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순교자 열전, 김이준 목사 > 믿음과 지혜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믿음과 지혜

감리교 순교자 열전, 김이준 목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46 조회1,823회 댓글0건

본문

감리교 순교자 열전, 김이준 목사

 

 

    김이준 목사는 1912년 8월 1일 충청남도 금산에서 출생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가난했지만 김이준 목사의 아버지는 당시 남보다 높은 자식에 대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생활이 어려웠지만, 아들 이준을 금산의 소학교에 보내서 공부를 시켰다. 이준의 아버지는 다른 뜻이 아니라 ‘남자 아이라면, 최소한도 자기 이름자는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들을 교육시킨 것이다. 이준이 소학교를 졸업할 때즘에, 아버지는 짓던 소작을 할 수없게 되자, 내가 농군인데 죽어도 땅을 파다 죽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경작할 땅이 있다는 소문만을 의지해서, 이준의 아버지가 조국을 떠나서 남만주 지방으로 이민을 갈 것을 결심했고, 이준도 아버지를 따라서 남만주로 이주를 했다. 임자 없는 땅을 부지런히 개간해서 농지를 만들고, 열심히 농사를 지은 결과, 생활이 조선에서보다는 나아졌다. 그러자 이준의 아버지는 아들 김이준을 용정에 독립투사들이 설립한 중학교에 보냈다. 고향에서부터 예수를 믿은 그의 가족은 만주에서도 감리교인으로 믿음생활을 유지하게 되었다. 일제 탄압에 못 견디고 외국까지 밀려와 고생하는 동포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리는 아픔을 느낀 김이준은 중등교육을 마치는 대로 "내 동포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가 되리라."라고 결심을 하고 만주신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에 만주신학교를 제 1회로 졸업을 하고, 목사가 되었다. 목사가 된 김이준은 재만동포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당시 기독교 자체를 항일 독립군으로 보는 일제의 시각은 애국운동을 하기 위하여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집결지인 용정의 교회를 일제가 세운 만주 괴뢰정권을 통해서 심각하게 탄압을 했다. 김이준 목사가 신학교를 졸업한 1941년은, 만주에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각 교파의 독자성이 무너지고 만주조선기독교도연맹으로 통합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독자적인 신앙행위를 인정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교단 본부에서 명령하는 형편이었다. 당시 감리교는 신사참배를 국가의 의례로 받아들여서, 본부에서 신사참배를 하도록 시달을 하고, 교단 대표들이 일본까지 가서 신사참배를 했지만, 김이준 목사는 감리교 교단의 입장과 달랐다. 김이준 목사는 신사에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규정을 하고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절하고, 신사참배를 죄라고 가르쳤다. 일경은 김이준 목사를 국헌위반자로 체포하여, 죽음보다 못한 옥살이를 시켰고, 고문과 영양실조, 심각한 정신적인 압박 때문에 결국 젊은 목회자인 김이준 목사도 일제의 핍박을 견디지를 못하고 끝내 쓰러져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날이 1945년 8월 1일이고 당시 그의 나이가 33세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