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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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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8 23:24 조회1,9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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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란 무엇인가?

21세기의 교회가 당면한 큰 문제는 종교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종교 다원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은 점점 더 단 하나의 객관적 진리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의 복음을 과연 유효하게 선언하고 선포된 복음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그들의 삶과 생활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혹은 교회 중심적 배타주의를 고수하며 신앙을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 모든 종교들이 자기 절대성과 궁극성을 주장하고 서로 상이한 입장들이 공존하게 되었다.

 

종교 다원주의란 종교 다원 현상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다원적인 종교들을 동일한 지평선에서 바라보며 다원적 종교들의 궁극적인 것 (the ultimate)의 실제를 주장하는 종교적, 신학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종교로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여러 가지 종교들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따라서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의 길이 있고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는 그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며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기본 명제를 전제로 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잘만 믿으면 천당도 가고, 극락도 가는데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 목적지는 같지만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는 얘기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여러 관점에서 볼 때 종교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으며, 기독교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주장이다.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종교도 더는 자기 절대성, 혹은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의 기본 입장은 모든 종교들이 제시하는 진리에는 그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을 뿐 아니라 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결코 특정 종교의 기준이 타종교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비교 종교학 교수였던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1916-1973)는 종교적 다원주의 문제는 교회가 따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던 선교 현장의 선교사들과 비교 종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한다. 18, 19세기의 그리스도교 선교 정책은 서구 식민주의와 그 궤를 같이하는 제국주의적 선교 정책이었다. 즉 서구 열강들의 군대가 약소국을 점령하면 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그리스도교로 그 지역을 점령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서구 식민지 정책이 종식되고 독립국들이 점차 늘어가면서 그리스도교의 정복 선교 정책도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선교지 일부에서는 선교사들이 타종교와의 대화를 주장하며 타종교를 인정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는가 하면 '세계 복음화'와 같은 그리스도교의 선교 기치는 침략적인 제국주의 정신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며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선교 형태를 반성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니터에 의하면 신학적 종교 다원주의의 촉발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죤 힉 역시도 같은 입장에서 궁극에는 모든 종교가 한 형제라는 것을 깨닫고 종교들이 서로 협력하며 교류하는 하나의 이상세계가 올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미 그리스도교를 변화시키고 있는 에큐메니칼 정신은 세계 종교간의 관계에도 더욱 영향을 미칠 것이다.

 

뉴비긴(L. Newbegin)은 서구 사회에서 다원주의의 근원을 유럽의 계몽주의에 의해 부활한 합리주의 전통에서 찾고 있다. 그는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통에서 이성은 진리를 확인하고 방어하는 유일한 도구가 되었다. 다원주의적 관점은 또한 과학적 방법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과학적 방법론은 무엇인가? 인간의 감각에 의해 관찰 대상으로부터 사실들을 얻어내는데 있어서 이성을 수단으로 가정을 세우고 결론을 유출해 내고 계속되는 적용을 통해 그 결론들을 시험하고 검증한다는 것이다. 비서구 세계에서의 모든 이슬람 국가들이 압도적으로 반 다원주의적이고, 단일성이 모든 생활의 영역에 미치고 있으며 법적으로 강요되기도 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비신자들의 거주지를 정해 놓고 그들의 활동을 엄격히 통제한다. 아시아, 아프리카에 있는 비 이슬람 국가들은 수세기 동안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살아왔다. 인종과 문화가 뚜렷이 구분되는 공동체들이 서로 근접해 있는 상황에서 긴장은 있었지만 일정 기간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관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또한 종교적 다원성을 인정하게 되고 그것을 일부 수용하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특별히 종교적 진리는 오로지 인간의 영혼에 국한되었다. 진리는 영에 의해서만 이해되어진다. 역사는 종교적 진리와 경험을 구성하게 된다. 종교 의식과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는 모든 역사 종교들은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다원주의 정신은 힌두교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쳐 온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다원주의는 서구든, 비서구든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인 상대주의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Alann Bloom 에 의하면 상대주의는 현대인의 도덕적인 조건이며 자유 민주 사회의 조건이라고 한다. 개방적인 사람을 상대주의에 헌신된 사람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절대주의(Absolutism)란 관용적이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현대 사회는 자신도 생존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도 함께 생존하게 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미덕이 되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종교 다원주의의 기원은 합리주의적 전통과 상대주의의 대두라고 말할 수 있겠다. 종교 다원주의론자들은 종교 다원화에 대한 정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 학자의 말을 인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는 현 시대는 모든 종교가 다양하게 공존하는 종교 다양성의 시대이므로 어느 특정 종교가 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주장할 수 없다는 종교에서의 가치 중립적 태도를 의미한다. 

 

종교 다원주의의 신학적 기초는 현재의 제도적 교회가 신약의 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함으로 현재의 기독교를 부정하고 상대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종교 다원주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전오진 교수는 여섯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부정하고 상대화한다. 

 

둘째는 일부 서구인들과 신학자들은 서구 식민주의와 양차대전에 대하여 강한 죄책감을 가지고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죄악시하고 비 서구 문화를 찬양한다. 

 

셋째는 종교 다원주의는 비서구인들 특히 많은 아시아인들이 서구로 이주하거나 거주함으로 서구 사회를 종교 다원주의사회로 만들었다. 

 

넷째로 비서구 국가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감을 전통 종교에서 추구하는데서 종교 다원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다섯째로 종교 다원주의 신학은 서구 신학이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절대성을 포기하는데 일차적 원인이 있다. 

 

여섯째로 W.C.C의 종교 대화는 전도의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인류의 평화와 복지라는 세속적 목적과 다원주의로 발전되었다. 

 

알랑 레이스는 그리스도교와 타종교의 관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배타주의 (exclusivism),

 

포괄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가 그것이다. 

 

배타주의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만이 참 종교요, 절대 종교라고 믿는 그리스도교 절대주의(christian absolutism)를 견지해왔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종교'라는 일반적 개념이 아예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설령 그리스도교가 타종교를 운위한다손 치더라도 그 유일한 까닭은 계시에 근거하여 그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입장에 대해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가 발생한 것은 분명히 충격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에는 전통적인 카톨릭의 입장과 칼 바르트, 크래머와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속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배타주의는 구원이 예수에 대한 명시적 신앙 안에만 있다거나 교회 울타리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몇 가지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성경의 문자적 증언과 일치한다는 것과 그리스도 신앙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확립시킨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또한 선교의 열정을 강조하고 같은 맥락에서 협조하는 것이 배타주의의 긍정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배타주의는 은총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강조하지만 기독교가 아니면서도 은총의 종교인 예를 들어 아미타불교, 바티 흰두교와 같은 교리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 또한 창조계시와 그리스도 계시를 이분함으로써 창조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점을 간과하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많은 선한 것에 대해 긍정적이고 바른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포괄주의는 자기 종교를 최 우위에 놓는 자기 중심적 요소가 있어 한편으로는 배타주의와 통하고 우열을 가리면서도 남의 종교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다원주의와도 통한다. 현재 카톨릭에서 가지고 있는 공식적인 입장이다. 즉 포괄주의는 "발전-완성"이라는 도식의 성취설을 취한다. "타종교 속에 있는 모든 진리는 본래 그리스도의 것이다"라거나 "타종교에도 구원은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는 등의 사상이 모두 포괄주의적 입장에 속한다.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으로 규정한 칼 라너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이후의 카톨릭 입장이 모두 이 견해를 대표한다. 포괄주의는 여전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의 한계 안에 갇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원주의는 참 종교를 하나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을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즉 궁극적으로는 형언불가능한 하나의 신적 실재를 믿되, 그 신앙의 다양한 표현으로서의 다원종교 현상을 인정하며 그것들 사이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이다. 이는 교회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타종교들을 배타하거나 포괄하려는 종래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이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근대 후기의 종교다원적 세계 속에서 요청되는 신학적 사고의 모형변이가 신중심주의(Theocentrism)의 입장에서 종교의 다원성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교회중심주의나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centrism)의 사고에 젖어 온 그리스도 신학은 타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쯤으로 포괄하는데 그칠 것이다. 

 

따라서 80년대의 다원주의적 종교신학은 소위, '신 중심적 모델'을 제시하며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궁극적 실제(ultimate reality)로서의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다원주의에 속하는 현대 종교 사상가로는 하버드 대학의 비교 종교학 교수였던 스미스와 인도의 신학자 사마르타, 인도의 카톨릭 신학자인 파니카, 남인도 뱅갈로 에큐메니칼 선교 센터 원장이며 1986년부터 1975년까지 W.C.C.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토마스, 영국 장로교 목사인 존 힉과 카톨릭 신자인 폴니터 등을 꼽을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이란 인간이 종국적 실재와의 관계에서 자기 삶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고 구원을 성취하는 양식에는 문화의 다양성에 따라 다양한 구원의 길과 종교 상징체계가 존재하며,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이름과 구원의 길의 다양성은 삶의 자리가 갖는 해석학적 제약에 기인하기 때문에 모두 상대적이며 특정 신의 이름과 구원의 방도가 배타적인 우월성을 지녔다는 주장은 용납될 수 없다는 종교신학적 이론이다. 

 

 

1. 칼 라너 : 익명의 그리스도인


칼 라너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은 만민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시고 처음부터 구원하려는 사랑과 긍휼로 사람을 만나셨다는 것이다. 이점은 배타주의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긍휼과 사랑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교되는 점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만민을 사랑하시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목되지 않았던 사람을 모두 지옥에 떨어뜨리고하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용서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용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사건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 라너는 자연과 은총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여기에 예외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율법으로 살아간다면 형벌로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 라너는 이런 의미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주장한다.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리고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은총을 안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은가? 라너가 말하는 익명이란 명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익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초월적 존재를 향해서 자기를 개방하는 사람들, 이웃을 향해서 자기를 열어 놓는 사람들, 선과 정의, 진리를 향해 그런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들이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은 구원의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은가 말하는 것이다.

칼 라너의 이러한 신학은 그리스도밖에 존재하는 은총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과 타종교와의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과 선교의 효과와 교회의 성장의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낙관주의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타종교에서 말하는 자력구원 의지, 역사 퇴행적 사고 행태 등은 중요한 부정적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타종교의 선한 것과 구원사이의 구분이 분명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정당하다면 기독교의 순교란 불가능하다는 결과를 이끌어 내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2. 에른스트 트뢸취 : 역사적 상대주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종교사학자 트뢸취(Ernst Troeltsch, 1865-1923)는 그리스도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 상대주의를 주장했다. 하나님은 유한한 것들과 동일시될 수 없지만 신성도 역사 속에 주어졌을 때는 상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절대적 종교가 아니며,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그것의 환경을 구성하는 역사적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운, 전적으로 유일회적인 종류의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종교의 보편적 원리라고 생각되는 것의 분별적, 최종적, 무조건적 실현이 아니다. 다른 위대한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도 그 역사의 매순간에 있어서 철저히 역사적인 현상이며, 모든 개별적 역사현상이 직면하게 되는 모든 제한에 종속되어 있다."

이처럼 그에게는 인간에 대한 절대적이고 유일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복음마저도 다양한 종교적 구원체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그의 철저한 역사적 의식과 그 역사적 의식이 요청하는 바 역사적 상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절대자는 모든 역사를 향해 현존하고 모든 역사 안에 현시되지만, 그러나 절대자에 대한 그 어떤 역사적 현시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절대자의 본질(절대자는 항상 유한자 이상이라는)과 모순되며, 역사적인 것의 본질(역사적인 것은 항상 제한적이고 가변적이라는)과도 모순된다는 것이다.

트뢸취는 만약 어느 날엔가 절대적 종교, 즉 신성의 최종적인 완전한 현현이 있게 된다면, 그러한 일은 곧 역사 이후의 영원한 단계에서나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3. 폴 틸리히 : 그리스도교 보편주의


20세기의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틸리히(1886-1965)는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신이 어느 특정한 방법으로만 현현한다는 특별계시의 주장을 배제하면서 타종교에도 계시적 접촉이나 신과의 만남이 있다는 그리스도교 보편주의를 표방했다.

"예수에게서 특수한 것은 보편적인 것을 위해 자기 속에 있는 특수한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특수한 종교에 대한 속박과 종교영역자체에 대한 속박에서 그의 모습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특수하면서도 특수적인 것에서 해방되고, 종교적이면서도 종교에서 해방된 이런 모습과 함께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판단함으로 다른 종교도 판단하는 표준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제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불교도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하는 대신 자기 성찰과 대화를 촉진시켜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목표는 종교들을 혼합하는 것도 아니고 타종교에 대해 승리하자는 것도 아닌 자기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자기 종교의 깊이로 더욱 파고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하나의 '신', 혹은 '신을 초월한 신'개념을 제시하며 신 중심주의적 사상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타종교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포기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타종교와의 만남을 자신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틸리히가 말하는 종교간의 만남-나는 너와의 만남을 통해서 내 자신을 실현하지만, 결코 네 속에 해소되지 않는다는 인격적 만남-임을 알 수 있다. "개종이 아니라 대화"를 강조하며 그리스도교의 특수성을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모두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보편주의가 종교간의 대화의 의미를 밝히려는 신 중심적인 종교다원주의적 발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4. 스미스 : 신 중심적 보편주의


하바드 대학의 비교종교사 교수이자 세계적 명성의 이슬람 연구 대가였던 스미스는 종교를 연구하고, 이를 삶으로 구현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종교'라는 개념을 제거해 버리려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종교'라는 말은 서구적인 개념으로 다른 종교들, 특히 동양종교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순전히 서구적 관념에서 잉태된 '종교'라는 말은 종교를 하나의 사물로, 하나의 "객관적인 조직적 실체"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이것은 종교적 실재를 "사물화했고" 규격화했으며 그리하여 가시적으로 대상화 해 버렸다. 일단 규격화되고 조직화된 종교는 통상 타종교와 비교되고 등급이 정해진다. 이것은 종교라는 말이 구체화하려는 바로 그 실재를 이용한 결과에 이르고 만 것이다. 스미스는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정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미스는 종교간의 협력을 통한 일치된 과거보다는 오늘날에 훨씬 더 가능하고 또한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현대의 예언자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를 향한 출발점은 모든 종교에 공통적인, 또 그들을 살아있게 하는 신앙임을 인식하고 그 점으로부터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스미스의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기 보다는 신중심적인 신학, 즉 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것에만 제한되지 않고 그가 모든 종교들 안에서 보편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에 보다 개방적인 신학으로 인도해 준다. 스미스의 신 중심적 보편주의는 오늘날 카즌스, 카모디같은 '지구 신학'자들에 의해 창조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5. WCC와 사마르타 : 에큐메니칼과 종교다원주의


WCC는 제 3차 뉴델리 총회 때부터 1928년 탐바람 선교 협의회 이후 유행해 온 바르트와 크레머의 영향, 즉 타종교에 대한 부정적이고도 배타주의적인 입장과 전격 결별하기 시작했다. 뉴델리 총회는 타종교를 '다른 신앙'으로 표현하고, '다른 신앙'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1979년의 킹스턴 총회에서는 사마르타를 중심으로 한 중앙위원회가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한 지침'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 지침은 무엇보다도 혼합주의의 위험을 경계하면서도 '대화'와 '선교'가 결코 모순되지 않다는 것과 타종교 신봉자들도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WCC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종교다원주의 신학자 가운데서 인도 출신의 사마르타(S.J.Samartha)의 입장은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는 위험성을 감수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자가 상대화된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종교적 다원성 가운데서 사는 것을 두려워해야만 하는가?"에 나타나고 있다.

그는 50년대, 60년대에 WCC가 타종교에 접근하며 사용한 신학적 틀인 '우주적 그리스도론'이나 '익명의 그리스도론' 따위를 일종의 허위의식이나 교만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절대적 궁극성과 보편적 규범성을 부정한다. 어떠한 종교나 종교적 인물은 신의 전적인 신비 앞에서는 궁극적인 말이나 충만한 언어로 명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6. 존 힉 : 신학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존 힉은 영국의 종교 철학자요 신학자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타종교들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신 중심적 모델을 제안한 사람 가운데서 가장 철저하고, 가장 혁명적이며,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힉은 칼 라너와 같은 신학자들이 신실한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유대교들을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는 옛 조교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입장이라고 비난하다. 이런 '익명의 그리스도인'적 관점에서 보면 결국은 그리스도인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힉은 이러한 입장이 반드시 기만적인 것만은 아니고, 전에는 전혀 희망이 없던 것으로 간주되던 타종교인들에게 일종의 은혜의 손길을 펴려는 것이라 이해한다. 따라서 이것은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넘어가는 심리적 가교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힉은 "조만간 이 다리를 통해 건너편으로 가야 할 것"을 강조하며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에 필적할 "종교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주장한다. "이것은 여러 신앙들이 공존하는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의 우리 자신의 종교의 위치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있어서 똑같이 철저한 변혁이 있어야 함을 함축한다.…그것은 제 신앙의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교 중심적 혹은 예수 중심적 모델에서 신 중심적 모델에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때에 우리는 위대한 세계 종교들을 하나의 신적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역사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 서로 다른 자각들을 구체화한 것으로 보게 된다."

힉은 "종교적 우주의 중심은 그리스도나 어떤 종교가 아니라 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아야 한다. 신이 바로 빛과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며, 모든 종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신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논리는 "큰 종교들은 모두 그들의 체험적 뿌리에 있어서 동일한 궁극적 신적 실재와 접촉하고 있다"로 귀결된다.  


7. 니 터 : 신 중심적 그리스도론


카톨릭 신학자이 니터는 칼 라너의 제자로 '신 중심적 그리스도론'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자다. 니터는 예수의 선교와 인격은 왕국 중심적, 혹은 신 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 자신을 신적 인격으로 생각지 않았다는 힉의 견해에 동의한다.

니터는 예수의 본래적 메시지는 오직 신 중심적이고 왕국 집중적이었으나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메시지에 와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신약성서에서 보는 것은 다만 "신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기능적, 종말론적인 이해로부터 그의 신성에 대한 성육신적이고, 존재론적인 선포에로의 진화"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의 자리', 곧 역사적, 문화적, 정치, 경제적 상황의 반영이며 그 상호작용에 의해 고무된 결과이다. 그러므로 니터는 신약성서의 예수에 관한 증언이 배타적이거나 최소한 규범적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론을 바르게 하지 못한 사람들의 착각에 불과하고 성경을 떠나서 인간 이성이 주가 된 신학을 하다가 나온 이론이다.

이들의 이론에 이따금씩 등장하는 신중심적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무지한 사람들에게 유신론적인 신학자로 착각하게 하는데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유일성과 삼위일체 신학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무서운 이론이다. 이들의 이론이라면 초월자는 한 분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그 주위에 시대에 따라 혹은 민족과 문화에 따라 여러 그리스도 즉 석가모니 마호멧 예수 공자 등이 등장했다는 말을 하고싶은 것이고 따라서 이제 오래지 않아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별다른 그리스도 즉 적그리스도가 오는 길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무지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마귀의 손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는 결과적으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려다가 오히려 기독교를 완전히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서구의 신학자들 즉 종교 다원주의를 표방하고 나온 사람들은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를 잘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서구 신학이 이렇게 된 이유는 성경을 읽어보지도 않고 신학을 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서구 신학자들은 타 종교 즉 불교나 유교의 핵심을 잘 모르고 피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 인도에 고대 종교였던 브라만교를 완곡하게 부정하면서 나온 종교였다. 석가모니는 브라만교가 말하는 많은 신들이 거짓 신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었기 때문에 무신론을 표방하고 나왔다. 그렇다면 불교와 브라만교는 결코 상호 존중으로 갈 수 없다. 루터와 칼빈은 한결같이 카톨릭을 사탄의 종교, 악마의 종교로 규정하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카톨릭은 영원히 상호 인정 내지는 상호 존중이 있을 수 없다.

이슬람교는 절대로 기독교를 존중할 수 없는 종교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먼저 성경이 말씀하시는 계시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타종교의 기원과 핵심교리를 명확하게 인식을 했다면 종교다원주의 같은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을 것이요 입에 담을 수도 없을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마귀(魔鬼)에 대하여 전혀 아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귀가 온갖 종교를 만들어서 결국은 사람들에게 절대자 하나님의 인격적인 계시를 부정하고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바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

 

  

조용기 목사 "성경과 불경 가르침은 하나"
[동아일보]“‘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이나 ‘마음이 곧 부처(心是佛)’라는 말씀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말입니다.”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인 조용기(趙鏞基·사진) 목사가 12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앰배서더호텔에서 열린 동국대 불교대학원 최고위과정에서 특강을 했다. 조 목사는 스님 불자 등 70여명의 청중 앞에서 50분간 강연했다. 개신교 보수교단의 핵심인물인 조 목사가 불교 관련 모임에서 강연한 것이 처음인 데다 강연내용도 파격적이어서 주목된다.

조 목사는 “동국대의 제의를 받고 무척 망설였으나 종교간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승낙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선(禪)불교를 신봉해 장남인 자신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불교문화 속에 살았다고 털어놨다.

“1953년 폐병을 앓아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우연히 누님 친구의 소개로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예수와 인연이 닿은 것이지요.”그는 불교가 한국의 장자 종교로서 포용력을 갖고 타 종교를 대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저는 케이블 불교TV를 자주 봅니다. 기독교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을 불교 강의를 들으며 깨닫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병조 교수(동국대 윤리문화학과)의 강의는 쉽고 재미있어 빼놓지 않고 봅니다.”내년에 정년(70세)을 맞는 조 목사는 은퇴 후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밖으로는 해외선교에 주력하고 안으로는 종교간 대화를 통해 상호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조용기 목사 발언 논란으로 본 종교다원주의 실체

길은 많아도 ‘생명의 길’ 은 하나

기독교의 구원 진리 절대성 거부… 보편적 신앙 모델로 끌어내려 성경으로 보면 종교다원주의 명백한 이단… 경계 늦추지 말아야

지명도 있는 교계 인사가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했다는 요지의 기사가 언론에 잇따라 보도됐다(관련 기사 1면). 발언의 진위를 확인하고 차분한 분석이 필요함을 전제하며, 기독교 내부에서 주창되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의 실체를 파악해 볼 수 있는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가 “기독교에만 구원 있다는 것은 유아독존적인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종교는 평등하다. 일부 목회자들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유아독존적인 생각이다”라고 한 말이 일간지에 일제히 소개되었다. 진위는 따져보아야 할 것이지만, 여러 모로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종교다원주의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종교다원주의는 각 종교는 각각의 구원의 길이므로 서로 개방성과 존경심을 가지고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수억, 수천만 명, 수백만 명의 경건한 신도를 지닌 종교들은 모두 참 종교라고 한다. 특정종교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불멸하는 진리 체계를 독점할 수 없고, 특정 종교의 가치 규범을 가지고 타종교를 판단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의 진리 담론이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기독교가 제시하지 못하는 구원을 이슬람, 불교, 힌두교가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헌신하면서도 종교 간의 대화와 협동을 모색하고 평화를 유지하자고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는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주장
미국 클레아몬트신학교의 존 힉(John Hick) 교수는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라고 주장한다. ‘우주적 실재’는 한 분이지만 그 분의 이름은 문화마다 서로 다른 명칭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언어 구조가 상이한 하나님의 이름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헬라인은 하나님을 ‘로고스’라고 하고, 유대인은 ‘야훼’(여호와), ‘엘로힘’이라고 한다. 고대 인도인들은 ‘아트만’ 혹은 ‘달마’ 혹은 ‘비로자나불’이라고 불렀다. 중국인들은 도, 천리, 천명이라고 부른다. 아랍인들은 ‘알라’, 한국인은 ‘하늘님’이라고 부른다.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동일한 궁극적 실재라고 하는 이명동신설(異名同神說)을 주장한다.

존 힉에 따르면, 오랜 세월 동안 종교들이 자신의 종교를 세계사의 중심에 놓고, 다른 종교를 자기 주위를 도는 행성 정도로 생각해 왔다. 기독교는 자기를 절대화하고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한다. 예수 중심의 기독교는 행성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기독교의 우월성 또는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기독교는 ‘예수 중심 모델’에서 보편적 신앙 모델인 ‘신 중심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역사에 출현한 모든 종교는 마치 태양 주위를 도는 아홉 개의 행성과 같고,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은 모두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이 세계사 속에 출현한 다양한 종교는 ‘하나의 신적 실재’를 역사적, 문화적으로 다르게 응답한 결과라고 한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식의 상이하고도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들은 하나의 신적 실재에 대한 응답이며,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형성된 다양한 인식의 구체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가 아니며, 특수한 전통 종교인식이 낳은 ‘우주적 실재’에 대한 반응일 뿐이라고 한다.

존 힉은 ‘하나의 신적 실재’가 과연 존재하며,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에 답하지 못한다. 인간의 모든 사유가 역사적, 문화적 상대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인간은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해석학적으로 의존적 존재라고 본다. 칸트의 인식론을 기초로 한 트뢸치(E. Troeltsch)의 ‘역사적 상대주의’를 반영한다. 역사 속에 출현한 모든 이념, 가치, 조직체계는 상대성을 피할 수 없다는 이론 위에 정초하고 있다.

인간이 작은 붓 대롱으로 본 하늘이 하늘의 전부라고 우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붓 대롱으로 본 하늘 역시 하늘인 것은 틀림없다. 존 힉은 이 점을 간과한다. 기독교가 특별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접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니지만, 한계를 가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리이다.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영적 암매(暗昧) 가운데 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붓 대롱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특별계시는 인간이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붓 대롱이다.

“일곱 가지 다양한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룬다” 주장
인도 태생 가톨릭교회 사제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는 종교다원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개별 종교의 고유성을 담보하는 무지개 이론을 펼친다. “인류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은 신적 실재라는 순백의 광선이 인간 경험이라는 프리즘에 투과되어 나타나는 무수한 색깔과 같다. 그 광선은 셀 수 없이 많은 전통과 교리, 종교를 통해 굴절된다”고 한다.

백색 광선은 ‘궁극적 실재’이고, 일곱 가지 색깔을 띠고 나타나는 무지개의 색상은 구체적인 역사적 종교들이다. 세계의 각 종교는 곧 한 개의 ‘신적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문화적, 역사적 반응이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역사적 종교는 그것이 불교든, 이슬람교든 신도교든 기독교든 간에 빛이 스펙트럼을 통과하면서 발생시키는 파장들을 다 나타내지 못한다고 한다. 각 종교가 가진 고유소(固有素), 다양성 그 자체가 다른 종교의 그것들과 더불어 신적 실재를 더욱 완전에 가깝게 드러낸다.

파니카에 따르면 특정 종교의 유형적 특성이 타종교를 판단하는 규범적 잣대가 될 수 없다. 다른 종교 안에는 우리가 믿는 구원 내용이 없으므로 종교로 인정할 수 없다든지, 그 종교 안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야 한다. “구원에 대한 실질적 이해와 체험이 개별 종교마다 나름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무지개 색상의 하나인 빨강색이 보라색에게 “너는 색깔이 아니다”고 말할 수 없고, 무궁화 꽃이 들국화를 향하여 너는 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백만 송이의 가짜 장미는 한송이의 진짜 장미와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다. 진짜 장미는 인조장미를 향하여 “너는 꽃의 모양은 갖고 있지만 살아 있는 꽃이 아니다”고 말할 수 있다. 파니카가 진짜 꽃과 진짜 꽃을 대조한 것은 아날로지를 잘못 설정한 것이다. 진짜 꽃과 가짜 꽃을 대조해야 옳다. 창조주 하나님이 부여한 생명의 종교, 계시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유사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등잔 모양은 다양하지만 비쳐 나오는 불빛은 동일하다”고 한다. 각 종교의 의례, 상징, 교리체계, 성직제도, 윤리적 계명은 다양하고 서로 다르지만 추구하는 내면의 가치는 동일하다고 본다. 상대주의를 전제로 한 신념이다.


“산의 등정로는 다양하지만 호연지기는 서로 통한다” 주장

종교다원주의의 핵심은 구원관에 있다. 각 종교는 구원에 대한 실질적 이해와 체험을 갖고 있다고 한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종교에도 그것은 있다고 한다. 구원은 해탈, 모크샤(moksa), 진인(眞人), 지복직관(至福直觀)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각각의 종교에서 나름대로 참 구원의 모습에 도달한 사람들은 공통의 특징을 보인다. 구원을 받은 참 종교인은 자기중심적 존재에서 실재 중심 혹은 생명 중심의 존재로 삶의 지향성이 변한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벗어나 전체 생명과 더 높은 진리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생사의 두려움을 극복하여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을 하나로 꿰뚫을 줄 안다. 사랑을 자발적으로 실천한다. 하나님의 나라, 혹은 불국토(佛國土) 혹은 대동세계를 실현하는 데 힘쓴다고 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등정로는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 있다고 본다. 등정로마다 산의 풍광이 다르고, 산세나 기후 변화도 달라 어느 길로 산을 오르느냐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한다. 등정로가 달라도 일단 정상에 오르면 호연지기가 통하는 것처럼 어느 종교를 통하든지 절대자 궁극적 실재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구원종교이다. 인격적, 공동체적, 역사종말론적 개념의 구원을 제시한다. 죄 사함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신비한 개체적 몸의 부활 신앙과 영원한 생명을 구원으로 제시한다. 한편 불교는 니르바나(해탈)의 경험을 구원으로 본다. 기타 종교가 나름대로의 구원이라고 일컫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이 영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대비시켜 동일시하는 것은 범주착각의 오류이다. 성경과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에서 보면 종교다원주의는 명백한 이단이다.

주목할 것은 종교다원주의가 자유주의 신학과 신신학에 개방된 태도를 취하거나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 교회 안에 독버섯처럼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건전한 신앙고백을 가진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는 교단, 이단자들을 제재하지 않는 교단과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혼합주의·종교주의 도전에 직면한 21세기 교회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의 공격방향은 전방위적이다. 사방이 적군들로 싸여 있다. 교회의 배타성에 대한 일반종교나 사회의 시선은 예전에도 곱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위협받는 절대 진리
진리의 유일성과 구원에 대한 오직 예수는 기독교의 존립기반이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 그리고 종교의 연합과 일치, 교회 안에서의 에큐메니칼을 넘어 타종교와의 에큐메니칼을 외치는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이해되고 공감하는 폭이 넓어지고 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의 보도, 영화와 인터넷의 왜곡된 정보의 재생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누룩보다 더 빠르게, 광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일부 진보주의나 다원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되고 있는 다른 종교에 대한 구원의 주장은 언론들이나 타 종교에서 매우 좋아하고 흐뭇해하는 메뉴들이다.

한국교회에서 얼마 전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에 대해 진보그룹의 여성신학자들이 크게 반발했다. 가부장적 아버지로부터 억압당하는 여성들이나 남성들이 아버지로 소개되는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논리가 존재한다. 더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사회문화적인 권위 가운데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었다.

인간의 죄성과 그로 인해 야기된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부인하는 쪽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변해야 하는 쪽으로 주문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인간의 문제를 하나님으로 돌리는 곡해가 일어났던 것이다.

구원에 대한 왜곡
그러나 하나님만 왜곡한 것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부분도 왜곡시켰다. 감리교의 변선환 학장의 사건은 종교다원주의의 단적인 예다. 산 정상을 올라가는 길은 여러 방법이 있다는 논리로 구원에 접근한다. 일반은총 가운데 하나님이 다른 종교에서 다르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런데 이 주장이 옳다고 했을 때 한 하나님이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해놓고, 다른 종교에서는 다른 방법의 구원을 제시하는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만약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나님이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만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다. 신이 한 입가지고 두 말하는 이중성과 거짓말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 논란의 핵심은 기독교를 종교로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종교가 아니다. 굳이 종교로 분류할 때 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만, 일반 종교가 세워지는 과정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21세기는 그런 기독교의 독특성을 거부한다. 자기들의 종교와 비슷하거나 동일하기를 요구한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종교단원주의와 포스트모던에 부응하는 신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그 중에 하나다. 성경이 독특한 영감성을 부인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다양한 길과 하나 되는 종교
미국의 경우도 성 윤리 논란이나 구원의 다양한 길에 대한 수용 폭이 매우 넓어지고 있다. 미국성공회는 지난 2월 불교선수행자인 케빈 듀 프레스터는 북부 미시건 교구 주교로 선출했다. 또한 4월 초 시애틀 교구의 앤 홀름스 레딩 신부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지만 또한 무슬림이라고 밝힌 뒤에 자신의 직임을 사퇴하기도 했다.

미국 성공회의 이런 경향은 점차 심해질 것으로 신학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웨이드 클라크 루프 종교학 교수(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대학교)는 “혼합주의와 관련해 성공회의 문제는 미국에서는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며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해, 자신의 종교에서보다는 다른 믿음체계에서 영적지혜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미국성공회는 2003년 동성애 주교를 선출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런 혼합주의 확산은 교회 안에 점점 동성애의 문제나 각종 성윤리 문제에 대한 허용이 미국을 넘어 각 나라로 확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교회의 동성애 대한 시각은 점점 선이 흐릿해지고 있다.

동성애를 질병의 차원으로 보기시작하면서 모든 동성애자들에 대한 시각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 죄를 인권과 질병으로 몰아가고, 포장하다보면 절대 선을 넘어가는 것은 쉽다. 그러나 동성애를 죄라고 지적하는 이들을 고리타분한 보수주의자들이라고 폄훼한다는 점에서 참기 힘들고 버티기 힘든 사회적 정죄가 깊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화석화 되는 기독교
개신교의 경우도 교회는 딱딱한 껍질로 쌓여진 종교화로 더 많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종교생활은 암흑시대라고 하는 중세시대의 교회로만 족할 수 없을 만큼 21세기 교회는 종교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교회의 조직을 위해 이뤄지는 설교가 있고, 봉사가 있다. 사회의 안전망을 위한 노력과 봉사에 분주한 교회가 많아지지만 정작 복음의 본질을 놓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들어 지역교회들이 뛰어든 노인복지에 대한 부분도 한 편으로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의 재정적인 문제 해결이 동기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만큼 솔직한가 묻고 싶다.

교회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기보다 후원확보를 위한 개인적인 역량과 아이디어를 발휘하는게 옳은가 자문해야 한다. 21세기 교회가 싸워야 할 것은 외부적인 환경만이 아니다. 내부적으로 겪는 복음의 본질에 대한 부분이다. 교회가 스스로 복음에 서 있지 않은 가운데 외부의 강력한 도전을 이길 힘은 없을 것이다.

혼합주의, 다원주의, 포스트모던의 도전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 하나님 되심의 포기다. 그러나 이것을 포기하면 기독교의 진리와 핵심을 잃는다. 다른 것은 변할 수 있지만 이것은 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변종 나르시즘
그러나 미국에서 나타나는 ‘변종 나르시즘’은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자신에게 효과 있는 믿음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는 종교적 성향이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날 여지가 충분하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 출석할 때 하나님이 내게 어떤 복을 주실 것인가를 저울질 한다. 교회 출석은 선택사항이다. 이 선택 사항은 타종교에도 문을 열어놓고 환영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성령의 인도와 회개케 하는 구원의 역사는 미미하게 일어난다.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공식을 외듯이 믿고, 삶의 변화가 없는 지식적이고 의지적인 영접은 매우 위험스러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너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성공회가 다른 교단보다 혼합주의가 강하게 나타나지만, 긍정의 신학은 미국 교회를 덮고 있다. 자기계발서 같은 설교와 주장이 미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은 “내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룰 수 있다”는 “내가 이룰 수 있다고 믿으면 가능하다”는 것으로 바꾸었다. ‘생각’을 ‘믿음’으로 환치했지만, 이 믿음은 하나님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전자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 긍정의 신학을 환호하고, 교회 교육의 주요 메뉴로 가져왔다. 매우 위험한 사상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과 혼적인 능력은 매우 활발한 문화적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가인이 놋 땅에 거하면서 이룩한 눈에 보이는 것들처럼 말이다.

 

 

 

누룩의 성령 역사
그러나 영적인 성령의 역사는 눈에 그다지 띄지 않는다. 매우 느려 보이며,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확산된다. 성격이 급한 이들은 이 방법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선동하고, 주장하고,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뭔가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당장 결과물을 얻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성령의 감동과 이끄심이 없이 감정적인 충만을 성령의 충만으로 오인하면 어떡하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누룩을 택해야 한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선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인도하심에 의지하는 의존적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개입하고 통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권리의 포기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

21세기 교회를 향한 도전은 20세기와 다른 형태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전략을 짜기 전에, 대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전에 우리의 순결과 본질적인 믿음을 점검해야 한다. 21세기에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파도를 넘길 수 있는 힘은 우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한 선언 가운데, 우리의 순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앞장서서 나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특별하다. 그리고 그분만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혼합과 다원의 요구 속에, 우리의 이 답변은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다.

2009년 05월 22일 (금)

* 관련자료 : 조용기 목사 동국대 강연 내용 전문
요한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행전 4/12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고 하더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

갈라디아서 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 그러나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딤전 4/1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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