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감리교회사 > 믿음과 지혜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믿음과 지혜

한국 감리교회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8 23:19 조회2,506회 댓글0건

본문

韓國 監理敎會略史

 

1. 들어가는 말

 

 이 땅에 감리교가 공식적으로 첫 발을 내딛은 것은 일본에서 일하던 미국(북)감리교회 소속 선교사 맥클레이 박사 (Dr.R.S.Maclay)의 내한이었다.(1884.6.24). 그가 이땅에 와서 “교육과 의료사업”이란 이름으로 하나님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윤허를 고종 황제로부터 얻어내게 되었고(동년.7.3), 이 사건의 배후에는 대미 사절단 일행을 이끌고 대륙횡단을 하던 민영익 단장과 가우쳐 목사(Rev.John F. Goucher)의 결정적 만남(1883년 9월 중순)이 있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하나님의 밝은 빛이 이 땅을 비치기 시작하였는 데. 그 빛의 사역자들은 미국 감리교회가 파송한 아펜젤러 목사(H.G.Apenzeller)일행 5명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 땅을 가장 먼저 밟은 스크랜톤 대부인(Mrs.Mary F. Scranton)은 최초의 여선교사로서,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효시였다.

 

한편 미국의 남감리회도 1895년 10월부터 한국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였다. 이때의 사역자들은 헨드릭스 감독(Bishop E.R.Hendrix)과 중국에서 활동하던 리이드 박사(Dr.C.F.Reid)였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에 오게 됨은 이보다 앞서 상해에서 남감리교인이 된 (1887.4.3) 윤치호씨의 헌신적 노력의 결실이었다. 남감리교회도 여성 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2년후에 캠벨부인(Mrs.Josephin Campbelle)을 파송했다.나아가 한국 기독교 선교는 외국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러 오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숨은 섭리에 의해서 시작되어 있었다. 중국과 일본을 통해 독자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 전도자가 되는가 하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국 선교에 대한 귀중한 기반을 닦아 놓았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감리교회는 1901년 최초의 개신교 목사 두명(김창식, 김기범)을 배출하여 (1955년에는 한국 최초로 그리고 미국 감리교회보다 앞서서 여성목사를 배출하였다.(전밀라.명화용), 한국 교회는 자치 능력을 신속히 키워 나갔다. 그러다가 1930년 12월 2일, 그동안 두 개의 조직으로 분리되어 일해오던 감리교회는 (미국 감리교회의 합동에 앞서)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공식적인 탄생이었다. 이같은 교회 합동을 통해 감리교회는 “모범적인 자유독립의 교회”를 이룩하려 하였다.

 

반면에 구한말의 암울한 운명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해야 했던 감리교회는 자랑스러운 저항과 고난, 수치스러운 침묵과 굴종의 역사를 함께 빚어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혼란을 살아오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조차도 여러차례 분열의 수치와 아픔을 치뤄야 했으나, 하나되고 온전케 하시는 치유자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죄악의 세력을 이기시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치성을 회복해 오셨다. 

 

이제 감리교회는 민족의 수난을 짊어지고 연구하고 가르치며 병고치며 복음 전하고 기도하기에 힘쓰던 감리교회의 통전적 신앙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며, 이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는 부끄러운 일들을 다시는 범치 않으며, 세계의 복음화와 민족통일이라는 지상 과제 수행을 위해 총력을 다 바쳐 헌신해야 할 것이다.

 

2. 한국적 상황 속에서 개신교와 접촉

 

2-1 조선에 처음온 개신교인들

 한국에 처음 온 서양인이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흥미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면, 당연히 한국 교회사에서는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서양 사람의 한국 도래는, 1582년(선조 15년)에 제주도에 표착한 마리이(MaRi-I)였다.

 

그 후 카톨릭 성직자로서 세스페데스(G.Cespedes)가 임진왜란 때 종군신부로 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후 개신교 신자로서 우리나라에 처음 온 사람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1627년(인조 5년) 네델란드 사람 벨테브레(J.J.Welteveree 미국명 John Weltteree)가 일행 두 사람과 함께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전라도 해안에 처음 표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개신교인인지 아닌지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없고, 다만 네델란드가 개신교 국가고, 거의 개신교인들이기에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체포된 후, 후일에 귀화하였고, 1남 1녀를 낳았다. 그가 전도한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벨테브레 다음으로 한국에 온 서양인은 1653년(효종4년)에 제주도에 온 하멜(HendrickHamel)일행이었다. 하멜은 13년 만에 탈출하여  표류기를 썼는데 , 하멜의 책으로 한국이 유럽에 소개 되었고, 그의 표류기 끝에 보면 그가 개신교인임을 입증할 자료가 있다. 그후 1816년(순조16년) 영국군함 올체스트호의 선장 맥스웰과 라이라호의 선장 홀이 서해안 군산만 마량진에 정박했으며 ,이때 마량진 첨사였던 조대복이 한문성경을 받았는데 이것이 한국인으로서는 맨처음 성경을 쥔 사건이었다. 

 

그러나 위의 몇 사람의 개신교인들은 선교와는 전혀 무관하게 단순히 자기들의 어떤 임무를 수행하다가 파선으로, 또는 임무 수행을 위해 한국 땅에 발을 디뎠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저들이 한국에 먼저 왔다는 의미 외에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2-2. 19세기 조선의 상황

19세기는 과학의 발달과 기술의 향상으로 인류의 문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 온 이른바 위대한 세기였다. 19세기의 서구는 산업혁명의 가속화,자본주의 팽창과 새로운 사상들,(다윈의 진화론, 헤겔의 변증법, 콩트의 실증주의등)의 등장,그리고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와 사회주의의 반동작용이 활발했다. 그러나 유독 한국만은 19세기와는 동떨어진 외진 섬처럼 어둠속에 남아 있었다. 

 

영,정조가 통치하던 18세기 후반은 한때 새로운 문화 풍토에 젖기도 했지만, 19세기는 11살의 순조의 등극과 함께 척신들의 세도정치로 암흑시대가 되었다. 순조의 정사를 가로 맡은 김대비와 그의 세력들은 두려움에 대상이었던 실학과 서교를 없앨려고 하였으며 이로 인해 신유박해(1801)가 일어난다. 그러나 천주교는 거듭된 박해속에서도 1830년 경에는 신도수가 1만이나 되었으며, 1831년에는 교황청에서 ‘조선교구’를 설치하고 프랑스인 신부를 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헌종을 대신하여 섭정한 안동 김씨 순조비를 몰아내려고 풍양조씨(헌종의 모후측) 일파는 이지연의 서학 박멸 주장과 함께 기해박해(1839)를 일으킨다.그후 한국인 신부 김대건의 순교(1846)를 전후한 박해도 있었으나 오히려 천주교인은 늘어나서 1860여년에는  선교사 12명에 신도수 2만 3천여명이나 되었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보수적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지배체제 정비를 위하여 일대 개혁을 추진하였고, 서원을 철폐하였으며, 경북궁을 재건하였다. 이때 서양세력은 큰 위협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보수파의 시각으로 서교는 침략세력과 동일시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한국 교회사상 최대의 비극인 병인(1866)대학살 사건이 생긴다.

 

같은해 대동강의 “제너럴 셔먼호 ”가 평양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불탔으며,이일로 미국은 1871년에 극동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으로 하여금 군함5척으로 강화도를 포격하였으나, 별소득 없이 돌아갔다.이것이 신미양요(1871)이다.그러나 명성황후 민비가 국왕의 친정을 주장함으로써 대원군을 추방하고(1873) 개국정책을 쓰게되었다. 완강한 쇄국주의자 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은 곧 운양호 사건을 일으겼다(1875),한일 조약을 통해 문호가 개방된 사실을 알게된 미국도 1878년 미국의회에서 수교를 논의하였고,1882년 제물포에 슈펠트가 입항하여 5월 22일 한.미 조약을 조인하게 된다. 이 조약으로 1883년 4월 7일에 미국 전권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부임하여 서양인 사신으로는 유사이래 처음으로 조선국왕을 알현하였다.

 

2-3. 조선에 처음 온 개신교 성직자들

1) 칼 귀츨라프(Karl.G.F GǛtzlaff. M.D)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프로시아 계 독일인으로 의사이며 목사였던 귀츨라프이다. 그는 1803년 7월 독일 표메라니아에서 태어 났으며,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1826.7.20)를 받았다.동남아 지역 선교사를 거쳐 중국 선교사가 된 그는 내륙 선교뿐만 아니라 1832년에 7월에 서해안 황해도 백령도 근처 섬에 상륙함으로 한국에 오는 첫 선교사로서 기록을 남겼다. 직접적인 선교에는 실패하였으나, 그는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게 하였으며 ,이 섬사람들에게 감자씨를 주면서 그 심는 법과 재배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2) 토마스(Robert J. Thomas)목사의 순교.

귀츨라프 선교사가 다녀간지 13년 뒤에 1865 토마스목사가 왔다.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선교하기 이전에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찾다가 ,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서 이땅에 귀한 피를 뿌린 사람이다. 그는 1840. 9. 영국 웨일즈 지방의 목사의 2남으로 출생하여  에딘버에 있는 뉴우 칼리지(New College)를 졸업했고, 23세때 스코트란드의 하노바 교회에서 선교사가 되려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3.6.4.) 그후 1863. 7. 부인과 함께 중국 상해 도착 (부인 사망).후  북경으로 옮겼고,이때 중국을 출입하는 한국인(상인) 천주교 신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한국에 처음온것은  1865. 9. 한국 천주교인 안내로 황해도 연안에 도착하여 두달반을 머물면서 한국어 배웠고, 육로로 동해 만주 경유 북경 도착한 이후 한국 선교에 꿈을 버리지 않았다. 1866. 7. 29.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제너렐 셔먼호’ 탑승했다가 박춘권의 칼에 맞아 순교했다. 토마스 목사는 품에 품고 온 성경책을 여기 저기에 뿌렸고,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 주었으나 처음에는 받지 않았다. 후에 그가 가지고간 성경책을 읽고 신자가 되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열두살 난 최치량이란 소년도 있었는데 그는 세권의 성경책을 주워 갖고 있다가 두려워 그중 한권을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주었으며 , 그가 성경책을 뜯어 벽지로 발라 쓴 것을 최치량이 후에 그의 집에 갔을 때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후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으며,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가 박영식의 집에 놀러 왔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예수를 믿고 후에 평양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의 조수가 되어,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사람으로 공헌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15년 후에 조선과 미국이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된다.

 

3. 문호개방과 선교적 토양의 마련

 

3-1 성서 번역 사업과 그 열매

 대한성서공회가 창립 104주년을 맞이하고 있다.그모체는 영국성서공회 켄뮤어(Alexander Kenmure, 1856-1910)가  중국을 떠나 한국에 도착한 것이 1895년 10월 18일이었던과 연관이 있다. 영국성서공회 본부가 독립된 한국지부 설립을 의결하는 것은 1896년이다. 외국 성서공회들의 한국인을 위한 성경사업을 이보다 휠씬 전에 만주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1870년대에 들어 만주의 영구,우장,봉천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로스(J,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馬勤泰)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보급하기로 하고, 1877년경부터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는 판편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1879년에는 몇개의 복음서가 번역됨과 동시에 4사람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는 기적이 만주에서 일어났다. 이 기적은 1882년에는 3월에 누가복음이, 5월에는 요한복음이 번역 출판되고 또 두사람의 한국인(김청송,서상윤)이 세레를 받는 열매로 연결되었다. 이때 출판된 누가.요한복음은 일부가 일본의 스코틀랜드 지부로 들어가 83년경부터는 부산과 대구에서 한국인들에게 보급되었고, 만주와 압록강 강변 , 한국에 보급되면서 복음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 오기전(1885년 4월 5일)에 수많은 수세희망자를 배출하는 기현상을 낳았다. 이것은 만주에 들어왔던 영국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역할에 의한 것이다.

 

한편 임오군란에서 민비를 살리는 데에 공헌한 이수정은 1882년 10월 일본유학의 길에 올랐으나 일본인 쯔다(津田仙)의 인도로 그 이등해 4월 ‘야스가와’목사로 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그때부터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의 루미스(H.Loomise)의 도움으로 성경 번역에 착수, 1884년 말에는 한문성경의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이두식 토를 달아 한한(漢韓)성경으로 출판하였고 ,1885년 초에는 마가복음(신약마가젼복음셔언)을 번역, 출판하였다. 이성경은 언더우드.아펜젤러가 일본을 거쳐 제물포로 올때 갖고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최초의 선교사가 입국하기전에 성경이 그 지방의 언어로 번역,출판된 것은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이수정은 외국에서 한국최초로 개신교 신자가 되었으며,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도록 활동했다. 갑신정변이후 한국에 돌아왔으나 정부는 위험인물로 지적하여 비밀리에 처형해 버렸다.성경 번역 사업은 1870-80년대부터 만주에서 로스.매킨타이어를 중심으로 번역되었고, 1887년<예수셩교젼셔>로 마무리 되었다. 

 

3-2 勸書와 賣書 그리고 사경회(査經會)

출판된 성경은 읽혀져야만 했다. 이 복된 책을 도시와 시골의 방방곡곡에 보급하고 구원의 소식을 전한 사람들을 매서(賣暑) 혹은 권서(勸書)라 불렀다. 권서는 선교사나 성서공회의 감독을 받으며 성경을 반포하는 데에 종사하였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한국에서는 성경이 뚫고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교도소와 병원 나환자 수용소, 매춘굴과 도박판, 아편소굴 그리고 궁궐과 가게까지도 들어갔다. 

 

매서인들의 공로는 지대해서 성경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초기에 교회가 세워진것도 권서의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근처에 교회가 없는 산간지방이나 외딴 지역에서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경우, 권서들은 그 지역에 적당하게 모일 장소를 마련하고 모임을 인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자라서 교회로 발전했다.권서들 중에는 뒷날 한국교회 지도자로 등장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남감리회의 경우 1924년까지 목사로 등장한 37명중 15명이 권서출신이었고, 어는 선교사가 받은 편지에도 한국교회 목회자들 중 70-80%가 성서공회 권서에서 출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사실 최봉석 목사나 주남선 같은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선봉자들이 권서출신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초기 선교사업의 ‘최전방’에 서 있던 권서들은 한국 교회사에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헌신했던 선구자들이요 , 한국교회의 창건자들이었다.

 

성경이 보급됨으로 성경공부 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경회(査經會)라는 이름의 모임은 바로 성경공부를 위한 모임이었다. 사경회 운동은 한국교회 부흥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 교회사에서 사경회가 부흥회보다 먼저 있었고 부흥운동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경회의 열성도 대단했다. 1901년 평양의 여성 사경회에는 300리나 떨어진 알록강변의 삭주,창성,지방의 여신도들이 참석했고, 그 이듬해의 ‘사나히 사경회’에 참석한 400여명 중에는 호남의 목포,무안 지방에서 참석한 남신도들도 있었다. 선교사들의 보고에는 어떤 여자는 아이를 엎고 머리에 쌀을 인채 300마일을 왔는데 그의 손에는 ‘때묻고 닳은 ’성경이 쥐어져 있었다고 했다.이것이 한국교회를 창건했던 믿음의 조상들의 자세였다.

 

사경회(査經會)에 대한 최초의 기록된 자료는 1890년 일곱사람이 언더우드의 집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작은 방에 모여 성경을 공부함으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885년 가을 무렵에 이미 아폔젤러가 사경반을 만든 것을 생각한다면, 감리교는 이보다 먼저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93년부터는 모든 교회가 사경회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사경회의 상급반은 교회지도자들을 위한 반이었지만 기초반에서는 농한기에 별로 할 일이 없이 소일하고 있는 교인들을 상대로 일주일에서 두달까지 자유롭게 하였다.

 

4. 미(남북)감리교회의 선교동기 

 

4-1 미(북) 감리교회의 선교동기

1882년 5월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측에서는 1883년 5월 푸트(L.H.Foot)를 주한 전권공사로 파견하였고 그 답례로 한국측에서는 민영익(閔泳翊)을 단장으로한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의  보빙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였는데 민영익 일행은 1883년 7월에 한국을 떠나 9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고, 같은 달 13일에 시카고를 출발, 워싱톤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그때 마침 열차 안에는 미국 북 감리교회의 목사요, 가우쳐 대학 학장인 가우쳐 목사(J.F.Goucher)룰 만나 담화를 나누게 되었다.

 

가우쳐 목사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한국인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고 무엇보다도 기독교 복음에 대한 불타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사잘단과 담화중에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그는 그해 11월 6일 미 감리교회의 선교부에 두 번에 걸쳐 5,000$을 보내면서 한국 선교를 제안하였고, 동시에 1884년 1월 31일에는 일본 주재 미 감리교 선교관리자인 맥클레이(R.S.Maclay) 박사에게 “한국에 찾아가서 그 나라를 실지 답사한후 선교사업에 착수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냈다.맥클레이 박사도 동경과 청산에서 이미 한국 선비들과 유학생들을 전도하며 한국선교의 기회를 노리던 터이라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 선교를 부르짖은 사람은 가우쳐 만이 아니었다. 미국 감리교회 잡지인 ‘The Christian Advocate'지는 수차에 걸쳐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외지 선교본부 기관지인 복음세계(The Gospel All Land)는 일본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 호소문을 실어 주었다. 그와 같은 호소문으로 인해 선교비를 보내오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편지를 받는 맥클레이 박사는 부인을 동반하고, 1884년 6월 24일 감리교 선교사로서는 첫 번째으로 한국 땅을 밟은 영광스러운 선교사가 되었다.

 

장로회의 알렌(H.N.Allen)이 맥클레이 선교사보다 두달 늦은 9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그는 의사 신분으로 왔다가 1887년 선교사를 사퇴한 후 주미 한국 대사관의 서기 또한 주한 미공사관 대리공사로 전향하였다.

 

한국에 온 맥클레이는 일본에서 사귄바 있는 김옥균을 통하여 그해 7월 3일 고종황제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하는 윤허를 받는데 성공하였고, , 7월 8일 일본으로 돌아간 맥클레이는 그 사실을 즉시 미 선교부에 보고하였으며, 미 선교부에서는 아펜젤러 목사부부, 스크랜톤 의사 부부, 스크랜톤 의사의 어머니 스크랜톤 대부인(Mrs.Mary F. Scranton) 등 5섯명을 선택하여 1885년 2월 한국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봄비를 맞으며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 일행은 한국에 첫발을 밟은 감격스런 마음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있다. 이때 미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도 그배에 동승함으로 이땅에 감리교와 장로교가 나란히 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4-2 남감리교회의 선교 동기

 미국 남감리교회에서 한국에 선교함에는 윤치호의 공이 크다. 윤치호는 고종 황제 아래서 판서(장관급)을 지낸 윤웅렬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일본에서 영어를 배운 후 주한 미국 초대공사 푸트(L.H.Foote)의 통역관으로 정계에 진출하였고, 맥클레이가 내한하여 고종 황제로부터 선교 윤허를 얻을 때에도 통역으로 미 감리교의 한국선교에 협력한 분이다.

 

1884년 12월 4일 감신정변의 실패로 김옥균, 박영호, 서광범, 서재필등 개화당 인사들이 망명하게 되자 김옥균을 따르던 윤치호도 상해로 망명, 남감리교 선교회에서 경여하는 중서대학(中西大學;Anglo-Chiness College)에서 공부하던중 1887년 4월 3일 본넬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인으로는 첫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윤치호는 1888년 10월 중서대학을 졸업하는 길로 도미하여 밴더빌드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후 1893년 상해로 귀환하여 중서대학에서 교수로 있었고, 1895년 2월 14일에 고국을 떠난 지 10년만에 귀국하였다. 

 

윤치호는 미국을 떠날 때 자기가 공부한 에모리 대학 총장 캔들러에게 2백불을 맡기면서 한국에도 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 시켜 달라고 청원한 바 있고, 귀국해서도 캔들러 총장과 미국 남감리교회에 한국 선교를 청원하였다. 그러 인하여 미 남감리교회 선교부에서는 1896년 8월 14일 중국에서 선교하던 리드목사(Dr.C.F.Reid)를 한국에 파송하여 지금 한국은행 자리에 있는 가옥을 매입, 선교처로 사용함으로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는 미 북감리회보다 10년 늦게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미북감리회 선교사들은 경성을 중심하고 경기도 남부와 충청남북도, 그리고 해주, 평양, 진남포, 영변등지를 선교지역으로 정하였고, 남감리교회 선교사들은 개성을 본부로 하고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철원과 춘천지역, 그리고 함경도 원산 지역을 담당, 선교사업에 착수하였다.

 

5. 미(북) 감리교의 4대 선교사업

 

5-1 한국에서 효시가 된 교육사업

1885년 4월 5일 한국에 온 아펜젤러 부부는 그해 8월 , 고영필, 이겸나 두학생을 얻어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웠다. 당시 서울에 성균관이 있고 지방에 서당이 있을 뿐 현대식 교육기관은 있지 아니했을때다.배재학당의 당훈(堂訓)은 “욕자인위 당위인역(欲者人爲 當爲人役)”이라 하였다. “너희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될 것이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마20:23-26)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한 유교의 교육정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1887년에는 현대식 당사를 건축하였고, 1889년에는 한,청,미,일 4개국 학생이 모여 공부하였으며, 1895년에는 대학부 4년이었고 대학부에는 영문과와 한문과가 있었다. 李承晩 박사는 최초의 영문과 학생이었다. 같은 해에 정부 위탁학생 2백명을 받아 정부보조로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배재학당에는 1896년에 귀국한 윤치호,서재필 박사에 힘입어 더욱 유력한 기관이 되었다. 배재학당 안에는 1886년에 “협성회”가 조직되었으며, “독립협회‘도 이때 조직되어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독립관 건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독립문 건립 정초식때 아펜젤러의 축사 뿐 아니라 탁사 최병헌 의”독립가“가 배재학당 학도들에 의해 울려퍼지기도 하였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1885년 10월 27일에 19채의 한옥과 6200여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여성사업을 시작하며 학생을 기다렸으나 1886년 5월 30일 여학생 1명을 얻어 이화학당을 시작하였고, 1910년에는 초등부,중등부,대학부를 설치함으로 한국에서는 첫 여학교가 되기도 하였거니와 첫 여자대학이 되기도 하였다. 이화학당의 여성교육기관은 이땅에 여성교육의 효시와 중심이 되었고, 여성전도와 여성민족지도자를 배출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화학당의 대학과는 1925년에 이화대학으로 승격시키고, 1933년도에 신촌 신축교사로 나가 오늘날 이화여자대학을 이루게 하였다.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에 온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9년 고종황제께 학교설립을 청원했다가 거절을 당하였고, 1886년부터 경영해 오던 고아원을 예수교 학당으로 고쳤으나 1897년 폐쇄하였으며 후일 다시 개교를 했으나 운영난으로 1905년에 배재학당과 합동하여 1년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오늘 경신학교가 된 것이다.

 

감리교 한국 선교부에서는 지방으로 선교 사업을 확장해 감에 따라 곳곳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남자학교는 배재(1885)를 비롯하여, 영화(1892년), 광성(1894),공옥(1895),삼일(1903),송도,(1906),숭덕(1906)등이요, 여자학교는 이화(1886),정진(1896),영화(1897),배화(1898),정의(1899),루씨(혹은 누씨)(1903),삼일(1903),호수돈(1904),영명(1905),미리흠(1906),양정(1910)등을 들수 있다.

 

1910년 한일 합방이 되고 일본이 한국에 교육령을 발표하자 배재,이화,배화,송도,호수돈,정의,광성,삼일등 감리교계 학교는 일본 문무성 인가를 받아 실력있는 중학교 또는 고등보통학교를 만들었고, 경신,정신,숭실, 숭의,계성,신성,보성 등 장로교계 학교는 조선 총독부 지정학교라 하여 고등공민학교와 흡사한 중등정도의 학교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5-2. 서민을 위한 의료선교 사업

 미북감리회가 한국에서 교육사업과 같이 시작한 것은 의료사업이다. 1885l년 의료 선교사로 미북감리교회에서 한국으로 파송받은 스크랜톤은 9월 10일 정동에 있는 자신의 주택에 병원을 설립하고 불우한 서민층을 치료해 주자 고종황제가 스크랜톤의 이런 희생적 봉사를 치하하여 시병원(施病院)이라 이름지어 주었다. 시병원에서는 아현동과 상동에 지병원을 세우고 무산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으며 1887년에는 상동병원을 확장하여 서울 남대문 상동병원이라고 하였다. 알렌이 경영하던 국립병원인 제증원(濟衆院) 보다 시설이 더 좋은 병원이었다.

 

1887년 10월 하워드(Miss.Meta.Howard) 여의사의 내한으로 한국 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설립하였고, 홀(Hall)의사는 평양으로 내려가 교회와 학교와 기홀병원(紀忽病院)을 시작하였는데 기홀병원은 1925년 장로교회와 연합하여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만들었다.

 

그밖에도 해주 구세병원(1910), 원주 서미감병원(1912),원산 구세병원(1898),개성 남성병원(1902),해주 구세요양원(1925)을 세웠으며 , 1917년 부터는 장로교회와 함께 세브란스 병원을 운영하여 이 나라 의료사업에 기초를 쌓는 등 많은 공헌을 하였다.

 

5-3. 현대 출판문화를 일으킨 감리교 출판사업

 아펜젤러 목사는 1887년 새로 건축한 배재학당 지하실에 현대식 인쇄소를 설치하고 출판사를 차린후 이름을 三文出版社(The Trilingual Press)라 했으며 상해에서  인쇄기와 구조기를 구입하고 ,1889년 1월 중국에서 선교하던 올링거(F.ohlinger)선교사를 초청하여 운영케 하였고,1894년에는 헐버트(H.B.Helbert) 선교사가 운영하였으며, 1900년에는 명칭을 감리교출판사로 고쳤다. 제본소도 갖추고 ,종로에 감리교서점을 차리고 출판한 서적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정부 박문국에 일본에서 구입한 인쇄기계가 있었을 뿐, 민간인으로는 첫 인쇄소였고 최초의 출판사였다. 출판한 서적은 크게 3가지로 첫째는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배재학당 규칙(1890) 복음요사(1896)를 비롯하여 ’대한력사‘’의회통요규칙‘’사민필지‘’심리학‘’산수교과서‘’태서신사‘’전례통용문답(생리학교과서)등 배재대학.이화학당등 여러학교의 교과서를 인쇄 출판하였다.  둘째는 기독교도서의 출판인데, ‘성경’‘찬송가’‘미이미교회문답’(초기에는 감리교회를 미이미교회 라고 불렀다.) ‘속죄지도’,‘셩교촬요,’‘찬셩시’(장로회찬송가),‘예수행적’,‘구약공부’‘천로역정’등이며 1900년 비로소 번역이 완료된 신약전서 1만2천부를 인쇄한후 정동감리교회에서 출판기념회를 성대하게 거행하기도 했다. 셋째로는 정기간행물들을 출판했다. 아펜젤러는 일찍이 ‘교회’(반월간 잡지,1889년)‘코리안리파시토리’(영문월간지 1892년)을 비롯하여 1897년 2월 1일 주간 ‘조션 그리스도인회보’를 발간하자 장로교 언더우드도 같은해 4월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했는데 인쇄는 감리교 인쇄소에서 인쇄했다. 장로교 출판물 뿐 아니라 한국최초의 일반신문인 서재필 박사의 ‘독립신문’, 윤치호박사의 ‘경성신문’, 이승만 박사의 ‘매일신문’이 모두 감리교 인쇄소에서 인쇄 발간하였다. 그러므로 신문과 잡지가 없던 이나라에 감리교는 출판문화의 개척자가 되었다.

 

5-4. 복음전도사업

1) 미(북)감리교회의 복음전도 사업

1885년에 들어온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은 교육과 병원사업 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전해 맥클레이 박사가 고종활제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 밖에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선사들은 속으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울 것을 생각하고 비밀리에 성경공부와 예배를 드렸다. 1885년 가을부터는 규칙적인 기도모임과 속회(사경반)가 조직되었다. 또한 1885년 10월 11일에는 한국최초의 개신교 성찬예식이 집례되었다. 1886년 4월 25일에 최초 개신교 세례식이 있었으며, 1886년 6월의 제2회 한국 선교회 통계를 보면 한국 감리교인이 세례인 1명,원입인 100명,주일학교 1개교, 주일학생 12명이라하여 이미 감리교회가 설립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가 1887년 한국 정부에서 복음 선교에 대하여 다소 완화하자 평양에 전도인을 파송하였고, 아펜젤러는 인천 내리교회(1885년 7월 19일 시작)와 서울 정동교회(1887년 10월)를 그밖의 선교사들은 상동교회(1889년 9월 10일), 동대문교회(1892년 12월 25일), 평양교회(1893년 3월 1일), 그리고 수원,천안, 서산,공주,대전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00년에는 한국서지방회, 북지방회.남지방회가 조직되었으며 1901년에는 김창식, 김기범 2사람이 안수를 받고 한국에서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함께 1905년에는 한국선교연회가 조직되었으며, 1908년에는 ‘한국연회’가 조직되었다. 감독은 일본주재 하리스감독이 겸임하였다.

 

   *처음 세워진 교회에 대하여-

  가) 정동 교회 : 아펜젤러가 1885. 8. 배재학당 세워 신교육을 하며, 학원선교 시작. 

      1886. 10. 11. 한옥에 4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림(벧엘교회라고 부름)

      1898. 10. 26. 정동교회 신축봉헌

  나) 상동 교회 : 1885. 9. 10. 내한한 스크랜톤이 상동병원에서 기도회 시작. 교회 명칭을 달성교회(1900)라고 했으나, 1901. 미국 스탠포오드에 있는 "미이드" 양이 자기 어머니를 기념하여 거액을 보내와 벽돌 예배당 봉헌, 상동 미이드 기념교회라고 부름.

  다) 동대문 교회 : 1892. 12. 25. 성탄일에 동대문 옆 "볼드윈 기념예배당"을 시작. 1900. 까지 - "볼드윈 예배당", 1906. 까지 - "볼드윈 동대문 예배당", 1908. 이후 - "동대문 교회", 1910. 5. 15. 동대문교회를 신축 봉헌함.

   라) 제물포(인천) 웨슬리 교회 : 아펜젤러 내한 1년 후, 1886. 4. 25. 인천에서 예배를 드림. 1891. 8. "제물포 웨슬리 기념 예배당"이 신축됨.

   마) 평양 교회 : 1893. 4. 1. 평양시 서문통에 큰 목조건물을 홀 목사가 구입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

 

2) 남감리교회의 복음전도 사업

1896년에 들어온 남감리교회에서는 개성을 본부로 정하고 고양음교회(1897년,5월,2일),광희문교회(1897,6,17),철원 지경터교회(1900년),종교교회(1900년 4월 15일) 그리고 점차로 철원,춘천,원산 등지에 교회가 설립되어 1897년에는 한국선교 지방회가 1918년에는 한국연회가 조직되었다. 독립된 연회를 가진 남북 감리교회의 교세는 아래와 같다.

                  

미 북감리회(1900년)와 남감리회(1906년)통계

교 파
선교사
교역자
교인
교회
주일학생
비 고
북감리회
남감리회
39
14
170
  34
11,799
9,911
170
  47
6,989
1,412



 6. 감리교의 부흥과 활동

 

6-1. 한국에 부흥을 일으킨 감리교회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감리교 하디(R.A.Hardie)선교사가 같은 선교사들에게 성경을 강의하는 자리에서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하디 목사는 성령의 새로운 체험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3년동안 강원도에 교회가 설립될 때 지경터에서 힘써 일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실패감이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나는 일을 더 할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하였다.....” 다시 말하면 참회의 기도에서 성령이 내리고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이다.

 

하디 선교사는 1907년 평양 장로회 선교사들의 초청을 받아 전 평양교회에 일대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1908년에는 평양 감리교회 집회에서도 큰 성령운동을 일으켰다. 그 부흥의 불길은 1909년 개성 감리교 선교사들의 20만명 전도운동으로 나타났고,같은 해 서울에서 모인 “복음주의 연합공의회”에서는 백만명 구령운동“이란 목표를 세우고 부흥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백만명 구령운동을 추진 지도한 이도 이위만(W.T.Reid)이라는 감리교 선교사였다.

 

1970년대 여의도에서 여러차례 모였던 복음화 운동도 1965년 김활란 박사가 시작한 복음화운동의 계속이라고 볼 때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대부분 감리교에서 일으킨 운동임을 알 수 있다.

 

6-2. 종교교육 사업과 문서사업

 한국에서 첫 주일학교는 1888년 1월 스크랜톤 대부인이 이화학당에서 시작한 것이요,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도 1922년 정동감리교회에서 어린이 백명을 데리고 시작한 것이 한국에서는 첫번이다.

 

엡웟(Epworth)청년회는 1899년 5월 5일 역시 정동교회에서 첫번으로 조직하였고, 여선교회는 북 감리교회에서는 이화학당에서 푸라이 교장이, 그리고 남 감리교회에서는 송도에서 조직한 것이 각각 첫번이다.

 

1920년 대에는 남북감리교가 자기연회 안에 교육국과 부녀국을 두고 한석원,김준옥,유형기,도마련,레시요한,전영택,김활란 등을 통해 전국교회 주일학교와 여선교회를 지도하였다. 협성신학교는 1907년 남북감리교회가 연합으로 설립하여 오늘날 감리교신학대학의 기초를 세웠다. 

 

문서선교를 말해도 감리교회는 단연 앞장 서 있었다.1889년 인쇄소를 설치하고 반 월간지 “교회”발간했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거니와 그후에도 1900년 조시원 선교사의 “신학월보”를 비롯하여 “엡웓 청년회보”(정동감리교회 엡웓회, 1904), ‘성경강론 월보’(정동교회 1906), “가뎡잡지”(1907 상동교회 청년학원,“공도‘(정동교호 장로 강매,1914)” “신학세계”(협성신학교,1916) “감리회보”(1917),“주일학교연구”(한석원1918) “선민”(강매 1919)등이 있는데 반해 장로회측 잡지로는 평양신학교에서 계간으로 발행하는 ’신학지남‘하나가 있을 뿐이었다.(주간지는 제외)

 

6-3. 민족운동에 앞장선 감리교회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 올 무렵에 이미 나라는 기울어져 있었다. 당시 한국에는 일본, 청나라, 러시아등 3개국의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다가 일청, 일로,양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한국과 보호조약을 맺었고, 1910년에 아해 합방해 버렸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가만히 있지 아니하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초기부터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데 앞장섰그 이러한 일에는 연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황성기독청년회(YMCA)에 참여하고 주동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때는 무효상소투쟁기도회와 운동을 벌이기도 했고, 1911년 ‘김태광 암살음모사건’과 ‘신민회사건’으로 교회는 일제히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19년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국권을 회복코자 총 궐기하였다. 그것이 저 숭고한 3.1운동이었다.

 

주로 , 국내 천도교 15명 , 감리교 9명, 장로교 7명,불교 2명등 33인을 민족대표로 삼고 독립선언문을 작성, 세계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감리교측 인사는 이필주,박동완,오화영,최성모,신석구,신흥식,박희도,김창준,정춘수 등이다. 이로보면 1920년까지 주로 선교초기에는 전도, 교육,의료,문서 및 민족운동에 있어서 감리교회가 단연 앞장을 서서 교회와 사회를 이끌어 왔던 것이다.

 

6-4. 조선감리교회로 하나 된 남북 감리교회

 삼일 운동이 있은 뒤에 교회에 대한 왜정의 탄압은 극심했으나 1930년 통계표에 의하면 교세는 오히려 발전되어 미북감리교인 41,950명, 남감리교인 18,640명이었다. 그것은 물론 유능한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선교초기에 벌써 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윤치호(1896미),신흥우(1911미),양주삼(1915미),강매(1911일),한석원(1916일),전영택(1923일),유형기(1927미),김준옥(1925미),김영섭(1925 미)등을 비롯하여 1911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협성신학교(감신대) 출신목사들의 헌신의 열매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924년 3월 남북감리교회에서는 제 2차로 ‘남북감리회 진흥 방침 연구위원회’가 모여, ① 조선에 있는 두 연회를 합하여 한 연회로 만든다. ② 합한 뒤에는 ‘미감리회’라던지 ‘남감리회’라 하지 못하고 새이름을 짓는다. ③ 교회에서 사용하는 예문과 직원의 명칭 등 같은 교회 장정을 제정한다. ④ 한국 교역자들은 남북교회의 관계자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지 파송한다. ⑤ 한국 안에 남북 감리교회의 모든 사업을 합동 연합하여 일치한 행동을 한다. 이상 5개 조항을 정하여 1928년 5월에는 미(북)감리교회 미국 총회에, 1930년 5월에는 남감리교회 미국 총회의 승인을 얻어 두 교회에서 선출된 전권위원 20인 특선위원 20인 목사대표 40인등 모두 100명으로 구성한 기독교 조선 감리회 제1회 총회를 1930년 11월 29일 경성 협성신학교에서 웰취감독의 사회로 열고, 남북감리회 합동과 조선감리교회 조직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한 후 제1대 총리사(감독)로 양주삼 목사를 선출하였다. 동시에 한국 감리교회의 헌법과 교리적 선언과 장정을 채택하여 한국에 새 감리교회를 출범시켰다. 한국 감리교회의 앞날은 양양하기만 하였다.

 

당시 총회를 사회한 웰취감독은 엡2: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를 봉독한 후 “한국감리교회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다음 세 가지를 강조하였다.

첫째: 한국감리교회는 진정한 감리교회가 되어야 한다.

둘째: 한국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셋째: 어느 교파보다도 먼저 자주,자치, 독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6-5. 순교의 피위에 세운 만주 시베리아 선교사업

 일찍이 외지 선교에 착안한 남감리회에서는 1908년 만주와 시베리아에 이화춘,김명학 선교사를 파송, 교포들에게 선교를 시작했으나 해삼위에서 김명학 목사가 소련당국에 의해 순교하자 시베리아에서는 철수하여 길림성 등지에서 선교하였고, 미(북)감리교회에서는 1910년 손정도 목사를 파송하여 하얼삔을 중심,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할 때 만주 선교사업도 기독교조선 감리회 만주선교연회로 단일화 하였다.

1937년의 기독교 조선 감리회의 교세현황은 다음과 같다.

         교역자 62명 (선교사 포함)

         교회수 26처 (기도처포함)

         성경학교 2교

         신학교 1교

 

7. 거듭되는 시련과 재 부흥시대

 

7-1. 감리교회 한국선교 50주년 기념행사

1930년 12월 2일은 한국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되고, 한국 감리교회가 미국 감리교회로부터 독립된 뜻 깊은 날이라면, 1934년 6월 24일은 일본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 박사가 한국에 첫 선교사로 입국하여 고종황제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의 윤허를 받은지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1934년 1월 27일에 모인 총리원 이사회에서는 감리교 한국 선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아래와 같이 결정했다.

         ① 1934-1935, 2개년간에 감리교회가 조선에 들어온지 50주년이 됨을 기념한다.

         ② 50주년 기념사업 범위는 영적사업과 물질적 사업과 축하식으로 한다.

         ③ 감리교회가 50년간 이룩한 사업과 양성한 인재를 소개하되 국문과 영문의 소책자로, 또는 신문과 잡지에 계재, 소개한다.

         ④ 감리교회 50년사를 국문과 영문으로 편집 발행한다.

         ⑤ 기념식은 전국적으로 하되 방법은 아래와 같다.

           ㉮맥클레이 박사가 한국에 도착한 6월 24일을 기해 전국의 교회,학교,기관에서 기념식을 한다.

           ㉯선교사들과 외국인을 위해서는 6월 19-20 양일간 영어로 거행한다.

           ㉰아펜젤러 목사가 도착한지 오십년이 되는 1935년 4월 5일은 경성에서 축하식을 가진다.

           ㉱기념사업 중에 장로교회와 연합하여 할 것은 연합해서 한다.

           ㉲기년사업위원은 33명으로 한다.

위와 같은 결의에 따라 6월 24일 전국 교회와 기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되 경성은 배재학당 교정에서, 평양은 광성학교 운동장에서 축하식을 가진 뒤 시가행진을 하였으며, 6월 19-20일 양일은 정동교회에서 선교사들이 축하행사를 가졌다.

 

아펜젤러 부부가 도착한지 50년이 되는 1935년 4월 5일에도 전국 감리교회 대표들이 경성에 모여 기념식을 성대히 가졌다. 물질적 행사로 1938년까지 20만원을 모금, 교회기본금을 세우기도 한 것은 일제의 탄압으로 실행치 못하고 말았다.

 

7-2. 일제 탄압과 8.15해방

 신앙운동을 민족 독립운동으로 알고 있는 일본 당국의 교회탄압은 만주사변91931)과 중일전쟁(1933)을 치르게 되면서부터 노골화 되었다.

 

한국인 특히 기독교인 탄압을 위한 신사참배강요(1938.2)와 종교단체법 개정91939.4)을 비롯하여 창씨개명(1939.11), 선교사추방(1941 감리교선교사 117명), 태평양 전쟁 도발(1941.12)등으로 시국은 극히 혼란하였다.

 

감리교회만 하더라도 신학교폐교(1940)을 당했고, 연회가 해산을 (1941.3)을 당했으며, 1943년 10월에는 일본기독교 조선 감리교단으로 일본감리교와 합동했다가 1945년 8월 1일에는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한국개신교가 전부 통합했으며(통리자 김관식 목사), 그로부터 15일 만에 일본을 무조건 항복으로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일제의 박해로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2백여 교회가 폐쇄를 당했고, 2천여 신도가 투옥되었으며, 50여 교역자가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감리교회에서는 이영한, 최인규,박현세,김창옥제씨가 순교를 당하였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자유의 아침은 오고야 말았다.

 

7-3.거듭되는 시련과 재 부흥시대

 왜정이 물러가자 정치 경제 교육 문화계와 더불어 감리교회에도 부흥,재건,양파로 갈리는 등 혼란이 있었다.그러나 1949년 4월 29-5월 1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모인 통합총회에서 감독 김유순, 전도국 총무 박만춘, 교육국 총무 유형기 의 취임으로 감리교회가 하나가 되고(서부연회 제외) 총리원이 정상화 되어 감리교회는 다른 교파보다 자유한국에서 새출발을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주일) 새벽에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으로 한 때는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일부외에는 한국 전초를 공산군에게 내주는 등 3년동안의 전란으로 우리 교회는 일제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순교한 교역자 80명 (남한 30,북한 50)

         전소된 교회당 204개 (남한 84, 북한 120)

         반파된 교회당 155개

         남치된 교역자 (김유순 감독외 18명)

그밖에도 많은 평신도를 잃은 감리교회에서는 1951년 11우러 2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특별총회를 열고 감독,유형기, 전도국 총무 조신일, 교육국 총무 김광우 제목사가 당선되어 교회 복구 사업에 진력하게 되었다. 그결과 1953년부터 미선교부에서 한국교회 복구비로 보내온 170만불의 원조금을 가지고 1955년경까지 500여 교회를 복구 또는 새로 설립하였으며, 미감리교 해외구제위원회의 원조금으로 서울 천사원,김해 진우원,여주 여광원을 비롯하여 수십처의 고아원과 모자원과 직업훈련소를 설립, 전쟁고아와 미망인들을 보호 양육하였다.

 

학교도 재건하여 평양 광성중고등 학교는 서울에, 개성 송도중고등학교는 인천에, 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는 대전에 재건하였고, 이천양정여자중 고등학교, 금란여자중고등학교, 이화여대부속 중고등학교등 새로 설립된 학교들은 한국청소년 교욱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또한 급격히 증가되는 교회의 교역자 양성을 위해 1954년 5월 대전신학원(현 목원대학)과 유치원 보모양성을 위해 1955년 4월에 대전 보육초급대학(현 배재대학)을 설립하였고, 그 후에 인천과 원주에 기독병원을 설립하였다. 이로서 한국 감리교회는 교단재건과 대민구호 선교에 앞장섰고, 또한 산업선교와 농촌선교 사업에 착수하여 교회의 문을 열어 민족구원에 앞장서 참여해왔다.

 

1970년대에는 5000교회 100만신도 운동으로 국내선교와 세계선교에 매진하여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성장하여 왔다. 또 한편 도시빈민선교, 산업선교,농어민선교 등으로 특수선교도 추친하였고,국가의 민주화를 위한 사회정의와 평화운동에도 탄압과 유린 속에서도 꾸준히 참여하여 민족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감리교회는 미(북)감리교 선교시대(1885-1930)와 남감리교 선교시대(1897-1930)을 거쳐, 기독교 조선감리회 시대로 (1930-1941) 발전하였고, 기독교 대한 감리회 시대(1949-1979)에는 중부,동부,남부,삼남선교,중앙의 5개연회의 규모로, 그리고 1980-1989년 까지는 서울,동부,중부,남부,삼남연회등,5개연회 시대로 발전하여 1990년부터는 7개연회(서울,서울남,중부,경기,동부,남부,삼남)로 발전하면서 7천교회 2백만 신도운동을 시작하였으며, 2006년에는 9개 연회(서울,서울남,중부,경기,동부,충북,남부,충청,삼남,)와 호남선교연회와 미주선교연회, 서부연회를 포함한 5000여교회를 아우르고 있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 끝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