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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지혜

최원철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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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6 22:49 조회2,3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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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최원철 장로

 

 

글쓴이: 최흥욱(서부동산교회 담임목사)

 

 

   나의 아버지가 태어나 자란 곳은 북간도라 불리는 두만강 북쪽에 있는 옛 만주 땅이다. 1800년대 말부터 농사를 짓기에 더 기름진 땅을 찾아 만주로 떠난 우리 민족의 대 이동이 있었다. 원래 함경북도 청진에 살았던 증조 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사를 해서 그 곳에 자리를 잡고 10,000여평을 개간하여 넉넉하게 살아갔다고 한다. 그 당시 북간도는 우리 민족의 이민자들에 의해 국경 밖의 영토처럼 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었다.    나의 아버지 최원철 장로는 1913년 11월 1일 중국 길림성 연길시 팔도에서 최정삼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중국어에 능통하였기에 6살부터 한문 공부를 시작하여 5년 동안 천자문 계몽편 동문서습 소학 맹자까지 두루 배워 익혔다. 1930년에 소학교 6년을 졸업하고, 같은 해 용정중앙교회가 운영하는 영신중학교에 들어가 6년 동안 공부하고 제14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 영신중학교는 기독교 학교로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 이호운 목사, 장덕순 서울대 교수, 박계주 소설가를 배출한 명문 학교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리던 조국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으로 내려와 사업을 하던 가운데 1949년 정래여학교 출신의 강정희씨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그 다음 해인 1951년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지석리로 내려와 살아가던 중 한은우 권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때부터 예수에게 사로 잡혀서 지석교회 권사로 유사부장(현 재무부장)으로 충성하였다. 1959년에 교동면 소재지인 대룡리로 이사하여 서점과 농사를 지으면서 중앙교회 권사와 유사부장이 되어 교회 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교회를 섬겨 나갔다. 한은우 전도사님의 오른 팔이 되어 그 당시 초가 12평을 25평 교회로, 그 후 조인익 목사님의 협력자가 되어 17평을 증축하여 42평의 눈물어린 아담한 교회를 짓는데 모든 것을 다 드려 헌신함으로 강화 지방적으로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1965년 1월 29일 강화지방 박성은 감리사의 파송을 받아 주관진 장로에 이어 제2대 교동중앙교회 장로가 되어 한은우, 박문종, 조인익 목사님을 충성스럽게 받들어 섬겼다. 그러다가 자녀들 교육 문제 때문에 1969년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관악구 신림 2동 밤골에 조그만 집 하나를 사서 살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드리기 시작하더니 바로 그 집에서 은정교회가 개척이 되었고 조인익 목사님을 초대 담임자로 모셔왔다. 1971년 종교교회 박용익 목사님과 정동교회 김광우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은정교회를 117평의 아름다운 건물로 신축하였다. 1971년에 서울 주파 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신우회 모임을 만들어 민선규 목사님을 지도 목사로 모시고 매주 1회씩 직원들과 사원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을 불어넣으며 7년 동안 재직하였다. 1979년 관악구 신림 6동에 조창환, 양재창 장로와 함께 서울대교회를 또 다시 개척하여 이충근 목사님을 담임자로 모시고 정말 불같이 헌신하다가 1980년 10월 31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 삶을 끝마쳤다.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필자는 ‘나를 키운 모두가 아버지였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내 삶 구석구석마다 아버지가 자리 잡고 계심을 느끼고 있다. 나의 아버지 최원철 장로님, 그 분은 분명히 오늘의 나를 나 되게 하신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오늘 필자는 나의 아버지 최원철 장로를 그리워하며 그 분이 살아계실 때 보고 들은 삶의 모습들과 돌아가신 뒤 다른 사람들이 들려준 인상 깊은 이야기들을 기록해 놓고 싶다.

 

   첫째로 최원철 장로는 주의 종을 하나님처럼 받들어 섬기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김성배 장로(현 부산 온누리 교회)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1965년인가 봅니다. 막 신학교를 졸업하고 박문종 전도사님이 담임자로 오셨을 때 최 장로님은 아들 같은 박 전도사님을 정말 하나님 대접하듯이 섬겼지요. 그 모습을 본 온 교우가 장로님처럼 주의 종을 받들어 섬기게 되어 교회는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 되었지요. 남녀노소가 하나 되어 기도하고 찬송하고 간증하는 중앙교회는 교동에서 제일가는 부흥하는 교회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1994년 6월 11일 편지 글) 

 

   1967년 12월 최용문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부흥회를 중앙교회에서 열었다. 그 때 최용문 목사님은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 흘리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강사님이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대접받고는 아버지를 축복하는 것이었다. 머리에다 손을 얹고 울면서 아버지를 축복해 주시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고의 헌금을 드리고, 강사를 극진히 하나님 모시듯이 대접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부흥 강사님이 눈물 흘리며 축복해 주셨다는 것이다.

 

   필자의 친구 이상윤 목사(현 기독교 사회봉사회 총무)가 들려주는 한 토막 이야기이다. 이상윤 목사는 필자와 김리교신학대학교 동기 동창으로 한때 나와 함께 경기도 이천 시골에서 목회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상윤 목사는 20대의 나이 어린 전도사였다.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 왔는데 나는 없었고 아버지 최원철 장로만 계시더란다. “최 목사, 자네 아버지 장로 중의 진짜 장로더라. 나 감동 먹었어. 내가 찾아가니 60이 훨씬 넘어 보이는 어르신이 깍듯이 허리 굽히고 날 맞아주는 거야. 날 방으로 들어오라 하더니 내가 앉자 그 어르신은 글쎄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거야. 그리고는 당신이 최흥욱 전도사의 아버지 장로라고 신분을 밝히고 부엌에 나가 상을 차려다 내 앞에 놓는 거야. 나도 참 어렵게 목회하는 때라 그 밥 먹으면서 눈물이 나오는 거 있지. 밖에 나와 보니 내가 벗은 구두가 코가 밖으로 향하게 가지런히 놓여 있었어. 장로님의 손이 닿은 것이지. 그리곤 내 가방을 차를 타는 정류장까지 들어다 주면서 내 손에 봉투에다 차비를 담아 들려주시잖아. 난 처음 이런 장로님 만나봤어.”

 

   내가 신학교 다닐 때 일이다. 아버지는 서울 신림동에 은정교회를 개척하고 조인익 목사님을 도와 장로로 충성하고 계셨다. 목사님 생활비를 대지 못하니 아버지는 이리저리 사람을 찾아다니며 생활비를 얻어오고, 때론 회사에 다닐 때 받은 월급 전액을 담임 목사님의 생활비로 내 놓는 것을 난 보았다. 꽤 오래 이렇게 생활비를 모금하여 대 드린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주의 종(목회자)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요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접하는 길은 주의 종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둘째로 최원철 장로는 생명 바쳐 교회를 섬기는 오직 교회의 사람이었다. 내가 15살 때 밤새워 공부할 때가 많았는데 새벽 3시만 되면 아버지가 어디로 나가시는 것이었다. 조금 있다가 교회의 종소리가 ‘뗑그렁 뗑그렁’하고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새벽종 지기가 되어 종을 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 선하다. 난 그 종소리를 들으며 교회에 나간 것이 아니라 밤 새워 공부 마치고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새벽기도가 끝난 뒤에는 늘 교회 청소를 손수 하시고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참 부지런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1962년 중앙교회는 한은우 전도사님의 지휘 아래 성전을 신축하게 되었다. 이때는 정말 살아가기 조차 어려운 3년 흉년의 때였다. 이런 형편에 있는 교인들에게 건축 헌금을 권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한은우 전도사님은 당시 최원철 권사를 불러 성전 신축 계획을 밝히니 최원철 권사는 내 집은 못 지어도 아버지 집만큼은 먼저 지어야 한다하며 기쁨으로 장리로 쌀 한 가마를 얻어 바쳤다. 1963년 1월 10일 중앙교회 신축 기성위원회 장부를 보면 한은우 5가마(10,000원), 최원철 1가마(2,000원), 신정녀 1가마(2,000원), 전웅섭 1,400원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최원철 장로의 희생적 헌신 사실이 직원들에게 알려지자 큰 감동을 받고 너도 나도 헌금하여 25평의 눈물겨운 성전이 세어졌다고 한다.(2005년 6월 13일 한은우 목사님의 증언)

 

이렇듯 아버지는 교회를 생명보다 귀히 여겨 교회를 지키고 섬기며 세우는데 온 힘과 물질을 바쳤다. 그 결과 아버지는 지석교회, 중앙교회, 은정교회, 서울대교회를 개척하는데 주역이 되었다.

 

   셋째로 최원철 장로는 가난하고 병든 교우들을 돌아보는 긍휼의 사람이었다. 한은우 권사를 통해 구원 받은 아버지는 지석교회 유사(현 재무부원)로 있으면서 그 당시 교역자 대리이신 한은우 권사의 오른 팔이 되어 동역하였다고 한다. 한은우 목사님은 그 당시 감동적인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고 있다.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형제 사이보다 더 가까웠지요. 우리 마을에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55세의 거지가 있었어요. 난 집사람을 설득하여 사랑방에 그를 두고 죽을 때까지 가래침을 청소해 주고 약을 사다 먹였는데 그 때 내 바로 옆에서 그 거지에게 주사를 놓아주며 돌봐주신 분이 바로 최원철 권사님이셨지요.”(1995년 4월 16일 한은우 목사님의 증언)

 

   아버지는 지석교회 다닐 때 그 당시 한은우 권사님의 인격적인 영향을 크게 받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때 어린이였던 필자의 누나 최경자 권사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아버지는 연백에서 피난 나올 때 돈을 꾸러미에 쌓아 가지고 나왔어. 그런데 예수를 믿고는 아버지가 완전히 달라지셨던 거야.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거야. 이런 일도 있었지.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그 전날 밤에 아버지는 고기와 선물 꾸러미를 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갔던 거야.”(2005년 12월 25일 증언)

 

   중앙교회에서 장로로 부름 받은 아버지는 아파하는 교인들의 손을 붙들고 함께 눈물을 흘리시고 괴로워하는 문제를 가진 교인들을 위해서는 늘 성전에 나가 밤을 새워가며 기도해 주었다.(1994년 6월 11일 김성배 장로의 편지 글)

 

   넷째로 최원철 장로는 성령에 사로잡혀 오직 기도로 살아가는 참 예수꾼이었다. 복음을 받고 거듭나 변화의 삶을 살아가게 된 최 장로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며 기도의 무릎을 꿇기 시작하였다. 중앙교회 전웅섭 장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최 장로님은 교회에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마다 늘 기도에 힘쓰셨지요. 그 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 어떻게 하시갔시까?’하고 외치던 모습은 오늘도 우리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지요.”(2006년 4월 13일 증언) 최 장로는 교회의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며 그 때마다 새벽 기도회에 나가 가슴을 치며 울면서 “주님, 제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제 탓입니다. 저 때문입니다!”하며 부르짖었다고 한다.(1994년 6월 11일 김성배 장로의 증언)

 

필자가 경기도 이천 은광교회에서 첫 목회할 때의 일이다. 전도사 시절 교회를 개척하면서 새벽 기도를 날마다 인도하려 하니 여간 피곤하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새벽 기도를 길게 하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와 쉬었다. 가끔 아버지는 시골 교회에 내려와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셨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도 집에 오시지 않아 예배당에 나가보면 그 때까지 꼿꼿하게 무릎을 꿇고 몸을 앞뒤로 굽히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계셨다. 차마 그 거룩한 기도 삼매에 잠긴 아버지의 기도를 중단 시킬 수 없어 그냥 돌아오곤 했던 적이 여러 차례나 된다. 아침 9시나 되어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얼굴 모습은 그야말로 광채에 쌓인 기쁨 가득한 모습이었다. 어떤 때는 아침 식사도 잊고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까지 기도에 푹 잠기고 계셨다. 

 

   다섯째로 최원철 장로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의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정과 자식은 제2, 제3에 속한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만이 최우선이었다. 아버지는 개인적인 일과 자녀들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일이라면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섰다.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때 우리 집은 고향 땅 교동을 떠나 서울 신림동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하고 살고 있었다.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인천에서 공부하던 내가 신림동 집을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 집이 바로 가마니를 깔고 몇 사람이 모여 예배드리는 기도처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은정교회가 시작되었고 아버지가 대리 교역자가 되어 기도회를 인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느 날 새벽 곤히 잠들었던 내가 잠이 깨어 일어나게 되었는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기도하는 소리였다. 가만히 잠 자는체하고 들어보았다. 울음 섞인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님 아버지, 흥욱이는 이제 내 아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듯이 나도 이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바칩니다!” 난 이 기도 소리를 듣고 이상한 마음 흔들림이 있었다. 

 

   사실 난 초등학교 2학년 때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하였던 것이다. 내가 9살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열이 나고 정신이 혼미해져 있을 때 중앙교회 한은우 전도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 오셔서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었다. 그 때 열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정신도 깨끗이 돌아오는 신기한 체험을 하였다. 그리고는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서원을 하였다. “하나님, 나도 앞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한은우 전도사님처럼 병든 사람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된 나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려고 입시 준비를 그리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확신을 갖고 서울대 입시 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전교에서 1, 2등을 다투다 보니 서울대는 무난히 합격할 수 있는 실력이었던 것 같다. 주의 종 서원은 이제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오로지 서울대에 들어가 교수가 되려는 꿈에 도취하고 있었던 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런 내 마음을 꿰뚫었던지 날마다 새벽마다 이런 나를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는 서원 기도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드디어 서울대 시험 날이 왔다. 난 확신하고 시험에 임했다. 비교적 잘 치루었다. 그런데 마지막 시간 제2외국어 독일어 시험 시간에 머리가 깨어지는 듯 아파오더니 거의 혼미 상태가 되었다. 난 어떻게 답을 썼는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대 혼돈의 시간이었다. 결국 보기 좋게 서울대에 떨어졌다. 때마침 그 해 감리교 신학대학 시험이 후기였다. 한줄기 빛이 내 마음 속에 비치기 시작하니 이젠 주의 종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시험을 치루어 감신대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감신대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난 내가 왜 서울대에 떨어지고 여기 왔는지 그 섭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이 비밀이 완전히 풀리게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박용식 목사님이 내 손을 꼭 붙잡곤 이런 말씀을 들려 주는 것이었다. “최 목사님, 이제는 말해도 좋을 것 같군요. 최원철 장로님께서 살아계실 때 내게 말씀하신 특급 비밀이었어요. 최 목사님이 서울대 시험 치르는 그 날 최 장로님은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보기 좋게 떨어지게 해 달라고 새벽에 나가 기도하였대요. 그래야 신학대학에 들어가 주의 종이 되겠으니 말이죠?”(1980년 10월 31일 박용식 목사님의 증언)

 

   난 이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소리 없이 앞을 가렸다. 세상의 어느 아버지가 서울대학교에 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아버지가 있단 말인가? 그 때부터 난 아버지에 대해 더욱 큰 존경심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가 넘치기 시작하였다. “그래, 아버지의 눈물의 서원 기도가 나를 원 위치로 복귀시켜 주의 종 만들어주셨구나!” 서울대에 떨어지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더니 응답이 되어 그리도 기뻐하셨던 나의 아버지 최원철 장로님, 이제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 깨달은 듯하다. 

 

   여섯째로 최원철 장로는 변화의 삶을 몸으로 살아가는 온유한 사람이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때부터 아버지는 교동 대룡리에서 아주 조그마한 서점과 문방구를 차렸다. 어쩌다가 가게에 나가보면 코흘리개 아이들이 물건을 사러 와도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높임말을 쓰며 얼굴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아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언젠가 내게 이런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다. “난 원래 차고 엄격한 사람이었는데 아, 글쎄 예수 믿고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지 뭐야!” 그 당시 우리 가게는 제일 작은 가게였으나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몰려와 잘 되는 가게가 되었던 것 같다.

 

중앙교회 주일학교 학생 지도에도 열심히 있었던 아버지는 주일학교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는 그 당시 아들 같은 김성배 소년에게 의논할 정도였다고 한다.(1994년 6월 11일 김성배 장로의 증언) 

 

   교회를 새로 지을 때는 직접 달구지를 끌고 앞장서서 일했으며 교회의 궂은 일은 아무도 모르게 몸으로 때우면서 일해 나갔다. 믿음의 아들처럼 아버지가 사랑하던 김성배 장로는 중앙교회에서 있었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내가 부흥회를 통해 은혜 받고 이젠 세상 일 다 버리고 주의 종이 되려고 했어요. 용문산 성경 학교에 들어가려고 결심하고 최 장로님에게 말씀 드렸더니 ‘그거 참 잘했어요. 신실한 주의 종이 되세요.’하며 그 나이 드신 어른이 글쎄 내 짐을 손수 등에 지시고 남산포까지 데려다 주는 게 아니겠어요.”(1994년 6월 11일 김성배 장로의 증언) 

 

   일곱째로 최원철 장로는 말씀과 기도로 가정을 이끌어가는 믿음의 아버지셨다. 내가 신학생이었을 때 아버지는 직장 생활 하면서도 명절 때는 물론이거니와 거의 날마다 빠지지 않고 가정 예배를 밤 시간에 정해 놓고 인도하였다. 간단한 말씀을 전하시고 으레 식구들을 위해 축복 기도해 주었는데 이 시간에는 우리 4남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나아가서는 손주들, 사위들 이름까지 불러가며 눈물로 기도해 주시는 것이었다. 지금도 자녀 위해 축복하셨던 아버지의 기도 소리가 귓전에 맴도는 것 같다.

 

   가정 예배 때 전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은 굉장히 조리 있으면서도 주석을 많이 참고하고 설교집을 많이 인용한 아주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설교하기 위해 작성한 설교 원고가 거의 100여편 가까이 친필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가정을 뒷전으로 미루어 놓았으나 자녀들만큼은 말씀과 기도로 철저히 양육하였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방학 때만 되면 나를 데리고 간 곳이 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책방(글방)이었다. 인천의 대한서림, 청운서관, 경동서점 등 책방으로 데려가 책을 사주시고, 서울에는 그 당시 최고의 종로서적으로 데리고 가 구경시켜 주고, 종로서적 위의 성서공회로 데리고 가 성경을 접하도록 하셨다. 이런 이유로 난 일찍이 책을 접하게 되어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책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내가 이리도 미치도록 책을 좋아하여 한 주간에도 고서점과 서점을 사흘씩 오가며 책을 읽은 것이 바로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일생에 있어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사건을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앞길에 대해 주님께 물어보기 위해 청계산 기도원에 들어가 꼭 일주일을 금식 기도한 적이 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계속 학문의 길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바로 목회의 길로 나갈 것인가를 앞에 놓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 때 주님은 내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과 함께 목회의 길로 응답하셨다. 기도원에서 응답받고 내려온 나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골 꼴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찬송하며 임지를 기다리고 있는 때였다. 정말 소명감이 불타올라 농촌이든 산골이든 바닷가든 빈들이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복음 들고 가리라고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뒤 아버지가 조용히 나를 부르시더니 가정 예배를 드리자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동생 이렇게 네 식구가 모였다. 아버지가 예배를 인도하셨다. 그 당시 찬송으로 387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전하셨다. 요한복음 10장 11절 본문을 읽으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그리고는 이어서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셨다. “사명자는 선한 목자이어야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립니다. 사명자는 양들이 있는 곳엔 어디든 가야 합니다. 지금 경기도 이천 설성면 제요리 시골 마을에 교회가 없어서 유리하는 양들이 있다고 해요. 최 전도사님이 가서 거기 교회를 세우고 양을 먹여야 합니다.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가세요.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은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어서 나를 위해 파송 기도, 축복 기도를 해 주셨다. “하나님, 주가 가라시니 이제 이 종이 갑니다. 선한 목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양들 위해 생명까지 마다 않고 바치는 선한 목자 말입니다. 우리 최 전도사님 부탁합니다.” 눈물로 기도해 주시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나의 가슴 속엔 가슴 벅찬 환희와 감격이 넘쳐나고 있었다. 난 하나님의 파송을 받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 1975년 4월 20일 첫 목회지인 경기도 이천 설성면 제요리로 내려가서 15평 천막을 치고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서 만 6년 동안 목회하면서 40평 예배당을 건축하고 20평 목사관을 건축하였다. 이 교회가 바로 이천 남지방 은광교회이다. 7년째 되는 해 한은우 목사님이 부목으로 부르셔서 동산교회에서 3년 동안 충성하다가 다시 또 서울 증산동에 서부동산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언 나의 목회도 31년을 넘어섰는데 이 기간 동안 나도 아버지처럼 개척교회에만 부름받아 은광교회, 서부동산교회를 건축하고 아직까지 두 교회째 섬기고 있는 것이다. 난 그 날 아버지의 축복을 잊을 수 없다. 그날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요한복음 10장 11절 말씀이 내 목회의 좌우명이 되었다. 교회도 없고 신자들도 없고 살 집도 없고 생활 대책도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나를 파송하면서 선한 목자가 되라고 축복해 주시던, 눈물로 기도해 주시던 그 아버지의 음성을 난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나의 아버지 최원철 장로님이 내 곁을 떠나 하늘 나라에 가신지도 어언 26년이 지나갔다. 내가 오늘에야 이 글을 쓰는 것은 자랑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고, 첫째는 교동중앙교회 역사를 만드는 데 글을 써 달라는 요청 때문이요, 둘째는 내 자녀들과 또 아버지를 아는 모든 이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함이다. 

 

   어느 해인가 아버지께서 가정 예배 인도하면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 전한 일이 생각난다. “나는 우리 가정이나 가족 그리고 자녀 여러분에게 아무 유산도 남기지 못하고 갈 것입니다. 예수만 잘 믿으면 그 분이 여러분의 유산이요 내 유산입니다. 나는 이 예수 신앙 밖에 남길 것이 없습니다.” 말씀대로 아버지는 나에게 재산 하나 물려주시지 않고 믿음의 유산 오직 예수 신앙을 남기고 가셨다. 오늘 내가 이렇게 주의 종이 되어 목양의 길을 걷고, 우리 가족이 축복받은 가정이 된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믿음의 유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만이 나의 유산입니다! 평생 이 예수만 붙들고 사랑과 나눔, 겸손과 섬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런 가장 위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나 또한 자손들에게 예수님만 물려주려 애쓰며 부족하지만 내 아버지가 걸으셨던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사랑의 길을 묵묵히 걷다가 훗날 하늘 나라에 들어가 ‘아버지!’하고 부르며 어린 아이처럼 그 분의 품에 덥썩 안기고 싶다.

 

 

주후 2006년 4월 16일 부활주일에

 

아들 최 흥 욱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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