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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수꾼 이세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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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3 16:23 조회1,9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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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수꾼 이세종 이야기

 

 

1. 남한 지방 화순의 이상한 사람

 정경옥에게 이세종은 조선 땅에 화신(化身)한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정경옥은 「그는 이렇게 살았다」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하면서 이세종을 ‘곤고(困苦)의 그리스도’로 비유하여 다시 한번 소개했다.

 

“남한 지방 화순이란 곳에 이상한 사람이 한 분 계신다. 그는 학식도 지위도 없는 산꼴 농부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운 후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인고(忍苦)를 즐겁게 받고 있다. 그는 음식을 먹어도 사람이 참아 먹지 못할만한 것을 먹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드려보아도 결단코 먹지 아니한다. 그는 불쌍한 거지나 어려운 생활을 하는 빈민들을 생각하면 부드러운 밥이나 맛있는 반찬이 목에 걸리어 넘어가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그는 잘 때에 이불을 덮어도 몸을 절반만 가리우고 잔다. 왜 다 덮지 아니하느냐고 물으면 추울 때 잘 곳이 없이 길가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아 이불을 끌어 덮기 어려워 손이 떨린다고 한다. 우리는 그의 미숙한 사상이나 독단적인 이론을 반박할 수도 있고 그의 기괴한 생활형식을 배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이단인지 정통인지 그것조차 심판하여 보려고 하지도 아니하였다. 나는 다만 그의 순진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곤고를 본받아 실천하여보려는 열성만을 존경하고 사표(師表)삼고 싶은 것이다. (정경옥, 「그는 이렇게 살았다」, 116-117쪽)

 

 

2. 하나님, 이 죄인을 어떻게 하실라우?

 

 천태산 기슭,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오솔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 이세종은 울고 있었다. “하나님, 이 죄인들을 어떻게 하실라우?” 그의 마음 속엔 자비심이 강물처럼 넘쳤다. 걸음마다 눈물이었다. 이탈리아의 성자 프란치스코가 언제나 울며 거리를 지나갔듯이 이세종도 자비가 충만하여 걸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남의 영혼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이세종은 예수 믿다가 타락한 이를 생각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누구의 집을 방문할 때는 대문 밖에서 잠깐 발을 멈춰 서서 자기 마음을 반성해 보고 자기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갔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가슴 위로 덮고 자지 않았다. 이 추운 밤에도 남의 집 처마 아래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울 사람을 생각해서였다. 그는 밥을 먹을 때도 땅바닥에 차려놓고 먹었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걸인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땅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차마 먹을 것을 입에 넣지 못했다.

 

 

3. 송덕비를 땅에 파묻다  

 

 등광리 마을 사람들은 이세종이 예수 믿은 뒤 남의 빚을 탕감해주고, 빚 문서를 불지르고, 재난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한 선행을 고맙게 여겨 그의 선행을 기리는 송덕비를 큰 나무에 조각해서 마을길에 세워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세종은 큰일 난 듯 면사무소에 뛰어가 이렇게 사정하였다. “사람의 유언이나 송덕비란 그 사람이 죽은 뒤에나 하는 일이지 산 사람에 대해 무슨 비를 세웁니까?” 하면서 자기가 한 일은 비를 세울 일도 못되고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달라고 사정하였다. 면 사람들이 세웠기에 자기가 마음대로 없애버리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정 안들어주면 사람들을 시켜 자기가 없애버리겠다고 하였다. 여러번 눈물로 사정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는 할 수 없이 그 비석을 땅 속에 파묻어 버렸다. 지금도 파묻은 자리가 어디인지 알 길이 없다고 한다.

 

 

4. 아직도 이 죽을 놈이 살아있습니다

 

 천태산을 내려오는 길에 김춘일 화순 분원 원장이 이세종 선생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아직도 긴 여운을 가지고 내 마음 속에 살아있다. “이공(이세종)님이 예수를 믿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래도 조금 남은 돈을 늘 큰 주머니에 넣고 다녔대요. 다니다가 거지가 구걸하면 손을 쑥 집어넣어서 잡히는 대로 다 주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에서 들어서자 저만치 한 거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지 뭐예요. 그순간 그는 주머니 속의 돈을 꺼내어 다가와 구걸하는 거지에게 몽땅 털어 주었어요.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거지는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당연하다는 듯 아무 반응도 없이 지나쳐 가더래요. ‘저 저 저런, 문둥이 같은 자식 보래이. 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인데 인사도 없이 그냥 지나가나? 저런 못돼 먹은 놈...”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깐 뿐 이공님은 그 자리에서 가슴을 치고 말았답니다. “오, 주님!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구제한답시고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하다니! 오, 제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아직도 이 죽을 놈이 살아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이공님은 저기 천태산에 들어가 수도를 하셨다는 거예요.”

 

 

5. 성경 한 책의 사람

 

 “공[이세종]은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 영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는 동네 뒷산 깊은 암자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고 진리를 명상하는데 몰두하였다. 교회의 전통이나 교파의 신조나 제도의 구속(拘束)을 벗어나 그의 적나라한 영은 하나님의 말씀과 직면할 수가 있었든 것이다. 그는 어느 유명한 학자에게서 계통이 있는 사상의 체계를 전수한 것도 아니요 어떤 성경학자의 주석이나 비판을 참고한 것도 아니다. 그는 성경을 손에 들고 자기의 독특한 해석을 나리우고 성경을 통하여 자기의 독특한 영감을 받았다.

 

 공이 성경을 연구하고 진리를 명상하는 동안 그 자기를 잊어버리고 시절이 바꾸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철을 따라 옷을 바꾸어 입고 때를 좇아 음식 먹는 것을 잊었다.

 

 어느 때는 암자에서 명상에 빠져 있다가 동네로 내려오면 소를 모라 논을 갈고 있는 것을 보고야 자기가 산으로 올라갈 때는 길 가에 눈이 허여케 덮였었는데 이제 벌써 봄이 되었나 보다 하였고 어느 때에는 어린애들이 밭에서 참새를 날리고 있는 것을 보고야 비로소 가을이 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렇게 한 것이 몇 해가 지났는지 그 때부터 자기도 자기의 나이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옛적에 글을 좋아해서 가죽 책가에가 세 번이나 해어진 분이 계셨다드니 진리에 탐(耽)하여 해가는 것을 잊은 사람이 이 시대에도 있었든가. 학위를 간판 삼고 신학을 직업술로 역이는 속계(俗界)의 사람들에게는 공의 존재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지 아니할까 두려워 한다. (정경옥, “조선의 성자 : 숨은 성자를 찾어.” 「새사람」, 1937.7, 34쪽)

 

 

6. 천태산 바위 틈에서 들었다고 하시오

 

 그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면서도, “행여 여러분이 밖에 이 말씀 전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물으면, 나한테 들었다고 하지 말고 천태산 돌 틈에서 들었다고 하시오.” 라고 당부하였다. 그는 찾아오면 가르칠 뿐, 제자들을 묶어 단체를 만들지 않았다. ‘이세종파’가 생기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누구나 깨끗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자기보다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기성교회에서 하는 사경회에도 종종 참석했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나가 전도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도 생활 중심은 어디나 산 골짜기였다.

 

7. 사람이 사는 것은 말씀으로 사는 것이오!

 

 그가 병이 나서 며칠이 지나도록 물 한 모금 못 먹고 심하게 앓았다. 사람들은 다 죽을 것으로 알았다. 이웃 마을에서는 죽어 장사 지냈다는 풍문까지 떠돌았다. 그래서 나은 다음에 어디를 가면 그의 혼영을 보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일주일, 열흘 간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하루는 밤중에 업어다 산에 있는 기도실에 놓아달라고 청하였다. 마지막 소원이라 생각하고 들어 드렸다. 업고 가는데 너무 가벼워 마치 마른 나무를 업고 가는 듯 했다. 살가죽과 뼈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업어다 냉돌방에 뉘었다. 추운 겨울인데 불도 안 넣은 냉방이었다. 누워서 다리를 좀 주물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아무리 주물러야 팔다리가 뻣뻣하고 방바닥에 툭툭 닿아서 주무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물을 좀 떠다가 머리를 축이고 몸을 문질러달라고 하였다. 잠시 뒤 일으키라고 하여서 일으켜 드렸더니 연못 가로 업어다 놓으라고 하였다. 연못 가로 가자 물을 떠서 끼얹으라고 하였다. 물을 끼얹어도 시원치 않았는지 당신이 옷을 벗고 못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때 어떤 광채를 보게 되었다. 그 길로 뛰어 나와 걸어서 마을로 내려갔다. 내려가서는 집집마다 찾아나다니면서 전도하시기를 “사람이 사는 것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요.”하고 증거하였다.

 

 

8. 바보 성자

 

 어느 날 이세종은 나주 남평 오동나무 거리에서 어린 거지 하나를 만났다. 돈 얼마를 구제하고 조금 가다가 생각하니 그 거지의 허름한 옷과 헐벗은 모습이 떠올라 양심이 괴로웠다. 그래서 다시 그 거지를 찾았으나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하루 종일 거지를 찾아다니다가 해질 무렵에서야 원적골이라는데서 다시 만났다. 이세종은 거지를 붙잡고는 “당신께 좋은 일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입은 옷과 내 옷을 바꿔 입으면 어떻소?”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바꾸어 입었는데 그 모습은 참 가관이었다.

 

 거지가 입던 다 떨어진 옷을 자기가 입고 자기의 새 옷을 거지를 주니 이세종의 큰 몸집에 거지의 옷은 너무 작아 남 보기에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이세종의 조카들이 그 꼴을 보고서는 너무 창피해서 “그런 거지 꼴을 하고 마을에 가면 우리들까지 수치스럽다.”면서 야단쳤다. 그래서 이세종은 해가 질 때까지 돌아가지 못하다가 자기 모습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어두워진 다음에야 마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세종의 상식을 뛰어넘는 언행은 처음엔 사람들에게 바보처럼 보였으나 세월이 흐르자 차차 거룩하게 느껴지게 되어 사람들이 이세종을 성자로 받들게 되었다. 유영모 선생도 이현필과 함께 이세종이 살던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를 둘러보고는 이세종을 성자라고 부르기에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유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인이 무엇이냐? 물질에 빠지고 미끄러지는 나를 물질을 차 버리고 깨끗해 보라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위에서 내려온 얼을 생명으로 잡아 윗자리와 같이 거룩해 보자는 것이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내 위에 누가 있으랴 하는 자는 지각이 없기로, 마치 철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 머리가 가장 위인 줄 알고 일을 저지르니 못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박영호, 「다석 유영모(하)」, 250쪽)

 

9. 꼼짝 말고 이렇게 있어!

 

 어느 날 이세종이 거지처럼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길을 가고 있었다. 어느 만큼 가다가 그는 마을에서 가장 심술궂고 농담 잘하는 사람을 만났다. “어디로 가? 이리와봐.” 그는 다짜고짜 이세종을 끌고 가서 길가에 있는 나무에다 새끼줄로 꽁꽁 묶어놓았다. “꼼짝 말고 이렇게 있어!” 그리고는 제 갈길로 가버렸다.

 

 이세종은 예수 믿기 전에는 악하지는 않았지만 성격이 불같이 급했다. 이웃집 닭이 자기집 마당에 들어오면 얼마나 빨리 쫓았는지 닭이 날개 쭉지가 빠질 정도로 혼을 냈다. 이런 이세종이 예수를 믿고 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아도 그저 “예 예” 하였다. 본래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는데 얼마나 참고 자기를 죽였는지 모른다.

 

 이세종을 나무에 묶어놓고 간 사나이는 아침에 한 일을 깜빡 잊고 볼일 보다가 오후에 그리고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이세종은 나무에 묶인채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아니, 왜 풀고 가지 않고 여태까지 이렇게 있었소?” “매는 것도 법이니 푸는 법이 또한 있어야 가지요.” 사나이가 미안해서 묻는 말에 이세종은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그렇게 대답하였다.

 

 

10. 수도생활의 특징

 

 그의 수도 생활에 특징적인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 그는 성경에 철저하였다. 그는 ‘득도’한 후 성경 외의 다른 책은 일체 읽지 않았는데 혼자 방 안에서 성경을 읽다가, “아, 그게 그렇군요.” 하는 식으로 자문자답하여 제자들은 “우리 선생님이 하나님과 말씀 나누고 있다.”고 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문자적으로’(in a literal sense) 실천하였는데, 성경만이 그의 절대 순종 대상이었다. 둘째, 역시 성경 말씀에 순종한 결과지만 ‘득도’한 후 절대 청빈의 삶을 살았다. 자신의 재산 일체를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름도 아예 빌 공(空) 자로 바꾸어 제자들에게 ‘이공(李空)’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그를 따라 그의 제자들도 ‘박공’, ‘김공’ 하는 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 벌 옷에 구멍 뚫린 모자를 쓰고 다녀 종종 거지로 오해를 받아 봉변을 당했는데, 그 때마다 “십자가 고난을 얻었도다.”하며 기뻐하였다. 셋째, 절대 순결을 강조하였다. 그는 ‘득도’한 후 “결혼이 죄는 아니지만 독신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16세 아래인 아내를 누이라 부르며 성생활을 중단하였다. 정경옥의 방문기에도 나오지만 이 때문에 부인은 두 번이나 가출했고, 그 때마다 찾아가 돌아오도록 권면하였다. 이 일로 해서 그는 ‘호세아를 닮은 성자’란 별명이 붙었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순결을 강조하였다. 넷째, 생명 경외 사상과 실천을 강조했다. 그는 ‘득도’한 후 하루 한 끼만 식사했는데, 그것도 육식은 금했다. 짐승은 물론 모기나 빈대 같은 곤충도 죽이지 않았고 나뭇가지도 꺾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길 가다가 사람들에게 밟혀 줄기가 으깨진 칡넝쿨을 보고 쓰다듬으며 “얼마나 아프겠누.”하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11. 수도하는 방법

 

 이공은 수도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길, 한 가지 방법으로만 말고 때로는 도시에서, 때로는 산중에서, 때로는 많은 군중 속에서, 또는 혼자서 고독하게 골고루 경험해 보아야 좋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시작할 때는 몰라도 결론은 모두 좋게 맺어질 것이라고 했다.

 

 “수도는 고생을 겪어보며 연단 받으려는 것이니까 넉넉한 생활 속에서는 수도가 되어질 수 없다. 수도자가 먹을 것, 입을 것이 넉넉하면서 수도한다고 하면 남들이 비웃기도 하려니와 많은 시험을 당하게 된다. 그러니 수도하려는 사람은 아예 빌어먹을 작정을 하고 나서야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12. 살다 살다 못 살겠으면 또 나를 찾아오시오!

 

 이세종은 30세 때 14살짜리 시골 처녀를 아내로 맞았다. 이세종의 부인 문순희는 무식하고 생각이 좁고 답답한 여자였다. 예수 믿고 순결생활에 대한 깨달음이 커서 아내와 이혼은 하지 않으면서도 한 방에 거처하는 것을 거부하고 남매처럼 지냈다. 그렇게 하는 길이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밤에 아내가 남편 방에 기어들어오면 내쫓았다. 건강하고 무식한 아내는 참다못해 남편을 버리고 딴 남자에게 두 번이나 시집을 갔다. 그럴 때면 이세종은 아내가 쓰던 세간을 사람을 시켜 지게에 옮겨다 주었다. 그러고는 아내에게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아무 때든지 회개하고서 돌아오라고 간곡히 타일러 주었다. 그러고는 사탕을 사 가지고 찾아갔다. 아내는 이세종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그래도 또 찾아가면 아내는 구정물을 바가지로 떠서 이세종에게 물벼락을 뒤집어 씌우면서 “오지 말라는데 왜 자꾸 오느냐.” 고 대들었다. 이세종은 구정물 세례를 받으면서도 부인을 향해 “예,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시오, 하나님을 꼭 잊어버리지 마시오, 살다 살다 못 살겠으면 또 나를 찾아오시오!”하고 간곡히 권면하였다.

 

 

13. 고독한 성자의 길

 

 기자는 길거리에서 그와 손목을 나누었다. 그는 걸인이라고 밖에 더 볼 수가 없었다. 구멍 뚫어진 모자, 누더기 베옷, 헤여진 고무신, 모두가 거지보다 나을 것이 없다.

 

 공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뚜덤 뚜덤 힘을 드려서 내게 말하였다. 자기는 기억력이 부족하여서 한 번 본 사람을 어디서 다시 만나더라도 무심히 지나치는 때가 많으니 언제든지 다시 만나거든 먼저 아는체하여 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情)을 구하고 친구를 찾는다. 공은 의지의 사람이면서 정의 인물이다. 그러나 이 거칠고 쓸쓸한 세상에서 공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길모퉁이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양을 물그럼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신앙은 고독이여니 성자의 길이 외로울진저.

 

 (감신대 조직신학교수 정경옥 박사의 증언)

 

 

14. 그 풀들은 지금 탄식하오, 안하오?

 

 어느 날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로마서 공부를 하는 중에,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기를 탄식하며 고대한다.’(롬8:18-22)는 성경을 설명하다가 바로 앞에 앉아서 듣고 있는 박복만씨에게 말했다.

 

 “당신, 지금 앉았다가 누웠다 하고 있는 그 자리 좀 보시오.”

 

 박공이 자기가 앉아 뭉게고 있는 풀밭을 보니 마치 멧돼지나 산 짐승이 뒹군 자리같이 풀들이 어지럽게 깔려 쓰러져 있었다. 이공은 그 풀을 손짓하며 말했다.

 

 “그 풀들은 지금 탄식하오, 안하오?”

 

 “헤헤, 탄식합니다.”

 

 박공은 그렇게 지적을 받으니 좀 미안했다. 이공은 “모르고 한 일은 괜찮아요. 알고 지은 죄가 벌이 중하오.” 하고 나서는. “그렇소,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생의 가치가 없는 거지요.”했다. 그날 성경공부를 마치고 내려오다가 길가에서 쉬는 도중에 손에 쑥 한 포기를 뜯어 들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 쑥에서 무엇을 배울 것이 있소?”

 

 “예. 색깔이 변치 않는 것, 봄이 변함없이 오면 다시 돋아나는 것 등 쑥 한 포기에서도 배울 것이 많지요.”

 

 “그렇지요. 그리고 그처럼 변함없이 믿는 마음을 가지려고 피차 애쓰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신적으로 볼 때는 쑥뿌리보다 더 쓴 것이 진리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꿀보다 더 단 것이 진리이니 이것을 잘 붙들어야 한다고 했다.

 

 

15. 얻어 먹어라! 

 

 이세종 선생은 예수님을 믿은 후 철저한 자기부인의 정신으로 살았다. 하루는 여제자 오복희씨가 이공에게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묻자, “얻어 먹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한마디 할 뿐이었다. 스승의 충고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자기는 도저히 그 교훈대로 실행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여러 해 동안 망설이다가 어느 겨울 눈 오는 날 그녀는 맨발로 거지처럼 얻어먹으러 나섰다. 탁발(托鉢)을 실행했다. 구걸하러 다니면서 냉정히 거절하며 주지 않는 집은 거듭 세 번씩이나 드나들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했다. 입으로는 “날빛보다 더 밝은 천당”이란 찬송을 부르면서....

 

 

16. 도인은 화려하면 못 쓴다.

 

 이공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부터는 믿는 일에 아예 푹 빠지려했다. 거지가 되려하고, 남 보기에는 미친 사람같이 되려고 각오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그 정신을 넣어 주려고 훈련을 시켰다. 이공의 음식이나 행색은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지나치게 검소했다. 잘 입으려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치스럽고 좋은 듯싶은 것은 저주스러워 못 쓴다고 하면서 헌 누더기로 만족했다. 이공은 기도 중에 “도인(道人)은 화려하면 못 쓴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노자는 말하기를 “성인은 몸에는 거친 옷을 입으나 가슴 속에는 옥(玉)을 품고 있다.”고 했고, 장자는 “참다운 성인은 혁혁한 광채를 벗어버리고 평민과 범인(凡人)속으로 피신한다. 덕이 뛰어나면 외형은 잊어버린다.”고 했다.

 

 이공도 말하길, “좋은 옷을 입고 길을 가보라.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부러워 뒤를 돌아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간다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사치한 옷을 입고 다니면, 남들이 부러워서 빚을 내서라도 그 흉내를 내려할 것이 뻔한 일이니,  이는 내가 그 피값을 빨아먹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참 군자(君子)는 사치한 옷을 입고 다니지 못하는 것이다.

 

17. 꺾은 고사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소  

 

 어느 봄날, 연한 고사리를 꺾기 위해 산에 올랐던 이공과 부인 그리고 박복만은 각각 한아름씩 고사리를 꺾어 내려오는데 이세종은 천천히 허리를 굽혀 고사리를 하나, 둘 그리고 세 개를 꺾은 다음 더는 꺾지 못하고 손에 든 고시리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울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후 “난 암만해도 고사리를 못꺾겠소, 꺾은 고사리에서 피가 흐르는듯 물이 배어 나오지 않소, 고사리에 사람 같은 피는 없겠지만, 이것도 마디를 이처럼 꺾으면 더는 살수 없을 것 아니요.”하며 울어 버렸고 산길을 가로질러 뻗어간 칡넝쿨이 지나 다니는 사람의 발에 밟혀 줄기와 마디가 다 터지고 우유빛 진 액이 피같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아이쿠, 뉘게 짓밟혀 이렇게 물이 뚝뚝 흐르는구나” 하고 울상이 되어 이찌 할 바를 몰라 하기도 하였으며, 이나 빈대도 죽이지 않고 성냥갑에 넣어 물에 띄어 보냈고 절대 고기는 먹지도 않았다. 이공의 부인이 갑자를 심고자 박공과 함께 밭을 파서 잡초와 쑥뿌리를 뽑아 던지자, 이세종은 일은 하지 않고 박공과 부인이 일하는 뒤를 쫓아다니며 뽑아버린 잡초와 뿌리를 주워 담으며 “사람들은 고추나 가지등 자기들에게 유익한 것만 모종하여 심고 물을 주면서도 이런 풀들은 뽑아내어 죽게한다.”며 투덜대기도 하였다.

 

 

18. 이 놈은 죄인이오 이놈이 잘못이오!

 

 이세종은 음식 중에 찰밥을 가장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찰밥 생각이 너무 나서 아내에게 찰밥 좀 하라고 했다. 아내가 5홉쯤 되는 찰밥을 해 주었더니, 그는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서 “아이구, 이 놈은 죄인이오. 이 놈이 잘못이오.”하면서 가난한 사람들 생각이 나서 못먹고 앉았다가 기어이 밥그릇을 들고 나가 이웃에 있는 가난한 집을 찾아다니면서 나눠주었다. 눈이 내리는 어느 날, 식혜를 먹고 싶어 해서 아내가 찹쌀 식혜를 만들어 주었더니, 두어 술 떠먹고는 더 먹지 못하고 통곡하면서, “이 놈이 진작 어느 도랑물에라도 빠져 죽지 않고 이제껏 살아온 것이 이런 먹을 것이나 탐내서 죽지 못했던가?”하면서 탄식했다.

 

 

19. 내가 네게 물려죽어야 할 텐데  

 

 어느 날 부엌에서 갑자기 풍덩하는 소리가 나길래 나가보니 구정물을 담아 둔 동이 속에서 쥐가 빠져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공은 부엌 구석에서 막대기를 주어다 쥐가 기어오르도록 다리를 놓아주었고 쥐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하였다. 개미 한 마리라도 자기 발에 밟혀 바둥거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위를 보아서는 내가 너에게 깨물려 죽어야 할 텐데 네가 나한테 밟혀 죽다니....”하면서 울기도 하였다. 이공은 ‘동물들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한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니 만물도 사람에게 반역한다고 말하면서 동물들이나 초목이나 무엇이든지 사람에게 매인 것들을 잘 보호하고 아껴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늘 이공을 따라다니면서 이런 모양을 곁에서 지켜 본 그의 제자는 말하길, "이공께서는 언제나 말보다 행위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어디가나 가짜가 많은 세상에서 이공 어른만이 순금인(純金人)이었습니다.“고 했다. 이공의 가르침은 누가 듣더라도 엄숙하고 두려웠다.

 

 

20. 꼭 성령님의 뜻을 물었다

 그는 어디를 가려면 먼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살펴보아 어떤 동기에서 가고 싶어 하는가 반성해 보고, 자기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뜻이라고 느껴져야만 비로소 일어섰다. 같은 마을의 어느 집에 찾아 갈 때에도 그랬고, 어디서 유숙하게 되는 경우에도 꼭 성령님의 뜻을 물었다. 어느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선 대문에서 발을 멈추고 자기 마음을 일단 반성해 보았으며, 마음에 지금 찾아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들어가지 않고 그 길로 발길을 돌려 되돌아갔다.

 

21. 문등이 비렁뱅이 너는 내 아들이다!

 

 이공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개구쟁이들이 길을 막고 서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팔을 비틀고 괴롭게 하였다. 아이들은 그에게 “문둥이, 비렁뱅이, 너는 내 아들이다.”라며 놀려댔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지나갔다. 이공은 스스로 반성하기를 “사자의 입도 막으신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들의 입 하나 못 막아내서 내게 이런 애매한 말을 듣게 하신 것인가? 아이들이 나를 문둥이라고 욕하는 것은 내 몸이 비록 문둥이가 아닐지라도 내 속에 있는 문둥병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알려 주심이 아니겠는가?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비렁뱅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내가 세상 사람에게는 비렁뱅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야 빌어먹으니 옳은 말이다.”하면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다.

 

 

22. 비우니 성령의 불이

 

 “어느 해인가 광주 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다고 해요. 이 소식을 들은 이공 어른은 사경회 한 주간 동안 먹을 음식을 미리 준비하여 광주로 갔어요. 광주에 가서 보니 시가지 한 복판으로 흐르는 개울가에 많은 거지들이 움막을 치고 살고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본 이공은 걸인들이 살고 있는 천막에 들어가 가져온 모든 음식을 나눠주었어요. 그래서 사경회 기간 동안 자기는 내내 금식하면서 말씀을 들어야만 했어요. 사경회를 마치고 광주에서 도암 동광리의 집을 향해 약 80리 길을 걸어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오다가 너무 지쳐서 길가에 그만 누워버리고 만 것이었죠. 한참 동안 쓰러져 있는데 갑자기 뱃속에서 뜨거운 성령의 불기운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어요. 그 후 몸이 가벼워져 자기 몸이 바람에 날아갈 듯하며 집까지 쉽게 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계명산 분원장 박공순 원장의 증언) 

 

23. 화가 복이다!

 

 이공은 제자들에게 “병들었다고 울지 말고 나았다고 기뻐하지 말고 후에 또 올 병을 생각하라. 부자라고 기뻐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한탄 말라. 화가 복이다. 이 이치를 깊이 명심하며 살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사람들은 자기 살림에 특별한 축복이 없을 때에라도 재앙을 당하지 않는 것이 곧 복인 줄을 모르고 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믿고 당장 무슨 큰 복이 쏟아져 내려오지 않더라도 재앙이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복인 줄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어느 때 이공은 팔에 종기가 나서 무더운 여름날 동안 낫지 않고 계속해서 고통이 더해갔다. 그래도 그는 태연히, “아무 때라도 한 번은 썩을 몸, 죽으면 모조리 썩을 것이니 살아서부터 썩은들 어떠랴.” 하면서 약도 쓰지 않고 견디었다.

 “의인은 환난을 기뻐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믿음이다. 많이 당하면 당할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쓰라린 경험을 많이 겪은 이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경험이 곧 믿음이다. 많이 경험할수록 잘 믿는 것이다.”

 

 24. 참다운 구제

 

 하루는 이세종 선생이 구제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참다운 구제란 자기가 쓸 몫에서 떼어 내어 하는 것이다. 자기가 먹을 것 안 먹고 해야지, 먹고, 입고, 쓸 것을 다 쓰고 남은 것으로 구제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주더라도 자기가 입은 옷이 다 해어져 누더기가 되기까지 입으면서 주어야 참 동정이 된다.”

  

25. 공기만을 먹고 사는 수행법

 마지막 무렵 이공생활은 극도로 가난하였다. 나흘만에 지은 움막에서 제자 박복만과 함께 생활하였던 이 3년간은 쑥과 보릿가루, 콩가루, 서숙가루, 도토리 가루등으로 연명하였으며, 소금외에는 반찬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시간들을 명상하며 보냈으며, 이세종을 사모하는 제자들이 찾아오면 늘 성경을 강해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의 독특한 수도법이 나타나는데 바로 동양의 신선도에서 선인들이 곡기를 끊고 천단(天丹)이란 것을 먹고 살았다고 하듯이 그도 호흡의 기(氣) 즉, 공기만을 먹고 사는 수행법을 시작한다. 그는 거의 두달 동안을 물만 마시며 공기만 마시고 지냈다. 그러한 그의 몸의 살은 빠지고 피골이 상접하여 두 눈은 깊은 우물처럼 움푹 들어갔지만, 그 곳의 두 눈동자는 날카롭게 광채가 났다고 한다. 제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이세종의 호를 공(空)이라 부르는데는 이런 깨달음이 있어서 한 일인 것 같다고 한다. 그에게는 무(無), 공(空), 영(靈)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엄두섭, 「호세아를 닮은 성자」, 117쪽)

 

26. 그런 옷 있으면 거지들 갖다 입히시오!

 

 이세종은 1938년 이후 신사참배 문제로 한국 교회가 큰 시련을 겪게 될 무렵, 등광리를 떠나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언젠가는 일본 경찰이 이 곳 등광리까지 와서 신사 참배를 하라고 강요할 것이고, 내 양심과 신앙으로 거부할 것은 당연하고, 그러면 그들이 나를 잡아다 고문하고 또 죽을 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찌 남을 죄인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내가 그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그래서 그는 사람 접근이 어려운 화학산 깊은 골짜리로 들어갔다. 이상복ㆍ박복만ㆍ오복희 같은 제자들이 그곳까지 따라가 성경을 배웠다. 두 번이나 가출해서 ‘딴 살림’을 차리다 집으로 돌아온 ‘고멜’부인도 그 때쯤 그를 이해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산 살림 뒷바라지를 하였다. 이세종은 그 곳에서 3년 동안 풀뿌리로 연명하며 지내다가 별세하였다. 그는 자기가 세상을 떠날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제자들을 시켜 미리 나뭇가지를 엮어 상여를 만들었고 봉분을 만들지 말고 평토장으로 할 것을 당부한 후, 경고성 유언을 남겼다.

 

 “행여 나 죽거든 지금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입혀 묻으시오. 수의 해 입힌다고 멀쩡한 옷 땅에 묻어 썩히면 되가 되오, 그런 옷 있으면 거지들 갖다 입히시오. 나 죽고 내 옷 벗기면 벌 받소.”

 

 그 때가 1942년 2월,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겨울 끝자락이었다.

 

27. 이세종 선생

                                    최흥욱

 

화순 도암에 가면

숨은 성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동양적 신선 냄새가 풍기고

한국적 예수 냄새가 나는 사람

이세종 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다

 

머슴살이 하면서 돈 모아 부자가 되어

천태산 기슭에 별장 같은 산당을 짓고 살더니

예수 믿은 후 자기에게 빚진 마을 사람들의 빚 문서들을

불질러버리고 모조리 탕감해 주고

창고문 열어 쌓아두었던 양식과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땅들은 구제에 써 달라고 면사무소에

몽땅 바쳐버린 청빈의 길 걸어간 이세종 선생

 

마흔살 되던 어느 날 예수 믿기 시작하여 글 깨우치고

성경 읽기 시작하더니 진리를 깨닫고는 밤이면 성경을 외우고

 낮에는 마을 처녀 총각들을 모아놓고

“파라 파라 깊이 파라!”하면서 성경을 가르쳤던

한 책의 사람 이세종 선생

 

독사도 죽이지 않고

발 밑에 깔린 개미의 죽음을 보고 울었고

길에 뻗어나온 칡 넝쿨은 밟지 않고 옮겨 놓고 지나갔고

길 가다가 마을 아이들이 팔을 벌려 길을 막고 지나가지

못하게 하면 지나가지 않았으며 늘그막에는 깊은 산 속에서

움막 쌓고 살면서 쑥을 뜯어먹고 지낸 모든 생명 가진 것을

경외한 넘치는 자비심의 사람 이세종 선생

  

젊은 아내를 얻어 부부가 아니라

누님이라 부르며 살았고

아내가 두 번이나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때마다

아내의 살림살이를 옮겨다주고

그 뒤 계속 옛 아내가 사는 집에 심방 가서

전도하더니 두 번이나 집 나간 아내를

받아들여 기어코 회개시킨

호세아를 닮은 사랑의 성자

 

자기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이공(李空)으로 불리기를 원했고

예수 믿는 그날부터

다른 것은 알지 않기로 마음먹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한분만 위해 살아갔던

오직 예수의 사람 이세종 선생

 

전남 화순 도암 마을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사람아 사람아 예수의 사람아

한번 도암 골짜기 등광리 마을

천태산 바위 틈을 찾아가서

거기서 흠뻑 이공의 영기를

마시고 돌아오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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