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순교자 열전, 서기훈 목사 > 믿음과 지혜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믿음과 지혜

감리교 순교자 열전, 서기훈 목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50 조회2,083회 댓글0건

본문

감리교 순교자 열전, 서기훈 목사

 

 

  서기훈 목사는 1882년 12월 19일 충남 논산군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9년 세례를 받았으며, 1914년 6월 남감리회 전도사의 직책을 받고, 교역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1918년에 김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22년 원산지방 고저교회, 1923년 간성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23년 집사 목사가 되어서, 목회하다가, 192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고저교회를 담임하였다. 1929년 김화교회로 전임되었고, 1931년부터 1933년까지 3년동안 철원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1934년 원산 구세병원 원목, 1937년 장전 관교동 신고산교회 담임으로 봉직하였는데, 1940년에는 일제의 박해로 7개월간 고성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받은 후에는 1947년 6월부터 철원지방 장흥리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기훈 목사는 교인들과 함께 하고자 피난을 가지 않고, 공산 치하에 있으면서 많은 고생을 하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공산군이 패주했는데, 1950년 11월 공산군 패잔병들이 동리에 들이닥쳐서는, 청년 교인의 집에 들어가서 밥을 얻어먹은 뒤에, 뒷 동리 청년들과 싸움이 벌이져서 공산군 9명이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일로 서기훈 목사가 검거되어서, 공산군을 사살한 청년의 이름을 대라고, 갖은 고문을 당한 후에 일단 풀려는 났으나, 12월 31일에 다시 정치보위부에 재 검거가 되어서, 구금되어있다가 이듬 해 1951년 1월 8일에 암소고개에서 70세의 나이로 공산군에게 총살형으로 순교를 했다. 

      1950년 12월 28일 임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서기훈 목사는 문안차 찾아 온 장흥리교회 속장 권오창에게 "사어당사 비당사 생이구생 불시생-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 죽음이 아니오.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다.-라는 유시를 남겼다. 1963년 3월 13일 박창국 감리사의 발의와 장흥교회 교인들의 협조로, 장흥교회당 앞에 서기훈 목사의 신앙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비문으로 위의 시구와 요한복음12:24절이 기록되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국교회 순교자기념사업회 경기도 용인시 한국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에서 2005년    제 2차 한국교회 순교자 추모예배를 드릴 때에, 서기훈 목사와 최 권사의 존영과 순교비를 제막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