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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레 목사의 소명을 향한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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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8 22:48 조회1,8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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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레 목사의 소명을 향한 생애 

 

   웨슬레는 거듭남의 체험 후 지금까지 그의 영적성장을 도와주었던 모라비안 사람들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서, 회심한지 3주도 못되어, 독일 헤른흐트에 가서 진젠돌프를 만나 2주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1738년 9월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에 돌아 온 웨슬레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과 성화도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을 설교하였다. 그러나 많은 강단이 그를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런던 주위에 있는 교회나 아니면 야외에서 매일같이 전도설교를 하였다. "1739년 휫필드(Whitfield Gorrge:1714-1770)는 브리스톨 ( Bristol)에서 야외설교로 큰 부흥을 일으키며, 친구 웨슬레를 브리스톨로 초청하였다. 웨슬레는 야외설교를 꺼려했으나 곧 익숙해졌고, 그 후 50년 동안 야외설교의 방식을 충실히 활용하였다. 휫필드는 모어필드 교회를 세웠고, 미국에 건너가 초기 감리교 신앙 운동에 기여한 부흥사였다. 그는 초기 영국 킹스우드의 석탄 광부들에게 야외에서 설교했다.” Ibid., p. 334. 

 

    웨슬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로 전도 여행을 다녔다. 당시 그의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이 소리 지르며 졸도하기도하고 진동하기도 하였다. 두 설교자 웨슬레와 휫필드는 이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요, 사탄의 저항으로 보았다. 

 

    웨슬레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설교할 때에, 청중들은 설교를 듣고 너무 감명을 받아, 입을 멍하니 벌리고 웨슬레를 바라볼 정도였다. 웨슬리는 로우(W. Law: 1686-1761), 아캠피스(Thomas a Kempis : 1379-1471), 테일러(Jeremy Taylor:1613-1667)와 같은 영성 깊은 신앙인들의 작품에서 그의 영력을 키웠다. 

 

    웨슬레가 살아가던 당시 영국은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사치와 약한 자에대한 혹사로 사회정의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였다. 교회의 출석은 말이 아니었고 생동력 넘치는 신앙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에, 그는 신앙적 행위를 강조하였다. 웨슬레가 신앙인의 경건생활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믿는 자가 이 세상에서 거룩해질 수 있으나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웨슬레는 1739년 5월 12일에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처음에는 이 교회가 가정에서 모였고, 그 다음에는 자체 건물을 갖게 되었다. 그 다음 이회의 회원이 많아지자, 12인으로 속(Class)을 두고, 각 속에 대표자를 두었다. 이 속들은 매 주마다 모여서 성경책을 읽고, 기도하고 자신들의 문제를 토의하고 기금을 모았다. 그는 평신도의 교회참여를 북돋아 주었고, 특히 속회를 여성들도 지도하게 하여, 여성들에게 탁월한 자리를 주었다. 또한 그는 뛰어난 조직가로서 평신도 지도자들을 육성하면서 전도 사업의 조직체도 아울러 키워갔다. 

 

    "웨슬레 운동은 급성장하여 그는 영국 전역으로 다니면서 선교를 해야 했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했다. 영국 브리스톨의 주교가 웨슬리의 전도로 성공회 교구들이 방해를 받는다고 하면서, 웨슬리의 전도활동을 방해하려하였다. 그러자 웨슬리는 "온 세계가 나의 교구이다" (The all world is my parish)라고 응답하였다. 이 말은 처음에는 성공회에 대한 항거의 뜻을 담고 있었지만, 훗날 이것은 감리교 선교의 표어가 되었다." Ibid., p. 336. 

 

    웨슬레는 70세가 될 때까지 하루에 여러 차례 설교를 했고, 매년 말 타고 수만 마일을 달려야 했다. 지구를 15회 이상 돌만한 거리인 160만 마일을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 여행을 했으며 141편의 설교집(42,400회 설교), 의학서적, 영문법, 논문 등 모두 44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또한 네델란드, 독일, 영국의 섬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를 여행하면서 세계적인 선교를 감당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무렵에는 12만 5천명의 감리교인과 1500명의 감리교 설교가가 생겼다. 웨슬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와 거듭남 그리고 기독교인의 성화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믿는 자의 윤리적, 개인적 '완전'의 삶을 강조하였다. 

 

    웨슬레가 거듭남을 체험한 후 세상을 떠날 때가지 줄곧 주장한 사상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었다. 이 사상은 옥스퍼드에서 터득한 것인데 그는 이것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취할 의무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말한 완전이란 사람은 자의로 범하는 죄 외에 본의 아니게 짓는 죄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죄의 용서로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성령의 선한 열매를 맺을 때 그는 완전한 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웨슬레는 완전을 위해 건전한 금욕생활을 강조한 일도 있었다. 이점에 있어서 그는 청교도들을 많이 본받고 있었다. 

 

    웨슬레가 운동을 전개하는 상황에서 평신도 설교가가 필요하게 되자 평신도를 설교자로 세우는 것이 자신의 긴박한 운동에 대한 응답으로 확신하였다. 그는 성만찬만 제하고 많은 부분을 평신도들에게 맡겼으며 여자들의 속은 여자 속장을 두어 여성 지도력을 키워나갔다. 또한 대 전도운동을 전개하여 놀라운 복음주의적인 부흥을 가져와 영국사회를 변화시키고 미국을 복음화 하는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항상 자기 생명을 땅위에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평생을 선교와 말씀 증거 하는 일에 힘썼다. 온 세계가 나의 교구이다" (The all world is my parish) 라는 구호를 외치며 세계를 가슴에 품고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던, 그는 1791년 3월 2일에 53년의 전도사역을 마치고 88세를 일기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말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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