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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배영초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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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48 조회1,8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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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배영초 전도사

 

 

1908년 평안남도 용강군 대대면 매산리에서, 배영순의 2남으로 출생한 배영초는, 일찍 신교육에 눈을 뜬 부모님 덕분에 성장하면서, 집성사립학교를 거쳐서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는 곧 농촌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헌신했다. 그래서 배영초는 과수, 야채 등의 종자를 개량했고, 다수확 농사를 위해서 많은 땀을 흘렸다. 하지만 당시 일제의 수탈정치 때문에 모든 의욕을 빼앗긴 배영초는, 기도하는 가운데 새로운 결단을 하고, 자신의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1940년에 고향에 명덕중학원을 설립하고, 아주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매진을 하였다. 명덕학원은 중학교였고, 당시 학생들은 늦게 학업에 뛰어 들었기 때문에 비록 중학생들이었지만, 절반 이상은 기혼자들이었고, 나이가 교사보다도 많은 학생도 많았다. 사실 그들이 바로 한국농촌을 부강케 할 주춧돌이었다. 배영초는 명덕중학원 설립자이고, 덕동감리교회 장로로 봉직하면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소련군대의 꼭두각시인 김일성이 들어와서 북한을 강점하게 되자, 복음으로 새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던 배영초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배영초는 이미 학창시절에 공산주의가 어떤 집단이란 것을 알았고,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배영초에게 월남할 것을 권유했지만, 배영초에게는 월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피땀을 흘리면서 세운 학교가 있었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고, 평생을 살아온  지역 연고가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배영초는 지역 연고에 붙잡혀 월남하지를 못하고 고향에 남아서 고향 젊은 이들에게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가르쳤다. 배영초의 이런 활동은 내무서에 속속 밀고가 되어, 밀정이 마치 배영초의 지지자인 것처럼 끼어들어서 배영초의 활동을 일일보고 형식으로 내무서에 보고하고 있었다. 1946년 5월 배영초는 사복을 한 정보요원들에 의해서 어디론가 끌려가서는 몸이 엉망진창이 되도록 맞았다. 그리고는 이어서 곧 진남포 유치장으로 끌려가서는 영문도 모른 채, 참으로 모질게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자 배영초도 믿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무정한 배신이 무서웠고, 그 보다도 스승을 파는 제자들의 배은에 치가 떨리고, 서럽기도 했다. 이런 제자들과 가까웠던 사람들의 배반과 배신이 너무도 서럽고 가슴이 아파서, 견디다 못해서 배영초는 평소에 존경하던 목회자인 이경재 목사를 찾아갔다. 이경재 목사에게 배영초는 말하기를 "목사님 저에게 교회를 맡겨주십시오. 어차피 저들 공산당에게 핍박을 받을 바에는 일선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저들과 맞서 싸워야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경재 목사는 한참을 배영초 전도사를 바라보더니, "교회는 교회여야지 공산주의와 맞서 싸울 도구로서의 교회는 아닙니다."라고 대답을 하셨다. 그러자 배영초는 "압니다.목사님"라고 하자, 이경재 목사가 "그래도 교회가 배영초 전도사를 공산주의에서 지켜주리라 믿는다, 이것입니까?"라고 하자, 배영초 전도사는 "그렇습니다."라고대답을 했고, 이경재 목사는 "좋아 그렇지 않아도, 강서지방에 있는 문동교회에 교역자가 비어서, 후임자를 찾는 중인데, 배 전도사가 교역을 하겠다면 기꺼히 추천하지요."라고 했고, 배영초 전도사는 "목사님,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배영초가 전도사가 된 것은, 순전한 이경재 목사의 배려 때문입니다. 배영초는 교회 강단을 하나님의 말씀 선포의 도장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경재 목사는 그런 배영초 전도사에게 문동교회를 맡긴 것입니다. 배영초는 자신에게 맡겨진 강단을 하나님의 말씀의 도장으로 삼았고, 비도비의(非道非義)는 그에게 용납이 안되어,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공산주의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호되게 비평했다.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나고, 반동으로 점찍힌 북녁의 지도자들을 속속 구속시켰는데, 배영초 전도사도 당시 구속 수감된 사람 중 하나였다. 배영초는 강서보안서에 수감되었다가,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50년 10월 공산당이 패주하면서 평양형무소에 불을 질러 많은 사람들을 소사시켰는데, 배영초 전도사도 그 때에 불에 타 순교했다. 그 때 나이가 향년 43세의 장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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