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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김동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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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45 조회1,8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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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김동철 목사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서울 중구 서소문동 75번지.빌딩으로 뒤덮힌 도심 중앙에 나즈막히 자리잡은 서소문교회에 들어서면 입구에 세워진 고 김동철목사(金東哲·1899~1950)의 순교비에 쓰여 있는 구절이다. 

함경북도 길주에서 1899년 출생한 김동철 목사는 당시 배고픔과 가뭄으로 조국을 떠나던 이민행렬에 끼여 있었다.그의 부친도 살기 힘든 고향을 등지고 북간도 용정에서 새 삶을 개척하기로 결심을 했다.부모가 정착한 용정 명동마을은 애국지사들이 많이 머물렀고, 이곳의 신식교육기관인 명동학교는 애국지사 김약연(金躍淵)이 세웠으며, 민족·애국운동의 요람이다.이 학교에서 민족의식을 고취받고 신앙교육을 철저히 받은 김동철은 졸업 후, 만주 영안(寧安)으로 가 영안학교 교사가 되었다.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가슴속의 열정을 퍼내지 못했던 김동철은 어느 날 묵상 중에 이 민족의 소망이 복음전파에 있음을 확신하고, “목사가 되자.강단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이 민족의 소망과 갈길을 전하자.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자.”라고 결단을 하고는, 1920년 서울로 와서는 협성신학교에 입학한다.졸업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고 용정으로 돌아온 그는 신앙생활을 했던 용정교회의 부목사와 용정교회의 부설기관인 소년학관의 사감 일을 맡는 것으로, 목회사역을 시작했다.당시 용정교회는 이화춘목사가 담임이었다.이목사는 말하기를, “교회가 운영하는 소학관은 신앙교육과 체육활동이 매우 활발해 이곳 출신 유명인사들이 많습니다.학생수가 5백명에 이를만큼 규모가 컸던 이 학교에서 수많은 기독교지도자가 배출되었다.”고 했다. 한국기독교순교자유족회 진수철목사는 “자료에 따르면 김동철 목사는 용정교회에서 목회자로서의 기초훈련을 철저히 받은 뒤, 신경시에 입선정교회를 개척하고, 곧 자립교회를 만든 것으로 나와 있다.”며 “특히 신경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빈민목회에 주력하면서, 지교회를 개척해 나간 것으로 안다.”고 했다.진목사는 김동철 목사의 사역만큼은 목회자로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일생이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신경에는 고향을 무작정 떠나 만주로 왔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불쌍한 한국인들이 많았다.구걸하다 한족들에게 얻어맞기도 했고, 병들어 고통받는 이들도 많았다.이들에게 김동철 목사는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하고 사랑을 베풀었다.주변 목회자들은 이런 그를 `북간도의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렀다.따라서 김목사가 시무하는 교회 안에는 항상 성도들이 차고 넘쳤다.1945년 8월15일.해방을 맞아 서울에 온 김동철 목사는 서울에도 사랑의 손길이 필요함을 절감했다.만주의 동포들이 해방된 조국을 찾아 무작정 내려왔지만, 역시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들과 함께 거처할 숙소를 찾던 김동철 목사는 친구였던 조선신학교 김재준박사를 만났다. 김재준 목사는 “내가 일본 천리교도들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 30여채를 관리하고 있는데, 김목사가 목회를 하겠다면 한 채를 드리리다.”라고 해서 적산가옥을 받아서, 1946년 시작한 것이 서소문교회였다.처음 이름은 근처에 덕수궁이 있어, 대한문교회라 지었으나 1년만에 개칭을 했다.서소문교회는 재만동포들의 은거지가 되었다.중국에서 돌아온 이들은 교회에 모여 숙식을 해결하고, 밤새워 조국의 통일을 위해 기도했다.갈곳이 없는 동포들에게 서소문교회는 안식처였다.교회는 자리를 잡고 점점 성장을 거듭했다.특히 김 동철 목사의 낮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헌신의 목회가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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