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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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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8 22:58 조회1,8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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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복음 이해  / (홍철종 서울신대교수)

 

Ⅰ. 놀라운 은총(amazing grace)

주후 1738년 5월 24일 저녁 9시 15분 전쯤,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였다. 영국 국교회의 사제이며, 동시에 신학교 교수와 선교사를 역임하였던 웨슬리는 그 날 밤 북(北) 런던에 있는 얼더스게이트(Aldersgate)라는 좁은 거리의 어느 작은 신도회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다. 이 삼십 오세 된 옥스포드(Oxford) 학자는 어느 평신도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떠듬거리며 읽고 있는 동안, 갑자기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 확신을 이렇게 그의 일기에 고백하였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만을 정말 신뢰한다고 느꼈다.

 

이 확신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적극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지 않았다. 웨슬리는 오랫동안 죄책(罪責)으로 마음 고생을 하였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결심해도 웨슬리는 자신의 죄 문제, 특히 불신이라는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죄의 용서라는 소극적인 확신도 못지않게 중요하였다. 이 확신에 대하여 웨슬리는 같은 일기에서 확실히 고백한 바 있었다: "그분이 나의 죄들을, 나의 죄들까지도 지고 가셨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결국 요한 웨슬리가 경험한 구원의 확신은 이중적(二重的)이었다. 한편으로는 소극적으로 죄의 용서였고, 또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이 이중적인 경험을 토대로 그의 전도 사역과 신학을 전개(展開)하였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죄와 그리스도라는 언뜻 보기에 상충(相沖)되는 두 개념을 염두(念頭)에 두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비록 웨슬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기 이전에도 "마음의 할례"라는 제목의 복음적 설교를 한 바 있었지만, 그가 근본적으로 "죄"와 "그리스도"를 선포하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은 얼더스게이트의 복음적 회심 이후부터였다. 고질적(痼疾的)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 아니라, 그때까지 지식적으로 동의하며 의지적으로 추구하던 그리스도를 실천적으로 의지하게 된 것은 결단코 웨슬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은총이었다. 그 은총으로 말미암아 웨슬리는 완전히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웨슬리는 평생에 그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웨슬리의 전도 이해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통의 이해라고 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Ⅱ. 선행 은총(prevenient grace)

요한 웨슬리는 복음이 선행 은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면서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구원은 흔히 (그리고 적절하게) 선행 은총이라고 불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최초의 욕구, 하나님의 뜻에 관한 최초의 여명(黎明),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범죄하였다는 희미하지만 순간적인 최초의 책망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모두 생명을 향한 다소의 추세(趨勢); 어느 정도의 구원;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아주 무감각한, 눈도 멀고 느낌도 없는 마음으로부터 해방의 시작을 함축한다. 구원은 책망의 은총(convincing grace) - 성경에서는 흔히 회개라고 불린다 - 으로 이어지는데, 그 은총을 통하여 더 많은 양(量)의 자기 지식과 굳은 마음으로부터 더 큰 해방을 경험한다. 그 후 우리는 적절한 기독교적 구원을 경험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 구원은 두 개의 큰 가지, 곧 의인(義認)과 성결로 구성된다.

 

선행 은총은 문자 그대로 앞서 가는 은총이다.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경험하기 이전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은총을 베푸신다. 인간의 모든 선행, 업적 및 미덕(美德)은 바로 미리 가서 능력주시는 하나님의 선행 은총 때문이다.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성만찬, 유아 세례 및 야외 설교 등을 통하여 인간들을 부르시며, 그리할 때 이런 것들은 선행 은총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선행 은총은 이들 뿐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당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에게 비추시는 모든 빛'… 성령이 시시 때때로 모든 자녀 안에서 역사 하시는 모든 책망도 역시 선행 은총이다.

 

그러면 선행 은총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복음을 듣고 바로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의 은총을 경험할 수 없단 말인가? 만일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여 최초로 범죄하자. 그들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이 죽음이야말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죽음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전달되어 그들도 역시 죽게 된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그의 설교, "신생"(新生)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리고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죽었는데, 모든 인류와 그 당시 아담의 허리에 있던 모든 인간의 자녀들도 죽었다. 당연히 그 결과는, 그로부터 나온 모든 사람이 세상에 올 때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상태에서, 죄 중에서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태어난다; 하나님의 생명도 전혀 없이, 하나님의 형상 곧 아담이 창조될 때 있었던 의(義)와 거룩도 전혀 없이.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은 기쁨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대신, 자신의 행동거지(行動擧止)를 위하여 자신을 의지할 뿐 아니라 자신이 바로 잣대가 된다. 이 불순종이라는 원죄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며, 그 결과는 교만과 자기 우상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완전 배교(背敎)이며 우주적 부패(腐敗)이다." 웨슬리는 이런 인간의 모습을 완전 타락(total depravity)과 부패(corruption)라는 용어로 묘사하였다.

 

하나님 밖에서 완전히 타락한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은 죄책 뿐이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다. 오히려 그분의 정죄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킬 수 없는 절대 무능(無能)의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가망 없고(hopeless) 무기력한(helpless)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긍휼을 베푸시고 역사 하시기 시작하였던 바, 그것이 바로 선행 은총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선행 은총이 죄인을 위하여 역사하는 수단도 각양각색(各樣各色)이다. 그러나 동시에 선행 은총은 죄로 부패한 인간을 부분적으로 회복시키며, 그러한 회복을 통하여 인간은 비록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구원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반응을 보일 수 있게 된다.

 

첫 번째 기능 회복은 부분적이긴 하나 우리의 이해력이다. 요한 웨슬리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제시하였는데, 우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의 회복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존재와 자연, 그리고 장래의 상급/심판의 가능성 등에 대한 지식이다. 그 다음은 양심의 기준에 근거하여 도덕적 선과 악의 차이를 기본적으로 분별(分別)할 수 있는 기능이다.

 

두 번째의 부분적 기능 회복은 자유이다. 은혜이긴 하나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 인식에 대하여 어떤 방법으로든지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선행 은총을 통하여 최소한의 자유가 우주적으로 회복된 것이다.

 

세 번째, 원죄로 인한 타락에서 회복되어야할 인간의 기능은 의지이다. 웨슬리는 의지의 회복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분야라고 한결같이 주장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이 먼저 죄인을 위하여 선행은총으로 지식, 자유 및 의지를 부분적으로나마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에 그는 회복된 기능을 가지고 반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그 선행 은총의 부름을 무시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 반항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그 은총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 그는 더 깊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Ⅲ. 중생의 은총(regenerating grace)

죄인이 선행 은총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하나님은 그에게 더 깊은 은총으로 인도하시는데(leading grace), 그것이 바로 책망의 은총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이 책망의 은총은 구원의 관문이기도 한 회개이다. 요한 웨슬리는 "하늘 나라로 가는 길"(The Way to the Kingdom)이라는 설교에서 회개를 죄성과 심판의 인식이요 동시에 마음의 아픔이라고 설파(說破)하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여러분 영혼의 모든 힘과 기능에서 타락된 것을, 그리고 여러분이 모든 면에서 완전히 타락되었기에 모든 기초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뿐만 아니요. 여러분은 '죄의 삯이 사망' - 현재적인 사망과 영원한 사망 - 이라는 것도 알아야 하오. '범죄하는 영혼은 죽을찌라'… 그 영혼은 둘째 사망을 당해야 하오. '이것은 하나님의 존전(尊前)과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끝없는 죽음과 심판이요… 모든 죄인은… 이미 지옥 불이라는 언도(言渡)를 받은 상태로 질질 끌려가다가 마침내는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오… 그것은 여러분 안팎에 있는 악에 대한 공의로운 보상이요… 그뿐 아니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이 여러분 위에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을 망각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순종한 자들에게 언제라도 쏟을 불같은 진노와 저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으로 두려워해야 되오…

이처럼 죄인이 죄와 심판에 대한 인식과 두려움 때문에 마음의 변화를 통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그는 구원을 경험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한 단계를 밟아야 한다. 그 단계가 바로 믿음이다. 그러면 회개의 믿음은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웨슬리는 그의 설교 "구원의 성경적 방법"(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에서 회개와 믿음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회개와 그 열매가 원격적(遠隔的)으로 그리고 믿음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믿음은 의인(義認)을 위하여 인접적(隣接的)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필요하다. 믿음이… 의인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이 믿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까닭에 어떤 사람도 믿음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쟁취(爭取)할 수 없다. 믿음은 우선, 하나님이 큰 긍휼과 은총으로 주신 것이다. 그 다음, 그리스도가 몸을 드리고 피를 흘려서 하나님의 공의(公儀)를 충족시키셨다. 그럼으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功績)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나오는 신뢰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호의"(好意)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경건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멸망에만 합당한 사람들에게… 그러나 '죄인인 나에게 긍휼을 베풀기'를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값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요한 웨슬리는 믿음을 주관적인 경험과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는 그의 설교, "신생의 표지들"(The Marks of the New Birth)에서 믿음의 주관적인 경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참되고 살아 있는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탄생된 것으로, 동의 - 이해의 행위 - 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마음 안에서 역사 하시는 기질(氣質)이다." 웨슬리에 따르면, 이 주관적 경험은 육체에 대한 모든 신뢰와 의의 모든 행위를 포기하며, 동시에 무기력하고 정죄받은 비참한 죄인으로서 그 해결책을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仲保)를 의지하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믿음의 다른 면, 곧 믿음의 객관적인 대상은 더욱 중요하다. 그는 그의 설교, "믿음에 의한 구원"(Salvation by Faith)에서 구원받는 믿음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이 믿음의 적절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이방인들의 믿음과는 충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구분된다." 요한 웨슬리에 의하면, 이신득의(以信得義), 곧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하심을 받는 이 경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要因)이 필요했다:

 

나는 우리의 의인에서 세 가지가 함께 가야한다고 믿는다; 하나님 편에서, 그의 큰 긍휼과 은총; 그리스도 편에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의 육체를 제공하시고, 그의 보혈을 흘리셨다; 우리 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業績)들에 대한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

 

이상의 세 가지 요인 중에서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면, 그분은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두 가지 역사를 이루셨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죄인들을 위한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피를 쏟으면서 죽으신 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들의 심판을 대신 짊어진 대속적(代贖的) 죽음이었다.

 

그러나 이 이신득의는 결단코 하나님이 죄를 간과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어떠한 죄에 대해서도 진노(震怒)와 심판을 가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屬性)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가? 그것은 화목제물(和睦祭物)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였다. 그 피를 통하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적(二重的) 사역 - 대속과 화목제물 - 을 통하여 죄인들도 믿기만 하면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의인(義認)의 은총인 것이다.

 

죄인이 의롭다하심을 받는 순간 그는 동시에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을 성경은 "거듭난다," "중생한다" 등으로 표현한다(요 3:3, 5; 딛 3:5). 의인과 중생이 동시적이면서 동시에 불가분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특성은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요한 웨슬리는 그들의 차이를 그의 설교,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의 큰 특권"(The Great Privilege of Those That Are Born of God)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의인은 개관적인 변화를, 신생은 실제적 변화를 함축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이루신다;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면서 우리 안에서 역사를 이루신다. 전자(前者)는 하나님과의 외적 관계를 변화시키어, 그 결과 원수들이 자녀가 된다; 후자(後者)는 우리의 내적 영혼이 변화되어, 그 결과 죄인들이 성자가 된다. 전자를 우리를 하나님의 호의로, 그리고 후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각각 회복시킨다. 전자는 죄책을 제거하며, 후자는 죄의 능력을 제거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시간에 관한 한 동시에 일어나나, 특성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다르다.

 

의인과 중생이 동시적이지만, 요한 웨슬리는 신학적/논리적으로 의인을 중생보다 앞세웠다. 만일 중생이 의인보다 앞선다면,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 곧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들만이 의인의 믿음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인간의 적극적 반응을 중시하였다.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관계의 회복을 인간이 의지적으로 수용할 때, 그는 이신득의를 깨닫고 법적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 그리고 용서받은 깨끗해진 사람들의 생애 속으로 성령이 내주(內住)하시어 중생의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중생의 은총은 어떤 의미에서 책망의 은총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성령이 구체적으로 역사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그 성령은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용서되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주신다.

 

물론 이 확신은 구원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는 회심을 경험한 순간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확신은 그에게 "사랑, 기쁨, 평강, 오래 참음, 온유, 양선"으로 채워주었다고 그의 설교, "성령의 증거, Ⅱ"에서 고백하였다.

 

Ⅳ. 성결의 은총(sanctifying grace)

요한 웨슬리는 마침내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중생의 은총을 경험하였다. 이 은총, 곧 복음적 회심으로 인하여 그의 생애와 사역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의 생애는 그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쳐졌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영혼의 구원을 위하는 일에 우선권을 부여하였다. 그가 설교를 하든, 소규모의 그룹운동을 전개하든, 평신도를 활성화하든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영혼의 구원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복음의 전파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고백은 진정한 삶의 변화를 수반(隨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진정한 삶의 변화는 성결의 삶이었다. 결국, 웨슬리에게 최종 목표는 중생 그 자체가 아니라 성결이었다.

 

그러면 왜 웨슬리는 "성경적 성결을 그 땅에 전파하려고" 노력하였는가? 첫째, 성결은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히브리서 12장 14절의 말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를 주석하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모든 성결을 따르지 않으면 각종의 죄에 빠지는 지름길이 된다." 웨슬리는 이 교리가 성경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성 바울의 교리, 성 야고보의 교리, 성 베드로와 성 요한의 교리입니다; 그리고 순수하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의 교리이지 웨슬리의 교리가 아닙니다. 나는 가장 알아듣기 쉬운 말로 내가 그것을 어디에서 그리고 언제 발견했는지를 당신에게 말하겠소.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구약과 신약에서 발견했소…

 

웨슬리가 성결을 강조한 둘째 이유는 신자들 안에 남아 있는 죄 때문이었다. 그는 신자들이 중생의 경험을 하는 순간 모든 죄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성령이 그들의 삶 속에 내주하신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이 여전히 죄를 범할 수 있는 죄성(罪性)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는 바울의 주장,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갈 5:17)를 인용하면서 신자들 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체, 곧 악한 성품이 신자들 안에 있는 성령도 대적합니다; 중생한 사람들 안에도 '서로 대적하는'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웨슬리는 이 두 가지 원리를 "신자들 안에 있는 죄"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확대해서 설명하였다:

 

진실로 이 중요한 사실, 신자들 안에 있는 두 상충적 원리들 - 자연과 은혜, 육체와 성령 - 이 바울 서신 전체에서, 아니, 성경 전체에서 나타납니다; 성경의 거의 모든 지시와 권면이 이 명제(命題) 위에서 발견됩니다; 성경의 저자들조차 신자라고 시인한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못된 성질과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믿음의 능력으로 이것들과 싸우고 정복해야 된다는 권면을 계속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중생한 신자들이 그들을 시시때때로 엄습해 오는 유혹과 죄들을 정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회개이다. 물론 이 회개는 불신자가 거듭나기 위하여 거쳐야 되는 회개와는 다르다. 신자의 회개는 이미 내주하신 성령의 역사로 신자들 마음 안에 잔재(殘在)하는 죄들, 겉으로 들어난 죄들, 죄책감의 문제, 절대적 무기력증의 문제 등에 대한 자각(自覺)과 아픔이다.

 

요한 웨슬리가 성결을 강조한 셋째 이유는 전도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전도사역과 성결의 경험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특히 성결의 경험이 강조되지 않으면 전도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약화(弱化)되었다. 그가 1765년에 브리스톨(Bristol)을 방문하면서 신자들의 수가 그 전해보다 줄어든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후 이틀 동안 내가 브리스톨에 있는 모임을 살펴보니 놀라웁게도 작년 시월 내가 그곳으르 떠난 때보다 오십 명이나 줄어든 것을 발견하였다. 한가지 이유는 기독자 완전이 별로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전해지지 않는 곳에서는 설교자들이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하더라도 숫자나 청중의 은혜가 별로 증가되지 못할 것이다.

 

알렉산더 보레인(Alexander Boraine)은 웨슬리의 진단에 동의하면서, 전도와 성결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성결의 목적은 전도이며, 전도의 목적은 성결이다! 그뿐이랴, 성결의 설교는 전도의 방편이나 복음의 설교는 모든 사람들이 거룩되게 하기 위함이다."

 

웨슬리가 성결을 강조한 넷째 이유는 신앙 성장을 위해서이다. 사람이 중생의 은총을 경험하면 영적으로 갓 태어난,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가 된다. 그리고 그 어린 아이는 성숙한 신자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가 영적으로 성장해 가면 갈수록 그의 부족과 한계에 대하여 더 예민하여진다. 그가 중생의 은총을 경험할 때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건만 아직도 그를 사로 잡아오는 죄성을 인식하게 된다. 웨슬리는 신자 안에 있는 부족과 갈등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면 할수록… 그 만큼 더 우리의 육신적 마음 안에 있는 적의(敵意)와, 의와 참된 성결로 온전히 새로워져야 될 필요성을 분변(分辨)하게 된다."

 

이 성결의 필요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선행 은총과 중생의 은총에서 역사하신 성령은 이제 신자 안에서 역사를 이루어 성결의 은총을 허락하신다. 실제로 이 성결의 역사는 신자가 중생을 경험하는 순간부터 이미 그 삶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듭날 때 성령이 그 신자 안에 내주하여 실제적인 변화를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령이 그 신자 안에서 계속적으로 역사하여 성결의 은총으로 연결시킨다.

 

그러면 모든 거듭난 신자는 자동적으로 성결의 은총을 경험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는 성결의 필요를 주지(周知)하고 그 은총을 경험하기 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 그 준비가 바로 회개와 믿음이다. 웨슬리는 신자의 회개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회개란 우리의 마음 안에 죄들이 잔재하면서 우리의 언행(言行)을 이배하고 있는 것을… 그리고 모든 성질과 언행에 대하여 심판을 받아야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웨슬리는 "인내"(On Patience)에 대한 설교에서 성결도 중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단순하고 진솔한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무엇을 믿을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하나님이 여러분을 모든 죄에서 구원하고 또 여러분을 거룩으로 충만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으십시요.

 

둘째,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을 속속들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요.

 

셋째, 그가 여러분을 속속들이 구원 - 모든 죄에서 당신을 정결케 하고 또 여러분 모두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구원 - 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원하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요.

 

넷째, 그가 그 역사를 지금 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원하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요. 여러분이 죽을 때가 아니라; 어떤 먼 훗날이 아니라; 내일이 아니라 오늘. 그러면 그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분의 말씀대로 그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게 할 것입니다-

 

Ⅴ. 영화의 은총(glorifying grace)

신자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물인 성결의 은총을 경험하였다고 해서 그가 절대적으로 완전하여 진 것을 아니다. 그는 여전히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며, 실수와 유혹에 빠질 수 있으며, 여전히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성결의 은총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적 죄의 제거요, "의와 참된 거룩으로 새롭게 된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 신자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지는가? 그것은 이 썩어질 육체가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될 때이다. 그것이 바로 영화의 은총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요한 웨슬리는 구원의 역사를 결코 중생의 은총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는 중생의 은총이 곧 성결의 은총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성결은 다시 영화의 은총으로 연결되어야 온전한 구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빌립보서 1장 6절의 각주에서 이 세 가지 은총을 다음과 같이 연결하였다: "의롭다하신 분이 여러분을 성결하게 변화시키기 시작하였으며, 그 역사를 영화로 마칠 때까지 계속하실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의 복음은 어떤 한 국면만을 강조하는 복음이 아니었다. 그는 그 당시 팽배(澎湃)해 있던, 이성(理性)만을 강조하는 이신론(理神論)과 달리 성령의 역사와 계시에 근거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적 복음과 달리 선행 은총을 통한 인간의 반응에 호소하는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율법폐기론적인 복음에 도전하면서 성결의 은총을 강조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의 복음은 문자 그대로 온전한 구원, 곧 중생, 성결 및 영화를 한데 묶은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이 온전한 복음을 이렇게 요약한바 있었다: "의인(혹은 중생)과 성결과 영화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이 셋이 온전한 구원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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