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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방승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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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47 조회2,81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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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방승학 목사

 

 

    방승학 목사는 1902년 3월 16일 평안북도 박천군 청용면 만수동에서 부친 방웅식(1883.1.20일생)과 모친 강우달(1876년 7월17일생)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방승학은 조보진(1905.6.18)과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으나, 자식들이 이유가 없이 계속 죽었다고 한다. 그런 일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보라고 권유해서, 예수를 믿고 얻은 자식이 장남 방윤일이며, 하나님께 대한 청결한 신앙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온양 방씨 가문에서 ‘예수를 믿는다.’라는 이유만으로 집안에서 내쫓아서, 할 수 없이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1927년부터 영평구역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37년 동부연회 경동지방 포천기도처에서 2년동안 시무하였고, 1939년 제7회 동부연회에서 협동회원으로 입회하여, 1939년 동부연회 경동지방 영평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여, 1945년 3월까지 시무하였다. 1945년 3월부터 포천군 이동면 노곡리 노곡리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영평구역 혹은 포천구역에서 담임목회 또는 순회목회를 하면서, 포천지역 교회들의 소식을 감리회보에 보냄으로, 포천지역 교회들의 역사를 더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로 생활하던 우리 민족은 일제가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항복하자, 우리민족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38선을 경계선으로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를 하고, 이남은 미군이 진주하게 되어, 미.소간의 군사적 분계선인 38선이 생겼다. 노곡리교회는 38경계인 38선 이북에 위치를 했는데, 그것은 노곡리교회의 시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노곡리교회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숙소로 사용을 했고, 신축한 목사관도 소련 장교들의 숙소로 빼앗끼게 되었다. 후엔 소련군과 임무를 교대한 북한 정권의 경비대가 교회에 다시 주둔하여, 노곡리교회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기가 어려웠다. 이후 38선 이남은 8월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지만, 38선 이북은 1948년 9월 9일에 김일성의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북한정권은 1949년 공산화 정책과 전쟁 준비를 본격화하면서, 전시체제에 들어갔다. 북한 정권은 비협조적인 민주 인사를 체포하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기독교 지도자들을 중점적으로 체포하기 시작하였고, 노곡리교회 담임목사인 방승학 목사도 체포되었다. 

      일제의 착취와 탄압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돈암교회에서 노곡리교회로 부임한 방승학 목사에게 노곡리교회 부임 역시 순탄한 길만은 아니었다. 해방 후 미 . 소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지자, 38선 이북에 있던 노곡리교회를 담임한다는 것은, 곧 시련의 길이었다. 포천지역은 방승학 목사가 순회목회를 하면서, 익숙한 곳이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파송된 것은1946년도다. 당시 38선 이북에 있던 노곡리는 철원군에 속해 있었다. 공산정권을 세운 공산당은 민주인사들에 대한 검거를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조만식 선생이 창당한 조선 민주당 성향의 사람들이 많았던, 개무지(노곡리교회가 있던 곳)사람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다. 1948년 8월 추석 다음날, 순교를 각오한 채 월남하지 않았던 기독교 지도자인 방승학 목사도 공산당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1949년 8월 18일에 순교하였다. 순교자의 유족으로는 장남 방윤일, 자부 윤영자가 금난교회에 출석하고, 장녀 방윤옥은 홍천 월운교회 사모로, 사위 권병찬은 홍천 월운교회 담임목사로 차남 방윤남과 자부 박옥례는 성남중앙교회 출석하는 등 모든 후손들이 순교자 방승학 목사의 순교정신을 유산으로 이어받아 대대에 이어오고 있다.

댓글목록

김항석님의 댓글

김항석 작성일

제 선친의 평양 신학교 동창이었던 장 광현님의  처숙이셨던 방 승학 목사님을 찾아 간 기록이 있읍니다.  제 선친께서 1947년 3월 평양에서 원산, 철원, 연천, 이동의 경로로 남쪽으로 내려 오다가 방 목사님 사택에 들렀다가, 목사님의 안내로 새벽에 한탄강을 넘어 교인 댁까지 안내 해 주시고 다시 사택으로 돌아 가셨다는 기록이 있읍니다.  이곳에서 방 목사님의 글을 읽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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