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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리의 성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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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8 22:59 조회2,1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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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리의 성화론

 

A. 성화의 신학적 개념

1. 기독자의 완전

“거룩”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santus”로부터 유래한 성화(Sanctification)라는 단어는 많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성령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새 생명이 주어지고, 죄와 죄책의 강압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어 왔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성화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삶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성화란 죄로부터의 완전한 벗어남과 함께 실제로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말하는 단어로써, 웨슬리는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말로써 표현하기도 했다.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말은 여러 신학자들 중 특히 웨슬리나 웨슬리를 따르는 웨슬리안들의 신학사상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개념으로써, 박대복은 이것에 대해 자신의 논문에서 “성화론은 웨슬리 신학의 중심이요, 그의 목회와 설교의 중심 교리였으며, 종교 개혁자들(루터, 칼빈)은 현세에서의 온전한 성화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통해 칭의의 순간적인 경험과 같이 성화의 두 번째 경험이 가능함을 주장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저서에서 기독자의 완전은 의도의 순수성이며, 마음의 할례요,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았다. 사랑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죄적인 모든 것들을 추방하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채워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는 그의 신학의 핵심이다. 웨슬리의 성화의 개념은 두 가지로 정의된다. 그 첫 번째가 죄악으로부터의 성결이며, 두 번째가 사랑이다.

 

오톤 와일리와 폴 컬벗슨은 저서 “웨슬리안 조직신학”에서 기독자의 완전에 대한 교리는 다음과 같은 4가지의 명제로 함축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로 “기독자의 완전”에서 말하는 완전은 율법적인 완전이 아닌, 오히려 복음적인 완전이라는 것이다. 기독자의 완전은 은혜의 완전인데, 그것은 죄가 영혼으로 인해 정화되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성령의 의해서 심령 속에 널리 퍼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자의 완전은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완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에서 본다면 인간은 결코 완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경륜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그것은 죄의 더러움으로부터의 영적인 본성 해방의 최종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다음 세 번째 명제는 기독자의 완전은 유예적이라는 것이다. 완전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윤리적인 법아래 있는 상태이므로 지속적인 조심스러움으로 보호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네 번째로 기독자의 완전은 중재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의 승리가 아니라 예수의 피에 대한 단순한 믿음에 응답하는 가운데 성령에 의해 심령 속에서 수행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2. 성결의 측면으로 본 성화론

 성결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카도쉬(Kadosh)”는 광휘(radiance, brilliance), 성별(separation), 정결(purity)등의 의미를 지니며, 희랍어 “하기오스(hagios)”는 성별(a setting apart), 분리(separation), 헌신, 혹은 정결케 함(cleansing), 정화(purification)등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거룩하게 성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행위의 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 순간에 용서함을 받고, 내적 죄는 성령의 역사로 성결하게 된다고 믿었다. 내적 죄는 죄의 뿌리 혹은 원죄라고 웨슬리는 이해한다. 행위의 죄는 용서받아도 내적 죄는 남아있는데, 이 내적 죄는 교만, 자기의지, 분노, 불신앙, 온갖 욕망 등이다.

 

웨슬리는 인간이 완전의 은혜로 성화를 이루게 될 때까지 우리의 내적 죄악을 계속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완전의 은혜는 모든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때의 구원은 단순히 칭의의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완전한 영화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부터 인간은 완전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3. 사랑의 측면으로 본 성화론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의 소극적 의미는 성결 혹은 죄 없음이지만, 더 적극적 의미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세상 속으로 찾아가는 성육신적 요소이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내 마음의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완전한 성도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섬기는 자로 오셨듯이 성도도 사회에 사랑으로 참여해야 함을 웨슬리는 강조한다.

웨슬리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랑의 종노릇을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설교 “중요한 질문(The Important Question)”에서는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방문하고, 눈 먼 자에게 눈이 되어주며,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고,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루터는 사랑이란 신앙의 나무에서 저절로 맺히는 열매라고 보지만, 웨슬리는 사랑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신-인 협조적 응답으로 보았다. 또한 루터는 사랑을 주어지는 은총(imputed grace)으로 강조한데 반해 웨슬리는 사랑을 주어질 뿐만 아니라 참여하는 은총(imputed and imparted grace)으로 보았다.

 

B. 성경적 근거

 아무리 존 웨슬리가 유명한 신학자이며, 그가 주장한 성화론이 멋진 것이라고 해도, 웨슬리가 한 사람의 신학자인 이상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면, 그의 성화론은 단지 공허한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웨슬리의 성화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성화론의 성경적 근거를 살펴보고, 그 과정을 통해 웨슬리의 성화론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본 논문은 오톤 와일리와 폴 컬벗슨은 저서 “웨슬리안 조직신학”의 내용을 깊이 참고했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1. 성화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a)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성화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살펴봄에 있어서 가장 먼저 이해하기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되길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나감에 있어서 여러 부분에서 이러한 사실에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에베소서 5:17-18의 말씀은 약속된 성령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언급된 성령의 충만함은 사도행전 2:4을 통해 사도들이 받았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함축되는 의미는 사도들이 오순절 이전에 어느 정도 성령을 받았으나, 성령의 완전한 충만을 위해서는 씻음이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데살로니가 전서 4:3-5을 보면, 여기에서 거룩은 몸의 오용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제시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앞서 살펴본 에베소서 5:17-18, 사도행전 2:4, 데살로니가 전서 4:3-5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이 영혼이나 몸의 모든 불결함으로부터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러한 씻음은 히브리서 10:10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인류의 칭의의 근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성화의 매개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b)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성화시키기로 약속했다.

이사야서 1:18절을 살펴보면 우리의 죄는 진홍빛으로 비유된다. 이사야서가 쓰여질 당시 진홍빛은 가장 지우기 어려운 물감중의 하나로써, 그렇게 지우기 어려운 인간의 죄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씻을 수가 있다. 에스겔서 36:25절을 보면 성령의 사역은 여기에서 씻는 행위자로 물의 상징에 의해서 표상되었다. 또한 말라기 3:2-3절에서는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을 위한 위대한 연단자로 묘사되었다. 정화되어야 할 자는 레위자손이며, 이 씻음의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의로움 가운데 제물을 바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마태복음 3:11-12절을 살펴보면, 성령세례는 요한의 세례보다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내적이고 영적인 씻음을 가져온다는 것이 분명하다. 후자인 요한의 세례는 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며, 전자인 성령 세례는 죄의 원리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성화시키고 있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c)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일반적으로 온전한 성화에 적용된 개념들-성결, 완전, 온전한 사랑-을 포함한다. 베드로 전서 1:16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거룩하라고 요구하며, 훈계와 모범으로 그것을 명령한다. 복음적 성결은 단지 유형적이거나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실제적이다. 성결에는 상대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성령에 의해서 내적으로 수행되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 있는 성결은 절대적이며 인간 안에 있는 것은 파생된 것이다.

 

2. 은총의 두 번째 사역으로써 온전한 성화

 로마서 12:1-2절의 권고는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호소는 이미 그분의 사죄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감당하신 희생제사는 죄책과 후천적인 부패성으로부터의 씻음에 의해서 초기의 성화를 얻은 자로서 거룩하게 드려야하는 것이 명백하며, 그것을 드리는 자는 이미 칭의 되어야 하는 것을 받아들일 만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2절의 말씀에서는 신자의 심령 속에 세상적인 것을 향한 경향성 내지 죄를 향한 기울어짐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세상을 따르고자 하는 경향은 그들의 마음의 변형 내지는 갱신에 의해서 제거되어야 하고, 그들은 선하고 기뻐할 만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거나, 경험해야 함이 인정되었다.

 

C. 성화의 단계

 웨슬리의 성화론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완성”과 “점진”이라는 두 가지 기둥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리는 이 세상에서의 성화가 분명히 가능하고 그것은 기독자의 완전으로써 나타난다고 주장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성화의 과정에 있어서 점진적인 요소가 있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성화론에 있어서 “완성”이라는 순간적인 측면에만 너무 집중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점진적 발전에 대한 사상은 그의 구원관이나 성화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완성”과 “점진”의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웨슬리 성화론의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웨슬리가 주장한 완성과 점진의 두 가지 요소를 함께 살펴보지 않으면, 웨슬리의 성화론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이제는 웨슬리가 주장한 성화론의 각 단계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초기성화 (initial sanctification)

웨슬리는 인간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죄사함을 받아 중생될 때부터 성화가 시작된다고 했는데, 이를 초기 성화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칭의와 중생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에 관계적 성화라고도 한다. 이 개념은 물론 웨슬리 이전에도 있었지만, 웨슬리는 그것을 초기성화라는 분명한 용어와 함께 확고한 하나의 개념으로써 정리하였다. 이 중생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로 이루어지는 순간적인 사건이며, 웨슬리는 중생을 성화의 시작이요, 문이라고 말했다. 웨슬리는 중생을 자연인의 출생과도 비슷하다고 비유하였다:

 

모태에 있는 태아는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며, 다른 감각 기능도 불완전하다. 우리는 태아를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가 태어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가 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영적상태와 너무나 비슷하다. 중생하기 전에는 영적인 의미에서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면 모든 것이 변화된다. 이러한 영적 변화가 바로 중생이며,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웨슬리는 이러한 중생의 필요성에 대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보았다. 그 결과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 대신에 마귀의 형상을 본받아 교만과 자기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한 인간은 반드시 중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잃어버린 형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또한 중생이 영원한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중생은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동시에 성화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므로 중생은 사람이 처음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처음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단계는 계속해서 성장과정을 통하여 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생은 성화의 필수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점진적 성화 (gradual sanctification)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순간적이며 동시에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칭의와 중생은 그 자체가 완전 성화는 아니며, 이것은 성화의 시작일 뿐, 완전 성화와 완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성장과 발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점진적인 성장 개념은 순간적인 요소와 결합되어 있다. 그는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인해 순간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단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에 있어서도 웨슬리는 더 높은 성장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회개와 그 열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실은 웨슬리가 중생한 사람도 아직 그 속에 죄악이 남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웨슬리의 주장을 통해 우리는 웨슬리가 온전한 성화를 이루어가는 성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선행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에 의해 순간적 변화와 아울러 점진적 성장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신학이 인간의 책임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긴장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3. 완전 성화 (entire sanctification)

웨슬리의 구원의 전체과정의 목적은 인간을 완전히 성화시키는데 있다. 그에게 성화의 과정은 구원의 과정이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과정은 회개의 믿음에 의한 의인으로서의 중생으로 시작되어,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과정이요, 더 나아가 영화(glorification)에까지 이르는 과정이었다. 웨슬리는 이 구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할 또한 강조했다. 따라서 그의 성화론은 상반된 개념들이 조화를 이루어, 신앙 지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이 강조되는 구원론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완전이라는 개념에 인간이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빠지게 되는 과오와 결함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는 완전성화를 통해 비도덕적인 불완전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는 무지와 과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이라는 개념은 비도덕적인 불완전을 모두 포함시키는 칼빈이나 루터의 절대적인 완전과는 개념이 다른 것이다.

 

신자가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다. 이때 점진적 과정이 중단되고, 한 단계 높은 평면으로 끌어올려 진다. 점진적인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복종이라는 신-인 협동적 요소로 이루어지지만, 완전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이루어진다. 웨슬리는 점진적 성화와 순간적 성화를 구분하였지만, 먼저 성화의 점진적인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완전 성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4. 영화 (glorification)

완전 성화를 체험하여 기독자의 완전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무지, 실수, 육체적 연약성 그리고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패하는 연약한 인간성은 우리 육체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결코 제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그러므로 완전한 자라고 할지라도 계속 은혜 안에서 성장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 최종적인 의인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최종적인 완전(final stsge of perfection) 또는 영화 (glorification)라고 한다. 완전한 성화를 “완전한 자”라고 한다면, 영화는 “완성된 자”라고 할 수 있다. 완전의 최종단계는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된다. 다시 말해서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으로,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병들 몸이 병들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 이 영화의 은총에서 죄로 인한 모든 흔적, 곧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제약성과 허약성, 실수와 무지, 그리고 유혹에서도 해방을 받는다고 해석한다. 물론 무의식적인 죄의 유약성에서도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활의 완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최종단계는 하늘에서, 또는 죽음 후에 오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어느 정도의 완전을 현세에서도 성취할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는 언제나 최종적인 완전은 죽음 후에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영혼의 현재적인 완전과 다음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인간성의 미래적인 완전은 명확히 구별했다. 다시 말해서 첫째는 믿는 자를 마음의 깊은 죄로부터 해방하는 것이고, 둘째로 죄의 모든 악한 결과에서 인간을 해방한다는 것이다.

 

Ⅲ. 실제적 성화의 적용

A. 웨슬리의 성화론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

 이상에서 본 논문은 웨슬리가 주장한 성화론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그와 함께 성경적 성화의 근거와 웨슬리가 주장한 성화의 단계에 대해서 확인하였다. 모두가 익히 알다시피 존 웨슬리는 18세기의 영국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오늘날 21세기의 한국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조금 멀게 느껴지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왜 웨슬리의 성화론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그의 주장이나 사상들을 살펴봐야 하는 것일까? 존 웨슬리의 성화론은 단지 우리에게 조직신학적 연구 가치가 있는 신학적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실제적 삶에 적용해나가야 할 “거룩한 삶”의 문제임과 동시에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희망의 빛을 제시해주는 등불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의 죄를 가볍게 보는 낙관주의가 현대 신학의 일부를 점하고 있는가 하면, 이에 반하여 죄를 너무도 깊이 보는 이들은 비관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러한 비관주의에 빠진 이들이 죄의 진상을 성경에서 확인하는 것은 분명 올바른 일이나, 비관주의에 빠져 구원의 복음이 힘을 잃게 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구원론을 말할 때, 많은 이들은 칭의의 교리에 그치고 만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악한 인간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해결은 없는가?”라고 묻게 되며, “하나님의 은총은 의롭게 하는 데까지만 행동하는 값싼 것인가?”하고 반문하는 사람까지 나오게 된다.

 

웨슬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자신의 성화론을 통해 제시하였다. 웨슬리는 죄의 깊이를 그들 못지않게 깊게 보는 동시에, 더욱 깊은 구속의 은총을 바라봄으로써 신자에게 소망을 안겨 주고 있으며, 이는 바로 값비싼 은총을 재조명한 것이다. 더욱이 그 성화 은총의 역사를 미래의 일로 남겨 놓는 다른 종교 개혁자들에 비하여, 웨슬리는 보다 실존적인 관점에서 현재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본 것이다.

 

또한 이 성화론은 기독교 원리에 근본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성화론을 제거한 윤리나 사회 복음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적 근거를 상실한다. 인본주의적인 윤리에 대체할 근거는 성화론 이외에서는 찾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웨슬리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인간의 무능성에서 보다는 능력에서, 그리고 인간의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이해하고 있으므로, 그의 성화론에 나타난 웨슬리의 신학은 은총의 낙관주의라 할 수 있다. 웨슬리의 강조는 불안한 미래보다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현재 승리자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성화론의 복음이야말로 오늘의 교회 생활에 활력을 주는 원동력인 것이다.

 

B. 성화의 실천방안

 조종남은 자신의 글 “웨슬리 신학의 신학적 공헌과 현대적 의의”에서 웨슬리는 “믿음만으로”와 “거룩한 생활”을 통합시켰다고 말했다. 웨슬리의 신학적 접근의 특징은 그가 성서에 있는 교리를 신학화 함에 있어서 창의적인 종합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웨슬리의 성화론은 칭의로부터 시작되며, 그것은 곧 “오직 믿음”으로 인한 “거룩한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성경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줄거리이다. 루터를 비롯한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서 이 점을 발견했으며, 또한 강조했고, 사람들에게 널리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칭의교리의 강조는 시간이 지나면서, 칭의와 성화를 구분 짓고 더 나아가 성화를 “오직 믿음”에서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신의 성화론에서 “거룩”과 “믿음”을 분명히 통합시켰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과 동시에 거룩한 삶을 강조함으로써 “믿음만으로”와 “거룩한 삶”의 두 면을 은총의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 종합시킨 것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칭의를 받음과 동시에 거듭나는 것이며, 이렇게 거듭난 자는 성결한 생활을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의 강조는 바로 거듭남으로서 시작되는 성결한 삶에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실제적 변화를 의미했으며, 곧 구원은 죄악으로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웨슬리의 완전론의 특징은 믿음에 의한 순간적 체험. 즉 내재적인 죄에서 씻음과 함께 성화의 능력을 받은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물론 앞에서 밝힌바 절대적인 완전이 아니라, 상대적 완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웨슬리가 주장하는 성화론은 거룩한 삶을 이루는 조건이 신자의 회개와 믿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자의 완전, 즉 온전한 성화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웨슬리의 관점은 우리에게 적잖은 사실을 시사해준다. 결국 거룩하게 변화되기 위한 인간의 노력에 앞서서 선재하는 은총이 있으며, 인간은 그 은총을 알고 또한 믿어, 믿음으로 성화의 길을 밟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과 수고를 뛰어넘어, 믿음으로 칭의 되었듯이 성화 또한 믿음으로 성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 칭의의 구원을 받을 때, 인간의 선행과 공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칭의 구원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깨닫고, 마음으로 믿으며, 입으로 시인하는 것 뿐이다. 이것이 웨슬리의 성화론이 인간 안에서 실천되어가는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성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께서 성화를 위해 이루신 일을 깨닫고, 마음으로 믿으며,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Ⅳ. 결론

 성화론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웨슬리에 대한 조직신학적 연구가치 이상으로 오늘날 한국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바 오늘날 한국 교회와 특히 한국 청년, 청소년의 거룩함이 무너지고 있으며, 그와 함께 우리의 실제적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본 논문은 지금까지 웨슬리가 주장한 성화론을 살펴보며, 성경적 근거와 웨슬리가 주장한 성화의 단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기독자의 완전”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 완전에 도달한 거룩함은 내재적인 죄를 처리하는 성결과 세상에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으로써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성화는 초기성화(initial sanctification)로부터 시작되며,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의 칭의 구원과 함께 성화의 첫 걸음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후 우리는 점진적인 과정(gradual sanctification)을 거쳐 점차 거룩한 모습으로써 변화되어 가며, 그 결과로 “기독자의 완전”이라 불리는 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의 단계에까지 도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것은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웨슬리의 성화론을 통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또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성화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므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오직 인간의 믿음으로만” 칭함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의 실제적인 삶속에서 “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본 논문은 실제적인 삶속에서의 문제를 다루고자 노력하며 연구주제를 다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 논문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단지 웨슬리의 성화론이라는 조직 신학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실제적 삶으로 연결되는 신앙적 실천으로 연결되길 바란다. 믿음으로 성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18세기 영국의 한 신학자의 주장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들의 삶의 지표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끝으로 연구과정에서 더 많은 신학자들의 주장과 그들의 책을 참고하지 못한 것에 적잖은 아쉬움을 느끼며, 누군가 이 부분에서 연구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웨슬리의 성화론을 따르는 많은 신학자들의 주장과 그들의 책과 함께 실제적으로 성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현대 신앙인들의 실례에 대해서 함께 연구해주기를 조심스럽게 청해 본다.

 

참고 문헌

BOOK

김홍기 (1993) 『존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대한기독교서회

 이성주 (1988) 『웨슬레 신학』 성광문화사

 한영태 (1999) 『웨슬레의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Cox. L. G. (1989) 『존 웨슬리의 완전론』 도서출판 은성

Lindstrom, H. (1992) 『웨슬리와 성화』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Wesley, J. (1979) 『그리스도인의 완전』 전망사

Wiley, O. (2002) 『웨슬리안 조직신학』 도서출판 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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