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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감리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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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8 22:58 조회2,2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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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감리교회의 역사

 

 이 글은 1784년부터 최근까지 영국 감리교회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전반에는 주로 모교회인 영국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된 감리교회가 되는 역사와 그런 독립 과정에서 나타난 초기 감리교회의 성격과 전통을 조사하려는데 집중하고, 후반에는 20세기에 들어선 감리교회의 성격과 변화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최근 영국 감리교회의 모습을 교회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을 중심으로 논하려고 한다. 

 

1. 존 웨슬리(1703~1791):충성스런 영국 국교도?

존 웨슬리와 국교회는 웨슬리가 야외설교(Field preaching)를 하면서부터 갈등과 불화의 관계에 들어갔다. 국교회의 감독들과 성직자들은 존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를 국교회의 규칙을 파괴한 분리주의자들이고, 광신주의자들로 취급하였다.

 

감리교도(Methodists)의 수가 증가하고 야외전도(Field Evangelical Movement)가 성공적으로 확대되고 있을 때, 국교회는 감리교도를 심하게 핍박했고, 감리교도는 웨슬리에게 국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독립교회를 만들 것을 요구하였다. 더욱이 웨슬리 생애 마지막 10년간은, 평신도 설교자들(Wesley's Lay Preachers)로부터 대단한 압력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웨슬리는 모교회를 떠나지 말고, 모교회의 예배와 모든 규칙을 철저히 지키라고 엄히 가르쳤다.

 

올더스게이트에서의 복음적 회심(Evangelical conversion experience at Aldersgate) 이후에 열성적인 전도자(Evangelist)이면서 동시에 회심 전과 같이 여전히 고교회주의자(High churchman)로 살았던, 웨슬리는 1789년 그가 죽기 2년 전에 국교회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고백적으로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는 영국 국교도로 살고 죽는다(I live and die a church of England man). 국교회를 떠나는 것은 곧 나를 떠나는 것이다.”  존 웨슬리는 “초대교회 다음으로 우리의 영국 국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성서적인 교회라고 믿고 있으며 국교회의 모든 교리에 동의하고 예전과 성례전의 전통을 따른다.”고 말했다. 

 

   1784년 아메리카에 있는 감리교도를 위해서 보내는 국교회의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축약하여 만든 “주일예배”(Sunday service for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서문에서도, 영국교회의 예배는 세계에서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순결하며 온전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상 웨슬리에게 있어서 세 가지 기독교 신앙의 전통과 교과서는 영국교회의 예전(Liturgy)과 39개 교리 조항과 설교집이었다. 

 

   이와 같이 웨슬리는 자신을 일생 동안 충성된 국교도라고 규정했다. 국교회로부터 국교회의 규칙을 깨는 분리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때 “우리는 결코 분리주의자가 아니다. 모교회에 충성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감리교도의 국교도와 다른 불규칙한 행동은 다만 야외에서 설교하는 것과 기도문 없이 하는 즉흥기도(extempore prayer)뿐이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당시 감리교도의 집회(Methodist service)는 국교회의 예배를 대신하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국교회의 예배에 보충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2.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리(1784~1791)

   웨슬리의 계속적인 국교회에 대한 충성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과 행동에는 처음부터 분리의 씨앗이 잠재해 있었다. 1739년 한 편지에서 웨슬리는 자신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변호하고 있다. 

 

‘나는 신앙이나 실천에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법칙 이상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성경의 하나님이 나에게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악한 자들을 개혁하고, 덕 있는 자들을 격려하도록 명령하신다. 사람이 이런 일들을 남의 교구에서 못하게 금지하는데, 나는 나의 교구가 없다. 고로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바라보노라.’

 

  이런 웨슬리의 고백적 선언에는 성경의 명령을 따른다는 신념과 웨슬리의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원칙이 있어 보이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교회의 규칙은 상대적인 것이었다. 웨슬리는 복음의 본질적인 사역을 위해서, 중대하고 긴급히 필요한 때에는 교회의 규칙보다 성경의 권위에 복종했던 것이다. 당시의 영국교회는 복음의 본질적 사역에 실패했었고, 이 실패는 감리교(Methodism)의 탄생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원인이었다. 

 

    웨슬리는 여러 가지 비공식적 집회를 가졌고, 야외에서 설교했고, 속회를 통해서 친밀한 교제와 영적 성장을 이루어갔다. 또한 그의 추종자들이 모일 독립적인 건물을 세웠고, 1744년부터는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들의 훈련과 조직 확대를 위한, 매년 총회(Annual Conference)를 열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웨슬리의 지도를 받아서 생동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게 되었으나, 동시에 웨슬리의 지침에 복종하여, 자기들이 소속한 교구교회의 주일예배와 성례전에 참여하면서, 충실히 교인의 의무를 다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감리교도는 국교회로부터 핍박이 심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국교회에 가는 것을 점점 더 주저하게 되었고, 갈등이 심화되어 갔다. 

 

    그러다가 1784년에 중대한 계기가 일어났다. 드디어 웨슬리가 감리회(Methodist Society)에 독립적인 법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주로 평신도 설교자 100여 명(Legal Hundred)으로 감리교도들의 총회를 대표하는 대표로 임명하고 선언(Deed of Declaration)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 2월 28일에 대법원에 등록하였다. 총회는 설교자들을 3년 주기의 임기로, 일정한 감리교 설교 집회소(Methodist Preaching House)에 임명 파송하였으며, 이 집회소는 감리교 예배당(Methodist Chapel)이라고 불려졌으나, 아직 “감리교회”(Methodist church)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같은 해 9월에는 북아메리카에 있는 감리교도에게 세례와 성만찬을 행할 신성한 권한을 주기 위해서, 5명에게 성직 안수를 하여 파송하였다. 이때 웨슬리는 국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같은 장로(국교회 목사)나 사제(priest)는 성직 안수를 줄 수 있는, 감독으로서의 권한을 갖고 있으며, 성경에서도 이것을 금지하는 어떤 근거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안수 받은 5명 중 하나가 토마스 코크였다. 이미 웨슬리와 같은 국교회의 장로였던 토마스 코크는 다른 사람을 안수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감리사(Superintendent)로 안수를 했는데, 사실상 이것은  당시의 웨슬리가 쓰기를 주저했던, ‘감독’(Bishop)이란 명칭을 대신하는 기술적 용어였다. 또한 이때 웨슬리는 북미감리교도를 위해서 국교회의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축약하였고, 39개 교리를 25개로 축소해서, 개인편지와 함께 코크의 손에 들려서 보냈다.

 

    이 개인편지 속에서 웨슬리는 자신은 국교회를 사랑할 뿐 아니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국교회의 교리와 예전과 규칙을 고수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북미의 감리교도의 사용에 맞게 조금 변경하고 축소하여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웨슬리 자신의 근본적인 신학의 변화라기보다는, 상황의 변화와 경험에 의하여 필요한 만큼의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웨슬리는 국교회의 설교집(Homilies)을 대신할 수 있는, 감리교의 “표준설교집”(Standard sermons)을 만들었으니, 국교회의 예배(Liturgy)와 교리와 설교를 변형시켜 감리교도에게 실제적으로 맞는 예배와 교리와 설교를 만들어 놓은 셈이 된다. 축소한 예배서와 교리는 그 후 북미와 영국과 그 외 모든 감리교를 위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어서 웨슬리는 1788년까지 모두 28명에게 성직 안수를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본래 웨슬리의 안수는 북미와 스코틀랜드 등 해외 목회를 위해서만 제한된 것이었는데, 스코틀랜드에 있던 감리교 성직자가 국경을 넘어오게 되자, 이 제한이 무효가 되었고, 1789년에 웨슬리는 이 결과를 시인하였다. 이렇게 하여 감리교도의 회(Methodist Society)의 분리는, 웨슬리의 안수사건을 계기로 기정사실화 되었다. 즉 안수는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Ordination is separation). 그러나 분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기록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으며, 웨슬리는 “우리는 분리주의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국교회에 충실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국교도로 살았다. 이 당시에 감리교도 중에는 감리회에만 소속한 사람과 두 교회 모두 소속한 사람이 나타났다. 

 

   3. 웨슬리 사후(1791~1795)

   존 웨슬리는 1791년 3월 2일 약 88세에 감리교 복음운동이 성공적으로 부흥하는 것을 보면서, 감사와 행복 속에 일생을 마쳤다. 웨슬리가 죽었을 때에 메토디스트회는 115개 구역(circuit)과 300명의 순회 목회자와 1,000명의 평신도 설교자와 약 8만 신도로 성장하였다.

 

    당시 영국의 총인구가 약 1,000만으로 추산되므로, 감리교도의 수는 전체 인구의 약 1/125이었다. 그러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리교가 사회에 끼치는 도덕적, 개혁적 영향력이었다. 

 

    웨슬리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장례가 끝나자마자, 감리회의 미래 방향에 대하여 세 가지 다른 주장이 나왔다. 

    첫째 그룹은 국교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자유교회(free church)를 속히 설립하자고 주장했고, 

    둘째 그룹은 정반대로 감리교의 모든 특이한 관습을 다 버리고 모교회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이 두 그룹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셋째 그룹의 사람은 중간입장을 취했는데, 이들은 감리교가 지금까지 해 오던 것들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모교회와 가능한 우호관계를 유지하자는 주장이었다. 물론 세 번째 그룹이 존 웨슬리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지만, 첫째, 둘째 그룹의 주장도 상당히 완고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국교회의 감리교도에 대한 태도는 갈수록 적대적이 되어갔다. 

 

     위와 같은 세 종류의 의견으로 인해 초기 감리교는 1930년까지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였다. 반면에 이런 갈등은 감리교회의 성격과 방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웨슬리 사후에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제 누가 웨슬리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 즉 매년 개최되는 감리회 총회(Methodist Conference)를 누가 이끌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가 구체화되자, 대부분의 감리교도는 감리교 감독(Methodist Bishop)을 원치 않았다. 거의 모든 감리교 설교자도 “이스라엘의 또 다른 왕”(Another King in Israel)이 필요 없고, 다만 매년 총회에서 사회를 맡을 의장(president)이 필요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감리교도들은 의장은 국교회식의 감독(Anglican Bishop)이 되거나 로만가톨릭교회식의 감리교 교황(Methodist Pope)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 자유교회(free church)식의 총회 의장의 직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초기 감리교회가 감독제가 아닌 의장제도를 선택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감리교도는 국교회의 정치적이며 권위주의적이며, 귀족 내지는 관료 계급적 성직제도로서의 감독제가 성경적으로 볼 때,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당시 메도디스트는 국교회 감독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성경적으로 참된 교회를 이루는 데, 감독제도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닐뿐더러, 방해되는 요소가 많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거의 모두가 가난한 보통사람들(Working class)이었던 감리교회는 진정으로 자유교회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또한 1785년 100명의 대표(Legal Hundred)에게 쓴 편지에서 웨슬리는 감리교도는 “형제단”(a band brother)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대표들은 감리교 형제들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우월권이나 지배권을 갖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미래의 감리교회 성격을 규정하는 지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초대 의장이 선출되고 사실상 의장보다 실질적으로 감리교회를 지도하는 데 중요한 총회의 총무(Secretary)에는 토마스 코크(Thomas Coke) 박사가 선출되었다. 이때 영국 전역을 27지방(District)으로 나누고, 다시 한 지방을 2~7구역(Circuit)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지방에는 지방회장(Chairman)이, 구역에는 감리사(Superintendent)가 선출되어 대표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약 3년 후 작은 그룹의 감리교 설교자들이 비밀위원회를 결성하고, 감리교회에 감독을 선출하려고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즉시 총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총회의 선언은 처음과 같았다.

 

    “감리회 형제들은 모두 평등하다”

    (No distinction among Methodist brethren)

    “감리회 형제들에게는 또 다른 왕이 없다”

    (No another King in Methodist brothers)

    “감리교도들은 하나의 형제단으로 남을 것이다”

    (To remain a band of brethren)

 

     1784년 볼티모어에서의 크리스마스 총회에서 애스베리와 코크를 감독으로 선출하고, 출발한, 북미감리교회와는 다르게 영국 감리교회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1년직 총회 의장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영국과 북미의 당시 역사적 상황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적어도 영국 초기 감리교회가 감독제도를 거부한 중요한 이유는, 감리교회의 질서(order)와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감리교회는 국교회같이 정치적인 교회나 권위주의적인 성직관료주의로 제도화되고 경직화되는 것을 배격하였다. 초기 감리교도는 민주적인 자유교회 형태를 원했고, 평신도 중심의 선교 지향적인 교회와 복음적이며 성령의 은사공동체적 교회를 원했던 것이다. 

 

     웨슬리 사후에 감리교도는 또 하나의 과제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감리교도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성만찬을 받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초기 감리교도는 웨슬리의 성만찬 경건주의 신앙을 잘 본받아서 매주일 지속적으로 성만찬을 받는 것을 신자의 거룩한 의무로 실천하였다. 그러므로 매주일 교구교회에 간다는 것은, 성만찬을 받으러 간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교구 성직자에게서 성만찬 받기를 거부당하는 모욕을 점점 더 많이 당하게 되면서, 감리교도는 감리교 설교자에 의해서 성만찬을 받을 수 있도록, 설교자에게 성만찬 집행 권한을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몇 년간의 토론과 갈등을 겪다가, 1795년 총회에서 드디어 문제 ‘해결의 계획’(Plan of Pacification)이 제정 선포되었다. 이 법은 모든 감리교 설교자(Methodist Preachers)에게 성례전을 집행하는 권한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즉 영국 국교회의 주일예배와 같은 시간에 감리교 예배당(Methodist Preaching House 또는 Methodist Chapel)에서 감리교 예배와 성례전의 집행을 허가하게 된 것이다. 다만 국교회의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나 웨슬리의 축소판 공동기도서 둘 중 하나를 Liturgy로 사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였다. 이로써 처음으로 공식적인 감리교회 주일예배와 감리교회 성만찬이 실행된 것이다. 이때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감리교도는 이 법을 환영하였다. 결국 감리교회가 영국 국교회로부터 완전 분리 독립하여, 실질적인 감리교회(Methodist Church)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감리교회의 분리는 웨슬리의 성직 안수사건 때부터 이미 본격화된 것이다. 사실 성직 안수는 세례와 성만찬 집행을 위해서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성직 안수사건에서 벌써 성만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초기 감리교도에게 성만찬은 중대한 예배의 본질이었고, 영성생활의 중심에 있었다.

 

    4. 초기의 분열과 통합 시기의 감리교회(1795~1932)

    1795년 “성만찬 해결 계획”(Plan of Pacification)이 시행된 이래 137년간 감리교회는 13개와 그 외의 미소한 분파로 분열되고 통합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성장해 나아갔다. 

 

   1) 새 감리교 연합체(Methodist New Connextion)

   1795년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는 Alexander Kilham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설교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국교회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할 것과 “해결계획”이 설교자들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준 것이므로 일반 감리교들에게 모든 권한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감리교회의 완전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고 나왔다. Kilham은 강력한 설교가인 동시에 영리한 신학자요, 유능한 목회자이었으나 개혁요구를 거절당하고, 1797년 총회에서 축출되어 약 5,000명의 신도들과 함께 “새 감리교 연합체”(Methodist New Connextion)라는 새로운 감리교회를 만들어 계속 성장시켰다. 1847년부터는 북미와 호주에 해외선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들의 요구는 감리교회가 보다 더 평신도 중심의 민주적인 교회로, 또한 보다 더 강력한 복음전도적인 교회로 발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1861년에는 이 교회 소속의 설교자요 과격파 복음주의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가 사임하고 따로 나와서, 존 웨슬리의 박애운동(Methodist philanthropy 또는 Charity works)이 감리교 복음주의의 핵심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실행키 위해서 구세군(Salvation Army)을 창설하였다. 

 

     2) 독립 감리교회(Independent Methodist Church)

     1800년에 소수의 감리교인들이 웨슬리 시대의 부흥(Revivalism)에 향수를 느끼고 감리교 복음주의의 회복운동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분리해 나갔다. 이들의 부흥운동의 표어는 “Methodism is still alive”였고 북미의 감리교 부흥사와 협력하여 천막부흥집회 운동을 일으켰다. 또 퀘이커 교회와도 협력하였기 때문에 “Quaker Methodist” 또는 “Singing Quaker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들은 결코 감리교 통합에 들어오지 않았다. 

 

       3) 원시 감리교회(Primitive Methodist Church)

       이것은 목수인 설교자 휴 본(Hugh Bourne)의 열성적인 개인전도운동이 감리교 부흥사 그룹을 형성하여 일어난 교회이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부흥회를 다니면서 커졌고 동시대의 북미 천막부흥회(Camp Meeting)식으로 조직을 확대해 갔다. 이들에 의해서 영국에서는 1807년 처음으로 천막부흥회가 개최되었다. 이들은 성령의 초월적 역사에 의한 개인의 회심, 중생을 강조했다. 철야기도와 금식기도 그리고 “온 종일 기도”(A whole day prayer)운동을 특징으로 하였다.

 

      이들의 부흥운동이 더욱 열성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총회에서는 그들이 지닌 위험과 혼란 때문에 활동중지 경고를 주었고, 드디어 1809년에는 그들을 모두 파문시켰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1811년에 독립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신비주의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Magic Methodists”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 교회는 감리교의 본래 전통을 가장 잘 실행하고 지키면서 위대한 공헌을 남긴 기록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 교회는 19세기 전반에 중부지방에 위대한 부흥을 일으켰고 특히 중북부 산업 공장지대 전도와 사회선교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산업사회의 사회 도덕과 경제 정치적 개혁에도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오히려 웨슬리안 감리교회(Wesleyan Methodist Church)보다도 더 감리교 선교에 모범적인 성과를 기록했다. 특별히 이 교회는 노동조합(Trade Union)운동에서 가장 훌륭한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배출시켰고, 웨슬리안 감리교회보다 더 적극적이고 진보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이 교회에는 여성 설교자들이 많았고 그들의 공로가 가장 두드러졌으며 실제로 교회와 사회에서 남녀평등을 강하게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해외선교에도 큰 공로를 세웠는데, 1890년부터 서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에 선교하였다. 같은 해에는 인도선교를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1829년부터 북미선교를 시작하여 1840년에는 북미에 “북미 원시 감리교회”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성서연구와 신학연구 활동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설교자들과 속장들을 위한 전문잡지인 The Horborn Review는 오랫동안 감리교 신학과 선교의 정보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했었다. 특히 웨슬리 성서신학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대표적인 학자는 피크 박사(Dr. A.S. Peake)이며 그의 주석은 지금까지 고전으로 읽혀지고 있다. 피크 박사는 당시 영국에서 자유교회의 신학원리에 따라서 성서를 해석하는 뛰어난 주석가이며 경건주의 목사였다. 

 

       이들은 감리교의 본래 전통을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웨슬리안 감리교회는 본래 전통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비판했다. 후기 역사가들은 이 교회는 감리교 역사에서 “진정으로 선교적 사명을 다하는 교회”(A true missionary church)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4) 바이블 크리스천(Bible Christians)

       이 감리교 분파는 영국의 소외된 지방 콘월(Cornwall)에서 1778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 오브라이언(William O'bryan)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는 10세쯤 되었을 때 존 웨슬리를 만나 “너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투병중에 신비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난 다음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받아 웨슬리가 미치지 못하는 소외된 지역을 다니며 전도를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의 활동범위가 웨슬리안 감리교의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1810년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는 수십 개의 새로운 감리회(societies)를 설립하여 다시 웨슬리안 감리교회에 허입하였으나 또다시 추방당하였다. 이들은 주로 서남부 소외지역인 농촌과 광산지역에서 부흥하였다.

 

      이들은 설교할 때에 어떤 주제들에 맞는 성경구절들을 갖고 해석하고 확증을 하는 특징이 있어 “바이블 크리스천”이라고 불려졌다. 이들의 특징적 성격은 열정적이고 신비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었다. 이들은 콘월에서 이민간 바이블 크리스천들의 요청으로 북미와 호주 등지에 Bible Christian Society를 설립하여 활동하다가 웨슬리안 감리교회와 연합하였고 국내에서는 “새 감리교 연합체”와 연합하였다. 

 

         5) Methodist Unitarian Movement(1807~1857)

         이 교회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고 단일신론(unitarianism)을 주장하는 설교자 조셉 쿠크(Joseph Cooke)와 그의 추종자 수백 명이 1806년 연회에서 축출당하면서 분리해 나간 것이다. 

이들은 다른 교리에서는 모두 웨슬리를 따랐으며, 특히 순회전도와 영적으로 깊고 긴 시간의 기도를 강조하였다. 또한 주일학교 운동을 크게 부흥시켰고, 사회선교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사회개혁과 정치개혁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지방자치 정치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성화를 위한 개혁운동(Factory Reform)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리한 법(poor law)의 폐지운동을 앞장서 전개하였다. 

 

         6) 그 외의 분파 감리교회들

      1800년부터 약 50년 동안 감리교회는 하나의 독립교회로서의 정치 제도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다. 동시에 감리교는 신학적으로 교리와 선교정책과 실천에서도 착실하게 정착하여 이 기간 동안 약 32만의 신도를 더 얻는 큰 부흥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가장 위대한 감리교 지도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야베츠 번팅(Jabetz Bunting)이다. 그는 천재적인 교회 정치 행정가였으며 신학자였다. 감리교회의 여러 가지 기초는 그에 의해서 확고히 놓여졌다고 할 수 있다. 조직과 제도뿐만 아니라 신학교와 해외선교회(Wesleyan Methodist Missionary Society)를 설립한 것도 그의 지도력의 결과였다. 번팅은 1814년부터 총회의 총무로 일하다가 1844년에 제4대 의장(President)이 되어 네 번이나 연임하였다. 번팅은 1818년에 감리교회에서 “Minister”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Reverend”라는 용어의 사용은 아직 금지하였다. 1836년부터 감리교 총회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의 목사 안수식이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감리교회에서는 “Minister”라는 용어보다는 “Preacher”라는 용어를 더 친숙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번팅의 강력한 지도력에 반대하는 다양한 작은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번팅에 의해서 확고히 형성되는 법과 제도와는 다른 것을 주장하다가 분열해 나가게 되었다. 가장 크게는 1927년에 수천 명의 개신교 감리교회(Protestant Methodists)이고, 이어서 소수의 세력들이 분열해 나아갔다. 

 

1825년 Tent Methodists

 1827년 Protestant Methodists

 1833년 Arminian Methodists

 1836년 Wesleyan Methodist Association

 1849년 Wesleyan Reform Movement

 1857년 United Methodist Free Church

 1859년 Wesleyan Reform Union

이와 같은 교회들은 19세기 중반까지 약 1세기 동안 각기 독립 감리교회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7) Wesleyan Methodist Church(1800~1932)

        초기 감리교회가 하나의 종교 분파적 형태(sect type)의 신앙공동체에서 교회 형태(church type)로 발전하는 과정에 크고 작은 분열사건이 있었으나, 항상 약 3/5 이상의 감리교도들은 존 웨슬리가 이끌어왔던 감리회 총회(The annual conference of the people called Methodists)에 그대로 남아서 감리교회를 지켰다. 이 모(母)감리교회를 떨어져 나간 다른 교회들과 구분하여 “Wesleyan Methodist Church”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교회는 1세기 동안 혼란과 분열을 겪었지만 중심이 흔들리는 타격은 받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영국 내에서 독립교회(Free Church)로 발전해 나갔다. 

 

         또한 19세기 중반에 가서 감리교회는 영국의 북동부 산업지대와 남서부 브리스톨, 데분, 콘월 지역에서 많은 국교회 신도들을 흡수했다. 그리고 남서부의 소외된 옛 청교도의 후예들인 대부분의 칼뱅주의 교도들을 흡수하여 그 지역의 80% 이상 혹은 90% 이상을 감리교인으로 만들기까지 하였다. 아직도 이 지역에는 감리교 대성당(Methodist Cathedral)이라 할 수 있는 큰 교회들이 많이 남아 있다. 

 

          1791년에 8만 신도가 1796년에는 10만으로, 1814년에 20만으로, 1833년에 30만으로, 1850년에는 40만 신도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것은 약 10년 단위로 10만의 신도를 얻은 것으로서, 초기 감리교회는 웨슬리가 활동하던 때의 강력한 복음주의 교회로서 모습을 유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웨슬리안 감리교회는 주로 산업화된 도시와 공장지대에서 부흥했고, 소외된 농촌지역에는 극히 약했다. 농촌지역이나 어촌지역에서는 원시 감리교회나 또 다른 작은 감리교 분파 교회들이 선교에 성공적이었다. 웨슬리안 감리교회는 19세기 후반부터 1932년 사이에 신도수 성장에 현저한 둔화를 보였다. 

 

           웨슬리안 감리교회는 국내선교보다 오히려 해외선교에 모범적 성공을 거둔 교회로 평가된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후반에 걸쳐 이미 5대양 6대주에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다. 1841년에 웨슬리안 교회의 약 400명의 선교사들이 세계에 흩어져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 인도, 버마, 실론, 말레이시아, 피지, 일본, 보르네오, 필리핀, 자바와 수마트라, 아프리카에서는 남아프리카 일대와 동부의 케냐,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수단, 우간다, 짐바브웨, 서부의 가나, 감비아, 잠비아, 베넴, 아이보리코스트, 나이지리아 등 모든 나라들에 가장 성공적인 선교를 하였다. 특별히 프랑스 가톨릭 지역인 서부 아프리카의 베넹, 아이보리코스트, 가봉, 카메룬에서 감리교는 용감한 개척선교로 가톨릭 세력을 이기고 성공하였다. 태평양의 피지제도에서 감리교 선교는 인구의 90%가 감리교인일 정도로까지 부흥하였다.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호주와 뉴질랜드에서의 감리교 선교의 위대한 부흥은 말할 것도 없이 세계선교 역사의 모본이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감리교는 유럽의 프랑스에 한 구역을 설립하는 것을 출발로 하여,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칸디나비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 감리교 선교가 이루어졌다. 비록 세력은 약했으나 차츰 기반을 잡아 20세기 중반에 와서는 유럽대륙에 감리교 연합체가 형성되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수많은 영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희생되었다. 감리교회의 선교사들은 80% 이상이 평신도 자원선교사들이었다. 감리교 해외선교는 주로 평신도들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그들에 의해서 처음에는 속회가 탄생하고 선교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감리교가 본래 복음전도에 강한 은사와 열정을 가진 교회임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감리교 선교는 가는 곳마다 복음전도와 사회선교를 조화 있게 실천함으로 문화적 갈등을 극복하고 선교에 성공할 수 있었다. 특히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아시아에서의 교육과 의료를 통한 박애운동 중심의 감리교 선교는 타교회가 도저히 따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감리교 복음주의의 통전적 선교 정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에 감리교회의 신도수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지역마다 모이던 감리회들(Society)은 감리교 예배당(Methodist chapel) 건축을 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아직 가난한 감리교인들은 감당키 어려운 부채를 지게 되었다. 그리고 각 지방의 도시에는 감리교회 중앙회관(Methodist Central Hall)이나 중심되는 큰 교회를 건축하여, 영국 국교회의 대성당(Anglican Cathedral)에 맞서는 독립교회의 위상을 보이려고 했다. 이로 인해서 때로 건축 부채를 감당치 못해 심각한 위기를 겪은 교회들도 많았다. 이러한 건축 재정문제를 해결키 위해서 1840년에 100주년 기념사업 기금 모으기 운동을 교단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이후 계속 감리교회는 국내선교를 계획하고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1940년까지 전국 모든 지역에 총 7,597개의 감리교회를 세웠다. 이 중 대부분이 1914년 이전에 건축한 것들이다. 1932년 감리교 통합 이후에는 새로 설립하는 교회는 별로 없었고 통합에 따르는 조정이나 인구의 이동에 따르는 교회당 신축이 있을 뿐이었다. 

 

           1850년대부터 웨슬리안 감리교회는 그 구성과 성격이 변하기 시작하여, 더이상 가난한 노동자들의 교회(working­class church)는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교회는 중산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감리교회의 변화는 새로운 교회당 건축과 이에 따른 재정 조달 때문에 더욱 분명해졌다. 당시 감리교회는 본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주의적인 교회 형태와 중산층을 의식하는 교회 형태를 동등하게 공존시키기에 어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1854년 총회 보고서에는 대도시의 가난한 민중들을 소홀히 한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감리교회의 지역전도 부흥운동을 조직하고 추진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런던 감리교 선교회”, “맨체스타 도시 선교회”, “셀포드 도시지역민 선교회” 등 모든 큰 도시의 가난한 노동자 계급의 대중 전도를 목적으로 한 웨슬리안 선교회가 조직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조금 때늦은 것이었다. 이미 스펄전과 같은 침례교 전도운동과 영국 국교회 복음전도운동 등 다른 교회들이 먼저 도시선교에 성공하고 있었고, 무디와 생키의 전도운동이 세계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놓았기 때문이다. 감리교회는 “지역선교사회”(District Missionaries)를 조직하여 처음 감리교와 같은 복음주의적 전통을 회복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런 전도운동은 주로 평신도들 자원 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전도방법은 개인전도와 사회운동을 병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에도 불구하고 감리교회는 생각보다 교인을 많이 얻지는 못하였다. 벌써 영국 사회는 18세기의 순박한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리교는 개인전도와 사회적 박애운동을 조직적으로 잘 해 나갔다. 산업도시에서의 노동운동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운동, 집 없는 사람들과 고아들같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박애운동 등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이 시기의 가난한 집 자녀들을 위한 감리교 학교(Methodist Charity School)들이 많이 생겨났다. 

 

          19세기 말까지도 감리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교회’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의 모습을 지켰다. 웨슬리가 시작하여 발전시킨 구빈원(Poor House 또는 Workhouse)을 각 도시와 지방마다 세워 그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 구제를 담당하였다. 19세기 감리교 사회봉사에서 가장 기념할 만한 것 중 하나가 ‘어린이 집’(Children's Home 후에 NCH:National Children's Home으로 불림)의 창설과 발전이다. NCH는 1869년에 감리교 목사인 토마스 스티븐슨(Thomas Stephenson)과 두 명의 감리교인에 의해서 두 명의 소년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런던의 한 마구간에서 시작된 것이 1930년대에 가서는 각 지방마다 세워졌고 약 3만 명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양육하고 있었다. NCH는 단순한 고아원이 아니라 가난한 집 아이들이 언제나 들어와 가정 생활하는 감리교 가정(Methodist Home)이었다. NCH는 또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였다. NCH는 감리교의 어린이와 청소년선교, 교육을 다양하게 실행했다. 1878년부터는 ‘The Sisterhood’라는 어린이와 청소년선교와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자원 사회사업봉사 학교가 세워져 졸업생들을 영국과 해외에까지 파송하였다. 

 

          NCH는 유대인 피난민 어린이를 비롯하여 해외의 많은 고아들을 받았고, 사회의 불행한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을 감리교 홀로 담당케 했던 선교기관이 되었다. 전국 감리교회는 매년 NCH를 위해 헌금하고, 총회와 감리교인들도 책임적 애정으로 지원하였다.

 

         존 웨슬리도 그랬지만 웨슬리 사후에 약 50년 동안 감리교의 최고 지도자였던 야베츠 번팅은 본래 고교회주의자(High Churchman)이며 토리(Tory)당에 속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감리교의 교황’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는 당시 광산노동자들과 산업노동자의 파업운동에 대하여 감리교인들에게 ‘정치행동금지’(No Politics Rule)를 주장하며 정치적이며 과격한 소요에 참여치 않도록 가르쳤다. 웨슬리안 감리교 안에는 진보파(Liberals)보다 보수파(토리당파)가 훨씬 많았고, 진보파 지도자들은 19세기 말엽까지는 한 번도 의장에 선출된 적이 없었다. 1856년 총회에서는 ‘기독교 애국주의’(Christian patriotism)의 의무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1858년에 번팅이 죽었으나 여전히 ‘정치행동금지’는 감리교 사회운동의 규칙이었다. 그러나 이후로 감리교 안에 실력 있는 사회 정치적 진보파들이 새롭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말에 가서는 감리교 안에 진보파가 득세하였고 정치 행동을 터부시하는 태도는 없어졌다. 그렇지만 아직도 감리교 안에는 보수파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영혼구원에 집중하는 복음주의와 개인적 경건주의는 감리교가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토록 하는 지속적인 힘과 전통이 되었다. 1887년 웨슬리안 총회는 ‘감리교회가 비정치적인 기관’임을 분명히 선언하기도 하였다. 사회정치문제에 있어서 감리교가 실천하는 최고의 봉사는 소위 ‘정치적인 선한 사마리아인들’(The political good samaritans)이 되는 것이었다. 가난한 약자들과 정치적인 약자들의 영혼을 돌보고,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그들 사이에 형제애를 증진시키는 일, 그리고 사람들의 도덕적 실수와 생활의 불경건을 교정해 주는 일이 언제나 중심이었다. 

 

           감리교 사회선교는 정치개혁운동으로서가 아니라 도덕개혁운동으로서 가장 탁월한 공헌을 남겼고 성공적이었다. 당시 산업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감리교인들은 가장 도움이 되는 좋은 이웃이었다. 18세기 산업사회에서 감리교회의 복음전도운동과 박애운동과 경건운동과 도덕개혁운동은 통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정치적 방법이 아닌 복음적이고 도덕적인 방법으로 인해서 감리교회는 산업사회 노동자의 노동환경과 고용조건, 그리고 인간대우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많은 개혁을 이루어냈다. 19세기 산업사회에서 노동자 계층의 권익을 위하고 정부와 고용주들의 개혁을 목적으로 일어난 노동자들의 운동으로서 광부들과 산업노동자들의 ‘노동조합운동’(The Trade Union Movement), ‘임금개혁을 위한 단결운동’, ‘동무들의 모임’(Friendly Society), ‘절제회’(Temperance Society), 성인교육운동의 회원과 지도자들이 대부분 감리교인들이었고 그 중심도 지역 감리교회들이었다. 감리교회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양심과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친근한 통로였다. 특별히 노동조합(Trade Union)의 중요한 지도자들은 거의 다 감리교인들이었다. 19세기 감리교회의 여러 가지 사회운동들은 영국에서 ‘노동당’(Labour Party)의 형성과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감리교회는 더이상 가난한 노동자들만의 교회가 아니라 중산층의 교회 모습을 띠기 시작했고, 감리교 평신도 지도자들은 엘리트 그룹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것은 의도적인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사회 엘리트 계층이 감리교에 들어오기도 했지만 감리교인들이 중산층이나 엘리트로 성장하기도 한 것이다. 20세기 초반부터 각 지방이나 도시 중심에 있는 감리교중앙회관(Methodist Central Hall)들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의 센터가 아닌 중산층 보통사람들의 회관이 되었다. 이때 큰 도시의 감리교중앙회관들이 중산층을 위한 감리교 대성당(Methodist Cathedral)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감리교의 사회도덕 개혁운동은 분명히 영국역사에 기념할 만한 대표적인 사회적 공헌임에 틀림없었다.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감리교의 사회정치적 사상과 활동은 점점 존 웨슬리적 보수주의에서 진보주의적으로 변화해 갔다. 1884년에 설립된 웨슬리안 사회순결위원회(Wesleyan Committee for Social Purity)는 당시 영국사회의 “비국교도의 양심”을 대변하였다. 이 당시 감리교 지도자 Hugh Price Hughes는 1889년에 ≪사회적 기독교≫란 책에서 “우리의 책임은 종교를 사회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이다. 교회 밖의 모든 사회적 삶을 성화시키는 것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똑같은 신(神)의 위임된 일이다. 그리스도는 개인을 사회 속에서 구원하러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의 본질은 인간사회를 정의와 사랑의 기초 위에 재건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감리교의 선교를 사회선교에 집중시키고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리교회의 사회운동은 본래의 비국교도 교회의 복음적 경건주의의 열매인 사회도덕 개혁과 박애운동으로서 가장 위대했었다. 당시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거나 계급사회를 개혁하는 데는 아직도 너무 보수적이었으며 미약하지만 적어도 비국교도의 양심을 대표했고, 사회도덕 개혁을 점진적으로 이뤄나가는 누룩이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은 영국 감리교(British Methodism)가 종파형태(sect type 또는 society type)에서 교회형태(church type)로 변화, 발전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예배와 영성에서 현저한 변화가 있었다. 19세기 초부터 나타났던 감리교 예배당에서 국교회의 예배서(The Anglican Liturgy)나 웨슬리의 축약된 주일예배서(Wesley's Sunday Service)를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과 갈등이 19세기 중반에 와서는 교회 분열을 초래하기까지 심화되었다. 벌써 1840년대에 와서 웨슬리가 축약한 주일예배서를 대부분의 웨슬리안 감리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도록 총회로부터 강요받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감리교인들은 이러한 움직임과 변화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예배서 사용이 늘 국교회(Anglicanism)에로의 복귀라고 주장했다. 어떤 목사들은 예배서의 사용과 자유기도를 적절히 병행하기도 했으나, 감리교 지도자들 특히 당시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요 의장이었던 리차드 왓슨은 예배서의 사용을 강력히 옹호하고 순전히 자유로운 즉흥기도의 사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또 반대자들로부터 “예배서에 의한 예배와 자유로운 즉흥기도를 병행하여 예배에서 전통과 자유 즉 영적 자율성의 조화를 강조한 존 웨슬리의 생각에 대한 배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감리교회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주로 고교회(High Church)적 성향을 가진 신학자들과 중산층 이상의 교인이었으므로, 이들의 힘에 의해서 점점 더 감리교 예배서(Methodist Liturgy)를 애용하는 감리교회 주일예배가 정착되어갔고, 가난한 감리교인들의 소박한 예배를 존중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감리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유롭게 표현하는 영적으로 단순하고 자유로운 예배가 점점 힘을 잃게 되었으며, 예배에 있어서 감리교의 특징이 상실되고 고교회(High Church)의 주일예배를 따라가려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들어와서 여러 번 웨슬리의 축약한 주일예배서를 수정하였고,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정상적인 감리교 예배의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북부산업지대와 콘월의 광산지역에 있던 소수의 감리교회는 20세기 전반까지 18세기 감리교의 전통적인 예배를 실행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속회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감리교인 소속의 기준을 속회참여로 할 것인가? 단순히 주일예배 참여로 할 것인가? 하는 토론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 토론의 결과는 보통 교회처럼 주일예배 참여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동시에 속회가 그 정통성과 권위에 있어 약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18세기 수도원적 개인의 성결을 추구하던 감리회(Society)의 영성생활의 핵심인 속회가 점점 친교(fellowship)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인기를 잃어가고 소홀히 취급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통적 속회방식에 대해서도 문제점들이 제기되었다. 지도자들의 결점, 지루함, 공개적인 고백의 어려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의 어려움 등 현실적 문제들이 생기면서 도시교회에서부터 속회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후까지 속회를 계속한 지역은 주로 북부산업지대와 서남부 해안가의 교회들이었다. 1900년대 전후의 감리교회는 본래적 감리교 영성생활의 이상과 규율이 약화되어 보통 다른 교회들과 같아지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전통적 감리교 영성(Original Methodist Tradition)을 주장하는 보수주의적 복음주의 감리교인들은 속회를 보호하는 운동을 벌이며 이에 관한 책들을 써냈고, 18세기 영성생활을 근대적으로 번역하여 보려는 운동들을 일으켰다. 그 중 하나가 케즈윅 사경회(Keswick Convention)이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의한 순간적(Instantaneous Sanctification) 완전성화, 즉 두 번째 축복(Second Blessing)을 강조하는 소수의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 그룹이 계속 남아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1932년 이후에는 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케즈윅 사경회는 완전성결을 추구하는 18세기 감리교 영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점점 성서와 전통신앙에 회의를 갖고 경건을 거부하는 현대인에게 복음전도를 강조하고 경건생활을 격려하는 초교파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으로 변모해 갔다. 

 

         1930년대 이후로는 감리교의 독특한 영성생활을 대표하던 속회와 계약예배와 철야기도회(Watch Night Service)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애찬회(love feast)는 20세기 이전에 쇠퇴하였다. 학자들의 말대로 감리교는 18세기 산업사회의 산물이었고, 그 시대에 가장 적절하고 큰 공헌을 하였으며, 20세기 이후에는 다른 교회처럼 기독교 후기 사회에 참여하는 교회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5. 하나의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탄생(1850~1932)

          지금까지 영국 감리교회는 갈등과 분열이 잦았으나 1850년 이후부터는 통합의 역사가 전개된다. 번팅의 의장 선출에 반대하여 분리해 나간 약 10만 신도의 “Wesleyan Reformers”는 “Wesleyan Methodist Association”과 “Protestant Methodists”, 그리고 “Derby Faith Methodist”와 통합하여 1857년 연합총회를 열어 “Wesleyan Methodist Free Church”를 탄생시켰다.

 

        실로 19세기 후반기는 미국과 캐나다와 아일랜드 그리고 호주에서 감리교회들이 통합하는 움직임이 활발했고 드디어 하나의 연합감리교회들이 탄생하게 되는 시대였다. 바로 이때를 맞추어 영국에서도 감리교회를 통합하는 시기로 들어섰다. 1907년에 “United Methodist Free Church”와 “Methodist New Connexion”, 그리고 “Bible Christians”이 통합하여 United Methodist Church가 탄생하였다. 

 

         이 교회는 모 교회인 “Wesleyan Methodist Church”와 “Primitive Methodist Church”와 함께 대표적인 세 교회로 등장하였다. 이후 이 세 교회는 통합의 노력을 계속하여 드디어 1932년 연합총회(The Uniting Conference)를 열고 하나의 감리교회(Methodist Church)를 탄생시켰다. 이때 “Independent Methodists”와 “Wesleyan Reform Union” 두 교회와 그 외의 아주 작은 감리회 분파들을 빼고는 모두가 통합에 참여하였다. 통합 당시의 교세는 United Methodist Church가 20만 신도, Primitive Methodist Church가 22만 신도, Wesleyan Methodist Church가 52만 신도로 총 94만 명의 신도였으며 안수목사가 2,510명, 평신도 설교자가 2만 명이었다. 이때 통합에 들어오지 않은 소수파 감리교회를 합하면, 당시의 영국 내 감리교인은 약 1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연합된 감리교회의 첫 총회는 런던의 Royal Albert Hall에서 개최되었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리교의 축제 대회가 되었다. 이때가 영국 감리교회의 교세가 가장 강하고 활발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명실공히 영국 내의 모든 독립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로서 위상을 한껏 높였던 때이다. 통합된 감리교회 신앙의 힘은 존 웨슬리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거대한 감리교중앙회관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국교회의 대표적 교회인 Westminster  Abbey 정면에 세워졌는데, 영국에서 가장 큰 독립교회인 감리교회의 상징적 위치를 내세우려는 의지가 돋보이는 것이다. 감리교중앙회관 안에는 건립부터 하나의 중앙회관 감리교회(A Central Hall Methodist Church)가 있었는데, 1950년까지만 해도 약 3,000명이 모이는 큰 교회였다. 그러나 현재는 약 1,000명 정도 모이는 교회로서 아직도 영국 감리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독립교회들의 대표 역할을 하고 있다. 

 

          6. 1932년 이후 에큐메니컬 시대의 감리교회

        감리교회는 통합하던 1932년에 가장 큰 힘을 스스로 느끼며 큰 축제를 가졌다. 그러나 그 감격은 곧 사라지고 옛날의 위대한 선교정신은 약화되고 해마다 교인수가 감소하는 위기를 의식하게 되었다. 서로 분열되어 있을 때는 경쟁적인 의식도 작용하였고, 또한 국교회의 핍박에 대한 응전적 태세도 갖고 있어서 초기 웨슬리안 복음전도와 부흥을 성공적으로 이뤄갈 수 있었으나, 통합한 후부터는 긴장이 풀렸고 열심을 잃기 시작하였다. 특히 제2차 대전 이후에는 급격히 감소하여 현재는 약 40만 교인밖에 남지 않았고 많은 아름다운 감리교 채플(Chapel)들은 텅 비어가거나 소수의 노인들만 지키는 곳이 많아지게 되었다. 

 

         감리교회는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두 가지 면에서 위기를 느꼈다. 하나는 교인수의 급격한 감소와 교세약화이다. 또 하나는 감리교의 정체성 문제이다. 감리교회 신앙과 교리가 영국 국교회와 무엇이 다르며, 무엇이 달라야 하느냐?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에큐메니컬적 관심이 커지면서 감리교회 안에서 많은 대화와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때 공헌한 감리교 신학자들은 Gordon Rupp, Rupert Davies, Raymond George, John Newton, Gordon Wakefield 등이다. 대부분의 감리교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존 웨슬리의 고교회주의 정신을 상기시키면서 감리교의 독특한 사명은 18세기에 다 끝났고 이 시대에는 독립해야 할 근본적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감리교 신학교에서는 감리교의 특징적 전통은 거의 강조하지 않았고, 에큐메니컬 신학을 강화하면서 예배서와 성례전 교육을 강화하였다. 또한 감리교회 예배는 점점 국교회와 별차이가 없는 것으로 되어갔고, 거의 감리교 특징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성령의 은사운동이나 복음주의적 성향의 신자들과 가난한 노동계급의 사람들(working class people)은 모두 침례교회나 오순절교회나 홀리네스교회 같은 곳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감리교회는 옛날의 뜨거운 복음주의 교회의 전통을 쉽게 상실하고서 마치 국교회의 고교회(High Church)가 된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국의 독립교회들은 국교회와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들은 장로교회(Reformed Church), 침례교회, 회중교회, 그리고 감리교회들이다. 이들은 모두 국교회의 교리와 제도와 예배형태를 수용하는 것으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의 반대로 독립교회들은 거절당하고 말았다. 

 

감리교회는 1952년부터 통합을 추진하여 드디어 1969년 7월에 찬, 반 투표를 했는데 감리교는 78% 찬성, 국교회는 69% 찬성이었다. 그러나 통과표 75%에 미달되어 실패하였다. 1972년에 다시 시도한 결과 또 75%에 미달하여 실패하였다. 이때 평신도들의 대부분이 찬성했으나 국교회의 많은 감독들이 반대하였던 것이며, 반대의 중요한 이유는 모든 감리교회 목사들의 성직 안수를 인정할 수 없으니 모두 다시 국교회 감독에게 안수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은퇴한 목사들도 다시 안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감리교회는 크게 실망했고 더욱 교세가 약화되고 정체성의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현재는 다시 통합을 위한 대화 재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통합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의 영국 감리교회는 감리교 본래의 특징이 거의 사라졌고, 옛날의 뜨거운 복음적 열정이나 영적인 관심이 거의 없다. 소수의 감리교 복음주의자들이 북쪽에 있기는 하지만 너무 미약하다. 이렇게 감리교회의 교인수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교세가 약화된 원인은 물론 시대적이고 사회문화적 영향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원인은 감리교회 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감리교회 지도층이 너무 쉽게 또 빨리 진보주의 일변도로 감리교회를 이끌고 간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감리교회의 본래 전통을 너무 쉽게 버린 것이 문제였다. 웨슬리의 고교회 정신에 쉽게 기울어지면서 웨슬리의 뜨거운 복음전도정신과 복음적 사랑의 열정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감리교 신학도 계시와 경험 중심에서 이성적 이해 중심으로 이동했으며, 감리교 메시지도 그 핵심적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값 없이 주시는 은혜’(free grace)에 대한 웨슬리안의 복음주의적 강조를 거의 다 상실했다.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낙관주의 사이의 균형에서 떠나 점점 후자 쪽으로 기울어가면서 웨슬리적 조화와 균형을 상실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배에서도 자유롭고 단순한 형태의 기도를 너무 쉽게 국교회식 리터지로 바꾸고 일방적으로 사용한 것이 큰 문제였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감리교의 목회제도의 문제이다. 현재의 감리교 제도는 18세기 방식 그대로이다. 특히 순회 설교제도는 현대에 있어서는 매우 적절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본래 18세기 감리교를 일으키고 교회와 사회개혁의 중심이었던 가난한 노동자 계급의 보통사람들(working class)을 버리고 중산층 내지는 부유층 사람들의 교회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영국 국교도들이 비국교도인 감리교회에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다. 또 감리교회의 선교도 균형을 잃은 모습을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지나치게 사회적, 정치․경제적 관심 일변도로 선교를 추진하고 단순한 보통사람들의 영적인 관심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그런 과정에서 20세기 감리교 사회선교는 하나의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변화하고 말았으며, 사회선교의 원동력이 되는 복음적 신앙과 복음적 사랑이 빠져버린 것이 되고 말았다. 이제 영국 감리교회에는 사회적 관심(Social Concern)과 세계관심(World Concern)만 남은 것같이 보인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웨슬리안 복음주의의 균형과 조화를 잃었다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대단히 불행한 것이다.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영적인 관심과 복음적 배려(Evangelical Concern) 없이는 개인구원만 아니라 사회구원도 극히 어려운 것이다. 교인이 떠나가 버리고 텅빈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으며, 영적인 힘이 없고 사랑의 열심이 없는 신자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현재 영국 감리교회의 소망은 국교회와의 통합뿐인 것 같다. 그러나 통합이 되든지 안되든지 사는 길이 하나 있다. 그 길은 성서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읽고, 신앙을 재건축하고, 감리교회 처음으로 돌아가서 감리교의 신학과 예배와 선교를 전체로 반성하고, 다시 존 웨슬리 같은 신앙체험과 뜨거운 복음적 사랑을 가지면, 하나님이 영국 감리교회를 다시 그분의 도구로 쓰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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