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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지혜

이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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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11-25 02:28 조회2,0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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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고 그대로 실천한 사람

 

 이세종 선생님은 한국의 토속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분이다. 그는 10여년 이상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40세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얼마나 열심히 성경을 읽고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지 몇 해 후에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에게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이처사라 불렀으나 정작 자신은 이제 세상에서 공(空)을 친 사람이니 이제부터 이공(李空)이라 불러달라고 하였다. 이공은 밤이면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 시켰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고 하면서 철저한 영적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 중의 한 분이 “맨발의 성자”라고 불리는 이현필 선생이다. 그리고 이공은 특히 순결사상을 강조했다. 이러한 순결사상을 따라 개신교 수도단체인 ‘동광원’이 탄생되었다. 이공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는 독사도 죽이지 않았고, 자기 발 밑에 깔린 개미의 죽음을 보고 울었다. 산길을 갈 때에는 칡넝쿨이 사람에게 밟히지 않도록 옮겨 놓았다. 이처럼 그는 산천초목과 금수곤충까지도 사랑했으며, 모든 생명 가진 피조물을 경외하며 살았다. 그는 예수님을 믿은 순간부터 세속적인 소유를 모두 버리고 철저히 오직 주님 한 분만을 따르고자 하신 분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와 같이 믿고 실천했던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제 36년의 암울하던 시기에 전남 일대를 밝게 비추는 빛으로 사용하셨다. 이세종 선생의 진실된 삶을 살펴보겠다.

 

 불신자 시절 : 1880년, 전남 화순군 동광리에서 삼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영찬’이었다. 어려서부터 착실하고 정직해서 무슨 일에든지 부지런하고 충직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일찍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하였다. 형님 댁에 같이 살던 그는 28세 때 동광리에서 20여리 되는 청풍면 차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10여년 동안 머슴을 살았다. 남의 집 머슴을 살면서 혼자 노력하여 한글을 배웠고, 부모대신 형과 형수에게 효도하였다. 짚신을 삼아도 제일 좋은 것은 형과 형수에게 주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을 자신이 신었다. 성격은 솔직하고 급하였다. 그리고 한 번 자기 비위에 맞지 않으면 천만금이 생긴다해도 하지 않았고, 한 번 결심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그대로 했다. 산에 나무하러 갈 때에도 ‘그 날 몇 짐을 하리라’고 작정했으면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그대로 하였다. 그는 나이 30세에 자신보다 16살이 어린 소녀를 결혼식조차 못 올리고 데려와 살았다. 그녀의 이름은 문순희였는데, 나이도 너무 어렸지만 아주 무식한 처녀였다. 결혼을 한 이공은 십년 작정을 하고 돈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게 발이 닳도록 열심히 일을 했다. 겨울에는 콩 잎사귀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돈을 모았다. 그래서 10년 후에는 동광리 부락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자식을 얻기 위해 산당(山堂)을 짓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많은 돈을 벌었으나 아내가 생산하지 못하였으므로 큰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식을 얻고자 무당의 권유로 천태산 중턱에 산당을 짓기로 했다. 산당을 짓는 동안 그는 상가집의 연장은 빌리지도 않았으며, 재료는 제일 좋은 것을 사용했고, 샘물은 삼중으로 파서 정한 물을 구별시켰으며, 마당에는 연못을 파고 정원도 꾸몄다. 이렇게 산당을 3층으로 준공한 후에 무당과 함께 살면서 제사상을 차리고 정성을 바쳤다. 그런데 얼마 후에 무당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하늘같이 받들던 무당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는 모든 정성이 허사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이 산당은 성경을 가르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지도나 가르침이 없이 혼자서 성경을 읽었다. 그러던 중에 ‘레위기’를 읽어보니 거기 나오는 제사법이 자기가 산당에서 차려놓고 지냈던 제사법과 비슷하여 신기하게 생각했다. 성경을 계속 읽는 동안 그는 산당에 열두 제상을 차려놓고 촛불을 켜고 매일 공을 드렸던 것이 헛수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하나님만이 참된 신(神)이며 그동안 자신이 잡신에게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그는 신약성경을 읽는 중에 기독교의 위대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후 그는 그동안 해온 미신 행위를 모두 버리고, 산당에 꾸며 놓았던 것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잡신을 섬기기에 열심이었던 만큼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도 정성이 지극했다. 그는 나이 40세 때 노나복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을 믿고 너무도 기뻐서 천태산 기슭 바람재 위에 높이 올라서서 아랫도리가 벗어진 줄도 모르고 두 손을 치켜들고 춤을 추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

 

회개와 변화 : 이공은 예수님을 믿은 후 철저히 회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었던 죄를 일일이 떠올리고 모두 배상해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버릇대로 남의 밭머리를 지나다가 콩잎을 뜯어먹은 것을 생각하고 그 콩밭 주인을 찾아가 죄를 자복하고 그 값을 변상해주었다. 또한 자기 돈과 곡식을 퍼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늙은이와 어린애가 많은 집을 찾아다니며 나눠주었다. 거지나 나그네가 찾아오면, 함께 식사를 하였다. 이공은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연구하였다. 밤에 혼자 앉아 성경을 읽을 때면 “오! 그러십니까.”라고 하면서 혼자서 자문자답(自問自答)하였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이세종이 하나님과 이야기한다고 소문이 돌았다. 그는 성경을 한구절 읽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예수를 믿으려면 철저히 믿어야 한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게 믿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성경에 가르친 대로 실행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행1:8)고 하신 말씀을 보고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살던 동광리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까지 찾아다니며 하루도 쉬지 않고 전도했다. 십자가를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했다. 때로는 식사도 잊고 전도하였다. 한 번 전도하러 갔던 집을 계속 찾아갔기 때문에 한 집을 다니는 데에만 짚신 세 켤레가 닳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온 삭개오를 보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가 갚겠나이다”(눅19:8). 그는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여 자기에게 빚진 모든 사람들의 빚을 다 탕감해주었다. “여기 있소! 당신의 문서 도로 받으시오. 모조리 탕감해 드리는 것이니 안심하시오.” 그는 빚진 사람을 불러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불질러 버렸다. 물건이든 돈이든 모두 탕감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공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마을 안에는 그에게 빚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덕행을 보고 면(面)에서 그의 송덕비를 경찰지서가 있는 통정리 마을 길에다 세워주었다. 그러자 이를 알게 된 그는 사색이 되어 면사무소를 찾아가 통사정을 하면서 “사람의 유언이나 송덕비는 그가 죽은 다음에라야 하는 것이지 산 사람에게 무슨 송덕비를 세웁니까?” 하면서 자기가 한 일은 그런 비를 세울 일이 못되고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달라고 하였다.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는 할 수 없이 면에서 그 비석을 땅에 파묻어 버렸다. 조그만 일에도 생색을 내며 공명심에 사로잡히는 작금의 세태와 얼마나 다른가!  

그는 외출할 때는 반드시 몸에 구제할 돈 얼마와 자기가 사사로이 쓸 돈 얼마를 따로 가지고 다녔다. 구제할 돈을 따로 가지고 다니다가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을 만나면 누구라도 주저하지 않고 주었다. 그는 물질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첫째는 복음 전도비, 둘째는 세금, 셋째는 남에게 갚을 것, 넷째는 구제비, 다섯째로 접대비로 책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남은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생활하고 없으면 굶어 죽는 경우가 있어도 그렇게 쓰라고 했다. 남을 구제하는 정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구제는 자기가 쓸 몫에서 떼어내어서 구제해야 참 구제이다. 자기가 먹을 것 안 먹고 해야지, 먹고 입고 쓸 것을 다 쓰고 남은 것을 구제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준다해도 자기가 입은 옷이 다 해어져 누더기가 되기까지 입으면서 주어야 참 동정이 된다.”

 

 

청빈거사(淸貧居士)


이세종 선생은 예수님을 믿은 후, 사람들이 자기를 ‘이공(李空)’이라 불러주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공(空)을 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철저한 자기부인의 정신이었다. 하루는 여제자 오복희씨가 이공에게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묻자, “얻어 먹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한마디 할 뿐이었다. 스승의 충고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자기는 도저히 그 교훈대로 실행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여러 해 동안 망설이다가 어느 겨울 눈오는 날 그녀는 맨발로 거지처럼 얻어먹으러 나섰다. 탁발을 실행했다. 구걸하러 다니면서 냉정히 거절하며 주지 않는 집을 거듭 세 번씩이나 드나들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했다. 이공의 음식이나 행색은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지나치게 검소했다. 잘 입으려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치스럽고 좋은 듯싶은 것은 저주스러워 못 쓴다고 하면서 헌누더기로 만족했다. 이공은 기도 중에 “도인(道人)은 화려하면 못 쓴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이공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생활, 꾸밈없이 사는 일이 그의 즐거움이요 자랑이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내 속을 다스리는 일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다”고 믿었다. 이공은 의식주 문제를 초월하며 살았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를 초월했고, 성(性)문제도 초월했다. 그는 심신을 자기 마음 먹은 자유자재로 통솔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음식에 대한 절제가 철저했다. 육식은 전혀 않고, 생선도 먹지 않았으며, 남의 집에서 명절 음식을 가져온 것도 먹지 않았다. 이공 자신이 금식하는 일은 보통이었으나, 남에게는 장려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지나친 음식대접을 극히 조심하여 좀 더 먹는 다 해도 변소 한 번 더 나녀오게 하는 수고 밖에 더 유익한 것이 없다고 가르치면서, 배부르기를 구하기 보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둘러 앉아서 성경 공부를 하는 시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음식을 들지 않았다. 공부가 끝난 다음에야 “성경 공부는 공사(公事)요, 음식먹는 일은 사사(私事)다. 이제 공사가 끝났으니 사사로 돌아갑시다”하며 음식을 먹었다. 그는 남을 구제할 경우에도 자기가 먹을 분량에서 얼마를 덜어서 구제하였다. 혹시 교회에서 위임식이나 무슨 큰 잔치가 벌어져 초대를 받으면, 이공은 참석은 해도 음식은 먹지 않고 자기 몫으로 내놓은 것을 가지고 나와서 구경꾼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고는 탄식하기를 “이렇게 하니 전도가 안됩니다. 교인들은 먹지 못하더라도 믿지 않는 마을 구경꾼들을 잘 대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했다. 이세종은 음식 중에 찰밥을 가장 좋아했다. 어느날 그는 찰밥 생각이 너무나서 아내에게 찰밥 좀 하라고 했다. 아내가 5홉 쯤 되는 찰밥을 해 주었더니, 그는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서 “아이구, 이 놈은 죄인 놈이오. 이 놈이 잘못이오”하면서 가난한 사람들 생각이 나서 못먹고 앉았다가 기어이 밥그릇을 들고 나가 이웃에 있는 가난한 집을 찾아다니면서 나눠주었다. 눈이 내리는 어느날, 식혜를 먹고 싶어해서 아내가 찹쌀 식혜를 만들어 주었더니, 두어 술 떠 먹고는 더 먹지 못하고 통곡하면서 “이 놈이 진작 어느 도랑물에라도 빠져 죽지 않고 이제껏 살아온 것이 이런 먹을 것이나 탐내서 죽지 못했던가?”하면서 탄식했다. 언젠가는 능주라는 곳에서 선교사 20주년 기념식이 있었는데, 이세종은 무명옷을 입고 갔다가 불쌍한 거지를 보고는 그만 옷을 바꿔 입었다. 거지의 옷은 검은 옷에 이까지 있고 작아서 볼쌍 사나왔지만 그는 태연히 참석했다.

이세종은 무엇 때문인지 종종 거리를 울면서 다녔다. “하나님, 죄인들을 어떻게   하실라우?” 그는 자비심이 충만하여 걸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입으로는 “하나님, 죄인들을 어떻게 하실라우?”하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호소했다. 불쌍한 죄인들을 볼 때는 “인간이 이렇게 살다가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지 않습니까?”하면서 측은해서 못 견뎌했으며, 혹시 잘못한 사람을 볼 때는 꾸지람을 했다가도 돌아서서는 눈물지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을 보면 답답해 하며 “그것을 가져다가 유익하게 써보지 못할 것인데, 왜 헛수고 하는고?”하고 안타까와 하였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락한 사람을 보면 “하나님, 이 사람을 잊지 말아 주소서”하고 밤새도록 기도하였다. 거지가 찾아오면 자기가 먹는 대로 손수 밥그릇을 들고 나가 주면서 다 먹기까지 곁에서 지켜보며 “빨리 먹고 한 집이라도 더 가서 구걸해야지!” 했다. 그는 덕(德)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남에게 덕을 끼치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덕을 위하는 일이라면 억지로 5리를 가자고 청해도 10리를 같이 가 주었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겐 겉옷까지 벗어 주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나타나 주님을 믿은 뒤 이공이 딴 사람으로 변한 것을 이용해서 그의 살림살이가 전부 자기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 때 이공은 한 마디도 답변하지 않은 채 다만 스스로 탄식하기를 “이제는 나도 죽을 때가 되었나 봅니다” 할 뿐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그대로 빼앗기는 일이 곧 얻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부자로 살던 그가 예수님 믿고 거지 모양으로 다니니 어떤 때는 친척들이 달려들어 자기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발악하고, 이공의 살림을 때려 부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망치 않았고, 그들이 바라는 요구 이상으로 편리를 봐주었다. 이공은 이 세상의 명예와 칭찬 따위는 털끝 만큼도 바라지 않았다. 그런 것은 뜬구름이요 허망한 것이라면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고 다녀선 안된다. 내가 남에게 무엇을 봉사하려고 해야지,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보고 탐나서 따러갔다간 반드시 시험에 빠질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는 칭찬받기를 바라는 일에 대하여 말하길, “쓸데 없이 칭찬하는 자도 마귀요, 칭찬받는 자도 마귀이다”라고 했다. 이세종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산천초목과 금수곤충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대하였다. 모든 생명 가진 것을 경외하고 넘치는 사랑으로 대하였다. “만물들아!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세.” 아름다운 산천과 우거진 숲을 바라볼 때면 그는 한량 없이 기뻐했다. 어느 날 부엌에서 갑자기 풍덩하는 소리가 나길래 나가보니 구정물을 담아 둔 동이 속에서 쥐가 빠져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공은 부엌 구석에서 막대기를 주워다 쥐가 기어오르도록 다리를 놓아 주었고 쥐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하였다. 개미 한 마리라도 자기 발에 밟혀 바둥거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위를 보아서는 내가 너에게 깨물려 죽어야할텐데 네가 나한테 밟혀 죽다니” 하면서 울기도 하였다. 이공은 ‘동물들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한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니 만물도 사람에게 반역한다고 말하면서 동물들이나 초목이나 무엇이든지 사람에게 매인 것들을 잘 보호하고 아껴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늘 이공을 따라 다니면서 이런 모양을 곁에서 지켜 본 그의 제자는 말하길, “이공께서는 언제나 말보다 행위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어디가나 가짜만 많은 세상에서 이공 어른만이 순금인(純金人)이었습니다”고 했다. 이공의 가르침은 누가 듣더라도 엄숙하고 두려웠다. 겸손은 매우 역설적이라 할 수 있다. 낮출수록 높아지며 겸손할수록 고귀해지는 역설적인 법칙, 낮추는 이가 사람일 때 높여주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상관관계에 근거해 있다.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소중하고 큰 미덕일 것이다. 이세종 선생님(이공)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겸손한 생활을 알아  보고자 한다. 

 

 

겸손(謙遜)의사람 이세종

 

이세종은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방과 같다. 마음이 거룩한 성전이 되면 성령님이 들어와 계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항상 깨끗이 준비해야 한다. 사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더러운 짓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법이다. 성령이 더러움에서 나를 지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정과 욕심을 순간순간 십자가에 못박아야 성령을 받기 때문에 성령을 받기 위하여 자기도 애를 써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세종은 신자가 건전한 믿음생활을 하려면 ‘신비’, ‘경험’, ‘지혜’, ‘지식’의 네 가지를 겸전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세종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았다. 거지가 구걸하건, 반가운 귀빈이 오건 집 식구들이 먹는 것과 똑같이 대접하였다. 어떤 때 부인이 화를 내면서 거지를 박대하는 눈치이면 아내를 타이르면서 거지도 우리에게 찾아오는 손님이니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성경 말씀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어떤 거지는 구걸하러 와서는 이공 댁에서 평소에 먹는 대로 주니까 너무 형편이 없는 음식이라서 안 먹고 가는 이도 있었다. 때로 이공은 거지에게, “당신은 혹시 마을 잔치 집에 가서 한끼라도 잘 먹었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이 놈은 우리 주님의 은혜를 알고 난 후부터는 지금까지 좋은 음식이라곤 입에 넣어 본 일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어느 날 이공이 병중에 있을 때, 미국인 노나복 선교사가 지나가다가 소식을 듣고 귤 몇 개를 이공에게 드리고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병이 회복된 후 계란 얼마를 가지고 선교사를 찾아가서 문병 왔을 때에 잘 대접하지 못한 일을 사과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을 존대할 줄 알았고, 목사를 험담하는 사람이 있으면 책망했다. 한 번은 사람들이 어느 목사를 험담하는 소리를 듣다가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시오. 그래도 목사라면 교인들을 앞에 놓고 남을 가르치는 분이신데 그럴 수 있겠소. 그만 두시오”라고 했다. 그래도 듣지 않고 계속 험담하자, “여보시오, 그만 두라면 그만 두지 왜 그러시오. 그런 말은 남의 험담이란 말이오. 남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지 않았소”하고 말렸다. 이공은 남들의 칭찬이나 악평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평에 따라 태도를 달리한 적도 없었고, 언제나 여전히 한 길을 갔다. 자기의 명예나 호평 따위는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의 생활 태도가 성경에 비추어 보아 맞느냐 안 맞느냐 반성할 뿐이었다. 남이 자기를 칭찬하는 일이나 존대하는 일은 절대로 싫어하고, 그런 것은 마귀 대접이라 여겼다. 칭찬이라는 것은 약자가 받으면 교만이 생기는 법이요, 덕이 장성한 사람이 받을 때는 도리어 괴로울 뿐이라고 하면서, 그러기에 칭찬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명예 따위는 털끝만큼도 구하지 않았다.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고 진리대로 살려고만 애를 썼다. 눈 한 번 뜨는 것, 발 하나 옮겨 놓는 것까지도 진리가 아니면 하지 않았다. 이세종은 늘 지혜롭게, 솔직하게, 양심대로 살라고 가르쳤다. 그는 솔직했고, 남도 솔직한 것을 좋아했다. 솔직하지 않을 땐 책망했다. 무엇이나 사실대로 해야지, 사람이 일부러 꾸며 만든 것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라고 절대로 금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며 사람의 칭찬을 즐기지 않는다. 바로 이공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오로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았다. 자랑은 교만이 되기 쉽고, 교만은 쉽사리 많은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은 온전한 처세를 위하여 빼어 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겸손은 지혜로운 자의 몫이며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聖經)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感動)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義)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5-17).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익한 책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속에서 진리를 찾을 것이요 문체를 따질 것이 아니며, 성경을 읽으면서   겸손되이 순직하게, 또한 성실하게 읽을 때 많은 유익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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