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메모 - 내적 고요 > 영성생활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영성생활

신앙메모 - 내적 고요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4-22 20:31 조회3,152회 댓글0건

본문

그리스도인은 온 힘을 다해 내적 고요를 구해야 한다.

 

1. 압바 안토니오스가 말했다. “물고기가 물 밖에 오래 머물면 죽어 버리듯, 수실 밖에서 꾸물거리거나 세상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수도자는 내적 고요의 긴장이 풀리게 된다. 그러므로 물고기가 바다를 향하는 것처럼, 우리는 수실을 향해 서둘러가야 한다. 밖에서 꾸물거리다 보면 내적인 경계를 망각할까 두려워해야 한다.” (안토니오스 10)

 

2. 그가 또 말했다. “사막에 머물며 내적 고요 안에 사는 자는 세 가지 싸움에서 자유롭게 되는데, 그것은 청각과 떠버리는 것과 시각에 대한 싸움이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싸움만이 남는 바, 곧 마음과의 싸움이다.” (안토니오스 11)


3. 압바 아르세니오스가 아직 궁전에 있을 때에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님, 내가 구원받도록 인도해 주소서.” 그런데 한 음성이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르세니오스야, 사람들을 피하라. 그러면 구원받을 것이다.” (아르세니오스 1)


4. 그 스스로가 수도적인 삶으로 물러나 같은 말로 다시 기도했다. 그런데 한 음성이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르세니오스야, 떠나거라. 잠잠하거라. 내적으로 고요하라. 이런 것이야말로 흠 없는 삶의 뿌리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아르세니오스 2)


5. 압바 마르코스가 압바 아르세니오스에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피하십니까?” 원로가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은 내가 그대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계신다네. 그러나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동시에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없다네. 위에 있는 수많은 것들은 오직 하나의 의지만을 갖고 있지만, 사람들은 많은 의지를 갖고 있지.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사람과 함께 갈 수 없다네.” (아르세니오스 13)


6. 복자(福者) 테오필로스 대감독이 어느 날 한 관리와 함께 압바 아르세니오스에게 갔다. 대감독은 그에게서 한 말씀 듣기를 청했다. 얼마간 침묵이 흐른 후에 원로는 그들에게 대답했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한다면, 그대들은 그것을 지키겠소?” 그들이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원로는 그들에게 “아르세니오스가 어디 있는 것을 듣더라도 그를 찾아가지 마시오”라고 했다. (아르세니오스 7)


7. 대감독 테오필로스는 언젠가 한 번 더 그에게 가고 싶어서 사람을 보내어 원로가 문을 열어 줄 것인지를 알고자 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해 주었다. “그대가 온다면 나는 문을 열어 줄 것이외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문을 열어 준다면, 모두에게 문을 열어 주어야 하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여기 머물지 않겠소.” 이 말을 들은 대 감독은 “내가 그곳에 가는 게 그를 쫓아내는 것이라면, 나는 그 거룩한 자에게 더는 가지 말아야지”라고 말했다. (아르세니오스 8)

 

8. 압바 아르세니오스가 하루는 어떤 곳에 갔는데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원로는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 흔들림이 무엇이더냐?” 그들은 그에게 “갈대입니다”라고 했다. 원로는 그들에게 말했다. “정말이지 누군가가 내적 고요 안에 머물면서 작은 참새의 지저귐을 듣는다면, 그의 마음은 동일한 내적 고요가 더 이상 없는 것이라네. 하물며 그대들이 이런 갈대의 동요를 지니고 있다니!” (아르세니오스 25)


9. 아르세니오스는 그의 수실이 약 삼 킬로미터 거리에 있었고, 다른 자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으므로 자주 외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스케티스가 황폐해지자 그는 그곳을 나와 “세상은 로마를 잃었고, 수도자는 스케티스를 잃었다”라고 울면서 말했다 한다. (아르세니오스 21)


10. 언젠가 압바 아르세니오스가 카노페에 머물 때였다. 아주 부유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원로원 가문의 처녀가 그를 보기 위해 로마에서 왔다. 대감독 테오필로스가 그녀를 맞아들였다. 그녀는 대감독에게 원로가 자신을 맞아들이도록 설득해 주십사 간청했다. 그는 원로에게 가서 이렇게 간청했다. “원로원 가문의 처녀가 로마에서 와서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나 원로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소식이 그녀에게 전해지자 그녀는 나귀에 길마를 얹게 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뵙게 하시리라 믿어요. 사람이야 우리 도시에도 많습니다. 나는 예언자를 만나러 왔어요.” 그녀가 원로의 수실에 도착했을 때, 원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수실 밖에서 기도 중이었다. 그녀는 원로를 보자 원로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하지만 원로가 화를 내며 그녀를 일으켰고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내 얼굴을 보고 싶다면, 보시오. 나 원 참!” 그러나 그녀는 당혹스러워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원로가 여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내가 어떻게 하는지 듣지 못했소? 그걸 알았어야 했소. 어떻게 감히 이렇게 배를 타고 올 생각을 했단 말이오? 그대는 여자의 몸으로, 결코 밖으로 나다니지 말아야 함을 알지 못하오? 로마로 돌아가서 다른 여자들에게 ‘나, 아르세니오스를 만났어’라고 하여, 여자들이 뱃길로 내게 오게 할 작정이오?” 그녀는 말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여자도 여기에 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나를 기억해 주세요.” 원로는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내 마음에서 당신에 대한 기억을 싹 지워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드릴 거요.” 그녀는 이 말을 듣고 상심하며 떠났다. 그녀가 도시에 이르렀을 때 이런 상심 탓에 열병에 걸렸다. 그녀가 아프다는 소식이 대감독에게 전해졌다. 대감독은 그녀에게 와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제가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원로에게 나를 기억해달라고 했더니, 그분은 내게 ‘내 마음에서 당신에 대한 기억을 싹 지워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드릴 거요’ 라고 대답했어요. 보세요, 나는 고통스러워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대감독은 그녀에게 말했다. “그대는 여자이고, 원수가 당신과 같은 여자를 이용해 거룩한 자들에게 싸움 거는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 때문에 원로가 그렇게 말했겠지만, 그분은 그대의 영혼을 위해 항상 기도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녀는 상심을 치료받았고, 기뻐하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르세니오스 28)


11. 하루는 원로들이 압바 아르세니오스에게 왔는데, 고요하게 살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 자들에 대해 한 말씀 주십사 청했다. 아르세니오스는 그들에게 말했다. “처녀가 아버지의 머무를 때는 많은 자들이 처녀와 혼인하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처녀가 나다니기 시작하면, 모두가 기뻐하지 않는 법입니다. 어떤 자들은 그녀를 무시하게 되고, 어떤 자들은 그녀를 칭찬하지요. 이처럼 그녀는 이전에 감추어져 있을 때와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이지요. 영혼이 밖을 활보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답니다.” (아르세니오스 44)


12. 압바 디아도코스가 말했다. “목욕장의 문이 계속 열려 있으면 열기가 아주 빨리 밖으로 달아납니다. 이처럼 영혼이 구구절절이 이야기하고 싶어지면, 설령 선한 것들을 말하게 된다 해도, 영혼 자신의 열기가 언어라는 문으로 달아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적절한 침묵이야말로 선한 것이다. 이는 아주 현명한 어머니와 닮았기 때문이다.” (디아도코스, 「영적인 백계」 70)

 

 

13. 압바 둘라스가 말했다. “만약 원수가 우리에게 내적 고요를 포기하게 한다면, 결코 그것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내적 고요와 비길 만한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은, 내면적인 시선에 날카로움을 준다. 또한 냄녀적 고요와 어울려 함께 원수에 대항해서 싸우게 한다.” (둘라스 1)

 

14. 그가 또 말했다.“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을 끊어 버리라. 그리하여 그대의 지성이 힘을 잃지 않고 내적인 고요한 삶의 방식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라.”(둘라스 2)

 

15. 한 형제가 압바 이사야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여야 수실에서 내적으로 고요할 수 있습니까?” 원로가 대답했다. “수실에서 내적으로 고요함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던지고, 온 힘을 다해 원수가 심어 놓은 모든 생각과 싸우는 것이라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라네.” 그 형제가 말했다. “세상이란 무엇인지요?” 원로가 대답했다. “걱정거리로 가득 찬 곳이 세상이라네. 세상이란 본성에 반(反)하여 행하며, 육에 따라 자기 자신의 뜻을 채우는 곳이기도 하지. 세상이란 자신이 이 세대에 사는 것만을 생각하는 곳이라네. 세상이란 영혼을 희생하면서까지 육을 돌보는 곳이고, 영적인 일을 져버림을 사랑하는 곳이라네. 이것을 말하는 자는 나 자신이 아니라 사도 요한이니, 이르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하였네.” (이사야, 21,3)

 

16. 그가 또 말했다. “내적 고요 안에서 사는 자는 공중에서 그를 잡으려는 원수들을 피했는지, 그리고 여전히 육체를 가졌음에도 그들에게 해방되었는지 알기 위해, 언제나 그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 원수들의 노예로 굴복하는 한, 더 이상 내적 고요 안에서 살 수 없다.” (이사야 26,1)

 

17. 한 형제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적 고요 안에 사는 자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요?” 그가 말했다. “내적 고요 안에 사는 자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것, 인내하며 간청하는 것, 하나님을 늘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네.” (이사야 26,3)

 

18. 사제인 압바 이시도로스에 대해 말하기를, 한 형제가 그의 집에 왔을 때에 그는 수실의 안쪽에 숨어 버렸다고 한다. 형제들이 “압바 이시도로스 님, 무엇 때문에 그리 행하셨습니까?”라고 묻자 “야생 동물도 둥지 속으로 피하면서 목숨을 구한다네”라고 그는 답했다. 그는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시도로스)

 

19. 한 형제가 스케티스에 있는 압바 모세의 집을 찾아와 한 말씀 청했다. 원로가 그에게 말했다. “떠나라. 그대의 수실에 머물라. 그리하면 그대의 수실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모세 6)

 

20. 압바 모세가 말했다. “사람들을 피해 사는 자는 잘 익은 포도송이와 같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는 덜 익은 포도와 같다.” (모세 7)

 

21. 압바 마르코스가 말했다. “인식의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는 자는 인내하며, 겸손하고, 깨어 있으며, 절제한다. 이런 네 가지와 상관없이 전진하려는 자는 마음이 혼란해져 건널 수 없다.” (마르코스 작품  27)

 

21.2. 그가 또 말했다. “내적 고요는 유익하다. 악덕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도 중에 이런 네 가지 덕을 합쳐 평정에 이르는 데 도움을 삼는다면, 어떤 것도 이보다 더 빠를 수는 없다.” (마르코스 작품28)

 

21.3 그가 또 말했다. “몸을 떠나지 않고서는 정신이 내적 고요에 이를 수 없고, 고요와 기도 없이 정신과 육체의 장벽을 허물 수도 없다.” (마르코스 작품 29)

 

23. 압바 네일로스가 말했다. “고요를 사랑하는 자는 원수의 화살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자는 끊임없이 상처를 받는다. 평온하면, 화처(火處)는 더 절제되고, 욕망은 내적 고요 속에서 지성을 따라 더욱 유순하게 된다. 요컨대 동요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욱 절제되는 쪽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동요에 고유한 행동을 잊게 하여 후에는 완전히 그치게 된다. 그리고 물(物)에 대한 기억만 남게 되며, 동요하는 성향이 사라진다.” (네일로스 9)

 

24. 압바 포이멘이 말했다. “악의 시작, 그것은 방심이다.” (포이멘 43)

 

25. 그는 또 말하기를 육적인 것을 피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육적인 전투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흡사 아주 깊은 수렁 위에 서 있는 자와 같다. 원수는 내키는 때에 그를 쉽게 아래로 밀어 넣을 것이다. 만일 그가 육적인 것을 멀리한다면, 그는 흡사 수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와 같다. 원수가 그를 당겨 아래로 던지려 할 때, 그를 당겨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원수가 던지려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도움을 보내 주신다.” (포이멘 59)

 

26. 압바 시소에스의 제자인 압바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다. “사부님, 이제 연로하셨으니, 사람들이 사는 곳에 좀 가까이 가십시오.” 압바 시소에스가 그에게 말했다. “여자가 없는 곳이라면 가기로 하세.” 제자가 그에게 말했다. “사막 말고 여자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러자 원로는 그에게 말했다. “그럼, 사막으로 나를 인도하게나.” (시소에스 3)

 

27. 암마 신클레티케가 말했다. “산 위에 있는 많은 자들이 도시 사람들처럼 행세하다가 망했다. 도시에 있는 많은 자들은 사막의 행업(行業)을 이루므로 구원받는다. 많은 사람과 함께 하면서도 마음으로 홀로 살 수 있다. 하지만 홀로 살아가면서도 생각을 통해 무리와 함께 살아갈 수도 있다.” (신클레티케의 생애 97)

 

28. 원로가 말했다. “수도자는 혹시 육적 손실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경시하기 위해, 내적 고요를 얻어야 한다.” (무명모음집 133)

 

29. 서로 친구인 세 명의 동업자가 수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사람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는 말씀에 따라, 싸우는 자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선택했다. 두 번째 사람은 병자들을 심방하는 일을 택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고요히 살려고 사막으로 떠났다. 그런데 첫 번째 사람은 수고했지만 사람들의 다툼 때문에 모두를 화평하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낙담한 채 병자를 돌보는 친구에게 갔다. 그런데 그 친구 역시 상심한 채 계명을 온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은 서로 뜻을 모아 은수자(隱修者)를 만나러 가서 그에게 자신들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그가 이룬 것을 말해 달라고 청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에 그는 대야에 물을 담고 그들에게 말했다. “물을 바라보시게.” 물은 요동치고 있었다. 조금 후에 다시 말했다. “이제 물이 얼마나 고요한지 보시게.” 그들이 물을 보자 거울을 들여다보듯 자신들의 얼굴을 비춰 볼 수 있었다. 그때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자는 흡사 이러하다네. 분주해서 자신의 죄를 볼 수 없다네. 하지만 내적으로 고요하면, 특히 사막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볼 걸세.” (무명모음집 134)

 

30. 원로가 말했다. “수실에 거하기를 원하는 자는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유지하지 말되, 특히 자신에게 잘못 행하는 자와 그러해야 한다.”

 

31. 원로가 말했다. “가까이에 예수를 모시며 그와 이야기하는 자는, 자신의 수실에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는다 해도, 잘 행하는 것이다.” (무명모음집 703)

 

32. 대(大)원로가 강으로 가다가 갈대 순이 고요한 것을 보았다. 그는 강가에 앉아 작은 골풀을 잘라 끈을 꼬아 강에 던졌다. 사람들이 와서 그를 볼 때까지 그렇게 했다. 그런 다음 그는 물러났다. 필요했기 때문에 일한 것이 아니라. 노고(勞苦)를 쏟은 다음 고요히 머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33. 원로가 말했다. “왕래가 잦은 길은 설령 씨를 뿌리더라도 행인들이 그곳을 밟고 지나다니므로 어떤 풀도 싹이 나지 않는 바와 같이, 우리도 그러하다. 모든 일에 물러서라. 그러면 그대는, 그동안 그대가 밟고 지나다니기 때문에 보지 못했던, 그대 속에 있지만 알고 있지 못하는 것들이 싹트는 것을 볼 것이다.” (무명모음집 463)

 

34. 어떤 거룩한 분이 말했다. “사람은 세상의 달콤함을 즐기는 만큼, 하나님의 달콤함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의 달콤함을 누린다면 오히려 그는 세상을 미워하게 된다. 기록된 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했다. 우리가 사람들과 왕래하고 육체의 휴식을 원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달콤함을 누릴 수 없다. 내가 말하거니와, 누군가가 그의 수실에 머물며 침묵을 훈련하고, 온 영혼으로 하는 기도와 손노동에 집중하면, 그는 이 세대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무명모음집 464)

 

35. 한 형제가 원로에게 물었다. “내적 고요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유용합니까?” 원로는 그에게 말했다. “내적 고요란, 악감(惡感)과 우월감을 멀리하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수실에 머무는 것이라네. 그런 내적 고요는 모든 덕을 만들어 내고, 원수의 불타는 화살에서 수도자를 보호하여 상처받지 않도록 한다네. 내적 고요는 수도자들을 발전시킨다네. 내적 고요는 천상의 사다리요, 내적 고요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라네. 내적 고요는 통회의 어머니라네. 내적 고요는 회개로 인도한다네. 내적 고요는 흠을 보여 주는 거울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낸다네. 내적 고요는 눈물과 괴로움을 막지 않는다네. 내적 고요는 영혼을 빛나게 한다네. 내적 고요는 부드러움을 낳는다네. 내적 고요는 겸손의 동반자라네. 내적 고요는 사람을 평화로운 상태로 인도한다네. 내적 고요는 천사들과 함께 말하게 한다네. 내적 고요는 정신을 비춘다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연결된 내적 고요는 생각을 살피고 분별과 동행한다네. 내적 고요는 모든 선을 낳고, 금식의 의지와, 혀의 절제와 탐식의 장애물을 낳는다네. 내적 고요는 기도의 학교이자 성경 강독의 학교라네. 내적 고요는 생각이 평온해지는 것이며 피난처인 항구라네. 금식의 무기인 내적 고요는 하나님을 감동하게 하고, 뉘우치지 않는 생각과 대화하며, 독방에 머물려는 사람들을 흔들림 없이 지켜 준다네. 내적 고요는 선한 멍에요 가벼운 짐으로, 내적 고요 자체를 짊어지는 자를 짊어지고 안식을 준다네. 내적 고요는 영혼과 마음의 기쁨이라네. 내적 고요는 그 자체에 관한 것만을 염려하며, 그리스도에게 말하고, 눈앞에 죽음을 끊임없이 떠올린다네. 내적 고요는 눈과 귀와 혀의 재갈이라네. 내적 고요는 매일 밤낮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등불을 끄지 않고 둔다네. 그대는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쉼 없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라’라고 노래하겠지. 내적 고요는 시시한 것을 없애버리고, 그런 것을 갖고 있는 자에게 웃음 대신 눈물을 가져다준다네. 내적 고요는 경건의 어머니라네. 내적 고요는 다정함을 증오하는 무례함의 원수이고, 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네. 내적 고요는 동요의 감옥이라네. 내적 고요는 좋은 농작물을 수확하는 그리스도의 밭이라네. 그렇다네! 형제여, 죽음을 기억하며 이런 덕을 가지시오.” (루푸스 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