리워했습니다 . 동리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또는 친구들의 말을 듣고 나는 몹시도 목사님을 그리워했습니다 . 그 음성이 듣고 싶고 그 얼굴이 보고 싶고 그 손목을 잡아보고 싶은 애모의 정이 내 가슴에서 끌어 올랐습니다 . 저는 목사님을 까닭 없이 사랑하고 이유 없이 사모한다고 남에게 비난도 받았습니다 . 그러나 내 가슴속에는 설명할 필요 없는 사랑의 까닭과 사모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날이 가고 달이 지나갈수록 저는 목사님 때문에 손에 일이 잡히지 않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밥이 맛이 없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멀리 삼방 ( 三防 ) 에 계시다는 소식도 듣고 그 후 원산에 가셨다는 소식은 들으면서도 가 뵙지 못한 것은 저에게 여비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 저는 그때에 서해안 용강군 일병리라는 농촌에 있었습니다 . 그 후 목사님의 병환이 극히 위중하시다는 근심스러운 소식을 듣고 생전에 얼굴이라도 뵈려고 신 끈을 매고 지팡이를 끌고 세 동무가 길을 떠났습니다.

당일로 160 리 길을 걸어 평양에 도착하여 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새벽에 또 다시 길을 떠나 서해변에서 동해안 원산까지 770 리 길을 도보로 90 일만에 도착하여 부랴부랴 광석동을 찾아가니 목사님은 1 주일 전에 별세하시고 장사 지낸 지도 4 일이라고 홍태헌 형이 말했습니다 . 이에 우리 세 친구는 기둥이 무너진 듯 , 등불이 꺼진 듯 기운을 잃고 실망하고 울었나이다 .

그래서 두 동지 중 하나는 남쪽 사천 ( 泗川 ) 으로 가고 하나는 서쪽 용강으로 헤어지고 나만 홀로 원산에 떨어져 있어서 목사님이 그리울 매마다 목사님 무덤에 가서 땅을 치며 울어도 보고 풀 포기를 붙들고 기도 드리기도 했습니다 . 밝은 새벽이나 안개 낀 저녁에 고요히 목사님에게 속삭여 보기도 했으나 목사님은 늘 아무 대답도 안 하시었지요.

저는 목사님께서 읽으시던 책을 많이 읽었나이다 . 그 중에서 기억되는 것은 『 우찌무라 ( 內村 ) 전집 』 중의 중요한 것과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 의 책 , 아타나시어스의 『 수육론 ( 受肉論 ) 』 , 스베덴보리 (E. Swedenborg) 의 저서 『 성프란시스전 』 등 이었습니다 . 목사님이 읽으시며 선을 긋고 표를 한 부분에서 저는 가끔 울기도 했지요 . 목사님의 손때 묻은 부분에서는 목사님의 거룩한 생활의 향기를 맡기도 했습니다 . 목사님의 책을 읽으며 목사님 무덤 곁에서 울며 기도 드리는 동안 저는 목사님의 좌우 명이신 무언 ( 無言 ), 겸비 ( 謙卑 ), 기도를 배웠습니다 .

1 년 반 동안을 거진 매일 한 번씩은 목사님의 무덤을 찾아갔었지요 . 저는 목사님의 마시던 광석동 샘물을 날마다 마시었사오며 목사님의 영구를 운반하였다는 상여를 가끔가끔 만져 보았습니다 . 마치 성자의 유적을 순배하는 순례자처럼 목사님께서 앉으셨다는 신학산 뒤 반석 위에 앉아 보기도 하고 목사님께서 기도하시었다는 골방에 가서 엎드려 울기도 하였습니다 . 금식기도도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산상기도도 하고 불면 ( 不眠 ), 불휴 ( 不休 ) 성경을 읽기도 하고 맨발을 벗고 얼음길 , 눈길을 걸어보기도 하는 등 난행 ( 難行 ) 과 고업 ( 苦業 ) 으로 자기를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

목사님 , 이 모든 것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 주님을 사랑하려거나 주님을 따라 가려면 미친 사람처럼 되라 ” 는 말씀에 내 영혼이 자극과 충동을 받은 까닭이었습니다 . 이 모든 경험과 고생이 후일 나의 영혼에 좋은 양식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 저는 성경의 인물 중에 사모하는 인물이 몇 분 있습니다 . 목사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린 예수를 구주로 찬양하던 안나와 시므온을 특히 사모하시었지만 저는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헷 사람 우리야와 사울파에게 죽임을 당한 스데반 집사를 사모하오며 교회에서 버림을 받으신 용도 목사님이 오늘 이 시간에도 애끓게 사모되옵니다.

나의 경모하고 애모하는 목사님 , 교회는 목사님을 버렸사오나 하나님은 받으셨사오며 사람은 구박했으나 주님께서는 높이 드시었나이다 . 목사님이시여 , 불의 사자여 , 진리의 광인 ( 狂人 ) 이시여 , 목사님은 분명코 조선에 보내신 아모스요 , 예레미아이었나이다 . 목사님께서 다녀가신 후로는 이 땅에 아모스같이 죄를 책망하는 종도 없고 예레미야 같은 일꾼도 없나이다.

목사님이여 , 날이 갈수록 불의 사자가 그립고 진리의 광인이 사모되오나 시들어가는 이 백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예레미아가 없나이다 . 그러므로 이날 이 시간도 저에게는 목사님이 간절히 사모되나이다.

목사님이시여 , 변종호 형은 목사님을 생전에 뵈옵고 목사님의 사랑을 몸소 받은 바 있다 하오나 저는 보지 못하고도 잊을 수 없사오며 목사님의 음성을 한번 듣지 못하고도 이리 애가 타오니 , 목사님 , 이 가련한 영을 지켜주시고 붙들어 주시여서 영광의 그 아침에 반가이 맞나 뵈옵게 해주옵소서. 아멘.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2 장

 

이용도식 ( 式 ) 전도 활동 - 변종호

 

 

그의 특징

 

이용도 목사가 조선 교회 부흥운동에 특수한 역할을 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바 그의 활동의 특수 방식이란 것과 그 영향을 적기 ( 摘記 ) 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기도를 드려 보아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만 어느 곳의 집회에 가고 안가는 것을 결정함 . 그는 유기주의자 ( 唯祈主義者 ) 요 , 유종주의 ( 唯從主義 ) 이었다.

② 설교를 퍼부어 내려가다가 숨이 끊어져오고 감격이 최고조에 달할 때 찬송가를 꺼내어 일동이 제창함 . 그리고서 또 설교함 .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 함 . - 이 방식이 이때부터 시작됨 .

③ 설교 준비를 절대로 하지 않고 오직 기도만 하다가 강단에 나서며 주님께서 하라는 말씀만 함 . 그래서 설교 원고라는 것이 절대로 없고 성경책에 도표를 하거나 선을 그은 것도 없음.

④ 설교의 제목을 말하지 않고 그냥 처음부터 이야기를 꺼내서 내려감으로 그 설교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려움 . 그러나 그저 울게 하고 그저 감동케 함.

⑤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음.

- 설교를 10 분만에 단축해서 끝내기도 하고 계속해서 7 시간 동안을 해내기도 함.

- 기도를 24 시간 계속하기도 하고 집회 시에 공중 기도를 계속해서 3 〜 4 시간 하기도 함.

- 예약 없이 나타나서 집회를 하자고 하기도 하고 집회 도중에 말없이 가버리기도 함.

- 기도나 전도를 위해서 조반을 저녁에 먹기도 하고 주님과 사귀느라고 몇 날 동안 밥을 안 먹기도 함.

⑥ 회중이 잔뜩 모인 중에 기도만 몇 시간 드리고 끝내기도 하고 성경만 몇 장 내리읽고 그만두기도 함 . 그런데 이 성경 읽는 것만으로 만장 ( 滿場 ) 이 울음을 쏟게 하고 만인을 통회하게 함.

⑦ 생활의 실천으로써 사람을 가르침 . 재령역에서와 선천역에서 출영자에게 자진 현신 ( 現身 ) 하지 않음으로 경고 ( 警告 ) 한 것과 같이 행함 .

⑧ 집회를 끝내고 그 지방을 떠날 때에 흔히는 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떠나 감.

⑨ 사치를 버리고 옷차림을 허수하게 하여 어느 때나 아무 곳에 엎드려 기도를 하여도 옷에 정신이 쓰이지 않게 함.

⑩ 흑색 우단으로 동정을 달아 입는 것은 항상 땀을 흘리므로 추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함이고 고무신을 신는 것은 신기 편하며 또 신발에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세상은 그것도 흠을 잡아 용도파 ( 派 ) 라는 등 말썽을 부리고 별소리를 다했음.

⑪ 용도열 ( 容道熱 ): 용도에게 성신이 임하여 나타나는 병상 ( 病狀 ) 을 용도열 ( 容道熱 ) 이라 함 . 용도를 염병쟁이라고 한 것은 이 용도열이 40 도 이상 올라간 상태로서 국산 ( 國産 ) ‘ 새 술 ’ 에 취한 것을 의미함 . 용도 10 성신 = 용도 열

⑫ 용도광 ( 湧禱狂 ): 용도를 정신병자 , 미치광이 , 아편쟁이라고 한 것은 그 몸은 기도의 덩어리로서 엎쳐도 뒤쳐도 눌러도 찔러도 그저 기도가 쏟아져 나올 뿐이었으므로 그를 ‘ 기도의 샘 ’ ‘ 신경이 기도편으로 돌아버린 자 ’ 라 하고 또 용도적 정신이상을 용도광 ( 湧禱狂 ) 이라고 함 .

⑬ 용도변 ( 鎔倒辯 ): 용도의 설교는 성신의 검 ( 劍 ) 이요 , 용도의 기도는 성신의 불이었으므로 그의 열변은 목석도 녹이고 그의 웅변은 금력 ( 金力 ), 마력 ( 魔力 ) 등 그 어떤 힘도 거꾸러뜨림으로 그의 말을 용도변 ( 鎔倒辯 ) 이라고 함.

⑭ 용도변 ( 龍道變 ): 용도의 설교의 칼에 맞고 그 기도의 열에 녹아 쓰러지고 녹아지고 거꾸러지고 엎드러져 울며 통회하며 가슴치며 통곡하는 등 용도 목사를 통해서 ‘ 부흥의 난 ( 亂 )’ 이 생긴 상태를 용도변 ( 龍道變 ) 이라고 함.

⑮ 용도식 망신 ( 亡身 ), 천재적 멸망 ( 滅亡 ): 용도 목사같이 남을 위해서 애쓰고 피 흘리고 눈물 흘린 사람이 없을 것이며 그와 같이 그렇게 뜯기고 뺏기고 패가망신한 사람이 또한 없음 . 그의 천재적 멸망 ! 아주 폭삭 망함으로써 크고 많은 영향을 세상에 주었음 . 망함으로써 시기하고 질투하던 자들의 배를 시원하게 해주었고 망함으로써 선 ( 善 ) 하고 정 ( 正 ) 하려는 자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음 . 바로 살고 철저히 패망한 것 , 그것을 천재적 멸망 , 용도식 망신이라고 함.

⑯ 진짜 이단 ( 異端 ): 용도는 이단임 . 남들은 세상 생각도 좀하고 저 볼 장도 조금씩은 보는데 그는 이 세상은 온전히 버리고 남의 사정만 보고 하늘만 바라보았으니 이단이요 , 남들은 땅 위에 좌정 ( 坐定 ) 하여 거기서 움찔거리고 물 ( 物 ) 만 가지고 노는데 그는 하늘에 입각 ( 立脚 ) 하여 하나님만 상대로 하고 그만 좋아하니 이단이었음 . 그는 인중 ( 人中 ) 의 이인 ( 異人 ) 으로서 보통 신자보다는 한 단계 높이 살던 이단이요 , 보통 목사와는 다른 [ 異 ] 끝 [ 端 ] 을 보고 올라간 이단 목사로서 이단 중에서도 진짜 이단이었음.

⑰ 용도는 새 종교를 세웠으니 그것은 송도교 ( 頌禱敎 ) 이었음 . 일생을 오직 찬송 , 기도 , 설교로써만 살고 오직 찬송 , 기도 , 설교로써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가 , 오직 찬송 , 기도 , 설교 속에서 깨끗이 죽고 깨깨 망했으니 그는 그 삶과 그 죽음으로써 송도교라는 이교 ( 異敎 ) 를 세운 것임 . 그러나 이것은 용도 목사가 세운 것도 아니요 , 명명 ( 命名 ) 한 것도 아님 . 그가 가신 후에 그의 생애를 연구 고찰하던 사람이 귀납적으로 발견해서 명명하고 호칭하게 된 것임.

 

 

 

그의 기도

 

이용도 목사님의 부흥회는 성신의 역사이었는바 이렇게 큰 역사를 하는 목사님의 부흥회는 그저 기도에서 출발해서 기도로 끝맺는 기도 중심의 움직임이었다 . 어디서 부흥회 인도의 청탁이 오면 ‘ 가야 할 것인지 , 안 가야 할 것인지 ’ 를 기도로 물어보아서 하늘의 지시가 있으면 가고 없으면 안 가신다 . 그리고 허락이 있으면 기도를 계속하여 떠나는 시간까지 그저 기도만 하였다.

밤과 새벽은 엎드려 기도 , 앉아서는 속으로 명상 기도 , 사람을 대하면서도 기도 , 혼자 있을 때도 성신에 취해서 기도 , 그리고 그냥 기도만 드리다가 제시간에 늦어지기도 한다 . 다른 사람은 다 떠들어도 예배당 한 모퉁이에 엎드려 사람 모르게 반시간 혹은 1 시간 두 시간 기도 , 사람들이 설교 시간 지나는 것을 걱정해도 일어나서는 또 기도 , 사회자가 소개한 후 또 기도 , 그 기도는 보통의 목사나 직분자의 것과는 달라 질서 , 고하 , 격식도 없다 . 그 기도는 모인 자 천인 ( 千人 ) 이건 만인 ( 萬人 ) 이건 다 그 심중을 찔러 뒤집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30 분 이상은 걸린다 . 그러나 듣는 자에게는 1 분밖에 안 걸린 듯한 느낌을 준다 . 그 이유는 전에 듣지 못하던 것이고 심중을 뒤집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기도를 듣는 자 당장 꺼꾸러져 울지 않는 자 없다.

보통 부흥회 1 주일 하는 것보다 이 목사님의 기도 한 번이 더 큰 효과를 낸다 . 설교가 있은 후는 또 기도 , 찬송하고는 또 기도 , 그리고는 통성기도를 시키는데 이때에는 누구나 다 기도의 입이 열리며 기도하기를 배우게 되고 기도의 열을 내게 한다.

통성기도가 시작되면 울음 , 눈물 , 콧물이 방바닥을 적시고 기도할 수 없는 자는 웬일인지 무서워 떨게 된다 . 그새에 12 시가 지나고 집회는 언제나 적어도 3 〜 4 시간 이상 걸린다 . 예배가 끝나면 갈 사람은 가고 남아 기도할 자는 하라고 하면 가려는 사람은 별로 없고 거진 다 남아 있는데 이때부터 또 기도가 시작된다 . 그 기도는 또 새로운 새 말이다 . 다윗이 시를 쓸 때 새 말을 자꾸 내서 쓴 것같이 그에게서는 언제나 새 말이 그냥 나온다.

부흥회가 2 〜 3 일째 계속되면 안수기도 원하는 자가 수백 명이 아우성을 친다 . 이때에 안수기도에 한 사람에게 적어도 10 분 이상 걸린다 . 왜 안수기도 를 원하느냐 묻는 법이 없다 . 그저 기도를 퍼붓는데 그 사람의 마음 속을 남김없이 묘사하고 모든 것을 속속 다 밝혀내고 폭로시킨다 . 그 답답함을 꿰뚫어보고 그 고민을 쪼개낸다 . 그가 의인인지 , 죄인인지 , 과부인지 , 처녀인지 , 그 신분을 알아내면서 통쾌히 책망하고 위로하고 축복한다 . 이렇게 하는 안수기도로 밤이 완전히 새면 새벽기도회에 나서 또 기도 , 그저 기도 , 설교도 없이 그저 기도하신다.

그래서 부흥회에 참여한 자는 목사님의 기도 한번에 붙들리어 집에 가지 않고 밤새우며 낮에도 집에 가지 않고 끝날 때까지 그냥 따라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 이것이 목사님의 집회에서 나타나는 기적이다 .

어느 날 서문밖교회에서 새벽기도회 인도를 청하였더니 전날 어떤 집에서 저녁식사 후 시작하신 기도를 10 시가 지나도록 하시고는 서문밖교회에 가서 10 시부터 시작한 기도를 새벽까지 계속하였다 . 그는 기도 중에는 일어나지도 않고 소변도 안 보는 것이었다 . 10 시에 엎드려 5 시까지 그저 송알송알 기도를 올리는데 정다운 부자 ( 父子 ) 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

 

 

 

가정 심방 기도

 

어떤 가정에서든지 오셔서 기도해 주기를 청하면 목사님은 가신다 . 집에 들리시면 곧 기도를 시작한다 . 사정도 묻지 않고 역사나 이유도 묻지 않는다 . 그러나 그 집안 형편 즉 , 싸우는지 , 화목한지 , 가난한지 , 부한지 , 공부 , 상업 , 상실 ( 喪失 ), 실아 ( 失兒 ) 등을 알아 맞춘다 . 물어보지 않고도 기도하는 중 알아 맞추며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 가정 모든 식구가 다 은혜를 받는다 .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를 할 때는 그 집 식구들의 심중을 다 꿰뚫어서 기도를 하시므로 목사님 앞에서는 녹지 않는 가정이 없고 녹지 않는 사람이 없다 . 이렇게 기도를 해주시므로 내 집에 와서 기도해주기를 청하는 자가 많다.

부흥회를 인도하고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자지 않고 먹지 않고 원하는 집에 가서 기도해 주신다 . 혹 어떤 집에서 음식 잡수시기를 청한즉 이때 드리는 기도도 좋은 음식을 주어서 감사하다는 따위의 간단한 기도가 아니라 그 집안 사람들의 영의 깨달음과 구원을 위하여 그 가정의 내용을 묘사하고 폭로하여 그 집 온 식구의 심령을 깨워놓는다.

그렇다고 해서 꼬집기만 하고 공포감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 그 집 형편 , 그 집 식구들이 하고있는 생각과 먹고 있는 마음을 묘하게 붙잡아 그 잘못을 알게 하고 그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게 하고 오직 주님만 믿어 그에게서 오는 힘과 위로만을 의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 목사님의 기도를 받은 가정은 예수를 믿음이 전보다 착실해지고 예수를 위해서 살려는 열심이 굳어지고 따라서 식구들끼리 화목함이 두터워진다.

목사님과 함께 여러 가정을 가보았는데 어느 가정에든지 가면 아무리 쌀쌀하고 완악하던 가정도 곧 녹아지고 풀어지는데 그것은 그의 사랑에 - 그 얼굴도 사랑 , 눈도 사랑 , 말소리도 사랑임 - 부딪혀 자연히 녹아지는 것이었다.

어떤 집에 들어서면 그 집에 남편이 있는지 , 없는지 그 집 과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 먹을 양식이 있는지 , 없는지도 다 안다 . 양식이 떨어진 집임을 알게 되는 때는 얼마의 돈이든지 그 지갑에 있는 돈을 다 털어준다. 그래서 그 몸에는 일 푼도 없는 때가 많고 집안은 언제나 궁핍에 쪼들리는 것이다 . 어디를 가든지 목사님이 투숙하는 집 주위에는 거지 떼가 몰려들어 우글우글하고 목사님이 어떤 곳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면 그 교회 혹은 그 근처의 환난 당한 집들의 사정과 명부가 알려진다 . 그랬다가 돌아갈 여비라도 좀 넉넉히 생기면 떠나기 전에 다 나눠주고 떠나는 것이다.

어떤 집에서 귀한 외아들이 죽어서 그 어머니가 정신을 잃고 반광 ( 半狂 ) 상태에 빠져있을 때에 목사님을 모셔갔다 . 그 열렬한 기도 , 그 불 같은 사랑은 그 마음을 위로하고 깨워서 그 어머니가 평안과 큰 기쁨을 얻고 일어났다 . 그 가족과 모인 여러 사람이 목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니 ,

“ 이런 일에 위로 얻지 못할 바에야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을 것입니까 ? 예수를 믿는다면서 제 슬픔을 정복하지 못하든가 , 남의 슬픔을 덜어주지 못하는 자는 예수를 잘못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 만일 슬픔이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 사람이 슬퍼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나 예수를 믿는 자는 이 슬픔을 예수님께 맡기고 그에게서 위로와 기쁨과 새 용기를 얻어오는 점이 불신자와 다른 것입니다 ” 라고 하셨다 .

 목사님을 한번 만나보고 그 설교나 기도를 듣는 자는 모든 것을 털어 놓고 목사님께 통사정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목사님께 내놓으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 이때에 목사님의 말씀은 ,

“ 옳습니다 . 이것은 내게 고하지 말고 주님께 고하시고 주님에게서 위로와 힘을 얻으십시오 ” 하고 부탁하시며 함께 엎드려 ,

“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해 주십시오 . 주님께는 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맡아서 구해주십시오 ” 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 드리신다.

어느 한 사람도 이 목사님 자신을 믿거나 의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경계하시고 설명하시는 것이었다 . 사귐으로 정이 들어 거기서 어떤 폐가 생길 염려가 있는 것을 알게 된 때는 그것을 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을 쓴 실례도 많이 있다 . 어떤 이는 ,

“ 이용도 목사는 참으로 신기하신 어른이다 . 다른 이들은 사람을 외모로 보고 평하는데 목사님이 사람을 보는 데는 그 마음 속을 본다 . 그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꿰뚫어보시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요 , 놀라운 일이다 . 눈으로 얼굴을 보는 것보다 더 똑똑히 사람의 심중을 들여다본다 . 하도 신기하여 그 눈을 보니 그 눈에 참으로 이상한 광채가 있어서 보통 사람의 눈이 아니고 하늘의 신성 ( 神性 ) 을 가진 사람의 눈임이 틀림 없다 ” 고 했다 . 어느 날 저녁에 집회를 필하고 갈 사람은 가게하고 남을 사람만 남아 기도를 하게 한 후 남은 사람들을 하나씩 안수기도를 해주고 있었다 . 그런데 어떤 부인에게 이르러서 독특한 기도의 말이 나왔다.

“ 이가 지금 신고 다니던 고무신을 잃은 것에 마음이 뺏기어서 그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사오며 잃어버린 예수를 찾으려는 열심은 분명히 적습니다. 이런 부족한 자가 어디 있으며 이런 마음자리에 어찌 주님이 임하여 계실 것입니까 . 50 전짜리 고무신을 잃어서 안타까운 이 마음이 예수님을 찾기 위한 안타까움으로 변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 하는 기도에 이 부인은 완전히 꺼꾸러져 통곡을 했으니 사실 그 부인은 전날 고무신을 잃고 마음이 애타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 이 부인은 그 후로 참된 신앙생활에 기쁨과 찬송으로 살고 있다 . 목사님을 따라 수 백리를 걸어서라도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은 그들은 완전히 목사님에게 꺼꾸러져 열모 ( 熱幕 ), 광모 ( 狂幕 ) 됨이 있기 때문이었다.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11 장

 

용도 씨의 인상-

박재봉 (朴在奉): 서울 은성( 隱城)교회

 

통천 ( 通川 ) 에서의 용도 목사의 생활은 말하자면 준비의 생활이고 고민의 생활이었습니다 . 그가 통천에 계실 때는 사회의 사조 ( 思潮 ) 가 민족주의 사상에서 사회주의 사상으로 전환되는 때이었으므로 용도 씨는 사회주의를 가끔 공격하였습니다 .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에게 매를 맞은 일이 수차 있었습니 다.

용도 목사는 ① 어거스틴의 참회 ② 프란시스의 신앙과 청빈생활 ③ 선다 싱의 희생적 ( 犧牲的 ) 정신으로 살기를 자기는 원하노라고 가끔 하는 것이었 습니다.

통천 계실 때 어느 크리스마스의 밤에 다른 순서에 시간을 다 뺏기고 설교 시간은 10 분밖에 없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 이 10 분 동안에 목사님은 10 시간 이나 10 일 동안에도 못할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설교를 완전히 했습니다 . 그때에 이 설교를 들은 사람은 그 말 중의 한 마디도 잊지 않고 길이길이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통천에 계실 때의 용도 목사는 기도하는 전도자로 알려졌고 얼마 후에는 일하는 목사 , 성령의 역사를 직접 나타내는 목사로 알려졌습니다 . 산과 들과 예배당에서 그저 기도에 열중하는 목사는 어느 집회에 가든지 성령의 큰 역사 - 통회 , 신생 , 신비의 환상 등 - 를 나타내고 , 실생활에서는 손으로 예배당을 수리하며 동리에 우물을 파주며 걸인을 업고 다니는 등 어찌 보면 좀 지나친 듯한 생활과 실천을 하기에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구석에서는 용도를 좀 이상하게 보기도 하고 쑤군쑤군하기도 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 편주

저자 박재봉 목사는 1928 년 가을 통천구역 담임인 이용도 전도사와 함께 백정봉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계속해서 그와 함께 기도 생활에 열중하던 교인이었다 . 간절히 기도하는 자를 붙들어 크게 쓰시는 주님께서는 박재봉 씨를 목사로 세워 크게 붙들어 쓰시었으니 이후 만주로 , 평양방면으로 구도의 생활과 전도의 생활에 모든 것을 바쳤다.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12 장

 

시무언을 추모함-

경석윤 ( 慶錫胤 ): 혜명교회 장로

 

1931 년 가을 서울 삼청동교회의 집회에서 이용도 목사님을 나는 처음으로 만나 뵈었다 . 첫날 첫 시간에 그의 설교에 거꾸러져 붙들린 나는 그 후로 이 목사님이 서울 시내에서 집회를 인도하실 때는 가능한 최선을 다하여 따라다녔다 . 중학교 3 학년생 어린 나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끊일 사이 없었고 공부에 바쁜 몸이지마는 부흥회에서 철야를 하는 때도 가끔 있었다 . 사람의 가슴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 설교와 목석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기도에 나는 아주 포로가 되었다 . 그래서 체부동교회 , 상동교회 , 자교교회 , 만리현 교회 등 서울서 열리는 집회에는 미친 사람같이 따라다녔다.

이렇게 사모하고 숭배하는 이 목사님께서 승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 그런데 1934 년 봄에 이용도 목사님의 서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나는 당장 달려가서 책 한 권을 왔다 . 서간집을 읽으면서 나는 울며 기도 드리고 기도하며 울었다 . 그 후 20 여 년간 나는 서간집을 읽으면서 내 생활을 반성하며 그 글을 읽으면서 내 신앙을 편달하였다 . 서간집을 통하여 깊이 감명된 말씀 ‘ 시무언 -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 는 이 목사님의 말씀은 30 년이 가까워 오는 오늘까지 내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고 내 생활의 규범이 되어 있다.

나는 이 목사님께서 돌아가신 지 몇 해 후에 강원도 고저 ( 庫底 ) 항구에 가서 1 년간 지내게 된 일이 있었다 . 그때에 나는 이 목사님께서 여러 해 동안 계셨다는 통천교회를 찾아가 텅 빈 교회의 앞뜰과 뒷들을 거닐며 이 목사님을 명상하며 기도 드린 일이 있었다 . 이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는 모양도 무척 내셨다는데 주님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후에는 몸맵시도 , 옷맵시도 다 던져 버리고 밤이나 낮이나 오직 기도에 미쳐 사셨다는 것과 모든 땅 위의 조건과 육신의 정욕을 떠나 오직 하늘을 향하여 홀로 달음질치시던 목사님의 땀과 눈물에 젖은 모습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그가 가신 지도 이미 25 년이 되었다 . 세상도 가고 사람도 가되 하나님의 말씀만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면서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묵묵히 걸어가신 이 목사님이 다시금 그리워진다 . 목사님 ! 부족한 죄인이오나 당신의 뒤를 따르게 해주소서 . 그 설교 , 그 기도를 그냥 들려주소서 . 그것을 통해서만 힘을 얻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이 약한 인간을 길이 붙들어 주소서 . 아멘 .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13 장

 

내가 숭배하는 성자( 聖者)-

명관조 (明觀祚): 춘천지방 감리사

 

때는 1931 년 12 월 말경이었다 . 산정현 ( 山亭峴 )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처음에는 우습게 생각하고 안 나가다가 친구의 강권에 끌리어서 갔던 나는 첫 시간에 거꾸러졌다 . 교회에 들어가서 설교를 몇 마디 듣는 동안에 곧 나도 모를 이상함이 내 몸에 와서 부딪쳐서 나는 울기 시작하여 밤새도록 울고 나서 마음이 거뜬함을 느끼게 되었는 바 , 이 역사가 언제나 내 마음에 남아 있어서 나를 일깨워주고 채찍질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나는 성신이 내게 역사하심이라고 믿는다.

그는 가장 완전한 인격자요 , 종교가요 , 신앙가이었다 . 참말로 우리나라 교회를 부흥시킨 이용도 목사님의 빛나는 생활과 공적은 만민에게 새 생명을 넣어 주었다 . 그런 그를 이단자라고 비난 공격하는 자도 있었으나 그것은 오로지 못난 인간들의 시기와 질투와 음해의 마음에서 그리했던 것이라 확신한다.

이러한 욕설이 들릴 때 나는 혼자 외치기를 이용도 목사는 성자라고 하였다 . 세상에서 바울 , 루터 , 웨슬레를 성자라고 한다기에 나는 우리 목사님을 성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 이용도 목사 ! 그는 참으로 주님께서 가신 길을 꼭 그대로 걸어 나가신 분임을 분명히 믿기에 나는 그를 불러 우리의 성자라고 명언 , 단언하는 바이다 . 그는 말로써 사람을 많이 감동시켰지마는 그 생활이 그의 말보다 더 큰 교훈을 주었으매 나는 성자라고 부르고 또 경배한다.

 

 

 

< 제 2 부 : 잊을 수 없는 그 분 >

 

 

 

제 14 장

 

그 한 분과 그 한 책- 

임근수( 林根洙)

 

나는 16 세부터 마음 한편 구석에 비 ( 非 ) 세속적인 이상한 불길이 펄펄 붙고 있었으니 그것은 이용도 목사님의 부흥회에 한 번 참석한 후부터이었다 . 어린 귀에 목사님의 설교가 어떻게 단단히 들어박혔는지 그 쟁쟁한 음성에 그냥 내 정신이 아주 다 녹아지는 것 같음을 느끼었다 . 속된 머리를 쳐부수고 답답한 가슴을 쪼개고 열어주는 듯한 그의 설교와 병든 가슴을 어루만져 주고 터진 상처를 싸매어 주는 듯한 그의 기도는 권력에 눌리고 환경에 쪼들 리어 애를 박박 쓰면서도 말 한마디 해볼 곳 없던 나에게는 하늘로부터의 원군이요 , 사막의 녹지이었다 .

그때 겨우 중학교 2 학년이었던 나 같은 어린이가 기독교의 그 심각숭고 (深 刻崇高 ) 한 진리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었지마는 용도 목사님의 그 평이 ( 平易 ), 통쾌 , 유창 , 열렬한 설교와 기도는 능히 철없는 어린 혼도 충분히 사로 잡았다 . 그래서 한번 붙들린 나는 용도에게 미쳤다고 할 만큼 그에게 끌리고 붙들리고 반했던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이 인천에 오시기만 하면 무엇을 다 그만두고라도 집회에 참석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 이렇게 목사님에게 백열적 ( 白熱的 ) 인 경모 ( 敬慕 ) 가 향하고 있을 때 목사님의 부보 ( 訃報 ) 가 전해졌다 . 부보를 읽을 때 마음이 비통하였음은 무어라 말할 길이 없었고 어쩐지 앞길이 아득하고 나도 모르게 내 발걸음이 비틀거림을 느끼었다 . 그것은 목사님께서 가르치신 그 신앙으로만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깨닫기는 하였는데 그렇게 실행해 나가기가 어려울 것같이 느껴지는 데서 오는 염려와 공포에서이었다 . 그래서 목사님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 올 때마다 세상이 무서워지기도 하고 사람이 또한 무서워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나를 붙들어 주는 손이 내게 임하였으니 ‘ 이용도 목사 서간집 ’ 이 그것이었다 . 처음에 이 책을 붙들고 나는 얼마나 감격하고 기도하고 울었던지 …… . 이 책을 내 책상 위에 놓은 날부터는 목사님이 안 계심에서 오는 허무함을 내 마음에서 없이 할 수 있었으니 그 책 속에 목사님의 말씀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고 그 책을 펴기만 하면 목사님의 음성을 그대로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이후 20 여 년간 심령이 컬컬할 때에는 이 책을 꺼내어서 마음에 시원함이 올 때까지 읽곤 하였다.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나의 최근의 생활은 이 목사님에게 염려를 끼칠 듯한 방향으로 휩쓸려 가는 때도 없지 않으나 내 마음은 항상 이미 붙잡은 그것을 붙들고서 꺼꾸러지지 않기 위하여 애쓰고 노력하고 있나니 , 그것은 목사님에게서 받은 바 교훈이 내 마음을 항상 경계해 주고 서간집을 읽는 데서 오는 경책 ( 警責 ) 이 내 몸을 편달 ( 鞭撻 ) 해 줌이 있음이다 .

내가 내 앞날을 장담할 수는 없지마는 든든히 믿는 것은 내 몸이 아무런 거리에 끌려 다니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 한 분의 교훈이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남아 있고 그 한 책이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동안은 내가 큰 실수를 하거나 아주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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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 부 : 그 자취를 따라서 >

 

 

 

제 1 장

 

평양 중앙교회 1930.2.26 ~ 3.9

내가 29 세 때 서문 안에서 백화상점을 보고 있던 때다 .

어느 날 저녁에 중앙예배당에서 부흥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처음에는 가지 못하였다 . 신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와서 하는 말이 청년 목사인데 사상과 신앙이 참 좋고 말을 또한 썩 잘하더라고 하는 것이었다 . 이튿날 저녁에 동생이 예배당에 간다고 하나 나는 역시 못갔었다 . 밤이 깊어 동생이 돌아왔다 . 들어오며 나를 붙잡더니 기가 막혀 울면서 말한다 . 

“ 형님 , 나는 죽을 죄로 잘못 하였으니 용서하여 주세요 .”

나는 웬일인지 몰라 오직 놀랄 뿐이었다 . 주머니에서 잔돈 큰돈 15 원을 꺼내 들면서,

“ 이것은 형님 안 계실 때에 제가 도적질한 것이에요 ” 하며 울음소리가 더 높아진다.

 

※ 편주 저자는 평양기도단원이었던 김영선 전도사로 추정

 

 

“ 촌에 갔다 와서 20 원 및 빚 준 것이 있지 않습니까 ? 그것도 다 훔쳐낸 돈이에요 ” 하며 그냥 운다 .

“ 사람의 죄는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은 누구를 사죄하거나 정죄하지 못한다 ” 고 하며 나는 동생을 위로하였다 .

 

그 다음날 저녁이 되었다 . 동생의 태도를 보고 지나간 밤새처럼 또 오늘 하루 종일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상점을 동생에게 맡기고 중앙예배당으로 부흥회를 찾아갔다 . 사람이 어찌나 모였는지 도무지 바람 들어갈 틈도 없다 . 그러나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꿰뚫고 들어가서 강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까지 들어가 앉았다 . 시간이 아직 안된 모양이라 모인 무리가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얼마 후 어떤 청년 하나가 강대상으로 올라간다 . 얼핏 바라보니 바람에 날아갈 듯한 가느다란 뺨에 살 한 점 없고 노란 그 얼굴 , 그는 마치 아편쟁이로 보이는 것이었다 . 나는 처음에 ‘ 저게 무엇 할꼬 ’ 하고 업신여기고 또한 의심하였다 . 그 목사에게서 말이 나오기 시작된다 . 인생과 죽음이란 것을 논하는데 비유를 든다.

“ 남도에 한 사람이 있어 외국 유학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학교장 , 면장 등을 지내고 각 방면으로 활동하며 칭찬을 받았고 돈 많고 큰 집 , 좋은 실과 , 밭 등이 있어 생활이 풍유하여 부자유가 없고 부족이 없어 그곳에서 가장 잘사는 집이라고 하였고 그 고을 전체가 부러워하며 우러러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 그러나 이 사람이 중병이 들게 되매 세상은 그를 아는 척도 안하게 되었습니다 . 그는 외로웠고 그는 서러웠다 . 그러나 그의 병은 날로 더하여서    마침내 푸른 눈물 몇 줄기와 함께 인생의 끝을 맞이하였고 나중에는 청산에 한줌 흙이 된 것이올시다 .” 이 비유를 들고 나서는 ,

“ 인생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 그 사람이 죽어서 장사가 굉장했고 또 훌륭했습니다 . 그러나 그 사람도 이미 썩은지 오랜 것이올시다 .” 그리고는 나사로와 부자를 비유하셨다.

“ 산 사람이 못 먹고 못 입어 죽어 가는데 죽은 사람의 훌륭한 장사가 무슨 소용입니까 . 사람이 제아무리 잘 살고 훌륭하다고 해도 결국은 죽어지는 것입니다 . 죽는 때를 당하면 몇 줄 눈물 , 시퍼런 눈물을 흘리고 마는 것이올시다 . 인생들이 정신이 없고 철이 없습니다 . 죽은 자에게 비단옷 입힐 줄은 알면서 산 사람이 죽어가는 데는 눈을 돌리지도 않는 것이올시다.” 첫날 저녁에는 대강 이런 뜻의 설교를 하시었다.

 

둘째 날 밤의 설교는 ‘ 예수의 죽음 ’ 에 대한 것이었다 . 이날 밤의 모든 광경과 사실은 벌써 땅에서의 것이 아니었다 . 부르는 찬미 소리도 사람의 노래가 아니요 , 천군천사의 소리였고 울려 나오는 그 음성이 모두 사람의 목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 이날 저녁에는 별사람이 다 모였다 . 일등부자 , 관리 , 변호사가 다 모였다 .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설명은 사람의 배알을 갈래갈래 끊어내는 것이었다 . ‘ 빌라도의 심판 ’ 을 설명하실 때 내 결에 있는 변호사가 너무도 울고 있음에 내가 참 미안을 느낄 지경이었다 . 1,000 여 명 군중은 그저 울음이다 . 수 천의 눈은 그저 눈물이다 . 목석도 이 자리에서는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나도 울었다 . 그저 울었다 . 실컷 울다가 얼굴을 드니 강단에선 이 목사는 보이지 않고 공중에서 있는 십자가와 거기에 달린 주님만이 내 눈에는 보이는 것이었다 . 그리고 한 음성이 내 귀에 들려왔다 . “ 나는 이렇게 달리는데 ,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

이때에 나는 기도도 되지 않고 울 수도 없고 다른 무엇이 보이지도 않고 입을 열 수도 없어졌다 . 오직 귀에 들리는 큰 음성 , “ 너는 무엇을 하느냐 ” 하는 소리뿐이었다 . 한참 동안 어느 세계에 가서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는 나의 눈에 곁에 있는 변호사가 마루창을 치며 떼굴떼굴 구르는 광경이 나타났다 . 나도 기도를 하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도무지 한마디도 나오지를 않았다 . 집에 돌아오니 잠도 한잠 안 오고 밥을 먹으려니 밥이 목구멍을 넘지 못하였다 . 낮에는 상점 때문에 가지 못하고 밤에야 또 가게 되었다 .

 

셋째 날 밤에는 설교 제목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없고 어느 것이 제목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 그저 ‘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에 끓으셨구나 ’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요 , 예수는 사람을 저렇게 사랑하시었구나 하고 스스로 감사를 느낄 뿐이었다 . 설교를 듣는 동안 나는 그저 눈물 , 그저 울음에 잠기었다 . 큰 장마 후에 개천마다 물이 가득 차는 것같이 이날 밤에는 눈물이 더욱더욱 예배당에 차고 넘치었다 . 설교를 마치신 후 통성기도를 시키시니 울음과 통곡 소리에 예배당은 부글부글 끓는 듯하였다 . 나도 울었다 . 그러나 기도는 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 처음에 나는 기도를 한다고 ,

“ 주여 , 어찌하여 저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까 ? 어찌하여 내 입은 말을 할 수 없습니까 ? 어찌하여 기도가 안됩니까 ?”

이말 한마디를 가지고 약 1 시간 가량 악을 쓰고 몸부림을 치고 졸라대었다 . 내 가슴은 더욱더욱 막혀 오고 답답하여 오는 것이었다 . 이렇게 애를 쓰기를 2 시간이나 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다 .

“ 이놈 , 너 이놈 , 기도는 하나님의 일이다 . 네 맘에 죄를 그렇게 쌓아놓고 기도를 하겠다고?”

“ 주여 , 내 죄가 무엇이오니까 ? 주께서 십자가 공로로 대속하여 주신 줄 믿사옵는데 , 이제 내게 있는 죄가 무엇입니까 ?” 하고 졸랐다 .

“ 내가 네 죄를 사해준다 . 그러나 네가 너의 손으로 , 눈으로 , 마음으로 , 발로 지은 죄는 네가 회개하고 자복하여야 사함을 받는다.”

“ 주여 , 이것은 용서함을 받은 줄 알고 있었는데요 .” 

“ 아니다 . 좀더 회개해라 .”

나는 이때에야 “ 주여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하고 통곡하였다 .

전년 가을 배추를 사러 외성에 갔었다 . 배추 한 오랑에 2 원 50 전씩 한다는 것 두 오랑을 캐어서 차에 실었다 . 그 주인이 술을 먹고 있다가 , 배추 값이라고 5 원짜리를 내주니 2 원 50 전을 거슬러 주는 것이었다 . 이때에 주일 학교 선생인 나는 가슴이 좀 두근두근하는 것을 참으며 그 돈 2 원 50 전을 받았다 . 그러나 내가 속이거나 빼앗은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을 받았으니 잘못도 아니요 , 죄도 아니라고 억지로 해석하여 나는 그 돈을 받아 지갑에 넣었 다.

더욱이 술 취하고 정신 없는 자의 돈은 다 긁어와도 좋다는 결론을 짓고 깨끗이 안심을 하고 있었다 . 그러나 그 김장을 먹는 한겨울 동안 내 마음은 종종 흐리어지며 괴로운 것이 사실이었다 . 이때에 이 돈 2 원 50 전이 눈 앞에 나타난다 . 나는 곧 그 돈 3 원을 내놓으며 그 죄를 고백하였다 . 이러고 엎드리니 기도가 나온다 . 약 1 시간 동안 나는 기도를 할 수 있었다 . 그리고는 또 기도가 꽉 막혀진다 . 나는 또 지난 날을 회고하며 죄의 기억을 찾고 있었다.

촌에서 지내던 때다 . 19 살 때 숙부 되는 이가 사랑방에서 주무신다 . 나는 돈을 쓰고 싶은 생각이 나서 숙부를 찾아 들어가니 다른 이는 없는데 숙부 가 술이 취하시어 혼자 누워 잠이 드시었다 . 나는 가만히 돈지갑을 훔쳤다 . 들고나오다가는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섰다가 다시 돌아서기를 몇 번하다가 나는 결국 그 지갑에 있는 돈 2 원을 홈쳐내고야 말았다 . 그리해서 그 돈을 헛된 데 써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내가 김을 매노라니 숙부가 나를 향해 오시다가는 돌아서시고 돌아 섰다가는 또 오시다가 또 돌아서시기를 몇 번 하신다 . 나는 그 눈치를 짐작하고 나는 모른다고 대답하기로 작정하고 김을 그냥 매노라니 숙부는 결국 입술을 깨물고 말을 입 밖에 내시지 않고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 10 년 전에 이 일이 문득 생각에 떠오른다 . 나는 곧 2 원 대신에 7 원을 보내면서 숙부님께 글을 올렸다 . “ 만일 술을 마시시면 모든 것을 다 잊으실 테니 그만두시고 저의 죄를 용서해달라 ” 고 하였다 . 이렇게 하고 나니까 또 기도가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기도를 시원히 했는데 또 기도가 막힌다 . 나는 또다시 옛날의 흐린 기억을 더듬었다 . 20 살 때에 나는 어떤 일본집에 가서 두 달 동안 일했던 적이 있었다 . 나는 힘껏 , 정성껏 일을 보았다 . 하루는 돈을 받아 오라기에 받아다가는 주인집 부인을 분명히 주었는데 받지 않았다고 고집한다 . 그래서 나는 분개하여 싸우고 나왔었다 . 그러나 얼마 후 나는 다시 그 집에 갔다 . 다시 가서는 돈 20 원을 저금하였다 . 그런데 이 돈 20 원 중 12 원은 물건값 받은 것을 내가 가로챈 것이었다 . 이 생각이 나서 나는 곧 그 노파를 찾아서 돈 12 원을 내놓으며 나의 잘못을 말하고 당신도 예수를 믿자고 전도하였더니 그 노파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었다.

이리하여 나는 어렸을 때 남의 참외 따먹은 것을 생각하여 그 돈을 교회에 내놓고 다른 작고 큰 죄를 생각되는 것은 다 고백하며 그 값을 내놓았다. 

어느 때에 물건을 흥정하다가 김 집사가 내게서 돈 10 전을 더 받아갔다 . 그래서 가서 달라니 안 준다 . 그래서 김 집사를 나쁜 사람이라고 미워하고 있었다 . 나는 이것도 내놓기로 했다 . 나의 심정을 김 집사에게 말한 후 우리는 눈물로 악수하였다 . 나는 익선 씨와 말다툼한 일이 있다 . 나는 이것도 풀어 버리고 그와 악수하였다.

이렇게 나는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아무리 작은 죄라도 생각되는 것은 다 회개하고 다 내놓았다 . 이때에는 회개하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요 , 원수를 푸는 일이 제일 기쁜 일이었다 . 오직 이 일만이 나의 살 길이요 ,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가 죽기를 바랬던 일이 있다 . 어서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병이 들어도 약도 안 사다 주며 미워하였다 . 첩은 얻을 수 없으니 다른 부인을 얻기 위해서는 아내가 죽어 주기를 기도하였다 . 이것도 마음에 걸려서 곧 아내에게 이 말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였다 . 아내도 기뻐 눈물을 흘렸다 . 이때부터야 부부는 참으로 화평하게 되었다.

이만치 죄를 털어놓고 씻어 버리니 비로소 몸이 가벼워지고 참말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맛볼 수가 있었다 . 이에 천지가 다 나를 위해 있는 것 같고 만물이 다 내 것 같으며 해와 달 빛이 어찌 그리 명랑하게 보이는지 이 때의 마음자리를 말로나 글로 표하기 어렵다 . 그저 마음이 기쁘고 그저 어깨춤이 들썩들썩 나오는 것이었다.

상점에 앉아서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에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그를 믿자고 전도하였다 . 이때에는 물건을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전도를 하는 것이 첫째 소원이었다 . 내가 전도를 하면 듣는 자마다 모두 크게 감동하거나 당장에 믿겠다고 작정을 하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 내 마음은 더욱더 기뻐지고 나는 용기를 더욱 내어 전도하였다.

하루는 매를 맞아 이빨이 부러진 촌 사람이 고소를 하고 경찰서에서 돌아오던 길에 내 상점에 물건 하나를 사려고 들린 일이 있었다 . 나는 이 사람을 붙들고 사랑을 설명하고 주님을 증거하였다 . 그랬더니 그는 당장에 눈물을 흘리며 고소를 취하할 것을 맹세한 후 성경을 한 권 사가지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 목사님의 설교는 그저 말이 기관총에서 쏟아져 나오는 듯 막 쏟아져 나와 가지고 사람의 귀에 와서 울리는 것이 아니라 , 사람의 심중을 콕콕 쏘아 마음을 찌르고 갈라 놓으므로 그 설교 앞에서는 죄를 두고는 참을 수 없고 흐린 마음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마음에 흐릿한 것이 있고 서는 방금 천벌을 받는 듯하여 벌벌 떨게 된다 . 그래서 변호사가 큰 죄를 자복하고 순사가 칼을 떼 놓았다 . 이 모라는 이는 전에 목사의 자리에 있던 사람으로서 첩을 얻고 별별 음탕한 생활을 다하는 사람이다 . 그가 나와서 자복하는 광경은 굉장하였다.

“ 이 놈은 더럽기 짝이 없는 자식이올시다 . 똥보다 더 더러운 자식 , 똥 중에도 썩어진 똥이올시다 . 희고 깨끗한 수건을 변소에 빠뜨리어 똥에 썩어진 손수건 같이 된 놈이올시다 ” 하며 통곡하는 그 정경은 불쌍하고 끔찍하였다.

모여든 모든 사람이 모두 다 자복하느라고 애를 쓰고 통곡하느라고 목이 쉬었다 . 이러는 동안에 벌써 집회 예정 기일인 1 주일이 다되었다 . 듣던 무리는 열이 극도에 달하였다 . 목사님이 이제 가버리신다는 것은 모두가 기절할 사실이었다 . 윤 전도사가 목사님께 조르기 시작했다 .

“ 우리가 지금 속에 들었던 어지러운 것을 다 내놓았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의 속은 텅텅 비었습니다 . 이제 그냥 목사님이 가버리신다면 우리는 또 무슨 위험에 빠질는지 모르겠습니다 . 목이 말랐으니 생수를 주셔야지요 . 정신을 잃었으니 회복을 시켜주셔야지요 . 그러지 않으시면 우리는 다 불쌍한 양이 되고 말 것이올시다.”

이렇게 조르며 사흘만 더 있어 달라는 간곡한 애원은 바쁘신 목사님의 허락을 받고야 말았다 . 이때부터는 목사님이 자기의 신앙 간증이 많았다 . “ 내가 이렇게 주의 일을 위하여 나서게 된 것은 오직 나의 어머니의 신앙과 기도의 힘이올시다 . 우리 어머니는 주를 믿기 위해서 목도 여러 번 매려 했고 서슬 사발도 여러 번 잡았답니다 . 그렇게 목숨을 끊으려고 하실 때마다 예수께서 나타나시사 , ‘ 내가 있는데 네가 왜 비관하고 죽으려고 하느냐 ’ 하심으로 다시 마음을 돌이키어 용기를 얻곤 하였다고 합니다 . 나의 어머니는 자기의 신앙을 위하여 , 친척과 자녀들의 신앙을 위하여 , 참으로 애도 많이 쓰시고 울기도 많이 하시고 기도도 많이 하셨습니다 . 이번에 만일 작은 능력이 나타 나셨다면 이는 오직 나의 어머니의 기도의 힘이요 , 이적이나 기사가 보여졌다면 이도 오직 어머니의 믿음의 힘으로 되어진 것이올시다.”

그의 음성은 떨리고 그는 눈물을 흘리신다 . 모인 무리가 다 감동되고 다 회개하며 다 ‘ 아멘 ’ 을 부르짖었다 . 이때쯤에는 회당이 정말 터지도록 사람이 모였다 . 그 예배당이 500 명 수용하는 집인데 천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 안에 사람이 어찌나 모여들어 복작거렸는지 벽돌담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예배당이 무너진다는 큰 소동까지 났었다.

 사람이 겹겹이 몰리어 무릎도 다른 사람에게 눌리고 등 또한 사람에게 꽉 눌리었다 . 무릎을 움직여 볼 수도 없고 등을 펴볼 수도 없다 . 이렇게 전신에 쇠고랑을 채워 놓은 상황에는 몇 분 동안도 참기 어려우련만 그래도 괴로움을 모르고 그의 말에 취하고 열정에 녹아지는 것이었다 . 목사님은 설교를 1 시간이나 2 시간만은 안 하신다 . 대개 3 시간 , 4 시간이요 , 어떤 때는 선 자리에서 5 시간 , 6 시간 , 7 시간까지도 힘차게 하셨다 . 그러나 그렇게 긴 시간을 그렇게 쪼그리고 있어도 졸음이 오거나 아픔을 느끼는 자가 없고 죄를 회개하고 주를 만나는 기쁨에 그저 찬송이요 , 그저 춤만 추는 것이었다 . 누가 헌금을 하자고 말한 일이 없고 이것이 헌금이라는 말이 없으면서 그냥 돈과 물품이 강대상으로 던져진다 . 헌금이 들어오고 또 들어온다 . 나는 이 때의 헌금을 세가지 종류의 헌금으로 구분한다.

 

① 회개의 헌금 : 부흥회가 시작된 지 며칠 후부터 돈과 물품이 들어왔다 . 이것은 전날에 남의 것을 훔친 자와 속이고 빼앗았던 자들이 회개함에 이르러 그에게 돌려 주고 싶어졌으나 지금에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어 도적질한 그 돈과 물품을 주님께 사죄하며 주 앞에 드리는 것이다.

② 감사의 헌금 : 죄를 회개하고 무거운 죄의 짐을 벗어놓으니 몸이 너무 가볍고 마음이 너무 좋아서 뒹굴며 춤을 추다가 기쁨이 넘치고 감사에 눌려 있는 바를 통째로 털어놓는 것이다 . 오늘이나 내일에 무엇을 먹는다는 그런 예산을 다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내놓는 전적헌납 ( 全的獻納 ) 이다 . 이때는 돈을 헤어 보거나 주머니에서 꺼내줄 여유가 없다 . 어서 바치려는 급급한 마음은 주머니 끈을 끊고 통째로 바쳤고 가방을 열어도 안보고 통째로 바치었다.

7 〜 8 년 감옥에 있는 동안 많은 자녀를 데리고 악전고투를 해오던 아내가 남편이 출옥을 함에 너무도 기뻐서 품팔이해서 번 돈으로 남편에게 새 두루마기를 해 주었는데 남편이 그 두루마기를 이때에 벗어 바쳤다 . 어린 여학생이 한 푼씩 , 두 푼씩 몇 해를 모으고 정성을 들여서 짰던 털실 목도리를 울며 춤추며 내바치고서 그 추운 밤에 기뻐 돌아가는 것이었다 . 금비녀나 금 단추는 문제도 안 된다 . 결혼반지 , 약혼반지 , 털 저고리 , 치마까지도 나왔다 . 그러면서도 몸을 통째로 바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 바칠 수만 있다면 속에 간이라도 다 뽑아 바쳤을 것이다 . 이 헌금 , 이 바침이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다 . 그저 저희가 기뻐서 아침으로 , 저녁으로 , 밤 중으로 시간이나 때도 가리지 않고 그냥 바치는 것이었다.

③ 고인의 명복을 비는 헌금 : 이미 세상 떠난 부모 , 아내 , 남편 , 자녀를 생각하며 내놓는 돈이 또한 많았다 . 그들의 생을 생각하며 내고 그들의 천국에서의 안식을 감사하며 내놓는 것이다 . 이때 보니 살아서 모인 사람도 많더니 그들이 떠나 보낸 죽은 자도 참으로 많았다 . 제 몫에 돌아오는 돈도 안 내려고 피하는 세상에서 그 이름이 교회에서 지워지고 , 호적에서 지워지고 , 근처에서 잊어버려진 그의 몫까지 가로맡아 낸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이적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모이고 쌓인 돈이 7,000 여 원에 이르렀다 . 지금 평양에 사는 자는 죽전리에 서있는 굉장한 벽돌집 예배당 중앙교회를 볼 수 있다 . 이 집이 이 때의 이 눈물과 이 기쁨 속에 모인 이 7,000 여 원을 토대로 해서 세워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나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놀래는 동시에 한 사람의 말과 땀과 눈물의 권능과 능력에 놀래었다.

내가 예수를 믿은 지 7 〜 8 년 동안에 이런 광경은 처음으로 보았다 . 나는 기뻤다 . 용기가 났다 . 돈벌이나 장사가 문제가 아니다 . 그저 기도 , 그저 전도만이 사람 전체요 , 생 전체라고 생각될 뿐이었다 . 상점에 앉아서도 나는 미친 듯이 예수 믿으라는 고함만 쳤다 . 상점에 오는 자마다 나는 손을 붙들며 예수를 믿자고 했다 . 만나는 자가 다 “ 믿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 했고 돌아서서는 안 믿겠다거나 , 힐난을 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 나의 말 몇 마디는 그의 영과 몸을 떨게 하며 머리를 숙이게 하는 것이었다.

밤 12 시가 되도록 상점을 보다가 가게 문을 닫고는 친구 김병관과 둘이서 모란봉으로 가서 밤새워 기도하였다 . 3 시나 4 시에 산에서 내려 오느라면 술이 취해서 길가에 넘어진 사람 , 비틀거리며 집을 찾느라고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 .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한 후 일으켜 집으로 가도록 하고 그를 붙들고 그 집 대문까지 인도해주었다 . 지나가는 , 짐을 많이 실은 구 루마를 가는 곳까지 밀어다 주었고 상가를 찾아 다니며 기도하고 같이 울고 눈물로 묻어 주었다 . 그때에는 집 생각이나 돈 생각이 다 없어지고 , 부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도 없고 , 그저 기쁘고 그저 좋아 내 소유 , 내 몸을 다 남에게 주고 거꾸러져 죽는 것이 제일 기쁠 것 같았다.

 

나는 인생이 역하여 울었고 인생이 무엇이냐고 고민하여 왔다 . 나는 어려서부터 고생을 하며 살아왔다 .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얼마 후에 어머니가 나가버린 후 어린 나는 친척집으로 밥을 얻어먹으려고 다녔고 남의 집으로 종살이를 다녔다 . 나는 울기도 많이 하고 가슴도 많이 쳤다 . 어린 몸이 자살을 몇 번이나 하려고 했는지 . 고생을 하며 천대를 받을 때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어머니를 원망하였다.

좀더 나이 들어서는 내가 받는 이 고생은 나라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탄을 하였으며 이 고생을 면하려면 일본 놈을 죽여야겠고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 돈을 모아도 별 수 없고 벼슬이 높아도 시원치 않을 것을 알게 된 나는 그저 일본 놈 하나를 죽이고 나도 죽어야 된다는 생각뿐 이었다 . 이 일에 착수하려고 결심도 여러 번 했고 주먹도 여러 번 쥐어보았다 . 그저 일본 놈을 많이 죽이고 내가 죽는 것만이 내가 갈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이 목사님이 오셔서 주의 사랑을 알려 주시고 그의 은총을 가르쳐 주셨다 . 나는 그저 자복과 그저 회개뿐이었다 . 회개의 꼭대기를 넘어선 나의 눈에는 올라가는 길이 아니고 내려가는 길이 나타났다 . 전날의 그 원수가 어찌 그리 곱게 보이는지 , 나를 해하려는 자라고 원망하던 그 사람들이 어찌 그리 좋아지는지 , 나를 학대한다고 원수로 생각했던 그 사람이 어느새 나의 종으로 보이고 나를 기르는 사람으로 보이며 귀여워지는 것이었다. 전에는 그 사람과는 하루도 못살겠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 사람 없이는 못 살 듯이 생각되는 것이었다 . 그 크고 밝은 태양이 나 한 사람을 위해 있는 것 같고 , 오고 가는 기차가 오직 나만을 위해서 수고하는 듯하다 . 지게꾼 , 인력거꾼 , 자동차가 다 나를 위해서 그 고생을 하는 것 같고 , 온 지구가 나 때문에 있고 하늘에 별이 나 한 사람만을 위해서 있는 것 같다. 바다의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이요 , 우마와 육축이 다 내 것으로 보인다 . 그래서 나는 길을 가다가 큰 웃음을 혼자 웃기도 하고 네거리 복판에 엎드려 기도도 올렸다.

나에게는 밥을 먹기 위해 허덕이는 나의 꼴이 우스워졌다 . 그보다도 하루 빨리 한시라도 빨리 주를 위해 이 몸을 바치고 싶어졌다 . 집도 상점도 다 버리고 아내와 아이도 다 내놓고 성경과 찬송가만 손에 들고 이 성에서 저 성으로 이 촌에서 저 거리로 복음을 전하며 돌아다니고 싶었다 . 나의 귀에는 “ 나를 따르라 ” 는 주의 음성만이 자꾸 들려 왔다 . 전에는 성경을 보다가 늘 ‘ 아 , 글쎄 사람이 어찌 이것을 실행할 수 있을까 ’ 고 의심하고 걱정했더니 이제는 성경에 있는 어느 구절의 명령 하나도 실행 못할 것이 없이 생각되었다 . 이리하여 결국 다년간 경영하던 상점을 닫고 말았다 .

 

나는 그 후에 곧 성경학교에 입학하였다 . 공부를 하기 시작한 후 얼마 후에 금식기도를 할 필요가 느껴졌다 . 나는 1 주일간 금식기도를 하기로 했다 . 금식기도를 하면서도 공부에는 여전히 참석하였다 . 시험도 치르고 찬송도 부르나 힘드는 줄을 조금도 몰랐다 . 찬송은 더 힘이 있고 얼음판길이 제일 걷기 좋은 길이 되었다 . 금식 1 주일째 되는 날 내가 누웠는데 아내가 곁에 오니 숨소리가 없어 겁이 벌컥 나서 나를 흔든 일도 있었다 . 나는 여드레께 되는 날에야 밥을 먹었다.

이후에 곧 전도 여행을 떠났다 . 길을 가며 만나는 사람에게 전도를 하면 몇 마디 듣고서 곧 크게 감동하며 믿겠다는 것이다 . 이윽고 수안 ( 遂安 ) 에 이르렀다 . 성탄 전일 밤에 찬송을 부르며 돌아다니니 온 거리가 놀라는 것이었다 . 한 걸음 두 걸음 가다가 어떤 큰 기와집 앞에 이르렀다 . 나의 찬송소리를 들은 그 집 주인은 하인과 투전꾼을 내보내어 나를 때리려고 한다. 

“ 왠 놈이 이리 야단이냐 ?” 고 하매 , 

“ 제가 그랬습니다 ” 했다 . 

“ 어디서 왔느냐 ?” 

“ 평양서 왔습니다 .” 

“ 그 놈 죽여라 .”

그러나 나는 목소리를 높여 전도만 했다 . 그들은 나를 때리지 않고 들어가 버리고 만다 . 그 집을 지나 좀더 가노라니까 시커먼 사람이 마주서며 , 

“ 어디서 왔느냐 ?” 묻는다 . 

“ 천국서 왔습니다 .”

“ 누가 가라고 하더냐 ?”

“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

그는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다가 언제까지나 이러겠느냐 등 별소리를 다 한다 . 그래도 내일이 예수탄일인데 교회에 나오라고 그 사람에게 나는 전도를 하였다.

이튿날 교회 강단에 올라서니 40 명 모이던 교회에 400 여 명이 모여 큰 은혜가 내렸다 . 나는 자전차를 타고 평양을 향하여 수안을 떠났다 . 주는 여비를 나는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 눈이 지독히 쌓여 길은 몹시 험하다 . 나는 넘어지고 쓰러지기를 몇 번 하였다 . 점심을 안 먹고 저녁을 안 먹으니 어두운 후부터는 더 넘어지고 뒹굴었다 . 넘어지며 찬송을 부르고 일어나서는 전도를 하였다 . 상가에 들어가 위로의 기도를 해주고 투전판에 달려들어 투전목을 빼앗았다 . 넘어지고 쓰러지는 동안에 평양에도 거의 왔다 . 바람은 모질게 불고 눈보라는 얼굴을 후려친다 . 훤하게 밝은 곳 , 밤 평양의 하늘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나는 목이 찢어져라 하고 찬송을 불렀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당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나는 기도하였다 . 눈 쌓인 그 길 위에 엎드려 기도 올렸다 . 집에 도착하니 12 시가 넘었다 . 밥을 안 먹었지만 배가 조금도 안 고프다 . 그냥 쓰러져 잤다 . 그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개인 전도를 했고 부흥회 인도를 한 적도 종종 있었다 . 전도를 하면 그저 다 믿고 부흥회에 나서면 모인 무리가 다 통곡을 하는데 나는 놀랐고 두려웠다 . 하나님이 나를 사로잡으신 것을 생각할 때 너무 두렵고 황송하였다.

 

얼마 후에 신암교회에서 전도사 일을 보라는 부탁이 있었다 . 나는 굳게 사양하였다 . 마음이 끌리어 전도는 몇 번 했으나 전도사라는 이름은 대단히 두려웠다 . “ 무식하고 믿음이 어리니까 감당을 못하겠다 . 경험과 학식이 없고 재주와 힘이 부족하니 못하겠다 ” 고 하였다 . 그러나 그저 충성된 마음 하나만 가지고 일을 보아달라고 해서 그럼 두 달 동안만 일을 보아 드리기로 약속하였다 . 교회에 예산도 별로 없고 나도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약속했다.

 

어느 집을 찾아가서 찬송을 한 장 부르고 기도 한 번 하면 한 달 동안 교회에 안 나오던 이가 오는 주일부터 가겠습니다 한다 . 다른 집에 가서 찬송과 기도를 올리면 몇 해 동안 교회에 안 오던 이가 오는 주일부터 꼭 가겠습니다 한다 . 이리하여 한 달 동안에 150 명의 교인이 늘었고 두 달째 되는 날에 새로 믿기 작정한 이가 200 명이 넘었다 .

이 교회에 김기영 집사라는 이가 있다 . 그의 열두 살 된 딸이 죽으면서 “ 아버지 , 어머니 예수 잘 믿으라 ” 고 하고 죽었다 . “ 나는 아버지 집으로 가니 부모도 아무쪼록 예수를 잘 믿으라 ” 는 부탁이었다 . 아버지는 가는 딸을 향하여 금반지를 끼고 가라고 하였다 . 그러나 천국에는 반지가 소용없다고 안 끼고 갔다 . 하늘에는 금 , 은이 소용 없다는 말에 감동한 김 집사 부처는 느낀 바 있어 돈을 내어 전도인을 세우기로 했다 . 이리하여 나를 전도인으로 세웠다고 한다 . 날이 갈수록 교인이 늘어났다 . 담임목사가 계속하여서 그냥 있자고 졸랐다 . 나도 그냥 주저앉기로 했다 .

 

나는 신암교회에서 1 년 반 동안 일을 보았다 . 창광산으로 가서 기도했다 . 길가에 나서서 전도를 했다 . 밤마다 전도하였다 . 전도에 드는 모든 비용은 말없이 던져주는 이름 모를 형제들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이 목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이 1 년 반 동안의 내 생활이 활동사진같이 나타난다 . 그리고 이때의 내 생활을 회고할 때마다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이 목사님께 향하여 감사의 절을 한다 . 이렇게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가 주를 그렇게 열심으로 사모하고 주의 일을 위하여 그렇게 나선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과 권능에서 된 것이다 . 그러나 이 사랑과 이 권능을 나에게 소개해 주고 전해준 이는 나의 경애하는 이 목사님이다 .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마다 용도 목사님에게 절을 하며 용도 목사님께 감사할 때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내가 목사님을 알게 된 후 크게 얻은 것이 있다 . 그것은 누구나 죄를 깨끗이 회개하고 씻어 버리면 다 주의 아들이 될 수 있고 주의 일꾼이 될 수 있고 큰 권능과 이적기사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마음 어느 한편 구석에 지저분한 잘못을 숨겨두고는 별 공부 다하고 별 짓을 다 한다고 해도 교회에 다닐 수는 있으되 예수를 따를 수는 없고 목사 월급을 받을 수는 있으되 목사의 직책을 감당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 제 3 부 : 그 자취를 따라서 >

 

 

 

제 2 장

 

평양 명촌교회 , 신암교회 1932.6

 

1932 년 음력 5 월 16 일에 목사님이 명촌교회에 집회 인도 차 오시었습니다 . 새벽 이른 차에서 내리셨는데 , 정거장에서 교회까지 들어오시는 그 광경은 바로 호산나를 부르는 예루살렘 거리 같았고 귀인으로 영접 받는 천사의 일행 같았습니다 . 마중 나간 교인들은 목사님을 가운데 모시고 149 장 ‘ 내주 를 가까이 하려 함은 ’ 찬송을 소리 높이 부르는데 모자를 벗어 드시고 평화의 웃음을 띄신 목사님은 뒤로 나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자를 흔들어 반겨 맞으시는 것이었습니다 . 이 명촌 집회 1 주일 동안에 낮 집회를 마치시고는 곧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시었는데 여러 신자들은 부흥성가 52 장 ‘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 를 불러서 도와 드렸습니다 .

계속해서 시작한 신암교회 부흥회 때에는 사람이 굉장히 모였습니다 . 어느 시간에나 6,000 명 이상은 모였습니다 . 회당이 너무 차고 넘쳐서 앉은 자는 남의 무릎 위에 앉았고 선 자는 몸을 꼼짝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 한창 더운 여름이었으매 , 앞뒤 사람이 다 땀에 젖어 있으니 예배당은 그냥 땀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 2, 3 일째 되는 날은 예배당이 꼬박 차고도 남는 사람이 많음으로 뜰에서 예배를 보게 되었습니다 . 걸상을 내다 놓고 그 위에서 말씀을 하시는데 목사님의 형상은 사람이 아니고 천사인 듯 , 신자 ( 神子 ) 인 듯이 보였습니다.

땀을 동이로 푹푹 쏟으시며 그 옷은 소나기를 맞은 것 같았고 , 흐르는 땀에 눈을 뜨지 못한 목사님은 한 손에 손수건을 늘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 하루는 세상에 믿을 것이 하나도 없고 사람은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설명에 열변을 토하시더니 땀에 젖은 손수건을 번쩍 높이 들며,

“‘ 의지하세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구하시네 구하시네 곧 구하시네 ’ 를 부르실 때 청중은 홀린 듯이 , 취한 듯이 말려들어 같은 목소리로 ‘ 의지하세 ’ 를 목을 찢어가며 합창 제창하는 것이었습니다 . 그 힘들었던 몸짓과 그 흘러내렸던 땀 , 그리고 그 내둘렀던 손수건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

 

신암교회에서 이 목사님을 청해오게 된 때 , 어떤 장로 한 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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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목사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요 , 그의 역사가 전부 신의 일이요 , 신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 성경을 인용하는데도 마태복음에 있는 ‘ 왼편 눈이 범죄하거든 뽑아 버리라 ’ 를 꺼내기 시작하여 30 여 곳을 그냥 줄줄 따라 외이며 설교를 답새겨 대는데 사람의 정신으로 도저히 그렇게 기억할 수 없는 것만 보아도 그는 사람의 껍데기를 썼으나 속에는 주의 권능으로 가득 찬 것이 분명합니다 ” 고 하였다 .

이때에 신암교회 집회를 시작하자 처음부터 5,000 명 이상이 모였다 . 그래 사람들은 다 남의 무릎 위에 앉고 내 무릎 위에 사람을 앉히는 것이었다. 신암교회에 오신 때는 중앙교회에 왔다 가신 지 3 년째 되는 해이었는데 , 목사님은 그 동안 3 년간을 계속해서 쉬지 않고 이 강산을 외치고 돌았으므로 이때에는 현저히 몸에 피가 마르고 살이 쪽 빠졌었다 . 그러나 그 말과 그 외침만은 여전히 힘있고 날카로워 언제나 5,000 〜 6,000 명 이상의 청중을 기관총으로 쏘듯이 그저 거꾸러뜨리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감에 따라 신암교회에는 사람이 더욱더욱 몰려들었다. 예배실은 차고 넘쳐서 창문 밖에 등상을 매고 거기에 사람들이 올라서게 했더니 , 사람이 너무 많이 올라타서 그 등상이 부러지고 말았다 . 그래서 할 수 없이 강대상을 들고 나와서 마당에서 집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모여드는 사람의 수와 그 모여든 사람들의 열정과 흥분은 끔찍하여 말로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 목사님은 단에 나서기만 하면 언제나 서너 시간 이상을 외치시었다 . 그러나 듣는 이에게는 서너 시간이 한 10 분 동안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 서너 시간을 서있어도 다리 아픈 줄을 모르고 무릎 위에 사람이 겹겹이 쌓여도 괴로움을 느끼지 못했다.

신암교회의 집회를 인도하시는 동안도 목사님은 별로 잡수시지를 않았고 또 주무시지도 않았다 . 그러면서도 단에 나서면 3 시간 , 4 시간씩 그 열변을 퍼 붓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침실에 돌아와 누우신 것을 보면 숨이 다 끊어진 인간으로 보였다 . 어느 날 아침 새벽 집회를 마치고 나오신 목사님은 포단 ( 蒲團 ) 을 쓰고 좀 누우셨다 . 어떤 분이 곁에 가니 아주 숨기운이 없어서 몇 사람이 모여서 지켜 보니 아주 숨소리가 없으매 통곡이 터졌다 . 그런데 이날에도 목사님은 조반 때를 지난 후부터 또 여전히 하루 종일 강단에서 그 더운 날씨에 10 여 시간 이상을 외쳐대시는 것이었다 .

 



 

 

< 제 3 부 : 그 자취를 따라서 >

 

 

 

제 3 장

 

안주 동부교회 , 서부교회 1932.10.3 ~ 10.11

 

1932 년 초이었다 . 평양방면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이용도 목사라는 이가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며 교계에 큰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 이때에 평양 성경학교에 나갔던 주○○ 씨가 들어왔는데 생활 태도가 아주 달라지고 그 기도하는 열과 방식까지도 우리에게 이상한 자극을 주었다 . 그런데 주 씨의 말도 역시 이 이용도 목사를 극구 칭찬하며 우리 안주에도 이 목사님을 한 번 모셔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름에 모이는 청년수양회 집회 인도를 해주시기를 용도 목사님께 청원하였다 . 그러나 이미 예정한 여러 곳 때문에 못 오시게 되었다 .

이에 주 씨 등 우리 네 사람은 이 목사님이 오실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를 계속하는 한편 동 · 서 두 교회의 제직회에서 이 목사 청빙을 공식으로 가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목사들 사이에서 시비가 생기고 방해운동이 일어나 당회에서는 초청 부결이 되어버렸다 . 서부교회의 모 씨가 주동이 되어 가지고 이런 결과까지 내게 된 것이었다.

이에 우리의 가슴은 끓었고 우리의 중심은 이 목사를 향하여 더욱 간절하게 되었다 . 그래서 우리 몇 청년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교회 제직 중의 일부는 지성과 뜨거운 눈물로써 용도 목사를 초청하자는 주장을 고집하였다 . 주님의 뜻을 막을 자가 어디 있으리요 . 서부교회 제직회는 다시 호전하여 전원 일치로 이 목사 초청을 가결하였다 . 서부교회에서 이렇게 확정되니 동부교 회에서도 합류 일치되었다.

동부교회 ○ 목사님이 이 목사님 청빙에 교섭자가 되었다 . 경성지방 김종우 감리사에게 수차 간원의 편지를 내고 현저동 목사님 본댁으로 수차 편지를 냈으나 , 2 개월 동안 도무지 소식이 없었다 .

은혜에 갈급한 여러 신자 , 특히 청년들은 지지한 목사의 초청에 만족할 수가 없다고 하여 다시 교섭위원으로 나를 뽑았다 . 이때에 나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중대한 책임감이 내 어깨에 지워짐에 심히 두려웠다 . 밤낮으로 지성을 다하여 간절한 애원의 기도를 드리면서 , 다른 편으로 목적 관철을 위한 실천에 결사 활동하였다 . 감리사에게와 목사님의 본 댁과 광희문교회 등 여러 곳으로 동시에 애원 절원의 초청 편지를 냈다 . 그랬더니 , 광희문교회에서 한 장 엽서가 왔다 . 우리는 그 엽서를 붙들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 지금 광회문교회에서 집회 중입니다 . 다른 곳에 이미 작정된 곳이 너무 많아 참 큰일이올시다 . 그러나 은혜를 갈급해 하는 정도 여하에 따라서 나는 언제든지 어디든지 끌려갈 수가 있습니다” 

하는 글이었다.

이에 나는 곧 여비를 보내면서 어느 날 경에 와 달라고 또 편지를 하였다. 전보료 2 원 이상을 들여 장문의 전보를 수 차례나 쳐 보내는 동안에 이 목사님은 안주에 오시게 되었다 . 우리가 청하기는 10 여 일 후에 와달라고 했는데 목사님의 회답은 4 ~ 5 일 후에 오시겠다는 것이었다 . 오시는 날 내가 신안주역까지 출영하였다 . 무명주의를 입으셨는데 그 동정까지 회색이었다 . 파나마 모자를 푹 눌러 쓴 목사님은 그리 큰 소리칠 위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 목사님과 함께 안주읍으로 오는 동안에 내 심중에 감격이 컸다 . 지나간 몇 달 동안에 제직과 싸우며 교회에 애걸하며 목사님을 모셔오기 위해서 애 태우고 고생한 생각을 하며 곁에 앉으신 목사님을 쳐다보니 감개무량하여 눈물이 자연히 흐르는 것이었다.

 

1932 년 10 월 3 일 저녁부터 집회가 시작되었다 .

“ 집회의 일체는 다 나에게 맡기시오 . 첫 종소리가 나서 예배당에 오시거든 다른 이야기나 생각은 하지 말고 찬송을 부르도록 하십시오.”

그러시더니 손을 들며 ‘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 를 꺼내시어 일동이 부르고는 기도가 시작되었다 . 첫 번 듣는 이 기도가 우선 우리의 귀에 맛이 다르게 들렸다 . 그 유창한 말씨 , 열렬한 어세 등 합하고 조화되어 아름다운 시를 외우는 듯 , 고운 독창을 듣는 듯이 기도가 약 1 시간 계속되었다 . 그러고 나시더니 설교는 몇 마디 안 하시고는 나를 믿지 말고 각각 중심으로 기도하는 중에 은혜 받으라고 하시며 통성기도를 시키시는 것이었다 . 말하자면 첫날 밤은 듣던 바와 같이 굉장하지는 못하여 조금 불만으로 느껴졌다.

이튿날 밤이 되었다 . 이 밤에야 본격적인 부흥회가 열렸다고 생각된다 . 설교를 한창 내리 답새기다가 만인의 가슴이 바짝바짝 타 들어왔을 때 목사님은 손을 높이 들며 찬송을 꺼내셨다 . 열광된 청중이 화답하여 한 절을 다같이 부르면 다시 있는 열을 다 내어 찬송의 다음 절을 시적으로 해석 설명하시며 자기의 주장과 소회 ( 所懷 ) 를 퍼붓다가 말이 제 3 절을 향하여 가경 ( 佳 境 ) 으로 들어가면 , 또 손을 번쩍 들며 제 3 절을 발성하는 것이었다 . 이러하기를 분명히 4 시간 이상 해내었다 . 이날 저녁부터 일반의 가슴은 시원해지고 끓던 가슴은 쾌함을 얻게 되었다.

어느 날 밤에는 요한복음 5 장에서 끝장까지 성경 낭독만 하였는데 그 성경 낭독이 어찌도 사람을 감동시키고 울리는지 , 그런 역사는 처음 보았다 . 주일 오후에는 요한 13 장을 보고 십자가 아래 세가지 사람들의 - 막달라 마리아 , 못을 박는 자 , 따라간 자 -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데 그 시적 형용과 정적 표현은 참으로 언어 이상의 미술이요 , 미술 이상의 매혹 ( 魅惑 ) 이었다 . 이렇게 되니 이 목사님 모셔 오는데 반대했던 사람들도 전부 거꾸러지게 되었다 . 그 굉장한 역사가 8 일간을 계속하다 목사님이 가실 날이 왔다 .

 

교회에서는 지켜오는 버릇대로 전별회를 한다고 몇 십전씩 돈을 모아 잔치 준비를 해놓았는데 , 마지막 날 저녁에 다 함께 기도하자고 통성기도를 시켜 놓고서 자기는 일찍 기도를 끝낸 후 몇 사람밖에 모르는 중에 안주를 떠나시고 말았다 . 이렇게 몰래 떠났으나 그 밤에 신안주역까지 50 리 길을 따라 온 자가 30 여 명은 되었다 .

 

이때에 안주에서의 집회광경에는 누구나 다 놀랐다 . 밤 7 시부터 예배를 시작하여 설교를 3 〜 4 시간씩 하고 그리고는 밤이 늦도록 수백 명의 신자에게 안수기도를 하시고 그리고 나서는 강대상 아래 엎드려서 기도로 밤을 완전히 새우시는 것이었다 . 그리고는 오전공부 , 또 계속하여 오후공부 . 이리하여 안수집회 8 일간은 문자 그대로의 불면 ( 不眠 ), 불휴 ( 不休 ) 이었다 . 그렇게 약해 보이는 몸이 그렇게 철석보다 더 강하고 단단함에는 누구나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목사님 오시기 전까지의 우리 교회는 참으로 산판적 ( 算板的 ) 이요 , 상회사 ( 商會社 ) 적이었다 . 그래서 단돈 10 전의 비용도 여러 가지 수속을 지내고서야 판출하였고 단 1 전을 쓰는데도 여러 계원과의 상의와 결의가 있어야 되었다 . 그런데 이때 이 목사님이 오신 때의 비용은 누가 어떻게 내어서 어떻게 썼는지 모른다 . 사경 비용이 얼마 들었다고 문제도 말도 없었고 북진행 여비 , 평양행 여비 등 불소한 경비가 났지만 어떻게 들어왔다가 어떻게 나갔는지 아는 자도 없고 물어보는 자도 없었다.

 

동 · 서 두 교회 사이에 무슨 담인지가 막히어 사사건건에 격의 ( 隔意 ) 가 있고 합일이 되지 못했는데 , 목사님이 왔다 가신 후부터 양당합일 ( 兩堂合一 ), 동서무별 ( 東西無別 ) 이 된 것이 큰 결실 중의 하나요 , 기도란 것은 남이 듣지 못하게 골방에서만 하는 것으로 알던 것이 안주성을 울리고 안주의 산야에서 밤낮으로 크게 들려오게 된 것이 또한 큰 소득이다 .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슬슬 신자의 비위를 맞추면서 속으로는 저 볼장만 꿍꿍이로 보던 교역자들이 정말 주님 앞에 탁 꺼꾸러진 것 또한 뛰어난 성공의 하나이었다.

 



 

< 제 3 부 : 그 자취를 따라서 >

 

 

 

제 4 장

 

목사님 그리며 주야 험로(險路) 230 리 1932.10

 

1932 년 음력 9 월 15 일은 이용도 목사님이 안주에 오신 지 9 일째 되는 날이다 . 이날 밤으로써 안주의 집회는 끝나는 것이다 . 그 불 , 그 열로 4 시간 이상을 가득 모인 청중에게 땀과 눈물을 다 쏟으시고서 마지막으로 통성 기도를 시키신다 . 가슴에 불이 펄펄 붙어 오르는 청중은 고함치며 통곡하며 가슴치며 방바닥을 쥐어뜯으며 기도의 골짜기로 모두가 쓸려 들어갔다. 

나도 이 기도에 참여했다 . 좀 빨리 끝나게 되어 강대상을 바라보니 목사님이 없으신 듯하다 . 나는 직감적으로 목사님이 이미 떠나신 것 같았다 . 그래서 나는 예배당을 뛰쳐나와 자동차부로 달려갔다 . 가보니 목사님은 벌써 떠나 버리시고 나와 같은 생각으로 뛰어온 친구 몇 사람이 차부 앞에서 웅성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 원망스럽기도 하고 맥도 빠져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던 중에 곁에 있는 어떤 분에게 들으니 목사님이 모레부터 운산 북진에서 집회를 여신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나는 곧 집으로 달려가서 북진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 “ 그게 무슨 망발이냐 ” 하는 동생들의 짜증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나는 단연 길을 떠나기로 하였다 . 한두 가지 옷과 책을 준비하고 나니 12 시가 지났다 . 새벽 1 시가 다되어 나는 집을 떠났다 . 몇몇 친구의 집에 가니 그들은 벌써 떠난 모양이다 . 그래서 나는 혼자서 그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 1 주일 이상이나 밥을 별로 안 먹어 굶주린 몸에 언제 밥이 생길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거리가 다 잠든 가을 새벽에 알지도 못하는 생소한 길을 향하여 미친 듯이 뛰어갔다 . 북진이 어느 편에 붙었는지 알지 못하는 내 몸은 어느 길이 북진 가는 길인지 알아볼 생각도 않고 그저 정신 없이 걸어가는 내 다리에 실리어 끌려가고 있었다 . 숨이 끊어지는 것 같아 문득 생각해 보니 뛰었던 모양이다.

얼마를 더 가니 친구 둘이 앞에 가는 것이 보인다 . 셋이서 한참 달음박질을 하니 저편 앞쪽에서 찬송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천당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여기서 우리도 목소리를 높여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함께 불렀다 . 이 찬송소리를 듣고서는 우리 셋은 주먹을 쥐고 달음질 쳤다 . 그러나 10 리를 지나 배를 타고 청천강을 건넌 후에야 20 명의 일행을 겨우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 우리만 뛰는 줄 알았더니 그들도 우리만큼 달음질친 모양이었다 . 20 명을 만나니 한 가지 애끓는 생각이 들었다 . 

‘ 이중에 목사님이 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 .’

길은 점점 좁아지고 고개는 하늘에 꼭 닿은 듯 길에는 칼끝 같은 돌이 깔렸고 새벽 공기는 달음질치는 우리에게도 소름이 끼치리만큼 차가움을 준다. 벌써 발이 부르터 못 가겠다는 사람 , 다리가 아프다고 주저앉는 사람이 생긴다 . 그러나 하루 밤낮에 230 리를 걸어야 북진집회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일행은 그런 사람을 위로하거나 동정할 자비심도 없었다 . 돌진 그냥 돌진 . 우리는 그저 쏜살같이 달아난다 . 한참 가다가 돌아보니 발이 쏜다 , 다리가 아프다던 사람들도 무슨 힘으로인지 다 따라온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한참 동안 더 달음질을 치더니 이번에는 20 여 명의 입이 다 같이 부르짖는다 . “ 아이고 다리야 .” 그러나 찬송소리는 점점 더 높아진다 .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입으로 나오는 소리는 컸으나 피곤한 지체의 맥은 차츰차츰 빠져간다 . 다리를 절뚝절뚝 저는 사람 , 쌍지팡이를 짚고 어기적거리는 사람 , 우리 일행은 어느덧 전쟁판에서 돌아오는 상이군인의 일행 같았다 . 그러나 여전히 원기 있는 찬송을 부른다.

 

내 일생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어깨는 늘어지고 다리는 떨리는데 머리가 천근인 듯 , 가슴이 만근인 듯 무거움에 허덕이는 우리는 못 박히신 손으로 피 흘리며 달려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는 위로를 얻고 원기를 공급 받는 것이었다.

풀어지고 맥 빠진 몸뚱이를 끌고 얼마 동안을 더 가서 행인에게 물으니 북진까지 가려면 이제도 190 리를 더 가야 한다니 우리는 겨우 40 리를 온 셈이다 . 넘어가는 달이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보고 늙은 영감 같은 소나무의 떼가 바람결에 맞추어 노래하고 있다.

 

내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일동은 길 바닥에 엎드렸다 . 각각 큰 목소리로 기도를 시작한다 . 인가가 없는 산골짜기 , 범이 나온다는 돌작고개 턱에서 통곡소리가 일어나 새벽 산간을 진동시킨다 . 누구인지가 일어서서 찬송을 부르니 또 하나가 일어나서 춤을 춘다 . 조금 전의 통곡성은 금시에 환희의 무도장으로 변하였다 . 모두가 다 일어나더니 서로 붙잡고 뒹굴며 손뼉 치며 춤추며 찬송한다.

일동은 움직였다 . 우리는 전진한다 . 그 춤을 그냥 추며 그 찬송을 그냥 부르며 발 40 개를 가진 여인 하나가 듬직한 걸음을 옮겨 놓고 있는 듯이 20 인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전진하고 있다 . 또 한 고개를 더 넘으니 날이 밝았다 . 건너편을 바라보니 조그만 오막살이가 하나 있다 . 주막이었다 . 우리는 그리로 들어가 그 집 방안에 혹은 토방에 또 뜰에 모조리 쓰러졌다 . 한 상 밥을 두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 춥고 주렸던 몸이 방에 들어오니 졸음이 온다 . 모조리 눈이 탁 풀어진다 . 이 집에서 한잠씩 자고 가자고 입들이 하는 말은 다 같으나 어느새 다리들은 그 집을 나와 걸어가고 있었다 . 내일 집회 첫날에 참석하려면 어서 가야 된다는 생각에 그리하였다. 

그날 하루를 우리는 종일 걸었다.

어느덧 저녁도 저물어 어둠이 닥쳐왔다 . 그러나 하늘은 우리에게 명랑한 보름달로 우리의 길을 비추어 주신다 . 밝은 달빛을 통하여 우리 눈에 나타나는 고산 준령은 북진 집회를 못 보고서도 깨달으라는 듯이 장엄하고 신비한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9 시 , 10 시 밤은 깊어간다 . 우리의 앞에는 이야말로 하늘에 꼭 닿은 높은 산이 가로막힌다 . 구령강을 건너서 평지로 가면 좀 힘이 덜 든다고 하나 이른 가을에 홍수가 나서 그리로는 못 간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이 산을 넘기로 하였다 . 길도 없고 인적조차 없는 듯한 이 벼랑 , 이 험한 고개를 우리는 철없이 , 어림 없이 넘으려고 하는 것이다 . 하늘로 솟은 봉이 너무도 높고 우리가 디디는 길이란 것이 너무도 험해서 눈을 뜨고서 차마 발을 옮겨 놓을 수가 없다 . 그래서 우리는 눈을 꼭 감고 한걸음 한걸음 바위를 넘고 가시덤불을 밟으며 올라가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걸었는지 몇 리나 걸었는지도 모른다 . 이제 어디서 사람의 말 소리가 들려온다 . 촌 집 속에서 우리를 향해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 우리는 그 집에 찾아 들어가 말을 던졌다 . 새벽 1 시 . “ 북진 가는 길이 어디로 났느냐 , 여기서 몇 리냐 ?”

그러나 집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다 . 좀더 큰 소리로 물으니 집 안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는 우리를 도적의 떼로 알고 방비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 하도 치근치근 물으니 한 사람이 칼을 들고 쑥 나서다가 사람이 하도 많으니까 다시 들어가서 창구멍으로 내다 보면서 대답했다. 

“ 길을 잘못 들었소 . 20 리를 다시 돌아내려가야 하오 .”

우리는 아주 맥이 빠졌다 . 올라온 것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 그러나 별수가 없으니 다시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 여기서 우리는 한참 동안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린 후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 벼랑길을 다 내려가니 아까 초아진에 지나온 구령강이 다시 나타났다. 각 사람의 발들은 붓고 쏘고 강물은 넘실넘실하는데 하늘에는 구름조차 빙빙 돌아 달빛까지 끄물끄물하니 자칫 잘못하면 강에 빠져 죽을 것만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강을 건너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으니 문제는 크게 되었다 . 이에 우리는 첨벙첨벙 달려들었다 . 모세로 하여금 홍해를 가르고 건너 가게 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믿으며 하나씩 강으로 들어섰다.

정작 들어서보니 강이 그다지 깊지는 않다 . 그러나 돌에 묻은 때가 미끄러워 도무지 발을 부칠 수 없다 . 우리는 서로서로 손을 꼭 마주 잡았다 . 20 인이 완전히 한 몸이 되었다 . 죽을 듯한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몸들이건만 20 명이 꼭 붙잡으니 걱정이 없었다 . 점점 강속으로 들여감에 따라 우리의 정신은 긴장하고 우리의 마음은 감격에 가득 찼다 . 주님께서 든든한 손으로 우리를 완전히 붙들어 주심을 20 명은 다같이 느꼈다 .

후에 들으니 이 강이 바로 북진 전기회사의 발전 수원 ( 水源 ) 이라고 한다 . 이 강을 깊은 밤 1, 2 시에 맨발 벗고 건넜다는 사실은 영원까지 기적으로 남아 있으리라 한다.

이 강을 건너 큰 감격에 붙들린 우리는 새 원기를 얻어 또 전진하고 있었다 . 조금 가노라니 이번에는 또 높고 험한 고개를 넘어야 하게 되었다 . 이 고개도 역시 걸어서 넘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곳이지만 우리는 이 고개도 주님의 힘주심을 얻어 무사히 넘을 수 있었다.

날이 밝아오는 듯하다 . 아마 4, 5 시경 객줏집인 듯한 조그만 집 하나가 나타나는데 새벽밥을 짓는 듯하다 . 이틀이나 한잠 못 자고 밤을 새우며 시달린 몸들이니 제일 고통인 것이 추위다 . 그래서 부들부들 떨면서 우리는 그 집으로 몰려들어갔다 . 정신 잃고 쓰러진 무리는 조반이라고 조금씩 먹는 듯 , 마는 듯하고 채 밝기 전에 또 떠나기로 하였다 . 이 집에서 물어보니 우리는 밤새도록 걸었다는 것이 30 리 길을 뺑뺑 돈 것뿐이라고 한다 .

그 집을 떠난 우리는 쉼 없이 타박타박 전진하고 있었다 . 아침 한 곁을 쉬지 않고 걸어서 점심 때쯤에 이르니 여기가 안주와 북진 사이의 꼭 절반 되는 지점이라고 한다 . 그냥 나가다가 좀 앉아 쉬노라니 자동차 소리가 들려 온다 . 일제히 일어서서 차 속을 들여다보니 뜻밖에도 그 차에 목사님 , 이용도 목사님이 타고 계시었다 . 우리인 것을 알게 된 목사님은 차를 멈추는 교섭을 하시는 모양이나 만원 버스는 서지 않고 그냥 가버린다 . 차가 서지 않고 그냥 가버린다 . 차가 설 생각을 하지 않고 흰 연기를 뿜으며 멀리로 가 버릴 때 우리는 기가 막혔다 . 맥이 갑자기 폭삭 나고 다리가 갑자기 무거워져서 이제는 더 걸을 수가 없다.

우리는 마음에 극도의 비애와 절망을 느꼈다 . 그래서 난 못 가겠다고 우는 사람도 있고 골이 나서 밸 부리는 사람도 생겼다 . 그러나 그것은 1, 2 인에 불과하고 우리 일행을 전체적으로 보면 의기가 충천이요 , 원기가 왕성이다 . 우리는 전진 또 전진이 있을 뿐이다 . 그냥 가고 또 가니 북진까지 60 리라는 곳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해는 이미 서산의 허리를 타고 앉았다 . 이날 저녁부터 북진 집회가 시작되는 것을 생각하고 , 무정히 넘어가는 해와 가물가물 끝없이 보이는 길과 맥 빠진 몸뚱이들을 보며 , 조급한 생각과 몸의 쏘는 아픔에 모두가 눈물에 엉기었다 . 그러나 찬송소리가 더 힘있게 일어났다 .

 

천당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찬송하며 원망하며 온정 ( 溫井 ) 까지 갔다 . 기도하며 춤추며 10 리를 또 더 나갔다 . 여기에 이르러서 달려오는 자동차 한 대를 만났다 . 다행히도 이 차는 텅 비었다 . 이에 우리 일행은 전부 차에 올랐다 . 여기서부터 30 리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그냥 찬송을 불렀다 . 산천이 잠을 깰 듯이 찬송을 불렀다 . 초목이 춤을 출 듯이 찬송을 불렀다 . 사람을 태운 차가 아니라 찬송을 태운 차이었다.

차가 멎었다 . 북진까지 5 리를 걸어 들어가야 된다는 곳에서 차는 멎었다 . 북진을 향해서 찬송소리가 전진하고 있는데 북진서 전도 부인이 마중 나왔다 . 20 명의 저녁까지 다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 이 말에서 우리는 목사님의 여성적인 사랑에 부딪쳤고 그 웃는 얼굴을 눈 속에 보면서 환성을 올렸다. 최후의 용기를 내어 걷고 걸어 우리는 북진 시내에 들어섰다 . 더 나갔다 . 우리는 예배당으로 바로 들어갔다 . 엎드려져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음성 , 목사님의 그 음성이 들린다 . 엎드린 우리들을 위하여 위로와 축복의 기도를 올리시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생하던 이야기와 모세가 그들을 데리고 가나안을 향하여 떠나가는 길에서의 가지가지 고생과 수고를 시적으로 길게 묘사하시었다.

“ 이 무리가 왜 이 길을 떠난 것이옵니까 . 복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나이까 . 주님이시여 , 남다른 열성으로 무한한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찾아온 이들 중에서 한 사람도 중도에서 거꾸러져 죽어 버리는 자 없 게 하시고 다같이 손을 맞잡고 가나안까지 들어가게 하옵소서.”

일동은 감격과 억함에 울음이 터졌다 . 통곡성은 깊은 산골짜기 예배당에서 울리어 나오고 있었다 .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우리의 눈이 목사님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 , 그 반가움 , 이것은 …… .

 

북진 1 주일간의 집회도 끝나게 되었다 . 밤예배가 끝나자 안주서 온 일행은 떠날 준비다 . 자지 않고 여장을 차리고 난 우리는 새벽 1 시 반에 북진을 떠났다 . 5 리를 걸어나가서 2 시에 떠나는 화물차를 타기 위함이었다 .

여기서 박천 ( 博川 ) 읍까지 가는 동안의 고생과 고심은 또 말하기 어려운 것 뿐이었다 . 박천을 거쳐 맹중리 ( 孟中里 ) 역에 이르러서 우리 일행은 목사님과 만나게 되었다 . 맹중리역에서 목사님과 함께 남행차에 올라 목사님을 가운데 모시고 둘러앉은 우리의 가슴 속은 형용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쁨과 자랑에 가득 차있어 , 우리는 이것이 곧 천국이라고 20 여 개의 입이 꼭 같이 말하였다 . 신안주역에 이르니 안주읍 교인이 많이 마중 나왔다 . 북진 못 갔던 이들은 통곡하고 있는데 갔던 우리들은 장하게 가슴이 툭 나오는 것이었다.

이때에 나타난 김예진 ( 金禮鎭 ) 씨는 평양서 목사님을 모시러 오신 분이었다 . 여기서 안주 사람과 평양 사람이 목사님 쟁탈전을 일으켰다 . 두 편이 한참 동안 이론하고 주장하고 억지를 쓰던 중 목사님의 입에서 “ 아무래도 많은 사람에게 빼앗겨야지 ” 하시는 말이 나올 때 우리는 “ 와 !” 하며 만세를 불렀다 . 5 리까지나 따라오며 예진 씨는 조른다 .

“ 평양은 아무래도 갈 곳이되 안주는 다시 못 올 터이니 평양에는 내일 가시도록 하자 ” 고 말해서 돌려 보냈다 .

신안주역을 떠나 안주읍으로 향해 들어가는 우리 일행은 천사를 모시고 가는 듯 , 개선장군을 모시고 가는 듯 기쁘고 즐겁고 가슴이 뚝 나왔다 ( 후일에 이때를 회고하면 호산나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연상한다 ). 5 리를 가서 우리를 마중 나오는 일단의 안주교인을 만났고 10 리를 가서는 안주읍 교인이 다 따라 나오는 것을 보았다 . 여기서부터 다 함께 안주성으로 향해 들어가는 우리는 찬송을 불렀다 . 점점 높아가는 찬송은 안주 삼천리 벌을 뒤흔들고 5 리 밖에 있는 안주성안 모든 사람들의 잠자는 영혼을 깨울 듯하였다.

 

 



< 제 3 부 : 그 자취를 따라서 >

 

 

 

제 5 장

 

생수를 찾아서 1932.10.20

 

때는 1932 년 10 월 20 일경이었다 . 각지로 돌아다니던 나는 집에 와서 몇 날 째 쉬고 있던 중이다.

그런데 22 일 오후에 신앙의 동지 남녀 11 인이 멀리 숙천 ( 肅川 ) 에서부터 한 무리가 되어 가지고 내 집을 찾아왔다 . 들으니 이용도 목사께서 23 일부터 해주에서 부흥회를 인도한다는 소식이 있으므로 갈급한 영의 애탐을 참을 수 없어 도보로 해주로 가는 도중에 나의 참가를 원하여서 들리었다는 것이다 . 청년 남녀들도 있지만 60 이 넘으신 노파도 섞인 이 무리는 300 리의 험곡원로 ( 險谷遠路 ) 를 도보로 답파한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처음에는 일행을 향하여 이제라도 이 길을 그만두라고 권해보기도 하고 나는 못 가겠다는 말도 해보았으나 도 ( 道 ) 에 주리고 성자의 그리움에 애타는 이 무리는 “ 절대 사양치 않고 아무래도 간다 . 다 안 가면 나 혼자라도 간다 ” 는 사람이 10 여 인임에 나는 동하여 그 일행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 내일부터 집회가 시작이므로 오늘밤을 밤새도록 걸어 내일 아침에는 해주에 도착하여야 한다니 아무리 날라간다고 해도 300 리 길을 하루 밤에 주파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평양 - 사리원 간은 기차를 타기로 하여 6 시에 일행이 사리원에 도착하였다 . 여기서부터 해주까지 170 리를 오늘밤에 다 걸어 내일 아침에는 해주 집회에 참여하자는 것이다 . 아득한 200 리 길을 방향도 모르고 노정도 모르는 우리는 이 밤에 걸으려고 길에 나섰다 . 사리원 거리를 지나면서 우리는 묵도하였고 신작로 왼편에 있는 공동묘지를 바라보면서는 인생의 무상에 또 한 번 묵도하였다.

몇 리 안 가서 벌써 천지가 어두워온다 . 우리들의 머리털은 흥분에 일어서고 우리의 가슴은 감격에 울렁거린다 . 오 , 어두워오는 이 밤 가물가물해가는 망연한 앞길.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2 절 , 3 절을 계속해서 부르고 4 절까지 마치고서는 또 1, 2, 3, 4 절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 찬송 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우리의 걸음은 빨라지고 우리의 마음은 용기에 날뛴다.

그러나 점점 어두워오는 천지는 우리들의 중심에서 한숨을 자아내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 지명을 잘 모르니 어디인지 자세히는 모르나 상해 - 금산 간이었던 듯하다 . 뒤에서 엔진소리와 함께 한 대의 자동차가 우리를 따라 점점 가까워져 온다 .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 때문에 뒤를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 차가 점점 가까이 오다가 우리 일행의 뒤에 와서는 경적을 크게 울 린다 . 우리는 이때에도 찬송가를 크게 고창하고 있었다 .

 

십자가 군병 되어서 예수를 좇을 때 

무서워하는 맘으로 주 모른체할까 

그리스도 내 구주여 나를 속량했으니 

내 십자가를 벗은 후 저 면류관 쓰리

 

우리는 찬송은 부르면서도 자동차의 경적소리는 들었다 . 그래서 차가 지나 갈 길은 충분히 내어주었다 . 그런데 보니 웬일인지 차가 정거를 한다 . 운전수가 어두운 밤중에 10 여 명의 남녀가 대로상에서 큰 노래를 부르며 야단치는 것이 이상히 생각되었던지 그는 차를 세웠다.

“ 어디를 가시는 분들이오 ? 이렇게 어두운 밤에 여러분이 ?”

“ 해주에서 우리의 숭배하는 성자 이용도 목사께서 부흥회를 인도한다기에 거기를 가는 중입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친절한 말씨로 다 차를 타라고 한다 . 자리가 불편하고 또 화물차이매 타시라는 것이 인사는 아니지만은 이 차라도 원하신다면 태워 주겠다는 것이다 . 감사히 받아 우리는 그 차를 탔다 . 이 차를 타고 재령 읍까지 약 10 리 길은 짧은 시간에 어려움 없이 갈 수가 있었다 .

이 차는 재령읍 모 상회의 차였다 . 어린이에게 물 한 술 주는 것을 크게 축복하시는 주님께서 이 저녁에 이 일을 한 운전수를 길이 축복하시기를 빌면서 우리는 재령읍에서부터 또 걷기 시작하였다 . 더 한층 용기를 내어 해주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 재령경찰서 앞을 어두움 속에 나는 듯이 지나고 사당고개를 또 번개같이 지났다.

우리의 입에서는 찬송소리가 더욱더욱 높아간다.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 

저 죄인 어서 이리와 주 사유하심 받아라 

구하라 주실 것이오 찾으라 얻을 것이라 

내 죄로 상한 영혼을 주 온전하게 하시네

 

우리의 발은 찬송소리에 맞추어 사뿐사뿐 전진하고 우리의 마음은 묵도 속에 의기가 충천이다.

몇 시간이나 걸었는지 모르나 어느덧 우리는 신원 ( 新院 ) 고개에 올라섰다 . 황해도의 분수령이라는 이 지대에 이르러 우리는 걸어온 뒷길을 생각하며 감격하고 또 가야 할 앞길을 향하여서 축원함이 있었다 . 고개에 올라서서 우리는 다 길에 엎드려 함께 기도 드렸다 . 그리고 신원 거리에 이르러 저녁 겸 밤참으로 국수를 한 그릇씩 시켜 먹고 우리는 서로 독려하여 또 길을 떠났다 . 여기서부터는 참으로 험로난행 ( 險路難行 ) 이요 , 악전 고투다 .

100 리 길을 걸어온 몸 , 주렸다가 요기나 겨우 한 배는 맥이 빠지고 졸음이 끄덕끄덕 오는 것이었다 . 다리가 아파서 가끔가끔 주저앉는 노파 , 발에서 피가 나서 버선이 다 젖었다는 젊은 부인 , 졸면서 가다가 길가에 선 나무를 들이받아 코피를 홀리는 청년 등 , 이야말로 결사적 강행이요 , 사신 ( 捨身 ) 적 돌진이다 . 그래도 이길 떠난 것을 후회하는 자는 하나도 없고 누구를 원망하는 소리는 꿈에도 안 들린다 . 찬송소리만 더욱더욱 깊은 밤의 산천을 울 리고 우리의 목은 밤새도록 부르는 찬송에 거의 반 다 쉬었다 . 그러나 우리의 심중은 더욱더욱 열성에 불이 붙었다.

 

천당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정 힘이 들 때는 큰 길바닥에 다 엎드려 울며 기도 올리고 몸을 추어 일으켜서는 찬송가로 채찍질하며 무거운 몸을 실은 힘든 발을 옮기어 밤새도록 걸음을 계속하니 새벽녘에 이르러는 희미하나마 달빛도 이따금씩 나타나 우리를 위로 격려하는 듯 , 우리 길을 인도하는 듯하였다 .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 또 얼마나 왔는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밤은 벌써 새운 듯 동편 하늘이 훤해오는 것 같다 . 밤이 밝아오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의 앞길이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초조하기도 하고 맥이 아주 폭삭 풀리기도 한다 . 우리의 몸은 완전히 피곤하여 이제는 더 갈 수 없다고 주저앉기를 권한다.

“ 아버지시여 , 저희를 목적한 해주까지 가게 하시려나이까 , 이 길 위에서 죽게 하시려나이까 …… .”

노파의 목 메인 기도는 일행의 눈물을 통째로 자아낸다. 

그러나 한 청년의 입은 힘있게 고창한다.

 

결단코 나는 이기려 큰 접전하리니 

담대한 용맹 주시사 승전케 하소서 

그 승전할 날 이르러 십자가 군병들 

개가를 불러 영광을 주께로 돌리리

 

일동은 목소리를 높이어 할렐루야를 연호하며 더욱더욱 걸음을 채찍질하였다 . 날이 다 밝았을 때 우리는 까맣게 높은 고개가 우리 앞에 가로막힌 것을 보았다 . - 학현 ( 鶴峴 ) 일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정말 기진맥진하였다 . 그러나 찬송 , 기도 , 할렐루야의 손에 끌리어 필경 그 고개 위에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 동편 탁 터진 편으로 바다가 보인다 . 여기서 서남의 산록을 싸고 돌아내려가면 해주읍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우리는 정말 몸을 가눌 수가 없고 허리를 세울 수가 없었다 . 우리는 또 엎드려 울며 기도 드렸다 .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복지 가나안을 눈앞에 놓고 우리를 죽게 하실 하나님이 아니심을 믿는 우리는 두 팔로 땅을 디디고 몸을 일으켰다 . 몇 걸음만 더 가면 우리가 그리운 목사님을 뵈올 수가 있고 목사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 은혜 그 사랑에 묻힐 수 있을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용기 백배하였다.

 

우리는 어느덧 해주 거리에 들어섰다 . 그리고 또 해주예배당에까지 이르렀다 . 1932 년 10 월 23 일 새벽 6 시 40 분 사리원을 떠난 지 12 시간 만에 170 리의 밤길을 걸어서 …… . 해주 거리에 들어서면서부터 혹은 눈물을 흘리고 혹은 훌쩍훌쩍 코를 들이마시던 우리는 해주교회 마당에 들어서자 감격의 큰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이때에 나타나는 정답고 낯익은 얼굴 , 그는 우리의 목사님이었다 . 우리 12 인은 목사님을 둘러싸고 울고 목사님은 우리를 둘러보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 반가움은 목사님이나 우리나 같았겠으나 목사님은 우리의 고생을 생각하여 우시고 우리는 목사님의 기상이 너무도 상하였음에 울었던 것이다. 목사님이 방으로 안내를 하신다 . 따라 들어간 우리는 모조리 구석구석에 쓰러졌다 . 올 때에는 몰랐는데 와서 쓰러져서 보니 각 사람의 발은 모두가 피투성이다 . 목사님은 얼른 나가시더니 멘솔레담 네 개를 사가지고 오신다 . 우리의 상하고 험하고 냄새나는 발을 목사님이 손수 종이로 깨끗이 씻어주 시고 또 약을 정성의 묵도와 함께 발라주신다.

이때에 일행 12 명은 목놓아 통곡하였다 . 우리가 울 때 목사님이 우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를 올리신다 . 우리들은 울음 속에서 그 기도에 화하여 엎드려졌다 .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시더니 목사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책망하신다.

“ 글쎄 무얼 하려고 300 리 길을 걸어 다니며 야단들이오 . 숙천에도 , 평양에도 , 하나님은 다 계신데 말이오 .”

우리는 이 말씀에 더 큰 교훈과 위로를 얻었다.

 

회고하니 하룻밤에 170 리 길을 걸었다 . 이는 오직 목사님을 보고 싶은 간절한 열정과 찬송과 기도가 우리를 채찍질한 덕분에 비로서 이 길을 능히 걸 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 제 3 부 : 그 자취를 따라서 >

 

 

 

제 6 장

 

해주 남본정교회 1932.10.23

 

 

성령의 역사 ( 서광숙 )

 

똑똑한 탓인지 , 덜된 탓인지 , 나는 예수 믿기를 즐겨 하지 않았다 . 그러나 험한 세상에서 신상에 여러 가지 불행이 닥쳐오고 내리누르게 되자 어찌된 셈인지 내 입에서도 “ 아이고 하나님 ” 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 지금에 이르러 처음 믿던 그때를 회고하면 나의 얼굴은 붉어지고 나 스스로를 향하여 멸시의 웃음을 웃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볼까 두려워 살살 예배당으로 몰래 찾아 다니는 나는 가장 작은 성경 찬송을 손바닥 속에 꼭 쓸어 넣기에 힘썼으며 사람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뒤에 감추며 옷자락에 감추는 등 무용한 고심을 정성되게 하였다 . 남 들은 기도를 울어가며 손뼉을 쳐가며 해내건만 나는 그렇게 야단치며 할 기도거리가 없었다.

내게 죄가 있다는 것은 암만 연구를 해도 찾아낼 수가 없고 그저 한다는 기도가 “ 첫째로 두 아이를 잘 기르게 하옵시고 , 둘째로 내 땅이 수리조합 구역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 셋째로 끝까지 무사히 수절하게 하옵소서 ” 하는 것들이었다 . 교회에서 떠들어대는 죄책감은 암만해도 내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 그래서 정식으로 교인되는 것도 살살 피해가며 그저 어름어름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하며 눈치나 보고 바람이나 쏘이려 다니는 것이 그때의 내 신앙 상태의 거짓 없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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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믿어 오는 차에 하루는 친구 가 와서 어떤 유명한 목사가 왔으니 함께 예배당에 가자고 조른다 . 그러나 주일날에나 한 번 겨우 나가는 나의 믿음으로는 그런 회에 참례하고 싶지를 않았다 . 그래서 토요일 밤부터 그 목사의 집회가 시작했다는 것을 나는 주일 낮에야 겨우 참석하게 되었다 . 주일 낮에 예배당에 가서 그 목사의 말을 몇 마디 들은 나는 웬일인지 도무지 머리를 들 수가 없다 . 내 머리에서 내리누르는 죄 덩어리 때문에 그저 엎드려 우는 수밖에 머리를 들 수도 없고 다른 생각을 할 여가도 없다. 나도 모르겠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 나도 알 수 없게 내 마음 속의 한쪽 담이 무너진 모양이다 . 그저 섧고 그저 눈물 , 그저 아프고 그저 안타까워 그날은 밥도 못 먹고 밤에 잠도 한잠 못 잤다.

잠도 깊이 들지 않아 고민하는 나는 새벽예배에나 나가고 싶으나 평생에 밤 중에는 대문 밖에 나가보지 못한 나는 그런 모험은 해볼 생각도 낼 수 없다 . 그런데 흐릿하게 잠이 들었던지 내게 꿈이 나타났다 . 어제 그 목사가 내 머리에 안수를 하시며 “ 너는 어째서 빈 방에서 잠만 자느냐 ?” 고 하시는 것이다 . 그 꿈에서 깨니 예배당에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 이때 회당에 가기로 결심하고서 대문을 열고 한걸음 나서니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무섭게 생긴 키가 9 척이나 되는 악마인지 도깨비인지 굉장한 괴물이 내 앞에 나타나 내 길을 꽉 막아 선다 . 나는 “ 으악 ” 소리를 치고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이를 악물고 그 자리에서 기도를 올렸다 . 기도를 하고 나니 그 괴물은 없어졌다 . 마음도 진정됨으로 나는 용기를 내어서 예배당으로 달음질쳤다 . 

예배당에 들어서니 그 열변 , 그 웅변이 바로 시작되고 있었다 . 나는 미치고 울고 나는 통회하고 또 통회하여 내 눈은 퉁퉁 붓고 내 얼굴도 부었다 . 이 때부터 아침저녁으로 낮으로 밤으로 그의 집회를 미친 듯이 찾아 다녔다.

 

그때에 그렇게 미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옛날의 어떤 의식은 아직도 좀 남아 있어서 근처나 세상의 눈과 입이 두려워 내 체면을 차리고 내 면목을 유지하여야 된다는 생각은 똑똑하였다 . 그래서 제 때에 밥 지어 먹는 것과 집의 안팎을 깨끗이 치우는 데는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 그러면서도 생각과 정신은 온통 예배당에 다 가있는 나는 전에는 그렇게 오래고 지루하던 밥 한끼 짓는 것이 그때에는 1 분이나 2 분밖에 안 걸리는 것 같았다 . 어서 예배 당에 가서 앉으려는 욕심은 방에 걸레치고 안팎 뜰 쓸기에도 최대의 열을 내었다.

전에는 30 〜 40 분이나 1 시간만 앉아 있어도 싫증이 나고 졸음이 오던 그 예배당이 이제는 그냥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예배당에 가 앉아있고 싶으리만치 교회가 그리워지고 그 자리가 좋았다 . 그의 찬송 , 그의 기도 , 그의 설교 , 나는 그의 그 어느 것에라도 감격되지 않은 바가 없고 감동되지 않은 바가 없다 . 그러나 지금 그 어느 것도 말로나 글로써 표현하기 어려우니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이다 . 그렇지만 지금도 귀에 쟁쟁하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말을 한두 마디로 말하려면 그것은 할 수가 있다.

 

 

① 건수 ( 乾水 ) 가 되지 말고 생수가 되라 .

 

소나기가 멎은 후에 돌챙이로 졸졸 흐르는 건수는 몇 시간이 못되어 말라버리고 마나 , 든든한 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는 해가 나거나 비가 오거나 밤에나 낮에나 끊임없이 쉼 없이 영원히 흘러나오며 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따스하여 사람을 기르고 사람을 살리나니 우리는 생수가 되어야 하겠다.

 

 

② 덮어 놓은 우물이 되라.

 

우물은 열어 놓으면 티끌 , 먼지 나뭇잎 , 검부러기 같은 것이 날라 들어가고 새똥 , 말똥 등 더러운 것이 그 속으로 들어가니 우물은 덮어두어야 된다 .

우리는 우리의 우물을 잘 건사하고 꼭 덮어두어서 정한 물을 꼭 주님에게만 드리도록 하자.

 

이 목사님의 모든 설교와 기도는 오직 나 한 사람을 붙들어다 놓고서 내 가슴 속을 시시콜콜히 그려내는 듯하였다 . 그래서 그의 모든 말 , 모든 기도는 그저 내 가슴을 쿡쿡 찌르고 쪽쪽 쪼개내었다 . 특히 꽈바리 예수교인이 조그만 성경책을 손바닥에 깊이 숨겨가지고 살금살금 사람 없는 모퉁이를 골라가며 예배당에 찾아 다닌다는 설명에는 나는 땅속으로 들어가 숨고 싶으리만치 부끄러워지고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1 주일 동안의 집회는 꿈결같이 끝나고 목사님이 가시는 날이 왔다 . 목사님이 해주를 떠나시는 날의 섭섭함과 애끓던 가슴을 어찌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 그저 나는 눈물을 흘렀다 . 흘리고 또 흘렸다 .

 

그리고 목사님이 가신 그날 바로 나는 성경책 넣는 커다란 책 자루 셋을 만들었다 . 그 하나는 친구에게 주고 둘은 내가 지금도 가지고 있다 . 전에는 작은 성경 찬송도 남이 볼까 겁이 나더니 이제는 제일 큰 성경 찬송을 그 자루에 넣어서 들고 나서지 않으면 예배당에 가는 것 같지 않게 생각된다. 그리고 이제는 책 자루라는 생각보다 밥 자루로 생각된다.

그 책 자루를 손에 들게 된 때부터 비로소 십자가의 군병이라는 자부심과 용기가 생겨 새벽기도회에도 안심하고 담대하게 잘 다니고 있다 . 밤 2 시나 3 시에 예배당에 가다가 순사의 구두 소리 , 칼자루 소리가 날 때에도 책 자루를 앞으로 가져다가 두 손으로 합하여 들면 문제가 없어진다 . 도적이나 마귀를 만난대도 겁이 나지 않는다 . 십자가 군병의 무기 , 성경책 자루면 못 당해낼 것이 없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기쁨의 근원 ( 김경숙 )

 

우리 해주에 오셔서 1 주일 동안에 목사님은 그 눈물과 그 땀을 다 쏟으시고 그 피를 충분히 말리셨다 . 그런데 목사님이 해주를 떠나가시는 시간이 왔다 . 목사님이 타신 기차가 벌써 움직이기 시작한다 . 이때에 이 마음은 형용할 수 없으리 만치 애달파지며 눈물이 흘렀다 . 다른 형제들은 손을 들어 할렐루야를 높이 부르짖으나 나는 그러지도 못하고 오직 머리를 숙여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 기도를 마치고 눈을 들어 바라보니 목사님께서 저희들을 향하여 손을 들어 기도를 하고 있었다 . 차가 떠나자 달아나는 차 중에서 손을 들어 해주 거리를 향하여 기도하시는 그 모습 , 지금도 눈에 남아 있다.

 

섭섭한 발걸음을 눈물로 돌려 집에 돌아와 저녁밥을 지으려고 하니 감사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시작한 이 눈물 , 밥을 다 짓기까지 그냥 홀렸다 . 눈물을 섞어서 지은 그 밥을 퍼다 놓고 먹으려니 눈물에 목이 메여 먹을 수가 없어 슬며시 밥술을 놓고 부엌으로 나오니 그저 눈물뿐이었다 . 방으로 들어가도 또 그저 눈물 , 이리하여 그 한밤은 눈물로 밝혔다 .

감사의 기도와 감사의 눈물로 지내는 5 ~ 6 일 동안에 30 년 동안이나 더러웠던 마음과 골수에 젖었던 누추한 생각이 주님의 따뜻한 사랑에 다 녹아져 버리는 것이었다 . 사랑에 녹아진 때 발걸음에 힘은 없어도 마음에 혈기는 다 죽어졌다.

주님의 뜨거운 피로 새 생명을 얻게 된 몸과 마음은 무한한 생기와 활력을 얻었다 . 위대하신 주님의 능력과 사랑에 붙들리자 수십 년 고질에 피곤하던 몸은 든든한 원기를 얻었다 . 올무를 벗고 광명한 햇빛을 받게 된 이 마음은 목사님을 향하여 추앙의 열을 점점 높이고 있다.

어느 날 시냇가로 빨래를 하러 나갔다 . 전날에 야외 예배로도 다녔고 춘추로 산보도 늘 다니던 길이다 . 전에는 봄꽃이나 가을단풍이 별로 흥미를 일으키지 못하던 곳이다 . 그런데 빨래질 가는 이날 , 눈을 늘어 산을 보니 밝고 묘한 수양산이 저를 보고 인사를 하더이다 . 노랗게 붉은 단풍잎이 또한 웃으며 인사를 하더이다 . 이 몸은 어찌도 자유롭고 기쁜지 . 팔은 빨래 광주리를 붙잡고 있으나 마음은 자유와 기쁨에 춤추고 있더이다 . 아 , 모든 자연의 경치의 아름다움이여 , 빨래 광주리를 머리 위에 이니 머리는 곧 면류관을 쓴 듯 대자연이 축하를 하더이다.

목사님 , 이렇게 자유롭고 즐거운 세계가 전에도 있었던가요 . 지금의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요 , 전날의 그 몸은 아님이 분명히 느껴집니다 . 내 마음 또한 내 것이 아니오며 내 생각도 또한 내 것이 아니오매 주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내놓았습니다 . 내놓으니 이렇게 기쁘고 즐거워지는군요 . “ 오 주여 , 자유의 낙원에서 길이 살게 해주시옵소서 . 아멘 .”

 

 

 

7 개월간의 울음 ( 배윤희 )

 

나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앙상의 고민으로 울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 그런데 이용도 목사께서 1932 년 초겨울에 우리 해주에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부터 신앙의 부족과 양심의 고민으로 울기 시작한 것을 멈출 수가 없어 계속하여 7 개월 동안을 울었습니다 . 울어서 죄를 눈물로 다 씻어버리고 가슴 쳐서 죄악의 덩어리를 다 부수어 버린 후의 기쁘고 즐거운 생활의 맛이란 참으로 낙원임을 알았습니다.

목사님이 다녀가신 후 몇 달 동안 기도하며 애를 쓰노라니 자연히 마음이 기쁘고 유쾌하여지며 감사가 한없이 솟아오름을 느꼈습니다 . 이때 만사가 오직 감사뿐이요 , 24 시간 그냥 기도의 계속이었습니다 .

 

어느 날은 자동차를 타고서 길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에 나는 자동차 안에 앉아서 길 가는 사람들과 산천의 초목들을 위하여 그저 축복의 기도를 올리었고 감사와 환희의 찬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면서 갔습니다.

이때의 심경 ( 心境 ) 을 회고할 때마다 그저 하늘 나라에 가서 선유 ( 仙遊 ) 하는 느낌을 얻는 동시에 그때가 늘 그리옵고 그런 경지에서 길이길이 살고 싶은 생각이 항상 간절합니다.

 

 

 

 

< 제 3 부 : 그 자취를 따라서 >

 

 

 

제 7 장

평양 신양리교회 1933. 2

 

 

반대를 무릅쓴 사경회 ( 나학주 )

 

우리 신양리감리교회에서는 매해 음력 정월이면 사경회 ( 査經會 ) 를 열었습니 다 . 1933 년 초의 음력 정월 사경회가 사흘째 모이는데 용도 목사님이 평양에 오시었습니다 . 그때는 벌써 목사님은 어느 교회에서든지 세우지 않기로 되어 있던 때입니다 . 원산에서부터 오신 목사님은 종현 씨 집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때에 신양리교회 직원들이 용도 목사님을 청해 오기로 생각했습니다 . 교인들에게 의향을 물으니 , 다 찬성함으로 전도사 2 인과 권사 2 인을 교섭위원으로 뽑았습니다.

원래 소원은 1 주일간이었으나 , 여러 방면에 장애가 많아 밤에만 1 시간씩 3 일간만 하기로 겨우 결정이 되었습니다 . 담임목사와 기타는 아주 못하게 극력 반대하였으나 길이 막힌 목사님의 길을 열어 드리자는 생각도 있어 교인들이 들러붙어 투쟁한 결과로 이만한 허락이라도 억지로 얻어낸 것이었습니 다 . 마지막 날은 마침 주일이었으므로 그날에는 세 번을 서시게 되었습니다 . 특히 오후에는 예배를 드리고 눌러서 3 시부터는 일요 강화도 하시었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에 회중교회 김건우 목사가 오셔서 1 주일 동안만 인도해 달라고 간청을 하여 , 쾌히 허락하시고 선 것이 예정보다 3 일을 더하여 10 일 동안을 했는데 , 그 조그만 집에 매번 2,000 명 이상이 모여 큰 은혜가 쏟아졌습니다 . 목사님께서는 이 10 일 동안에 있는 땀과 피를 온통 다 쏟으셨습니다.

그 설교에 힘들어 하심 , 그 기침에 가슴 아파하심 , 참으로 눈물이 나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 하루에 세 번 혹은 네 번씩 외치시고 , 밤에는 안수기도에 또한 피와 땀을 다 쏟았습니다 . 매일 밤을 안수기도로 밝히셨어요 . 하루 저녁에는 목사님의 기운이 아주 다 뽑히신 듯한데 , 안수 받으려는 사람이 하도 많이 모여들기에 내 가슴이 아파서 목사님에게 오늘 밤은 안수기도는 그만두고 돌아 가시자고 하니 , 엄연한 태도로 말씀하셨다 .

“ 이거 내가 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주님의 지시나 명령이 있는 한 , 내가 거꾸러져 숨이 지는 순간까지 하다가 죽어야지요 .” 이때부터 목사님을 사모하는 무리는 계속해서 회중교회로 모이었습니다 . 이 무리들의 이 모임이 얼마 후에는 어느덧 새 교회운동으로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일거일동을 오직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만 움직이시는 것을 나는 보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목사님께서 숙소를 떠나 회중교회를 향하여 나서시기에 나도 따라 나갔습니다 . 그런데 대문밖에 나서자마자 돌아서시더니 오늘밤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하시며 종현 씨에게 설교를 맡기시는 것이었습니다 . 그날 밤에 종현 씨가 참으로 굉장한 명설교를 했습니다 . 후에 들으니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그리 하셨다는 것입니다.

 

 

눈물의 집회 ( 차성심 )

 

신양리교회 집회의 첫날밤이었습니다 . 요한복음 10 장을 읽으시고 양과 목자의 이야기를 하셨지요.

“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다 도적이요 , 강도요 , 주의 사명을 저버리고 헛된 꿈을 꾸는 목사와 제직은 다 도적이요 , 강도 ”

라고 내려쪼개는데 , 참으로 가슴이 벙벙하였습니다 . 이때에 어느 목사의 흘겨 보는 눈동자가 가관이었습니다 . “ 뇌물만 탐내고 호랑이를 막지 않는 목자 ” 하시더니 감격 ( 感激 ) 하여 큰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 울면서 혼자 부르시는 노래,

 

어지신 목자 양 먹이시는 곳 

그늘진 바위 옆 시원한데

나 어찌 떠나서 양떼를 버리고 

위태한 곳으로 나갔던고

 

더욱더욱 비창한 어조로 눈물을 흘리시며 이 한절의 뜻을 시적으로 사람의 중심을 쪼개내는 듯이 설명을 하시더니 또 노래를 부르십니다.

 

어지신 목자 길 잃어 버린 양 

찾도록 찾으며 부르소서

택하신 어린양 문 앞에 모여서 

다 들어 가기 전 날 이끄소서

 

이 한절을 가지고 또 가슴을 무너뜨리는 듯한 설명을 하신 후 다시 목을 열어,

 

어지신 목자 날 가르치시고 

주 따라 가는 법 알게 하사

다시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날 보호하시고 지키소서

 

이 마지막 절을 설명하실 때는 여기저기서 울음소리와 기도소리가 터져 나와 목사님의 음성이 안 들릴 정도에 이르렀다 . 예배가 끝난 후 감격한 교인들이 이 목사님에게 인사를 하려고 모여드니 담임목사가 전깃불을 꺼버리며 다 헤어져 돌아가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신양리교회 집회의 둘째 밤은 참으로 굉장하였습니다 . 어찌나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는지 .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이 숨소리 하나 안내고 죽은 듯이 고요히 설교에 취하여 버리고만 것은 참으로 놀랄 일이었습니다.

이날 저녁에는 요한복음 9 장을 읽으시고 “ 소경된 것이 자기의 죄냐 , 부모의 죄냐 , 아니다 . 그에게서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 라는 말씀으로 설교하셨습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이 찬송을 거듭거듭 부르시며 외쳐대시는 그날 밤의 설교는 참으로 천인 만인의 가슴을 마음대로 흔들어 놓으시는 것이었습니다.

 

 



< 제 3 부 : 그 자취를 따라서 >

 

 

 

제 8 장

 

해주 남본정교회 1933. 2.

 

 

이용도 목사님께서 우리 해주에는 두 번 오셨다 . 다른 곳에서는 수년 동안을 간청하고서도 한 번도 못 모시어간 곳도 많다는데 우리 해주에는 두 번 씩이나 찾아오셨던 것을 생각할 때 오직 감사와 감격이 클 뿐이올시다. 

첫 번에는 1932 년 음력 9 월 22 일부터 1 주일간이었고 두 번째에는 1933 년 음력 1 월 28 일 ( 토 ) 저녁에 해주 오셨다가 2 월 4 일 ( 금 ) 새벽에 해주를 떠나셨다 . 첫 번 오셨을 때에 해주의 여러 교회가 크게 부흥되고 모든 교인의 심령에 큰 빛을 던져주신 기적적인 역사는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므로 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고 두 번째 오셨을 때에 있었던 사실의 일부를 말하겠다.

 

1933 년 음력 1 월 28 일은 토요일이었다 . 이 토요일 저녁예배가 거의 끝나게 되어 가는데 목사님께서 해주 교회에 나타나 엎드리시는 것이었다 .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실 무렵에 우리의 공부도 끝이 났으므로 우리는 목사님을 이영은 씨 집으로 모시고 갔다 . 목사님께서 뜻밖에 해주에 오시었으므로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강령 ( 康領 ) 으로 가시려는 길에 잠깐 해주에 들리신 것이라고 했다.

 어느새 모여든 우리 동지들은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 기도를 아마 1 시간 이상 올렸던 것 같다 . 기도를 마치고 다 일어났을 때 어떤 부인 한 분이 “ 제가 지금 기도하는 중에 목사님께서 이번에 강령 가시는 것을 중지하시고 해주에서 집회를 여시는 것이 좋을 것을 느끼었습니다 ” 고 하였다 . 

 그래서 우리 일동이 다시 엎드려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 두 번째 기도가 끝난 후에는 모인 무리가 다 해주 집회를 간청하게 되었으므로 목사님께서 또 긴 시간 기도를 하신 결과 강령행을 그만두고 해주에서 집회를 열기로 작정을 하셨다.

 

이튿날 새벽부터 집회가 시작되었다.

첫날과 둘째 날에 벌써 목사님은 세상에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는 듯이 결사적으로 최후적인 설교와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다 . 셋째 날에 이르러서는 이상하고도 극히 중대한 역사가 많이 일어났다 . 자기의 죄와 부족을 통회하노라고 가슴 치는 모습과 통곡하는 소리가 한편에서 일어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친구를 책망하는 소리와 교역자에게 충고하는 소리가 들려 오고 , 또 다른 한편에는 기뻐 춤추는 자도 있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하다가 그 십자가를 지어본다고 해서 두 팔을 십자로 벌리고 일어나 담벽에 의지하여 십자가를 지고 뻣뻣하여지는 이 등이 생겨 예배는 심각한 긴장과 혼란에 빠지는 것이었다 . 이 밤에도 목사님은 집회를 마치시고는 모여드는 자에게 안수기도를 하시면서 한밤을 꼬박 새우셨다.

이튿날 새벽에도 전날 밤과 같은 현상이 많이 나타나니 이날부터 해주예배당 근처에는 별별 소문이 다 돌아가게 되어 거리가 떠들썩 하였다.

불신자들 사이에서는 “ 예수가 왔다지 ” “ 천사가 왔다지 ” 하면서 쑤군거리고 , 예수 구경가자고 몰리어 오기도 했다 . 바로 그날 밤에 예배당에는 진리와 은혜를 사모하는 무리와 무슨 일이 생기는가 하여 구경하러 모인 무리와 신문기자 , 판사 , 검사 , 도립병원 원장 ( 일본인 ) 등까지 모여 해주예배당은 정말로 꽉 차고 넘치고 넘쳤고 예배당 뜰도 꼭 차고 예배당 앞 큰 길도 사람 때문에 통행이 곤란한 형편이었다.

목사님이 단에 나섰다 . 한마디 , 두 마디 말씀이 진행됨에 따라 흐르는 땀은 눈을 뜰 수 없이 이마와 눈 잔등에서 흘러내려 두 뺨이 번들거렸고 처음에는 조금씩 나던 기침이 약 반시간을 지난 후부터는 점점 심해지게 되어 몇 마디 말씀을 하시고는 땀을 씻고 또 몇 마디를 하시다가는 기침에 숨이 막히어 말까지 막히는 것이었다.

“ 날마다 시간마다 산 같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아 , 너희들은 하늘의 큰 벌을 어떻게 면할 수가 있을 줄로 아느냐 . 이자리 , 이 시간에 죄를 내어놓고 주 앞으로 나오라 . 예수 앞으로 나오라 .”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열변 , 땀 , 기침 , 그리고서 또 열변 , 또 땀 , 또 기침 . 울며 찬송하시다가 주먹을 휘두르며 열변 , 절규 . 몸부림을 치시며 고성 질호 ( 疾呼 ). 창백한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번뜩이고 결사의 고함은 기침에 콱콱 사로잡히는 듯 땀에 젖은 손수건을 높이 들며 찬송 또 찬송 . 울음 섞인 음성으로 목을 아주 찢어버리시려는 듯 설교 또 설교.

회중 가운데서 울음소리와 기도소리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그 소리보다 더 높은 음성의 말씀을 들려주시려는 애탐은 두 손을 다 들고 온몸을 다 바쳐 흔들며 떨며 몸부림으로 화하였다 . 단상 ( 壇上 ) 에 말하는 이와 단하 ( 壇下 ) 에 말 듣는 수천 명의 청중이 한 울음에 삼키어져 울음의 골짜기가 되었을 때, 번쩍드는 손수건에 따라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의 피땀을 쏟는 기도가 있은 후 단에서 내리셨을 때 , 시간은 꼭 4 시간이 걸렸다 .

땀과 눈물에 완전히 젖으신 그 몸 , 있는 기운을 철저히 뽑아내신 그 몸이 강단에서 내리시자 곧 땅에 엎드리셨다.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는 그 찰나에 강단 뒷문이 열리더니 어떤 청년이 목사 님을 부르더니 끌어내는 것이었다 . 목사님이 뒷방으로 끌려가신 후 열정의 찬송을 부르던 회당은 전날 밤과 같은 광경이 더 굉장히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때에 교회당 한편에서는 이상한 눈치가 보여지며 웅성거리게 되었으니 이는 이용도 목사가 청년들한테 매를 맞는다는 소식이었다 . 기도 , 통곡 , 회개에 잠긴 이들에게는 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겠지만 구경이나 하러 왔던 사람들은 목사가 매맞는다는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많은 무리가 전도실을 둘러싸고 야단이 벌어졌다 . 이때에 전도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7 ~ 8 명의 청년 ( 교역자의 아들과 친척 교회에서 유력하던 청년들 ) 이 목사님을 가운데 놓고 희롱과 욕설을 퍼부으며 움직이는 손길 발길이 또 목사님을 치고 차려고 하고 있었다.

“ 복아지 알 팔러 다니는 자식 , 미친놈 , 밸 빠진 자식 , 때려 죽일 놈 .” 

“ 얘 이놈아 예수가 무어냐 , 너 같은 자식이 하나님이 무어냐 ” 등 욕설이 높아졌다.

들고 나는 주먹이 이제 또 바로 이 목사를 치려 드는 것이었다.

이때에 나는 ( 그때에 나는 예배당에 잘 다니던 사람도 아니요 , 교회나 교인을 그리 신통하게 여기던 자도 아니었다 ) 목사님 곁으로 다가서면서 가장 덤비고 , 날뛰는 ○○○의 멱살을 붙들고 “ 어떤 자식이 목사님을 친단 말이냐 , 목사를 치려는 놈의 자식은 나오라 ” 고 고함을 쳤다 .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때 싸움깨나 하기로 해주에서 알려진 자이었으니만큼 내가 나서며 고함을 지르자 장내의 공기는 갑자기 돌변하여 잠잠해지는 것이었다.

 

이때에야 문 밖에 서서 방안의 꼴을 보며 치를 떨고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조이던 부인 몇 분이 몰려 들어와 목사님을 부축해서 겨우 일으켰다 . 어서 가라고 목사님의 가방을 바깥으로 집어 던지는 자들의 난동과 이 자리로 해주에서 없어져 버리라고 퍼붓는 욕설을 들으시며 방을 나서려니 목사님의 신발이 없어져 있었다 . 여러 부인들이 그 신을 두루두루 찾아도 못 찾다가 얼마 후에 치 떨리는 광경이 보여졌으니 , 조각조각 찢어진 하얀 고무신 조각이 어두운 밤 , 시커먼 땅 위에 히뜩히뜩 흩어져 있는 것이었다 .

목사님의 숙소로 정한 이영은 씨 집까지 약 500 미터의 길을 목사님은 양말 발로 아직도 얼음이 녹지 않은 찬 땅을 걸어가셨다 . 이때에 나는 십자가를 지시고 비틀비틀 쓰러지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주님을 연상하면서 울었다 . 목사님의 뒤에는 언제 모였는지 적지 않은 수의 부인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 그들에게서는 오직 흐늑흐늑 우는 소리와 가느다란 목소리로 울음의 기도를 올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 그런데 부인들 뒤로 몇 명의 청년이 따라와서 목사님 숙소까지 이르러 사람을 죽일 듯한 태도로 또 야단을 해댔다.

“ 썩 가거라 . 가지 않았다가는 죽여버린다 . 강령에 가보아라 . 따라가서 때려죽인다 ” 는 것이었다 .

 

이날 밤 영은 씨 집은 통곡과 기도로 가득했다.

목사님은 이후 다시 강단에 나서지 않았다 . 강단에 내세우는 자도 없었고 또 그때 목사님의 체력으로는 몇 걸음도 옮길 수 없었다 . 목사님은 어디로 가실래야 가실 힘도 없었고 더 있겠다고 우기지도 않으시었으나 , 몇몇 부인 신자의 간절한 소원과 결사적 수호로 영은 씨 집에서 사 ( 私 ) 기도회를 열었다 . 건평 4 ~ 5 평밖에 안 되는 작은 방에 150 여 명이 모여 이틀 동안 통분과 기도와 감격으로 지낸 후 , 1933 년 음력 2 월 4 일 금요일 새벽 6 시 , 날이 채 밝기 전에 이른 봄의 새벽 거리를 울리는 발차 경적소리와 함께 목사님은 해주를 떠나시고 말았다.

 

해주의 이 집회에 대해서는 세평이 구구하다 . 목사님을 욕하고 해하려는 자들은 별소리를 다하면서 헐고 깎아 내리지만 내가 분명히 믿기는 그때의 이용도 목사님은 벌써 인간의 모든 것은 다 없어지고 오직 주님의 형상만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 하늘의 사실을 인간의 경우로 해석하려는 것이니까 별별 오해가 다 생기고 별별 파란이 다 일어났던 것이리라.

 

이렇게 죄송스럽게 , 이렇게 섭섭하게 목사님을 보낸 후 해주의 우리 동지 몇몇은 목사님의 천사 같은 음성을 또 한 번 들어볼 날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조르고 있었는데 목사님 승천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 우리 몇 사람은 모여서 통곡하였다.

더욱이 그때 그날 저녁의 설교가 목사님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설교가 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들으니 , 그날 밤의 설교를 다 기억할 수 없음이 가슴 아픈 일이요 , 또 우리 해주 ( 海州 ) 가 목사님을 죽여버린 ( 害主 , 주를 십 자가에 못박음 ) 듯한 죄책감에 참으로 가슴이 찔리고 아픈 것이올시다 .

 

 

 

 

< 제 3 부 : 그 자취를 따라서 >

 

 

제 9 장

 

안주노회 관련 1933. 3

 

안주노회의 매장 논의가 가결 확정하고 폐회의 기도가 끝나자 , 오 군이 두 손을 들고 강대상으로 뛰어 올라가며 “ 화가 있을진저 안주노회원들아 , 그 화를 어찌 받으려고 너희가 하나님의 사자를 타살매장 ( 打殺埋葬 ) 하느냐 ” 고 외치었다 . 이에 오군은 곧 처벌의 선언을 받았고 오 군의 처벌이 있는 날 밤 우리 몇 동지는 내 집에 모여 울며 밤을 세웠다.

이때부터 내 집을 중심으로 동지들의 모임이 있었고 모이는 우리는 결정적으로 교회와 간격이 생겼다.

그러나 절대로 누구 흉을 보거나 욕을 하는 일은 없고 그저 밤마다 모여 2, 3 시까지 혹은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기도하고 찬송하고 울며 통곡하다가 어떤 때는 기뻐서 몇 시간씩 춤을 추며 기도하였다.

이때에 나의 조모님이 중한 병으로 누워 계셨으나 아랫간에 누우신 조모님의 병환에는 아무 관심도 가지지 못하고 광희 ( 狂喜 ), 광분 ( 狂憤 ), 광읍 ( 狂 泣 ), 광무 ( 狂舞 ) 에 밤과 낮을 지내었다 . 조모님은 드디어 별세하셨다 . 그러나 조모상 ( 喪 ) 이란 관념도 잊은 듯이 그저 찬송 그저 춤을 출 뿐이었다 . 조모님 장례가 내일인데도 그 밤을 붙들고 돌아가며 춤추면서 “ 의지하세 의지하세 곧 의지하세 구하겠네 구하겠네 곧 구하시네 ” 를 부르며 그 밤을 꼬박 밝혔다.

 

나는 한 편의 성명서 , 오관백지지 , 이용도 목사 숭배 , 노회결의 부인 등의 성명서를 썼다 . 만일 이 글에 이의가 있거든 오 군과 함께 나도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 그런데 말없이 알려진 이 성명서에 달려와 도장을 찍은 이가 20 여명에 이르렀다 . 우리는 이 글을 노회에 제출하였다 .

상회불복 ( 上會不服 ), 작당망동 ( 作黨妄動 ) 이라는 죄명 아래 우리를 심판하려는 도당회가 모였다.

서명자를 한 명씩 불러드린다 . 가장 약해 보이는 사람부터 불러들여 마음을 돌리고 서명을 취소하면 이제라도 용서할 것이나 만일 그냥 고집하면 책벌한다고 위협하였다 . 다른 사람을 다 불러 심문한 후 나는 맨 나중에 불려갔다 . 심문장에 들어가니 10 여 명의 목사 , 장로들이 죽 들어 앉아있다 . 나는 척 들어서며 말없이 땅에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 제사장과 바리새 교인이 성경은 혼자 안다고 하면서 주님을 못박았고 저 혼자 주를 잘 믿노라고 하면서 메시야를 못박아 죽이더니 , 오늘의 안주 교회는 목사 , 장로가 둘러앉아 주의 종을 매장하고 그의 동지를 치고 멸시합니다 . 오 주여 , 이 불쌍한 무리들을 주께서 긍휼이 보시고 그의 마음에 어서 속히 깨달음과 뉘우침이 있게 해 주옵소서.”

내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리는데 머리를 숙이기는커녕 지껄이면서 저의 볼장만 보고 있던 그들은 내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자 곧 나를 심 문한다 . ○○ 목사가 먼저 나를 심문한다 . 이에 나는 곧 말하였다 .

“ 목사님도 이러십니까 ? 다른 사람은 다 그런다고 해도 , 목사님이야 그래도 이러실 수가 있을 것입니까 ? 이때까지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우리와 보조를 같이하시던 목사님께서야 이럴 수가 있어요?”

가장 친하던 ○ 장로가 또 나를 책망한다 . 이분에게는 나는 입을 열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동지들이 모여서 구석구석 엎드려 기도를 드리고 있다 . 흐느껴 우는 자 , 머리를 쥐어뜯는 자 등 그때의 모임은 참으로 피눈물을 자아내는 모임이었다 . 그날 밤도 우리는 울며 기도하고 찬미하며 춤추었다 . 이때에는 두 사람이 오거나 세 사람이 모이거나 공론 잡담은 절대로 없고 결사적 각오와 비창한 긴장감에 오직 애끓는 기도와 간절한 찬송만이 있었다.

 

의지하세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구하시네 구하시네 곧 구하시네

 

우리에게도 벌이 내렸다 , 20 여 명은 책벌을 받고 교회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 이유는 상회 불복 , 작당망동 등 .

 

때는 1933 년 2 월 중순 . 이렇게 된 후 우리는 더욱더욱 굳게 결속되어 이 집 저 집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 이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평양에서 몰리어난 동지들에 의해서 새로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이 에 우리도 평양의 교회와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이때를 회고하면 지금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어깨춤이 으쓱으쓱 나온다 . 나는 그때에 길로 다니면서도 꽤 큰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 사무를 보면서도 기도를 중얼중얼하며 지냈다 . 그래서 세상은 우리가 미쳤다고 했고 ○○이가 미쳐서 사업을 뒤집어 박았다는 소문도 굉장히 떠돌았다고 한다. 

어쨌든 그때를 회고할 때마다 그것이 천당이라는 느낌이 크다 . 이런 세계와 재미를 못보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은 불행이요 , 불쌍한 신자라고 나는 단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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