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성자 이현필 > 믿음과 지혜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믿음과 지혜

맨발의 성자 이현필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4 18:37 조회2,770회 댓글0건

본문

맨발의 성자 이현필

                                                                  글쓴이: 최흥욱 목사(서부동산교회 담임)

 

 

e4d265f4144794a07ddae0b68a570dac_1476437746_56.JPG

 

이현필 선생 사진

도민증에 붙어 있던 사진으로 인물 사진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다.

​​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당신은 아십니까?        
당신은 들어보셨습니까?     
한국의 맨발의 성자에 대하여  

섬진강 굽이굽이 맨발로 걸으며 
눈 덮인 지리산 마루에 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사랑이 밀려와 
'아 십자가 아 십자가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감격하여 십자가의 노래 부르며 흐느껴 통곡하던 님       

지리산 우거진 솔밭, 갈대밭 속에 
한번 엎드리면 꿈쩍도 않고 일어날 줄 몰라        
까마귀가 송장인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까악 울다가 
그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찍을 때까지  
잔등에 흰서리 덮이고 수염엔 고드름 달린 채 
밤새워 목숨 걸고 겨레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던 님

한 마리 잃은 양을 찾기 위해 
거지같은 헌 옷에 맨발로 걸식 탁발하며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준령 험치 않소
 방울방울 땀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노래하며        
30리 50리 산길 지치는 줄 모르고 걸어간
거룩한 거지 전도인        

눈 오는 밤이면 배고프고 헐벗은 겨레의 가련한 얼굴들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 조끼도 없이 맨 저고리에 엷은 바지 입고       
불도 때지 않은 방에서 요도 없이 앉아 추위에 떨며        
주린 사람들 찾아 돌봐주던 따뜻한 사랑의 사도        
더럽고 냄새나는 거지굴 속에 칠성판을 깔고 누워서        
거지들과 함께 어울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던 님        

길가의 들꽃처럼 이름 없이 살다가        
사진 한 장 쓸만한 것 남기지 않고        
마지막엔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거적대기에 싸서        
평토장을 해 달라' 고 유언을 남기고는        
하늘로 훌쩍 올라가 버린 님        

아, 오늘 같은 영혼의 깊은 밤중엔         
맨발의 성자 그 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님과 같은 이는 볼 수 없어        
거슬러 거슬러 영혼으로 님을 찾아 나섭니다

 

 맨발의 성자,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집사도 아닌 평신도였다. 그는 한 시대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간 이름 없는 예수의 제자였다. 그는 한국 기독교 100년 역사 속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성자였다. 그가 곧 한국의 프란치스코라고 불리는 이현필 선생이다. 맨발의 성자라는 이름은 엄두섭 목사가 1978년 이현필의 전기를 쓰면서 책 제목으로 붙인 이현필의 별명이다.

  그는 한평생 집도 없이 하늘을 천장으로, 땅 바닥을 안방으로, 돌로 베개를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자원하여 거룩한 전도인으로 거지의 삶을 살다간 주님의 신실한 종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넥타이 매어 본 일도 양복을 입어 본 적도 없고 그 흔한 쌀밥 한 그릇 먹는 것을 옆에서 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이 “선생님께서는 왜 밥을 잡수시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니 “쌀 한 톨 만들기까지 농부들이 석 달 남짓 땀 흘려 수고하는데 농사도 짓지 않는 내가 어찌 그 쌀로 지은 밥을 체면도 없이 넙죽넙죽 먹어 치울 수 있겠는가?”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손수 병원에서 환자들이 먹고 버린 죽을 다시 끓여 먹으며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이현필의 삶은 고난과 순결, 가난과 청빈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러한 삶 속에서도 그가 살던 화순에서 서울로, 광주로, 남원으로, 진도로, 해남으로 가게 되면 그 멀고도 먼 거리를 볼 일은 뒷전이고 맨발로 걸어서 가고 오면서 만나는 사람 가리지 않고 복음 전하다 보면 3개월도 걸리고 6개월도 걸리곤 했다니 이런 그를 가리켜 ‘한국의 프란치스코’ 또는 ‘맨발의 성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정말 잘 한 것 같다. 프란치스코가 벼랑 끝에 몰린 유럽의 기독교를 살려내며 불거진 인물이라면 이현필은 소리 없이 한국교회의 언저리에서 예수의 영성을 추구하다 스러져간 참 예수꾼이었다.

 이현필, 그는 분명히 한국교회 영성사에 있어서 한 맥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특이한 사람이지만 숨겨져 있다. 그는 결코 그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거룩한 삶을 그리워하며

 

  이현필은 1913년 1월 28일 전남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용하리)에서 평범한 농부인 이승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보통학교를 마친 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에서 몇 십리 떨어진 영산포에 나가서 닭 장사를 하다가 일본인 목사에게 전도 받고 13세 때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후 한때 서울에 올라와 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그때 원경선 선생(현 풀무원 공동체 원장)을 만나 평생 교우가 되었다. 서울 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배운 그는 광주에 내려와서는 신안동교회 전도사로 일했으며, 해방 전에는 광주 YMCA의 강순명 목사를 중심으로 한 독신 전도단에 참여하여 이준묵 목사, 차남진 박사등과 전도 활동을 하였다.

 이현필의 삶이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22세 때 도암의 성자라고 불리는 서른 살 위인 이세종 선생을 만난 뒤로부터였다. 감리교 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정경옥 박사는 이세종을 가리켜 “한국에 성인이 나왔다.”고 소개했는데 이세종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자기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가 남매처럼 살았고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 속에서 지냈다. 또한 밤에는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가까운 마을의 처녀, 총각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켰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이세종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은 살아있을 때에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 봤지만 내 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하고 하였다. 이현필은 23세 때 결혼했는데 스승 이세종의 순결 사상을 따라 약 2년간 부부생활을 하다가 동방(同房)하지 않고,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해혼(解婚)했다. 아내가 앞문으로 들어오면 이현필은 뒷문으로 빠져 도망을 쳤다.

  이현필은 25세 때부터 28세까지 전남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에 들어가 기도생활을 하면서 이세종 선생의 지도와 영향을 받게 되어 수도자의 모습을 닮아갔다. 이세종의 사상을 주의 깊게 받아들이며 이세종에 관한 글을 모두 정리하여 간직하고 이세종의 전기까지 정리한 '우리의 거울'이라는 글도 쓰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이세종처럼 거룩하고 빛된 삶을 철저하게 살고 싶은 열정이 생기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는 생각한 바를 반드시 시행해야 하는 이현필은, 그후 도암 화학산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화학산 기슭 청소 마을 뒷산에 꾹골 골짜기가 있다. 이곳은 이현필이 새벽마다 기도하던 곳이다. 마을 사람들이 땔나무를 마련하러 올라가면 눈 위에 새 발자국이 있고 큰 바위(마당 바위) 한쪽에는 눈이 녹아 없어진 자리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가 바로 이현필이 무릎 꿇고 기도한 자리이다. 아주 추운 어느 겨울날이었다. 이현필이 기도하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그 마을에 사는 누님 집에 들렀다. 누님 집에는 어린 조카 세명이 있었다. 꽁꽁 얼어서 들어오는 동생을 본 누님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얼른 방으로 들어가서 언 몸을 녹이게 하였다. 한참 뒤 따뜻한 밥상이 들어왔다. 바로 그때 그 집에서 기르는 큰 고양이가 밥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고양이는 얼어서 상해 냄새나는 양말도 신지 않은 이현필의 발을 꽉 물고 놓지 않았다. 그때 이현필은 "고기 아니요."하면서 발을 빼냈는데 발에선 시커먼 피가 줄줄 흘러 내렸다.

 

지리산 서리내와 갈보리에서

 나이 30세 전후로 그는 지리산의 오감산이나 서리내에서 깊이 기도하였다. 산에 파묻혀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고, 특별히 부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남원에서도 몇 십리 들어가는 서리내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고 불리는 동산이 있다.

 서리내에서 행해진 교육은 보름씩 산 속에서 행해졌으며 경건생활과 노동이 엄격하게 함께 이루어졌다. 갈보리 역시 서리내와 함께 수도의 도장이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 모여 예배드리고 성경 강해를 들었으며 특히 그의 순결사상을 여기서 받게 되었다. 갈보리와 서리내는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훗날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이현필이 영성운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이 지리산이요, 그가 맨발로 걸어 다니던 길이 지리산 구석구석을 잇는 산길이었고, 그는 섬진강 맑은 물을 맨발로 건너 다녔다. 섬진강은 전북 마이산으로부터 지리산을 싸고 굽이굽이 감돌면서 남해 노량바다로 흘러가는 길이 220km의 생명줄이다. 이 섬진강은 우리나라 5대 강 가운데 하나로 다른 강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큰 들을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큰 도시를 끼고 흐르는 것도 아니다. 작은 들과 마을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골짜기를 굽이굽이 흐른다. 널따란 논 마지기, 높은 건물, 공장 하나 없이 강과 더불어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는 섬진강 마을을 이현필은 맨발로 걸어 다녔던 것이다.
 서리내란 이름은 선인래(仙人來)에서 왔다고 한다. 서리내 산등성이에 서서 바라보면 한편으로는 지리산 반야봉이 멀리 건너다 보이며 앞으로는 전남 광양 쪽으로 백운산이 구름 속에 내다 보인다.
노령산맥의 견두산 줄기가 느른하게 흘러내린 선경이다. 산골짜기 앞의 왼쪽 오른쪽은 상무, 하무라고 부르고 그 너머는 학재가 있고, 또 그 너머엔 백운천이 고요히 흐르고 있다. 사방 전망이 탁 터진 이곳은 이름 그대로 서리내(仙人來)의 선경이다. 선경이라서 이현필이 들어오기 전에도 황생원이라는 도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산신령을 만났다면서 수염도 깎지 않고 여자를 멀리하고 비린 것을 먹지도 않고 도를 닦고 있었다고 한다.
 서리내, 이곳이 바로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요 산실이요 말구유였다. 이현필은 이런 좋은 곳을 그의 수도의 요람으로 선택하였다. 해방 이듬해부터 이현필은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을 거느리고 서리내에 들어와 수도를 시켰다. 이곳에 모인 그들은 대부분 이현필 선생에게 감동되어 집을 나온 젊은이들이었다. 이 서리내 깊은 선경 속에서 그들은 이현필 선생의 인격적 감화를 받으면서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노래를 부르며 훈련을 받았다.
 한번 훈련받는 기간은 15일이었다. 보름 훈련하고는 쉬었다가 또 보름을 하였다. 이현필은 뒷산에 자주 올라가 기도했다. 이현필은 남원 목공소를 떠나 이 서리내에 숨어서 하나님만 부르며 엎드려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6·25가 터지기 전에 이현필은 이 산에 엎드려 있으면서 지리산이 몇 번이나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도 하고, 그가 종일 엎드려 일어나지 않으니 산에 사는 까마귀 떼들이 죽은 송장인줄 알고 모여와 까악 까악 울어대며 부리로 쿡쿡 쪼아댔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리산 줄기 서리내 산에는 늑대 사슴 멧돼지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잔등에 이끼와 잡초가 돋은 큰 멧되지가 새끼들을 데리고 와서 밭에 심은 곡식을 파먹어서 이현필의 어린 제자들이 이 짐승들을 쫒느라고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 산에는 뱀과 독사들도 우글거렸는데 이현필은 맨발로 다녔다.
 서리내에서 이현필은 쌀가루에다 물을 타서 생식을 했다. 그것조차도 어떤 때는 며칠씩이나 굶고 지내기도 하였다. 소녀들도 하루 한 끼씩만 먹었으니 어린 제자들은 수도한다고 하였지만 사실 먹고 싶은 생각 밖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먹는 것이라곤 풀뿌리와 쑥이 주식이었다.
 한번은 어디서 쌀이 생겨서 이현필이 소년 소녀들에게 쌀밥을 해 먹이라 해서 오래간만에 하얀 쌀밥을 먹게 내버려 두었더니 먹고 나서 모두 밥에 취해 쓰러져 누워 버렸다. 이현필은 이런 모습을 보고 "그것 봐, 쌀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겠나?"하고 말했다.
 보름씩이나 서리내 산에 살던 소년 소녀들이 자기 집 생각이 새록새록 피어오를 때는 이현필은 그 마음을 헤아려 "집 생각 간절하지?"하면서 친히 그들을 데리고 서리내를 내려왔다. 산을 넘어 이 마을 저 마을 그들의 집집을 찾아 다니며 데려다 주고는 자기는 다시 수십리 산길을 넘어 서리내로 걸아갔다. 며칠이 지나서 다시 이현필은 집집마다 심방하면서 그들을 데리고 서리내에 와서 또 훈련을 시켰다.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던 남원 서리내골이야말로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처녀 6~7명과 소년 어머니들 몇이 서리내에 모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서리내 동광원의 효시이다. 이 서리내골에서 이현필은 보름씩 소년 소녀들을 강하게 훈련시켰는데 반드시 노동을 겸하여 시키곤 했다. 이현필은 이곳에서 순결 사상을 강조하다 보니 남녀유별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철저하고 엄격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거룩한 땅 서리내 동산에는 옛날 살던 화전민도 없고, 도를 닦던 황생원도 온데 간데없고, 나무꾼들마저 다니지 않아 찔레와 억새풀이 길을 메웠고, 이현필이 수도하고 가르치던 그 옛 집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우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 십자가 아, 십자가


 서리내에서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고 불리우는 동산이 있다. 갈보리는 전북 남원시 수지면 갈촌 마을 뒷벌이다. 거기서 더 큰 길 쪽으로 나오면 홍실(호곡리)이란 큰 동네가 있다. 천마산과 견두산 사이로 느른히 펼쳐진 산자락이다. 이 동산에는 갖가지 나무가 우거지고 연못도 있고 커다란 대나무 숲이 있었다. 이곳을 갈보리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옛날 이 일대는 칡넝쿨이 우거진 비탈진 초원이어서 사람들이 '갈벌'이라고 불렀다는데 그것이 어느새 '갈보리'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이 동산은 마을에서 10분쯤 걸리는 호젓한 곳에 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농삿집이다. 이 갈보리에서 제자들이 모이게 된데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이현필을 따라 나선 김금남양(현 동광원 남원 분원장)의 작은 아버지의 농장이 바로 여기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갈보리에 농장을 마련하고 그 안에 저수지를 파고 밤나무 대나무 감나무 따위를 울창하게 심고 논을 만들었으며 농장 한편 구석에 아늑한 집 한 채를 농막으로 지어 놓았다.
 김금남 수녀는 동광원 수녀들 가운데 제일 먼저 수녀생활에 나선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가 먼저 이현필을 따라 나섰고, 그 뒤 김금남양도 남원읍에서 살다가 자기 앞날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끝에 어머니와 함께 작은 아버지의 농장인 이 갈보리 집에 아버지의 반대를 피해 와서 100일 기도를 드렸다. 이런 일 때문에 이현필이 이곳을 드나들면서 자주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됨으로 이곳도 서리내와 함께 수도의 도장이 되었다.
 그 무렵 갈보리는 가출인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였다. 이현필을 따라 집을 나온 남녀들이 부모에게 쫓겨날 뿐만 아니라 다니던 교회에서까지도 이단자를 따라 다닌다고 핍박을 받아 쫒겨난 사람들이 이 갈보리에 모여 들었다. 처음엔 주로 가정 부인들과 처녀들이었다. 30대 청년 이현필이 한번 남원 일대를 지나가면 교회에서는 바로 예수 믿어보려는 부인들이 자기 교회를 버리고 따라 나섰고, 집집에서는 처녀들이 집을 나와 이현필을 따라 나섰다. 그들은 남원 시내에서 20리나 떨어진 갈보리 외딴 집에 모여와 숨어 지냈다. 어쨌든 이현필이 한번 지나간 자리에는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남원 일대 집집에는 소동이 일어났다.
 남원 광한루 옆에서 삼일 목공소를 꾸려나가던 오북환은 목공소를 집회 장소로 내놓고 목수일 따위는 집어치우고 이현필을 따라 다녔다. 강남순은 자기 딸 김금남까지 데리고 이현필을 따라 다녔다. 삼일 목공소에 모여 성경을 가르칠 때 이현필은 청년 비구승 같은 옷차림에 머리는 삭발하고 거의 말이 없었고 사람 보는 데서 음식을 먹는 법이 없었다. 한번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밤늦도록 계속하고, 중간에 너무 힘들면 잠깐 쉬면서 무우를 깎아 먹고는 또 성경공부를 계속하였다.
 청년 이현필에게 반한 남녀가 갈보리 숨은 초가에 모여서는 뒷산 서리내에 엎드려 있는 이현필에게 알려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이현필은 맨발로 그 산을 내려와 오두막 방에 앉아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가르쳤다. 서리내에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엎드려있다 아침 햇살 받고 내려온 이현필의 잔등에는 서리가 하얗게 덮여 있었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아침 햇볕에 등을 돌려대고 녹이고 있었다.
거지 옷에 바싹 야윈 청년, 삭박할 머리에 언제나 수염도 깎지 않은 이현필이었다. 이현필을 따라 나선 사람들은 이 갈보리 동산에 모여서 늘 예배드리고, 성경 말씀을 듣고, 순결사상을 가르침 받았다.
 이현필이 서리내 산에서 기도하다 내려와 또는 갈보리에서 성경을 가르치다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갈보리 산에서'란 노래이다. 이 노래는 동광원의 주제가가 되어 버렸다. 동광원 성가 모음 제 1장이 되었다.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는 귀중하신 보배 피를 흘리사
구원받은 참 길을 열어놓셨느니라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아 십자가 아 십자가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그와 같은 끝없는 사랑을 알고서는
영과 육을 아울러 산 제물로 바치며
주님 기뻐하시는 종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 보배 피를 저에게 부어 주사
지금으로 이 몸을 거룩한 성전 삼아
영원무궁하도록 삼아주심 빕니다!


 이토록 애처로운 노래를 부르는 이현필의 모습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갈보리에서나 서리내에서 모이면 이 노래를 불렀다. 모인 사람들은 통곡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노래 곡조도 눈물겹고 슬픈 가락이지만 그들 처지가 핍박받고 집을 나온 신세요, 또 그 장소가 갈보리인지라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부르니 감격과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

 서리내에서 산 쪽으로 40리쯤 더 들어가면 오감산이 나온다. 이현필의 제자 김광석과 그 밖의 여제자가 기도하던 산이다. 절벽산이다. 한번은 이현필의 제자 김광석 집사가 지리산 오감산 기도막에서 특별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현필에게 누가 떡을 가져왔다. 이현필은 오감산 속에서 기도하고 있는 제자 김광석이 생각났다.
"겨울 눈보라 속에 갇혀 뭘 먹고 지낼까?" 이현필은 떡을 수건에 싸서 옆구리에 끼고 맨발로 40리를 걸었다. 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 기도하는 제자가 놀랄까봐 동틀 무렵 조용히 찬송을 불렀다. 김광석은 천사가 온줄 알고 문을 열고 절을 계속하며 나왔다. "김공, 얼마나 고생하시오!"하는 소리에 쳐다보는데 이현필 선생이었다. "아니, 이 밤중에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따스한 물을 끓이시오." 이현필은 겨드랑이에서 가지고 간 떡을 꺼내면서 "잡수시오. 시장하시겠소!"하고 권했다. 제자 김광석은 이현필 선생 이야기를 할 때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이야말로 예수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선생님을 볼 때 나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이현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화신이었다. 하나님의 화신이 예수 그리스도이듯이 우린 예수 그리스도와 화신이어야 하리라. 우리의 인격 속에 실제로 예수가 살아 움직이는 인격을 보는 날이 와야 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속에 다시 살아야 한다.
나사렛 예수의 얼, 정신이 우리의 실생활 속에 성육신 되어야 한다. 지금 이 오감산은 너무 깊은 산속이어서 찾아갈 수도 없고 제자들도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현필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에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의 삶을 훈련시켰다. 그 자신 스스로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 옷과 불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지내며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였다. 그는 식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을 했으나 일체 침묵하였고 오직 성경만 가르쳤고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생명외경 사상을 실천하여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동안 교회 지도자들이 이현필을 금욕주의자 또는 산중파라고 부르며 비방하였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찾아와서 보고 들은 사람들은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하고 소리쳤다. 이현필은 지리산 봉우리마다 깨끗하게 가득 쌓인 눈경치를 보며 수도하기 위해 세상도, 청춘도 모두 바친 제자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아, 십자가! 십자가의 길 뿐입니다!”하고 호소하곤 하였다. 도인(道人) 이세종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 이현필은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 모두 7년이란 산(山) 기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통곡하는 사람이 되었고 청빈한 수도자 프란치스코 같은 모습을 닮아 어질고 겸손한 성자의 모습을 이루어 갔다.



석학 유영모와의 만남 

 

  이현필의 주위에는 여러 유능한 인물과 명사들이 모여 들었다. 호남의 명사요, 나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최흥종 목사는 이현필을 친아들처럼 사랑했다. 서울 중앙 YMCA 총무요, 평화주의자로 20세기 종로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현동완 선생도 이현필을 방문하고 그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광주 YMCA 총무 정인세는 유도 2단에 덴마크 체조 교사이기도 했던 인물인데 YMCA를 그만두고, 양복을 벗어버리고,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이현필 운동에 몸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한국의 공자요, 작대 철학자로 이름난 삼각산 철인 유영모 선생은 이현필을 사랑하여 한평생을 이현필과 교제하였고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자진하여 봉사하였다. 1946년 처음 만나서 이현필이 세상 떠난 1964년까지 한결같이 사제의 의를 지켰고 진리와 도(道)의 정을 나누었다. 

 이현필과 당대의 석학 유영모와의 만남은 동광원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것이었다. 유영모 선생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 교장이었으며 유명한 한학자로서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함석헌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유영모가 이현필을 만난 것은 현동완과 정인세와의 관계성 속에서이다. 그들은 한국 안에서 성인을 찾아 헤매였으나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갈급함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그들은 전라도 화순의 이세종이란 인물을 찾게 되고 그 후 1946년 전남 광주에서 맨발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이현필을 만나게 되었다. 이 나라에 성자가 나기를 고대하던 현동완은 이현필에게서 성자의 가능성을 보고 당시 YMCA 연경반 공부를 맡고 있던 삼각산의 유영모에게 이현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로써 1946년 봄 광주 YMCA에서 유영모, 현동완의 공개 강연이 열리게 되었고 처음 대면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영모는 이현필에 대해 “한국에 인물이 없는 줄 알았더니 광주에 반쪽이 있었구나.”하고 말했다고 한다. 유영모 선생은 이현필을 무척이나 아끼었고 자주 광주 동광원에 내려와 동광원 식구들에게 강의하곤 하였다. 이현필은 유영모의 가르침에 매우 만족해하였다. 특히 유영모의 동정 순결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어느 날 이현필은 유영모의 강의를 듣고 나서 평하기를 “한마디 한마디 피투성이다.”고 할 정도로 전폭적이었다. 이현필은 유영모의 참 인격과 참 말씀에 끌리어 스승으로 받들었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유영모의 영성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강조한 것이라면, 이현필의 사상은 이웃에 대한 비계산적 무차별적 사랑의 실천이었다. 두 맥의 만남을 통해 자칫하면 은둔적이고 신비적인 영성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동광원이 균형 잡힌 영성을 갖추게 되었다. 유영모의 민족적이고 한국적인 여운이 뒷받침되어 한국의 토착적 주관을 가진 믿음을 이 땅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탁발 순회 전도 


  1949년에는 현동완 총무가 이현필과 그의 제자 일부를 서울로 초청하여 삼각산과 능곡 등지에 머물게 했다. 능곡에는 오원(吳園)을 세우고 남녀 청년들이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추운 겨울 날 이현필은 남녀 제자들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마을에 탁발을 내보냈다. 추운 겨울인데도 신도 신지 않고 맨발로 나섰다. 처녀들이 탁발하고 떠난 집에 뒤이어 남자들이 또 닥쳐 탁발을 청하니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요즘 무슨 거지들이 이리도 많아졌지?”하고 말하였다. 이현필도 바보 고아의 손을 잡고 맨발로 천천히 다니며 탁발을 하였다. 그 무렵 이현필의 모습은 완전히 거지였다. 긴 머리털은 목에까지 늘어졌고, 옷은 다 찢어진 옷이었다. 바보 소년과 바보 이현필은 아침에 떠나서 오후 세시쯤에야 집에 돌아왔는데 겨우 밥 한술을 얻어 가지고 왔다.​ 제자들은 경기도 고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고양 벽제에 있는 계명산 수녀원의 모체가 되었다. 경기도 능곡을 중심한 이현필의 젊은 전도대는 농사도 지으며 때로는 탁발도 나가고 모여서는 항상 기도하고 성경 읽는데 주력하였다. 한편 여름에는 전도대를 조직하여 남원, 순천, 여수, 강진, 해남, 광주 등지로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거지같은 헌옷에 신도 신지 않고 맨발에 걸식, 탁발을 하며 전도하였다. 해남의 명사 이준묵 목사도 적극 나서서 도왔고 자기 교회에 이현필을 청해 집회도 가졌다.

 해남교회에 김준호라는 청년이 있었다. 23세 청년인 그는 의사가 되려고 고시 준비를 하면서 교회에서 자며 교회 청소를 도맡아 하였다. 어느날 예수 잘 믿는 선생이 와서 탁별 집회를 한다고해서 기뻐 기다렸다. 교회 대문 앞에 트럭 한 대가 와서 섰는데 그 위에는 두 사람이 뛰어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현필과 제자 오북환이었다. 첫날 저녁 집회에 이현필은 두루마기도 입지 않고 바지 저고리에 맨발 차림으로 나서서 높이 강단 위에는 오르지 않고 밑에 선채 자기 앞 책상 위에 놓은 꽃병에 꽂힌 국화 한 송이를 뽑아 들고 말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나 같은 죄인이 집회한다고 해서 이 꽃 한 가지라도 함부로 이렇게 꺾지 말아야 합니다. 꽃은 꺾지 말고 핀 자리에 두고 봐야 합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을 기다리고 갈망하던 김준호는 이현필의 이 첫마디에 그냥 머리 숙이고 거꾸러졌다.
"나는 이 선생님을 스승으로 삼고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해서 김준호는 그때부터 이현필의 제자가 되어 따라 나셨던 것이다.​
​ 

한국 개신교 토박이 수도 공동체 동광원 

 

  그러던 중 6ㆍ25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1949년 여순 반란 사건으로 고아들과 떠도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현필은 탁발 수도를 그만두고 전남 화순군 화학산 청소 마을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화학산 기슭 청소 골짜기는 동광원의 고아원 운동의 발상지이다. 청소(淸沼)마을은 도암면 봉하리로 되어 있으며 마을에 맑은 쏘가리가 있어서 청소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현필이 김준호씨를 데리고 여기 와서 처음으로 고아들을 모아 기르던 곳이다. 맨 처음 이곳에서 고아원 보모 노릇을 한 사람은 정귀주 수녀였다.

 1950년 1월 광주에서 정인세 선생을 통해 YMCA를 중심으로 동광원(東光園)이란 이름의 고아원이 생기자 이현필과 그의 제자들은 동광원 고아들을 헌신적으로 섬겼고 결국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의 운동 단체가 되었다. 그들은 오갈 데 없는 많은 사람들을 하룻밤씩 재워주는 운동을 벌였다.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고 재워 보내는 이 사역은 후에 귀일원(歸一園)의 모체가 되었다. 여순 사건과 전쟁에 휘말린 민족의 역사 현장에는 고아뿐 아니라 과부, 장애인, 무의탁 노인, 나환자, 폐결핵 환자들이 들끓었다. 동광원의 고아 사역이 귀일원으로 통합되면서 처음 10여명을 돌보던 것이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 이렇게 보면 동광원은 주의 사랑에 붙들린 이현필 선생이 버럼받은 이웃, 고아, 걸인, 나그네들을 고난 가운데 사랑으로 돌보려고 세운 수도 공동체인 셈이다. 이현필 선생이 화순과 남원에서 훈련시켜 두었던 수녀들과 제자들을 이곳 광주로 보내 방림산 자락에 움막 짓고 고아들을 돌보게 하여 순결과 노동, 수도와 선행이 조화를 이룬 순결 신앙인들의 한국 개신교 맨 처음 토박이 수도 공동체를 이름하여 동광원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귀일원이라 하여 오갈 데 없는 정신 장애인들과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자기 집으로 알고 수도자 봉사자들과 함께 사는 곳으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자. 한 맘으로 살자. 하룻밤씩 재워 보내자"는 이현필의 가르침에 따라 세워진 사랑의 동산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은 동광원 영성의 기초가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이 말씀은 동광원의 정신을 요약한 것이다. 동광원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육체적인 일(선행)과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기를 지키는 정신적인 일(수도)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신앙인의 공동체이다. 동광원은 밖에서 보면 사회사업 단체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순결 신앙인들의 수도 단체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고아와 과부 같은 고통당하는 이웃을 돌보는 생활이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동광원의 삶은 세상 속에 있지만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고 주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수도 공동체 생활인 것이다.

 이현필 선생과 숨어서 수도하는 동광원 지체들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기도 밖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현재 동광원 식구들은 전국에 약 80명 가량이며 남녀 모두 독신 생활하는 공동체 형태로 살고 있다. 주로 전라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원에 본원이 있고 분원으로서 진도 분원, 함평 분원, 도암 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그리고 경기도 벽제 계명산 분원이 있다.
 독일의 신학자 하르낙(Harnack) 교수는 "수도원은 교회가 박해받을 때 지켜주고, 세속에 빠질 때 건져주었고, 이단 사교가 일어날 때 바른 신앙을 지켜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세 교회가 생명력이 사라지고 어두워졌을 때마다 베네딕트, 버나드, 프란치스코, 어거스틴의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고 도덕적 타락을 막아주고 정화시키는 영적 수원지가 되어 세속 교회에 신령한 물줄기를 대어 주었다. 수도원은 세속 속에 있는 교회의 영적 수원지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세상에 종교치고 수도원이 없는 종교는 없다. 불교도 원불교도 가톨릭도 그리스 정교회도 수도원이 있는데 우리 개신교만 수도원이 없다. 수도정신이 없이는 영성 생활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는 기도원은 많은데 수도원이 없다. 수도원 없이 교회가 예배만 가지고 종교생활을 해 나가려고하니 신자들의 영성이 메마르고 세속에 깊이 빠지고 경건을 잃어버리고 교양도 없고 천박해지고 말았다. 심각한 영적 위기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를 구원하기 위해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수도원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수도원을 세우고 그 수도정신을 세속 속에서 실천해 나가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동광원 같은 모임은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고 본다. 이제 동광원은 한국 개신교 수도 공동체로서는 맨 처음으로 가장 오랜 50년이 넘는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 동광원은 서구신학이나 서양 선교사 등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경 말씀을 그대로 따르려는 한국 사람들의 토박이 수도 공동체였다. 대천덕 신부는 한국의 기독교가 너무 서구화 되어 있고, 모든 것을 서구신학의 잣대로 재려는 경향을 아쉬워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동광원 같은 한국인의 자생적인 공동체는 매우 귀하며 계속 발전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저는 헌신짝입니다.


 동광원에는 전쟁 고아들이 많이 들어와서 살았다. 고아들은 동광원의 엄격한 생활과 훈련을 싫어하여 빠져 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광주 양림 다리 밑 거지들에게 가서 그들과 합류하고 한번 거기 들어가면 도무지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것을 본 이현필은 제자 김준호를 시켜 광주 시가로 흐르는 양림 다리나 방림 다리 밑에 거지막을 치자고 하였다. 김준호는 다리 밑 근처에서 생수가 나오는 곳을 선택해서 시킨 대로 거지막을 쳤다. 그 집은 건축비 한푼도 들이지 않고 30분도 안걸려 지어낸 거지막이었다.
그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쓰레기통에서 마른 해바라기 대를 주워 기둥을 삼아 세우고 부잣집에서 쓰레기를 담아다 버린 마대 자루를 주어 빨아서 벽을 두르고, 헌 가마니를 주워 지붕을 덮고 어떤 집 방 뜯어 버린 데서 기름 종이를 주워서 바닥에 깔고 거기서 고아들을 데리고 살았다.

 사람들이 이현필을 보고 "예수 잘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으면 "오장치를 짊어지고 나서라"고 대답하였다. 거지가 등에 지고 다니는 것이 오장치(오쟁이)다. 이현필은 제자 김준호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걸인 한 명을 스승처럼 붙여줘 같이 다니게 하였다. 탁발 생활을 몸에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성경도 정신이 살아야 도움이 되는 것이지 정신이 죽어 있으면 아무 소용없다."며 제자들에게 말보다 실천을 가르쳐 주었다.
 이현필은 기차나 버스를 탈 때도 제자들에게 "우린 제일 나중에 타자."고 하며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다 빼앗기고 문간에 서서 다니기가 일쑤였다. 한번은 이현필 선생이 기차를 탔는데 누가 자리 없이 옆에 선 것을 보고 양보하고 다른 데 가서 앉았다. 거기서 또 자리 없는 사람을 보자 다시 자리를 양보하고 밀려 밀려 기차문 밖 계단에 나가 앉았다. 그때 어떤 험상궂은 사나이가 이현필에게 다가와서 "우리 통성합시다. 성씨가 무엇이요?" "예, 헌가입니다" "헌가? 이름은 무엇입니까?" "신짝입니다" "헌신짝! 예끼 여보, 헌신짝이란 이름이 어디 있소?"
 사실 이현필은 자기를 늘 헌신짝이라고 불렀다. 여 제자들이 이현필을 보고 "선생님, 선생님"하고 부르는 것을 보고 "나보고 선생이라 하지 말고 헌신짝이라고 부르시오"하고 부탁하였다. 헌신짝 이현필, 그는 예수의 얼을 지니고 맨발로 예수의 길을 걸어간 참 예수꾼이었다.

 한번은 수색에서 서울 YMCA 농촌문제에 대한 강연회가 열렸다. 능곡에 사는 이현필의 제자가 보니 현동완 총무, 김모 박사 등 쟁쟁한 강사들이 연단 위에 앉았는데 그 가운데 이현필도 끼어 앉아 있었다. 다른 강사들은 양복 입고 안경 쓰고 그럴듯하게 앉아 있었는데 이현필은 풍채는 괴상하고 형편없었다. 헌 무명 바지 저고리를 입고 앉았는데 저고리는 어찌나 작은지 팔굽이 나오고 바지는 무릎 위로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발은 맨발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이현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버젓이 신사들 속에 섞여 앉았다가 자기 강연 순서가 되니 버젓이 나가서 열변을 토했다. 제자가 알아보았더니 이현필은 지방에 있다가 서울에 강사로 초청되어 올라오는 도중에 기차에서 고아를 만나자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 고아에게 입히고 고아의 옷을 바꿔 입고 그 모임의 강사로 나선 것이었다.
 동광원 화순분원 김춘일 원장이 입을 열어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이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1957년쯤이었나 봐요. 제가 광주에서 넝마주이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어느 골목길에서 큰 개 한 마리가 뛰어나와 갑자기 제 다리를 물어버렸어요. 바로 그때 2km 밖에 있었던 이현필 사부님은 저와 같이 놀라셨습니다. 45년이 지난 이 시간에도 그때 그 신비롭고 크신 사랑을 돌이켜 보면서 명상에 잠깁니다.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 옷은 내 몸이라고 하신 사부님. 지금도 그때와 같이 저희들과 함께 기뻐하시고 저희들과 함께 아파하시겠지요. 고통의 깊이에 따라 말씀이 들어오고 내 피(내 죄)를 내놓아야 예수님의 피(사랑)를 볼 수 있다고 하신 존경하올 스승은 삶으로 믿음으로 모든 고난을 달게 받으셨습니다."
 예수를 닮으려 했기에 아픔이 있었고 아픔을 환영하며 살아갔기에 기쁨이 넘쳤던 행복한 참 예수꾼 이현필이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작게 낮게 없는 듯이 살자."는 것이었다. 오늘의 괴로움은 괴로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일 기쁨의 씨앗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광야의 삶은 불편하고 제약을 많이 받고 괴로움이 많은 것이 아닌가. 어차피 광야에 내 던져져 살 바에는 더 이상 괴로움을 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괴로움이 더 하도록 살아봄은 어떨까. 이것이 바로 고통의 신비이리라.​

 


파계: 저는 위선자입니다


  말년에 이현필은 말 한마디도 못할 만큼 후두 결핵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그는 자기 건강이 오래 못갈 줄 알고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 가서 혼자 죽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로 가기로 작정하고 기차를 타고 그의 제자 셋째(한영우 집사)가 넝마주이하면서 살고 있는 신촌 거지 굴까지 업혀서 갔다. 그는 묘지에서 주어 온 칠성판을 깔고 누웠다.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면서 그는 죽은 사람처럼 핏기가 없어졌고, 그 자신도 운명의 시간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날이 새자 죽음을 넘긴 그는 필담으로 실로 놀라운 고백을 하였다.

  “저는 그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고백합니다. 제게 있어선 선행이 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귀할 뿐입니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님께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고 느낍니다. 그동안 저는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위선자입니다. 저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은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만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고기든지 좋으니 먹을 고기를 사오라고 부탁했다. 셋째는 굴비 한 마리를 사서 동냥 다닐 때 쓰는 때 묻은 깡통에 물을 붓고 끓여 가져왔다. 이현필은 그 국물을 자기 입에 떠 넣어 달라고 말했다. 셋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조기 국물은 후두 결핵으로 말 못하는 이현필의 목으로 넘어갔다. 그동안 한 번도 육식 아니 커피 한잔 마시지 않던 그가 고기 국을 마신 것이다. 그때가 바로 1955년 가을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파계이다. 그런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일주일도 못 버틴다는 후두의 병이 깨끗이 나은 것이다.

 훗날 그는 이때의 심중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가 저지른 파계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그동안 나의 금욕, 고행의 모습 때문에 따르던 사람들이 격분하여 나를 위선자라 몰아 붙이며 몽둥이로 때리고 동광원에서 쫓아내도 할 수 없다는 각오로 고기를 먹었습니다.”

 물론 이현필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 보기에 그는 금욕주의자 같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처럼 보였다. 더욱이 곁에서 지켜본 제자들에게 비춰진 인상이 하나님의 은총이나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철저한 절제를 통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오해될 것을 걱정하여 의도적으로 파계했던 것이다.

  

 

마지막 집회


 1964년 이현필은 광주 동광원에서 마지막 고별집회를 열었다. 새해 아침 광주 방림 동광원에서 열린 사상 처음 한달 동안의 수양회였다. 무척 쇠약해진 이현필은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마지막 집회를 열고 제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다.
 한번 하는 강의는 적어도 두세 시간 계속했는데 그냥 무릎 꿇고 앉아서 했고, 다 마치고 나면 무릎이 굳어져 일어서지 못하여 제자들이 양쪽에서 겨드랑이를 붙들어 세웠고 마룻방까지는 업어다 모셨는데, 송장같이 뻣뻣이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설교 시간만 되면 어디서 힘이 생기는지 우스운 얘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아, 기쁘다, 참 기쁘다"하면서 끝까지 계속했다.
 이현필은 마지막 유언 집회에서 피맺힌 교훈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절을 지켜야 그리스도의 은혜를 갚는 일이 된다." "음란과 돈을 이기는 일이 곧 세상을 이기는 일이다." "물질 없어도 살 수 있다고 믿어지면 그것이 천국이다" 그는 제자들과 모인 사람들에게 농부가를 부르자며 함께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게 하고 "아, 사랑으로 모여서 사랑으로 지내다가 사랑으로 헤어지자! 이번에 헤어지면 우리는 언제 또 만날는지 모른다."며 어린아이처럼 둥실둥실 춤추고 노래하며 감사하였다.​

 

 

아이고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이현필은 마지막 고별집회를 마치고 세상 떠날 때가 가까운 줄 알고는 급히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가장 사랑하고 사모하는 고장은 경기도 벽제 계명산 수녀원이었다. 그곳에 여 제자 정한나 수녀가 홀로 들어가 굴을 파고 살며 개척한 동광원 분원이 있고, 산수 좋은 뒷산 개울가에 현동완 총무의 별장 자리에 조그마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현 총무가 동광원에 기증한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계명산 수녀원에서 줄곧 기도하면서 자기가 세상 떠날 것을 미리 말하며, 제자들에게 지극한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장래를 부탁하고 일일이 축복하였다.

 ​1964년 3월 12일 계명산에 들어온 이현필은 이틀 동안 베틀방에서 머물다가 산장으로 옮겨와 닷새 동안 여기 있으면서 마지막 가르침을 주었다. 박공순 원장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선생님이 세상 떠나기 전날 밤에 동쪽 하늘에서 별안간 매우 강한 불빛이 현재 묘소 있는 가까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선생님은 '내가 살아도 여기에 살고 죽어도 여기에 죽는다'고 말씀하셨지요."

  최후의 순간이 왔다. 평생 영양실조로 시달린 그의 육체가 더 이상 오랜 병을 감당해내지 못하였다. 수녀들이 깨끗이 빨아 두었던 선생의 누더기 바지 저고리를 수의로 입혀 드렸다. 그러나 그는 입었던 옷을 다시 벗으며 “이것은 내가 깨끗이 입은 것이니 내가 죽으면 이 옷을 없애 버리지 말고 헐벗은 사람에게 주어 입게 하시오.”하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시체에 수의를 입히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또 “나는 죄인이니 내가 죽으면 관에 넣지 마시오. 죄인의 시체니까 거적대기에 싸서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도록 길가에 평토장 해주시오. 분상을 만들어 놓는 이는 화를 받을 것이오.”하고 유언하였다.

 임종이 가까워지면서 몸은 불덩이 같이 뜨거워지고 숨은 곧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자 무척 애썼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바로 이때 이현필에게 신기한 기쁨의 물결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기쁨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한 이현필은 또 다시 외쳤다. “아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면서 주위를 둘러보며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하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꽃피고 새 우는 봄의 문턱에서 이현필은 한 알의 밀알 씨가 되어 벽제 계명산에 묻혔다. 유영모 선생은 이 사실을 한시로 읊었다.  “도암서기무등등 현필이공계명치”(道岩瑞氣無等騰 賢弼李公啓明致) “도암의 상서로운 기운이 무등산에 오르고 이현필 공이 벽제 계명산에서 마치다”라는 뜻이다. (박영호, 다석 유영모下, 145쪽)

​ 이현필의 평생 갈망과 목표는 순결과 자기완성 그리고 고난당하는 이웃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복음 삼덕 곧 순결은 목숨보다 소중하며, 순명은 생명과 같은 것이고, 나 하나의 인력 완성이 가장 귀한 것이요,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결 청빈 순명의 수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걱정하는 이웃이 있으면 자기도 밤새 잠 못 이루고 함께 걱정했고, 형제들이 기뻐할 때는 자기도 춤출 듯이 기뻐하였다.

 우리도 이현필의 길을 가자. 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길이리라. 아, 제2의 이현필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오늘 우린 맨발의 성자를 어디서 또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아, 맨발의 성자여, 한국 강산에 신음하는 겨레와 비틀거리는 한국교회를 위해 다시 오라. 

내 앞엔 오직 하나의 길

갈보리산 오르는 길

비아 돌로로사로 가는 길

십자가 지고 땀과 피에 젖어

휘청거리며 가시와 돌밭 길로

걸어가신 님의 길

 

동광원 사람들이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참 목자 이현필 선생 만나

한결같이 부르짖었던 기쁜 소리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뚜렷하게 들려온다

 

병약하고 맨발 벗은 이현필 선생

나무 한 짐 간신히 지고

바위와 자갈길로

가시와 찔레 우거진 숲 사이로

두 다리 후들후들 떨면서 그렇게 걷고

제자들도 그렇게

스승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하늘 높이 솟은 종탑 아래

웅장한 그레고리안 성가

화려한 남녀 신도들 가득한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

아, 님의 발자국이 전혀 보이질 않네

예수는 서리내 찔레밭길

독사가 우글거리는 억새풀 속에

맨발로 다니며 “아 십자가, 아 십자가!”

통곡하며 부르는 예수였다

밤새 서리 맞으며

엎드려 부르는 예수였다

수염에 고드름이 달리며

목메어 부르는 예수였다

 

아, 나는 길을 찾았습니다

이것이다 바로 이 길입니다

님이 그렇게도 피 흘리시고

땀 흘리고 통곡하시며

홀로 밟고 가신 그 길

천리고 만리고

비바람 눈보라 몰아쳐도

나 따라가리이다 나 걸어가리이다

아, 아! 난

지리산 서리내와 갈밭(갈보리)에서

나의 님 예수를 찾았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