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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성자 방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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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5 23:41 조회2,3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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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성자 방애인

  

글쓴이: 최흥욱 목사(서부동산교회 담임)

 

 

예수의 얼을 가지고 예수의 형상을 닮아 예수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간 사람을 동양에서 말하라면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言)와 인도의 테레사(Teresa of Calcutta)를 말할 수 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가 곧 방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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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애인 선생(1909-1933)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평양 숭의, 개성 호수돈 여학교에서 배우고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거의 수도자 같은 삶을 살아가며 자선사업에 힘썼다. 

그는 지금까지도 한민족의 역사 인물로서 또는 한국교회사 속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사람이다. 방애인이 역사의 무대에 알려진 것은 일제시대 배은희 목사가 쓴 「조선성자 방애인 소전」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1934년에 나온 61쪽에 지나지 않는 작은 책이었지만 거룩한 영인을 이 땅에 알려준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이 책은 배은희 목사가 전주에서 자기 눈으로 방애인 양을 보고 교제하면서 너무도 귀한 이야기라 생각되어 자신이 친히 방애인 양의 고향인 황주에 찾아가 그 부모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남겨둔 일기도 얻어서 쓴 방애인의 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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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성자 방애인 소전에 실린 조선성자 방애인 소전 표지 

방애인 선생 사진 (13판, 1948) 방애인 소전은 1934년 초판 출판 이후 13판이나 발행되었다. 1948년 13판 출판 당시의 책에 수록된 방애인 선생의 모습.

 

 

   그 당시 방애인이 나온 개성 호수돈 여학교에는 교실마다 방애인의 초상화 특히 방애인이 등에 거지 아이를 업고 또 한손으로는 깨진 주전자를 든 거지 아이의 손목을 잡고 자기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호수돈에서는 누구나 의례 성 방애인이라고 불렀고, 방애인의 졸업 사진을 보고 그의 전기를 읽으며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혼에 잉태하고 순결과 사랑 그리고 기도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방애인. 그는 한국교회의 성녀이자 우리민족 종교 안의 동정녀 전통을 기독교의 토양에서 일궈낸 개척자였다. 수도원적 영성으로 짧은 삶을 살다간 방애인은 한국 종교 속의 동정녀 전통을 개신교 안에서 담아낸 첫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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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돈여학교에 걸려있는 방애인의 초상화 

때묻지 않은 신여성 실력있는 교사로 조선의 성자란 칭호를 받았던 방애인. 

 

 

그는 1909년 9월 26일 초기 한국교회의 모판 역할을 했던 황해도 황주군 황주읍 벽성리에서 방중일씨의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방중일은 그 지방에서 이름난 재력가였으며, 그의 할아버지 방흥복은 자선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어머니 김중선은 날마다 새벽기도 할 정도로 믿음이 좋았다. 어머니의 품은 곧 방애인의 신학교였다. 그는 어머니 품에 안겨 세례를 받았고, 거룩한 환경 속에서 당시의 일반 조선 여성보다는 좋은 조건 속에서 자라났다.

 

방애인은 일곱 살 되던 해 황주읍교회에서 세운 양성학교에 들어가서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1921년 3월 양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더 큰 배움을 위해 평양의 숭의여자 고등보통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이곳에서도 방애인은 언제든지 최우등이었다. 아름다운 품행으로 선생님들과 동급생들의 끝없는 칭찬과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였다. 학생들이 숭의학교의 총독부 지정학교 승격과 기숙사 제도에 대한 불만으로 데모를 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가자 학교를 옮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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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감리교 30년사」에 나오는 호수돈여학교

 

 

그는 1923년 개성의 감리교 학교 호수돈 여자 고등보통학교로 옮겨 1926년에 최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호수돈을 졸업한 그는 당시 신여성의 꿈인 이화여자 전문학교에 들어가기를 뜨겁게 바랐다. 그러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진학의 꿈을 포기하고 1926년 4월 1일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방애인과 전주 기전여학교 사이에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전여학교는 호남지역의 선교를 맡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신흥학교와 더불어 전주에 세운 학교였다. 선교와 교육에 헌신했던 선교사 전킨을 기념하는 뜻을 담고 있는 기전(紀全)여학교는 당시 선구자적인 정신으로 근대적인 지식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대표적인 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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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전여학교 (랭킨 교장 때 준공한 학교 건물)

 

 

 눈과 같이 깨끗하라! 

 

기전여학교에서의 3년 동안의 처음 교사 생활은 때 묻지 않은 신여성의 모습 그대로였다. 신교육을 받은 신세대 여성으로서 그는 학교 안의 최고로 세련되고 실력 있는 교사로서 순수한 열정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는 무언가 영적인 갈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것 없는 삶 속에서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와 영적 무력감에 빠져 기전여학교를 떠났다. 그는 친구에게 자기는 언제나 주님의 지신 십자가를 맛보려고 심히 갈급하였다고 고백하고는 전주를 떠났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모교인 황주 양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신앙생활의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의 틀을 벗어나 참된 믿음과 영적 확신에 대한 체험을 갈구하였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부흥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거듭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의 일기 속에 이런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1930년 1월 10일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 눈과 같이 깨끗하라 아아! 참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이다.

  

1930년 1월 11일 


나는 어디로서인지 손뼉치는 소리의 세 번 부르는 음향을 듣고 혼자 신성회(새벽기도회)에 가다. 아아! 기쁨에 넘치는 걸음이다. 

 

눈과 같이 깨끗하라 이 영음을 들은 방애인은 순결한 처녀로서의 새로운 삶을 서원하고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눈과 같이 희고 거룩한 삶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적인 욕망과 자기 중심적 의지를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었다.


그는 다시 전주 기전여학교의 부름을 받아 1931년 9월 전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때의 방애인은 2년 전 전주를 떠날 때의 방애인이 아니었다. 부잣집 딸의 옷차림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검소한 단벌 차림이었고, 값진 주단이나 세루 치마니 하는 옷감은 자취를 감추었다. 얼굴도 하늘이 주신 그대로였으니 향수니 크림이니 하는 화장품은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전의 신여성, 최고급의 의상에 화장을 한 전위적인 여성의 모습이 사라지고 순수하고 검소한 여인이 되어 전주에 돌아온 것이다.

 

  

거룩한 삶을 위한 신앙공동체 운동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 받은 방애인은 1932년 기전여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성회를 조직하여 신앙공동체 운동을 시작하였다. 신성회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공동체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기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나의 가정 우리 민족 모두가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10가지 계율을 만들어 놓고 하루하루를 반성하며 살아갔다.

① 은밀기도 하였습니까?

② 성경 한 장을 보았으며 전도하였습니까?

③ 배우는 데 열심하였습니까?

④ 남을 섬겼습니까?

⑤ 웃사람에게 순종하였습니까?

⑥ 친구를 먼저 존경하며 사랑하였습니까?

⑦ 맡은 직분에 충실하였습니까?

⑧ 시간을 귀히 여기고 부지런하였습니까?

⑨ 검박하게 생활합니까?

⑩ 말에 실수가 없습니까?

신성회는 세상 안에서 수도적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는 신앙공동체 운동이었다. 삶의 현장 속에서 기도와 봉사로써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헌신하고 사랑과 희생으로 하나가 되려는 공동체 운동이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시여!  

 

방애인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어떤 일을 계획할 때면 제일 먼저 기도하였다. 몸도 약했고 틈도 없었으면서도 쉬지 않고 기도했고 때론 밤새워 기도하였다. 자기 일만 위해 기도하지 않고 부모와 제자 그리고 민족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였다. 방애인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였고 기도로 일을 진행하였으며 기도로 일을 끝내고 마는 기도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방법이고 예수가 해답이었다.

방애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기도는 아버지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였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를 본받아 날마다 아침을 금식하며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언제나 놀라운 응답을 주셨다. 방애인의 아버지는 본래 살림이 넉넉했고 사교에도 능한 사람이어서 사귀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러던 가운데 신문사 지국을 경영하는 사람의 보증을 서 주었는데 그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여 그때 돈으로 2천 2백원의 빚을 책임지게 되었다. 벗어날 수 없는 빚을 물게 되면 가정은 파산하고 말 것이다. 이때 방애인은 오직 하나님 밖에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 고모와 약속하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깜짝 놀라는 일이 생겼다. 세 차례 재판을 거쳐 2천 2백원을 단돈 220원으로 탕감 받았다. 방애인은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32년 7월 22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라. 2천 2백원을 2백 2십원으로 탕감함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집의 사활이 달린 이 크나큰 문제를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어떻게 되었으랴. 주님 외에는 누가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키리오. 아아! 감사하나이다. 찬송하나이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시여!

  

언젠가는 사촌 언니가 먼 길을 다녀오는데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큰 어머니와 함께 기도를 드렸다. 과연 밤늦게 사촌 언니가 무사히 돌아왔다. 사촌 언니는 돌아오는 길에 도둑 같은 사람을 만나 크게 욕을 볼 뻔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 시간을 물으니 큰 어머니와 함께 기도하던 시간과 같았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사람 

 

방애인은 철저한 교회의 사람이었다. 그의 봉사는 교회를 중심하여 이어져 나갔다. 그 당시 전주에는 4개의 교회가 있었으나 기전여학교에서 가까운 교회가 두 곳에 있었다. 하나는 전주의 모교회인 서문밖교회요, 다른 하나는 막둥이 교회인 완산동교회였다. 서문밖교회는 큰 교회가 되어 활발히 움직이고 있으나 완산동 교회는 조그마한 교회당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형편이었다. 이때 방애인은 기숙사 학생들을 데리고 주일 낮 예배는 완산동 교회에서 주일 밤 예배와 수요 기도회는 서문밖교회에서 드렸다. 많지도 않은 봉급에서 완산동교회와 서문밖교회에 십일조를 드렸다.

서문밖교회에서는 중산리라는 곳에 확장 주일학교를 세우면서 방애인에게 그 책임도 맡겼다. 전주에서 꽤 먼 거리였는데도 그는 3년을 하루같이 정성을 쏟아 봉사한 결과 그곳에 많은 신자들이 생겼다. 그래서 오전 주일학교를 마치면 계속해서 여자들을 모아놓고 기도회를 인도하고, 그곳 병자들을 위문도 하고 전도도 하느라고 밥 한번 제 때에 먹어본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동네의 가난한 여자 치고 방애인의 옷을 얻어 입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방애인은 중산리 넘어 진정리에, 그리고 거기서 더 가서 발우 마을에도 학생들을 보내어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눈부신 활동을 하면서도 제 마음대로 하지 않고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 하지 않고 언제나 목사와 당회의 허락을 받고서야 시작했다. 기전여학교 교사로서 학교 학생들을 대할 때나 주일 학생을 대할 때나 차별이 없었다. 주일 학생 가정에 병난 사람이 있으면 곧 가서 기도해 주고 세상 떠난 이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위로하였다. 교회 안의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는 언제나 겸손을 다해 순종하였다. 무엇에나 남보다 앞선 사람인데도 그같은 모양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어린 양과 같이 유순하였다. 그러기에 모든 교인들이 그를 존경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교회에 내분이 일어나면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오직 밤 새워 기도하면서 서로를 권면하고 교회의 풍파를 잠재우는 평화의 사람이었다. 얼마나 갸륵한 그리스도인이요, 주의 숨은 종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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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서문밖교회

(1911년 87평 ㄱ자집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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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완산동교회

 가는 곳마다 복음의 사도되어
 

 

학교 시간 외의 시간은 모두 전도에 바쳤다. 최약실, 김선례, 홍석호 등 동료 교사들과 전주 거리를 다니며 전도하는 방애인의 모습은 전주 사람들에겐 낯익은 풍경의 하나가 되었다. 방애인은 만나는 사람마다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의 사도였다.

길을 가면 길가에 있는 사람에게, 기차를 타면 함께 탄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학부모를 방문하면 학부모에게, 밥 먹는 자리에선 함께 먹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걸인을 만나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옆으로 다가가 진지하게 복음을 전했다. 사회의 버림받은 걸인들이 방애인의 전도를 받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고아원 기부금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집마다 전도하지 않고는 그냥 나오는 법이 없었다.

방애인은 오후 수업을 마친 뒤 빈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다가천변으로 갔다. 냇가의 양지 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옷조차 변변히 입지 못한 어린이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들이 모이면 찬송과 기도를 가르치면서 성경말씀을 이야기한 뒤 그들에게 싸 가지고 온 누룽지를 나눠주었다. 이들은 방애인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대했다.

방애인은 학생들이나 선생들이 입지 않는 떨어진 헌 옷을 걷어 이것을 깨끗이 빨아 말려서 밤을 새워 가면서 누더기를 깁고 기운 옷가지를 들고 다니면서 한 가지씩 나눠주면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소망이 넘치고 웃음이 깃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고 전도하였다. 부부 사이에 큰 소리 내고 다투는 곳이 있으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눈물로서 붙들고 말씀으로 권면하면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화목한 가정이 됩니다.하고 전도하기를 잊지 않았다.

방애인은 길가의 병술집에 앉아서 천하가 제 세상인 듯이 새빨간 얼굴로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술잔을 들고 잔뜩 취해 노래 속에 파묻힌 남자의 팔뚝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저씨가 마시고 있는 술잔 속을 들여다보세요. 그 속에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의 헐벗고 굶주려 있는 얼굴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새 가정을 이룩하셔요.하고 전도하였다.

방애인의 가슴 속에는 영혼구원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시간은 모자라고 몸은 하나이니 그는 울부짖으며 영혼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매어 달렸다. 방애인, 그는 학생들에게는 어진 선생님이요, 다가천변의 불쌍한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어머니가 되어 주었고, 젊은이들에게는 형제가 되었으며 가정불화 만난 이에게는 좋은 중재인이었고 길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는 선한 목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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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서문밖교회 부근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방애인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듯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쳤다. 그는 교사라기보다는 차라리 학생들의 어머니였다. 학생이 병이 났을 때에는 밤을 새워 기도해 주었고, 슬픔과 괴로움이 있을 때면 은밀한 방에 데리고 가서 기도해 주고 위로와 격려해 주고, 벌 받을 짓을 한 학생을 발견하면 고요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눈물로 권면하면서 기도해 주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학생을 보면 옛날 위인들의 전기를 이야기해 주면서 위로하고 새 용기를 주면서 기도하였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이 있으면 그 부모를 찾아가서 좋은 말로 위로하고, 가정 사정이 어려운 학생은 자기의 박봉을 떼어 도와주었다. 졸업생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기도해 주었고, 졸업 후 갈 길이 막힌 학생은 스스로 상담하고 지도해 주었다.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학교 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며 계속해서 그들의 내일을 위해 은밀히 금식하며 기도하는 거룩한 사랑의 교사였다. 그만큼 학생들도 그를 따랐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하며 따르던 학생들은 부모의 사랑이 없이는 살아도 방애인 선생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학생 가운데 실력이 모자라는 저능아가 있으면 따로 가르쳐 주고, 그 학부모 집에 찾아가 복습에 주의할 점을 일러주어 낙제생이 생기지 않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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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애인과 친구들(왼쪽에 있는 이가 방애인 선생)

 

 

거리의 성자되어 

 

 방애인은 학교 교사 안에만 머문 선생이 아니었다. 그는 거리로 나가 거리에서 만나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는 말로만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길거리에 내버려진 고아나 걸인들을 데려다가 씻기고 먹여주며 돌봐주는 거리의 성자였다.

어느 날 길가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섰다. 무슨 일인가 들여다보았더니 나이 많은 정신병자가 앉아 있었다. 둘러선 구경꾼들은 그 노파를 놀리고 있었고, 노파는 반항하면서 저주의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 노파는 울고 있었다. 이것을 보는 순간 방애인은 사람들을 헤치고 가까이 가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병든 노파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데리고 갔다. 둘러선 구경꾼들도 감격하여 눈물에 젖었다. 그는 그 불쌍한 노파를 자기 학교 근처에 사는 강필남이라는 분의 집에 데려다 주고 일기에 이렇게 썼다. 불쌍한 할머니를 수남이 어머님 댁에 두고 목욕시키고 새 옷 입히고 식비를 담당하기로 하다.  

때로는 그가 근무하는 기전여학교에 흉측하게 생긴 나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방애인을 찾는 무리들이었다. 24세의 아름다운 처녀 방애인은 나병을 더럽다 하지 않고 그들의 썩어가는 피부를 어루만지며 더운 눈물로 기도하였다. 주여!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능력과 사랑이 내 손을 통하여 나타나 이 괴로운 병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주여! 자비와 긍휼을 아끼지 마소서

이 간절한 기도는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씨를 깊이 깊이 심었다. 그들의 손등에 떨어지는 눈물 방울은 그들의 썩어가는 살을 소생하게 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학교를 찾아와 성자의 눈물을 구한다고 하였다.

그는 말 그대로 거리의 성자였다. 거리가 그의 목장이었고 그의 강단이었다. 거리에서 만나는 온갖 사람들 특히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기쁨이고 보람이었다.

전주 서문밖교회 전도실 한 구석에는 교회에서 설립한 고아원이 있었다. 1927년 전주 YWCA 이효덕 회장이 배은희 목사를 비롯한 교인들의 도움을 얻어 세웠는데 3년이 넘도록 교회 안에서 빈약한 형편에 머물고 있었다. 방애인은 이 고아원을 제대로 운영하도록 하기 위해 앞장 섰다. 특히 서문밖교회 배은희 목사와 동료 홍석호 선생, 김선례 선생이 함께 발 벗고 나섰다. 방애인은 전북지역 교회를 순회하며 모금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월급을 아껴 고아원 설립기금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전주시내 8천호 가구를 방문하며 일반 사회에서도 도움을 얻어 서문밖교회 근처에 있던 기생 놀이집으로 쓰던 독립 가옥을 얻어 1931년 성탄절에 고아원 설립예배를 드렸다. 방학인데도 그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거리의 고아들을 모아 들이는데 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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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고아원(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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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여자 기독청년회(1929)

방애인 선생은 전주 YWCA 전신인 이 모임을 통해

복음 전도와 고아 보육사업으로 교회와 사회를 위해 적극 봉사하였다.

앞줄 왼쪽 끝이 방애인 선생.
 

 

전주 서문밖교회 배은희 목사가 사택에서 주무시는데 밤 11시경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거센 바람 소리가 귀를 에는 추운 밤에 밖에서

사모님, 사모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 추운 밤중에 왔을까? 하고 문을 열고 나가 보니 방애인이 온 몸에 눈을 뒤집어 쓴 채 떨고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등에 고아를 업고 있었다.

이 아이가 길가에서 추위에 떨고 있기에 업고 왔습니다. 방애인은 그 밤으로 머리를 깎아 주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혀 고아원에 업어다 두고 갔다. 그 후에도 고아를 만나면 몸소 업고 왔다. 고아들의 수가 늘어나면 한 달에 몇 번씩 공중 목욕탕에 데리고 갔다. 어린 아이는 업고, 좀 큰 아이는 앞세우고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때를 씻어 주었다. 고아들의 어머니 같았다. 방애인이 고아를 업고 가는 모습은 그후 그림으로 그려져 보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의 모교인 개성 호수돈 여학교는 교실마다 그 그림을 걸어놓았다고 한다. 그 가는 태도는 실로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모습과 같았다.

학교와 교회 그리고 고아원으로 이어지는 삶의 현장 속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는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방애인의 모습은 점차 성녀의 모습으로 전주 시민들의 눈에 비치기 시작하였다. 방애인은 신여성이요, 처녀 교사이면서도 두벌 옷이 없었다. 방애인이 세상을 떠난 뒤 배은희 목사가 황주에 있는 방양의 부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목사님, 보십시오. 딸이 옷이 하도 없어서 할머니가 입으시던 털로 안을 바친 갓옷 저 고리 한 개와 햇솜을 넣은 바지 한 개를 보내 주었더니 한 번도 입어 보지도 않고 다 남에게 주어 버렸어요. 죽은 후 옷이라고 찾아보니 다 떨어져 입지 못할 것 몇 개 밖에는 없었어요.하며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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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희 목사 

 

아아! 어머니 어머니!
 

 방애인은 1933년 여름방학을 고향에서 보낸 뒤 몸이 좋지 않은 상태로 학교에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개학식에 참석한 뒤 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다음날 어머니가 황주에서 전주까지 내려왔다. 병상 곁에 서서 애인아, 내가 왔다.고 하자 그는 손을 내밀어 어머니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어머님 오셨어요?하고 간신히 한 마디 할 뿐이었다. 열이 40도까지 올랐다. 내리지 않았다. 9월 16일, 방애인이 회복될 희망이 없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서 아버지가 전주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병원 문을 들어서며 아아! 애인아, 이게 웬일이냐. 애인아, 내가 왔다.면서 딸의 손을 잡자 그는 희미하게 눈을 뜨며 아아!라는 두어 마디만 남기고 24세의 젊은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방애인은 흰 눈같이 깨끗한 처녀로 성녀다운 사랑과 자기 희생의 짧은 일생을 이렇게 마쳤다. 고요히 티끌 같은 세상을 순결한 처녀로 떠나고 말았다.

전주 사람들이 사랑하는 성녀 방애인이 죽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전주 바닥에 알려졌다. 그의 인격을 존경하고 그의 사랑을 받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교회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고아들이 슬피 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창자를 에이는 듯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울 정도였다.

방애인의 장례식은 전주 시민 전체의 애도 속에 기전여학교 운동장에서 치뤄졌다. 하얀 소복을 입은 수십 명의 여자들이 상여를 메고 묘지를 향하는데 동료 교사들, 학생들, 평소에 그가 돌보던 고아들이 함께 메고 가는 길은 모두 눈물이 앞을 가려 나가지를 못하였다. 고아들은 어머니 어머니!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선생님 선생님!하며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참으로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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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애인 선생의 묘소를 찾은 전주 여자 기독청년회원 일동(1933)

걸인, 정신병자, 나환자, 고아 등을 대상으로

사회 구제사업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방애인 선생은

1933년 9월 16일, 24세로 별세하여 전주 화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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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애인 선생 묘소 이적비(1999)

전주 서문교회 안식원(비봉)에 이장한 뒤 세운 이적비
 

 

방애인의 짧은 생애를 살펴보면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성녀 소화 테레사(St. Teresa of Lisieux)를 생각하게 된다. 소화 테레사가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도 24세였다. 방애인은 한국 개신교의 성녀였다. 이만한 사람은 한국교회 인물 백년 역사 속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기에 결혼도 그만두고 독신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 되어 살았던 이, 오직 자기를 비우는 기도와 봉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순결하게 살았던 이, 거리의 성자 방애인, 그의 삶은 오늘도 자신의 영혼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가난한 이들을 봉사와 희생으로 섬기며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이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성녀 소화 테레사는 십자가 고상을 손에 꼭 쥐고 임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다 말했습니다. 모두 다 이루어졌습니다. 값진 것으로 오직 하나 사랑뿐입니다. 아아 하나님! 나는 사랑합니다. 주님을! 나는 사랑에 몸 바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아 하나님!…주님을…사랑합니다. 하나님!…나는 주님을…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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